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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넨버그 몰트만의 만유재신론적 신학 (Panentheistic Theology)

by 【고동엽】 2021. 11.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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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넨버그 몰트만의 만유재신론적 신학 (Panentheistic Theology)*이 글은 총 4차에 걸쳐서 개혁신문 2002년 9월 7일~28일자(485~488호)에 실린 글입니다.
*신문의 특성상 각주가 생략되어 있음을 양지해 주시기 바랍니다.

몰트만의 만유재신론적 신학 (Panentheistic Theology)


1. 서론 : 몰트만 신학의 기본적 특징

현대 신학의 물줄기는 하나님의 내재성을 강조하느냐 초월성을 강조하느냐의 기로에 서 있다고 볼 수 있다. 한쪽에 대한 과대한 강조는 현대 사회 인식에 있어서 잘못된 편견을 갖게 만든다. 하나님의 내재성에 대한 지나친 강조는 신학을 특정 문화속에 갇히도록 만들 수 있으며, 하나님의 초월성에 대한 지나친 강조는 문화적 상황을 무시하도록 만들 수 있다. 개혁신학의 전통은 하나님의 내재성과 초월성의 균형을 잘 유지해 왔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최근 현대 진보적 신학은 이런 균형을 상실했으며, 한편에서는 내재성의 지나친 강조를 통해서 우리 곁에 계신 하나님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사상의 중심에 만유재신론(萬有在神論, Panentheism)이 서 있다. 독자들은 범신론(Pantheism)에 대해서는 익히 들어왔을 것이다. 하나님을 자연과 동일시하는 독일 관념론에 영향을 받아 19세기 이후에 신학을 변질시켰던 사상가운데 하나이다. 반면 만유재신론(Panentheism)은 ‘하나님안에 모든 것이 들어있다,’(all in God) 그리고 ‘모든 것속에 하나님이 들어있다’(God in all)고 주장한다.


얼핏 들으면 그게 뭐가 잘못되었느냐 질문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에베소서 4:6에도 보면, 하나님이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라는 말씀이 있기 때문이다. 나중에 더 자세하게 다루겠지만, 이 만유재신론의 가장 큰 실수는 모든 만물, 즉 자연속에도 하나님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두개의 양극단속에 존재한다. 하나님은 그의 존재(Being) 자체가 영원하시며, 절대적이시며, 불변하시며, 불멸하시며, 무제한적이신 분이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하나님은 그 존재가 일시적이시며, 상대적이시며, 불완전하시며, 변하시며, 사멸하시며, 제한적이시며, 다른 사물에 의존적이신 분이다. 그리해서 하나님은 한편으로는 스스로 계신 분이시나, 한편으로는 인간 또는 자연에 의해 그 존재 여부가 결정되게 된다. 보는 각도에 따라 사물이 다르게 보이듯 하나님도 그런 식으로 보는 것이다.

만유재신론자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신학자군은 화이트 헤드를 중심으로 하는 과정신학자들이다(Process Theologians).이에 대해서는 자타가 공인하는 것이지만, 많은 현대 신학자중 만유재신론적 성격을 가지고 있는 이들은 오히려 자신들의 만유재신론적 성격을 부인하고 있다. 그러나 그 신학의 중심부를 흐르는 사상은 이것을 부인하지 못한다. 그중에 대표적인 인물이 독일 신학자인 판넨버그와 몰트만이다. 이 두 신학자는 과정신학자는 아니며, 과정신학적 만유재신론자 또한 아니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그들의 신학에서 만유재신론적 성격이 발견되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필자는 이 글에서 필자는 이 글에서 특별히 몰트만의 신학 가운데서 만유재신론적 성격을 발견하고 파헤치는 작업을 할 것이다. 지면의 제한으로 비교적 세밀한 접근을 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바라기는 이 기회에 한국교계와 신학이 만유재신론의 위험성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인식하기를 바란다.


몰트만은 종말론을 강조하는 현대의 가장 영향력있는 독일 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그는 하나님이 만유안에서 만유가 되실(엡 4:6) 영광의 왕국에 대한 종말론이 기독교 교리의 중심이 되어야 하며, 그것은 역사와 경험을 통한 실제적인 희망(hope)이라고 주장한다. 몰트만의 주장은 궁극적으로 세계의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으로 초점을 맞춘다. 그는 신학을 직접적으로 사회적 문제에 적용시킨 가장 뛰어난 학자라고도 볼 수 있다. 몰트만의 또다른 신학적 특징은 삼위일체론의 강조이다. 그는 삼위일체의 빛아래서 하나님의 역사적 현존을 이해한다. 「십자가에 못박히신 하나님」(The Crucified God), 「삼위일체와 하나님의 왕국」(The Trinity and The Kingdom of God), 「창조속에 계신 하나님」(God in Creation) 등과 같은 작품에서 삼위일체적 신론을 종말론적으로 개발할려고 노력해 왔다.



이 작품들을 통해 몰트만은 인간과 역사를 위한, 그리고 미래를 향한 하나님의 존재의 개방성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몰트만의 신학은 종말론적이며 세상속에 내재적인 삼위일체 하나님을 강조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미래를 향해 오시는 하나님이며, 동시에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 거주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는 하나님에 대한 이런 생각에 기초하여, 하나님의 내재성과 초월성 사이의 긴장 관계를 해결하려 하는 것이다. 이러한 몰트만의 역사적 삼위일체 신학은 현대 신학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신학이 만유재신론적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정통적 신론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2. 만유재신론(萬有在神論, Panentheism)이란 무엇인가?


만유재신론(Pan-nen-theism)은 문자적으로 모든 것이 하나님안에 있고, 하나님안에 모든 것이 있다는 뜻이다(all-in-God, 또는 God-in-all). 만유재신론은 만물과 하나님을 동일시 하여, 그것의 일부마다 하나님의 다른 모습이 있음을 강조하는 범신론(Pantheism)과는 구별된다. 만유재신론에 대한 정의(定意)는 신학자들, 특히 만유재신론자 가운데서도 다양하게 정의되어 지고 있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을 소개하기에는 지면상의 제약이 있다. 여기서는 만유재신론의 네가지 기본적인 특징만을 소개하고자 한다.


첫째, 만유재신론은 하나님이 두개의 극(poles)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한 극은 하나님의 잠재적 본성을 말하며, 또 다른 극은 하나님의 실제적 본성을 말한다. 잠재적 본성이라 함은, 하나님이 당신의 존재안에서 영원하며, 완전하며, 불변하며, 불멸하며, 무제한적임을 의미한다. 실제적 본성에서의 하나님은 존재속에서 일시적이며, 상대적이며, 불완전하며, 변하며, 소멸하며, 제한적이며, 의존적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세상을 초월하신 분이신 동시에 인간 또는 자연에 의해서 존재의 의미를 부여받게 된다. 자연이 없다면 하나님의 존재는 우리 인간에게 무의미하다. 하나님은 상대적 신일 뿐이다.


둘째, 만유재신론은 세상이 하나님의 몸이라고 말한다. 만유재신론자들은 그리스 철학에서 출발한 형이상학적 영-육 관계성의 개념을 하나님-세상 관계성에 대한 기독교의 전통적 신 개념 모델로서 개발시킨다. 한 극이 하나님의 몸이라면 세상은 또다른 극이 된다. 그래서 하나님과 세상은 존재론적으로 구분되나, 동시에 존재론적으로 서로 붙어있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세상은 하나님께 의존하고, 하나님은 세상에 의존하는 존재가 된다. 쉽게 말하면 이 세상은 하나님을 담아내는 용기(容器)가 된다. 고로 그릇이 없다면 하나님도 없게 된다.


셋째, 만유재신론은 세상은 무로부터(ex nihilo)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것이 아니라, 물질로 부터(ex material) 창조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리해서 하나님은 세상의 창조자가 아니라, 우주의 감독관이 된다. 그러나 이 주장에 대해서는 서로 논란이 많다. 몰트만은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 개념을 받아 들이나, 전통적 신론에서 말하는 것과는 다르게 재해석하여 받아들인다.
넷째, 만유재신론은 역사는 끊임없는 하나님의 진보의 과정이라고 주장한다. 하나님은 더 완전성을 향해서 변화하고 있으며, 성장하고 있다. 결국 역사는 하나님과 인간이 공동의 창조자로서 존재하는 진화적 과정이라고 주장한다. 이 개념은 화이트헤드의 형이상학적 신개념에서 개발된 것으로 모든 실재(實在, entities)들이 경험에 의해 완성되듯이 하나님 또한 완성된 존재가 아니라 완성되어가는 과정에 있는 실제적 존재이다.


대표적인 만유재신론적 신학자로는 찰스 하트숀(Charles Hartshone)을 중심으로 하는 과정신학자, 레오나드 보프(Leonard Boff)와 같은 해방신학자를 들 수 있다. 화이트헤드의 하바드 대학 직계 제자인 하트숀은 화이트헤드의 형이상학적 신개념을 더욱 심화 개발하여 과정신학이라는 신학군을 실제적으로 이끌어간 인물이다. 그는 완전성의 개념을 하나님의 개념에 대입하여 과연 하나님이 완전한가라는 질문을 유도한다. 그는 완전성에는 변하지 않는 완전성과 변하는 완전성이 있다고 본다. 하나님의 영원한 자기 정체성은 완전하다. 그러나 시간이 감에 따라 하나님의 이전의 완전성의 상태 또한 업그레이드 되어진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완전하지 않다.


대표적인 가톨릭 해방신학자인 보프는 만유재신론을 통한 현대 생태학적 위기의 극복을 주장한다.그에 따르면, 만유재신론이 중세 스콜라 학자였던 스코투스나 옥캄의 신학에서 발견되며, 현대에 이르러서는 해방신학이 이를 승계하고 있고, 정교회(Orthodox Church)가 만유재신론적 조화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만유재신론자들은 하나님과 세상의 관계성을 더 이상 종속적 관계가 아닌 상호 보완적 관계로 유지할 수 있음을 말하는데, 그 이면에 만유재신론이 자리하고 있다. 만유재신론자들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삼위 하나님에 대한 해석이 삼신론적 경향을 띄고 있다는 것이다. 세분 하나님이 영원히 공존하는 동시에 하나님은 서로 다른 구별된 존재이다. 다른 세 분 하나님이 서로 조화를 유지하는 그 모습이 이 세상에 그대로 투영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모든 존재와 관계 속에 내재하고 있기 때문에 세분 하나님이 공존하며 조화를 이루듯이 이 세계 또한 그 모습을 닮아가야 한다. 결국, 보프는 하나님, 인간, 자연의 관계성이 올바로 회복될 때, 파괴된 생태계는 창조의 모습을 회복하게 될 것임을 주장하는 것이다.


몰트만의 신학은 위에서 살펴본 극단적 만유재신론자와는 차별성을 가지고 있다. 그는 과정신학자는 아니다. 그럼에도 그의 신학은 하나님의 세상에 대한 의존성 개념을 가지고 있다. 몰트만은 스스로 삼신론자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의 신학은 삼신론적 경향을 띄며 관계성의 개념을 매우 강하게 주장한다. 그 이면에는 분명히 만유재신론이 자리잡고 있다. 이 다음 시간에 우리는 몰트만 신학에서 이런 측면들을 더욱 자세하게 살펴볼 것이다.


3. 몰트만의 사회적 삼위일체론에서 발견되는 만유재신론

(1) 몰트만은 역사적 삼위일체론을 강조하는 생존하는 최고의 신학자라고 할 수 있다.그의 삼위일체론은 관계성과 공동체를 강조하기 때문에 사회적 삼위일체론이라고 불리워진다. 이 사회적 삼위일체론은 삼위 위격간의 교제의 역사를 강조한다. 몰트만에 따르면, 신적 위격 개념이 위격의 단일성 개념보다 우선하며, 신적 위격들은 절대적 주체가 아니다. 또한 전통적 삼위일체론에서는 하나님을 절대적 주체로서 보아왔기 때문에 진정한 삼위일체적 개념에서 벗어난 오류를 범하게 되었다. 몰트만은 전통적 삼위일체론이 일원론적이어서 상하 계급사회를 조장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는 하나님의 절대적 주체성의 개념이 위격들 사이의 역사적 관계성을 파괴하며, 세상을 바라볼 때도 단순히 창조의 대상으로서만 간주하게 만든다고 본다. 따라서 하나님은 세상과 연결되지 않고 세상은 말 그대로 세속화 되어진다. 게다가 절대적 주체로서의 일원론적 하나님은 고통할 수 없고 사랑할 수 없다.


몰트만은 이러한 그림이 계층적 주권교리의 토대가 된다고 생각한다. 결국 이런 일방적 지배구조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가 하나님을 절대적 주체로서가 아니라 삼위일체적 하나님의 교제를 통한 단일성으로서 보아야 한다. “삼위적 단일성은 수적인 단일성이 아니라, 성부, 성자, 성령의 연합 안에 놓여진다. 그것은 단 하나의 주체로의 동질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교제속에 위치한다.”(The Trinity and the Kingdom: The Doctrine of God, (Minneapolis: Fortress Press, 1993) p. 95) 몰트만은 이러한 교제의 개념(perichoresis)을 강조하면서 이것이 전통적 삼위일체론에 내재하는 종속주의를 피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세 위격 각각은 교제의 관계성을 통해 일위성을 유지하고 그 생명력을 유지한다. 삼위는 서로에게 내재적으로 생존하며, 다른 위격을 통해 생명력을 유지하게 되는 것이다. 삼위 각각의 실체적 개념을 무시하고 관계성으로 묶여질 때 그 존재 여부가 결정 난다.


몰트만은 이런 교제(perichoresis)의 개념을 세상과 하나님의 관계성의 개념으로 발전시켜 간다. 그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교제와 관계성이 세상의 역사 속에서 비로소 완성되어진다고 본다. 그러므로 역사적 사건과 삼위간의 관계성이 삼위일체 자체의 생명력이 되는 것이다. 이 말은 역사적 사건이 없었다면 삼위 하나님의 존재는 완성되지 않음을 말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역사적 사건에 의해 해석되어지는 것이다. 예를 들어 창조,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등과 같은 구속의 역사는 하나님의 외적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 내부에서, 즉 성부, 성자, 성령의 상호관계성 속에서 신적 공동체를 형성하면서 일어난 것이다. 그러므로 삼위적 하나님은 구속사속에서, 그리고 동시에 교제속에서 자신의 상호관계성의 패턴을 바꾸게 되며, 비로소 존재성을 부여받게 된다. 몰트만의 이러한 주장에 근거하면 성부 하나님은 우주의 아버지가 아니다. 하나님은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일 뿐이며, 성자와의 관계성 속에서만 성부가 되는 것이다. 또한 성자는 인간의 맏형으로 간주되기에,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몰트만의 사회적 삼위일체론에서 하나님의 초월성에 대한 심각한 문제를 발견하게 된다. 몰트만의 이런 주장은 그가 삼신론자라는 의구심을 일으키기에 충분할 뿐만 아니라, 만유재신론이 말하는 하나님이 역사의 과정속에서 완성되어간다는 주장과 거의 일치하고 있음을 보이는 것이다. 세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삼위적 존재로서의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게 된다. 만일 구속사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성자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도, 성부로서의 하나님도 존재하지 않게 된다. 그러므로 몰트만의 이러한 관점은 삼위적 하나님이 세상과의 관계성속에서만 실체를 갖는다는 점에서 명확하게 만유재신론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2) 대표적인 서방 신학자 가운데 한사람인 터툴리안(160-220) 이래로 기독교 전통에서는 일반적으로 경륜적(Economic) 삼위일체와 내재적(Immanent) 삼위일체를 구별해 왔다.경륜적 삼위일체는 구속사속에서 스스로를 계시하시는 삼위 하나님을 의미하며, 내재적 삼위일체는 하나님 자신 내부의 삼위적 존재를 의미한다. 그래서 경륜적 삼위일체는 계시적 삼위일체, 내재적 삼위일체는 실체적 삼위일체라고 불려지기도 한다. 이런 구분은 하나님의 자유로운 주권과 하나님의 세상적 참여를 둘다 보호하기 위해 도입된 개념이다. 그러나 현대 진보적 신학은 칼 라너를 중심으로 이런 구분을 포기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데, 몰트만 또한 그런 입장을 취한다. 몰트만은 삼위 하나님과 세 위격의 역사적 관계성을 동일시하기 때문에, 그에게는 굳이 경륜적 삼위일체와 내재적 삼위일체의 구분이 필요 없게 된 것이다.


몰트만에 따르면, 만약 신개념 속에 자유와 필연성이라는 개념만 있다면 그 구분은 필수적이 될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 신개념에는 사랑의 개념이 있는데, 이는 하나님은 필연적으로 사랑해야만 한다는 어떠한 외적인 또는 내적인 강요가 필요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이 곧 사랑이기 때문에, 그 사랑은 하나님의 자기 내적 증거가 된다는 것이다. 몰트만은 ‘세상이 하나님께 의존하듯이 왜 하나님은 세상에 의존하시는가?’ 라는 질문을 통해 하나님의 세상에의 참여는 하나님의 본성 자체라고 대답한다. 사랑의 개념이 세상 참여에 대한 하나님의 의지와 본성을 일치시킨다고 보는 것이다.



세상을 사랑하는 하나님이 자기 자신도 사랑하는 하나님이 된다. 하나님의 삼위적 개념은 그 자신 내부에 존재하듯이 역사 속에도 필수적으로 존재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삼위 하나님은 역사 속에 존재할 때 진정한 의미를 부여받게 된다. 몰트만은 이러한 경륜적 삼위일체와 내재적 삼위일체의 구분이 하나님과 세상의 구분을 유도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철저하게 하나님을 세상 속에 위치시키는 신학자이다. 그에게 세상과 분리된 하나님은 진정한 신이 아닌 것으로 보여지는 듯하다. 이러한 세상을 향한 사랑의 행위를 하나님의 자기 제한성(zimsum)이라 부르며, 이것은 과정신학과는 다른 몰트만 특유의 만유재신론적 특징으로 이끈다.

몰트만은 역사적 삼위일체 이해의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위치시킨다. 그는 하나님의 본성 그 자체만을 가지고는 진정한 하나님에 대해 말할 수 없으며, 오직 역사 속에서 인간에게 도달했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우리 인간을 사랑한 하나님을 이야기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본성은 그리스도를 통한 인간의 역사를 통해서만 그 의미가 주어진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하나님이 진정한 하나님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역사성, 하나님의 미래성이라는 단어가 말해 주듯이 하나님은 역사 속에서 비로소 완성된다. 창조속으로 들어오신 하나님은 십자가를 통해서 성취되어 가며, 그 하나님은 인간 역사의 종말을 향해 점점 진보하며 완성되어 가는 하나님이다.

4. 결론

몰트만은 보수주의자들에게는 현대 급진주의 신학의 토대를 제공한 신학자로 알려져 있으며, 진보주의자들은 오히려 보수주의로 회귀하고 있다는 비난과 함께 신보수주의자라 평하기도 한다. 공히 인정하는 것은 몰트만의 신학이 세상 참여에 대한 기독교적 관심을 증진시켰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몰트만의 신학은 정통 기독교 신론에서 벗어나며, 만유재신론적임이 자명한 것 같다. 그는 신격(Divine Persons)의 절대성을 부인하면서 하나님의 삼위적 관계성은 인간의 역사 속에서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고 주장한다. 그에게 하나님은 창조 안에 거주하면서 인간의 고통을 함께 경험하는 인간적(人間的) 하나님인 동시에, 종말론적 완성을 바라보면서 오시는 과정 중에 있는(in process) 하나님이 된다. 몰트만의 하나님은 세상과 관련되었을 때 진정한 하나님으로서 가치를 가지며, 인간의 역사에 의존하는 불완전한 하나님이다. 몰트만의 신학에서 과거와 현재의 하나님은 정통 개혁신학이 말하는 완전하며 불변한 본성 자체의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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