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박종순 목사설교모음 70편{1}

by 【고동엽】 2023. 1. 14.

박종순 목사설교모음 70편

 

 

3 돌아온 사람들

4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

5 자아관리에 최선을

6 은혜로 사는 사람들

7 한인교회협 정기총회

8 은혜와 삶

9 우울한 사람이 부르는 노래

10 향과 기도

11 기도에 최선을

12 주 밖에 없나이다

13 경배하는 사람들

14 깨어 있으라

15 지키시는 하나님

16 < 예화 > 독소와 해독

17 생명의 면류관

18 최선을 다하는 교회 II

19 최선을 다하는 교회(1)

20 새해를 맞는 마음

21 구원의 우물에서

22 하나님은 나의 구원

23 엎드리는 사람들

24 승리하는 교회

25 던지고 다시 찾는 법

26 물동이를 버린 여인

27 졸지 맙시다

28 제자가 됩시다

29 열납되도록 드립시다

30 마음을 정한 사람들

31 바로 드리는 사람들

32 수년안에

33 나의 삶 속에 평화를

34 원망하는 사람들

35 하나님이 주신 양식

36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사람들

37 풍요로우신 하나님

38 예정에서 영화까지

39 이 성에 유하라

40 그를 힘입어

41 해방된 사람들

42 선택받은 사람들

43 피조물의 탄식소리

44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사람들

45 내 생각을 너희 생각과 다르며

46 건강한 사람들

47 단비를 주소서

48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

49 나와 내 집이 사는 길

50 가면서 전파하라

51 물고기 뱃속에서 드린 기도

52 저주받은 도시들

53 한나의 성공비결

54 어떤 부자의 일생

55 하나님이 주신 기업

56 실패에서 성공으로

57 배가 되기 위하여

58 사는 길로 인도 합시다

59 확실한 증거들

60 나의 객실이 있느냐

61 은혜를 크게 받은 사람

62 차고 넘치는 교회

63 나중까지 견디는 사람들

64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65 전진합시다

66 빛이 있으라

67 실패한 관리자들

68 하나님의 대사들

69 칭송하며 선포하며

70 세째 하늘에 이끌려 간 사람

 

 

1

 

3

제목 : 돌아온 사람들

자료원 : 박종순목사 충신교회

 

누가복음 24장은 주님이 부활하신 후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일어난 사건들

을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13-35절은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

로 내려가던 두 제자가 길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부활신앙을 회복한 뒤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두 제자의 행보 속에서 몇가지 산교훈을 발견하게 됩니다.

 

1. 두제자의 잘못을 살펴보겠습니다.

 

두 제자의 이름이 명기되어 있지 않은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열두사도 중의

두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가까이서 따르고 모셨던 사람들

이었음에도 틀림이 없습니다. 그들 두 사람의 행보는 다음과 같은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곧 오늘 나의 잘못인 것입니다.

 

(1) 삶의 현장을 떠났습니다.

 

그들이 일하던 곳,다른 제자들과 함께 어울려 살던 예루살렘을 떠났습니

. 13절을 보면 "그날에"라고 했습니다.

그 뜻은 부활하신 그날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로 내려갔다는 것입니다.

너무 성급하게 조급하게 떠난 것입니다.

우리는 세가지를 경계해야 합니다. 그것은 방관주의, 회피주의, 도피주의

입니다. 방관은 무관심이고, 회피는 편의주의이며, 도피는 적극적 외면이며

부인입니다. 세가지 다 나쁜 것입니다. 가령 두 제자가 한달 정도 예룻라렘

에서 고통받아가 떠났다면 이해가 가능합니다만 그러나 그날 더우기 부활의

소식이 퍼져나가고 있는 예루살렘을 떠난 것은 제아무리 미화하고 호평을

한다해도 이해되지 않는 처사였습니다. 현대 크리스챤의 특징은 방관자,

피자, 도피자라는 것입니다. 필요하면 내밀고, 불리하면 움츠리는데 익숙합

니다.

떠나면 안됩니다. 부활의 현장인 예루살렘을 떠났다는 것은 그들의 믿음이

떠났다는 것을 뜻합니다. 떠나면 안됩니다.

 

(2)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에게 주님이 나타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

수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16절을 보면 '저희 눈이 가리워져서 그인줄 알

아보지 못하거늘"이라고 했습니다.

뇌에 충격을 받거나 손상을 입으면 기억상실증에 걸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의 경우는 사흘 전까지 곁에 있었던 예수를 알아 보지 못했

습니다. 한마디로 비극입니다. '눈이 가리워졌다'는 것은 신령한 것과 신령

한 세계를 보는 눈이 어두워졌다는 것입니다.

안과의사들은 사람 눈에 발생할 수 있는 질환이 수십가지라고 말합니다.

그 가운데 가장 심각한 질환은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보지 못하는

질환 가운데 가장 큰 질환은 신령한 것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람에겐 네 개의 눈이 필요합니다.

하나는 사물을 보는 눈입니다.

산을 보고, 사람을 보고, 하늘을 보는 눈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 눈이

대기오염과 텔레비젼 시청 등 물리적인 원인에 의해 점점 어두워지고 있스

빈다.

둘은 이웃을 보는 눈입니다.

이 눈은 정신의 눈이며, 연민의 눈이며, 사랑의 눈입니다. 그런데 이 눈도

병들어가고 있습니다. 이웃은 보이지 않고 나만 보는 눈으로 병들어가고 있

습니다. 이웃은 보이지 않고 나만 보는 눈으로 병들어 가고 있고, 좋은 점

은 보이지 않고 허물만 약점만 보는 눈으로 병들어 가고 있습니다.

셋은 세계를 보는 눈입니다.

인간의 눈 자체의 가시거리는 그리 멀지 않습니다. 천리안이라는 말이 있

긴 합니다만 천리를 보는 눈은 없습니다. 그러나 보조장치를 이용하면 아

메바도 볼 수 있고 월세계도 볼 수 있고, 사람의 위장도 들여다 볼 수 있습

니다.

사람에겐 세계를 보는 눈이 있습니다. 세계란 넓고, 크고, 깁니다. 모든

것을 포용하고, 통합하고, 이해하는 것이 세게를 보는 눈입니다. 그런데 우

리네 눈은 좁고 침침합니다. 나 밖에 모르고 우리 밖에 모릅니다.

TV 토크쇼를 진행하는 사회자이 말이 생각납니다.

"요즘 세계화가 한창 강조되고 있습니다만 한국사람에 세계화 되는 것이

빠를런지, 세계를 한국화 하는 것이 빠를지 얘기해 봐야 될 것같습니다."

고 했습니다.

세계화 수용 태세가 덜 됐다는 뜻일 것입니다. 세계를 보고 역사를 보고

미래를 보는 눈이 필요합니다.

넷은 하나님을 보는 눈입니다.

이 눈은 믿음이라는 보조 수단이 없는한 보이지 않는 눈입니다. 그리고 성

령님의 도우심을 받아야 하나님을 보는 눈입니다.

"어두운 내 눈 밝히사 진리를 보게 하소서.

진리의 열쇠 내게 주사 참빛을 찾게 하소서

깊으신 뜻을 알고자 하소서 성령이여"아멘

그런데 현대인은 그 눈이 점점 어두워가고 있습니다.

중세기는 천주교의 교리와 성물숭배가 믿음의 눈을 어둡게 했습니다.

때를 암흑기라고 부릅니다. 21세기는 인간의 지식과 과학문명이 하나님을

보는 눈을 가리고 있습니다. 영적 암흑기에 접어들고 있습니다. 두 제자의

경우 신령한 눈이 어두워졌기 때문에 곁에 계시는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습

니다.

 

(3) 말씀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길 가면서 그들은 예수님과 이야기를 주고 받았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풀

어주는데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정상적인 인격을 가진 사람이라면 네 가지

단계의 결단이 필요합니다.

첫째는 듣는 것이고, 둘째는 느끼는 것이고, 셋째는 깨닫는 것이고, 넷째

는 실천하는 것입니다. 듣긴 듣는데 느낌이 없다든지 느끼긴 하지만 깨달음

이 없다든지 깨닫긴 했는데 실천이 없다면 인격을 갖춘 사람이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두제자가 말씀을 깨닫지 못한 원인을 25절이 밝혀주고 있습니다. "미련하

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이란 예수님의 부활을 예언한 선지

자들의 예언을 의미합니다. 그 예언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예수

님의 말씀도 믿지 못한 것입니다.

다시말하면, 구약을 믿지 못하는 사람은 신약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믿

는 일에 익숙한 사람은 무엇이나 잘 믿습니다. 그러나 안 믿고 의심하는데

길들여진 사람은 무엇이나 안믿고 믿지 못하빈다.

안믿기로 작정한 사람은 예수님이 직접 말씀을 하셔도 믿지 못하는 것입니

.

 

(4) 예수님의 부활사건을 남의 이야기처럼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예수님 자신의 부활이야기를 주고 받으면서 마치남의 이

야기처럼 했습니다.

어떤 주간지를 보니까 요즈음 대구에는 "카더라"통신이 유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소위 유언비어를 말하는데, "..했다 카더라.. 아니라 카더라...

한다 카더라"식의 유행어가 돌고 있다는 것입니다.

신앙은 유행어여도 안되고 유언비어여도 안됩니다.

만일 두 제자가 부활신앙이 확실했더라면 이렇게 말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직접 다시 사신 예수를 만나진 못했지만 그 분은 반드시 사흘만에

살아나셨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믿고 있습니다"라고 우리나라 속담에 "남의

얘기하듯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자기 부모나 처자를 그리고 남편을 남처럼 여기거나 말하는 것은 잘못입니

. 내가 믿는 예수님을 남처럼 여기는 것은 더 큰 잘못입니다. 내가 다니

고 은혜받는 내 교회를 남의 교회처럼 생각하는 것도 큰 잘못입니다.

 

2. 두 제자의 변화를 살펴봅시다.

 

두 제자의 이야기는 부정적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들의 삶에 놀랍고도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 변화는 크게 세가지로 요약됩니다.

 

(1) 시각이 변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눈이 밝아졌습니다. 그들은 밝아진 눈으로 예수를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눈이 밝아져 허물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벌거벗은 수치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신령한 눈이 밝아지면 예수가 보이고 천국이 보이고 영원한 세계가

보입니다. 반대로 죄의 눈이 밝아지면 세상 것들이 보입니다. 쾌락이 보이

, 죄짓는 법이 보이고, 불의한 길이 보입니다. 중요한 것은 두제자의 눈

이 언제 어떻게 밝아졌느냐하는 것입니다.

30절을 보면 "저희와 함께 음식잡수실 때에"라고 했고, 31절을 보면 "저희

눈이 밝아져 그인줄 알아보도니"라고 했습니다.

함께 음식을 먹었다는 것은 에수님과의 격의없는 교제를 의미합니다. 예수

님과 만나고 교제하는 사람은 신령한 눈이 밝아지고 신령한 마음이 열리는

법입니다. 그러나 악한 사람과 교제하고 먹고 마시면 금방 악을 본뜨게 됩

니다.

내가 신령한 눈을 떠서 예수님을 보려면 그 분과 늘 교제해야 합니다.

함께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2) 심령이 변했습니다.

 

32절을 보면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성경을 풀어주실 때에 우리 속

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라고 했습니다.

마음이 뜨거워졌다는 것은 성령체험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그날 거기서 성

령을 받은 것입니다. 성령을 받고 난후 그들의 모든 것은 변했습니다. 냉소

적인 신앙이 불처럼 뜨거운 신앙으로, 침체되었던 신앙이 되살아나는 신앙

으로 탈진했던 신앙이 활기찬 신앙으로, 의심하던 신앙이 확신하는 신앙으

로 회복되었습니다.

언제 뜨거워졌습니까?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 라고 32절이 설명합니다. 그들은 길에서 말씀듣고 성경말씀 듣다고 성

령을 받은 것입니다.

 

사도행전 10장을 보면 고넬료가 베드로를 자기 집에 초청하여 말씀들은 이

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날 베드로의 설교 요지는 예수의 십자가와 부

활이었습니다. 그런데 말씀듣는 도중에 성령이 강림하셨습니다. 고넬료를

비롯하여 가족들이 방언을 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건 속에서 말씀과 성령의 깊은 관계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

고 말씀을 통한 성령의 역사와 운동이 가장 바람직하다는 것도 발견되게 됩

니다. 말씀을 외면하거나 소홀히 취급하는 성령운동은 잘못 탈선할 위험이

많습니다. 그리고 두 제자가 그날 들었던 그 말씀은 바로 성경이었다는 사

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그날 두 제자는 예수님 말씀듣고 성령받았습니다. 그리고 심령이 변했습니

.

 

(3) 행동이 변했습니다.

 

33절을 보면 "곧 그 시로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고 했습니다.

동없는 변화는 참 변화가 아닙니다. 만일 그들이 예수신줄 알고 그리고 마

음이 뜨거워진 뒤에도 그냥 엠마오에 머물러 있었다면 그들이야말로 부활신

앙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곧 그 시""바로 그 때"라는 뜻입니다. 29절을 보면 그때는 이미 저물

었을 때입니다. 예루살렘까지 되돌아가려면 12km나 됩니다. 그러나 그들은

곧 그 시로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다음날이나 아니면 2-3일 흐른 뒤에 돌아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들은 바로 그 때 되돌아왔습니다. 그것이 신앙인의 결단입니다. 믿음이 떨

어지면 예루살렘을 떠납니다.

그러나 믿음이 회복되면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참 회개는 즉시

해야 합니다. 미룰 필요도 없고 늦출 필요도 없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났던

그들이 곧 그 시로 돌아온 것은 회개의 신속성을 의미합니다.

떠났던 예루살렘으로!

떠났던 하나님께로!

떠났던 믿음에로 속히 돌아와야 합니다.

가수 조용필은 "돌아와요 부산항"을 불러 한국과 일본에서 수십만장의 디

스크 판매고를 올렸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돌아와야 할 곳은 부산항이

아닙니다.

 

부활의 신앙의 현장, 선교현장, 사명의 현장입니다.

그들은 돌아와 길에서 만난 예수를 증거했습니다. 그 일 때문에 돌아왔습

니다. 36절 이하를 보면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다시 사신 예수님을

증거하고 있을 때 예수님은 그들에게 다시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너희에

게 평강이 있을찌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돌아온 사람들, 예수를 전하는 사람들, 부활의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아멘.

 

 

4

제목 :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

 

고린도전서 15장은 바울의 유명한 부활신앙의 고백이며 증언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1-34절은 부활의 확실성에 대하여

35-49절은 부활한 몸의 성격에 대하여

50-58절은 부활과 승리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부활의 확실성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첫째,성경대로 살아나셨다고 증거합니다.

1:3절을 보면 "성경대로 죽으시고" 1:4절을 보면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예언된 사건이었습니다. 아이사

53장과 다니엘서 9:26과 시편 22편과 스가랴 12:10등에 이미 그리스도의

죽음이 예언되었습니다. 그리고 부활 역시 돌발적으로 일어난 사건이 아니

라 성경에 예언된 사건이었습니다.

둘째, 게바(베드로)에게 보이셨습니다.

셋째, 열두 제자에게 나타나셨습니다(24:33-39).

넷째, 오백여 형제에게 보이셨습니다.

다섯째, 야고보에게 보이셨습니다.

여섯째,모든사람에게 보이셨습니다.

일곱째,바울에게도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고린도전서 15:14-15을 보면 '만일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

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믿음은 헛것이며 훗날 거짓증인으로 발견될 것

이라"고 했습니다. 그야말로 바울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하여 확신 또 확신

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사셨다는 것을 믿고 고백하는

종교이며 나도 다시 산다는 개인의 부활을 믿고 고백하는 종교입니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종교와 기독교의 다른 점이 바로 '부활신앙'인 것

입니다. 불교,유교, 도교,회교, 힌두교 등 그 어느 종교도 교주가 다시 살

아났다는 교리나 신앙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은 기독교가 죽은 종교가 아니라 산 종교라

는 뜻입니다.

본문은 세가지를 교훈합니다.

 

1.신령한 몸으로 부활한다는 것입니다.

 

51절을 보면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더니"라고 했고, 52절을 보면

"우리도 변화하니라"고 했습니다. 부활체의 모습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간의 육체는 변합니다. 그러나 부정적으로 변합니다. 세월이 흐를수록 힘도

쇠하고 허리도 굽어지고 눈도 침침해지고 얼굴도 주름투성이로 변합니다.

곱고 깨끗하던 피부도 거칠어지고 주근깨며 검버섯이 피어납니다. 꾀꼬리

소리나 은방울 굴리던 소리같던 목소리도 쉬고 굵은 소리로 변합니다.

그러나 부활하니 몸은 신령한 몸으로 변합니다. 어떤 신학자는 인간이 상

상할 수 없는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변한다고 했습니다.

 

일본 나고야 대학의 연구팀이 사람과 같은 혈액형을 가진 돼지를 사육하는

데 성공했다고 412일 교도통신이 보도했스니다.

나고야 대학연구팀은 사람의 피를 생성하는 효소 유전자를 수정된 돼지의

난소에 주입시킨 뒤 수정란을 19마리의 암돼지 자궁에 이식했는데 그 중 3

마리가 낳은 27마리의 돼지 새끼가운데 1마리가 사람과 동일한 특성을 지닌

피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의 피와 같은 특성을 지닌 돼

지를 사육하려면 앞으로 10년이 더 걸리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사람 피와 동일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돼지는

돼지 일뿐 그것이 사람피가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성공해

서 사람 몸에 수혈이 가능해진다고 하더라도 저로서는 제 몸속에 돼지피를

넣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피는 생명이라고 했는데 어떻게 사람 생명 속에 돼지 생명을 혼합시킬 수

가 있겠습니까?

사람의 탈을 쓰고 사람의 피가 정맥과 동맥을 순환하고 있는데도 돼지만아

도 못하게 행동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하물며 돼지피가 사람의 혈관을 흐른

다면 돼지처럼 꽥꽥거리고 낄낄거리고 온통 세상이 돼지 우리가 될까봐 겁

이 납니다.

사람 몸속에 사람의 피를 수혈하면 생명을 구하거나 연장하는데 도움이 됩

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를 힘입으면 죄사함을 받고 구원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그 피로 씻음을 받은 사람만 신령한 몸으로 부활할 수 있는

것입니다.

51절과 52절은 변화의 성격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순식간에 홀연

히 변한다"는 것이고 썩지 않을 것으로 변화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순간 신령한 몸으로 부활합니다. 신령한 몸이

란 죽지도 않고 썩지도 않고 시간과 공간의 제한도 받지 않는 몸을 의미합

니다.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는 것은 서서히 몇 십년 걸려 진화하는 것이 아

닙니다. 순식간에 홀연히 변화합니다.

상처 후 재혼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어느날 저에게 요청한 상담의 내용은

훗날 천당가면 부인이 둘이 될텐데 어떻게 처신해야 하느냐는 것이었습니

. 저는 그 사람에게 마태복음 22:30말씀을 소개했습니다.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고 했습

니다. 우리는 모두 신령한 몸으로 부활할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에게 주신 크나큰 축복된 것입니다.

 

2.이김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55절을 보면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

이 어디 있느냐"라고 했고 57절을 보면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게

감사하노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이김은 예수 그리스도 때문이라고 했

습니다.

예수님은 승리자이십니다. 40일동안 금식하신 후 마귀시험을 이기셨습니

. 유대 교권자들과 지도자들의 도전을 이기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영적싸움에 이기셨습니다. 그뿐입니까?

죄와 유혹을 이기셨고 죽음을 이기셨습니다.

그 주님께서 우리에게도 이김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의 부활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승리의 축복을 주십니다.

사람의 몸에는 지구상에 사는 사람 수만큼의 온갖 세균이 기생하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집안 거실에는 60만개의 곰팡이가 기생하고 있다

고 합니다. 무심코 피우는 담배한대 속에서 4천여 가지의 화학성분이 발생

한다고 합니다.

인간은 온갖 질병과 위험에 노출되어 있습니다만 그때 그때 생성되는 강한

저항력 때문에 그것들을 막고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저항력이란

한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는 저항력(능력)

주십니다. 우리가 그 능력을 받아야 죄도 이기고 시험도 이기고 유혹도 이

기고 마귀도 이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특히 바울이 본문에서 강조하는 것은 두가지입니다.

첫째는 죄를 이기게 해주셨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기 힘으로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세상법의 경

우에서도 드러납니다. 죄를 지은 사람이 나는 죄인이 아니다라고 말한다든

지 죄가 없다고 강변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 앞에 죄인된 사람은 스스로 자기 의를 자랑할 수가 없

는것입니다.

구약의 경우를 보면 짐승을 죽여 그대로 그 피를 제물로 드림으로 죄사함

을 받았습니다. 신약의 경우는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을 속죄의 제물로 드림

으로 우리 죄를 사하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피를 공로를 믿는 사람은 죄

를 이길 수 있는 권세를 주신 것입니다.

 

둘째는 죽음을 이기게 해주셨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1:25-26을 보면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

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

느냐"라고 하셨습니다.

죽었다가 다시 사신 예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다시 산다는 것입니다.

시 말하면 죽음을 이기게 해주신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다 죽었습니다. 예수도 죽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시 살

아나셨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생명이며 핵심진리입니다.

죽음을 이기는 신앙은 하나뿐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죽어도 다시 삽니다.

 

3.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는 것입니다.

 

58절은 고린도전서 15장의 결론이며 부활장의 마무리입니다. 부활을 믿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할 것인가를 밝혀 주고 있습니다.

 

(1)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라

 

나이가 들면 손박이나 몸이 떨립니다. 그것은 몸의 기능이나 힘이 떨어졌

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흔들리는 것은 부활신앙이 허약하기 때문입니다.

을까봐 떨고 망할까봐 떠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신앙만 확실하

면 떨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로마서 8:35을 보면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라고 했고, 8:38-39

보면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일

이나 장래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

를 우리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했습니다.

한마디로 바울은 그 어떤 내적 갈등이나 외적 억압이나 영향에도 자기 믿

음이 흔들리지 않는다는 고백인 것입니다. 어떻게 그토록 위대한 고백이 가

능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다시 사는 부활신앙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죽어도 다시 사는데 죽음이 겁날리 없고 넘어져도 다시 일으켜 주시는 주

님이 계시는데 걱정될 리 없고, 우겨사임을 받고 핍박을 받아도 힘주시고

지키시고 이기게 하시는 주님이 계시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입니

.

바울은 본문에서 너희도 그 신앙을 가졌기 때문에 견고하게 서서 흔들리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집이 흔들리면 무너집니다. 나무가 흔들리면 뿌리가

뽑힙니다. 신앙이 흔들리면 그 영혼이 침몰합니다.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맙

시다.

 

(2)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예수님의 제자들과 초대교회 신자들은 두 가지 사건 때문에 힘을 얻고 주

님과 교회를 위해 힘써 일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는 부할하신 주님을 만났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성령을 받았기 때문

이었습니다. 만일 그들이 따르고 좇던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으로 끝

이 났다면 충성을 바쳐 따르고 섬길 대상이 없어져 버렸을 것입니다. 그리

고 더 이상 예수 이야기를 할 필요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들의 절망은 순간으로 끝났습니다. 새로운 희망과 감격

과 충성의 대상이 떠오른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고 하신 것입니다.

 

1914년 당시 정동교회는 미화로 200달러 정도의 빚을 지고 있었습니다.

빚은 1893년에 시작한 교회 건축 때문이었습니다.

어느 주일 아침 목사님은 빚을 갚기 위해 헌금을 하자고 했지만 그날 걷힌

헌금은 50달러 정도였습니다. 그 당시 교인은 이화학당 학생이 많았습니다.

기숙사로 돌아온 학생들은 가지고 있는 것들을 바치기로 의논하고 주일저녁

교회에 다시 모였습니다.

'내게 있는 모든 것을 아낌없이 바치네'찬송을 부른 후 한사람 씩 나와 가

진 것을 바쳤습니다. 동전 17달러 정도, 반지 35, 손거울, 자명종 2,

양먈, 내의,구두,혼수감으로 어머니가 주신 붉은 명주도 있었습니다. 어떤

여학생은 댕기머리를 잘라서 주님께 드린다며 내어 놓았습니다. 그날 그 교

회의 빚은 해결되었습니다.

빚바랜 이화여대 학생들의 요즘 세태에 비기면 고전소설 같은 이야기입니

.

누가 주의 일에 더욱 힘쓸 수 있습니까? 부활신앙을 가진 사람입니다.

가 자신의 댕기머리를 잘라서 드릴 수 있습니까?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누가 한평생 흔들리지 않고 굳게 서서 교회 섬기고 직분 감당

하고 주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까? 내 대신 죽었다가 다시 사신 예수님을 나

의 구주로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오 주여, 주님을 사랑합니다.

주님을 섬기겠습니다.

 

 

4

제목 : 자아관리에 최선을

자료원 : 박종순목사 충신교회

발행일 : 950409

 

미국 [노테데임 대학교]의 철학과 교수인 톰 모리스(Tom Morris)는 성공에

5가지 조건이 따라야 한다고 했습니다.

(1) 목표를 분명히 하라.

(2) 당신보다 더 많이 아는 사람을 찾아라.

(3) 집요한 끈기로 자신의 포부를 실천에 옮겨라.

(4) 전심전력을 다하라.

(5) 목표를 다시 점검하고 새롭게 하라고 했습니다.

[놀만 빈센 필] 박사는 "실패자처럼 생각하면 실패자가 된다"고 했습니다.

성공은 자기와의 싸움입니다. 자기를 어떻게 관리하느냐에 따라 인생과 신

앙의 성패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톰 모리스 교수나 빈센 필 박사의 얘기들은 결국 자신을 어떻게 다스리느

냐에 따라 성공이 좌우된다는 것입니다.

잠언 16:32을 보면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

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고 했습니다.

탈무드를 보면 "가장 힘센 자가 누구냐, 자기를 이기는 자다"라고 했습니

.

미국 캔터키감리교회 담임목사였던 데이빗 씨맨즈(David Seamands)박사는

상처받은 자신의 감정을 치료받기 위한 원리를 다음과 같이 소개했습니다.

그것은

(1) 문제를 똑바로 직시하라.

(2) 고침받기를 원하는지 자신에게 물어보라.

(3) 어떤 문제든 자신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라.

(4) 문제와 관련된 모든 사람을 용서하라.

(5) 자기 자신을 용서하라.

(6) 문제의 핵심이 무엇인가, 그것을 위해 어떻게 기도해야 할 바를 성령

님께 구하라는 것입니다.

 

씨맨즈 박사 역시 문제 해결의 당사자는 자신이며 기도가 방법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에덴 동산의 타락사건 이후 인간은 자신이 져야할 책임을 그 누군가에게

떠넘기는 버릇에 익숙해졌습니다.

아담은 하와에게 떠넘기고, 하와는 뱀에게 떠넘겼던 그 나쁜 습성이 지금

우리들 속에서 발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일찌기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고 했고 요즈음 사람들은 "주제를 파악하라"고 말합니다만 그러나 그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를 알고 자아를 통찰하

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영국 웨스트민스터(Westminster)교회 목사였던 조웽(Jowett)은 사람은 두

개의 자로 자신을 잴 수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의 자는 자아의 죽음(Life for Christ)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살기 위해 내가 죽는 것, 그것이 곧 그리스도인의 부정이

며 바른 삶의 등식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세 가지 자아관리의 방향을 발견하게 됩니다.

 

1. 감정관리입니다.

 

32절을 보면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라고 했습니다. 바다

에 파도가 있고, 전파에 주파가 있는 것처럼 감정에도 기복이 있습니다.

치 날씨처럼 흐렸다. 갰다를 반복합니다.

클라이드 네레모어(Clyde M Narramore) 박사는 "인간의 신체적조건

(Physical)과 정서적 조건(Emotional),그리고 영적조건(Spiritual) 은 상호

간 영향을 주고 받는다고 했습니다. 몸이 아프면 만사가 귀찮고, 기도하기

도 힘들어갑니다. 그 영혼이 탈진상태에 빠지면 정신도, 육체도 흔들리게

됩니다. 그래서 신체, 정서, 영혼은 밀접하게 영향을 주고 받는 것입니다.

사람이 성을 내는 것 역시 그 원인이 단순하지 않습니다.

성내기를 잘하는 원인으로서는,

(1) 습관성 원인, (2) 정서불안의 원인, (3) 외적 충동에 의한 원인,

(4) 물리적 자극에 의한 원인 등이 있습니다.

화를 자꾸내는 버릇에 익숙해지면 반복해서 화를 내게 됩니다.

심지어 좋은 일도 화를 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말투나 행동 표현이

화를 내는 것과 같기 때문에 남에게 상처를 주고 공동체의 화평을 깨뜨리게

됩니다.

성내는 것은 그 원인보다 결과가 더 무섭습니다. 라틴어를 잘 모르는 사람

이 라틴어로 학술토론하는 학자들의 모임에 참석했습니다. 친구가 물었습니

. "자네는 라틴어를 알아 들을 수 있는가?" 그러자 그는 "알아듣지 못하

. 그렇지만 누가 토론에서 밀리고 있는가 하는 것은 잘 알고 있네"

"어떻게 그것을 안단 말인가?"라고 묻자 그는 "먼저 화를 내는 사람이 밀

리는 사람 아니겠나"라고 대답했습니다.

강자가 먼저 화를 내는 법은 없습니다. 믿음 좋은사람은 벌컥벌컥 화를 내

지 않습니다.

화를 내는 순간 모든 피가 역류합니다. 그래서 혈압이 상승작용을 하게 됩

니다. 화낼 때 얼굴이 뻘겋게 상기되는 것은 혈압의 상승작용 때문입니다.

화를 내면 모든 신경조직에 비상이 걸립니다. 위벽이 긴장을 하고, 위액분

비가 중단됩니다. 그리고 그 순간 영적 헛점이 생기게 됩니다. 영적 헛점은

마귀에게 공격의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해지도록 분을 품

지 말라"고 했습니다.

밀턴은 "자신을 통제하며 자기의 감정과 욕망 그리고 공포를 다스리는 사

람은 한 나라의 왕보다 위대하다"고 했습니다.

기독교 상담학자인 로렌스 크랩(Lawrence J.Crab)박사는 나쁜 감정을 유발

하는 네 가지 원인을 밝혔습니다.

첫째, 나쁜 행동이 나쁜 감정을 유발한다.

그러므로 바르게 행동하라.

둘째, 나쁜 목표가 나쁜 감정을 유발한다.

그러므로 당신의 삶의 방향을 수정하라.

셋째, 나쁜 생각이 나쁜 감정을 유발한다.

그러므로 올바르게 생각하라.

넷째, 나쁜 신앙이 나쁜 감정을 유발한다.

그러므로 신령한 생활을 힘쓰라고 했습니다.

내가 올바로 나 자신을 관리하려면 나 자신의 감정을 바로 관리해야 합니

. 로렌스 크랩 박사의 말처럼 나쁜 감정을 올바른 행동과 목표와 생각과

신앙을 가질 때 통제되고 조절되는 것입니다.

저 자신의 고백입니다만 이유와 원인이 무엇이건 화를 내고 난 다음 시간

이 지나면 저 자신이 초라하고 부끄러워 집니다.

일생동안 저 자신이 자신의 감정통제를 위해 사용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첫째, 그 순간을 참고 넘깁니다.

둘째, 감정유발의 책임을 나한테서 찾아냅니다.

셋째, 빨리 그 사건을 잊어버립니다.

넷째, 기도합니다.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는 사람은 천하를 다스리는 용사보다 위대한 사람입

니다.

 

2. 마음관리입니다.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고 했습니다.

50대 중년 남자가 어느날 갑자기 소화가 안되고 설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병원에 갔더니 검사를 해보자며 위검사를 했습니다. 결과는 위에 암세포가

있는 것 같다면 3일후 종합검사를 하자고 했습니다. 그날 그 시간부터 위가

쓰리고, 열이 오르고, 사지의 힘이 빠지기 시작하면서 죽도 소화가 안됩니

. 몇달 안에 암이 퍼져 죽을 것 같습니다. 지옥같은 3일이 지난 후 초췌

한 모습으로 병원에 찾아가 종합검사를 받았습니다. 일주일 후에 결과가 나

왔는데 아무 이상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시간부터 위도 안쑤시고,

도 오르지 않고, 기분이 날아갈 듯 하더랍니다.

그것은 마음 곧 정신작용의 결과였습니다. 마음은 그만큼 그 사람의 정서

와 감정과 행동을 좌우하는 것입니다.

이규태씨의 한국인의 건강관리이라는 에세이를 보면 옛부터 한국인은 심인

설을 중요시했다는 것입니다. 즉 모든 원인이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것입니

.

 

건강을 해치는 다섯가지 요인을 양생오난이라고 하는데

一難은 명성이나 재물을 구하는 마음을 멸할 수 없는 것.

二難은 기쁘고 노여움을 제할 수 없는 것.

三難은 노래와 여색을 거절할 수 없는 것.

四難은 맛있고 살찐 음식을 거절 못하는 것.

五難은 근심걱정을 없앨 수 없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한국인의 양생법(건강법)은 마음을 곱고 편하게 갖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마음을 관리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3. 신앙관리입니다.

 

33절을 보면 "사람이 제비는 뽑으나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

"고 했습니다.

잠언 29:26을 보면 "사람의 일의 작정은 여호와께로 말미암느니라"고 했습

니다.

시편 127:1을 보면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

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숫군의 경성함이 허사로다

"라고 했습니다. 바로 이러한 본질적인 진리를 믿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신

앙입니다.

제아무리 높은 빌딩이라도 그리고 제아무리 최고의 실내장식으로 꾸민 건

물이라도 기초가 흔들려 무너지면 아무런 의미도 가치도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몸이 건강하고 돈을 많이 벌고 정신적으로 튼튼하다고

해도 영혼이 흔들리면 그 인생은 속절없이 무너지고 마는 것입니다. 이유는

영혼이 인간의 본체이기 때문입니다.

일본에서는 매년 과로사로 생명을 잃는 사람이 30만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주원인은 스트레스라고 합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사람들은 고도반응의 사람들 - 민감한 반응의 사람들이며, 고독한 사람들이

, 까다로운 성미의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문제는 어떻게 해야 스트레스를 덜 받느냐인데 그것은 느긋한 마음으로 운

동을 즐기고 생활을 즐기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느긋한 마음은 신앙으로만 가능합니다.

스탠포드대학의 의과대학 교수인 케네스 펠레티어박사는 크게 성공한 남녀

51명을 대상으로 그들이 어떻게 스트레스를 푸는가를 연구했습니다. 그 가

운데 제일 많은 것이 기도를 한다는 것이었고, 다음이 정신이나 신체활동을

제어하는 생체자기제어(Biofeedback)이었습니다. 그리고 어떤 형상을 마음

에 떠올리는 심상화(Visualization)등이었습니다. 스트레스를 해소사는 방

법 역시 기도가 제일이라는 과학적 증명은 신앙의 힘이 얼마나 크고 중요한

가를 설명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은 생명체와 같기 때문에 관리를 잘 하면 살고 활성화되지만 관리를

잘못하면 시들고 죽게 됩니다.

내 신앙이 죽지 않고 산 믿음이 되려면

첫째, 생명이신 그리스도에게 붙어 있어야 합니다. 떨어지거나 떠나면 죽

습니다.

둘째, 때를 따라 말씀으로 영양공급을 받아야 합니다.

셋째, 영적 건강 상태를 수시로 점검해야 합니다.

 

건강한 그리스도인만이 건강한 교회와 사회와 국가를 만들수 있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자신을 돌아보고 자아를 관리하는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감정과 마음과 신앙을 철저히 관리합시다. 아멘.

 

 

5

제목 : 은혜로 사는 사람들

자료원 : 박종순목사 충신교회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하나님의 은혜는 마른 땅을 적시는 여름날의

소낙비와 같다"고 했습니다. 만일 여름철 소낙비가 없다면 대지도, 초목도,

사람도 메말라 시들고 말 것입니다.

어떤 날 페르시아의 고레스(Kyros)황제가 친구 중 한 사람에게는 금메달을

걸어주고 다른 한 사람에게는 키스를 해주었습니다. 그때 금메달을 받은 사

람은 키스를 받은 사가을 몹씨 부러워했습니다. 이유는 왕의 총애를 받는

사람들에게 키스를 해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돈을 벌고, 출세하고, 성공하고, 명예를 얻는 것도 나쁠 것은

없습니다만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의 총애를 받는 것입니다. 주님의 총애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은혜 하나만으로도

일평생 감격하고 감사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사도행전 4:32-37은 은혜받은 초대교회의 모습을 소개해 줍니다. 그 모습

은 이상적 교회상이며 이상적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입니다. 그 내용을 구

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은혜받은 사람들은

 

1. 한 마음 한 뜻이 됩니다.

 

4:32를 보면 "무리가 한 마음 한 뜻이 되어"라고 했습니다. 라며 살고 있

는 부부도 한 마음 한 뜻이 되기 어렵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20년 사이 이혼율이 5배로 증가했다고 합니다. 1970년도

말에 3만쌍이었던 것이 1993년에는 8만쌍으로 증가했습니다. 이혼의 사유는

부정행위, 학대, 직계존배속 학대, 악의에 찬 유기 등이 대부분입니다.

리고 이혼율은 매년 가속되고, 증가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부부도 한 마음,

한 뜻이 되기가 어렵다는 실증인 것입니다.

 

그런데 초대교회에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그들

의 함께 은혜받고 성령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마음은 감정, 의지, 사상, 생각이 집합된 것을 의미합니다.

어떻게 부부가 하나되고 교회 공동체가 하나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은혜

를 받아야 합니다. 오순절사건 이전의 그들은 저마다 각각 놀던 사람들이었

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성령을 충만히 받고 난 이후부터 마음과 뜻이 하나

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은혜를 받으면 세가지 안목이 열립니다.

 

첫째,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죄인이었던 나, 허물많은 나, 쓸모없는 나, 연약한 나를 제대로 보게 됩니

. 그리고 주의 은혜로 거듭난 나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 이웃을 보게 됩니다.

이웃을 보면서 사랑을 나누고 통찰력있는 교제를 시작하게 됩니다.

셋째,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은혜를 받으면 눈이 밝아져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은혜를 못받으면 선악

과가 보이고 벌거벗은 수치가 보이게 됩니다.

 

일본인들은 [가다오까(KATAOKA)]를 중의원의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그는

네 차례나 일본 중의원 의장을 역임한 사람입니다.

그는 본래 불신자였습니다. 미국에 유학을 가서 공부하고 있던 어느날 안

개낀 철길을 건너다 기차에 치어 공중으로 튕겨 올랐습니다. 수십미터를 날

아가 땅에 떨어졌습니다. 얼마후 정신을 차려보니 모래밭이었습니다. 그날

그는 거기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누가 나를 모래밭에 떨어져 살게 했을까

를 생각하다가 바로 그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다친데도

없었습니다. 그는 즉시 모래밭에 꿇어 엎드려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자기발로 교회를 찾아가 예술르 믿기 시작했고, 유학 후 일본으로

돌아와 정치에 투신 중의원 의장을 네번씩 역임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무슨

일이 있어도 주일이면 교회에 나가 예배를 드렸고 문간에 서서 들어오는 교

인들의 신발(게다)을 정리하는 일을 도맡아 했습니다. 그리고 매 월말이면

자신이 직접 [아오끼] 목사님께 드리는 생활비를 봉투에 담고 리본을 매어

찾아와 무릎꿇고 드렸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은혜받은 산증거인 것입니다.

 

산산조각난 부부가 하나되려면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회사가 잘 되려면

사장도, 사원도 은혜를 받으면 됩니다. 교회가 잘 되려면 목사도, 교인도

함께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한 마음, 한 뜻이 되는 것은 은혜받고, 예수의

마음으로 변화될 때 가능해집니다.

 

2. 나누는 삶을 살게 됩니다.

 

32절을 보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고 했습니다.

우린 여기서 서로 통용했다는 것과 제 것이라고 하는 이가 하나도 없었다

는 말씀을 주목해야 합니다. 은혜를 받으면 나누는 삶이 가능합니다. 그리

고 헛된 욕심이 사라집니다. 소유는 전투적 과정과 절차를 거쳐서 이루어집

니다. 그러나 축복은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집니다.

야고보는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면 사망을 낳는다"고 했

습니다(1:15).

사람은 나이가 들면 하루에 뇌세포가 10만개씩 소멸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창의력도 기억력도 없어지는 것입니다.

월남전 당시 미군 포로들은 지옥같은 수용소에서 별로 할 일이 없었습니

. 그때 그들은 둘러 앉아 성경구절을 암송하고 담뱃재로 만든 잉크로 성

경을 써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한 포로들은 모두가 기억력과 건

강을 유지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고인 물을 썩는 것처럼, 돈벌어서 나만 쓰고 나만 먹었던 부자는 한결같이

당대로 망했습니다. 그러나 나누며 산 부자들은 대를 이어 나갔습니다.

초대교회의 경우는 제 재물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으로 놀라운 변화입니다.

저희 교회는 세례문답할 때 십일조 여부를 반드시 묻습니다. 부부가 함께

세례를 받는 경우에도 부부에게 따로 질문을 합니다. "십일조를 하는가,

제부터 할 것인가"라고 십일조의 경우도 부부가 함께 은혜를 받아야 가능하

기 때문입니다.

부인은 하자는데 남편이 반대를 한다든지 부인은 교회가자는데, 남편은 놀

라가자면 신앙생활이 고달퍼집니다.

그런데 초대교회는 나누는 삶을 반대하는 사람도 없었고, 구경꾼도 없었고

빠지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것은 그들 모두가 은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9:8을 보면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

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

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여기 넘치는 은혜를 받은 사람의 할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넘치는 은혜를 받은 사람은 넘치도록 착한 일을 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받은 만큼 나눠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은혜를 나눌 때 오는 축복이 있습니다. 그것은

첫째, 강하게 됩니다.

딤후 2:1을 보면 "네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속에서 강하고"라고

했습니다. 그 뜻은 은혜를 받은 사람과 나누는 사람과 은혜안에 사는 사람

은 강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주는 자가 강하고, 나눠줄 수 있는 사람이 부

자입니다.

둘째, 성장합니다.

베드로후서 3:18을 보면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고 했습니다. 은혜를 받은 사람은 그 믿음과

지식이 자라갑니다. 은헤를 받아야 교회도 성장하고 회사도 기업도 직장도

자랍니다.

셋째, 더욱 풍성해 집니다.

나누면 작아지고 줄어든다고 믿는 것은 세상 경제원리입니다.그러나 나눌

수록 커지고 많아진다고 믿는 것은 하나님의 경제원리입니다.

 

경기침체와 불황으로 전 세계가 진통을 겪고 있습니다만 그래도 미국경제

는 세계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전 세계를 위해 이유야 어떻든 나누

는 삶을 살아왔습니다. 바로 그 나누는 정신과 신앙 때문에 미국이 복을 받

은 것입니다. 한마디로 받는 자보다 주는 자가 복이 있다는 말씀대로인 것

입니다.

 

사도행전 5장으로 건너가면 나누기를 주저하고 욕심에 눈이 어두웠던 아나

니아와 삽비라의 비극적 최후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부부가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베드로를 속이고 성령을 속여려 하다가 한날 함께 죽었습니

.

칼빈은 아나니아의 죄를 여섯가지로 지적했습니다.

(1) 하나님을 업신여긴 죄, (2) 성물을 거짓으로 바친 죄,(3) 허영심으로

바친 죄,(4) 거룩한 교회에 오점을 남긴 죄,(5) 불신앙의 죄,(6)외식의 죄

등입니다.

아무리 내 것이라도 하나님께 드리기로 한 것은 내 것이 아닙니다. 물질

, 시간도 재능도 함께 드리기로 한 것은 반드시 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나누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3. 예수를 부활을 증거합니다.

 

33절을 보면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얻어"라고 했습니다.

우리 여기서 부활을 증거한 사건과 큰 은혜가 동시적이었다는 점을 주목해

야 합니다.

이것은 예수의 부활이 증거되는 곳에는 큰 은혜가 넘친다는 뜻도 되고 큰

은혜가 넘치는 곳에는 반드시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는 역사가 일어난다는

뜻도 되는 것입니다.

은혜를 왜 받아야 합니까?

왜 성령을 받아야 합니까?

초대교회 사도들은 큰 은혜를 받고난 후에 큰 소리로 예수의 부활을 증거

했습니다.

초대교회 교인들은 성령받고 예수의 부활을 전파했습니다.

음식을 먹기 위해 음식을 먹는 것은 식도락입니다. 그러나 힘을 얻기 위해

음식을 먹고 일하기 위해 음식을 먹는 것은 바람직한 일입니다.

마찬가지로 은혜를 음미하기 위해 은혜를 받는 것은 영적 사치입니다.

은헤는 예수부활을 증거하기 위해 받아야 합니다. 그동안 우리 사회에 연쇄

적으로 일어난 사건들, 지존파 사건, 성수대교 붕괴사건, 도시가스 폭발사

, 세금 포탈사건 등은 한강의 기적과 동시에 일어났습니다. 독일의 경우

는 라인강의 기적은 있었지만 우리나라 같은 패륜적이고 반사회적인 사건은

없었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급걱한 사회변동에 대처할 올바

른 가최관을 확립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의 종교분포를 보면 기독교 25%,불교25%(물론 생전절에 한번도 안

가는 사람을 포함해), 유교, 무종교 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매년 무당조

합에 연회비를 내는 무당만도 5만여명이 됩니다. 그리고 소위 유형문화재라

고 해서 나라돈으로 관리하고 지원하는 것들 가운데 80%가 불교사찰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방향도 없이 추락하고 있습니다. 패륜도, 사치도,무법

, 사고도 세계 제일이라고 합니다.

서울대학의 윤이흠 교수는 절대가치를 이 민족과 사회 앞에 제시할 사회적

실체는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정치권도 아니다. 대학도 아니다.무당도 아니

. 종교 아니다. 바로 개신교다"라고 말합니다.

이유는 기독교만 유일신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신앙이나 잡신앙

을 가진 종교는 유일한 가치나 진리를 제시할 수가 없습니다.

기독교는 예수의 부활생명을 믿습니다. 부활이 뭡니까?

다시 산다. 죽어도 다시 산다. 죽음이 끝이 아니다. 희망이 있다는 것입니

.

희망의 종교라야 희망을 줄 수 있고 생명의 종교라야 생명을 줄 수 있고,

부활의 종교라야 부활을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은사람들은 예수의 부활을 선포해야 합니다.

이 길 막고 이 민족이 사는 길은 없습니다.

비내리는 땅은 푸른 초원, 녹음방초로 우거지고 비내리지 않는 땅은 사막

과 황토로 뒤덮여 있는 것처럼 은혜받은 나라, 교회, 가정이라야 푸르르고

기름지고 잘 살게 됩니다. 은혜로 삽시다.

 

 

 

8

제목 : 은혜와 삶

자료원 : 박종순목사 충신교회

발행일 : 950326

 

은혜와 은혜 아닌 것, 은혜받은 사람과 받지 않은 사람 사이에 아무런 차

이도 없다면 구태여 은혤르 논할 필요도 없고 은혜를 받아야 한다고 강조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은혜를 받은 사람과 받지 못한 사람은 하늘과 땅만큼 엄청난 차치

가 있기 때문에 성경은 은혜를 강조하고 있으며 은혜를 받으라고 강권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본문에서 바울은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은혜 베풀 때 너를 도

왔다","지금은 은혜받을 만한 때요"라고 말씀하면서 은혜의 중요성을 강조

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도나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은헤를 강조했습니다만 그 가운데 특히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를 더 강조했습니다. 이유는 바울 자신이 풍성한 은혜

의 체험을 했기 때문입니다.

은혜는 깨달은 사람과 체험한 사람들이야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을

중심으로 몇 가지 교훈을 찾겠습니다.

 

1. 은혜는 올바로 받아야 합니다.

 

1절을 보면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

의 은헤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 했습니다.

먼저 바울은 자신의 입장을 설명합니다. 다시 말하면 은혜에 대하여 권면

하는 자신의 위치를 밝히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

는 것입니다.

그 뜻은 하나님의 전권대사로서 하나님의 뜻을 전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까 이 권면은 바울의 개인적 충고가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이라는 것입니다.

 

우린 여기서 설교듣는 사람들이 지녀야 될 태도를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

님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사람들의 입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케 합

니다. 그러니까 그 말씀을 듣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수용하고 순종

해야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편식방법과 태도로는 은헤받기가 어렵습니다. 본문

1절은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그 뜻은 은헤의 가치를 알고 소중하게 간직하라는 것입니다.

은혜 자체는 금은보석보다 귀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은헤를 잘못 받으면

그 삶에 아무런 변화도 갱신도 일어나지 못합니다.

우리나라는 오랜 세월동안 유교전통과 문화를 지켜 나왔기 때문에 유교적

윤리와 도덕의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유교윤리를 한 마디로 요약할 수는

없겠지만 [삼강오륜]이 그 근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가운데 부모와

자식, 윗사람과 아랫사람, 부부간의 윤리가 있습니다. 자식은 부모를 높이

고 순종하는 것이 성경의 명령이고 동양윤리의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94년도에는 유학갔던 아들이 돌아와 돈 때문에 아버지를 살해한 사

건으로 온 세상에 충격을 던졌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대학 강단에서 학생

을 가르치는 선생이 아버지를 살해함으로 더 큰 사회적 충격을 주었습니다.

 

일부 언론은 그가 기독교인이었다는 것을 밝혔습니다. 이것은 더 큰 충격

입니다. 그러니 생각해 보십시오. 그가 정말 기독교인이었다면 은혜를 체험

하고 거듭난 신자였다면 그런 일은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솔직하게 말하면 1,200-1,500만이라는 기독교인들 가운데 은혜를 모르고

교회만 들락거리는 사람들 속에는 도둑놈, 소매치기, 살인자, 불한당, 이중

생활하는 자, 그리고 어쩌면 살의를 품고 있는 자들이 있을 수 있을 것입니

. 그러나 그들도 은혜를 제대로 받기만 하면 거듭나고 새사람되고 회개하

는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우니라가 자랑하는 세계적인 소프라노 성악가 김영미씨의 얘기는 감동적인

것입니다.

 

미국 L.A 에 있는 나성한인교회 김의환 목사님이 김영미씨에게 주일 2

예배에 와서 성가연주회를 해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미국 대부분의 교회

는 저녁예배가 없거나 2시에 드리는 교회가 많습니다.

 

김영미씨의 대답은 주일은 어렵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유는 자신이 L.A

있는 제퍼슨 감리교회 성가대원인데 성가대원이 많지 않기 때문에 빠질 수

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은혜받은 사람만 가능한 감동적 이야기입니다.

김영미씨의 성공은 그녀 자신의 피나는 노력의 결과입니다만 그러나 주님

과 교회를 먼저 생각하는 그의 신앙과 책임감 때문이었으며 그것을 보신 하

나님께서 그녀에게 은혜를 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려서 저는 이 말 뜻이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어머님에게 자주 물었습니

. "엄마 어떻게 엉덩이에 뿔이 나?"라고 그때마다 제 어머님은'크면 알게

된다"라고 하셨고 "까불지 말라는 뜻이란다"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제 어머님의 대답은 명답이었습니다. 철들고 세상을 알면

서 그 뜻이 분명해졌습니다. 그리고 그 뜻이 때론 떠오릅니다. 엉덩이에 뿔

나는 법은 없습니다. 뿔은 이마에 납니다.

만일 엉덩이에 뿔이 난다면 그것은 기형입니다. 그리고 살아가는데 장애물

이 됩니다. 은혜를 헛되이 받거나 잘못 받으면 기형아가 됩니다. 그리고 자

신의 삶을 망가뜨립니다.

 

서울시내 모 큰 교회 정문입구에는 그 교회가 꼭 사서 넣어야 할 건물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교회 자체도 땅이 비좁거니와 그 땅을 사서 넣어야 교

회 전경도 드러나고 출입도 자유로워지는 건물입니다. 큰 교회이기 때문에

가지고 있는 돈도 있습니다. 문제는 건물임자가 땅을 내놓지 않는 것입니

. 그런데 어느 해 그 건물을 팔겠다는 제의가 들어왔습니다. 긴급히 당회

를 모였습니다.

 

그런데 당회원 가운데 한 사람이 결사반대를 합니다. 말도 되지 않는 이유

를 들이대면서 반대하는 바람에 결국 좌절되고 말았습니다. 지금까지 그 교

회는 그 건물을 사지 못했습니다. 그후 그 장로님은 미국으로 이민을 가버

렸습니다. 들은 바대로는 그 분은 지금 미국에서 "내가 왜 그때 그렇게 반

대했는지 모르겠다"며 후회를 한다는 것입니다.

 

신앙과 고집은 다릅니다. 내 고집을 강조하는 사람은 은혜받은 사람이 아

닙니다. 은혜를 받은 사람은 자신의 주관과 고집과 죄악과 악습을 십자가에

못박고 꺽어 버립니다.

 

다른 얘기 하나를 더 하겠습니다.

서울에 있는 모 큰 교회의 이야기입니다.

교회 바로 뒷편에 붙어 잇는 500평 대지가 있었습니다. 그 교회의 성장이

나 미래를 위해서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매입해야 하는 땅입니다.

15년전 어느 날 평당 100만원에 팔겠다는 전갈이 왔습니다. 당회를 모였습

니다. 땅이 너무 비싸다며 한 사람이 한사코 반대를 하는 바람에 포기했습

니다. 7년이 지난후 5억에 팔겠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다시 모였습니다만

반대하던 그 사람 때문에 부결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로부터 7년이 지난

어느날 50억에 팔겠다는 연락을 받고 14년만에 50억에 샀습니다.

은혜를 받지 못하고 고집부렸던 그 사람은 교회에 세 가지 큰 손해를 주었

습니다.

첫째, 495천만원의 손해를 주었습니다. 첫번 기회에 반대를 안했다면 5

천만원에 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둘째, 교회성장을 14년 정지시켰습니다.

셋째, 긍정적으로 교회를 섬기고 일하려는 사람들에게 정신적, 신앙적 상

처를 주었습니다.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은혜를 바로 받으면 태도가 달라지고 삶이 달라지

고 신앙이 달라집니다. 그리고 변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은혜를 헛되

이 받으면 다른 삼과 자신에게 엄청난 손해와 상처를 주게 됩니다.

 

사울왕은 은혜를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랬기에 이스라엘의 초대왕이 되

었습니다. 그는 은혜받고 예언을 하는가 하면 나라 정치를 잘했습니다.

러나 그 은혜를 제대로 간직하지 못하고 헛되이 여기기 시작하면서 몰락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 외면하고 교만하기 시작하고 세상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하자 하나

님이 그를 버리기 시작했습니다. 결과는 뻔했습니다. 자신도 그의 왕가도

몰락했습니다.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그리고 바로 받아야 합니다. 부천의 영생교, 일본의

오음진리교, 그들이 표방한 것은 영생이고 진리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살인

을 주저하지 않는 비영생, 비진리 집단이었습니다.

여러분, 부모도, 자식도,남편도, 아내도, 목사도, 장로도, 권사도 집사도,

은혜를 받아 합니다.

 

2. 지금 받아야 합니다.

 

2절 끝을 보면 "보라 지금은 은혜받을 만한 때"라고 했습니다.

"보라"는 것은 은혜의 공개성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은혜 자체는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보고 만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이란 숨쉬는 그 순간, 살아있는 이 찰라를 의미합니다. 이 순간.

찰라, 맥박이 뛰고 심장이 고동치고 손발이 움직이고 두 눈이 껌벅거리고

있는 이 순간이 지금입니다.

 

지금 이 시간 이 순간에 은혜를 받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은 다

분히 종말적 긴박성이 강조되는 시간인 것입니다.

 

기회를 놓치면 안됩니다. 다음으로 미루면 안됩니다. 은혜를 덱토스라고

합니다. 그 뜻은 "입증된"이라는 것입니다.

 

은혜는 많은 사람들을 통해 입증된 사건입니다. 두 번다시 그 효과를 물

어볼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은혜를 카이로라고 합니다. 그 뜻은 유쾌하다,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으면 유쾌하고 행복합니다. 본문은 은혜와

구원을 동일시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은혜의 결과를 구원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은혜받아야 행복하고 유

쾌하고 구원을 받게 됩니다.

 

더 이상 은혜를 미루고 소홀히 취급할 생각입니까>

스코틀랜드에서 목회하던 어스킨(Erskine) 목사의 설교를 들은 스칼렛 부

인이 그 날 큰 은혜를 받고 깊은 감동을 체험했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 주

일 그녀는 어스킨 목사의 설교를 들엇으나 은혜를 받지 못받았습니다. 스칼

렛은 목사님을 만나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어스킨의 댈바은 "지난 주에는

당신이 예수를 만나려고 왔기 때문에 신령한 은혜를 받았지만 오늘은 나를

보려고 왔기 때문에 은헤를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은혜의 출처는 주님이십니다. 주님의 말씀이 나에게 은헤를 주는 것입니

.

지금 은혜받아야 합니다.

다음 시간은 내 시간이 아닙니다.

내일도 내 시간이 아닙니다.

지금 여기서 은혜를 받읍시다.

 

 

9

제목 : 우울한 사람이 부르는 노래

자료원 : 박종순목사 충신교회

발행일 : 950319

 

시편 61편은 다윗이 B.C 979년 경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예루살렘을 떠

나 마하나임에 피신해 있을 때 쓴 것으로 보는 비탄시입니다(삼하15:17).

다윗은 자신의 비통한 심정과 정황을 2절에서 '내 마음이 눌릴 때에 땅끝

에서부터 주께 부르짖으오리니 나보다 높은 바위에 나를 인도하소서"라고

표현했습니다.

 

2절에서 말한 "눌리다"라는 말의 뜻은 "상하다. 다치다"라는 것입니다.

러니까 다윗은 아들의 반역 때문에 마음이 상할대로 상했고 다칠대로 다쳤

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의 마음이 불안하고 근심에 쌓여 있어 답답하

고 쇠약해져 있었습니다.

 

원인은 각각 다릅니다만 모든 사람은 그 어떤 이유 때문에 근심과 불안과

초조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며칠 전 가정주부가 이웃집에 놀러가 그 집 아이들을 아파트에서 떨어 뜨

리고 자신도 떨어져 죽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원인은 그사람이 우울증을 앓

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뉴욕에서 발행되는 [윌 스트리트 저널]지의 보도에 의하면 월가에서 가장

가까운 뉴욕병원은 최근 가슴통증과 심장발작환자들의 급증으로 응급실을

추가로 설치해야될 형편이라고 합니다. 병원을 찾는 대부분의 환자들은 월

가의 금융기관 종사자들로 주가의 등락, 환율변동 등으로 인해 긴장과 스트

레스가 겹치는데다 불규칙한 식사와 흡연등으로 심장발작을 일으킨다는 것

입니다.

 

뉴욕병원의 심장전문의인 이라 슐먼 박사는 "인구 1천명당 심장발작 비율

이 윌가가 가장 높다"고 했습니다. 전문가들의 말에 의하면 현대인의 40%

정신질환의 위험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열 명중 네명은 정신질환에 걸

릴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남자에 비해 여자가 정신질환에 걸릴

위험이 3배나 높다는 것입니다. 이유는 정서적으로 소극적이며 수용적이며

긴장해소의 기회가 적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요즈음 미국에서는 여성복싱이 유행하는가 하면 한국에서도 여성검도 인구

가 늘어나고 각종 레저시설마다 여성 이용자가 증가하고 있다고 합니다.

것은 한마디로 스트레스 해소를 위한 자구책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미국 바이올라 대학의 심리학교수 클라이드 네데모어(Clyde M.Narrnmore)

박사는 우울증의 원인을 다음과 같이 지적했습니다.

(1) 어린시절 부모로부터 거부를 받은 경험(parental rejection)이 있을때

(2) 부모의 지나친 비판이나 간섭(overly-critical parents)을 받은 경험

이 있을 때.

(3) 부모의 잔인한 행동(cruel parent behavior)을 경험했을 때

(4) 무의식적인 적대감정(unconsicous feelings of hostility)이 있을때.

(5) 과거의 외상적 체험(traumatic experience)이 있을 때

(6) 본능적인 충동(instinctual drives)과 사회적인 요구(demends of

 

society)사이의 갈등이 있을때.

(7) 근심과 무가치감이 있을 때.

(8) 강한 죄의식이 있을 때.

 

브리시터(C.W.Brister)교수는 우울증의 원인을 "사회가치의 혼란, 정통문

화의 붕괴, 실존적 무법현상 때문에 젊은이들 세게에 급속히 번져가고 있

"고 했습니다.

욥은 욥기 7:3이하에서 "내가 여러 달째 곤고를 받으니 수고로운 밤이 내

게 작정되었구나.. 새벽까지 이리뒤척 저리뒤척 하는구나"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본문은 2절에서 "내 마음이 눌릴 때에"라고 탄식했습니다. 한 마디

로 욥이나 다윗도 자신들의 우울한 심정을 토로한 것입니다.

 

영국의 명재상 처칠경은 세계 2차대전 당시 위기에 빠진 연합군과 영국 젊

은이들에게 '절대로 절대로 포기하지 말라"는 명언으로 도전했습니다. 그러

나 그도 일생동안 우울증으로 시달렸고 베토벤과 우울증에 시달렸다고 합

. 그러니까 우울증은 동서양 모든 사람과 빈부귀천에 상관없이 작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치료방법입니다. 전문가들의 견해와 다윗의 고백 속

에서 그 방법을 찾아 보겠습니다.

 

1. 먼저 잘못 선택한 방법들을 살펴보겠습니다.

 

근심이나 걱정, 우울증을 극복하기 위해 담배를 피우거나 술을 마시는사람

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자극성 있는 음료나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행위는 우

울증 치료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199211월 들소의 항체를 연구하던 존 폴리 박사는 흡연자와 페암환자의

페조직을 현미경으로 비교조사했습니다.폴리박사의 연구결과에 의하면 담배

연기를 들이마실 경우 담배필터의 미세한 입자들이 잘게 쪼개지면서 폐속으

로 들어가 최소한 수개월 동안 길게는 평생 동안 잠복한다는 것입니다.

 

92년도 샌프란시코의 캘리포니아 대학에서 발간한 연구보고서에 의하면 커

피는 불면증, 카페인 중독, 우울증의 원인이 되는가 하면 스트레스와 불안

증세를 유발시킨다는 것입니다.

 

지금 미국에서는 매년 6천명의 생후 6개월된 신생아가 죽어가고 있습니다.

이유는 부모가 피우는 담배 때문입니다. 건강하게 태어난 생후 1년만의 아

기가 갑자기 숨지는 것을 유아급사증후군(sids) 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간접

흡연이 주원인이라고 힐러리 클로노프 박사가 연구결과를 발표했습니다.

 

읍주, 흡연, 약물복용 등은 우울증 해결에 도움이 안됩니다. 그리고 가족

구성원 특히 유아들에겐 독약이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우울증을 해결하기 위해 불건전한 오락이나 레저에 빠지기

도 합니다. 예를들면 도박이나 불건한 모임에 빠지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문제를 더 악화시킵니다. 방법이 건전해야 결과도 건전합니

.

 

2. 올바른 치료방법을 살펴보겠습니다.

 

1) 건강한 만남을 가져야 합니다.

근심걱정에 푹빠진 사람들이나 우울증에 시다릴는 사람들끼리 모이고 만나

면 그곳은 우울증 환자 수용소가 되고 말 것입니다.

 

환자는 명의를 만나야 하는 것처럼 우울증 환자는 건강한 생각과 삶을 사

는 사람들을 만나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건강하고 건전한 삶의 이야기들

을 듣고 나누어야 합니다. 이것을 상담학에서는 상담요법이라고 부릅니다.

우울증뿐만이 아니고 인생살이도 신앙도 좋은 이웃과 바른 안내자를 만나야

합니다. 인도자나 안내자를 잘못 만나면 둘 다 불행하게 됩니다.

 

주님은 이것을 가리켜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 다 웅덩이에 빠진다"

표현했습니다. 늘 한숨짓고 탄식하는 사람, 부정적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

걸핏하면 절망하고 죽음을 얘기하는 사람들을 자주 만나고 대하면 우울증상

은 더 심각해지고 맙니다.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나에게 도움이 될만한 사람

들을 만나야 합니다.

 

2) 건강한 활동을 해야 합니다.

우선 세상을 밝은 눈으로 보기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에게도 할

일이 있고 해야될 일이 있다는 것을 다짐해야 합니다. 그리 내가 살고 있고

해야될 일이 있다는 것을 다짐해야 합니다.그리고 내가 살고 있는 주변에는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줄지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에 눈을 돌

려야 합니다.

 

그들은 병들고 가난하고 연약한 사람들입니다. 걷지 못하고 움직이지 못하

고 볼 수 없고 말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병상에서 일어나 앉지도

못한 채 6개월-1년씩 신음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에게 무엇인가를 베

풀고 나눠주고 베푸는 삶으로 방향을 전환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지나

간 일을 일삼아 되새기고 불행했거나 힘들었던 과거를 되살릴 필요가 없습

니다. 가치있는 일을 위해 손을 펴고 봉사를 시작하십시오. 남을 섬기고 돕

는 일을 찾아서 시작하십시오.

 

3) 기도로 치유해야 합니다.

다윗은 본문 61:1에서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시며"라고 했고 2절에서는 내

마음이 눌릴 때 땅끝에서부터 주께 부르짖으오리니"라고 했습니다. 그 뜻은

비록 내가 되돌아 올 수 없는 땅끝 벼랑으로 밀려 났다고 하더라도 거기서

주님을 향해 부르짖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기도하겠다는 것입니다. '기도할 수 있는데 왜 걱정하십니까

"라는 복음성가는 우리에게 용기와 믿음을 줍니다. 우리는 1-2절에서 기억

애햐할 교훈이 있습니다. 그것은 부르짖어야 한다는 것과 땅끝에서라도 부

르짖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높은 바위 위에 인도하실 줄로 믿고 기도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부르짖는다는 것은 소리내어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간절히 기도하

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가 땅끝에서 기도한다는 것은 절망과 좌절과 우울의

벼랑에서도 기도한다는 것을 뜻하고 그렇게 기도하면 하나님은 나를 높은

바위 위로 끌어 올려 주신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나를 근심과 걱정과 우울증의 심면에서 끌어 올려 주신다는 것입

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큰 소리로 소리 높여 기도합시다.

 

4) 주님의 보호를 받아야 합니다.

3절을 보면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원수를 피하는 견고한 망대'라고 했고

4절을 보면 "내가 영원히 주의 장막에 거하며 내가 주의 날개 밑에 피하리

이다"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피난처,망대,날개'라고 노래합니다.

이 셋은 모두가 보호수단입니다.그리고 4절을 보면 "내가 영원히 주의 장막

에 거하며"라고 했습니다. 주의 장막은 성막(Tabernacle)을 말합니다. 성막

은 하나님이 계시는 처소입니다. 내가 하나님이 계시는 성막에 피하여 머문

다면 무슨 걱정이 있으며 염려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피난처, 망대, 날개, 장막으로 믿고 의뢰했던 다윗은 사울왕에게

쫓기고 압살롬에게 쫓기는 비참한 현실 속에서도 결코 절망하거나 자신을

자학하지 않았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피할 곳이 있고 바라볼 곳이 있고 숨을 곳이 있고 영원히 머물 장막이 있

는 사람이 무엇때문에 우울한 삶을 살 필요가 있겠습니까. 다윗처럼 하나님

을 절대로 의지한다면 모든 정신적 고통은 사라지고 말것입니다. 성경은 인

간의 성공,건강, 행복만을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성경에는 고난,역경, 불안,실패, 사건, 위기상황 등도 낱낱이 기록되어 있

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해결하시고 처리하신 하나님의 능력과 섭리를 기

록하고 있습니다. 누구라도 위기상황이나 절망에 직면할 수 있습니다. 누구

라도 불안이나 걱정으로 인한 우울증 증세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어떤 믿으을 가지느냐에 따라 그것들을 극복할 수도 있고 무릎을 꿇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전문가들이 말하는 약물치료법이나 상담요법도 우울증

치료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육체는 정신이 조절하고, 정신

은 영혼이 통제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영혼은

신앙에 의해 좌우된다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영혼이 바로 서면 정신도 바로 서고 육체도 바로 서게 됩니다. 영혼이 건

강하면 정신도 육체도 바른 리듬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그 어떤 방법보다

믿음의 방법이 가장 위대하고 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는 나의

피난처, 망대,날개, 장막이심을 믿읍시다. 그리고 날마다 고백합시다.

 

 

10

제목 : 향과 기도

자료원 : 박종순목사 충신교회

발행일 : 950312

 

요한계시록에는 3대 재앙이 예고되어 있는데 그것은 일곱인의 재앙. 일곱

나팔의 재앙, 일곱대접의 재앙입니다. 인을 뗄 때마다 사건이 터지고 나팔

을 불때마다 재앙이 임하고 대접을 쏟을 때마다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가 임

하는 모습이 제시되어 있습니다.

 

계시록 8장은 일곱번째 인을 떼었을 때 일어난 사건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천사가 금향로에 많은 향을 담아 하나님께 드리는데 성도들의 기도와 함께

드리며 그 향과 기도가 하나님 앞으로 올라 갔다는 것입니다. 향과 기도가

함께 하나님께 올라 갔다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1. 향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만드는가?

 

1) 구약의 경우

구약의 경우 향은 크게 두가지로 구분됩니다. 하나는 일반적인 향으로 주

로 화장용이나 선물용으로 사용했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 드리는 거룩한

향으로 그것은 제조방법이나 사용방법이 정해져 있었습니다. 출애굽기

30:22이하를 보면 향 만드는 법이 나와 있는데 그것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

습니다.

 

첫째, 최고의 향재료를 만들어야 합니다.

둘째, 여러 가지 향 소합, 나감, 풍자 등 최고급 향을 배합하되 동일한 양

으로 해야 합니다.

셋째, 소금을 넣어야 합니다(다른 것은 첨가되면 안됩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무엇이든 최고의 것을 드려야 합니다. 시간도,인생

, 물질도 다 쓰고 남은 찌꺼기를 드리면 안됩니다. 옛날 사람들은 그 해

거둔 첫 수확 가운데 가장 좋은 것은 나랏님께 진상을 했습니다.

 

어느 농부는 매년 제일 빨리 거둔 쌀을 대통령께 바친다면 청와대로 가져

온 일도 있습니다. 하나님게 드리는 향을 최고의 것이어야 했던 것처럼 기

도의 시간도 제일 좋은 시간을 드려야 합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할 때 건축자재는 최고 최상품이었습니다. 금은 오빌

에서 수입한 정금이었고 나무는 그 향이 은은한 레바논의 백향목이었고 둘

은 석질이 가장좋은 예루살렘 근교의 것을 사용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모든 것은 언제나 최상품이어야 합니다. 최고의 향품을 일정량으로 배합하

겠다는 것은 조화와 균형을 의미합니다.

 

어떤 사람은 기도가 좋다면서 살립도 안하고 성경도 읽지 않고 교회도 안

나오고 사람도 안만나고 기도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내가 기도하고 은혜를 받고나면 평소 싫었던 사람이 좋아져야 합

니다. 멀리하던 사람이 가까와집니다. 지옥처럼 느껴졌던 가정이나 세상이

할 일 많은 일터가 됩니다. 귀찮던 일들이 즐거워지고 멀어졌떤 교회가 사

랑스러워지고 힘없던 신앙생활에 활력이 넘치게 됩니다.

 

세 가지 향을 동일한 중수로 배합했던 것처럼 기도생활은 조화와 균형을

잃으면 안됩니다. 예를 들면 가정주부의 경우 "하나님 아버지!"도 잘 불러

야 하지만 "여보!"고 잘 부를 수 있어야 합니다. 기도생활이란 외골수로 빠

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소금을 쳤다는 것입니다.소금을 치면 세가지 현상이 벌어

집니다.

 

 

 

 

하나는, 순이 죽게 됩니다.

배추도 생선도 소금을 치면 순해집니다. 자칫 기도생활이나 영적체험에 깊

이 빠지다 보면 팔딱 거리고 교만해지기 쉽습니다. 거기다 소금을 쳐야 합

니다.

 

둘은, 맛이 납니다.

제아무리 설렁탕,곰탕,삼계탕이 진국이라도 소금을 치지 않으면 맛이 없습

니다. 제아무리 열심이고 기도를 잘 하고 성경을 많이 알아도 그것 때문에

맛을 잃어버리면 안됩니다.

맛없는 음식은 따돌림을 받습니다. 소금치지 않는 기도생활이나 신앙생활

은 이웃이나 교회공동체로부터 따돌림을 받게 됩니다. 소금치고 맛있는 사

람이 되어야 합니다.

 

셋은,고칩니다.

열왕기하 2:19-22을 보면 여리고의 물근원에 문제가 있어 그 물로 농사를

지으면 곡식이 익기도 전에 떨어졌습니다. 엘리사가 어느날 물 근원(수원

)소금을 던져 그 물을 치료했습니다. 내가 소금처럼 녹아 희생하면 가정

, 교회도, 역사도 치료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치 소금이 녹아내리듯 십자가에 자신을 던졌기 때문

에 모든 인간이 고침을 받게 될 것입니다.

소금은 그대로 있으면 안됩니다. 녹아야 소금입니다. 소금은 맛을 잃으면

안됩니다. 맛 잃은 소금은 쓰레기일 뿐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향은 그 사용방법도 일반향의 용도와 달랐습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첫째,하나님을 위해 만든 향은 거룩한 목적으로 사용해야 하빈다.

예를 들어 자기몸에 바른다든지 화장실에 뿌리다든지 하면 안됩니다. 기도

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의 목적은 하나님과의 교제이며 신령한 문

제를 위해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칫 잘못하면 이사문제, 집 사는 문

, 어디가는 문제, 누구만나는 문제,따위가 기도의 전체를 차지한다면 그

것은 육체를 위한 기도로 끝나는 것입니다. 더 쉽게 말하면 하나님께 드리

는 신령한 기도를 수단이나 방법으로 사용해선 안됩니다. 개인의 운명이나

점쳐주고 대소사를 밝혀주는 것으로 기도를 전락시켜선 안됩니다.

 

둘째, 아침 저역으로 분향해야 합니다.

출애굽기 30:7-8을 보면 아침마다 아론이 분향했고 저녁 등불켤 때 다시

분향했습니다. 아침은 하루의 시작이고 저녁은 하루의 마감입니다. 그러니

까 분향으로 시작하고 분향으로 마치라는 것입니다. 분향은 기도입니다.

도로 하루를 시작하고 기도로 하루를 끝내야 합니다. 만일 기도소리를 들으

며 태어나고 기도하며 살다가 기도로 숨을 거둘 수만 있다면 그보다 더 행

복한 일이 없을 것입니다. 기도는 곧 삶이어야 합니다.

 

셋째, 제사장 외엔 분향하지 못했습니다.

역대상 23:13을 보면 아론과 그 자손들만 분향하되 그들도 몸을 성결케하

고 분향한다고 했습니다. 레위기 10:1-2을 보면 아론의 아들인 나답과 아비

후가 다른 불로 분향하다가 불에 타 죽은 사건이 기록되어 있고 소멸되어

죽었습니다. 역대하 26:16-19을 보면 웃시야 왕이 제사장만 할 수 있는 영

역을 침범해 분향하려다가 나병에 걸린 일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한마디로

분향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설명해 주는 것입니다.

기도는 분향입니다. 헌신짝처럼 취급해도 안되고 그 필요성을 외면해도 안

됩니다.

 

2) 신약의 경우

크게 두가지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하나는 기도입니다. 본문에서 밝힌대로 향과 기도가 함께 금향로에 담겨

하나님께로 올라간다는 것은 곧 향이 기도임을 설명해 주는 것입니다.

향과 기도는 하나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받으시고 하나님께로 올라가는 것

입니다. 그리고 금향로에 담는다는 것은 기도가 그만큼 귀한 것이기 때문입

니다.

둘은, 삶을 뜻합니다. 고린도후서 3:15을 보면 우리를 그리스도의 향기라

고 했고 3:14을 보면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탸내시는 하나님

께 감사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예수 향기를 날릴 수도 있고 악취가 날 수도

있습니다. 백합화는 바람이 불면 그 향이 널리 퍼집니다. 그리고 찢기면 더

향이 짙어집니다. 우리가 풍랑을 겪고 상처받고 찢길 때 그 사건이나 아픔

때문에 예수 향기가 널리 전파된다면 정말 좋은 향이 될 것입니다.

 

2. 향과 기도의 의미

 

위에서 말씀드렸습니다만 향은 성도들의 기도이며 하나님께 올라가는 향연

입니다. 하나님을 위해 만든 향은 하나님께만 드려야 하고 다른 향은 섞어

만들어도 안됩니다. 그리고 그 향을 드리는 장소 다시 말하면 분향 장소는

성전이라야 합니다. 아무데서나 분향하면 안됩니다. 그러니까 정한 방법대

로 정한 사람이 정한 장소에서 해야 합니다. 왜 성전에서 분향해야 합니까?

 

첫째, 하나님이 성전에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역대하 7:1을 보면 '여호와의 영광이 그 전에 가득하니"라고 했고 7:16

보면 "내 눈과 내 마음이 항상 여기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솔

로몬이 성전을 짓고 난 후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을 때 주신 응답입니다.

하나님은 계시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무소부내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성전을 처소로 삼으시고 그곳에 계시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려면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 가야 합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말씀드리고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성전으로 나와야 합니다.

 

둘째, 성전에서 기도를 들으시기 때문입니다.

역대하 7:15을 보면 '이곳에서 하는 기도에 내가 눈을 들고 귀를 기울이리

"라고 했습니다. 성전에서 기도하면 비를 내리고 재앙을 거두시고 죄를

사하시고 그 땅을 고쳐주신다고 했습니다.

 

얼마전 농수산부 직원들이 산에 올라가 돼지 대가리를 상에 올려놓고 넙죽

히 엎드려 절하며 비를 달라고 기우제를 지냈스빈다. 우선 세계화를 표방하

고 최첨단 과학시대를 살아가는 국가 관리들이 돼지 대가기를 놓고 절하며

기우제를 지냈다는 그 발상이 기가 막혔습니다.

 

돼지 대가리 놓고 절하는 것이 세계화는 아닙니다. 그러나 비는 오지 않았

습니다. 만일 그때 바로 혹은 그 다음날 비가 내렸다면 농수산부는 기우제

때문이라고 떠벌렸을 것이빈다. 제때에 비내리고 바람이 순하게 부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하나님이 비를 내리시고 바람의 방향을 돌리

시는 것입니다. 미국도 일본도 과학의 힘으로 비오게 하고 태풍을 막고 땅

갈라지는 것을 막지는 못합니다.

 

셋째, 성전에 영원히 계시기 때문입니다.

역대하 7:16을 보면 "내 이름으로 여기 영영히 있게 하였음이라"고 했습니

. 잠깐 머물다보면 떠나는 곳이 아닙니다. 영원히 거기 계시겠다는 것입

니다. 그러나 내가 사는 집을 언젠가 그대로 두고 떠나야 할 곳이빈다.

럼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에 나와서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결론으로 본문 8:5을 주목해야 합니다. "천사가 향로를 가지고 단

위의 불을 담아다가 땅에 쏟으매 뇌성과 음성과 번개와 지진이 나더라"

했습니다.

 

하나님께 상달된 성도들의 기도 속에는 순교자의 피의 호소도 있었습니다.

고난받고 핍박받은 성도들의 탄원도 있었습니다. 그 기도를 받으신 하나님

게서 드디어 응답으로 심판의 불을 쏟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

는 반드시 하나님께 상달됩니다. 그리고 반드시 응답됩니다. 문제는 기도해

야 하는데 안하는 것입니다.

 

기도하면 되는데 안하는 것입니다. 기도하면서 염려하고 걱정하는 것입니

. 기도하긴 하는데 의심하는 것 이것들이 문제인 것입니다. 하나님께 향

을 드리듯 하나님께 기도합시다. 향을 바로 만들어야 하듯 기도를 바르게

합시다. 성전에서 분향해서 하듯 성전에 나와서 기도합시다. 향이 하나님께

올라가듯 내 기도가 하나님께 올라가는 것을 믿고 기도합시다. 향은 향기로

운 것처럼 내 기도와 삶이 향기나는 것이 되게 합시다.

주여 기도를 받으소서.

 

 

11

제목 : 기도에 최선을

자료원 : 박종순목사 충신교회

발행일 : 950305

 

일반적으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책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구원

에 이르게 하는 책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다른 말로 성경을 부른다면 그

것은 [기도의 책]입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성경은 창세기에서 말라기까지 그리고 마태복음에서 요한계시록까지 기도

에 관한 이야기들과 기도의 사람들에 과한 이야기들로 채워져 있기 때문입

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기도가 얼마나 중요하며 필요한 것인가를 설명해 주는

증거들이기도 한 것입니다. 특히 시편은 거의가 다 기도시들로 엮어져 있습

니다. 시편 145편의 경우도 다윗이 을었던 찬송시로 되었습니다만 그 내용

을 보면 그의 간절한 고백과 간구가 전편을 흐르고 있습니다만 그 내용을

보면 그의 간절한 고백과 간구가 전편을 흐르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본문

은 어떻게 기도해야 하며 어떤 사람의 기도를 하나님이 들으시는가를 설명

해 주고 있습니다.

빌리 그레이엄 목사는 "내가 날마다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내가 매일 아침마다 하나님과 이야기하기 때문이다"라고 했

습니다.

무디는 "기도란 내 사고와 목적으로 하나님을 끌어 당기는 것이 아니요 나

의 사고와 배려와 갈망을 하나님 편으로 끌어주어 그의 도안과 예정에 맞추

어 조화를 이루게 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하여 기도의 자세와 응답받는 비결을 찾을 수 있습니다.

 

1. 간구하는 자에게 가가이 하십니다.

 

18절을 보면 '여호와께서는 자기에게 간구하는 모든 자 곧 진실하게 간구

하는 모든 자에게 가까이 하시는도다"라고 했습니다. 18절 속에는 다음과

같은 교훈이 들어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께 간구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간구하는 모든 자"라는 말씀의 뜻은 기도의 대상이 누구인가를

밝혀 줍니다. 기도의 대상설정은 매우 중요합니다. 기도의 대상은 하나님입

니다. 성모 마리아나 성인은 기도의 대상이 아닙니다. 우리의 기도를 받으

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분 뿐입니다.

 

둘은, 모든 자의 기도를 들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특정인의 기도만 들으시거나 특정인에게만 응답이나 계시를 주시

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나만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계시를 받고 지시를 받

는다고 생각한다든지 하나님이 내 기도만 들으신다고 생각하거나 말하는 사

람이 있다면 그것은 큰 잘못입니다. 그리고 자기는 기도하지 않으면서 기도

한다는 사람들을 찾아 다니며 마치 무당이나 점쟁이를 찾아가 운명을 묻고

점치듯이 무엇을 알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더 잘못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입으로 간구하는 자들과 자기 소리로 기도하는 모든 사람들

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시편 5:2을 보면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십니다. 시편 5:2을 보면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부르짖는 소리

를 들으소서 내가 주께 기도하나이다"라고 했고, 시편5:3을 보면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라고 했습니다. 시편 66:17을 보면 "내가 내 입으

로 그에게 부르짖으며 내 혀로 높이 찬송하였도다"라고 했습니다.

 

내가 내 입으로 기도할 때 하나님은 모든 자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특정

인에게만 그 응답을 국한하여서는 하나님이 아니신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셋은, 진실하게 간구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진실한 간구란 과장이나 꾸밈이나 거짓이 없는 기도를 뜻합

니다. 현대인은 포장문화에 익숙해 있습니다. 쓰레기 종량제로 포장기피현

상이 일어나고 있다고는 합니다만 시원찮은 상품도 고급포장으로 감싸 놓으

면 고가처럼 보이고 사람들도 겉치장만 화려하면 진면목은 어떻든 높이 평

가하는 세상이 돼 버렸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때는 그런 따

위의 포장이 아무 소용없습니다.

 

예를 들면 고졸의 기도보다 대졸의 기도를 더 잘 들으신다든지 석사의 기

도보다 박사의 기도를 더 높이 평가하신다든지 월수입 100만원 보다는 1000

만원짜리의 기도를 더 잘 들으신다든지 하는 인간적 논리가 전혀 통하지 않

습니다.

 

하나님이 들으시는 기도는 진실과 간구입니다. 우린 하나님 앞에 정직과

진실과 솔직한 모습과 마음으로 서야 합니다.헛기침을 할 필요도 없고 채색

옷으로 자신을 감출 필요도 없습니다.

 

요즈음 젊은이들 유행어 가운데 [알몸표 수영복]이라는게 있다고 합니다.

적나라한 모습을 표현하는 말일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설때마다 "나는 알몸표 수용복을 입었습니다."라는

심정으로 서야합니다.

[간구]라는 말을 헬라어로 파라칼레라고 합니다. 그 뜻은 '가까이서 부르

'라는 것입니다.

 

진실한 사이는 가까운 사이입니다. 서로 허위가 있고 거짓이 있고 꾸밈이

있으면 사이가 가까워질 수 없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가까이서 부르지 못하

는 것은 나에게 허위가 있고 감추고 싶은 죄가 있기 때문입니다. 부부간을

가리켜 무촌간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모든 인간관계에서 가장 가까운 관계

라는 뜻이빈다.

 

부부관계가 왜 가장 가까운 무촌간입니까? 그것은 서로 숨김이 없다는 것

입니다. 부부간에 숨기는 것이 많을수록 사랑은 반비례합니다. 아무 것도

가리지 않고 만날 수 있는 유일한 관계는 부부관계입니다.그러나 그보다 더

적나라하게 만날 수 있는 관계가 있습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과 나와의 관

계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가까이서 부르는 것을 원하십니다. 하늘에서 우리를 부르실

수 있었습니다만 가까이서 부르시기 위해 친히 이 땅 우리 곁에 오셨습니

. 그리고 우리들에게도 가까이 나와서 부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린 여기서 왜 우리가 때를 따라 교회에 나와야 하며 교회에 나와 기도해

야 하는가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요구입니다.

가능하면 교회에 나와 정한 시간에 기도해야 합니다. 여건상 그것이 불그

낭하다면 시간을 정하고 교회가 있는 동부 이촌동을 바라보며 있는 곳에서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진실하게 간구하는 모든 자의 기도를 들어주신

다는 것을 믿고 기도합시다.

 

2. 경외하는 자의 소원을 이루어 줍니다.

 

19절을 보면 "저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의 소원을 이루시며 또 저희 부르짖

음음을 들으사 구원하시리로다"라고 했습니다.

두 가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경외하는 자의 소원을 이루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경외]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높이고 받드는 태도를 의미

합니다. 하나님은 아버지이시면서 창조주이십니다. 사랑이시면서 공의이십

니다. 부드러우시면서 강한 분이십니다. 용서하시면서 때리시는 분이십니

. 부드러우시면서 강한 분이십니다. 용서하시면서 때리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한 면만을 보면 안됩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하나

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소련의 저항작가 솔제니친이 미국에서의 망명생활을 청산하고 그의 조국

소련으로 돌아갔습니다. 이유는 조국을 버릴 수 없다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비록 가난하고 낙후된 조국 러시아이지만 자신의 조국을 인정했기 때

문에 조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섬기고 돌아가야 할 하나님의 품은 러시아의 품이 아닙니

. 미국의 품도 아닙니다. 영원히 안전하고 풍요로운 하나님의 품입니다.

그곳에 나의 행복이 있고 응답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품을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둘은 부르짖으면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풍랑으로 난파당한 선원들이 무인도에서 구원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3

월째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그들이 취할 태도는 어떤 것이어야 하겠습

니까? 지나가는 배가 스스로 알아서 우리를 구해주겠거니라며 앉아서 잡담

이나 나누고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아니면 이왕 죽은 목숨 발버둥 칠 필

요가 있겠느냐며 포기해 버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받는 길은

나무를 모아다가 불을 지펴 연기를 피우고 옷을 벗어 높은대로 올라가 흔듦

도 죽을 히을 다해 소리를 질러야 할 것입니다.

 

본문에서 "부르짖음을 들으사 구원하신다"는 말씀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부르짖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취할

수 있는 최대한의 특권입니다.

 

소경 바디매오는 주님을 향해 부르짖고 두 눈을 떴습니다. 가나안 여인은

부르짖고 딸을 괴롭히던 귀신을 내쫓았습니다. 어떤 과부는 부르짖고 자신

의 억울한 원한을 풀었습니다. 누가복음 18:7을 보면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라고 했습니다.

부르짖지 못하는 몇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왜 부르짖어야 하는가에 대한 필요성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입니

.

둘째, 목이 막혔기 때문입니다. 교만이나 자존심으로 목이 붓고 막히면 소

리지르지 못합니다.

셋째는 경험이 없기 때문입니다.

부르짖고 응답받고 구원을 경험한 사람들은 소리높혀 하나님을 찾고 부르

게 됩니다. 그러나 그 경험이 없는 사람들은 부르짖지 못합니다.

넷째,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부르짖으면 구원받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잇

다는 확신이 없기 때문에 부르짖지 못합니다.

요즈음 연예인이나 가수를 따라 다니던 10대 오빠부대가 체육관으로 그 주

소를 옮겼스빈다. 농구나 배구 경기가 벌어지는 체육관은 온통 고래고래 소

리를 지르는 오빠부대들의 괴성으로 떠나가고 있습니다. 물론 그것은 한때

일로 끝날 것입니다. 그러나 그 극성과 정열은 누구도 흉내낼 수가 없습니

.

 

저는 이 괴성과 응원열기를 바라볼 때마다. 우리들의 기도제사와 신앙열기

를 따져보곤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죄송하고 부끄러운 마음을 갖곤

합니다. 세상일 때문에 악을 쓴다든지 신경질 때문에 소리를 지른다든지 홧

김에 울부짖는 것은 창피스런 일입니다. 그리고 아무런 유익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는 것은 특권이며 영광입니다. 힘써 부르짖어

기도합시다.

 

3.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를 보호해 주십니다.

 

20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는 다 보호하시고 악인은 다

멸하시리로다"라고 했습니다. 우린 여기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를 선한 사

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악인으로 대칭시키고 있음을 주목

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보호하신다는 것도 주목해

야 합니다.하나님이 악인을 지키시고 보호하실 까닭은 없습니다.

 

20절은 시편 145편의 결론입니다. 누구의 기도를 들으시는가, 누구를 지키

시는가 누구를 보호해 주시는가 누구의 소원을 들어 주시는가에 대한 대답

20절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의 기도와 소원을 들어주시고 그를

지키시고 보호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물그릇과 같습니다. 그릇이 크면 물은 많이 담을 수 있지만 그릇이

작으면 물을 적게 담을 수 밖에 없습니다. 사랑은 많이 크게 하는 사람이

많은 사랑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없

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찌어다"라고 했습니다.

 

의도적으로 하나님을 거역하고 증오하고 반역하면서 사랑을 기대하는 것은

오산입니다. 우리는 시편145:20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사랑하면 보호해

주시고 악인은 멸하신다"는 말씀을 깊이 새겨야 합니다. 우리는 나를 사랑

하시고 내가 사랑하는 주님을 향해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안해도 된다는 교

만이나 착각은 버립시다.

 

행복한 사람은 행복의 지속을 위해,고독한 사람은 그 고독의 극복을 위해,

병든 사람은 치유를 위해, 은혜받은 사람은 감사를 위해,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뜨거운 사랑의 고백을 위해 기도의 손을 높이 듭시다.

 

기도에 최선을 다하면서 최상의 응답이 임할 것입니다.

 

 

12

제목 : 주 밖에 없나이다

자료원 : 박종순목사 충신교회 예장통합

발행일 : 950226

 

시편 150편은 거의가 다 다윗의 저작입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다른 사람

의 작품도 몇 편씩 끼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다윗과 동시대의 인물로 보는

아삽이나 아굴 그리고 다윗와의 아들인 솔로몬 등의 시가 수록되어 있습니

.

 

시편 73편은 아삽의 시 가운데 하나입니다. 시편 73편의 목적은 하늘과

땅 그 어느 곳에도 주와 같은 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만을 영원

히 찬양하며 경배하겠다는 것입니다. 특히 본문을 중심으로 아삽의 신앙과

고백을 찾아보겠습니다.

 

1. 오직 주님 한 분 뿐이라고 노래합니다

 

25절을 보면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밖에 나

의 사모할 자 없나이다"라고 했습니다.

동남아에서 잡신이 많은 나라가 일본입니다. 200만개의 잡신을 섬긴다

고 합니다. 그 다음이 중국이고 그 다음이 한국입니다. 아삽이 이 시를 을

고 노래를 불렸던 그 시대의 중동지방 역시 우상과 잡신이 들끊고 있었습니

. 예를 들면 바알,아세라, 아스다롯, 몰렉등 사람들이 신격화하고 숭배하

는 우상이 많이 있었습니다.

자연히 그러한 주변의 문화와 종교의 영향을 받는 이스라엘 사람들도 유일

신이신 하나님을 떠나 우상이나 잡신에게 끌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상

황에서 아삽은 유일신 신앙을 고백한 것입니다. "하늘에서도 땅에서도 주

밖에 없으며 사모할 자가 없다"는 이 고백이야말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

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던 베드로의 고백과 상통합니다.

 

주 밖에 없다는 것은 하나님을 오직 한분이신 주님으로 인정한다는 것입링

니다. 그러나 인정하는 것만으론 안됩니다. 그 주님을 사모해야 합니다.

모한다는 것은 마음을 준다는 것이며 사랑의 대상으로 결정했다는 것입니

.

 

찬송작가 프라이(C.W.FRY)"내 진정 사모하는 친구가 되시는 구주 예수

님은 아름다워라"고 노래했습니다. 하와를 만드신 하나님은 "너는 남편을

사모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창세기 3장의 선악과 사건 이후 서

로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깨진 부부가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사모하며 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마귀는 주님과의 간격을

떼도록 하기 위해 온갖 유혹과 시험으로 다가옵니다. 인간관계를 통해서 다

오기도 하고 물질을 통해서 오기도 하고 명예를 통해서 오기도 하고 권력을

통해서 오기도 합니다. 그리고 모든 유혹과 시험이 갖는 공통점이 있습니

.그것은 달콤하고 감미롭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일 좋은 것이며 가장

필요한 것이라고 소근거립니다. 그러나 그 시험에 빠진 사람은 모두가 한결

같이 실패했거나 파멸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생명을 잃었던 에덴동산에서 쫓겨났

습니다. 가인은 질투와 시기 때무에 시험에 빠져 최초의 살인자가 되었습니

.

 

삼손은 블레셋 여자 들릴라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두눈이 뽑히는 수모를

겪어야 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욕심의 유혹에 빠져 성령님을 속이려다가 한낱 한시

에 부부가 죽었습니다. 그러나 오직 주님만을 사모하고 바라보고 의지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복을 받았고 은혜를 입었습니다. 다윗은 실수로 하나님을

외면하고 유혹에 빠졌었지만 그러나 하나님께로 돌아와 회개했을 때 하나님

이 그를 위대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하늘에도 땅에도 내가 섬기고 사랑하고 사모할 분은 주님뿐임을 믿고 고백

합시다.

 

2. 인간의 육체는 쇠잔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며 분깃이라고 노래

합니다.

 

여기서 시인은 육체를 쇠잔하는 존재로 보고 있습니다. 점점 약해지고 힘

이 없어지다가 결국 침상에 눕게 된다는 것은 전세계에서 매년 1,500만회

정도의 지진이 발생하는 것으로 전문가들은 추정합니다. 그중 간진 (리히터

규모 6-9)100회 이상, 중진(4-6)15천회정도,나머지는 (1-4) 창문이

흔들릴 정도의 미진나이라고 합니다. 문제는 현대과학으로는 정확한 지진의

예측이 어렵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우물에서 거품이 끓어오르고 쥐가 쥐

구멍에서 기어나와 비틀거리며 돌아다니고 동면하던 뱀들이 기어나와 길에

서 열어 죽는다는 것입니다.

 

일반 칸사이지방의 대지진이 있기 전 동남해에선 이상하리만큼 물고기가

잡히지 않았고 중국에서는 금년들어 닭,돼지,,고양이 등이 유별난 행동을

보였다고 합니다. 유럽에서가는 외양간에 메어둔 황소가 하늘을 바라보고

유별나게 울면 지진이 일어났고 중국에서는 거북이떼가 떼지어 기어나면 지

진이 일어났따고 합니다.그러나 최첨단의 과학을 자랑하는 미국이나 일본

도 지진예측에 실패했습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인간이 얼마나 무지하며 무

력한가를 설명해주는 것입니다.

 

시인은 고백합니다. "인간은 쇠잔하나 하나님은 영원하시다"고 사람은 잘

못알고 있는것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인간이 대단한 존재이며 무엇이나 해

낼 수 있다는 것도 잘못 알고 있는 것 중에 하나입니다.

 

술을 마시지 않는 사람에 비해 술을 많이 마시는 사람이 암이 걸렸을 경우

퍼지는 속도가 10-20배가 넘는다고 합니다. 술은 몸 속의 세포들 뇌신경세

, 위장세포, 간세포, 백혈구들의 저항력을 약하게 해서 암의 전이가 빨라

진다는 것이다.

 

샌디에고 의과대학의 암 전문인인 이기천교수는 병원에서 암으로 죽어가는

환자들을 많이 보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죽는 모습은 부자나 가난한 자나

높은 자나 낮은 자나,동양인이나 서양인이 다른 점이 없더라는 것입니다.

두려움,공포, 아픔으로 인해 그 죽는 순간이 너무나 처절하더라는 것입니

. 그런데 그리스도인의 경우는 다르더라는 것입니다. 평안하게 죽는 사람

들은 모두가 주님을 바라보는 사람들이더라고 했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

. 시인의 고백대로 나의 영원한 반석이며 피난처이신 주님을 믿기 때문인

것입니다.

 

3. 하나님을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고 노래합니다.

 

27절을 보면 "주를 떠난 자를 주께서 음녀같이 벌하신다"고 했고 28절을

보면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이 복이라"고 했고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았다"고 했습니다.

 

우리나라의 GNP1963100달러였습니다. 1989년에 5천달러를 돌파했고

드디어 1995년인 금년에 1만달러를 넘게될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가 1만달러 시대에 접어들었을 경우 발생할 문제들을 전문가들은

다음과 같이 예견하고 있습니다.

@ 승용차의 대형화

@ 가전제품의 원색디자인과 대형화

@ 독신자 용픔 시장 확대

@ 교외에 세컨드 홈

@ 전력소비의 급증

@ 상품수요의 폭발

@ 취미생활의 변화

@ 투자패턴의 변화

@ 자동화 등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걱정하는 것은 기독교인들의 신앙생활 태도의 변화입니다.

득이 높아지고 문화적 욕구가 충족되면 사람들은 하나님을 찾고 의지하는

대신 세상을 의지하고 인간의 지식이나 능력을 의지하게 됩니다. 주말이면

산으로 바다로 해외로 빠져 나가기 때문에 교회는 빈자리가 많아지게 될 것

이고 찬송과 기도소리는 작아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시인의 고백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27절을 보면 '주를

멀리하는 자는 망하리니 주를 떠난 자를 주께서 저를 음녀같이 멸하셨나이

"라고 했습니다.

잘 산다는 것 그자체가 죄는 아닙니다. 소득이 높아진다는 것이 문제될 것

도 없습니다. 문제는 그런 것들 때문에 주님을 멀리 하거나 떠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멀리하거나 떠나면 망하고 멸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세계는 하나님이 계셔야할 자리에 과학문명을 대치시켰습니다. 그러

나 세계도처에서 전쟁과 지진과 기근과 홍수와 전염병과 폭염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과학과 문명 때문에 하나님을 떠난데 대한 심판입니다.

 

인도네시아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말라리아를 퍼뜨리는 모기를 죽이기 위

해 강력한 살충제를 뿌렸습니다. 그런데 모기만 죽은 것이 아니라 모기들과

함께 초가지붕에 서식하는 곤충들을 잡아 먹는 별들도 함께 죽었습니다.

과로 초가지붕 속에는 곤충이 들끓기 시작했고 얼마뒤 지붕이 곤충 때문에

무너져 내렸습니다.

 

인간들의 무지와 교만은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를 지금 지옥으로 만들어가

고 있습니다.국가도 가정도 개인도 하나님을 떠나거나 멀리 하면 안됩니다.

시인의 고백대로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이 최상의 복인 것입니다.

 

전 세계 인류가 하나님이 주셨던 본래의 형상을 회복하고 주님께로 돌아오

는 날 이 세계는 파라다이스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합시다. 하나

님의 뜻을 따라 살아갑시다.

 

성공하고 잘 산다는 이유 때문에 하나님을 멀리하거나 떠나지 맙시다.

나님을 가까이 하는 사람이 복있는 사람입니다.

 

4. 모든 행사를 전파하겠다고 노래합니다.

 

28절 끝을 보면 "모든 행사를 전파하리이다"라고 했습니다. 지난 215

오전 한국통신회의실에서 가진 한국-러시아-일본 3개국 부총리간에는 해저

광케이블을 통한 영상회의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홍보와 교류의 새로운 기

대가 열렸음을 시사합니다.

 

세계 여러나라의 지도자들이 한 곳에 모이지 않아도 국제회의가 가능해진

것입니다. 한마디로 정보시대의 새로운 장이 열린 것입니다.그런데 시인이

주의 행사를 전하겠다는 것은 자신의 입과 몸과 몸과 삶으로 전하겠다는 것

입니다. 제아무리 광케이블을 통한 정보교환시대가 도래했다고 하더라도 인

간은 직접 만나 얼굴을 대하고 손을마주 잡아야 하는 존재인 것입니다.

리는 최대한 문명의 이기들을 선교도 구로 사용해야 합니다. 그러나 내가

할 일을 기계에서 맡길 수는 없습니다.

 

시인은 "주 밖에 없다는 사실을 자신의 입으로 전파하겠다"고 고백합니다.

"주 밖에 없나이다."

그렇습니다. 내가 영원히 찬양하고 섬길 분은 주 밖에 없습니다. 나의 반

석이며 피난처이신 분도 주 밖에 없습니다.

내가 가까이하고 복받을 수 있는 분도 주님 밖에는 없습니다. 영원히 부를

노래도 주 밖에 없습니다.

"주 외에 누가 있으리요"

"주 밖에 없나이다"

"영원히 가까이 할수록 행복하고 떠나면 죽는 분도 주님 뿐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그 중심을 지키고 믿을 때 올바른 신앙이 되는 것입니

.주님만 나의 구원,요새,산성,피난처시라는 다윗의 고백과 아삽의 노래는

그 맥을 함께하고 있습니다.

이 고백과 노래가 나의 고백이 되고 나의 노래가 되게 합시다.

그 믿음으로 살아갑시다.

"주 밖에 없나이다" 아멘.

 

 

13

제목 : 경배하는 사람들

자료원 : 박종순목사 충신교회 예장통합

발행일 : 950205

 

사람과 짐승의 다른 점은 여러가지입니다. 사람은 문자와 언어를 가지고

있는 점이라든지 도덕이나 윤리 규범을 지키는 능력 등 짐승이 가지지 못한

것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절대자에 대한 경외심과

신앙심을 갖는다는 점입니다. 절을 짓고 사워을 짓고 교회를 짓는 것은 인

간세게에서만 가능한 일입니다. 제아무리 지능지수가 높은 침팬지들이라고

하더라도 그들 세계엔 하나님 예배가 없습니다. 그러나 제아무리 미개하고

야만적인 사람들이라도 그들이 모인 곳엔 예배가 있고 교회가 있는 것입니

.

경배의 대상이나 그 방법에는 차이가 있고 문제가 있습나다만 그러나 절대

자를 찾고 경외하고경배하는 것은 인간에게만 있는 종교행위인 것입니다.

 

고대인들은 하늘,,,,별같은 천체나 바람,,번개,우뢰같은 자연 현

상들을 숭배했습니다. 그것은 자연숭배(Nature Worship)라고 합니다. 무엇

인가를 그리거나 새겨서 몸에 지니고 다니면서 그것이 나를 지켜준다면 믿

는 행위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서물숭배 (Fetichsm)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인간의 숭배행위는 결국 피조물을 절대화해서 숭배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우상숭배가 되는 것입니다. 피조물은 창조주를 숭배하고 예배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창조주를 십계명의 제1계명은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내게 있게 말찌니라"고 했고 제2계명은 "너를 위하

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피조물을 신격화해서

숭배하는 종교와 창조주를 절대자로 예배하고 숭배하는 기독교를 같은 종교

범주에 넣는 것은 큰 잘못입니다.

 

제가 신학교 다닐 때 채필근 목사님의 비교종교론 강의를 들었습니다.

어른은 유모어가 풍부하시고 한학과 동양학은 물론 해박한 신학과 철하글

겸비하신 학자였습니다. 본래 채목사님은 철저한 유교가정에서 자라며 유교

경전에 심취했습니다. 그런데 14살 되던 해 아버지가 (1898) 복음을 받고

기독교로 개종을 했습니다. 그때 소년 채필근의 심정은 아버지를 이단에게

빼앗긴 것같은 슬픔이 가득했습니다. 기독교로 개종한 아버지는 유명한 한

학자로 600여권의 책을 쌓아 놓고 공부하던 분이었습니다. 채필근은 공자에

게 하소연을 했습니다. "공부자님, 제 아버지는 그리스도교를 좀 알아라지

고 그 종교를 공박하고 유교를 옹호하는 글을 쓰시겠다고 하면서 기독교의

경전인 성경을 보시더니 그만 불행하게도 이단에 빠졌습니다. 성인님께서

이단을 공부하고 연구하면 해롭다고 하심이 이것을 가리키심인듯 합니다.

그러나 저는 결코 성인의 도를 저버리지 않기로 맹세합니다"라며 하소연을

했습니다.

 

그로부터 1년후 어느날 아버지가 채필근을 부르더니 내일은 주일이니 예배

당에 함께 가자고 했습니다. 변명도 피할 길도 없었습니다. 눈물을 머금고

이단자를따라 난생 처음 예배당엘 나갔습니다. 그리고 그날 집으로 돌아와

공부자님께 다시 호소했습니다. "공부자님 참말로 죄송합니다. 성인님의 가

르침 중에 아버지가 잘못하면 간하고 간하여도 듣지 않으면 울면서 좇으라

고 하셨지요. 그리고 세상을 떠나시면 3년까지 고치지 말라 하셨지요. 저도

아버지 세상 떠나시면 3년상 치르고 틀림없이 성인님에게로 돌아오겠습니

."라고 그러나 그 채필근이 끝내 공자한테 안돌아가고 유명한 목사님이

되셨습니다.

 

훗날 채목사님은 [공자님께] 라는 글속에서 "내가 꼭 다시 성인님에게로

돌아오겠다던 맹세를 지키지 못해 미안합니다. 그러나 나는 오늘날 공부자

님이 계시다면 그리스도교에 귀의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공부자나 소크라테

스나 석가모니같은 성인들과 철인들도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이신 그리

스도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한다고 믿는 것이 기독교인의 신앙이기 때문입니

"라고 했습니다.

 

시편 291절에서 시인은 "너희 권능있는 자들아 영광과 능력을 여호와께

돌리고 돌릴찌어다"라고 했습니다.

모든 인간은 그가 누구이든 무엇을 하는 사람이라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

고 그를 예배해야 합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하나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입

니다.

 

시편 29:1-2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세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1. 예배는 계속해서 드려야 합니다.

 

1절을 보면 영광과 능력을 여호와께 돌리고 돌릴찌어다"라고 했습니다.

리고 돌릴찌어다라는 거슨계속해서 드리라는 것이빈다.

신체의 리듬은 일할 때 일하고 쉬어야할 때 쉬고 먹어야 할 때 먹고 잠자

야 할 때 자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리고 시간과 간격을 조절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리듬은 반복되어야 합니다.

정월 초하룻날 1년분의 음식을다 먹을 수는 없스빈다. 사흘 휴가 기간동안

1년 밀린 잠을 다 잘 수는 없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1년에 한번이나 한달에 한번 그리고 일주일에 한번 정도

의 예배로는 부족합니다.

예배는 하나님과의 만남이며 교제의 시간입니다. 친한 사람일수록 가까운

사람일수록 만나는 횟수가 많아집니다. 그러다가 정말 친해지면 한 집에서

함께 사는 것입니다. 예배를 멀리하는 것은 하나님을 멀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멀리하면 되는 일이 없습니다.

 

사도행전 8:26이하를 보면 에디오피아의 국고를 맡은 장관이 예배하러 예

루살렘에 왔다가 돌아가는 길에 빌립을 만나 세례받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

습니다.

 

국사에 바쁘고 교통조건이 열악했던 때였습니다만 그는 아직 예배를 드리

기 위해 남의 나라를 방문했던 것이빈다.그리고 그가 자기 나라로 돌아가

에디오피아를 기독교 국가로 만드는데 큰 몫을 감당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오늘의 에디오피아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하고 살기 힘든 나라에 들어가빈

. 이유는 간단합니다. 잘 살던 저들이었습니다만 하나님 신앙을 버리고

예배를 소홀히 하면서부터 하나님의 축복이 에디오피아를 떠난 것입니다.

 

1950년대까지만 해도 미국은 주말이면 모든 상가가 철시를 하고 주일이면

가족들이 정장한 모습으로 교회나가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 당시 미국의 국력이나 경제적 영향력이나 정치적 힘은 세계에 제일이 었

습니다. 그러나 60가대 민주당이 집권하면서 그리고 세속문화의 거센 도전

에 정신문화가 무릎을 꿇기 시작하면서부터 미국사람들은 주말이면 저마다

문을 닫고 바닷가로 산으로 술집으로 들로 빠져나갔습니다. 교회는 텅텅비

기 시작했고 문을 닫거나 교회건물을 파는 교회가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부터 미국은 날개를 달고 추락하기 시작했습니다. 세계도처에서 위신이

추락했고 경제가 흔들렬싶고 도덕이 땅에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미국사람들이 하나님을 멀리하고 예배를 포가히자 하나님

은 저들을 포기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제 이야기가아니고 미국을 염려하는

미국인들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본래 영국을 떠났던 청교도들은 미국 신대륙에 상륙하여 첫 해 지은 농사

로 맨 먼저 하나님을 예배하는 교회를 건축했습니다. 청교도 정신은 하나님

을 예배하는 정신인 것입니다.

시인은 노래합니다. '돌리고 돌릴찌어다'라고.

 

2. 합당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2절을 보면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리고 했습니다. 구약

시대의 예배방법은 제사였습니다. 모든 제사는 정해진 법대로 드려야 하빈

. 제물을 선택하는법 , 제물을 잡아서 드리는 법,제사장이 제사를 집전하

는 법 드이 소상하게 정해져 있었스빈다. 그러나 신약의 경우는 그 기본 정

신과 자세가 중요시되고 있습니다.

주님은 요한복음 4:24에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고 하셨고 바울

은 로마서 12:1에서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제사로 드리라"

했습니다. 예배는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 대상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받으시기에 합당한 예배를 드려야 하는것입니다. 구체적

으로 바른 예배를 어떻게 드릴 것인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 미리 준비해야 합니다.

성경 ,찬송, 옷차림, 헌금, 마음가짐 등 미리미리 준비하고 당일에 서둘거

나 조급히 굴면 안됩니다.

 

둘째, 모든 예배시간을 지켜야 합니다.

평양 산정현교회 목사였던 주기철 목사님이 어느 주일날 예배인도를 하고

있는데 그 교회 장로였던 고당 조만식 선생님이 헐레벌떡 교회에 들어서고

있었습니다. 급한 일로 늦었던 것입니다. "조장로님 거기 서 계십시오.자오

님이 늦으면 교인이 본받을게 뭐가 있겠습니까?"그 한마디에 조만식 장로님

은 그날 선 채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예배후 목사님을 찾아와 앞으

론 어떤 일이 있더라도 늦지 않겠다고 약속을 했다고 합니다.

 

조만식 선생님은 주기철 목사님의 오산학교를 다니실 때 교장이셨고 주 목

사님은 학생이셨습니다. 평양 산정현 교회가 주기철 목사님을 담임목사로

모시기로 하고 조만식 장로님을 청빙대표로 보냈습니다. 조만식 장로님은

주목사님 앞에 무릎을 꿇고 "목사님 저희교회에 부임해 주실 것을 허락해

주십시오"라고 간청을 했다고 합니다. 대인의 겸손이셨습니다.

누구든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시간을 지켜야 합니다. 물론 교통사정, 개인

사정이 있을 수 있습니다만 하나님 뵙는 시간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셋째 바른 자세로 드려야 합니다.

태도도 바르게 마음고 바르게 찬송도 기도도 바르게 드려야 합니다. 그리

고 예배 이외의 다른 사건이나 소음이 예배장소를 어지럽히면 안됩니다.

를들어 예배도중에 핸드폰이 울린다든지 그리고 유유하게 통화를 하고 있는

다든지 무선호출기의 삐삐움이 들린다든지 수근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은

안됩니다. 그리고 유아가 쿵쾅거리고 활보를 한다든지 울음소리가 남의 예

배를 방해해선 안됩니다.

 

우리는 언제나 오늘 이 예배가 하나님이 받으신 예배였는지를 생각해야 합

니다. 헛수구로 한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3. 아름답고 거룩하게 드려야 합니다.

 

2절 하반절을 보면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께 경배할찌어다"라고 했스빈

. 여기서 말하는 거룩한 옷이란 거룩함으로 꾸민 아름다운 옷이라는 뜻이

빈다. 구악시대 제사장이 하나가링께제자드리기 위해 입는 옷은 팅여상복이

아니었스빈다. 최그급 천에 수를 넣고 금수술을 달아 만든 거룩하고 아름다

운 옷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입는 옷이기 때문에 아름답고 단정

해야 합니다.

 

복장문화의 발달로 현대인들은 다양하고 멋있는 의상을 접하게 되었습니

. 유니섹스라고 해서 남녀의 성구별이 모호해져가고 있기 때문에 의상도

남녀 구별이 어려워져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최초로 인간이 옷

을 입기 시작한 것은 벌거벗은 수치를 가리기 위해서 였다는 것입니다.

러니까 어떤 옷이든 입어서 추하고 혐오스러우면 안되는 것입니다. 특히 하

나님을 만나기 위해 입는 옷은 더더욱 아름다워야 합니다. 아름다운 예배,

기쁘고 즐거운 예배를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시편 84:3을 보면 '참새도 주의 전에서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둘 보금

자리를 얻었나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84;4을 보면 "주의 집에 거하는

자가 복이 있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시편 29;11을 보면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심이며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평강의 복을 주시리로

"라고 했습니다. 주의 전에 나오기를 힘쓰는 사람들과 하나님을 에배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결론은 자명합니다. 예배를 멀리하는 것은 하나님을 멀리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멀리하면 하나님과 거리가 멀어집니다. 그리고 교통이 차단

됩니다. 나는 하나님과 상관없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

셨습니까? 예배에 최선을 다합시다. 예배생활에 최선을 다합시다.

 

 

14

제목 : 깨어 있으라

자료원 : 박종순목사 충신교회 예장통합

발행일 : 950129

 

주경학자들은 마태복음 24장을 작은 계시록이라고 부릅니다. 이유는 계시

록이 담고 잇는내용들을 축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종말에 과한 자세

한 설명이 있기 때무에 요한게시록과 상통점을 갖고 있는것이빈다. 오늘 읽

은 본문은 말세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취할 삶의 태도가 무엇인가를

밝혀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깨어 있으라"는 것입니다.

 

어느날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겠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 물음에 대한 대답이 마태복음 244절이하에 기록되어 있

습니다. 그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거짓 그리스도가 나타나 많은 사람을 미혹할 것이다.

(2) 난리와 난리소문이 무성할 것이다.

(3) 민족과 민족이 나라와 나라간의 싸움이 치열해질 것이다.

(4) 처처에 지진과 기근이 일어날 것이다.

(5) 사랑이 식고 반목과 갈등이 첨예화 할 것이다.

(6)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될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주님은 노아홍수 당시의 상황을 예로들어 주셨습니다. (37-39).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은 이 세상이 홍수로 멸망하게 된다

는 외침을 귀담아 듣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는

일에 전력을 다했습니다. 더 불행한 것은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

지 깨닫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39-).

그리고 인자가 다시 올 때도 그런 현상이 벌어지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

습니다. 그러면서 주님은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

가 알지 못함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지난 주간 가장 가까운 나라 일본 칸사이 지방을 휩쓴 대지진 참사

를 지켜보았습니다.

 

21일자 뉴스워크지의 표지는 지진으로 무너져 내리는 고층건물의 처참

한 모습을 싣고 있었고 "무너진 일본의 내진신화"라는 타이틀과 함께 "고베

의 악몽"이라는 화보 특집을 다루었습니다.

지진으로 무너진 고베 고속도로에 깔린 트럭사진 밑에 이런 설명을 써놓고

있었습니다. "일본 칸사이 지방의 산업 중심지였던 고베시 일원이 대지진

앞에 허무하게 무너져 내렸다. 모든 사태에 대한 대비가 완벽한 것으로 여

겨졌던 초일류 산업기술국 일본에 어떠헥 그런 일이 일어났는가. 일본 당국

은 수년째 지진에 대한 안전보장을 큰소리쳤는데.. 일본인들은 2차대전 이

래처음으로 자신들이 취약국에 살고 있음을 깨달았다"라고 .

 

지난 117일 오전 546분에 발생한 지진은 불과 20초간 계속되었습니

. 그러나 사망자는 5,100명을 넘어섰고 25천명이 부상당했는가 하면

이재민은 30만명이 넘는다고 합니다.그리고 5만채의 건물이 무너졌거나 파

손되었다고 합니다.

 

20초간의 재앙치곤 그 결과가 너무나 엄청나고 큽니다.

최근에 세계적으로 일어난 지진상황을 살펴보면 1970년 페루 북부에서일어

난 지진으로 66,794명이 사망했고 1976년 중국 당산에서 일어난 지진으로

242천명이 사망했고 1985년 멕시코시티에서 발생한 지진으로 4,200명이,

1988년 아르메니아 북서부에서 일어난 지진으로 55천명이, 1989년 미국

샌프란시스코 지진으로 62명이, 1990년 이란 북서부의 지진으로 4만명이,

1990년 필리핀 루손 지진으로 1,621 명이, 1993년 인도 마드하라슈트라 지

진으로 3만명이 1994년 캘리포니아 노스리지 지진으로 61명이,1995년 고베

지진으로 5,100명이 죽었습니다. 25년동안 지진으로 죽은 사람의 수르루

합하면 444,833명이 됩니다. 그리고 진도는 6.4에서 8.2였습니다.

 

우리를 더욱 놀라게 하는 것은 지진이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라는 것입니

. 그것은 지진학자들의 공통된 견해이며 한반도도 예외가 아니라는 사실

을 주목해야 합니다.

 

지구는 12대의 지각판으로 구성되어 있따고 합니다. 암반으로 이루어진 판

들은 계속 이동하면서 판사이의 단층선에서 서로 충돌한다고 하빈다.그때

한쪽판이 다른 한쪽판 아래로 꺼지거나 위로 치솟아 오르게 되는데 그는 충

돌의 충격으로 암반이 갈라지면서 지진이 발생한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전

세계는 지각판의 이동과 함께 지진대에 걸쳐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견해

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전문가들의 소리에만 귀를 기울여선 안됩니다.

 

성경의 교훈에 귀를 기울이여 합니다. 마태복음 24:7을 보면 "처처에 기근

과 지진이 있으리니"라고 했습니다. 성경을 살펴보면 지진은 하나님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 출애굽기 19:18을 보면 시내산에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장면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불 가운데서 거기 강림하셨다"

했고, "온 산이 크게 진동했다"고 했습니다. 민수기 16:31-32을 보면 고라

와 그 일당이 모세의 지도력에 불만을 품고 작당하여 반항한 일이 있었는데

그때 땅이 갈라지고 입을 열어 그 모든 소속이 산 채로 매장된 일이 있었습

니다. 지진으로 땅이 갈라져 매몰된 것입니다.

 

열왕기상 19:11을 보면 엘리야가 호렙산으로 아합왕을 피해 도망쳤을 때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고 바람 후에 지진이 있었다"

했스빈다. 아모스 1:1아늘 보면 여로보암왕 시대에 큰 지진이 있었다고 했

습니다.

 

마태복음 27:50-51을 보면 주님이 십자가에서 운명하실 때 땅이 진동하고

바위가 터지는 지진이 있었고 마태복음 28:2을 보면 주님이 부활하실 때도

큰 지진이 났다고 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성경이 말하는 지진은 하나님의 능력과 현존, 진노와 심판을

의미합니다. 특히 마지막 때 하나님이 세상을 심판하시는 심판의 도구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과학자들은 지각판의 이동과정에서 발생하는 충돌의 겨로가라고 설명합니

다만 그러나 성경은 지진 속에는 하나님의 능력과 권위, 심판과 진노의 뜻

이 들어있다고 가르쳐 줍니다.

 

히브리서 12:26을 보면 "그때에는 그 소리가 땅을 진동하였기니와 내가 또

한번 땅만 아니라 하늘도 진동하리라"고 했습니다. 땅도 하늘도 진동시키는

권능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고베 지진 이후 일본사람들의 걱정은 재해복구나 슬픔의 회복보다는 더 큰

지진이 일본을 강타하리라는 두려움이라도 합니다.

 

뉴스워크지 베를린 지국장 빌 포웰(Bill Powell)[지진 속에 파묻힌 '

만의 시대']라는 글 속에서 "심각한 경기침체와 만성적 정치혼란이 뒤엉 닥

친 지난 주의 지진은 80년대 후반 최고조에 달했던 일본인들의 경제적 기술

적 우월감의 소산인 오만의 시대가 나긴 잔재들마저 일소해 버렸다"면서 5

년전까지만 해도 일본의 경제적 상승은 결코 끝나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일본의 정치인들은 서구의 쇠퇴와 퇴폐를 손가락질하면서 설교하는 동안 도

쿄의 졸부들은 그들의 생선 초밥에 반짝거리는 금가루를 뿌려 먹었다. 자만

심 가한 미군도 일본의 기술지원이 없었더라면 걸프전에서 이기지 못했을

것이라고 일본의 중의원 이시하라 산타로 의원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러나 이제부터 일본 사람들은 고통을 겪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고 썼습니

.

저는 세계적으로 계속된 대지진 사건을 지켜보면서 그리고 지난 주 가장

가까운 일본 칸사이 지방에서 일어난 지진사건을 보면서 "그런즉 깨어 있으

"는 주님의 말씀이 강하게 떠올랐습니다.

이번 사건을 통해 몇가지 교훈을 찾을 수 있습니다.

 

첫째, 인간의 능력은 유한하다는 것입니다.

 

일본은 자타가 공인하는 최첨단 과학문명국입니다. 그런데 지진이나자 고

베시는 아수라장으로 변했습니다. 물도, 전기도, 먹을 것도 없었스빈다..

가장 발달된 도시 고베시 한복판에서 주먹밥으로 허기를 달래야 했고 잠잘

곳도 입을 옷도 없었습니다. 고도로 발달된 일본의 정보, 통신, 교통도 손

을 쓸 수가 없었습니다.

 

주전 2160년경 메소포타미아(Nesopotamia)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자신들의

지식과 기술로 큰 도시(Great City)를 건설하고 하늘에 닿는 탑을 쌓기 시

작했습니다. 그 탑의 목적은 두 가지 였습니다. 인간의 기술문명을 자랑하

고 이름을 떨치자는 것이었고 하나님이 계시다는 하늘 닿는데까지 탑을 쌓

아올려 하나님을 기죽이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탑을 무너뜨리

진 않았습니다. 시날(Shinar)평지에 모여 탑을 쌓고 있던 사람들을 흩어지

게 하셨습니다. 사람이 흩어지면 탑은 자연히 무너져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문명이나 과학의 종말을 역사는 증거해 줍니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무능력한 존재입니다. 그것을 알면 하나님 앞에서

떠들고 소리지르고 자랑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둘째 자만이나 교만은 금물이라는 것입니다.

 

남의 상쳐를 건드리는 것 같아 미안합니다만 미국이 지진으로 고속도로가

무너지고 고가도로가 엿가락처럼 휘어 내렸을 때 일본 언론들은 앞을 다투

어 비아냥댔습니다.

그걸 공사라고 했느냐는등 적어도 지진대비는 했어야 된다는둥 그러면서

일본은 지진대비만은 철저하다는등, 고속도로나 고속전철은 어떤 경우에도

만전을 기했다고 장담을 늘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성수대교가 무너지자 일

본 언론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부실공사였다느니 원리의 붕괴라느니 사회

현상의 붕괴라느니 비아냥대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한마디로 당사자인 우

리로서는 기분이 좋을리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일본은 할 말이 없게 되

었습니다. 교만이나 자만은 금물입니다. 일본의 지진은 먼산의 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함경도와 동해 동북부지역 그리고 전국 곳곳이 활성단층이라는 것입니다.

서울대 지질과학과 이기화 교수는'우리나라가 지각판 경게에서 떨어져 있

긴 하지만 지각이 약한 단층구조가 많아서 인접지각판의 충돌로 대규모 지

진이 일어나게 될 경우 우리나라에도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고 말했습니

.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라는 성경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셋째, 심판의 두려움을 깨달아야 합니다.

 

샌프란시스코나 L.A. 노스리지 지진이 일어났을 때 미국의 뜻있는 사람들

은 미국을 향해 내리시는 하나님의 경고라고 했습니다.

일본사람들이 이번 칸사이 지방의 지진을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하고 수용

하는지 그것은 그들의 자유입니다만 한가지 확실한 것은 하나님의 심판의

예고이며 경고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무섭고 두렵습니다. 예외도

없습니다. 단 회개하면 예외가 성립됩니다. 우상숭배와 교만은 하나님이 가

장 싫어하시는 죄입니다. 준엄한 하나님의 심판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깨

닫고 회개해야 합니다.

 

넷째, 깨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4;42을 보면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

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고 했고 44절을 보면 "이러므로 너희도 예배

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고 했습니다.

 

한낮에 당하는 지진피해 보다는 잠자다가 당하는 지진피해가 더 크다고 합

니다. L.A. 노스리지 지진도, 이번 고베 지진도 잠잘 때 일어났습니다.

6.25남침도 주일새벽 잠잘 때 일어났습니다.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신앙적으로 잠잘 때 사건이 터지고 문제가 일어납

니다. 주님의 재림도 졸며 잠잘 때 이뤄진다고 했습니다. 잠잔다는 것은 무

엇을 뜻합니까? 하던 일을 중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의식 상태에 빠지

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눈 감고 불 끄고 편히 드러누워 쉽고 있는 것을

뜻합니다. 적당한 휴식이나 긴장해소는 필요합니다만 그러나 영적으로 네

활개 펴고 편히 쉬어를 계속하면 큰일납니다. 깨어있는 사람은 오늘밤 주님

이 오셔도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심판을 향한 초침소리는 점점 긴박해져가

고 있습니다.

전쟁 ,기근,갈등,반목,증오,지진,이단의 출몰등 종말이 다가오고 있습니

. 우리는 깨어 정신을 차리고 주님 오실 날을 기다려야 합니다.

느헤미야가 한 손엔 창을 한 손엔 연장을 들고 예루살렘성을 재건했던것처

럼 우리는 깨어 기도하고 믿음을 지켜 그날을 대비해야 합니다. 일하면서

준비하고 준비하며 일해야 합니다.

졸지 맙시다. 깨어 기도합시다. 깨어 준비합시다. 신앙생활 잘 합시다.

아멘 주 예수여 어소 오시옵소서.

 

 

15

제목 : 지키시는 하나님

자료원 : 박종순목사 충신교회 예장통합

발행일 : 950122

 

신명기는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지켜야 될 법도를 재조명

하고 확인하기 위해 기록한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면 애굽을 떠나 광야를

횡단하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신앙과 생활 지침서인 것입니다.

가운데 신명기 32-34장은 신명기의 결론부분이 됩니다.

 

신명기의 결론은 두 가지로 요약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설명하고 있으며 모세가 죽기 전에 각 지파를 축복한 것입니다. 본문이 말

하는 하나님은 한마디로 지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짖

켜주심을 살펴보겠습니다.

 

1,열악한 환경과 위기에서 지켜주십니다.

 

10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그 황무지에서 짐승의 부르짖는 광야에서만나시

"리고 했스빈다.

이스라엘 백성이 통과했던 광야는 사람이 거처하거나 통과하기가 힘든 곳

이었습니다. 일교차가 커서 낮에는 일사병으로 쓰러질만큼 폭염이 계속되다

가 밤이 되면 추위가 몰아 닥칩니다. 마실 물이 없어 목말라 죽기 십상이

고 독사와 맹수들이 들끓기 때문에 언제 기습을 받을런지 예측불허입니다.

거기다가 먹을 것을 구하는 것은 하늘의 별을 따는 것만큼 어렵습니다.

 

본문은 그곳을 "황무지, 짐승이 부르짖는 광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구약성경을 보면 그토록 열악하고 위험천만한 황야를 횡단했던 이

스라엘 민족이 단 한명도 목말라 죽었거나 일사병으로 죽었거나 배고파 죽

었거나 추위에 얼어 죽었거나 맹수에 물려 죽은 일이 없었스빈다. 애굽에서

나왔던 1세대가 광야에서 다 죽었지만 그들이 죽은 이유는 하나님을 배반하

고 불순종한 죄 때문이었지 황무지와 짐승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신명기 32:21을 보면 "그들이 하나님이 아닌 자로 나의 질투를 일으키며

그들의 허무한 것으로 나의 진노를 격발하였으니.."라고 했고 22절을 보면

"내 분노의 불이 일어나서"라고 했습니다.

 

환경이 그 사람의 삶의 태도를 결정하는 것은 사실이니다. 그러나 그것이

절대적 요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환경이 좋은데 타락하거나 잘못되는 경

우가 있는가 하면 환경이 열악한데 바로 되고 잘되는 경우들도 있습니다.

 

저희 교회 유치원의 경우를 보면 중구 교육청 관내뿐 아니라 서울 시내에

서 모범 유치원으로 공인받고 평가를 얻었습니다. 매년 평가에서 빠지지 않

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열악한 환경 속에서 가장 건실하고 알찬 교육

을 실시하는 모범유치원이라는 것입니다.

 

충신유치원보다 더 시설규모나 내용이 크고 화려한 유치원이 많습니다.

러나 충신유치원은 협소하고 제한된 조건임에도 불구하고 가장 모범적인 유

치원으로 운영하고 있는 것입니다.

열악한 환경을 탓하고 주님을 떠나 제멋대로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환

경이 어렵기 때문에 주님을 더욱 가까이 하고 믿음을 굳세게 지키는 사람이

있습니다.

 

돈 잘 벌고 성공하고 잘 살게 됐기 때문에 주님 외면하고 교회등지는사람

이 있는가 하면 감사하고 감격해서 신앙생활을 더욱 잘 하는 사람들도 있습

니다. 중요한 것은 잘 살든지 못 살든지, 성공했든지 실패했든지, 일이 되

든지 안되든지, 건강하든지 병들었든지 그리고 살든지 죽든지 하나님을 외

 

 

 

면해선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가 황무지와 짐승이 울부

짖는 광야에 들어섰을 때보다 더 철저하게 지키시고 보호해 주신다는 것입

니다.

 

다니엘과 그의 세친구들은 그들이 사잘굴과 풀무불 속에 들어 갔을 때 사

자의 입을 봉해 주었고 풀무불이 사르지 못하도록 지켜주셨습니다. 하나님

의 인도와 보호하심을 한마디로 설명한다면 "언제, 어디서나"입니다.

저는 가끔식 비극적 생애를 마감한, 고 박대통령 내외분을 새각하곤 합니

. 인물평가란 적어도 그 세대가 지난 후라야 가능한 법입니다. 100년후에

내리는 평가가 정직한 평가가로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제 개인의

생각으론 자신들의 정권연장을 위한 무리한 정치 행동을 제외한다면 어느

대통령 못지 않게 일을 많이 했다고 평가하고 싶스빈다. 그런데 불행한 것

은 육영수 여사는 철통같은 경비망을 뚫고 잠입한 문세광에 의해 저격당해

세상을 떠났고 박 대통령은 정보부장의 총탄에 맞아 세상을 떠났습니다.

 

육여사의 경우는 그 자리에 우리나라에서 사격술이 가장 뛰어나다는 사람

과 완전무장한 경호원들이 보는 앞에서 저격당했습니다. 박대통령의 경우는

가장 신임하는 경호실장, 비서실장, 정보부장이 동석한 자리에서 저격당했

습니다. 이미 지나간 역사의 상처들이긴 합니다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도대

체 누가 누구를 지킬 수 있다는 것입니까?

우리의 잘못은 절대자이신 하나가링을 과소평가하고 상대자인 사람의 능려

이나 그 역할을 절대 평가하는데 있습니다. 좀더 쉽게 말하면 사람은 대단

한 것으로 평가하고 하나님은 소홀히 취급하고 있습니다.

 

신명기 32:39을 보면 "내가 죽이기도 하며 살리기도하며 상하게도 한다면

하나님을 향하여 보호와 도우심을 요청해야 합니다.

저희 집 안방에는 고 갈물 이철경 선생께서 써주신 한글족자가 걸려있습니

. 살아계실 때 제가 좋아하는 성경구절이라며 부탁드리고 받은것입니다.

그것은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

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라는 시편 121:1 -2 말씀입니다.

 

2. 왜 지킵십니까?

 

신명기 32:9을 보면 "여호와의 분깃은 자기 백성이라 야곱은 그 택하신 기

업이로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선택하신 자기 백성이기 때문이라

는 것입니다. 그 누구도 하나님에게 이스라엘을 선택하라고 추천한 사람이

없습니다. 이스라엘 자신이 우리를 선택해 다랄고 부탁한 일도 없습니다.

하나님 자신이 스스로 선택하셨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의도와는 상관도

없는 일방적 선택이라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을 버

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그것은 마치 자식을낳은 부모는 자식을 기르고 지키

고 가르칠 책임을 전적으로 져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또 다른 이유는 언약 때문입니다. "내가 너

를 지키겠다 사랑하겠다 인도하겠다 구원하겠다"는 약속을 하셨습니다.

나님은 신실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 약속을 어기는 법이 없습니다.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모든 조건과 제한과 약점과 허물을 넘어서고 덮어줍니다. 이스라엘

과의 약속 때문에 지키시고 보호하신다기 보다는 사랑하기 때문에 덮어주

시고 용서하시고 지켜주시는 것입니다.

약속은 엄밀하게 보면 냉정한 것입니다. 한쪽이 약속을 어기면 약속은 깨

어지는 법이고 그 책임은 어긴 사람 쪽에 있는것입니다. 약속을 어긴 사람

은 대접을 받기도 어렵고 용서를 받기도 어렵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모든

것을 넘어섭니다. 그리고 용서와 관용과 도움을 받도록 해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약속을 어겼습니다. 하나님만 섬기겠다던 약속도 ,하나님만 사

랑하겠다던 약속도, 결코 한눈팔지 않겠다던 철석같은 약속도 제멋대로 깨

트려 버렸습니다. 대접은 커녕 매맞고 내쫓기고 버림받을 일만 골라 했습니

. 그러나 [사랑]때문에 용서받고 보호받을 수 있었스빈다.

 

사랑으로 눈이 가리워지면 세상만사가 아름답게 보이는 법입니다. 그래서

결혼도 사랑이 절대 조건이긴 하지만 사랑은 판단력을 흐리게 하기 때무에

결혼을 결저아는 단계는 이성적 관찰과 판단이 필요한 것입니다. 일단 이성

적 판단과 결정이 된 다음에는 불같이 뜨겁게 사랑해야 하는 것이 결혼의

절차인 것입니다. 잘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매맞는 짓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용서받고 보호받는 이유는 순전히 사랑 때문인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3. 어떻게 지켜 주십니까?

 

10-12절이 설명해 줍니다.

 

1) 구체적으로 지켜주십니다.

10절을 보면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 눈동자같이 지키셨도

"라고 했습니다. [만나시고]는 멀리 계시지 않고 가까이서 지키신다는 것

이빈다.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는 전폭적으로 지키신다는 것입니다. [

기 눈동자 같이 지키신다]는 것은 완벽하게 지켜주신다는 것입니다. 특히

눈동자 같이 지키시낟는 말씀을 주목해야 하빈다. 사람의 눈에는 30만개의

회로가 있고 1억만개의 신경세포가 있어서 거리,광도, 색상을 자동으로 조

절한다고 합니다. 모든신체의 기능이 오나전 자동차화 시스템으로 되어 있

지만 특히 눈의 기능은 전자동이라고 합니다. 눈꺼풀만해도 완저 자동 개폐

식이어서 유사시에는 즉흥적으로 눈꺼풀이 덮히게 됩니다. 그리고 눈물샘을

만들어 언제나 안구운동에 지장이 없도록 촉촉하게 습도를 조절해 줍니다.

 

하나님이 자기 사랑하는 사람들을 자기 눈동자같이 지키시나는 것은 자기

눈을 보호하듯 철저하게 완벽하게 지켜 주신다는 것이빈다.

사람의 지체 가운데 가장 빠르게 움직이는 것이 신경조직, 두뇌판단, 눈동

작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눈을 보호하듯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2) 홀로 인도하십니다.

 

12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홀로 그들을 인도하셨고 함께한 다른 신이 없었

도다"라고 했습니다. 힘이 모자라 누구의도움을 받는다든지 연합전선을 펴

서 우리를 도우시고 인도하시는 것이 아니라 홀로 하셨습니다.애굽의 바로

왕은 기병대를 동원하고 술객들을 동원해 이스라엘 백성을 추격하고 괴롭혔

습니다. 하나님은 홀로 홍해를 가르셨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셨습니다. 홀로

하셔도 무엇이나 가능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을

인도하신 방법입니다. 11절을 보면 "독수리 그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그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 날개 위에 그것

을 업는 것같이..."라고 했습니다. 짤막한 한 구절 속에 독수리 훈련방법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독수리가 새 중 왕이 되는 것은 가혹한 훈련 때문이빈

. 알에서 금방 나온 독수리는 병아리나 꿩새끼와 다른 바 없습니다. 그러

나 철저한 훈련을 통해 새의 왕이 되는 것입니다. 어미 독수리는 등지 안에

있는 새끼들에게 먹이를 물어다 줍니다. 그것은 어미의 보호본능입니다.

러나 보호만 하는것이 아닙니다. 둥지를 흔들어 새끼를 떨어뜨립니다. 위기

를 느낀 새끼들이 몸부림치며 등지 안에 머물려고 하면 날개를 너풀거려 떨

어뜨립니다. 둥지에서 떨어진 새끼가 땅을 향해 떨어질 무렵 어미는 다시

받아 둥지로 옮겨 놓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반복합니다. 그 뜻을 모르는

다른새들이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면 어미 독수리가 심술이 났다든지 정신이

돌았다고 수근거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독수리의 강훈련방법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방법으로 이스라엘을 훈련하셨고 오늘 우리를 훈련하시는

것입니다.

의사들은 현대인이 건강을 유지하려면 하루 만보를 걸으라고 합니다. 그래

야 하체가 튼튼해지고 신진대사가 잘 된다고 합니다. 그것은 자기 신체를

단련하고 훈련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홀로 한 분이십니다. 영광도 호롤 받으십니다. 축복도 홀로 하십

니다. 지키시고 힘주시는 것도 홀로 하십니다.

인생을 살고 신앙생활을 해나가는 동안 보금자리가 흔들릴 수 있습니다.

둥지에서 떨어지는 아픔과 고통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파멸은

아닙니다. 그리고 종점도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훈련이며 연단이며 훈

련방법입니다.

 

105인 사건으로 투옥된 남강 이승훈 선생님이 5년간의 수감생활을 마치고

나오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고합니다."감옥은 이상한 곳이다. 강철같이

굳세게 되어 나오는 사람도 있고 썩은 들풀처럼 약해져 나오는 사람도 있

."

하나님은 온실의 화초처럼 인도하시고 보호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독수리

가 새끼를 훈련하듯 지휘관이 병사를 훈련하듯 감독이 선수를 훈련하듯 하

십니다. 거기에 합격하면 강한 독수리가 되고 강한 병사가 되고 강한 선수

가 되는것입니다. 오늘 나를 지키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그의 인도와 보호를 따릅시다.

주여, 나를 지켜주옵소서.

 

 

 

17

제목 : 생명의 면류관

자료원 : 박종순목사 충신교회

발행일 : 950115

 

이 세상을 살아 나가는 모든 사람은 누구나 마찬가지입니다. 제 경우를 놓

고 볼때 하는 일과 맡은 일이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많스니다. 그 가우데서

기억하기 쉬운 것들만을 꼽아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남편, 아버지, 아들,

할아버지,삼촌, 큰 아버지, 작은 아버지, 형부, 매제, 이모부 등이 저에게

따라 다니는 이름입니다.

 

사회적으로는 대한민국 국민이고, 서울 시민이고 용산 구민에다 이촌동 동

민입니다. 교회적으로는 충신교회 담임 목사, 서울서노회 노회원, 예장총회

목사입니다. 그리고 연합사업이나 사회 단체, 교회단체 등에서 맡은 일이

수십가지 입니다.

 

그런데 저는 지금까지 대한민국 국민 노릇을 잘 해야 되기 때문에 시민 노

릇을 소홀히 한 일이 없습니다. 아버지 노릇을 잘 하기 위해 남편 노릇을

가볍게 취급한 일이 없습니다.

아버지 노릇으로도 비거운데 할아버지 노릇까지 감당하기는 더 어렵다면서

나는 할아버지가 아니다 못한다라고 거절한 일이 없습니다.

물론 맡은 일을 감당해내는 사람의 능력과 역량을 따라 개인차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중요한 것은 맡은 일에 최선을 하느냐 하지 않느

냐인 것입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서머나 교회는 그 당시 소아시아 지방에 있었던 일곱교회

가우데 가장 모범적이면서 최선을 다한 교회였습니다. 서머나교회의 장점은

크게 두가지로 요약됩니다.

 

1.열악한 환경조건 속에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서머나교회가 처했던 상황을 9절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라고 했고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

도 아노니"라고 했습니다.

서머나 교회는 환난과 궁핍과 훼방에 직면한 교회였습니다. 예수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박해와 환난과 생활의 위협을 받고 있었고 유대주의자들의방해

와 훼방이 교회를 괴롭혔습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로마의 황제 숭배와 유대인의 율법주의가 서머나

교회를 위협했고 괴롭혔던 것입니다. 황제숭배를 거절하는 사람은 재산을

목수당했고 일터를 박탈당했습니다. 그러나 그드른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외부기온을 따라 변한다면 시낭지키기가 어렵게 되빈

. 기온이 영하로 내려가면 물이 얼게 됩니다. 그러나 영상으로 올라가면

얼었던 물이 녹게 됩니다.

외적 조건이 조금 어렵다고 움츠러들고 약간 편해졌다고 활개치는 그런 신

앙이라면 뭘 해낼 수 있겠습니까?

한국 초대 교회 순교자 가운데 한 분인 최태용 목사님이 19261월호 [

과 진리가]라는 잡지에 기고한 글 속에서 "이제는 신앙혁명을 들으라.기독

교가 아니요, 그리스도 자신을 믿으라. 교회 생활이 아니요 영이 더가라.

진리가 되라"고 외쳤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제는 교인이 아니라 신자가 되어야 합니다. 기독교인이 아

니라 예수에게 속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길선주 목사님의 설교 가운데 등불이 방 가운데 들어가매 어둠이 밖으로

도망가고 물이 그릇 안에 들어가매 공기가 밖으로 나가고 믿음이 마음 가운

데 들어가매 의심이 밖으로 나간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燈入房中夜逃外

하고 水入器內氣出外 하며 信入心中疑出外).

빛이 들어가면 어둠이 쫓겨나고 물이 차면 공기가 쫓겨나게 되는 것입니

.

세계교회 신앙 선배들의 신앙면모를 들여다 보면 오히려 열악한 환경과 조

건 속에서 더욱더 신앙생활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서머나교회도 그랬습니다.

 

2. 영적인 문제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교회생활을 잘 한다든지 예수를 잘 믿는다든지 신앙생활에 최선을 다한다

는 것은 영적인 문제입니다.

솔직하게 말하면 교회에 나와 하루 봉사를 했다고 해서 일당을 받는 것도

아니고 그것이 경력으로 인정되어 회사에서 진급할 때 도움이 되는 것도 아

닙니다. 신앙생활은 영적 사건인 것입니다.

영적인 것은 당장 손에 잡히거나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신령한 축복

을 받는다는 것도 당장 내 손에 수표가 들어오는 것도 아니고 아파트가 당

첨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쪽 분야를 소홀히 취급하는 것입

니다.

 

그러나 서머나교회는 영적인 문제를 가장 소중히 여기고 최선을 다했습니

. 이유는 간단합니다. 영이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영이 살고 영이 복을

받아야 육신이 살고 바로 되는 것입니다.

일본이 강요한 신사참배 반대에 앞장섰던 이기선 목사님이 일본 경찰에 체

포되어 고문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목사님은 일경이 고문을 할때마

'주님은 저 위해 피흘러 돌아가셨는데 저도 고문을 받게 하시니 감사합

니다"라며 고문을 견뎌내었습니다.

어느날 일경이 물었습니다. "영감, 천황 폐하가 기독교를 믿으면 죽이겠다

고 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 물음에 이기선 목사님은 "천국법도 지키고 국법도 지키겠소"라고 대답

했습니다. "어떻게 둘 다 지킬 수 있단 말이요?"라는 물음에 이목사님은 "

하나님이 예수믿으라 했으니 예수 믿고, 천황이 죽으라 했으니 죽으면 됩니

"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이기선 목사님, 주기철 목사님이라고 해서 생명이 아깝지 않다는지, 죽음

이 두렵지 않다든지 고문이 고통스럽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주님도 십자가

를 면하고 싶어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나 서머나교회 교

인들이 환난과 궁핍과 핍박과 고문을 받으면서도 믿음을 지켰던 것은 영적

인 문제가 더 중요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제아무리 좋은 집에서 떵떵거리고 잘 산다고 해도 그 집에서 앞으로 80

이상을 살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모두가 80년 안에 죽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육체와 그 육체를 에워싼 조건들은 모두가 제한적이고 한시적입니

. 그러나 영원합니다. 그리고 영적 사건도 영원한 것입니다.

이 진리를 아는 사람들은 오늘의 쾌락이나 행복 때문에 영원한 나라를 포

기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영적인 것은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

는 본문 10절 하반절을 주목해야 합니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고 했

습니다. 서머나교회는 이미 충성을 다하고 있었습니다. 열심히 일했고 환난

과 궁핍과 고통을 감당하면서 최선을 다하고 있는 그 교인들에게 주님은 말

씀했습니다. "죽도록 충성하라"고 이 한마디 속에 다음과 같은 뜻이 들어

있습니다.

 

첫째, 하던 충성을 더 하라는 것입니다.

 

말씀드린대로 이미 충성했고, 최선을 다하고 있었습니다만 그것으로 만족

하거나 자족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최선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훈련의 의미나 가치는 지속성에 있습니다. 게임 끝나고 훈련을 쉬는 선수

는 다음 경기에 이길 수가 없습니다. 게임이 있든 없든 훈련을 계속해야 강

한 선수가 될 수 있습니다. 독창회나 연주회가 끝났다고 해서 연습을 중단

해 버리는 음악가나 전시회 끝났다고 해서 붓을 던져버리는 미술가는 훌륭

한 작품을 남기기가 어렵습니다.

우리는 지금껏 맡은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더욱 힘써 그일을 계

속해야 합니다.

 

둘째, 작은 일을 소홀히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저수지 댐이 터지는 것은 지극히 작은 구멍으로 물이 새기 시작하고 그것

이 점점 커져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성인병의 경우도 커져서 원인이 점던 커져서 큰 병이 되는 것입니다. 일반

적으로 사람의 위 용량은 200CC 의 음식물이 위 속에 들어간다고 합니다.

위가 10배로 불어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자루가 매 끼니마다 터질 지경

이 되는 것입니다. 그뿐입니까? 위 입장은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짠 것,

운것, 질긴 것, 뜨거운 것, 오만가지 나쁜 것을 다 집어 넣습니다. 쉴 날도

쉴 시간도 없습니다. 피곤해서 잠깐 쉴까하면 커피 집어넣고, 과일 집어넣

, 과자 집어넣고, 저녁 잠자는 시간에도 2000cc를 집어넣고 중노동을 시

킵니다.

 

전문가들의 말에 의하면 모든 위병의 원인이 바로 그러한 위장관리에서 비

롯된다는 것입니다.

작은 일, 소홀히 취급하기 쉬운 일을 소홀히 하면 안됩니다. '작은 일에

충성된 자는 큰 일에도 충성되고 작은 일에 불의한 자는 큰 일에도 불어하

니라"는 말씀을 주목해야 합니다.

 

셋째, 드러나지 않는 일에 최서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일이란 성과가 당장 눈앞에 드러나는 일이 있는가 하면 드러나지 않는 일

이 있습니다.

우리가 지나치게 실적위주에 치우치다 보면 형식과 전시효과를 중요시하는

잘못을 저지르게 됩니다. 그러나 신령한 일은 오늘 당장 그 실적이 드러나

지 않습니다. 오늘 충성했다고 해서 오늘 상급이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일하는 사람은 그일에 상응하는 보수를 받게 됩니다. 미국의 경우를 보면

시간제가 있고, 일급이 있고 주급이 있고, 월급이 있고, 연봉이 있습니다.

한시간 일하고 받는 보수는 극히 작습니다. 대개 엄청난 보수일수록 연봉으

로 계산합니다.1년에 얼마를 주고받기로 계약하고 일을 하는 것이 연봉입니

. 한 시간 일하고 그 자리에서 받아 챙기는 돈과 연봉입니다. 한 시간 일

하고 받아 챙기는 돈과 연봉은 하늘과 땅 차이가 납니다.

하나님의 일은 연봉이 아니빈다. 최고봉이빈다. 하나님 앞에서 받게 되는

영원한 보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당장 오늘 일하고 칭찬이나

보상이 없다고 해서 그 일을 소홀히 하거나 과소평가 하면 안됩니다.

 

넷째, 내가 맡은 일에 충성하라는 것입니다.

 

세상일을 나혼자 다 맡아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내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면 됩니다. 맡은 일에는 관심이 없고 맡지 않은 일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잘못입니다.A 회사에 입사를 했으면 그 회사일에 최

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런데 A 회사 일에는 최선을 다하지 않고 B회사 일에

군침을 삼킨다면 A 회사가 그를 버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군입니다. 하나님이 일을 맡겨주셨습니다. 그일에 최선

을 다해야 합니다.

 

다섯째, 죽도록 충성하라는 것입니다.

그 뜻은 죽음을 각오하고, 죽을 힘을 다해, 순교정신으로 일하라는 것입니

.

[예수천당]으로 유명한 최봉석목사님은 19396월 신사참배를 반대한다는

이유로 2차 투옥되었는데 옥중에서 40일 금시기도에 들어갔습니다. 40일 금

식기도가 끝난후의 최목사님은 산송장이었습니다. 병보석으로 나와 기홀병

원에서 15일간 치료를 받았으나 회복하가지 못하고 1944425일 세상을

떠났습니다. 최목사님은 세상을 떠나시기전 '하늘에서 전보가 왔구나 나를

오라신다"는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두셨다고 합니다.

 

순교자들과 신앙의 선배들이 뿌린 피와 흘린 땀 위에 한국교회는 세워졌습

니다. 오늘까지 한국교회가 역사의 격동과 격변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제

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 피와 땀 때문이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죽도록 충성한 다음에 오는 상급이빈다. 본문을 보면 "그리하면 내가 생명

의 면류관을 내게 주리라"고 했습니다.

 

면류관은 아무나 쓰는 것이 아닙니다. 운동경기에서 우승한 사람, 싸움에

서 이긴 개선장군, 직무에 최선을 다하고 퇴임하는 장관에게 면류관을 주었

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의의 면류관, 영광의 면류관, 썩지않는 면류관,

랑의 면류관 가운데 가장 귀한 것은 생명의 면류관입니다. 이유는 생명을

바쳐 얻은 면류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본문 속에서 최선을 다한 뒤에는 반드시 상급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생명과 히믈 다해 최선을 다하면 영원한 생명과 면류관이

약속되어 있음을 받는 것이 됩니다.

 

금메달리스트는 금메달만 받는 것이 아닙니다. 상금이 있고 연봉이 있고

명예가 있고 직장이 보장됩니다. 생명의 면류관은 최선을 다한 그리스도인

에게 주시는 최고의 상급입니다. 그 상급이 내것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의 것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18

제목 : 최선을 다하는 교회 II

자료원 : 박종순목사 충신교회

발행일 : 950108

 

최선을 다하는 사람만 최상의 영광을 누릴 수 있고 최선에 대하여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바울사도의 삶을 통해 발견하게 됩니다.

그는 디모데후서 4:7에서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길을 마치

고 믿음을 지켰으니"라고 했습니다. 이 한 구절 속에 바울의 삶의 여정이

그려져 있습니다.[싸웠다,마쳤다, 지켰다]는 세마디야 말로 그가 일생을 어

떻게 살았으며 어떤 태도로 일했는가를 설명해 주기에 넉넉합니다.

 

그는 싸우는 병사처럼,달리는 운동선수처럼, 성을 지키는 파숫군처럼 싸웠

고 달렸고 지키며 살았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최선을 다한 삶이었습니

.

흔한 일은 아닙니다만 마라톤 선수가 어깨를 늘어뜨린 채 걸어서 결승점으

로 돌아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는 경기를 포기한 사람입니다. 달리는 사

람은 걸으면 안됩니다.

축구열전이 벌어지고 있는 운동장에서 공을 바라보며 걸어가는 선수는 없

습니다. 있다면 부상당하고 퇴장하거나 반칙으로 퇴장당하는 선수일 것입니

.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삶은 운동경기로 비유했고 전투로 비유했습니다.

선을 다하는 사람이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1994119일 저녁 6시 제주공항을 떠나 광주로 이륙하던 대한항공 326

편의 비행기 왼쪽 엔진에서 갑자기 불꽃이 튀기 시작했습니다. 300명의 승

객과 승무원은 순간 공포의 도가니에 빠졌습니다. 곧바로 기장은 기수를 제

주로 돌려 회항했고 다행히 불은 착륙과정에서 꺼졌습니다.

원인 조사 결과 망가진 엔진사이에 꿩이 깃털과 피가 남아 있었습니다.

활주로에 있던 꿩이 비행기에 부딪쳐 일어난 조류충돌사고였던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외국에서는 버드 스트라이크(Bird Strike)라고 부릅니다.

꿩 한마리 때문에 엔진부품인 팬블레이드(Fan Blade) 46개가 망가져 40

원의 수리비를 날렸다고 합니다.

 

1995년부터 23년간 민항기와 군용기 73대가 새와 충동해 추락했고 138명이

사망했다고 합니다.

92년 한 해동안 전 세계적으로 5,605건의 조류 충동사건이 있었다고 하니

어안이 벙벙해집니다.

꿩 한마리와 비행기, 비교도 상대도 되지 않습니다만 그 작은 새한마리가

비행기를 떨어뜨릴 수도 있고 40억원의 손해를 입힐 수도 있다는 이 사건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교훈은 작은 것을 소홀히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작은 것을 소홀히 취급하는 사람은 큰 것에도 소홀하기 마련입니다. 그러

나 작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은 큰일에도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어느 시골에 면장이 있었습니다. 그는 늘 자신이 면장이라는 사실에 대해

불만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내가 공부를 못했나. 대학을 안나왔나, 얼굴

이 못생겼나, 헌데 겨우 면장이라니" 하며 면장 책상에 앉아 있는 시간보다

는 술타령을 일삼고 걸핏하면 도지사 만나 교제해야 된다며 도청소재지에

나가 살다시피 합니다. 그리고 왜 면장일을 소홀히 하느냐고 물으면 "나한

테 대통령을 시켜보라 내가 누구보다 잘 해낼거다"라며 기염을 토합니다.

이 소문이 도지사의 귀에 들어갔습니다. 그 사람을 댕오령 시켰겠습니까?

그 달 말로 해임되고 자리에서 쫓겨나야 마땅합니다.

일을 하지 않는 사람들에겐 핑계가 많습니다. 대체적으로 '나를 무시해도

분후가 있지. 이걸 일이라고 준단 말야? 다른 걸 맡겨보란 말야, 잘 해낼테

.."라며 핑계를 대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충성된 사람들은 둘을 맡겨도 다섯을 맡겨도 충성을 다합니다.

엇을 맡겨도 그 일에 최서을 다합니다. 작은 것이라고 소홀히 취급하거나

외면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본문 속에서 왜 최선을 다해야 하는가를 발견하게 됩니다.

 

1. 그리스도의 일군이기 때문입니다.

 

본래 [일군]이라는 말의 의미는 배 밑창에서 비지땀을 흘리며 노를 젓는

사람을 뜻합니다. 북소리에 맞춰 줄지어 앉은 채 노를 젓는 사람을 가리켜

일군(훼파레스)이라고 불렀습니다. 옛날에는 노예가 노를 젓는 일을 맡았습

니다. 어두운 배 밑창에서 비지땀을 흘리며 노를 젓는 동안 한눈을 팔거나

딴전을 피우며 꾀를 부리는 노예가 발견되면 감시원의 가죽 채찍이 날아옵

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일군입니다. 한눈을 팔아도 안되고 딴전을 피워도 안되

고 꾀를 부려도 안되고 핑계를 댈 수도 없습니다. 뒷줄은 힘드니까 앞줄로

가겠다든지 기분 나쁘니까 쉬다가 하겠다느니 불평도 핑계도 통하지 않습니

.

 

북소리의 리듬에 맞춰 노를 젓기만 하면 됩니다. 배가 어느 방향으로 가는

지 목적지가 어딘지에 관한 것은 선장이 결정하는 것입니다.

 

옛날 시골에 살면서 모내기를 해 본 일이 있습니다.

지금은 기계로 모내기를 합니다만 옛날엔 사람이 줄 지어서서 손에 한웅큼

씩 모를 들고 있다가 줄을 따라 모를 심곤했습니다. "평당 쌀이 몇가마니

나올까, 비료값은 얼마나 들까, 이 논에서 나온 쌀은 누가 가져갈까"등 그

런 것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냥 어이 어이 하는 구령에 맞춰 모를 심고

일어서고 다시 모를 심곤 합니다. 바로 그것이 일군의 자세인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하나님의 밭에서 일을 하고 있는 농부이며 하나님의 배에서

노를 젓는 노예이며 하나님의 논에서 모를 내는 일군인 것입니다. 일군의

할 일은 열심히 일하는 것입니다.

대통령의 연두기자 회견이 끝난 후 TV 토론에 참여한 어느 연사의 말이 생

각납니다. 그는 '대통령의 시정방침이나 세계화 구상이 발표됐습니다만 국

민의 할 일이 더 큰 것 같습니다. 모든 국민이 그 뜻을 따르고 협력한다면

선진화나 세계화가 이뤄질 것이고 그렇지 못한다면 대통령의 구상은 한낱

구상으로 끝나고 말 것입니다. 우리 모두 열심히 일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일군은 일해야 합니다. 떠들고 일 안하는

사람보다는 조용하게 일하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의 일군입니다.

 

2.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맡은 자]라는 것은 관리자, 청지기라는 것입니다. 본래 뜻

은 오이코스노모스(Oikosnomos) 라는 것으로 집을 관리하는 자라는 것입니

.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라면 얼마나 신임이 두터우

며 그 책임이 중요합니까?

미국 대통령 곁을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는 사람가운데 검은 가방을 든 사

나이가 있습니다. 그 검은 가방은 만일의 돌발사태에 대처할 대통령의 결

정에 관한 장치가 장착되어 있는 중요한 것입니다.

그 가방을 아무에게나 맡길 수 있겠습니까.심복도 가장 신임하는 심복에게

맡길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비밀스런 사명을 맡겼겠습

니까? 믿고 신임하고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맡기신 일을

소홀히 취급하는 것은 그 일을 맡기신 하나님을 소홀히 취급하고 과소 평가

하는 것입니다.

 

관청마다 벽에는 대통령의 사진이 걸려 있습니다. 어느날 장관이 자기방에

걸려있는 대통령 사진을 떼낸 후 땅바닥에 던지고 발로 밟았다고 합시다.

진이란 인화지에 현상한 그림에 불과하빈다. 그러나 그는 대통령의 존재와

권위와 인격을 짓밟는 것입니다. 그 장관의 목이 붙어 있을 수가 없습니다.

 

누가 나한테 직분을 주셨습니까? 내가 누구의 종이며 일군이며 청지기입니

? 하나님의 종입니다. 하나님의 청지기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주신 일

을 소홀히 취급한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수 있으며 축복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무엇을 맡았든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더구나

비밀가방을 소홀히 취급하면 그 화가 더 큰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의 비밀, 축복받는 비밀, 영원한 생명의 비밀,천국가

는 비밀을 맡은 사람들입니다. 그 비밀을 알리고 전하는 청지기 노릇을 잘

해야 합니다.

 

3. 심판이 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3:13을 보면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에 공력을 밝히

리니"라고 했고 4:4 끝을 보면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고 했습니다.

기독교는 창조론과 종말론을 가진 종교입니다. 창조론이란 하나님이 천지

를 창조하셨다는 것이고 종말론이란 이 세상의 종말이 하나님의 심판으로

끝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원한 세계가 영속된다는 것입니다.

 

과학자들은 아직도 빛이 무엇인가에 대하 명확한 개념이나 정의를 정립하

지 못하고 있습니다. 17세기 후반에 뉴톤(Newton)[빛은 발광체에서 빠른

속도로 진행하여 나오는 입자]라는 학설을 주장했습니다. , 광립자

(particulate Theory) 설이 뉴톤의 학설입니다. 그런가하면 물리학자 호이

겐스 (Huygens)는 빛은 하나의 파동이라고 하여 파동설(Wave Theory) 을 주

장했습니다.

 

아인슈타인(Einstein)은 빛은 에너지를 가진 입자라고 하는 광량자설

(Photon Theory)을 주장했습니다. 최근의 학자들은 빛은 파도의 파장처럼

파동성(Wave)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을 전자파니(electromagnetic wave)

(Wave Length)이니 주파수(cycle) 니 가시광선(visible light)이라고 부

릅니다.

그러나 창세기 1;3을 보면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라고 했습니다. 성경은 한마디로 빛이 무엇인가를 밝히고 있었습니

. 빛은 하나님께서 혼돈과 흑암을 물리치기 위해 말씀으로 만드신 창조물

이라는 것입니다.

 

물리학자들이 그토록 오랜 세월동안 규명하고 연구해도 미지한 그 빛을 말

씀 한마디로 창조하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충성을 명령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심판이 있을 것을 예고해 주셨습니다.

성경은 [심판이 있으리라]고 했고 [벌거벗은 것처럼 드러나리라]고 했고

[칭찬이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들을 종합하면 낱낱이 심판이 있을

것이며 잘한 사람에게는 칭찬과 상이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시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는 말씀을 주목해야 합니다. 이 말씀

은 일군과 맡은 자들에게 요구하는 자격조건이 무엇인가를 설명해 줍니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조건은 학벌도, 가문도, 미모도, 경력도 아닙니다.

충성입니다. 다른 조건들은 충성하는데 필요한 것들이지 충성보다 그것들이

더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 당시 제자들의 경우를 살펴봅시다. 베드로보다 훨씬 더 사회겨험이

나 가문이나 학벌이 출충한 사람이 얼마든지 있었습니다만 베드로를 선택하

신 것은 그의 충성심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베드로는 예수님을 위해 십자

가를 지는 순교의 잔을 마셨습니다.

 

바울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디모데전서 1:12에서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감

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라고 했습니다. 내 가

문때문에,내 학벌때문에,내 경험때문에라고 말하지 않고 "나를 충성되이 여

"라고 했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고 꾸짖고 계시는 부분이 있습니다.

것은 왜 공부하지 않느냐, 왜 경험이 적으냐가 아닙니다. 왜 최선을 다하지

않느냐입니다.

바울은 최선을 다한 주의 종이었습니다. 그러기에 본문 4:4에서 '자책할

일이 없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고 했습니다. 최선을 다한 사람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상급을 바라본 것입니

.

 

하나님이 맡기신 일에 최선을 다합시다.

내가 맡은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합시다.

지금 이 순간 내가 하나님 앞에 서 있다는 믿음으로 최선을 다합시다.

하나님이 지켜보고 계신다는 믿음으로 최선을 다합시다.

하나님이 지켜보시는 앞에서 꾀를 부릴 순 없지 않습니까?

 

 

19

제목 : 최선을 다하는 교회(1)

자료원 : 박종순목사 충신교회

발행일 : 950101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군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찌어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우리는 금년 한해동안 이 구절을 암송해야 합니다. 언제 어디서라도 암송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당회 모일 때도, 제직회 모일 때도 교역자 모임에서

도 예배시간에도, 남녀선교회 모임에서도 맨 먼저 이구절을 암송하고 시작

해야 합니다.

이유는 금년 우리 교회 표어 성경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최서을 다해야 한

다는 것은 금년 만의 경우는 아닙니다. 인생과 신앙을 포함한 모든 일에 최

선을 다합니다.

어떤 책을 보니까 최선의 정의를 다음과 같이 내리고 있었습니다. 최선이

"산모가 아이를 낳을때 힘쓰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아이를 낳아 본 경험이 없어서 실감나는 얘기를 할 수 없습니다만 여

자들의 말에 의하면 죽을 힘을 다하고 목숨을 걸고 힘을 써낳는다는 것입니

.

산부인과 병원이 없었던 시절의 임산부들은 민간요법으로 집에서 해산을

하고 했습니다. 아이를 낳기 위해 방에 들어가는 임산부들 마음 속엔 내가

벗어놓은 저 신발을 다시 신을 수 있을까라는 두려움으로 해산에 임했다고

합니다.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의 세계에는 대충대충 대강, 적당히,슬슬, 되는대로

라는 단어가 통하지 않습니다.

아이를 낳다가 그만 둘수는 없는 대충대충, 슬슬, 적당하, 되는대로,아이

를 낳을 수는 없습니다. 죽기 위해 남겨둔 힘까지도 써야 고고성을 들을 수

있는 것처럼, 인생사는 것도, 예수를 믿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도 적당히,

슬슬 해 치울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영국 격언 가운데 "최선을 다하라 그리고 신의 축복을 기다리라"는 말이

있습니다. 최선을 다하지 않는 사람은 축복받을 생각을 말라는 뜻입니다.

미국의 전직 대통령 가운데 현직에서 물러난 후에도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사람은 [지미 카터]입니다. 그는 그의 고향 조지아 주에 카터 연구소

를 만들어 국제문제를 다루고 있는가 하면 국제 해결사로 각광을 받고 있습

니다. 그는 작년 경직화되어 가던 북한 핵문제 해결을 위해 북한을 방문,

김일성을 만났고, 보스니아의 내전해결을 위해 세르비아계의 본거지 팔레를

방문했는가 하면 아이티를 방문해 아이티의 긴장을 해결하는데 공헌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난 후 자신의 회고록을 집필했는데 제

목은 [왜 최선을 다하지 않는가?] (Why not the best?)였습니다.

 

카터가 해군중위시절 해군함정을 타고 항해하던 중 어떤 날 함장 리코버

제독으로부터 "귀관은 왜 최선을 다하지 않는가"라는 책망을 받은 일이 있

었습니다. 그날 이후 그는 크게 깨닫고 자극을 받아 어떤 일이든 최선을 다

했고 그러한 삶이 원인으로 작용해 대통령이 되었노라며 리코버 제독에게

감사하노라고 말했습니다.

성공의 조건은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재벌들의 회고록을 읽어보면 그들

은 오늘의 부를 축적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음을 알게되빈다. 음악도,운동

, 미술도, 세계 정상에 오르려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대충대충 시간이

나 메꾸려는 태도로는 예술가도 되기 힘들고 학자도 되기 힘들고 목회자도

되기 힘듭니다.

성공의 일곱가지 비결이있습니다.

 

첫째는 시간을 바로 관리해야 합니다.

 

시간이란 초와 분과 시들이 모여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부스러기를

모아 만든 작품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초나 분 하나하나를 소홀

히 취급하고 낭비하다 보면 인생 전체가 망가지로 목적성취가 어렵게 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자투리 시간을 선용하고 아껴야 하는 것입니다.

돈을 버는 것도 100억 환상에 빠져 백원이나 천원을 거들떠 보지도 않고

도으로 취급하지 않는 사람은 일생 가난뱅이가 되든가 아니면 어느날 도둑

질을 하게 될 것입니다.

성공하려면 잠도 줄여야 합니다. 24시간 중 4분의 1이상을 자면 성공하기

어렵습니다. 잠자는 시간이 길면 길수록 성공의 길은 멀어집니다.

 

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잠이 많으면 기도생활도 힘들고 규칙적인 신앙성

장이 어렵게 됩니다. 특히 목회자는 잠이 많으면 고생스럽습니다. 한국교회

의 경우 새벽기도회가 없어지긴 어려울텐데 목히자가 잠이 많으면 얼마나

고통스럽고 힘들겠습니까? 올바른 시간관리는 성공과 직결되어 있음을 기억

해야 합니다.

 

둘째는 부지런해야 합니다.

 

게으른 사람은 성공이 어렵습니다. 구멍가게도 부지런하면 성공하지만 게

으르면 문을 닫게 됩니다.

신선한 야채와 생선을 파는 가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가게는 아침 11

시나 되어야 문을 엽니다. 가정 주부들은 그날 아침 일찍 문여는 다른 가게

로 가서 물건을 사가곤 했습니다. 넉달만에 그 게으른 가게는 문을 닫았습

니다.

 

교회도 게으른 교회는 부흥하기 어렵습니다. 불꺼져 있는 시간이 많은교

, 담임목사도 게으르고, 부목사도 게으르고, 장로도, 권사도, 성가대도,

교사도, 교인도 모두 게으름뱅이들 뿐이라면 그 교회는 부흥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12:11에서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

기라"고 했습니다.

잠언 6:6을 보면 "게으른 자는 개한테 가서 그 하는 것을 보고 배우라"

했습니다.

바울은 '일하는 소의 입에는 망을 씌우지 말라"고 했고 "일군이 그 삯을

받는 것은 마땅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일하지 않으면서 댓가만 챙기는 것은 안됩니다.

바울은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민주

화 열풍이 불기 시작하면서부터 일하기를 기피하는 풍조가 돌기 시작했습니

. 맡은 일을 적당히 땜질이나 하고 댓가만 챙기겠다는 망국적 풍조가 풍

미하고 있습니다.

일하는 사람만 권리를 주장할 수 있습니다. 일 안하는 사람은 권리도 없습

니다.

우리는 민족적으로 좀 더 부지런해야 합니다.

[복지부동]이라는 용어가 언론에 희자되고 있다는 사실은 슬픈 일입니다.

복지부동이 무업니까? 너는 떠들테면 떠들어라 나는 꼼짝도 안한다는 것입

니다. 죽일테면 죽여라. 나는 움직이지 않겠다는 것이 복지부동입니다.

게으르고 일 안하고 복지부동하는 것은 나라 망치는 병균입니다.

신앙도 게으르고 일 아니하면 자라지 못합니다. 금년은 무엇이든 누구든

한 가지씩 일을 합시다.

 

셋째, 전력투구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힘을 다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신명기 6:5을 보면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

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마음,성품, 힘을 다하라는 것은 전력

을 다하라는 것이며 전 인격을 다 쏟으라는 것입니다. 어떤 일이든 전력투

구해야 성공합니다. 한 가지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은 다른 일도 잘해냅니

. 그러나 작은 일 한 가지를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사람은 둘도 셋도 제

대로 해내지 못합니다.

기독교인은 어느 곳에서 무엇을 맡았든지 전력을 다해야 합니다.

그래야 전도의 길도 막히지 않고 그 다음 사람의 길이 열리기 때문입니다.

 

넷째, 성공한 사람을 본떠야 합니다.

 

그것이 경제적인 것이든, 정치적인 것이든, 학문이든, 예술이든 성공한 사

람들은 남이 따르지 못할 비범한 특성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냥 우연히

성공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그 점과 그 면을 예의주시하고 배우고 본뜨

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나쁜것, 악한 것, 범죄수단은 본뜰 필요가 없지만 성공한 사람들의 삶의

자취는 따르고 배우고 본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나도 그렇게 될 수 있는 것

입니다.

 

다섯째, 사람을 잘 만나야 합니다.

 

집에서 기르는 개도 어떤 주인을 만나느냐에 따라 천대받을 수도 있고 호

강할 수도 있습니다.

미국의 어떤 개가 죽으면서 자식들에게 유언을 했다고 합니다. '절대로

한국에 이민 가지 말라"고 이유는 간단합니다. 사철탕집으로 끌려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미국 뉴저지 주에 살던 [보미]라는 이름을 가진 개는

주인이 죽으며 100만 달러를 유산으로 몰려주었습니다. 그 유산은 변호사가

관리하며 개전용 캐딜락 승용차에 전속 운전수를 고용했고 주치 수의사가

건강을 체크하는가 하면 전속 개의상 디자이너가 디자인한 옷을 입혀 주었

습니다. 그 개는 주인 잘 만나 호강한 것입니다.

사람의 경우는 더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사람을 잘 만나면 성공길이 열리고 잘못 만나면 열렸던 길도 닫히고 맙니

. 그러니까 성공하고픈 마음이 있다면 친구나 이웃 선택을 잘 해야 합니

.

제가 어렸을 때 한 동네에서 교회를 다니며 늘 어울리느니 7-8명의 친구들

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4명은 나쁜 버릇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를 들면 장난삼아 남의 수박을 훔친다든지, 호박 잎을 가루처럼 만들어 담

배처럼 피운다든지 하는 것을 조금도 주저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도 강요하곤 했습니다.

만일 그때 제가 그들과의 만남이나 교제를 끊지 않고 계속했더라면 오늘의

저는 목사가 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그들은 모두가 예수를

떠났고 세상 사람들이 됐기 때문입니다.

지금 사귀고 있는사람, 자주 만나는 사람, 친구려니 하고 교제하는사람을

둘러 보십시오.

빨리 삶에 오염되기 전에 주변을 정리하십시오.

 

여섯째는 때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기회는 주어지지 않습니다. 기회란 시간과 사건이 합해서 되는 것이기 때

문에 시간이 지나가는 것처럼 마치 물이 흐르듯 흘러가는 것입니다. 그러므

로 그 기회를 붙잡고 내 것으로 만들어야 성공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은혜도, 구원도 지금이라야 된다고 말했습니다.

일곱째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야 합니다.

 

모든 성공의 조건을 다 갖추고 만반의 준비가 다 되어 있다고 해도 성공의

결정권은 하나님이 행사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악조건 속에서도 성공을

만들어 내시는가 하면 성공의 결정에서도 끌어내리시는 능력을 가지고 계시

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성공과 행복과 평안은 하나님께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역대상 29:10이하를 보면 다윗의 고백이 기록되어 있습

니다. 그는 "권능과 영광과 이김과 주권과 천지에 있는 모든 것이 다 주께

속하였으며 주께로부터 왔노라"고 했습니다.

 

1995년도 충신교회 표어는 [최선을 다하는 교회]입니다. 그리고 관련성구

는 고린도전서 4:1-2입니다. 말씀드린대로 우리는 이 구절을 때마다 암송해

야 합니다.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군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저는

계속해서 왜 최선을 다해야 하며 어떻게 최선을 다해야 하며 최서을 다하면

어떤께 되는가에 대하여 연속적으로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바람직하고 바르고 좋은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 결

과로 오는 하나님의 축복과 은총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미국 라스베가스에 도박을 하기 위해 몰려드는 사람들은 대부분 금요일 오

후에 몰려들기 시작 토요일과 주일까지 도박에 미쳐 있다가 오후가 되면

시뻘겋게 충혈된 눈과 빈혈병자처럼 비실거리는 걸음거리로 주차장으로 간

다는 것입니다.

도박군들은 이틀밤씩 최선을 다했지만 남는 것은 허탈, 기진, 패배감 뿐

인 것입니다. 나쁜 일에 최선을 다했기 때문입니다.

1995년 한해동안 하나님이 맡겨주신 일에 최선을 다합시다.

뜻있고 보람된 일에 최선을 다합시다. 각각 맡은 일들에 최서을 다합시다.

주의 몸된 교회를 위해 최선을 다합시다. 그리하면 하나님의 상급이 임할

것입니다.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아멘!

 

 

20

제목 : 새해를 맞는 마음

자료원 : 박종순목사 충신교회

발행일 : 950101

 

우리나라 만큼 사계절의 순환과 구분이 명확한 곳도 많지 않습니다. 노르

웨이 같은 경우는 겨울이면 몇 달씩 밤만 계속되는가 하면 여름이면 낮만

계속됩니다.

노르웨이 최북단 사는 주민들은 118일이 되면 여러달 동안 계속된 밤이

끝나고 새롭게 솟아오르는 해를 보기위해 높은 산 위로 올라갑니다. 그리고

떠오르는 해를 본느 순간 "아침이다! 해가 솟는다!"라고 소리를 지릅니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강원도 경포대의 새해 첫날 일출을 보기 위해 1231

저녁 버스를 대절해 단체로 가는 사람들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시간 성전에서 영원한 빛이신 주님을 바라보며 새해를

맞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려야할 감사의 주제나 내용 가운데 새해

니까 특별히 더 감사해야 된다는 공식은 없습니다. 감사는 언제나, 늘 감사

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지난 한해는 수를 셀 수 없는 감사로 점철된 한해였습

니다. 주님 떠나지 않고 믿음지킨 것으로 시작해 죽지않고 살게 된 것,

지백체가 기능상실하지 않은 것, 주님 섬기게 해 주신 것, 전쟁 일어나지

않은 것, 굶어죽지 않은 것, 오늘 여기 모일 수 있게 된 것.. 등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우리는 대망의 새해를 감사하는 마음과 믿음으로 맞이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새해를 맞는 우리의 마음가짐이며 태도이기 때문입니다. 카렌다는 바

뀌고 해는 바뀌었지만 그 마음이 바뀌지 않으면 의미가 없게 되는 것입니

.

어떤 공산주의자가 뉴욕에 있는 콜럼버스 광장에서 사람들을 모아 놓고 공

산주의를 찬양하는 연설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기염을 토하며 외치고 있었습니다. "공산주의는 인간에게 새로운 옷

을 입혀 줄 수 있습니다"라고

그의 연설을 듣고 있던 기독교인 한 사람이 말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 새 옷을 입을 새 사람을 만드십니다"라고

새 옷보다는 새 사람이 중요한 것입니다. 제아무리 값비싼 새 옷을 입어도

도둑놈은 도둑놈입니다. 새 옷 입는다고 도둑놈이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잘못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옷만 갈아 입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바울은 "새 사람을 입으라"고 했습니다.

시편 131편은 시인의 소박한 열망을 우리에게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

은 시인의 삶의 다짐이기도 하고 소원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시인의 그 소

박한 다짐을 새해를 맞는나의 소망과 다짐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1. 겸손하게 살겠습니다.

 

1절에서 시인 다윗은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치 아니하고 내 눈이 높지

아니하오며"라고 했습니다.

이 시는 다윗의 후기 작품입니다. 다시말하면 그가 베들레헴 들판에서 양

을 치며 불렀던 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최고 통치자인 왕으로 재위하는

동안 을었던 시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하나님을 향하여 "내 마음이 교만치 아니하며 내 눈이 높지

아니하오며"라고 자신의 겸손을 고백한 것입니다.

겸손은 내적인 것이며 인격적 사건입니다. 겸손은 자포자기나 체념이 아닙

니다. 겸손이라는 원문의 뜻은 [누르다][낮추다][괴롭히다]라는 것입니다.

겸손은 자신을 누르고 낮추고 괴롭히는 자기와의 싸움입니다.

 

 

 

 

누가복음 18:13-14을 보면 어느 죄 많은 세리의 기도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는 가슴을 치며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

소이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죄를 사하셨고 그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죄인이며 무가치한 존재이며 얼마나 잘못한 것

이 많은 사람인가를 깨닫게 될수록 겸손의 부피는 많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영국의 신학자 [풀리처]에게 젊은이가 물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위대한

사람이 될 수 있겠습니까"라고

풀리처는 대답했습니다. "만일 그대가 영국에서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이

라고 생각할 수 있다면 하나님은 반드시 그대를 들어 써 주실 것이다"라고

주경가 베이커는 "인생은 계단과 같다. 위로 올라가면 하나님을 알게되고

밑으로 내려가면 자신을 알게 된다"고 했습니다.

체코슬로바키아 낳은 세계적인 작곡가 [드보르작]은 민족주의 낭만파 음악

인으로 명성을 떨친 사람입니다. 특히 그가 작곡한 첼로 협주곡[신세계 고

향곡]은 음악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어느날 드보르작을 존경하는 프라하의 시민들이 그에게 꽃다발을 증정했습

니다. 그 꽃다발에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음악가에게"라는 리본이 매어

있었습니다.

며칠 후 사람들이 드보르작의 집을 방문했을 때 그들이 주었던 꽃다발은

드보르작의 작곡실 한켠에 있는 베토벤의 흉상 밑에 놓여있었습니다. 그리

고 드보르작이 직접 쓴 찬사도 함께 놓여 있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음악가에게..."

드보르작은 시민들의 찬사와 꽃다발을 받고 몸둘 바를 몰라하며 고민하다

가 자신의 음악세계에 결정적 영향력을 주었던 베토벤에게 바치기로 결심했

던 것입니다.

우리가 취해야할 겸손한 삶의 태도는 주님을 높이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주님께로 말미암았으며 주님께 돌려야 하며 주님의 받으셔야 된다는 것을

믿고 사는 것이 최고의 겸손인 것입니다. 그리고 언제나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며 살아야 합니다. 금년 한 해 겸손하게 살아갑시다.

 

2. 과욕을 버리겠습니다.

 

1절 끝을 보면 "내가 큰 일과 미치지 못할 기이한 일을 힘쓰지 아니하나이

"라고 했습니다. 한마디로 지나친 욕심으로 자신을 망가뜨리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큰 일과 미치지 못하는 기이한 일이란 자신의 분수에 맞지

않는 허영된 삶이나 욕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1960년대 우리나라 정치의 이슈는 [잘 살아보세]였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경제적 중진국 대열에 끼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사는 훈련은 전무였습

니다. 허영, 사치,낭비의 물결이 홍수처럼 휩쓸어도 속수무책입니다.

시인은 그런 것들 때문에 하나님이 내게 주신 힘을 낭비하지 않겠다고 고

백합니다.

사람이 일생동안 쓸 수 있는 힘은 제한되어있습니다.

수명 자체도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 힘과 생명을 헛된 데 낭비하면 안됩니

.

돈은 매우 필요한 것입니다만 그 돈을 벌기 위해 과욕을 부리면 결국 그

돈 때문에 인생을 그릇치게 됩니다.

쾌락이 인생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이긴 하지만 그러나 쾌락만을 구하다

보면 그 쾌락에 빠져 패가망신하고 마는 것입니다.

시간도, 건강도, 물질도 올바로 사용합시다. 노력하고 힘을 다해 살되 욕

심은 버립시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는다"는 야고보서의

말씀에 귀를 기울입시다.

 

3. 평안한 마음으로 살겠습니다.

2절을 보면 "실로 내가 내 심령으로 고요하고 평온케 하기를 젖뗀 아이와

같도다"라고 했습니다.

어린아이가 엄마의 품에 안겨 실컷 젖을 먹고 난 후 만족한 미소를 짓고

있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숟가락으로 이유식을 먹였을 대 아기의 표정과 엄마의 젖을 먹을때 아기의

표정을 비교해서 관찰해 보십시오. 이유식을 받아 먹고 있는 표정은 만족한

표정이빈다. 그러나 엄마의 젖을 먹고 있는 표정은 행복하고 평안한 표정입

니다.

 

외국 미술단체에서 [평화]를 주제로 미술작품을 공모했습니다. 많은 작품

이 공모됐는데 소재가 다양했습니다.

구름 한점도, 바람도 없는 망망대해에 떠 있는 배 한척, 한적한 시골의 전

원풍경, 꽃핀 들녘에서 가족들이 소풍을 즐기는 모습, 노을지는 석양 한쌍

의 연인들이 손을 잡고 걸어가는 모습, 푸른 초장에서 양떼들이 풀을 뜯고

있는 모습 등, 평화를 상징하기에 너무나 적절한 그림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 공보전의 당선작은 다음 그림이었습니다.

"거친 파도가 밀려오는 해변가의 작은 오두막 엄마의 품에 안겨 밖에서 일

고 있는 풍랑이나 소란에 아랑곳 없이 젖을 빨고 있는 갓난아기의 미소"

습니다.

아기의 최대 요람은 엄마의 품입니다. 집안에 돈도 있고 TV도 있고,만화책

도 있고, 언니도 있고, 장난감도 있고, 옷도 있고, 신발도 있고, 냉장고도

있고, 세탁기도 있고, 보험 증서도 있고, 침대도 있습니다. 그런데 아기느

니 서럽게 울어댑니다. "엄마- 부르며 웁니다. 아가의 최대 행복과 평화는

엄마의 품입니다. 그곳에 평안이 있고 행복이 있습니다.

시인은 고백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품 거기서 젖뗀 아이처럼 행복하고 평안을 찾겠노라"고 다

윗은 시편 17:8에서 하나님의 품을 "주의 날게 그늘"이라고 노래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주의 품, 그 날개 그늘에서 쉬고, 평화를 찾고 평안을

추구해야 합니다.

 

주 날개 및 내가 평안히 쉬네

밤깊고 비바람 불어쳐도

아버지께서 날 지키시리니

거기서 평안히 쉬리로다

주 날개 밑 즐거워라 그 사랑 끊을 자 뉘뇨

주 날개 밑 내 쉬는 영혼 영원히 거기서 살리

주님 안에서 그 날개 아래서 평안을 누리며

금년 한해를 살아나갑시다.

 

4. 영원히 하나님을 바라며 살겠습니다.

 

3절을 보면 "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찌어다"라고 했

습니다.

3절의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나는 내 일생 하나님을 높이며 겸손히 살겠다. 헛된 일에 나의 건강이나

정력이나 소유를 낭비하지 않겠다. 그리고 하나님의 그 품 속에 살면서 젖

먹고 난 어린 아이처럼 평안하고 행복하게 살겠다. 이스라엘아 내가 그렇게

살기로 한 것처럼 너희도 그렇게 살기를 바란다]는 통치자로서의 바램을 피

력한 것입니다.

바란다는 것은 원한다 소망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르는 복음성가 가운데 "사람을 보며 세상을 볼 땐 만족함이 없었

"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세상을 바라면 세상 것은 얻을 수 있지만 만족과 행복은 얻지 못하빈다.

"나의 하나님 그분을 볼 땐 나는 만족하였네"라는 노래처럼 하나님을 바라

면 참 만족과 행복을 얻게 됩니다. 그래서 시인은 "이스라엘아 영원까지 바

라면 내가 누릴 만족과 행복도 영원까지 계속되기 때문입니다.

 

새해의 태양이 밝았습니다.

겸손하게 삽시다.

욕심을 버립시다.

평안을 누리며 삽시다.

영원히 하나님을 바라며 살아갑시다. 아멘!

 

 

21

제목 : 구원의 우물에서

자료원 : 박종순 목사. 충신교회

발행일 : 941225

 

본문은 하나님을 나의 구원과 힘과 노래로 밍고 사는 사람들에게

임할 은혜와 그 삶이 어떤 것인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

면 구원받은 사람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밝혀 주고 있는 것입니

.

3절은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

나님을 나의 구원, , 노래로 믿고 산다면'이라는 뜻입니다. 그가

예수를 믿는 사람인가, 구원을 받은 사람인가, 은혜를 받은 사람인

가 하는 것은 그의 사는 모습을 통해 드러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3

[그러므로]이하의 설명을 주목해야 합니다.

 

1.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

라고 했습니다.

우리네가 생각하는 땅이나 물에 대한 개념과 이스라엘 사람들이

생각하는 개념은 전혀 다릅니다.

땅은 하나님이 주셨다고 믿기 때문에 성지로 믿는가하면 물이 귀

한 곳이기 때문에 [구원]의 상징으로 묘사된 곳이 많습니다.

8:6을 보면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긴 죄를 가

리켜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 물을 버렸다"고 묘사 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가리켜 생명의 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마리아 수가성에 살던 어떤 여인은 피곤하고 지친 모습으로 물

길러 나왔다가 거기서 생수이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야말로 기

쁨으로 물을 긷게 된 것입니다.

17:1-7을 보면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물이 없어 고통받고 있을

때 하나님은 반석에서 물이 나와 마시게 해 주셨습니다.

이상에서 말한 물과 얽힌 모든 사건 등은 결국 영원한 생명의 물

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물 긷

는 사람들 입니다.

지금도 수도 물을 사용합니다만 옛날엔 우물을 파고 그 물을 두

레박으로 퍼내 썼습니다.

우물은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그 동네 여론의 집합소입니다.

우물가에 둘러앉은 아낙네들이 세상 돌아가는 얘기며 속상한 얘

기며 축하할만한 소식들을 주고 받는 곳이 우물입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여론광장인 셈입니다.

둘째, 우물물은 퍼내야 맑고 깨끗합니다.

물을 퍼쓰지 않으면 얼마 가지 못해 이끼가 끼고 썩게 됩니다.

물은 흔들고 흘러야 생수가 되는 법입니다.

셋째, 두레박이 터지면 안됩니다.

그렇게 되면 물이 다 새어 나가게 됩니다.

넷째, 우물물은 계속 새롭게 솟아납니다.

우리가 예수를 영접하고 구주로 고백하는 순간부터 마치 우물물

이 솟아나듯 기쁨이 샘솟게 되는 것입니다.

물 없는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기쁨보다 더 큰 감격이 신령

한 우물을 만난 사람에게 넘치는 것입니다.

누굴 만날까봐 뜨거운 한 낮에 물길러 나왔던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을 만난 후 참 기쁨이 무엇인가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쁨으로 구원의 우물에서 물을 긷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참 기빛븜, 참 행복, 참 만족을 얻으려면 구원의 우물에

서 물을 길어야 합니다. 구원의 우물가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야 합니다. 우리끼리만 우물가에 둘러 앉아서 세상 돌아가는 얘기

의 꽃이 피운다면 참 기쁨이나 구원을 얻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2. 여호와께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4절을 보면 "그날에 너희가 또 말하기를 여호와께 감사하라"

했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의 최초의 언어는 [감사합니다]라는 것입

니다.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사람을 건져주었습니다. 정신을 차린 그

가 자신을 구원해 준 사람에게 맨 먼저 할 말이 무엇이겠습니까?

"형씨 몇살이슈?"

"주민등록 번호가 뭐유?"

"어디 사슈?"라야 되겠습니다.

아닙니다. 그건 안됩니다. 첫마디는 "감사합니다"라는 것이어야

합니다.

본문을 보면 감사의 대상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그 이름을 부르

"라고 했습니다. 딴이름 부르며 감사하면 안됩니다. 나에게 구원

의 기쁨을 주신 하나님을 부르며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시편 후반부를 보면 "여호와께 감사하라"는 노래들로 채워져 있

습니다.

때로 우리는 정말로 감사해야 될 하나님과 상대적인 감사의 대상

인 사람을 뒤바꿀 때가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입은 은혜는 최선을

다해 감사할 줄 알면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선 대충 대충 넘어갈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

.

 

3. 그 행하심을 만국중에 선포하라고 했습니다.

감사하는 것만으로 끝나면 안됩니다. 내가 감사하고 있는 그 사

실과 내용을 선포해야 합니다.

어느 해 농아인들과 정박아들이 함께 드리는 추수감사절 예배에

참석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들보다 건강한 제가 볼 때 그들은 감사

할 조건이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날 저는 그들의 노래와

손놀림 속에서 감격적 감사를 목격했습니다. 감동적인 예배였습니

.

우리는 사지백체가 말짱하고 먹고 배설하고 잠자고 깨어날 수 있

을 뿐만 아니라 구원의 은총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감사가 적었습

니다.

감사는 하나였고 원망은 아홉이었습니다.

감사의 노래는 한곡 뿐이었고 원망과 시비의 노래는 수천곡조였

습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감사를 중얼거렸을뿐 선포하지못했

습니다.

본문은 만국 중에 선포하라고 했습니다. 왜 예수님이 좋은가,

한가, 위대하신가를 선포하라는 것입니다.

지난 주간 김포 공항 직원들의 성탄 축하예배에 설교를 하기위해

갔습니다. 그날 마침 모 백화점이 제2공항청사 지하 넓은 공간에

매장을 열고 자선바자 판매를 하고 있었습니다. 예배 장소가 그곳

매장을 지나서 가야하는 곳이어서 매장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제가

여러 코너를 지날 때마다 판매원들이 "어서 오십시요" "할인 판매

합니다" "기회 놓치지 마십시요" "좋은 물건입니다"라며 손님 끌기

에 열을 올리고 있었습니다.

저는 거기서 상품 판매에 열을 쏟는 젊은이들의 신념을 볼 수 있

었습니다.

그들은 부끄러움도 망서림도 없었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감사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행하심을 만국 중에 선포해야 합니담. "

수님은 나를 위해 오셨다""예수님은 나를 위해 죽으셨다""

수님은 나를 위해 다시 살아나셨다""예수님은 오늘도 나와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선포해야 합니다.

5절 끝을 보면 "온 세계에 알게 할찌어다"라고 했습니다.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만국 중에 선포하라든지 온 세계에 알게

하라는 것은 복음의 세계화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문민정부 출범초기의 이슈는 개혁과 민주화였습니다. 그리고 어

번 개각을 계기로 내건 이슈는 세계화입니다.

이제는 동남 아세아의 한국이 아니라 세계의 한국이 되어야 한다

는 것입니다. 어차피 세계 정세는 세계화를 지향할 수 밖에 없습니

.

러시아나 중국이 이미 개방 정책을 표방한데 이어 북한도 영공개

방을 선언했습니다. 이제 더이상 폐쇄나 쇄국정책이 설 자리가 없

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시점에서 볼 때 주전 700년경 하나님의 구원을 만국 중에

선포하며 온 세계에 알게 하라는 본문의 교훈이야말로 복음선교의

세계화를 위한 예언이었던 것입니다.

벳바게라는 마을을 떠나신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으

로 올라가고 계셨습니다. 길가에 서있던 시민들이 종려가지를 흔들

고 겉옷을 벗어 길에 편 채 호산나를 외쳤습니다. 그러자 종교 지

도자들이 웬 소란이냐며 말렸습니다.

그때 주님은 "만일 이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고 하

셨습니다.

4-6절 사이에 "그 이름을 부르며, 선포하며, 알게하라, 소리높여

부르라"고 반복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이 해야하는

가장 중요한 일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4. 그 이유가 무엇인지 찾아 보겠습니다.

 

왜 감사해야 하며 그 이름을 부르고 선포하고 높이고 찬송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찾아야 합니다.

5절 끝을 보면 "가히 아름다운 일을 하셨음이니"라고 했습니다.

극히 아름답다는 것은 탁월한 비교할 수 없는 뛰어난 영광스러운

아름다움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뛰어나고 탁월

하고 비교할 수 없고 영광스러운 사건이며 아름다운 일인 것입니

.

신문 보도에 의하면 중국 상해나 북경에도 성탄나무(Christmas

Tree)를 세우고 성탄 할아버지(Santa- )를 만들어 세웠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이 세상에서 가장 놀랍고 아름다운 사건입니다.

그러기에 전 세계가 그분의 탄새을 축하하고 경배하는 것입니다.

그 뿐입니까? 이 세상에 이름을 남긴 모든 사람들 가운데 예수님

보다 더 아름답고 귀한 삶을 산 사람이 누굽니까? 그리고 예수님처

럼 죽은 사람이 누굽니까? 오직 예수 뿐입니다.

그토록 아름답고 위대하신 예수님이 태어나신 날이 크리스마스입

니다.

이 복된 날 우리에겐 너무나 감사하고 증거할 사건들이 많습니

.

윌리엄 거널은 "악한 일을 하고 기뻐하는 모습이나 그리스도인들

이 슬퍼하고 낙심하는 모습은 똑같이 꼴불견이다"라고 했습니다.

저는 어제(토요일) 새벽기도회를 마치고 [늘 주님]이라는 붓글씨

를 써서 표구사에 보냈습니다. 어떤 분에게 선물을 하기 위해서였

습니다. 저는 그 분을 만나본 일이 없기 때문에 얼굴도 모르는 사

람입니다. 저희 교회 장로님이 몇년 전 제가 써준 [늘 주님]이라는

족자를 사무실에 걸어 놓았는데 어느날 그분이 그 방에 들어 왔다

가 그것을 보았답니다. 어렸을 때 교회 생활을 하다가 장년이 된

뒤로부터는 신앙생활을 못하던 사람이었는데 그날 [늘 주님]이라는

족자를 보는 순간 가슴 뭉클한 감동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휘호 하나를 더 부탁해서 받아 달라는 청탁을 받았다는 것입니

.

[늘 주님]을 히브리 말로는 임마누엘이라고 합니다. 임마누엘이

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임마누엘이 역사적 사건으로 이뤄진 날을 크리스마스라고

부릅니다.

크리스마스는 구원의 우물이 되신 주님께서 탄생하신 날입니다.

그리고 크리스마스는 지금도 나와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이신 주님

을 찬양하는 날입니다.

이 사건을 감사합시다. 이 아름다운 사건을 만국에 전파합시다.

오늘도 주님은 나와 함께 계십니다.

할렐루야!

 

 

22

제목 : 하나님은 나의 구원

자료원 : 박종순목사 충신교회

발행일 : 941218

 

이사야12장은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감사와 찬양입니다. 이스라

엘 사람들은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찬양이 136편이나 되었다고 합니

. 본문의 찬양 주제는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는 것입니다.

12:1"그날에 너희가 말하기를"이라는 서두로 시작됩니다. (In

that day you will say) 그 뜻은 그날에 있을 사건 때문에 찬양한

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그날은 주님이 메시아로 오시는 날

을 의미합니다. 그렇게 볼 때 이사야12장은 주전 700년 전에 불렀

던 성탄송가가 되는 것입니다. 12장은 둘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것은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감사와 찬양(1-2)과 하나님의 구원을

세계 만방에 전하라는 것입니다(3-6). 우리는 2절 말씀을 주목해야

합니다.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의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워이심

이라"고 했습니다. 2절 속에 하나님 찬양의 내용이 드러나고 있습

니다.

 

1."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고 찬송합니다.

 

우린 여기서 []라는 1인칭을 주목해야 합니다. 우리의 구원이

시라고 노래하지 않고 나의 구원이시라고 노래한 점을 주목해야 합

니다.

1절 끝을 보면 "내가 주께 감사하겠나이다"라고 했습니다. "나의

하나님""나의 구원"이 바른 고백입니다. 구원은 내 것일 때 감격스

럽고 감사가 넘치는 것입니다. 만성 고질병을 앓던 사람이 명의를

만나 병을 고쳤습니다. 그를 만나는 사람마다 어떻게 병을 고쳤는

가를 물었습니다. 그는 감격한 나머지 울먹이멸 어느 병원인지는

잘 모르겠고 의사 이름도 모르는데 하여튼 우리가 고침받았다고 떠

벌렸다고 가정합시다. 그 사람은 가장 중요한것을 잊어버린 사람입

니다. 병원을 대고 고쳐준 의사 이름을 대고 내가 그분 때문에 고

침받았다고 소리를 높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는 이 고백 속에는 다음과 같은 뜻이

들어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만 나의 구원이시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유일성과 구원의 유일성을 천명하는 것입

니다. 하나님이 한 분이신 것처럼 구원의 길도 하나입니다. 다른

방법으로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교리를 바울은 갈1:6에서 [다른 복

]이라고 했고, 1:8에서는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

"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도량이 크고 넓은 사도였습니다. 심지어 자기를 배신했거

든 의견을 달리했던 사람들도 용납하고 포용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복음은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미국을 중심으로 일어난 신학사상 가운데 종교 다원주의라는게

있습니다. 미국은 본래 합중국이어서 각 나라 각 민족이 각각 다른

종교를 가진 채 모여 살고 있습니다. 각 나라 사람마다 각각 다른

종교 신앙을 가지고 살면서 구원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에 기독교만

구원이 있다고 주장하는 기독교의 교리는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교나 불교나 회교나 인도교나 그 어떤 종교도 구원이 있기 때문에

꼭 예수를 믿어야만 구원 받는다는 것은 시대착오적 발상이라는 것

이 종교 다원주의 주장입니다. 종교 다원주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나 교회의 존재를 완전히 무시해 버리고 있습니다.

사상은 무신론보다 더 무서운 적입니다. 한마디로 바울이 말한 [

주받을 다른 복음]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주신 예수 그리스

도의 십자가 없이는 구원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십니

.

둘째 하나님은 나를 용서 하신다는 것입니다.

용서는 구원의 과정이며 조건입니다. 다시 말하면 구원은 내가

죄용서 받는 것입니다. 용서받지 못하면 구원받지 못하는 것입니

. 용서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죄지은 사람이 죄없는 사

람더러 "내가 당신을 용서하겠소"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죄인은 죄인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

물론 사람이 사람에게 지은 죄는 서로 용서하고 용서받을 수 있

습니다. 그러나 지옥갈 죄를 용서해 줄 수는 없는 것입니다.

대통령의 특사로 수감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교도소에서 나온 사

람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특사]라는 말은 듣는 순간 하늘이 빙

빙 돌더랍니다. 그리고 설마하는 생각으로 기가 막히더랍니다.

기 허벅지를 꼬집어 보았답니다. 분명 꿈은 아니더랍니다. 전신의

힘이 쑥 빠지면서 털썩 주저앉아 엉엉 울었답니다. 그리고 이젠 살

았구나라는 감동이 전신을 휘감고 소리치며 노래를 부르고 싶더랍

니다. 그리고 죄사함을 받은 그 감격은 비교도 할 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 그 무엇에 그것을 비길 수 있겠습니까? 위가 쓰리고 아파

서 병원을 찾아간 어느 집사님이 계셨습니다. 설마 했지만 암이라

는 진단 결과가 나왔습니다. 하늘이 노랗게 변하고 현기증이 일어

나면서 의자에 털썩 주저 앉았습니다. 그리고 내가 왜 암이야라는

분노가 치솟았습니다.

"내가 뭘 잘못했길래 암이란말야, 뭐 이따위 병원이 다있어?"

며 모든 것이 다 증오스러워 졌습니다.

그 시간 부터 위가 쑤시고 열이 오르고 구역질이 나고 개스가 터

져 나왔습니다. 식욕이 떨어지고 소화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 소식

을 들은 친구 의사가 모 종합병원의 내과 과장을 소개해 주면서 다

시 한번 검사해 보도록 주선을 했습니다. 결과는 암이 아니었습니

. 그 순간 세상이 그렇게 밝고 아름답고 햇빛이 그토록 찬란하더

랍니다. 의사가 그토록 고맙고 팔다리에 힘이 솟고 차 안에서 노래

를 부르며 집으로 돌아 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엔 분명히 문제가 있습니다.

특사받은 감격만도 못하고 암이 아니라는 건강 진단을 받은 후의

감격만도 못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심판하실 수도 있고 용서하실 수도 있습니다. 벌하실

수도 있고 상을 주실 수도 있습니다.

구약 성경을 보면 무서운 심판을 받은 사람이나 민족들의 이야기

가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경우는 용서받은 사

람들이 된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셋째 그 구원은 영속적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의사나 약은 내 몸둥이를 고쳐 줍니다. 그러나 그 몸둥이는 나이

들면 노쇠하고 병약하게 됩니다. 영원히 건강하게 되는 것이 아닙

니다.

어떤 잡지를 보니까 외국의 어떤 여자 배우는 얼굴 성형수술만

세번을 했다고 합니다. 20대 초반에는 눈이며 코며 양 볼의 보조개

를 성형했다고 합니다. 30대 초반에는 이마의 주름을 없애고 팽팽

하게 하기 위해 머리 속으로 이마 피부를 끌어 잡아 꿰메는 수술을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40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늘어진 목덜미와

턱을 팽팽하게 만들기 위해 목 뒤로 피부를 비끌어 메는 수술을 했

다는 것입니다. 그 잡지의 평은 만일 50이 지난 그녀의 얼굴을 비

끄러맨 실을 가위로 싹뚝싹뚝 잘라 버린다면 하루 아침에 그녕는

60 노파가 되고 말 석이라고 했습니다.

미인도, 영웅도, 영광도, 재물도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은 영원한 것입니다. 구원은 영원히 영원히 계속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2. 하나님은 나의 힘이라고 찬송합니다.

하나님이 나의 힘이라는 찬송은 경험적 고백입니다. 하나님의 힘

을 체험한 사람만 그렇게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힘은 크게 세

가지로 구분됩니다.

첫째는 육체의 힘입니다.

물건을 드는 힘, 만드는 힘, 무력, 폭력, 경제력, 정치력, 지식

의 힘 등 인간 세계에서 생성되고 행사되는 모든 힘을 가리켜 육체

의 힘이라고 합니다.

사람은 살아가는데 이 힘이 없으면 살기가 어렵습니다. 그 힘과

힘이 겨루는 것을 경쟁력이라고 합니다.

둘째는 영적인 힘입니다.

영적인 힘은 초자연적이며 초월적입니다. 마귀도 이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합니다.

셋째는 하나님의 힘입니다.

이 힘은 누구도 무엇도 겨룰 수 없고 맞설 수 없습니다. 가장 이

힘에 맞설 수 있는 것은 마귀의 힘인데 이밈 마귀는 하나님의 힘

앞에 무릎을 꿇은지 오랩니다.

하나님의 힘은 자기 힘을 믿는 사람에게서는 떠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힘을 믿고 의지하면 강한 힘이 돼 주십니다. 교만과 불신

과 의심과 염려는 내게서 힘을 빼앗아 갑니다.

그러나 하나님만을 앙망하면 새 힘이 솟구치는 것입니다.

40:31을 보면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한평생 하나님의 힘을 체험하며 살았던 다윗은 시18:1에서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 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리

고 이어 2절에서는 "여호와는 나의 반석, 요새, 건지시는자, 피할

바위, 방패, 구원의 뿔, 나의 산성이시라"고 노래 했습니다.

다윗은 고독할 때마다, 힘들 때마다, 시련이나 환난이 앞을 가로

막을 때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 힘을 구했습니다. 그리고 그 힘

으로 승리했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힘이시며 구원이십니다.

 

3. 하나님은 나의 노래라고 찬송 했습니다.

 

가사있는 노래는 사람만 부릅니다. 새들의 노래는 소리와 곡조는

있습니다만 가사는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노래는 가사가 있고

사상이 있고 뜻이 있습니다.

노래는 자연, 이념, 사상, 사랑을 예찬하거나 표현하는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찬송은 그 대상이 하나님입니다.

영국 시인 에드워드 영은 "기도는 우리의 길을 하늘로 향하게 하

지만 찬양은 이미 그곳에 있었다"고 했습니다.

노래 가운데 가장 귀하고 고상한 노래는 하나님을 노래하는 것입

니다. 그것은 거룩한 노래이기 때문에 [성가]라고 부릅니다.

[예수로 나의 구주삼고]등 우리에게 익숙한 찬송을 많이 쓴 크로

스 비는 생후 6개월만에 시력을 잃고 맹인이 되었습니다. 어느날

친구가 그녀에게 "하나님은 왜 너 같이 착하고 재주 많은 사람을

맹인이 되게 하셨을까?"라며 한마디 했습니다. 크로스비는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내가 태어나는 순간 네 소원이 무

엇이냐고 물으셨다면 나는 맹인이 되게 해달라고 부탁했을거야 왜

냐하면 천국에 가서 맨처음 눈을 뜨고 주님을 볼 수 있기 때문이

"라고...

그녀는 일생동안 2000여개의 찬송시를 썼습니다. 우리 찬송가에

24편이나 수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당면한 현실은 각각 다릅니다.

두 눈을 뜬 사람도 있고 감은 사람도 있습니다. 성공한 사람도

있고 실패한 사람도 있습니다. 행복한 사람도 있고 불행한 사람도

있습니다. 건강한 사람도 있고 병든 사람도 있습니다. 아무 문제가

없는 사람도 있고 문제 투성이인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크로스

비는 두 눈을 감을 채 2천여개의 감사와 감격의 찬송시들을 썼습니

.

119:164절을 보면 "주의 의로운 규례로 인하여 내가 하루 일곱

번씩 주를 찬양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16장을 보면 빌립보 옥

중에 갇힌 바울과 실라가 깊은 밤 찬송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

밤에 옥문이 열리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성탄은 하나님의 구원과 그 크신 사랑을 찬송하는 계절입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들이 산처럼 쌓여 있더라도 감사하고 찬송합시다.

금성철벽 여리고 성도 나팔불고 찬송하며 돌았기 때문에 무너졌습

니다.

나의 힘, 나의 노래, 나의 구원이신 주여 내가 주를 찬양 하나이

.

 

 

23

제목 : 엎드리는 사람들

자료원 : 박종순목사 충신교회

발행일 : 941211

민수기에는 두가지 큰 반역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14장에 기록된 바란 광야 가데스의 반역 사건 입니다.

굽에서 나온지 2녕 정도 지난 이스라엘 백성이 [가데스]에 이르렀

을 때 각 지파의 대표 한 사람씩을 뽑아 장차 들어갈 가나안 땅을

정탐하도록 했습니다. 열두 명의 정탐군들은 모세의 파송을 받고

그 딪당에 들어가 40일 동안 비빌리에 샅샅이 정킹마을 마치고 돌

아왔습니다. 그리고 정탐 보고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 땅에서 가져

온 실과를 보이며 그 땅 거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며 심히 커

우리 실력으론 그 땅을 점령할 수 없다고 열변을 토했습니다.

보고가 끝나자마자 백성이 소리를 지르며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의 원망의 골자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1) 애굽에서 죽었거나 이곳 광야에서 죽는 것이 좋았겠다.

2) 왜 하나님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그들의 칼에 죽게

하려는가

3) 애굽으로 돌아갈 것이 났겠다.

4) 한 장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 가자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지도자 모세를 향한 반역이었고 창조주 하나님을 향한 반

역이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다며 애굽으로 돌아가자던

그들은 단 한명도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리

고 능히 들어갈 수 있다던 여호수아와 갈렙만 들어갔습니다.

14:27절이하를 보면 하나님의 조치가 기록되오 있습니다.

1) 나를 원망하는 이악한 회중을 어느때까지 참겠느냐

2) 내가 그들의 원망을 다들었다

3) 말한대로 해 주겠다.

4) 너희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다.

5) 너희 시체가 광야에서 없어질 때까지 너희 자녀들이 40년을

광야에서 유리방황하게 될 것이다.

6) 그리고 하나님과 모세를 악평한 열명은 하나님 앞에서 재앙

으로 죽었습니다.

참으로 끔찍한 진노였습니다. 40년을 방황하게된 결정적 이유는

하나님을 원망하고 반역한 죄의 결과였습니다.

다른 하나의 반역은 가데스의 반역이 있은지 38, 길고도 험했

던 광야 바황이 끝나갈 무렵 당시 지도층 인사였던 [고라, 다단,

]세사람이 작당하여 반역사건을 일으켰습니다.

특히 주모자였던 [고라]는 레위 지파인데다 모세의 사촌 형제였

고 성막의 기물을 운반하고 관리하는 고핫 자손이었습니다. 한 마

디로 그래선 안될 사람이 반역 행위를 저지른 것입니다.

그들 세 사람은 250명의 저명 인사들을 포섭하여 구테타를 모의

하고 항명 파동을 일으켰습니다. 악은 언제나 악과 뭉치기 마련입

니다.

그들이 내건 원망과 불평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너희가 분수에 지나치다 왜 너희가 스스로 여호와의 총회 위

에 스스로 높이느냐

2) 우리를 젖과 꿀이 흐르는 애굽땅에서 인도하여 과야에서 죽

이려하느냐

3) 우리 위에 왕이 되려느냐

4) 왜 우리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지 않고 고생을

시키느냐

5) 이젠 가나안은 싫다, 물러가라는 것이었습니다.

 

 

 

38년전 바란광야 가데스의 반역 때문에 38년 동안 광야를 방황해

야 했던 그들은 38년후 고라의 반역으로 엄청난 징벌을 받게 되었

습니다.

16:32절을 보면 땅이 갈라져 산채로 고라, 다단, 온 세삼과 그

의 가족과 온 집이 생매장되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동조했던 250

저명 인사들은 하나님의 불에 소멸되고 말았습니다(16:35). 그 뿐

만이 아닙니다. 그 사건 이후 하나님의 진노로 동조했거나 동의했

14,700명이 염병으로 죽었습니다. 이 두 반역 사건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두렵고 치욕스런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두 반역 사건을 통해 배워야 할 교훈이 있습니다.

 

첫째는 창조주 하나님은 피조물의 항변이나 반역을 용납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가 누구이든지, 그 이유가 무엇이든 하나님은 피조물의 도전이

나 항거나 반역을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피조물 가운데 하나님을

반역하는 것은 유일하게 인간들입니다. 개나 돼지나 소나 말 심지

언 범이나 사자도 창조주를 반역하지는 않습니다. 인간만 반역죄를

짓고 삽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결단코 그 죄를 용납하지 않은십니

.

920절을 보면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

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

느냐 말하겠느뇨?"라고 했습니다.

둘째는 말대로 된것입니다(14:28)

"광야에서 죽는 것이 낫겠다" "가나안은 절대로 못들어간다""

리는 안들어간다"이 말은 저들이 걸핏하면 쓰던 상투어였습니다.

그런데 그대로 되었습니다. 말대로 된 것입니다.

[좋은 사람이 될꺼야]를 반복해도 좋은 사람이 되기가 힘든 법인

[나는 나쁜 놈이 될꺼야, 나는 죽을꺼야, 나는 망할꺼야]를 노

래 부른다면 그 사람은 그대로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셋째는 원망과 불평은 전염성이 강하다는 것입니다.

원망과 불평심리는 반드시 남을 끌어 드리고 싶어집니다. 동조자

를 찾고 당을 만드는 것입니다. 고라는 250명을 모았습니다.

네째는 모든 원망은 하나님이 들으신다는 것입니다.

바란광야 사건도 고라의 사건도 하나님이 친히 들으셨고 보셨습

니다(14:27). 하나님은 돌이나 나무나 쇠붙이로 만든 신이 아닙

니다. 듣고 보고 느끼고 행동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시19:14절에서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다섯째는 모세 원망과 하나님 원망이 같은 맥락에서 취급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14:2절을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라고

했고, 14:11을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 백성이 어

느 때까지 나를 멸시하겠느냐"라고 했습니다. 14:27절을 보면 "

를 원망하는 이 악한 회중을 내가 어느 때까지 참으랴"라고 했습니

. 16:3을 보면 "그들이 모세와 아론을 거스렸다"고 했고,

16:30절을 보면 "이 사람들이 과연 여호와를 멸시했다"고 했습니

.

16:4을 보면 "온 회중이 모세와 아론을 원망"했고, 16:42을 보

"모세와 아론을 칠 때에 구름이 회막을 덮었고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났더라"고 했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종

이요 보내신 자요 일군이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개인적인 권력욕이

나 공명심 때문에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해 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인도해 내라는 하나님의 명령 때문에 심부름

하고 있는 종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모세의 사역을 방해하고 반항

하고 반역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반역하는 행위였기 때문에 하나님

 

 

 

이 간섭하신 것입니다.

여섯째는 댓가 지불이 너무나 크고 비참하다는 것입니다.

가데스 사건의 경우는 주모자가 모두 진노로 죽었고 40년 방화이

시작 되었습니다. 고라의 경우는 당사자와 부화뇌동했던 250명 무

리들, 말로 마음으로 동조했거나 박수를 보냈던 14,700명이 멸망했

습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싫어하시는 행동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오늘 하고자하는 이야기의 초점은 처참한 비극을 들추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건을 대했던 모세의 태도를 살펴 보려는 것입니다.

14:5을 보면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 앞에서 엎드린자라"고 했고

16:4을 보면 "모세가 듣고 엎드렸다가"라고 했고 16:45을 보면 "

사람이 엎드리니라"고 했습니다.

34:8절을 보면 "모세가 급히 엎드렸다"고 했고 민20:6을 보면

"모세가 회막문에 엎드렸다"고 했습니다. 모세는 엎드리는 사람입

니다. 힘들고 답답하고 속상하고 막막하면 땅에 엎드렸습니다.

9:18-25을 보면 40일동안 그는 물도 떡도 먹지않고 하나님 앞

에 엎드렸습니다. 5:14을 보면 여호수아도 엎드렸습니다. 모세한

테 배운것입니다. 도대체 엎드린다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첫째는 자신을 낮춘다는 것입니다.

높은 사람 가진 사람 강한 사람은 대개 뻣뻣하게 서거나 앉기 마

련입니다. 땅바닥에 엎드리는 것은 종이 취하는 태도입니다. 모세

는 하나님의 종입니다. 그래서 땅바닥에 엎드린 것입니다.

둘째,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땅바닥에 엎드린 종은 [머리를 들라]는 임금이나 주인의 하명이

있을 때까지 엎드려 있어야 합니다.

모세는 답답하고 속상하고 고통스러운 사건을 앞에 놓고 하나님

의 뜻을 기다리기 위해 엎드린 것입니다.

셋째, 기도를 의미합니다.

모세는 땅바닥에 엎드려 하나님께 기도드렸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말씀 드리고 하나님의 도우심과 뜻을 기다리기

위해 엎드렸던 것입니담. 한마디로 모세는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문제는 결과입니다. 엎드릴 때마다 하나님이 개입하시고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어떤 사건이나 문제가 생겼을 때 우리가 취할

수 있는 몇 가지 태도가 있습니다.

1) 절망하고 낙심하는 태도입니다.

그러나 이 태도는 문제를 더 힘들게 만들 뿐 아니라 회복 가능성

차체를 포기해 버리는 것입니다.

2) 원망하는 태도입니다.

사회를 원망하고 부모를 원망하고 여건을 원망하고 이웃을 원망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한걸음 나아가 하나님을 원망할 수 있습니

. 그러나 원망죄는 용서받지 못합니다. 원망하면 결과는 파멸입

니다.

3) 출구를 찾는 태도입니다.

누구를 만날까? 누구에게 호소할까? 누가 도와줄 수 있을까?

평선이나 수평선에서 출구를 찾는 것입니다.

4)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 방법과 태도는 하나님께 부탁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겠

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직접 회사

나 가정이나 업체에 찾아오시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그토록 애타

게 찾던 누군가를 보내시고 누군가를 통해서 내 문제를 해결해 주

시는 것입니다.

죠지 뮬러는 한 평생 동안 기도 응답으로 최고 기록을 세운 사람

입니다. 통산5만번의 기도 응답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때

마다 하나님은 누군가를 톺해서 기도 응답을 주셨습니다.

모세의 경우 엎드릴 때마다 하나님이 임재하셨고 사건에 개입하

셨습니다. 그리고 문제를 해결하셨고 주변의 교통 정리를 해 주셨

습니다.

독일의 종교개혁자였던 멜랑크톤은 "환난과 곤고는 나를 골방으

로 몰아 넣어 기도하게 하시고 기도는 그 환난과 곤고를 내게서 떠

나게 한다"고 말했습니다.

천로역정을 쓴 죤 번연은 "만일 당신의 입이 벙어리일때 하나님

은 당신에게 귀머거리가 되실 것이다"고 말했습니다. 벙어리는 말

못하고 디스크 환자는 땅바닥에 허리굽혀 엎드리지 못합니다. 나는

영적으로 버어리가 아닙니까? 허리 못굽히는 허리병 환자는 아닙니

?

지금 입을 열어 기도합시다. 엎드립시다. 지금 하나님이 기도를

듣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여 내가 기도하나이다 내 기도를 들으소서.

 

 

24

제목 : 승리하는 교회

자료원 : 박종순목사 충신교회

발행일 : 941204

 

우리는 본문 20절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평강의 하나님께

서 속히 사단을 너희 발 아래서 상하게 하시리라"는 말씀입니다.

그뜻은 평강의 하나님께서 사단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교회에 승리

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 한구절 속에 깊은 뜻이 들어 있습니다.

 

1.평강의 하나님께서 사단을 이기신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전투는 칼과 칼, 총과 총의 대결입니다. 맨 주먹과

권총을 든 사람이 싸우는 것은 어린 아이와 어른의 싸움과 같은 것

입니다.

하나님은 평강의 하나님이신데 반해 사단은 난폭하고 간교하기

짝이없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평강의 하나님이 사단을 상하게 하신

다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교회의 참 승리의 모습이 있는 것입니

.

3:15절을 보면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이미 태초에

사단과의 영적 전쟁이 있었음을 밝혀주는 말씀입니다.

여자의 후손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사단을 이긴다는 것입니다.

악을 쓰고 고함을 지르며 덤비는 사람보다는 싱글싱글 웃으며 덤

비는 사람이 이기기 마련입니다. 사단은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해

싸움을 걸지만 하나님은 평강으로 이기시는 것입니다.

사단이 동원하는 무기는 어떤 것들입니까? 17절과 18절이 설명해

줍니다.

첫째, 분쟁을 일으킵니다.

하나님은 하나되게 하시고 사단을 분쟁하게 합니다. 부부가 갈라

서게 하고 형제가 분쟁하게 만듭니다. 서로 미워하고 다투고 시기

하고 질투하게 만듭니다. 사단은 교회 안에서도 분쟁을 일으킵니

.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되게 하십니다.

43절을 보면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했습니다. 하나되고 싶은 마음 하나를 만들고 싶은

마음은 성령께서 주시는 마음입니다. 그러나 하나되는 것을 방해하

고 찢는 것은 사단의 역사인 것입니다.

둘째, 거치게 합니다.

17년을 보면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리고 저희에게서 떠나라"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거치게 한다는 것은 방해가 된다는 것입

니다.

영의 세계는 민감한 세계이기 때문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가 그

시야를 가려도 그 영혼에 큰 그늘이 드리우는 것입니다.

카메라 렌즈에 눈섭 하나가 붙어 있었는데 그대로 사진 촬영을

했습니다. 현상을 해보니 사진에 큰 기둥 하나가 가로 놓여 있었습

니다. 눈섭이 확대인화된 것입니다.

내 영혼을 방해하는 것은 눈섭처럼 작은 것도 닦아 내야 합니다.

사단은 모든 것을 거치게 만듭니다. 다시 말하면 필요없는 사람

이 되게 만듭니다. 그 공동체에서 필요없는 사람이 되지 말고 필요

한 사람이 됩시다.

셋째, 예수를 섬기지 않습니다.

18절을 보면 "이같은 자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

"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자기 배만 섬긴다"고 했습니다.

사단은 자기를 섬기게 합니다. 교회를 다니고 예수를 믿는 것도

내 이익과 내 배를 채우기 위해서라고 가르칩니다.

털끝 만큼만 손해되는 일이 생기면 악을 쓰고 덤비는 것이 사단

 

 

 

의 생활 방법입니다.

미국의 큰 제과회사 사장이었던 존 하일러는 사업을 시작하기전

하나님과 중요한 약속을 했습니다. 그것은 십일조를 하겠다는 것이

었습니다. 그는 통장 하나를 별도로 만들고 통장 주인의 이름을

M.P라고 했습니다. M.PMy partner의 약자입니다.

그날부터 전체 수입의 10분의 1은 그의 파트너인 하나님 통장에

자동으로 입금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기의 파트너에게

10분의 2, 10분의 3으로 이익배당을 늘려갔습니다. 그와 함께 그의

사업 역시 23배로 확장되어 갔습니다. 하나님을 진실로 사랑하

는 사람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최선을 다합니다.

옛날 얘깁니다만 비만오면 교회 마당에 꽃을 옮겨다 심는 권사님

이 있었습니다. 자기집 마당에 심으면 시들고 교회 마당에 심으면

잘 자란다며 자기집 마당의 꽃을 떠다가 심곤 했습니다. 그리고 그

꽃이 자라는 모습을 자켜보고 순을 집어 주며 기뻐하는 그 모습이

지금도 생각납니다. 바로 그런 태도가 주님을 섬기고 사랑하는 태

도인 것입니다.

네째, 순진한 사람을 꼬입니다.

18절 끝을 보면 "공교하게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하느니라"고 했습니다.

공교하다는 것은 세련되었다는 것이고 아첨한다는 것은 듣기 좋

고 보기 좋다는 것입니다. 사단은 세련된 매너와 듣기 좋은 화술과

보기 좋은 태도로 순진한 사람을 유혹한다는 것입니다.

사단의 별명은 유혹자, 꼬이는자 입니다. 그 사람을 파멸시키기

위해 꼬이고 미혹하는 것이 사단의 전문 기술입니다.

그 유혹에 넘어가면 안됩니다. 아담과 하와는 사단의 감언이설띵

에 넘어가 멸망했습니다.

평강의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로 하여금 사단의 유혹과 시험을 이

기도록 능력으로 함께 하신다는 것이 본문의 가르침인 것입니다.

 

2. 속히 이기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20절을 보면 "속히 사단을 너희 발 아래서 상하게 하시리라"

했습니다.

우린 여기서 사단의 시험이나 유혹은 영원한 사건이 아니라는 것

을 발견하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고통, 시련, 슬픔, 시험이라는 것들은 영원히 계속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단 내가 하나님 편에 서는한 그것들

은 속히 끝나고 만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내가 사단의 속박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환난이나 시험

이나 실패나 고통이라는 것들은 한평생 내 뒤를 따라 다니게 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20절 끝 부분입니다.

"우리 주 예수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라고 했습니다.

울은 하나님께서 사단을 속히 이기게 하시는 그 사건을 은혜로 해

석한 것입니다. 그 은혜가 내게 임할 때 시험도 유혹도 고통도 실

패도 속히 떠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겐 주님의 은혜가 임해

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은혜받는 몇가지

방법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겸손해야 합니다.

은혜란 나 자신의 능력이나 가능성을 포기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그 은혜라야 된다는 겸손을 가진 사람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그러

기 때문에 내가 할 수 있다든지 내가 해 낸다는 교만한 마음을 가

진 사람들은 은혜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둘째, 사모해야 합니다.

성령도 구하는 사람이 받습니다. 은혜도 갈망하고 사모하는 사람

 

 

 

이 받는 법입니다. 이유는 갈증난 사람에게라야 냉수 한그릇이 꿀

맛인것처럼 은혜를 갈망하는 사람에게는 은혜가 꿀보다 더 단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셋째,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최선의 방법은 기도하는 것입니

.

지난번 미국의 중간 선거는 민주당의 참패와 공화당의 대승으로

끝났습니다. 공화당의 승리를 미국 언론들은 보수파의 승리라고 표

현했습니다. 그 이유는 민주당의 정책이나 클린턴의 정치 노선이

진보적이었기 때문입니다.

한가지 예를 들면 클린턴은 대통령 선거 공약에 동성연애를 인정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동성연애자들의 표를 긁어 모았습니다.

1960년대 초까지만 해도 미국의 모든 국민하교에서는 매일 한차례

씩 의무적으로 기도하는 시간을 갖도록 했습니다. 매일 아침 수업

을 시작하기전 전국 교실에서는 담임 선생님의 인도로 기도를 드리

고 하루 일과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천주교도인 케네디가 대통령

이 되면서 1962년 헌법 2조에 명시된 종교의 자유에 위배될 뿐만

아니라 종교와 정치의 분리라는 국시에 배치된다하여 연방대법원이

위헌판결을 내리고 기도를 없애버렸습니다. 그것이 케네디가 위임

한 다음해 사건이었습니다.

그때 기도를 빼앗겼던 사람들이 이번 대거 공화당의 승리의 주역

들이 되면서 빼앗긴 교실의 기도를 되찾아 미국의 위기를 구하고자

나선 것입니다. 그들을 언론은 보수파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들은 공공연히 말합니다.

오늘 미국이 이 모양 이 꼴로 전락한 것도, 심지어 국민학교 아

이들과 시골의 중고등학교 아이들까지도 총기를 휴대하고 마약 중

독에 빠져 들어가는 것도, 그리고 케네디가 총에 맞아 죽은 것도

기도시간을 빼앗은데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인도네시아에서 열린 아태 경제협력 각료회의 18개국 정상 회담

을 마친 클린턴은 기자회견에서 공립학교 기도시간 부활 문제를 반

대하지 않겠다는 의사 표명을 했습니다.

공화당의 공세는 단순한 정치 공세가 아닙니다. 병든 미국, 썩어

가는 미국을 다시 살리는 처방은 기도 밖에 없다는 신앙적 진단을

내린 것입니다. 저도 쌍수를 들어 환영합니다.

클린턴은 타 종교의 반발을 고려해 [자발적 기도] 방안을 제시했

다지만 미국이 다시 사는길은 클린턴과 민주당과 공화당과 전 국민

이 무릎꿇고 두손들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길일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썩어 곪아터져 건드리기만 하면 동서남북 사방에서 고름이 터지

는 이 나라! 그것이 4공 책임이냐, 5공 책임이냐, 7, 7공 책임

이냐를 따질 겨를이 없습니다.

살릴 길이 뭡니까? 청와대도 국회도 사법부도 교회도 모두 한 통

속이 되어 기도 운동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1863430일 목요일을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은 [국민금식과

기도의날]로 지킬 것을 선포하면서 "우리는 계속된 성공에 도취되

어 너무 자족하고 교만한 나머지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께 기도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 앞에

우리 자신을 겸비하여 국가적인 죄를 자복하고 하나님의 관용과 용

서를 빌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부산에서 만난 모장로님은 약국을 경영하시는 분이었습니다.

파트 단지에 있는 약국이어서 저녁 11시 지나서야 문을 닫는다고

했습니다. 그 분의 선친도 장로님이셨는데 평생 새벽 기도를 빠뜨

리지 않으신 분이었다고 합니다. 세상 떠나기전 모든 죄를 다 낱낱

이 회개하고 숨을 거두셨는데 심지어는 교인들 손이 더럽다고 악수

안한 것까지 회개했다고 합니다. 그분의 아들 장로 역시 아버지가

 

 

 

물려준 전통을 지키기 위해 새벽 기도회에 빠지지 않는다는 것입니

. 집에 돌아가면 저녁12시 잠자리에 들면 1시가 되지만 반드시

일어나 새벽 제단을 쌓는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들으며 참으로 좋은 모범과 전통을 물려 받았

다고 칭찬을 해 주었습니다.

은혜받는 비결도 기도입니다. 국가가 살고 민족이 사는 것도 기

도입니다.

1773년 불란서 의회가 [불란서 국민은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한

]는 결의를 했습니다.

그 이후로 부터 불란서의 정신과 도덕과 윤리는 곤두박질치기 시

작했습니다. 그후 불란서의 혁명 국회는 다시 "불란서 국민은 초월

적 존재와 영혼불멸은 인정한다"는 결의를 투표로 결정했습니다.

그것마져도 없었더라면 불란서는 망했을 것입니다. 기도해야 가정

도 살고 문제도 해결됩니다. 기도해야 은혜받고 승리 할 수 있습니

.

 

 

25

제 목 : 던지고 다시 찾는 법

자료원 : 박종순 목사 충신교회 예장통합

구 절 : 11:1-4

 

 

미국 여배우 [줄리아 로버츠](26)'부인들'이라는 영화에 12백만

달러를 받고 출연해 사상 최고의 여배우 출연료 기록을 세웠다고 합니다.

리 돈으로 96억원입니다.

같은 영화에서 [맥 라이언]1천만 달러(80억원)을 받았고,"씨스터 액터"

라는 영화에 출연한 {우피 골드버그}8백만 달러를 받았다고 합니다.

저는 영화 한 편에 출연하고 96억원을 받았다는 보도를 읽으면서 몇가지

생각나는게 있었습니다.

첫째는 도대체 그 사람들은 어떻게 생겼을까 하는 점입니다. 얼마나 잘 나

, 잘 생기고, 연기가 좋아서 천문학적인 출연료를 받을 수 있을까.

둘째는 세계의 내노라하는 배우들이 얼마나 부러워 할까.

셋째는 그 돈을 어떻게 쓸가.

넷째는 그토록 엄청난 출연료를 지불하고 영화를 만드는 사람은 골이 찬

사람일까. 골이 빈 사람일까 하는 것이빈다.

얼마전 미국에서 WBA챔피언을 뽑는 권투시합이 있었습니다.

45살된 [조지 포맨'25살난 [마이클 무어러]의 권투경기에서 포먼이 10

회에 무어러를 KO시키고 챔피언이 되었습니다.KO로 상대편 선수를 때려 눕

히고 KO승을 거둔 포먼이 자신의 코너로 돌아가 기도하는 모습이 텔리비젼

으로 증거되었습니다.

현재 [조지 포먼]은 미국 텍사스주 휴스턴시 북부에 있는 그리스도 교회의

담임목사입니다.

권투시합이 있기 전 주일 포먼은 강단에서 "왼뺨을 때리거든 오른뺨마저

내밀어 주라"는 요지의 설교를 해 교인들을 감동시켰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포먼 목사가 링에서 그것도 20살이나 아래인 무어러 선수를 두

둘겨 패 KO시키고 기도를 올리고 있는 모습을 지켜본 많은사람들이 도대체

링에서 뭐라고 기도했는지 모르겠다고 비아냥댔습니다.

그러자 포먼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승리를 할 수 있었다. 그래서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성직지가 사람을 팰수 있느냐는 공세에 그는 "복싱은 하나

님 말씀을 전하는데 필요한 자금마련을 위한 수단이며, 선교의 일환이다"

고 응수했다고 합니다.

그는 87년도에 권투로 벌어들인 파이트머니로 불우청소년을 돕는데 전액을

썼다고 합니다.

마이클 무어러와의 경기를 지켜본 권투전문가들은 역시 목사 복서로서 모

범적인 매너를 보여줬다고 칭찬했습니다.

솔직하게 저는 96억원을 받았다는 미녀배우 [줄리어 로버츠]보다는 흑인목

사이자 권투선수인 [조지 포먼]이 더 매력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다움이란 얼마나 버느냐, 얼마를 가졌느냐로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버느냐, 어떻게 쓰느냐가 그 사람의 인격과 삶을 결정하는 것입니

.

지난 10월 최명길 자매가 방송대상을 수상했습니다. 짤막한 그의 수상소감

이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오늘 제게 주시는 상금은 제가 다니는 충신교회를 통해 르완다 난민을 돕

는데 쓰겠습니다."

이 짤막한 얘기는 세가지 효과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첫째는 연기자로서의 신선한 이미지를 높혔고,

둘째는 자신이 기독교인이라는 걸 밝혔고,

셋째는 충신교회를 알리는 효과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옛말에 짐승처럼 벌어서 정승처럼 쓰라는 말이 있습니다만 기독교인의 청

지기관은 바로 벌고 바로 써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청소년시절 홍길동전이나 임꺽정 소설을 진지한 흥미와 관심을 가지

고 읽었습니다. 그들의 의협심과 탐관오리를 징벌하는 그들의 의기가 손뼉

을 칠만큼 통쾌했기 때문입니다.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면 하나만 알고 둘은

몰랐던 때의 소견이었습니다.

정당한 행위란 동기도 방법도 결과도 좋아야 합니다.

제아무리 목적이 좋다고 하더라도 도둑질을 하거나 사람을 죽이면서 그 목

적을 성취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전도서는 이스라엘의 3대왕 솔로몬의 인생과 신앙고백록입니다.

그는 전도서를 통하여 인생이 무엇이며,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자신의 경홈을 반추하며 밝히고 있습니다.

11장 본문에서 그는 "던지라.. 다시 찾으리라"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두 가지 교훈을 찾겠습니다.

 

1. 네 식물을 물위에 던지라.

 

1절을 보면 " 네 식물을 물위에 던지라 여러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고 했

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식물은 내가 생존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들을 의미합니

. 먹는 것으로 시작해 쓰는 것, 소유한 것들을 말합니다.

동물과 사람의 차이가 여러가지입니다.

동물은 영혼이 없으나 사람은 영혼이 있습니다.

동물은 고도의 윤리성이 없지만 사람은 윤리적 결단과 삶이 있습니다.

동물은 하나님 예배가 없지만 사람에겐 하나님을 예배하는 신앙행위가 있

습니다. 동물에겐 언어와 문자가 없습니다만 사람에겐 언어와 문자와 과학

과 문명이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에겐 너무나 많고 다양한 생필품이 있습니다. 동물은 필요한

것들이 간단합니다. 그러나 사람에겐 집, 자동차, 침대, 이불, 베개, 전기

, 저금통장, ,보석, 숟가락, 젓가락, 의복 등... 그 수를 셀수가 없습

니다.

 

동물들에겐 없어도 되는 것들이 사람들에겐 너무나 많이 필요합니다. 그리

고 그런 것들은 만족이 없습니다. 더 좋은 것들이 줄을 이어 개발되고 시판

되고 있기때문입니다.

당시 솔로몬은 최고의 향락과 사치를 만끽하며 살았던 통치자였습니다.

와 영화와 향락을 마음껏 즐겼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는 "네 식물을 물 위에 던지라"고 했습니다.

여기 몇가지 뜻이 있습니다.

첫째 물 흐르듯 흘러가는 것이 인생이고 유행이라는 것입니다.

이 지상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들은 영원히 가지고 있을만한 것들이

아닙니다. 본인은 영원히 가지고 있고픈 마음이지만 그것들은 언젠가 내 곁

을 떠나 물흐르듯 흘러가고 마는 것입니다.

언젠가 하관식을 하는 묘지에서 세상떠난 부인의 관 위에 손으로 흙을 덮

으며 중얼거리던 남편의 독백이 생각납니다.

그것은 "바보같은 사람, 이렇게 훌쩍 떠나려면서 집수리는 뭣하러 했소"

는 것이었습니다. 구름이 흘러가고 물이 흐르듯 우리의 모든 것도 흘러가기

마련입니다.

 

둘째 주라는 것입니다.

흘러가는 물에 던진다는 것은 대상이 명확하지 않습니다. 남을 돕는다는

것은 대상이 분명하지 않더라도 그 사실 자체만으로 귀한 것입니다.

저는 6.25전쟁 직후 미국사람들이 보내준 구호물자 가운데 양복한 벌과 구

두 한 켤레를 다니던 교회를 통해 선물받은 일이 있었습니다. 마침 제 발과

몸에 맞는 것이어서 제 차지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지금도 그 신발 임자가 누구였는지, 그 양복 주인이 누구였는

지 모릅니다. 그냥 미국교회 어느 교인이었을 것이라는 것외에는 아는 이

없습니다.

 

 

 

그 구제품을 보내는 미국교회 교인들도 누가 자기 것을 입고, 신고,사용할

것인가를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냥 보내준 것입니다.

편애는 시기와 질투와 증오와 싸움을 일으킵니다만, 박애는 그런 불순물을

만들지 않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쌀쌀하고 냉정하다는 평을 듣는 편입니다. 하지만 사실은

저도 부드러운 남자입니다.

제가 그런 평을 듣게된 데는 저 자신의 개성탓도 있습니다만 특정인만을

위해 목사의 사랑을 편애해선 안된다는 다시 말하면 목사는 만인의 목사여

야하며, 모든 사람을 똑같이 대해야 된다는 목회 철학 때문인 것입니다.

저는 미국을 방문할 때마다 우리를 도와준 나라, 내가 어렸을 때 처음으로

구두를 신게해 줬고, 양복을 입게해준 나라라는 고마운 마음을 갖곤 합니

.

 

욥기 22:44을 보면 " 네 보배를 진토에 버리고 오빌의 금을 강가의 돌에

버리라 긔하면 전능자가 네 보매가 되시며 네게 귀한 은이 되시리라"고 했

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나는 물질을 버렸는데 하나님이 그 자리를 친히 메꿔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제아무리 귀한 보배나 값진 보석이라도 뜻있고 값지게 사용한다면 하나님

이 그 빈자리를 넘치도록 채워주신다는 약속인 것입니다.

주님도 말씀하셨습니다.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복이 있다"고 본문은 밝

힙니다. "네 식물을 물위에 던지라 여러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

여러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는 것은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반드시 도로 찾

는다는 것이고, 오래 걸리지 않아 도로 찾게 된다는 것입니다. 주면서 사는

생활이 복이 있음을 기억하고 많이 던지고 삽시다.

쓸데없이 던지고 쓸데없는 것에 던지지 맙시다. 바로 던져야 도로 찾게 됩

니다.

 

2. 많은 사람에게 나눠주라

 

2절을보면 "일곱이나 여덟에게 나눠줄찌어다 무슨 재앙이 땅에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의 뜻은

첫째 폭을 넓히라는 것입니다.

하나나 둘만을 보지 말고 일곱이나 여덟을 보라는 것입니다. 나만 보지 말

고 이웃을 보라는 것이며, 서울만 생각하지 말고, 한국을 생각하라는 것이

, 한국만 생각하지 말고 북한동포를 생각하라는 것이며, 나아가 세계를

보라는 것입니다.

 

둘째 골고루 나누라는 것입니다.

사랑도, 물질도, 정성도 골고루 넓게 나눠야 합니다.일곱에게나 여덟에게

나눠주라는 구절을 주목해야 합니다. 일곱으로 국한하지 말고 일곱이라는

제한수를 넘어 여덟에게도 나눠주라는 것입니다.어떤 주경학자는 일곱이나

여덟에게 나눠주라는 본 구절을 곱셈으로 해석했습니다. 7*8=56이라고

해석한 것입니다.

 

흔히 사랑은 국경이 없다고 말합니다. 사랑은 전 세계 어느 곳이나 들어갑

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그높이, 그 깊이, 그 넓이, 그 길이로 이

해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왜 우리가 남을 돕고 사랑을 베풀어야 합니까?

첫째 성경의 명령입니다.

성경은 도처에서 사랑과 봉사를 명령하고 있습니다.

둘째 주님이 삶으로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보는 바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면서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는 것은 거짓말이니라"는 주님의 말씀이 우리를 강권하고 있습니다.

셋째, 보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언제 주님이 옥에 갇히셨으며, 주리셨으며 헐벗었으며 목마르셨나이까?"

라는 질문에 "지극히 작은 소자에게 행한 것이 곧 나에게 행한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본문은 "언제 무슨 재앙을 당할는지 모르기 때문에 많이 넓게 던지라"

했습니다.

심은 만큼 거둡니다.

정을 주면 정을 받고,

덕을 베풀면 덕을 입게 됩니다.

사랑과 온정이 식어가고 있습니다. 그것을 경기탓으로 돌립니다만 백화점

은 초만원입니다. 그것은 종말현상입니다.

말세가 되면 사랑이 식는다고 했습니다.

사랑합시다.

남을 도웁시다.

손을 폅시다.

지갑을 꺼냅시다.

 

 

26

제 목 : 물동이를 버린 여인

자료원 : 박종순 목사 충신교회 예장통합

구 절 : 4:27-30

 

 

요한복음 4장은 예수님과 한 이름없는 여인과의 만남에 관한 기사로 채워

져 있습니다. 그녀가 누구의 딸이었는지,나이는 얼마나 됐는지, 교육수준은

어느 정도인지, 그런 것들에 대해선 언급이 없습니다.

 

다만 어느날 물길러 나왔다가 우물가에서 예수를 만나게 되었고, 얘기 끝

에 영원한 생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했다는 것이 본문의 줄거리인 것

입니다.

여자라고 다 이름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사라,리브가,한나,마리아 등 성

경 속엔 여러 명의 여인들의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사미라아 여인의 경우는 이름이 없습니다. 그런가하면 그녀의 과거

는 철저하게 밝혀져 있습니다.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남편이 없다는 말이 옳도다.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이 대화는 여자로선 가장 아픈 상처인 과거를 들춰내고 있습니다.

그녀는 바로 그 과거 때문에 사람들의 눈길을 피해 다녔고, 사람접촉을 피

하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외출이 뜸한 한 낮을 골라 물을 길러 나

왔던 것입니다.

주님은 그녀의 과거를 끄집어 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녀가 자신의 과거

를 부인하지 않고 시인했다는 점입니다.펄쩍 뛰며 웬 사람잡을 소니랴고 잡

아뗐다면 그날 에수님과의 만남은 무위로 끝났을 것입니다.

 

바로 이점이 중요합니다. 주님 앞에 서는 사람, 주님을 마나는 사람에게

이름이 없으면 어떻게 과거가 드러나면 어떻습니까?

 

마태복음 15장에 나오는 가나안 여인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주

겠느냐"라는 극단적인 굴욕을 당하면서도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

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며 주님께서로 더 바짝 다가

섰습니다. 그리고 응답을 받았습니다.

 

얼마 전 서울시내를 누비며 운전하는 영업용 택시 기사들에게 설교할 기회

가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지금까지 교통법을 한번도 어긴 일이 없는 사람

은 손을 들어보라"고 했떠니 단 한명도 없었습니다. 모두가 다 범법자들이

었습니다. 우리들의 경우도 예외가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범법자

아닌 삶은 없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의 경우 그날 예수님을 만나 여섯 남편에 관한 이야기를 하

지 않았더라면 일생 어둔 그늘에 묻혀 살아야 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녀의 과거를 들추고 상처를 건드리신 것은 상처를 주고 아픔을

주기 위해서는 아니었습니다. 그녀의 상처를 싸매시고 치료하시고 구원하시

기 위해서였습니다.

어렸을 때 종기 수술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매일 병원에 가서 수술부위에

부쳐놓은 거즈를 떼낸 후 소독약으로 상처를 닦아냅니다. 그때 그 아픔은

말로 형언할 수가 없습니다.

너무 아파서 악을 쓰며 울었습니다. 그리고 간호사나 의사가 사정없이 미

웠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일주일이나 열흘씩 거즈를 떼내지도 않고 닦아내

지도 않고 약도 바르지 않는다면 환부는 썩어 고름이 흐르게 될 것입니다.

 

사람은 사람을 무시하고 멸시하고 천대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다른 사람의 과거를 들추고 괴롭히고 그것을 약점삼아 악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러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과거를 말함은 악용 치유하기

위해서이며, 주께서 상처를 건드리심은 그 상처에 고여있는 피고름을 닦아

내고 고쳐 주시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1. 예수님과 그 여인의 대화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 그녀와의 대화를 위해 제자들을 마을로 보냈습니다.

그것은 곁에서 이러쿵 저러쿵 거들고 나서는 제자들이 도움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단 둘이 나눴던 대화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13-15절을 보면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

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여자가 가로되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

르지도 않고 여기 물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라고 했습니다.

장소가 우물가였기 때문에 화제는 자연히 물로 시작되었습니다. 여자는 마

실 물을 달라고 했고, 주님은 생명의 물을 말씀하셨습니다.

이 단계는 신앙의 초보단계인 것입니다. 먹는 것이나 마시는 것이 신앙의

주된 관심이라면 그것은 신앙의 초보단계입니다.

먹고 또 먹어도 배고픈 것들, 마시고 또 마셔도 갈증나는 것들이 세상 것

들입니다.

도대체 얼마나 벌고, 얼마나 소유하면 "이제 그만"이라고 손을 저으며 만

족할 수 있을까요?

[프랭클린]"만족은 가난한 사람을 부하게 만들고 불만은 부한 사람을

가난하게 만든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 전서 6:17에서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라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라"고 했습니다.

정함이 없다는 것은 재물이란 한 곳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이동성 고

기압과 같아서 언제 어디로 옮겨갈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얼마를 받

고 가지면 된다는 상한선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공부를 하는 목적도, 사업을 하는

목적도 잘 먹고, 잘 살고, 부자되는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그것이 실현되지 않고 깨어지게 되는 날이면 절망하고 좌절하고

스스로 목숨까지도 포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녀에게 "내가 주는 물은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될 것이

"고 하자 그는 바로 그런 물을 내게 달라고 했습니다.

예를 들어 대학강의실에서 물마시는 것, 밥먹는 것, 숫가락질하는 것,

서는 것, 신호등 보고 길 건너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면 그 꼴이 뭐가 되겠

습니까? 그런 것은 유치원에서 배우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생의 차원과 신앙의 차원을 한 단계 높입시다.

영원히 솟아나는 생명의 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봅시다.

 

2) 예배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물에 과한 이야기가 20절에서 갑자기 예배에 관한 것으로 돌변합니다.

제가 바뀐 것입니다.

화제를 극적으로 바꾼 것은 "네 남편을 데려오라"는 말씀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남편이 없습니다."라는 그녀의 대답 속에는 진짜 남편이라고 믿고

살았던 사람은 없었다는 뜻이 들어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과거가 불륜과 부도덕으로 일관된 삶이었다는 실토이기도

한 것입니다.이유는 남편아닌 여섯 남자와 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의 과거를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안고 있는 도

덕적 갈등과 고민과 함께 영적 갈망을 헤아리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남자나 바라보고 웃고 우는 그녀의 일차원적 삶을 영원하신 하나님을 바라

보고 예배하는 삶으로 끌어내 주신 것이빈다.

23절을 보면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고 했

습니다.

금년들어 재벌기업들의 신입사원 채용규정이 변했다고 합니다.

남녀 성차별 없앤 것은 이미 오래고, 전 같으면 병역필,명문대학, 성적 등

이 우선조건으로 꼽혔지만 금년부터는 그 사람의 인성, 적응 능력, 인간관

, 창의성, 품성 등 주로 인격적 조건이 중시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찾으십니까? "자기에게 예배하는 사람"입니다. 그리

고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는 것입니다.

본래 예배(라트뤼오)라는 낱말의 뜻은 "고용된 하인"이라는 말에서 유래했

는데, 그 뜻은 봉사하다, 섬기다라는 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봉사하고

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국 사람들은 예배를 써비스라고 하는 것입니다.

왜 주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하나님을 예배하라고 가르쳤을까요?

그것은 지금까지 세상섬기고,남자섬기고,그것도 제 남편도 아닌 남자들에

게 시달리며 살던 그녀에게 눈을 들어 하나님을 섬기며 살도록 하시기 위해

서였던 것입니다.

 

여기에 그녀의 위대한 삶의 전환이 있는 것입니다.

참된 변화가 무엇입니까? 세상에 매어달리고, 사람에게 매어 달리며 살던

사람이 그것들을 떨쳐 버리고 하나님 섬기며 살게 된 것이 참 변화입니다.

삶의 방향과 질이 달라진 것이 참 변화인 것입니다. 드디어 그녀는 사람답

게 사는 것이 무엇인가를 찾게 된 것입니다.

 

2. 그녀의 변화된 모습을 살펴보겠습니다.

 

1)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들어갔습니다.

28절을 보면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서"라고 했습니다.

물동이는 식수수단이며, 생활수단입니다. 지금처럼 상수도시설이 없었던

당시로서는 물동이가 없으면 물을 길어다 먹을 수가 없스빈다.

그런데 그녀는 그것을 버렸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더 좋고 귀한

시간이 터졌기 때문입니다.

모래퍼서 밥만들고 풀잎 잘라 반찬만들어 노는 소꼽장난이 끝나고 진짜 밥

먹으러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들은 모래밭에 그것들을 그대로 버려두고 갑니

. 그 밥상을 가지고 들어가는 아이들은 없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지금껏 죄에 파묻혀 살면서 여섯명 씩이나 남자 파트너를

바꿔가며 소꼽장난 같은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 생활은 고독했고 허무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우물가에서 예수님 만나고 거듭났습니다. 그래서 물동이를 버

렸습니다.

그녀에게 물동이는 그의 지나간 과거였고, 어두운 삶의 상징이었습니다.

우리에겐 버려야 할 것들과 버러선 안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소중한 것,

귀한 것, 필요한 것, 가치있는 것은 버려선 안됩니다. 그러나 해로운 것,

유익하지 않은 것, 나쁜 것들은 과감하게 버려야 합니다.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들어간 그 여인은 결단은 우리에게 많은 도전으

로 다가섭니다. 진실로 예수를 만난 사람은 동네도, 사람도 겁날 것이 없는

것입니다.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뛰어들어가던 그 여인의 모습을 영상처럼 보십

시다. 발걸음 가벼웠을 것입니다. 어깨는 덩실거렸을 것이고, 입에선 노래

가 흘러나왔을 것입니다.그리고 그의 눈에는 감격의 이슬이 맺혔을 것입니

.

그 이야기는 오늘 나의 이야기라야 합니다. 그 모습은 바로 내 모습이 되

어야 합니다.

2)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말했습니다.

29절을 보면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은 와 보라 이는 그리스

도가 아니냐"라고 했습니다. 그날 그 여인의 간증과 증거 때문에 39절을 보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42절입니다. 예수를 믿게 된 사마리아인들이 그 여자에게 "우리가 믿는 것

은 네 말을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

신줄 앎이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날 우물가에서 죄많은 여자에게 엄청난 사건이 일어나게 하셨

습니다. 그리고 사미라아 동네에도 사건이 터지게 하셨습니다.

예수 바라보고 믿는 것이 진짜입니다. 예수님이 던지는 폭탄이 진짜 폭탄

입니다.

물동이를 버리게 하신 것도 그토록 저주스럽던 동네로 뛰어들어가게 하신

것도 눈에서 펑펑 눈물이 쏟아지게 하신 것도 예수님이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줄을 서 예수를 믿게 된 것도 예수님 때문이었습니다.

주여! 나도 그렇게 만들어 주소서, 나도 그렇게 되게 하소서, 아멘.

 

발행일 : 941120

분 류 : 설교

 

 

27

제 목 : 졸지 맙시다

자료원 : 박종순 목사 충신교회 예장통합

구 절 : 20:7-12

 

 

정상적인 수면은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시편 127:2에서 "

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라고 노래했습니다.

러나 잠이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교통사고의 주된 원인은 과속운전, 과로운전, 음주운전,

졸음운전이라고 합니다.

고속도로를 주행해본 운전자는 누구나 경험했을 것입니다만 주행중 조는

시간은 불과 2-3초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2-3초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졸지 않아야 될 자리에서 조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졸음은 일종의

생리 현상입니다. 졸음의 원인은 수면부족일 때,피곤할 때, 식사 후 식곤증

때문에, 허약할 때 등입니다.

졸릴 때 잠자고, 깨야할 때 깨는 것은 자유로운 행복입니다.

그러나 잠자고 싶을 때 잠자지 못하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3일간 밥을 먹지 않는 고통보다는 3일간 잠자지 않는 고통이 더 큰 것입니

. 그래서 고문 가운데 무서운 것은 잠을 못자게 하는 고문이라고 합니다.

분명히 잠은 은헤이며, 축복입니다.

그러나 시도 때도 없이 잠을 잔다든지, 때와 장소도 가리지 않고 졸고 앉

아 있다면 그건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국가의 중요정책을 결정하는 각료회의에서 장관이 끄떡거리고 졸고 앉아

있는 모습이 전국에 생중계 됐다면 그 장관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제가 오늘 말씀드리려는 골자는 영적인 졸음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가 여

기서 주목할 것은 영적 상태가 무너지면 정신상태가 무너지고, 정신상태가

흔들리면 육체도 흔들린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영적 긴장상태가 무너져 내리면 모든 분야의 나사못이 풀리게

된다는 것이빈다.

우리는 본문 속에서 졸다가 떨어져 죽은 한 젊은이의 사건을 통해 교훈을

발견하게 됩니다.

 

1. 주일에 그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7절을 보면 '안식후 첫 날에'라고 했습니다. 안식후 첫날은 주일입니다.

여러 사람들이 주일예배를 드리기 위해 모였고 마침 선교여행중 드로아를

방무한 바울사도가 말씀을 전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은혜스럽고

복된 날, 복된 장소에서 불상사가 벌어진 것입니다. 유두고라는 청년이 3

다락난간에 걸터 앉아서 졸다가 떨어져 죽은 것입니다.

 

북한이 남한을 침공했던 1950625일은 주일 새벽이였습니다. 그동안

일어났던 대형 사건이나 사고들은 대부분이 주일에 일어났습니다.

작년 (1993)1010일 위도 앞바다에서 여객선 침몰로 270명이 희생당한

사건도 주일에 일어났습니다. 휴일을 즐기려는 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했습니

. 그중에는 교회다디는 교인들도 더러 있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안식일이나 주일에 대한 개념을 올바로 정립해야 합니다.

 

창세기 2:2을 보면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

시니라"고 했고, 3절을 보면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렸음이더라"고 했습니다. 안식일의 출발은 엿새동

안 천지창조 사역을 의해 노동하신 하나님이 쉬신날입니다. 아담이나, 하와

가 쉬는 날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그후에 하나님은 인간에게도 쉬라고 안

식의 법을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쉬시도록 해드리고 그대신 인간이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하는 날이 안식일의 원리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엿새동안 눈코뜰새없이 자기 사업, 자기 직장, 자기 생업에

골몰하다가 안식일이 되면 내가 쉬는 날로 착각하고 놀고 쉬려하고 있습니

.

그것은 안식일의 기본정신을 망각한 처사인 것입니다.

주일의 경우는 구약의 안식일이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사건으로 바뀌면서

지키게 된 주의 날입니다.

글자 그대로 주일은 주의 날, 주님의 날입니다. 그날의 주인은 주님이십니

. 그런데 우리는 주인한테 물어보지 않고 휴일이니, 공일이나, 주일이니

하여 제멋대로 남용하고 죄짓는데 쓰고 있습니다.

더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유두고의 경우는 안식후 첫날 교회에 나와 앉

아 있었고 예배를 드리고 있었고 말씀을 듣고 있었는데 떨어져 죽었다는 것

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건의 교훈은 주일에 교회 나오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떤 태도와 마음가짐으로 예배를 드리느냐 하는 것입니다.

주의 날 주의 전에 나오지 않는 것은 말할 가치도 없습니다. 그러나 나와

앉아 있다고 하더라도 참 예배자의 정신과 자세를 가다듬고 앉아 있어야 되

는 것입니다. 주의 전에 나와 바른 에배를 드려야 합니다.

 

2. 그 사건은 말씀듣는 도중에 일어났습니다.

 

7절을 보며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저희에게 강론할 때 말을 밤중

까지 계속하매"라고 했습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저녁집회가 좀 길어졌는데 3층에서 졸던 사람이 떨어져

죽었다는 얘기가 됩니다.

잡담하고 노닥거리는 것은 시간가는 줄 모릅니다만 진리를 탐구하고 말씀

을 들으며 하나님을 예배하는 시간은 지루하고 답답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

나 그것은 내 생각에 잘못이 있는 것입니다.

옛날 얘깁니다만, 영화곤에 영화보러 갔다가 중간에 쉬고 본 영화가 둘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빅터 플레밍'이 감독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라는 영화였고,

다른 하나는 '윌리엄 와일러'가 감독한 [벤허]였습니다. 지금도 생생한 것

은 그 누구도 '무슨 놈의 영화가 이렇게 길담','쓸데없이 길구먼'이라며 짜

투덜댄 사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영화의 끝을 알리는 The End싸인이 화면에 나오고 극장 안의 불이 켜졌는

데도 사람들은 의자에서 일어나지 않고 있었습니다. 물론 조는 사람도 없었

습니다. 세기의 명화인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보면서 조는 사람은 [

람과 함께 사라질 사람]일 것입니다.

그런데 유두고는 하나님을 만나는 교회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서 졸

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졸아선 안될 이유가 또 있었습니다.

8절을 보면 "우리의 모인 윗다락에 등불을 많이 켰다"고 했습니다. 조명은

수면과 직접 관계가 있습니다. 불을 끄거나 조명이 어두우면 졸거나 잠을

청하게 됩니다. 그러니 그날 밤의 경우는 윗다락까지 등불을 밝혀 두었습니

.

그리고 그날 밤 졸았던 사람의 수가 수십 명이었다면 그건 바울의 책임입

니다만 다 정신차리고 말씀듣는데 유두교 혼자만 졸았습니다. 한마디로 은

혜의 등불, 마음의 등불, 영혼의 등불이 꺼졌기 때문입니다.

 

꽃피고 새우는 봄날도 마음이 싸늘하게 식으면 춥게 느껴지는 것처럼 마음

의 등불이 꺼지면 은혜는 떠나고 졸음만 오는 것입니다.

마귀는 신자가 은혜받는 것을 제일 싫어합니다. 이유는 은혜를 받지 못해

야 다루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사단이 은혜받는 것을 방해하는 몇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첫째 말씀에 대해 거부감을 일으킵니다.

 

 

 

둘째 말씀에 대해 의심을 일으킵니다.

셋째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대해 불평스러운 마음을 일으킵니다.

넷째 교회를 등지게 만듭니다.

다섯째 졸도록 유도합니다.

 

시험 중에 가장 심각한 시험은 말씀듣다가 거의 걸려 넘어지는 것입니다.

더 쉽게 말하면 설교듣다가 시험드는 것입니다.

'새롭게 하소서' 상담시간에 보낸 편지사연 가운데 목사님이 설교 시간에

헌금이야기를 하면 거부감이 일어나고 은혜가 안되는데 이를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는 질문이 있었습니다.제 대답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설교는 합시다와 하지 맙시다로 구분됩니다. 전도해라, 기도해라, 사랑해

,봉사해라,바로 살아라, 못된 짓 하지말라, 미워하지 마라,죄짓지 말라

등이 계속 반복되고 설파됩니다. 그런데 다른 얘기는 아무 반응이 없다가도

헌금문제만은 민감한 반응을 보입니다. 그러나 부정적 반응을 보이면 내 신

앙이 모자라고 그것이 습관이 되어 하나님의 말씀 자체를 거부하는 습관을

형성하게 됩니다.

 

맨날 설교가 헌금소리로 채워진다면 그건 잘못이지만 한두번 정도라면 '

님 저도 헌금생활 많이하고 바로 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라고 기도하고 소

원하는 것이 훨씬 더 아름답고 복받는 태도인 것입니다. 그날 그날의 말씀

을 긍정적으로 받아드리도록 노력하십시오."라는 내용의 대답을 한 일이 있

었습니다.

유두고는 말씀듣다가 떨어졌습니다. 만일 충신교회에서 누구누구가 설교

듣다가 떨어져 죽었다고 보도가 된다면 그 꼴이 뭐가 되겠습니까?

 

3. 걸터 앉았기 때문이었습니다.

 

9절을 보면 "유두고라는 청년이 창에 걸터 앉아 있다가 깊이 졸더니...

음을 이기지 못하여 삼층 누에서 떨어지거늘"이라고 했습니다.

도대체 왜, 뭣하러 3층까지 올라갔는지 모르겠습니다.

위험은 피하는 것이 최상의 예방책입니다. 화재를 예방하려면 불을 조심해

야 하고, 교통사고를 예방하려면 차를 조심해야 하는 것처럼 추락을 막으려

면 걸터앉아서 안됩니다.

 

저는 이 상황을 영적 사건으로 조명해 보고 싶습니다.

걸터 앉았다는 것, 그것은 안정감이 없습니다. 그리고 방자스러운 행동입

니다. 의자에 앉는 것도 엉덩이를 디밀고 허리를 등받이에 붙이고 똑바로

앉는 것이 가장 단정한 자세입니다.

영적으로 걸터 앉는다는 것은 뭔가 산만하고 오만하고 그러면서 지쳐있느

니 그런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것은 신앙의 위기입니다.

지난 주간 뉴스위크지 뉴스메이커 안에 두 사람이 소개된 바 있습니다.

 

하나는 미국의 인기 텔레비젼 토크쇼의 호스트로 최상의 인기를 누리고 있

[오프라 윈프리]에 관한 얘기입니다. 그녀는 자신의 홍보담당 비서였던

콜린랠리를 내쫓고 다른 사람을 채용했는데 전비서가 20만달러의 손해배상

청구를 했다는 것입니다. 거기다가 시청률이 계속 떨어지고 있는것입니다.

거기다가 시청률이 계속 떨어지고 있는 중이어서 앞으로 어떻게 될지 미지

수라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현재 미국에서 선풍적 인기를 끌고 있는 바이얼린 연주가인

금년 23세의 [질 새햄]에 관한 얘기입니다.

 

지난 주 필라델피아 교향악단과 함께 카네기 홀에서 연주회를 가졌는데

[차이코프스키]의 바이얼린 협주곡 연주가 끝나자 기립박수를 받았습니다.

박수가 끝나자 그는 슬금슬금 무대 뒤로 걸어가더니 오케스트라의 바이얼린

 

 

 

파트 제일 마지막 줄에 앉아 다른 단원들과 함께 [드보르작] 의 제8번 교향

곡을 신나게 연주했던 것입니다.

교만방자한 윈프리는 구설수에 오르고 겸솨난 질 새햄은 칭찬을 받고 있다

는 기사였습니다.

 

성공했든지 실패했든지, 잘 살든지 못 살든지, 힘들든지 쉽든지, 편하든지

괴롭든지, 걸터 앉으면 안됩니다. 정신차리고 말씀듣고 신앙생활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졸고 있는 사단병력보다는 깨어있는 1개 소대가 훨씬 더 강한 법입니다.

졸고 있는 교인 10만 명보다는 눈을 똑바로 뜨고 말씀을 경청하는 1천명

교인이 힘이 있습니다.

운전도 졸면 안되고, 공부도 졸면서 하는 것은 효과가 없습니다.

몽롱한 상태에서는 능률도 오르지 않습니다. 신앙생활도 몽롱한 상태에서

하면 안됩니다.

분재토양에 3대조건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흡수성이고, 둘째는 통기성이고, 셋째는 배수성이라고 합니다.

분재에 적합한 흙은 공기가 통해야 하고, 물이 흡수가 잘 되어야 하고,

수가 잘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앙성장의 조건이 있습니다.

교회출석 잘하고, 말씀 잘 먹고, 졸지 않고 깨어 기도하고, 예수님 바라보

고 전진하노라면 믿음은 자라게 되는 것입니다.

졸지 맙시다. 정신차립시다.

깹시다. 일합시다. 아멘.

 

발행일 : 941113

분 류 : 설교

 

 

28

제 목 : 제자가 됩시다

자료원 : 박종순 목사 충신교회 예장통합

구 절 : 15:7-10

 

 

국토면적에 비해 자동차 밀도가 가장 높은 나라는 한국이라고 합니다.

리고 세계에서 교통사고가 제일 많은 나라도 한국이라고 합니다.

얼마 전 주한 외국인이 한국에서 운전하는 법을 소개해 화제를 모은 일이

있었습니다(미국 자동차 잡지 오토모티브 뉴스특파원).

 

첫째 파란불은 자동차 경주의 출발신호다. 파란불이 켜지는 순간 반드시

뒷차의 경적이 울릴 것이다. 그 전에 나가라.

둘째 차간거리는 1인치의 틈도 두지 말라. 그 틈을 메우지 않으면 뒷차가

매울 것이다.

셋째 시원하게 달릴려면 레미톤 차를 사서 타라. 모든 차가 길을 비켜줄

것이다.

넷째 모든 차선을 헤집고 다녀라. 주행차선만 골라서 다니면 앞으로 가기

어려울 것이다.

다섯째 차가 막힐 때마다 경적을 길게 울려라. 스트레스도 풀고, 건강에

좋을 것이다.

여섯째 손을 흔들어라. 마구 끼어들고도 손만 흔들면 된다. 얼굴은 보이지

않으니까>..

 

한마디로 우리의 자동차 문화를 비아냥댄 글이었습니다.

교육부는 금년 9월부터 유치원에서는 한해 40시간, 국민학교와 중학교는

20시간 이상 도로교통법과 경범죄 처벌법 등을 가르치도록 의무화했다고 합

니다.

그것은 잘못된 운전습관이나 비뚤어진 운전문화를 어려서부터 바로 가르치

자는 때늦은 발상인 것입니다.

누구에게엇 배우느냐, 어떻게 배우느냐, 무엇을 배우느냐에 따라 그 사람

의 인격과 인생과 신앙이 결정되는 것이빈다.

훌륭한 스승에게서 바른 삶을 배우면 인격인이 됩니다. 위대한 스승에게서

참 도를 배우면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스승을 잘 만나야 하는 것이빈다.

 

본문 8절 끝을 보면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우

리가 예수님의제자가 되는 길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제자가 될 수 있으며 제자가 할 일은 무엇인가를 본문 속에서

찾아보겠습니다.

 

1. 제자는 예수 안에 거하는 사람입니다.

 

7절을 보면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고 했습니다.

인간관계에서 가장 가까운 사람은 부부입니다. 그래서 '무촌'이라고도 합

니다. 그리고 부인을 [안사람]이라고 부릅니다.여기서 말하는 [안사람]이란

집 안에 있다는 것만은 아닙니다. 내 안에 있는 사람, 그래서 언제나 함께

있는 사람, 함께 살고, 함께 일하는 사람이라는 뜻인 것입니다.

 

4절을 보면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고 했습니다.

그 뜻은 나와 함께 살자. 내 집에 들어와 살자, 나와 함께 일하자는 것입

니다.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친구들 몇 사람이 둘러앉아 저녁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

 

 

 

의 꽃을 피우느라 식사시간이 길어져 저녁 10세가 넘었습니다. 식사 후에

조용한 곳으로 자리를 옮겨 차를 한잔씩 하기로 했습니다. 그중 한 사람이

집에 전화를 걸더니 부인이 몸살기가 있으니 빨리 약을 사오란다면 먼저 자

리를 떴습니다.그러자 3년 전에 부인이 세상을 떠난 친구가 "우리는 천천히

일어섭시다. 집에 가봐야 기다릴 사람도 없는데.."라며 천정을 바라보았습

니다.

 

그러나 솔직하게 말하면 집에서 기다리는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시한부

존재들입니다.

늘 언제나 기다려 줄 수 없다는 말입니다. 가끔씩 지방집회를 마치고 돌아

오면 새벽 2시나 3시가 될 때가 있습니다. 그때마다 집에 도착해 보면 아이

들은 잠에 골아떨어져 있지만 제 아내는 기다리고 있습니다.

 

언젠가 밖에서 초인종을 눌러도 대답이 없었습니다. 기다리다가 잠이 들었

기 때문입니다. 그러려니 생각했지만, 두번 세번 울려도 대답이 없자 섭섭

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자기 혼자 잠을 자다니..."

그러나 만일 입장이 바뀌어 내가 기다렸다면 나는 꿈속을 헤매고 있었을

것입니다.

서로 [안에] 거하는 것이 부부입니다.

이 원리가 그리스도와 나와의 관계로 발전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 안에 거하면 '원하는대로 이루리라"는 말씀입니다.

말을 바꾸면 예수 밖에 거하면 원해도 안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몸부림처도 안되고, 안간힘 써도 안되고, 발을 동동 굴러도

안되는 이유는 내가 예수안에 거하지 않고 예수 밖에 살기 때문인 것이빈

.

 

우린 자칫 잘못하면 예수 안에 산다든지 예수와 함께 사는 것을 부자유자

, 속박으로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가능하면 예수 밖으로 탈출하고 싶은 욕망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한마디로 모든 것을 안되게 하는 비결인 것입니다.

뜻을 이루려면 행복을 잡으려면 진실한 성공을 이루려면 예수 안에 거해야

합니다.

5절을 보면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했습니다.

 

2. 과실을 맺어야 합니다.

 

8절을 보면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

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15장은 포도나무의 비유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2절에서는 "과실

을 맺지 않는 가지는 재해 버린다"고 했고, 4절에서는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5절에서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는다"

했고, 8절에서는 "과실을 많이 맺어야 제자가 된다"고 했습니다.

 

나무는 관상수가 있고, 유실수가 있습니다. 그 누구도 관상수에게서 과실

을 찾지는 않습니다.그러나 유실수라면 당연히 과실이 있어야 합니다. 포도

나무는 과실을 맺는 유실수입니다.

탐스럽게 잘 익은 포도는 포도주의 원료가 되는가 하면 과실로서 사람들을

즐겁게 해 줍니다. 포도나무는 포도를 맺어야 합니다.

 

요한복음 15장에서 강조되고 있는 포도나무가 가지는 우리 그리스도인입니

.

그리고 과실은 우리 그리스도인이 해야 할 당연한 본분을 의미합니다. 과실

은 나무의 결과이며 평가기준입니다.

 

 

 

포도가지가 제아무리 무성해도 과실이 없으면 포도나무 가지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 가지가 좋은 포도나무에 붙어 있으면서도 열매를 맺지 못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영양공급이 중당됐기 때문입니다. 그리

6절을 보면 "과실이 없으면 사람들이 모아다가 불에 던져 태워버린다"

했습니다.

 

나에겐 과실이 있습니까?

일년동안 뭘했습니까?

단 한 알의 과실도 맺지 못한 채 잎떨어진 앙상한 가지만으로 금년을 마무

리할 생각입니까? 제자는 과실을 맺어야 합니다.

금년 봄 유치부에서 아이듬에게 호박씨를 나눠주면서 집에 가져다가 심으

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난 주일 머리통보다 더 큰 호박 한 덩이를 가져온 아이가 있었습

니다. 자기집 아파트앞에 심었더니 호박이 열렸다는 것이빈다.

1년 동안 교회를 들락거리면서 신앙생활하면서 호박 한덩어리도 맺지 못했

다면 그는 호박만도 못한 사람입니다.

제자는 열매로 평가하는 것입니다.

전도의 열매, 기도의 열매, 봉사의 열매, 성령의 열매들 가운데 다는 맺지

못했다 하더라도 몇가지는 맺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열매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3. 사랑의 계명을 지켜야 합니다.

 

9절을 보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고 했고,

10절을 보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라히라"고 했습니

.

예수님의 제자는 스승인 예수님의 삶을 따르고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의

삶은 여러가지 면에서 사표가 됩니다.

예를 들면 청빈, 검소, 절제, 근면,관용,진실 등 그 어느 것 하나도 본받

지 않을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희생과 사랑입

니다.

 

만일 예수를 믿고 예수를 따르는 제자라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사랑을 외면

한다면 그는 제자도 아니고, 그리스도인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한마

디로 자기를 희생하신 사랑입니다.

자기를 아낌없이 내어주신 사랑입니다.

문법을 연구해 보면 명사의 종류가 여러가지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대명사,인칭대명사,추상명사 등 명사의 종류가 여러가지 입니다. 사랑은

추성명사도 아니고, 형용사도 아닙니다.

 

사랑은 사건이며, 역사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할 때 뭔가를 골똘히 추상하고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

. 사랑은 행동하고 사건을 만들어 냅니다.

지금 우리 시대는 사랑을 추상화하고, 형용사화하고, 소설화화고,드라마화

하고,작품화해버리는 문제가 있습니다.

사랑은 죽어가는 자식의 머리맡을 떠나지 않고 밤새 뜬눈으로 눈물을 쏟으

며 지켜보고 있는 어머니의 사건입바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죄로 죽어가는 인간을 멀고 먼 하늘에서 지켜보며 관조하

, 사색하고, 명상한 하나님의 명상록이 아닙니다.

친히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셔서 매맞고, 찢기고, 십자가에 달려 피를

흘리신 몸으로 고난의 사건인 것입니다.

 

제자는 그 사랑을 배우고, 깨닫고, 실천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느 교회 목사님이 신장기능이 약화돼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진찰결과 건강한 사람의 신장을 이식해야 된다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문제

 

 

 

는 누가 신장을 기증하느냐였습니다.

 

어느 주일날 임시로 강단을 맡아 설교를 하게된 유명한 목사님이 전후사정

을 설명한 후 아무래도 교인들 가운데서 신장기증자가 나와야 될 것이라고

설득했습니다. 그리고 기증자의 조건을 이야기한 후 고통받는 주의 종을 위

해 신장을 기증할 뜻이 있는 사람은 손을 들어 보라고 했습니다. 잠시후 여

기저기서 두 손을 들기 시작하더니 거기 모인 천여명이 거의다 손을 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날 설교를 맡은 목사님은 감격했습니다. 그러나 신장은 한 사람의 것이

면 되기 때문에 손을 내리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참으로 감격스럽습니다.이처럼 주의 종을 사랑하는 사람이 많다는

데 놀랐습니다.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어느 한 사람을 지적하겠습니다"라며

오리털 하나를 꺼내 입으로 불었습니다.

"이 오리털이 머리 위에 내려앉은 사람을 선정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주의 뜻을 기다리기 위해 조용히 기도하며 기다립시다"라고 말했습니다.

디더 오리털이 강단을 떠나 회중석으로 날아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오리털이 가까이 날아오면 사방에서 주여, 할렐

루야, 아멘 소리가 입바람에 섞여 나오고 그와 동시 오리털은 다른 곳으로

날아갑니다. 오리털은 그 누구 머리 위에도 내려앉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만일 주님을 위해 신장을 바칠 사람을 결정하는 오리털이 내 머리 위로 날

아오고 있을 때 나는 어떻게 했을 것인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부끄러울

뿐입니다.

제자는 주님의 사랑을 배우고,따르고,실천해야 합니다. 제자가 지킬 게명

가운데 가장 큰 계명은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아멘.

 

발행일 : 941106

분 류 : 설교

 

 

29

제 목 : 열납되도록 드립시다

자료원 : 박종순 목사 충신교회 예장통합

구 절 : 22:17-23

 

 

어느날 정성껏 준비한 선물을 가지고 친구의 집을 방문했습니다. 그러나

그 친구는 문도 열어주지 않았고, 선물도 거절했습니다. 그때 거절당한 기

분이 어떠했겠습니까?

 

거절당한 제사, 거절당한 예물, 거절당한 호의는 헛수고에 불과합니다.

리는 본문과 그 외의 몇군데 성경구절을 통해 어떻게 드리는 것을 하나님이

받으시는가를 발젼하게 됩니다.

 

본문 18절과 19절을 보면 "여호와께 예물을 드리려거든 열납되도록 드릴

찌니...."라고 했습니다.

어떻게 드려야 열납하시는지 찾아 보겠습니다.

 

1. 흠없는 것으로 드려야 합니다.

 

19절을 보면 소나 양이나 염소의 흠없는 수컷으로 드리라고 했고, 레위기

3:1을 보면 역시 흠없는 것으로 드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모든 제물이나 예물을 흠없는 것으로 드려야 합니다.

승을 드릴 경우 상처가 있다든지, 신체부위에 이상이 있다든지, 병든 짐승

을 드리면 받지 않으셨스니다.

 

흠없다는 것은 완전하다는 뜻입니다. 불완전한 예물은 받지 않습니다.

래서 바울은 로마서 12:1에서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

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고 했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은 속된 제물이나 죽은 제물은 받지 않으신다는데 있습니다.

내가 나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약시대는 산 짐승, 흠없는 짐승을 드렸고, 예수님은 자신을 희생제물로

바쳤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내가 산 제물이 되어야 한다고 바울은 강조하고

있습니다.

 

구약에서 강조된 흠없는 제물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흠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는 허물투성이입니다. 흠이 없고, 약점이 많은 존재입니다. 바로

그러한 나를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온전하고 깨끗하게 만들어 주시고 산 제

물이 되게 해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그것이 짐승이든, 곡물이든, 사람이든 가장 귀하고

좋은 것으로 드려야 합니다. 쓰다버린 찌꺼기나 잉여 농산물을 드려선 안됩

니다.

 

하나님께 먼저 드려야 합니다.

낡고 오래된 건물을 가진 교회가 있었습니다. 벽이 떨어지고, 비가 새어도

당회가 교회 건축할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젊은 집사 10여명이 헌

금을 작정한 후 가장 돈많은 장로님을 찾아가 호소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장로님,장로님 생전에 교회를 신축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장로님께서

명령만 하시면 저희들이 심부름은 하겠습니다."

"철없는 사람들이로군, 교회를 아무나 짓는 줄 아는가, 그리고 교회를 지

으려면 엄청난 돈이 필요하다네"

 

 

 

"그런 저희도 압니다. 저희들도 최선을 다해 헌금을 할테니 장로님도 헌금

을 하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어허 사람들하곤, 내가 무슨 돈이 있다고 헌금을 하나"

"장로님 이 집하며, 중심가의 빌딩하며, 여기저기 땅이 있지 않습니까"

"그건 다 내것이 아닐세"

"장로님 것이 아니라니 누구 것이란 말씀입니까?"

"이 집은 우리 집사람 이름으로 돼있고, 빌딩은 큰 아들 이름으로, 땅은

딸이름으로 농장은 둘째 아들 이름으로 과수원은 손자 이름으로 돼있다

..."

찾아간 젊은 집사들은 말문이 막혔습니다. 일어서면서 한 집사가 내뱉은

말은 "하나님 몫만 없군요"라는 것이었습니다.

흠없는 것으로 주님께 먼저 드려야 합니다.

 

2. 감사함으로 드려야 합니다.

 

레위기 7:11을 보면 "화목제를 드릴 때 감사함으로 드려야 된다"라고 했

, 15절을 보면 "감사함으로 드리는 화목제"라고 했습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드린 대표적인 제사가 다섯가지이었

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번제,소제,화목제,속죄제, 속건제입니다.

리고 제사를 드리는 방법은 넷으로 구분됩니다.

 

불로 태워 드리는 제사를 [화제]라고 부릅니다. 흔들어 드리는 제사를[

]라고 부릅니다. 높이 치켜들어 드리는 제사를 [거제]라고 부릅니다.

어서 드리는 제사를 [전제]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이 모든 제사의 동기는 하나님의 사랑과 그 구속의 은총에 대한 감

사에서 비롯된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감사해서 드리는 것입니다.

 

가난한 학생이 여행중 싸구려 여관에 투숙했습니다. 그런데 아침에 깨어보

니 누가 신발을 훔쳐 갔습니다. 그는 어제 밤 잠자기전 분명히 하나님께 지

키시고 보호해 달라고 기도하고 잠을 청했습니다. 그런데 신발을 도둑맞은

것입니다.

 

그는 화가 났습니다. 하필이면 가난한 자기 신발을 훔쳐가게 내버려둔 하

나님이 원망스러웠습니다. 주인이 미안하다면 창고에서 헌 신발 한 켤레를

꺼내다 주며 오늘은 주일이니까 교회에 함께 가자고 했습니다. 그는 마지못

해 따라가긴 했지만 기도도, 찬송되 되지 않고 신발생각만 났습니다.

 

그런데 같은 의자에 앉아 예배드리는 어떤 사람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는 눈물을 흘리며 찬송을 부르는가 하면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그 태도가 너무나 간절하고 감격스러웠습니다. 자세히 그를 바라보다가 깜

짝 놀랐습니다. 그는 두 다리가 없었습니다. 그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

발 신을 발도 없는 사람이 저토록 감사와 감격의 예배를 드리는데 나는 신

발 한 켤레 잃어버렸다고 원망하고 투정을 부렸구나"라며 회개했습니다.

가 훗날 독일의 재무장관이 된 [마르틴 바덴]이었습니다.

 

시편을 보면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

"라고 했고 "감사함으로 그 궁정에 들어가라"고 했습니다.

 

조지 메길은 "감사라는 과목은 졸업이 없다"고 했습니다.

감사는 일평생 그리고 천당에 가서도 감사의 찬송을 불러야 합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3. 정성껏 드려야 합니다.

레위기 2:1을 보면 "누구든지 소제의 예물을 드리려거든 고운 가루로 예물

을 삼아 드리라"고 했습니다. 고운 가루는 한마디로 가장 귀한 상등품 밀가

루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고운 가루란 더 이상 방아를 찧을 수 없을 만큼

세미하게 만든 가루를 의미합니다. 밀이 가루가 되는 것은 자기를 으깨는

희생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가장 고운 가루란 가장 오랫동안 많이 희생당한 가루라는 뜻입니

.

 

고운 가루일수록 돌이나 먼지가 들어가면 안됩니다. 고운 가루를 만들려면

섬세한 관리와 정성이 들어가야 합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나 예물도 정

성으로 준비해야 합니다. 오다가다 생각나서 드리는 예배는 고운 가루 예배

가 아닙니다.

 

저는 국립중앙극장 입장권과 예술의 전당 입장권과 세종문화회관의 입장권

뒤에 있는 주의사항을 주목해 보았습니다.

@ 혼잡을 피하기 위하여 공연 개시 10분전에 입장하시기 바랍니다.

@ 6세이하 어린이는 입장할 수 없습니다.

@ 공연 중 사진촬영, 화한수는 할 수 없습니다.

@ 공연 중에 객석을 출입할 수 없습니다.

@ 음식물을 장내에 가지고 들아갈 수 없습니다.

@ 공연 도중 입장할 수 없습니다.

저는 우리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태도를 곰곰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1994416() 저녁 730, 예술의 전당 오페라 극장에서 정명훈

씨가 지휘하는 파리 바스티유 오페라 [살로메'가 공연되고 있었습니다.

회일로 저는 늦게 그곳에 도착했습니다. 문은 모두 잠겼고 문마다 사람이

지키고 있었습니다. 내 손엔 표도, 지정좌석도 있었지만 늦었다는게 창피스

러웠습니다. 사정 사정해 도둑 고양이처럼 곁문으로 들어가긴 했지만 곁에

사람들에게 여간 미안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정성으로 준비하고, 정성으로 나오고, 정성으로 드

려야 합니다.

예배드리는 것은 그런 것들보다 천만배 정성스러워야 합니다.

 

4. 순결한 것으로 드려야 합니다.

 

레위기 2:11을 보면 하나님께 드리는 소제물에는 누룩을 넣지 말라고 했습

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드리는 소제물 속에는 썩게 하는 누룩을 넣으면 안됩니

. 그것은 썩은 정성, 썩은 태도, 썩은 정신, 썩은 물질을 드려선 안된다

는 것은 가르쳐 줍니다.

 

누룩은 나만 썩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남도 썩게 만듭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소제물은 썩은 것을 드리면 안됩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동기도, 방법도, 결과도 선해야 합니다.

예배 역시 그 동기와 방법이 순수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사랑

과 그 은혜가 감격스럽고 감사해서 경배와 찬야을 드리는 것이어야 합니다.

헌금을 드리는 것도 순수한 마음으로 드려야 합니다.

 

레위기 2:13을 보면 "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고 했습니다.

소금은 썩는 것을 방지합니다. 뻣뻣한 것을 순을 죽여 부드럽게 만듭니다.

그리고 소금은 맛을 내줍니다. 소금을 치라는 것은 썩지않게 부드럽게 맛있

게 드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즐겁고 맛있고 기뻐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도 나

를 맛있는 사람으로, 멋있고 즐거운 사람으로 열납하시는 것입니다.

 

길거리에서 구걸하는 거지에게 지나가던 왕이 "네가 구걸한 물건중 나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느냐"라고 했더니 쌀 한 알을 깡통에서 꺼내 주었습니다.

집으로 돌아간 거지는 깜짝 놀랐습니다. 깡통 속에 왕이 준 금으로 된 쌀알

이 딱 한알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거지는 무릎을 치며 후회했습니다. "

통채 다 주는건데....."

순수한 마음 자체를 하나님께 드립시다.

 

5. 온전히 드려야 합니다.

 

레위기 4:10을 이하를 보면 속죄제를 드릴 때 모든 것을 불살라 드리라고

했습니다.

가장 온전한 제사는 불태워 드리는 것입니다. 불사른다는 히브리어는 [

라프]입니다. 그 뜻은 완전히 소각한다는 것입니다. 나를 온전히 드리는 것

이 참 제사이며 예배입니다.

 

나를 드리지 않고 물질만 드린다면 그것은 참 예배가 아닙니다. 그리고 참

감사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가장 귀한 예물은 나를 온전히 드리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번제로 바친 후 엄청난 복을 받았습니다. 물론 이삭도

되돌려 받았습니다.

고린도전서 6:19-20을 보면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엇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했습니다.

 

내 몸도, 내 영혼도, 내 물질도, 내 시간도 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드리고 영광도 드려야 하는 것입니

.

주여 나를 드리나이다.

 

발행일 : 941030

분 류 : 설교

 

 

30

제 목 : 마음을 정한 사람들

자료원 : 박종순 목사 충신교회 예장통합

구 절 : 108:1-4

시편 108편은 다윗이 읊었떤 찬송시를 가운데 하나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끄는 대목은 "하나님이여 내 마음을 정하였사오니"라는 시의 서두입니다.

 

사람은 마음먹기 따라 태도가 결정됩니다. 제아무리 극한 슬픔이라고 해도

마음을 어떻게 정하느냐에 따라 게속 슬픔에 빠질 수도 있고, 그 슬픔을 극

복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할 것인가, 안할 것인가, 갈 것인가, 말 것인가,

줄 것인가, 안줄 것인가 등으로 고민하다가 마음을 정하고 나면 행동은 저

절로 뒤따르기 마련인 것입니다.

 

본문에서 다윗은 자신의 정한 마음이 세 가지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1. 찬양하며 살기로 마음을 정했습니다.

 

1절과 2절에서 그는 "내가 노래하며 내 심령으로 찬양하리로다 비파야 수

금아 깰지어다"라고 했습니다.

 

본래 다윗은 목동이었습니다. 그는 정규 음악원에서 공부를 한 사람이 아

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뛰어는 시창력과 연주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수많은 시를 창작했고, 악기를 연주할 수 있었으며 자작시에 곡을 붙

여 연주하고 노래하기를 즐겼습니다.

그런데 그는 노래하는 자신의 삶을 소년시절의 감상으로 국한하지 않고 일

생동안 계속하겠다는 것입니다.

 

특히 그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태도를 심령으로 찬양할 것이라고 밝혔습니

. 성악 전문가들의 말을 빌리면 발성법과 호흡법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목구멍에서 나오는 소리는 공명의 폭이 좁지만 배와 폐부에서 끌어내는 소

리는 세종문화회관이나 광장도 울릴 수가 있는것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도 입술로 부르는 경우가 있고 심령으로 부르는 경우

가 있습니다. 입술로 부르는 찬양은 듣는 사람의 귀를 감미롭게 할 수는 있

습니다. 그러나 심령으로 부르는 노래는 듣는 사람들의 영혼을 뒤흔들고 하

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리고[심령으로] 라는 말의 뜻은 영광을 다 바친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 영광을 얻기 위해 온갖 시련을 다 겪었습니

. 정적에게 쫓기는 고통을 겪었는가 하면 아들의 반역으로 가슴 찢기는

아픔을 겪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여러차례 죽을 고비를 겪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차지한 영광입니다.

 

그런데 그는 그 영광을 하나님께 드리겠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결단

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에 대조되는 다른 왕이 있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입니

. 그는 별 탈없이 백성들의 요청에 의해 어느 날 왕이 되었습니다. 그가

왕으로서 누릴 수 있는 권세와 영광은 대단했습니다. 그는 그 영광을 길이

누리고 싶었습니다. 누구에게도 그 영광을 양보할 수 없었고, 틈을 줄 수도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하나님께 돌려야할 영광마저도 자신이 누리겠다

는 착각을 하기 시작했고 그것이 원인이 돼 결국 하나님의 버림을 받게 되

었습니다. 그 결과 사울왕조는 몰락했고 영원히 영광의 자리에서 밀려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들은 영광을 하나님께 드리고 심령으로 찬양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찬양하기로 마음을 정한 사람들은 자신의 모든 정성과 사

랑과 재능과 영광을 하나님께 드리고 그 영혼의 노래를 드려야 하는 것입니

.

 

2. 새벽을 깨우기로 마음을 정했습니다.

 

2절을 보면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라고 했습니다.

새벽을 깨운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뜻이 있습니다.

 

첫째, 일찍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가장 좋은 건강법은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것입니다.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것은 생체리듬을 역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건강생활에 유익하지 않

습니다. 그런데 현대인은 거의가 야행성 기질로 변하고 있습니다. 늦은 밤

까지 잠 안자고 늦게 일어나기 때문에 아침 시간을 몽롱하게 보내게 됩니

.

 

그런 습관은 신앙생활도 힘들게 만듭니다. 새벽기도 생활을 못하는 원인도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여러해 전 이야기입니다만, 어떤 남자 교인에게 신년도 서리집사를 임명할

테니 순종하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 대답이 걸작이었습니다.

"목사님 저는 체질이 야행성이어서 저녁 늦게까지 잠 안자는 것은 얼마든

지 견뎌낼 수 있습니다만 그러나 새벽에 일어나는 것은 죽어도 못합니다.

집사가 되면 새벽기도회에 나가야 할텐데 저는 죽었다 새벽에 깨날 수 있을

지는 몰라도 잠자다가 깨긴 어렵습니다. 새벽기도 나오라는 말씀을 안하신

다면 집사를 맡겠습니다"라고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죽어도 못 일어나는 새벽기도를 어떻게 억지로 하겠습니까 혹 깰 수 있거

들랑 나오시지요"라고 했더니 "그럼 해보겠습니다"라며 집사가 되었습니다.

 

그해 3월말 연속 새벽부흥회가 계속되던 토요일 새벽 430분 교회로 나

오다가 길에 서있는 그 집사를 만났습니다. 깜깜하고 추운 새벽이었스비다.

"웬일로 서계십니까?라고 물었더니 친구들하고 낚시하러 가기 위해 차를

기다린다는 것이었습니다.

"잘 다녀오십시오."라며 헤어졌습니다만 제 속으로 "야행성이라 죽어도 새

벽엔 못 일어난다더니.."라며 실소를 금치 못했던 일이 있었습니다.

 

새벽을 깨우는 것은 마음 정하기에 달렸습니다.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려면

시간관리하는 태도와 습관도 고쳐야 합니다.

 

둘째, 하루의 일과를 주님과의 교제로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클린턴 대통령은 가끔씩 측근들과 새벽조깅을 즐깁니다.제아무리 개인의

인권과 자유가 보장된 미국이라고 해도 클린턴을 보좌하는 스탭들이 늦잠을

자야 된다는 이유로 대통령과의 이른 아침 조깅을 거절할 수는 없을 것입니

. 아마 조깅이 좋아서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싫어도 대통령과 함께 뛰

니까 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새벽을 깨운다는 것은 하루일과를 시작하기 전 하나님과 교제하는 시간을

갖겠다는 것은 하루일과를 시작하기 전 하나님과 교제하는 시간을 갖겠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아름답고 귀한 시간입니까?

 

셋째 다른 사람을 깨우겠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종소리가 없어졌습니다만 교회의 은은한 새벽 종소리는 잠든 사람

들을 깨우곤 했습니다. 새벽거리를 청소하는 미화원은 거리를 깨우는 사람

들입니다. 신문을 돌리는 사람들도 새벽을 깨우는 사람들입니다. 시내버스,

전동차, 택시기사들도 새벽을 깨우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새벽제단에 나와 기도하는 사람들은 잠든 민족의 양심과 혼을 깨우

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시들고 마모되고 죽어가는 이 민족의 양심과 정신을 깨우는 새벽종

이 종이 되어야 합니다.

 

미국 어느 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목사님이 어느 주일 아침 주일학교

아이 하나를 붙잡고 물었습니다.

"얘 토미야! 넌 여리고성이 어떻게 무너졌다고 생각하니"라고

어떻게 배웠을까하는 것이 궁금해서 물었던 것입니다.

그 아이는 갑자기 긴장을 하더니 "목사님 전 절대로 아녜요, 전 여리고성

을 무너뜨린 일이 없어요 전 그 곁에 가본 일도 없어요"라고 대답했습니다.

 

목사님은 기가막혔습니다. 도대체 선생이 어떻게 가르쳤길래...

그 선생을 불로 물었습니다. "수잔나 선생, 내가 조금 전에 토미에게 열리

고성이 왜 무너졌느냐고 물었더니 자기는 여리고성 곁에 가본일도 없다며

자기는 결코 무너뜨리지 않았다고 잡아떼니 이게 어떻게 된 일이요?"

 

이 말을 듣던 수잔나 선생은 "목사님 그 애 말이 맞을꺼예요, 그애는 절대

로 성을 무너뜨릴 애가 아니예요, 그 애는 착하고 얌전하거든요?라고 대답

하는 것입니다. 목사님은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날 예배후 당회가 모인 자

리에서 그 얘길 꺼냈습니다.

 

"장로님 여러분 이럴 수가 있습니까, 여리고성이 왜 무너졌느냐니까 토미

는 성 곁에는 가지도 않았다고 잡아떼고 수잔나 선생은 그 애는 절대로 성

을 무너뜨릴 만큼 힘도 없고, 얌전하다니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

?"

 

한참 생각에 잠겨있던 재정담당 장로가 "목사님 이미 저질러진 일을 어떻

게 하겠습니까? 누가 무너뜨렸건 교회가 책임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교회재

정으로 수리하도록 하십시다"라고 대답하더라는 것입니다.

 

가장이 깨어야 가정이 깨는 법입니다. 교회 지도자들이 깨야 교회가 깨어

납니다. 교회가 깨어야 사회가 깨고 민족이 깨어나는 것입니다.

 

다윗은 노래합니다. "나는 새벽을 깨우기로 마음을 정하였노라"고 그것은

내가 먼저 깨겠노라는 것이며 내 가족을 깨우겠노라는 것이며 내 민족을 죄

의 잠과 영혼의 깊은 잠에서 깨우겠노라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민족은 너무나 깊은 잠에 떨어져 있습니다.

우리가 깨워야 합니다.

 

3. 감사하기로 마음을 정하였습니다.

 

3절을 보면 "내가 만민 중에서 주께 감사하고"라고 했습니다.

1993년도 미국 스탠포드대학 경영대학원에서는 [에니어그램]이라는 새로운

프로그램을 강좌에 넣었습니다. 이것은 쉽게 말하면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

인 면을 가진 인간의 감정형태를 9가지로 분류하고 긍정적인 면은 강조하

, 부정적인 면은 고쳐 나감으로 그 사회나 공동체를 이끌어갈 지도자가

되게 한다는 프로그램입니다.

 

[에니어그램]에 드러나는 9가지 성격형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완벽주의자 (2) 베푸는 형 (3) 연기자형 (4) 낭만주의자 (5) 방관자

(6) 회의형 (7) 향락주의자 (8) 보수형 (9) 조정자형입니다.

 

이미 뉴욕에서는 이 분류법을 적용해서 사람을 채용하기 시작했다고 합니

.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감사할 줄 아는 사람"

채용하거나, 임용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미국 아이오와주 어느 농장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일하는 일꾼들을 위해

농장주인의 아내가 정성껏 음식을 준비했습니다. 일을 끝내고 식탁에 둘러

앉은 일꾼들은 한마디 감사하다는 인사말도 없이 게걸스럽게 음식을 먹어치

웠습니다.

 

며칠후 그녀는 일꾼들이 저녁 식탁에 말이 먹는 건초를 잔뜩 잘라서 그릇

에 담아올려 놓았습니다. 식탁에 둘러앉은 일꾼들은 "아니 이럴 수가 우릴

짐승으로 보는 거야"라며 화를 냈습니다.

 

지켜보고 있던 그녀는 "장난이 아닙니다. 지난 번 당신들은 내가 무더운

날 비지땀을 흘리며 만든 음식을 먹으면서 그 누구도 감사하다는 말 한마디

를 한 사람이 없었어요, 한마디의 감사도 없이 식탁에 앉고 일어서는 사람

들은 값비싼 선물을 발로 짓밟아 뭉게는 마굿간의 소나 말과 다름없어요"

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일꾼들은 얼굴을 붉히며 잘못했다고 사과를 했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한평생 감사하며 사기로 마음을 정했습니다.

우리도 주께 감사하기로 마음을 정하고 살아야 했습니다.

작은 일에 감사합시다.

언제나 감사합시다.

심령으로 감사합시다.

주경가 베이커는 "인간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감사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고 했습니다.

사람이라면 감사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플라톤은 "짐승으로 태어나지 않고 사람으로 태어난 것, 헬라인으로 태어

난 것, 철학자가 된 것"을 감사했다고 합니다.

스튜어트 목사는 매 주말이면 아내와 함께 마주앉아 한주간 동안의 은혜를

계산하며 감사했다고 합니다.

감사하기로 마음을 정합시다.

언제 어디서나 어떤 경우에도 감사하기로 마음을 정합시다.

주여 내가 마음을 정하였나이다.

아멘.

 

발행일 : 941023

분 류 : 설교

 

 

31

제 목 : 바로 드리는 사람들

자료원 : 박종순 목사 충신교회 예장통합

구 절 : 고후 8:1-8

 

 

지방 중심도시에서 목회하는 목사님이 있는데 어느날 그 도시의 천주교 신

부가 찾아 왔답니다. 찾아온 목적은 신도드을 모아 놓을테니 몇시간 집회를

해달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천주교에서 개신교 목사를 청해다가 집회를 할

려고 하는가, 그리고 무슨 얘기를 해달라는 것인가라고 물언더니 이미 로마

바티칸의 허락까지 받았다며 개신교의 십일조하는 법을 얘기해 달라고 하더

라는 것입니다.

 

찾아온 신부의 얘기는 도대체 천주교 교인들이라는게 헌금할 줄도 모르고

바티칸에서 돈오기나 기다리고 있어서 답답하고 속상하다며 몇시간 개신교

인들 헌금하는 얘기를 해달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 목사님은 쾌히 승락하고 가서 몇 시간 십올조 얘기를 했더니 반응이 크

게 일더라고 했습니다. 천주교보다는 개신교가 훨씬 더 헌금생활에 익숙하

고 최선을 다합니다. 그리고 세계교회 가운데 한국 교인들이 가장 올바른

헌금생활을 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빈다.

 

그러나 보다 더 헌금의 원리를 제대로 이해하고 드린다면 받으시는 하나님

께는 더 큰 영광이 될 것이고 드리는 우리에게도 큰 은혜가 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6:1-8과 고린도후서 8:1-8과 고린도후서 9:1-7은 바울사도가

고린도교회에 주신 헌금에 관한 교훈입니다.

몇가지 기본적인 원리를 찾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1.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은혜입니다.

 

고린도전서 16:3을 보면 "너희의 은혜를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가게 하리니

"라고 했고, 고린도후서 8:1을 보면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라고 했고, 8:4을 보면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8:6을 보면 " 이 은혜에도 풍성하게 할찌니라"고 했습니다.

 

이상에서 말하고 있는 "은혜"는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행위를 의미합니다.

 

바울은 하나님께 드린다는 그 행위자체를 은혜로 해석한 것입니다.

바울이 하나님께 드리는 행위를 [은혜]로 해석한데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보답이며 감사행위이기 때문입니다.

 

1988105일 아침 계약 회사원이었던 전용기 씨가 아침 조깅을 하러

나갔다가 차에 치어 두개골 골절 등 14가지 합병증세로 전주예수병원에 입

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연락을 받고 병원으로 쫓아간 부인 성정식 씨의 놀

라움을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그 당시 네살된 딸과 생후 45일밖에 안된 딸

을 대전의 친정집에 맡기고 월 5만원의 사글세 생후 45일밖에 안된 딸을 대

전의 친정집에 맡기고 월 5만원의 사글세 방을 병원 앞에 얻어 남편의 간병

을 시작했습니다.

 

남편 전용기씨는 식물인간이었습니다. 하루 수십 차례씩 가래를 빼내고,

대소변을 받아내고, 목욕을 시키는 등 남편 수발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고통의 날들은 하루 이틀이 아니었습니다. 511개월이었습니다.

주위에선 포기하라고 했고 시댁식구들도 발길이 뜸해지는가 하면 의사들도

합병증세 때문에 얼마 살지 못할 거라며 살아난다고 해도 식물인간을 벗어

나지 못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가까운 사람들은 새출발을 하라

고 권위하기도 했습니다.

 

남편은 급성폐렴 등 합병으로 수많은 고비를 넘겼는가 하면 성정식씨도 4

개월만에 쓰러져 입원을 하기도 했습니다.

 

성씨는 평소 배워둔 미용기술로 환자들의 머리를 깍아주고 한달에 4-5만원

을 받아 남편의 기저귀를 사거나 약값에 보탰습니다.

본래 성정식씨는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믿는 집으로 출가를

해왔지만 교회를 다니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남편이 사고로 쓰러지면서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고 날마다 병원교회에 나가 남편 살려다라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식물인간이라도 좋으니 제발 살아만 있게 해달라"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411개월간의 길고 긴 식물인간의 잠에서 깨어난 것입니

.

 

저는 이 사연을 신문에서 읽었고, 예수병원 관계자의 입을 통해 직접 들었

습니다. 참으로 감동적인 한편의 인간드라마입니다. 부부가 서로 얼굴을 마

주 바라보며 주고 받는 이야기가 있을 것입니다. 무엇이겠습니까?

"여보 고맙소","여보 깨어나줘서 고마워요"

"내 일생 당신 은혜 잊지 않을꼐"

"나 당신 사랑한다구"

"저두요"

부부의 대화를 엿들은 건 아니지만 대충 그런 대화가 오고 갈 것입니다.

 

은혜는 순수한 것입니다. 은혜는 조건도 없습니다. 다만 은혜는 감동과 감

격과 감사가 넘칠 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가 감동하고 감격한다면

드린다는 행위가 너무나 감사하고, 기쁜 사건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둘째 드릴 수 있고, 드릴 것이 있다는 것이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억천만금을 가지고 있어도 죽어버리면 드릴 수가 없습니다. 살아있기

때문에 드릴 수 있고 또 드릴만한 것이 있기 때문에 드리는 것입니다. 제아

무리 드리고 싶어도 가진 것이 없다면 드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드

릴 것이 있다는 것은 은혜인 것입니다.

 

저는 매일 아침 잠자리에서 깨어나면 그대로 무릎꿇고 즉시 그 자리에서

기도를 드립니다. 기도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주님, 오늘도 깨어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심장의 고동소리를 듣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눈으로 보게 해주셨군요. 귀로 듣게 해주셨군요 입으로

말하게 해주셨군요. 손발이 움직이게 해주셨군요 또 다시 오늘 하루를 주셨

군요 감사합니다."

 

이 기도를 드리고 일어서곤 합니다.

여러분, 억천만원을 벌지 못했더라도, 성공출세를 내 욕심대로 못했더라면

살아있다는 것과 내 것이라고 몫지은 것이 없다는 것 때문에 감사해야 합니

.

 

그것을 아는 사람이라야 은혜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위장병을 치료하는 내과 전문의의 얘기를 들었습니다. 평소 식도락을 즐기

던 두 남자환자를 치료하고 있습니다. 위장병 환자는 다른 환자들에 비해

음식을 조심해야하고 특히 의사의 지시를 따라야 하빈다. A라는 성을 가진

환자는 의사의 말에 순응하고 치료되면 마음놓고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자기 절제에 최선을 다합니다.

 

그 결과 치료가 급속도로 빠릅니다.그런데 B라는 성을 가진 환자는 의사

말을 듣지 않습니다. 사람이 태어나서 먹는 재미로 사는데 왜 음식을 먹지

못하게 하느냐, 먹으면서 치료를 하는 법은 없느냐, 먹고 치료하면 되지 않

느냐며 항의하고 의사의 지시를 따르지 않습니다. 그 환자는 A 환자에 비해

80% 치료가 지연되고 있다는것입니다.

 

먹게되면 먹게 되서 감사하고, 먹지 못하면 이 다음에 잘 먹게 될 줄로 믿

고 감사하는 사람이 은혜생활을 하는 사람이고 그가 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

니다.

건강한 것, 드릴 수 있게 된 것, 드릴 것이 있다는 것, 오늘 내가 여기 존

재한다는 것 그것을 은혜로 믿고 감사합시다.

 

2. 자신을 먼저 드려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8:5을 보면 "우리의 바라던 것뿐 아니라 저희가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의 뜻을 좇아 우리에게 주었도다"라고 했습니다.

 

물질로 헌금을 하기 전에 자신을 하나님께 드려야 된다는 것입니다.

 

부부관계를 들어 설명해 보게습니다. 가령 남편이 딴집 살림을 차리고 딴

살림을 하면서 그것을 미봉하기 위해 자기 부인에게 좋은 차를 사주고 좋은

옷을 사주고 용돈을 분에 넘치도록 준다고 가정해 좁시다. 부인은 남편이야

어디를 싸돌든 돈주고, 차사주고,옷사주는 것만으로 감지덕지할 수 있겠습

니까?

 

돈이 큰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도 마찬

가지입니다. 우리 자신을 원하십니다. 그래서 "네 마음을 내게 달라"고 하

신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순서가 있습니다. 그것은 나는 먼저 드리는 것입니다.

 

10여년 전 저는 어느 사진전에 갔다가 별난 작품을 구경했습니다. 사진모

델은 주로 여자였습니다. 그런데 작품은 거의가 얼굴이 없었습니다. 여자의

각선미, 히프 가슴, 팔목, 등 그런 부분만을 클로즈업시켜 찍은 사진들이었

습니다. 얼굴없는 지체들의 전시회였습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지 않고 돈만 드린다면 그것은 얼굴없는 가슴처

럼 흉물스러울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수재민 구호금을 내는 행위와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수재민 구호금을 내는 행위와 같은 것입니다.

를 먼저 드릴 때 하나님은 내가 드리는 물질과 시간과 재주를 받으시는 것

입니다.

 

3. 심는대로 거둡니다.

 

고린도후서 9:6을 보면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농사법칙이고 인생

법칙입니다. 바울은 그 법칙을 하나님께 드리는 법칙으로 도입한 것입니다.

 

쿠바의 산티아고 마을에 [마리아]라는 여선생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매일

말을 타고 학교에 출퇴근을 했습니다. 어떤 날 남루한 옷차림에 맨발로 학

교를 향해 뛰어가는 소년을 보게 되었습니다. 차림새가 꽤재재한 거라든지

맨발로 뛰는 걸로 보아 가난한 집 아이임에 틀림없었습니다.

그 소년이 누구인가를 알아 보았더니 자기학교 학생이었고, 검은 눈이 초

롱초롱 빛나고 공부를 잘 하는 아이였습니다. 다음 주 월요일 마리아 선생

은 구두 한 켤레를 사서 그 학생에게 주었고, 정성껏 도와 주었습니다.

리고 그 다음해 그는 그 학교를 떠났습니다. 그후 쿠바의 지도자로 카스트

로가 권좌에 오르게 되었고, 마리아 선생은 한 신문에 공산주의를 비방하는

글을 썼다는 죄목으로 경찰서에 연행되었습니다. 그 선생은 곧 바로 정보과

정에게 넘겨졌습니다.

 

마리아 선생을 본 정보과장이 깜짝 놀라며 물었습니다. "당신은 마리아 선

생이 아니오? 저를 모르시겠습니까? 옛날 구두 사준 학생이 바로 접니다."

라며 덥썩 손을 잡았습니다. 구두 한 켤레와 작은 정성이 훗날 위기를 모면

케 해주었던 것입니다.

 

덕이라는 씨앗을 뿌리면 덕이라는 열매를 거둡니다. 사랑이라는 종자를 뿌

리면 사랑이라는 열매를 거둡니다. 그럼으로 좋은 일은 많이 뿌리는 것이

좋습니다.

 

덕이라는 씨앗을 뿌리면 덕이라는 열매를 거둡니다. 사랑이라는 종자를 뿌

리면 사랑이라는 열매를 거둡니다. 그럼으로 좋은 일은 많이 뿌리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악을 뿌리고,부덕을 뿌리고,죄를 뿌리면 그것들을 많이 거

두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쁜 일은 많이 뿌리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창세기 18장을 보면 어떤 날 아브라함 집에 낯선 손님 셋이 찾아왔습니다.

너그럽고 후덕한 아브라함 부부는 정성을 다해 송아지를 잡고 요리를 만들

어 그들을 대접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두 천사였습니다. 그날 아브라함

은 그들을 대접하고 아들을 낳게 될 것이라는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리고 그날의 약속대로 일년 후에 이삭을 낳게 되었습니다.

 

주님께 드리는 것은 공짜가 없습니다. 많이 드리면 많은 것으로 채워주십

니다.

우리가 주님께 드리면서 늘 해야 할 고백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 더 많

이 못드려 죄송합니다","주님 정성껏 드리겠습니다","주님 더 많이 드리도

록 복 내려 주옵소서"라는 것입니다.

 

은혜로 알고 드립시다.

은혜를 감사하며 드립시다.

나 자신을 드립시다.

풍성하게, 넉넉하게, 많이 드십시다.

심는대로 거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바로 드리는 방법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드리는 사람들의

헌신과 헌물과 감사를 받으실 것입니다.

얼마나 드리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드리느냐가 중요합니다. 거지

도 거지취급하면 화내고 덤빕니다.

하나님을 누구로 알고 믿고 드리고 있습니까?

바로 드리는 사람들에게 은혜와 축복이 임하는 것입니다.

 

발행일 : 941016

분 류 : 설교

 

 

32

제 목 : 수년안에

자료원 : 박종순 목사 충신교회 예장통합

구 절 : 3:1-4

하박국 선지자의 활동시기는 BC 612년에서 605년에 이르는 7년 기간이었습

니다. 당시 고대 근동지역의 정황은 앗수르 제국을 멸망시킨 바벧론의 급부

상으로 격변을 겪고 있었습니다. 바벧론은 여세를 몰아 BC 605년 갈그미스

(Carchemish) 전쟁에서 애굽을 이김으로 패권을 장악하게 되었스빈다.

그러한 국제 패권다툼과 경쟁 속에서 남왕국 유다의 모습은 문자 그대로

풍전등화와 같았습니다. 더욱 심각한 것은 국내 문제였습니다.

 

통치자들은 백성을 압제하고 착취했습니다. 강대국에 조공을 바쳐야 된다

는 이유로 백성을 늑탈했고 공의를 외치는 주의 종들을 듣기 싫다는 이유로

잡아 죽였습니다(36:20).

그런가 하면 도덕은 땅에 떨어져 구원의 여망이 없어져 버렸습니다.

 

여기서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을 향하여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어느 때까지 악인의 활동을 방치하시렵니까"

"어느 때에 의인들을 구원하시겠습니까?라고, 그리고 하박국 선지자가 깨달

은 몇 가지 진리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1.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옳지 않은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박국의 의문은 "왜 하나님은 불의한 자들의 심판을 지체하시는가", "

하나님은 불의한 바벧론을 들어 택한 백성을 징계하시는가" 라는 것이었습

니다.

 

그러나 하박국이 깨달은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옳지 않은 것이 없다

는 신앙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나무로 깍거나, 돌로 다듬어 만든 생명없는 신이 아닙니다. 보시

고 들으시는 인격적인 신이십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불의를 심판하십니다.

그러나 자동검색기처럼 순간순간 삐삐소리를 내지는 않습니다.

 

바벧론이 남왕국 유다를 침략하고 괴롭히고 있을 때는 많은 사람들은 하나

님을 원망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우상을 숭배하는 바벧론의 말발굽이 택

한 땅을 유린할 수가 있으며 하나님의 백성을 공격할 수 있는가라고 항변했

습니다.

 

그러나 하나니은 침묵하셨습니다. 그렇다해서 바벧론을 방치하신 것은 아

닙니다. 그들 역시 신흥국가 페르시아에 의해 역사의 지명선에서 점멸하고

말았습니다.

 

저는 어느날 텔레비젼 드라마(한명회)를 보다가 느낀게 많았습니다. 세조

가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나이 어린 왕이 그 위를 잇게 되었습니다. 제가

본 장면은 어전회의였습니다. 손자뻘에 불과한 어린 왕이 뭐라고 한마디를

하고 있었스빈다.

 

그러자 일제 대신들은 코가 마루바닥에 닿도록 엎드리며 소리를 합창했습

니다.

 

"성은이 망극하여이다'. 물론 이것은 왕권을 절대화하고 신격화 했던 전제

정치 하에서나 있었던 풍속도입니다.

왕은 사람이기 때문에 잘못을 저지를 수도 있고 정책결정에 오류를 변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를 보좌하는 대신들은 왕명을 절대시 했고 성은

 

 

 

으로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하박국은 경우는 어떻습니까? 그는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을 비록 그것

이 인간의 논리나 경험에 비추어 마땅치 않다고 하더라도 "모두 정당하고

옳다"고 믿은 것입니다.

바울은 그것을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신 뜻이라"고 로마서 12장에서

표현했습니다.

 

성경 전체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두 종류의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입

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모두 옳다고 믿고 순종하는 사람들과 하나님

이 하시는 일에 대하여 항변하고 반기를 들었던 사람들입니다. 중요한 것으

니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항하고 반기를 들고 도전했던 사람들은 복을 받

지 못했거나 심판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그 예를 들겠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경우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금령에 도전하다가 추방당한 실

패자가 되었습니다.

노아 당시 사람들이 하나님을 거역하고 불신하다가 홍수로 전멸당했습니

.

 

자신들의 지식과 과학문명을 하나님으로 대치하기 위해 시날 평지에 모여

반역의 탑을 쌓던 지식주의자들과 과학주의자들은 탑도 무너졌고 동서남북

으로 흩어지는 이산가족이 됐습니다.

 

퇴폐와 탈선과 범죄에 빠진 채 하나님을 외면했던 소돔과 고모라는 흔적도

없이 사람도 도시도 소멸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에 정면 도전했던 고라와 그의 일당은 지진으로 생매장되고

말았습니다.

그런가 하면 노아는 하나님의 명령에 조건없이 순종하고 대홍수에서 구원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무모한 것 같은 섭리에 순종했기 때문에 자신과 그

후손이 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철저한 실패에도 불구하고 주의 말씀을 따라 깊은 곳에

그물을 던졌다가 엄청난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실패를 넘어 성공을 한 것입

니다.

 

이런 이야기를 성경전체를 메우고 있습니다.

"하나님, 주께서 하시는 일은 하나에서 열까지 그 모두가 옳으십니다"라고

고백하고 따르고 순종하는 것이 나와 내 후손이 복받는 길이라는 것을 명심

해야 합니다.

 

현대이을 위협하는 성인병을 일명 인조병이라고도 합니다. 이유는 현대인

의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생활방식 때문에 성인병이 발병한 데서 하는 말인

것입니다.

 

성인병은 크게 다섯가지라고 합니다. 그것은 (1) , (2) 뇌졸증 (3) 심장

마비 (4) 간장병 (5) 당뇨병 입니다.

 

암의 경우는 그 원인이 아직도 규명되지 않은 상태입니다만 전문가들은 정

신적 원인과 물리적 원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고 보고 있습니다. 정신적

스트레스와 공기 오염, 식수 오염, 음식물 오염, 불규칙한 생활 등이 복합

적 원인이라고 말합니다.

뇌졸증의 경우는 동물성 기름의 과다섭취로 뇌혈관이 막혀 혈액순환이 안

되는 것이고, 심장마비의 경우는 과로나 과음이 원인이 작용해 돌연사를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간장병 역시 과음이나 과로에나 약의 과다복용이 그

원인이 된다는 것이고, 당뇨병은 과식, 운동부족, 주색잡기, 근심 걱정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주원인이 된다고 합니다.

 

그렇게 보면 모든 성인병은 내가 만드는 인조병이라는 말이 맞습니다.

러나 성인병보다 더 큰 인조병이 있습니다. 그것은 불행과 저주입니다.

행과 저주는 꽃가루처럼 공중을 떠돌다가 아무에게나 내려 앉는 것이 아닙

니다. 그것은 내가 동기를 부여하고 내가 발전시키고 내가 제조하는 인조병

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도전하고 반기를 들면 그 순간부터 나는 영적 인

조병에 걸리게 됩니다.

 

영적 성인병의 증상은 다음과 같습니다.

마음이 편치않고 불안합니다. 모든 생각과 일에 안정감이 없습니다.뭔가

목에 걸려 있는 것 같은 증상이 계속됩니다. 기도가 막히고 찬송이 힘이 없

습니다. 영적 식욕감퇴로 말씀이 맛이 없도 거부심리가 발동합니다. 그 증

상이 깊어지면 불평과 불만이 터져 나오기 시작하고 모든 걸 때려치우고 싶

은 충동이 일어납니다.

 

그러다가 하나님 자신이 원망스러워지고 그 존재와 하는 일이 의심스러워

지게 됩니다. 이 영적 성이병을 빨리 고치지 않는다면 내 영혼은 지옥에 떨

어지고 맙니다. "오 거룩하신 하나님, 주께서 하신 일과 하고 계시는 일과

그리고 앞으로 하실 모든 일은 모두가 옳고 정당합니다"라고 고백하고 하나

님의 주권을 인정합시다. 그래야 영혼의 성인병을 고치고 살 수 있습니다.

 

2. 불의의 끝은 멸망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구속사로 채워져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 속에는 의와 불

, 선과 악, 신앙과 불신앙으로 점철된 사건들이 섞여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게 긴 사건이 아닙민다.

 

하박국의 신앙은 설령 이 지상에서 불의와 악과 불신앙이 흥왕한다 하더

라도 최후의 심판대에서 심판받게 된다는 것이빈다.

 

그래서 불의한 사람들이나 악한 사람들의 성공이나 행복 때문에 가슴칠 필

요도 없고 그것을 부러워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북극해를 항해하느라면 그 크기를 잴 수 없는 빙산들이 365일 남쪽으로 흘

러가는 것을 보게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물 위에 떠 있는 작은 얼음덩어리들은 북쪽으로 떠내려 간다는 것

입니다.

 

빙산은 75%가 바다 밑에 잠겨있기 때문에 남쪽으로 흐르는 해류를 따라 떠

내려 가지만 해면에 떠있는 작은 얼음덩어리들은 표면의 바람을 따라 북쪽

으로 흐른다는 것입니다. 바다 속에 잠긴 채 떠내려가는 빙산의 방향이 바

닷물의 진짜 방향인 것입니다.

 

우리 사회 표면에서 일어나고 있는 온갖 사건들, 부정, 부패,횡령,살인,

퇴폐, 불법 따위들은 북극바다 해면에 떠있는 얼음덩어리들에 불과합니다.

그것들은 바람에 밀려 북쪽으로 흘러갑니다. 그러다가 언젠가는 저네들끼리

부딛쳐 가루가 될 것이며 햇빛에 녹아 없어질 것이며 지나가는 뱃창에 부딪

쳐 조각이 날 것입니다.

그러나 빙산은 말없이 그 웅지를 감춘채 남쪽으로 흐릅니다.우리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침묵이 계속 된다고 해서 바람따라 살면 안됩니다. 불의는

심판받고 정의는 승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3. 수년내에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기도했습니다.

 

3:2을 보면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수년 내에 라는 것은 "금방,짧은 시간 안에, 속히" 라는 뜻

입니다.

 

그리고 부흥케 하옵소서라는 것은 두가지 뜻을 갖고 있습니다.

첫째는 죽었던 것을 다시 소생시켜 달라는 것이고, 둘째는 건강을 회복시

켜서 치료해 달라는 것입니다.

 

저는 여행중 하박국서를 읽었습니다. 그리고 이 구절에서 용기와 소망과

위로를 찾았습니다. 인천북구청 세금 횡령사건과 지존파의 살인 사건으로

온통 충격 속에 빠져있던 지난 주간 저는 서울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미국

에 머무는 동안 부녀자 납치살해 사건과 군부대내의 장교 길들이기 사건,

강원도 탄광사거 사건, 뉴스를 들었습니다.

 

제가 만난 몇몇 지도자들은 "요즘 한국 어때요?"라고 물었고 저는 "글쎄

"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솔직히 제 개인의 생각은 우리 사회가

어디로 가고 있는가. 이러다가 벼랑에 떨어지는 것은 아닌가라는 두려움과

걱정으로 고민스럽습니다.

 

그러나 하박국은 수년 안에 살리시고 고쳐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기도는 하박국의 믿음이며, 고백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살리시고 치

료하신다는 확신과 고백인 것입니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주님, 성난 파도를 잔잔케 하신 주님, 거라사의 광

인에게서 귀신을 내쫓으신 주님, 그 주님은 오늘 우리 사회와 우리 시대를

살리시고 치료하실 것입니다.

 

하늘에서 터지고, 땅위에서 터지고, 바다에서 터지고, 집안에서 터지고,

길거리에서 터지고, 땅 속에서 터지고, 관청에서 터지고, 내무반에서 터지

는 사건, 사건, 사건들을 누가 어떻게 막고 고치고 살릴 수 있겠습니까?

"주여 수년 안에 살리시고 치료하소서."

 

1858년은 미국에서 대부흥운동이 일어난 해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부흥운

동은 평신도 중심으로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2년동안 200만명이 회개하고

예수를 믿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교회 역사가였던 챨스 콜슨(Charles Colson)은 그 운동을 가리켜 "이 운동

은 허드슨 강에서 시작하여 시카고를 휩쓸었고 마치 산불처럼 미 전역을 휩

쓸었다. 그 당시의 모든 기독교인들은 직업을 가진 전도자들이었다. 날마다

길과 밭과 지장에서 전도했다"고 했습니다.

 

누가 우리 사회를 고치고 살립니까?" 수년 안에 하나님이 하실 것입니다.

누가 그 소식을 전해야 합니까? 우리 모두 한 사람 한 사람이 직장에서,

에서, 시장에서, 가정에서 마치 1858년의 미국처럼 전도자가 되고, 등불이

되고, 소금이 되고, 등대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안에 절망은 없습니다. 우리 시대와 모든 사람이 하나님께로 돌아

오기만 한다면 우리 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곳이 될 것입니다.

주여, 수년 안에 고치시고 살려 주옵소서.

우리를 부흥케 하옵소서.

 

발행일 : 941009

분 류 : 설교

 

 

33

제 목 : 나의 삶 속에 평화를

자료원 : 박종순 목사 충신교회 예장통합 주간기독교

구 절 : 27:1-6

 

 

12월의 표어는 [온누리에 평화를]입니다. 성탄 계절이기 때문에 그런 표어

를 정했습니다. [온 누리에 평화]는 먼저 나의 삶 속에 평화가 임해야 합니

. 다시 말하면 [온누리]는 곧 온 세상인데 온 세상 평화는 곧 나에게서부

터 평화가 시작되어야 합니다.

 

요한복음 316절에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

으니]했을 때 바로 그 세상은 이 세상의 자연,예컨대 흙,나무,바람,사과들

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사람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곧 나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참된 삶의 평화란 땅에 있지 않습니다. 정원속에 있지 않습니다. 예금통장

에 있지 않습니다. 권력이나 명예에는 더더욱 있지 않지요. 우린 그 사실과

그 고백을 이스라엘의 2대 왕이었던 다윗의 시편속에서 발견하게 되빈다.

실로 그는 부족한 것이 없는 최고의 권력자였습니다. 명성을 떨치던 왕이었

습니다. 사무엘하 21:17을 보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윗을 가리켜 [이스라

엘의 등불]이라고가지 불렀던 훌륭하고 위대한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

게도 다윗은 거기서 행복이나 만족을 찾지 않고 있습니다.

 

신하들이나 측근들 그리고 백성들이 [당신은 이스라엘의 등불이십니다.

망이십니다]라고 치켜 올려도 그는 생각이 달랐습니다. [아니다,나는 등불

이 못된다. 나의 영원한 등불, 꺼지지 안는 등불은 여호와 하나님뿐이시다]

라고 고백합니다.

 

파스칼은 인간을 별 것이 아닌 존재로 보았습니다. 파스칼은 세종류의 사

람이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전혀 관심이 없는 자, 이런 사람은 자기가 제아무리 유식

하고 고상하고 위대하다고 자처해도 미련하고 어리석은 존재라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가장 위대한 지식인 산지식 즉 하나님께 대하여 무지하고 관심을

가지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겉으론 태연한 척하고 대범한 척하고 아

무런 이상이 없는 것 같아도 그러나 실상은 살얼음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언제나 찾기만 하는 자,하도 많이 찾았기 때문에 잘 압니다.

러나 이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고 있다는 것은 철학적이고 논리적입니다.

나님에 대하여 신앙 생활에 대하여 까다롭게 구는 사람들은 하나님과 만날

수 없습니다.하나님에 대한 많은 지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영적으로

항상 공부하고 배가 고프기 마련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자,바로 다윗같은 사람입니다.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 [하나님이 빛이시고 구원이십니다]라고 고백하는

겸허한 신앙의 소유자가 바로 이러한 사람들 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겐 위대

한 무기가 주어지는데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라는 무기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은 사람이 두렵지 않습니다. 생명을 하나님의 능

력에 맡긴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생명의 능력으로 삼은 사람입니다. 위축되

어가는 내 생명, 꺼져가는 등불같은 내 생명 속에 새로운 생명의 활력을 불

어넣어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믿을 때 나의 삶은 평화와 안정을

찾게되는 것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

와는 나의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박종순 목사 설교집 [누구를 찾느랴]에서)

 

발행일 : 941225

분 류 : 설교

 

 

34

제 목 : 원망하는 사람들

자료원 : 박종순 목사 충신교회 예장통합

구 절 : 16:6-12

 

 

이스라엘 백성을 부르는 부정적 별명이 있습니다.그것은 [목이 곧은 백성]

이라는 것입니다. 고집과 교만과 불신으로 하나님을 대적할 뿐만 아니라 불

순종하는 저들의 모습을 [목이 곧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

면 또 다른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원망하는 모습입니다. 이스라

엘 백성의 원망이 구체화되고 집단화 되기 시작한 것은 출애굽한 이후부터

였습니다.

 

출애굽기 14:12를 보면 홍해 앞에서 뒤쫓아 오는 바로의 병샤들을 바라보

"애굽사람을 섬기는 것이 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다"며 모세를 원

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 원망은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으로 잠잠해

졌습니다.

 

그로부터 사흘이 지난 후 마라라는 곳에 이르렀을 때 마실 물이 없다며 원

망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원망도 쓴물을 단물로 치료하신 기적 때문

에 잠잠해졌습니다 (15:22-27).

 

출애굽기 16:1-3을 보면 애굽에서 나온지 한달이 지난 어느날 그들의 원망

이 재연되었습니다. 애굽의 고기 가마 곁에서 고기와 덕을 배부르게 먹고

있을 때 죽었더라면 좋을 뻔했다는 것이 원망의 내용이었습니다. 다시 말하

면 배고파 죽겠다는 원망이었던 것입니다. 이 원망은 하나님이 내려주신 만

나와 메추라기 때문에 잠잠해졌습니다.

 

출애굽기 17:3을 보면 그들이 르비딤에 이르렀을 때 마실 물이 없다며 원

망을 시작했습니다. 이 원망은 반석으로 생수가 터지게해 주심으로 끝났습

니다.

 

그들의 원망은 계속됐습니다.

민수기 11:1을 보면 "백성이 악한 말로 원망했다"고 했습니다.

그들의 원망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일어났습니다. 밤낮도 없었고 실

, 실외도 가리지 않았습니다. 신명기 1:27을 보면 "장막 안에서 원망했다

"고 했습니다.

 

한마디로 이스라엘 백성은 "원망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한두번도 아니고

수를 셀 수 없는 원망역사를 지켜 보느라면 해도 해도 너무했다는 생각이

들곤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사건은 저들의 모습이 곧 우리네의 자화상이라는 점입니다.

저들은 사건있을 때마다 원망을 터트렸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마음 가득히 원망의 폭탄을 안은 채 살고 있습니다. 온몸

가득히, 멱까지 원망이 가득차 있습니다.

 

1. 원망의 원인이 무엇입니까?

 

1) 불신 때문입니다.

원망은 불신의 산물입니다. 죽게 됐다면 원망하면 살 길을 열어 주셨고,

물이 쓰다고 원망하면 단물이 되게해 주셨고, 배고프다고 원망하면 만나를

주셨고, 고기먹고 싶다고 원망하면 메추라기를 주셨고, 목마르다고 원망하

면 반석에서 나온 생수를 주셨습니다. 수를 셀 수 없을 정도로 하나님의 기

적과 응답을 체험한 저들입니다만 계속 원망을 일삼았습니다. 한마디로 하

나님을 향한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원망이란 수근거리며 불평한다는 뜻을 갖는 말입니다. 저들이 최소한의 믿

음만 가지고 있었다면 기적과 능력을 체험하면서 원망을 일삼을 수가 있었

겠습니까? 하나님의 존재와 그 능력과 섭리를 믿는 사람은 하나님을 원망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2) 미련하기 때문입니다.

잠언 19:3을 보면 "사랑이 미련함으로 자기 길을 굽게하고 마음으로 여호

와를 원망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의 뜻은 잘못은 자기가 저질러 놓

고 하나님을 원망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탓으로 빚어진 결과를 놓고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하나님

게 그 책임을 떠민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 잠언 19:3은 미련

한 사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전문의의 말을 빌리면 한국인의 경우 성인병의 원인은 크게 세가지라고 합

니다. 그것은 식생활, 성격, 습관이라는 것입니다.

불규칙한 식생활, 자극성이 과다한 음식물의 섭취, 과음, 과식 등 식생활

의 잘못으로 성인병이 발병하는가 하면 그 사람의 성격도 성인병 원인으로

작용한다는 것입니다. 조급한 성격, 내성적 성격 불같은 성격 등 조화와 균

형을 깨트리는 성격은 성인병의 원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사람의 습관도 성인병 유발의 원인이 된다고 합니다. 좋은

습관, 건전한 습관, 경건한 습관은 건강의 비결이 됩니다만 반대로 무질서

한 습관, 통제가 불가능한 습관, 생체의 리듬을 깨트리는 습관은 성인병의

원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경우 그들의 원망은 누적되고 계속된 습관 때문이었습니다.

임을 남에게 떠넘기는 버릇을 가지면 일생동안 책임을 떠넘기기에 바쁩니

.

 

원망하는 나쁜 습관에 길들면 일마다 원망을 일삼게 됩니다. 습관은 그사

람의 인격과 신앙과 삶을 결정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습관적으로 투

정하고 하나님을 원망하면 결국 그 영혼이 버림받고 만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2. 왜 원망하면 안됩니까?

 

1) 하나님이 원망을 들으시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16:7을 보면 "여호와께서 너희가 자기를 향하여 원망함을 들으셨

음이라"고 했습니다. 그 원망이 속으로 중얼거리는 독백이든 혼자서 고함치

는 것이든 다른 사람 앞에서 터뜨린 것이든 하나님이 그 원망을 들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듣고 계시는데 어떻게 원망할 수가 있겠습니까?

 

2) 모세를 향한 원망도 하나님을 향한 원망이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16:8을 보면 "너희의 원망을 우리를 향하여 함이 아니요 여호와

를 향하여 함이로다"라고 했습니다. 16:9,12에는 하나님이 원망을 들으셨다

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눈에 보이는 공격대상은 모세였습니다. 그들은 모세가 자

기들을 애굽에서 끌어냈고 고생을 시키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모

세의 지도능력이 모자라 먹을 것과 마실 것을 해결하지 못한다고 여겼습니

. 그래서 걸핏하면 모세에게 대들고 도전했습니다.

 

그러한 저들에게 16:8 말씀은 경고가 아닐 수 없습니다. '너희 원망은 하

 

 

 

나님을 향하여 함이로다'라는 말씀은 원망의 대상이 누구였는를 천명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64:8"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리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

로 지으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진흙덩어리가 토기장이를 향해 원망을 퍼붓

는다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모세는 하나님이 부른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강권적으로 애굽에 보내 명령

을 순응하며 평생을 바친 하나님의 종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모세를 공

격했고 죽이겠다고 덤볐고, 돌을 던지려 했고 원망과 비난을 서슴치 않았습

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들의 원망은 곧 하나님을 향한 원망이었으며 하나님

을 향한 도전이었다는 것입니다.

 

3. 원망하면 어떻게 됩니까?

 

고린도전서 10:10을 보면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더니 너희는 저희와 같이 원망하지 말지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야고보서 5:9을 보면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

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자가 문 밖에서 게시니라"고 했습니다.

 

원망은 하면 할수록 그 폭이 넓어집니다. 가까운 사람에 대해 원망을 하기

시작하면 점차 주변은 물론 사회 국가 세계가 원망의 대상으로 바뀌게 됩니

. 한 가지를 원망하기 시작하면 열 가지 백 가지 그리고 세상만사가 다

원망스러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멸망하고 심판받게 되는 것입니

.

 

소위 지존파라는 범죄조직을 만들고 엽기적 살인을 일삼던 20대 젊은이들

의 행적이 그것을 설명해 줍니다. 가난, 무지, 멸시, 증오가 한데뭉쳐 세상

을 쓸어버리려 했다는 것이 저들의 항변입니다. 그러나 저네들보다 더 불우

하고 비참한 환경 속에서도 곧고 바르게 일하며 꿈을 키워나가는 젊은이들

이 더 많습니다. 이번 사건은 우리에게 너무나 큰 충격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원망심리가 점차 증폭되면서 집단행동으로 발전했고 저토록 몸소

리쳐지는 만행을 저지르게 된 것입니다. 만일 저들의 원망으로 시작된 자신

들의 종말을 단 한번만이라도 되돌아 볼 수 있었다면 준엄한 법의 심판대에

서지 않게 되었을 것입니다.

 

어느 신문의 기사가 생각납니다.이번 사건은 우리 모두가 피해자이며 가해

자라는 기사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가 그렇게 만들었고 그렇게 당한

것입니다. 허탈, 좌절, 통한, 죄책감으로 가슴이 떨리고 머리가 무겁습니

.

 

원망의 결과는 멸망입니다.

민수기 11장을 보면 원망하는 사람들이 모여왔던 진을 하나님의 불이 살랐

습니다. 민수기 14:27을 보면 "나를 원망하는 이 회중을 내가 어느 때까지

참으랴" 라고 했습니다.

 

민수기 16:31 이하를 보면 원망을 일삼고 집단행동으로 모세를 반역했던

고라와 그 일당이 땅이 갈라져 산채로 생매장되었습니다.

 

민수기 21장을 보면 원망하던 사람들이 불뱀에 물려 죽은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자고로 원망을 일삼과 잘되거나 성공한 사람은 단 하나도 없스빈

. 욥기 23:2을 보면 "혹독히 원망하는 사람은 받는 재앙도 크다"고 했습

니다.

 

4. 원망을 피하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1) 원망하는 사람들과의 접촉을 피해야 합니다.

원망을 일삼고 불평불만이 멱까지 차있는 사람들과 늘상 교제하다보면 자

신도 모르는 사이에 오염이 되고 맙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또레집단

형성을 위해 마치 세뇌를 하듯 다른 사람드을 세뇌시키고 동조자를 만들려

합니다. 더 깊은 함정에 빠지기 전 원망하는 개인이나 집단과는 사귐을 끊

어야 합니다.

 

2) 자족해야 합니다.

주어진 삶과 상황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자족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리고 그런 사람이라야 향상과 발전이 성공이 가능한 것입니다.

예를들면 불우한 환경에 처한 사람이라도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최선을 다

할 때 더 낳은 환경에로의 진일보가 가능한 것입니다.

 

반대로 환경을 탓하고 저주하고 적개심을 품는다면 지존파의 젊은이들처럼

멸망에 이르게 되고마는 것입니다.

 

존 웨인 게이시(John Wayne Gacey)33명을 연쇄살인한 희대의 살인자였

습니다. 1978년부터 16년동안 수감되어 있다가 945월 독약주사를 맞고

사형이 집행되었습니다. 죽는 날 소원을 묻자 켄터키 후라이드 치킨이 먹고

싶다고 했습링니다. 네 종류의 과일과 함께 치킨을 차려주었더니 배불리 먹

고난 후 불평을 터트리기 시작했습니다. "사형제도는 살인행위이기 때문에

반드시 없애야 한다. 어떻게 정부가 살인을 한다 말이냐"라며 고함을 질러

댔습니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 뉘우침이 없었고 원망과 불평으로 죽었습니

. 원망을 피하려면 자족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3) 자기 책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원망심리의 뿌리를 캐보면 나는 잘못한 것이 없는데 누구때문에, 무엇때문

에 이렇게 됐다는 망울이 맺혀있습니다.

그러나 내 책임임을 인정하기 시작하면 남을 탓하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마

음이 없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4) 기도해야 합니다.

갈릴리 바다의 풍랑을 잔잔케 한 것은 제자들의 아우성이 아니었습니다.

제자들의 노련한 노젓는 노력이 아니었습니다. 우연히 바람이 그쳤기 때문

도 아니었습니다. 그곳에 주님이 오셔서 "고요하라 잔잔하라"고 명령하셨

기 때문이었습니다.

 

내 마음과 내 삶과 우리 역사 속에 주님이 임재하셔서 원망과 시비. 질투

와 분쟁, 다툼과 증오를 잠잠케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각 언론의 지적이 아니더라도 지금 우리 사회는 총체적 위기국먼에 접어들

고 있습니다. 도덕도, 윤리도, 양심도 실종되버렸습니다.우리의 기도와 각

성이 필요합니다. 더 이상 가해자나 피해자가 생겨나선 안됩니다.

 

원망없는 사회와 교회의 재건을 위하여 기도를 새로 시작합시다.

주여, 우리와 우리 시대를 구원하소서.

 

발행일 : 940925

분 류 : 설교

 

 

35

제 목 : 하나님이 주신 양식

자료원 : 박종순 목사 충신교회 예장통합

구 절 : 16:13-20

애굽은 430년만에 탈출한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까지 430

년 동안 먹었던 식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만나]였습니다. 색깔은 흰빛이

, 모양은 갓씨와 비슷했습니다. 일정한 곳에 씨를 뿌리고 농사를 지을 형

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그날 그날 양식이 필요했습니다.

머물고 떠나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에 의한 것이었기 때문에 농사를 지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40년 동안 굶어 죽거나, 목말라 죽지 않았습니다. 심지 않

고 거두지 않았지만 40년 동안 하나님이 주신 만나를 먹고 살았습니다.

 

이스라엘이 40년 동안 만나를 먹고 살았다는 것은 우리에게 큰 교훈을 주

고 있습니다. 주님은 마태복음 6:26에서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

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고 했습니다.

한마디로 만나는 하나님이 주신 양식입니다. 그리고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

에게 일용할 양식을 내려주고 계신다는 것이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인 것입

니다. 본문을 중심으로 만나의 교훈을 찾도록 하겠습니다.

 

1.식량대로 거둬야 했습니다.

 

16절을 보면 가족 1인당 한 호멜씩 식량대로 거두라고 했습니다. 한 호멜

은 약 2.3리터가 됩니다. 식량대로 거두라는 것은 먹을 만큼 거두라는 것입

니다. 다시 말하면 남거나 모자라지 않게 거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한 호멜을 재는 그릇이 없었기 때문에 짐작으로 거둘 수 밖

에없었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짐작으로 만나를

거둬다가 호멜로 되어보면 많이 거둔 사람도 남는게 없고, 적게 거둔 사람

도 모자람이 없었습니다.

잠에서 깨어나 집 밖에 나가면 하얀 빛깔의 만나가 지면에 마치 눈송이처

럼 덮혀있습니다.

그릇을 가지고 식구들의 식량대로 거두어서 요리를 해먹곤 했던 것입니다.

"1인당 한 호멜""식량대로"라는 만나의 법칙 속에서 깨달아야 할 진리가

있습니다.

 

언젠가 과적차량 진입금지라는 표지가 도로변에 세워져 있는 것을 본 일이

있습니다. 과적차량은 타이어가 펑크날 위험이 있는가 하면, 도로를 파손하

게 됩니다.

 

구청 공무원의 세금 횡령사건은 우리 사회에 엄청난 충격파를 던졌습니다.

1인당 한 호멜이면 굶어죽지 않고 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량초과가 빚

어내는 비극 때문에 울고 망하고 죽는 사람이 너무나 많습니다.

 

어려서 자라던 동네에 [꾸러기],[짱구]라는 별명을 가진 친구가 있었습니

. 큰 부자는 아니지만 먹고 사는 것은 별 탈이 없는 집 아이였습니다.

런데 그 아이는 욕심이 너무 많았습니다. 그래서 욕심꾸러기의 끝자를 따서

꾸러기라고 불렀습니다. 먹는 욕심도 보통이 아닙니다.

 

밥그릇이나 국그릇도 제일 큰 것이어야 하고, 떡을 먹어도 다른 사람이 하

나들고 먹는 동안 그 아이는 입에다 하나물고 양손에 하나씩 쥐고 새끼를

한꺼번에 먹곤 했습니다. 배가 부르다 못해 올챙이 배처럼 튀어나와도 계속

먹다가 바닥이 나면 물러서는 아이였습니다.

시골 사람들은 너무 많이 먹어서 배가 튀어나오고 씩씩거리며 쉼쉬는 사람

 

 

 

을 짜구났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아이 별명은 [짜구]였습니다.

그런데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위하수병에 걸려 밥을 먹지 못하게 되자 신경

과민 증세가 합병되더니 고등학교 지학도 포기했습니다. 몸은 젓가락처럼

마르기 시작하고 노이로제 환자로 목숨을 이어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놀라운 것은 우리 시대는 꾸러기들과 짜구난 사람들이 너무나 많고 흔하다

는 점입니다.

 

1인당 한 호멜! 그것이 정량입니다. 욕심부리지 맙시다.

 

2. 비축이 불가능했습니다.

 

19절을 보면 "다음날 아침까지 그것을 남겨두지 말라"고 했습니다.그런데

20절을 보면 만나를 그 다음날 아침까지 남겨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두가지 이유에서였을 것입니다.

하나는 매일 아침 나가서 거두는 것이 귀찮은 사람이었을 것이고, 다른 하

나는 그 결과를 시험해 보고픈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본문 20절을 보면 "아침까지 두었더니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났다" 고 했

습니다.

한 호멜을 넘게 거둔 것들, 즉 정량초과분의 만나는 썩고 냄새나고 벌레가

생겨 먹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양식은 그날 거둬다가 그날 먹어

야 하는 일용할 양식이었습니다.

 

주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 속에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라는

기도가 들어있습니다.

 

마태복음 6:34을 보면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

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낱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니라"고 했습니다.

먹을 것도 그날 것으로, 걱정도 그날로 자족하고 끝내라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2:19 이하를 보면 여러해 동안 먹고 살 돈과 양식을 창고에 쌓

아놓고 인생을 즐기려는 한 부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독백합니다. "내 영혼

아 여러해 쓸 문건이 창고에 가득하구나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며 즐기자꾸

"라고.

그에게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라고

하나님이 주신 양식은 일용할 양식이기 때문에 비축이 불가능합니다. 썩고

냄새나고 도둑이 가져갑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6:20을 보면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거

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고 했습니다.

 

다 먹지도 못할 것, 다 쓰지도 못할 것들을 챙기고 쌓고 숨기려다가 망하

는 사람들이 추태는 다시 한번 [그날의 만나]가 주는 뜻을 되새기게 해줍니

.

 

3. 안식일분은 비축이 가능했습니다.

 

23-24을 보면 안식일 전날 아침에 나가 만나를 거둘 때 이틀분을 거두라고

했고 안식일에 먹기위해 거둔 만나는 썩거나 냄새나는 일이 없었습니다.

 

안식일은 밖에 나가 먹을 양식을 거둘 필요가 없었고 그날은 만나도 내리

지 않았습니다. 안식일은 하나님이 천지창조하신 후 쉬던 날입니다. 성경은

그날을 하나님의 날이라고 했고 거룩하게 지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스

 

 

 

라엘 민족은 그날 사사로운 일이나 오락을 금했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날로

지켰습니다.

 

안식일에는 만나도 내리지 않고 거두러 나갈 필요도 없었다는 것은 하나님

도 그날은 쉬셨고 백성들도 쉬는 날이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쉰다는 것은 하나님을 위해 쉬는 것과 자기를 위해 쉬는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참 인식은 영적인 것이며 정신적인 것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미국에서 있었던 얘기입니다만 산좋고 물맑은 바닷가에 별장을 가지고 있

는 부자가 있었습니다.

피로를 풀거나 여가가 필요할 때 사용하기 위해 지은 호화별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별장주인이 자살시체로 그곳에서 발견되었습니다. 부부

간의 갈등과 정신적 쇼크로 인한 자살이었습니다. 쉬기 위해 만든 별장에서

왜 자살을 해야 했겠습니까?

참된 쉼은 먹고, 마시고, 여행을 하고, 돈을 쓰는데 있지 않기 때문입니

. 참된 안식은 영혼이 평안함을 누리는 것입니다.

내 영혼이 참 쉼을 얻으려면 예수 그리스도를 내 마음에 모셔야 합니다.

주님과 함께 살고 주님을 따르는 것이 참된 안식의 비결인 것입니다.

안식일은 만나를 거두지 않아도 되는 날이라고 해서 늦잠을 잔다든지,

라간다든지, 죄를 짓는 날로 여기면 안됩니다.

 

최소한 일주일 중 하루만이라도 주님을 생각하고, 위해서 심부름하는 날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4. 하나님이 주신 양식이었습니다.

 

32절을 보면 "내가 너희에게 광야에서 먹인 양식"이라고 했고 35절을 보면

40년 동안 먹었다고 했습니다.

저절로 땅 위에 내린 양식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내려주신 양식입니다.

나가 처음 내린 것은 출애굽 한지 한달이 지난 달이었습니다.

 

본문 1절을 보면 215일로 되어있습니다. 연대로 따지면 BC 1446년이 됩

니다. 그리고 만나가 그친 것은 41년째 되던해 유월절 직후였습니다.

40, 결코 짧은 세월이 아닙니다. 먹기위해 수고도 땀도 흘린 일이 없습

니다. 자고나서 집 밖에 나가면 지면에 덮여 있습니다. 그것을 거둬다가 요

리를 만들어 먹으면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만나사건 속에서 다음의 교훈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 욕심부리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욕심부리고 한 호멜 이상을 거둬들이면 썩고 냄새나고 벌레가 생겼습니다.

만나는 남지도 모자라지도 않았습니다. 그날 그날 넉넉한 양식이었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면 사망을 낳는다

"고 했습니다.

 

우리는 욕심부리다가 비극의 주인공으로 전락한 사람들을 너무나 많이 보

았습니다. 한번으로 끝났으면 존경받고 행복했을 집권자들이 헌법까지 뜯어

고치면서 두번 세번 하려다가 비명에 간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월급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아무 돈이나 삼키려다가 철창신세를 진사람들과

지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오늘도 듣고 있습니다.

욕심, 그것은 비극의 씨앗입니다.

만나는 아침 햇빛이 비추기 시작하면 스러졌습니다. 24시간 땅에 널려있는

양식이 아닙니다. 그때 그때 필요한 양으로 만족하고 감사하며 살아가야 합

니다. 그리고 부지런해야 만나를 먹을 수 있습니다. 늦게 나가면 만나가 없

어졌기 때문입니다.

 

둘째 영원한 생명의 양식을 사모해야 합니다.

광야의 만나는 영원한 생명양식의 그림자입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그 땅에서 거둔 곡식을 먹게 된 날부터 만나는 그쳤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먹고 마시는 행위는 이 세상 떠나면 모조리 끝나게 됩

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행위가 없습니다.

 

요한복음 6:48-49를 보면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다 너희 조상들은 광야

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라고 했고, 6:51를 보면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영원한 만나, 생명의 떡입니다. 세상 것들을 영원한 양식

으로 생각하면 영생을 얻지 못합니다. 미국의 갑부 록펠러는 33세에 백만장

자가 됐고, 43세에 미국의 정유산업을 장악했고, 53세에 세계 최고의 부자

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알로페시아(Alopecia)라는 병에 걸려 머리털과

눈썹이 빠지고 소화불량으로 우유와 크래커로 연명했습니다. 그리고 공포심

에 사로잡혀 수십명의 보디가드가 지켜야 했고 불면증으로 매일 밤을 뜬눈

으로 지샜습니다. 의사는 1년 밖에 살지 못한다고 선언했고, 각 신문들은

그의 특집과 죽은 다음에 실을 살지 못한다고 선언했고, 각 신문들은 그의

특집과 죽은 다음에 실을 조사까지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성경

을 읽다가 "돈이 전부가 아니다"라는 깨달음과 함께 회개하고 거듭나기 시

작했습니다. 그는 돈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교회, 구호단체, 의학연구소,

대학 등을 도왔습니다. 페니실린도 록펠러 재단의 후원으로 개발된 것입니

. 그는 건강을 되찾아 98세까지 살았습니다. 영원한 만나를 발견했고 먹

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양식을 먹어야 건강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만나를 먹어야

삶에 활력이 넘칩니다.

 

사람답게 가치있게 뜻있게 보람있게 살려면 영원한 만나이신 그리스도를

만나고 함께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양식으로 풍요롭게 되시기를 축

원합니다.

 

발행일 : 940918

분 류 : 설교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