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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목양 단상[1,073]〓/성경 교육 지침

요아킴 예레미아스(Joachim Jeremias;1900- )의 신학사상

by 【고동엽】 2022. 3. 5.

요아킴 예레미아스(Joachim Jeremias;1900- )의 신학사상

 

 

Ⅰ. 들어가는 말

 

불트만(R. Bultmann)과 콘첼만(H. Conzelmann)이 신약 신학을 실존주의적 방법으로 접근하였다면, 요아킴 예레미야스는 신약신학을 역사적인 방법으로 접근하고 있다. 따라서 요아킴 예레미야스의 신학사상을 연구하는 것은 실존주의적 방법을 가지고 신약신학을 접근하였을때에 간과하기 쉬운 "역사적 예수"를 고찰하는데에 큰 유익을 줄수가 있다. 이 과제(assignment)에서는 요아킴 예레미야스의 신학 사상을 고찰하는데에 목적이 있는데, 그의 대표적 저서인 [신약 성서신학 제1부]를 요약 정리해 나가면서 그의 신학적인 사상을 살펴보려고 한다.

 

Ⅱ. 생애및 주요 사상

 

1. 생애


요아킴 예레미야스( JOACHIM JEREMIAS)는 1900년 9월 20일에 독일 작슨 지방의 수도 드레센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루터교회의 파견목사인 그의 아버지를 따라서 예루살렘으로 가서, 거기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修學했다. 이때문에 그는 이스라엘의 종교, 언어, 역사와 문화에 해박하였다. 그는 20세에 다시 독일의 경건주의의 본거지인 작슨 지방 헤르후트으로 돌아와서 성경선생으로 일했다. 그후 헤르너 연구소, 베를린, 그라이스발트를 거쳐 1935년 이래 1979년 세상을 떠나기까지 그는 괴팅엔대학교 신학부 신약학 교수로서 강의했으며 수 많은 저서를 집필하였다. 그의 대표적인 저술서로는 [예수의 비유], [예수 시대의 예루살렘], [예수의 성찬어록], [알려지지 않은 예수의 말씀들], [예수의 기도], [신약성서신학 제 1부] 등이 있다.
그는 신약학자로서 역사적 예수의 말을 찾는데에 노력을 하였다.

 

2. 사상


요아킴 예레미야스( JOACHIM JEREMIAS)의 사상은 불트만(R. Bultmann)의 사상과의 비교를 할때에 더 분명하게 알수가 있다. 이 두사람은 같은 20세기 신약학계의 거장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신학적인 입장에서는 분명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것은 바로 "역사적 예수연구"에 관한 견해의 차이다.


불트만은 그의 대표적인 책 [신약성서신학]에서 역사적 예수는 신약성서 신학의 연구대상이 될수가 없다고 분명하게 선언한다. 불트만은 공관복음 자체가 역사적 사실기록문서가 아닌 초대교회의 신앙고백의 산물이라고 본다. 즉 그는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가 역사적인 예수가 아니라, 초대교회의 신앙 속에서 역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보았던 것이다. 따라서 불트만 그에게는 역사적인 예수는 관심이 없다.


그러나 예레미야스는 이런 불트만의 의견에 정면으로 반대한다. 예레미야스도 복음서들이 초대교회의 신앙고백적 문헌임을 인정하나, 그 속에는 지상적 예수 그리스도에게까지 올라가는 오래된 "예수 전승(Jesus- berlieferung)"둘이 상당부분 내포되어 있음을 주장한다. 즉 복음서에 기록되어있는 예수의 말씀들이 블트만이 말처럼 초대교회의 필요와 요청으로 교회에 의해 형성된 것이 아니라, 그중 상당부분이 실제로 지상적인 역사적인 에수의 입에서 선포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이런 신학적인 견해아래 복음서 속에 "전승(Tradition)"과 "해석(Interpretation)"의 층이


있음을 중시하고, Perrin등의 학자들이 일부 사용한 방버들을 신중히 적용하여서 초대교회의 신학적인 해석층과 예수의 전승을 구별해낼수가 있다고 강조했다. 즉 예레미야스의 신학적 사상으 가장 큰 특징은 "역사적인 예수"에 관심을 갖았다는 것이다.

 

Ⅲ. 예레미아스( J. JEREMIAS)의 신학사상
- [신약성서신학 제 1부]를 중심으로 -


1. [신약성서신학 제 1부]의 개요


이 책은 앞서 말한 예레미야스의 주된 사상인 역사적 예수의 공생애 연구만을 철처히 다루고있다. 이 책은 총 7장으로 되어있다. 먼저 1장에서 그는 왜 역사적 예수의 문제점들이 발생하고 있는가를 설명하고 있다. 그는 이런 문제가 발생하고 있는 이유가 "자료평가의 문제점"이라고 본다. 즉 우리가 역사적인 예수의 선포와 그의 기본 사상을 선포할수 있는 역사적으로 믿을만한 자료가 있느냐 없느냐하는 문제라는 것이다. 그는 역사적인 예수를 찾을수 있는 믿을만한 자료들이 있다고 본다. 그래서 예레미야스는 1장에서 역사적인 예수의 선포와 사상을 찾을수있는 신빙성 있는 "언어적-문체적 분석연구"등의 여러방법들을 서술하고 있다.
그는 1장의 이런 기초작업을 전제로 해서 2장에서 6장까지의 예수의 공생애에 관한 예레미야스의 신학사상을 다루고 있다. 여기서 각 장의 제목을 살펴보면, 2장은 "에수의 사명", 3장은 "구원의 때의 여명" , 4은 "은헤의 시대", 5장은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 6장은 "자신의 사명에 대한 에수 자신의 증거", 7장은 "부활의 날"이다. 즉 예레미야스는 이 책에서 초대교회의 신앙고백을 목적으로 쓴 복음서에서 역사적인 에수전승을 찾는 여러방법들을 조심스럽게 사용하여, 예수의 가르침과 활동, 그의 메시아적 자의식, 수난과 부활등의 문제에 대해 예레미야스 나름대로의 신학 사상을 전개하고 있다.

 

 

2. 예수의 말씀의 전승은 얼마나 신뢰할만한가?

 

예레미야스는 [신약성서신학 제 1부]의 제1장에서 역사적 예수의 연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근거인 자료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는 이 문제를 다룰수 밖에 없는 이유를 두 가지 이류를 들어서 말하고 있다. 그 첫째 이유는 우리들에게 "예수 자신이 기록한 글이 없다"는 것이고, 둘째 이유는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수의 전승이 얼마나 신뢰성이 있게 전해져왔는가"이다.


예레미야스는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역사적인 예수에 관한 자료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러한 방법으로서 그는 첫째로 페린(N.Perrin)이 제시한 비교방법을 들고 있다. 즉 이 방법은 소위 '부동성의 표준(criterion of dissimilarity)"의 방법으로서, 하나의 말이나 사상이 유대주의나 초대교회에서 도저히 유래될수 없는 최초의 전승을 찾아, 바로 그것이 역사적 예수의 전승이라고 볼수있다는 방법론이다. 그러나 이 방법에 약점이 있음도 그는 말하고 있다. 즉 팔레스틴 유대주의 및 초대교회의 종교적 개념의 비교가 너무나 일방적으로 독창성의 원리에 기초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이 방법론은 아주 일부분의 예수 전승에만 적용을 할수밖에 없다는 이야기이다. 따라서 또 다른 역사적 예수를 찾을수있는 또 다른 방법도 필요하다고 그는 말하고 있다. 그 방법론이 "언어와 문체"를 고찰하는 방법론이다. 1장에서 예레미아스는 주로 "언어와 문체"를 고찰을 통해서 역사적 예수를 찾는 방법론을 설명하고 있다.


예레미야스는 "언어와 문체"를 고찰을 통해 역사적인 예수를 찾는 방법 3가지를 설명하고 있다. 첫째는 예수의 어록의 아람어적 근거를 통해서 역사적 예수를 찾아가는 방법이고, 둘째는 예수가 선호한 화법을 밝히므로써 역사적 예수를 찾아가는 접근이고, 셋째로는 "예수의 실제 음성의 언어적 특성"을 고찰해 나가므로써 역사적인 예수를 찾아가는 방법론이다.

 

 

① 예수의 어록( )의 아람어적 근거


예수의 어록( )의 아람어적 근거를 통해서 역사적 예수를 찾아가는 방법은 예수의 모국어가 "서방 아람어의 갈릴리역(譯)"이었다는 사실을 근거로 하여, 성경 속에 나와있는 이 방언을 찾으므로써 역사적인 예수에 관한 어록을 찾을수 있다는 것이다. 가령 달리다굼( ), 엘리엘리 라마 사박다니( ) 등이 복음서에 들어있는 예수의 어록이다. 또 원래의아람어뿐만 아니라, 히브리어나 헬라어에서는 생소하게 보여지는 표현들 속에도 역사적인 예수의 어록의 증거들이 들어있다는 것이다. 가령 히브리어인지 아람어인지 논란이 되고있는 에바다( )등을 들수가 있다. 즉 이 접근 방법은 예수 말씀이 아람어를 배경으로 가졌다는 것과 당시의 유대주의에 유행했던 셈어들의 특징과 대조해서 역사적 예수를 찾아가는 방법이다.

 

 

② 예수가 선호하는 화법


예레미아스는 예수가 선호하는 어법이 당시의 사용하는 어법과 비교해볼때에 매우 도특한 것임을 발견하고, 그 특징을 사용하여서 역사적인 예수를 찾으려고 하였다. 예레미아스가 발견한 예수만의 독특한 화법으로는 신적인 수동형, 반위적 평행법, 운율, 두운·유운·문자의 기교이다.


예수의 신적인 수동형이란 하나님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고 다양한 완곡어법으로 하나님을 표현했다는 것이다. 에수의 말씀에 신적인 수동형이 약100번 가량 나타나고 있다.


반위적 평행법이란 명사, 동사, 형용사 등을 반대적으로 (보통 한쌍의 반대어를 통하여) 사용함으로써 그 뜻을 분명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 가령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고 네 원수를 사랑하라"를 들수가 있다. 그런데, 예수의 반위적 평행법은 대체로 둘쨰 항목에 강세가 있다. 예수의 말씀에는 구약의 예언적 말들에 있는 운율적인 성격을 띄고 있다고 예레미아스는 말한다. 예수가 사용한 운율은 두박자 운율, 세박자 운율, 네박자 운율, 키나 운율을 들수가 있다.


또 에수님이 선호하는 화법으로 두운·유운·문자의 기교가 있다. 이것은 예수의 말씀을 다시 예수가 사용하신 아람어를 번역을 할때에 두운·유운·문자의 기교가 나타남을 통해서 밝혀진 것이다.

 

③ 예수의 실제 음성의 언어적 특성
예수의 실제 음성의 언어적 특성은 예수께서 사용하신 비유, 수수께끼, 하나님의 통치, 아멘, 아바를 잘 사용하셨다 점을 근거로 해서 역사적인 에수를 찾아나가는 것이다.
지금까지 말한 방법들로 인해 찾은 것들이 모두 역사적인 예수의 실제적인 말씀이라고는 할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적 에수의 진정성을(authenticity)의 실마리를 우리에게 줄수 있다.

 

 

3. 예수의 사명


예리미아스는 이 장에서 세례 요한과 예수의 관계를 비춤으로써 예수의 사명을 진술하고 있다. 먼저 우리는 예수의 선포를 설명함에 있어서 어디를 출발점으로 삼는가를 잘 생각해 보아야한다. 왜냐하면 이 문제는 "예수가 어떻게 출현하여 복음을 선포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문제이기도 하기때문이다. 이 문제는 먼저 세례요한과 예수의 관계를 통해서 살펴보아야 할것이다. 성경만을 볼때에 예수와 세례 요한의 조우는 예수의 세례 순간으로 압축도어있다. 예레미아스는 이에대한 이유가 세례 요한에 대한 예수의 종속이나 동등됨을 가능한 멀리 피하기 위해서 성경에 그렇게 기록했다고 보고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가 세례 요한에 대해서 놀라운 평가를 내리고 있음을 성경에서 보고 있다. 또 예수는 여러면에서 세레 요한을 따랐다 예수는 요한과 같이 공중들 앞에서 설교를 하였고, 요한처럼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회개하기를 선포하였다. 이런 점에서는 예수는 세례 요한에게 종속되었다는 의견을 개진할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요한과 분명한 차이점이 있었다. 요한은 금욕적인데에 반해, 예수는 세상에 대해서 포용적이었다. 또 요한 심판을 주장한데에 반해, 에수는 하나님의 통치가 가까옴을 주장하였다. 즉 우리는 세례 요한과 에수 사이에 많은 유사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다른점이 있어 근본적인 차이가 있음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예수는 요한으로부터 세레를 받을때에 소명을 체험하였다. 우리는 이 예수의 역사적인 체험을 의심할수가 없다. 또 예수는 세례 요한을 통해서 세례를 받았을때에, 우리는 그 이야기를 통해서 '영의 전달'이 있었다는 것과 '와의 즉위가 아닌 종의 영역으로의 이끌림'의 결과가 있었던 것도 알수가 있다. 즉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이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았을때 체험했던 소명"이 그의 사역의 출발점인 것이다.


에수의 세례 이외에 예수님의 사명을 이해하는데에 이해되는 구절이 마11:27, 눅10:22의 말씀이다. 즉 이 구절들 속에서 우리는 계시의 전달자로서의 예수를 살펴볼수가 있다. 예수님의 의식 속에 하나님에 관한 지식의 수령자요 중개자라는 의식이 들어있다는 것이다. 이와함께 예수님의 사명을 이해하는데에 이해데에 더 관심을 가져야 할것은 예수께서 하나님께 대해서 "아바"라는 호칭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유대주의에서 하나님이 '아바'라는 말로 한번도 불려진 예가 없는 반면에, 예수님 자신의 기도 가운데에는 항상 '아바'라고 부른 사실을 들어 특이한 것임 알수가 있다. 예수의 '아바'호칭의 사용은 예수의 사명의 궁극적인 신비를 표현하는 것이다. 즉 자신이 하나님의 계시를 전달하는 권세를 가졌음을 의식하는 말이다.


에수님의 사명은 곧 사탄의 시험에 응답해야만 했다. 그런데 사탄의 시험은 궁극적으로 보면 '정치적 메시야로서의 예수의 출현'에 대한 유혹이었음을 알수가있다. 그러나 에수는 이 유혹에 대해서 거부를 하였다. 이 의미는 유혹에 대한 승리일뿐만 아니라, '사명에 대한 예수 자신의 응답'의 의미까지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구약의 위대한 인물들이 자신의 신앙을 시련으로써 증명했듯이 예수도 그런한 것이다. 또한 예수의 시련은 종말론적인 의미로 해석할수도 있다. 즉 예수님의 승리는 곧 구원의 여명의 의미한다는 것으로 볼수도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에수는 그러한 자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4. 구원의 때의 여명


예레미아스는 이 장에서 예수님의 말씀 선포의 가장 큰 의미가 무엇인지를 말해주고 있다. 우리는 예수의 사명에 대해서 항상 많은 점에서 모호한 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의 말씀과 행동을 통하여서 분명한 정보들을 얻을 수가 있다. 첫째로 알수가 있는 정보가 예수님을 통해서 끊어진 영들이 회복하는 것을 알수가 있다. 예수는 그가 영을 소유하였다고 여러 차례 말하고있다. 이런 영 회복의 의미는 심판의 때가 끝나고 은혜의 때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영이 있는 곳마다 이중적인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볼수가있다.


이것은 사탄의 통치의 정복을 의미하기도 한다. 당시는 질병과 귀신이 성행하였다. 그래서 귀신을 두려워하고 숭배하는 일까지 일어났다. 즉 악이 최고 절정에 이르는 시대인 것이다. 이런 시대에 예수가 사탄을 쫓음으로써 사탄의 멸망을 도래케하였다.


이러므로써 하나님의 통치의 여명이 열린 것이다. 대표적인 성경 구절인 누가복음 7:22 이하에서 볼수가 곧 이것은 가난한 자의 복음을 의미하기도 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가난한 자'란 의미는 '돈 없는 자'라는 의미가 아닌,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라는 의미이다. 예수께서는 말씀과 행동으로써 오직 그들에게만 하나님 나라가 있는 것임을 선포하셨다. 바로 이것이 예수께서 열어놓으신 구원의 여명인 것이다.

 

5. 은혜의 시대


예수는 구원의 여명을 열어놓으셨을뿐만 아니라, 그것을 충분히 드러낼수있는 재앙도 선포하셨다. 복음은 심판에 앞선 마지막 유예기간을 선포한다는것 이라고도 할수가 있는 것이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가 도래하기 이전에 재앙이 임할것이고, 이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것이라고 확신을 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 재앙이 언제 임할 것인지는 거부하셨다. 다만, 바실레이아 선언, 제자들의 부르심, 선교의 말씀들, 회개에의 부르심, (이 세대 말씀들), 고난과 위로의 말씀들, 포도주를 마시지 않겠다는 말씀, 겟세마네 기도 등을 통하여서 재앙의 임박 성을 말씀하신다.


또한 이와 함께 예수께서는 화(禍)를 이야기하고 계신다. 즉 동시대인들의 화, 제사장·서기관·바리새인들에 대한 화에 대해서 언급하시고, 또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시키는 경건을 결의법적인 형식으로 단호히 지적하신다. 이런 화에 대해서 언급하시므로써 예수는 사람들이 멸망으로 치닫고 있음을 보고있다. 따라서 죄 속에서 사는 사람들에게 때의 도전의 말씀을 주신다. 그것은 바로 '회개'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회개'는 죄 뉘우침 그 이상의 것이다. 심지어 예수께서는 천국에 들어가기를 원하는 자들에게 다시 어린이가 되기를 요구하신다. 회개에 관해서는 세례 요한도 이야기를 하였다. 그런데, 세례요한의 회개는 '심판의 두려움에 인한' 회개라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회개'는 동기에 있어서 '하나님의 한량없는 은혜의 체험'이다. 즉 동기에 있어서 근본적인 차이를 가지고 있다. 즉 예수님이 말씀하신 회개는 탕자가 아버지의 집에 돌아가는 것과 같은 기쁨이 있는 회개인 것이다. 회개를 통해서 생명을 얻음과 동시에 다시 자녀가 되는 기쁨을 누릴수가있는 것이다.

 

6.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


'나를 따라 오너라"이 말씀은 예수님의 부름을 받은 사람들에게 주시는 예수님의 도전의 말씀이다. 에수님의 도전의 말씀 중의 가장 큰 것은 하나님의 믿음의 말씀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믿음은 '이적에 대한 단순한 믿음 그 이상'의 것을 의미한다. 성경에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의 믿음은 가족이나 소유, 심지어 자기 생명까지도 바치는 믿음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아주 큰 믿음에만 관심을 가졌던 것이 아니다. 예수는 또한 약한 자의 믿음과 대표적인 믿음도 존중을 하였다.


이런 예수님이 원하시는 믿음을 가진 공동체를 예수님게서는 그이 가족보다도 귀히 여기셨다. 예수의 전체활동의 유일한 의미는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백성을 모으는 것이다.
그런데 그 당시에 그룹을 모았던 것이 예수가 처음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런 예수의 자녀 됨이 다른 그룹들과는 구분되는 '은혜의 무한성과 무조건성'을 가진 예수의 메세지에 있는 것이다. 즉, 예수께서 모은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의 주요한 성격은 그들이 하나님 은혜의 무한성을 인식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를 맺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는 새로운 관계를 갖는 것이다. 복음서를 통해 하나님의 이미지를 보면, 경배하는 무조건 주나, 창조의 주가 아니라 '너희의 아버지'로 인식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또한 이것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계속되는 것이다. 또한 이 하나님 아버지는 항상 안전하게 지켜주시고, 심지어 죽음조차도 두렵지 않게 하시는 분이다.


자녀들은 아버지와 대화를 할수가 있는데, 바로 그것이 '기도'이다. 예수는 그 당시의 유대 기도와는 새로운 기도를 보여주셨다. 첫째로 일상적인 생활 가운데에서 기도의 모범을 보여주셨다는 것이고, 둘째로는 주기도문으로 기도를 가르치셨다는 것이다. 예수는 기존의 형식과 내용을 산산조각내어 버린다. 예수님은 기도에 대해서 은밀하고, 짧게 기도하여야 하며, 용서할 준비가 전제되어야 한다고 가르치셨다.에수님이 가르쳐주신 주기도문은 마치 마라나타와도 같은 종말론적인 기도이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사람에게는 '제자의 생활'을 생각할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새로운 사람이 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즉 옛 시대는 새로운 것을 대체되어야 하는 것이다. 에수님은 구약의 율법이나 구전을 비판하시고, 사랑의 계명을 새생활의 윤리로 주셨다. 이 사랑의 특징은 무한성이다. 이 사랑의 율법은 강제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감사가 넘쳐나오는데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이다. 예수는 또한 구체적인 생활 속의 윤리도 제시하고 계신다. 일상생활 가운데에서 말의 훈련된 사용, 모든 소유를 포기하는 삶, 여자를 남자와 동등한 인격으로 취급하는 것, 어린이들을 인격적으로 대우하는것, 의식주를 위해서 일하는 것을 금지하는 것등에서 구체적으로 말씀하시고 계신다. 또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사람이 하여야 할일은 하나님의 사자가 되는 것이다. 에수님은 열두 제자들에게 아무것도 가지지 말라는 업격한 금지와 함께 가르침과 위임과 권세를 주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셨다. 그들은 고난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종말론적인 고통의 때가 지나면 승리한다. 즉 전환점을 통하여서 하나님 통치하는 시대가 다가온다. 이때에 창조와 구속이 완성되어진다.

 


7. 자신의 사명에 대한 예수 자신의 증거


이 장에서 예레미아스는 예수의 자의식을 심층적으로 다루고 있다. 예수는 먼저 구원을 가져오는자로 자의식을 가졌다. 이것은 예수께서 구원을 상징하는 말들을 사용하시면서, 강조적 용법인 " "를 사용하셨다. 에수는 자신이 구원을 가져오는 자라는 사실을 공적인 선포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또 에수는 '인자'라는 자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유대에서는 인자라는 사상이 묵시전승으로 계속해서 내려왔다. 이 유다 사상 속에 있는 인자의 의미는 '나의(하나님) 종이라는 뜻이다. 예수는 인자를 삼인칭으로 항상 말하고 있으며, '온 세상을 위하여 구원을 가져오는 자'라는 의미로 사용하셨다. 이러므로써 예수는 자신과 인자의 관계를 신비한 관계로 묘사하였다.


에수의 자신을 이해할때에 꼭 지적해야 할 것은 예수 자신이 죽음을 어떤 의미로 부여하고있는가 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죽음을 3번 언급하고 있다. 에수는 자신의 죽음이 곧 일어날것이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또 우리는 예수 자신의 죽음 이해를 "성찬의 말씀들", "많은 사람들을 위한 대속물", "칼에 관한 말씀", "엘리야에 관한 말씀", "넘기워짐", "목자에 관한 말씀", "죄인들을 위한 중재"를 통해서 살펴볼수가 있다. 이것을 통해서 알수있는 예수가 가지셨던 죽음에 대한 자의식은 죄없는, 자발적인, 고난이며 힘겹게 힘을 지는, 하나님이 뜻하시는 고난으로 이해하셨다. 그래서 여기에서 주어지는 생명은 하나님과 더불어 그리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생명이기 때문에, 이러한 죽음은 무제한의 속죄능력 능력을 갖는 것이다.

 

8. 부활의 날


우리는 문서상 수난의 문제와 부활의 이야기 속에서 차이가 있음을 보게된다. 부활의 이야기는 관련된 사람도 약간은 다르고, 장소도 다양함을 보게된다. 이것은 부활의 이야기가 손질되었다는것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이 이유 4가지의 부활의 형성동기들 가운데에서 찾을수가 있다. 즉 부활하신 자의 말씀들에 의해서, 부활을 조롱하는 사람들에게 대한 변증법적인 동기에서, 교회 안에서의 발전에서, 당시의 이야기체 Style에서 찾을수가 있다. 예수의 부활은 '여인들이 부활의 날 아침에 방문을 때'라는데에 일치를 보고있다. 또 이때에 예기치 못한 일이 일어나는데에, 여인이 천사를 만났다는 것이다. 즉 예수의 부활은 사람들에 의해 직접적인 체험의 표현으로 나타난다. 그 부활에 대한 경험은 그의 왕위에 등극을 경험하는 것과 같다. 즉, 역사의 과정 속에의 그들은 파루시아를 경험하게 된 것이다 즉 이로서 "지금 여기에서 세상의 완성 속에서"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Ⅳ. 맺는 말

 

예레미아스는 철저히 역사적 자료를 중시하므로써 역사적인 예수의 말을 찾으려고 노력하였다. 그는 예수가 초대교회에 사정에 가려져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초대교회는 교회의 상황에 따라서 예수의 말과 행동을 재해석하였다. 그래서 그는 경전 중에서 예수의 말을 찾으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즉 그의 가장 중심된 사상은 역사적인 에수를 찾는 것이었다. 그것은 그 당시의 케뤼그마 에수를 찾는 학자들과는 전혀 다른 견해이었다. 즉 그의 사상의 독특한 점은 다른 것보다도 예수에 대해서 다른 어떤 학자들과는 달리 역사적 예수를 찾는데에 동기를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예레미아는 이런 독특한 차원에서 예수에 대해서 접근하였다. 그가 말한 예수의 사명은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는자 이었고, 가난한 자에게 구원을 전하는 자이었고, 하나님의 백성을 모으시고,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에게 생활윤리를 가르쳐주시고 자신의 사명에 대해서 분명히 아시는 분으로 서술해 놓았다.


예레미야스의 이상과 같은 역사적 예수를 향한 신학적인 접근법은 우리가 성서신학을 하면서 배워야할 방법론인것 같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신약 성서신학 2부를]을 쓰지 못하고 예레미아스가 죽은 것이다.

 

참 고 문 헌

 

1. 성종현, [신약총론], 서울:장로회신학대학교 출판부, 1994.
2. 레온하르트 고펠트 [신약 신학Ⅰ], 서울: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5.
3. 요아킴 예레미아스 [신약 신학], 서울:새순출판사, 1993.
4. [예수의 비유], 서울:분도출판사,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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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시대 예루살렘" - 신약성경의 배경이되는 예루살렘이야기


예수시대의 예루살렘
예레미아스 | 한국신학연구소 | 1992년 05월


요아킴 예레미야스( JOACHIM JEREMIAS)

요아킴 예레미야스는 1900년 9월 20일에 독일 작슨 지방의 수도 드레센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루터교회의 파견목사인 그의 아버지를 따라서 예루살렘으로 가서, 거기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修學했다.
이때문에 그는 이스라엘의 종교, 언어, 역사와 문화에 해박하였다.
그는 20세에 다시 독일의 경건주의의 본거지인 작슨 지방 헤르후트으로 돌아와서 성경선생으로 일했다.
그후 헤르너 연구소, 베를린, 그라이스발트를 거쳐 1935년 이래 1979년 세상을 떠나기까지 그는 괴팅엔대학교 신학부 신약학 교수로서 강의했으며 수 많은 저서를 집필하였다.
그의 대표적인 저술서로는 [예수의 비유], [예수 시대의 예루살렘], [예수의 성찬어록], [알려지지 않은 예수의 말씀들], [예수의 기도], [신약성서신학 제 1부] 등이 있다.
그는 신약학자로서 역사적 예수의 말을 찾는데에 노력을 하였다

 

 

목차

1.경제적 상황
2. 수공업
3. 상업
4. 외국인여행
5. 사회적 상황
6. 부자
7. 중간계층
8. 빈자
9. 예수시대 예루살렘 주민의 자산상태를 형성하는데 결정적인.....
10. 사회적 상층계급
11. 민족적 순수성의 보존

 

 

비록 자유주의 신학자이지만
또 역사적 예수 연구라는 것에 몰두하여 이루어낸 책이지만
예수님 당시의 예루살렘의 정치 사회적
경제적인 여러상황들에 대한 균형잡힌 자료를 접할 수 있다.

 

성경을 읽는 다는 것은
2000년 이상의 간극을 두고
이당과 저 땅의 문화와 환경을 넘어서야하는 일이다.
물론 성령의 도우심으로 우리는 그일들을 할 수 있으나
좀 더 깊이 그 말씀을 연구하고 공부하며
나아가 그 말씀을 나누기 위해서 좋은 참고자료가 될 수 있으리라.

 

성경은 너무 이성적으로만 이해하려고 하면 않되지만
그러나 우리에게 주어진 이성을 무시하고는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이해하는것이 쉽지 않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성을 주심으로
당신의 말씀을 잘 깨달아 알 수 있도록 하셨기에...

 

 


예수시대의 예루살렘

요하힘 예레미야스

 

제1부 경제적 상황


I . 수공업


이 시대의 전형적인 산업형태는 수공업이다. "자기 자식에게 수공업을 배워주지 않는 사람은 마치 강도질을 가르치는 사람과도 같다. 이 시대의 율법학자들은 대부분 수공업에 종사하였다.

 

 

1. 예루살렘 사람들의 직업과 직업조합


가. 일반 직업


1)소비재 제조업


(1) 가정용품


우리는 유다에서는 모직물을 ,갈릴리에서는 아마 제품을 여자로부터 살 수 있다는 말이 있다. 양모 가공업이 유다의 특산물이었다. 양모 가공은 결혼한 여자들이 종사해야하는 노동이었다. 예루살렘 사람들은 직조업을 경영했다. 직조업은 여자들이 종사할 수 있는 직업이었는데 남자들이 그것을 경영할 때에는 멸시받는 직업이었다. 철공업은 신시가지에 자리 잡고 있었다.

 

 

(2) 사치품


시리아에서는 향유와 수지가 생산되었다. 예루살렘에서는 올리브가 가공되었다. 예루살렘의 유일한 수출품은 기름이었다. 수지와 기름의 제조도 예루살렘의 발전된 수공업이었다. 마르코복음 16장 1절에는 예루살렘에서 향유가 판매되었다고 언급한다. "그 여자들은 그에게 가서 그의 몸에 기름을 바르려고 기름을 샀다" . 대체로 사치와 관련된 수공업은 헤롯 왕궁으로 인해서 번창하였다. 그 가운데 가장 먼저 생각해 볼것은 공예품이다. 두루마리의 필사자의 작업도 공예품 가운데 하나였다.


요약하면 시리아 속주에서는 가장 중요하게 여겨진 수공업들이 예루살렘에도 있었다. 무엇보다도 공예와 기름 제조는 중요한 역활을 했다.

 

 


2)건축업


(1)건축물


헤롯 가문의 통치자들은 건축을 좋아하는 군주들이었다. 그래서 건축업은 그들의 통치하에서 그리고 후세에 예루살렘의 주된 업종이 되었다.

 

(2)건축노동자- 대부분의 건물은 사치스러웠기 때문에 공예업의 활동범위는 넓었다. 외부 치장과 내부치장, 재료의 공급과 가공의 풍부한 다양성과 값비싼 공임을 놓고 매우 다양한 공예업이 서로 경쟁하였다. 노동자들과 공예가들 이외에 건축물을 유지하는 노동자들도 필요했다.


수로, 성벽, 성탑 및 예루살렘에 필요했던 모든 시설의 유지는 성전 금고에서 지불되었다.
요약하면 주후 70년 이전에 예루살렘은 많은 건축물들이 세워졌고 화려한 건축물도 건립되었다. 이로 인해 건축업과 공예업은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3)식료품업


기름 제조업이 발달했다. 예레미야 37:21 은 옛날부터 빵 제조업체가 조직되어 있음을 전제한다. 강우량이 적은 해에는 물을 판매하는 직업도 있었다. 마가복음 14:3에 언급된 물나르는 사람은 가정 노예가 아니라면 위에서 말한 물 나르는 직업에 종사했던 사람이다.


예술산업이나 건축 공예나 건축업이나 직조업이나 기름 제조업은 예루살렘의 가장 중요한 수공업이었다.

 

 

나. 수공업 길드


수공업의 조직은 우선 수공업자들의 동일한 장소에 모였다는 점에서 드러난다. 그렇지만 이를 능가하는 길드적 조직이 있었던 것 같다.

 

 

다. 성전 건축과 제의에 관여한 수공업


성전 건축에 고용된 자들은 누구보다도 석공이나 목수나 공예가들이었다. 사제들은 거룩한 구역을 건축하기 위해서 교육을 받아야했다. 특기할 만한 것은 석공 기술을 배운 사제들도 있고 미장 기술을 배운 사제들도 있었다는 사실이다.

 

성전이 건축되는 82혹은 84년 동안 제의는 한시간도 중단되지 않았다. 진설병 제조자들과 흠향 제물 제조자들은 제의에 소비되는 물품을 만들었다.
성전의 휘장의 관리도 할당되어 있었다. 제단사는 사제들의 예복을제작하는 데 필요했다. 우물 감독관은 성전용 급수의 책임을 맡았다. 그 밖에 성전 의사도 있었다. 끝으로 성전 이발사가 있었음은 틀림없다. 나지르인 서원의식이나 레위인의 성별의식이나 나병 치유자의 정결의식은 이발사의 존재를 전재한다.

 

그러므로 성전은 건축기간에 수공업의 중심지였을 뿐만 아니라 제의를 끊임없이 진행시킴으로써 수공업의 중심을 이루기도 하였다. 시간이 경과하면서 고정 관습들이 형성되었다. 그들은 도급제로 일했다. 한편 임금은 매우 충분하였다 . 성전 제의에 관련된 어떤 수공업들은 몇몇 가문들의 특권이었다. 그들은 이 직업을 세습하였다. 진설병과 흠향제물의 제조가 그런 것이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많은 수공업자들 특히 석수들과 목수들과 공예업자들이 성전 건축에 종사하였다. 그 이외에도 상임 수공업자들이 제의와 관련된 수공업에 종사하였다.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성전 수공업자들은 그들 나름의 노동 조건들과 관습들을 형성하였다.

 

 

2. 수공업에 영향을 미친 예루살렘의 특성

 

가. 수공업에 영향을 미친 예루살렘의 위치

 

예루살렘은 수공업의 매우 불리한 지역에 있었다. 대부분 원료는 부족하였다. 무엇보다도 물이 모자랐다. 역사상 예루살렘의 특산품을 생산해 내는 수공업이 그곳에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예루살렘의 지리적 상황이 수공업에 얼마나 부적당했는가에 대한 하나의 증거이다.

 

 


나. 수공업에 영향을 미친 예루살렘의 문화적 중요성

 


1)경제적 중요성


예루살렘은 원방 무역보다는 근방 교역에 더 종사하였다. 예루살렘이 이러한 교역의 대가로 지불한 수입원은 무엇인가?

 

첫째로, 성전의 막대한 수입을 들 수 있다. 둘째로, 이방지역 유대인의 왕래를 통해 수입이 예루살렘으로 수입되었다. 세째로, 최소한 자주적인 통치자들이 유다를 다스렸던 시대에는 세금 수입이 위에 말한 요인들 가운데 하나이다. 넷째, 무역에 불리한 위치에 있음에 불구하고 예루살렘의 관통하는 도로들이 있었던 까닭은 예루살렘의 경제적 ,정치적, 종교적 중요성 때문이다. 끝으로, 옛부터 예루살렘은 자본 능력을 가진 사람들을 유인했다는 점도 기억해야 한다.

 


2)정치적 중요성


궁정과 예루살렘이 거주했던 국가 지도자들은 큰 문화적 요구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사치품을 생산하는 수공업을 장려하였다. 의료행위도 이러한 요구들 가운데 하나였다.

 


3)종교적 중요성


예루살렘은 성전도시이다. 성전이 수공업의 제공한 잇점들은 비할 바 없이 많았다.
성전의 돈으로 예루살렘의 건축물들이 유지되었고, 예루살렘이 청소되었고 도로가 포장되었다. 많은 순례자들이 경건하게 헌금을 하였으므로 성전 수공업자들은 수입을 올릴 수 있었다. 순례자들은 기념품 산업에 활기를 불어 넣어 주었다 많은 순례자들은 예루살렘 특산물을 집으로 가져갔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성전은 수공업의 중심지였다. 일군의 수공업자들이 성전 건축에 종사하고 또 다른 수공업자들은 항상 제의와 관련된 일에 종사하였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의 특성은 다음과 같다: 비록 예루살렘의 위치가 수공업의 발달에 불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문화적 중요성 때문에 예루살렘 안에서는 수공업이 개화하였다.

 

 

II. 상업

 

1) 예루살렘의 상업에 관한 정보들

 

가. 개관: 예루살렘의 상품 수입 및 거래 경로


상인이라는 직업은 매우 존중받은 직업이었다. 사제들조차도 상업에 종사하였다. 대사제 가문도 유망한 상업에 종사하였다. 예루살렘의 상품 수입 및 거래 경로를 살펴보자. 긴 대열을 이루곤 하는 낙타대상들은 먼 지역으로부터 예루살렘으로 상품을 가져왔다. 인근 교역의 경우에는 운송용 짐승으로 나귀가 이용되기도 하였다. 상업에 있어서 중요한 문제는 도로의 안전이었다. 헤로데는 도둑의 횡행을 막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다행스럽게도 예루살렘 시장에 도착하면 사람들은 예루살렘의 시장세를 징수했던 세금청부업자에게 세금을 납부해야 했다. 세금을 납부할 경우에만 사람들은 저자에 나가 그들의 상품을 거래 할 수 있었다.

 

예루살렘에는 곡물시장, 과일시장, 가축시장, 목재시장, 살진짐승을 파는 시장이 있었고 심지어 노예들을 전시하고 판매했던 특별한 경매석도 있었다. 대도시 예루살렘은 물가가 비쌌다.
예루살렘 주변 지역의 마을에서 생산된 물품들은 생산자의 손에서부터 직접 소비자의 손으로 넘어갔을 것이다. 심지어 물물교환은 그 당시 팔레스틴에서 널리 통용되었던 것이다.

 

 

나. 원방무역


여러 자료들에 비추어 볼때 원방무역은 예루살렘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았다. 원방무역에 갖은 중요한 영향을 끼친것은 성전이었다. 그 밖에 원방무역의 상품은 식료품, 귀금속, 사치품, 옷감이었다.

 

 

다. 근방교역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옛날에도 근방교역의 중요한 역할은 대도시에 생활필수품을 공급하는 일이었다. 예루살렘에 수입된 주요 식료품은 밀과 올리브와 가축이었다. 기름이나 올리브는 유다로부터 공급되었고 곡물은 팔레스틴의 다른 지역으로부터 공급되었다.

 

 

1) 농산물 수입

 

(1) 곡물수입


기근이 닥칠 때에는 무엇보다도 곡물이 부족했다. 그래서 우리는 곡물이 식료품 수입의 대부분을 차지했다고 가정을 해야한다. 곡물은 예루살렘 인근지역에서 재배되었다.
예루살렘에 대한 곡물에 관한 정보가 부족하다는 사실은 이례적인 것이다. 그 이유는 곡물이대단히 먼 곳에서 수송되었기 때문인것 같다. 예루살렘 인근지역의 생산품을 개별적으로 시장에 내다 팔았으나 보다 먼 지역으로부터 곡물을 수송하는 것은 대상들의일이었다. 예루살렘시장의 곡물거래는 매우 중요했음에도 불구하고 양성화되어 있지 않았으며 오히려 뒷거래가 이루어졌다.

 


(2) 과일과 야채수입


곡물은 주로 유다인이 살지 않았던 팔레스틴 지역으로부터 그 가운데서도 특히 요르단 지방으로 부터, 부차적으로 갈릴리와 사마리아 지방으로 부터 공급되었다. 과일과 야채는 주로 올리브와 포도주, 무화과와 야채가 재배된 예루살렘 인근지역으로 부터, 예루살렘지역으로부터 공급되었고, 올리브와 포도열매가 재배된 유다로 부터, 부차적으로 공급되었다.

 


2) 가축수입


예루살렘 가축 수입에 관한 행정명령을 안티오쿠스대왕은 그의 왕국 전역에 걸처 반포했다.
"말이나 노새나 야생나귀나 길들인 나귀나 표범이나 여우나 토끼의 고기와 유다인들이 먹지 못하도록 금지된 모든 짐승들의 고기는 예루살렘의 수입되어서는 안된다. 더 나아가 이런 짐승의 가죽을 수입해서도 안되며, 끝으로 이런 종류의 짐승을 예루살렘에서 길러서는 아니된다. 단, 옛부터 하나님과 화해하는 제물로 쓰여졌던 동물들은 수입해도 무방하다".

 


3)원료와 상품의 수입


원료와 "상품"곧 목재,석재,양모,도자기는 팔레스틴으로 부터 공급되었으며 , 그것도 성전수요를 제외한다면 대부분 유다로부터 공급되었다.

근방무역은 주로 예루살렘의 생활필수품을 공급하였고 부차적으로 예루살렘의 수공업자들에게 원료를 공급하였다.

 

 

2. 상업에 끼친 예루살렘의 특성


가. 상업에 끼친 예루살렘의 지리적 위치

 

1)유리한 점- 예루살렘은 유다 전지역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다. 예루살렘은 사람이 거주할 수 있는 세계의 중앙이며 온 땅의 중심지이다.

 

2)실상 - 이러한 사실들로 부터 상업에 유리한 도로가 있었다고 추론한다면 그것은 잘못이다. 예루살렘이 산악지대에 외따로 떨어진 도시였음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은 어떻게 해서 교역이 활발하고 해상 교통로가 유리하게 전개된 한 속주의 중심이 되었을까? 그리고 그것이 예루살렘의 실상이다. 예루살렘에서 봉기가 발발하여 예루살렘 당국이 치안을 유지하지 못하게 되자 팔레스틴 지역은 강도의 불법행위가 연이어 일어났다. 그러나 강도의 위협 보다 더욱 더 괴로운 것은 예루살렘과 연결된 도로망이 부족했던 것이다.


나. 상업에 영향을 끼친 예루살렘의 문화적 중요성

 


1) 예루살렘의 경제적 중요성


예루살렘의 주변지역이 곡물재배에 적합하지 않을 정도로 비옥하지 않았고 또한 예루살렘 주변 지역에서 소가 거의 사육되지 않았기 때문에 식량 사정은 더욱 더 나빠졌다. 지리적 상황으로 인해 예루살렘에서는 가장 중요한 생활 필수품도 생산되지 않았고 다른 생활 자료 곧 가장 중요한 원료들도 생산되지 않았다.


요약하자면, 경제적 상황이 수입과 수출을 요구 했으므로 사람들은 상업에 불리한 지리적 위치라는 장애물을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2) 정치적 중요성


직접적인 영향- 왕들의 높은 문화적 욕구 (비싼 건축 자재 조달)
간접적인 영향- 민족 자본은 예루살렘을 상업의 중심지로 만듦.
예루살렘의 정치적 중요성은 무역에 활력을 불어 일으킴.

 


3) 종교적 중요성


성전제의를 위해서도 가장 질이 좋은 목재와 포도주와 기름과 곡물과 훈향제품이 필요하였다. 사람들은 희생 짐승을 많이 수입하였다. 축제 순례자들은 제 2의 십일조를 예루살렘에서 소비해야 했다. 예루살렘의 상업이 중요하게 된 까닭은 바로 성전 때문이었다. 유다인은 매년성전 금고에 헌금을 바쳐야했는데, 바로 이러한 우회로를 통해 전 세계의 유다인들은 예루살렘의 상업이 기여한 셈이다.

 

 

II. 외국인 여행


1. 예루살렘의 외국인 여행에 관한 정보들

 


가. 원거리 여행


예루살렘의 외국인 내왕은 게르마니아로 부터 바르티아 왕국을 거쳐 에디오피아에 이르기까지 이루어졌다. 다시 말하자면 이것은 그 당시에 알려진 거의 전 세계에 걸쳐 이루어진 것이다. 예루살렘의 외국인 여행은 우선 종교적인 동기에 의해서 다음은 정치적이거나 경제적인 이유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바빌론과 에집트와 시리아와 소아시아 사람들이 가장 많이 예루살렘에 여행하였다.

 


나. 근거리 여행


팔레스틴의 나머지 지역 사람들은 거래 때문이라기 보다는 종교적인 의무 때문에 예루살렘으로 여행하였다. 제의가 그리짐산에 집중되어있었던 사마리아 사람들의 경우는 예외였다. 팔레스틴으로부터 온 축제 대상들이 때때로 크게 증가하게 된 또다른 이유는 예루살렘이 모든 메시야운동의 목표였기 때문이었다.


근거리 여행은 무엇보다도 유다인들을 예루살렘과 결합시켰던 종교적 의무들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유다에 있어서는 예루살렘과의 경제적 정치적 관계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2. 외국인 여행에 영향을 미친 예루살렘의 특성

 

가. 여행에 영향을 미친 예루살렘의 문화적 중요성

 

1)정치적 중요성


예루살렘은 유다사회의 정치적 중심지였다. 예루살렘에는 산헤드린이 있었다. 산헤드린의 영향은 유다에 가장 강력하게 미쳤다. 세 번의 순례 축제들은 성전에서 거행되었다.
축제 집회의 정치적인 중요성 때문에 격동기에는 축제 대상이 엄청나게 증가되었다.

 

2)종교적 중요성


예루살렘은 바리새파 사람의 중심지였고 오랫동안 세계 그리스도교 중심지였다. 예루살렘은 종교적 대망의 목표였다. 무엇보다도 예루살렘에는 성전이 있었다. 사제들이나 레위인들이나 교대로 직무했던 순례 성소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직무를 교대하기 위해 성전으로 갔다. 전세계의 유다인들은 일년에 세 번 성전으로 몰려들었다.

 

 


제 2부 사회적 상황


A. 부자와 빈자


I . 부자


1. 궁전


화려한 궁정 생활을 하는 통치자들의 부요함은 예루살렘의 주민들에게 아주 분명하게 인지되었다. 왕에게는 일부다처제가 율법에 따라 허용되었다. 미쉬나가 허용한 최고의 부인은 18명이었다.


요세푸스는 통치자들의 방대한 지출을 충당한 수입에 관하여 몇가지 정보를 제공해 준다. 그는 헤로데의 영토를 분활받은 상속자들의 수입을 계산하였다. 그 계산에 따르면 헤로데의 전 영토에서 거의 960달란트가 세금으로 징수되었다. 헤로데는 1000달란트로 그의 모든 지출을 충당할 수 없었고, 아그립바 1세는 1200달란트로 그의 지출을 충당할 수 없었다. 끝으로 선심 공세나 뇌물도 항상 통치자의 수지계산에서 중요한 역활을 하였을 것이다.

 

 

2. 자산 계층

 

1)사 치


부자들의 잔치는 중요한 비증을 차지하였다. 사치비용의 두번째 중요 부분은 여인들의 지출비용이었다. 그 당시 유다인들에게는 일부다처제가 허용되었다. 그러나 여러 부인을 두고 가계를 꾸려 가는 것은 엄청난 금전 부담을 초래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부자만이 일부다처제를 누렸다. 귀족 가문들은 딸들이 결혼할 때 많은 액수의 지참금을 주었다. 여기는 시아버지를 위한 배당금도 있었다. 숙녀들은 예루살렘에서 그들의 사치품 수요- 향수와 화장품, 장신구와 금실이나 은실로 고정시킨 의치 등 -만을 위해서도 지참금의 10%를 사용할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2)자산 계층의 대표자들


예루살렘은 예전부터 팔레스틴의 민족자본을 유인하였다. 대상인 ,토지소유자, 세금 청부업자, 대금업자들이 그것이다. 사제 귀족은 자산가 계층에 속하였다. 전승에 따르면 대사제 가문들의 집에서는 사치가 극심하였다고 한다. 대사제들의 정규 수입은 어느 고에도 언급되지 않는다. 요세푸스는 주후 66년 유다-로마전쟁이 발발하기 이전의 격동기에 "대사제들이 파렴치해져서 그의 종들을 타작마당으로 보내 사제들에게 돌아갈 십일조를 강탈했다"고 한다. 또한 그는 "그래서 이제까지 십일조를 생계수단으로 삼았던 사람들은 영양부족으로 죽게 되었다"고 보도한다.


평사제들의 가난한 상황과 대조되는 사제 귀족 부유함이 우선 우리의 눈길을 끈다. 그다음 우리는 사제 귀족이 성전 금고에 매우깊이 관여했고 , 그의 후손들을 성전금고 관리인의 지위에 임명했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II. 중간계층


먼 곳으로부터 상품을 수입하여 큰 창고에 그것들을 보관하는 대상인들 이외에 시장에 소규모 점포를 가지고 있는 소상인들도 있었다. 또한 자기의 작업장을 소유하고 있으므로 다른 사람에게서 임금을 받고 일할 필요가 없는 수공업자들은 예외없이 중간계층에 속하였다.


사제들도 중간계층에 속하였다. 예루살렘에 거주한 사제들은 재산이 많았고 교육 수준이 높았던 것 같다.

 

 

 

II. 빈 자

 


1. 노예들과 날품팔이꾼


예수시대의 예루살렘에서 노예가 매매되었다는 사실은 노예 경매석에 의해 밝혀진다.
노예 소유는 농업 경제에서 중요한 역활을 수행하지 않는다. 날품팔이꾼은 노예보다 훨씬 많았다. 날품팔이꾼은 먹여주는 것 이외에 평균 1데나리온의 품삯을 받았다.

 

 

2. 구호금으로 생활하는 주민들


타인의 구호금에 크게 혹은 전적으로 의존하는 주민들이 많았다는것이 예루살렘의 특징이었다. 이들 가운데 먼저언 급해야 할 사람들은 율법학자들이다. 율법학자들은 자신들의 활동의 대가를 받지 못하도록 금지되어 있었다. 율법학자들은 무엇으로생활하였을까? 탈무드에 의하면 수백명의 랍비들은 수공업자들이었다고 한다. 만일 사도바울이 선교활동 기간에 수공업에 종사하였다면 그는 분명히 예루살렘의 랍비처럼 생활비를 스스로 버는 방식을 후대에까지 유지한셈이다.

 

율법학자들은 주로 구호금으로 생활하였다. 프란쯔 델리취는 "율법학자들이나 지혜교사들은 학생들의 자발적인 사례비에 의존하거나 . .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십일조의 할당금에 의존하거나 어떤 경우에는 성전 금고에서 출연한 구호금으로 의존하였다"고


판단한다.
그러나 우리는 사제들처럼 고정된 수입을 받았던 일련의 율법학자들이 있었음을 분명히 알고 있다. 또한 성전에 고용되어 해마다 바치는 성전세에서 급료를 지불받은 율법학자들도 고정 수입을 가지고 있었다. 끝으로 위에서 언급한 바를 확인하기 위해 예수의 가난을 언급하고자 한다. 예수는 가난한 가문 출신이었다. 예수는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그는 머리를 둘 곳 조차 없었다. 결코 돈을 휴대하지 않았고 보조금에 의존하였다. 그러므로 전반적으로 보아 랍비들은 가난한 주민들에 속했음을 알 수 있다.

 

 

 

IV. 예수시대 예루살렘 주민의 자산상태를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요인들

 

1. 정치적 상황


1)세금


국가는 주로 세금을 높임으로써 세력을 강화하였다. 세금은 헤로데 대왕의 통치 하에서 무자비하게 징수되었다. 헤로데와 그의 친척들 및 친구들 그리고 세금 징수자들 내지 세금 청부업자들과 그 부하들에게 바치는 뇌물들과 현물 징수와 특별 과세는 민중에게 훨씬 더 큰 부담을 안겨주었음은 틀림없다.

 

세례 요한은 자신의 옥외 설교에서 군인들에게 " 협박하거나 속임수를 써서 남의 물건을 착취하지 말고 너희 받는 봉급으로 만족하여라"고 권면한다. 벨릭스는 뇌물을 받기 위해 바울을 가이샤랴에 억류했다.

 

 

2)전투와 약탈


정치적 혼란기에 예루살렘은 유다의 수도로서 그리고 성전 도시로서 극심한 고통을 당할 수 밖에 없었다. 비록 예루살렘이 헤로데 치하에서 평정을 되찾았다 할지라도 헤로데가 죽은 후 주로 로마의 통치하에서 전쟁의 환란이 새로 나타났다.

 

 

2. 종교와 제의


1)사회 사업


자선은 유다인의 신심에 큰역활을 하였다. 우리는 예수의 설교에서 자선이 차지하는 역활을 과소 평가 해서는 안된다. "너희의 재산을 팔아 자선을 베풀라. " 그러므로 예수의 견해에 따르면 자선을 위해 재산을 사용하는 것은 계명을 철저히 이행하는 일이라는 사실이 밝혀진다.


경건한 축제 순례자는 순례할 때 자선을 베풀었다. 자선이 예루살렘에서 행해질 경우 그 행위는 특별히 보상을 받을 만한 일로 간주되었음에 틀림없다.
사적인 사회사업과 공적인 사회사업 중간에는 종교 공동체의 사회사업이 있었다.


우리는 예루살렘을 포함한 모든 도시에 교단 요원을 상주시키고 이들로 하여금 의복과 기타 생활용품을 공급하게 하였던 에쎄네파와 예루살렘의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이러한 사업을 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원시 공동체 안에는 토지 소유를 포함한 자발적인 재산 공동체가 있었으며 , 이 재산 공동체는 사회사업을 할 수 있었다.


이제 공적인 사회사업을 살펴보기로 하자.


1) 채무가 면제되는 안식년 규정


2) 가난한 자들을 위한 십일조 규정


3) 수확기에 가난한 자들이 주장할 수 있는 법률적 요구 등


2)수입원으로서의 순례자 내왕
순례자들의 제 2십일조는 7년을 주기로 한 기간의 처음 6년 동안 납부되었다고 한다.
필로는 제 2의 십일조는 사제들에게 납부해야할 세금으로 파악했고, 반면에 제 1의 십일조는 레위인들에게 납부되어야 할 세금으로 파악하였다.


3)예루살렘의 주요수입원은 제의를 매개로 한 수입이었다.


제의는 사제귀족이나 사제 계급이나 성전 고용원들의 생계를 해결해 주었다. 성전 금고로부터의 방대한 지출과 경건한 사람들의 제의 행위는 여러가지 방식으로 예루살렘의 수공업과 상업에 소득원을 제공해 주었다.

 

요약해 보면 예루살렘 주민들의 자산상태와 관련되는 예루살렘의 특성은 다음과 같은 점에서 엿볼 수있다.

 


1) 자선에 의존하는 주민들이 많다는점.
2) 한편으로는 이런 점으로 인해, 또다른 한편으로는 궁전과 사제귀족의 존재로 인해 야기된 사회적 고립의 긴장상태 .
3) 예루살렘의 복지가 그곳의 종교적 중요성에서 기인했다는 점.

 


B. 상층계급과 하층계급


I 사회적 상층계급

1. 사제 계급

 

1)대사제


대사제가 지도자 위치를 차지한 이유는 이 대사제직의 제의적인 성격, 즉"영원한 거룩함"때문이다. 대사제는 이 직무의 제의적인 성격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은 자로서 공동체를 속죄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대사제는 서품식을 통해 이러한 성격의 직책을 부여받았으며 여덟 부분으로 이루어진 대사제복을 받았다.

 

이 대사제복은 속죄의 힘을 가지고 있었다. 대사제직의 제의적인 성격을 특정짓는 것은 그의 죽음이 속죄의 힘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대사가 죽으면 바로 그 날에 피의 복수를 면하기위해 도피성읍 들에 도망가 있었던 살인자들도 자유의 몸이되어 고향에 갈 수 있었다.

 

이러한 대사제는 그에게만 허용되었던 특권을 누렸으며 그에게만 부여된 위무를 수행했다. 첫째, 그가 누렸던 가장 중요한 특권은 일년에 단 하루 , 죽음을 면치 못하는 피조물로서는 유일하게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 제의에서 대사제가 누리는 특권은 그가 원하기만 하면 언제라도 제물을 바치는 일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세번째로 대사제는 상을 당한 경우에도 제사를 봉행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네번째로 대사제는 "성전의 성물들"이 직무를 수행한 사제들에게 분배될 때 제일 먼저 선택할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그 밖의 다른 특권들 가운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대사제가 유다인의 최고 행정기관이며 최고 재판소인 산헤드린의 의장이라는 점이다. 대사제들의 또 다른 직위상의 의무들은 그의 제의 능력을 보존하기 위한 목적으로 대사제의 정결규정들을 준수하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대사제가 자기 지위에 합당한 예식을 치루는 것도 대사제가 직책상 수행해야 할 의무들에 속했다. 헤로데가 대사제직을 제거하기 위해 대사제를 자의적으로임명하고 또한 대사제 귀족들이 과거에 가지고 있었던 특권들을 무시하면서 평범한 사제 가문 출신의 사제들 가운데 아무나 대사제로 임명했다는 것은 그야말로 대사제의 권위를 뿌리채 흔들어 버리는 조치였음에 틀림없다. 헤로데 이후 로마인의 통치시대에도 대사제직은 더이상 평생직도 세습직도 아니었다.

 

 

2)고위 사제들과 고위 레위인들

 

서열표: 대사제 - 대사제의 대리인 - 12인의 고위 사제 - 주간 당직 사제들의 통솔자
- 12인의 고위 레위인들 - 주간 당직 레위인의 통솔자.

 

성전 경비 대장이나 성전 감독이나 창고 책임자는 성전 제의와 결부되어 있는 직책이었고 이들은 항상 예루살렘에 거주하여야 한다. 그렇지만 전국에 퍼져 살고 있었던 24개조의 주간당직 사제들 가운데 지도자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던 사제들은 각각 일주일간씩 24주간과 그 밖에도 세 가지 순례 축제때 성전에서 직무를 수행했다.

 

성전 경비 대장직은 성전 경비 대장을 지내지 않았던 사람은 대사제로 임명하지 않을 정도로 중요한 것이었다. 서열상으로 볼 때에 성전 경비대장 아래에는 주간 당직 사제들의 통솔자 24명과 일직사제들의 통솔자가 있었다.


제의 거행과 성전 재정 관리와 성전 감독은 고위 사제들과 고위 레위인들이 관장했던 세가지 직무였다. 신약성서에는 고위사제들이 성전에서 독립된 지위를 갖고 있었던 재판관이나 행정관으로 언급되어 있다.

 

고위사제들은 성전 행정을 맡은 집단으로서 유다가 성전에 되돌려준 "배반자의 삯"을 어디에 사용할 것인가를 결정하였다. 결국 이들은 "피의 삯"을 성전 금고에 넣어서는 안 된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들은 성전경찰의 고위 관리로서 이미 산헤드린에서 결정된 예수의 체포를 상의하기도 했으며 , 성전 광장에서 사도들을 체포하도록 명령하기도 했으며, 예수 부활을 조작하지 못하도록 무덤 경비를 명하기도 하였으며 , 사도들이 성전 경찰의 감시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감옥 경비를 명하기도 했다.

 

예루살렘의 고위 사제들이 다른 사람들과 구분되는 집단을 형성하고 있었다는 이러한 사실의 중요성은 고위 사제들이 사제귀족에 속했다는 사도행전 4장 6절의 진술에 의해 증대된다.
그러므로 사제들이 전부 고위 사제직에 오를 수 있는것은 아니었다. 이로써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제들간의 사회적인 격차는 다른 진술에 의해서도 확인된다.


탈무드와 요세푸스의 일치된 보도에 따르면 성전이 파괴되기 직전에 예루살렘의 대사제들과 그밖의 다른 사제들 사이에는 날카로운 대립이 있었다고 한다. 탈무드는 고위사제의 횡포에 대해 개탄한다. 탈무드는 고위사제들의 권력정책과 친척등용에 대해 불평하고 있다.

 


3)사제 귀족

 

예수 시대에 유다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역사관에 따르면 사독 대사제 가문은 아론 이후 계속해서 이스라엘의 대사제직을 세습했다고한다. 역대상 5장 29-41절은 아론으로부터 포로기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느헤미야 12장 10-11절은 주전 4세기에 이르기까지 이 사독 가문이 한번도 빠짐없이 대사제직을 맡은 것으로 나와있다.

 

아론으로부터 셀류커스왕조의 왕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에 이르기까지 사독 가문이 한번도 빠짐없이 대사제직을 세습했다고 보는 주후 1세기 유다인들의 역사관 만큼은 확인할 수 있다. 안티오쿠스 4세는 대사제의 임명에 관여하고 종교적안 박해를 가함으로써 사독 가문의 대 사제직에 종지부를 찍었다.

 

사독가문의 합법적인 세습에 의한 마지막 합법적인 대사제는 오니아스 2세였다. 주전 175년 안티오쿠스 4세의 명령으로 그의 동생 예수 (야손)가 그의 뒤를 이었다. 야손은 이에 대한 보답으로 안티오쿠스 4세에게 많은 돈을 바치고 예루살렘에 그리스 관습을 도입할 것을 약속하였다. 야손이 불법적으로 대사제에 임명됨으로써 대사제직의 계승에 혼란이야기되었다. 안티오쿠스4세는 그이 재임 3년째 되던해인 주전 172년에 그를 해임하고 그대신 비사독 가문 출신인 메넬라우스를 대사제로 임명했다. 메넬라우스는 사제계급인 빌가 가문 출신이었으며 그는 안티오쿠스 4세에게 보다 더 많은 세금을 바치기로 약속했던 것이다. 백성들이 아직도 살아있는 오니아스 2세를 합법적인 대사제로 간주한 것은 당연하다. 따라서 오니아스 2세는 메넬라우스의 위계에 위해 주전 172년 말 내지 171년 초에 암살되었다.

 

주후 1세기에는 두부류의 대사제 가문이 있었는데 하나는 비합법적인 가문이요 다른 하나는 합법적인 대사제 가문이었다. 합법적인 대사제 가문은 레온토폴리스의 오니아스 성전에서 재직하고 있는 사독 가문과 이 가문의 직계가문들뿐이었다. 비합리적인 대사제가문들은 주전 37년이래 우연과 정치의 파도를 타고 가장 높은정신적 직위로 부상한 인물을 한 명 이상 배출한 사제가문들을 말한다. 평범한 사제가문의 후손임에도 불구하고 백년 이상 대사제직을 차지했던 하스몬가문은 비합법적인 대사제가문으로서 헤로데에 의해 멸절되었기 때문에 주후 1세기의 대사제가문에 속하지 않는다.

 

우리는 사독가문이 비록정치적으로는 영향력을 가지고 있지는 못했지만 백성들의 의식 속에는 영향력있는 비합법적인 대사제가문들 보다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있다.
신약성서는 잘못해석되는 경우가 많은 사도행전4장 5-6절을 통해 새로운 계급의 친척등용제도에 대해 증언하고 있다. 이 신흥계급은 부와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 계급은 자신들에게 결여된 합법성을 부와 권력에 의해 보완할 수는 없었다.

 

 

4) "일반 "사제들


이 사제들은 유다민족 내부에서 다른 집단과 구별되는 혈통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 혈통공동체의 계보는 아론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사제직은 이 혈통공동체에 의해 세습되었다.
예수시대에는 사제들이 보통24개의 사제혈통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각 사제혈통들은 안식일에서 다음 안식일까지 순서에따라 일주일 동안 예루살렘에서 직무를 수행했다. 따라서 이 혈통들은 "______ 조"라고 불리워지기도 했다.


우리는 일직조에 속했던 사제들이 대체로 30명 이상이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같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사제들이 안식일과 속죄일에는 평일보다 더 많은 직무를 수행했다는 것이다. 조석으로 바치는 번제 이외에도 또 다른 공동체 제물들이 봉헌 되어야 했기때문이다.

 

사제가 제의기능을 수행했던 기간은 세가지 순례 축제기간과 연2 주간 정도였다. 나머지 10-11개월동안 사제들은 고향에 살면서 매우 드문일이지만 사제로서의 직무도 수행했다. 가령 완치된 나병환자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율법에 규정되어 잇는 정결제물을 바치고 나서 최종적인 정결 선포를 받기 전에 그 지역의 사제에게 정결 선포를 받기 위해 찾아온 경우가 그것이다. 그런데 십일조나 그 밖의 다른 세금으로부터 주어진 사제들의 수입은 이들이 일년 내내 아무 일을 하지않고도 살 수 있을 만큼 많지는 않았다. 오히려 사제들은 고향에서 직업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헤로데는 천 명의 사제들에게 목수일과 석수일을 가르쳐 사제의 뜰 안에 있는 성전을 개축할 때나 성전이 곳에 들어갈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미 우리는 비느하스가 사제로서 석수였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사제요 사독의 아들인 랍비 엘르아잘도 예루살렘에서 장사를 했는데 아마도 기름과 관련이 있는 장사였던 것 간다. 우리가 이미 살펴본 바가 있는 즈가리야의 아버지는 예루살렘의 사제였는데 그도 예루살렘에서 고기장사를 했다. 아자르야의 아들 사제 엘르아잘은 많은 짐승들을 사유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사제들 가운데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었던 율법학자들에 대해서 언급해야 할 것이다. 여러 지역에서 사제들은 지방재판소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사람들이 이들을 지방재판관으로 삼은 이유는 사제직에 대한 존경심 때문이요. 율법에 정통한 사제들의 경우에는 그들의 율법에 대한 학식 때문이며,또한 성서의 규정을 준수하기 위함이었다.


시골에 사는 사제들 가운데에는 필로가 언급한 바와 같이 사람들이 회당예배 때 율법을 낭독하고 해석하는 일을 기꺼이 맡길 정도로 율법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던 사제들이 있었는가 하면 전혀 학식이 없는 사제들도 있었다. 우리는 많은사제들과 대부분 사제귀족에 속하는 고위사제들 간에 심각한 대립이 있었다는 사실을 이미 언급한바 있다. 그러므로 주후66년 로마에 대한 봉기가 발발했을 때 많은 사제들이 무분별한 젊은 귀족과는 결탁하면서도 다른 고위 대사제들과는 적대적인 관계를 맺으면서 민중의 편에 섰던 것은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5)레위인들 (하급 성직자들)


신명기사에 의해 레위인으로 격하된 사제들의 후손인 레위인들은 하급 성직자들이었다. 사제들은 레위인이었던 아론의 후손으로서 레위의 후손들 가운데에서 높은 계급에 속했지만 아론의 가문의 사람이었던 사독의 후손들인 합법적인 대사제들은 대사제들 가운데 가장 높은 계급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레위인들은 사제들 가운데 하급 성직자에 속했으며 제의 자체에는 전혀 참여하지 못했다. 이들은 성전의 음악을 담당하였으며 성전에서 허드렛일을 했다. 이들의 지위를 엿보게 해주는 특정적인 사실은 무엇보다도 성전 건물에 발을 들여 놓거나 제단에 들어가는 것은 평민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에게도 사형죄에 해당되는 것이었다.

 

레위인들은 음악가와 성전일꾼으로 나뉘었다. 이들의 수효는 거의 비슷했다. 가수들과 음악가들은 레위인들 가운데 상층계급을 이루고있다. 이러한 직책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흠없는 가문의 출신이라는 것을 입증해 보이기만 하면 되었다.


레위인 음악가들은 성전건물이 있고 사제들만 출입할 수 있는 사제들의 앞뜰에는 들어갈 수 없었다. 이들은 평민과 마찬가지로 제물을 바칠때에만 사제의 앞뜰에 들어갈 수 있었다.
성전일꾼들은 여러가지 허드렛일을 했다. 첫째 이들은 제의와 관련된 온갖 직무를 수행하였다. 두번째로 , 성전일꾼들은 성전 청소도 했다. 그렇지만 레위인들은 제물을 바칠 경우를제외하고는 사제의 앞뜰에 들어갈 수 없었기 때문에 사제의 앞뜰에 는 청소를 할 수 없었다. 사제 앞뜰에는 사제들이 했다. 끝으로 레위인들은 성전 경찰 직무를 수행하였다.

 

성전 음악가들과 성전 일꾼들 사이에는 사회적인 차이가 있었다. 이러한 사회적 격차는 역사의 전개과정에서 비롯되었다. 에스라 시대에만 해도 "가수들과 문지기들"은 레위인 집단에 속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들은 레위인 가문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레위인 집단에 먼저 편입한 사람은 가수들이었다. 그후 이들은 레위인 집단 내부에서 문지기보다 더 높은 계급을 이루고 있었다.
음악가들은 사제들과 동등한 지위를 추구하였으며 문지기들은 음악가들과의 동등한 지위를 간절히 원했다.

 

 


6)사제직의 세습제도


사제와 레위인의 지위는 세습되었으며 세습 이외의 다른 방법을 통해서는 이 직위를 차지할 수 없었기 때문에 가문의 순수성을 보존하는일은 사제와 레위인에게 매우 중요했다. 따라서 이를 위해 이들은 족보를 소중하게 보관하였으며 혼안법을 엄격하게 제정하였다. 자신의 가문이 합법적인 가문임을 입증하지 못하는 사제의 경우에는 그 자신은 물론 그의 후손 들도 사제직의 권리와 사제직의 수행 관리를 상실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불법적인 결혼을 할 경우 이 결혼으로 태어난 아이들은 사제직에 오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떠한 조건을 구비해야만 제의행위를 수행하는 데 흠이 없는 합법적인 가문 출신의 사제와 레위인으로 간주될 수 있었는가? 그가 사제나 레위인인 아버지와 이와 동일 혈통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을 경우에만 합법적인 가문의 사람으로 간주될 수 있었다.

 

 


2. 평민 귀족


사제 귀족 이외에도 평민 귀족이 있었다. 산헤드린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고위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원로들이 그것이다. 원로의 집단에 속했던 사람들은 누구였는가? "평민적인 귀족"을 대표하고 지도하는 비사제 가문의 수장들이 사제귀족과 동맹을 맺음으로써 포로기 이후의 유다사회의 최고 기관인 산헤드린이 생겨났다.


예루살렘의 최고법정은 레위인과 사제들과 가문의 수장들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 최고법정은 평민귀족들과 사제귀족들의 대변자들로 구성된 귀족원로원들이었다. 신약성서는 산헤드린을 구성하는 제 3의 집단으로서 "원로"란 말 대신에 "백성의 지도자들"이란 말을 단 합번 사용하는데 이것은 '원로'들과 동의어로서 매우 많은 점을 시사해준다. 부유한 대토지 소유자였던 아리마대 요셉은 이 집단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부유한 귀족가문들은 유력한 사제귀족들과 제휴함으로서 백성들의 생활에 강한 영향을 미쳤다. 특히 하스몬 왕가의 시대부터 알렉산드라 여왕의 즉위 이전까지 그들은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들은 고위 사제들과 함께 산헤드린을 구성하였으며 통치자를 보좌하면서 정부와 사법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알렉산드라 여왕때부터 그들의 세력은 점차 약화되기 시작했다. 알렉산드라의 치하에 바리새파 사람들은 산헤드린에 진출하게 되었으며 대다수의 민중들은 점점 더 바리새파 사람들을 추종하게 되었다.


사두개파사람들이 헤로데 대왕과 투쟁하는 가운데 , 특히 보에뚜스의 아들인 대사제 시므온이 오랫동안 재직하고 있었던 기간에 형성되었던 것으로 보이는 내적인 결속력도 증대하는 바리새파 사람들의 세력을 저지할 수 없었다. 주후 1세기 처음 50년동안에 대사제의 정치적인 위세가 약화되자 그 결과 평민 귀족도 몰락하였다.

 

국가의 몰락은 일반귀족의 몰락을 의미했으며 또한 사제귀족과 평민귀족의 동맹에 기초한 사두개파의 몰락을 의미했다. 가문의 특권에 기초한 과거의 상층계급인 사제 귀족과 일반귀족은 강력한 신흥 상층계급인 율법학자들에 의해 완전히 밀려나게 되었다.

 

 


3. 율법학자


종교적인 세습귀족과 세속적인 귀족으로 구성된 옛날 상층계급 이외에 주전 1-2세기 동안 율법학자들이 새로운 상층계급으로 부상하였다. 예루살렘의 율법학자들의 출신은 매우 다양했다. 가난한 율법학자들이 중요한 역활을 했던 것은 가문 때문이 아니다. 이들은 비천한 출신이고 가난뱅이이며 소시민적인 직업을가진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역활을 했던 것이다.


오직 지식만이 율법학자들의 힘이었다. 서품을 받아 율법학자단에 가입하고자 했던 사람은 수년동안의 정규적인 연구과정을 마쳐야했다. 서품을 받은 율법학자들만이 토라에서 유래한 전승들의 전달자요 창조자였다.


율법학자들은 교육 활동과 그들의 생업이외에도 이러한 "제도 교육에 기반을 둔 직업 "에 종사하게 되었다. 율법학자들은 고위 사제들과 세속 귀족 가문사람들을 제외하고 최고의 기관인 산헤드린에 들어갈 수 이는 자격이 주어진 유일한 집단이었다.


율법학자들이 민중에 대해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이 종교법에 관한 전승 자료 자체에 정통했기 때문이거나 이러한 지식 덕분에 요직을 차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이들이 비의적인 전승,즉 비의적인 지식의 담지자들이었기 때문이다. 비의론은 분산 고립된 신학적인 가르침들이 아니라 강력한 신학적인 체계요 ,체계화된 가르침이며 그 내용은 하나님의 영감에서 비롯된 것이다.


율법학자들은 예언자들처럼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성직자와 동일한 위치에 놓여있었다. 율법자들이 율법학자 직위를 얻을수 있었던 것은 사제들처럼 가문을 입증함으로써가 아니라 예언자들과 마찬가지로 이들 주변에도 그의 가르침을 전수받으려고 많은 학생들이 몰려들었다. 또한 율법 학자들이 율법학자 직위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의 뜻을 알아 그것을 가르침과 재판과 설교를 통해 선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바울로가 된 사울은 가물리엘 1세에게 배우기 위해 길리기아의 다르소로부터 예루살렘으로 이주했다. 그것은 예수 시대의 예루살렘이 유다교 신학과 법학의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백성들이 거룩한 비의적 지식의 전달자이며 교사인 율법학자들을 옛날 예언자들을 존경하듯이 한량없는 존경심과 경외심을 가지고 공경했던 것은 당연했다.


율법학자들의 말은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특히 바리사이파 공동체를 바리사이파 율법학자들에게 무조건 순종하였다. 사두가이파 율법학자들의 가르침이 전승에 서 완전히 자취를 감춰버린 까닭은 주로 예루살렘의 멸망과 함께 사두가이파 사람들의 역할이 약화되고 주후 2세기 이래 문서화된 현존하는 전승들이 전적으로 그들의 적이었던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서만 유래한 것이기 때문이다.
율법에 무지한 사람의딸은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율법학자의 결혼대상으로 생각되지 않았다.

 

 

4. 부록 : 바리사이파 사람들


상층계급에 속하지 않았다는 것은 의심할 나위가 없으며 대다수는 성서적인 지식이 없는 민중 출신이었다. 율법학자들의 세력상승이 곧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세력상승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적극 강조되어야 할 점은 이 공동체가 폐쇄적인 공동체였다는 사실이다. 주전 2세기부터 바라사이파 사람들의 단체는 폐쇄적인 동맹체를 이루고 있엇다. 에쎄네파도 출현하였다.


바리사이파 공동체에 속했던 구성원들의 수효는 헤로데시대와 왕국확장시대에 그 수효는 "6천명이상"이었다고 한다.

 

율법학자들에 대한 예수의 비난은 다음과 같다.


1) 이들은 사람들에게 무거운 종교법적인 짐을 지워놓고 스스로는 그 짐을 회피한다.


2) 이들은 하느님이 보낸 자들에게 사형선고를 내리려고 하면서도 예언자들의 무덤을 세운다.


3) 이들은 그들의 지식을 활용하지 않으면서 이러한 지식을 비밀로 함으로서 대중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있는 길을 차단해 버린다.


4) 이들은 의복과 인사받기와 자리배정을 통해 자신의 명예욕을 만족시키며 특히 회당에서 제일 높은 자리를 요구한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에 대한 예수의 비난은 다음과 같다.


1) 자기 자신의 내면은 불결하면서도 겉으로만 정결규정을 준수하는 이들의 위선


2) 율법의 종교적 도덕적인 규정들은 무시하면서도 율법에 규정되어 있지 않은 채소들과 소채의 십일조를 내는 위선 우리는 이러한 비난들이 신학적인 학식과 전혀 무관하다는 것과 도리어 이러한 비난은 바리사이파 율법학자들의 종교법적 규정에 따라 살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마태5장 21-48절은 "옛전승"을 전달하고 해석하는 율법학자들에 대한 비난만을 언급하고 있으며 "6장 1-8절" 에도 "위선자"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몇개의 예외가 있긴 하지만 마태오복음에 나오는 "위선자 "는 바라사이파 사람을 말한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명확하게 구분되어야 한다.


복음서와 사도행전 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신약성서 시대에 산헤드린 의회원이었던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회의 석상에서 한 발언은 결정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왜냐하면 이들은 갈릴래아의 사분봉왕인 헤로데 안티파스와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이다.

 

 


II. 민족적 순수성의 보존

예수시대의 유다사회 전체의 계급문화는 민족의 순수한 혈통보존이라는 기본사상에 의해 좌우되었다. 순수한 이스라엘을 구성하는 것은 오로지 합법적인 가문출신의 이스라엘 사람들뿐 이었다. 혈통상에 흠이 있는 모든 가문들은 순수한 민족 공동체의 핵심으로부터 배제되었다. 이렇게 배제된 것은 사제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종교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즉 이 민족은 하나님이 일으키신 민족으로 간주되었으며 그 순수성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마지막 때의 약속들도 순수한 혈통을 보존한 민족의 핵심 에게만 유효하다는 것이다.

 

 


5. 순수한 혈통을 가진 이스라엘 사람들

 


1) 혈통의 합법성


순수한 혈통을 가진 이스라엘 사람들은 성직자들 과 함께 순수한 이스라엘을 형성하고 있었다. 모두 자신의 족보를 샅샅이 알고 있었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평범한 이스라엘 사람도 그의 바로 윗 세대에 속하는 선조들이 누구인가를 알았으며 자신이 12 부족 가운데 어느 부족의 출신인가를 말할 수 있었다.
외국에 살고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포함한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은 사제와 혼인관계를 맺고자 할 경우 위로 5대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족보를 심사 받아야 했으며 공적인 직책을 얻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도 가문의 합법성을 심사받아야 했다.
사적인 성격과 공적인 성격을 띤 평민가문들의 구전족보전승과 문서족보전승이 있었다는 것이확실하게 밝혀졌다.

 


2). 완전한 이스라엘 사람들의 시민적인 권리들


가장 중요한 특권은 "딸을 사제와 결혼시킬수 있는 "합법적인 이스라엘 사람이란 칭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모든 중요한 명예직들과 고위공직들은 완전한 이스라엘 사람들의 차지였다 최고의 사법기관인 산헤드린과 23인으로 구성된 형사법원 의 일원이 되고자 했던 사람은 순수한 혈통임을 입증해야 했다. 샴마이파는 힐렐파와는 달리 훌륭한 집안의 아들들에게만 입학을 혀용한 것 같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에쎄네파가 새로 가입한 회원들의 명단을 혈통에 따라 작성하고 혈통에 따라 등급을 매겼다는 것도 언급해야할 것이다. 매우 중요한 시민적인 특권들은 완전한 이스라엘 사람들의 차지였다. 가장 중요한 특권은 종교적인 영역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 가문들은 순수한 혈통 덕분에 그들의 조상들이 이룩했던 공로를 세습적으로 상속받게 된다.

 

(1) 사람들이 흔히 가리키는 것처럼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은 족장들 특히 아브라함의 공로를 물려 받았다.


(2) 더 나아가 자기 선조 가운에 의인이 있다면 그 이스라엘 사람은 이 선조의 공로를 이어받고 그의 중보를 받는다.


순수한 이스라엘 가문들만 메시야의 구원에 동참하리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다. 이들의 순수한 이스라엘 가문들이 순수한 혈통을 보존하기 위해 노심초사하고 자녀들을 결혼시키기 앞서 장차 자기의 사위나 며느리가 될 사람의 족보들을 조사했던 가장 큰 이유이다.

 

 


6. 천대받은 직업들과 유다인 "노예"

 

1)천대받는 직업들


@ 당나귀몰이꾼, 낙타 몰이꾼, 뱃사공, 마부, 목동, 소매상인, 의사, 푸주간 주인 : 이들은 대부분 파렴치하고 도벽이 심했다.


@ 개똥 수거자, 구리 대장장이, 무두장이 : 직업과 관련된 악취때문에 혐오감을 일으키는 직업들이었다.


@ 금세공, 아마빗제조자, 절구석공, 행상인, 이발사, 무두장이: 자기의 직업으로 인해 훨씬 더 견디기 힘든 고통을 감수했다. 이러한 사람들은 이 일을 여인들과 함께 해야 때문에 부도덕하다는 비난을 받았다. 이러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공동체의 의장직도 맡을 수 없었다.


@ 투전꾼, 고리대금업자, 비둘기, 경주자 ,세리 :속임수를 쓰는 직업들이며 법률적인 보호를 전혀 받지 못하는 직업들로 간주되었다. 투전꾼, 고리대금업자, 비둘기경주자, 휴경년의 과일장수는 사실상 유명한 사기꾼들이다. 세금징수업와 세금을 높게 사정하는 세리들 과 그의 부하직원들도 자신의 직위를 부당한 부를 증식하는 데에만 남용하였다.


이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공적으로도 법률에의해 권리를 박탈당하고 천대를 받았다. 그들은 재판관이 될수 없었으며 이방인 노예와 마찬가지로 증인으로서 진술할 수 없었다.

 


2). 유다인"노예들 "


노예 상태로 전락하는 경우는 다음 세가지 경우이다.


(1)가장 흔했던 것은 도둑질로 인한 경우였다. 이것은 도둑이 자기가 훔친것에 대해 배상을 할 수 없을 것이다.


(2) 자신의 의사에따라 곧 자발적으로 자기를 판매함으로써 노예가 된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성인인 이스라엘 사람만 이렇게 할 수 있었으며 그것도 극빈자에게만 허용되었다.


(3) 지금까지는 성인 이스라엘 남자들이 노예로 팔리는 경우에 대해서만 언급했지만 이스라엘 여자들도 노예로 팔릴 수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12세 미만의 미성년 여자아이 에게만 한정되엇다. 아버지는 출애굽기21장 7절에 근거하여 미성년자인 딸을 유다인에게 팔 수 있는 가부장권을 가지고 있었다. 유다인 주인 아래 예속되어 있는 노예들의 예속기간은 만 6년이었다.

 

 


8. 비합법적인 이스라엘 사람들

 

1)사소한 결합이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


공통점은 이 집단들이 레위인이나 순수한 혈통을 가진 이스라엘 사람들과 결혼한 경우 그 결혼은 합법적인 것으로 인정되었지만 사제가문들과 혼인관계를 맺는 것은 이들에게 금지되었다. 이들은 특정한 관직을 차지할 수 없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갈망하는 명예직들도 차지할 수 없었다.

 

(1)비합법적인 사제의 후손들


어떤 사제가 자기와 혈통이 다르거나그 밖의 다른 이유로 결혼이 금지되어 있는 여인과 결혼해서 낳은 자녀들을 말한다. 온건한 입장을 취했던 바리사이파 사람들도 근본적으로는 비 합법적인 사제의후손들을 사제계급에서 제외시키는 것에 찬동했다.


비합법적인 사제가문들은 그렇게 많지 않았던 것처럼 보인다.

 

 


(2) 개종자들


이들은 할례와 침례를 받고 제물을 바침으로써 유다교로 개종한 이방인들을 일컫는다. 마태복음 23 장 15 절 에서 추측할 수 있는 바와 같이 이 세대에 디아스포라에서도 완전 개종자를 한사람 얻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일이 아니었던 것 같다. 그 당시 그러나 이것은 결코 놀랄만한 일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리스 로마 세계엔는 유다적인 사조가 확산되어 있었지 때문이다. 예루살렘의 개종자들과 관련하여 기억해야 할 점은 우리가 이미 살펴본바와 같이 거룩한 도시에서 명망이 높았던 율법학자들 가운데 개종자들의 후예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개종자들의 법률적 지위는 어떠했는가? 개종한 이방인들이 모든 점에서이스라엘 사람과 똑같은 자로 취급되어야 한다. 는 규정은 개종자들이 완전한 이스라엘 사람과 똑같은 권리들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개종자들도 모든 유다인과 마찬가지로 율법을 준수할 의무가 있다 는 것만을 의미할 뿐이다. 유다교인들이 개종자에 대해 갈수록 더 부정적인 판단을 내렸다. 개종자들은 이스라엘에서 나병환자만큼이나 나쁜 평을 받았다. 개종자들이 공직에 임명될 수 있는 권한에 대해 살펴보면 개종자들은 산헤드린 과 중죄인 판결을 내리는 23인 법정 의 일원으로서 발언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만일 개종자가 이 재판의 판결에 가담했을 경우 그 판결은 무효가 되었다. 개종자들에게 합법적인 족보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것은 법률적인 손해였을 뿐만 아니라 종교적인 손해이기도 했다는 사실이 강조되어야 한다.
(3) 이방인 해방노예


유다인의 노예로 일하다가 나중에 방면된 이방인 여자들과 남자들이며 유다인 주인의 소유로 넘겨질때 할례와 침례를 받은 자들이었다. 이들이 방면될 수 있었던 경우는 다음과 같다.
소유자의 자유로운 결정에 의해 방면되는 경우 . 다른 사람의 도움에 의해 속전을 지불하고 방면되는 경우 . 증인이 있는 데서 주인이 노예의 눈이나 이빨을 하나라도 빠지게 하거나 "24개의 골절" 가운에 하나라도 손상시켰을 경우 . 우리가 이미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개종자 주인이 개종후 낳은 자식이 없어 상속자를 남기지 않은 채 죽었을 때 방면되는 경우. "노예다 되었음을 확인하는 목적으로 베풀어지는 침례" 를 받지 않음으로써 아직 주인의 소유로 완전히 넘겨지지 않은 노예는 "자유인임을 확인하는 목적으로 베풀어지는 침례"를 받음으로써 스스로 자유를 확보할 수 있었다. 총괄적으로 말하자면 이방인 노예들이 해방될 가능성은 매우 적었다.

 

 


2) 큰 결함을 가지고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


(1)사생아


사생아는 무엇인가? "결혼해서는 안된다 "라고 금지되어 있는 관계로부터 태어난 모든 후손들이라고 한다. 하나님의 손에 의해 멸망의 형벌을 받아 마땅한 모든 후손이라고 한다. 사생아가 사회에서 차지하는 법률적인 지위는 "사생아는 야훼의 공동체에 들어올 수 없다"는 정도이다. 이들이 결혼할 수 있는 사람은 개종자와 해방노예들과 큰 결함이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 뿐 이었다.


사생아란 단어가 가장 나쁜 욕설이었다는 것은 자명하다. 즉 사생아라고 욕한 사람은 39대의 태형을 선고받았다. 요약해서 말하자면, 큰 결함이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사생아와 환관들이었다. 신명기 23장2-3절에 근거한 랍비 의 율법은 이 사람들의 권리가 없는 계급으로 낙인찍음으로써 공동체와 특히 사제들로 부터 이들을 격리시키려고 애를 썼다.
9. 이방인 노예들


이들은 유다인 공동체와 매우 밀접한 생활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지만 유다인 공동체의 구성원으로는 간주되지 않았다. 노예들의 사회적 지위는 어떠한 재산도 소유할수 없었다 즉 그의 노동의 소득은 주인에게 귀속되었으며 습득하거나 선물받은 것이다.


유다인의 소유로 넘어간 이방인 여자 노예들과 남자노예들은 "노예임을 확인하기 위한 목적으로 거행되는 침례"를 받아야 했다. 여자노예에게는 이 침례가 유다교로의 개종을 의미했다.
이방인 남자노예는 한편으로는 노예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할례를 받은 자였기 때문에 독특한 중간적인 위치에 놓일수 밖에 없었다. 즉 그는 할례를 받았기 때문에 "계약의 아들 "이긴 했지만 이스라엘공동체의 구성원은 아니었다.


노예는 주인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만 유다교의 종교법으로부터 혜택을 받았다. 첫째로 모든 이스라엘 사람과 똑같이 안식일에 휴식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그는 과월절 식사를 포함하여 과월절 축제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도 가지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그의 주인은 그를 이방인에게 팔 권리를 가지고있지 않았다.

 

 


10. 사마리아 사람들


사마리아 사람들이 유다공동체로부터 배척당한 후 그리짐산위에 그들의 성전을 세우자 유다인과 사마리아 사람들 사이에는 심각한 긴장이 조성되었다. 주후 1세기는 유다인과 사마리아 사람들이 첨예한 대립관계를 맺고 있었던 시대였다. 예수는 사마리아 사람들이 증오한 예수살렘 성전에 간다는 이유 때문에 사마리아를 지나면서 숙소를 제공받지도 못했으며 심지어 마실물조차 얻어먹지 못했다 . 이것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유다인에 대해 배우 엄청난 증오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여러가지 면에서 이방인들과 동등한 취급을 받았다. 그러므로 유다인들이 사마리아 사람들과 종교적 모임을 함께 갖는다는 것은 생각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신구약 중간기에 유다인이 사마리아 여인을 부인으로 맞이한경우는 헤로데 대왕의 경우 뿐이다. 헤로데는 유다인과 사마리아 사람 사이의 분열을 극복하기 위해 사마리아 여인 과 결혼을 하였다.
주후 70년 이전에는 사마리아 사람들에 대한 유다인의 태도와 이방인들에 대한 유다인의 태도에 근본적인 차이가 없었다.

 

 

11. 부록:여성의 사회적 지위


동방의 여성들은 공적인 생활에 참여할 수 없었다. 따라서 여성들은 사회에서 존중을 받지못했다. 비천한 계층의 여인들은 종들로 둘러 쌓인 귀족부인들처럼 완전한 유폐생활 을 할 수 없었는데 그것은 무엇보다도 경제적인 이유 때문이다. 약혼운 처녀가 아버지의 지배에서 벗어나 남편의 지배를 받게 되는 것을 의미했다.


처녀가 결혼을 하게되면 궁극적으로 아버지의 지배에서 벗어나 남편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이 결혼은 보통 약혼식 이후 1년 안에 거행되었다.


부인이 여자 노예와 법률적으로 다른 점은 첫째, 결혼때 가지고 온 지참금에 대한 소유권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 둘째, 남편과 이혼하거나 사별할 때 그녀에게 지불되는 금액이 기록된 증서를 담보로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부인의 첫번째 의무는 가계를 돌보는 것이다. 남편의 술을 주조하고 남편의 얼굴과 손과 발을 씻겨주는 것도 부인의 의무에 속했다. 부인의 순종은 종교적인 의무에 속했다. 생명이 위태로울 때 제일 먼저 구출되어야 하는 사람들이 남편들이 었다. 그것은 일부다처제가 허용되어 있었기 때문에 부인은 자기 이외에 첩들이 있다는 사실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했다.


부인의 지위는 이러한 한계 안에서 각각 달랐다.


첬째 부인은 부인의 혈연들 특히 부인의 형제들에게 의존 했는데 이것은 가정에서 부인의 지위에 매우 중요했다.


둘째, 자녀들의 소유 특히 아들의 소유는 부인에게는 매우 중요했다.
부인들의 종교적이 권리들도 종교적인 의무들과 마찬가지로 제약되어 있었다.


결혼에 대한 예수님의 입장은 유례없을 정도로 새로운 것이었다. 그는 일부일처제를 찬성했을 뿐 아니라 제자들에게 이혼을 철저히 금지했다.
예수는 이처럼 유례가 없을 정도로 결혼을 높이 평가하고 성화시킴으로써 결혼을 하나님의 창조질서로 선언한 성서의 말씀을 진지하게 다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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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class.kbtus.ac.kr/Nseminary/Community/b_pds/pds_l.asp?seq=35&page=19&search=name&field=

공관복음서 종말론
J. 예레미야스. “6장 자신의 사명에 대한 예수 자신의 근거”「신약신학」

M.Div 3학년 서재종, 윤용현

 

 

1. 강조적 ego


복음서의 기독론적인(그리스도?) 칭호는 모두 부활 후에 붙여진 것 이여서 예수의 권위를 표현하는 데 적합하지 않다. 예수께서는 대신 상징적인 부르심의 표현들을 즐겨 사용하여 자신의 구속자 위치를 알렸다. 예를 들어 병든 자들의 의사, 목자, 성전의 건축자 등이 그것이다. 이 상징적인 언어는 모두 “구원을 가져오는 자”를 묘사한 것으로 종말론적인 배경을 갖는다. 


 그 중에 자신이 자주 사용한 ego는 마 5:17과 마 5:21~48의 여섯 가지 대조들에서 잘 나타난다. 1) 2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2) 28.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3) 3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없이 4) 3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5) 39.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6) 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이 본문은 “대조로 구성된 개별적 전승들의 모음집”이다. 예수는 ego를 사용하여 토라에 반대하여 혁명적이고 권세 있는 선언을 한다. 나아가 치유할 때, 사도들을 보낼 때, 격려할 때 등장하고, “아멘”과 관련하여 등장하는 것은 그의 신적 권세로 말함을 나타낸다. 하나님의 이중적 왕적 권세 곧 사죄와 입법을 관장한다.


강조적 ego는 문서비평으로 제거될 수 없을 만큼 예수에 관한 모든 전승에 존재하며, 예수 자신이 하나님의 대표자로 행동하는 동시에 자신을 하나님의 뜻에 철저히 종속시킨다. 그의 선포는 단순히 바실레이아(나라)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공관복음서의 예수 말씀은 1) 공중(公衆)이나 적대자들과 2) 제자들을 대상으로, 자신의 권세를 담아 전했다. 예컨대 막4:11~12는 오직 제자들에게만 자신의 권세를 열어주는 예수를 보여준다. 당시 유대주의에서는 개인적이고도 은밀한 가르침은 매우 중요하여 엣센파의 경우 그 공동체 가입 조건으로 고문을 당하면서도 은밀한 가르침을 누설하지 않고 보호하기를 맹세시킬 정도였다. 이러한 토대 위에 서기관들의 막강한 권위가 존재했다. 예수 또한 제자들을 개인적으로 가르치는 어휘가 적대자들과의 논쟁이나 대중적인 설교에 사용한 어휘들과 차이가 있다.(T.W.Manson) 예수가 제자들에게 자신의 사명을 가르친 것은 베드로의 고백 이후에 비로서 발전되었다.

 

 


2. 인 자


  인자는 예수가 자신에 대해 사용한 유일한 칭호로 진정성(authenticity)이 받아들여져야 한다. 공관복음서에서 예수가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로 묘사한 곳은 막13:32 한곳뿐이다. 이것도 당시 팔레스틴 유대주의에서 메시야적 칭호로 전혀 알려지지 않은 非팔레스틴적 어법으로 2차 작성으로 보인다. 메시야라는 칭호가 베드로의 입에서 나온 것 외에 예수 자신이 말한 것은 막9:41,마23:10,요17:3 단 세 번에 불과하다. 스스로를 다윗의 아들이라 말한 적도 없다. 다만 삼하7:13의 예언을 성취한 것으로 새 성전을 세우는 자로 자신을 은연중에 다윗의 아들임을 말할 뿐이다.(막4:58,마16:18) 이는 학가다 모순논리의 랍비적 질문 형식과 정치적인 의미 때문에 다윗의 아들 칭호를 사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반면 예수가 자신을 인자(son of man)으로 부른 것은 복음서에 82회로 그중 69회는 공관복음서(막14회,마30회,눅25회)에, 나머지 13회는 요한복음에 나타난다.


  1) 언어학적 입장 - 인자는 통속 헬라어에는 전혀 생소한 사실 “the man”또는 “a man”이란 뜻의 “바르(관사) 에나샤(사람)”아람어 번역이다. 묵시문학적 언어 가운데 '바르 에나샤‘는 단7:13의 결과로 메시야적 칭호가 되었다. 그러나 막3:28(사람의 모든 죄와-마가복음판과 달리 어록판은 인자로 기록),막2:28(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총칭을 후대에 칭호화), 마11:19(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고-한 사람이 칭호화)은 일상적인 의미를 초대교회 전승이 “인자” 칭호를 발견한 것 같다.


  2) 전승사적 입장 - 인자 칭호가 사용된 판과 사용되지 않은 판의 전승을 비교할 때(ex.눅6:22 인자를 인하여,마5:11 나를 인하여) 복음서의 51회 인자 말씀 가운데 최소 37회는 ego가 인자로 대체된 경합전승을 갖고 있다. 여러 근거로 보건대 인자 칭호는 후기의, 2차적 산물이다. 그러나 인자가 처음부터 칭호로 의도된 것이었음을 막13:26 등 11개의 어록에서 보여준다. 이때는 모두 미래에 관한 말씀이다.


  3) 진정성 - ‘인자’의 사용이 예수 자신인지 아니면 초대 공동체에서 시작됐는지 살펴볼 때 아람어를 말하는 초대교회로 볼 수 있다. 예수 자신이 인자 칭호를 사용했다는 한가지 근거는 예수의 초기 말씀에 단7장을 언급했다는 점이다.(눅12:32) 또한 다섯가지 전승층에서 예수는 인자를 3인칭으로 일치하게 말한다. 자신과 인자를 구분한 것이다.  부활과 파루시아의 구분이 부활 이후 기독론에서 이뤄진 것으로 보아 인자 말씀들도 부활 이전의 용례이다. 인자 칭호가 바울시대에 이미 헬라어 사용 교회에서 굳건한 위치를 점했고 동시에 확장되었다.(요한복음에 13회) 더욱이 인자 칭호는 사복음서에서 예수 자신의 입으로 나타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대교회의 어떤 고백문이나 기도에서도 예수에 대해서는 인자로 부르지 않는다. 그 이유는 인자 칭호가 처음부터 예수 자신의 말씀의 전승에 뿌리가 박혀 있는 신성불가침의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인자는 비밀한 종말론의 슬로건이었다. 이와 병립한 단어는 바실레이아로 이는 공개적인 종말론의 슬로건이었다.(ex.눅17:21對24절)


  인자 칭호의 배경 - 근거가 빈약한 종교사학파의 근동 지역의 원인(primal man) 기원설과 이란학파의 가요마르트 기원설이 있었다. 묵시문학에서 인자는 구속자의 칭호가 되었다. 여기에서 인자는 옛 의인들과 더불어 낙원에서 산다. 유대주의에서 지배적인 대망의 대상인 인자, 메시야는 지상의 통치자라는 점에서 다르다.


  예수의 입술 위에 있는 인자칭호의 의미 - 유대 묵시문학에서처럼 예수의 말씀들에서도 ‘인자’는 영광의 단어였다. 만일 인자어록의 최초전승층을 인정한다면, 인자칭호는 단7:13 “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에게 나아와 그 앞에 인도되매”의 실현이다. 단7:13의 진행은 아래로부터 위로의 운동이고, 복음서의 파루시아(강림) 개념은 인자의 도래가 위로부터 아래로의 운동으로써 대조된다. 그러나 복음서의 파루시아 단어가 마태복음에만 한정되며 인자가 내려오는 개념이 많은 경우는 편집적이다. 초기 인자어록에 인자의 내려옴이 분명히 기술된 것을 갖고 있지 않다. 대신 아래에서 위쪽으로의 운동개념이 나타난다. 이것은 파루시아 개념보다 빠르다.


눅22:14부터 시작되는 수난이야기가 누가복음 특별자료에서 나왔고, 그래서 마가복음의 수난이야기와는 독립된 전승을 가졌다고 유추할 수 있다. 막14:62과 눅22:69의 독립된 판들을 비교할 때 누가복음판이 승귀와 파루시아에 대한 초대교회의 기독론적 양식에 의해 아직 영향을 입지 않아 마가복음보다 단순함을 알 수 있다. 눅22:69 “이제 후로는 인자가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으리라”는 인자의 영광의 현시가 하나님에 대한 그의 승천에 있음을 전제한 듯 보여 이 또한 아래에서 위쪽으로의 운동이다. 단7:13이하와 에디오피아 에녹70장이하, 그리고 눅22:69은오직 인자의 영화가 하나님께 대한 그의 승귀를 통해 이뤄짐을 언급한다. 반대로 파루시아를 위에서 아래의 운동개념으로 본 최초의 예는 살전1:10, 2:19, 3:13, 4:16, 5:23이다. 결론적으로 최초의 개념은 인자의 나타남이 하나님께로의 승천의 형태로 일어날 것으로 본 것 같다.


  인자의 현현은 그가 우주적 통치자요,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들의 머리요, 대표자로 인자의 날들을 시작케 한다. 그러나 이것은 민족주의와는 무관하다. 유대주의는 메시야를 다윗 자손으로서 민족주의 戰士와 열방의 빛이 될 바르 에나샤의 초민족주의 존재(에디오피아에녹48:4)로 이중적인 기대를 가졌다. 그는 온 세상을 위한 메시야이다. 인자의 영광의 현현은 고난과 시험을 당한 자들에게 임한다. 최초의 전승층으로 보이는 인자어록도 주로 종말론적인 환난과 핍박이 가져오는 시험을 말할 때 등장한다. 이로써 예수는 임박한 고난에 직면한 제자들을 위로하고 굳게 한다.


  예수는 인자를 항상 3인칭으로 말하여 자신과 인자를 구분한다. 이것은 불트만과 벨하우젠의 주장처럼 예수 이외의 다른 구원자를 지칭한 것이 아니라, 예수의 현재와 미래의 승귀된 상태를 구분한 것이다. 예수 자신의 사명에 대한 예수의 인식의 핵심으로 인도하는 곳은 단7장보다 사53장이다. 

 

 


3. 수 난


  복음서에 따르면 수난은 끝이 아니라 목표요 예수의 지상 활동의 면류관이며 인자의 영광에의 필연적인 길이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 자신이 설교 가운데 자신의 죽음에 대하여 어떤 의미를 부여하였는가 하는 문제를 살펴보려 한다.
 1) 고난에 관한 언급


복음서는 예수의 제자들에게 자신의 고난과 부활에 대하여 많은 말로 세 번 말씀하신 것으로 기록한다. 이것은 세가지 수난예언이라고 부른다.(막8:31병행 ; 9:31병행 ; 10:33병행) 이 구절들에 예수에 수난에 관하여 여섯 단계로 예언되고 있다. 1) 인자가 대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고 2)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하고 3) 이방인들에게 넘겨주겠고 4) 그들은 능욕하고 침벹으며 채찍질하고 5) 죽일 것이고 6) 삼일 안에 살아날 것이다. 이러한 순서는 이후 발생한 일들과 정확히 일치한다. 즉 이 수난 예언은 사건 후에 형성된 수난에 대한 요약이라고 할 수 있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복음서 기자가 다른 기자의 복음서를 참고하여 수난예언을 재구성한 것을 복음서 안에서 찾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마태는 마가복음 때의 단순한 언급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과 무교절이라”(막14:1)을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의 아는바와 같이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이라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팔리우리라”(마26:1)라는 수난에 관한 언급으로 바꾸었다. 이런 사실에 기초하여 예수의 수난이 예수 스스로가 언급한 것이 아니라 제자들에 의해서 편집되고 추가된 것이기에 예수의 수난에 대한 모든 해석들은 역사적 사실이라고 보기 힘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러한 견해는 다음의 이유로 거부된다.


   a. 예수의 사역의 외부적 과정은 그로 하여금 폭력적인 죽음의 가능성을 고려하게 했을 것이다. 예수가 바알세불의 힘을 힘입어 귀신들을 쫓아냈다는 고소는 그가 마술을 행하였고 따라서 돌로 침을 당하여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또한 예수가 안식일을 깨뜨린 실례들 (안식일에 밀이삭을 자른 것/회당에서 손 마른 사람을 고쳐준 일)은 죽음의 위협을 느끼기에 충분한 파격적인 일이었다. 당시 유대율법은 율법을 범한 자가 경고를 받고도 또 그일을 행할 경우 반드시 심판에 쳐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기에 예수는 고난을 당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고려했음에 분명하다.


   b. 예수의 구원사적 관점 : 예수의 시대는 순교자가 존경받던 시대로 예수도 이러한 역사관을 공유하였다. 그는 예루살렘에서의 순교를 선지자직의 한 부분으로 간주하였다. 그는 구원사를 아벨로부터 여호야댜의 아들 스가랴에 이르는 의인들과 하나님의 사자들의 순교에 깨어지지 않는 체인으로 간주했던 지혜말씀에 동의하였다.


  이와 같이 예수의 사역과정과 그의 구원사관은 그가 자신의 고난에 대하여 사전에 전혀 언급한바 없다는 이론에 대하여 반대한다. 뿐만 아니라 예수의 말씀 자체도 그러한 말씀들의 신뢰성에 대한 전반적인 평가절하에 대해 반대한다.


  앞에서 언급한 세 가지 수난예언들 중 어떤 것이 가장 이른 것인가에 대해서는 마태와 누가가 수난예언을 자신들이 선호하는 단어로 대체한 구절들 (8:31 ; 10:33)을 제외하면 마가복음 9:31이 가장 이른 것임을 알 수 있다.


  고난에 관한 많은 언급들은 스스로 초기전승임을 드러내는데 제자들을 옹호하는 것이 전승의 경향임에도 불구하고 문맥은 계속해서 제자들의 몰이해와 실수를 나타낸다. 예를 들어 베드로를 사탄이라고 부르는 것(막8:33)이나 예수가 잡히실 때에 제자들이 도주할 것을 예언하는 것(14:50)에서 볼 수 있다. 또한 여인이 예수의 발에 향유를 붓는 사건을 통해서도 예수는 자신이 범죄자로 죽임을 당하고 향유를 부음이 없이 무덤 속에 던져지는 범죄자의 장사를 예견하고 있다. 또한 예수는 자신의 수난과 함께 칼의 때가 시작될 것이고 제자들이 자신의 고난에 연루되며 그들 가운데 몇 명은 자신과 동일한 운명을 맞게 될 것이고(막10:35-40)이라고 예언하며 자신의 고난이 집합적 고난의 전주곡이 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이 실제로 일어나지는 않았다. 예수는 유대인이 아닌 로마인들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그의 장사는 범죄자의 장사는 아니었으며 (막15:46) 제자들은 예수가 체포될 때 연루되지 않았다. 이 모든 사실들에서 볼 때 모든 언급들이 사후에(Ex eventu)형성된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2) 고난에 대한 해석


  예수는 자신의 임박한 고난을 분명하게 내다보고 사전에 그것을 언급했다고 단언할 뿐 아니라 나아가서 그가 자신의 죽음의 필연성 문제를 숙고하고 그러한 문제에 대한 해답을 성경 특히 고난 받는 종에 대하여 말씀하는 이사야 53장과 스가랴 13장에서 찾았다고 덧붙인다. 따라서 자신의 죽음이 속죄하는 능력이 있음을 확신했다. 그럼 어떻게 한사람의 죽음이 속죄의 능력이 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나? 예수 시대 때는 어떤 죽음이라도 그것이 회개와 연결되어 있으면 속죄하는 능력을 가졌다. 특히 의인의 순교는 더 큰 속죄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이런 확신을 갖는 것이 가능했던 것이다.


   a. 성찬 말씀들 - 예수는 자신의 임박한 고난에 대한 언급과 해석을 떡과 포도주의 해석말씀의 형태로 말하였다. 해석 자체에 대해서 두 가지가 언급되어야 한다. 첫째로 때어진 마자를 자신의 죽은 몸으로 그리고 붉은 포도주를 자신의 피로 비교함에 있어서 예수는 제사적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예수는 자신을 제물로서 특히 종말론적인 유월절 어린양으로 묘사한다.


   b, 많은 사람을 위한 대속물 - 막 10:45절에서 λυτρον은 대리적인 제물, 속죄제물 등보다 넓은 의미를 갖는다. 70인 역에서 λυτρον은 장자를 위한 속전, 노예를 해방시키기 위한 속전, 생명을 위한 속전을 의미하였다. 그러므로 예수는 자신의 생명을 속죄제물로 줌으로서 섬기는 것이다. 이것은 많은 사람들의 유익을 위한 것이다.


   c, 칼에 대한 말씀 - 눅 22:35-38에서 우리는 이사야 53:12로부터의 문자적인 인용을 볼 수 있는데 예수는 제자들에게 평강의 때가 지나가고 종말론적인 “칼의 때”가 임박했다고 말한다. (눅22:35이하) 예수는 어째서 상황이 그토록 근본적으로 바뀌었느냐는 질문에 대하여 이사야 53:12로 대답한다. (눅22:37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기록된바 저는 불법자의 동류로 여김을 받았다 한 말이 내게 이루어져야 하리니”)


   d, 엘리야에 관한 말씀 - 막 9:12에서 예수는 세례요한의 운명이 자신에게도 기다리고 있음을 언급한다. 예수는 자신을 하나님의 선지자로서 아니 그 이상의 인물로서 보았다. 순교가 선지자의 일반적인 운명이라고 생각했던 당시의 확신을 예수도 공유하였고 자신에게 적용시켰다.


   e, 넘기워짐 - 아람어 전승에서 기인하여 복음서에 3번 등장하며, 신적 수동태로써 마샬(수수께끼)을 사53장에 연결시키는 역할을 한다.


   f. 목자에 관한 말씀 - 목자의 죽음은 양들의 흩음과 멸절에서 끝이 아니고 남은 양의 모음에까지 이른다. 스13:7~9


   g. 죄인들을 위한 중재 - 눅 22:16,18병행, 마가복음 14:25에 보면 최후의 만찬 때 예수께서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을 다시 하지 않겠다는 선언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메시야가 도래하지 이전의 마지막 때에 이스라엘을 위하여 중재하는 것이었다. 예수의 이런 선언이 이스라엘을 중재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그가 “죄인들을 위한 중재”(사53:12)를 이와 같이 행동화 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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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론 - 방법론에 대한 고찰

차재승

 

Ⅰ. 들어가는 말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과 사역 그리고 십자가의 대신(代身)은 복음의 총화이자 기독교 신학의 요체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한 인간이요 완전한 하나님이시며 그 중심에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한 사역과 인간의 실존을 자유하게 한 십자가가 존재한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 교회가 확장되고 성장해 감에 따라 이러한 진리는 내 외부적으로 많은 도전과 공격을 받게 되었고 변증가들은 시기적절하게 기독교 신학을 지켜왔다. 그러한 도전과 변증의 주된 논의는 예수의 신성과 인성 부분에 있어서의 증명이었다. 이렇게 예수의 두 가지 속성에서의 대한 논제 속에서 자연스럽게 혹은 타의적으로 예수의 인성적 측면은 논의 밖의 대상이 되어갔다.

하지만 르네상스 이후 인문주의가 대두됨에 따라 신학의 논의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인문주의의 옷을 덧입고 태동한 계몽주의는 인간의 이성에 기초하여 모든 학문을 바라보고자 했고, 신학 역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계몽주의는 르네상스 이후 인간의 이성을 마비시켰던 교회에 대한 도전이었다.

그들은 인간의 이성에 기초하여 하나님을 인식하고 합리적 체계 속에서 기독교 신학의 전반을 이해하려는 방법론을 제시했다. 보편적 기독교 신학자들은 이러한 계몽주의 사상을 비난했지만 중세 교회가 함구하고 있었던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적 측면 나아가 인간으로써의 예수에 대한 연구를 제시한 점에서 계몽주의는 큰 역할을 했다. 이러한 계몽주의는 프랑스 혁명 이래 지속되었던 유럽의 혼란 속에서 자유주의를 양산했고 더욱이 시대가 급변함에 따라 제 3세계에서는 해방신학이 대한민국에서는 정치적 혼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민중 신학이 대두 되었다.

엄밀히 말래 자유주의 신학 사조 이후로 나타난 이러한 신학은 그리스도의 해석 방법에 있어 이해와 관점을 달리했을 뿐 그들 ‘역시 위로부터의 기독론과 아래로부터의 기독론 사이’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인가?」에 대한 본질적인 해명을 강구했다.

이에 필자는 본 보고서에서 ‘진정한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가는 방법은 무엇인가?’ 라는 내면적 질문을 염두 하여 전체적인 글을 기술하고자 한다. 먼저 그리스도 해석에 있어 두 가지 방법론을 제시하고 그 방법론을 주장한 학자들을 기술하고자 한다. 그리고 두 방법론에 대한 견해와 비판을 기술하고 필자가 생각하는 기독론과 그 근원적 출발의 대안을 어떻게 설정해야 하는 가를 요지로 삼아 역설하고자 한다.


Ⅱ. 역사적 예수

A. 역사적 예수 그리스도의 탐구

서론에서 언급했듯이 인간의 이성과 그에 따른 합리성이 대두됨에 따라 기독교 또한 인간의 합리성 안에서 증명되어야만 하는 도전을 받았다. 그렇기에 예수는 실제로 존재한 인물이었는가? 만약 존재했다면 그는 무엇을 하였고 무엇을 남겼는가? 라는 탐색이 대두 되었다. 이것이 바로 “역사적 예수 그리스도의 탐구”이다. 이 탐구의 저변에는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실증적 탐구가 전제되어 있다. 즉, 4개의 복음서와 바울 서신은 주관적인 입장에서 기술 되었기에 그것을 단지 하나의 역사적 사료로서 인식하고 이러한 것들 이외에 또 다른 사료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탐구하고 인식하려는 것이었다. 혹 성경의 사료를 이용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단순히 주관적 사료(史料)로 치부했을 뿐, 보편적인 역사 방법론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이해하려고 했다.


B. 대표적 신학자들과 견해

실증주의의 대표자였던 슈트라우스(David Strauss)와 르낭(Ernest Renan)은 예수 그리스도를 성 삼위일체 중 하나의 위격이 아닌 선한 사람 혹은 영적으로 훌륭한 교사로 묘사했다. 금세기 초 개신교적 자유주의 신학의 가장 뛰어난 대중적 대변자로 불리던 하르낙(Adolf von Harnack)은 복음서들이 예수의 유년시절과 청년기 시절에 대해 명확히 언급하지 않고 있기에 그의 전기를 구성할 수 없으며, 그렇기에 일반적인 견해로 볼 때 예수의 기적은 허구라 주장했다. 또한 예수의 설교나 메시지에 대해 자유주의 신학 입장의 토대에 서서 고전적인 진술을 피력했다.

그 후 역사적 예수에 대한 연구는 점차 종말을 선언했지만, 20세기에 에델베르트 슈타우퍼(Ethelbert Stauffer)와 요아킴 예레미아스(Joachim Jeremias)에 이어 현재까지 연구되고 있다.


Ⅲ. 위로부터의 기독론

A. 위로부터의 기독론이란?

위로부터 기독론의 요체는 성 삼위일체의 하나님의 제2격으로서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에서 출발하면서 그 중심에 그리스도의 선재 및 성육신 사상이 서 있는 전통적인 방법의 기독론을 일컫는다. 즉, 사람이 되시기 위해 이 땅에 내려오시고, 가장 낮은 자리에서 공생애를 이루시고 종국에는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셨으나 결국 부활 승천 하셔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어 지금도 이 땅을 다스리시고 치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탐구하고 증명하는 것이다. 이것은 초기 고대 그리스 철학의 우주론적 지평을 배경으로 확실한 입지를 세운 후 중세, 개혁주의, 개신교 정통주의를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수용되고 있다. 위로부터의 기독론은 계몽주의 이전까지 기독론의 접근 방법에서 중심의 자리를 지켜왔으며, 기독교 정통주의 교회 역시 위로부터의 기독론만이 유일한 구원을 선사하는 진리라고 표명했다.


B. 대표적 신학자들과 견해

고전적인 기독론은 역사 속에 현현된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적 모습을 뛰어 넘어 그의 구속 사역과 인성에 가장 정확하고도 세밀한 초점을 맞추었다. 이것은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변증으로 특히 신 정통주의 신학자들에 의해서 집중적으로 조명되었다.

에밀 브룬너(Emil Brunner)는 기독론의 이해의 기초는 예수의 설교(Kerygma)에 집중을 해야 하며, 예수의 생애를 다룬 공관 복음서들보다는 바울 서신과 요한복음을 집중적으로 조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신앙은 인간의 이성에 기초한 합리성에 근거하지 않으며 그것에 의해 정당화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육체 안에 있는 그리스도’와 ‘육체를 벗어난 그리스도’를 구분하여 성육신한 말씀과 역사적 예수를 엄연히 구분 짓고 ‘육체안의 그리스도 즉, 성육신한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더 중요한 것으로 보았다.

에밀 브룬너와는 달리 조금 더 보수적인 입장을 취한 신학자는 칼 바르트였다. 그는 위로부터의 기독론을 확고하게 정립한 신학자였다. 바르트는 신학의 중심은 인간에 관한 것이 아닌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며, 신학(神學)은 인학(人學)이 아님을 역설했다. 즉 신학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낮추시고 내려오시고 도달하시는 것이지 인간이 하나님에게로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그렇기에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 세상에서 현현하신 분이 아니라 위로부터 오신 분이다. 바르트는 후기로 갈수록 그가 견지한 주장이 다소 약화 되는 듯하나, 여전히 위로부터 오신 그리스도를 포기하지 않고 기술한다.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와 그에 따른 십자가의 비이성적 행위는 반드시 위로부터 온 것이지 역발상으로는 존재할 수 없다고 주창했다.


 

Ⅳ. 아래로부터의 기독론

A. 아래로부터의 기독론이란?

근대의 계몽주의는 인간의 자기 이해라는 엄청난 변화를 몰고 왔다. 인간의 주체성에 대한 자각과 함께 인간 자신이 모든 확신의 근거와 실재 이해의 출발점이 되었다. 계몽주의의 영향력은 기독교 신학에도 깊숙이 침투하여 변화를 야기 시켰다. 이젠 더 이상 하나님 혹은 신성이란 개념은 자명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이성 속에서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계몽주의 이전에는 기독론의 주된 논쟁은 영존하는 하나님이 어떻게 예수 즉, 인간 안에 있을 수 있는가를 해명하는데 있었다면, 이제는 어떻게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인가 라는 문제를 규명해야했다.

위로부터의 기독론과 달리, 아래로부터의 기독론은 ‘역사적 사실로써의 예수 탐구’의 영향력을 상당히 받았다고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광의(廣義)적으로는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이 방법론은 유대인의 혈통을 가진 나사렛 예수라 불리는 역사적 인간의 활동과 삶의 존재로부터 출발하여 그의 신성을 규명하려는 기독론이다.


B. 대표적 신학자들과 견해

대표적인 아래로부터의 기독론을 주장한 학자는 철학적 신학의 거성인 폴 틸리히(Paul Tillich)와 케제만(E.Ksemann) 그리고 ‘희망의 신학’의 선두주자인 판넨베르크(Pannenberg)였다. 틸리히는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라는 위로부터의 기독론의 시작을 과감히 버리고 예수 안에서 ‘본질적으로 인간적인 모습이 실존의 한계 아래서 출현했다.’라고 하는 전제에서 출발했다. 틸리히가 주창한 전제는 예수 그리스도 안의 인간 존재의 내재적인 역설, 즉 그리스도는 처음부터 인간의 모습 속에 구현되어 있는 하나님의 모습을 대변했으나, 그와 동시에 타락한 인간의 한계 속에서 살았다는 전제이고 예수는 당위(Sollen)적이며 현실적인 인간이었다라고 하는 전제이다. 따라서 전통적인 위로부터의 기독론을 전면 혹은 부분적으로 부정하는 전제가 탄생한 것이다.

불트만의 기독론에 반(反)하여 기독론을 기술한 케제만(E. Ksemann)은 역사적 사실의 토대 위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세울 것을 주장했다. 그의 학설에 반작용으로 역사적 예수에 대한 고증과 연구가 지속적으로 수반되었고 종국에는 예수는 신성을 완전히 상실한 보편적인 인간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틸리히와 동일한 노선을 걸었던 판넨베르크는 틸리히와는 다른 방법으로 아래로부터의 기독론을 구상했다. 그는 고전적 기독론의 측면에서 ‘신성의 문제를 밝히는 것이 기독론의 과제라면 이미 신성이 전제되어 버렸다.’라는 점을 강력하게 꼬집어 비난했다. 그렇기에 기독론 해명의 중차대한 과제는 바로 예수의 역사가 예수의 신앙에 대한 기초를 구성하는 데 있는 것임을 보여 주려고 했다. 그는 예수의 설교(Kerygma) 이면에 대한 역사적 연구는 충분히 가능하며 신학적으로도 반드시 수반되어야 함을 역설했다. 또한 예수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그의 가르침과 사역은 단순한 역사 지식 습득을 위한 접근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그는 위로부터의 기독론은 철저히 하나님의 중심에서 서 있다는 것에 회의를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에서의 삶이 신성에 도달하는 과정을 해명하려 했다. 그렇기에 그는 부분적으로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사이의 연속성이 존재할 것이라는 가정을 제시 했다. 이는 후기 리츨학파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ⅴ. 견해와 비판

A. 방법론적 측면에서의 비판

필자는 짧게 남아 두 가지 그리스도 방법론에 대해서 기술했다. 본론 부분에서 보아 알 수 있듯이 기독론은 시대의 흐름 속에서 내용적인 측면과 방법론적 측면에서 논쟁의 대상이 되어왔고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연장선상에 놓여있다. 그렇기에 기독론을 전개함에 있어 방법론적 구분을 명확히 한다는 것은 어쩌면 불가피한 일 일지도 모른다. 즉, 어떤 방법론을 택하고 또한 그 편에 서 있는 다는 것 자체가 매우 다른 양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위로부터의 기독론은 인간의 죄를 담당하고자 했던 하나님의 성육신에 기초하였기 때문에 한 번도 구체적 인간으로써의 예수를 무게 있게 다루지 않았다. 또한 역사를 통해 드러난 하나님과는 무관한 하나님의 표상을 전제하고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사변적 위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러한 부분은 몰트만의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에 잘 나타나 있다. 그렇기에 계몽주의 이후의 대두되었던 아래부터의 기독론을 단순하게 잘못되었다라고 치부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위로부터의 기독론의 모순점을 해결하고자 한다하여 아래로부터의 기독론을 전적으로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예수의 인간적 측면을 부각시키고 신성을 전면 부정해 버린다면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단절시키고 종국에는 하나님을 고찰하고 인식하는 신학이 아닌 인간의 모습을 연구하는 인간학으로 전락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지지하듯 케슬레(H. Kessler)는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는 우리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역사와 길임을 요구 한다’라고 밝혔다. 이러한 사실로 볼 때 성육신 사상은 단순히 방법론적 논쟁의 대상이 아니다. 역사 속에서 인간이 된 독생 하신 아들과 하나님의 관계는 단순히 역사가 지니는 의미에서의 방법론적 규명이 아니고 예수의 역사에 처음부터 전제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두 기독론은 상충하는 것이 아닌 상호보완적인 것이다. 어느 한 국면에 치우치지 않는 기독론은 역사에 대한 이해와 더불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계시를 파악케 하고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비이성적(인간의 이성으로는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사랑을 명시해 주는 역할을 한다.


B. 필자의 견해 (시대 사회적 측면에서)

오늘날의 시대는 과거와 달리 급변하고, 급변하는 시대의 조류가 인간의 사고와 관념체계를 마비시키고 있다. 그 마비된 인식체계 속에서 사람들은 돈과 직업 그리고 사회에서의 성공에 목말라 하면서 그리스도의 본질을 수단으로서 자리매김 시키고 있다. 이러한 시대 속에서 비록 기독교인이라 할지라도 갖은 자와 갖지 못한 자들 간의 격차는 필연적일 수밖에 없었고 갖은자는 그들의 탐심을 더욱 가중화 시키기 위해 갖지 못한 자들의 것을 착취했다. 이런 부조리한 틈새에서 민중 신학과 해방 신학 기독론의 대두는 당위적일 수밖에 없었을 지도 모른다.

또한 오늘날의 교회와 신학은 이러한 사회의 급변하는 흐름 속에서 과거보다 더 심각한 위기 속에 직면해 있다. 교회와 신학이 세상의 문제들에 대해 관심을 갖고 접근하려고 하면 할수록 그들은 더욱 더 심한 괴리감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고 역으로 교회와 신학이 그들의 독특성을 내세우면 내세울수록 현실과 동떨어져 현실을 직시할 수 없는 상태로 치닫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이중적인 문제들을 직면하면서 교회는 딜레마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 같은 맥락에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적인 부분만을 강조한 중세의 교회와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이러한 부조리 속에서 민중 신학과 해방 신학 자들은 신성을 중시한 교회의 이중성을 적나라하게 비판하고 예수의 인간성을 충분히 강조하였다. 그들은 공관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사역에 초점을 맞추어 사회의 약자에 편에 서서 예수의 신성적 측면보다는 인간성의 측면을 모범으로 삼았던 것이다. 그들은 정통 신학에서 강조하지 않는 우리가 따라야 할 모범적 예수를 강조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예수의 신성적인 측면을 강조하지 않는 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 역시 반드시 수반되어야 할 부분이다.

하지만 예수의 신성을 인정하고 고백한다는 것이 공허한 외침으로 느껴진다며 도덕적 예수의 모범으로써의 예수가 하나님의 순종의 성육신으로써 순종하여 후에 하나님의 아들로 추앙되었다는 자유주의자들의 모습에서 우리가 배울 부분이 충분히 있다고 생각한다.

적도의 성자인 슈바이처, 행동하는 영성인 늦봄 문익환, 해방신학 선구자 돔 엘더 카마라 대주교는 공허한 말보다는 삶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했다. 그들은 그 어떤 보수주의와 정통주의 신학자들보다 삶으로 예수의 신성을 강조했고 절대적으로 따라야 할 모범으로 생각했다. 이러한 측면에서 아래로부터의 기독론이 마냥 인간의 합리성의 산물이라 치부할 수는 없는 것이다.

입으로 고백하는 것 자체의 의미는 중요하다. 하지만 현실속의 그리스도인이 위로부터의 예수를 고백하고 아래로부터의 예수를 행동과 삶으로 고백하지 않는 다면 그것은 고백의 모순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입술의 고백을 하고 온갖 탐욕과 악함과 비행을 저지르면 그 고백은 고백이 아닌 것이다. 그렇기에 아래로부터의 기독론과 위로부터의 기독론이 단순히 관념적 수준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고백의 실천적 수준으로까지 도달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부분에 있어서 사도 바울 역시 강조 하였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공관 복음서를 통해 친히 모범을 보이셨다. 아무리 예수의 신성을 입술로 고백한다 한들 그들의 삶으로 예수를 고백하지 않는 다면 그것은 공허한 고백일 뿐이다. 그렇기에 필자가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기독론은 형벌만족설적 기독론(위로부터의 기독론)과 삶에서의 모방을 통한 기독론(아래로부터의 기독론)이 절충되는 것이다.

 


※참고 문헌


폴 틸리히. {조직 신학Ⅲ}. 유장환 역. 서울: 한들, 2005

알리스터 E. 맥그래스. {역사속의 신학}. 이형기외 역.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8

박봉랑. {기독교의 비종교화}. 서울 : 법문사, 1975

조순. {그리스도론}. 서울 : 한들 출판사, 2004

윤철호. {예수 그리스도 (상),(하)}. 서울: 한국장로교 출판사, 1998

알리스터 E. 맥그래스. {현대독일 기독론}. 김성복 역. 서울: 북토피아, 2000

판넨베르크. {판넨베르크의 조직신학 (1)}. 김영선 역. 서울: 은성, 2003

위르겐 몰트만.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 김균진 역. 서울: 한국 신학 연구소, 2000

잔 그레샘 메이천. {기독교와 자유주의}. 김길성 역. 경기도 고양: 크리스챤 출판사, 2000


차재승. [The Cross as Such and the Cross Overflowing.]. Vrije Universiteit: Ph. D. dissertation, 2005

김영선. [판넨베르크의 기독론 연구]. 협성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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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신학의 시작과 발전 (신약신학의 기본 이슈)

 


        1. 종교개혁으로부터 계몽시대까지


  종교개혁자들은 교회의 전통과 스콜라 신학으로부터 스스로 벗어나 “오직 성경”을 전투의 구호로 삼았다. 이러한 원리 하에서 성경은 더 이상 전통에 의하여 해석되지 않게 되었다. 이것이 그 이후 성경신학 발전의 원천이 되었다.


  루터와 기타 개혁자들은 “오직 성경”이라는 원리의 해석학적인 의의를 신학의 전 영역에 적용하지는 않았다. 즉 그들은 “성경신학”으로 알려진 분야를 개발하지는 않았다.
  “성경신학”이라는 용어를 개발한 자들의 선구자들은 사실 과격 종교개혁, 즉 재세례파 운동에 속한 자들로서 특별히 1530년대 초의 오스왈드 글래이트와 안드레아스 피셔이다. 그러나 그로부터 100년 후에야 비로소 “성경신학”이라는 표현이 볼프강 야콥 크리스트만의 “성경신학”에서 최초로 나타나게 되었다. “성경신학”은 초기 개신교 정통신학의 전통적인 “교리체계”를 지지하기 위하여 신구약 성경으로부터 무분별하게 취해 내는 “증빙 본문들”로 구성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교리학에 대한 “성경신학”의 보조적인 역할은 아브라함 칼로비우스에 의해 확립되었는데, 그는 “성경신학”을 과거에 “주경신학”으로 알려진 것을 가리킨다고 보았다.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독일 경건주의의 강조점은 성경신학의 방향을 바꾸어 놓았다. 경건주의에 있어서 성경신학은 메마른 개신교 정통주의에 대한 반발의 도구가 되었다.
  1745년에 “성경신학”은 교리신학으로부터 분리되었고, 이것은 성경신학이 단순히 교리학의 보조학 역할로부터 벗어난 것을 의미한다.

 

 


        2. 계몽시대


  계몽시대에는 성경 연구를 위한 전혀 새로운 접근법이 여러가지 영향하에서 개발되었다. 그 중 첫번째로 제일 중요한 영향은 여하한 형태의 초자연주의에 대해서도 반발한 합리주의이다. 이것은 신적 계시의 무오한 기록으로서의 성경의 권위가 거부된 것을 의미했다.


  계몽시대의 두번째 주요한 출발점은 역사비평법이라는 새로운 해석학의 개발이었다. 이것은 자유주의 학계와 그 이상에서 현재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는 방법이다.
  세번째는 성경에 대한 급진적인 문서비평의 적용이다.


  마지막으로 합리주의는 합리주의라는 바로 그 본질 때문에 성경 영감이라는 정통적인 견해를 포기하기에 이르렀고, 따라서 궁극적으로 성경은 어느 다른 고문서처럼 연구되어야 할 고문서 중의 하나로 전락되었다.

 

 


        3. 계몽시대로부터 변증신학까지


  1813-1821년에는 고트로브 필립 크리스티안 카이저의 3부작 “성경신학”이 등장했다. 그는 “철학적인 보편 종교사의 관점”과 결합된 소위 “문법적 역사적 해석법”으로써 자신의 작품을 구성했다. 그는 “종교사적인” 접근법을 적용하여 모든 성경적, 비성경적 국면들을 보편 종교의 원리에 종속시킨 최초의 신학자였다.


  드 베테는 “신구약성경 교리”를 1813년에 발행했다. 그는 게블러의 제자였다. 그의 작품은 프리스에 의해서 중개된 칸트 철학을 채택하고 성경신학을 철학 체계와 결합함으로써 합리주의로부터 떠나는 움직임을 보여 주었다. 신앙과 감정을 고차원적으로 종합한 그의 입장은 히브리주의에서 유대주의를 경유하여 기독교로 넘어오는 종교의 “유전적인 발전”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이것은 구약과 신약의 내용적인 통일성을 분쇄하는 것을 의미한다. 신약신학이 종교사의 한 형상으로 이해되게 된 것이다.


  드 베테의 접근법은 스타인으로부터 과격한 반격을 받았다. 스타인은 드 베테의 접근법에 게블러의 프로그램과 바우어의 신약신학에서 벗어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신약 저자들이 동의하는 예수님의 교훈을 신약의 핵심으로 만들고자 했다. 여기서 신약의 핵심과 통일성 문제 전체가 전면에 부상된다. 이것은 오늘날까지 주요 이슈로 남아 있는 것이다.


  성경신학의 “순수하게 역사적인” 본질에 관한 게블러와 바우어의 전통은 폰 쾰른의 “신약성경신학”에도 나타나 있다. 폰 쾰른은 히브리주의 - 유대주의 - 기독교의 발전론을 묘사했고 신정 사상의 영화, 윤리적 정화 및 보편적 확대의 역사를 제시했다. 메르크는 폰 쾰른이 결과적으로 수정된 교리신학을 낳았다고 지적했다. 그것은 그가 역사적 비평적 성경신학의 과제를 해석의 과제로부터 예리하게 분리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순수하게 역사적인” 신약신학에 관한 게블러와 바우어의 접근법이 페리디난드 크리스티안 바우어의 작품에서 그 절정에 이르렀다. 바우어의 헤겔적 변증법은 그로 하여금 기독교 역사를 유대 기독교의 정과 이방 기독교의 반 간의 투쟁이 2세기 초기 가톨릭주의의 합으로 나타난 역사로 보게 하였다. 이것은 신약신학과 관계가 있는데, 신약신학은 “순수하게 역사적인 학문이지만 신약의 문헌들에 제한되어 있다는 것이다.


  신약신학에 대한 “순수하게 역사적인” 접근법들과는 대조적으로 19세기 초기 학자들 중에는 신약신학의 “적극적으로 역사적인”방향에 속한다고 분류될 수 있는 학자들이 있다. 이런 방향의 창설자들 중에 로씨우스와 크레머가 있는데, 이들은 본질적으로 동일한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 로씨우스는 “교리개념”에 대한 교리적 접근법을 역사적 접근법과 결합하였다.


  바움게르텐 - 크루시우스의 노골적인 보수적인 “성경신학 개요”는 독특한 위치를 점한 책이다. 바움가르텐 - 크루시우스는 “교리의 기초와 규범 및 교리사의 출발점이 될 순수하게 성경적인 개념들의 체계를 제시하고자” 하였다. 그는 문법적 역사적 해석의 타당성을 인식했고 카이저, 드 베테, 로씨우스 등에 영향을 받은 것을 느꼈으나, 성경신학에 대한 이질적인 영향을 떨어버리기 위해서 이신론의 과도한 종교비판을 건전하게 반격하는 주장을 폈다. 그는 성경의 통일성은 신약과 구약을 연합하는 하나님의 나라라는 공동 주제에 근거하여 인식된다고 제의했다.


  신약의 통일성과 다양성 문제는 아우구스트 네안데르의 접근법에 있어서 중요한 이슈가 되었다. 네안테르는 사도시대의 역사를 추적한 후에(제1권), 상이한 사도들, 즉 바울, 야고보, 베드로, 요한의 가닥들을 구분했다(제2권). 이러한 사도들의 메시지 제시의 다양성은 그리스도의 교훈의 다양성 속에서의 “살아 있는 통일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네안데르가 크리스티안 프리드리히 슈미트에 미친 영향은 슈미트 자신이 거리낌없이 인정했다. 슈미트는 신약에 본질적인 통일성이 있으며 이것이 신약 저자들의 상이한 교리 속에 반영되어 있다고 믿었다.
  이와 유사한 견해가 1854년에 게오르그 루드비히 한과 1856년에 헤르만 메스너에 의해 주장되었다.


  베르나르트 바이스의 “신약의 성경신학 교재”는 대단한 인기를 누린 책이다. 바이스의 접근법은 보수적이었다. 슈미트와 한과 메스너의 방법론과는 대조적으로 바이스의 접근법은 긍정적인 면이 많으면서도 보수성이 적었다. 그는 신약과 구약의 관계를 완전히 다루지 않았으며 요한복음이 예수의 교훈을 위한 출처라는 것을 완전히 배제해 버렸기 때문이다. 바이스는 “신약성경신학은 각기 다른 신약 문헌들의 다양한 교훈 형태들을 기술해야 한다”고 제의했다. 바이스에게 있어서는 해석학적 토대는 “각 저자를 그 저자 자신 안에서 해석하는 입장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바이스의 방법은 신학적인 ”교리 개념“ 방법이 특징이다. 신약신학에 있어서 “교리개념” 방법은 “현대적 적극적” 신약신학 입장의 대표자들이라고 할 수 있는 모든 학자들에게로 넘겨졌다.


  “순수하게 역사적인” 신약신학 방법에 대한 또 하나의 “보수적인” 반발은 “구속사 학파”를 통해서 표현되었다. 19세기의 “구속사 학파”는 “말씀 속에 표현된” 하나님의 백성의 역사, 성경영감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신인 역사의 결과 등에 기초하고 있다.


  폰 호프만은 성경에서 직선적 구원사의 기록을 발견했다.
  폰 호프만의 “구원사적” 접근법을 두고 파이네는 “19세기에 가장 유익한 신학적 발전”이라고 최고의 찬사를 보냈다.
  폰 호프만의 영향은 해박한 학자 테오도르 짠에게 선명하게 나타난다. 짠은 신약신학을 과학적인 종교체계로 보지 않고 성경에 포함된 신학을 제시하는 것으로 보았다.
  쉴레터는 “무신론적 신학 방법들”이라는 도전적인 논문에서 현대적 역사비평법에 들어 있는 무신론을 거부하고 세계관을 포함한 문화신학이나 현대의 역사비평법이 신약신학 방법으로 적절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하나님의 활동을 배제하고 순수하게 역사적으로만 기독교의 발전을 연구하려는 방법은 “무신론적”이다.


  몰간은 쉴레터의 입장이 판넨버그의 신학적인 입장의 일부 측면들 및 판넨버그가 그 이후의 “말씀의 신학”을 비판한 점과 공통점이 많다고 보았는데, 이것은 바른 지적이다.
  고펠트와 크라우스는 쉴레터의 접근법 속에서 구원사 개념을 보았는데, 이것은 매우 정확한 관찰이다. 쉴레터는 “신학적인”관심을 지배적인 것으로 삼는 자들의 선구자이다.
  윌리암 브레데가 “소위 신약신학의 과제와 방법에 관하여”에서 개괄적으로 제시한 방법은 쉴레터의 접근법과 이 이상 다른 방법이 있겠나 싶을 정도의 신약신학 방법이다.
  바이넬은 “신비적 구속 종교”와 대조되는 “윤리적 구속 종교”로서의 “예수의 종교”를 크게 강조하였다. 이 둘이 초기 기독교의 “종교” 속에 통합되어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헤겔 변증법의 영향이 분명히 나타나 있다.


  바이넬의 책이 출판되고 2년 후에, 빌헬름 부세트의 중요한 책 “주 그리스도”가 등장했다. 부세트는 기독교의 기원과 발전에 관한 미묘한 역사를 통하여 바우어의 시대를 극복했다.
  칼 홀과 고펠트는 초기 보편 교회의 기원이 부세트와 종교사적인 접근법에 의해서 설명되었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20세기로 접어들면서 개신교 신학은 다양한 파노라마로 표현되었다. 첫째, 1897년 바젤 대학교에서 자신의 전공인 신약해석과 고대교회사를 자발적으로 포기한 프란쯔 오버벡이 있다. 그가 그렇게 한 것은 자신을 “근본적 불신앙”으로 이끈 순수 역사적 방법론 때문이다. 그의 급진적 불신앙은 신약을 순수하게 역사적으로 연구하는 신학적인 과제 자체를 부인하는 것이었다. 둘째, 종교사 학파가 있는데 그 종교사적 신학작업은 일관된 역사비평법에 기초한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순수한 역사적” 방법을 신랄하게 비판한 쉴레터가 있는데 그는 구속사적 접근법에 견고한 관심을 두었던 매우 박학한 학자이다. 이리하여 변증법적 신학이 일어난 시기까지 이른 것이다.

 

 


        4. 변증법적 신학에서 현재까지


  칼 바르트가 해석학과 신학에서 과격한 변화의 신호를 보냈다. 그는 1918년 독일어로 된 그의 강력한 로마서 주석 서문에서 도전적인 말로 자유주의에 대한 환멸을 표현했다. 바르트의 이러한 과감한 지적은 변증법적 신학을 낳은 부분적인 이유가 되었다. 변증법적 신학은 해석과 신학의 문제를 새로운 방식으로 제기한 신학이다. 바르트는 신인관계에서 신적측면, 즉 계시의 출처로서의 하나님을 강조하였다.


  20세기 신약연구에 있어서 가장 지배적인 인물이 변증법적 신학과 함께 등장하여 그것으로부터 출발했다. 루돌프 불트만의 학문활동은 양식비평과 비신화화, 이 양자를 창시했다. 그는 다른 무엇보다 역사적 예수에 관해 새로운 연구에 대한 논쟁에 기여했다. 그의 활동은 그의 견해들에 대한 찬반의 문서들이 홍수처럼 쏟아지게 하였다.


  불트만에 대한 가장 의미 깊은 반발은 1950년대에 불트만 자신의 학생들로부터 나온 것인데, 그들은 통상적으로 후불트만 학파라고 불리운다. 후불트만 학파는 역사의 예수가 신앙에 적실성이 없다는 불트만의 주장을 반격했다.


  1960년대 초, 후불트만 학자중 몇 명은 불트만의 해석학, 특히 초기 하이데거의 실존주의를 채택한 불트만의 입장을 초월하여 언어가 기능하는 방식에 대한 불트만의 이해를 비판했다.
  역사적 예수에 대한 새로운 연구 운동과 신해석학 운동에 회원으로 있는 후불트만 학자가 1976년에 영어로 논문을 발표했는데, 로빈슨은 그 논문에 “신약신학의 미래”라는 도전적인 제목을 붙였다.
  스툴마허는 “승인의 해석학”을 주장했는데, 이것은 “성서 말씀의 내재적인 능력” “신앙의 지평과 교회의 경험” “초월성으로부터 우리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진리와 만나기 위한 개방성” “신앙의 가능성에 대한 개방성”을 위한 충분한 여지를 포함하는 해석학이다. 그는 자신이 “케리그마신학, 경건주의, 그리고 성서적인 방향을 지닌 루터주의의 경계선에선 자”로서의 중간 입장을 취하고 있다고 보았다.


  로빈슨과 스툴마허의 입장은 그들의 신약신학 개념에 있어서 불트만 학파에서 나오는 자들이 과격한 다양성을 지닐 수 있다는 것을 반영한다. 로빈슨의 프로그램이 “순수한 역사적”방향으로 회귀하는 것임에 비하여 스툴마허의 프로그램은 소위 “구속사” 학파로 좀더 다가가는 것 같다.


  로마 가톨릭 학계는 1928년에 최초의 신약신학을 출판했다. 불란서 신학자 레모녀는 “신약의 신학”에서 주제적 접근법을 제시했다.
  본시르벤은 1951년에 “신약의 신학”을 내놓았는데 그도 역시 신약신학을 통합적으로 제시하는데 관심을 두었다.
  현대 가톨릭 성경운동은 피우스XII세의 회람문으로 시작되었다.


  스코틀랜드의 헌터가 쓴 “신약신학 서론”은 “그리스도의 사실”에 근거해서 신약신학에 대한 역사적 접근법을 다소 드러내고 있다.
  1940년대 이후 미구의 “성경신학 운동”을 탁월하게 정리해서 소개한 사람이 차일즈이다. 그 운동은 미국 나름의 운동이라고 한 그의 독특한 강조점이 바르에 의해 도전을 받았는데, 바르는 “영국의 유럽 대륙에서도 동일한 넓은 경향이 배경은 달라도 존재했다”고 지적했다.

 

 


   제 2 장 신약신학의 방법론


        1. 주제적 접근법


           1. 알란 리차드슨


  알란 리차드슨은 “신약신학 서론”(1958)이란 제목으로 신약신학을 제시했는데, 자기 책의 구조를 16장으로 잡았다. 리차드슨은 “신약신학은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집필될 때 반드시 사도적 신앙으로부터 시작할 것이다”라고 말하고 “믿음과 들음”이란 제목의 제1장 벽두에서 “근본적인 신앙개념 연구로부터 신약신학 고찰을 시작하는 것이 적당하다‘고 주장했다. 16장의 방법론적인 구조에 대해서는 주제적인 구조이다. 리차드슨은 “내부로부터” 자신의 주제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외부로부터 부과된 구조들로부터 자신의 주제를 다루는 것 같다.

 

 


           2. 칼 쉘클레


  쉘클레의 방법론은 “신약 전제를 통해서 더 무게 있는 단어들, 개념들, 주제들을 추적하고 신약의 개별적인 책들과 그룹들 속에서 실제로 그것들이 어떻게 형성되고 어떤 의미를 가지게 되었는가를 조직적으로 요약하여 묘사하는 것”이다.

 

 


        2. 실존주의적인 접근법


           1. 루돌프 불트만


  불트만의 유산은 “순수하게 역사적인” 연구방향으로 남아 있고 그는 종교사 학파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이것은 무엇보다 먼저 그의 역사적 뿌리가 역사비평법에 깊이 내려져 있음을 의미한다. 불트만의 두번째 역사적 뿌리는 1920년대의 변증법적 신학, 특히 바르트와 고가르텐과 연결되어 있다. 불트만은 역사적 이슈, 즉 “사고하는 행위”로 만족하지 않았다. 역사와 인간 존재에 대한 불트만의 이해는 그의 체계 속으로 하이데거의 실존주의를 병합하게 하였는데, 그는 이 실존주의에 근거해서 “실존주의적 해석”의 가장 강력한 옹호자가 되었다. 불트만은 “역사적 재구성”과 “실존주의적 해석”을 결합했다. “실존주의적 해석”은 그의 비신화화 프로그램과 긴밀하게 묶여져 있고 상호 연관되어 있다. 비신화화가 해석의 방법으로 필요한 것은 “신학의 우주론이 성격상 본질적으로 신화적이기 때문이다. 지구가 중심이고 위로는 하늘, 아래로는 지하 세계, 이렇게 3층 구조의 세계관이 나타나 있다. 이러한 세계관이 옳은 것으로 전제되어 있는데, 이것은 ”현대인에게는 믿을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현대인은 신화적 세계관이 케케묵은 것임을 확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불트만의 이해에 있어서 나아가야 할 방향은 두 가지 밖에 없다. 한 방향은 현대인이 복음의 메시지를 받아들이고 그것과 함께 “신화적 세계관”을 받아들일 것을 기대하는 것이고, 다른 한 방향은 신학이 케리그마에서 그 신화적 틀을 벗겨내는 작업, 즉 그것을 비신화화하는 작업을 하는 것이다.

 

 


           2. 한스 콘첼만


  콘첼만은 재구성과 해석의 상호 관계 면에서 변화를 보였다. 이러한 변화는 재구성, 즉 규범적인 것보다는 역사적인 것을 향한 변화이다. 불트만의 시대에는 “말해진 것의 의미를 해석하는 것과 본문들의 메시지”를 강력하게 강조하였으나, 콘첼만은 “시작들이 바뀌었다”는 느낌을 가졌다. 오늘날에는 역사 긍정주의와 상대주의를 향한 새로운 경향이 있다. 성경신학자들이 수십년간 좋아했던 위로 향하는 경향 자체가 일종의 도피주의 - 역사적인 것에로 도피하는 것임이 입증되었다. 콘첼만은 역사 긍정주의와 상대주의를 향한 이러한 경향을 역류하고자 하였다.


불트만은 본문의 재구성이 실존주의라는 철학적 매체를 통하여 현대인들을 위해 번역될 때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것, 즉 “해석”을 강조했지만, 콘첼만은 이러한 불트만을 반대하는 작전을 통해서 그러한 경향에 역류하고자 했다. 실존주의적인 접근법은 실존주의적 해석에 맞는 신약의 부분들만을 다룰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접근법에 맞지 않는 신약의 부분들만을 다룰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접근법에 맞지 않는 신약의 부분들은 “내용 비판”의 대상이 되거나 아예 고려대상에서 제외되었다. 불트만과 콘첼만의 실존주의적 접근법은 히브리서, 베드로전후서, 야고보서, 유다서, 계시록 등 문서들을 주목할 가치가 없는 저서들로 취급한 것 같다.

 

 


        3. 역사적 접근법


           1. 킴멜


  킴멜은 “바울과 예수” 문제에 있어서 전혀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불트만은 브레데 계열에서 바울과 예수 사이의 단절이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킴멜의 주장은 바울은 예수의 건전한 증인이며 해석자라는 것이다. 킴멜의 결론은 “예수와 바울은 동일한 역사적 진리에 대한 증인들이지만 바울은 예수가 이루어 낸 구원과 예수로부터 기대된 구원을 되돌아보면서, 또 내다보면서 지적한 것뿐이다”는 것이다. 킴멜은 신약신학의 통일성 문제를 강조한 것이다. 킴멜의 신약신학이 예수, 바울, 요한 등 주요 증언들에만 국한되어 있기 때문에 신약 전제의 통일성 문제에 대답할 수 없지만, 그는 이런 과정에 있어서 로제의 추종을 받았는데 로제는 그의 “신약신학 개요”의 결론을 “신약의 통일성”에 대한 한 장으로 내렸다.

 

 


           2. 요아킴 예레미아스


  “적극적 - 역사적” 연구방향의 최고 대표자는 괴팅겐 대학교의 국제적 명성이 있는 학자 요아킴 예레미아스이다. 그는 신약신학을 “케리그마 신학”으로 만드는 불트만의 접근법을 선두에서 비판한 학자 중의 한 사람이 되었고 “강력한 역사 반비판주의”를 개발했다. 예레미아스의 연구는 역사적 진리를 받들고 말씀을 가현설적 증발로부터 보호하려는 것이었다. 예레미아스는 1971년에 독일어와 영어로 동시에 그의 “신약신학 : 예수의 선포” 첫권을 출판했다. 제1장은 “예수의 어록 전통은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는가?” 하는 제목이 붙어 있다. 이것은 역사적 예수의 문제와 관련된 것인데 역사적 예수 문제를 불트만은 신약신학의 전제라고 보았고, 콘첼만은 신약신학의 일부가 결코 아니라고 선포한 바 있었다.


예레미아스는 “우리의 출처들이 예수 설교의 기본적인 사상들을 어느 정도의 개연성을 가지고 제시해 주기에 충분한가의 여부”를 조사하는데 관심을 두었다. 제2장은 “예수의 사명”을 다룬 것인데 “예수와 세례 요한”, “예수의 소명”, “계시의 전달”, “하나님을 부를 때의 ‘아바’”, “사명에 대한 예스”등이 그 세부 항목들이다. 제3장과 제4장에서는 “구원 시대의 여명”과 “은혜의 시대”라는 제목으로 예수의 선포를 다루고 있다. 예레미아스는 “예수의 공식 선포의 핵심 주제는 하나님의 왕적통치였다” 제5장은 예수 메시지의 개인적인 호소를 다루었는데 여기서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이 형성되고, 이 백성은 하나님을 끝없이 경배하는 신앙의 남은 공동체이다. 예레미아스는 제6장 “예수의 사명에 대한 예수의 증언”에서 그의 방법론을 논시했다. 예레미아스는 ‘에고’를 강조해서 사용한 것이 예수 당시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것으로서 이것은 하나의 암시적 기독론을 지원한다고 주장했다.

 

 


        4. 구원사적 접근법


           1. 오스카 쿨만


  쿨만에게 있어서 구원사적 접근법은 “기독교가 무엇인가? 하는 옛 질문에 대한 하나의 답변, 바로 이것을 추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쿨만은 “역사 속의 구원”이라는 거작을 남겼다. 이 책의 내용 제1부에는 “서론”이 포함되어 있다. 여기에는 2세기 영지주의, 20세기의 종말론, 구원사와 관련된 해석학이 개관되어 있고, 그 다음에 구원사의 정의가 내려져 있다. 제2부는 “구원사적 접근법의 창시”라는 제목으로 되어 있다. 여기에서는 내용과 해석, 성경 증언들의 신앙, 항시성과 부수성, 신약에서의 구원사적 인용들의 공고화 등이 다루어져 있다. 제3부는 역사와 신화, 구원사와 역사, “이미”와 “아직 아니”의 갈등 등에 역점을 두고 ‘현상학적인 특징들“을 거론하고 있다. 제4부는 그 책의 핵심부로서 구원사의 ”신약의 주요 유형들“, 즉 예수에게서의 구원사의 시작, 구원사의 중간시대, 요한의 복음과 구원사를 다루고 있다. 마지막으로, 제5부는 ”조직신학의 내용과 교리의 역사 : 구원사와 성경 이후 시대를 다루고 있다. 이러한 개요를 통해서 당장 드러나는 것은 쿨만은 구원사가 신약 증언들의 본질적 틀이라는 것을 주장하면서 불트만과 그의 추종자들에 의해 알려진 실존주의적 신약신학 방법에 도전을 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종말론의 시간성을 제거하는 방식, 즉 신약 케리그마의 풍요성을 붕괴하여 지금 여기의 “현시적 종말론”으로 대조적으로, 쿨만의 대안은 “이미”와 “아직 아니”간의 구원사적인 긴장이 신약 이해의 열쇠라는 것이다. “예수의 선포를 포함한 신약신학 전체가 이런 긴장에 의해 한정된다. 오늘날 인간은 ”구원사의 중간시대,“ 즉 ”두 극점, 성경시대와 종말시대간의 중간 단계“에 살고 있다. 서술적 과제가 쿨만에게 있어서는 핵심적인 것으로 나타나 있다. 그는 신약의 구원사를 실존주의, 플라톤주의, 혹은 어떤 다른 체계에 의해 현재의 것으로 옮기는 것을 거부했다.

 

 


           2. 조지 래드


  래드의 거작은 “신약신학”이라는 제목으로 되어 있고 신약신학에 있어서 구원사적 접근법에 확실하게 속하는 책이다. 래드는 구원사를 “계시사의 흐름”으로 묘사하면서 쿨만의 개념을 따르지 않았다. 즉 초기의 해석들에 대한 “재해석” 혹은 초기 구원사 해석들의 “교정”의 개념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다. 래드는 라이트의 언어를 사용하여 신약은 이러한 구원사의 흐름 속에 서 있다는 것과 “신약신학은⋯ 주로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 안에서 행하신 것을 설명하는 것으로 구성된다”는 것을 진술했다. 기독교 선포의 본질은 이와 같이 “역사 속에서의 하나님의 행위들을 설명하는 것”이다. 래드는 그의 신약신학을 6대 부분으로 나누고 그 각부를 또한 장들로 세분하였다. 제1부는 “공관복음”을 다루는 것이다. 래드는 주제적인 횡단법을 사용하여 8개의 장은 예수가 선포한 천국의 측면들을 다루고 5개의 장은 기독론적인 개념들의 측면들을 다루었다. 이러한 제1부 전체의 앞에 다소 갑작스럽게 세례 요한에 대한 한 장을 배치했다. 제2부는 “제4복음서”를 다룬다. 이것은 비판적인 문제들에 대한 한 장으로 시작되는데, 여기서 래드는 자신의 목표를 이렇게 진술했다 : “이것이 어느 정도로⋯ 공관복음과 유사성이나 차이성이 있는지를 발견하고자 한다. 제3부는 “초대교회”라는 제목 하에서 사도행전의 신학을 다룬 것이다. 제4부에 나타난 바울의 신학은 요한복음의 신학 다음으로 래드의 신약신학의 강점 중의 하나이다. 구원사는 통합적인 개념을 포함하므로, 래드는 데이비스와 함께 바울신학의 핵심을 “그리스도의 업적을 통한 도래하는 구속의 새 시대의 실현”이라고 보았다. 제5부는 “일반서신”이란 제목으로 히브리서, 야고보서, 베드로전후서, 유다서, 요한 서신들의 신학을 요약하는 내용이다. 마지막 부분인 제6부 “계시록”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래드의 구원사적 접근법은 거듭 지적된 바와 같이 방법론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다. 그는 구원사에 통합되어 그것을 표현하는 성경의 독특한 개념들을 포괄적인 단어연구를 통해 다룬 것이다.

 

 


           3. 레온하르트 고펠트


  고펠트는 그의 신약신학에서 약 1900년 이후의 여러 가지 입장들을 개관하면서 자신은 폰 라드와 쿨만의 광범위한 구원사적 접근법을 따르고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쿨만과는 대조적으로 신약은 “구원사를 보편사의 계획”으로 보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신약은 구원사를 “약속과 성취의 상호 관계”로만 보고 있다는 것이다. 고펠트는 신약신학의 “목표를 하나의 글, 혹은 그룹의 글들로부터 내용적으로 질서화되고 연결된 묘사, 예수의 사역이나 초대교회의 선포와 교훈의 이러한 묘사를 도출해 내려는 시도”라고 규정했다. 고펠트의 신약신학 각권은 하나의 주요부분에 집중되어 있다. 제1권은 “예수의 행위의 신학적인 의미”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데, 이것은 이 부제가 지시하는 대로 그 내용에 전적으로 집중되어 있다. 제1장은 신약신학의 출발점 문제와 관련된 역사적이고 신학적인 이슈들을 토론한다. 제2장은 “하나님의 통치의 도래”로 시작된다. 예수 선포의 핵심이 하나님의 나라이기 때문이다. 예수의 요구와 하나님 통치의 선물로서의 “회심”이라는 주제가 제3장과 제4장에서 다루어져 있다. 제5장은 “종말론적 갱신으로서의 예수의 구원활동”을 제목으로 예수활동의 일환인 기적들을 다룬다. 메시아의 자기 의식이 제6장의 주제이다. “예수의 자기 이해”는 예수가 자신에 대하여 적어도 “인자”라는 명칭을 사용했다는 것을 논시한다. 예수활동의 목표가 제7장에서 “예수와 교회”로 거론되었다. 마지막 장은 “예수의 종말”에 관한 것으로서 수난, 죽음, 부활, 승천을 포함하고 있다.


  고펠트의 신약신학 제2권은 1976년에 출판되었고, “사도적 그리스도 증언의 다양성과 통일성”이란 부제가 붙어 있다. “초기교회”라는 제목의 제2부는 “교회로서의 예수의 제자도”와 “기독론의 시작들”에 대한 장들을 담고 있다. 제3부는 “바울과 헬라적 기독교” 제목으로 헬라적 기독교의 문제에 대한 서론과 바울신학의 전제에 대해 한 장을 할애하는 것으로 토의를 시작한다. “바울 이후 저술들의 신학”이란 제목이 붙은 제4부는 구조적으로 미완성이다. 제1장은 베드로전서의 신학을 “베드로전서에 의거한 사회 안의 기독교인들의 책임”이란 제목으로 다루고 계시록의 신학을 “요한의 계시에 의거한 말세의 후기독교적 사회 안의 기독교인들”이란 제목으로 다루었다. 제2장은 야고보의 신학, 즉 제국의 신학을 마태의 신학과 쌍으로 다루었는데, 마태의 신학은 “마태 속에서 예수 등장의 의미”라는 제목으로 다루었다. 제3장은 히브리서의 신학을 다룬 다음 구원사의 신학자 누가를 다루었다. 누가복음을 사도행전과 분리해서 다룬 것이 독특하다. 마지막 장은 요한신학에 대한 것이나 완전하게 개진되지는 않았다.

 

 

 

           5. 결론적 논평


  주제적 접근법은, 하나 혹은 그 이상의 주요 주제들을 횡적으로 거론하는 횡단법과 손을 맞잡고 동행한다. 주제적 접근법의 특별한 주관성은 선별성의 문제이다. 하나의 주요 주제나 혹은 보다 많은 단순한 주제들에 따라 횡단법을 사용하는 신약신학자는 선별의 원리에 의해 움직이지 않을 수 없다. 이와 긴밀하게 연결된 것은 동질성의 원리이다. 동질성의 원리는 모든 다른 주제들, 모티프들, 혹은 주요 주제에 동질적인 개념들과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이미 여기에서 이 접근법의 독특한 제한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첫째, 선별의 원리가 어떤 객관적인 근거에 의해서 작용하는가? 둘째 동질성의 원리는 선택된 주요 주제 혹은 주제들과 관련해서만 기능을 발휘할 수 있다. 셋째, 만일 선별의 원리가 주요 주제와 무관한 방식으로 사용된다면, 주관적인 근거 외에 어떤 근거에 의해서 일부 부제들이 포함되고 다른 주제들은 제외되는가?


  성경 재료들의 다양한 본질의 풍요성 때문에 그것이 다루는 재료들과 걸맞는 하나의 접근법이 요구된다.


  신약신학의 주요한 방법론적 문제들 중의 하나의 신약신학에 있어서 예수의 위상 문제이다.


  방법론의 문제는 신약신학이라는 것이 있는가, 혹은 신약과 그 세계의 역사적 연구가 1897년 브레데가 제의한 것처럼 “초기 기독교의 역사”라는 이름으로 불려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신약신학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방법론적 문제 중의 하나는 역사적 재구성과 신학적 해석의 문제이다. 불트만의 비신화화 프로그램은 알맹이를 그 껍데기로부터 벗겨서 실존주의 철학의 도움을 받아 그 케리그마를 현대인을 위한 것으로 번역하는 과정의 일부이다. 불트만의 경우는 실존주의적 해석에 역점을 둔 것이다. 로빈슨은 금방 지적하기를 “물론 예수, 바울 혹은 요한이 비신화나 실존주의를 이해했을 리는 전혀 없다”고 했다. 불트만의 가장 충실한 추종자 콘첼만도 최근의 경향과 자기 자신의 방향의 역점을 “역사적 재구성, 즉 신약의 사상 세계가 그 당시에 의해서 조건화된 것으로 제시하는 것”이라고 표현했다.

 

 


   제 3 장 신약신학의 중심과 통일성

 

        1. 이슈

  신약연구에 있어서 가장 뜨겁게 논쟁되고 있는 이슈들 중의 하나는 신약의 중심과 통일성 문제이다. 1950년대 이후로 독특하게 제기된 문제는 신약신학이 어느 정도로 동질성이 있는가 하는 것이다.

 

 

 

        2. 신약의 중심을 향한 연구

 


           1. 인간론


  불트만과 그의 제자 브라운은 인간론이 신약의 중심이라고 보았다. 불트만은 신약을 비평적으로 재구성했는데, 그는 “현재에 대해 무언가 말하고 있다는 전제”에 이끌렸다. 따라서 신약신학이 제시할 과제는 불트만에게 있어서 “이러한 신앙의 자기 이해를 케리그마와의 관련 속에서 선명하게 하는 것”이다.


  불트만의 제자 중의 한 사람인 브라운은 스스로 여러번 신약의 통일성 문제를 다루었다. 브라운은 신약의 다양성을 전적인 상이성의 극단으로 몰고 간 학자로 보인다. 브라운이 본 신약의 “내면적 중심”은 신학적 인간론이다. 이러한 “내면적 중심”이 신약의 모든 책들 혹은 책들의 블록들을 포함할 수 없다는 것은 브라운 자신도 인정하고 있다. 그러므로 브라운은 “정경 속의 정경”의 원리를 주장했다.


  불트만은 자신의 의도가 브라운에 의해서 아주 일관성 있게 개진되었다고 주장했다. 신자의 자기 이해라는 항존요소를 가진 브라운의 중심 개념을 불트만이 명시적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불트만이 이렇게 받아들인 것과는 대조적으로 몇몇 후불트만 학자들은 반대의사를 표현했다.


  케제만은 신학적 인간론이란 브라운의 “내면적 중심”이 “파산을 의미하는 일종의 신비주의”라고 하면서 거칠게 비판했다. 로제는 신약에 통합된 기독론이 결여되어 있다면 신약에는 통합된 인간론도 결여되어 있다는 것을 보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에벨링은 브라운의 통일성 원리가 기독교적인 어떠한 요소도 결핍하고 있다고 하여 그것을 반대했다. 브라운의 신학적 인간론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하지 않고 기독교의 본질을 규정하려는 시도이다. “신앙의 자기 이해라는 항존요소”는 인간론이 아니라 “이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 즉 기독론적 케리그마 쪽으로 방향을 잡고, 이 케리그마를 그 자체의 고백 속에서 받아들이는 신앙이다”고 에벨링은 주장했다.

 

 


           2. 구원사


  금세기에 구원사를 가장 포괄적으로 다룬 학자는 쿨만이다. “구원사”가 쿨만의 사상에 있어서 성경, 구약과 신약 양자의 정경의 의존하는 기초이다. 그는 “정경 속의 정경”이라는 루터적 문제에 반대 의견을 분명히 했다. 쿨만은 정경인 성경 전체를 심각하게 받아들인다는 면에서 평가되어야 한다. 그는 어떤 특정한 부분에 집중하여 전체를 판단하는 “정경 속의 정경”을 피하려고 했다.


  쿨만이 성경의 “중심” 혹은 “본질”을 주장하자 이에 대한 반발이 여러 방면에서 일어났다. 에반스는 쿨만의 사상에 있어서 “구원사”의 결함은 “그것이 거룩한 사건 혹은 신적인 행동의 운하를 전제하고 그 운하가 세계 역사의 둑 안에서 흘러 그 결과로 그 운하가 어디에서 발견될 수 있는가를 결정하는 것과 함께 의심스러운 정의와 한계규정이 나타난다는 점이라는 느낌을 말했다. 쿨만의 구원사 개념에 대한 불트만의 초기의 반발은 ”그가 신약신학을 기독교 역사철학으로 바꾸었다는 것이었다. 쿨만은 구원사를 어떻게 이해하느냐는 문제를 떠나서 구원사가 중요한 성경적 개념이라는 것을 논시했다.

 

 


           3. 언약, 사랑, 그리고 기타 제안들


  성경의 언약 개념이 최근 성경연구의 전면으로 부각되었다. 금세기의 구약신학의 거성 중의 한 사람이 언약 개념을 구약구조의 체계적 원리로 사용하였다. 아이크로트는 언약개념에 근거하여 구약을 조직적 횡단법으로 정리하는 것을 택했다.

 

 


           4. 기독론


  “기독론”의 표제 하에서 우리는 이런 저런 방식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된 여러 가지 제안들을 토론할 수 있을 것이다.
  라이케의 제안은 “그리스도 - 사건 안에⋯ 신약의 본질적 통일성이 있다”고 했다.


  그랜트도 신약이 “진정으로 그리스도 중심적이다”라고 주장함으로써 유사한 견해를 밝혔다.
  무어는 구원사가 신약의 기본적인 개념이라는 것을 강력하게 지지하면서도 “예수 그리스도라는 중심으로부터 구원사의 선이 언약을 통해서 창조와 그 이전까지 거꾸로 흐르고, 교회와 재림과 그 이후까지의 그 사명을 통하여 앞으로 흐른다”고 강조했다.


  래드는 쿨만만큼 구원사에 집중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쿨만에 반대하여 구원사적 혹은 종말론적 구조가 신약신학의 구조를 위한 종합을 제공한다는 것을 자신의 초기의 견해에 비추어 거절했다.
  슈라게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신약의 중심이 있다는 것을 반대하지 않았다.


  웁살라 대학교의 리젠펠트는 “상이한 신앙요소들 - 그 유일한 공통점은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했다는, 예수라 이름하는 한 인간을 어떤 방식으로든 언급한다는 것 - 이 그토록 놀랍도록 짧은 기간에 수집되고 통합되고 동질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는 것, 이것이 어떻게 가능했는지의 문제를 제기했다.


  바일너는 역사적 예수가 어떻게 선포된 승귀의 그리스도가 되었는가를 보여 주는 것이 신약신학의 과제라고 제의했다.


  신약의 통일성이 무스너에 의해서는 다르게 파악되었다. 무스너의 논제는 “복음의 중심은 신약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종말적 구원시대가 밝아온다는 복음이다”라는 것이다.
  일부 신약신학자들은 주요 종교 개혁자들의 강조점에 맞추어 “불경건한 자들의 칭의”라는 바울 사상을 신약의 중심으로 보았다.


  케제만은 칭의 메시지를 바울신학의 중심으로 볼 뿐 아니라, “정경 속의 정경” 원리를 지지하면서 이것이 신약 전체의 중심이라고 제의했다.
  케제만의 제자 슈라게도 케제만이 강조한 것을 강조했다. 슈라게에게 있어서 “불경건한 자들의 칭의(롬4:5)는 바울적 선포와 신학의 중심이며 핵심주제이다.”
  불경건한 자들의 칭의라는 “신학적인 공식”이 신약, 아니 성경 전체의 중심이라는 것에 대한 간접적인 반박은 루즈가 제기했다. 그는 “신약의 중심은 십자가 신학”이라고 주장했다. 루즈는 신약의 중심에 대한 연구를 바울에게서 시작했지만 케제만과 그의 추종자들과는 다른 기독론적 측면에 도달하게 되었다.

 

 


        3. 신약의 중심과 정경 속의 정경


  신약의 중심에 관한 현재의 토론은 정경비평 문제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신약의 중심으로 만들어지는 어떠한 공식, 원리, 사상 등 - 그것에 근거하여 “정경 속의 정경”의 선별원리로써 정경비평을 하는 - 은 “주관적인 임의성”이다. 왜냐하면 “기독교 신앙에 대한 주어진 전이해가 정경 속의 비판적 정경으로서 신약 속으로 투사되어 있기” 때문이다.


  내용비판 혹은 정경비평의 목적으로 사용되는 “정경 속의 정경” 역할을 하는 하나의 중심에 관한 또 하나의 비판은 그것이 불가피한 축소주의에 빠져 있다는 것이다. 전체적으로 본 신약은 “그 완전성 속의 진리”이다. “정경 속의 정경”의 원리는 신약의 총체성을 정당하게 다룰 수 없다. 신약의 중심이 무엇이냐, 즉 “정경 속의 정경” 역할을 하고 정경비판의 실질적 원리로 작용할 중심이 무엇이냐를 토론하면서 학자들이 지적한 다양한 문제들은 극복하지 못할 것 같다. 신약 전체를 적절하게 살리려는 신약신학의 방법은 임의성, 주관성, 축소주의를 해결할 수 없다. 이런 문제는 성경 바깥으로부터나 혹은 성경 안으로부터 하나의 중심을 선택해서 찾는 선택원리에 내재하고 있는 문제이다. 이 중심에 근거하여 성서 전체의 내용이나 그 부분들에 관한 가치판단을 하는 것이다.

 

 


   제 5 장 신약신학을 향한 기본적인 제안들 : 하나의 복합적인 접근


  신약신학에 있어서 현대의 방법론들과 접근법들에 기본적인 위기가 있다. 이미 취해진 길들에 대한 비판을 통해 우리는 보다 더 적절한 접근법을 고안해 내야 한다. 여기서부터 진행하는데 있어서 보다 생산적인 방법은 다음과 같은 제안들에 근거해야 할 것이다.


  1. 성경신학은 신학적 - 역사적 학문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구약신학 혹은 신약신학을 하는 성경신학자는 본문이 ‘의미했던’ 것을 발견하여 묘사하고 또한 그것이 오늘날 ‘의미하는’ 것을 설명하는 것, 이 양자가 자신의 과제라는 것을 주장해야 한다. 성경신학자의 과제는 역사적 연구와 언어와 언어학적 연구 방법을 조심스럽게 사용하여 성경을 의미있게 해석하는 것이다. 성경의 증거가 의미했던 것을 “거기로 돌아가서” 이해하고 묘사하고, 성경의 증거가 신학자 자신의 특별한 역사적 상황 속에 처한 현대인에게 의미하는 것을 설명하려는 시도를 하는 것이다.


  신약신학을 위한 적절한 방법은 출발점으로부터 신학적이면서 동시에 역사적이어야 한다. 역사적이면서도 신학적인 방법으로 작업하는 성경신학자는 인간 객관성의 상대성을 완전하게 인식한다. 따라서 성경신학자는 자기 신앙이 그가 서 있는 신앙의 전통과 공동체에 근거하여 성경 자료들을 현대화하도록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다. 성경신학자는 성경본문의 질문들을 그 자체의 방식대로 제기해야 한다. 성경신학자는 자신의 전통과 자기 신앙의 공동체가 그가 발견한 것에 의해서 도전과 안내와 활력과 풍요로움을 얻을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야 한다. 성경신학자는 또한 순수하게 문헌학적인, 언어학적인, 그리고 역사적인 접근법이 역사적 본문의 완전하고 완벽한 의미를 밝히기에 결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우리는 역사적, 언어학적, 그리고 문헌학적 연구에서 사용할 수 있는 모든 주석적 도구들을 적용하면서도 성경 저자들의 말하는 기본적인 경험, 즉 신앙에 굴복하지 않는 한 결코 문제의 핵심에 이를 수 없는 것을 알아야 한다. 신학적 - 역사적 해석이 역사 경험의 모든 심층들을 헤아리고 본문과 그 안에 표현된 실재의 완전한 의미를 뚫고 들어가기 위해서는 신앙의 뒷받침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해석이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증거하는 진술들과 증언들을 파악하려고 할 때 - 시간과 사건의 주인으로서의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의 행위들과 말씀들을 통하여 실제적으로 날자를 확인할 수 있는 사건들 속에서 자신을 계시하였음 - 그러한 진술들과 증거들을 이해하는 과정은 표현된 완전한 실재를 완전하게 파악하기 위해서 성격상 역사적이면서도 동시에 신학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해야 한다.


  2. 신약신학 작업을 하는 성경신학자는 그의 작업이 신약으로부터 취해진 재료들에 근거해야 한다. 신약신학은 신약의 여러 책들과 책들의 블록들의 신학에 대한 문제를 다루는 것이다. 신약은 기원, 내용, 형태들, 의도들, 그리고 의미가 매우 다양한 책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문제들의 본질 때문에 우리에게 일차적인 맥락, 즉 우리가 그것을 처음 만나는 형태에 비추어 들고 있는 재료를 살펴야만 한다. 즉 문헌 전체의 본질적인 부분의 언어적인 구조로 그것을 보아야 하는 것이다. 신약신학은 주로 신약 각문서나 신약의 블록들을 요약새서 해석하고 설명하는 것이다. 그 다양한 개념들, 주제들, 그리고 모티프들을 드러나게 하고 그것들의 상호 관계를 밝혀야 한다. 어떤 하나의 주제, 체계, 혹은 모티프도 그 안에 신약 관점들의 모든 다양성을 포함할 만큼 충분히 포괄적이지 못하므로, 어떤 특정 개념, 공식, 기본사상 등을 신약의 유일한 중심으로 삼아 그것에 의해 신약의 다양하고 다변적인 증거들을 체계화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구약의 중심이신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가 신약의 중심이시라는 것을 주장해야 한다.


  3. 신약신학을 제시할 때는 예수의 메시지, 여러 가지 신약문서들로부터 얻을 수 있는 그 메시지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다. 이것은 예수의 메시지를 각각의 복음서들로부터와 다른 신약문서들에 인용된 몇몇 어록들로부터 구할 수 있다는 것과 신약 문서들 속에 보존된 것은 기본적인 역사적 신빙성이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4. 신약신학은 여러 책들이나 책들의 그룹들의 신학을 알고자 하는 것뿐 아니라 또한 신약의 주요 주제들을 함께 모아서 제시하는 것이다. 신약신학은 주제들, 모티프들, 그리고 개념들을 지향하는 경향이 있어야 하고 모든 다양성과 신약 자체에 의해서 가해지는 모든 제한들과 함께 제시되어야 한다.


  신약 증거들의 이러한 종적인 시각들은 복합적인 논의를 통해서만 제시될 수 있다. 신약 증거들의 풍요성은 신약의 본질과 걸맞는 복합적인 접근법에 의해서만 파악될 수 있다. 종적 주제들에 대한 복합적 토의와 함께 이러한 복합적 접근법은 성경신학자로 하여금 하나의 구조적 개념에 의해서 결정되는 인위적이고 강요된 획일적인 접근법 - 거기에 모든 신약의 증거들을 두들겨 맞추어야 하는 언약이나, 교제, 하나님의 왕국, 혹은 기타 어떤 것이든 간에 - 의 개념으로부터 자유롭게 한다.


  5. 신약신학의 최종목표는 다양한 신학들과 종적 주제들, 개념들, 그리고 모티프들을 하나로 묶는 통일성을 논시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신약성경을 남겨 준 사람들의 경험 배후에 하나의 독특한 신적 실재가 있다면, 모든 다양하고 다변적인 신학적 성찰 배후에 신약 책들의 통일성이 있다는 것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신학의 궁극적인 목표는 그러한 통일성을 가급적 많이 은닉상태에서 이끌어 내어 그것을 투명하게 만드는 것이다.


  6. 성경신학자는 신약신학을 보다 큰 전체의 일부로 이해해야 한다. “신약의 신학”이라는 이름은 신구약으로 구성된 성경의 보다 넓은 맥락을 암시한다. 이 방법은 신약 사상의 풍부한 다양성, 옛 것과 새 것뿐 아니라 유사성과 차이성을 충실하게 다루는 이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이 방법은 문자적 의미와 신약이 소속되어 있는 보다 넓은 성경적 맥락에서 본문의 본래적인 역사적 증거를 조금도 왜곡하지 않는다. 이것은 모든 다양성과 다변성 안에서 통일성이 부각되게 하되 그 통일성을 획일성의 틀이 되지 않도록 한다.

 

 

   서     평


  하젤은 종교개혁시대로부터 계몽시대를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신약신학의 시작과 발전을 개관한 다음 신약신학의 방법론을 주제적 실존주의적, 역사적, 구원사적 방법론으로 나누어 설명하였다. 그는 이어서 신약신학의 통일성 문제를 다루면서 인간론, 구원사, 언약, 사랑, 기독론 등 신약신학의 핵심으로 제시된 학설들을 설명하고 신약신학의 핵심 문제가 정경 내의 정경 문제로 연결되는 것을 지적하였다. 그는 또한 신구약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논의하면서 역사적 연결, 성경적 상호의존성, 어휘, 주제, 예표론, 약속과 성취, 구원사, 시각의 통일성 면의 연속성을 제시하였다.


  하젤은 이와같이 다양한 방법론과 쟁점들을 소개한 다음 신약신학이 그 방법론과 접근법에 잇어서 근본적인 위기에 봉착했다고 말한다. 이런 위기에서 벗어나는 길로 그는 신약신학에 대한 다각도적 다형태적 접근법을 제의하고 있다. 다각도적 접근법은 신약성경의 다양한 책들을 바르게 다루려는 것이며 신약의 다양한 내용을 하나의 획일적인 견해나 제한된 성격의 복합적인 접근법으로써 설명하는 것을 피하고자 하는 의도이다. 다각도적 접근법은 신약사상의 풍요한 다양성을 충실하게 표현해 줄 수 있는 것이다.


  최근의 신약신학은 학문적 매력이 감소되었다. 그것은 너무나 많은 신약신학자들이 신약신학의 본질, 기능, 방법 및 범위에 대해서 다양한 견해를 표명하였기 때문에 학자들 사이에서 혼란과 긴장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하젤은 신약신학 내에 일어나고 있는 근본 논쟁들을 심도있게 논의 하고 또 신약신학이 학문으로 형성된 지난 2세기 동안의 발전과정을 정리하여 앞으로 신약신학이 어떻게 발전의 방향을 잡아나갈 것인가를 진술하고 있다.


  하젤은 오늘날의 신약신학계가 어떤 조망을 가져야 할 것인가를 말하고 있다. 그는 구약과 신약의 통일성과 연결성을 인정하고 진지한 자세로 성경본문을 다루면서 신약신학의 역사적 신학적 방법론을 결론적으로 제시하고 방대한 신약신학의 관련 문헌들과 자료들을 정래해 줌으로써 후학들의 연구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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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약 신 학
현대논쟁의 기본 이슈들
 
 


 
 신약신학과 구약

 

        1. 비통일성과 불연속성의 형태들


   ㄴ2세기에 말시온이란 사람은 영지주의의 영향을 받아 구약과 신약, 이스라엘과 교회, 구약의 하나님과 예수의 아버지 사이에 총체적 비통일성이 있다는 것을 강조했다. 말시온은 히브리 성서를 정면으로 거부했고, 동시에 신약에서 그가 이해하기에 히브리 성서나 그 사상들에 근접한 어떤 것도 거부했다. 이 때문에 기독교는 무엇이 기독교 진리인지의 문제를 다루고 정경의 문제를 결정해야 한다.
           1. 신약의 과대 강조 - 구약의 과소 강조

 

  신약 전체나 혹은 그 주요 부분들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말시온적 입장은 기독교 안에 오랫동안 존재해 왔다. 우리는 신약의 인용구들은 전통의 통일성을 전제하고 구약 안에 있는 보다 넓은 맥락을 환기시키기 위해서 주요 단어들과 주요 모티프들과 개념들을 지적하고 있다는 것을 주장해야 한다.
           2. 신약의 과소 강조 - 구약의 과대 강조

 

  스펙트럼의 반대편 끝에는 신약을 희생시키면서 구약을 너무 강조함으로써 신약과 구약 사이에 비통일성 내지 불연속성이 있다고 보는 시도들이 있다. 일부 학자들은 구약을 신학적, 역사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으로 만든다. 작고한 화란의 교리신학자 판룰러는 기독교 사상과 교훈과 관련하여 구약을 신약보다 우월한 수준에 올려 놓으려는 시도를 했다. 개혁주의 성경신학자 비셔는 구약에 대한 철저하게 기독론적인 접근법을 채용한 점에서 성경신학자들 중에 두드러지는 학자이다. 그는 주장하기를 구약을 포함한 성경이 그 진실된 의도, 그 진실된 주제에 비추어 해석되어야 한다고 했다. 그 진실된 주제는 그리스도이다. 이러한 원리들에 근거하여 비셔는 전적으로 기독론적인 구약 해석들을 제공했다. 그는 구약 전체가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그리스도에 관해 증거할 뿐 아니라 각각의 가장 작은 세부사항에서도 기독교인의 눈은 그리스도를 인식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고펠트는 핵심적인 지점을 꼭 집어내어서 “그리스도와 구약이라는 주제는… 신학 전체의 열쇠가 되는 문제이다. 라고 지적했다. 어떠한 기독교 신학자도 이 문제를 피할 수는 없다.

 

 

 

        2. 통일성과 연속성의 패턴들

 


           1. 역사적 연결


  학자들은 신구약의 통일성 문제를 해결하려고 시도하면서, 통상적으로 성경의 본질적 이야기의 역사성을 강조했다. 구약과 신약의 공통된 표지는 하나님의 백성의 계속적인 역사이다.

 


           2. 성경의 상호 의존


  구약과 신약의 신학적인 연결점 중의 하나는 신약이 구약 구절들로부터 인용한 구절들이다. 현대의 역사비평적 관점으로 볼 때 이런 인용구들의 일부는 구약 본문들의 의미와 맞지 않는다. 이것은 신구약이 서로를 언급하고 있다는 점에서 정당한 연결 관계를 맺고 있다는 입장에 대한 심각한 반론으로 제기되어 왔다. 신약이 구약을 언급할 때 조직적으로 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 때문에 광범위한 인용 과정의 중요성이 감소되는 것은 아니다.

 


           3. 어휘


  신구약이 연결되는 또 하나의 선은 성경의 어휘, 즉 단어들의 관계에서 발견된다. 예수와 사도들은 익숙한 단어들을 사용했다. 우리는 “헬라어 단어들과 그 히브리어적 의미들, 즉 구약과 신약의 연결선을 파악해야 할 것이다.

 

 

           4. 주제들


  신구약을 연결하는 많은 주제들의 목록을 제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신구약의 관계를 표현하는 것으로 최근에 강조된 주제들 중의 하나는 언약이다. 그러나 단일한 주제로서의 언약까지도 신구약 관계의 모든 신비를 풀어 주는 황금의 열쇠를 잡을 수 없다.

 

 

           5. 예표론


  신구약을 서로 연결시키는데 두드러진 방법은 구약 안의 인물들, 제조들, 혹은 사건들을 신약과의 예표적 관계 면에서 연구하는 것이다. 신약의 의미가 구약 본문 속으로 읽혀 들어가지 않도록 구약 문맥은 그 예표면에서 나름대로 유지되어야 하지만, 주관적으로 창안한 공상들과 임의적인 신학적 유추들을 피하기 위해서는 선명한 신약의 지침이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즉 예표론적 접근법의 “귀납적” 성격 문제를 억눌러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6. 약속 - 성취


  신구약 연속성의 매우 중요한 패턴은 약속 - 성취 체계이다. 보다 포괄적인 규모에 있어서 우리는 약속 - 성취 구조가 신구약 관계의 모든 것을 요약하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약속 - 성취 접근법이 근본적이고 유실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 자체는 신구약 관계의 복합적 성격을 묘사할 수가 없다.

 


           7. 구원사


  신구약의 통합적인 패턴들 중의 여러 가지가 구원사 패턴과 분리될 수 없다. 구원사는 시각의 통일성을 지시한다.

 

 

           8. 시각의 통일성


  많은 탁월한 학자들은 구약과 신약을 통합하는 미래를 가리키는 시각이 있다는 점에 동의한다. 신약은 구약의 미완성을 완성하지만 아직도 최종 종말을 향해서 그 너머로 움직인다. 구약으로부터 신약에로 그리고 그 너머로 종말, 즉 주의 날의 도래를 지향하는 하나의 계속적인 움직임이 있다. 구약과 신약의 통일성은 또한 그 공통된 시각, 계획, 인간들을 위한 목적과 이것을 실현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계속되는 행위의 통일성이다. 신구약 관계의 복잡성은 복합적인 접근법을 요한다. 어떤 하나는 범주, 개념, 혹은 체계도 상호 관계의 다양성을 다 다룰 것으로 기대될 수 없다. 신구약의 역사적 신학적 관계의 패턴들 중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1) 신구약의 공통된 표지는 하나님 백성이 계속된 역사와 하나님의 대인 관계에 대한 묘사이다.


(2) 성경 인용구들에 근거한 신구약의 관계가 새롭게 강조되었다. (3) 신구약의 상호 관계 중에는 신학적인 주요 용어들의 공통된 사용이라는 것도 있다. (4) 신구약의 상호 관계는 또한 주요 주제들의 본질적 통일성을 통해서도 표현되어 있다. (5) 조심스럽고 신중한 예표론의 사용이 구약의 역사적인 맥락과 신약과 그것의 관계를 파악하려고 시도하는 적절한 방법에 없어서는 안될 것이다. (6) 약속 / 예언과 성취의 범주는 신구약의 상호 관계의 다른 측면을 조명해 준다. (7) 구원사의 개념이 신구약을 함께 연결한다. (8) 마지막으로, 우리는시각의 통일성, 즉 신구약에 내재한 미래적 방향을 언급했다.
  이러한 복잡적인 신구약 관계들은 바로 이해되기만 하면 신구약의 통일성 - 다양한 성경 증거들에 획일성을 강요하지 않고 - 을 밝히는 데 주요 요소들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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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aspire7.net/belief-4-13-c.html#9

 

 

요아킴 예레미아스(Joachim Jeremias)의 이단 사상


성경의 기적 사건들의 확실성을 부정한다.


"비평적인 문학적, 언어적 분석에 복종될 때, 기적 이야기들의 내용은 매우 상당히 감소된다"(New Testament Theology, p. 86).


"기적 이야기들의 문학적 비평적 조사는 기적 요소를 높이는 경향을 나타낸다. 수가 증가한다. 기적들은 정교해진다. 이중적 보도들이 전달되어 내려온다. 요약들은 예수님의 기적 행하는 행위를 일반화한다. 몇 가지 경우들에서, 우리는 어떻게 기적 이야기가 언어적 오해에서 자라나왔는지 볼 수 있거나 혹은 적어도 상상할 수 있다"(Ibid., p. 86 footnote).


"심지어 예수께서 물 위로 걸으신 이야기(막 6:45-52; 요 6:16-21)도 풍랑을 잔잔케 하신 이야기(막 4:35-41 참조)로부터 언어적 오해의 결과로 자라나왔을 것이다"(Ibid., p. 87 footnote).


"만일 우리가 랍비주의적 그리고 헬라주의적 기적 이야기들과 비교한다면 그 내용은 더욱 감소된다"(Ibid., p. 88).


"우리는 또한 특히 헬라주의적 환경으로부터의 당시 유행하는 작품에서, 귀신의 추방, 병고침, 죽은 자들을 일으킴, 풍랑을 잔잔케 함, 포도주 기적들의 이야기들을 발견한다. 이 기적 이야기들의 어떤 것들은 복음서들의 그것들과 매우 밀접한 접촉을 보이기 때문에, 우리는 기독교적 전통이 그것의 주위 환경으로부터 빌려왔으며 적어도 그것으로부터 어떤 개별적 주제들을 이어받았다는 결론을 거의 피할 수 없다"(Ibid., p. 88 footnote).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성경 보도의 확실성을 부정한다.


"수난은 며칠의 과정을 거쳐서 예루살렘에서 발생한 하나의 관찰할 수 있는 사건이었던 반면에, 그리스도의 [부활] 현현(顯現)들은 오랜 기간에 걸쳐서, 아마 여러 해들에 걸쳐서 계속된 다른 종류의 다양한 사건들이었다. 전통은 오직 비교적 후대에만 그리스도의 현현들의 기간을 40일에 한정했다(행 1:3)"(Ibid., p. 301).


"처음에 보기엔, 부활의 주님의 나타나심들이 그 처음 증인들에게 직접적 경험이라는 점에서 무엇을 의미했는지를 찾아내려는 시도는, 우리의 자료들이 그 사건들로부터 수십년 동안 떨어져 있고 부활적 기사들이 그 동안 정교화되고 여러 점들에서 재구성되었기 때문에, 아주 절망적인 것 같다. 그렇지만, 우리가 그 시대의 사고로부터 시작한다면, 하나의 가설이 시도될 수 있을 것이다"(Ibid., p. 308).


"부활절 사건들이 주는 직접적 인상의 추가적 반향은 예수님의 부활이 그의 보좌에 앉으심이라는 생각에 보존되어 있을지 모른다. . . . 그렇다면 이것은, 그 종말을 향하여 재촉하는 역사의 과정에서의 하나님의 독특한 능력의 행위로서가 아니고(비록 이것은 그것이 짧은 기간의 간격 후에 그들에게 그렇게 보였음에 틀림없는 것이지만), 종말 사건의 여명으로서의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제자들의 직접적 경험이었다. 그들은 비추는 빛 안에서 예수님을 보았다. 그들은 그의 영광 안으로의 들어감의 증인들이었다. 다른 말로 말해, 그들은 파루시아[재림]를 경험했다"(Ibid., p. 310).


 


이신칭의(以信稱義)의 법정적(法廷的, forensic) 성격을 약화시킨다.


"우리는 이와 같이, 법정적(法廷的) 비교가 묽어졌거나 심지어 완전히 포기된 것처럼 보이는 디카이우스다이의 용법을 보았다. 나는 이 용법을 법정적 용법과 구별하기 위하여 '구원론적' 용법이라고 부르고 싶다.


바울에게 있어서도 '의롭다고 하다'(혹은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용법이 법적 영역을 훨씬 넘어선다는 것은 분명하다. 비록 법정적 측면이 완전히 없지는 않지만. . . 구원론적 의미가 그의 말을 지배한다. 바울에게서는, 능동태 디카이운은 '은혜나 기뻐하심을 베풀다'는 것을 의미하고, 수동태 디카이우스다이는 '은혜나 기뻐하심을 얻다'는 것을 의미한다"(The Central Message of the New Testament, pp.53, 54).

 


성례가 구원의 은혜를 전달한다고 본다.


". . . 칭의가 어떻게 주어지는가? 하나님께서 어떻게 불경건한 자들을 용납하시는가? 이 문제에서 우리는, 이 주어짐이 발생하는 것이 바로 세례에서라는 것을 지난 수십년 동안 배웠기 때문에, 오늘날 더 분명하게 사실들을 본다"(Ibid., p. 59).


"칭의와 세례의 연관이 바울에게 매우 분명하였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를 구원하시는 것이 바로 세례에서라는 것을 그렇게 많은 말로 진술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Ibid.).


"바울은 성찬이 세례와 동일한 은사, 즉 그리스도의 대리적 죽음에와 그의 몸의 친교에 참여함을 전달한다고 이해했다"(Ibid., p. 65)

 

출처 : 주님의 뜰-행원소구
글쓴이 : 김유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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