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를 극복하는 6가지 길
시편 56편 1-13절
< 자기를 극복한 다윗의 고백 >
지난주에 한 유명한 젊은 여배우가 자살했습니다. 얼마든지 세상은 살만한 곳인데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 소식을 듣고 이 시대에 자기를 극복하며 산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지난주 내내 생각했습니다. 역사상 위대한 사람들은 다 자기를 극복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다윗도 자기를 극복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시편의 표제를 보십시오. “다윗의 믹담 시, 영장으로 요낫 엘렘 르호김에 맞춘 노래, 다윗이 가드에서 블레셋 인에게 잡힌 때에”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믹담’이란 ‘금언’이란 뜻입니다. 즉 이 시는 다윗이 평생 동안 금언처럼 여겼던 시로, 다윗이 가드로 피신 갔다가 블레셋 사람에게 잡혔을 때를 회상하며 쓴 다윗의 신앙고백이 담긴 시입니다.
왜 다윗이 블레셋 땅 가드로 피신을 갔습니까? 사무엘상 17장에서 다윗이 골리앗을 물리치자 다윗은 이스라엘의 최고 인기 스타가 됩니다. 사울 왕도 다윗의 인기를 따를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사울은 천천이고 다윗은 만만이다”라고 소리쳤습니다.
그 인기가 문제였습니다. 결국 사울 왕의 미움을 받아 다윗은 끊임없는 피신 길에 오르게 됩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블레셋 지역의 땅인 가드의 아기스 왕에게 피난을 갔습니다. 그러나 가드에서 그는 철저히 자존심이 무너지는 경험을 합니다.
그때 신하들이 아기스 왕에게 다윗에 대해 모함을 했습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최고 인기 스타인데 왜 망명을 오겠습니까? 망명을 온 것이 아니라 정탐을 왔을 것입니다.” 그러자 다윗은 자기 생명이 위험한 줄 알고 대문짝을 그적거리고, 수염에 침을 흘리며 미친 척을 했습니다. 그러자 아기스는 “저 미치광이를 내 집에서 쫓아내라!”고 해서 위기를 모면하게 됩니다. 그때를 회상하면 할수록 자존심이 상하고 우울해지고 견딜 수 없었지만 그는 결국 자기를 극복하고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왕이 됩니다.
< 자기를 극복하는 6가지 길 >
다윗이 어떻게 자기를 극복할 수 있었습니까? 오늘 본문의 시편은 자기를 극복하는 6가지 길을 우리들에게 가르쳐 줍니다.
1.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다윗이 왜 블레셋에서 자존심이 무너지게 되었습니까? 다윗의 결정적인 잘못이 무엇입니까? 무엇보다 블레셋으로 피신했던 것 자체가 잘못이었습니다. 블레셋은 세상을 상징합니다. 힘들다고 세상으로 나가면 더욱 큰 환난과 수치를 당하게 됩니다.
결국 다윗은 아기스 왕 앞에서 자존심이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침을 수염에 흘리면서 미친 척까지 해야 했습니다. 그 수치스러운 일이 성경에까지 기록되었으니 얼마나 비참합니까? 자존심이 완전히 벗겨진 알몸 인생이 되었습니다. 그런 과거를 가지고 앞으로 살아가려니까 삶이 두려웠을 것입니다. 그 수치심과 두려움을 어떻게 극복했습니까?
본문 3절 말씀을 보십시오. “내가 두려워하는 날에는 주를 의지하리이다.” 다윗은 자신의 두려움을 하나님의 의지하고 바라봄으로 극복했습니다. 사실 두려움은 대개 실체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은 말했습니다. “공포가 문을 두드릴 때 믿음으로 문을 열면 문밖에는 아무도 없다.”
두려움은 훈련됩니다. 두려워하면 두려움이 커집니다. 그러나 믿음도 훈련됩니다. 믿음으로 맞서면 믿음도 점차 커지게 됩니다.
아이들과 롯데 월드에 가면 가장 하기 싫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이로드롭을 타는 것입니다. 30층 높이에서 순식간에 떨어지면 아찔합니다. 그것도 서서 떨어지는 것도 아니도 앉아서 떨어지니까 더 가슴이 철렁합니다. 그런데 아이들과 사모가 보고 있으니까 무섭다는 내색도 할 수 없고, 할 수 없이 도살장이 끌려가는 심정으로 자이로드롭 의자에 앉습니다. 그리고 “죽으면 죽으리라!”고 하고 타지만 속으로는 “나는 반드시 죽지 않는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탑니다. 결국 타고 난 후에는 웃으면서 그곳에서 내려옵니다.
두려움은 실체가 없는 것입니다. 다 마음의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의 훈련을 하고 두려움을 주는 것은 최대한 멀리해야 합니다. 점집에 가서 동자 귀신, 장군 귀신의 눈동자 돌아가는 모습을 신기하다고 쳐다보지 말아야 합니다. 공포영화를 멀리하고, 소름이 돋는 얘기를 멀리해야 합니다. 그런 것을 보고 그런 얘기를 들으면 영혼의 방어벽이 현저하게 약화되기 때문입니다.
대신에 믿음의 말은 많이 들어야 합니다. 믿음은 훈련됩니다. 계속 믿음의 생각을 하고, 믿음의 말씀을 듣고, 믿음의 말을 하면 두려움과 공포는 사라질 것입니다. 때로 큰 문제를 만나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문제보다 크십니다. 환경을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보면 하나님은 우리의 실수와 실패도 다 좋은 체험으로 승화시켜주실 것입니다.
2. 말씀을 높이십시오.
본문 4절에서 다윗은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말씀을 찬송하올지라.” 여기서 ‘그 말씀’이란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을 의미합니다. 다윗은 자신이 약해지고 흔들릴 때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생각하고 용기를 얻었습니다. 우리도 말씀을 앞세우고 말씀을 높이는 삶을 살면 우리는 어떤 시련이나 어떤 사람의 말에도 흔들리지 않고 살 수 있습니다.
사람이 언제 가장 많이 불안에 빠집니까? 자신의 단점을 보였을 때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나에 대해 어떻게 말할까?”하는 염려를 할 때 가장 많이 불안에 빠집니다. 그러나 나의 단점을 보여주는 것이 인간관계에서 꼭 마이너스만은 아닙니다. 그것 때문에 나와 상대방은 더 조심하게 되고, 더 성숙하게 될 수 있습니다. 또한 대적은 나의 단점을 보고 방심하기 때문에 승리의 기회는 더 커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단점 노출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우리는 남의 시선에 내 영혼을 맡기지 말고, 남의 말에 내 영혼을 맡기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전폭적으로 신뢰하되 사람의 말은 가려서 들으면 됩니다. 사람의 말이 얼마나 곡해되는지 모릅니다(5절). 사단의 장기가 사람 사이의 말을 곡해하는 것입니다. 그 곡해한 말에 내 영혼이 흔들릴 필요는 없습니다.
오해가 심할 때는 변명도 필요 없고, 핑계도 필요 없고, 설득도 필요 없습니다. 그때에는 내 입과 귀에 하나님의 말씀이 가득 차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오해를 풀 수 있는 기회를 주시고, 우리의 영혼은 더욱 빛나게 될 것입니다.
전자제품이 작동하려면 전류가 입력단자로 들어가 전선을 따라 순환하고 출력단자로 나오는 일이 계속되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의 영혼을 활력 있게 만드는 영적 전류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때 말씀의 입력단자는 귀이고, 출력단자는 입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귀로 들어가게 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입으로 말씀이 나오게 하면 그 사람의 영혼에 불이 켜지면서 가장 활력이 넘치는 성령 충만한 영혼이 될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 입으로 무엇을 자랑하는가 하는 것에 그 사람의 사람됨이 나타나 있습니다. 가끔 보면 시시한 것을 자랑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열등감의 표시로 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자랑하고 말씀을 높일 때 사람들은 우리의 영혼의 무게를 느끼게 됩니다. 그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높이는 사람은 결코 사람의 말에 비천하게 되지 않을 것입니다.
3. 눈물을 많이 흘리십시오.
본문 8절 말씀을 보십시오. “나의 유리함을 주께서 계수하셨으니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이것이 주의 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나이까.”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환난을 하나까지 다 세시고, 자신의 눈물 한 방울도 주의 병에 담을 정도로 헛되게 하지 않으신다고 고백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다윗의 환난과 눈물을 다 기억하십니까? 큰 상급으로 갚아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룩한 눈물을 많이 흘려야 합니다.
눈물에는 거짓과 헛됨이 없습니다. 눈물을 흘린 만큼 상처 치유의 역사가 나타나고, 사람을 움직이고, 하나님을 움직일 수 있습니다. 오늘날 가장 큰 문제는 눈물이 마른 것입니다. 우리는 눈물이 있는 교회, 눈물이 있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한 눈물이 있어야 하고, 어려운 이웃을 위한 눈물이 있어야 합니다. 선교사들을 위한 눈물이 있어야 하고, 나의 죄 때문에 흘리는 눈물이 있어야 하고, 주님의 은혜를 생각하는 눈물이 있어야 합니다. 그 눈물은 한 방울도 헛됨이 없이 주님의 눈물 병에 담기고, 결국 그 눈물 후에 기쁨으로 단을 가지고 돌아오는 역사가 있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셨습니다. 그 선언이 있기까지 주님이 흘렸던 피와 땀과 눈물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은 정말 행복하게 사셨습니다. 주님은 “내가 이 일을 원한다!”는 삶을 살지 않고 “하나님이 이 일을 원하신다!”는 삶을 사셨습니다. 그래서 피와 땀과 눈물이 있었지만 그래도 가장 행복하게 사셨습니다.
특별히 눈물은 노력을 상징합니다. 우리는 최선을 다해 노력해야 합니다. 행복은 눈물에 비례합니다. 게으른 사람은 행복할 수 없습니다. 땀과 눈물을 가진 사람은 행복하게 될 것이고, 이미 행복한 사람입니다.
성공자와 실패자의 가장 큰 차이는 무엇일까요? 사실 성공자와 실패자는 학력, IQ, 성격 등에서 별로 큰 차이가 없습니다. 진짜 큰 차이는 생각과 사는 태도에서 차이가 납니다. 게으르면 대개 실패하고, 부지런하면 대개 성공합니다.
성공자는 기도실과 연구실도 좋아하지만 대개 사람도 잘 챙깁니다. 부지런히 사람에게 관심을 표합니다. 보통 사람은 귀찮아서 안 합니다. 그런데 성공의 기회는 대개 다른 사람을 통해서 오기 때문에 사람에게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대화가 서투르면 이메일을 이용하면 됩니다. 열심히 나의 팬을 만들어야 합니다. 인맥이 참 중요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무엇이든지 노력과 관심이 없으면 성공할 수 없습니다. 몸도 부지런해야 하지만 머리도 부지런해야 합니다. 열심히 노력하고 연구해서 자신의 강점을 키우고, 핵심역량을 키워야 합니다. 내가 공동체를 위해 어떤 성과를 낼 것인가를 생각하고, 미래를 읽어내는 안목을 키우고, 미래에 내가 어떤 위치에 설 것인가에 대한 그림을 계속 그려야 합니다.
때로는 자기 마케팅도 필요합니다. 자기만의 노하우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내가 거룩한 사역에 공헌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가, 그리고 실제로 공헌하고 있는가?”를 항상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 모든 일에 눈물이 있어야 합니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살면서 행운이 찾아오기를 바라지 말아야 합니다.
특별히 우리는 새벽 시간의 정복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루의 첫 시간을 말씀과 기도로 시작하면서 하나님께 매달리면 하나님께서 자기 마케팅 전략도 알려주실 것이고, 자기만의 노하우를 가지는 길도 보여주실 것이고, 성공의 중요한 자산인 온유함과 담대함도 주실 것이고, 인맥도 만들 수 있는 지혜를 주실 것입니다. 신맥이 튼튼하면 인맥은 반드시 따라올 것이고, 성공의 길과 자기 극복의 길도 활짝 열릴 것입니다.
4. 승리를 확신하십시오.
다윗은 어떤 환경에서도 하나님의 도우심을 확신하고 승리를 확신했습니다. 본문 9절 말씀을 보십시오. “내가 아뢰는 날에 내 원수가 물러가리니 하나님이 나를 도우심인 줄 아나이다.” 우리가 성경 지식은 잘 몰라도 “하나님은 나를 도와주실 것이고, 나는 반드시 승리할 것이다!”라는 확신만은 잃지 말아야 합니다.
마귀의 가장 큰 일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마음에 패배감을 심는 일입니다. “너는 이제 안 된다! 너는 이제 희망이 없다. 뒤에서 다 너를 욕한다. 사는 게 사는 게 아니다.” 그 마귀의 속삭임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생각하고 믿음으로 고백해야 합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아직도 남은 것이 있다! 아직도 내게는 소중한 것이 있다! 가진 것이 없을 때 성공하면 진짜 성공이다. 진짜 성공을 이뤄보자! 하나님! 저에게 믿음과 용기와 지혜를 주소서!” 재주도 중요하고, 수단도 중요하고, 인맥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확신입니다.
저는 대학교 4학년 때까지 시선공포증 환자였고, 말더듬이였습니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설교자가 됩니까? 지금 유명한 설교가들 중에는 어렸을 때에 웅변을 하던 사람들이 많습니다. 같은 말을 해도 웅변을 하는 사람이 말하면 가슴이 찌릿찌릿 합니다. 믿음이 더 생기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말더듬이가 하면 있던 믿음도 답답해지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하나님께서 도와주시니까 설교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만나는 사람마다 “목사님이 말을 더듬었다는 것이 도저히 믿기지 않아요.”라고 말합니다.
말을 더듬으면 어떻습니까? 말은 잘 못해도 거짓말은 안하면 됩니다. 때로는 말을 잘하는 사람도 말을 더듬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방언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화려한 말이 아닙니다. 화려한 말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지만 하나님의 마음은 움직일 수 없습니다. 말은 못해도 “감사합니다. 잘했습니다. 사랑합니다”라는 천국 방언을 잘하면 얼마든지 우리는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독일의 대표적인 작가 헤르만 헤세는 어렸을 때 자폐증 환자였습니다. 성인이 되어서도 극도의 신경쇠약과 언어장애로 시달렸습니다. 그 고통을 통해서 더욱 아름다운 글을 쓸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못한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부자의 꿈을 미리 포기하고 “부자가 되는 것은 나의 사명이 아니다!”라고 단정하지 말아야 합니다.
남 앞에 서면 얼굴이 붉어지는 증세를 적면증이라고 합니다. 저도 약간의 적면증이 있습니다. 적면증이 있는 사람은 대개 심장이 약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도와주시면 약한 심장도 강심장으로 만들어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패배를 운명처럼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얘기를 들어보면 맞는 얘기입니다. 반대로 성공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얘기를 들어봐도 맞는 얘기입니다. 다 맞는 얘기라면 우리는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나가야 합니다. 성경은 일관적으로 하나님의 자녀는 성공할 수 있다고 합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그 말씀을 깊이 새기고 어떤 일이 있어도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인내하고 나가면 축복의 때는 반드시 찾아오게 됩니다. 그때를 상상하면서 계속 준비하고 전진해야 합니다. 넘어졌을 때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스키를 탈 때 한두 번 넘어졌다고 포기하면 상급자가 될 수 없습니다. 넘어지면 더 큰 희망을 가지고 스키를 신어야 합니다. 말을 탈 때 한번 낙마했다고 포기하면 말을 잘 탈 수 없습니다. 그때 더 큰 희망을 가지고 말 등으로 올라타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온갖 패배의식을 버려야 합니다. 자신을 놀라운 가능성을 가진 존재라고 믿어야 합니다. 스스로 안 된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시면 무엇이든지 될 수 있고, 무엇이든지 얻을 수 있다고 믿어야 합니다.
5. 범사에 감사하십시오.
본문 12절 말씀을 보십시오.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서원함이 있사온즉 내가 감사제를 주께 드리리니.” 다윗은 고통 중에서도 한 가지 서원을 했습니다. 그것은 “이제 어려움이 있어도 블레셋 땅으로 가지 않고, 무엇보다 감사하는 삶을 살겠다”는 서원이었습니다.
사람의 상처를 아물게 하고, 수치심을 덮어주고, 불행한 생각의 바이러스를 박멸하는 가장 위대한 명약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용서와 감사입니다. 그래서 행복하게 사는 사람들을 보면 대개 감사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매력 없는 사람은 핑계하고 불평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식으로 살면 주변 사람들이 다 도망가 버리고 그러면 성공할 수도 없고 행복할 수도 없습니다. 반면에 이 세상에서 제일 매력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남을 높여주고 범사에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한 사람, 한 사람 내 곁으로 몰려들게 될 것입니다.
요새 성공하겠다고 성공비결을 찾고 성공강연을 듣지만 어떤 놀라운 성공비결보다 더 중요한 것이 범사에 감사하는 삶입니다. 이제 범사에 감사하는 마음을 훈련하십시오. 그처럼 감사하는 삶을 체질화시킬 때 우리의 영혼은 다윗처럼 견고한 영혼이 될 것입니다.
6.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십시오.
본문 13절 말씀을 보십시오. “주께서 내 생명을 사망에서 건지셨음이라 주께서 나로 하나님 앞(coram deo), 생명의 빛에 다니게 하시려고 실족치 않게 하지 아니하셨나이까.” 왜 하나님께서 다윗을 블레셋에서 극적으로 건져주셨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빛 된 삶을 살라는 뜻이었다고 다윗은 고백하고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까? 이제 구원받은 자로서 하나님 앞에서 헌신된 삶을 살라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바로 거기에 자기 극복의 가장 위대한 길이 있습니다. 자기를 극복하는 가장 위대한 길은 “나는 나를 극복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자신을 하나님께 온전히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 헌신이 빠진 자기 극복은 니체의 초인사상과 다를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진짜 신앙은 ‘자기 극복’에 있지 않고 ‘자기 헌신’에 있습니다. 결국 자기를 헌신하는 자가 자기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왜 제가 선교와 구제를 강조합니까? 선교사를 도우면서 자기 자신도 돕게 되기 때문이고, 이웃을 행복하게 하면서 자기 자신도 행복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에 저희들이 보낸 컴퓨터 20대와 여러 기자재가 몽고에 잘 도착했다는 임병철 선교사님의 연락을 받았습니다. 그 일을 위해 정길진 목사님이 많이 수고를 하셨습니다. 그때 컴퓨터 세팅을 위해 여러 사람들이 밤까지 세웠지만 얼마나 행복해하면서 했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지난 한달 반 동안 임병철 목사님이 기도제목으로 내놓고 가신 몽골 선교훈련센터 차량을 위해서 후원금을 모금하기 시작했는데 지금까지 딱 한분만 참여하셨습니다. 다른 기자재 후원을 위해서는 많이 참여했는데 차량의 경우에는 너무 금액이 크다고 생각하니까 아예 참여조차 하지 않고 있습니다. 작은 정성도 괜찮습니다. 성심성의껏 참여하시면 됩니다.
지난주 온누리 교회에서 고(故) 김사무엘 목사님 1주기 추도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때 하용조 목사님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어느 날, 김사무엘 목사님이 자신에게 물었다고 합니다. “목사님! 어떻게 하면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설교를 잘 할 수 있을까요?” 그때 하 목사님이 대답했다고 합니다. “김 목사님! 목사님은 설교하실 때마다 ‘선교, 선교’하는데, 이제 가끔만 말씀하세요. 성도들이 부담스럽게 생각해요.” 하 목사님의 얘기는 김 목사님이 잘못했다는 얘기가 아니라 그만큼 김 목사님이 선교의 열정이 있었다는 것을 반어법으로 표현한 것이었습니다.
사실 선교는 내 호주머니를 비우는 일과 관련되기 때문에 듣기에 부담스럽습니다. 그래도 선교에 동참하는 것을 축복으로 알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이 자신의 것을 거룩한 일에 드릴 때처럼 행복한 때는 없고, 충만해질 때는 없습니다. 결국 자기 헌신은 자기 극복을 위한 최선의 길입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자기 헌신이 없는 자기 극복’은 일종의 무신론이고 기복주의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불행하게 되는 이유는 자기를 높이는 것을 자기 극복의 길이라고 오해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부귀영화를 가진 사람은 다 자기 극복의 천재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사람이 살면서 사닥다리를 한 계단씩 올라가는 것도 필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현재의 그 단계에서 헌신하는 것입니다. 얼마 후에 자기의 역량이 커져서 사닥다리를 또 한 계단 올라가면 또 그 단계에서 헌신해야 합니다.
목회자가 50명 교회를 100명 교회로 만들고, 100명 교회를 1000명 교회로 만드는 것은 성취감은 주겠지만 그것은 진정한 자기 극복의 길이 아닙니다. 사업을 키우고 아파트 평수를 늘리는 것도 자기 극복의 길이 아닙니다. 큰 꿈과 비전을 가지고 나가면서도 현재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 하나님께 자기를 드릴 줄 아는 것이 자기를 극복한 것입니다.
우리는 가끔 자신의 모습을 보고 실망할 때가 있습니다. “아니, 내가 신앙인으로서 이런 모습을 보이면 되나?” 그러면서 열심히 자기 수양을 합니다. 감정을 누르고, 욕망을 누르고 삽니다. 그리고 그것을 신자 됨의 표시로 생각합니다. 그러면 일시적인 성취감이 있을지라도 한번 감정과 욕망이 폭발하면 사람 무너지는 것은 순식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스스로 무엇을 하겠다고 하기보다 시시때때로 하나님 앞에 우리를 드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때로 단점이 노출되고, 수치심이 클 때도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드리면 그때가 오히려 영혼이 성숙해지는 기회가 됩니다. 그때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나는 예수님이 없으면 희망이 없구나!” 그때 우리는 주님의 보혈의 공로가 얼마나 소중한지 느끼게 되고, 보혈의 공로를 의지하며 나 자신보다 주님을 향해 조금 더 나가게 될 것입니다.
그때 많은 사람들의 시선에 몰입했던 내가 주님께 더 몰입하게 됨으로 넉넉한 마음을 가지게 되고, 또한 우리 등 뒤에서 힘주시는 주님의 힘을 의지해서 주님만 바라보고 주님의 사명을 향해 달려갈 수 있게 됩니다. 그처럼 내 뜻이 사라지고 주님 뜻이 부각되고, 세상과 나는 사라지고 구속한 주님만 보이게 될 때 우리의 영혼은 무적의 영혼이 될 것입니다.
어떤 시선공포증 처녀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선을 보기 전에 한 상담학자를 찾았습니다. “선생님! 저는 처음 가는 장소에서나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는 불안해서 견딜 수 없습니다. 치료 방법이 없습니까?” 그런 상담을 하면서도 그녀는 불안한 기색으로 끊임없이 흠짓흠짓하고, 눈을 깜빡거리고, 얼굴을 들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상담자는 시선공포증 극복법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래서 매일 아침과 저녁에 3분씩 거울 앞에 서서 거울에 비친 자기 얼굴을 똑바로 주시하라고 했습니다. 자기의 얼굴이라면 시선을 돌리지 않고 똑바로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잘 하는 요령으로 처음에는 자기의 이마를 보다가 익숙해지면 자기의 눈을 응시하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계속하니까 남을 얼굴을 보는 일이 비교적 편해졌다고 합니다. 사람이 거울을 바라보고 자기를 바라봐도 이렇게 변할 수 있는데 영적인 눈을 크게 뜨고 하나님을 바라보면 무슨 두려움이 있겠습니까?
우리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불완전하지만 하나님은 완전합니다. 어차피 우리는 넘어지고 깨어지고 실망하고 낙심에 빠지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그처럼 우리는 완전한 삶을 살 수는 없지만 완전하신 하나님께 나아갈 수는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완벽함은 주시지 않았지만 완벽하신 주님을 향해 나갈 수 있는 믿음을 주셨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누구보다 축복받은 존재입니다. 항상 주님만 바라보고 주님의 뜻과 사명에 자신을 온전히 드림으로 자기를 극복하는 복된 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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