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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자료실 종합모음

《제17강》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롬 5:1-4)

by 【고동엽】 2022. 3. 11.

《제17강》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롬 5:1-4)

 

임종이 가까운 어느 권사님에게 교회 목사님이 찾아가서 신앙적인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죽음이 두렵습니까?" "죽음이 두렵다니요, 하나님 품으로 가는데!" 또 목사님이 "하나님 앞에 선다고 생각하면 두려운 생각이 나지 않습니까?" "두려운 까닭이 없지요" 다시 목사님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는 데 정말 두렵지 않습니까?" 재차 다짐하면서 물었더니, 권사님은 얼굴에 환한 웃음을 띄우면서 "나는 죄 많은 여인이지만 나를 위해 주께서 보혈의 피를 흘려 내 죄를 용서하시고, 화평을 이루어 놓았으니 나는 그 화평 속에 들어가 쉬기만 하면 될 것을 저는 믿습니다"
이 얼마나 복된 믿음입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과의 화평을 내가 만든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그 피의 권능으로 이루어 놓은 것을 받아 누리기만 하면 됩니다.
기독교 신문에 ≪경아의 오른팔≫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고3년 생의 꿈 많은 여고시절에 '단백질이 빠져나가는 신증후군'이라고 하는 불치병을 앓고 있는 소녀의 이야기였는데, 그는 중환자 실에서 마치 꺼져가는 등불처럼 힘든 투병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그의 오른팔이 썩어 들어가기 시작합니다. 결국 그 팔을 절단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저를 놀라게 한 것은 수술 후 그가 찍은 사진에서 '오른팔은 잘리 운 채, 왼손으로 턱을 고이고 밝게 웃고 있는 그의 평안한 얼굴' 때문입니다. 사진 설명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었기에 팔을 절단하러 들어갈 때도 평안했다"고 고백하는 그의 얼굴이 환하게 빛이 났습니다.
이것은 초자연적인 평안입니다. 정말로 신비한 평안입니다. 잔인하리만큼 갈기갈기 찢긴 이 어린 소녀의 마음을 그토록 평안하게 붙들고 있는 능력이 어디서 오는 것입니까? 우리는 압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은혜입니다. /믿어집니까?/ ◀제목소개!▶

 

'슈페너'라는 성경학자는 '성경을 하나의 반지라고 한다면, 로마서는 그 반지의 보석에 해당한다'고 말합니다. 로마서 안에는 그 말씀의 중요성이 정말 반지의 보석처럼 빛나는 말씀들이 곳곳에서 나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이 바로 보석처럼 빛나는 말씀입니다. 1-2절에 보면, 네 가지의 기막힌 은혜가 있습니다.
①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습니다.
②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게 됩니다.
③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되었습니다.
④이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즐거워하는 축복을 받습니다.
학자들은 1-11절까지의 말씀을 '이신칭의'의 결과요 열매로, '확신'이라는 제목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배워서 알고 있지만 우리는 원래 하나님과 평화로운 관계를 가질 수 없는 그런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는 죄인입니다.
아담이 하나님을 배신함으로 하나님과의 거리가 생겼습니다. 바울은 엡2;21절에서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가 원수 된 것이라고 본문10절에서와 엡2;15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영적으로 죽었고, 하나님과 원수 된 상태에서 인간 스스로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하나님께 나갈 수 없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때 하나님은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시고 죄의 문제를 다 해결하신 후에 그 죄를 해결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의롭다 함을 주시고 오늘 1절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게" 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1절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바울이 롬1:1절부터 시작해서 4장 마지막 절까지 계속 반복해서 가르쳐준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롬4:5절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 시나니"
여기서 일이란 어떤 선행, 행위를 의미하는데, 일 아니해도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경건치 못해도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런 것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무엇을 보시고 의롭다 하시는 것입니까? 믿음! 우리의 믿음 한 가지를 보시고 우리를 의롭다 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얻었은즉" '얻을 것이요'가 아니라 '얻었은즉' 완료형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을 때에 앞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현재 구원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의'라고 하는 말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의로운 분이시기 때문에 죄인을 만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를 죄인인 우리에게 옷 입혀서 의롭다하여 의인으로 간주해 놓으시고 만나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죄인을 용서하신다는 것은 '단순히 용서했다는 소극적인 의미'가 아닙니다. 또한 '잠깐만 참으셔서 죄인을 살짝 눈감아 주신다'는 의미도 아닙니다. 의롭다 하신 것은 '지난날의 잘못을 깨끗이 씻어주시고 전혀 새로운 관계, 바른 관계를 맺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틴 루터'는 신앙을 정의하기를 '하나님과 바른 관계'라고 했습니다. 바른 관계는 '의의 관계요, 화평의 관계'입니다.
돌아온 탕자를 영접한 것이 아니라 완전한 아들로 영접했습니다. 전혀 과거를 묻지 않고 그저 돌아왔으니 "내 아들이 왔다. 소를 잡아라. 반지를 끼워라. 옷을 입혀라!" 하고 영접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완전한 아버지와의 바른 관계입니다. 조금도 탕자라는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도 이와 같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죄인을 우리의 믿음 안에서 용서하시고 의인으로 대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이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아멘!/

본문 1절의 해석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받아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어 그것을 전제로 하여 이제는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것'입니다.
본시 우리는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릴 수 있는 관계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는 완전히 단절되어 있습니다. 무엇 때문에? 죄 때문입니다. 죄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갈라놓았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바뀌었습니다.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릴 수 있는 관계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셨고,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매일 매일의 삶 속에서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과거에는 죄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 된 관계에 놓여 있었습니다. "아이고, 목사님 그런 말씀하지 마세요. 제가 과거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해서 믿지 못한 것이지, 하나님과 원수질 일은 한번도 한 적이 없습니다."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롬8:7절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고 했습니다. 야고보 사도도 약4:4절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이니라."
그렇습니다. 하나님 중심으로 살지 못하고 내 중심으로 사는 것, 하나님의 영광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내 명예를 위해서 사는 것, 내 육신을 위해서 사는 것이 바로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 과거에 하나님과 원수 된 관계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릴 수 있는 신분으로 바뀌었습니다.
단순히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고 말씀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서 화목 제물이 되지 아니하였더라면 우리는 감히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릴 수 있는 존재가 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한 손으로는 하나님의 손을 잡으시고, 또 한 손으로는 우리의 손을 잡아서 하나님과 단절된 우리 사이를 이어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비로소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1절 마지막에 "누리자"라는 말입니다. 무엇을 누리라고 합니까?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과 화평을 누릴 수 있어야 하고, 즐길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히브리 사람들에게 있어서 화평, 즉 '살 롬'은 아주 중요합니다. 아침, 저녁 인사가 '살 롬'이고, 복을 달라고 할 때에도, 또 복을 비는 내용도 "이 화평이 당신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라고 합니다. 그들은 화평을 '하나님과의 화평, 이웃과의 화평, 자기 자신과의 화평' 세 가지 차원을 생각합니다.
복의 개념이 우리와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의 복 개념은 주로 물질적, 물량적입니다. 그래서 정월달이 되면 복 주머니가 나옵니다. 그러나 성경을 배경으로 하는 히브리 사람들의 복의 개념은 물질이전에 화평입니다. '하나님과의 화평, 이웃과의 화평, 자신과의 화평'입니다.
솔로몬은 그의 잠언 서에서 "마른 떡 하나를 놓고도 서로 화평 하는 것이 욕심이 가득하고 싸우는 것보다 낫다"고 했습니다. 히브리 사람들의 참된 축복은 화평입니다. 그래서 '살 롬'입니다.

본문에서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라는 말은, '화평을 즐기라'는 말입니다. 화평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고 즐겨야 합니다. 물질도 내가 가졌다고 다 내 것입니까? 가진 물건을 내가 즐겨야 내 것이 됩니다. 만약 내 집이라고 마련해 놓고 평생 남에게 빌려 주었다가 그대로 죽어버리면 내 집이 무슨 소용입니까?
그 집에서 살면서 소유해야 자기 집입니다. 하나님과 화평을 즐기시지 바랍니다. 이것이 의롭다 함을 받은 신앙인의 생활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기쁘게 살아야 하고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는 말은 '하나님과 깊은 믿음의 교제, 기도의 교제, 찬양의 교제'를 가지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누리라는 의미입니다. 부모와 자식간에도 교제(대화, 의논, 상의)가 없이는 삭막한 분위기가 됩니다. 부부관계는 늘 교제가 이루어져야 사랑이 샘솟고 행복이 넘쳐 나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다는 것은 끊임없이 하나님과 교제함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도로 교제하며 부르짖을 때, 응답해 주시고, 믿음의 교제를 통하여 기적을 베풀어주시며, 감사할 때, 우리의 영혼이 더 풍성해지며 우리의 범사 위에 화평함으로 충만'하게 해 주십니다. /믿으시면 아멘!/
▶다시 한 번 1절을 조용히 묵상해 보십시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①"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의롭게 하신 주체가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롬3:24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롬5:9절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예수의 피가 귀합니다. 유월절 어린양의 피가 이스라엘 백성의 생명을 구원한 것 같이 하나님은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보고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해 주시고 구원해 주셨습니다.
레17;11절(하)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기 죄를 속하느니라"
롬4:25절 "예수는 우리 범죄 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주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가 의롭다함을 확정 받았습니다.
②"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하나님과 화평을 누릴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인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화평을 누릴 수 있는 비결은 역시 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본문 10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 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주님의 죽음을 통해 원수 된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 시키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유명한 설교자요 신학교수인 미국의 '오르피즈' 목사님은 자신의 언행심사가 마음에 안 들어 괴로워했습니다. 자신의 성격을 보아도 형편이 없고 과거의 죄를 생각하면 치가 떨리고 현재의 허물을 생각할 때 도저히 자기 자신을 용납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날마다 하나님과 자신과의 싸움을 했다고 합니다. "네가 무슨 설교자냐? 네가 무슨 목사냐?" 자기를 자책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골2:13절을 읽다가 깊은 은혜를 체험하고 벌떡 일어났다고 합니다. "우리에게 모든 죄를 사 하시고-" 라는 말씀 중에서 '모든'이라는 말에 갑자기 그의 마음이 설래이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는 마음속으로 하나님께 질문을 했답니다. "주님 이 말씀의 의미는 제가 아직 짓지도 않은 죄까지 다 용서해주신다는 뜻인가요? 그렇다면 이대로 저 자신을 받아주시겠습니까?" 그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너는 설교자가 아니냐? 이때까지 그것도 모르고 있었느냐? 이 어리석은 목사야!"
그때까지 그 목사님은 예수님을 믿으면 모든 죄 용서 받는다는 것을 머리로만 알고 있었을 뿐, 그것이 마음에 와 닿지는 않았습니다. 유명한 설교자요, 신학자인 그였지만 그때까지 하나님의 화평을 누리지 못했다가 이 말씀에 깨우쳐 하나님과 화목을 누렸다고 고백했습니다.
여러분! 우리 믿음으로 확신합시다. 롬8:38-39절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 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할/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히12;2절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라!" 여기 '믿음'이란 말은 우리의 '구원'과 직결된 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로 말미암아 주어진 이 믿음은 성도를 구원으로 인도합니다.
엡2:8절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할/

▶2절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또한 그로 말미암아" 바울은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음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역할에 대하여 다시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로 말미암아'는 '예수로 말미암아'입니다. 왜 반복합니까? 그만큼 예수 그리스도가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입니다.
행4;12절에서 베드로가 이스라엘의 관원과 장로와 서기관들 앞에서 외치기를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다"고 외치면서, 오직 구원을 얻을 방법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라고 못 박았습니다.
주님은 자신을 가리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보십시다.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니"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은 것뿐만 아니라 예수로 말미암아 믿음에 서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구원받은 데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서 있는 은혜를 얻었다는 말입니다. 곧 '믿음을 지켜주신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걱정하지 마십시오, 예수 믿는 믿음을 내가 지키는 줄 알면 큰 오산입니다. 주님이 믿음을 주셔야 합니다. 믿음으로 서 있도록 예수께서 은혜로 붙잡아 주셔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붙잡아 주신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어떤 계시록 학자는 대 환란 뒤에 예수님이 오시는데 그때 믿음을 지키기가 어렵다고 말합니다. 이 소리 들으면 겁이 나서 신앙생활하지가 무섭습니다.
여러분! 어떻게 우리 연약한 인간이 그 환난 때, 믿음을 지킬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붙잡아 주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할/
우리는 하나님께서 예정해 놓으신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인을 받은 잡니다. 그러므로 확실히 천국 가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믿음을 지킬 수 없습니다. 그분이 지켜주셔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큰 믿음, 굳센 믿음, 강한 믿음으로 붙잡아 달라'고 기도합니다.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택한 백성들은 하나님이 절대로 버리지 않습니다.
시27:10절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 부모는 결국 자식을 버립니다. 죽으면 자식을 돌보고 싶어도 돌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영원히 돌보십니다.
요10:28-29절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할/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은혜의 영역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통치를 받아드리는 세계입니다. 여러분! 미국은 지금 부시가 통치합니다. 우리나라는 노무현 대통령의 통치를 받는 영역이 대한민국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은혜의 영역은 하나님의 통치 안에 하나님의 다스림 속에 거하는 곳입니다. 하나님이 다스리는 곳에 낙원이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통치 속에 거하는 성도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즐거워 해야"합니다. /할/
그런데 본문에 대단히 중요한 단어 하나 나오는데 "들어간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 있는 말이지만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주는 말입니다.
여러분, 옛날 구약 시대의 성막을 한번 생각해 봐야 실감이 납니다. 이방인들은 감히 그 성막 안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밖에서만 쳐다보아야 합니다. 유대인들만 성막 안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막 안에는 들어가지만 성소 안에는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성소의 뜰만 밟을 수 있었습니다.
성소 안에는 누구만 들어갈 수 있었는가? 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성소와 그 안 더 깊숙한 곳에 있는 지성소 사이에는 아주 굵은 휘장이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이 지성소 속에는 제사장이라도 감히 들어갈 수 없습니다. 대제사장 한 사람만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것도 아무 때나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일년에 단 한번 대 '속죄일' 에만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아주 조심스럽게 들어갔습니다.
대제사장은 거룩한 세마포 옷을 입게 되어 있었는데, 옷 밑에 방울을 달았습니다. 대제사장이 걸을 때마다 딸그랑딸그랑하고 소리가 나도록 한 것입니다.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간 뒤 딸그랑딸그랑하는 소리가 들리면 아직도 대제사장이 살아 있다는 증거고, 만일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갔는데 딸그랑딸그랑 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그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하나님이 그 사람이 싫어서 치셨다는 의미입니다. 제사장이 죽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만큼 지성소에 들어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무서웠습니다.
그 지성소를 가로막고 있는 휘장이 언제 갈라졌습니까?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우리의 죄 값을 다 지불하시고 "다 이루었다!" 운명하시던 그 순간에 지성소를 가로막고 있던 굵은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다 찢어졌습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이제는 너희가 들어와도 좋다"고 하나님이 허락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은혜의 자리에,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에 들어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비로소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에 나감을 얻게 된 것입니다.
히4:16절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엡3:12절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감을 얻느니라"
▶또 생각해 볼 것은 본문 마지막에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는 말씀입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왜? 롬3:23절을 한번 읽어보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우리는 죄 때문에 감히 전에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달라졌습니다.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하나님의 놀라운 영광을 소망 가운데 바라보면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기쁨과 즐거움과 소망 속에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행7장에 나오는 스데반집사는 성난 군중이 그를 향해서 돌을 던지고 있습니다. 머리가 터졌습니다. 살갗이 찢어졌습니다. 피가 터져 나옵니다.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습니까? 그때 스데반 집사님이 무엇을 바라보았습니까? 성난 군중을 바라본 것이 아닙니다. 고통스러운 자기 자신을 바라본 것이 아닙니다.
행7:55-56절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스데반 집사님이 그 고통 속에서도 눈을 들어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았다고 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았을 때 고통스러움 속에서도 얼굴이 천사의 얼굴처럼 환하게 빛났습니다. 그 고통 속에서 그가 마지막으로 무슨 기도를 드렸습니까?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원수를 위해서 편안한 마음으로 기도하고 잠들 수 있었습니다. 이 평안을 누가 줍니까? 주님이 주십니다.
하나님과 화목을 이룬 자는 화평을 누리게 됩니다. 그 화평 속에 영원한 약속을 바라보면서 즐거워해야 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승리를 말하고 ▶천국을 말합니다.
여러분! 하나님과 함께 승리할 것을 믿고 바라보면서 즐거워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우리가 이 땅에서 삶을 마감하고 영원한 천국이 우리에게 허락되었음을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기쁨이란 미래지향적인 것입니다. 내가 아무리 좋은 음식을 먹는다 하더라도 내일이 보장이 없다면 기쁠 수가 없고, 즐거울 수가 없습니다. 또한 오늘 어려움이 있고, 고난이 있다 할지라도 내일의 승리와 약속이 있으므로 우리는 기뻐할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바라보십시오. 하나님의 승리의 삶을! 또 바라보십시오, 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할/

 

▶3-4절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바울은 1-2절에서 '누구나 예수를 믿어 의롭다 함을 얻어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며 하나님의 은혜 속에 깊이 들어가 살면서 하나님이 예비해 놓으신 천국을 바라보면서 즐거움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환희에 넘쳐 소리 높여 외쳤습니다.
이때 바울의 말씀에 동조한 사람도 많았지만 어떤 사람은 거침없이 "당신이 말하는 것이 좋긴 좋소 마는 현재 당신의 그 꼴이 무엇이오? 예수 때문에 장가도 못하고 재산도 없고, 겨우 장막 만드는 노동으로 입에 풀칠을 해야 하고 교회 안, 밖에는 당신을 죽이려 하는 원수도 많고, 뚝하면 감옥소에 들어가고 또한 질병으로 어려움을 당하고, 예수도 좋고 천국도 좋지만 어디 그렇게 고생스러워서야 누가 예수를 바로 믿겠소." 세상 적인 참상을 들어 비난하는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칼빈은 이 구절을 강해하시기를 "진실 된 성도가 처참한 현실에 대한 반대자들의 조소와 반발을 예상하고 먼저 앞질러 대답한 구절"이라고 주해를 하고 있습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주안에서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즐거운 생활, 감사생활, 승리생활이 아닌 다른 생활이라 할지라도 주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다니엘의 세 친구(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의 신앙고백을 잘 압니다. 우리 하나님이 풀무불 속에서 우리를 건져주지 아니하실 지라도 금신상에 절하지 않겠다는 고백 말입니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이런 문맥과 비슷합니다.
"우리는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예수 믿으면 환난이 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너희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 믿으면 환난이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와 함께 동행했던 제자들이 갈릴리 바다에서 풍랑을 만났습니다. 인생의 삶이란 고통과 슬픔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어떤 사람은 정신적으로, 또 육체적으로 또 환경에 의해서, 사람들로 인한 슬픔도 있고, 배신도 있고, 환난이란 인간 누구에게나 보편적인 것입니다.
욥5;7절 "인생은 고난을 위하여 났나니 불티가 위로 날음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환난 중에서도 즐거워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환난이 없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이 환난은 우리의 신앙을 성숙시킵니다. 이 환난은 신앙적으로 매우 유익을 가져다줍니다. 바울은 수 없이 많은 환난을 당한 자입니다. 영광을 바라보면서 즐거워하는 것은 누구나 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는 것은 고차원적인 높은 신앙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오래 믿는다는 사람이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진실하게 믿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바울이 환난 중에도 '내가 기뻐한다'는 고백이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이 해답은 고후12;7-10절의 말씀을 읽어보면 이해가 됩니다.
사도 바울에게 어떤 고질적인 질병이 있었습니다. 그가 하나님께 세 번이나 이 병이 떠나기를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를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네 은혜가 네게 족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네가 약할 그때에 강하게 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는 약할 때에 하나님을 더 의지했고, 그때마다 하나님께 더 매달렸더니 하나님이 그를 강하고 담대하게 세워주셨습니다.
이 말씀 속에서 얻어지는 진리는 성도가 환난을 당할 때, 하나님께 매달리게 됩니다. 그때 하나님의 권능이 나타나게 됩니다.

▶중국에 칼을 잘 쓰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본래 이 사람은 활을 잘 쏘지는 못했는데 매우 특별하게 가르치는 스승 때문에 활을 잘 쏘게 되었습니다. 그 스승은 처마 밑에다 이를 잡아 매달아 놓고서 그 작은 이를 매일 쳐다보되 꿩만큼 크게 보일 때까지 시각적인 훈련을 시켰습니다.
그래서 제자는 집중적으로 이를 주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시간이 흐르자 조그마한 이가 꿩으로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훈련으로 명사수가 되었답니다.
여러분! 우리는 연약하지만 하나님의 권능은 큽니다. "나는 연약하지만 하나님의 권능은 크시다"고 믿는 믿음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권능이 크게 보일 때까지 하나님은 훈련을 시키십니다. /할/
▶3-4절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제가 이 말씀을 벽에 써 붙이고 기도할 때가 있었습니다. 하는 것마다 손해를 보고, 빚 덩이에 앉아서 소망 없는 나날 속에 살아갈 때, 하나님이 이 말씀을 주셨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부여잡고 기도했더니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하나님은 정말 보잘것없는 부족하고, 연약한 저를 하나님의 종으로 세우시고 큰 소망으로 인도해주셨습니다.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환난은 인내를 이룬다고 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인내는 질긴 힘입니다. 인내는 고난을 견디어 나갈 뿐만 아니라 모든 장애물을 헤치고 나갈 분투를 의미합니다. ▶모든 운동선수는 피나는 노력으로 자신과의 싸움을 합니다. 권투 선수는 주먹을 움켜지고 샌드백을 두드리고 고된 훈련을 합니다. 마라톤 선수는 오랜 시간동안 뛰는 고통을 일부러 많이 겪어야만 근육이 튼튼해지고 질긴 힘을 받게 되는 인내심을 갖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신앙인 들도 강한 신앙 인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합니다.
이 고난은 하나님께서 바로 가라는 교정의 뜻이 있습니다. 자식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 부모가 매를 드는 것과 비슷합니다. 이 고난은 훈련용으로도 볼 수 있고, 깨닫게 하기 위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환난을 무서워하지 마십시오,
히12:5절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주십니다." /아멘!/
▶오늘 본문 3-4절은 너무 중요하기에 다음 시간에 한 번 더 상고하고 넘어가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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