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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사도신경 강좌 3강

by 【고동엽】 2021. 11. 27.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성령으로 잉태되시고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신 나사렛 예수




I.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요 1:18; 3:16)
사도신경의 신앙고백의 핵심은 주 예수 그리스도 고백이다. 주 예수에 대한 신앙고백은 그가 하나님 아버지의 외아들, 독생자라는 데서 시작된다.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관계는 “독생자”(the only begotten Son, 獨生 子)라는 말 한 마디에 다 들어 있다. 독생자라는 말뜻은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아주 독특한 의미에서의 아버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이다.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의 관계는 아주 독특하게 형성된 아버지와 아들 관계라는 뜻이다. 출생도 아니고 입양도 아닌 방법으로 아버지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이다(요 1:1-3; 1:18; 3:16; 5:18, 19-43; 8:25-26, 54-55, 56-58; 빌 2:6-11; 골 1:15-16; 히 1:1-8).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첫 번째 특징적 관계는 엄청난 자기비하를 통한 절대적이고 자발적 순종이다. 빌립보서 2:6-11에 의하면 인간의 육신을 입고 탄생하신 사건 자체가 독생자의 순종의 결과다(탄생: 요한복음으로 말하면 성부 하나님 아버지의 파송이요 마태와 누가복음식으로 말하면 인간으로 태어난 사건. 사람이 된 사건). 하나님의 독생자가, 즉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인간의 세상으로 오신 사건 자체가 엄청나게 낙차가 큰 하강이요 순종이다(아래 그림 참조).
둘째로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을 뿐만 아니라 사람 중에서도 종의 형체를 가졌다. 종은 순종의 화신이다. 이사야 42장, 49장, 50장, 52-53장에는 야웨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야웨의 종”이 등장한다.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기 위하여 고난을 감수해야 한다면 고난을 감수하는, 그것도 억지로가 아닌, 지극히 자발적으로 고난을 자취하신 종이 등장한다. 예수님은 이사야서의 고난 받는 종-고난을 통해서라도 아버지의 뜻을 이루어 드리려는 고난받는 종(이사야 55:10-11, 파송받은 말씀)과 자신을 동일시하신 것이다. 이것은 자신을 비운 결과이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위하여 자신의 뜻을 비운 결단의 절정인 것이다. 매순간 일상생활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복종해 온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생애 마지막 절정의 때에 복종할 수 있는 능력과 기회를 허락하신다. 마지막 절정의 복종과 순종을 통하여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것이 십자가의 삶이다. 십자가의 삶은 매일 매순간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자발적이고도 감미로운 마음으로 복종하다가 자신의 생애 마지막 순간을 순종의 불꽃으로 산화하는 삶이다.


II. 동정녀에게 나신 그리스도 고백
초대교회는 예수님의 신적 기원(독생자 예수,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을 강조하는 한편 동시에 인간적 탄생을 강조한다. 예수는 여자의 후손(창 3:15; 갈 4장)이다. 예수가 여자에게서 태어났다는 고백은 예수가 여자의 후손으로 태어나 뱀의 머리를 치명적으로 타격하실 구원자로 오셨음을, 그리고 여자의 후손의 죄 아래 팔린 운명의 연대적인 공감자로 오셨음을 의미한다. 이처럼 말씀의 성육신, 영의 인간화는 사도신경의 중심주제이다. 기독론적인 주제에서는 어디까지나 하나님과 인간은 함께 있고 결코 분리될 수 없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한 본성으로만 환원시키려고 한 순수한 단일성주의의 경향은 교회사의 한 부분을 장식했다. 두 화살(신성과 인성) 중의 어느 하나가 상실될 때, 믿음의 기초도 흔들린다. 예수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 독생자이시면서 동시에 성령으로 잉태된 여자의 후손으로 태어나신 분이다. 여자의 후손이 아니면 예수가 죄 아래 팔린 인간의 운명과 연대할 수 없기에 여자의 후손으로 태어나셨고, 성령으로 잉태하지 않으셨다면 그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실 수 없었기 때문에 성령의 능력으로 잉태되신 분이다. 그래서 “성령으로 잉태하사”와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라는 이 짧은 고백은 나사렛 예수의 출생 과정에서 드러난 죄인된 인간에의 연대성과 인간과의 거룩한 구별성을 동시에 강조하고 있다.
초대교회가 예수의 동정녀 잉태와 탄생을 신앙고백 안에 포함시킨 이유는 아마도 이 두 가지 초점을 신자들에게 주지시키고자 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초대교회는 예수의 탄생부터 성령의 강력한 주도권이 작용했음을 고백한 것이다(아마도 마리아의 고백의 반영이었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역사에서는 하나님 자신의 주도권에 의한 수태 이외 다른 어떤 것도 문제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밝힌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성령의 권능으로 잉태되고 탄생되었듯이, 하나님의 교회도 또한 성령의 권능으로 탄생되었다(행 2장).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인간 역사 속에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영에 주도되는 구원역사를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하나님의 아들이 성령의 능력으로 동정녀에게 태어났다는 고백은 인류구원의 결정적인 전환점인 성탄절이 하나님의 역사이고, 인간적인 역사라는 점을 강조한다. 양자 중의 어떤 것도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마태복음 1:18-25은 이 점을 잘 예해하고 있다. 여기서 하나님의 주도권과 인간의 능동적 자발적 순종이 함께 동역함으로써 성령에 의한 예수의 동정녀 잉태와 탄생이 실현된다. 성령의 잉태 고지를 들은 마리아는 경악하고, 그 신탁의 말씀을 감당하지 못하고 당혹감에 빠진다. 마리아의 말을 전해들은 정혼한 남편 요셉도 당혹하고 마리아를 통한 성자의 잉태와 탄생은 인간의 불신앙과 불순종으로 무위로 그칠 뻔 했다. 여인의 태를 거룩하게 기습하신 성령의 주도적 역사는 인간 경험과 상식에게 놀람, 경악, 기습적 당혹을 선사하면서 추지된 것이다. 그렇다면 초대교회는 왜 이 당혹스러운 성자의 성령 잉태를 신앙고백의 중심에 배치했을까?


하나님의 성령에 의한 동정녀 잉태와 탄생은 인간의 이성과 경험을 전복하고 쇄도하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적인 역사하심을 한껏 드러내고자 함이었을 것이다. 인간 구원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적인 잉태에 있고 하나님의 기습적인 통고로 시작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내재적인 역사발전에 의거한 성자의 출생을 유도하지 않고 성령의 수직적인 계시에 의한 간섭으로 인간구원을 일으키신 것이다. 성령의 잉태는 순전히 하나님 자신의 절대주권적 의지와 권능의 과시사건이요 인간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모험적인 사건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하나님의 절대주권적인 의지와 권능이 인간의 능동적이고 자발적인 순종에 의하여 완전히 구현된다는 점이 동시에 강조되어야 한다. 그래서 “동정녀 마리아에게서”라는 말이 추가된 것이다. 성령에 의한 동정녀 성자 잉태와 출생에 관여된 모든 피조물들은 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했다. 천사 가브리엘, 마리아, 그리고 다윗의 자손 요셉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했다. 이 하나님의 초월적인 계시가 일어나는 순간에는 인간의 이성, 활동, 경건성은 잠시 판단중지를 경험했으며 당사자들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으로써 그 뜻이 성취되도록 자신들의 경험과 상식을 괄호 안에 묶여버렸다.
다시 말하자면 동정녀 탄생에서 두 가지 요점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첫째, 하나님은 그의 구원의 역사를 위해서 어떤 동역적인 협력자도 필요로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성령에 의한 잉태가 강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신약성서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주도권과 은총에 대한 마리아의 대답이 놀랍도록 혁명적인 성격으로 차 있음을 볼 수 있다. 우리는 이 마리아의 혁명적인 대답에서, 인간의 독자적인 구원이 아닌 은혜의 주도성과 역동성을, 잔인한 인간성이 아닌 은총을 입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반응을 주목하게 된다. 이처럼 동정녀 탄생의 문제는 시종일관 은혜의 신학의 일부로 취급되어야 한다. 그것은 세계를 구원하는, 강제할 수 없는 사랑의 선물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그것을 받아들일 때, 어떻게 구원이 우리에게 오는가에 대한 사신(使臣, messenger)이다.
하지만 그것은 또한 인간의 순종과 자발적인 협력을 기대하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적인 구원사건이다(이런 점에서 첫째 것만 강조한 로흐만은 다소 한계를 보인다). 가브리엘은 성령의 잉태 사실을 일방적으로 통고하고 하늘로 올라가버리지 않고 마리아와 요셉의 순종을 기대한다. 또한 엘리자벳의 인간적 권고도 사용하셔서 처녀잉태, 동정녀 잉태의 충격에 빠진 마리아의 감정을 달래시고 수습하신다.


III. 본디오 빌라도 아래서 고난을 받으사........
사도신경은 이 본디오 빌라도의 고난 신조를 삽입함으로써 기독교 신앙의 철저한 역사적 근거를 확보한다. 예수가 부활하고 승천했다는 고백이 어려운 만큼이나 예수가 참 사람이라고 고백하는 것도 어려웠다. 예수가 특정 역사의 시점에 태어나 로마제국의 압제에 시달리는 유대인의 운명에 정확하게 연대했다는 사실은 예수가 인류의 구세주이기 이전에 유대인/이스라엘의 대표자임을 깨닫게 한다. 그리스도의 완전한 인간성에 대한 인식은 고대 교회에서 결코 자명한 것은 아니었다. 예수의 인간성에 대한 회의는 신약성서의 배후에서 시작한다. 예수의 인간적, 물질적인 성격을 완화시켜서 상징적인 가상(假像)으로 환원하려고 한 가현설(假現說, docetism)은 고대 기독교가 직면했던 가장 심각한 시험이었다(요한복음이 이 점을 가장 날카롭게 의식하는 복음서). 신약의 증언에 의하면, 예수의 동시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완전한 인간으로 경험했다. 또한 사도들에게도 예수는 역사적 조건에 얽매인 채 순종하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었다. 예수의 완전한 인간성에 대한 지시로서, 그가 가져온 구원이 인간의 전체적인 삶과 세상의 모든 현실에 관계된다면, 예수의 인간성에 대한 사도적인 증거는 이 세상에서 살아가야 할 그리스도인의 윤리적인 책임을 확립시킨다. 예수의 삶은,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살아가야할 것인가에 대한 윤곽을 보여주며, 그를 따르는 자의 삶의 방향과 목표를 각인해주고, 그에 대한 신앙을 구속력있게 규정하기 때문이다. 예수는 단지 의존해야 할 구세주가 아니라 우리가 따르고 모방해야 할 주이시기도 한 것이다.


“빌라도 아래서”라는 이 표현은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인간성을 강력하게 부각시켜 준다. 이로써 그리스도 신앙과 이 세상 현실과의 관계가 분명히 밝혀진다. 예수의 공생애는역사적인, 정치적인 구체성에서 수행되었고 그는 로마제국의 정치적 위세와 대비되어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빌라도의 존재는 기독교 신앙의 역사적인 관련성을 뒷받침해 준다. 그러므로 빌라도의 위치는 기독교 신앙을 위해서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칼 바르트는 빌라도의 이 역할을 관심있게 추적하였다. 바르트는 그의 논문 “정당성과 법”에서 예수와 빌라도와의 만남을 기술한다. 국가의 제도에 대해서 적극적인 태도를 취해야 한다는 바울의 지시는 오늘날에도 주목해야 할 요소들이 있다(롬 13장). 물론 교회사적으로 이 지시가 오용되어 국가의 이데올로기로 전락된 것을 눈여겨보아야 할 것이다. 국가체제의 공권력을 대신한 빌라도가 예수의 박해자가 되었다는 것은 이 세상 국가의 잠재적인 반역성과 무신성(godlessness)을 증거한다.
“고난받으사”라는 이 말은 흔히 예수의 마지막 날의 수난을 지시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이 말은 예수의 출생과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는 전 삶과의 관계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의 삶의 스타일은 고행을 하고 있는 금욕적인 것과는 전혀 다르다. 그는 생의 기쁨을 동시대인들과 같이 나누었다. 그의 주변의 반응으로 보아서 그가 어떠한 생활을 영위했는지를 알 수 있다. 복음서의 시각에 의하면, 고난의 삶은 예수에게서 불행한 삶을 뜻하지는 않는다. 십자가는 그의 사명의 완성을 의미한다. 그것은 많은 사람을 위한 희생이었다. 그는 불행 자체를 즐긴 비관주의자나 염세주의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가득 찬 생명을 즐겼으나 의도적으로 불가피하게 로마제국의 공권력을 상징하는 인물에 의하여 박해를 당한 것이다. 그것은 로마제국에게 박해당하고 있던 이스라엘/유대인의 운명에 동참하기 위한 수난이었고 죄와 죽음의 권세 아래 시달리는 온 인류의 운명에 대한 연대성의 과시였다.
빌라도 아래서 겪은 예수의 고난은 악의 극복을 위해서, 파괴적인 것의 파괴를 위해서 필요 불가결했다. 그의 고난은 악의 극복을 위한 목적에서 이해되어져야 한다. 예수에게 가해진 십자가상의 폭력(로마제국의 폭력)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요 심판의 집행이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진노는 하나님께 저항하는 인간적인 죄의 힘을 타파하려는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의 행위로 이해된다. 적극적으로 믿는 자는 “본디오 빌라도 아래서 고난을 받은 자”를 뒤따르는 삶을 살아야 한다. 하나님의 자녀가 이 세상에 본디오 빌라도 아래서의 고난을 회피할 수 없다. 하나님 나라는 본디오 빌라도의 나라를 향해 선포되었기 때문에 본디오 빌라도의 저항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고난은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성도가 바칠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다.


IV. 특정한 시공간의 사건이 어떻게 인류의 구원사건이 되는가?
왜 2000년 전 팔레스틴 골고다라는 특정한 시공간에서 일어난 사건이 초공간적 초시간적 효력을 갖는(구원의 효력을 갖는) 사건으로 격상되었는가? 예수의 부활 때문이다. “부활”은 역사적 사건 이상의 사건이다. 부활은 시간과 영원의 접점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그것은 한 특정한 시간에 일어난 부활이요 특정한 공간에서 일어난 부활이지만 그것의 효력은 영원하고 우주적이다. 예수님의 부활 때문에 예수님의 죽음마저도 초시간적 초공간적인 효력을 갖는 사건으로 승격된 것이다. 다이어그램으로 그려보면 다음과 같다.










성육신-낙차 큰 하강 주(主)와 그리스도로 부활, 승천, 존귀케 되심
사람 중에서 종의 형체. 영적 피조물, 인간, 동물 모두 예수=주(主) 고백


(요일 1:1-2; 요 1:1-2) (빌 2:6-11; 행전 2:31-34)


십자가 -아버지의 뜻을 위해
고난을 당하심.
(사 55:10-11, 빌 2:6-11)
















십자가에 달려죽기까지 복종하심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특정 시간(2000년전)과
특정 공간에 일어난 사건-보통 역사적 사건과 동일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후








예수님의 무덤은 텅 빈 무덤이 됨-죄와 죽음의
정복(고전 15:51-58); 죄사함 실현(롬 4:25). 예수의
부활은 하나님의 죄 용서 사실을 확증하는 사건
(히 9:11-22)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은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초월하는 사건이 되고
인류 구원의 사건이 된다.


따라서 성령으로 충만한 복음전도사가 이 놀라운 그리스도의 순종과 죽음과 부활을 증거할 때 성령은 듣는 자에게 믿음을 창조하셔서 신자가 되게 하셨다.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에 바울의 언어는 성령의 그릇이 된다. 듣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자신을 위한 죽임이라고 고백하게 만든다. 나를 위한 그리고 나를 대신한 죽음을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고 고백하는 것이 바로 구원이다(고후 5:16-18). 주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면, 성령이 강림하여 죄악의 권세는 쇠락하게 된다. 즉 구원이 임한 것이다. 구원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인생을 다스림을 의미한다.






V. 왜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이 인류/나의 구원사건이 되는가?(요 19장).
1. 예수님의 죽음에 관여한 당사자들
1)당국자들
대제사장: 사두개파(Sadduces)라고 알려진(옛 제사장 가문인 사독 Zadok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자들) 아주 세속화된 성직자들. 이름만 성직자들이지 매관매직으로 성직자가 되는 경우도 많았다. 세속화된 삶(권력과 부를 독점) 이외에도 부활과 천사의 존재 등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바리새인들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바리새인들: 재야 평신도 청교도 운동가들로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율법을 엄격하게 지키지 못하여 현재의 고난(로마제국의 식민지)이 임하였다고 해석하여 엄격한 율법 준수만이 고난을 끝내고 메시야의 왕의 도래를 촉진시킨다고 믿었다. 국민 총거룩(Gross Holiness Product)의 증가가 메시야의 도래를 앞당긴다고 보았다.


서기관들: 헤롯과 대제사장들에 빌붙어 사는 신학자들


장로들: 지주계급들, 친로마제국의 토착세력들


헤롯당들: 로마제국의 묵인하에 이스라엘지역을 다스리던 하수인들 세력. 아주 음란하고 폭력적인 가문이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장로들, 그리고 헤롯당은 서로 친밀한 사이가 아니었으나 예수님 때문에 예수님을 대적하기 위하여 전략적으로 단결하였다. 이들의 공통 이익은 종교적 정치적 기득권 체제의 고수였다. 시기와 질투, 그들의 이익을 잃을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그들은 예수를 죽이고자 했다. 그들은 빌라도의 손을 빌지 않고 광장에 끌고 나와 돌로 쳐죽일 수도 있었다(행전 7장: 스데반 집사의 경우처럼). 그러나 그들은 예수의 죽음을 하나님의 저주 하에 죽은 죽음인 것처럼 믿게 하려고 빌라도의 십자가형을 이용한다. 신명기 21:22-23은 말한다:


“사람이 만일 죽을 죄를 범하므로 네가 그를 죽여 나무 위에 달거든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당일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그들은 예수의 세 가지 언동 때문에 예수를 죽여야겠다고 결심한다: (1) 안식일 정결예법 등의 파괴 (2)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참칭 (3) 하나님의 성전을 허물어 버리겠다고 위협한 죄(성전 훼방죄). 그들은 예수가 하나님의 저주 아래 죽는 죽음을 대중들에게 보여주어 믿게 하고 싶었다. 그래서 예수가 로마제국의 황제를 대적하는 정치적 운동을 벌였다고 고소한다. 예수 자신이 자신을 유대인의 왕이라고 주장하였다는 것이다.


2) 가룟 유다와 제자들: 예수님의 친밀한 사랑을 받은 유다와 제자들은 예수님을 넘겨주고 자신들의 신병안전을 도모하였다. 예수님이 심문을 받았을 때에도 제자들은 검거되거나 체포되지 아니하였다. 유다는 자신의 메시야적 이상과 너무나 동떨어진 예수님을 은 30에 팔아버린다. 유다는 돈을 탐하여 스승을 팔아넘긴 것이다.




3) 빌라도: 예수의 무죄를 확신하였으나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하여 십자가형에 처하도록 내어준다. 예수가 정치적 소요나 반역을 꾀할 인물이라고 보지는 않았다.


4) 하나님 아버지: 인류의 죄를 대신 짐지고 대신 심판을 받을 중보자를 찾고 계셨으나 인간 중에서 찾지 못해 하나님 당신의 아들을 파송하심. 죄인들을 심판해야 하기도 하셨으나 또한 그들을 사랑하여 용서하여 새 사람을 만드셔야 하셨던 사랑 때문에 독생자를 죄있는 사람의 모양으로 보내어 그 육신에 죄를 정하여 심판하실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의 죄인에 대한 무한 긍휼 때문에, 죄인의 죄를 심판하시고 그 죄인을 용서하셔야 했던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 때문에 예수를 죽음으로 몰아가셨다. 예수 죽음의 궁극적 신학적 책임 소재가 하나님 아버지께 있다.


5)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아버지 하나님에 대한 복종의지가 예수 죽음의 원인이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죄인 용서, 죄 심판의지)을 이루어 드리려는 자발적 순종 때문에 죽음을 자초하셨다. 예수는 잃어버린 양떼들에 대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갖고 팔레스틴의 정치와 종교의 한복판에 뛰어들어 선한 목자로 투신하셨다가 죽음을 자초하셨다.


2. 예수님의 죽음의 의미?
마가복음 10:45: 자신의 목숨을 대속물로 주기 위한 죽음(테텔레스타이-it is paid off)


로마서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히브리서 9:12, 22
12절: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
22절: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3.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 형벌을 받았다는 주장에 공감이 되는가?
갈라디아서 3:10-13
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11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니라. 12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라 이를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벧전 2:22-24
22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 23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 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4. 왜 예수는 가장 잔인하고 끔찍한 십자가형에 처해 졌는가?
(1)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극적으로 표현한다. (2) 예수가 하나님께 저주받은 자의 죽음을 죽었음을 드러낸다(신 21:23; 갈 3;13).


5. 죄의 기원과 죄인이 된 인간
(1) 창세기 3:10, 11, 12, 16, 17
10 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죄의 결과) 11 가라사대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실과를 네가 먹었느냐(죄=하나님이 금지하신 나무의 실과를 따먹는 행위. 금지의 위반; 죄의 결과가 금방 나타나지 않음. 즉 누가 무슨 피해를 입었는지 분명하지 않다)12 아담이 가로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책임전가) 13 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가로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책임전가) 14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육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종신토록 흙을 먹을지니라 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유혹하는 자와 여자의 후손, 인류간의 적대적 관계) 16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17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심판-죽음과 죽음의 권세아래서 종신토록 수고. 농사일이 저주의 대표가 된다)




(2) 로마서 5:12; 3:23:
롬 5:12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롬 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한 사람이 범한 실수 때문에 온 인류가 이토록 참담한 재난을 당하다니! 씨. 에스. 루이스(C. S. Lewis)의 해설을 보자. 루이스도 자유의지를 잘못 사용하였기 때문에 전지구적 고통이 왔다는 주장이 매력이 없게 여겨질 수도 있음을 일단 인정한다(<고통의 문제>, 84-85쪽). 현대의 여러 사조들은 인간을 죄인이라고 규정하는 성경의 주장에 대하여 저항한다. 인간의 죄를 바로잡기 위하여 고통을 초래하며 간섭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매우 불쾌한 간섭이라고 생각하게 만든다. 특히 (1)정신분석학은 억제와 억압은 나쁜 것이라고 규정하며 (2) 수치심은 위험하다고 가르친다. 죄책감을 고취시키는 기독교에 대하여 정신분석학의 저항은 드세다. 그러나 자신의 악함을 인정하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를 불가피한 것으로 여기고 이 진노마저도 하나님의 선하심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게 된다.
아담의 타락의 의미를 영적 유전자 유전설의 유추를 통하여 설명할 수 있다. 아담의 타락으로 아담과 그 후손들은 순수인간의 종의 지위를 박탈당했다고 볼 수 있다. 순수인간의 경우 하나님께 복종하고 자기를 양도하는 것이 고통을 의미하지 않았다. 그러나 자기양도가 즐거움을 의미하였던 낙원에서의 아담의 범죄는 결과적으로 자기양도가 고통을 동반하는 현상을 낳는다(123쪽). 죄는 생물학자들이 말하는 획득형질에 불과한 것이 아니었다(그들에 의하면 획득형질은 유전되지 않는다). 악한 욕망에 의해 지배되는 인간성은 유전에 의해 모든 세대에게 전달되었으며, 아담의 타락 사건은 인간의 체질이 근본적으로 바뀐 사건이었다. 즉 그것은 사람을 구성하는 그 구성요소들의 관계가 교란된 사건이었으며 그 요소들 중 하나가 내부에서 뒤틀려져 버린 사건이었다. 죄인은 하나님에 반역한 인간 변종이다. 마치 위험한 무기를 들고 아버지에게 덤벼드는 반역적인 아들과 같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은 이와 같은 반역적 본성 가운데 빠져 있던 인류에게 다른 삶의 가능성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6. 예수가 십자가에서 달려죽은 사건은 인간의 죄문제를 해결하는 사건이었다.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아간 죄에 당신의 죄도 포함되는가? 예! 포함된다(요한일서 2:15-17).
사람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는가? 인간의 자원은 제한되어 있다. 하나님의 율법을 지킬 수 있는 의지력이 부족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기에는 우리의 지성의 힘은 빈약하고 영생을 살기 위해서는 우리의 몸은 너무나 연약하다. 우리 스스로를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가 신(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께 의존함으로써 살아가도록 창조된 피조물임을 깨닫는다. 자신의 피조물다운 제한성과 유한성을 깨닫는 것이 구원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구원은 우리 밖에서(extra nobis) 우리를 위하여(pro nobis) 외부에서 와야 한다.


예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은 구원의 사건이다. 예수는 자신을 가리켜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들을 위한 대속물(다 지불하였다: 테텔레스타이. tetelestai=paid off-요한복음 19:30)로 주려 왔다”고 선언한다. 그런데 예수는 구약성경에 의하면(신 21:23) 가장 비참한 죽음-하나님께 저주받은 자의 죽음-을 당하였다(갈 3:13; 벧전 2:22-23). 바울은 사도가 되기 전에 이런 방식으로 예수의 죽음을 이해하였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 제자들을 박멸하려고 다메섹으로 질주하다가 하나님의 영광의 보좌우편에 앉아계신 부활한 예수와 충돌하였다. 박해자 바울은 충격에 빠진다.


“아니, 하나님께 저주를 받아 지금 뜨거운 지옥 불구덩이에서 고통스럽게 신음하고 있어야 할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의 영광의 보좌 우편에 앉아 있네? 빌라도에게 십자가위에서 처형당한 그 나사렛의 방랑 전도자 예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분명히 그는 저주받은 자처럼 죽었는데,,,,, 그는 저주받은 자처럼 단말마의 외침-“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외친다(막 15:34)-을 외치고 죽지 않았던가?


바울은 이런 딜레마에 빠져 있다가 하나의 해결책을 계시받는다.


“그렇다. 예수는 저주받아 죽었다. 그러나 우리의 죄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자의 자리에 서주셨다. 그는 자신의 죄 때문에 죽지 않고 누군가의 죄 때문에 죽었다. 자신이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죽은 것이다. 그는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았구나. 한 사람이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대신 죽었으므로 결국 모든 사람들이 죽은 셈이나 마찬가지다(고후 5:14-15). 따라서 이제 나는 죽은 몸이다. 내가 산다면 그것은 예수가 덤으로 준 삶이며 그 삶의 주인은 예수가 되어야 한다(갈 2:20).”


바울은 여기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는 이신칭의 교리를 확정짓는다. 철학적으로 말해서 2000년이란 시간을 초월하여 몇 만리의 공간을 초월하여 오늘 나에게 구원의 효력이 발생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다음과 같다. 왜 역사적으로 한 특정한 시대에 한 특정한 공간에서 일어난 한 특별한 개인의 죽음(과 부활)이 온 인류를 위한 구원사건이 되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 사건은 시간/공간 안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예수의 죽음은 성소의 휘장이 찢어진 사건이다(히 10:19-22). 우리 마음의 모든 휘장이 찢어진 사건이다(막 15:38-39). 예수의 죽음과 부활은 역사 안에서 일어난 사건이지만 초역사적, 초시간적, 초공간적인 효력을 가진 구원사건이다. 이런 초시간적 초공간적 효력을 가지는 죽음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가는 산 길을 열기 위하여 자신의 육체의 휘장을 영단번(once for all generations)에 찢으신 사건”이라고 한다(히 9:26). 예수 죽음을 자신의 대신 죽음이라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휘장파열이 일어난다. 영단번에 드려진 제물은 구약시대의 반복적으로 드려진 제물과 대조된다. 예수는 동물희생을 가지고 반복적으로 드리는 구약제사(세상 모든 종교에서 드려지는 제사포함)를 한번 죽으심으로 영단번에 완성하신다. 영단번에 죽은 사건이기 때문에 초시간적 초공간적인 효력을 갖는 제사가 된다.


7. 그 외에 십자가의 피로 이 세상에 어떤 혜택이 베풀어졌는가?
(1) 에베소 2:13-14: 이방인과 유대인의 화해. 사람과 사람의 화해
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2) 골로새 1:20: 땅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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