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박해 중에 임한 큰 기쁨! (행 8:1-8)
여러분, 언제나 예수로 사는 삶을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
우리가 정말 예수로 살게 되면 환경의 영향을 적게 받게 됩니다. 전에는 좋은 일이 생기는 것과 어려운 일이 생기는 것에 영향을 크게 받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로 살게 되면 좋은 일이 생기나 어려운 일이 생기나 마음이 크게 요동하지 않습니다.
환경보다는 예수님이 기뻐하시고 슬퍼하시는 것에 민감하게 반응하게 됩니다.
이런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의 역사는 이루어집니다.
스데반이 순교한 후에 예루살렘에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큰 박해가 시작되었습니다. 핍박이 너무 심하여 성도들은 예루살렘을 떠나 피난을 가야했습니다. 예루살렘 성 안에 있기가 어려워지니까 그들이 뿔뿔히 유대와 사마리아로 흩어졌는데, 그들이 흩어지면서 교회는 유대와 사마리아와 온 아시아로 퍼져나가기 시작을 했던 것입니다.
마치 산이 메말라 있는데 불씨 하나가 바람에 날려서 퍼지게 되니까 그 불씨가 처음에는 아무 것도 아니었는데 나중에 온 산을 뒤엎는 산불이 되는 것과 같은 모양입니다.
그 당시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의 심령 중심에 성령의 불이 임했습니다. 정말 이제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놀라운 성도들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불을 가지고 있는 성도들이 온 유대와 사마리아로 흩어진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이 가는 곳곳마다 불이 붙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에 부흥이 이 사건으로 인하여 일어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예언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1절)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4절)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흩어졌다, 두루 다녔다 는 표현은 예루살렘을 떠나 피난 길에 들어선 그리스도인들의 형편이 얼마나 비참했는지 생생히 말해주는 구절입니다. 집도 교회도 다 버리고 목적지가 없는 길을 떠나는 것입니다.
아마 어떤 이들은 눈물로 기도했을 것입니다. 하나님, 왜 우리를 도와주시지 않으십니까? 집도 없습니다. 교회는 문을 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왜 우리를 그냥 내버려 두십니까? 그들은 고난도 두렵고 침묵만 하고 계시는 하나님이 답답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8절에 보니 본문 상황과 전혀 어울리지 않게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 는 구절이 나옵니다. 큰 핍박 과 큰 기쁨 . 전혀 어울리지 않는 두 단어가 함께 기록된 것은 성령의 의도가 있음을 알 수 있는 구절입니다.
하나님은 예루살렘 교회에 큰 핍박이 일어날 때 가만히 계셨던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박해 때문에 교회가 무너졌습니까? 정 반대입니다. 예루살렘의 박해 때문에 초대 교회는 더욱 확대되었습니다. 박해를 피해 흩어진 사람들은 사방에서 복음을 전하였고 유대와 사마리아, 소아시아, 유럽까지 교회는 퍼져갔습니다.
그리고 전도의 주체가 사도들에서 평신도로 넘어 갔습니다. 스데반이나 빌립 같은 평신도들은 구제 사역을 위하여 뽑혔지만 이제 복음을 전하는 사역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예언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1절을 보십시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4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
여러분, 혹시 어떤 성경 구절이 생각나지 않습니까?
행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분명히 예언하신 말씀입니다. 예루살렘의 대 핍박으로 인하여 온 유대와 사마리아에 복음이 전해진 것입니다. 이 예언의 말씀이 예루살렘의 대핍박으로 인하여 성취되리라고는 누가 상상할 수 있었겠습니까? 예루살렘 교회에 대핍박이 일어나서 성도들이 예루살렘에서 도무지 살지 못해서 피난을 가게 됐는데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그들이 흩어지면서 예수님의 증인이 되고 그리고 교회가 서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스데반의 순교와 예루살렘 교회 대핍박은 한편 생각하면 성도들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고 하나님께도 말할 수 없는 손해같이 보이지만, 하나님께서 그 일 속에서도 역사하시고 그 일도 하나님이 허락하심 가운데 된 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지난 주일 큐티 중 말씀을 읽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사 45:7 나는 빛도 짓고 어둠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들을 행하는 자니라 하였노라
하나님께서 환란도 창조하신다는 것입니다. 한편으로 보면 하나님이 살아계신데 어떻게 예루살렘의 대핍이 일어나는가 싶지만, 그 일 속에도 하나님의 역사가 있었고 하나님이 허락하셔서 된 일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십자가 사건이 그랬던 것 처럼 스데반의 순교도 그리고 예루살렘의 대핍박도 하나님이 살아계시지 않아서 그랬던 일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그 일 속에 역사하셨던 것입니다.
5절을 보면 빌립이 사마리아로 갔다고 했는데, 이것은 빌립이 당시 얼마나 다급했었는지를 알게 해 줍니다. 대 핍박이 아니었다면 결코 사마리아로 가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9장 52-56절에 보면 얼마 전에 예수님과 제자들이 사마리아 땅에들렀다가 그곳 사람들로부터 배척을 받았던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시 야고보와 요한이 얼마나 화가 났는지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 좇아 내려 저희를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했을 정도입니다. 예수님도 그런 마음을 가지셨을 것이라고 제자들은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 정도로 사마리아 사람들로부터 수모를 당했습니다.
그런 사마리아에 빌립은 왜 갔을까요? 유대인들이 여기는 따라 오지 않을 곳이기에 간 것입니다. 빌립은 피난을 간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참 놀랍게 이 부분을 설명하기를 빌립이 사마리아로 간 일에 대하여 피난 갔다고 하지 않고 전도했다고 했습니다. 마치 전도 여행을 간 것 처럼 기록하고 있습니다.
(5절) ...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빌립 뿐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이 피난 다닌 일을 전도 여행이었다고 표현했습니다.
(4절)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
이것은 놀라운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빌립은 분명히 사마리아에 전도하러 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파송을 받아 간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전도 여행이 되었습니다. 이유가 무엇이지요? 빌립이 성령 충만하여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사람으로 거듭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놀라운 것입니다.
여러분, 정말 십자가 복음을 분명히 믿어서 여러분 자신이 예수님과 함께 죽었고 예수님이 생명이 되셔서 살게 되면 그때부터는 우리가 혹시 어떤 어려움을 겪어서 피란 생활을 하게 되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전도 여행이 되고 선교 여행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사마리아에 큰 기쁨이 임하였다고 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복음을 들었고 병에서 고침을 받았고 귀신들린 자가 놓임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빌립을 통하여 친히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오늘 성경에서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대 핍박 중에 이런 큰 기쁨이 일어난 것은 빌립이 성령충만하여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환란을 당하여 잠시 당황하였지만 곧 성령의 인도를 받은 것입니다. 그가 정신을 차려보니 사마리아에 와 있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갈급한 이들이 많았습니다. 빌립은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지 않고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고 역사는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빌립의 피난길이 전도 여행이 된 것입니다. 그는 선교사 파송을 받은 것이 아니지만 선교사가 된 것입니다.
전도해라! 전도해야지!가 아닙니다. 성령 충만하여 예수로 사는 사람이 되면 삶 자체가 전도가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로 살면 우리가 직장 나가는 것이 전도고 학교 다니는 것이 전도이고 출장 가는 것이 전도입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의 예언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내 증인이 되리라
그래서 사마리아에 큰 구원의 역사, 큰 기쁨이 일어난 것입니다. 언제 핍박을 당하여 피난하여야 했었는지 다 잊어버릴 정도였습니다.
우리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길 기도합시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성령으로 불붙은 성도였습니다. 그들이 흩어졌습니다. 메마른 산에 불씨가 흩어지면 어떻게 됩니까? 엄청난 산불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온 아시아에 복음의 불이 붙기 시작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핍박 때만큼 교회 성장이 크게 일어났던 때가 없었습니다.
얼마나 신나는 일입니까?
그렇습니다. 우리가 성령충만하여 나 죽고 예수로 사는 자가 되면 환란도 핍박도 두렵지 않습니다.
전에는 꼭 환경 따지고 사람 따지고 자리 따졌습니다. 우리 자신이 약하니 그럴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 좋은 환경 주세요. 하나님, 좋은 자리에 가게 해주세요. 좋은 사람 만나게 해주세요.” 늘 그렇게 기도했습니다. 우리 자신이 약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로 살게 되면 그럴 필요가 없어집니다. 오히려 “어려운 곳에 보내 주세요! 아무도 안 가겠다면 저 있잖아요!” 하게 됩니다. 교만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시는 것이라고 믿어지니까 믿음 때문에 그런 기도가 나오는 것이고 실제로 그 삶은 놀라운 삶이 되는 것입니다.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저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 담대함을 꼭 누리실 수 있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일이 일어나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혹시 지금 힘들고 어려워 삶의 기반이 다 흔들려 고통당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사도행전 8장의 이 말씀이 내게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이렇게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그 말씀도 기억이 안 나면 큰 핍박과 큰 기쁨이라는 단어만이라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큰 핍박! 큰 기쁨! 이대로 되게 해주세요.” 기도하세요.
기도를 해도 하나님이 역사하도록 기도를 해야 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닥친 사건이나 환경에 신경 쓰지 않고 오직 성령충만하여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자만 되면 됩니다. 그러면 환란이 오히려 엄청난 하나님의 역사가 되는 것입니다.
최근 오바마 미 대통령이 한국의 교육에 대하여 자주 언급하면서 미국이 한국을 배워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오바마대통령에게 한국 교육에 대한 강한 인상을 심어준 사람 중에 한 사람이 오바마대통령의 입법 특별 보좌관으로 임명된 크리스토퍼강(한국명 강진영) 변호사입니다. 그는 부시 행정부에서 국가장애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해온 강영우 박사의 둘째 아들입니다. 강영우 박사가 부시 대통령을 모시는 마지막 날, 그 아들이 새 대통령의 보좌관 자리에 올랐습니다. 한국 사람으로는 미국 정치계의 최고 고위직에 진출하게 되었습니다.
강영우 박사의 가정에 어떻게 이런 경사스런 일이 일어난 것입니까?
강영우 박사가 14세 때 축구공에 눈을 맞아 시력을 잃어 맹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어머니 모두 돌아가시고 소녀가장이었던 누나도 과로로 죽고, 남은 3남매가 모두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아무런 살 희망도 도움도 보이지 않았던 그 때, 어릴 적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신앙으로 살 소망을 품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만드셨다.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사명과 목적을 가지고 태어났다. 비록 내가 고아에 맹인이지만 내 생명 이대로 나에게 존귀함과 사명을 주셨다. 그는 이 사실을 믿었습니다. 도무지 믿을 수 없는 현실인데도 그는 믿었습니다. 그가 믿으니 하나님께서 그를 인도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한국 맹인의 운명은 점쟁이나 안마사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피할 길은 대학에 가서 공부하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는 맹학교에서 중고등학교를 마치고 연세대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유학하여 교육학, 심리학 석사, 교육행정학 박사 학위를 받아 한국인 최초의 맹인 박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장애인었지만 사람들의 동정을 구하지 않고 나는 하나님의 축복의 도구다. 라는 믿음으로 감사하며 살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실명이 나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퍼지는 축복의 통로가 되었다고 간증하였습니다.
저희 가족 모두가 저의 실명으로 인해 훌륭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정말 저의 실명은 하나님의 축복이었습니다. 저의 아내는 저 때문에 장애 교육을 공부해서 전문가가 되었고 큰 아들은 나의 눈을 고쳐주기 위해 안과 의사가 되었으며 작은 아들은 나의 연설문 쓰는 것을 도와주다가 글을 잘 쓰게 되었고 변호사가 되었습니다. 나의 실명은 우리 가족들에게도 큰 은혜가 되었던 것입니다.
변호사라고 누구나 미 대통령의 보좌관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바마대통령의 입법 특별 보좌관이 된 강진영씨는 말했습니다. 아버지로부터 공공 영역에서 봉사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배웠기에 이 자리가 주어진 것 같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으로 살게 되면 눈에 보이는 어려움이 더 이상 문제가 되지를 않습니다. 내게 영향을 미치기 보다는 내가 오히려 그 어려운 환경을 뒤집어 놓는 일을 하게 됩니다.
흔히 어려운 일이 생기면 하나님의 뜻을 알기 어렵다고 합니다.
아닙니다. 결코 그럴 리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실 리가 없습니다. 평소에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가르쳐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려움을 당했다면 하나님의 뜻을 더 분명하게 가르쳐주시기를 원하시지, 어려움을 당했는데 하나님의 뜻을 아는데 혼란스럽게 하실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어려울 때일수록 당신의 뜻을 우리에게 더욱 분명히 알게 해 주시기 원하십니다.
그런데 많은 성도들이 어려움을 당하고 하나님의 뜻을 알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묻는 질문이 잘못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알기 어렵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질문이 바로 되었는지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많은 사람이 어려움을 당하면 그만 마음이 조급해지고 두려워하고 염려하여 자기 자신에 집착을 합니다. 그래서 기도를 해도 “나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입니까?” “이런 어려움을 주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렇게 기도를 합니다. 그런 질문으로는 하나님 계획을 깨닫기 어렵습니다. 여전히 자아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어려움이 올 때 여러분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혔음을 믿으시고 전제 조건을 달지 않고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입니까?” 하고 물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원하시고 기뻐하시고 이루시려는 것들이 깨달아집니다.
그 다음에 “그러면 나는 무엇을 하기 원하십니까?” 하고 묻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너무나 구체적으로 깨달아집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소상하게 다 밝혀주셨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깨달았다면 근심과 두려움은 십자가에 못 박고 오직 순종만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너무나 간단한 이 진리를 붙들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난 연회 과정 중의 전도사님들 고시가 있었는데, 고시 위원인 어느 목사님께서 설교 논문을 제출한 전도사님 한 분이 마음에 들지 않으셨던 것 같았습니다. 답답한 마음으로 물었습니다. 욥기의 주인공은 누구입니까? 전도사님이 욥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질문하신 목사님이 큰소리로 말씀하였습니다. 아니에요. 절대 아닙니다. 그러니 성경을 읽어도 깨닫지 못하고 메시지를 얻지 못하는 거예요. 욥기의 주인공은 하나님입니다. 어느 성경본문이나 주인공은 아브라함도 다윗도 제자들도 아니고 언제나 하나님입니다. 나머지 사람들은 다 엑스트라입니다. 어느 성경이나 하나님이 주인공임을 알고 읽어야 메시지가 분명해지는 것입니다. 했습니다. 저도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여러분, 성경만 그렇습니까? 성경 읽기만 아니라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에 누가 주인공입니까? 여러분입니까? 그러니까 삶이 혼란스러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기 어려운 것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의 주인공은 예수님입니다. 이것을 분명히 하면 인생은 분명해집니다. 길도 답도 분명해집니다.
큰 환란이 닥쳐도 변하여 큰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하나님의 목적이 무엇이며 세상 역사가 어떻게 진행될지 분명히 밝혀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예언이 하나 남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 24:14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이 말씀을 이루시기 위해서 모든 일이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천국 복음이 모든 족속에게 전해지는 일을 위하여 역사는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 약속에 비추어 인생 계획도 세우고 우리가 잘 살고 있는지 판단도 해야 합니다. 여러분, 이 말씀에 비추어서 여러분의 인생을 보고 또 앞으로 되어질 일을 판단하기만 한다면 비록 내 인생에 큰 환란이 닥친 것같은 일이 올지라도, 그 일이 큰 기쁨으로 바뀌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속회가 분속할 때 정이든 사람들끼리 헤어지지 않았으면 하는 심정을 가져보지 않았습니까? 선교회가 분회 되어야 한다는 사명에 순종하고 있습니까? 우리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의 계획 보다는 내 계획 형편만 앞세우고 움츠리고 소극적이고 안주하려는 자세,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북한을 위해서 기도할 때 한번은 짜증스러운 마음이 일어났습니다. 왜 우리는 언제까지 북한 때문에 시달려야 됩니까? 미사일을 쏜다, 대포를 쏜다고 위협할 때 그것 때문에 온 국민의 마음이 무겁고 경제가 어려워지고 위기감이 조성되는 이런 일을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됩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문제에 대한 답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세계적인 예언 사역자 진다넬 여사가 1997년에 쓴 책 [그가 내게 기름부으사]를 읽게 하셨습니다. 마지막 부분에 한국에 대한 놀라운 예언 기록하였습니다.
십여년 전에 한국에 집회를 와서 서울 어느 교회에서 기도하는 중에 이 민족을 향한 예언의 환상을 봅니다. 서울의 한 한인교회에서 예배드리고 있을 때 나는 가로누운 커다란 십자가가 하늘에서부터 내려오면서 남한과 북한 사이의 경계선 위에서 맴도는 환상을 보았답니다. 전투의 악령들로 이루어진 거대한 악마의 성벽이 그 경계선에 벽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촘촘히 대오를 지어 남한을 향하여 철통 같은 장벽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계속 내려와 그 악마들의 머리 위에 오자 멈춰 섰습니다. 십자가의 두 막대기가 교차하는 곳의 윗부분이 원수들의 경계선 너머 북한 땅을 향하여 아래로 숙여졌습니다. 그것은 땅을 뚫고 지하로 파고 들어갔습니다. 십자가는 마치 지렛대처럼 한 끝은 북한의 땅 속에, 다른 한 끝은 남한 백성들 머리 위 공중에 멈추어 서 있었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모여 와서 십자가의 아래쪽 끄트머리 위에 올라서는 것을 보았습니다. 많은 기도의 용사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있는 힘을 다하여 기도했습니다. 머리를 위로 향하고 손을 들고서. 그들은 십자가의 끝에서 공중으로 솟구쳐 올랐다가 뛰어 내리고, 솟구쳐 올랐다가 뛰어내리는 일을 반복하였습니다. 그들의 기도는 십자가의 윗부분, 북한 땅에 박힌 쪽을 흔들리게 하여 땅을 움직거리게 하였습니다. 그 순간 진다넬은 북한의 제일 위쪽 경계선에서 소요가 이는 것을 보았습니다. 지도자들은 그 북쪽을 걱정스럽게 응시하였습니다. 그들은 그것에 열중한 나머지 남쪽 경계선 근처에서 드려지는 기도가 북한에 어떠한 영향을 주고 있는지를 눈치채지 못하였습니다. 위쪽의 소요는 군인들에 의해 일어난 것이 아니고 서류 가방을 든 신사복 차림의 사람들이 일으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군사 동요라기 보다는 상업 혹은 기업에 의한 위기같이 보였답니다. 그곳의 문제가 북한 지도자들의 주의를 온통 사로잡고 있었습니다. 남쪽 사람들이 더욱 열심히 기도함에 따라 십자가가 경계선 뒤 땅을 뚫고 나오게 되었습니다. 남한에 있는 수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경계선을 넘어 밀려들어가 기쁨의 함성을 지르며 그 땅을 취하였습니다.
저는 전율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북한이 핵무기를 가지고 있다, 미사일을 쏜다고 할 때 우리 마음이 짜증스러웠지만 기도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비로서 북한을 위한 간절한 기도가 다시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지난 얼마 동안 남북관계가 좋다고 편안해졌다고 할 때 솔직히 기도가 다 죽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절박한 기도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도를 일으키신 것입니다. 북한의 위협이 지금 우리에게 말할 수 없이 어려운 일같아 보여도 그 일로 인하여 하나님이 기도자를 일으키신 것입니다.
북한의 위협이 기도를 일으키시는 하나님의 섭리임을 깨달았습니다. 기도하게 하시니 기도하면 됩니다. 큰 위협이 큰 기쁨이 될 것입니다
무엇이 예루살렘의 큰 핍박 중에 큰 기쁨을 경험하게 했습니까?
오직 성령의 철저한 인도하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처음에 저들은 하나님의 섭리를 다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든 상황에서 오직 나 죽고 예수로 살면서 모든 판단을 주님께 드리고 오직 복음 전하는데만 힘썼습니다. 하나님의 계획대로 요원의 불길처럼 복음은 전 세계로 퍼져가게 된 것입니다. 나 죽고 예수로 살고 나면 환경에 대해 가지고 있는 판단이 완전히 바뀝니다. 전에는 환경이 좋아야 되고, 사람 잘 만나야 되고... 이제 상관 없습니다. 예수님만 내 안에 분명히 계시고 예수님이 내 주님이신 것만 확실하다면 오히려 어려움이 나에게 어떤 놀라운 결과를 가져올지 누가 장담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역사를 한두 번 경험하셨나요? 결국 지나고 놓고 보면 어려운 일 환란같은 일이 다 큰 간증이 되지 않았습니까? 편안하다, 쉽다, 잘됐다 할 때가 오히려 위기였지 않습니까?
피난을 떠나는 상황이 되어도 나는 죽고 예수로 사니 두려워하지 않고, 낙심하지 않고, 주저 앉지 않고 주님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혹 미련하여 그 순간에 다 깨닫지 못하였어도 오직 주님만 바라보면 주께서 기가 막힐 정도로 길을 인도하십니다.
롬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고전 10:13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나는 죽고 예수로 살면서 달라진 것은 환경에 대한 판단이 달라진 것입니다.
어렵다, 죽겠다, 괴롭다고 형편대로 판단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풍랑을 만나도 두렵지 않고, 오병이어로 5천 명을 먹여야 되는 일이 있을지라도, 잔치 집에 포도주가 떨어져도 당황스럽지 않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예수님이 함께 하시느냐 하는 것이지, 어려운 환경 처지가 아닌 것입니다.
스데반 시대의 그 하나님은 오늘도 동일한 역사를 일으키십니다.
좋은 일이 일어났느냐. 어려움이 닥쳤느냐는 우리에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 자신이 예수님으로 살면 됩니다.
오직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의 목적을 붙잡고 살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 속에서도 대핍박이 오히려 큰 기쁨이 되는 역사가 반드시 일어나게 하십니다. 그 말씀이 여러분의 삶을 놀랍게 변화시키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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