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거룩함의 열쇠는 사랑에 빠지는 것
하나님 안에 있는 더 좋은 만족으로 인해 죄가 싫어지지 않는 한 장기적으로 죄를 이길 길은 없다. 죄가 싫어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전 존재의 아름다움을 먹고 맛보는 것이다. 예수님의 기쁨 즉, 그분만이 굶주린 영혼들에게 주실 수 있는 은혜의 긍휼과 자비와 사랑과 용서와 능력과 평안을 맛보는 것이다.
내 친한 친구 하나가 주님께 등 돌린 딸 문제로 고민하고 있다. 딸은 대놓고 반항하여 죄의 길을 가면서 매순간 보란 듯이 그런 삶을 즐기고 있다. 최근 우리는 함께 만나 문제에 접근하는 최상의 대책을 의논했다. “딸한테 뭐라고 말하지? 어떻게 해야 내 말을 알아듣지?” 친구는 말했다. 나는 곧바로 정곡을 찔렀다. “더 높은 도덕으로 아이를 나무란다고 될 일이 아닐세. 더 높은 기쁨으로 아이를 초대하면 돼! 도덕 원리라면 자네가 옳고 아이가 틀렸지. 두말할 것도 없네. 하지만 아이한테 그렇게 말해 봐야 결과는 뻔하지. 아무리 잘 타일러도 아이는 자네를 자신의 쾌락과 행복의 적으로 해석할 걸세. 자네는 딱딱하고 금욕적이고 고리타분한 삶을 내세우는 사람이 될 수밖에 없지.”
나는 말을 이었다. “대신 아이의 낭비와 마약과 성 문란과 자아 도취적 생활방식과 희한한 옷차림과 기타 아이가 행복의 필수요소라 생각하는 것들을 보며 이렇게 말해 보게. ‘에게게. 겨우 이거야? 네가 고작 이 정도에 만족하다니 믿어지지 않는 걸. 쾌락치고는 형편없이 빈약한데? 세상에! 넌 네가 뭘 놓치고 있는지 통 모르고 있구나!’”
내 요지는 간단하다. “그런 틀렸어. 하지 마”라고 말하는 것은 상대로 하여금 옳은 길을 가게 하는 방법이 못된다. 그 ‘틀린’ 길이 적어도 상대의 ‘옳은’ 길보다 훨씬 신나고 매력 있고 즐겁고 재미있기 때문이다. 해답은 상대에게 더 아름다운 하나님, 모든 지각에 뛰어난 그리스도의 평안, 성령님과의 친밀한 관계가 주는 흡족한 쾌락을 맛보게 하는 것이다. C. S. 루이스는 그것을 이렇게 표현했다:
“부끄럽지 않은 보상의 약속 즉, 복음서에 약속된 놀라운 보상을 생각하건대 우리의 세상 욕심은 주님 보시기에 너무 강한 것이 아니라 차라리 너무 약해 보일 것이다. 우리는 무한한 기쁨이 약속돼 있는데도 술과 섹스와 야망 따위로 놀아나는 철없는 피조물이다. 약속된 해변의 휴일의 의미를 감히 상상도 못하기에 빈민굴에서 진흙이나 이기며 놀려 하는 무지한 아이처럼 말이다. 우리는 별 것 아닌 것에 너무 쉽게 만족한다.”
내 신학적 신조와 개인적 체험을 통해 나는 내 심령이 죄의 쾌락보다 더 좋은 쾌락에 붙들리지 않는 한 죄에 대한 지속적 승리를 결코 누릴 수 없음을 얼마든지 피력할 수 있다. 일시적인 쾌락에 노예가 된 심령을 해방시키는 유일한 길은 예수님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는 기쁨과 즐거움에 열정을 품는 것이다. 죄의 쾌락에는 일시적 중독성이 있지만 하나님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다. 그 약속을 믿을 때 죄는 힘을 잃는다.
2. 쾌락은 힘이 세다
욕망이란 무시한다고 없어지지 않는다. 욕망을 깊이 묻거나 마음속 안전한 구석에 가둬둘 수는 있다. 과거의 죄를 들먹거리며 욕망의 목소리를 잠재울 수 있다. 그러나 꾹꾹 누른 비치볼처럼 욕망도 결국 표면에 다시 떠오른다. 그것도 가장 엉뚱한 순간에 떠오를 때가 많다.
어느 날 나는 차 안에서 기독교 라디오 방송을 듣고 있다가 미국의 가장 유명한 성경교사 중 한 사람이 한 말에 갓길로 차를 세울 수밖에 없었다. 그의 말을 대충 풀어 쓰면 이렇다. “여태껏 내가 성경을 공부하며 깨달은 단연 최고의 통찰이자 지금까지 발견한 단연 가장 중요한 원리는 이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목표 내지 목적은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미안하지만 나는 이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사실 나는 그보다 당당하게 이렇게까지 말할 수 있다. “여태껏 내가 성경을 공부하며 깨달은 단연 최고의 통찰이자 지금까지 발견한 단연 가장 중요한 원리는 이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목표 내지 목적은 하나님 안에서 정확히 행복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내 영혼이 이토록 애타게 갈망하는 행복을 하나님 안에서 발견하는 것보다 그분을 더 영화롭게 하는 길은 없기 때문입니다.”
블레이즈 파스칼은 기독교 쾌락주의의 중심 교의를 이렇게 표현했다. “모든 인간은 행복을 추구한다. 예외가 없다. 동원하는 방법은 다를지라도 인간은 누구나 그 목적을 지향한다.” 또한 조나단 에드워즈보다 그것을 명확히 이해하고 생생히 표현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모든 인간의 영혼은 필연적으로 행복을 갈망한다. 그것은 선인과 악인을 막론하고 인간 본성의 보편적 욕구다.” 악인들은 상상 가능한 온갖 죄악되고 타락한 체험에서 행복을 찾으려 한다. 신자들은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자신의 쾌락 충동에 마음을 굳게 닫고 문제가 자신의 욕구에 있다고 잘못 단정한다. 그리고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욕구의 표출을 깨끗이 억압하고 억누르려 해왔다. 하지만 에드워즈는 의인과 잃은 영혼의 차이란 욕구 자체를 없애려는 데 있지 않고 ‘행복의 참 길’을 선택하는 데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문제는 욕망이 아니라 그 욕망을 이루는 길이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는 주된 길은 그분만이 주실 수 있는 즐거움과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우리의 보배의 척도는 쾌락이다.” 기쁨이 없는 의무는 하나님을 욕되게 한다. 하나님은 최고의 낭만주의자다. 그분은 인간 영혼에게 구애하고 노래하며 불러내고 유혹한다. 그분은 우리를 곁으로 가까이 이끌기 원하신다. 그분만이 주실 수 있는 친밀함의 기쁨으로 이끌기 원하신다.
욕망을 비난하는 것은 기독교가 아니라 불교다. 불교 철학의 4대 도(道) 중 하나는 고통의 원인은 욕망이고 욕망이 채워지지 않을 때 우리는 고통하므로 고통을 없애는 길은 욕망을 소멸시키는 것이라는 깨달음이다. 만족을 늘리는 것이 아니라 욕망을 줄여라. 소원을 최소로 줄여라. 그러면 실망의 고통이 사라질 것이다. 이것은 단연 비기독교적인 시각이다. 문제는 우리에게 욕망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보다 죄를 욕망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다. 우리가 마귀한테 속았다는 것이다. 우리는 가장 악질적인 거짓말을 믿어왔다. 세상과 육신과 마귀가 주는 쾌락과 기쁨이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존재보다 더 즐겁고 만족스럽다는 거짓말이다.
시편 기자의 말에서 그가 쾌락 욕구를 악하게 여겼는지 판별해 보라.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시 34:8). 그분의 긍휼과 자비는 영혼에 달다. 한마디로 하나님은 맛있는 분이다! 그러나 이 권고는 바로 다음 구절인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시 34:9)는 또 다른 권고로 인해 더 놀라운 의미를 지닌다. 맞다. 우리가 ‘맛보아야’ 할 그 하나님은 곧 우리가 경외해야 할 하나님이다. 지구별의 문제는 사람들이 쾌락주의자처럼 즐거움을 추구하는 데 있지 않다. 진정 영원히 그 쾌락을 찾을 수 있는 유일한 근원인 하나님의 임재를 반항적으로 어리석게 거부하는 데 있다.
우리는 그분을 즐거워하도록 지음받았다. 우리 마음은 하나님에 대해 생각하고 그분의 위엄과 아름다움을 묵상하고 되새기며 신학적 깨달음의 지적 감격을 경험하도록 빚어지고 꾸며져 있다. 우리의 감정은 그분의 능력과 우리를 향한 사랑과 그리움을 느끼도록 되어 있다. 우리의 의지는 그분의 뜻과 길을 선택하도록 되어 있다. 우리의 영혼은 그분과의 연합의 환희를 경험하도록 빚어져 있다. 우리의 육체는 그분께서 친히 기쁘게 거하시는 성전으로 만들어졌다!
인간 심령에 대한 가장 심각한 위협 중 하나는 권태이다. 권태는 악의 온상이다. 따분한 사람은 육신과 마귀의 손쉬운 표적이 된다. 사람들이 중독증 생활방식에 그토록 빠지기 쉬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죄의 중독에 빠지는 사람들을 보면 치명적 권태에 젖었던 이들이다. 중독이 그토록 위력적인 이유는 우리 심령 속에 초월적 연합과 영적 낭만을 위해 지음받은 그 부분을 건드리기 때문이다. 우리의 심령은 어차피 중독의 일시적 쾌락 아니면 하나님께 이끌리게 되어 있다.
세상은 죽자살자 쾌락을 찾고 있다. 그러나 이 세상의 쾌락은 잠깐뿐이다. 금세 우리를 사로잡았다가 금세 김이 빠져 실망시키는 것이 세상 쾌락이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는 무한한 만족과 영적 기쁨이 있다. 하나님은 고갈되지 않는 저수지다. 하나님께는 우리를 매혹하고 사로잡아 감격시킬 일이 절대 떨어지지 않는다. 하나님은 온 우주에서 그런 무한한 능력을 지니신 유일한 분이다. 뜨거운 열정으로 자기 백성들을 만져 주시며 즐거이 우리를 채우시고 환희와 기쁨과 흥분과 평화와 목적을 가져다 주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포화 상태로 데려가신다. 끊임없이 우리가 보지 못했던 뜻밖의 것들을 우리 앞에 펼치신다. 새로운 맛, 새로운 소리, 상상도 못했을 정도로 더 영광스럽고 가슴 벅찬 그분의 새로운 모습을 말이다. 괴로운 시련과 혼란스런 비극 중에도 그것은 변함없다.
3. 하나님을 오해하고 있는 사람들
비참하게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이 생각하는 하나님의 부족함을 채우려고 발버둥치고 있다. 하나님도 모자란 부분이 있다고 철석같이 믿고 그 부분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이해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가장 영광을 얻으시는 것은 겸손히 그분께 나와 그분만이 주실 수 있는 자비와 선하심을 받을 때다.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셨다. “나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으며 많은 사람의 죄 값을 치르기 위해 내 생명마저 주려고 왔다”(막 10:45). 예수님의 선포는 그 어떤 종교 지도자나 스승의 입에서도 절대 찾을 수 없는 것이다. 일련의 규율 체계로 사람들을 불러모아 온몸으로 자신을 떠받들게 하는 분이 아니다. “그 신은 바로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분은 하늘과 땅의 주인이시므로 사람의 손으로 만든 신전에서 사시지 않으며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이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않으신다. 그분은 모든 사람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직접 주신 분이기 때문이다.”(행 17:24-25). 다윗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편 대목을 보면, “부와 존귀가 주께로부터 나온다.” “사람이 위대하고 강하게 되는 것도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
고린도후서 8-9장에서 바울은 형편이 어려운 예루살렘 형제들을 힘껏 돕도록 고린도 교인들을 독려했다. 마케도니아 사람들이 보여 준 희생적 나눔의 본을 지적하면서 호소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이 “자신들을 주께 바친 것은 먼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베푸신 큰 은혜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그들이 어떤 훌륭한 일을 행했든 그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선행된 은혜의 역사로 인한 것이다. 또한 하나님은 후히 드리는 자들에게 풍성한 공급을 약속하신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후한 그리스도인 청지기들에게 풍성히 채우시는 이유를 설명한다.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 작용하고 있는 영적 역동을 놓치지 말라. 은혜가 내려오자 기쁨이 피어올라 나눔이 뻗어나간다. 이처럼 모든 나눔의 근원은 하나님의 은혜에 있으며, 그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게 된다.
복음은 도움을 구하는 광고가 아니다. 존 파이퍼의 예화가 말해주듯, 한마디로 주님은 수조가 아니라 옹달샘이다. 옹달샘은 저절로 차오른다. 옹달샘은 늘 넘쳐흘러 사람들의 목을 축여 준다. 그러나 수조는 펌프나 양동이로 계속 채워 줘야 한다. 따라서 수조의 가치를 높이려면 계속 땀흘려 물을 부어 쓸모 있게 만들어야 하지만, 옹달샘의 가치를 높이려면 그저 무릎꿇고 앉아 실컷 물을 받아 마시면 된다. 다시 계곡 아래로 내려가 사람들에게 새로 찾은 샘물 얘기를 해줄 수 있을 만큼 새 힘과 원기를 얻을 때까지 말이다. 우리는 물을 갖다 붓기 위해서가 아니라 마시기 위해 그분께 가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섬기시는 분이다. 기쁜 소식은, 우리를 위해 행하시고 역사하시는 이 하나님은 주무시지도 않고 졸지도 않으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그분은 나라들을 통치하시고, 매순간 우주의 존재를 붙들고 계시며, 지상의 동물들을 계속 먹이신다. 또한 역대하 16:9의 말씀처럼 “여호와께서는 온 세상을 두루 살피시고 자기를 진심으로 찾는 사람들에게 능력을 주신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을 향한 우리의 섬김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섬김의 결과이다.
하나님은 앞서 행하시는 분이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13). 바울은 하나님의 선행적 임재와 능력이야말로 우리가 그분 보시기에 기쁘신 일들을 적극 순종하여 행하는 기초라고 담대히 선포한다. 성령께서 주시는 능력으로 행할진대 우리의 수고는 결코 헛되지 않다. 우리는 모든 다양한 차원에서 구원을 이루어갈 참된 소망이 있다.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 안에서 일하시며 우리를 자극하시고 일깨우시고 의지적 반응을 유지시켜 주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환자요 하나님은 치료하시는 의사다. 존 파이퍼는 말했다. “환자가 의사를 섬기는 것이 아니다. 환자는 의사의 좋은 처방을 믿는 것이다. 산상수훈과 십계명은 고용주의 직무 설명서가 아니라 의사가 처방한 건강 계획서다.” 그러므로 의사가 환자를 섬기듯 그분이 우리를 섬겨 주실 것을 믿을 때 우리는 하나님을 가장 높이는 것이다. 다윗도 그것을 알았기에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갈망을 광야에서 생명의 물을 찾아 헐떡거리는 사슴의 생생한 이미지에 비유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시 42:1). 이 회화적 묘사의 초점은 사슴이 아니라 물이다. 목을 축여 주고 목숨을 부지시켜 주는 사막의 시원한 물줄기에 모든 시선이 고정된다. 사슴이 시내에 가지고 오는 것은 타는 듯한 갈증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 예배하는 우리도 하나님께 그렇게 나와야 한다.
4. 하나님의 최고 열정은 무엇인가?
예수님과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의 지고한 아름다움과 사랑스러움에 우리 마음과 생각이 매료되고 사로잡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체험은 회심으로 시작된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말처럼 거듭남의 진수는 “심령에 거룩한 맛 내지 감각을 주는 것, 가장 아름답고 사랑스럽고 고귀한 하나님의 성품을 맛보게 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정적인 침전물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평생토록 꽃이 만발하는 살아 있는 씨앗이며, 마치 성령께서 직접 입으로 불어 용광로 같은 불길을 만들어 내시는 살아 있는 석탄과 같다. 구주의 아름다움에 대한 이 새 맛을 잘 개발하고 가꾸면 그것이야말로 우리 영혼에 죄가 싫어지게 하는 유일한 요소다. 그래서 예수님과 사랑에 빠지는 것이 거룩함의 열쇠다.
그렇다면 하나님 마음속의 최고의 열정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가장 큰 쾌락은 무엇인가? “하나님 마음속의 최고의 열정은 곧 그분 자신의 영광이다.” 하나님이 불철주야 끊임없이 창조하시고, 다스리시고, 명령하시고, 지시하시고, 말씀하시고, 판단하시고, 구원하시고, 멸하시고, 건지심은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위함이요, 궁극적으로 영원히 오직 그분께만 합당한 찬양과 명예와 영광을 온 우주로부터 얻으시기 위함이다. 단연 신 중심적인 이런 우주관이 없이는 거룩함을 향한 우리의 모든 노력은 심각한 결손을 면할 수 없다.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계 1:8).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롬 11:36). 만물이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것은 곧 그분의 영광을 위해 존재한다는 뜻이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만물을 자신의 영광을 위해 탁월하게 설계하셨다는 사실에 즐거이 동의하고 있다. 하나님의 행동 목표는 그분 자신의 영광이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5-6).
수많은 성경 본문이 말해주고 있듯이, 인간의 도덕성과 성취의 최종 목표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또한 예수님의 최고 목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며 구속 사역의 목표도 그분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와 하나님의 심판의 목표도 그분의 영광에 있으며 자연세계도 그분의 영광을 나타낸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을 하늘 위에 두셨나이다”(시 8:1).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그의 백성들에게 헌신하시는가? 그 답은 ‘그 크신 이름을 인하여’다. 하나님의 이름이 우리의 운명에 걸려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이 하나님의 영광에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이렇게 노래한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도다”(시 23:3). 에드워즈의 말처럼, “우리를 안전과 행복의 길로 인도하고 지도하심, 영혼을 소생시키심, 죄를 사하심, 그리고 그 결과로 주시는 도움과 건짐과 구원이 모두 하나님의 이름을 위한 것이다.” 또한 악인의 심판마저도 하나님의 이름을 위한 것이다. 하나님은 여러 모양의 행사를 통해 자신만이 홀로 하나님이요 홀로 주이시며 능하신 일을 행하는 자임을 선포하신다.
하나님이 사랑으로 우리의 영원한 행복과 유익을 구하시려면 먼저 혼신을 다해 무엇보다도 자신의 영광과 이름의 명예를 구하셔야만 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뜨겁게 사랑하시려면 먼저 자신을 최우선으로 사랑하셔야 한다. 그것이 내 결론이다. 우리가 오로지 그분만을 예배하고 그분의 이름에 모든 영광을 돌리는 이유는 하나님은 우주에서 가장 가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분의 위엄은 다른 모든 자를 앞지른다. 그분의 거룩함과 도덕적 탁월성은 다른 무엇과도 비할 수 없다. 하나님의 이름은 세상에 존재하는 가장 훌륭하고 명예로운 이름이다. 하나님이 자신의 절대가치를 지키실 수 없는 분이라면 어떻게 그런 하나님을 의롭고 선하다 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이 자신을 가장 중시하지 않거나 그럴 수 없다면 그것은 그분이 우상숭배의 죄를 짓는 것과 같다. 우상숭배란 하나님 대신 그 어떤 것이나 사람을 신처럼 높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자신의 영광을 구하는 것은 죄다. 우리 자신보다 더 가치 있고 중요한 것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바로 하나님이다. 우리는 피조물일 뿐이다. 동일한 이유로 하나님이 자신의 영광을 구하는 것은 의로운 일이다. 하나님보다 더 중요하거나 가치 있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그분은 창조주다.
그렇다면 세상 무엇보다 자신을 사랑하는 하나님이 어떻게 다른 이들을 사랑하실 수 있을까? 존 파이퍼는 그것을 이렇게 표현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누리도록 주시는 것 중 그분의 사랑을 가장 잘 입증해 줄 것은 무엇일까? 가능한 답은 하나뿐이다. 그분 자신이다. 그분이 우리의 묵상과 교제에서 자신을 거두신다면 아무리 많은 것을 주실지라도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시지 않는 것이다.” 그분 자신이 가장 큰 선물인 것이다. 그분은 우리 심령으로부터 당신의 영광에 대한 찬송을 얻고자 하시는데, 그것은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의 충만한 기쁨을 구하시기 때문이다. 그 기쁨은 모든 존재 중 가장 위대한 분이신 그분을 알고 찬양할 때만 얻을 수 있다.
자기의 명예를 구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사랑의 행위인 분이 온 우주에 딱 한 분 있으니 곧 하나님이다. 그분께는 자기를 높이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덕이다. 그분은 모든 일을 자기 영광을 높이기 위해 하신다. 그분은 우리의 갈망을 채워줄 수 있는 유일한 답을 우리를 위해 지키시고 베푸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신다! 그리고 이 사랑의 기초는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신다는 사실에 있다. 그분은 전에도 그러셨고 지금도 그러시며 앞으로도 언제나 그러실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최고선은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최고선은 그 즐거움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5. 감탄, 놀람, 목마름, 두려움, 기쁨...
“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롬 11:33). 이것은 로마서를 마감하는 사도 바울의 뜨거운 선포다. 자문해 본다. 그리고 당신에게도 묻는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반응에 ‘오!’라는 깊은 경이와 감탄은 어디로 갔는가? 가슴 아픈 말이지만 사람들이 죄에 매여 사는 주된 이유는 하나님이 따분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사단의 가장 효과적 전술 중 하나는 우리를 속여 하나님을 따분한 존재로 믿게 만드는 것이다. 영에 감격이 있는 자들은 죄의 유혹에 끌리지 않는다. 하나님께 탄복하는 자들에게는 죄가 별 매력이 없다. 불의의 노예가 되기 어렵다.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에 시선이 붙들린 자들은 세상의 매혹에 마음이 동하지 않는다.
뉴잉글랜드의 제1차 대각성 운동 때(1740-1742) 무수한 사람들이 새롭게 부어 주시는 성령에 강한 영향을 입었다. 많은 사람들의 삶이 영광스럽게 바뀌었다. 그때 인생이 송두리째 바뀐 사람으로 조나단 에드워즈의 아내, 사라를 빼놓을 수 없다. 하나님은 놀라운 힘과 열정으로 사라를 찾아오셨다. 그 체험을 한 단어로 압축한다면 그것은 ‘오!’일 것이다. 다음은 사라의 간증을 몇 군데 발췌한 것이다.
하나님의 임재가 어찌나 가깝고 생생하던지 그 밖의 것은 거의 의식되지 않을 정도였다.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가 분명한 인격으로 느껴졌다. 두 분은 상상할 수 없는 아름다움과 온유와 자비를 그리고 내게 대한 변치 않는 깊은 사랑을 보여 주셨다. 나는 표현 못할 사랑에 끌려 하나님과 구주의 보호와 책임 하에 들어간 기분이었다. 그리스도는 철저히 부패한 내 심령을 사로잡아 자신의 발아래 두셨다... 내가 느낀 평안과 행복은 하늘에서 내려온 영원불변한 것으로, 이 세상의 손에 닿지 않도록 지옥과 지상의 위로 높이 들린 것 같았다. 그리하여 나는 인간이나 귀신의 모든 분노와 적의를 볼 때도 일종의 거룩한 무관심과 흔들리지 않은 평정으로 대할 수 있었고... 내 자신이 보잘것없는 존재임을 깨달음과 동시에 내 영혼이 깊이 낮아짐을 느끼면서 온 인류에 대한 긍휼과 사랑이 느껴졌다. 이 세상의 모든 즐거움과 고민이 아무것도 아닌 듯이 보였다... 그분이 내게 가깝다는 것과 그분이 나를 귀히 여기신다는 것도 느껴졌다. 내 가슴과 영혼은 온통 사랑이 되어 그리스도께 흘러나갔으며 또한 그렇게 그리스도의 가슴에서 내 가슴으로 천국의 거룩한 사랑이 계속 흐르고 흘렀다. 내 영혼은 천상낙원에 있었다. 내 영혼을 충만히 채워 주는 순결한 기쁨이었고 단절이 전혀 없는 쾌락이었다. 이기심이나 사사로운 이기적 타산이 그토록 완전히 없어진 경험은 처음이다. 자아가 완전히 해결된 느낌이었다. 나에 대한 세상의 시선이 아무것도 아닌 듯 느껴졌다. 내 이득과는 상관없이 오히려 내가 한번도 본 적이 없는 다른 이들의 유익을 챙겨야 할 것 같았다. 하나님의 영광이 내 심령의 모든 소원과 열망을 삼켜버린 듯했다.
사라의 간증처럼 그것은 정말로 실효가 있을까? 그리스도를 기뻐하면 정말로 내 실패를 이길 수 있을까? 내 삶은 변할 수 있을까? 내가 살고 있는 정욕과 탐심과 교만과 시기와 수치의 도랑에 정말 근본적인 차이를 가져올 수 있을까? 물론이다. ‘오!’가 바울과 모세의 삶을 어떻게 송두리째 바꿔놓았는지 살펴본다면, 그들이 더 낮은 쾌락을 거부한 것은 순전히 더 높은 쾌락을 갈망했기 때문임을 알게 될 것이다. 프랑소와 모리악은 <내가 믿는 것>이라는 제목의 간단한 회고록 속에서 순결함을 구하는 이유는 하나뿐이라고 결론짓는다. 예수께서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라고 하신 말씀 속에 있다는 것이다. 순결이란 더 높은 사랑의 조건이며 모든 부를 능가하는 부요 곧 하나님 자신이다.
6. 예수님을 바라보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회심한 지 얼마 안 돼서부터 히브리서 12장 1-3절을 암송한다.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
내 경험상 어디를 가든 그리스도인들은 두 가지 고충을 토로한다. 하나는 죄의 얽어매는 거미줄을 벗어날 능력이 없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경주를 그만두고 싶은 유혹을 강하게 느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을 생각할” 때만 해결 가능하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어떤 면을 ‘바라보고’ ‘생각해야’ 할까? 그것은 보좌에 앉으신 예수님이나 기적을 행하시는 예수님이 아니다. 바리새인을 책망하거나 무화과나무를 저주하거나 귀신을 쫓아내시는 예수님도 아니다. 그것은 죄인들한테 당하는 고난과 수치를 기꺼이 받아들이시는 그분의 모습이다. 예수님의 고난에 대한 묵상은 우리 영혼을 들어올려 변화시키는 강한 힘이 있다. 우리가 그분의 고난에서 힘과 위로를 얻는 것은 우리의 충만한 기쁨과 영원한 즐거움이 바로 그것을 통해 확보됐기 때문이다.
그분은 우리에게 당한 고통이나 유혹의 힘을 아신다. 이것은 그분이 공감하실 수 없는 것이 없음을 일깨워 주는 대목이다. 나아가 고난받는 예수님을 바라볼 때 우리는 성령께 전적으로 의존하여 사는 인생의 모델을 본다. 예수님의 고난은 아버지를 향한 그분의 믿음을 가장 확실히 보여 준다. 결국 죄가 패한다는 희망을 우리에게 준 것은 그분의 고난이다. 그 고난을 통해 우리는 우리를 향한 그분의 깊은 애정을 보고 느낀다. 그토록 순결하고 자상하고 친절하고 자비로운 분께서 우리를 위해 그렇게 많은 수모를 견디셨는데 어떻게 계속 죄를 짓거나 경주를 포기할 생각을 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떤 동기로 고통과 수치를 자원하여 견디셨을까? 기쁨이다. 예수께서 묵상하신 기쁨, 그것은 곧 하나님의 오른편으로 높이 들려지는 기쁨이었다. 포기하지 않도록 그분의 영혼에 힘을 준 것은 약속된 기쁨이었다. 그 기쁨이 갈보리 저편에서 그분을 기다리고 있었다. 또한 그 기쁨은 많은 아들딸들을 영광으로 불러들일 때 그분이 체험하실 기쁨이었다. 그러므로 경주에 이기는 길은 곧 그런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지독하게 방해하는 적이 두 가지 있다. 바로 율법주의와 금욕주의다. 이들은 그리스도의 몸에 상습적으로 침투해 기력을 쇠진시켜 불행에 빠뜨리는 치명적 바이러스다. 이에 대한 바울의 반응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바울은 이러한 가르침을 하는 사람들을 이단이라고 지적하며 “위에 것을 찾으라”고 호소한다. 그 이유는 거기가 그리스도께서 계시는 곳이기 때문이다. 하늘의 매력은 곧 예수님의 임재다. 물론 그는 육체와 세상의 일시적 유혹을 멀리하라는 권고도 빼놓지 않지만 그것은 순서상 뒤에 나온다. 누군가를 본다는 것은 곧 상대처럼 되는 것이다. 예수님처럼 되는 것은 예수님을 바라보는 삶의 열매다.
예수님을 바라보면 우리 영혼의 중심에 내적 변화가 일어난다. 이 변화란 우리가 생각하고 느끼고 선택하는 방식이 달라진다는 뜻이다. 이 변화가 단번으로 영원한 효력을 발해 매일의 싸움이 아주 끝난다면 얼마나 좋으랴만은 그것은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이 아니다. 이 성화의 체험은 점진적인 것이다. 한 단계의 영광에서 다음 단계의 영광으로, 그리고 마지막날 보게 될 부활하신 예수님의 최후의 영광으로 데려간다. 그러므로 그분 안에 소망을 가지고 살아갈 때, 마침내 주님과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보는 순간 우리는 온전히 성화된다.
선지자 이사야는 하나님의 지엄하신 거룩함을 만났다.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한” 것을 보았다. 하나님이 성전에 나타나시자 문지방의 터가 요동했다고 되어 있다.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사실은, 지금은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것이다. 동일한 하나님이 우리 안에 살고 거하시는 성전이다. 이사야는 그 순간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그는 무너져 내렸다. 왕이신 하나님의 찬란한 순결과 초월 앞에 못 견딜 만큼 불의한 자신의 실상을 보았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놀랍게도 자신의 죄성과 파멸에 대한 그의 갑작스런 인식은 입술과 연결된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그의 삶에 한 점 두려움이나 염려가 없었던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혀의 사용이었다. 그러나 그가 맨 처음 느낀 것은 자신의 입술의 죄였다. 이사야는 바닥을 기고 있었다. 체내의 모든 신경 섬유가 떨고 있었다. 그는 숨을 곳을 찾았지만 숨을 곳이 없었다. 그러나 여기 복음의 기쁜 소식이 있다. 무한히 거룩한 하나님은 은혜와 자비의 하나님이기도 하다. 이사야의 입술에 숯이 닿았다는 사실은 “필요가 고백된 부분에서 하나님이 죄인을 도우신다”는 원리를 보여준다.
하나님의 거룩함을 보는 체험의 실제적 의미는 굉장하다. 인격의 변화는 자신의 죄의 흉측함이 아니라 구주의 아름다움을 볼 때 나타나는 결과다.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깨달음은 필연적으로 자아의 실상에 대한 깨달음으로 이어진다. 이것을 존 캘빈보다 설득력 있게 표현한 사람은 없다. “먼저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 그 다음 그분을 묵상하는 자리에서 자신을 살피는 자리로 내려오지 않는 한 아무도 자기 자신을 정확히 알 수 없다. 명백한 증거를 통해 자신의 불의와 더러움과 어리석음과 부족함을 깨우치기 전에는 누구든 언제나 자신이 의롭고 정직하고 현명하고 거룩해 보이기 때문이다. 이 교만은 모든 인간의 본능이다.”
7. 마음을 사로잡는 예수님의 아름다움
아름다움이란 무엇이든 경이와 놀람으로 우리를 숨가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름다움이란 본질상 도덕적인 것일 수도 있다. 아울러 영적 차원도 있다고 나는 믿는다. 예컨대 친절과 겸손과 밝은 마음씨와 긍휼과 성실과 너그러움과 기쁨과 인내와 이해심과 충성심과 자비와 용서와 능력과 사랑과 자상함은 모두 아름다움의 자질이며 그 모두가 한 사람 안에 있을 때 특히 그렇다!
예수님의 아름다움을 말할 때 그것은 외모와 전혀 무관하다. 예수님이 아름다운 것은 우리가 친구에게 바라는 모든 것을 그분이 완벽하게 구현하셨기 때문이다. 그분은 인간이 구세주에게 기대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표출하셨다. 그분의 아름다움은 거기서 나온다. 그분 안에 있는 것이 너무 완벽하기에 다른 모든 것은 불품없고 뒤틀어지고 부끄럽고 역겨워 우리의 헌신과 사랑을 받을 가치가 없는 것으로 비칠 수밖에 없다.
‘거룩함’이란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전 존재를 음미하는 것이다. 먼저, 성육신 행위에 나타난 예수님의 아름다움을 잠시 음미해 보자. 성경의 여러 본문에 그 개념이 등장한다. ‘육체로 오신 자’, ‘육신의 모양으로 보냄받은 분’, ‘육체의 고난을 받으신 분’,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신 분’, ‘원수 된 것을 육체로 폐하여 화평케 하신 분’,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신 분’,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 성육신 교리는 예수라는 한 인격 안에 두 개의 다른 성품(신성과 인성)이 하나로 연합돼 있다는 뜻이다. 예수님은 두 인격(신과 인간)이 아니다. 그분은 한 인격 즉, 신인(神人)이다. 일단 육신이 된 말씀은 영원히 육신이 되었다. 지상 생활과 죽음과 부활 후에도 예수님은 육신을 벗지 않았다. 그분의 인간 신분은 끝나지 않았다. 하나님 아버지 우편에 계신 그분은 지금도 인간인 동시에 하나님이시다. 그분은 언제나 신인이다.
그리스도의 인성의 아름다움을 묵상해 보자. 그분은 얼만큼까지 인간적이었을까? 성경은 그분의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분은 하나님의 뜻에 자기 뜻을 굽히셨다. 아버지의 손에 자기 영혼을 부탁하셨다. 그분은 긍휼과 사랑과 분노와 기쁨을 느끼셨다. 맥스 루케이도의 표현을 빌자면, “전능자가 한순간 몸이 상할 수 있는 자가 됐다. 영이신 분이 창에 찔릴 수 있는 자가 됐다. 우주보다 크신 분이 태아가 됐다...”
예수님을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들에게 그는 말한다. “이것은 우리가 좋아하는 일이 아니다. 불편한 일이다. 성육신에서 인성을 빼는 것이 차라리 훨씬 쉽다. 말구유 주위에 말똥도 없게 하라. 그분의 눈가에 땀도 없게 하라. 코를 풀거나 망치로 손가락을 친 적도 없게 하라. 그러면 그분을 소화하기 쉽다... 그러나 그분의 신성만 내세우면 그분은 멀어지고 정답에 갇히고 뻔해진다. 그러니 그러지 말라. 하늘이 두 쪽이 나도 그래서는 안 된다. 본인이 원하신 만큼 그분을 인간으로 두라. 세상의 진흙과 오물 속에 들어오시게 하라. 우리가 그분을 들어오게 해드려야만 그분이 우리를 끌어내실 수 있다.”
한편 그리스도의 신성의 아름다움을 묵상하기에 요한계시록보다 좋은 곳은 없다. 그분의 발은 주석 같았고 그분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 같았다. 검은 그분의 손에 있지 않고 입에서 나왔다. 그분이 발하시는 말씀을 염두에 둔 것이다. 검의 좌우에 날이 서 있다는 것은 생명 아니면 심판을 가져다 주는 복음을 지칭한 것이다. 그분의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취는 것 같았다. 생전에 변화산에서도 그분은 비슷한 모습을 보인 적이 있었다. “그 얼굴이 해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더라.”
조나단 에드워즈는 그의 일기 속에서 그리스도를 ‘우리의 영혼의 갈망을 채울 유일한 분’으로 묘사하고 있다. “예수님, 오직 예수님만이 참으로 아름답다. 지친 영혼들도 그 끝없는 아름다움을 한번 보면 더 이상 딴 데 기웃거릴 필요 없이 거기서 마음의 안식을 얻는다. 우리는 그분 안에서 초월적 영광과 말할 수 없는 감미로움을 본다. 여태 자신이 좇은 것은 그림자였고 이제야 실체를 찾았음을 깨닫는다. 여태까지는 개울에서 행복을 구했으나 이제 대양을 찾았음을 깨닫는다.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은 영혼의 본능적 갈망을 채워 주되 넘치도록 충만하게 채워 준다. 그것은 인간의 마음이 갈망하는 무한의 아름다움이다... 거기에는 한계가 있을 수 없다. 뭔가를 새롭게 발견할 때마다 그 아름다움은 매혹을 더한다. 끝이 없다. 한없이 깊어지면서도 결코 바닥에 닿지 않는 공간이 있다. 그 아름다움을 처음 볼 때 영혼은 기쁨이 넘친다.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은 언제나 신선하고 새로우며 천년만년이 지나도 첫 순간 때처럼 충만한 기쁨을 준다.”
8. 금식 중에는 무엇을 먹을까
내 영혼을 어디에 두어야 그 아름다움을 볼 수 있으며, 와서 마시라고 나를 부르는 ‘기쁨의 강’에서 그 하나님을 만날 것인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얼마든지 다양할 수 있으나 여기서는 세 가지 길만 생각해 보고자 한다. 하나님의 충만함을 받을 수 있도록 내 영혼을 녹이고 내 심령을 넓히는 가장 효과적인 길을 생각할 때 마음에 떠오르는 것은 금식과 묵상과 예배이다.
마태복음 6:16-18에 보면 예수님은 두 번이나 “금식할 때 너희는...”이라고 하셨다. 마태복음 9:14-17에서는 제자들이 금식하지 않는 이유를 바리새인들이 묻자 예수님은 지상에서의 자신의 물리적 임재의 관점에서 설명하셨다.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그러므로 금식은 동경과 갈망의 시간이다. 신랑이 더 이상 지상에 몸으로 우리와 함께 없을 때는 금식함이 마땅하다. 이 시대의 모든 그리스도인 안에는 아픔과 일종의 향수가 있다. 예수께서 우리가 바랄 때마다 친밀하고 강하게 가시적으로 직접 우리 곁에 계시지 않기 때문이다. 금식의 이유가 거기 있다. 언젠가 그분이 우리 곁에 몸으로 계실 것을 우리는 안다.
이런 점에서 금식과 주의 성만찬 사이에 놀라운 유사성이 있다. 성만찬이 시간을 되돌리는 잔치라면 금식은 시간을 내다보는 잔치다. 떡을 떼고 잔을 마실 때 우리는 주님의 역사적 즉, 과거의 희생 행위를 ‘기념하는’ 것이다. 이렇듯 먹고 마심으로 우리는 그 대속의 죽음과 영광스런 부활의 완성성과 충족성을 기뻐한다. 반면 매일의 식사가 제공되는 식탁을 외면할 때 우리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한 깊은 사모의 마음을 선포하는 것이다.
우리가 금식함은 음식 이상의 것을 원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당분간 음식을 거부함은 훨씬 더 맛있는 것, 훨씬 더 만족스러운 것으로 자신을 채우기 위해서다. 다시 말해 우리가 음식의 욕구를 억제하는 것은 더 소중하고 영원히 가치 있는 것에 대해 더 강하고 깊은 욕구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예수를 더 많이 경험하는 쾌락과 그분의 강력한 임재의 계시를 위해 금식한다.
나는 성경에서 금식의 15가지 이유를 찾아냈다. 첫 번째, 금식은 자기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과 화를 돌리기 위해 시행됐다. 두 번째, 하나님의 보호와 축복을 구하는 의미로 전쟁 준비 때 자주 금식했다. 세 번째, 금식은 개인적 난관과 압제에서 하나님의 구원과 도움을 구하는 한 방편이었다. 네 번째, 금식은 죄에 대한 진심에서 우러난 회개와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의 표현일 때가 많았다. 다섯 번째, 금식은 애도, 비탄, 깊은 비애, 슬픔의 표시이기도 했다. 여섯 번째, 에스라는 하나님께 안전한 여정을 구하며 금식했다. 일곱 번째, 금식은 하나님의 일이 형통하도록 관심을 표명하는 방편이다. 여덟 번째, 금식은 우리의 행복이 얼마나 외적인 식도락에 의존해 있는지 보여 줌으로 우리를 낮추고 꾸짖는다. 아홉 번째, 금식은 우리에게 절제와 자기 훈련을 가르친다. 열 번째, 금식은 영적 전투의 막강한 무기다. 열한 번째, 금식은 우리 영의 귀를 열어 하나님의 음성을 분별하게 한다. 열두 번째 금식은 우리의 중보기도를 민감하고 강하게 해준다. 열세 번째, 금식은 예배다. 열네 번째, 금식은 어려운 자들을 향한 우리의 나눔과 긍휼의 표현이 될 수 있다. 열다섯 번째, 금식은 잔치다!
웨슬리 듀얼은 이렇게 말한다. “성경적 의미의 금식이란 음식의 섭취를 거부하되 영적 갈급함이 너무 깊거나 중보기도의 결의가 너무 강하거나 영적 전투가 너무 치열해 신체적 필요마저 잠깐 제쳐두고 기도와 묵상에 임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위선자처럼 되지 말라고 경고하신다. 위선자란 금식 같은 영적 훈련을 남에게 보이려고 행하는 자들이다. 그렇다면 은밀한 중에 계신 하나님 눈에만 띄는 것이 우리의 동기일 경우 그분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보상은 무엇인가? 그분의 응답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해 확보된 축복을 더 많이 주시는 것이다. 그분의 보상은 그분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구하는 기도에 응답하시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은 몸의 치유나 인도 등 다른 것들도 주실 수 있고 실제로 주신다. 그러나 금식의 결실 중 으뜸은 하나님의 이름이 높아지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케 해달라고 청하라. 그분의 부양과 공급과 원조를 간구하라. 그리고 마침내 금식이 끝나거든 하나님이 공급하신 음식을 즐기며 모든 좋은 것을 주신 그분께 감사하라.
9. 지성의 쾌락
시편 기자는 죄짓지 않는 길 즉, 무엇보다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길은 곧 그분의 말씀을 마음에 두는 것이라고 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간직한다는 것은 묵상의 한 단면이다.. 단순히 말씀을 ‘고백’하는 정도가 아니라 ‘마음에 둔다’는 것은 말씀의 진리에 최고의 가치를 두고 그것을 값지고 소중하고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아끼며 암송과 묵상을 통해 섭취하여 우리의 영적 혈관에 자유로이 흐르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될 때 성령님은 우리가 말씀의 명대로 믿고 행하도록 힘을 주신다. 묵상이 없다면 신자들은 자녀로서 누릴 수 있는 하나님과의 교제의 깊이를 절대 온전히 소화해 체험할 수 없다.
묵상은 말씀을 생각하는 데서 시작한다. 제대로 묵상하려면 마음이 섭취한 것을 영혼으로 반추하고 영혼이 깨달은 것을 가슴으로 기뻐해야 한다. 하나님이 말씀 속에 계시해 주신 내용을 천천히 읽고 기도로 섭취하고 겸손히 의지하는 것이 바른 묵상이다. 물론 그 모두는 내면에 힘 주시는 성령의 역사에 의식적으로 의존하는 가운데 진행돼야 한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앉아 계시는 곳인 ‘위에 것을 찾는’ 한 방편이다. 묵상이란 우리 마음과 하나님의 의식적, 지속적 만남이다. 이렇게 마음이 새롭게 됨은 하나님의 말씀이 깨우침의 빛과 변화의 능력으로 우리 심령과 영혼을 꿰뚫는 과정의 일환이다. 돈 휘트니는 그것을 차(茶)의 비유로 설명했다.
“우리는 한 잔의 뜨거운 물이요 말씀의 섭취는 차 봉지와 같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차 봉지를 잔에 한 번 담갔다 빼는 것과 같다. 차 향기가 물에 조금 퍼지지만 봉지를 흠뻑 적실 때만큼 강하지는 않다. 이 비유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공부하고 암송하는 것은 차 봉지를 연거푸 잔에 넣었다 뺐다 하는 것에 비견된다. 차가 물 속에 들어가는 횟수가 잦을수록 맛이 진해진다. 그러나 묵상이란 차 봉지를 푹 담가 두어 맛을 우려내는 것이다. 그윽한 차 향기가 모두 추출돼 뜨거운 물에 불그스름한 갈색이 짙게 돌 때까지 말이다.”
묵상의 가치를 알려면 먼저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이 우리의 사고와 감정과 행동 방식을 변화시키는 능력을 알아야 한다. 성경이 - 오직 성경만이 - 우리 삶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길들을 잠시 생각해 보라. 우선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께서 인간 심령을 중생케 하시는 방편 내지 도구다. 베드로는 우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고 말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은 믿음의 물줄기가 솟아나는 샘이기도 하다. 기쁨과 희망과 평안이 솟는 것도 성경을 통해서다. 그리스도의 몸(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지속적인 기적의 역사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한 것이다. 우리에게 은혜로 성령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며 성령의 이 새로운 공급은 기적으로 표현되는데, 이 때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도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경험하는 우리의 믿음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우리의 생각과 심령은 하나님 중심이 된다. 우리의 초점은 그분의 영광에 있고 그리하여 그분의 위대하심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넓어지고 깊어진다. 이 모두가 초자연적 씨앗이 뿌려지는 토양이 된다. 말씀 없이는 진정한 믿음이란 존재할 수 없으며 믿음 없이는 기적이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 묵상’의 능력이 시편 19편보다 잘 나타난 곳은 없을 것이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규례는 확실하여 다 의로우니”. 그렇다.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마음에 두면 이처럼 ‘큰 상’이 있다.
피조 세계의 묵상이나 하나님과 그분이 하신 일의 묵상도 마음을 바꿔놓는 체험이 될 수 있다. 내 심령에 비상이 필요하고 내 마음에 죄를 거부할 에너지가 부족할 때, 나는 시편 145편을 즐겨 읽는다. “중생의 눈이 주를 앙망하오니 주는 때를 따라 저희에게 식물을 주시며 손을 펴사 모든 생물의 소원을 만족게 하시나이다”. 우리가 묵상하는 하나님은 의로운 하나님이며 인자하심이 크신 하나님이다. 높으면서 겸손하신 분, 강하면서 민감하신 분, 의로우면서 은혜로우신 분, 능력이 많으면서 자비로우신 분, 권위가 있으면서 자상하신 분, 거룩하면서 용서하시는 분... 그분은 기도에 응답해 일하시는 하나님이다.
동양 명상은 세상을 초탈의 대상이라 주장한다. 기독교의 묵상은 하나님을 애착의 대상으로 삼는다. 신자들이 세상의 혼란과 유혹을 멀리한다면 그것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을 가까이하기 위해서다. 동양 명상은 자기만의 현실을 창조하기 위한 시각화를 주장하지만 기독교의 묵상은 하나님께서 이미 창조하신 현실을 시각화하는 것이다. 동양 명상은 ‘신’과의 형이상학적 합일을 주장하지만 기독교 묵상은 하나님과 영적 교제를 나누는 것이다. 동양 명상은 자기 존재의 근원을 찾기 위한 내면의 여정을 강조하시만 기독교 묵상은 성경과 피조 세계에 객관적으로 계시된 하나님께 초점을 둔다. 동양 명상은 신비적 황홀경을 노력의 목표라 주장하지만 기독교의 묵상은 인격의 변화를 노력의 목표로 삼는다.
당신의 묵상을 시작하기에 도움이 될 만한 내용을 간략히 소개한다. 첫째, 마음속에 하나님의 임재를 되새기는 것으로 준비한다. 둘째, 말씀을 정독한다. 셋째, 본문의 진리에 상상력과 오감을 동원하여 상상한다. 넷째, 말씀의 진리를 깊이 묵상한다. 다섯째, 기도로 하나님께 반응하는 시간을 갖는다. 여섯째, 개인화한다. 일곱째, 찬양한다. 여덟째, 말씀이 명하는 일을 최선을 다해 실천한다.
10. 하나님을 만끽하라
예배란 내 즐거움의 문제가 아니다. 내가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이다. 예배란 내 쾌락, 내 기쁨, 내 만족의 문제가 아니다. 내가 하나님 안에서 쾌락과 기쁨과 만족을 누리는 것이다. 예배란 단순히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을 영원히 즐거워함으로 그분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당신이 단지 도덕적 의무감 때문에 하나님을 예배한다면 하나님은 차라리 당신이 아예 예배하지 않기를 원하실 것이다.
물의 가치를 높이는 것은 무엇인가? 사막의 오랜 여정 끝에 마침내 오아시스에서 엎드려 물을 마시는 사슴인가? 아니면 사막에서 간절히 물을 그리워하는 사슴인가? 둘 다다. 사실 마시는 것이야말로 물의 가치를 높이는 가장 확실한 최선책이나, 물가에 다다를 때까지는 계속 갈급함을 잃지 말라. 와서 하나님을 예배하며 예수님 안에서 당신을 위한 그분의 전 존재의 충만한 부를 만끽하라. 아직 그분을 즐거워하지 못하는 상태라면 여기 몇 가지 실제적 조언이 있다.
첫째, 기쁨 없는 죄를 고백하라. 존 오트버그는 기쁨이 없는 상태는 ‘심각한 죄’라고 말했다. 당신의 차갑게 식어 버린 심령을 인정하라. 기분이 중요하지 않은 척하지 말라. 당신의 기분은 중요하다. 당신에게만 아니라 특히 하나님께 중요하다.
둘째, 하나님의 광채와 아름다움과 위엄과 달콤함, 그리고 모든 것을 채우시기에 충분한 그분의 선하심을 계시해 달라고 기도하라. 당신을 인해 즐거워하시는 아버지의 크고 우렁찬 노랫소리가 들리도록 당신 영혼의 귀를 열어달라고 성령님께 기도하라. 산 자의 땅에서 주님의 선하심을 다시 볼 수 있도록 영혼의 눈을 뜨게 해달라고 성령님께 기도하라.
셋째, 성경 읽기와 기도, 성찬식 참여, 지난날 하나님의 사랑스런 손길들의 기억, 십자가 묵상,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이들과의 교제 등 당신의 기쁨을 되찾기 위해 성경에 나와 있는 여러 조치들을 취하라.
넷째, 지옥을 생각하라. 조나단 에드워즈의 개인적 결단에는 이런 내용이 포함돼 있다. “고통을 느낄 때면 순교의 고통과 지옥의 고통을 생각하기로 결단한다.” 우리가 은혜로 건짐받은 그 지옥의 고통을 잠깐만 묵상해도 기쁨과 감사가 커지고 깊어지는 것을 보며 당신은 놀랄 것이다.
다섯째, 어쨌든 그분을 찬양하라. 내면의 기쁨을 다시 불붙여 줄 것이라는 소망과 기대와 기도로 당신의 본분의 외면적 차원에 충실하라. 당신의 마음과 영혼이 하나님을 향한 열정과 그분의 임재의식으로 뜨겁게 불타던 지난날을 떠올려 보라.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위선이 아니다. 내적 기쁨을 찾으려는 희망에서 나온 외적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내적 기쁨의 대용품도 아니고 마음에도 없는 것을 남들로 믿게 만들려는 위장도 아니다.
결론적으로, 예배할 때 교만하게 감히 뭔가 드리려는 자세로 하나님께 나오지 말라. 겸손히 받으려는 자세로 나오라. 하나님은 언제나 갈급한 심령을 채워 주신다.
11. 섹스 & 온전한 성품
성적 순결에 대해 말할 때 가장 중요하게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이 우리 편이라는 사실이다. 사람들은 섹스에 관한 한 흔히 하나님을 자신의 적으로 간주한다. 이런 오해는 우리의 상황이 절망적이라는 생각을 굳혀 주고 우리를 그분의 품에서 더 멀리 몰아낼 뿐이다. 그분의 사랑과 지원과 인정만이 우리를 이 육신과의 전쟁에서 이기게 할 수 있는데도 말이다. 우리의 성적 만족을 하나님보다 더 원하시는 이는 없다. 그 진리를 받아들여야 한다. 하나님은 당신의 성공과 거룩함에 필요한 모든 것을 마련해 놓으셨다.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의 아내 취할 줄을 알고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과 같이 색욕을 좇지 말고 이 일에 분수를 넘어서 형제를 해하지 말라...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케 하심이 아니요 거룩게 하심이니 그러므로 저버리는 자는 사람을 저버림이 아니요 너희에게 그의 성령을 주신 하나님을 저버림이니라.”
우리의 거룩함을 향한 아버지의 심정을 들어보자. “나는 네가 온전한 성적 환희를 체험함으로 기쁨과 만족을 누리기 원한다. 아담에게 하와를 데려갈 때 내가 의도했던 신체적 정열을 네가 만끽하기 원한다. 네 즐거움을 위해 내가 만든 것을 왜곡하고 변질시킴으로 기회를 허비하지 말라.” 인간의 성에 대한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들을 때 나는 그분의 마음의 소원과 갈망을 생각한다. 그분의 가장 귀한 선물 중 하나인 성을 우리가 최대한 즐기기 원하시는 아버지의 열정을 본다. “나는 네가 성적 존재로서 이것을 누리기 원한다. 나는 너를 만든 자다. 네 혼과 몸 안에 성적 충동을 둔 것도 나다. 호르몬도 내가 지었다. 나를 믿어라. 최대의 기쁨과 최고의 쾌락이 어디서 오는지 내가 너보다 더 잘 안다.”
요지는 간단하다. 당신과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언제나 그분의 사랑의 표현이다. 그렇다면 성생활에 있어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바는 정확히 무엇인가? 자기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음란 즉 ‘성적 부도덕’을 삼가는 것이다. 이 단어는 간음, 간통, 동성애 등 모든 형태의 부정한 성생활을 총칭하는 말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혼외 성관계를 가리킨다. 성적인 죄는 더 큰 만족을 빼앗아간다. 그것을 인식하면 성적인 죄를 물리치라는 성경의 권고에 따를 마음이 생긴다.
하나님은 그 자녀들의 마음속에 다각적 기쁨을 깊이 만끽하는 능력을 주셨다. 신체적 부도덕을 거부하라는 주된 이유는 그것이 그 능력을 갉아먹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 존재를 기뻐하시지만 성적인 죄는 우리 역량을 둔화시켜 그분의 기쁨을 느끼지 못하게 한다. 성적인 죄는 우리에게서 그분의 능력을 고갈시키며, 성령님의 사랑의 접근에 우리 마음을 강퍅하게 만든다.
또한 부정한 성행위는 명백히 타인들에 대한 사회적 불의이기도 하며 나아가 자기 자신도 욕되게 한다. 우리는 그보다 나은 것을 위해 지음받은 존재다. 경계를 벗어나는 다른 방식으로 성적 만족을 구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자로서 자기 존엄성을 더럽히는 것이며 자기 몸에서 하나님이 정해 주신 기능을 빼앗는 것이다. 다른 방식에는 재앙과 불명예와 종종 질병만이 뒤따른다는 것을 하나님은 아신다.
그러나 여기 희망이 있다. 도움이 있다. 거룩함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은 당신과 내가 거룩해지도록 돕고자 성령의 무한한 능력을 공급하신다. 그분은 성령을 통해 언제나 당신 안에 계시며 성적 순결을 택하도록 당신에게 능력을 주신다. 이 말을 읽고 있는 순간에도 하나님의 능력은 죄의 세력을 깨뜨리고자 당신의 마음속으로 흘러들어가고 있으며, 이로서 우리는 온전함을 누리게 된다. 온전함에 대해 내가 제일 좋아하는 성경말씀은 언제나 시편 15편이다.
“여호와여, 누가 주의 성소에 들어갈 수 있으며 누가 주의 거룩한 산에 머물 수 있겠습니까? 정직하게 살고 옳은 일을 행하며 그 마음에 진실을 말하는 자, 남을 비방하지 않고 자기 친구를 해하지 않으며 이웃을 헐뜯지 않는 자, 하나님을 저버린 자를 멸시하며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를 존중하고 한번 약속한 것은 손해가 가도 지키는 자, 돈을 빌려 주고도 이자를 받지 않으며 뇌물을 받고 죄 없는 자를 해치지 않는 자니 이런 자들은 영원히 흔들리지 않으리라”(1-5절).
이 시에서 다윗이 하는 말을 잘못 해석한 사람들이 있다. 다윗은 구원받는 길을 말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구원받는 자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이 도덕 선언은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 조건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받아들여진 결과다. 이렇듯 다윗은 하나님 나라 밖에 있는 자들이 안에 들어가는 데 필요한 조건을 말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 안에 들어온 자들이 그 나라를 즐기는 법을 말한 것이다. 심령이 은혜에 사로잡히고 삶이 은혜로 능력을 입은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의로운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 쉽다. 그리고 분명 우리의 순종은 하나님께 큰 기쁨이 된다.
12. 유혹을 해부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당신은 예수님과 사랑에 빠지면 그것으로 유혹은 끝이라는 인상을 받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의 위엄에 매료되거나 그분의 임재 안에서 더 뛰어난 쾌락을 누린다 해서 영적 각성의 필요성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사단은 본성상 속이는 자, 유혹하는 자요 실제로 그런 일을 즐긴다. 당당히 하나님의 아들과 사랑에 빠지는 자라면 무조건 광분하여 삼키려 드는 것이 사단이다. 실제로 성경은 그를 ‘시험(유혹)하는 자’로 부르고 있다. 누가복음 4:13에 보면 사단은 광야에서 결정적 패배를 당하고도 예수님을 ‘얼마 동안’만 떠났다고 되어 있다. 예수님께도 그랬을진대 우리라고 그보다 덜하리라 생각할 이유가 전혀 없다.
먼저 유혹에 관한 네 가지 기본 진리로 시작하자. 무엇보다 첫째로,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시되(test) 절대로 유혹하시는(tempt) 일은 없다(약 1:13). 하나님의 시험의 목적은 우리를 강건하게 하고 성화시키는 것인 반면 사단의 유혹의 목적은 우리를 기만하여 파멸시키는 것이다. 둘째, 유혹은 거의 언제나 육신에서 시작된다(약 1:14). 우리의 육신은 죄에 불을 지른다. 사단은 그 불꽃에 부채질할 뿐이다. 우리가 먼저 죄를 수락하지 않는 한 사단은 무력하다. 그는 우리의 죄악된 결정을 이용하여 이미 우리 쪽에서 선택한 행동 노선을 굳혀 주는 방식으로 일할 때가 가장 많다.
세 번째 원리는 유혹 자체는 죄가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도 계속 유혹 받으셨으나 죄는 없으셨다. “새가 네 머리 위로 날아가는 것은 막을 수 없지만 네 머리에 둥지를 트는 것은 막을 수 있다”는 마르틴 루터의 말의 요지는 내가 유혹에 동의해 그것을 ‘아끼고 즐길’ 때에만 유혹은 죄가 된다는 것이다. 넷째로, 유혹의 힘은 미덕이 악덕으로 바뀔 정도로 과도히 탐하는 성향에서도 비롯된다. 예컨대 먹는 즐거움이 식탐으로, 휴식의 축복이 게으름으로, 고요한 평화가 대화 단절로, 근면이 탐욕으로, 자유가 방종의 구실로 변하기란 너무 쉽다. 쾌락이 호색으로, 자기 관리가 이기심으로, 자존감이 자만심으로, 현명한 조심성이 냉소와 불신으로, 의분이 불의한 격노로, 섹스의 기쁨이 부도덕으로, 세심함이 완벽주의로 변하는 모습을 우리는 다 알고 있다.
이러한 마귀의 꼬임에 대비하는 길은 많지만 특히 네 가지에 집중하고자 한다. 첫째, 유혹에 맞서는 가장 중요한 전술은 이 책의 핵심 진리를 수용, 추구하는 것이다. 우리 심장이 늘 황홀함으로 박동하고 우리 생각이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광채와 충족성으로 충만할 때 마귀가 발판을 마련할 여지는 거의 없어진다. 둘째, 자신을 알라. 다시 말해 자신의 약점, 취약 지구, 실패 전력이 있는 영역을 신속히 파악한 뒤 특별한 대비책을 세워 향후 자신을 보호해야 한다. 셋째, 죄에 철저히 대처하라. 예수님은 “오른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빼어 버리라. 몸의 한 부분을 잃을지라도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더 낫다”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의 요지는 도덕적으로 냉혹히 자기를 부인하라는 것이다. 그분이 가르치신 거룩함의 길은 사지 절단이 아니라 영적 훈련이다.” 넷째, 막판이 아니라 초반부터 유혹에 맞서 이겨라. 나는 집을 떠나 있을 때 이 원리가 특히 유익함을 깨달았다. 호텔 방에 들기 전 나는 반드시 프론트 직원에게 성인 영화 완전 차단을 요구한다. 당신처럼 나도 육신의 남자이기 때문이다.
13. 모든 죄보다 큰 은혜
하나님의 은혜는 더러운 죄와 악한 사건을 취해 그 더러운 죄의 계보에서 구속자가 세상에 오시는 역사를 엮어낼 정도로 강하다. 인간의 죄는 구속사를 향한 궁극적인 뜻이든 내 삶을 향한 개인적 뜻이든 하나님의 뜻에 전혀 장애물이 못된다. 이제 우리는 이 원리를 개인화하여 내게 적용해야 한다. 악을 만들어내는 당신의 죄의 능력이 선을 만들어내는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보다 크다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 하나님이 계시는 한, 구속과 만회와 회복이 불가능한 일은 없다.
물론 이 은혜는 값없는 것이다. 그러나 언제나 무조건적인 것은 아니다. 선택의 은혜는 무조건적이지만 하나님의 행위와 축복의 많은 부분은 조건적이다. “여호와의 인자하심은(은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미치리니 곧 그 언약을 지키고... 행하는 자에게로다”(시 103: 17-18). 장래의 은혜를 위해 언약을 지켜야 한다는 이 조건은 우리가 안전이나 확신을 잃는다는 뜻이 아니다. 택한 자들 속에 시작하신 일을 하나님이 친히 이루시기로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의 기쁘신 뜻을 위해 소원을 품고 행하도록 우리 안에서 일하신다. 그분은 그분 보시기에 즐거운 것을 우리 속에 이루심으로 언약의 조건을 성취하신다. 그러므로 우리의 안전은 하나님의 신실하심만큼이나 확실하다.
성경에 사용된 은혜라는 단어는 영혼을 회심케 하는 성령의 능력이다. 믿음으로 영혼을 구원하여 의롭게 하는 하나님의 활동 내지 역사다. 따라서 은혜는 단순히 믿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체험하는 것이다. 아울러 은혜는 우리의 영적 삶을 태동케 하는 하나님의 행위일 뿐 아니라 그 삶을 계속 살아가도록 지탱하고 양육하는 능력 자체이기도 하다. 내주하시는 성령의 능력과 성화 사역도 하나님의 은혜다.
바울 서신의 서두 인사말과 마지막 축복에 으레 등장하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언급을 생각해 보자. 예외 없이 서두의 축복은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로 되어 있는 반면 각 편지 말미의 축복은 “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을지어다”로 되어 있어 흥미를 끈다. 왜 그럴까? 파이퍼는 말한다.“편지를 시작할 때 바울이 염두에 둔 것은 그 편지가 독자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의 통로가 되는 것이다. 바울의 글을 통해 은혜가 하나님에게서 그리스도인들에게로 흐를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라고 말한 것이다. 하지만 독자들이 편지를 다 읽은 후에는 그 은혜는 어디 있는가? 이제 은혜는 그들과 함께 있다는 것이 답이다. 이렇듯 우리는 영감의 성경 말씀을 취하여 읽을 때마다 은혜가 우리에게 흐를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성경책을 내려놓고 일상생활로 돌아갈 때면 은혜가 우리와 함께 머문다는 것을 안다.”
마지막으로 은혜라는 단어는 봉사의 능력을 주시거나 특정 직무와 사명에 권한을 부여하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행위를 가리킬 때도 있다. 소위 ‘영적 은사’를 얘기할 때 ‘은혜’라는 말과 그 파생어들이 쓰이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 아니다. 로마서 12:6은 “우리에게 주신 은혜(카린)대로 받은 은사(카리스마타)가 각각 다르니”라고 말한다. 그러면 은혜를 어떻게 받는가? 단순 논리를 펼 생각은 없지만, 구하면 된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것을 이렇게 표현했다.
“우리에게는 하늘로 올라가신 위대한 대제사장이 계십니다. 그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을 굳게 지킵시다. 우리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할 수 없는 분이 아니십니다. 오히려 그분은 모든 점에서 우리처럼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죄는 없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불쌍히 여기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도우시는 은혜를 받기 위하여 담대하게 하나님의 보좌(원문에 은혜의 보좌)로 가까이 나아갑시다”(히 4:14-16).
14. 질투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왜 우리의 거룩함에 신경 쓰시는가? 우리의 거룩함이 그분께 왜 이렇게 중요한가? 어떤 동기에서 하나님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명하시는가? 그분의 영광을 위한 그분의 열정, 그것이 성경이 주는 답이다. 엄청난 오해의 소지를 무릅쓰고 ‘열정’이라는 말을 ‘질투’라는 말로 대치하고자 한다. 하나님이라는 정체의 핵심에 질투가 있다. 질투는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는 결정적 특성 내지 성품이다. 성경에는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기고 사랑해야 할 다른 이유들도 많이 있고 모두 선한 것들이다. 그러나 그중 단연 두드러진 것은 우리 하나님이 자기 백성으로부터 일편단심의 충성과 애정을 얻고자 질투로 불타시는 분이라는 사실이다.
제임스 패커의 설명대로 “하나님의 질투는 흔히 인간의 질투가 그렇듯 좌절, 시기, 앙심의 덩어리가 아니라 오히려... 뭔가 더없이 귀한 것을 지키려는 고결한 열정으로 나타난다. 하나님의 질투는 격정의 에너지다. 하나님이 사랑하고 바라시는 것을 누리지 못하게 가로막는 방해 세력은 누구든, 무엇이든 그분의 질투를 격발하고 자극하여 결국 행동을 취하시게 만든다. 이때 하나님의 분노의 강도는 그분의 사랑의 깊이에 정비례한다. 자기 백성과의 관계에 어떤 라이벌도 용납하실 수 없는 타오르는 불같은 사랑이다.
이 질투 때문에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무엇일까? 고린도후서 2:14의 바울의 말에서 찾을 수 있다.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승리 후 인솔하시고) 우리를 통해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곳곳에 향기처럼 퍼지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여기서 ‘이기다’ 또는 다른 역본에 ‘개선 행진’이라 옮겨진 헬라어 단어(트리암베우오)에 대한 가장 개연성 있는 해석은 이 비유에 사용된 바울의 명백한 역설을 인정하는 해석이다. 하나님은 승리 후 바울을(그리고 그 연장선상에서 바울처럼 복음을 전하는 다른 사람들을) 이끌고 계신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승리 후 누군가의 인솔을 받는다는 것은 포로 신분과 고통을 암시할 수 있다. 서신을 관통하고 있는 ‘약함 중 강함’의 주제가 여기도 등장한다. 하나님은 그를 그리스도 안에서 고난받는 종으로 이끄심으로 오히려 그의 사역에 정통성을 부여해 주신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당하신 수욕이 이 종의 삶에 재현되고 있다.
바울은 선포한다. “질그릇 같은 우리 속에 이 보화를 가진 것은 그 엄청난 능력이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한 것입니다”(고후 4:7).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복음을 ‘질그릇’ 같은 우리 속에 맡긴 이유를 깨닫는 것이다. 찬란한 보화와 볼품없는 질그릇의 이 현격한 대조 뒤에는 한치의 오차도 없는 하나님의 필연적 설계가 깔려 있다. 곧 차고 넘치는 풍성한 능력이 우리 인간에게서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께로서 나온 것임을 보이기 위함이다. 그래서 우리는 약함을 인해서도 기뻐할 줄 알게 된다. 이 진리에는 기쁜 소식이 또 있다. 인간의 약함이 하나님의 목적에 전혀 방해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어떤 약점이 있어도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는 데 위협 요소가 못된다. 오히려 많은 경우 그분의 영광을 더 높여 줄뿐이다!
날마다 바울의 몸에서 일어난 ‘예수님의 죽음’은 괴로움과 난처한 일과 핍박과 수모다. 그가 예수님의 죽음을 견딘 것은 그런 고난에서 구원(‘예수님의 생명’)을 체험하기 위해서였다. 이 ‘죽음’은 끊임없이 계속된다. 호흡이 물리적 생명의 일부이듯 이 영적 죽음은 그리스도인 존재의 일부다. 예수님의 생명이 나타나도록 날마다 예수님의 죽음을 우리 몸에 짊어지는 것이 우리의 영적 생득권이다. 이 모두가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과 우리의 사랑을 위해 불일 듯 질투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존 캘빈의 말처럼, “참되고 신실한 남편의 본분을 다하시는 하나님은 자기 신부, 즉 자기 백성에게서 사랑과 정절을 요구하신다. 영적으로 사단과 음행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가장 조심스럽게 흠없이 보전되어 마땅한 그분의 신성에 대한 예배가 다른 대상에게 옮겨지거나 미신과 혼합될 때 특히 그렇다.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혼인 서약을 파기할 뿐 아니라 부부의 잠자리를 간부들에게 내주어 욕되게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야고보서 4:5은 말한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게 하신 성령은 (우리 마음의 전적인 헌신을) 질투하시기까지 사모하신다.” 성령님은 우리의 일편단심의 애정에 대해 어떤 라이벌도 용납하실 수 없는 질투의 연인이다!
출처 : 비교적 젊은 개혁주의자들의 아지트!
글쓴이 : 하늘형상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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