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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주기도문 3강

by 【고동엽】 2021. 11. 27.

양식, 용서, 악과 시련을 위한 청원

땅에 임하는 하나님 나라의 필수 활동을 위한 청원

 

하나님 나라는 땅에 이뤄지는 정치적 공간적 영적 실재다. 그것은 부단한 음식을 먹고 부단히 용서받고, 부단히 죄와 유혹에 시달리는 피조물 인간을 구원하는 나라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는 인간의 능동적 참여와 순종으로 인간화되는 나라다. 인간의 가장 심층적 필요에 응답하는 나라다. 인간의 가장 심층적 필요는 양식, 용서, 죄와 유혹, 시련으로부터의 해방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기독교를 가공의 세계를 향한 모종의 타계 여행 같은 것으로 여기는 관념이 있으나 이는 주기도가 엄연한 현실 문제로 내려가 대담하게 하나님께 양식을 구하는 지점에 이르면 설 땅을 잃게 된다. 하나님께 양식을 구하는 이 행위는, 우리의 삶은 우리의 양식처럼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선물이라는 사실을 매일 같이 우리에게 상기시켜준다. 매일같이 우리는 하나님께 의존해 살아간다. 만일 하나님이 만나를 선물로 보내시지 않으셨더라면 굶어죽고 말았을, 광야의 그 히브리인들처럼(출 16:1-36),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매일의, 평범한, 필수적인 선물들이 없다면,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다. 그래서 우리는 담대히 하나님께 일용할 양식을 구한다.

천국과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들 와중에서, 이제 이 기도는 우리에게 우리는 밥을 먹고 사는 육신적인 존재라는 점을 상기시켜준다. 구원이란 우리의 삶은 선물이며, 또한 우리의 삶은 하루하루 밥에 의존하고 밥으로써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이 기도는 우리에게 밥을 하나님의 선물로 알라고 가르친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먹이시기를 기뻐하시는 분이다: 예수께서 배에서 내려서 큰 무리를 보시고, 그들이 마치 목자 없는 양과 같으므로,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다. 그래서 그들에게 여러 가지로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날이 이미 저물었으므로, 제자들이 예수께 다가와서 말하였다. "여기는 빈 들이고 날도 이미 저물었습니다. 이 사람들을 헤쳐, 제각기 먹을 것을 사 먹게 근방에 있는 농가나 마을로 보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제자들이 그에게 말하였다. "그러면 우리가 가서 빵 이백 데나리온 어치를 사다가 그들에게 먹이라는 말씀입니까?"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에게 빵이 얼마나 있느냐? 가서, 알아보아라." 그들이 알아보고 말하였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명하여, 모두들 떼를 지어 푸른 풀밭에 앉게 하셨다. 그들은 백 명씩 또는 쉰 명씩 떼를 지어 앉았다. 예수께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들어서, 하늘을 쳐다보고 축복하신 다음에, 빵을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시고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게 하셨다. 그리고 그 물고기 두 마리도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 주셨다. 그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마가복음 6:34-42)(먹이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게 만드는 설교-오병이어 설교, 박득훈 목사).

 

예수는 배고픈 이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분이다. 굶주림을, 지금 여기로 뚫고 들어오는(inbreaking) 하나님 나라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하시는 구원자이시자, 우리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 주인장이시며, 우리에게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고 명령하시는 스승이시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스라엘은 자신의 메시아를 식탁에서 알아보게 될 것이라고 말했었다. 메시아가 오시면, 굶주렸던 이들이 배불리 먹게 될 것이다. 고대했던 하나님 나라는 굶주린 이들, 잊혀진 이들을 위해 베풀어지는 식사다. 이사야 선지자는 말한다, 그 날 온 땅을 향해 한 커다란 외침이 터져 나올 것이다: 너희 모든 목마른 사람들아, 어서 물로 나오너라. 돈이 없는 사람도 오너라. 너희는 와서 사서 먹되, 돈도 내지 말고 값도 지불하지 말고 포도주와 젖을 사거라. (이사야 55:1)

 

자신의 한 설교에서 어거스틴은 다음과 같은 취지의 말을 한 바 있다. 일요일 날 제단에서 빵을 앞에 두고 기도하는 사제는 그 기도를 통해 한 평범한 빵을 기이하고 비범한 성체로 변모시키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 감사기도(Prayer of Thanksgiving)를 통해 그 사제는 빵이 실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사실을, 즉 거룩한 성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 기도에 참여하는 이들 중에 이렇게 말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저기 제단 위의 빵은 제가 오늘 아침 식사 때 먹었던 빵과 별 다를 바 없어 보이는데요. 아침 식사 때는 저는 그 빵을 거룩한 것으로 생각하지 못했는걸요.”

“그렇습니다,” 교회는 말한다. “바로 그 점이 핵심입니다. 일요일 날 교회에서 빵을 앞에 두고 이런 기도를 드린 후에는, 이제 아마 당신은 월요일 날에는 당신의 빵을 다른 방식으로 먹게 될 것입니다.”

이 기도를 통해 교회는 우리에게 우리는 약하고 의존적인 존재라는 것,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보살피신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주시는 분이다. 심지어 빵처럼 지극히 현세적인 필수품도 말이다.

그러나 아침식사 때의 빵은 성만찬 때 우리 주님의 몸인 그 빵과 다르다. 주님의 만찬 때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몸에 참여자들이 되는데, 이는 세상으로 하여금 세상은 하나님의 현존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음을 알게 하려는 것이다. 우리는 세상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모험 속으로 포섭 당한다. 이 식사를 통해 하나님은 우리를 신비한 끈으로 서로서로 연합시키신다. 우리는 이를 신비라고 부르는데, 이는 이 식사가 우리의 지성을 좌절시키기 때문이어서가 아니라, 이 식사를 통해 구현되고 현현되는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그 가차 없는 사랑을 우리가 보다 잘 이해하면 이해할수록, 그러한 사랑이 일깨워주는 신비가 보다 더 깊어가기 때문이다.

성만찬 때 우리는 우리가 감히 형언할 수 없는 실재와 마주하게 된다. 이는 단순히 어떤 고상한 사상이나 종교적 성향의 문제일 수 없는, 너무도 참된 현실이다. 이 믿음은 빵과 포도주를 통해 역사한다. 이 하나님은 우리의 삶의 모든 것을, 심지어 가장 현세적이고 평범한 것도 하나님의 현존의 표지들로 바꾸어 놓으신다. 따라서 하나님에 대해 무엇을 믿느냐는 물음을 받을 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흔히, 전에는 서로 낯선 이들이었던 일단의 사람들이 성만찬이라고 불리는 한 가족 식탁에 둘러 앉아 먹는 모습을 가리키곤 한다. 또 우리는 사람들이 어떤 강물 속에 잠겨 들어가는 모습, 자신의 옛 자아들에 대해 죽고 새로운 창조물로서 일어서는 모습, 즉 세례를 가리키곤 한다. 이러한 식탁, 빵 덩어리, 침수 등은 모두 우리 주님이 이 세상 속으로 침입해 들어오시는 방식, 이 세상을 자신의 것으로 주장하시는 방식의 표현들이 된다.

부활의 날, 두 의기소침한 제자들이 엠마오라는 한 작은 마을을 향해 함께 길을 가고 있었다. 한 낯선 이가 길에서 그들을 만나 동행했는데, 그는 그들에게 대체 왜 그렇게 낙담에 빠져 있느냐고 물었다. “아니, 당신만 이번 주말에 예루살렘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고 있단 말이오?” 그리고는 그들은 그에게 삼일 전에 일어난 예수의 죽음 사건에 대해 들려주었다: 그리고 그 두 길손은 자기들이 가려고 하는 마을에 가까이 이르렀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더 멀리 가는 척하셨다. 그러자 그들은 예수를 만류하여 말하였다. "저녁때가 되고, 날이 이미 저물었으니, 우리 집에 묵으십시오." 예수께서 그들의 집에 묵으려고 들어가셨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시려고 앉으셨을 때에, 예수께서 빵을 들어서 축복하시고, 떼어서 그들에게 주셨다. 그제서야 그들의 눈이 열려서, 예수를 알아보았다. (누가복음 24:28-31)

 

하나님을 만나고자 할 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높은 산으로 올라가거나, 자신의 정신을 샅샅이 분석하거나, 계시를 기다린다며 손을 꼭 맞잡고 눈을 감고서 “쿰 바 야”(굴라(Gullah)어로서 ‘여기 오소서’라는 뜻--역주)를 노래하거나 하지 않는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여 함께 빵을 뗀다. 이것이 그분이 우리를 만나시기로 택하신 곳이며, 우리의 눈이 열려 우리가 그분을 알아보는 곳이다. 우리가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은 어떤 생존전략으로서가 아니다. 아무리 많은 빵이 우리에게 있다고 한들, 우리가 그것 때문에 생존하는 것은 아니다. 매일의 양식을 구하는 것은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매일의 현존을 구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저 일용할 양식을 구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라. 이 “일용할”을 보다 정확히 번역하자면 ‘충분한’이 될 것이다. 이 일용할(충분한) 만큼 이상의 것을 하나님께 구하는 것은 자칫하면 우리를 은혜로운 하나님의 뜻과 역사(役事)만을 의지해 살아가는 사람들답지 못한 이들로 만들 수 있다. 만나가 광야에서 주어졌을 때, 그 히브리인들은 그 날 하루 필요한 만큼의 만나만을 거둬들일 수 있도록 허락 받았다(출 16:16). 우리는, 날마다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하나님께 날마다 나아가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여기 이렇게 있는 것, 우리 삶에 의미와 내용이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이 날마다 주시는 선물 때문이라는 매일의 깨달음 속에 살아야 한다.

 

일단의 학생들이 한 트라피스트 수도원에서 한주를 보내고 있었다. 저녁 식사 때, 침묵 가운데 그 훌륭한, 맛난 빵을 먹다가, 그만 한 학생이 자기도 모르게 말을 내뱉었다, “와--, 이 빵 우리가 만든 건가, 아님 누가 우리에게 준 건가?”

한 수도승이 대답했다, “그럼요, 누가 우리에게 준 거죠.”

우리는 하나님에게--혹은, 아무튼 다른 누구에게--의존하는 것을 혐오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 빵을 구하는 기도를 드릴 때 우리는, 우리가 자애로운 하나님께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며, 또한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우리가 모르는, 우리가 감사할 수 없는 어떤 낯선 이들의 노고와 희생과 선물 없이는 어떤 빵도 우리 식탁에 오를 수 없다.

우리 사회는 우리에게 자족적이고,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사람이 되라고 가르친다. 이런 사회에서 주기도는 너무도 분명히 우리의 자연적 성향을 거스르는 것이기에, 우리는 이 기도를 매일같이 드릴 필요가 있다. 또 우리에겐 매일같이 일용할 양식이 필요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러한 깨달음에 있어서 실제로 배고픈 이들, 정말로 가난한 이들이 우리보다 앞서 있음을 안다. 가진 것이 너무 적은 이들은 우리는 전적으로 의존적인 존재라는 것, 우리는 “오늘 주옵소서”라고 기도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더 잘 깨닫는다. 그런 이들은 다른 이들과 더불어 기도하는 것, 오직 다른 이들이 주어야만 하는 선물들을 위해 기도하기를 배울 수 있었는데, 이는 그들의 가난이 그들에게 우리의 삶은 오직 선물로서 받는 것임을 가르쳐주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아마 예수께서 가난한 이들과 배고픈 이들이 당신의 나라의 중심에 있다고 선포하신 이유일 것이다: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너희 가난한 사람들은 복이 있다.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 너희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 너희가 배부르게 될 것이다. (누가복음 6:20-21)

 

주기도의 이 지점에서 우리는 마땅히 정직한 고백을 털어놓아야 한다. 회피하지 말고 우리는 이를 대면해야 한다. 사실 우리들 대부분은 일용할 양식에 대해 그다지 많이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들 대부분에게 있어서, 적어도 이 책을 읽을 독자들의 경우, 양식은 절박한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들 대부분은 양식이 적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너무 많아서 죽어간다. 자기 내면의 공허함을 끝없는 소비를 통해 채워보려 하면서 말이다. 우리는 분명 부자들이고, 앞서 살펴보았듯, 성서는 부자를 큰 곤경에 처한 이들로 그린다.

온두라스(Honduras) 공화국의 한 작은 마을에 사는 한 여인은 매일같이 힘겹게 산에 올라 땔감용 나뭇가지들을 모아서는 등에 지고 다시 내려온다. 그리고는 다시 산으로 올라가 요리하는데 필요한 물을 길어온다. 그리고는 그녀는 남편이 재배한 옥수수를 낟알 하나하나를 아끼며 맷돌로 간다. 올해 수확한 옥수수로 겨울을 날 수 있기를 희망하면서. 그녀는 손바닥으로 일일이 토티아(tortillas)를 만든다. 그리고는 그것들을 냄비로 구어서는 자신의 자녀들 하나하나에게 먹인다. 그것은 그날 그들의 쓰린 위를 채워줄 유일한 음식이다. 이 여인은 분명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라는 기도를 우리와 다르게 기도할 것이다.

과소비의 문화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이런 기도를 드릴 수 있는 은총을 구해야할 것이다, “충분한 것을 충분한 것으로 알 수 있는 은총을 주옵소서”, “세상이 우리에게 너무도 많은 것으로 유혹할 때 우리로 하여금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이런 기도를 드릴 때, 우리는 “기본으로 돌아가는” 것을 배우게 될 것이고,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을 원하는 법을 배우게 될 것이다. 그래서 어느 날 우리는 바울처럼 이렇게 말하게 될 것이다: 나는 어떤 처지에서도 스스로 만족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나는 비천하게 살 줄도 알고, 풍족하게 살 줄도 압니다. 배부르거나, 굶주리거나, 풍족하거나, 궁핍하거나, 그 어떤 경우에도 적응할 수 있는 비결을 배웠습니다. 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빌립보서 4:11-13)

 

 

수세기 전 닛사의 그레고리(Gregory of Nyssa)는, 우리는 우리에게 많은 것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주기도에서 우리가 구하도록 허락받은 것은 빵 같은 기본적인 것이 전부라는 사실에 주목하고 놀란 바 있다. 우리가 구하도록 허락받은 것은 가축 떼도 비단 옷도 아니다. 높은 지위도 기념비도 조상(彫像)도 아니다. 다만 빵이 전부다.

주기도문에서 우리는 나의 양식을 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양식을 구하는 것이다. 빵은 공동체적 산물이다. 빵은 혼자 힘으로 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이오와의 농부들, 뉴욕의 제빵업자들, 당신 사는 도시의 배달 트럭 운전사들, 빵은 이들 모두의 공동작업의 산물이다. 누구도 혼자 힘으로 먹고 살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이는 빵이 공동체적 산물임을 의미할 뿐 아니라, 또한 빵은 공동의 책임이라는 점을 의미한다. 성 바실(St. Basil the Great)은 한 설교에서, 나의 소유물은 결코 나만의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말했다. 특히, “일용할 양식” 이상의 것들은 더더욱 그렇다.

 

당신의 집에서 썩고 있는 그 빵은 굶주린 이들의 것이다. 당신의 침대 밑에서 곰팡내를 풍기고 있는 그 신발들은 신발 없는 이들의 것이다. 당신의 옷장에 쌓여있는 그 옷들은 헐벗은 이들의 것이다. 당신의 금고에서 값이 떨어지고 있는 그 돈은 가난한 이들의 것이다!

 

우리의 빵은 우리가 쌓아둘 수 있는 우리의 소유물이 아니다. 우리의 빵은 우리의 형제자매들의 것이다. 빵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다른 많은 좋은 선물들처럼, 우리는 이 선물도 우리의 이기심을 가지고 왜곡시킨다. 이 때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은 우리 자신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하는 것이며, 빵의 선물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시는 요구를 인정하는 것이며, 우리가 우리 이웃의 필요에 대해 갖는 책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당신이 이 기도를 배운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당신의 삶을 다른 이들에게 내어주는 것이라는 점에 주목하라. 거슬리는 말로 들릴 수 있겠으나, 실은 기독교는 당신의 돈에 대한 것이며, 당신의 재정생활에 대한 것이다. 구원은 물질적인 것이다. 영성은 물질적인 것들에 대한 것이며, 우리는 돈보다 더 “영적인” 것은 없다고 믿는다. 이 기도를 기도하기를 배움으로써 우리는 우리의 돈은 “우리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배운다. 이렇게, 우리가 우리의 가진 것을 나누라는 요구를 받을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소유물은 애초에 우리의 것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를 시련의 시기에서 구하여 주시고 악에서 건져주소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폭풍과 격랑으로부터 안전한 포구가 아니다. 우리는 약속된 하나님 나라의 지체들이지만, 지금 우리는, 그리스도와 더불어, 힘센 권세들과 전쟁을 벌이고 있다. 우리는 구원 받기를 기도하는 이들이다: 예수께서 배에 오르시니, 제자들이 그를 따라갔다. 그런데 바다에 큰 풍랑이 일어나서, 배가 물결에 막 뒤덮일 위험에 빠지게 되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주무시고 계셨다. 제자들이 다가가서 예수를 깨우고서 말하였다. "주님, 살려 주십시오. 우리가 죽게 되었습니다."

(마태복음 8:23-25)

그리스도인들은 구원 받기를 기도하는 이들이다. 하나님께 구원을 청한다는 것은, 우리의 자기이해를 변화시켜달라거나, 자신에 대해 새로운 느낌을 갖게 해달라거나, 삶의 정열이 생겨나게 해달라거나 하는 기도가 아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는다는 것이란 입양 받는 것(세례)이며, 어떤 백성-이스라엘과 교회--의 지체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 백성의 지체가 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구원 받을 수 없었을 것이라고 정말로 믿는 이들이다.

따라서 당신이 돈을 어떻게 쓰고, 성생활을 어떻게 하고, 투표를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 교회가 의견을 갖고 있다는 것, 이것이 바로 구원이다. 당신은 그저 당신의 개인적 탐욕이나 방탕으로부터 구원받고 있는 것이 아니다. 당신은 지금 하나님의 백성의 한 지체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나를 구원해 주소서”라고 기도하지 않는다는 점에 주목하라. 우리는 “우리를 구원해 주소서”라고 기도한다. 물론, “우리” 안에는 “나”가 포함되어 있다. 우리가 “우리 아버지”라고 기도하며 이 기도를 시작했던 것처럼, 여기서도 우리는, 우리는 “나”를 넘어서는 어떤 큰 드라마 (즉, 구원)에 포함되어 있고, 이 드라마가 실은 내가 누구인지를 결정한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당신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삶이 변화되고, 징집되고, 뒤집어지고, 해독(解毒)된, 모든 시대 모든 성도들과 한 백성이 되는 것이다. 마태복음 8장의 그 제자들처럼, 우리는 모두 같은 배에 타고 있으며, 우리가 만들어내지 않은 어떤 풍랑을 만나 이미 저리 요동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한다, “주님, 우리를 구원해주소서!”(에베소서 6:18-20)

 

“구원해 주소서”나 “시련”이나 “건져 주소서”같은 단어들은 모두 위기에 처했을 때의 단어들이다. 이 단어들은 우리에게, 주기도를 기도한다는 것은 어떤 우주적 전쟁의 한복판에 던져지는 것을 뜻한다는 점을 일깨워준다. 주기도는 이 지점에서 사뭇 열기가 고조된다. 지금 이 세상은 크게 잘못된 세상이다. 이는 마치 무언가가, 누군가가 하나님을 거슬러 조직적인 반란을 일으킨 것과 같은 상황이다. 이 때 당신이 이 기도를 충실히 드린다는 것은, 또 당신 삶을 이 기도에 일치시키고자 애쓴다는 것은, 그 반란세력의 공격 대상이 되기를 자처한다는 뜻이다.

 

구원이, 우리를 괴롭히는 모든 것들에 대한 모종의 해결책으로 제시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외로운가? 그럼 예수께 나와 그 문제를 해결 받으라.” “알코올 중독자인가? 그럼 예수께 나와 그 중독으로부터 건짐 받아라.” “삶이 혼란스러운가? 그럼 교회에 와서 모든 해답을 얻으라.” 복음이 이런 식으로 제시되는 곳에서는 구원이란 당신이 가진 모든 문제들이 해결 받는 것, 당신을 괴롭히는 모든 것들이 고침 받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시련의 시기에 하나님께 구원과 구조와 도움을 청하는, 주기도의 이 간청은 우리에게,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이란 어떤 모험, 어떤 여정, 어떤 거대한 드라마 속으로의 참여를 의미한다는 점을 일깨워준다. 이 기도를 기도한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리스도의 백성으로 징집되지 않았더라면 갖지 않았었을 문제들을 우리가 갖기 시작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악의 권세들은 자신의 영토를 한 치도 쉽게 포기하려 하지 않는다. 구원 받고 있다는 말은 내가 하나님이 새롭게 탈환하신 영토가 된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이 악의 권세들과 싸움을 벌이시는 그 전쟁터가 된다. 이렇게, 이 기도를 드리는 일은 말하자면 전쟁에 참여하는 일이다(엡 6:10-13).

 

하나님께 “우리를 시련에서 구해주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께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에 맞서 일어난 그 권세들에 굴복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이다. 구원받는 자로서 당신이 대항해 싸워야할 대상은 단순히 당신의 개인적 결점이나 흠들이나, 당신의 사소한 유혹이나 허물이 아니다. 당신은 소위 “정사와 권세들”(the principalities and powers)과 맞서고 있는 것이다. 악은 거대하고, 우주적이고, 조직적이고, 교묘하고, 광범위하고, 실제적인 존재다. 악의 권세들은 결코 악한 모습이나 위압적인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나지 않는다. 악의 권세들은 언제나 자신을, 우리가 누려야할 자유의 모습으로, 혹은 우리가 따라야만 하는 필연성의 모습으로 가장하고 나타난다.

가령, “경제”는 하나의 권세이다. 우리는 소위 “경제”라고 불리는 어떤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실재가 존재한다고 믿게끔 교육 받아왔다. 이 “경제”는 우리 삶에 결정적 영향력을 행사하며, 우리를 기쁘게도 슬프게도 만들 수 있으며, 우리의 최고의 분투와 헌신을 받을 가치가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우리는 가끔 “월 스트리트가 결정했다”는 말을 듣기도 하고, 또 말하기도 한다. 이런 권세로 또 “인종”이 있다. 우리는 “인종”을 한 개인의 운명과 인생관을 결정하는 것으로, 모든 의미와 가치의 원천인 것으로 여긴다. “성”(gender)도 이런 권세다. 세상은 우리에게 이런 권세들에 대해서 우리는 다만 순응하고 적응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라크 전쟁 때 한 공중 폭격 후, 왜 그렇게 많은 사상자가 나왔어야했느냐는 질문을 받자 한 장군이 이렇게 답했다. “국가 안보가 그것을 요구했습니다.” 대화의 끝이었다. 이런 것이 바로 권세이다. “미디어”도 하나의 권세다. 겉보기에는 “미디어”는 나쁠 것이 없어 보인다. 어쨌거나 우리에게는 정보가 필요하지 않은가?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이 “미디어”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영상들, 사실들, 이름들, 장면들, 소리들을 퍼부어 대고. 그것들은 우리가 세상을 보는 관점을 결정한다. “미디어”는 우리에게 세상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무엇이 현실인지를 말해준다. 우리는 이를 “뉴스”(news)라고 부른다.

 

그러나 주기도를 기도한다는 것은 무엇이 현실인지를 놓고 벌이는 전쟁에 참여하는 것이다. 무엇이 정말로 “뉴스”인가? 누가 “실재”를 규정하는가? 우리는 어떤 메타포들과 이미지들을 통해 세상을 묘사할 것인가? 매주 대략 오천만 명의 미국인들이 교회 예배에 참석한다. 이 숫자에 비하면 한 주에 영화관에 가는 사람들의 수는 아주 소수다. 그러나 오늘 아침 조간신문을 펴보거나 아침 텔레비전 방송을 보면, 거기에는 교회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나오지 않는다. 이야기의 대부분은 영화나 영화 스타들에 대한 것이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할리우드가 예루살렘보다 중요하다고 믿게끔 만들어 버린다. “미디어”라는 권세는 이런 식으로 현실을 만들어 낸다. 지금 우리 삶은 미디어가 제공해주는 이미지들에 사로잡혀 있다. 우리는 미디어가 제공해주는 이미지들을 통하지 않고 스스로 세상에 대해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렸다. 그래서 이러한 “세력들”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우리에겐 어떤 초자연적인 세력의 간섭이 필요하다.

 

우리가 주기도를 기도하면 악마들이 들고 일어난다. “기존 세력들”(power that be)은 한 사람이 “우리 아버지...우리를 구원하소서”라고 기도하며 자기들이 묶어놓은 사슬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워지는 것을 참지 못한다. 당신도 경험을 통해 알고 있겠듯이, 거짓말은 가면이 벗겨지고 진상이 폭로되면 더욱 폭력적이 된다. 그러므로, 당신이 구원받기를 기도한다는 것, 시련의 때에 건짐 받기를 기도한다는 것은, 당신은 당신이 당신 자신의 운명의 지배자가 아니며, 세상에는 당신이 저항해야 하는 무언가가 존재하며, 이 세상과, 이 세상이 주는 보상은 충분하지 않으며, 당신은 지금 이 세상이 섬기고 있는 권세들보다 더 큰 어떤 세력을 섬겨야 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사단은 빛의 천사로 자신을 가장해서 나타나며, 자신의 가면이 벗겨지는 것에 저항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싸울 준비를 갖춰야 한다.

바울--성 바울--이 그리스도인이 된 후에 적은 이 고뇌어린 말들에 주목해 보라(로마서 7:15-20, 24)

 

이렇게 우리는 시련의 때에 구원 받기를, 악으로부터 건짐 받기를 간청한다. 분명, 이는 단순히 어떤 일련의 신조들을 긍정하는 것이나, 인생의 의미를 찾는 것보다 훨씬 더 흥미로운 무언가를 말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이러 저러한 신조를 믿는다는 것이 아니다. 물론 분명 우리는 매우 구체적인 삶의 방식들(ways)을 믿고 있는 사람들이지만 말이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그보다는, 나는 이러한 무시무시한 전투 중에 있기에 기도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배운 사람들 중의 하나가 된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인정한다는 것은, 카이사르가 아닌 다른 통치자에게 고개 숙이며, 우리의 안녕에 대해 미국 경제가 아니라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에 대향해 일어난 그 무시무시한 권세들에 우리가 위협을 가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갈등 중에 있는 이 창조세계를 포기하기를 거부하셨다. 대신, 하나님은 물과 성령으로 한 새로운 백성을 불러내셨다.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을 불러내셔서, 창조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섭리적 돌보심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는 예시로 삼으셨다. 하나님은 그저 세상을 창조해 놓으시곤 우리보고 알아서 하라고 하시며 어디론가 훌쩍 떠나버리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간섭하셨고, 창조의 일을 계속하셨고, 씨름하셨다. 지금 우리는 하나님이 악의 권세들과 싸움 하시는 곳에서 싸우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 전쟁이 결국 어떻게 끝날 것인지 분명히 알고 있지만--십자가는 창조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은 결코 꺾이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보여주었다--우리에겐 여전히 싸워야할 싸움들이 남아있다(로마서 8:31-39).

 

우리는 미래가 어떻게 될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미래가 누구의 손에 있는지는 알고 있다. 그것을 알기에, 우리는 투쟁 중에서도 인내할 수 있다. 우리는, 시간이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는 것을 알기에 우리는 시간을 가지고 일할 수 있다. 세상은 우리의 삶은 종결점인 죽음과 붕괴를 향해 지금도 돌진해가고 있다는 이야기에 입각해 살아간다. 그렇기에 세상은, 우리는 매분 매초를 의미 있게 만들기 위해 미친 듯이 열심히 일해야만 한다--왜냐하면 우리가 일해서 만들어내는 것들만이 의미 있는 것이기에--고 끊임없이 우리에게 말한다. 세상은 우리에게, 지금 우리는 끔찍한 혼란 상태에 살고 있고, 이 상황을 바로 잡아야할 책임은 우리에게 있고, 우리가 못하면 오직 절망만이 있을 뿐이라는 생각을 주입해 넣으려고 애쓴다. 세상은, 모든 고통과 혼란과 아픔은 우리 인간들의 근면한 노력과, 약물과, 경제발전과, 혹은 의학 기술 등으로 지금 해결되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절망뿐이라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렇게 우리로 하여금 인내할 수 있게 해주는, 시간을 갖고 일할 수 있게 해주는 이야기가 부재할 때 생겨나는 필연적인 결과가 바로 폭력이다(빌립보서 4:4-7).

 

 

주기도는 우리에게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알게 해준다. 우리는 악의 권세들이 우리를 절망이나 거짓된 희망 속으로, 미성숙한 결론이나 광적인 분주함 속으로 돌진하게 만드는 것을 거부한다. 우리는 문제를 해결하고 일을 성사시키고 완성시키는 일에 있어 서두르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세상에게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시간을 주셨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빵을 굽는 일은 시간과 인내, 점진적인 기술 습득이 필요한 일이다. 이 간청 바로 직전에, 우리는 일용할 빵을 만드는 인내를 달라고 기도했었다. 악의 권세들에 저항하는 일은 결혼을 하고, 가족을 이루고, 빵을 굽는 일 같은 그런 형태를 취할 수 있다--모두 공동의 노력, 시간, 인내, 자연적이지 않은 기술의 습득 등을 요하는 일들이다. 당신은 당신의 교회에, 당신이 악의 권세들에 저항하는 데에 필요한 군장(軍葬)을 갖출 수 있게 해달라고 마땅히 요구해야 한다.

현대세계에 인내는 너무나 찾아보기 힘든 덕목이기에, 또 우리는 악의 세력들에 포위되어 살고 있기에, 우리는 기도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를 악에서 구원하여 주소서.” 주기도의 다른 번역은 이 부분을 “우리를 그 악한 이(the Evil One)로부터 구원해 주소서”라고 옮기기도 하다. 이렇게 주기도는 이 세상에는 선한 하나님 나라에 대항하는 악한 모의가 존재한다는 것, 따라서 악의 인격적 화신(즉, 사단)의 존재도 우리가 얼마든지 생각할 수 있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준다: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으십시오. 여러분의 원수 악마가, 우는 사자 같이 삼킬 자를 찾아 두루 다닙니다. 믿음에 굳게 서서, 악마를 맞서 싸우십시오. (베드로전서 5:8-9)

 

하나님께 우리를 구원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은 그분께 대항하는 그 어떤 적보다 더 큰 존재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우리는 악의 세력을 인정하고 심각히 여겨야 하나, 그렇다고 너무 심각하게 여겨서는 안 된다. 아마 이것이 바로 주기도가, 비록 정직하게 시련이나 유혹이나 악에 대해 초점을 맞추고 있긴 하지만, 결코 사단의 이름을 언급하고 있지는 않은 이유일 것이다. 악은 위협적인 세력이긴 하지만, 그러나 패배한 세력이다. 격렬한 전쟁 중에 있지만, 그러나 우리는 이 전쟁의 승자가 누구인지를 이미 알고 있다. 악으로부터 구원받기를 기도한다는 것은 우리는 자신만의 힘으로는 악에게 저항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주기도는 참으로 정직한 기도다. 지금 우리 삶은 기존 세력들의 지배를 받고 있다. 약한 존재들로서 우리는 도움의 손길을 찾고, 그 때 우리는 구원을 받는다. 알코올 중독자 치료모임(Alcoholics Anonymous)의 방식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닌가? “우리는 우리 자신보다 더 큰 어떤 힘을 향해 도움을 청해야 한다." AA가 당신으로 하여금 “우리 자신보다 더 큰 어떤 힘을 향해” 도움을 청하게 만드는 방식들 중 하나가, 또 그 힘이 당신을 치료하는 주된 수단이 다름 아니라 바로, 당신을 어떤 그룹에 속하게 만드는 것이라는 사실에 주목하라. 공동체는 우리에게 악의 권세들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게 하는 힘을 준다. 혼자 힘만으로는, 개개인들로 따로 떨어진 채로는, 우리는 그 권세들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 공동체(교회)에 입양되고, 그 안에서 우리는 “우리를 악에서 구하여 주소서”라고 기도하며, 응답 받는다: 이와 같이, 성령께서도 우리의 약함을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도 알지 못하지만, 성령께서 친히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하여 주십니다.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생각이 어떠한지를 아십니다. 성령께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성도를 대신하여 간구하시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8:26-27)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이제와 영원토록 당신의 것입니다”

예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의 종결 부분에 도달한 지금, 다시 정치가 대두된다. 주기도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메시아, 예수의 정치적 의미를 이해하게끔 훈련시켜주는 기도다. 예수라는 왕께 대한, 그의 나라에 대한 충성은 다른 왕, 다른 나라에 대한 충성과 양립될 수 없다. 워싱턴 D.C.에 한번 가보라. 그러면 당신은 이 세상의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으리으리한 대리석과 화강암으로 형상화되어 있는 모습을 볼 것이다. 거기에는, 다른 모든 나라들의 수도들과 마찬가지로, 정사와 권세들(principalities and the powers)이 조각들과 건축물들로 형상화되어 있다. 모든 것이 필요 이상으로 크고 견고하게 만들어져 있어서, 마치 영원토록 끄떡없을 것처럼 보인다. 제퍼슨 기념관에 가보면, 토마스 제퍼슨은 마치 신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그간 우리 나라가 가담한 전쟁들은 다 십자군 전쟁이 되어 있다. 독립선언문은 성경이 되어 있다. 주기도는 이 모든 것들을 문제 삼는다.

처음부터 우리는, 예수는 정치적 소요를 야기하셨다는 것, 예수는 메시아였고, 메시아로서 모든 나라들과 맞서는, 그 나라들이 사람들을 조직화하는 방식과 맞서는 한 새로운 나라를 세우시고 형성하셨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또 예수 운동의 일종의 국가(國歌)라고 할 수 있는, 마리아의 “마니피캇”(Magnificat)에서도 우리는, 이 운동은 결코 순탄한 운동이 아닐 것이라는 경고를 받아둔 바 있다: 그리하여 마리아가 말하였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양하며 내 마음이 내 구주 하나님을 좋아함은, 그가 이 여종의 비천함을 보살펴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는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할 것입니다. 힘센 분이 나에게 큰 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의 이름은 거룩하고, 그의 자비하심은, 그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대대로 있을 것입니다. 그는 그 팔로 권능을 행하시고 마음이 교만한 사람들을 흩으셨으니, 제왕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사람을 높이셨습니다. 주린 사람들을 좋은 것으로 배부르게 하시고, 부한 사람들을 빈손으로 떠나보내셨습니다.

(누가복음 1:46-53)

 

이런 것이 바로 구원이다. 구원은 곤혹스러우리만치 정치적이고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가난한 이들이 높아지고 부자들이 빈손이 되어 보내질 때, 일어나는 무엇이다. 하나님 나라는, 가난한 이들이 먹을 것을 얻을 때 우리 중에 솟아 나오는 무엇이다. 한 가난한, 미혼의, 임신한, 가난한 시골 여자가 주먹을 불끈 쥐고 하나님의 승리를 노래 부를 때, 펜타곤, 크렘린, 텐 다우닝 스트리트(Ten Downing Street: 영국 수상 관저가 있는 거리-역주)의 사람들은 병력을 소집한다. 한 아기가 게토에서 울음을 터뜨리고, 별들이 이상하게 움직이기 시작할 때, 헤롯은 바짝 긴장한다. 당신의 회중이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당신의 것입니다”라고 기도할 때, 시청의 사람들은 마땅히 긴장해야 한다. 교회는 밑바닥 사람들이 높아지고 꼭대기 사람들이 아래로 내쳐지는 그 긴장을 표지와 신호로 나타내고, 노래하기 위해 존재한다. 복음서들은 구원을 만나 그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제안 받았음에도 결국 빈손으로 떠나고 만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누가복음 18:18-26).

주기도는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라는 세 가지 큼지막한 단어들이 하나로 겹쳐서, 하나님을 향한 최종적 찬양의 외침을 이루며 끝나고 있다. 주기도는, 지금까지 교회가 다양한 방식으로 그래왔던 것처럼, 말보다는 노래로 기도하는 것이 더 좋다. 주기도는 외침으로 끝나는데, 마리아의 노래에서 배웠듯이, 당신이 어떤 노래를, 또 누구를 향해 노래하는가는 정말로 중요한 문제다. 모든 군대가 알고 있듯이, 전쟁터로 행군할 때 어떤 종류의 음악을 행진곡으로 선택하느냐는 매우 중요한 문제다. 우리는 하나님께 이렇게 노래하도록 가르침을 받는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모두 당신의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단어들을 무슨 의미로 사용하는지 당신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나라’와 ‘권세’와 ‘영광’은 아주 위험한 단어들이다. 세상은 이러한 단어들을 좋아한다. 왕들은 자기들의 나라들을 세우고, 그 나라들을 모든 살인적 폭력을 동원해 수호한다. 정치란 권세의 행사다. 그리고 영광은 권세를 가진 이들로부터 발산되는 무엇이다. 지금은 물론, 국민이 “왕”이다. 우리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살고 있다. 그러나 민주주의가 우리를 우리 자신의 왕으로 만들어주었다고 해서 이제 교회와 정치의 갈등이 해소되었다고 생각하는 우를 범치 말라. 현대 역사는 민주주의 국가들도 자신을 보호하는 일에 있어 독재정권들과 조금도 다를 바 없이 살인적이라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미국의 범죄율이 보여주는 바, 현대 민주주의는 우리 각자를 자신의 왕으로, 신으로 내세움으로써, 유례없을 정도로 폭력적인 형태의 정부를 만들어내었다. 따라서 우리는, 나라와 권세와 영광에 대해 이야기할 때, 신중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우리가 그 단어들을 무슨 의미에서 사용하는지를, 또 독특한 기독교적 시각에서 그런 단어들이 무슨 의미를 갖는지를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한다.

 

이 주기도에서 우리는 나라와 권세와 영광에 대해 말하기 직전에 유혹과 악에 대해 말했었다는 사실에 주목하라. 사역을 처음 시작하셨을 때 예수께서는 먼저 광야로 인도되셨고, 거기서 사단은 예수께 이 세상이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주겠노라고 제안했었다(마태복음 4:1-11)

 

예수께서 유혹 받으신 이 이야기에서, 사단이 무엇을 제안했었고, 또 예수께서 무엇을 거부하셨는지 주목해 보라. 사단이 예수께 제안한 것들은 다 좋은 것들이었다--경제적 권세, 영적인 권세, 그리고 정치적인 권세. 우리는 가난한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야 한다고 믿지 않는가? 우리는 영적인 능력을 갖기 위해 교회에 모이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은 이 민주주의 사회에서 선을 위해 정치적인 행동을 행할 책임이 있다고 믿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예수께서는 그런 것들을 다 거부하신다(설령 사단이 자기 말을 모두 성서를 가지고 뒷받침한다 하더라도!).

흥미롭게도, 이러한 권세들(경제적, 종교적, 정치적)은 사단이 자기 마음대로 사람들에게 맡기는 것들이다! 예수께서는 사단의 손에서 오는 권세를 거부하신다. 이러한 권세들을 하나님과 무관하게 행사할 수 있는,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것으로 여기는 순간, 그것은 하나의 사단 숭배 행위가 된다. 그 자체로서는 좋은 것들인 그것들을 우리는 악으로 변질시켰지만(많은 이들이 너무 많이 먹어 죽어가고 있고, 종교가 전쟁의 한 주요 원인이 되어 버렸고, 금세기에는 전쟁에서 죽은 사람들보다 자기 나라 정부에 의해 죽임을 당한 사람들이 더 많았다), 그러나 그것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변모된다. 예수께서는 배고픈 무리들을 먹이셨다(막 8:1-10). 그러나 그들을 경제적 노예로 만드는 행위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넘쳐흐르는 자비의 선물로서 그렇게 하셨다. 예수께서 기적을 행하셨다, 그러나 신적인 힘을 자신을 위해 마음대로 이용하는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세상 속으로 뚫고 들어오시는 하나님의 능력의 표지로서 그렇게 하셨다. 예수께서는 선을 위해 권세를 행사하셨지만, 세상 나라들이 사용하는 수단과 방법들을 사용하지 않으셨다. 우리의 정치와는 달리, 예수께서는 선한 목적을 위해 폭력을 행사하기를 거부하셨다. 이렇게 예수의 삶은 우리에게 나라와 권세와 영광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재정의해준다. 정직하게 말해서, 사람은 누구나 영광을 얻고 싶어 한다. 우리는 누구나 우리가 빛나는 순간, 대중들보다 높아져서, 성공과 성취의 빛을 발하는 그런 순간을 고대한다. 그러나 여기 주기도에서는 우리는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린다. 그 뿐 아니다. 주기도를 기도하는 것은 영광에 대한 우리의 개념 자체를 바꾸어준다: 여러분 안에 이 마음을 품으십시오. 그것은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를 지극히 높이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에게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 있는 모든 것들이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고,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고백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빌립보서 2:5-11)

 

요한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빈번히 자신이 “영광을 받을 시간”에 대해 말씀하셨다(요 7:39; 8:54; 12:16, 23; 13:31; 15:8; 21:19).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수께서 말하는 이 “영광”의 의미를 오해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의 “영광”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십자가를 말한다. 세상이 자신에게 지우는 십자가를 받아들이시며,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여야 할까? '아버지, 이 시간을 벗어나게 하여 주십시오' 하고 말할까? 아니다. 나는 바로 이 일 때문에 이 때에 왔다.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드러내십시오." 그 때에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 왔다. "내가 이미 영광되게 하였고, 앞으로도 영광되게 하겠다." 거기에 서서 듣고 있던 무리 가운데서 더러는 천둥이 울렸다고 하고, 또 더러는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다고 하였다.

 

(요한복음 12:27-29)

 

영광이 피 흘리는 십자가형으로 정의되는 나라는 분명 독특한 나라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이 점을 놓치고 만다. 하나님 나라의 영광에 대한 말을 듣고서도, 많은 이들은 그저 자신들이 천둥소리를 들었다고 생각했다. 하나님의 나라, 권세, 영광이 가진 특별한 의미를 계속 우리에게 일깨워주는 것은 다름 아닌 교회의 순교자들이다. 세상은 자신의 권세를 위협하는 이들을 지극히 관습적이고 세상적인 방식--즉, 폭력--으로 다룬다. 그러나 순교자들은 그러한 세상의 폭력에 너무도 비관습적인 방식으로 응대했다. 그들은 악에게 폭력으로 저항하지 않고, 대신 그들의 삶을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증언으로서 바쳤다. 자기방어를 위해 자신의 힘에 의지하지 않고, 대신 그들은 하나님을 신뢰했다. 그들은 죽음을 당했고, 그들 자신을 하나님의 손에 의탁했다. 자신들의 삶의 의미를 그들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두면서 말이다. 그들은 이렇게 하나님 나라라는 한 새로운 나라에 대한 그들의 충성을 보여주었고, 그렇게 전혀 새로운 정치의 모습을 나타내 보여주었다. 중세 시대에, 교회는 교회의 정문과 현관에 순교자들의 상을 세워놓았는데, 이는 영광스러운 지혜였다. 이렇게 신자들은 참수, 피 묻은 칼들, 하나님의 고난 받는 종들의 모습을 보며 교회에 발을 디뎠다. 교회는, 처음부터, 현관에서부터, 제자도의 대가가 무엇인지를 예시해 보여주었던 것이다.

순교자들은 비록 세상의 눈에는 무력한 희생자들처럼 보이나, 실은 그들은 세상의 거짓말을, 세상 나라들이 으스대며 서있는 그 토대를 강력하게 폭로시킨 이들이다. 이렇게 순교자들은 우리에게 전혀 새로운 종류의 영광을 가리켜주는 이들이다. 초기 기독교 회화는 순교자들을 묘사할 때 그들의 머리에서 빛의 광선이 흘러나오고 있는 모습을 그렸다. 참으로 자유로워진 사람의 모습만큼 영광스럽고 멋진 모습은 없다. 이 세상의 정사와 권세들과 맞설 수 있을 만큼, 이 세상이 제안하는 헛된 영광들에 대해 ‘아니오’를 말할 수 있을 만큼 힘 있는 삶을 사는 이들로부턴 빛의 광선이 흘러나온다. 이렇게 순교자들은 우리에게 나라와 권세와 영광은 예수의 것임을, 뿐만 아니라 예수는 우리 같은 평범한 남녀들로 하여금 그 나라와 권세와 영광에 참여할 수 있게끔 만드셨다는 것을 보여준다. 즉, 그분은 우리에게 성인(聖人)이 될 수 있는 힘을 주셨다: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 (요한복음 15:8)

 

캘커타에서 죽어가는 이들을 위해 일했던 마더 테레사에게서 영광의 빛이 발한다. 세상이 주는 보상을 거부하고, 뉴욕에서 가난한 이들을 위해 애썼던 도로시 데이에게서도 영광의 빛이 발한다. 세상은 이런 이들을 비웃고 두려워하는 데, 이는 당연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 세상이 경배하는 모든 것들에 저항하는, 눈에 보이는 영광스런 표지이기 때문이다.

십자가 처형과 다가올 영광의 시간에 대해 분명히 말씀하신 후, 요한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자신의 십자가를 이 세상 나라들과의 정치적인 대결로 묘사하신다: 이제 이 세상에 대한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의 임금이 쫓겨나리라.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이렇게 말씀하심은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보이심이러라. (요한복음 12:31-33)

 

마지막으로, 주기도는 예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그 나라, 그 권세, 그 영광은 “이제와 영원토록” 하나님의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기도하는 그 나라는 “그림의 떡”이 아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미 지금 여기에 있다. 우리는 하나님과 친구가 될 날을 기다릴 필요가 없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나라는 이미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현재는, 하나님 나라는 대개 어렴풋한 형태로 우리에게 경험된다. 그러나 주일 날, 예배할 때처럼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충만하게 경험하는 그런 놀라운 순간들도 있다. 예배 때, 당신은 성만찬에 참여하기 위해 앞으로 걸어 나온다. 빈 손과 빈 삶을 들고. 그 복된 떡과 잔을 먹고 마실 때 당신은 충만해진다. 주님의 식탁으로 나오기 전 당신은 “주님의 평화가 함께 하시기를”이라고 말하며 형제자매들에게 평화의 인사를 건넨다. 당신 옆의 사람이 정말로 당신의 친척이, 가족이 되는 것이다. 당신과 모두에게 평화가 임한다.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은 평화가 말이다.

 

그러나 또한 우리는 “당신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라고 기도하며, “이제와 영원토록”이라고 기도한다. 하나님 나라는 이미 여기 있는 나라지만, 그러나 아직 충만한 모습으로 여기 있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미 지금 있는 나라지만, 그러나 또한 그 나라는 우리가 영원 가운데 기다려야 하는 나라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전조라고 말할 수 있지만, 그러나 어떤 교회도 하나님 나라 자체는 아니다. 여전히 악이 존재하고, 고통이, 비극이 존재한다. 하나님은 우리에 대해, 또 세상에 대해 하실 일을 아직 다 마치지 않으셨다. 지금 우리는 도상(途上)에 있으며, 아직 우리는 여정의 끝에 도달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은총으로, 우리 앞엔 더 많은 것이 기다리고 있다.

예배 시에 우리가 하는 선포, “그리스도는 죽으셨고, 그리스도는 부활하셨고, 그리스도는 다시 오십니다”는 하나님 나라의 이러한 ‘이미 그러나 아직’ 성격을 잘 보여주는 표지다. 우리에게는 이미 한 이야기(그리스도는 죽으셨고, 그리스도는 부활하셨다)가 있고, 그 이야기는 우리에게 하나님이 앞으로 세상 속에서 하실 일(그리스도는 다시 오실 것이다)을 말해주는 중심 이야기가 된다. 그리스도는 한 여정을 시작하셨고, 우리는 그 여정을 걷도록 징집되었다. 지금 우리는 그 여정 중에 있으며, 그 여정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 여정의 미완의 측면이 바로 우리가 감당해야할 제자도의 모험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이제 곧 우리 가운데 행하실 일을 기다리며 설렘 가운데 살아간다.

성만찬에 참여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가 그 떡과 잔과 친교를 통해 우리에게 자신을 바치시며 그 식탁에 구체적으로 현존하고 계심을 믿는다. 이 식사를 함께 먹음으로써 우리는 세상에, 세상은 하나님 나라를 기다릴 필요가 없다는 것, 하나님 나라는 바로 지금 주님의 식탁 주위에 모여 있는 바로 우리라는 것을 나타낸다. 바로 여기 하나님의 평화가 임하였고, 그래서 우리는 그 평화를 전달한다.

그러나 또한 우리는 나라와 권세와 영광은 아직 충만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인식하며 그 떡과 잔을 먹는다. 우리는 현재 상태에 만족하지 않으며, 이 세상을 집으로 여기지 않으며, 지금 우리에게 있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우리는 더 이상의 것을 원한다. 그 한 조각의 빵과 한 모금의 포도주를 먹고 마실 때 우리 안에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향한 배고픔과 갈증이 더욱 커지고, 그래서 우리는 더 이상의 것을 원하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총으로, 우리는 장차 더 이상의 것을 갖게 될 것이다. 우리는 모든 시대, 모든 나라, 모든 종족에게 활짝 열려 있는 그 거대한 향연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는 죽으셨고, 그리스도는 부활하셨고, 그리스도는 다시 오실 것이다(요한계시록 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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