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깊은 은혜의 자리로 들어가라! (행 18:24-28)
지난 주간 뉴질랜드 코스타 집회에 갔었는데 한 청년과 상담하였습니다. 그는 목사의 아들로서 아버지가 자신이 목사가 되기를 원하시지만, 자신은 목사가 되기 싫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그대로 목사가 되어야 하느냐, 아니면 자신이 원하는 길로 가는 것이 옳으냐고 물어왔습니다.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충고해 주실 것입니까? 아버지 말을 들으라고 하실 건가요, 아니면 네 인생은 네가 결정하는 거라고 하실 건가요?
저는 그에게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는지를 물었습니다. 만약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하였다면 목사가 되는 것이 힘들다, 답답하다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난 다음에는 모든 것이 다 달리 보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 청년을 보면서 꼭 35년 전 저를 상담하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제가 목사 되는 것이 팔자인 줄 알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부모님이 정해놓으셨기 때문에. 성격이 유순해서 거절할 용기가 없어서 목사가 되었다는 생각도 했었습니다. 제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알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 때 “내 인생은 내 것입니다. 왜 내 인생을 당신들 마음대로 결정하셨습니까?“ 하며 반항하며 다른 길을 갔었다면, 지금 너무나 후회하였을 것입니다. 지금은 너무나 행복합니다. 그렇게 보이지 않습니까?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알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어도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느냐 아니냐에 따라 엄청나게 다릅니다.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하면 이해가 안되는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예배의 감격이 무엇인지, 십자가의 감동이 무엇인지, 헌신이 무엇인지, 눈물의 기도가 무엇이지, 용서와 사랑이 무엇인지 알 수 없습니다.
예수님에 대하여 들어서 믿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멈추면 안됩니다. 아직 예수를 진짜 믿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더 깊은 은혜의 자리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러면 나도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은혜를 받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면 걱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늘 아볼로라는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더 깊은 은혜의 자리로 여러분을 인도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아볼로라는 사역자는 대단한 사람입니다. 본문에 보면 그는 당시 애굽의 수도였고 정치 문화 학문의 세계적인 중심지였던 알렉산드리아 출신으로서 바울 못지 않게 공부를 많이 했고, 구약 성경에 능하고 말에 능한 웅변가로서 초대 교회의 유명한 지도자였습니다. 알렉산드리아는 성경적으로도 굉장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도시입니다. 성경의 중요한 사본들이 알렉산드리아에서 작성이 되었습니다.
고린도전서에 고린도 교회에 일어난 네개 분파가 나오는데, 바울파, 베드로파, 예수파와 함께 아볼로파가 있었습니다. 아볼로는 바울과도 동등한 위치에 있어 교인들에게 대단한 영향력이 있던 사람입니다.
고린도후서 10장 10절에 보면 사도 바울을 비난하였던 사람들이 그의 설교가 시원치 않았음을 지적하였습니다.
고후 10:10 그들의 말이 그의 편지들은 무게가 있고 힘이 있으나 그가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그 말도 시원하지 않다 하니
아마 이런 비난을 들은 이유가 아볼로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아볼로는 설교를 잘하였던 반면에 바울은 말을 잘 못했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사도 바울을 무엇이라고 비난을 하느냐 하면, 편지는 아주 은혜롭고 무게가 있게 글을 쓰는데 만나서 보면 사람이 신통치가 않다는 것입니다. 또 말을 들어보면 무슨 말을 하는지 제대로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설교에는 능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나를 사람들이 평가하고 비난을 하지만.’ 사도 바울은 이렇게 썼습니다. 사도 바울이 왜 이런 표현을 썼을까? 성경 학자들은 아볼로 때문에 그랬다고 해석을 합니다. 아볼로는 말을 잘했습니다. 설교가 얼마나 은혜로운지.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아볼로에게서 은혜를 받았느니까 “나는 아볼로가 더 좋아.” 했습니다.
사실 사도 바울은 아볼로라는 존재가 사실 어떻게 보면 눈에 가시같은 존재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얼마나 놀랍습니까? 사도 바울이 아볼로를 경쟁 상대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직임이 서로 다르고 은사가 다를 뿐이지 오직 하나님을 섬길 뿐이라고 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 사이에는 바울파니, 아볼로파니 하는 쓸데없는 싸움이 있었지만 바울과 아볼로 두 사람 사이는 정말 아름다운 동역자였습니다.
고린도전서 3장 6-7절에서 사도 바울은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 뿐이니라 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아볼로가 경쟁자가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주신 동역자로 믿었던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4장 6,7절에서는 둘이 어떻게 협력하였는지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고전 4:6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들어서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가지지 말게 하려 함이라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은사 문제로 서로 시기하고 다투는 상황에서 사도 바울은 자신과 아볼로 사이를 좀 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6장 12절을 보면 사도 바울이 아볼로를 형제라고 말하면서, 고린도교회에 다시 가서 교회를 세워주라고 여러 번 권하였다고 했습니다. 고린도교회에 바울파니 아볼로파니 하는 상황이었음을 생각하면 대단한 일입니다. 고린도 교회에 사도 바울과 아볼로는 겉으로는 경쟁 관계에 있는 것 처럼 보입니다. 사람의 마음으로는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바울과 아볼로 사이는 정말 성령이 충만한 상태였기 때문에 전혀 시기하고 경쟁하는 관계가 아니었습니다.
성도 여러분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렇게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하여튼 아볼로는 사도 바울과 거의 비슷한, 심지어는 사도 바울보다 더 낫다고 평가될만한 분이었습니다. 이런 아볼로였지만 그도 처음부터 예수님을 바로 믿은 사람이 아니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되 부족한 것이 있는 상태에서 믿었던 단계가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25절에 보면 아볼로가 일찍 주의 도를 배웠지만 요한의 세례만 알았다고 했습니다.
그가 일찍이 주의 도를 배워 열심으로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나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라
아볼로가 어떻게 예수님에 대하여 알았을까요? 25절에 아볼로가 “요한의 세례”만 알았던 사람이라고 말한 것을 보아 성경학자들은 아볼로가 세례 요한의 제자였거나 적어도 그 영향을 받은 것으로 봅니다. 세례 요한을 통하여 예수님에 대하여 들었던 것 같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이 분이 메시아구나!’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이나 행적에 대해서 아볼로가 자세히 알고 있었고 그리고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설교 중에 아볼로가 전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뭔가 부족한 것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여튼 아볼로는 예수를 이미 알았고 믿었지만 온전히 예수님을 알지는 못했던 것입니다.
어느 날 브리스길라 부부가 아볼로의 설교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는 열심히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했지만 무엇인가가 빠져있음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가르치기는 하는데 뭔가가 정확하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끝나고 난 다음에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는 아볼로를 초대하고 함께 교제를 하면서 그에게 "하나님의 도" 즉 정확한 복음에 대해 더 자세히 풀어 설명해 주었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아볼로가 예수를 믿어도 무엇인가 빠져있었다면 무엇이 빠져있었던 것일까요? 그리고 아굴라 부부가 도대체 무엇을 아굴라에게 설명해 준 것일까요? 성령의 역사에 대한 것입니다. 아볼로가 예수님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지만 성령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세례를 알지 못하였다는 말입니다.
다음 장인 사도행전 19장에 보면 거의 같은 케이스가 나옵니다. 사도 바울이 3차 전도여행 길에 에베소를 갔더니 이미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예수님을 전하러 간 것인데. 그런데 그 사람들에게서 무엇인가 빠져있는 것을 깨닫고, 바울이 물었습니다.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그들의 대답은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였습니다.
요한의 세례란 회개의 세례를 말합니다. 세례 요한은 하나님의 심판이 다가왔음을 선포하였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회개를 촉구하였습니다. 그때 사람들이 요한의 설교를 통하여 거룩한 두려움이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받았습니다. 요한의 세례는 죄를 깨닫고 회개하고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를 믿는 중요한 단계가 회개하고 죄사함을 받은 것입니다. 예수를 믿었다는 말은 이제는 내가 예전에 살던 것에서 회개하고 죄사함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회개하였다고 예수님을 온전히 믿은 것은 아닙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말은 예수를 믿고 내 죄를 회개하고 죄사함을 받고 성령을 받고 새 삶을 사는데까지 가야 함을 의미합니다. 반드시 성령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이것은 세례 요한이 한 말입니다.
눅 3:16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풀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그러니까 예수님을 믿으면 끝나는 것이 아니고, 성령과 불로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도 같은 설교를 했습니다.
행 2:38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그렇습니다. 지금도 아볼로처럼 요한의 세례만 알고 성령의 역사를 모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볼로처럼 뛰어난 신학적 성경적 지식을 가졌어도 성령을 받지 못하면 예수를 온전히 믿은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선물을 받은 것입니다. 그때부터 진짜 예수 믿는 삶이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이 날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가 아볼로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었을까요? 성령 세례에 대하여 가르쳐 주었을 것입니다. 아볼로는 이 날 성령 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그 결과를 성경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28절 이는 성경으로써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증언하여 공중 앞에서 힘있게 유대인의 말을 이김이러라
아볼로가 원래 성경에 능통하고 언변에도 뛰어났던데다가 성령의 역사가 함께 함으로 많은 사람들 앞에서 예수는 그리스도임을 능력있게 증거하였던 것입니다. 성경 박사인 정도가 아니고 말씀의 권세가 나타난 것입니다.
여러분이 예수를 믿으면 정상적으로 성령님이 역사하시는 삶을 살게 된다면 여러분의 삶에 권세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그랬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예수님을 성령의 능력으로 믿고 있습니까?
예수님에 대하여 아는 것과 성령의 능력으로 예수님을 믿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십자가 복음을 잘 압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나 사탄의 궤계로 인간에게 죄가 들어왔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것입니다. 우리는 죄의 종이 되었습니다. 죄 덩어리입니다. 이제는 멸망해 지옥에 갈 수 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때가 이르매 독생자를 구주로 보내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모든 인간의 죄를 짊어지고 속죄의 제물이 되어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사흘만에 부활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천국 백성이 됩니다. 이것이 복음의 요약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복음을 다 알고 있고 믿지만, 삶이 변화되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습니다. 십자가 복음을 알지만 감동은 없고 삶의 변화도 없습니다. 내가 이 놀라운 복음을 갖고 있습니다. 누구나 다 알고 있는 복음이 아닙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그 복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복음을 아는 것이 고린도전서 1장 18절 말씀처럼 여러분의 삶에 진짜 하나님의 능력이 되었습니까? 여러분이 십자가 복음을 정말 알면서도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왜 그렇게 미운 사람이 많습니까? 왜 그렇게 용서가 안되는 사람이 많습니까? 왜 다른 사람을 보면 그렇게 허물이 자꾸 보입니까? 도대체 이런 복음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은 지옥 갈 나를 용서해 주시고, 죄는 내가 지었는데 당신의 독생자가 죄 값을 치르시는 은혜를 내게 주셨다고 믿으면서도 왜 다른 사람의 허물과 잘못을 용서하지 못하고 은혜로 보아지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길래 독생자를 주면서까지 사랑하셨습니까?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를 믿는다면서 왜 그렇게 두려움과 염려가 많습니까?
서로 정죄하고 판단합니다. 용서와 사랑이 안됩니다. 습관적인 죄를 벗어 버리지 못합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는 이유는 머리로만 믿었지, 성령의 능력으로 예수님을 믿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아는데도 내 삶에 미움, 다툼, 시기, 질투, 불평, 원망, 두려움, 염려가 많습니다. 십자가 복음이 분명하지만 내게는 능력이 아닙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집니까? 내가 예수님에 대해서 아는 것이지 성령의 역사로 알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성경에 대해서도 예수에 대해서도 알기는 많이 아는데 감동이 없습니까? 기쁨이 없습니까? 감사가 없습니까? 사랑이 없습니까? 더 깊은 은혜의 자리로 들어가야 합니다.
“예수를 믿어도 어쩔 수 없구나!”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많은 분들이 교회에 왔다가 실망하고 세상으로 나가면서 “내가 예수 믿는 사람들을 보았지만 그들이 나와 똑같더라. 예수 믿어도 별 소용이 없더라.” 그러시는 분들을 많이 봅니다. 또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안타깝습니다. 예수를 믿어도 별 소용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에 대해서 듣고 아는 정도로 그치니까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로 주님을 더 알고 주님과 인격적인 교제가 되는 단계로 들어가면 변하지 않을 사람이 없습니다.
뉴질랜드 교회는 영국교회 같이 노인만 남은 교회로 예배당을 주일 한번 50분 예배드리고 나머지는 다 임대함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부흥되는 교회도 있었다. 성령의 역사를 강조하는 교회입니다
처음 말씀드린 상담 이야기에서 목사의 아들이 목사가 되어야 하나? 하는 갈등이 생기는 이유는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역사로 예수님을 믿은 것이 아니니까 주님을 위해서 평생 전임 사역을 한다는 것이 힘들어 보이기만 한 것입니다.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시다는 설교를 알아듣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이 도무지 믿어지지도 않고 이해도 안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내 안에 와 계시다니!’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알고 성령 체험을 하기 전에는 정말 그랬습니다. 성경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지만 그것이 내 삶에 답이고 기쁨이 되지 못했습니다. 성령님이 역사하시면 말씀이 다 달라집니다. 말씀이 살았는 말씀이요 진리요 이것이 실제로 체험되어집니다.
제자들도 성령 받기 전에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도 제대로 알아듣지도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성령을 받고서 알았습니다. 내 가슴에 계신 것을!
예배 중에, 찬양 중에, 기도 중에 눈물이 흘렀습니다.
5분 기도가 안되는 이유는 성령으로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령 충만하면 1시간이 언제 지나갔느냐는 식으로
전도가 되고 예배가 감격이 됩니다,
어떻게 하면 성령 충만을 받을 수 있습니까?
아볼로처럼 겸손히 말씀에 반응하면 됩니다.
아볼로도 대단하고 브리스길라 아굴라도 대단합니다. 브리스길라 아굴라가 공개적으로 아볼로를 책망하지도 않고 조용히 따로 불러서 그 분에게 하나님의 도에 대해서 성령에 대해서 다시 전해드렸습니다. 아볼라는 아볼라대로 당대에 대학자요 철학자요 웅변가였습니다.
아볼로는 공부를 많이 해서 많이 알긴 했지만 성령 체험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천막 장사꾼이었던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로부터 하나님의 도에 대하여 겸손히 배웠습니다. 아볼로 자기 자신에게 뭔가 부족하다는 것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브리스길라 아굴라를 통하여 성령에 대해서 들었습니다.
이 점이 바로 아볼로의 위대한 점 아니겠습니까? 만일 아볼로에게 이같은 배우려는 겸손함이 없었다면 그는 내내 복음의 진수를 깨닫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볼로 사역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도 여러분이 정말 자신의 영적인 상태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겸손하게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면 하나님은 여러분을 더 깊고 놀라운 은혜의 자리로 인도하시고 계십니다.
말씀 양육 받을 때 어떤 분은 양육 이라는 말이 기분 나빠서 안 받으신다는 분도 있었습니다. 내가 어린애냐? 무슨 양육을 받게. 그래서 그 표현을 바꿀까 하는 생각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되면 하나님이 아무리 도와주시려고 해도 도움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2개월 동안 예수님과의 행복한 동행을 하시라고 여러분에게 권해도, 여러분이 정말 겸손하게 그것을 받아들이고 따르지 않으면 그 놀라운 복을 받는 기회를 다 누리지 못합니다. 제자훈련 꼭 다 받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우리는 성찬을 받습니다.
그러나 어떤 마음으로 받느냐에 따라 성찬의 은혜가 달라집니다.
성찬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수님과 우리가 얼마나 하나가 되었는가. 예수님은 우리의 삶 속에 얼마나 놀랍게 같이 계신가 하는 것을 계속해서 우리에게 확인시켜 주시는 놀라운 은혜의 시간입니다.
그러나 같은 성찬을 받아도 어떤 분들은 성찬을 통하여 살아계신 주님을 만날 수고 있고, 어떤 분들은 그저 조그만 떡과 포도즙을 먹고 마시는 하나의 예식으로 끝날 수도 있습니다. 그 마음의 겸손함이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주님, 제가 이렇게 신앙 생활하는 것이 정상이 아닙니다. 예수님, 제가 정말 주님을 만나고 싶습니다. 예수님, 정말 제가 주님을 원합니다. 여러분이 진정으로 갈망하시면 주님은 반드시 여러분을 만나주십니다.
유명한 인도의 선교사였던 스탠리죤스는 어려서부터 예수를 믿었지만 열일곱살 때 성령 체험을 하였습니다. 순회 설교자 로버트J.베이트먼(Robert]. Bateman)이 인도하는 집회 셋째 날 밤, 집회에 참석하기 전에 침대 곁에 무릎 꿇고 이제까지 드렸던 기도 기운데서 가장 신설한 기도를 바쳤습니다. 예수님, 오늘 밤 저를 구원하소서... 마음 속에서 뜨거운 사모함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교회로 달려갔습니다. 그렇게 달려갔던 적이 없었습니다. 교회 맨 앞 좌석에 앉았습니다. 전에 한번도 해보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설교가 끝났을 때 기도의 제단에 가장 먼저 달려갔습니다. 무릎을 꿇기도 전에 천국이 나의 영 속으로 뛰어들었다고 고백했습니다.
마음에 놀라운 변화가 생겼습니다.
(1) 하나님께 용서받았다는 느낌.
(2) 본향에 있다는 느낌. 나의 그곳으로 돌아왔다는 느낌을 받았다
(3) 삶의 목표와 방향을 잡고 목적을 찾았다는 느낌.
(4) 혼자가 아니라는 느낌. 내게는 나와 늘 함께하시는 분이 있다.
(5) 어엿한 사람이 되었다는 느낌.
(6) 온전해졌다는 느낌.
(7) 은혜를 받았다는 느낌.
뒤에 온 사람을 붙잡고 외쳤습니다. 나는 그것을 소유했어요!
무릎을 펴고 일어서자, 세계를 부둥켜 안고 기쁨을 모든 사람과 함께 나누면서 나의 남은 생을 보내리라고 결심했습니다. 전에는 꿈도 꾸지 못했습니다.
열일곱 살 나이에 스탠리존스 선교사는 이렇게 회심했습니다.
그러나 스탠리존스의 단짝 친구 래스는 회심하지 못하였습니다. 래스, 나는 나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바칠 거야. 너도 그럴 거지? 라고 말하자, 아니, 나는 인생을 좀 더 알 거야! 그리고 둘은 헤어졌습니다. 헤어진 지 30년 뒤에 다시 만났습니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하며 살았는지 이야기했습니다. 그는 도박에 빠져 살았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지금 성령의 역사를 경험하지 못하였다면 그 어떤 판단도 내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중요한 결정을 내릴만큼 아직까지 여러분은 정확하게 판단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저 착하게 사는 것이 주님의 영광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냥 좋은 사람이 아니라 성령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착하게 사는 정도로 여러분을 향한 계획을 세우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삶이 놀라운 삶이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다 그렇게 되어집니다. 오늘 성찬을 받기 전에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제가 예수님을 원합니다. 살아계신 주님을 원합니다. 아볼로처럼 내 인생도 예수님을 만나고 완전히 변화되기를 원합니다. 주님, 제게 역사해 주시옵소서. 저를 만나주시옵소서. 오늘 성찬을 통하여 제 눈을 열어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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