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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전도

성령과 전도 (행1:6-11)

by 【고동엽】 2022. 7.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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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과 전도   (행1:6-11)

"(6)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니이까?' 하니 (7)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 (8)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9)이 말씀을 마치시고 저희 보는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 (10)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 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저희 곁에 서서 (11)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요한의 말을 빌리자면 예수님께서 생애에 하신 말씀과 기적을 다 기록하면 쌓을 곳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행하신 그 기적을 제일로 많이 경험한 사람들이 있다면 예수님의 제자들이라고 생각됩니다. 예수님께서 물로 포도주를 만들 때 거기에 있었고 그 포도주를 맛보았으며, 앉은뱅이를 일으킬 때에 거기에서 보았으며, 5병2어의 기적을 체험했고 또 그것을 먹었으며, 그리고 죽은 나사로를 살릴 때에 거기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기적을 보았을 뿐만 아니라 친히 기적을 많이 행한 사람들입니다. 손수 앉은뱅이도 일으켰고, 장님의 눈도 뜨게 했고, 중풍병자도 일으켰습니다. 심지어 귀신도 쫓아낸 자들이 제자들입니다. 그런데도 이들 모두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 비겁자가 되어 숨어버렸습니다. 그러던 저들이 변화되었습니다. 성령으로 담대하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겁쟁이가 아니었습니다. 성령을 체험하고 난 제자들에 대하여, 사도행전에서는 이들을 '담대한 사람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행 4:31)라고 되었습니다. 그랬더니 전무후무한 역사가 나타나기 시작하였습니다. 하루에 전도하여 회개하고 세례를 받는 자들이 삼천명이나 되기도 하였습니다(행 2:41). 오늘 본문에 증인이 되기 위한 하나의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이 임하면"이란 조건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성령과 전도는 무슨 관련이 있을까요? 성령 받기 전에는 많은 것을 체험을 하고도 왜 전도하지 못했을까요? 그런데 성령을 체험하고 난 후에는 왜 전도의 역사가 나타날까요? 왜 증인이 되려면 성령이 임해야 할까요? 사도행전은 성령행전이요, 전도행전입니다. 성령과 전도, 전도와 성령은 뗄레야 뗄 수 없는 것입니다.


먼저 성령으로만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는 확실한 증거를 가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먼저 내적으로 확신이 없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증거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내 속에 확실한 증거를 가져야 합니다. 사람이 거짓에 대해서도 불타는 확신을 가지면 추종자가 생기는 법입니다. 그런데 바른 진리 바른 지식에 대해서도 확신이 없으면 다른 사람이 따라가지 않는 법입니다. 나도 모르는데 너를 가르칠 수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세상에 아내의 이름도 모르는 남편도 있습니까? 아내의 얼굴도 모르는 그런 남편도 있습니까? 어떤 사람이 "아내를 얻어준다"고 하며 돈을 요구하여 돈을 주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다음에는 "아내를 우리 집에 잘 보관하고 있으니 또 돈을 달라"고 하여 돈을 주었다고 합니다. 그러더니 "이제 자내 아내가 아이를 낳았으니 돈을 달라"고 하여 돈을 주었다고 합니다. 조금 있으니까 이제 하는 말이 "자네 아내가 죽었으니 장례비용을 내라"고 하여 장례비용을 주고 만나보지도 않은 얼굴도 모르는 아내를 위하여 1주일을 울었다고 합니다. 그런 남편도 있습니까? 만나보지 않은 예수님을 위하여 헌금도 내고, 주일도 지키고, 눈물로 흘릴 수 있습니까?


기적을 체험했다고 해서 그것으로 자신이 그리스도인라는 확증이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안다고 해서 그것으로 확신이 생기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성령으로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점을 여러 번 확실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고후 1:22)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고후 5:5)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8:14)고 말했습니다


구원을 받고도 전도하지 못하는 이유는 성령 충만을 받지 못해서입니다. 성령의 확실한 내적 증거가 있을 때에 전도하는 것입니다. 창피해서 전도 못합니다. 날 위해 죽은 십자가의 예수가 창피해서 전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나 구하려다 불에 타 얽어버린 어머니의 얼굴이 창피해서 식모라고 말하는 자식과 같습니다.


<휫필드>는 청년 시절에 죄악 가운데 깊이 빠져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자신의 마음이 온통 시꺼먼 죄악으로 물들어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구원받기 위하여 어떻게 하면 좋을지를 알지 못해서 먼저 그는 자기부정을 애썼습니다. 사치하던 삶을 정리하고 누더기 옷을 입고 가장 초라한 음식을 먹었으며 일주일에 이틀간은 금식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돈을 주었으며 밤마다 기도로 지새곤 했습니다. 그런데도 이 모든 것이 헛일이었습니다. 아무리 해도 마음의 평안을 찾을 길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요한 웨슬레>를 만났는데 그로부터 <영혼 속의 하나님 생명이란> 책자를 얻었습니다. 이 책을 읽은 <휫필드>는 자신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리하여 믿음으로써 주님께 매달렸습니다. 그랬더니 그 때 성령께서 그의 마음 가운데 들어오셔서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훗날 <휫필드>는 아메리카 인디언들이든, 서인도제도의 유색 인종이든, 그리고 스코틀랜드의 광부들과 런던의 부유한 귀족들이든 전도를 할 때마다 그는 "네가 거듭나야만 하겠다" "네가 성령을 체험해야 하겠다"는 것만 전하였습니다.


예수를 믿되 성령 없는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많고 심지어 성령 없는 예수를 믿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두 가지 때문입니다.


먼저, 자신은 성령 받기가 어렵다는 생각을 합니다. 나이가 어려서, 초신자라서, 남자라서, 성경 지식이 많지 못해서 성령을 받을 수 없다고 오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령을 받으려면 엄청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고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다음으로, 성령이 내 마음에 들어오시는 그 날로 내 생애의 기쁨도 쾌락도 다 끝장난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성령 충만을 바라기보다 성령 충만을 두려워합니다. 아닙니다. 성령으로 하지 않으면 오히려 예수 믿기가 힘들고 어렵습니다. 성령을 받지 못하면 내가 그리스도인이란 확실한 증거가 없고 그렇게 되면 담대하게 그리스도를 증거할 수 없습니다. 자기 확신이 있어야 다른 사람에게도 그 길을 소개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다음으로 성령은 우리에게 능력을 주기 때문입니다.


저보고 이 세상에 제일로 힘든 일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사람의 변화"라고 하겠습니다. 사람이 변화되는 것이 가장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방향이냐 목적을 바꾸기란 사람이 한 번 죽었다가 살아나는 것만큼 어려운 일입니다. 한 사상이 다른 사상으로 바꾸어지고 변화되려면 반듯이 위기를 겪어야 하기 때문에 내가 사진 사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아도 쉽게 다른 사상을 취하지 못하게 됩니다. 역시 습관의 변화, 가치의 변화, 인격의 변화 다 어렵습니다. 몰라서 변화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러나 알고도 변화되지 못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러나 인간을 변화시키는 능력은 성령으로부터 나옵니다. 성령으로 하면 쉽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신 성령님께서 우리 속에 들어오실 때 사울처럼, 삭케오처럼, 우물가의 여인처럼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성령 따라 살아가는 성도는 늘 변화를 맛보며 변화하는 재미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사상이 변하고, 마음이 변하고, 지식이 새로워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두려움이 변하여 기도가 되는 것을 경험하고, 한숨이 변하여 찬송이 되는 것을 경험합니다. 어제는 비겁쟁이였는데 오늘은 담대한 사람으로, 어제는 이기적인 사람이었는데 오늘은 베푸는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자기만 위해 살던 자가 헌신자가 되고, 정욕적인 사람이 성령의 사람이 되고, 남의 가슴을 아프게 하며 살던 사람도 남을 돕고 위로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리고 인생이 허무해서 몸부림치던 사람도 삶의 참 맛을 느끼며 살게 됩니다.


인도의 이름난 성자인 <선다 싱>은 원래 힌두교의 한 분파인 <시이크> 교도로서 어렸을 때부터 기독교를 박해하여 성경을 한 장씩 찢어서 불사를 정도로 악했습니다. 그러나 14세의 어린 나이에 때 예수님을 만나 성령으로 놀라운 변화를 경험하였습니다. 결국 그는 많은 박해를 당하였고 가정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러나 그는 고향을 떠나지 않고 전도하여 결국 무서운 아버지까지 하나님께 인도하였고, 인도에 성령의 불길을 당겼습니다. 그는 자기 동족들의 더러운 발까지 씻겨가며 생명을 걸고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가 40세에 티벳 산속으로 사라진 후 다시 돌아오지 않자, 인도 사람들은 그를 인도에 나타난 예수님이라고까지 말합니다. 이 모든 일이 가능한 것을 성령님 때문이었습니다.


보혜사 성령은 인간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성령님은 나쁜 버릇이 고쳐주고, 자기 절제를 가능하게 하며, 창조적 생각을 갖게 하며, 영적 가치를 소중히 여기게 하며, 화평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하며, 영적 설득력이 생기고, 반대의견도 수용할 수 있게 되며, 하나님의 섭리 주님의 뜻대로 살고자 노력이 생기고, 주위 사람들에게 평안을 주기 시작하며, 이웃에게 진정으로 관심을 갖게 되고, 자기의 모든 재능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데 사용하기 시작하며, 강력한 끈기가 생기고, 원수를 사랑하고 싶은 마음을 주며, 모든 면에서 믿음을 근거로 한 낙관주의자가 되고, 남을 위하여 희생할 줄 아는 사람이 되고, 그리고 평소에는 생각으로도 불가능한 일 즉 입술을 열어서 전도하는 일이 가능하게 됩니다.


제자들을 보십시오. 천한 계집종의 말이 두려워서 예수를 세 번이나 부인한 베드로입니다. 무서워서 문을 걸어 잠그고 바람에 흔들리는 문고리 소리에도 소스라치게 놀라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담대한 사람들이 되었습니까? 무엇이 이들을 이렇게 담대하게 했습니까? 바로 성령 때문입니다.


어떤 아들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자기 속에 살아 있는 예수와 성령의 기쁨을 자기 아버지에게도 설명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기도를 많이 했습니다. 자식이 아버지에게 효과 있게 말하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드디어 아버지에게 간증했습니다. 그랬더니 아버지가 놀라운 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자신도 오래 전에 한 전도집회에서 예수를 영접한 일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예수를 영접하고도 그 동안 숨겨온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제 숨기지 말고 드러내어 말하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를 믿고도 숨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교회사적으로 우리 나라에서 세례를 처음 받은 사람으로 알려진 인물은 1876년 <이수정>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상가요 정치가로서 최초의 국한문 혼용체의 "서유견문"이란 책을 썼던 <유길준>이라는 사람이 일찍 유학을 가서 분명히 세례를 받았는데 이 사람이 먼저 받았을 가능성이 크다고 글을 쓴 교계원로의 글을 보았습니다. 그의 장남 <유만겸>이란 사람이 "우리 아버님도 미국에서 세례를 받았지만 귀국해서 나라 일을 하게 돼서 교회에 나가지 못했다"고 증언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제 저녁에 백과사전을 찾아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1856년 생이란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그가 먼저 일본에 유학을 먼저 갔고 그 다음에 미국에 갔으니 먼저 받았을 확률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사람은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란 사실을 숨기고 살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사적으로 최초로 세례를 받은 한 사람으로 그 이름을 남길 수 있었는데 그렇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어떤 이들이 예수를 영접한 일이 있으면서도 그것을 숨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떻게 구원을 받고도 그것을 말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한 의대생이 지치고 괴로운 어느 날 존경하는 한 교수님이 식사를 하면서 기도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모습이 너무나 평화스런 아름답게 보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교수에게 다가가 예수를 믿게 되었고 믿어보니 그 예수가 너무나 귀하고 아름답고 그리고 그 교수님이 베풀어주신 사랑의 빛을 기억하여 의료선교사로 사역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 교수님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자기의 삶을 간증하는 일을 드러내지 않고 감추어두고 있었다면 그와 같은 열매를 맺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저는 강단에 설 때마다 늘 이렇게 기도하며 강단에 오릅니다. "하나님! 오늘도 내가 성령을 부리고 내가 성령을 쓰지 말고, 성령께서 나를 부리고 나를 쓰시기를 원합니다"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또한 설교를 할 때마다 느끼는 것은 성령님께서 나보다 먼저 강단에 와 계신다는 것입니다.


성도의 최고의 기쁨이 성령 충만이라면 반대로 성도의 최대의 비극은 성령 없이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몇 번씩이나 부인했던 베드로도 성령 충만함을 받은 후에야 전도의 권능을 얻었습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세 가지를 주십니다.


먼저 기쁨을 주십니다. 환경이나 고난을 초월해서 얻을 수 있는 그런 기쁨이 생깁니다. 사람과 사물에 대한 공포에서 해방되고 어떤 염려에서도 자유로워질 수 있게 됩니다. 바울과 실라처럼 감옥 속에서도 찬송하게 하는 그런 기쁨입니다. 저는 떨어지는 낙숫물 소리에도 불안하여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성령을 체험하고 난 후에 얼마나 기쁜지 지구를 들고 뛰어갈 수 있을 것 같은 담대함이 생겼습니다.


다음으로 믿음과 삶의 열정과 생기를 주십니다. 찬송도 기도도 예배도 삶도 다 생기가 넘칩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들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지 성령께서 주시는 열정이 있습니다.


한 신학생이 학비가 모자라 공사장에 가서 벽돌 짐을 지는 노동을 하였습니다. 같이 일하던 젊은이들은 온 종일 불평을 하며 일을 합니다. 그런데 기쁘게 일하는 이 젊은이를 보고 "당신은 왜 불평 하나 하지 않고 일만 합니까?" "나는 앞으로 세계를 내 두 어깨에 짊어지고 갈 사람이오. 그런데 이까짓 벽돌 짐 정도를 무겁다고 불평하면 어찌 세계를 짊어지고 갈 수 있겠소?" 그의 말을 듣고 난 젊은이들은 감동을 받아 그 후 다시는 불평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성령은 우리에게 능력을 줍니다. 자기를 이기는 능력,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능력, 아무리 큰 힘도 두려워하지 않는 능력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사람은 어디에서든 존귀한 사람이 됩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은 이방인 속에서 존귀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왕 앞에서도 왕보다 더 담대했습니다. 바로 성령 때문입니다.


옛날 로마에 사면 <카리스토> 카타콤이 있다고 합니다. <카리스토>라는 젊은 여인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신앙생활을 하다가 로마 군인들이 카타콤을 습격해 그만 체포되었습니다. 그들이 말하기를 "예수를 버리겠는가 아니면 이 창을 받겠는가"라고 물었을 때 <카리스토>는 손가락 셋을 내밀면서 "성부, 성자, 성령, 이 하나님을 당신들도 믿으십시오."라고 말하여 결국 로마 군인의 창검에 찔려 죽었습니다. 바로 그녀의 믿음을 기리기 위하여 그 카타콤을 <성 카리스토 카타콤>이라 이름지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카타콤 지하 4층에서는 하얀 대리석으로 아름다운 아가씨 <카리스토>상을 조각하였는데 손가락 셋을 내밀고 쓰러지는 모습을 새겨 놓았습니다. 말없이 서 있는 조각상이지만 이곳을 다녀가는 수천만 명의 관광객들마다 그 상 앞에서 마음을 열고 기도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합니다. 나도 그런 능력을 달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친히 전도의 열매를 맺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한 기독교 문서전도협회에서 문서전도를 위한 자원자들을 모집하여 훈련을 시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훈련생들은 말을 알아듣기 어려울 정도로 말을 더듬는 말더듬이가 훈련을 받고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대부분의 동료들은 그것을 불쾌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교육을 담당하는 한 간부가 정중히 그들에게 말하였습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감동시켜 이곳에 보내셨다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통해 어떻게 전도의 역사를 일으키시는지도 보아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여 계속 훈련을 받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몇 달이 지나 그 말더듬이는 상상 할 수 없는 많은 책을 보내달라는 연락이 계속되었습니다. 말도 제대로 못하는 사람이 그처럼 많은 책을 팔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한 본부에서는 전도자가 사람들에게 지나치게 강요하며 책을 떠맡기는 것이 아닌가 의심했습니다. 결국 본부에서는 본부 요원 하나를 파송해서 그 전도자와 함께 문서전도에 나서게 했습니다. 그 말더듬이 전도자는 시골길을 걸어서 한 집 한 집을 방문하며 전도 책자를 보급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어떤 집이든 그 집에 들어가기 전에 나무 밑이나 길가에 무릎을 꿇고 "하나님, 성령께서 먼저 저 집을 방문하여 그 사람을 감동시켜 주시옵소서.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주님만 믿고 갑니다."라고 기도를 하고 전도하는 것이었습니다. 놀랍게도 그가 방문하는 집마다 말더듬이의 잘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듣고도 책자를 사기로 약속하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역사입니다. 이처럼 전도는 성령의 능력으로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 자체가 우리 속에서 능력을 발하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은 반복해서 받을 수 있는 것은 사도들은 2장에서 충만하고 4장에서 다시 충만했던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성령 충만은 사랑 충만이요, 기쁨 충만이요, 평화 충만입니다. 환경이나 내 소유와 상관없이 충만합니다. 전도하는 힘, 기도하는 힘, 주를 섬기는 힘은 성령에게서 옵니다. 성령은 성경을 가르쳐 주시고, 주를 닮게 하시고, 고난과 시련 속에서 승리하게 하십니다.


서푼의 가치도 없는 것들에 대하여, 조그만 지나고 나면 아무 것도 아닌 자존심에 대하여는 열을 내고, 훗날에는 후회스러움 밖에 남는 것이 없는 정욕에 대하여 그리고 돈에 대하여 그렇게 민감하고 그렇게 열을 내면서도 성령에 대하여 진리에 대하여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는 무능한 그런 인생을 사시겠습니까? 아니면 성령 충만을 사모하여 전도의 능력 있는 그런 인생을 사기겠습니까?

출처/최삼경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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