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절기 설교[1,404편]〓/어린이 주일설교

경건한 자손 (잠1:7-9)

by 【고동엽】 2022. 8. 22.
목차로 돌아가기
 
 

 경건한 자손   (잠1:7-9)
  
5월은 가정의 달입니다. 첫째주일은 어린이 주일이고, 둘째
주일은 어버이 주일이고, 셋째 주일은 성년주일 입니다. 그래
서 5월은 가정을 생각해 보는 달입니다.
여러분, 세상에서 가장 좋은 귀한 곳은 어디라고 생각하십니
까. 세상에서 가장 귀한 곳은 뭐니 뭐니 해도 가정입니다. 혈
육이 있고, 부모가 있고, 자녀들이 있는 곳, 그리고 마음껏 편
히 쉬고 생활할 수 있는 곳, 그곳이 가정입니다. 그래서 그곳
을 Sweet Home 이라고 했습니다. 이 땅의 천국이라는 뜻입니
다.
이렇듯 5월은 우리들로 하여금 모처럼 가정을 생각해 보게
하는 달입니다. 부모님을 생각해 보고, 자녀들을 생각해 보
고, 어린이의 귀중함을 생각해 보고, 청년을 생각해 보는 그런
계절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전국교회가 일제히 어린이 주일로
지키게 됩니다. 하나님이 주신 어린아이의 존재를 생각해 보
고, 어린아이의 양육문제를 생각해 보고, 어린 어린아이와 함
께 하시는 하나님의 자상하신 사랑을 생각해 보게 하는 그런
주일입니다.
옛날에는 이 날을 꽃 주일이라고 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은 어린 아이 입니다. 여러분, 어린아이들이 웃는
모습을 들여다 보십시요. 거기에 티가 있습니까, 거짓이 있습
니까. 꽃도 그런 꽃이 없습니다. 어린아이는 분명히 꽃 중의
꽃입니다. 이 꽃을 꽃주일 날에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그것을
헌아식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헌아식을 하는데는 다음과 같은 뜻이 있습니다. 첫
째는 "이 아이를 하나님의 말씀대로 양육하겠습니다" 하는 다
짐입니다. 그 어린아이에 대한 양육책임이 부모에게 주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이 아이가 하나님을 알
고 살아가는 아이로 키우겠습니다"하는 약속입니다. 이를테면
이 아이의 마음 속 깊이 하나님을 심어 주는 양육을 하겠다는
다짐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이 아이로 하여금 하나님을 위
해서 살아가는 아이로 키우겠습니다" 하는 서약입니다. 이것
이 헌 아를 하는 목적입니다.
그렇다고 하면 그 아이가 커서 그같은 부모님의 뜻을 알게 되
었을 때 얼마나 부모님에게 고마움을 갖겠습니까. "나는 이렇
게 바쳐진 아이로구나"
그 아이가 평생 어떻게 그것을 잊겠습니까. 이것이야말로 부
모가 자식에게 해 줄 수 있는 가장 큰 축복일 것입니다. 그런
데 오늘 세상을 보면 부모들이 이렇게 마땅히 할 일에는 무관
심하고 엉뚱한 일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잘 못된 방
향으로만 관심을 가지고 있고, 애정을 쏟고 있습니다.
보십시요. 오늘은 자식이 원수인 시대입니다. 어떤 검사는
대학생인 아들이 돈을 받고 대리시험을 치르는 바람에 공직에
서 물러났습니다. 어떤 장관은 자식을 특례입학 시킨 것이 문
제가 되어서 장관직에서 물러났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돈을
많이 들여서 부정입학 시킨 것이 문제가 되어 구속을 당했습니
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은 많은 돈을 어린아이에게 상속해
주었다고 해서 공직에서 물러났습니다.
그리고 요즘에는 자식이 부모의 몸에 칼을 대기까지 합니다.
부모를 죽입니다. 부모의 돈을 탐해서 부모를 죽이기까지 합니
다. 옛 말에 무자식이 상팔자라고 했는데 바로 이런 사람들이
그 말을 실감할 것입니다.
자식에 대한 애착은 어느 부모에게나 다 있습니다. 오늘 부
모님들이 아이들에게 대해서 얼마나 애착이 많습니까. 좋은 학
군을 따라 무리를 해 가면서 옮겨 다니는 것을 보면 옛날 맹자
의 어머니는 비교도 안될 정도입니다.
그렇지만 이같은 과보호적인 자식에 대한 애착은 그것이 사
랑에서 나온 애착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성서적이 아닙니다.
자식을 낳아 키우는 것이 졸업장이나 따고, 부동산이나 물려주
는 것만으로 인식된다면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부정을 져 질러야 하고, 탈세를 하면서 까지 재산을 물
려주려고 혈안이 된다는 것은 더 더욱 성경적일 수가 없습니
다.
그래서 성경은 자녀 양육문제에 대해서 말씀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잠언서를 보면 이 양육문제에 대해서 집중적
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문제는 그 만큼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 입니다. 그 중에서도 오늘 읽어 드린 말씀은 그 핵심이
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몇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경건한 자식으로 기르는 일" 입니다.

잠언 1:7절을 보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
라" 고 했습니다. 이것이 모든 것의 근본이라는 말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라야 그것이 참 인간이
라" 는 말입니다. 무엇보다도 자식을 키우는데는 이 점을 알
게 해야 합니다.
오늘 이 시대를 보십시요. 이 시대의 특징은 두려워 해야할
대상이 없는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부모를 두려워하지 않습니
다. 선생님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어른을 두려워하다 않습
니다. 심지어는 하나님도 두려워하다 않습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 별일이 다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서운 세상입
니다. 무서울 것이 없는 세상은 정말 무서운 세상입니다. 그
래서 이 세상이 이렇게 거칠어 졌고, 포악해 졌고, 삭막해진
것입니다.
신앙인의 교육에는 제 1조가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는데" 제
일의 목적이 있습니다. 그래야 그 자식이 세상을 경건하게
살아가게 됩니다. 요셉을 보십시요. 요셉이 애굽으로 팔려 가
서 온갖 유혹을 뿌리칩니다. 나중에는 집요한 유혹을 뿌리치
며 하는 말이 "내가 어찌 죄를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 하리까"
하고 말합니다.
이같은 집요한 유혹에서 이길 수 있었던 것은 의지가 주는
힘도 아니고, 양심이 주는 힘도 아닌, 이 "근본을 아는 힘" 때
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것을 "지식의 근본" 이라고 했습
니다. 이것을 가르치는 것이 기독교 교육이고 부모의 할 일
입니다.

두 번째는 "경건한 부모가 되는 일"입니다.

8절을 보면 "내 아들아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라" 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부모가 경건을 만들어
주라는 말입니다. 부모가 경건해야 가정도 경건하게 되고, 가
족 모두가 경건하게 살아 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경건이 없는 시대입니다. 가정에도 경건이
없고, 사회에도 경건이 없고, 심지어는 교회에까지도 경건의
모양이 점점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요즘 오랜지족이라는
것이 있다고 합니다. 왜 오랜지족이라고 했나 하고 곰곰이 생
각해 보니까 애들이 싹이 노랗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 것이 아
닌가 생각됩니다. 옛 말에 될성싶은 나무는 떡잎부터 다르다
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들은 싹이 그렇게 좋게 보이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오랜지족이라고 했는지 모릅니다.
이 아이들은 모두 돈이 많은 집 아이들이라고 합니다. 하루
에도 용돈을 수 백만원씩을 쓰며 돌아 다닌다고 합니다. 그
아이들이 돌아 다니면서 무엇을 하겠습니까. 그 아이들의 부
모는 도대체 어떻게 생긴 사람들입니까. 어떻게 생긴 사람들
이길래 돈을 그렇게 많이 줘서 아이들을 밖으로 내 보내는 것
입니까. 그 부모들의 가슴 속에, 생활 속에, 정신 속에는,과
연 무엇이 들어 있는 것입니까. 경건이 있겠습니까, 하나님
이 있겠습니까, 두려움이 있겠습니까. 이것이 우리 시대에 많
은 사람들을 슬프게 만드는 속되고 타락된 가정 부재의 모습들
입니다.
백만장자의 집안이라도 그곳에 경건이 없으면 경건한 자식이
나오지를 않습니다. 경건한 가정 속에서, 경건한 사회 속에
서, 경건한 교회 속에서, 그리고 경건한 부부 사이에서, 하나
님을 두려워 할 줄 아는 사람이 태어납니다. 그래서 부모는
무엇보다도 경건을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본문 8절을 보면 "
내 아들아 아비의 훈계를 듣고,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라" 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것이 경건입니다.
예례미야서 35장을 보면 하나의 경건한 전통있는 가문이 소
개되고 있습니다. 그 가문은 레갑의 족속인데 이 레갑의 가문
은 자손 대대로 술을 입에 대지 않는 것이 전통이었습니다.
그것은 그의 선조가 술을 입에 대지 말라는 강력한 유훈을 자
손들에게 남겼기 때문입니다. 그 유훈을 따라서 그 자손들은
대대로 술을 입에 대지 않는 전통을 세워서 자손들이 이를 즐
겁게 지켜서 경건한 가문을 형성해 갑니다. 그래서 후에는
하나님으로부터 크게 칭찬까지 받았던 족속입니다. 얼마나
좋은 유산입니까. 그래서 부모는 경건을 가르쳐야 합니다.

세 번째는 "경건의 본을 보아는 일"입니다.

경건에는 셋이 있습니다. 하나는 신앙의 경건입니다. 주일날
만 되면 별 일이 있어도 그날은 하나님을 찾아가는 신앙의 모
습이 부모에게 있어야 합니다. 한 주간 동안 열심히 일 하고
주일 아침이 되면 만사를 제쳐놓고, 깨끗한 옷차림으로, 하나
님을 찾아가 제일 앞자리에 앉아서 엄숙하게 예배를 드리는
모습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본 입니다.
자라나는 자손들에게 있어서는 이같은 부모들의 모습을 통해
서 알게 모르게 깊은 영향을 받게 됩니다. 슈바이처는 회고
록에서 말하기를 "나는 어렸을 때 부모의 손에 이끌려서 예배
에 참석하는 동안에 그 엄숙한 분위기에서 경건을 배웠다" 고
술회했습니다. 이것이 부모가 줄 수 있는 경건의 본 입니다.
두 번째는 경건한 삶을 보여야 합니다. 한 가정에서는 아버
지가 어머니를 존중하는 모습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어머
니가 아버지를 존경하는 모습도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어른을
존대하는 모습이 그곳에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곳에 경건
한 삶이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면 그 경건은 다음 세대로 이
어져 내려가게 되는 것입니다.
요즘 아이들의 언어가 왜 그렇게 거칠어 졌습니까. 그 책임
이 누구에게 있습니까. 그 이유는 우리들이 쉽게 찾아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어머니와 아버지의 거친 대화의 내용이 어
린아이들의 대화습관에 그대로 적용이 되어 나타나게 된 것입
니다. 아이들이 집안에서 경어를 쓸 줄을 모르니까 밖에 나가
서도 경어를 제대로 쓸 줄을 모르고, 제대로 인사할 줄도 모릅
니다. 안에서 경건이 없으니까 밖으로 나가서 경건이 나타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정 안에는 경건이 있어야 합니다. 벽에 붙어 있는
그림 한 장에도, 장식해 놓은 장식물 하나에도, 오고가는 대화
한 마디 속에도, 경건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신앙의 본 입
니다.

네 번째는 "실생활에서도 경건의 본을 보이는 일" 입니다.

부모는 자식들에게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사람이 가장 아름다울 때가 언제 입니
까. 그것은 열심히 일을 할 때라고 합니다. 사람이 그렇게
열심히 일을 하면 그곳에는 부정도 없고, 문제도 없습니다.
세상을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그럴만한 여유도, 생각도,
유혹도, 찾아오지를 않습니다. 문제는 그곳에 삶에 대한 성실
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느 청소부에게 대학을 다니는 아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아들은 아버지가 청소부인 것이 늘 마음에 떳떳치가 않습니
다. 언제나 창피하고, 불만족스럽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언제나 열심히 일을 하십니다. 새벽 일찍이 어김없이 일어나
서 일을 나가십니다.
어느 날인가 그날은 밤새 열이 나서 앓다가 새벽이 되었는데
또 일어나서 일을 나가십니다. 안타까워서 함께 따라 나갔던
아들은 열심히 일하시는 아버지의 모습을 눈여겨보는 동안 그
일하시는 아버지의 모습 속에서 성실한 모습을 발견했고, 그
일을 천직으로 알고 철저하게 일 하시는 그 모습에서 비로소
존경스러운 아버지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
고 나서 한 말이 "나는 청소부인 아버지가 존경스럽다" 고 고
백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면 됐지 않습니까. 그 이상 무엇이
더 필요합니까. 장성한 아들의 마음속에 아버지의 모습이 존경
스러운 모습으로 비추어졌다면 그만 아닙니까.
창기 업을 해서 돈을 많이 벌어 준다고 해서 존경이 주어지
는 것입니까. 아니면 고리대금업을 해서 돈을 많이 벌어다 준
다고 해서 더 나은 존경이 주어질 것입니까. 부모는 자식이
크건 작건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스승이고 교사입니다. 그래
서 실생활에서도 경건을 심어 주어야 할 뿐 아니라 경건한 삶
의 모습이 있어야 합니다. 그 때 비로소 경건은 위에서 아래
도 내려가고, 대를 이어 경건의 가문이 형성될 뿐만 아니라
대대로 경건한 자손이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은 어린이 주일입니다. 이같은 축복이 여러분의 생활
속에 나타나고, 가정 속에 나타날 수 있기를 기원 합니다.

출처/이정익목사 설교 중에서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