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란 중에도 담대한 이유! (행 21:27-22:1)
어느 목사님이 신학교에 다니다가 군에 가서 겪은 일입니다. 한 주간동안 고된 훈련을 받고 처음으로 군인 교회에서 주일 예배를 드리는데, 얼마나 감격스러운지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답니다. 그렇게 예배를 드리고 돌아왔는데, 소대장이 예배드리고 온 25명을 넓은 연병장을 서너 바퀴 선착순 돌리더니, 병기 검사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교회에 다녀온 사람만 총기가 불량하다고 얼차려를 주었답니다. 그 다음 주일 교회에 갈 사람 나오라고 하였더니 10명 정도가 나오더랍니다. 주일 예배를 드리고 돌아오니 소대장이 관물대 검사한다고 하면서 교회 다녀온 사람들만 골라내어 추운 겨울날 팬티 바람에 연병장에 집합시켜 별의별 기합을 주었답니다. 세 번째 주일에 교회에 갈 사람, 5명이 나왔습니다. 그 5명이 돌아와서 사역을 나가 저녁 늦게까지 일을 하고 돌아왔답니다. 네 번째 주일이 되었는데, 교회에 다녀오겠다고 나선 사람은 두 사람이었답니다. 다른 사람들이 근심어린 눈으로 잘 다녀오라고 했답니다. 그런데 소대장이 하는 말, 이제부터 이 두 사람은 주일 교회에 가서 저녁 예배까지 드리고 와도 좋고, 일과 후에 교회에 다녀와도 좋다고 했답니다. 그때부터 너무너무 편하게 신앙 생활 군에서도 잘하면서 후에 두 사람이 다 목사님이 되셨답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고 살기 위하여 어떤 고난을 당할지라도 끝까지 갈 준비가 되었습니까?
오늘 본문 말씀이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갔다가 유대인들에게 붙잡혀 매를 맞았습니다. 사도 바울이 하지도 않은 일, 이방인을 성전에 데리고 들어왔다고 하는 어처구니없는 누명을 쓰고 죽도록 매를 맞았습니다. 사도 바울에게 씌어진 죄목은 성전 모독죄였습니다.
(28절) ...헬라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가서 이 거룩한 곳을 더럽혔다
그것은 유대교에서는 사형에 해당되는 죄입니다.
(31절) 그들이 그를 죽이려 할 때에
그런데 사도 바울은 그 상황에서 두려워하거나 당황하거나 어떻게 해서든지 살아보려고 발버둥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런 상황에서도 어떻게 해서든지 복음을 전하려 하였습니다. 자기를 죽이려고 막 달려드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면 내가 이런 기회에 전도를 할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맞아 죽을 상황이 되었을 때 로마 군대가 와서 사도 바울을 체포함으로 죽음을 면할 수 있었습니다. 기가막힌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그런데 로마 군인들에게 붙잡혀 가면서 사도 바울은 천부장에게 사람들에게 말을 좀 하게 해 달라고 부탁을 하였습니다. 로마 군인들에게 붙들려서 감옥에 들어가기 직전에 자기를 죽이려고 몰려드는 유대인들에게 히브리 말로 복음을 전하는 이 장면까지가 오늘 읽은 본문입니다.
다음 주에는 사도 바울이 전했던 복음의 내용을 같이 살펴보겠는데,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도전은 예수를 믿고 주의 사명의 길을 갈 때 환란이 온다는 것입니다.
(40절) 천부장이 허락하거늘 바울이 층대 위에 서서 백성에게 손짓하여 매우 조용히 한 후에 히브리 말로 말하니라
오늘 우리가 주목할 것은 죽음의 위협 앞에서 사도 바울은 어떻게 이렇게 담대하였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도 바울이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으로부터 예루살렘에 가면 결박을 당하고 이러한 환란이 있으리라 하는 말씀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에게도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다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마음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자기에게 달려들어 붙잡고 죽이려고 달려들 때도 당황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았고 오히려 복음 전도의 기회를 찾았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마음에는 ‘이런 일이 있을 것이라고 그랬지.’ 그러니까 사도 바울이 그 상황에 대해서 혼란스러워하거나 또는 도망가려고 하지 않고 그 상황 속에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역사하심을 더 생각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도 똑같습니다.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으면 예수 믿고 살아가는 동안에 환란이 오거나 어려움이 와도 우리가 사도 바울처럼 담대한 마음을 가지고 그 상황을 처리할 수 있고, 하나님은 어떤 시험 중에도 항상 피할 길을 열어두시고 살 길을 주신다고 하셨으니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을 보게 됩니다. 문제는 우리 마음에 준비가 되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환란 중에도 담대하려면 마음의 준비를 하고 살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5장 11절에서 분명히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이 예수님 때문에 누구로부터 욕을 듣고 또 거짓말로 증언을 받는다든지 또는 박해를 받을 때 ‘아, 이런 일도 있을 것이라고 그랬지.’ 이상하게 생각할 게 아니란 말입니다. ‘왜? 이런 일이 생길까?’ 할 게 아닙니다. 벌써 그러리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그리고 디모데후서 3장 12절에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가정에서든지 직장에서든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경건하게 살려고 결단하는 순간부터 여러분에게 박해가 있을 때‘아, 그랬지. 그렇게 말씀하셨지.’라고 여러분이 마음을 붙잡으면 그 상황이 여러분에게 전혀 다르게 보인다 말입니다. 이상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두려워할 것도 아니고 혼란도 아니고 또 도망가고 싶은 것도 아니고.‘이때 하나님이 어떻게 하기를 원하실까?’이렇게 생각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마음 준비를 하라는 것입니다. 고난도 당하리라고 하셨음을 아니 두려워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명령 중에 가장 자주 나오는 명령은 무엇인지 아십니까? “사랑하라” 는 것이겠지요. 아닙니다. 사랑하라는 말씀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가장 중요한 명령이지만, 가장 많이 말씀하시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면 “교만하지 말라, 겸손하라.”이겠지요. 그 말씀도 중요하지만 아닙니다. “온전한 행실을 하라.”도 아닙니다.
성경에서 어떤 명령보다 자주 등장하는 명령은 “두려워 말라.”는 것입니다. 오길비라는 성경 학자는 성경에두려워 말라.는 구절이 총 366번 등장한다는 점에 주목했습니다. 1년 365일에서 윤년까지 위한 개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만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고 싶은 말씀 중에 제일 하고 싶은 말씀이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말은 우리가 예수 믿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가려고 할 때 두려워할만한 일을 만날 것이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을 하나님이 정말 싫어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두려워하는 것을 왜 이렇게 싫어하시는가? 그것이 죄이기 때문입니다. 이해가 안되는 분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짓는 죄 중에 윤리적인 죄가 우리 눈에는 항상 두드러지지만, 실제로는 영적인 죄가 훨씬 심각한 죄입니다. 우리가 짓는 죄 중에 가장 심각한 죄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것이 그렇게 큰 죄입니다. 아직도 이해가 안되시는 분이 있을 것입니다. ‘간음죄, 살인죄는 큰 죄같이 보이는데, 믿지 않는 것이 무엇이 그렇게 큰 죄일까?’
여러분, 아내가 남편을 믿지 못할 때 그 남편의 심정이 어떨까요? 남편이 아내를 믿지 못할 때 그때 아내 심정이 어떨까요? 여러분, 누가 여러분을 믿지 않을 때 여러분은 그때 어떤 마음이세요? 믿지 않는 것이 얼마나 큰 죄인가는 실제로 겪어보면 압니다. 하물며 하나님께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지 않아요.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께는 얼마나 큰 죄인가 깨닫지 못하니까 믿음이 없는 것이 얼마나 큰 죄인가를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들끼리도 누가 여러분을 믿지 않으면 얼마나 불쾌하고 또 그것 때문에 얼마나 마음에 상처가 되겠습니까?
하나님을 믿지 않는 대표적인 현상이 두려움입니다. 하나님을 안 믿는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렇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제대로 믿으려면 ‘어려움도 있으리라.’ 각오하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어려워서 못해요, 힘들어서 안해요.” 한다면 신앙은 어떻게 지키며, 복음은 어떻게 전해지겠습니까?
제가 부흥회 갈 때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예수님이 우리 마음에 오신 것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이 놀라운 십자가 복음을 전하고 이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예수님과 함께 우리 가운데 임했고 그리고 예수님이 재림하시면서 온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가 완전히 임하게 될 것을 설교하고 묻습니다,“당신은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는 것이라면 무조건 순종하겠습니까?”그러면 대답을 못하는 사람이 대부분입니다.“주님, 아무도 안하겠다는 일 저에게 시켜주세요! 주여, 아무도 안 가겠다고 하는 곳, 제가 가겠습니다. 할 수 있습니까?”라고 질문했을 때 대답을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신 것과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십자가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설교하였는데도 그렇습니다.
말씀을 듣기만 하지 마음으로 붙잡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지금 천국으로 오라 하셔도 담대하게 갈 수 있겠습니까? 준비되셨습니까? 괜찮습니까? 천국이 있다는 것과 천국이 그렇게 좋다는 곳임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지금 주님이 나를 데려간다면 혼란스러워하고 당황스러워하면 그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여러분은 매일 성경 마지막 말씀인“주 예수여 오시옵소서.”하고 기도하고 사십니까? 주님의 나라가 있고 그 주님의 나라가 이미 내 마음에 이루어졌고 온 세상이 주님이 오심과 함께 이 땅에 임할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정말 안다면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그 기도가 안 나오는 것이 이상하지요.
마음의 준비가 없는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의 나라가 좋다면“지금 오라.”한다고 당황할 것이 무엇입니까?“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구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믿는다고 말하는 것은 거짓입니다.
주님이 오실 때는 노아 시대와 같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노아가 방주를 지어놓고 홍수가 나니 방주에 들어오라 하여도 망설일 사람이 많다는 것입니다. 구원의 길을 달려갈 때, 롯의 아내처럼 뒤 돌아설 자가 많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마음 준비가 안된 사람은 주님이 결정적인 순간에 너희가 구원의 방주로 들어오라 하여도 코웃음만 칩니다. 구원의 길을 달려가야 될 때 롯의 아내처럼 세상을 뒤돌아보다가 소금 기둥 되는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성경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마음의 준비를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듣기만 하지 실제로는 마음 준비를 안하는 것입니다.
얼마 전 정년 은퇴하시는 이상선 초등학교 교장 선생님에 대하여 들었습니다.
교장 선생님께서 퇴임식 때 충격적인 고백을 하였습니다.
"저는 참회하는 심정으로 이 자리에 섰습니다. 지난 44년 5개월 동안 교직 생활하면서 내가 저지른 큰 죄는 3가지입니다. 바로 민주주의 교육 못한 죄, 통일 교육 제대로 못한 죄, 아이들을 입시 지옥으로 내몬 죄입니다."
은퇴식에 참석한 200여명의 교사와 학부모들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히 이 교장을 쳐다봤습니다.
"그 외도 작은 죄들은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많습니다. 학급 규칙을 일방적으로 정한 것, 용의검사 해서 더럽다고 아이 기죽인 것, 운동장에서 조회하면서 아이들 줄 세운 것, 각종 부정선거에 참여한 것, 유신 헌법을 찬양한 교과서로 교육한 것, 웅변으로 글짓기로 북한을 적으로 가르친 것, 1등과 꼴찌를 발표한 것...' 말을 맺지 못하는 은퇴 교장 선생님의 회개에 대하여 들으면서 제 가슴이 울렁거렸습니다.
‘목사인 나는 마지막에 무슨 말을 할까? 교인들에게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이 없을까?’
마음 준비 없이 살면 반드시 마지막에 무서운 순간을 맞이 하게 됩니다. 복된 길은 버리고 망할 길을 걸었음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마음 준비가 분명히 되어있지 않은 사람은 반드시 그렇습니다. 마지막에 정말 피눈물 나는 회개를 고백하는 것 밖에는 할 것이 없습니다. 사는 길, 복된 길, 생명의 길은 알고도 안 간 것입니다. 몰라서 안 간 것이 아니고. 망하는 길, 정말 철저히 회개하는 그 길로 가는 것입니다. 왜? 진리를 결론 삼지 않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매 순간 갈등인 것입니다.
힘들고 고생스럽다고 저주가 아닙니다. 편안한 삶이 꼭 복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진리를 결론 삼아야 바로 살 수 있습니다.
“나 죽고 예수로 산다!” 구원받은 성도의 고백입니다. 입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고 마음에 그 점에 대해서 결론 삼아야 비로서 살 길과 죽을 길이 보입니다. 하나님이 복주시는 길과 하나님이 떠난 길이 보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눈으로 보기에 크고 좋은 길, 평탄한 길에 현혹되면 안된다 말입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이 이끄시는 길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을 따라 살아야 양이 살지 않습니까? 자기 눈에 보기에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라고 “나는 안 가요!” 그러면 그 양은 죽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마음 준비는 되었습니까? 진리를 결론 삼으셨습니까?
사도 바울은 마음의 준비가 되었기 때문에 결정적인 순간에 그는 환란 앞에서 도망가지 않고 더 앞으로 나아갔고, 하나님은 사도 바울을 로마에까지 인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마음의 준비가 되었다고 환란 앞에서 담대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의 준비가 되었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환란을 담대하게 이길 사람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환란 중에도 흔들림이 없었던 것은 단순히 환란이 있을 것을 안 것만 아니라 늘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백 중에 몇 구절만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고전 15:5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고후 13:5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
빌 1:8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그렇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이길 힘은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요 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세상에서 환란을 당해도 담대할 수 있는 유일한 열쇠는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 때문입니다. 만약에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도 모르고 예수님이 그 마음에 계신 것도 모르는 사람은 결국 어떤 상황에서도 평안한 마음 절대 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 안에 거하는 자여야 합니다. 예수님을 정말 바라보는 눈이 뜨인 자여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하는 사람 만이 환란을 당해도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
어느 집사님이 남편을 교회로 인도하셨는데 같이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부인 집사님은 남편이 목사와 같이 식사하면서 신앙 생활을 좀더 잘하게 하고 싶은 동기도 있으셨던 것 같았습니다. 남편분이 주로 얘기를 하게 하셨는데 교회에 나와보니 좋은 말씀도 듣고 참 유익한 것도 많은데, 한 가지 불편한 것이 있다고 했습니다. 바쁜 일이 있거나 집안에 무슨 일이 있어서 주일에 빠지게 되면 어떻게 자기가 주일에 빠졌는지 전도사님 목사님들이 아는지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꼭 바로 그 다음 날 전화가 온다는 것입니다.“이번 주일에 빠지셨더군요. 바쁜 일이 있었던 모양이지요. 주일에 빠지시면 안됩니다.”교회에서 자기를 감시하고 있는 모양이래요. 주일에 왔는지 안왔는지. 그것이 그렇게 부담스럽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아내를 탓했습니다. 아내가 자기보다 교회를 먼저 나가서 신앙은 좀 좋은지 모르겠는데 너무 고지식하게 산다는 것입니다. 아내가 정말 조금만 융통성만 있어 주일에 교회에서 장로님이나 전도사님이“오늘 남편이 안 보이시는군요.”그러면“아, 아까 왔다 갔어요.” 이렇게 한번만 얘기하면 굳이 전화 올 일이 없을텐데. 자기가 주일예배 빠지는 것 때문에 꼭 교회에서는 성실하지 못한 사람인 것처럼 평을 받게 되는 것이 부담스럽다는 것입니다.
제가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화가 나거나 그러지 않고 그냥 감사했습니다. 아직 새가족이시니까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은 그분에게는 전혀 이해가 안되는 말이고 그저 사람의 눈 의식하는 정도 밖에 안되는 초신자시니까 아내가 그런 식으로 거짓말만 해줘도 자기 입장이 편하겠다고 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도 교회를 나오시는 것이 감사한 일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내 안에 계신 것을 안 성도도 여전히 이런 수준에만 머무르면 문제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정말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알면서도 또 그것을 믿으면서도 여전히 집에서는 부부싸움 하고 교회에서는 안한 것처럼 하고. 이것이 말이 됩니까? 은밀한 죄 아직도 해결이 안되는 것 이것이 말이 되나요? 사람의 눈만 피하면 아무도 안 보면 된다는 정도의 그런 수준의 믿음 밖에 안된다면 어떻게 그분이 신앙 생활을 제대로 하고 환란 앞에서 담대할 수 있겠느냐 말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는 수준이 그 정도 밖에 안되면.
베드로전서 5장 7절에서 염려를 주께 맡겨 버리라 하셨는데, 어떻게 염려를 주님께 맡길 수 있습니까? 주님을 아는 만큼 맡겨집니다. 하나님을 지식으로만 아는 것 가지고는 절대 하나님께 염려가 맡겨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분명히 체험하는 순간, 그 즉시 염려가 하나님께 맡겨집니다.
여러분, 손에 돈을 가지고 있으면 그 돈에 해당되는 염려, 일부러 맡기려고 애쓸 필요가 있습니까? 손에 돈 가지고 있으면 그냥 염려는 맡겨져버리는 것입니다. 왜? 내가 돈의 힘을 믿으니까. 예수님을 정말 바라보는 눈이 뜨이면 염려하라, 염려하지 말라 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야곱과 함께 하셨지만, 야곱은 늘 두려움 속에 살았습니다. 그러나 벧엘 들판에서 돌베개를 베고 자다가 하나님을 만난 순간 두려움이 사라졌습니다.
모세가 죽은 후에 여호수아는 두려웠습니다. ‘내가 할 수 있을까’ 모세의 저 놀라운 강렬한 위엄에 비하면 그는 자신이 이주 작은 어린아이와 같이 느껴졌습니다. 그 여호수아에게 하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처럼 ..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라 ..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 버리지 아니하리니 ..
그 순간 여호수아의 마음에는 감동이 가득차는 것을 느꼈습니다. 여호수아는 담대함으로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열쇠인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성경을 많이 알아도 또 아무리 어려서부터 교회 생활을 많이 했어도 아무리 내 눈으로 기적이 일어나는 것을 여러 번 보았어도 살아계신 주님을 만나는 눈이 뜨이지 않으면 내 삶에 조그만 어려움 앞에서 두려움 염려, 해결이 안되는 것입니다.
이사야는 웃시야 왕이 죽었을 때 그는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는 성전에 들어가서 하나님께 나라와 민족의 어려운 형편 때문에 두려운 마음으로 기도했습니다. 그 이사야가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순교의 사명 앞에서 “나를 보내소서!” 하고 외쳤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나면 두려운 일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뱃전에 올라선 베드로가 바다 위로 뛰어내렸습니다. 예수님을 바라 보았기 때문입니다.
스데반은 잔뜩 화난 무리들이 돌멩이를 들어 자신을 향해 던질 때에도 그의 영안이 열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보았고,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을 향하여 두 팔 벌리고 서 계심을 보았습니다. 그 때 그에게서 죽음의 두려움이 사라졌습니다. 자기에게 돌던지는 자를 위해 기도하고 죽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거기서 충격을 받았을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19세기 말 독일 사람이면서 중국 선교사였던 에리자벳자일러 양이 소녀 시절에 선교사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아버지의 허락까지 받았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어느 선교회의 테스트를 받게 되었는데, 그만 큰 병이 들었습니다. 선교회 사무실에서 직원들이 자일러양을 보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중환자가 왔기 때문입니다. 하루 뒤에 면접을 하기로 하고 우선 좀 쉬라고 다락방으로 인도해 주었습니다. 자일러양은 내내 기도하였습니다.“하나님, 정말 저를 부르신 것이라면 저와 함께 계심을 알게 해 주세요” 절박한 기도였습니다. 다락방 문을 여니, 침대와 창문이 보이고 창문 위에 조그만 액자가 하나 걸려 있었습니다. 그 액자에 글이 쓰여 있었는데, [함께 가자] 라는 글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동행하신다는 너무나 놀라운 확인이었고 응답이었습니다. 그 순간 자일러양의 병이 떠나버렸습니다.
사도 바울은 어떻게 그렇게 성령충만한 삶을 사고 두려움도 환란도 그가 굴하지 아니하고 믿음의 길을 갔습니까? 그는 끊임없이 주님을 사모하며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새해에 여러분에게 이전보다 더 큰 일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이것이 무섭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살려고 할 때, 사람이 두렵고, 재정적인 염려가 되고, 산이 가로막혀 있다는 걱정이 있을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2010년은 이전 어느 때보다도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크고 놀랍습니다. 이것은 너무나 분명한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하나님은 역사를 주관하고 계시기 때문에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또 우리 교회, 이 민족에게 하나님이 세우신 계획은 이전에 우리가 경험했던 것과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정말 우리가 믿음으로 얼마든지 붙들어도 됩니다. 그러나 이전의 내 삶보다 이제부터 하나님의 계획이 크다는 얘기는 한편 우리를 두렵게도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더 큰 믿음을 요구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더 큰 순종을 요구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전과 같이 살아서는 하나님의 놀라운 그 계획을 살아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럴 때 여러분의 마음에 사람이 두려울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재정적인 문제에 대한 염려가 올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눈 앞에 사방이 가로막힌 것같은 답답함이 올 수가 있습니다.
이 순간에 여러분에게 선택권이 있습니다. 두려움으로 다시 이전으로 돌아가느냐 아니면 믿음으로 앞으로 나아가느냐, 결정하는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이 선택하셔야 됩니다. 두려움 때문에 그냥 예전처럼 살 것인지, 아니면 믿음을 가지고 담대하게 나아갈 것인지. 여러분이 선택하기 나름입니다. 여러분이 결정하셔야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쉽게 결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저 눈에 보이는 것만 가지고 예상되는 것만 가지고 판단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는 눈이 뜨일 때까지 기도한 다음에 정말 주님을 바라보고 기도하는 시간을 가진 다음에 결정하십시오. 사람이 가지고 있는 생각만으로 판단하면 항상 나중에 가면 말할 수 없이 후회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어떤 결정을 내리든 먼저 기도한 다음, 성령충만한 다음 결정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행 1:4 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이 명령은 당시의 상황으로 보아 제자들이 순종하기 어려운 말씀이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이 없는 예루살렘에 머물 이유가 없었습니다. 게다가 예루살렘은 매우 위험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 말씀을 순종하여 마가 다락방에 모여서 오로지 기도에 힘썼던 이들은 주님이 약속하신 부흥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에 있었어도 마가 다락방에 함께 모이지 않았던 이들은 부흥을 구경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 원리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부흥은 하나님의 영이 내게 임할 때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임할 때 더럽고 때묻은 심령이 치유되고 새로워지며 침체된 심령이 새 힘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새로운 삶의 비전을 바라보게 되고 삶의 의미와 목적이 달라지게 됩니다. 자기 중심의 삶에서 하나님 중심의 삶으로 돌아오게 되는 회개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하나님과 단절된 관계가 치유되고 사랑의 관계가 회복됩니다.
2천년 동안 내내 부흥의 물줄기가 우리 밑에 흐르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우물을 파기만 하면 강과 같은 성령의 역사가 터져나오게 됩니다. 그러나 파지 않으면 물줄기 위에서 목말라 죽는 것입니다. 기도하면 됩니다.
우리는 개인적인 삶 뿐 아니라 교단이나 나라, 민족이 어려움에 처한 것을 보지만 아무런 힘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성령의 권능이 임하면 달라집니다. 어떤 사람이든지 그 능력과 사랑의 하나님을 가까이 체험하게 되면 그는 강하고 담대한 사람이 됩니다. 능력 있는 사역의 비결도 오직 그것 뿐입니다.
사도 바울이 늘 성령충만하였던 것은 그가 성령충만을 사모하였기 때문입니다.
빌 3:12-14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성령님이 우리 안에 계십니다! 주님을 찬양합시다! 주님을 사모합시다!
어떤 사람이 아무리 초라하고 왜소할지라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훌륭하고 풍성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결코 낙심하거나 두려워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마음에 정말 예수님에 대한 갈망이 있습니까? ‘주님, 제가 주님을 만나기를 원합니다. 사도 바울처럼 저도 주님을 온전히 주목하며 살기 원합니다. 제가 꼭 가야 될 길 진짜 살 길, 정말 복받는 길 하나님이 나를 인도하시는 그 길을 갈 용기를 주십시오.’
오늘 우리가 사도 바울이 살았던 것을 흉내만 내도 내가 이제 옛날처럼 살았던 것은 여기서 끝나고 이제 하나님이 나를 향한 놀라운 더 큰 계획의 삶을 내가 살아야 되겠다. 주여, 제가 주님께로 달려갑니다. 여러분이 그런 마음을 가지고 주님을 사모하시면 주님은 여러분과 함께 계시는 것을 놀랍게 보여주십니다. 여러분의 눈이 완전히 달라지게 됩니다.
오늘 이 시간에 기도하십시다.
“하나님, 정말 주님이 말씀하신 그 길, 그것이 좁은 길이라도 비록 그 길에 환란이 있다 하더라도 핍박을 받는다 하더라도 그 길이 살 길이라면 그 길을 갈 용기를 주십시오. 주님, 제 눈을 열어 주를 보게 해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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