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 눈이 밝아져 예수인 줄 알아보더니! (눅 24:30-31)
지난 주간에 귀한 책 한 권을 읽었습니다, [나는 진실로 행복한 사람] (홍예숙 사모 간증) 홍예숙 사모님은 어머니가 임신했을 때, 병원의 오진으로 엄마의 배 속에서부터 과다 복용된 약물에 중독되어, 제대로 목도 가누지 못하고 걷지도 못하는 장애아로 태어났습니다. 주위의 따가운 시선을 견디지 못한 어머니가 9살 때 기도원에 맡겨 기도원에서 살았습니다.
하루는 기도원 원장님이 하나님께 울면서 기도 한번 해 보지 못하느냐? 는 책망에 수건을 물에 적셔 얼굴에 바르고 우는 척 하며 오기로 주여! 몇 번씩을 외쳤는데 이같은 허튼 기도에도 하나님의 응답이 들려오자 갈급함에 대구 주암산에 올라가서 3년간 한 자리에서 산 기도를 했습니다, 13살 때 처음 은혜를 받고 부터 영육간에 병이 든 사람들의 몸 속과 생각이 보이기 시작했으며 이들을 치유하고 회복게 하는 치유의 사역을 펼치게 되었습니다. 중학생 나이에 미국에 가서 집회를 인도했고 부시 전 대통령의 초청도 받았답니다. 실업고등학교를 다녔는데 고등학생 때는 학교 공부를 마친 후 전국에 치유 집회를 다녔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급성 강직성척추염이라는 불치병에 걸린 서울대학생을 치유한 후에 함께 전도사로 사역하다 결혼하여 함께 사역하고 있습니다. 홍예숙 사모님의 간증의 핵심은 지금도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 약한 자를 들어 더욱 강하게 쓰시는 하나님입니다,
오늘은 부활절입니다.
어떤 사람은 “죽은 사람이 어떻게 부활할 수 있어?” 하고 예수님의 부활을 이상한 일처럼 여깁니다. 하나님을 아예 안 믿는 사람에게는 부활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겠지만,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게는 부활이 도대체 무엇이 문제가 됩니까?
부활이 이상할 이유가 없습니다. 아무 것도 없는데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신데, 그 하나님께서 동정녀 탄생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낳게 하시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후에 다시 사흘만에 부활시키신 일이 무엇이 믿을 수 없다는 일입니까?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면 천지창조도 성육신도 부활도 믿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부활절의 진짜 문제는 예수님이 부활하셨느냐 안 하셨느냐가 아닙니다. 그것은 너무나 당여한 일입니다. 부활절의 진짜 문제는 예수님이 정말 부활하셨다면 내게도 살아계신 주님으로 만나주시느냐 하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체험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정말 부활하신 것이 사실이라면. 왜 예수님이 부활하셨습니까? 성령님으로 모든 성도들의 마음에 오셔서 부활의 능력의 삶을 살게 하기 위하여입니다. 그렇다면 그 예수님이 내게 살아계신 주님으로 내 삶에서 만나지느냐 그것이 문제인 것이지, 예수님이 부활했느냐 안했느냐는 문제도 되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 부활하신 예수님이 마음 중심에 정말 살아계신 주님으로 역사하고 계십니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부활에 대해서 듣기는 들었지만, 예수님이 정말 내 안에 살아계신 주님으로 역사하는 것은 모릅니다.
오늘 본문 누가복음 24장에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예수님이 만나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는 부활하신 예수님과 만나 꼬박 하루를 함께 동행하며 말씀을 나누었었는데, 그 분이 예수님이신 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저녁때가 되어서 더 가시려고 하시는 예수님을 두 제자가 붙잡습니다. 여관에 들어가 저녁 식사를 하려 할 때,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저희 눈이 밝아져 예수인 줄 알아보았습니다. (30-31절)
만약 예수님께서 그 날 저녁 식사를 하지 않으시고 떠나셨다면 그 두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과 동행했었음을 전혀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도, 같이 말씀을 같이 나누고도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일이 어떻게 있을 수 있을까요?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것이 오늘날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겪고 있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셨음을 믿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고, 그 분을 주님으로 고백하며, 큐티나 주일 예배, 부흥회를 통하여 많은 은혜를 받고 있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전부 예수님이 하시는 역사인데도. 그렇게 신앙 생활하면서도 부활하신 예수님은 못 만났다. 나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내 안에 있는지도 모른다고 합니다. 실제로 이것이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신앙 생활의 형편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정말 믿으시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인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왜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처럼 예수님을 만나고도 실제로 예수님을 보는 눈이 열리지 않았을까? 거기에는 두 가지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마음 깊은 곳에 하나님의 말씀을 더디 믿는 불신앙이 있기 때문입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는 이미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들은 후였습니다. 자기들의 입으로 부활의 소식을 전했습니다. 자신들은 믿지도 않으면서도 그 모든 것을 예수님께 말씀드렸습니다.
(22-23절) 또한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로 놀라게 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아나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함이라
이 말을 들은 예수님은 그들을 책망하셨습니다.
(25절)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 들이여"
여러분, 이것이 우리 이야기임을 깨달으십니까?
우리가 예수님의 역사로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 아닙니까? 예수님을 믿고 오늘 이 자리에까지 오신 것은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를 여기까지 인도하신 것입니다. 그런데도 “나는 예수님을 모르겠다, 예수님을 못 만났다, 2천년 전에 부활하셨는지는 모르지만 지금 내 마음에는 안 계신다.” 고 말합니다. 왜 이렇게 믿고 있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믿으려고 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반응하지 않으니까 주님께서 역사를 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살아계심을 보여주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정말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믿음으로 반응하십니까? 그렇다면 반드시 예수님이 여러분과 함께 계심을 체험으로 알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친밀하게 인격적으로 만나게 되어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는 이유는 말씀을 듣고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진리가 삶에서 체험되지 않아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안 믿으니 그런 것입니다.
여러분, 아침에 밥을 하려고 솥에다가 쌀도 넣고 물도 넣고 밥솥의 전기코드를 전기 소켓에 꽂아도 불이 들어오지 않으면 어떻게 합니까? 자꾸 전기 코드를 만져 보고 소켓에 꽂았다 뺐다 하지 않습니까? 왜냐하면 정상적으로 전기가 들어오게 되어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는대로 안되면 짜증이 납니다. 남편을 깨우고 아들을 부르고 어떻게 되었는지 봐달라고 하고, AS 센타에 문의합니다. 또 교회에 오려고 자동차를 타고 시동 키를 돌렸는데도 차가 꿈쩍도 하지 않으면 이상하게 여기고 여러 번 시동 키를 조작하고, 아니면 잘 알지 못하지만 차량 앞 본넷을 열어보고 밧데리를 떼려도 보고, AS 센터에 전화하지 않습니까? 왜냐하면 작동이 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침에 마음이 기쁘지 않고 감사가 없으면 어떻게 하십니까? “아, 짜증 나. 내가 지금 이 상황에서 기쁠 일이 없지.” 하고 지나갑니다. 여러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라고 말씀에 그랬습니까?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이 말씀을 정말 믿으면 왜 내게 짜증이 나고 불평이 생기는지 너무나 안타깝지 않겠습니까? 밥솥이 문제입니까? 자동차가 문제입니까? 하나님 말씀대로 내 마음이 되지 않는 것이 심각한 문제인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옆 사람들의 말소리가 안 들리면 당장 이비인후과로 달려갈 것입니다. 휴무이면 아마 응급실에라도 갈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음성을 듣지 못한 채 하루를 살았다면 어떻게 하십니까? 내 양은 내 음성을 듣는다고 분명히 말씀하셨는데도. 말씀을 들어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전화를 걸었는데 신호는 가는데 상대방 목소리가 안 들리면 당장 손을 보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기도하고 응답이 없으면 어떻게 하십니까? 기도하면 정말 응답해 주신다는 약속의 말씀을 정말 믿는다면 ‘무엇이 문제일까? 나는 무엇이 안돼서 주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것일까?’ 하지 않겠어요? 우리는 주님의 말씀에 대하여 전혀 믿음으로 반응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말씀을 통해서 약속은 해주셨지만, 우리에게 실제적인 체험을 주시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된다는 믿음이 없기 때문에 이상하게 여기지도 않습니다.
주님은 그런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미련하고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살면서 예수님을 살아계신 주님으로 만나지 못하는 이유는 은혜받을 때, 감동받는 수준에서 멈추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부활 소식을 듣고도 믿지 못하는 두 제자에게 예수님께서 성경을 풀어 선지자들이 예언한 놀라운 일들에 대해 가르치시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성경 말씀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마음이 시원해지고 기쁨이 넘치고. 특히 그리스도의 부활을 예언한 말씀이 참된 말씀이라는 것을 가르치시는 부분에 이르러서는 설명할 수 없는 기쁨으로 인해 마음이 뜨거워지기 시작했습니다.
(32절)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우리도 큐티를 하거나 교회에서 열리는 기도회, 예배, 부흥회를 통해서 마음이 뜨거워진 적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이 때 우리가 “이거야, 바로 이것이 필요했어.” 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닙니다. 아직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 은혜 받는 상태에 머무는 것을 결코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마음이 뜨거워짐이 예수님께서 행하신 은혜의 역사이지만 거기에는 한 가지 요소가 결여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참 모습을 드러내시고 우리가 인격적으로 주님을 아는 것입니다.
말씀을 통하여 은혜와 감동을 받았다고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아침에 은혜 받고 저녁에 뒤집어질 수 있고, 주일 예배에 은혜 받고 주차장에서 뒤집어질 수도 있습니다. 금방 식고 가끔 다시 체험하는 ‘마음의 뜨거움’과 매순간 함께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를 바라보는 자는 저녁에 은혜롭고 아침도 변함없습니다. 1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고 더욱 충만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눈이 뜨이는 단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어떤 분들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과연 우리에게 그 모습을 나타내실까?’ 그렇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실의에 찬 두 제자에게 나타나 부활하신 자신의 모습을 계시하신 주님은 다시 사신 주님을 만나기 원하는 우리에게도 반드시 자신을 나타내십니다.
그러면 어떻게 살아계신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할 수 있습니까?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처럼 하면 됩니다. 은혜를 느낄 때, 거기서 만족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체험할 때까지 더욱 구하는 것입니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의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하지만 저녁이 되어 주님은 그들과 헤어져 더 가시려고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 때 두 제자는 예수님을 보내드리지 않았습니다. “저희와 더 같이 계십시다. 우리에게 하시던 말씀 더 들려주세요. 저희들이 아직까지 부족합니다. 여기서 끝날 수는 없습니다.” 하고 붙들었습니다. 이런 자세가 필요합니다.
여러분, 은혜가 내게 왔다고 느낄 때, 뭔가 마음에 감동이 오고 이상한 역사가 일어난다고 생각되는 분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이제 정말 중요한 은혜를 받으려고 여러분 마음을 여신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붙잡고 그 날 저녁에 식탁에 앉았을 때 예수님이 떡을 떼어 축사하는 순간 눈이 열려 이 분이 예수님이신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눈이 열린 것입니다.
두 제자가 마음이 뜨거워진 상태에 만족한 나머지 주님을 만나지 못하고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들에게 돌아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들은 “오늘 오후에 얼마나 복된 체험을 했는지 몰라! 어떤 나그네가 정말 놀라운 가르침을 주었어! 성경에 기록된 놀라운 하나님의 약속들을 풀이해 주었어!” 라고 말할 수 는 있었겠지만, “우리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어요!” 라고 말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진정한 은혜에 대하여 간절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만났던 것입니다.
야곱이 얍복 나루터에서 천사와 씨름할 때 천사에게 외쳤습니다.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창 32:26)
우리는 결코 마음이 뜨거워지는데서 머물면 안됩니다. 더 나아가야 합니다.
주 예수님이 이 세상에 거하실 때 주님의 제자들을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게 만들었던 요소는 무엇이었습니까? 제자들과 다른 사람 사이를 구분하게 만들었던 핵심적인 요소는 바로 주님과의 교제 안에 머무는 것이었습니다. 매일, 매 시간, 그리고 매 순간 주님과 함께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부활의 삶을 사는 능력도 마찬가지로 예수를 바라보는데서 나옵니다.
우리가 주님을 바라보는 눈이 열리기 전에도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 은혜를 받을 수 있고, 설교를 통하여 찬송을 통해서도 큰 기쁨을 얻을 수 있습니다. 기도하고 봉사를 통하여도 기쁨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기쁨과 은혜는 한 순간에 마음이 뜨거워졌다가 금방 식어져 버리는 문제가 있습니다. 아침에 은혜를 받았는데 저녁에 가서는 강퍅해지는 일도 있고, 주일예배 드리다가 은혜를 받았는데 주차장 가서 은혜 식어져버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3층 식당에 가서 밥을 먹으려고 엘리베이터를 타다가 은혜를 잃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받은 은혜를 잃지 않고 지속적으로 유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 마음에 계속되는 평강을 가져다주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임재’ 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수님을 바라보는 눈을 뜨게 해주시를 원하십니다.
풍랑이 제자들을 삼키려고 위협할 때 그들의 마음을 평안하게 만든 것도 주님이 그들과 함께 계신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우리가 죄를 멀리하고, 죄 씻음을 확신하고, 죄로부터의 구원받는 것은 살아 계신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셔서 권능을 주실 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로 인해 정결함과 능력을 얻을 수 있게 됩니다.
능력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입니까? 예수님과 개인적으로 교제하는 기쁨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부활의 주님을 만날 때 비로서 우리 인생은 부활의 능력이 나타나는 인생이 됩니다. 저는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뿐 만이 아니고, 우리 교우중에도 이와 같이 주님을 만나고 실제로 부활의 능력을 경험하고 사는 많은 성도들을 압니다. 오늘 그 분 중에 한 분의 간증을 들으려고 합니다. 이 분은 어떻게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어떻게 부활의 능력을 체험하고 사는지 오늘 부활주일 예배를 드리면서 이 시간 그 은혜를 나누었으면 좋겠습니다.
(간증)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궁금해 하는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연약한 삶을 사는 이유는 무엇일까?" 주님의 교회 안에 만연되어 있는 공통된 불평거리가 하나 있습니다. 설교자로부터 새가족에 이르기까지 이구동성으로 하소연하는 것은 ‘우리가 주님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데도 왜 기쁨과 축복을 느낄 수 없느냐?’는 것입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가 그랬습니다. 그들은 실제로 예수님을 만나고도 슬픔이 가득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이유는 하나입니다. 예수님을 정말 바라보는 눈이 뜨이지 않으니까 예수님과 동행하면서도 슬픔이 가득한 것입니다. 주의 일하면서도 낙심이 되고 두렵고 마음에 불평과 원망이 많고. 주님을 만나는 눈이 여러분 모두에게 열려지기를 축복합니다.
그 이유는 ‘주님과 동행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한 걸음 한 걸음씩 살아갈 때, 부활의 놀라운 능력을 체험하게 됩니다.
오늘 말씀을 분명히 붙잡으십시오. 여러분,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주 예수님! 저는 놀라운 복음을 들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우리 옛 사람이 이미 죽었고 예수님께서 내 안에 오셔서, 나의 생명, 나의 주님이 되셨다는 말씀도 들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내 안에 오셨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저는 이 놀라운 복음을 완전히 이해하지도 못하고 그동안 온전히 믿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말씀을 들은 것에서 만족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이미 저를 여기까지 인도하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저는 결코 주님을 그냥 가시도록 놔두지 않겠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그대로 체험하게 되기를 원합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처럼 주님을 붙잡습니다. 주님, 제게 은혜를 주실 뿐만 아니고 눈을 열어 주시옵소서. 이것을 행하시는 이가 주님임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
여러분에게도 부활의 주님을 만나는 놀라운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 자료 18,185편 ◑ > 자료 16,731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항상 주를 바라볼 때, 은혜의 눈도 열린다! (시 8:1-9) (0) | 2022.01.09 |
---|---|
어떻게 하면 마음도 정직해 질 수 있을까? (시 7:1-17) (0) | 2022.01.09 |
무엇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켜라! (요 13:21-30) (0) | 2022.01.09 |
예수 그리스도에게 입을 맞추라! (시 2:1-12) (0) | 2022.01.09 |
말 보다 삶으로 믿음을 증거하라! (시 12:1-8) (0) | 2022.01.09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