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사도신경 강해1(2013.9.29. 주일 2부예배설교. 창세기 1:1-5)

by 【고동엽】 2021. 11. 26.

 나는 천지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

 

사도신경은 AD4세기 로마교회가 고백했던 신앙고백으로서 나중에 전 서방교회 신앙고백이 되었던 내용입니다. 사도신경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현재적 통치를 고백하는 겁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참칭하는 로마제국의 황제들이 AD 118-312년까지, 타가야누스 황제부터 시작해서 AD 312년까지 기독교를 맹렬하게 박해했습니다. 그때 로마황제들은 전능을 참칭했습니다. 사람들의 생명을 마음대로 앗아갔고 로마기독교인들의 신앙의 자유를 박탈하면서 그들의 능력을 한껏 과시했습니다. 로마제국의 전능은 다른 사람들의 생명을 착취하고 박해하고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보통 전능이라고 하면 하늘의 나는 새를 떨어뜨리는 것을 예로 듭니다. 국정원장 검찰총장, 하늘을 나는 새를 떨어뜨린다, 하나님은 전능하시지만 하늘에 나는 새를 전혀 떨어뜨리지 않습니다. 공중의 나는 새를 돌보시고, 악을 전혀 행하지 못하는 무능력이 전능의 핵심입니다. 악을 영원히 행할 수 없는 무능력자, 오늘날 우리가 쓰는 전능은 악에 전능한 자, 악을 마음대로 범하는 전능을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의 전능은 하나님 사랑에 의해서 100% 통제되기 때문에 하나님과 관련 없는 능력행사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무능력해보일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셨다고 고백할 때는 로마황제와 같이 인간의 권력욕을 충족시키는 그런 전능이 아니라 사랑의 원리로 철두철미하게 통제되는 전능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면서도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이 세상의 악행을 보고 바로 즉시 심판하지 않습니다. ? 전능하지만 사랑이 많기 때문에, 전능하시지만 우리 하나님은 내 악행을 즉시 stop시키시지 않습니다. ?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은 내 악행을 보고도 그냥 기다리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현재적 통치를 고백하는 것이 사도신경의 핵심이죠. 사도신경 내용을 보면 대부분 예수님에 관한 고백입니다.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장사한지 사흘만에 죽은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반 이상이 예수님에 관한 고백이죠. 핵심은 하나님 우편보좌에 앉아 계시면서 세계를 지금 통치한다고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계를 통치한다는 증거가 과연 무엇이냐? 이것이 핵심입니다. 예수님이 만일 세상을 통치한다면 예수님의 성품과 예수님의 자애로운 통치를 모방하고 그걸 흉내 내는 쪽으로 역사가 발전하고 있느냐를 봐야 해요. 저는 포괄적으로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세계역사를 좌우하는 서구문명의 agenda, 자유 평등 박애 자유의 가치 박애의 가치 이것은 순전히 놀랍게도 서구기독교가 영향을 준 서구사회가 대표하는 개념입니다. 특별히 그리스 로마사회, 카스트 제도를 지금도 존속시키는 범 브라만 힌두사회, 여기선 평등개념이 없습니다. 그리스 로마사회는 철두철미하게 노예제사회 신분제사회입니다. 우리는 그걸 범 아리안 사상이라고 하는데, 인도 유럽사상의 핵심은 인간을 운명론적인 별자리에 연동시키기 때문에 노예로 태어난 운명은 노예가 될 수밖에 없다는 사상을 깔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 소크라테스 전부 다 노예제 지지자였습니다. 그들이 공화제를 지지했지만 노예가 모든 형이하학적 노동을 다 담당해주고 남는 시간에 폴리스에서 자유로운 남자들만 만나서 정치를 한 겁니다. 서구사회가 주도하는 자유 평등 박애 특히 평등 계급차별 남녀차별 극복은 순전히 갈라디아서 3 28, 사도바울이 인류역사에 서구문명에 이식시켰던 기독교적 가치 때문인 것을 지금 서구교과서가 다 인정합니다. 서양 교과서, 유럽에 있는 어떤 교과서 아무 것을 찾아보면 불신자가 쓴 교과서라도 바울이 전한 기독교가 유럽의 얼굴을 바꿨다는 겁니다. 성형수술 했다고 기록해 있습니다. 그리스 로마사회에 이끌려 내려오던 노예제 사회, 인간에 대한 숙명론적 생각은 전부 다 기독교에 의해서 철폐됐습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밝혀진 이상 그 뜻을 향해 목적지를 향해서 달려가는, 역사를 발전시키는 추진력이 강한 역사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사상의 부정적 일탈이 칼 마르크스입니다. 칼 마르크스는 유대인으로써 성경과 탈무드와 랍비들의 글에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 다음이 프로이드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역사가 계급도 없는 평등사회까지 갈 수 있다고 감히 꿈을 꿀 수 있는 것은 성경 아이디어에서 나온 겁니다. 이걸 우리가 크게 포괄적으로 보면, 역사는 주님께서 던지신 하나님 나라의 화두를 중심으로 돌고 있고 그걸 향해서 전진하고 있고 그 하나님 나라를 향해서 숙명적으로 자신도 모르게, 서구역사가 주도한 역사를 볼 때도 그렇고 긴 인류역사를 볼 때도 인류역사 안에 과연 하나님의 통치가 없는가? 인류역사는 놀랍게도 하나님의 불멸성을 확신하는 쪽으로 옮겨가고 있습니다. 아무리 인간역사가 나빠도 사랑의 으뜸성과 불멸성은 모든 문명과 예술과 학문의 기본사상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고등종교에서 사랑을 예찬하지 않은 종교가 없습니다. 모든 정상적 예술은 전부 다 그 문명이 어떤 문명이든 간에 전부다 사랑의 불멸성과 선과 의와 정의의 불멸성을 노래합니다. 칼릴 지브란 타고르 인디언 추장의 시, 시애틀 인디언 추장의 토지사상, 전부 다 사랑 우애 형제자매애, 심지어 자연과 나누는 교감, 이 말은 이 세계가 아무리 문명의 야만성을 경험하고 어둡고 잔혹한 인간성의 이면을 봤다 하더라도 크게 보면 헨델의 음악과 모차르트의 음악이 지배하는 사회, 여전히 하나님의 자애로운 통치를 도처에서 경험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 세계는 한 번도 하나님의 보편적 통치를 벗어난 적이 없고 하나님이 우주적 통치를 한 번도 멈춘 적이 없다는 것, 그것이 우리에게 주는 확신입니다. 우리가 과장하지 말 것은 내가 이 세상에서 경험한 부정적 쓰레기 같은 경험을 가지고 금방 하나님이 없다고 단숨에 비약적인 결론을 내면 안 됩니다. 그건 과장이 있는 것이고 우리가 이 세상에서 받은 사랑, 우리 엄마 아빠에게 받은 사랑만 하더라도 세상에 사랑의 으뜸성과 궁극성을 의심하기는 불가능합니다. 저 같은 경우도 가만히 보면 저희 아버지가 얼마나 저를 사랑했는가? 저는 어머니 사랑보다 아버지 사랑이 더 기억납니다. 왜냐하면 저희 아버지가 술을 한 잔 드시기 전까지는 자기 속마음을 털어놓지 않으신데 얼굴이 벌게지는 순간 자기 속마음을 털어놓습니다. 우리 시골 전체에서 처음으로 리어카 자전거를 사서 가르쳐주신 분이 우리 아버지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만일 감기에 걸리면 자전거에 태워서 산길을 거쳐서 십리를 동네병원을 향해서 가요. 가면서 늘 위로하는 말을 합니다. 저는 저희 아버지의 강렬한 사랑을 보았기 때문에 나중에 만일 좀 잘못된 모습을 보여도 전혀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식지 않았습니다. 제가 저희 아버지 어머니 사랑을 받았습니다. 저희 어머니 사랑은 분명히 소 먹이고 풀 베러 가라고 했는데도 안 먹이고 친구들과 하루 종일 축구하고 나서 몰래 들어가 엄마 밥 내놓으라고 해도 어김없이 밥을 내주고 아무 책망도 안하셨습니다. 제 바로 위의 형부터 혼나면 빌었는데 저는 놀다가 와서 밥을 당당히 요구할 때 책망하지 않고 밥을 주신 어머니, 이런 사랑만 있습니까?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계속된 스승의 사랑, 동료의 사랑, 선배의 사랑, 이런 켜켜이 쌓인 사랑의 위력경험은 내가 직장에 가서 나쁜 사람을 만나고 전두환급 박정희급 독재자를 만나더라도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할 수 없는 겁니다. 우리가 과장하지 않는다면 가족에게 받았던 강렬한 사랑 하나만 가지고도 하나님의 자애로운 세계 통치, 주님의 통치를 믿을 수 있습니다. 우주적으로 보면 옛날에 굉장히 중요한 기사를 봤습니다. 저는 천체우주선에 관한 기사를 많이 봤는데 이번 주에도 화성탐사선이 착륙하는 기사를 세 번이나 나사에서 다운 받아서 봤습니다. 그 장면을 보면서 우주천체를 가만히 보기만 해도 이 세계가 얼마나 하나님의 통치를 드러내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천체과학자들에 의하면 태양보다 1만 배 큰 별들이 소멸되는 과정이 십자가의 원리를 드러낸다 합니다. 태양보다 1만 배 큰 별은 적색도성 엄청난 큰 별로 바뀌다가 적색도성이 백색왜성으로 바뀌었다가 마지막으로 자기목숨을 잃어가면서 태양풍에 의해서 질량이 해체되면서 자기 몸의 나머지 영양분을 다른 별을 만드는 원료로 공급하고 자기는 장렬하게 소멸된다고 합니다. 별들도 죽으면서 다른 별의 탄생을 돕는다는 겁니다. 우주 안에도 별들도 십자가와 부활의 원리를 서로 나누고 있다는 겁니다. 한 알의 별이 폭발하여 다른 별을 살리는 놀라운 역사가 있다는 겁니다. 이번에 고양시에서 조용필 콘서트를 합니다. 저는 조용필의 동선을 항상 추적합니다. 조용필의 가사에는 항상 십자가에 원리가 있습니다. 킬리만자로의 표범은 제가 수없이 들었습니다. 킬리만자로의 표범을 틀어놓고 기도하면 기도가 그렇게 잘 됩니다. 킬리만자로의 표범은 고난극복사상이 들어 있습니다. 조용필이 파주에서 메티캐스라는 작은 밴드를 모집해서 일본 무대에서 일탈하면서 피를 토하면서 노래를 부르는 그 과정, 그 간증을 들으면 눈물을 흘리지 않고 견딜 수 없습니다. 조용필 1983년에 <못 찾겠다 꾀꼬리>를 했잖아요. 그 안에 <비련>이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비련>은 가사가 정말 기독교적입니다. 사랑의 으뜸성 불멸성이 있습니다. 비련은 1983년에 깡촌, 태백 요양원에서 14살 지적 장애인이 한 번도 감정의 변화를 보이지 않고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는데, 요양병원장이 처음으로 비련이라는 노래를 들려줬을 때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런데 14살짜리 자매가 그 가사를 이해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가사의 내용은 기도입니다. 이별의 슬픔을 노래했습니다. 사랑의 절멸성 사랑의 위대성, 아마 파주에서 작곡 한 것 같아요. 내용이 파주 내용이 많아요. 이별의 슬픔을 노래하고 사랑의 불멸성을 노래했는데 기도라는 말이 계속 나와요. 이 아이가 처음으로 이 노래를 듣고 눈물을 흘렸는데 드디어 처음으로 감정에 동요를 보이고 사람다운 구실을 했습니다. 그 병원장이 너무 답답하여 최동규한테 전화를 했습니다. 조용필 씨 와서 노래를 한 번 불러주세요, 이 아이를 위해서, 그날 조용필이 4곳의 밤무대를 뛰어야 합니다. 한번 뛸 때 3천만 원 또는 4천만 원 받았습니다. 조용필이 1 2천만 원 정도의 손해를 보고 다녀갔습니다. 담배 한 대 피우고, 담배 한 대 피운 사람이 더 성자가 많습니다. 기독교인들이 담배 피운 사람을 너무나 미워하는데 그건 정말 잘못됐습니다. 담배는 성자들이 자기 생각을 할 때 쓰는 건데 너무 기독교인들은 술 안 먹고 담배 안 피우고 카바레 안 가는 것에 대해 너무 경건하게 생각하는데, 조용필은 담배 한 대피우고 위약금 다 물어주고 갔습니다. 가서 노래를 불렀는데 그 아이가 막 울었습니다. 그 아이의 감정이 살아난 겁니다. 그랬더니 그 어머니가 손을 붙잡고 돈을 주려고 하니까 이 아이가 흘린 눈물이 내가 평생 벌 돈보다 가치가 있는 겁니다, 나는 이 아이의 눈물을 보고, 이게 대중음악에서 나온 겁니다. 그럼 조용필의 음악만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대부분의 대중음악도 사랑과 이별입니다. 즉 사랑의 으뜸성, 친밀함에 대한 욕구, 예수님께서 성령의 열매 안에 맺힐 수 있는 희락과 사랑과 화평, 이런 위대한 것들을 다 노래합니다. 그래야 사랑이 됩니다. 인간은 아무리 교회에 안 다녀도 위대한 가치와 혼을 불어 넣을 수 있는 가사에 춤을 추고 덩실덩실 응답하는 존재입니다. 기독교회가 너무 잘못하면 안 됩니다. 교회 오는 사람 중심으로 보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우주적 통치를 가지고 보면 이 세계는 교회 바깥에 있는 사람들이 훨씬 더 감수성이 깨끗하고 고결하고 잘 보이는 사람이 많습니다. 우리는 바리새적으로 너무 경직돼 있고 판단을 잘하고 교회 다니는 것과 안 다니는 것을 너무 크게 봅니다. 우리 주님은 그렇게 보지 않고 우리 하나님은 그렇게 보시지 않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사랑으로 세계를 통치하시고, 이 세계는 사랑을 중심으로 돌고 있는 지구별이고, 사랑을 향해서 뛰는 별이고, 이 세계의 모든 사람이 심장박동수와 돈과 모든 사랑을 다 바치는 것은 사랑 때문입니다. 이 말은 사랑이 최고란 말이고 하나님이 바로 사랑입니다. 이건 우연이 아닙니다. 우리 하나님이 세계를 통치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우주적 보통현상이고, 공통 현상이고 사랑이 세계를 이끌어간다 볼 수 있고 사랑이 세계를 완성한다 볼 수 있는데 이 사랑을 위하여 우리를 부르신 겁니다. 우리 교회는 이 세계를 통치하는 보편적 통치, 사랑을 중심으로 역사가 움직이는 이 통치를 먼저 수긍하고 나서 교회의 사명을 알아야 합니다. 이걸 모르고 기독교라는 좁은 boundary 안에서 우리가 나누는 이것을 다로 알고 하면 우리가 편협해보이고 세상 사람들을 향한 따뜻한 마음이 사라져버립니다. 저는 이번에 조용필 50주년 고양콘서트 갈 생각입니다. 제 아내가 알면 어렵게 생각할지 몰라도 저는 표를 구할 생각입니다. 혹시 방송 나오면 제가 간 줄 아십시오. 저는 조용필의 킬리만자로의 표범을 틀어놓고 10시간 기도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만큼 이 세계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보편적 통치흔적이 사랑을 중심으로 돌고 가는 세상, 이 세상의 모든 예술 모든 문학 건축이 사랑 때문이다, 노트르담도 하나님 사랑 때문에 가능한 것이고 헨델의 메시아도 하나님 사랑 때문에 가능한 것이고 이 땅의 모든 문학도 사랑의 으뜸성에 바치는 헌사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 보좌에서 이 세계를 통치하고 있음을 우리는 믿을 수 있다는 말이죠. 사도신경 1 1조는 이겁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전능하사라는 말 전에 천지를 창조했다는 창세기 1 1절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참 중요한데요.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이건 다른 말이 아닙니다. 땅이라는 건 큰 바닷물에 잠겨 있어서 아무도 살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피조물의 보금자리인 육지가 물 안에 갇혀 있어서 누구도 살지 못하는 상태로부터 하나님의 신은 수면위에 운행했다, 여기로부터 창조됩니다. 하나님은 7일 창조의 첫 단계를 매우 좋지 않은 상태에서 시작했습니다. 큰물이 땅을 가득 침수시켜 놓은 상태, 혼돈이라는 말을 주목해야 합니다. 혼돈은 천자문에 나온 말이죠. 큰물 혼, 큰물에 잠길 돈입니다. 큰물에 잠긴다는 뜻입니다. 혼동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이걸 혼동이라고 생각하는데 혼동하지 마십시오. 혼돈입니다. 육지가 큰물에 잠겨서 아무도 살지 못하는 상태, 거기에는 요즘 과학적으로 말하면 방사능이 많다는 뜻이랍니다. 우주가 처음 폭발했을 때 방사능이 너무 많았답니다. 그래서 아무도 살지 못했습니다. 우주 빅뱅이론으로 말하면 방사능이 너무 많아서 아무도 살지 못했다는 말이 됩니다. 어쨌든 이때 하나님의 신이 수면에 운행했는데 현재능동분사형입니다. 메라헤페트라는 말입니다. 루아흐 엘로힘 메라헤페트 알프네 하마임, 이 말은 하나님의 영이 창조직전에 계속 예비 작업을 쭉 하고 있었단 말입니다. 땅을 가득 채운 물을 가를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그걸 어둠이 꽉 잡고 있습니다. 어둠밖에 없고 뭍과 물이 뒤엉켜있는 상태가 하나님의 7일 창조가 시작되기 전 상태입니다. 7일 창조의 첫 순간은 이겁니다. 뭍과 물이 뒤엉킨 상태에서 흑암이 깊게 내려온 이 상태에서 창조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살 수 없는 상태에서 사람과 피조물이 살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기 때문에 창조란 말뜻은 없는 것에서 있는 것을 만들었다는 뜻이라기보다는 이미 있는 좋지 않은 것으로부터 더 좋은 상태로 질적 전환을 했다는 뜻과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빠라라는 말은 여호수아 17 15절에서 요셉지파에게 여호수아가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이르되 네가 큰 민족이 되므로 에브라임 산지가 네게 너무 좁을진대 브리스 족속과 르바임 족속의 땅 삼림에 올라가서 스스로 개척하라' 그 개척하라는 말, 개간하라는 말이 정확하게 빠라입니다. 우리가 이번에 10 13일에 가기로 한 상암동 난지도 있죠. 원래 난지 쓰레기장이라는 말인데 난지도라는 말이 없어졌습니다. 70년대 말에 난지 쓰레기까지 가는 버스가 25번이었습니다. 그때 가보면 인간이 살 수 없는 지옥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냄새가 너무나 심했습니다. 그때 그 난지쓰레기장에 간척 사업했던 흙을 다 퍼부어서 평화공원도 서고 월드컵 경기장도 그 옆에 들어섰습니다. 그런 것을 창조한다고 말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가치 없는 것을 가지고 가치 있는 것을 창조할 때 그때 창조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창조한다는 말을 고백할 때부터 나의 부정적 경험들, 내가 지상에서 경험했던 하나님을 없다고 생각하게 만들 수 있을 만큼 나쁜 경험들을 가지고 좋은 걸 창조하신다는 뜻입니다. 난지도 쓰레기 같이 정신적 하수구 같이 내 인생이 방치됐는데 방치된 내 인생의 쓰레기 경험을 가지고 우리 하나님은 하늘공원과 평화공원을 만들어내듯이 우리 하나님은 만들어내신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고백은 너무나 좋은 고백입니다. 요셉의 입장에서 볼까요? 13년 동안 형들에게 버림받고 이집트 노예시장에 팔렸고요. 그런 부정적 쓰레기 경험들 위에 애굽 총리라는 놀라운 영광을 만드시고 선을 만드셨습니다. 그게 바로 창조입니다.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 제 부정적인 경험 내 인생의 이력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이 쓰라린 경험들을 갖고 선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런데 전능하사라는 말이 참 중요합니다. 전능하사 라는 말은 만군의 하나님이라는 말을 잘못 번역한 겁니다. 만군의 하나님이라는 말을 그리스 말로 번역할 때 판토 크라토 라는 말로 번역했습니다. 원래 만군의 하나님이라는 말은 이런 뜻입니다. 성경에 나온 말입니다. 천군천사를 자유자재로 부리시는 하나님, 천군천사들에게 당신의 권한과 능력 일부를 맡겼다가 천군천사들에게 분할된 순종과 대리행위를 통하여 당신의 능력이 결국 다 발휘되도록 만드신 하나님, 즉 매개를 통하여 피조물의 협조와 순종을 받아가면서 세상을 통치하기로 작정하신 하나님이 전능하신 하나님입니다. 히브리 개념과 많이 뜻이 달라지죠. 성경개념에는 천군천사를 부리시는 하나님이 강조됩니다. 피조물의 순종과 도움을 받아가면서 당신의 능력을 드러내는 하나님이 많이 강조되는데, 이 그리스 개념은 판토크라토 개념은 혼자서 능력을 원맨쇼로 발휘하는 그런 느낌이 들죠? 그건 틀렸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원래 성경적 맥락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천군천사를 통하여 당신의 능력을 대리하시고 위임케 하시고 분할된 과업을 통하여 당신의 능력이 적분되고 당신의 능력이 한꺼번에 드러나도록 만드는 겸손하신 하나님,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 자기를 비우신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능력이 많은 교수일수록 자기의 능력을 학생들에게 고루 분할시켜서 제자들의 능력이 합해져서 자기 능력이 드러나도록 합니다. 제자들은 멍청하게 만들고 자기 혼자서 계속 논문 많이 쓰고 상 받는 교수가 훌륭한 게 아니라 제자들에게 임팩트를 줘서 제자들을 동시에 intelligent하게 만들고, capable 하게 만들고 능력 있게 만들고 지성적으로 탁월하게 만들고, 그렇게 하면서 자기 능력을 발휘하는 교수가 좋은 교수입니다. 그게 좋은 교사입니다. 능력이 많은 아버지는 누구입니까? 자녀를 무책임하게 만들면서 자녀에게 230억씩 잔고를 주는 아버지입니까? 아니면 자녀에게 근로정신을 고취시켜서 보통 사람들처럼 학습을 하게 해서 그가 어떤 환경에서도 살아남게 만들고, 마침내 그를 능력 있게 만드는 아버지입니까? 후자 아버지입니다. 그런데 요새 아버지 중 능력 없는 아버지는 자녀 몰래 300억을 통장에 만들어주고 세금도 떼어 먹는 아버지가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당신의 전능을 혼자서 독차지해서 마음껏 발산하지 않고 우리의 순종과 우리의 대리행위를 통하여 당신의 전능을 드러내는 인격적인 하나님이고 겸손하신 하나님이고 소탈하신 하나님이고, 우리 순종을 통해서 당신이 능력 있는 하나님으로 드러나길 기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천군천사가 만일 순종을 안 해주면 만군의 천사가 순종하지 않기로 하면 우리 하나님은 능력이 없는 하나님으로 오해를 받습니다. 지금 바로 이런 상황입니다. 우리 교회가 하나님께 집단적으로 불순종하면 하나님은 교회를 통치하지 않으시는 건 물론이고, 교회를 통해서 이 세계를 돌보시지 않는 것이 확실하다고 확신하게 됩니다. 교회바깥에 있는 모든 무신론자들은 상당부분 교회가 발생시킨 무신론자입니다. 파생된 무신론자입니다. 그래서 우리 하나님은 피조물의 순종을 통하여 이 세계를 창조하시고, 천군천사와 인간들의 누적된 순종 분할된 순종, 각각 우리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뜻을 집행하고 대리하는 이 행위를 통하여 하나님 능력을 드러내기 때문에 하나님은 겸손하신 하나님이 되기로 작정하신 겁니다. 나는 많은 천군천사와 숱한 성도들의 순종을 통하여 당신의 능력을 드러내기로 작정하신 하나님이 숱한 성도들과 천군천사들과 더불어 점점 더 쓰레기더미 같은 세상에서 평화공원 같은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라는 고백이 바로 1 1절 고백입니다. 1 1절 고백에서는 벌써 내가 하나님의 전능을 입증하기 위해서 내 몫의 사명이 있는 것이고, 하나님이 하는 일에 대한 고백일뿐 아니라 하나님이 나에게 위탁한 사명을 김회권의 일생동안 순종하기로 다짐한 그 다짐도 있는 거죠. 예수님을 독생자로 보내신 하나님이 이런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이 당신 전능의 일부를 예언자들에게 맡기고 각계각층에게 맡깁니다. 그래서 저는 다른 형제자매들의 순종을 통해서도 엄청난 하나님의 통치를 봅니다. 저는 우리 교우들 중에서 순결한 교우들을 보고 훌륭한 교우들을 보면 하나님 살아계심을 믿습니다. 내 마음의 영적 기상도가 흐려진다 할지라도 내 옆에 있는 이 훌륭한 고결한 세마포 같은 성도들의 삶을 볼 때 하나님의 세계통치를 믿을 수밖에 없는 겁니다. 하나님만 보지 말고 하나님이 천군천사처럼 들어 쓰시고 하나님이 적재적소에서 마음껏 사용하시는 성도를 보세요. 그러면 여러분께서 믿음이 생길 겁니다. 그래서 제가 믿음이 유지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이 제게 주신 믿음 플러스, 한 번도 하나님의 세계통치를 의심할 수 없는 많은 성도들, 심지어 조용필의 노래까지도 저를 도와줍니다. 대중가요가사마저도 저를 성령 충만하게 해줍니다. 대중가요를 음미할 때마저도 하나님의 세계통치를 확신할 수밖에 없습니다. 인디언추장들이 남긴 글을 읽을 때도 하나님의 세계통치를 의심하지 않습니다. 결국 우리가 정확하게 숙고해볼 때 이 세계를 하나님이 통치한다는 것을 안 믿기가 매우 힘듭니다. 믿는 것은 우리가 숙고의 숙고를 거듭하면 가능합니다. 물론 이 믿음은 성령의 선물임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은 좋지 않은 상태, 뭍과 물이 뒤엉켜 있는 상태를 창조하셔서 빛과 어둠으로 세상을 양분합니다. 이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어둠을 소멸시키셨습니까? 하나님의 첫 창조에서는 빛과 어둠이 세력의 균형을 이룹니까? 아예 빛만 있습니까? 우리가 잘못하면 하나님이 이 세상을 통치하는 증거로 빛과 같은 경험만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게 잘못됐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완벽하게 만들지 않고 빛과 어둠이 교차하면서 빛과 어둠이 세력균형을 이루는 세상을 만들었습니다. 우리가 그런 세상에 태어났지, 빛만 있는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저는 저희 아버지의 빛도 봤고 어둠도 봤습니다. 저는 내안에 있는 천사 같은 신성도 보았고 내 안에 있는 짐승 같은 야수성도 보았습니다. 나는 나한테만 그런 게 아닙니다. 내 인생의 어느 순간은 빛으로 가득 찬 걸 보지만 어느 순간은 어둠이 짙은 음영으로 가득 찬 걸 봅니다. 제 인생도 그랬고, 그래서 저는 빛과 어둠의 팽팽한 긴장 속에서 신앙의 기쁨을 느끼고 하나님 믿는 일이 얼마나 역동적인 상상력인가를 항상 경험합니다. 이 세상에는 분명한 어둠이 있습니다. 그러나 과장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둠이 있긴 있지만 절대로 어둠지배론적인 세상이 아닙니다. 즉 악은 있지만 악지배론적인 세상이 아닙니다. 심지어 히틀러 때도 보세요. 히틀러가 독일을 13년간 다스렸을 때 히틀러치하에서도 히틀러 체제를 극복하려는 놀라운 일이 있었습니다. 박정희 18년 유신치하에서도 그랬습니다. 그런데 어둠이 먼저 있었다는 말이 중요합니다. 어둠은 먼저 있었는데 새 하늘과 새 땅 가서야 없어집니다. 그때는 낮과 밤이 교차되지 않고, 태양대신 빛 되신 하나님만 하루 종일 계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처음으로 파송하신 첫 세계,  1세계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아닌 세계는 빛과 어둠이 교차하기 때문에 반드시 환난도 있고 평화도 있습니다. 이사야 45 7 '나는 빛도 짓고 어둠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들을 행하는 자니라 하였노라' 잘 보세요. 어둠의 경험에 사로잡히는 순간, 어둠이 우리를 전일적으로 지배하고, 다시는 빛이 오지 않을 것 같은 무시무시한 어둠, 빛을 전혀 상상도 못하게 어둠에 사로잡힐 때 우리가 자살하게 됩니다. 자살지향적인 고도일 때, 자살하려는 사람을 도우려고 할 때는 너무 위대한 진리를 필요 없습니다. 사소한 빛의 조명만 주면 자살은 유예시킬 수 있고 멈출 수 있습니다. 숭실대 올 초에 14층 가장 높은 빌딩에서 한 학생이 자살했습니다. 신문에는 안 나왔습니다. 전기공학과 학생이 불문과로 전과를 했는데, 이 학생이 인물이 잘생겼습니다. 가톨릭 신자래요. 불문과 학생이 자기 마음을 받아주지 않은 겁니다. 이 불문과 여학생은 사귀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잘생긴 학생이 사랑의 삼각형을 이해했어야 합니다. 사랑이 식을 때까지 기다리거나 딴 자매를 찾아야 하는데, 풀리지 않은 방정식을 가지고 사랑을 구애하니까 사랑을 다 표현하지 못합니다. 그러다가 왕따가 됐습니다. 이미 애인 있는 여학생에 대시를 하니까 왕따를 당하고, 전과생이 왕따를 당하니 갈 곳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일 높은 14층에 올라가서 소주 반병 마시고 바로 투신을 했는데 그 장면을 50명의 학우가 본 겁니다. 동시에 50명의 학우가 보는 앞에서 떨어진 겁니다. 저는 교목실장으로써 너무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유가족을 만나 위로를 하고 온갖 수습을 다 했는데, 그 아이가 그렇게 착했습니다. 그 아이가 미술치료 상담을 했는데 미술집단치료 상담이 연기가 됐습니다. 자살하기 전 이 아이가 미술치료에 가서 알았다면 연기될 수 있었습니다. 찬스를 놓쳤습니다. 학생상담센터에서 날짜 조정이 잘못된 겁니다. 이 세상에는 자살지향적, 자기 파괴적인 결단으로 움직이는 극한 어둠의 경험 세력이 있습니다. 그때 그 어둠이 빛 가운데 노출되면 위력이 약해집니다. 다시 말해서 빛 가운데 노출된 어둠은 통제될만한 어둠이고 견딜만한 어둠이고 극복 가능한 어둠이 됩니다. 그런데 그 형제는 그게 없었습니다. 우리 가운데 어둠에 사로잡혀서 내 인생의 장래를 전혀 낙관하지 못하고 죽음 외에는 길이 없다고 결론 내게 만드는 진짜 무서운 결혼이 이 세상에 똬리를 틀고 있을 때 여러분이 빛의 자녀가 돼서 도와줘야 합니다. 교회가 도와줘야 하고요. 요한복음 9장에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이 있었죠.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은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이런 말을 듣고 살았죠. 이런 식으로 내 인생이 망가진 이유가 내가 잘못해서 그렇습니까? 내 부모가 잘못해서 그렇습니까? 내가 이렇게 빈털터리 가난한 이유가, 내가 이렇게 못 생긴 이유가 내 잘못입니까? 내 부모 잘못입니까? 오늘날 외모와 성적과 가난에 대해서 전부 다 누구 잘못이냐고 묻는 아우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 아들 예수님은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이 사람은 하나님이 빛도 짓고 어둠도 지었다는 걸 가르쳐주기 위해서, 하나님이 하시는 그 일이 애매모호한 양가성, 빛과 어둠을 동시에 창조하신 하나님의 일을 드러내기 위해서 하나님이 이 사람의 눈을 멀게 했습니다, 자 내가 지금 이 사람 눈으로 빛도 짓고 어둠도 지었다는 것을 실연하여 보여주겠습니다, 하면서 예수님께서는 창세기 2장에 있는 창조의 모습을 그대로 시뮬레이션 하면서 보여주셨습니다. 우리 어둠은 주님의 빛 아래 노출될 때 빛이 됩니다. 이걸 우리는 시편 139 11-12 '내가 혹시 말하기를 흑암이 반드시 나를 덮고 나를 두른 빛은 밤이 되리라 할지라도 주에게서는 흑암이 숨기지 못하며 밤이 낮과 같이 비추이나니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같음이니이다' 우리가 신앙고백을 한 번 할 때마다 주님의 손 안에 우리 어둠을 갖다 맡기는 거거든요. 내가 하나님 사랑을 경험할 수 없고 하나님을 믿을 수도 없는 부정적이고 쓰라린 한복판에 노출될 때, 주님 내 어둠을 받으소서, 주님 내 어둠을 둘러 빛으로 만드시든지 내 어둠을 견딜만한 어둠으로 통제해주시든지, 어둠이 나를 삼키지 못하도록 도와주소서, 그렇게 말하는 것이 신앙고백입니다. 그렇게 한 번 하는 것,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이렇게 하는 순간 내가 어둠의 터널을 빠져 나가서 나를 두른 빛의 바다로 뛰어갑니다. 내가 고백 한 번 하는 순간마다 빛이신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입니다. 우리가 전능을 참칭하고 내 인생을 으스러뜨릴 것처럼 엄습하는 어둠의 세력이 있을 지라도 이 신앙고백으로 어둠의 세력을 물리칠 수 있음을 믿기 바랍니다. 저는 그걸 굳게 믿고 있습니다. 저는 이 신앙고백이 어둠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고백이라 믿습니다. '나를 두른 빛은 밤이 되리라 할지라도' 이 밤을 주님의 손으로 가져가는 것, 결국 이사야 50 10 '너희 중에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종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자가 누구냐 흑암 중에 행하여 빛이 없는 자라도 여호와의 이름을 의뢰하며 자기 하나님께 의지할지어다' 이것이 신앙고백입니다. 이것이 사도신경의 엄청난 위력의 고백입니다. 여러분 모두 사도신경 8주 동안 여러분 안에 찾아온 전능하신 하나님처럼 내 인생을 으스러뜨릴 것 같은 방해꾼들 어둠의 세력들, 도무지 걱정하지 마십시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을 고백할수록 어둠은 약해지고, 여러분을 장악하는 그 힘은 약해지고, 여러분은 어둠과 공존할 수 있을지언정 어둠에게 삼켜지지 않습니다. 지금 이지선 자매님은 어둠과 공존합니다. 그 아름다운 이지선 <지선아 사랑해>, 새벽기도 갔다 오다가 3도 화상을 입고 그 예뻤던 지선이가 엉망이 됐습니다. 유일하게 남아 있는 것은 발가락, 발가락에 매니큐어를 칠했습니다. 어둠과 공존합니다. 어둠을 압도하면서 공존합니다. 사도바울은 간질병과 같은 무서운 질병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이 질병을 고쳐주지 않고 이 질병은 너를 겸손케 하는 것이다, 하면서 내버려뒀습니다. 어떤 사람은 가난이 어둠입니다. 그러나 빛과 어둠이 교차된다는 사실을 꼭 믿기 바랍니다. 통제 가능한 어둠은 빛과 어둠의 교차 속에 있는 어둠입니다. 통제 가능한 어둠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만드는 어둠입니다. 빛과 어둠의 교차는 마지막 7일째로 가면 빛만 있는 시대로 과도기가 됩니다. 여러분 이 고단한 삶에서 통제 가능한 어둠, 빛으로 통제 가능한 어둠과 공존하는 법을 터득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열등감과 공존해야 하고 실패와 공존해야 하고, 공존해야 합니다. 없애지 못해요. 그러나 이길 수 있습니다. (기도) 아버지 하나님 우리는 신앙 고백함으로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을 고백함으로 어둠을 이기게 하시고 어둠을 압도하게 하셔서 빛의 자녀처럼 살 수 있도록 도와주시길 원합니다. 사도신경을 고백할수록 우리를 드리운 이 무서운 어둠의 세력들을 견딜만한 어둠의 세력으로 축소시킬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헌금기도) 아버지 하나님 감사와 감격으로 바친 이 헌물이 하나님 백성, 교회 안팎의 백성 위해서 아낌없이 낭비되기를 원합니다. 아버지 경제적 곤궁 때문에 직장의 불안 때문에 하나님 통치가 믿어지지 않는 형제자매들 있습니까? 하나님의 자애로운 통치, 우리를 이 세상에 보내셨을 때는 우리가 자기에 대해서 존엄한 형상을 회복하고 자기에 대해서 만족할만한 세상으로 보내셨는데 우리를 한없이 으스러뜨리는 세상 앞에서 우리를 주눅 들지 않도록 하시고 우리를 창조하사 이 세상에 파송하신 하나님 믿고 이 어둠 이길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축도)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에게 새 생명 주셔서 감사하옵고 새 생명을 육아하고 길러내는 부모님들의 고단한 노고를 위로하여 주시길 원합니다. 아버지 해외체류중인 교우, 유학을 떠난 교우들을 낱낱이 기억하여 주시기 원합니다. 고독한 거리에서 주님의 영감과 계시 받아 공부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길 원합니다. 출장 중이거나 몸 건강이 여의치 못해 오지 못한 교우들 있습니다. 그 따뜻한 병상에서 주님의 임재를 방문을 경험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주님 우리교회 새로 나와서 낯설기만 한 교우들을 위로해 주시고 우리 모두 낯설지라도 주님 사이에 두고 친구 되게 해주시고 가족 되게 해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원거리에서 우리교회를 출입하는 형제자매들 있습니다. 주님의 집에 가기 위해서 그 먼 거리를 마다하지 않고 온 아들딸들에게 절대 안전을 주시고 위로를 주시길 바랍니다. 우리교회를 방문하신 귀한 지체들 있습니다. 천사의 방문을 받은 것처럼 우리가 기뻐하고 환대합니다. 우리 모두가 주님의 몸 된 우주적 공교회 하나밖에 없는 교회에서 친구가 되게 하시고 동역자가 되게 하소서. 지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 크신 사랑과 성령의 위로하심과 교제케 하심이 오늘 예배드리고 다시 한 번 사도신경 고백함으로 어둠을 뚫고 빛의 나라 하나님의 품 안에 안기기로 다짐하는 교우들 위에, 그들의 일터와 자녀들 위에, 해외에 흩어진 모든 교우들 머리 위에, 교회 바깥에서 지금도 어둠의 세력과 혈투를 벌이는 주님을 모르는 아들딸들 위에 지금부터 영원토록 함께 계시기를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