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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속으로 〓/성경 교육 지침

E. P. 샌더스(E. P. Sanders;1937- )

by 【고동엽】 2022. 3. 5.

E. P. 샌더스(E. P. Sanders)

약력

 

1937년 미국의 텍사스(Taxas)주, 그랜드 프레리(Grand Prairie)출생


1959년 텍사스 웨슬리안(Texas Wesleyan)대학교 문학사(B.A.)


1962년 남감리대학교(Southern Methodist University) 신학사(B.D)


1966년 뉴욕 유니온 신학교(Union Theological Seminary) 신학박사(Th.D) 취득


1966년부터 1983년까지 캐나다의 맥매스터(McMaster) 대학교 종교학부 교수


1984년부터 1990년까지 영국의 옥스퍼드(Oxford) 대학교에서
The Dean Ireland 주석학 교수


1990년부터 지금까지 미국의 노스 캐롤라이나(North Calolona)주,
듀크(Duke) 대학교 인문과학부 종교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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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율법관 1 서론 1.2 최근 율법관 연구의 현황

 


1.2 최근 율법관 연구의 현황

 

바울의 율법관을 둘러 싼 논쟁의 역사를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율법에 대한 바울의 모호한 표현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몸부림의 역사였다고 말할 수 있다.

 

율법에 대한 바울의 진술들은 많은 질문들을 야기시킨다. 바울이 율법에 대해 긍정적이고 부정적인 견해를 동시에 피력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다시말하면 바울이 한편으로 율법은 하나님의 거룩한 법이라고 말하면서(롬7:10-14, 9:4), 다른 한편으로 율법은 죄와 저주와 사망이 된다고 말하는(롬7:5,갈3:10- 13) 이유는 무엇인가? 과연 바울은 율법에 대하여 논리적 일관성을 가지고 있었는가? 바울이 논쟁하고 있는 유대교의 본질은 무엇인가? 율법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가? 하나님의 구원역사에 있어서 율법의 위치와 그 역할은 무엇인가? 이 모든 질문들은 율법에 대한 바울의 모순되어 보이는 진술들과 직접적으로 혹은 간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문제들이다.

 

위의 문제 해결을 위하여 그동안 많은 주장들이 제기되어 왔다. 바울의 율법관에 대한 전통적인 이해는 율법에 대한 바울의 주된 비평의 대상은 율법을 선한 공적을 쌓아 자신의 구원을 확보하려는 수단으로 삼으려는 유대 ‘율법주의(legalism)’의 오류라는 입장이다.

 

많은 학자들은 바울의 사상 속에는 ‘거룩한 신의지의 계시로서의 율법’과 ‘자신의 공적을 쌓기 위해 사람들에 의해 오용된 율법’, 즉 율법주의 사이에 함축적인 구분이 존재한다고 결론지어 왔다. 이 견해에 따르면 바울이 율법에 대해 긍정적으로 진술하는 것처럼 보일때 그는 ‘신의지의 계시로서의 율법’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고, 반면에 바울이 율법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면서 그것을 평가절하하는 것처럼 보일때 그는 실재로 율법 자체보다는 율법에 대한 당시 유대인들의 오해와 오용(즉 legalism)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 바울의 율법관 연구에 있어 대단한 ‘지각 변동’을 일으켰던 학자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그 대표적 주자는 바로 E.P.Sanders이다. 그는 자신의 작품을 통해 전통적인 해석을 모두 뒤집어 놓았다. 그는 방대한 유대교 문헌들에 기초하여 바울 당대의 유대교는, 전통적으로 많은 학자들이 믿어 왔던 바와 같이, 율법을 열심히 지킴으로 하나님 앞에 ‘의’를 이루려고 했던 “율법주의적 종교”나 “행위 구원적 종교”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택과 언약에 의해 주어진 의와 구원의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율법을 지키려고 했던 ‘언약적 율법주의’(covenantal nomism)의 종교였다고 주장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언약백성 가운데 들어가기 위해서가 아니라(not getting in), 오히려 하나님의 언약백성의 공동체에 계속 머물러 있기 위해서(but staying in) 율법을 지키고자 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바울이 자기 당대의 유대교와 율법을 비판한 주된 이유는 유대인들이 율법을 자기 의나 구원을 추구하는 수단으로 삼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적 목적들과 약속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기에 구원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주어진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샌더스가 바울의 율법관에 대한 전통적인 견해를 전면적으로 비판한 이래 바울의 율법 논쟁은 신약학자들 사이에 더욱 가열되고 있다. 최근의 학계는 전통적인 견해를 거부하는 샌더스의 견해를 적극 지지하는 학자들과 샌더스의 견해에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전통적인 견해를 여전히 고수하는 학자들로 나뉘어지는 ‘양분화 현상’을 겪고 있다.

 

샌더스의 견해를 따르는 학자들은 바울 당대의 유대교가 율법주의가 아니었다면, 바울은 무슨 이유로 유대주의자들을 공격했을까?하는 문제에 논의의 촛점을 맞추고 있다.

 

N.T.Wright는 바울이 유대인들을 비평한 이유는 그들의 율법주의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배타적 민족주의 때문이었음을 논증하고자 했다.
비슷하게 J.D.G.Dunn은 바울이 비평하고 있는 것은 율법 자체가 아니라 당시의 유대교가 중요시하던 할례, 음식법, 안식일 등과 같은 율법의 행위들인데, 그것들은 언약을 너무 협소하게 ‘민족주의적’으로 파악함으로써 국가적 우월성 내지 선민의식을 내세워 이방인들을 배제시키는 역할을 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F.Watson은 바울이 율법을 비평한 근본 원인은 ‘신학적’이 아닌 ‘사회적’ 이유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이방인의 사도로서 바울은 율법의 멍에를 이방인들에게 짊어지게 하는 것은 환영받지 못할 일이 분명함을 미리 견지했기에 율법을 부정하면서 율법 폐지론을 펼쳤다는 견해를 피력한다.


H.Räisänen은 바울 자신은 스스로도 해결할 수 없는 모순으로 가득찬 율법이해를 갖고 있었다고 하면서, 바울의 일관된 율법이해를 찾으려는 시도보다는 비 체계적인 바울 자신으로 만족해야 한다는 극단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바울의 복잡한 율법관은 개인적으로 극복하지 못한 논쟁의 상황에서 발생한 ‘혼돈된 사회적, 심리적 상황’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울의 율법에 대한 여러 표현들은 상호 연관되어 있지 않을 뿐더러 상호 연결시킬 수도 없는 조각들로 혼재하고 있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샌더스의 견해를 반대하는 학자들은 유대교는 율법주의인 행위구원의 종교였다는 전통적인 견해를 수용하면서, 바울이 율법에 대해 한편으로는 긍정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또다른 한편으로는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는 바울의 모호한 표현들에 대한 문제 해결에 논의의 촛점을 맞추고 있다.


C.F.D.Moule, G.E.Ladd, C.E.B.Cranfield같은 학자들은 ‘율법주의적 율법’과 ‘하나님의 뜻의 표현으로서의 율법’ 사이를 구분함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D.J.Moo, T.R.Sc- hreiner 같은 학자들은 ‘제의적 율법’과 ‘도덕적 율법’ 사이를 구분함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바울은 율법을 제사법(의식법)과 윤리법 등 두가지로 나누고 제사법은 그리스도의 속죄사역과 더불어 그 기능이 종결되었으나 윤리법만은 신약시대에도 그대로 남아 그 기능을 발휘한다고 생각했다고 이들은 주장한다.


W.D.Davies, R.Longenecker같은 학자들은 ‘모세의 토라’와 ‘메시야적 토라’ 사이를 구분함으로써 율법에 대한 바울의 어떤 불일치 현상을 해결하려고 한다.
U.Wilckens, H.Hübner, J.Drane같은 학자들은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율법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다가 예루살렘교회로부터 심각한 반대에 부딪히게 되자 율법 문제를 심각하게 재고하게 되었고, 그 결과 로마서에서는 율법에 대해 긍정적인 자세를 보이게 되었다는 소위 ‘발전이론’을 제시한다.

 

이상의 논의를 통해 볼 때, 바울의 율법관을 둘러싼 논쟁의 핵심은 바울이 진술한 모호한 표현들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하는 데 있다. 이와 관련해 바울을 반대했던 적대자들의 정체, 그들의 사상적 배경을 이루고 있는 유대교의 본질, 그리고 바울의 율법관이 갖는 일관성의 문제가 중요한 이슈로 대두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cafe.daum.net/duson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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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 론(바울의 율법관)

1.1 연구 목적 및 과제

본 논문의 목적은 최근 학계에서 뜨겁게 논쟁되고 있는 바울의 율법관에 대한 문제를 고찰하는데 있다. 율법은 바울의 신학에 있어서 여러 다른 주제들과 밀접한 연결을 가지고 있는 중심적인 주제이기 때문에, 바울의 율법관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그의 신학 사상 전체를 연구하는데 필수적이다. 따라서 지난 수 세기 동안 바울의 율법관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수많은 연구들이 진행되어 왔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학계는 통일된 해결책에 도달하지 못하고, 다양한 의견들만이 제시되어 논의가 계속되고 있을 뿐이다. 특별히 E.P.Sanders 이후 바울의 율법관에 대한 신약학자들 사이의 논쟁은 더욱 가열되어 마치 춘추전국 시대를 방불할 정도로 심각한 상황에 있다.

 

바울의 율법관을 연구하는 최근의 학자들은 바울 사상의 통일성에 대해 강한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왜냐하면 바울 서신에는 율법에 대한 진술들 가운데 서로 모순되어 보이는 표현들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특히 바울은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통해 한편으로 율법에 대해 대단히 부정적으로 말하고 있으며(갈2:16,19 ;3:11,15이하,19,21,25;5:1;롬3:28;5:20;7:5,8-13;7:4,6;10:4),
또 다른 한편에서는 그 반대로 대단히 긍정적으로 말하고 있다(갈3:12;5:14;6:2;롬2:20;3:31; 7:10,12,14;8:4;13;8).

 

이와 같이 율법에 대한 바울의 모호한 표현들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서 학자들은 나름대로의 해결책들을 내 놓았다. 그러나 그 해결책들은 본인이 보기에는 만족스럽지 못하다. 따라서 본인은 바울 자신의 진술들을 충분히 고려하면서, 과연 그는 율법에 대하여 논리적인 일관성을 가지고 있었는가?하는 문제를 집중적으로 고찰해 보고자 한다.

 

위의 과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본 논문은 갈라디아서와 로마서를 중심으로 바울의 율법관을 고찰하게 될 것이다. 바울은 일목요연하게 볼 수 있는 체계적인 논문이나 서신을 써서 자신의 율법관을 우리에게 남겨 준 것이 아니라 다만 특수한 상황과 관련되어 쓰여진 여러 서신들, 특별히 갈라디아서와 로마서를 통해 제시하고 있다. 그는 역사적 정황이나 교회가 처한 형편이 확연히 다른 두 공동체에 각각의 서신을 보내고 있기에 각 서신에서 보여지는 바울의 율법이해는 서로 상이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각 서신들의 상황을 충분히 고려하면서 두 서신 속에 나타나는 바울의 율법이해에 대한 표현들을 면밀히 검토한다면, 그가 갖고 있던 율법관이 사실은 시종일관한 통일성이 있었음을 발견할 수 있지는 않을까?

 


바울, 율법, 유대인(E. P. Sanders)

 


E. P. 샌더스 지음 [바울, 율법, 유대인] 김진영 옮김 (서울: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4) [Sanders, E. P. Paul, the Law, the Jewish People.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83.]


샌더스(E. P. Sanders)의 [바울과 팔레스틴 유대교](1977)는 바울 연구에 있어서 '바울에 대한 새로운 전망' 또는 '포스트-샌더스 연구' 라고 불리는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다. covenantal normism으로 규정된 샌더스의 팔레스틴 유대교는 더 이상 바울의 적대자가 아니었다. 이제 바울 연구자들은 바울의 주장들, 특히 그의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주장이 유대교와 맺고 있는 새로운 관계를 규명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샌더스는 [바울, 율법, 유대인]의 서문에서 [바울과 팔레스틴 유대교]에서는 바울의 유대인됨과 바울이 유대교 전승 및 사상과 맺은 개괄적인 관계를 탐구할 의도가 없었으며, 이 책([바울, 율법, 유대인])에서 바울과 당대 유대교의 일반적인 관계를 좀더 꼼꼼하게 집중적으로 다루려고 한다고 밝힌다.(9) 이 책은 '율법'(제1부)과 '유대인의 구원'(제2부)이라는 두 주제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선 각각의 주제에 대해서 바울이 어떤 입장을 가지고 있었는지 살피고, 그것이 당시 유대교의 입장과 어떤 차이점을 가지는지, 그리고 바울이 그러한 입장들을 가지게 된 이유는 무엇인지 제시한다. 이 글은 샌더스가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고 언급한(18, 제1부의 1장을 가리킴) 제1부를 중심으로 하였다.

 

샌더스는 바울 사상의 몇 가지 주요 특징들을 제시함으로써 자신의 논의를 시작하는데, 이 특징들은 바울의 율법에 대한 진술들을 이해하는데 결정적인 틀을 제공한다. 첫째, 바울의 진술들은 어떤 질문들과 관련해서 언급된다. "율법에 대해 바울이 말한 것들이 서로 다른 이유는 제기된 질문과 문제에 근거한 것이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각각의 대답은 그 나름대로 논리를 가지고 있으며 모두 다 바울의 중심적인 관심들 속에서 나오고 있지만, 그러나 그 다양한 대답들을 함께 나란히 두었을 때, 율법과 같은 문제를 논의할 때 기대했던 것처럼, 전체적으로 논리있게 정리되지는 않는다."(18) 둘째, "바울이 말하는 내용의 대부분은 바울이 가지고 있었던 어떤 중심적인 확신들에 의해 결정되고 있다...... 그 중심 확신들로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모든 사람의 구원을 위해서 보내셨다는 것, 따라서 유대인이든 헬라인이든 동일한 근거를 가지고 있다는 것('그리스도를 믿음',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 그 주님은 곧 다시 오실 것이라는 것, 바울 자신은 이방인의 사도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는 것,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 등이다."(18) 셋째, "바울의 사상과 그 사상을 표현하는 핵심 술어 간에 차이가 있는데...... 구원받지 못한 상태에서 구원받은 상태로 옮겨진 것을 논의하고 있다."(21) 넷째, 구원받은 상태로의 이동은 구원받는 사람들의 몸(집단)에 '들어감'(getting in)과 '머뭄'(staying in)이라는 구조로 이루어진다.(22)

 

이 글은 샌더스 논지의 핵을 이루는 이 네 가지 사항들을 중심으로 이 책의 공헌과 한계를 점검해 보고자 한다. 첫째, 샌더스가 바울의 다양한 율법 진술들이 서로 다른 질문들에서부터 온다고 본 것이다. 바울의 편지들이 가지고 있는 상황적 성격을 고려할 때, 샌더스가 다양한 율법 진술들을 서로 다른 맥락에서 제기된 문제들과 관련시킨 것은 바울 이해의 기본 전제에 충실하였다고 볼 수 있다. 샌더스는 바울 율법 진술들을 분류하기 위하여 나름대로 네 가지 질문을 고안하였다: ① 어떻게 구원받을 집단에 들어가는가 ②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목적은 무엇인가 ③ 구원받을 집단에 들어간 후의 생활은 어떠해야 하는가 ④ 옛(율법) 시대와 새(예수 그리스도) 시대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이러한 샌더스의 질문들은 바울 사상의 특징으로 제시된 제3, 4 항목과 관련된다. 따라서 샌더스가 바울 사상의 특징이라고 본 것 중에서 제1, 3, 4 항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제1, 3, 4 항의 핵심은 결국 '들어감'과 '머뭄'의 구조에 있다고 하겠다. 과연 이 구조가 샌더스의 계획대로 바울의 다양한 율법 진술들을 이해하는데 성공적이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다.

 

샌더스는 "바울이 율법이라는 용어를 최소한 두 개의 서로 다른 문맥...... 하나는 사람이 어떻게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들어가는가'를 논의하는 문맥에서...... 다른 하나는 그 '안에 있는' 사람이 어떻게 (그가 율법을 지키면서) 행동하는가를 논의하는 문맥에서 사용하고 있다"(31)고 제시한다.(제1장, 제3장) 그는 바울이 '들어감'의 조건으로서의 율법(행위)에 대해서는 반대하였으나 '머뭄'의 조건으로서의 율법(행위)에 대해서는 반대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43) 그러나 샌더스는 바울이 반대한 들어감의 조건으로서의 율법(행위), 그 구체적인 예인 할례, 절기 준수, 음식 규례의 경우는(43) 바울이 '머뭄'의 문제를 다룰 때에는 제거되거나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으로 주장되었다고(161) 한다. 이것은 샌더스가 바울의 율법 거부를 '들어감'의 조건으로 제한시켰던 시도에서 다소 물러선 인상을 준다. '머뭄'의 경우에도 거부되는 항목이 있다는 것이다.

 

샌더스의 주장은 바울의 율법 거부가 '들어감'과 '머뭄'의 구조, 즉 가입 조건으로서의 율법 거부가 아니라 유대인 선택 사상에 대한 거부 차원에서 설명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던(J. Dunn)은, 샌더스가 '들어감'과 '머뭄'에서 거부된 것으로 제시한 행위들이 유대인의 정체를 규정하는 행위들이라고 옳게 지적하였다. "율법의 문제는...... 유대인에게 있는 특권이 없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온 세상을 구원하려는 목적을 주지 못했다는 점이다."라는 샌더스의 주장처럼, 바울의 율법 거부를 설명하는데 '들어감과 머뭄'의 구조는 그리 유효하지 않은 듯하다. 바울과 유대교의 관계 차원에서 볼 때, 바울의 율법 거부를 유대교의 그리스도 거부와 유대인의 특권 주장에 대한 거부로(73-74) 인식한 샌더스의 주장은 정당하다. 유대인의 특권에 대한 바울의 거부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외에 율법의 행위를 지킬 것을 주장하였던 어떤 그리스도인들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바울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라는 동일한 토대에서 의롭다 여김을 받는다고 했기 때문에 유대적 정체성을 규정하는 율법의 행위들을 '들어감'과 '머뭄' 모두에서 거부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유대교와의 관계에서든지, 율법 행위를 주장한 그리스도인들과의 관계에서든지, 바울의 율법 거부는 '들어감'과 '머뭄'의 구조와 상관없이 의롭다 여김 받는데는 믿음 이외의 어떤 것도 필요하지 않다는, 특히 의롭다 여김을 받기 위해 유대인이 될 필요가 없다는 그의 중심 확신(샌더스의 주장대로)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다.

 

언뜻 보기에 샌더스의 '들어감과 머뭄'의 구조는 바울이 율법을 이루어야 한다고 말한 부분을 설명하는데 효과적인 것처럼 보인다. 샌더스는 그리스도인이 올바르게 행동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을 이루어야 한다고 했는데, 이것은 '머뭄' 곧 구원받은 집단에 들어온 후에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의 질문과 관련된다고 보았다. 샌더스는 바울이 그리스도인을 규율하는 율법과 모세의 율법을 이론적으로 구분하지 않고 있으며(160), 바울의 권고, 특히 상급과 형벌에 관한 가르침은 율법과 유대교 전승에 매우 일치한다고 지적한다(162). 그러나 샌더스는 바울이 완전한 할라카 체계를 만들어 내지 않았고(143), 그의 권고가 모두 성경적이거나 유대교적인 것은 아니며(143, 161), 의도적이고 명시적으로 '율법'에서 율법의 요구 조건 가운데 세 가지 즉 할례, 날들과 절기, 음식 관련 규제를 제거하거나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으로 주장했다는 점에서는 모세의 율법과는 다르다고 말한다.(161) 여기에 대해서 샌더스는 "바울에게서 율법이 율법으로 여전히 작용한 정도를 정확하게 평가하기란 어렵고 앞으로도 여전히 어려울 것이다. 나는 그 점을 무시하고 싶지 않다. 또한 그 점을 과장하고 싶지도 않다"(167)고 논평함으로써 '머뭄'의 구조 안에서 이 문제를 성공적으로 다루지 못했음을 스스로 인정한다.

 

또한 샌더스는 바울의 모순적인 율법 관련 주장들을 정리하는데 자신이 도입한 '들어감'과 '머뭄'의 구분이 지니는 문제점을 인식하고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나는 바울에게 믿음이 그리스도의 몸에 들어가는 시점에만 요구되었다는 뜻을 내비칠 의도가 없다. 그 반대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언제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활의 일부가 되었을 것이며 하나님에 대한 의지는 결코 흔들려서는 안된다...... 아마 믿음이 '선행' 자체의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고 드러날 때, 바울이 선행에 대하여 즉 율법주의와 자기 성취에 대한 의지에 대하여 유대교를 비난했다고 생각해야 할 부담이 덜할 것이다......"(234-235)

 

둘째, 바울의 다양한 율법 진술들은 그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중심 확신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샌더스는 이 점에서 바울의 율법 진술의 일관성을 변호한다. 샌더스는 바울의 율법 관련 주장들을 평가하면서, 이러한 주장들은 '체계적'이지는 않을지라도 바울의 중심 확신들로부터 나오고 있기 때문에 일관성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고 보았다. 그는 이러한 바울의 주장들이 '경험(바울의 회개/부르심)'과 그로 인해 생겨난 중심 확신으로부터 나오는 '사유의 연속 순서'(221-222), 바울의 흑백 사고 방식(203)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결론짓는다. 샌더스는 이러한 설명이 "개별 구절의 성경 주해적 분석보다 더 설득력있는 주장"(219)이라고 말하지만 정작 다양한 진술들에 일관성을 부여했다는 중심 확신의 기원으로 제시한 바울의 경험이나 바울의 사유 순서, 사고 방식에 대해서는 논증하지 않고 있다.

 

샌더스는 바울 당시 유대교를 공적주의에서 구해주었지만, 그가 [바울, 율법, 유대인]에서 목표로 했던 바울과 유대교의 관계를 적극적으로 규명하는데는 그리 성공하지 못했다. 샌더스는 바울의 율법(행위) 거부가 입교 조건에만 국한된 것이었다고 말함으로써 바울의 율법(행위) 수용과 그에 따른 유대교와의 접촉점을 제시하고자 했으나 유감스럽게도 그의 연구는 바울의 율법(행위) 수용이 모세의 율법과 갖는 관계를 만족스럽게 설명하지 못하였다.(167) 오히려 그의 연구는 바울이 유대교가 주장하지 않았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배타적으로 강조하고 유대교의 선택 사상을 거부함으로써 유대교와는 단절 관계에 놓이게 되었음을 부각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샌더스의 바울은 공적주의 유대교와는 대결하지 않았을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특권적인 선택 사상을 지닌 유대교와는 여전히 대결하고 있었던 것이다.

 

* 일러두기: 이 서평은 우리말 번역서를 중심으로 하였기 때문에 여기에 언급된 용어들은 번역서에 준하였다.

 

 

http://nbible.tv/wwwb/data/biblical09/Rv011113.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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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역사적 배경에 관한 논쟁

 

E.P. Sanders1)

김진호 옮김

 

 

예수의 역사적 배경을 어떻게 묘사할 수 있을까? 최근 어떤 학자들은 예수시대 갈릴래아가 그리스-로마 세계의 다른 지역처럼 헬레니즘화되었다는 논지를 편 바 있다. 이러한 주장은, 예수시대 유다교가 크게 보아 히브리성서의 종교와는 다른 모습을 띄었다는,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케케묵은 주장의 한 극단의 예일 뿐이다. 예수와 유다교 사이의 이와 같은 불연속성에 대한 강조는, 부분적으로는, 신약시대 유다교(post-biblical Judaism)가 부패한 종교였다는 그리스도교적 편견에서 비롯된다. 또 한편으로는, 팔레스틴에 침투하고 있는 새로운 영향을 단순히 강조하려는 데에 기인하고 있다. 그러나 히브리성서나 '약속된 때'(appointed times)에 대한 관념(추수제나 신월제, 또는 그밖의 축제들과 같은 반복적으로 일어나면서 회고적 신심을 불러일으키는 사건들, 그리고 유다교의 시간 개념) 등이 예수의 역사적 배경으로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는 사실을 간과하는 것은 예수시대 팔레스틴의 정치적이고 종교적인 실제와 부합하지 않는 착오를 반영한다.2)

 


얼마 전만 해도, 우리가 예수가 살았던 세계를 묘사하기 위한 핵심 개념을 논하려면, 필시 유다 팔레스틴에서 영향력을 발휘했던 집단들을 나타내는 용어들인, '로마인들', '바리사이', '묵시가들', '젤롯당' 등을 들먹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 집단들은 도대체 어떤 역할을 했는가? 이에 대해서는 지난 수십년간을 지배해 왔던 견해를 다음과 같이 간략히 묘사할 수 있을 것이다: '로마인들'은 팔레스틴을 통치했고; '바리사이'는 유다의 종교관을 지배했으며, 또 유다인들이 자신의 존재를 정립하고 그에 따라 삶을 살게 하는 법적인 문제를 만들고 적법성 여부를 판별해 주는 역할을 했으며; '묵시가들'은 우주적 대격변을 꿈꿨으며; '젤롯당'은 혁명을 기도했고, 그들 대부분이 염원했던 메시아인 다윗의 아들이 도래하여 자신들을 이끌고 승승장구하리라고 믿었던 사람들이라고. 물론 이와 아울러서 바리사이와 묵시가들, 그리고 젤롯당은 서로 어느 정도 중복되기도 하고 서로 연합전선을 형성하기도 했다는 것에 대한 논의도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최근의 학계에선 이와 같은 식으로 스케치(나는 이것을 '스케치 1'이라 부르고자 한다)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비록 그 잔재가 교과서들에서는 어느 정도 남아 있긴 하지만 말이다. 이 글에서도 예수나 예수시대 갈릴래아 지방이나 유다 지방을 다루면서 이 네 개념어들에 대한 통상적 이해를 더 이상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물론 전적으로 거부하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여기서는 예수의 배경에 관해 제시된 최근의 두 부류의 견해를 간략히 서술하고자 한다. 그 하나(나는 이것을 '스케치 2'라고 부를 것이다)는 특히 리차드 호슬리(Richard Horsley)와 아펠바움(S. Appelbaum)의 주장, 그리고 어느 정도는 마커스 보그(Marcus Borg)의 주장과 관련되며, 다른 하나(나는 이것을 '스케치 3'이라 부를 것이다)는 리차드 베이티(Richard Batey), 존 도미닉 크로싼(John Dominic Crossan), 제랄드 다우닝(Gerald Downing), 하워드 키이(Haward Kee), 버튼 맥(Burton Mack), 제임스 스트레인지(James Strange) 등 많은 학자들의 견해와 관련된 것이다.

 


스케치 2 : 예수의 세계는 극심한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위기 상황에 직면해 있었고, 나날이 악화일로에 있었다. 팔레스틴의 소토지보유농들은 "이중과세, 과중한 채무, 토지 상실 등과 같은, 제도화된 부정의의 올가미에 극도로 옥죄이는" 상태에 있었다.3) 농가들은 "이중과세라는 지속적인 경제적 압박 속에서 더욱 심한 부채의 상황으로 몰락해 갔다."4) 부유층은 소농들에게 되갚을 수 없을 만큼의 고율의 이자를 붙여서 대부해 줬고, 그 대가로 그들의 재산을 저당잡았다. 그리하여 부자들은 점점 부유해진 반면, 더욱 더 많은 사람들은 토지에 긴박돼 버렸다.5) '채무 상황'은 점증했고, '농민들은 몰락해갔으며',6) '사회경제적인 토대'는 와해되고 있었고, 궁핍 상황은 '악화일로'에 있었다.7)

 


그 책임은 우선적으로 로마인들에게 있었다. 그것은 그들이 전반적인 체제를 주도했고, 유다인들에게 제2 조세를 부과했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다 본토의 지도자들, 특히 사제귀족들에게도 책임이 있었다. 그들은 주민들에게 제1 조세를 부과했었던 이들이었다. 로마인들과 유다인들이 각기 조세를 부과했던 것이 제도적 부정의의 으뜸가는 요소였다. 사제들과 제휴하고 있었던 바리사이들도 비난받아 마땅하다. 그들은 귀족들의 '가신'(retainers)이었던 것이다.8) 그들은 견해를 달리하는 사람들을 악마로서 낙인찍고 침묵하게 하는 류의 횡포를 일삼았다. [호슬리는 악마의 활동에 관한 기발한 주장을 펼쳤다. 악마의 활동이란 지배계급을 향한 일종의 사회적 경제적 비평이었다는 것이다.]9)

 


스케치 3 : 이 견해는 '스케치 2'와는 명백하게 대립되고 있는 주장으로, 갈릴래아가 도시화되었고, 국제화되었으며, 번영일로에 있었음을 강조한다. 이러한 입장을 취하는 한 연구자에 따르면, "갈릴래아는 실상 헬레니즘적인 문화로 특성화되었다"고 하며10), 또 다른 학자는 "1세기 하부 갈릴래아는 [로마] 제국 내의 다른 어떤 지역에 비해 도시화가 진척되었으며 매우 세련된 모습을 띠고 있었다"고 주장한다.11) 예수와 그의 동시대인들은 "광범위하게 로마제국적인 도시의 모습을" 현저하게 "띠고 있었다"는 것이다.12)

 

게다가 예수와 그의 청중들은 그리스말을 하고 있었고, 그리스풍의 극장에 대해서 알고 있었으며(그들은 세포리스에서 극장행사에 참여했다13)), 견유학파의 철학에 대해서도 익히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14) 요컨대 '스케치 3'은 '스케지 2'와 비교할 때, 경제적인 차원에서 정반대의 견해를 취하고 있다. 즉 빈곤이 아니라 풍요의 상황이라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스케치 3'의 편에 선 학자들 가운데 일부는 그래도 유다종교가 영향을 미치고 있었고 어느 정도 압박을 가하고 있었다는 것은 인정한다. 이들은 성전이나 성직자들이 부양받고 있다는 것을 일종의 '사취행위'(Victimiaztion)로서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15)

 

한편 더욱 많은 학자들은 갈릴래아의 일반농민이, 여가를 향유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나 가능한 문화를 향유하고 있었다고 상정한다. 촌락민들은 인근 도시의 권역으로 편입됨으로써 그리스적 연극을 볼 수 있었고 철학자들의 설법을 들을 수 있었으며, 더욱이 휴가 때가 되면 이들은, 훨씬 더 그리스 문화에 젖어 있던 시리아의 더욱 큰 도시들로 다녀오기도 했다는 것이다.16) 결국 이런 관점에서 보면 로마가 대단히 중요한 요소로서 부각된다. 갈릴래아에는 로마 병사들로 들끓었고17); 로마의 관료들이나 행정관들도 많았고18); 그리스의 서기관들을 포함한 지식인들도 많았다. 이들 모두는 팔레스틴에서 결코 낯선 존재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세포리스에는 극장 뿐만 아니라, '아우구스투스와 로마를 경배하는' 이방 신전도 있었고19); 농민들은 로마인들의 식용 및 제의용 돼지를 사육했으며; 노동자들은 [유다 율법에 따르면 금지된 동물인] 노새를 활용했다.20) 결론적으로 그리스-로마의 문화, 그들의 언어, 그들의 관행 등이 온통 만연해 있었다는 것이다.

 


예수의 역사적 배경에 대하여 이 세 가지 견해들은 어느 정도는 정확하고 유용하다. 그러나 아주 제한된 한에서만 그러하다. 나는 여기서 그 오류에 대하여 일일이 언급하지는 않을 것이다. 대신에 예수 시대 갈릴래아와 유다 지방에 대한 역사적 배경을 간략하게 언급할 것이다. 당시 각각의 정부가 기본적으로 어떻게 구성되었느냐의 문제는 예수의 역사적 배경을 보다 정확하게 이해하는 데 있어서 그 기반이 된다. 하지만 이것은 대체로 잘못 이해되고 있고, 특히 베이티(Batey)나 키이(Kee) 같은 학자들은 상당히 크게 오해하고 있는 듯하다. 정부에 관한 문제는 헬레니즘화나 로마화의 문제(즉 그리스와 로마의 영향의 문제)와 결부되어 있으며, 또한 조세 문제를 포함한 경제적 문제와도 연관되어 있다. 이 문제의 요소들 가운데 몇은 간략하게만 다루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나는 이것이 예수의 배경을 다루는 데 있어 최소한의 기본틀을 구성할 만한 논거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다.

 

 

I

 

예수 시대 유다 팔레스틴에는 주요한 정부 조직이 세 개 있었는데, 이것들에 대해서 우리는 그 통치자의 이름을 통해서 알고 있다: ① 헤로데 대왕의 상속자 중의 하나로 갈릴래아를 다스리고 있던 헤로데 안티파스; ② 예루살렘과, 얼마간은 유다 지방의 일부분을 지배하고 있던 대사제인 가야파; ③ 로마의 행정관 빌라도. 그는 지정학적으로 유다 지방을 이루고 있던 지역들(이두매, 사마리아, 유다)을 전반적으로 관장하고 있었다. 이들 가운데, 가장 중요성이 덜한 것은 빌라도다. 하지만, 로마의 역할에 대한 문제가 정부 문제를 다룰 때 가장 많은 혼란이 초래되는 분야인 탓에, 여기서는 팔레스틴에서 로마의 존재 문제로 이야기를 시작하고자 한다.

 


신약성서학자들은 종종 로마가 예수 시대에 팔레스틴을 점령한 것을, 길 모퉁이에 지키고 서 있는 병사들에 관한 것쯤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예컨대, 마태오복음서에 관한 대부분의 오래된 주석들은 가파르나움에서 예수가 로마의 백부장의 하인을 치유한 이야기(마태 8,5-13)에 대하여 논할 때, 이 백부장을 로마군 장교로 단정한다. 하지만 마태오가 말하고 있는 것은 그가 군 장교라는 것뿐이다. 그러나 '스케치 3'의 계열에 속하는 학자들 중에는, 예수시대의 세포리스(예수의 고향 나자렛에서 불과 몇 마일 거리에 있는 성읍인)에는 갈릴래아 지역의 로마 행정청이 세워져 있었고, 따라서 그 근방에 로마군이 주둔하고 있었으며, 로마군 고급장교도 있었다는 식의 한참 앞서간 논지를 펴는 학자들이 있다. 이 계열군에 속하는 또 다른 학자들은 예수 시대 팔레스틴을 로마가 '지배하였고' '점거하고 있었다'고 기술한다. 심지어 어떤 학자는 로마가 팔레스틴을 '합병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21)

 


이러한 주장들의 어느 것도 실제와는 전혀 무관하다. 예수 시대 팔레스틴의 정부 구조를 충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 세기 정도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필요가 있다. 아니면, 적어도 주전 37년에서 주전 4년까지 제위에 있었고, 예수가 태어날 즈음에 죽었던 헤로데 대왕에서부터 이야기하는 것 정도는 필수적이다. 그가 작성한 두 가지 다른 유언을 근거로 해서,22) 그의 왕국은 그의 아들들 가운데 몇에게 분할 상속되었다. 로마의 카이자르 아우구스투스는 헤로데의 두 유언장을 참작해서 다른 요소들을 절충하는 결정을 내렸다. 그리하여 헤로데의 세 아들이 공직에 임명되어, 과거 헤로데의 왕국을 분할통치하게 되었다. 이때 이들의 직위의 조건이나 성격은 이들의 아버지에게 적용됐던 것과 동일했다.

 


여기서 직위의 조건과 성격이란 무엇인가? 헤로데는 로마군의 도움으로 자신의 왕국을 정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후에 그는 서둘러서 로마군을 떠나보내고자 했다. 실제로 그는 그들을 확실하게 돌려보내기 위해 많은 뇌물을 바치기도 했다.23) 이후 로마군은 [팔레스틴으로 ― 옮긴이 주] 되돌아오지 않았다. 헤로데는 자신의 왕국을 통치했으며, 이두매인과 유다인으로 구성된 혼성군으로 정적들을 격퇴했다. 아마도 그는 로마의 봉신왕 가운데 가장 유능한 사람의 하나였던 것 같다.

 


로마의 봉신국들은 소비에트 제국의 붕괴 이전의 동유럽 국가들과 비견할 수 있다. 헝가리,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같은 나라들은 모두 자체의 정부를 가지고 있었다. 이들 나라들은 나름의 법률에 따라 국가를 통치했다. 그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소비에트 제국에 예속되어(contribute)야 했으나, 모스코바가 이들 나라에 직접적인 간섭을 할 경우는, 각국 정부가 통제할 수 없는 소요나 내전이 벌어졌거나, '주제넘게도' [예속]정부가 지나친 독립을 주장할 때뿐이었다.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로마는 팔레스틴과 관계를 맺었다. 헤로데가 통치했고, [로마의 관점에서] 그의 통치에 이상이 없는 한, 그는 안정된 정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의 통치에 있어서의 조건이란, 공납의 의무를 지고 있다는 것,24) 왕국의 변방을 방어해야 한다는 것, 내국의 반란을 자체적으로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로마가 인근 국가들의 하나에서 군사 행동을 벌일 때 군사적인 협조를 해야 한다는 것 등이다.

 


헤로데는 준독립적인 통치자로서(즉 그가 위의 네 가지 조건들을 준수하는 한에서, 내국 통치에 관한 한 완전히 독립적인 왕으로서) 정력적인 건축 사업을 펼쳤으며, 아마도 이 과정에서 이방의 건축술을 도입하고 수석 석공(head mason)들을 유치하였던 것 같다. 그의 후견자 중의 적어도 한 사람인 다마스커스의 니콜라우스(또는 니콜라스 Nicholaus/Nicholas of Damascus)는 이방인이었으며, 헤로데는 주로 이방 주민들로 구성된 몇 개의 도시들을 건축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도시들은 [옛 성읍을 재건한 것이 아니라 ― 옮긴이 주] 전혀 새로이 건설된 것이었다. 헤로데는 자신의 왕국의 유다적 부분들을 이방적 요소로 채우지는 않았던 것이다. 많은 유다인들이 이방적 도시들에 거류하기는 했지만, 주요한 유다 도시들에 많은 이방인들이 살지는 않았다. 헤로데는 단지 지형적인 통치자 이상의 의미를 갖는 유다의 왕이었다. 물론 인구가 희박한 지역인 요르단 계곡의 동부 지역과 갈릴래아 호수의 북부 지역은 이방인이 압도적으로 많기는 했지만 말이다.

 


더욱이 헤로데는 여러 가지로 유다의 율법과 전통에 충실했다. 그는 자신이 주조하게 한 화폐에 자신의 형상이나 아우구스투스의 형상 혹은 이방 신의 형상을 부조해 넣지 않았다.25) 그는 성전을 존중했고, 아낌없는 주의를 기울였으며, 많은 돈을 희사했다.26) 정결에 관해 새로이 추가된 경건의 관점에 따르기 위해, 그는 사제들을 석공으로 훈련케 하여, 평신도들이 결코 성전의 가장 신성한 구역에 들어갈 수 없도록 하기도 했다.27) 그는 자신의 궁전 곳곳에 유다적인 침례 못을 설비케 하여, 자신이나 자신의 가족, 그리고 관료들이 유다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행할 수 있도록 했다.28) 그는 디아스포라 지역에서 유다인의 권리가 보호받을 수 있게 하려 노력했는데, 이것은 이방 땅에서조차 유다인들이 이방인들처럼 되지 않게 하려고 노력한다는 그의 사려깊음을 나타내려 함이었다. 그리하여 디아스포라 유다인들은 부분적으로 분리적 삶을 유지할 수 있었다. 즉 그들은 안식일을 지킬 수 있었고, 회당 예배에 참여할 수 있었으며, 코우셔(kosher) 음식29)을 먹을 수 있었다.30)

 


헤로데는, 자신의 영역 안팎의 이방인 도시 혹은 이방인이 우세한 도시에서 그리스-로마의 문화나 여흥양식에 따른 수많은 건축물들을 의도적으로 세울 필요가 있었다. 예컨대, 그는 트리폴리스(Tripolis), 아꼬(Acco)/프톨레마이스(Ptolemaïs), 다마스커스(Damascus)에 김지나온들(gymnasia)을 세웠고, 예리코(Jericho)에 원형경기장(hippodrome)과 원형극장을, 그리고 가이사리아(Caesarea)에는 로마제국과 아우구스투스를 기리는 신전과 원형극장과 아고라(agora)를 건설했고, 나중에 가이사리아 필립비로 개칭된, 갈릴래아 호수 북부의 이방도시인 파네이온에는 아우구스투스를 기리는 신전을 세웠다.31)

 


이 건축물들 및 이것을 이용한 활동들은 유다 주민의 대다수에게는 매우 혐오스런 것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헤로데가 이 건출물들을 세운 곳은, 주로 이방인들이 거주하도록 새로 건축한 성읍(가이사리아; 세바스테 Sebaste)이나, 이미 이방인들 중심의 도시(파네이온)이거나, 혹은 유다 주민이 극히 소수만 거류하는 지역(예리코)이었다. 그럼에도 많은 학자들은 헤로데가 극장이나 원형극장, 원형경기장 등을 예루살렘이나 그 인근 지역에 세웠다고 주장한다.

 

또한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4년마다 로마와 로마의 황제와 로마의 신들을 기념하는 경기가 치뤄졌고, 이때마다 예루살렘은 운동선수들과 배우들, 검투사들, 관람객들로 가득 찼다고 주장한다.32) 이러한 주장들의 근거는, 유다적 생활 방식에서 이탈한 헤로데의 활동에 관한 요세푸스의 묘사에 기초한 것이다. 그에 따르면 헤로데는 4년마다 운동경기를 열었고; "예루살렘에" 극장을 세웠으며, "평원에" 거대한 원형극장을 건축했고; 경기에 참여하기 위해 "세상 온갖 지역에서" 검투사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으며; 사자를 포함한 무수한 야수들을 유입해 와서, 인간들이 이 야수들과 사투를 벌이게 하는 경기가 벌어졌는데; 특히 무엇보다 유다인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것은 극장을 장식하고 있던 기념물이었다는 것이다(Antiq. 15,267-276).

 

나는 많은 학자들이 어째서 요세푸스가 예루살렘이나 그 근방에 원형경기장을 세웠고, 거기서 4년마다 운동경기를 벌였다고 말한 것으로 보고 있는지를 알고 있다. 요세푸스 [혹은 그가 사용한 원본들]33)은 헤로데의 비유다적인 활동을 열거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그것들의 차이가 강조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이것들을 보다 면밀히 조사해보면, 여기서 공간(locale)상의 중대한 차이가 밝혀질 수 있다. "예루살렘에서"라는 공간지시어에는 '극장'만이 연결되어 있고, 원형극장은 "평원에서"라고 명시되어 있다. 요세푸스의 용례에서 평원이라는 말은, 고원지대의 한 가운데 위치한 협소한 한 지점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광대한 지역을 가리킨다.

 


팔레스틴 지역 내에서 그가 '평원'이라고 부르는 지역은 두 곳뿐이다. 하나는 갈릴래아의 에스드랠론(Esdraelon) 평원인데, 그는 때로 이곳을 "대평원"이라고 부르기도 한다(예: Antiq. 6,373; 15,294). 다른 하나는 지중해 연안의 샤론(Sharon) 평원인데, 이곳은 요빠(Yoppa)에서 가이사리아 북부 지역에까지 이르는 영역을 가리킨다(예: Antiq. 16,142). Antiq. 13,89-91는 '평원'이라는 용어에 대한 요세푸스의 전형적인 용례를 보여 준다: 그는 여기서 "평원에" 있는 요빠와 "산악지역에" 있는 예루살렘을 대조하고 있다. 주지한 대로 요빠는 샤론 평원에 위치한 도시다.34) 이와 마찬가지로 Antiq. 15,268에 언급된 두 가지 공간지시어는 예루살렘의 극장을 평원에 있는, 즉 사론 평원의 가이사리아에 있는 원형극장과 구별하고 있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운동경기는 원형경기장에서 벌어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헤로데의 영토에서 아우구스투스와 로마를 기리면서 4년마다 운동경기가 벌어진 지역은 가이사리아 한 곳뿐이었다고 결론내릴 수 있다.

 


우리가 '예루살렘'과 '평원'에 대한 요세푸스의 용례의 차이를 이해할 수만 있다면, 헤로데가 검투를 포함한 운동경기를 4년마다 예루살렘에서 개최했다는 식의 주장을 반박하는 그 이상의 논지를 펼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⑴ 극장이 경건한 예루살렘 주민에게 역겨운 것이라는 부수적인 이야기를 할 수는 있다. 하지만 원형경기장과, 그곳에서 운동경기들이 있었고, 이것은 로마와 아우구스투스를 기념하는 것이고, 이방신들이 예배되었으며, 수많은 이방인들의 가옥이 있었다는 것 등의 주장은 성립되지 않는다. [경건한 유다인들이 ― 옮긴이 주] 저항감을 갖는 보다 본질적인 요소는 운동경기, 검투, 로마제국의 신들과 아우구스투스를 향한 경의의 자세 등에 대한 것이며, 이것은 우리가 하나 혹은 그 이상의 자료를 통해서 언급한 바와 같다. ⑵ [예루살렘 근방에서 ― 옮긴이 주]

 

극장의 유적이 발굴되었다. 하지만 "거대한 원형극장"이나 원형경기장, 운동경기장 등의 유적은 발굴되지 않았다.35) 예루살렘 주변 지역은 고고학자들과 아마츄어 탐험가들에 의해 철저하리 만큼 속속들이 발굴되었다. 그러므로 원형극장이 아직 발굴되지 않은 채 숨겨져 있을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⑶ 요세푸스는 수차례에 걸쳐 가이사리아에서 벌어진 운동경기에 대해 언급하고 있지만,36) 예루살렘에서 벌어진 운동경기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

 


나는 헤로데가 이방 제도를 팔레스틴에 도입했다는 것과 관련된 이 논제가 헬레니즘화와 로마화를 이해하는 데 있어 대단히 중요하며, 그래서 예수의 사회적 맥락을 이해하는 데 있어 중요한 통찰력을 제공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른 많은 학자들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해 왔다. 샬릿(Schalit)은, 헤로데가 운동경기를 도입한 것이 예루살렘에 '대대적인 이방인'을 유입하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보면서, 이것은 유다 백성들을 둘러치고 있던 '영적 방벽'을 무너뜨리려는 헤로데의 계획의 일환이었다고 해석한다.37) 하지만 주지한대로 원형경기장이 세워지고 운동경기가 벌어진 곳은 예루살렘이 아니라 '평원'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러한 평가는 수정되지 않으면 안된다. 내가 보기엔, 헤로데는 자신의 유다인 백성들을 헬레니즘화와 로마화로의 길로 억지로 몰아붙이려 하지 않았고, 오히려 이에 대해서 대단히 조심스런 태도를 취했던 것 같다.

 


헤로데가 어떤 유다 도시에도, 혹은 더 나아가 자신의 왕국 어디에도 김지나온(gymnasium)을 세우지 않았다는 사실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38) 그리스의 김지나온은 오늘날의 체육관(gymnasium) 이상의 기능을 가졌다. 그곳은 소년들과 청소년들의 교육의 장이었다. 이들은 이곳에서 그리스어, 문학, 종교 철학, 정치 등을 배웠다. 또한 이들은 이곳에서 벌거벗은 몸으로 교육을 받았다. 김지나온은 그리스 문화를 확산시키는 최선의 도구였다. 가이사리아나 예리코같이, 원형극장을 받아들였으나 김지나온을 받아들이지는 않았던 도시는 그리스-로마 문화에 충분히 동화되지는 았았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예루살렘의 극장을 김지나온과 비견되는 것으로 평가하기는 더욱 어려운 일이다. 예루살렘의 극장에서 무슨 경기가 벌어졌고, 어떤 언어가 사용되었으며, 누가 참여했는지 등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터에 말이다. 그런데 헬레니즘화를 추진하려는 노력을 기울이려면 김지나온을 반드시 필요로 한다.

 


헤로데의 도시들 어느 곳에서도 그리스식의 정부 형태가 존재하지는 않았다. 즉 부울레(boule)를 선출하는 에클레시아(ekklesia)가 존재했던 헤로데의 도시에 대해서 우리는 전혀 아는 바가 없다. 여기서 에클레시아는 도시를 다스리는 의회원을 선출하는 성인 남자 자유민들의 대중회의를 가리킨다. 이것 또한 [김지나온과 마찬가지로 ― 옮긴이 주] 그리스 문화의 본질적인 요소의 하나였다. 예루살렘에는 의회, 즉 부울레라 불리우는 기구가 존재하기는 했으나, 이것은 선출된 자들의 모임이 아니었다.39) 이 의회는 헤로데가 임명한 대사제를 수장으로 하고 있었고, 추정컨대 의회 의원 모두가 헤로데에 의해 임명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예루살렘은 그리스적 도시가 아니었다. 전문용어로 말한다면, 폴리스(polis)가 아니었다. 물론 예리코나 가이사리아도 폴리스는 아니었다.

 


헬레니즘 문화 확산 수단의 대종이 스포츠나 검투 경기를 통해 수행되었다는 점은 오늘날의 현상과 커다란 유사성을 갖는다. 그래서 그리스에서 김지나온이나 에클레시아, 부울레가 없이 원형극장만을 갖고 있다는 것은, 오늘날 미국인이 TV 앞에 앉아서 리모트 컨트롤러에 장악된 채, 3시간 동안 한 주간의 아메리칸 풋볼 기간의 분위기를 관람하면서 이해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것을 통해 미국 문화의 정신이 얼마나 전달될 수 있겠는가? 이런 류의 활동으로 세익스피어나 토마스 제퍼슨에 관한 글을 읽기에 부족함이 없는 영어를 배울 수 있겠는가? 아메리칸 풋볼의 시청자는, 세익스피어나 제퍼슨의 글에 동화되는 도덕적이고 지적인 원동력을 발견하려는 목적으로, 안전한 공격을 하려는 편과 그것을 끊으려는 수비자들간의 격렬한 활동을 관람할 리가 있겠는가? 원형극장이 그리스-로마에 있어서 문화요 지식인 것처럼, 풋볼은 영국인이나 미국인에게 문학이요, 철학이며, 정부와 법률, 그리고 정치제도를 함축하고 있다. 또 극장이라는 것은 강력한 프로파간다의 무기다. 마치 영화가 그런 것처럼. 그러나 예루살렘 근방의 극장은 그 건물 이상의 것, 즉 그리스-로마의 철학이나 종교를 유다인에게 각인시키는 목적에 충분한 역할을 수행했던 것 같지는 않다.

 


헤로데는 대단히 영리한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의 비용으로 자신의 영토 밖의 지역에 세 개의 김지나온을 세웠으나, 영토 안에는 하나도 건축하지 않았다. 그랬더라면 매우 심각한 내란이 일어났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보다 앞선 시기에, 김지나온의 건설로 말미암아 잇따른 봉기가 발발했던 것이다('마카베오 봉기': 마카베오 1서 1,14를 보라). 헤로데는 자신의 영토 내에 극장이나 원형극장을 어디에 세울 지에 대해 매우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그 결과 이것들은 아주 소수만 건설되었고, 그것들간의 거리도 충분히 먼 곳에 입지하게 되었다.

 

또한 헤로데는 예루살렘 근방에 건설할 경우에도 예루살렘의 반감을 최소화하려고 신중에 신중을 기했다. 가이사리아같이, 이것들이 건축된 대부분의 이방도시들의 경우에조차, 그는 그리스적인 교육과 정치적 기구를 허용하지는 않았다. 게다가 가이사리아에 거류하는 유다인들에게 그리스-로마의 문화나 법률이 전혀 강제되지도 않았다. 가이사리아의 유다인들은, 북아프리카나, 소아시아, 그리스, 이탈리아의 이방 도시에 살고 있던 대부분의 유다인들과 마찬가지로, 자신들 나름의 환경을 형성하면서 살았다. 그들이 부분적으로 [헬레니즘에 ― 옮긴이 주] 동화되기는 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들은 자신들을 둘러싼 이방적 환경을 무시했고, 자기 나름의 법률만을 단호하게

 


고집하기도 했다. 이것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것의 하나로, 유다인들이 이방인들 한 가운데 살면서도 자신들 나름의 생활 방식을 지켜내기 위해 온 힘을 기울였다는 가이사리아 회당의 이야기를 들 수 있다(War 2,285-292). 그러므로 숀 프레인(Sean Freyne)의 다음과 같은 주장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다: "어떤 점에서 문화적 접속이란 반드시 보다 큰 문화의 가치나 전제를, 나아가 비슷한 수준의 문화의 삶의 차원들을 다른 문화가 받아들이는 것으로만 보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40)

 


나의 결론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헤로데는 이방인들이 대종을 이루는 몇 개의 도시를 건설했다. 그 중의 하나가 사마리아이고, 또 하나의 도시인 가이사리아는 가장 커다란 항구도시로서 건설되었는데, 이 도시는 거의 새로 만든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후자같이 새로 건축된 도시는 본래 유다 주민이 살았던 도시를 개축한 것이 아니었다. 대개의 경우 그는 자신의 영토에서 유다적 부분은 그대로 남겨두었던 것이다. 그는 수도를 세련되고 현대적인 모습으로 만들려는 생각에서 그리스-로마 사회의 한 주변적인 요소를 도입했다. 아마도 그는 극장에서 연극을 즐겼던 탓인 듯하다. 예루살렘의 가장 경건한 유다인들의 일부는 극장으로 말미암아 약간은 동요했던 것 같다. 그들은 이 극장이 함축하고 있는 이미지를 문제로 여겼던 것이다.

 

하지만 이것을 위협적인 것으로 여기지는 않았다. 그들은, 과거에 선조들이 헬레니즘에 동화된 유다인들이 예루살렘에 추진했던 김지나온의 건설에 반대하면서 봉기를 일으켰던 것처럼,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다. 빌라도가 예루살렘으로 로마의 군기를 가지고 들어오려 했을 때 유다인들이 저항했던 것과는 달리, 또 성전에 독수리상을 세우려 했을 때 유다인들이 헤로데와 그의 승계자 아르켈라우스에게 저항했던 것41)과는 달리, 헤로데의 극장 건축에 대해서는 아무런 저항도 없었다. 이 사실은 아마도 극장이 예루살렘으로 이방 풍습을 도입하려는 시도로서 인식되지 않았고, 또 연극이 이교도 예배를 장려하는 것으로 인식되지도 않았음을 의미하리라.42)

 


헤로데는 예루살렘의 주민을 그리스-로마인으로 바꾸려는 어떤 시도도 하지 않았다. 그는 본토에서 뿐 아니라 그리스-로마 세계의 어느 곳에서도 헬레니즘화의 위협으로부터 유다 율법과 관습과 독립성을 수호하려 애썼다. 그는 로마식의 법정이나 법률을 세우려 하지 않았고, 또한 그리스적인 교육 제도를 도입하려 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II

 


(1) 예수 시대의 갈릴래아:

 

헤로데가 죽고 난 뒤, 그의 아들 가운데 가장 유능한 인물인 안티파스(Antipas)가 예수의 고향 나자렛이 속한 갈릴래아를 상속받게 되었다. 예수는 안티파스가 권력을 쥐게 된 때 대략 두세 살 정도 됐던 것 같다. 안티파스는 왕이 아니라, 그보다는 하위의 칭호인 테트라크(tetrarch), 즉 '사분봉왕'(ruler of a fourth), 다시 말하면, 헤로데 왕국의 1/4을 다스리는 통치자가 되었다. 그러나 안티파스는 앞에서 열거한 네 가지 직위의 조건이나 성격에서 자신의 아버지와 마찬가지의 통치자로서의 면모를 보여 준다. 단 가벼운 실수 정도가 예외라 할 수 있다. 이에 대하여는 아래에서 설명할 것이다. 그러므로 로마제국은 그에게 가능한 한 간섭하지 않고 자율권을 부여해 주었다. 로마는 갈릴래아로 관리를 파견하지도 않았고, 로마 수비대를 갈릴래아에 주둔시키지도 않았던 것이다.

 


흔히 사람들이 상상하듯이, 로마인들이 실제로 제국 내의 모든 주요 도시들을 직접 다스리면서 치안을 유지했고, 로마적이거나 혹은 그리스적인 관료들이 공안을 위해 잘 정리된 로마적인 기록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로마인 이주민들이 로마법을 시행하였다는 식의 가정은 로마 제국사를 이해하는 데 별 도움이 되지 못할 뿐더러, 산술적인 문제를 고찰하는 데도 유용하지 못하다. 이렇게 놀라우리 만큼 사방에 퍼져 있다고 보기에는 로마인의 수가 충분치 못하다. 뿐만 아니라, 로마인들이 왜 이런 식의 과중한 통제를 실행해야 했단 말인가? 그들이 팔레스틴같은 지역으로부터 실제로 기대했던 것은 고작 충성과 변경의 안전이 전부였다. 로마인들은 [오늘날의 프랑스를 가리키는] 고울(Gaul) 지역을 로마화하고자 했으며, 상당 수준 그렇게 했다.

 

하지만 팔레스틴에 대해서는 그런 야심을 품지 않았다. 그럼에도 신약성서 학자들을 포함한 많은 연구자들은 예수 시대 로마인들의 행동을, 백년 후의 하드리안(Hadrian) 황제가 의도했던 목적에 유추해서, 즉 제국 전체에 걸쳐 주도권을 장악하고 문화적으로 그리스-로마화를 추진하려 했던 방식으로 유추하여 해석하곤 한다.43) 그러나 줄리어스 카이자르(Julius Caesar), 아우구스투스(Augustus), 티베리우스(Tiberius) 등에게 이런 하드린안 류의 야망을 귀속시키는 것은 분명 지나친 해석이다.

 


헤로데의 승계자의 하나인 안티파스도 자신의 영토에 대해 문화 전반을 바꾸려는 계획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 전체 주민에 해당하는 일에 있어서 그는 유다법을 준수했다. 그는 자신이 주조한 동전에 자기 얼굴을 새겨 넣지 않았고, 또한 아우구스투스나, 그 후에는 티베리우스의 얼굴을 넣지도 않았다.44) 또 그는 김지나온을 건설하지 않았고, 그리스식 학교를 세우지도 않았다. 한편 그는 자신의 첫번째 수도였던 세포리스(Sepphoris)에 극장을 지었을 수 있으며,45) 어쩌면 두번째 수도인 티베리아(Tiberias)에도 만들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것은 그의 아버지인 헤로데 대왕이 예루살렘 근방에 극장을 건축했다는 이유 때문은 아니었다. 하지만 예루살렘이나 세포리스는 모두 유다인이 대다수를 구성하고 있던 도시였다.

 

세포리스는 오래된 유다적 도시였고,46) 안티파스가 세포리스로 수도를 정하는 데 있어서 팔레스틴 내부나 그 인근의 어떤 이방인에게 뇌물을 바쳤다고 시사할 만한 어떤 근거도 없다. 그가 평소 자신의 아버지가 했던 것처럼 일부 이방인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기 위해 갖은 수단을 다 썼음이 분명하다 하더라도 말이다. 더욱이 티베리아 시의 경우, 로마의 새 황제를 기리는 이름으로 작명되었고 안티파스가 그 기초부터 건축한 도시이지만, 그 주민의 대부분은 유다인이었다. 하지만 그 지역의 일부분은 온통 묘지였고, 유다인들은 시신을 불결한 것으로 여겨 회피하려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에, 안티파스는 그곳으로 고위층의 유다인들을 강제 이주시켜야 했다. 그리고 자신의 계획에 따라 다른 사람들도 끌여들였다(Antiq. 18,36-38). 반면 시신의 불결성 문제는 이방인들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으며, 이방인들은 그 이전부터 그의 이주정책에 적극적이었다. 그래서 그가 자신의 새 수도에 이들을 유치하는 데 특별한 노력이 필요치는 않았다. 그럼에도 티베리아는 주후 66년에 발발한 반로마 유다봉기 당시 주로 유다인들로 구성되어 있었다.47)

 


그런데 안티파스는 한때 봉신국 통치자로서 책임 있는 모습을 보이는 데 실패한 경우가 있었다. 그가 자신의 이복형제의 딸인 헤로디아와 결혼하기로 한 것이 그것이다. 그런데 그녀는 이미 자신의 아버지의 또 다른 이복형제(즉 그녀의 이복 삼촌 ― 옮긴이 주)와 결혼한 상태에 있었다.48) 신약성서에 따르면, 세례자 요한은 안티파스의 이러한 행위에 대해 심한 비난을 퍼부었다(마르 6,18).

 

안티파스의 본처와 그녀의 아버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이름이 알려져 있지 않은] 그의 본처는 이혼당하는 것을 피하려고, 국경 너머, 자신의 아버지인 아랍 왕 아레타스(Aretas)에게로 갔다. 얼마 후, 아레타스는 갈릴래아를 침공하려고 국경 분쟁을 일으켰으며, 안티파스의 군대를 격파했다. 갈릴래아 주민들은 이것을 천벌이라 믿었다. 그것은 안티파스가 존경받는 예언자인 세례자 요한을 이 일련의 사건 와중에서 처형했기 때문이었다. 아레타스의 군대는 로마의 군단과 충돌하지는 않았다. 이것은 갈릴래아에 로마 군대가 주둔하지 않았다는 간단 명료한 논거가 된다. 안티파스는 봉신국 통치자로서, 자신의 군대를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만일 예수가 안티파스 군대 소속의 어떤 백부장의 하인을 치유했다면(마태오복음서가 말해 주고 있듯이), 그 사람은 로마 군에 소속된 백부장이 아니었던 것이다.

 


로마의 군대는 아라테스의 침공에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봉신국 통치자들은 그들의 후견인인 로마 황제 앞에 위임받은 것에 대해 책임을 져야 했지만, 동시에 로마는 이 봉신왕들을 보호해 줘야 하는, 호혜적인 관계에 있었다. 그래서 다소 늦게 도달한 정보에 접한 로마는 충실한 동맹국을 침공한 아레타스를 응징하기 위한 군대를 시리아로부터 파견코자 했다. 긴 이야기를 간단히 요약하면, 로마의 황제가 죽었고 출동명령이 보류됐다. 그 사이에 아레타스의 군대는 철수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문제의 초점은 명백하다.49) 팔레스틴에서 가장 가까운 로마군의 주력부대는 시리아에 있었는데, 여기에는 4개 군단, 즉 2만에서 2만 5천에 이르는 병력이 있었고, 아마도 이와는 별도로 기병이 5천 기가 있었다.50) 아레타스는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었다. 갈릴래아를 침공했을 때, 그는 로마군을 공격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뜻을 펼쳐보인 뒤, 바로 퇴각했다.

 


요컨대 예수시대 갈릴래아는 전체적으로 볼 때 유능하고 훌륭한 유다인 테트라크가 통치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로마의 군사력에 의존하기보다는 ― 옮긴이 주] 유다인 부대를 통해 통치했는데, 이 부대는 아마도 [그의 조부<안티파텔 ― 옮긴이 주>의 모국인] 이두매인들이 포함된 혼성부대였다. 또한 아마도 [당시의 대개의 군대가 그렇듯이] 외국인 용병들을 통해 전력을 한층 강화시켰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휘하의 군 사령관들이나 행정관들도 유다인이었다. 전체적으로 안티파스 치하의 갈릴래아, 즉 예수가 살던 당시의 갈릴래아에는 법률도 유다적이었고, 법정도 유다적이었으며, 교육도 유다적이었다. 물론 이방인의 수가 상당히 많았던 지역에서는 어디든지, 그들의 권리가 보호되었다. 이것은 그들이 유다화의 위협 아래 있지 않았다는 것을 뜻한다.51)

 


팔레스틴에서 로마화와 헤레니즘화가 어느 정도로 진척되었으며 어느 정도로 그렇지 못했는지의 여부를 명료하게 이해하는 데는 전후 독일과의 비교가 유용하다. 영국과 미국(여기서 나는 프랑스는 무시하고자 한다)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에 점령부대를 주둔시켰다. 그 이후에도 냉전이 계속되었기 때문에 독일에는 영어로 말하는 부대가 대규모로 집결해 있었다. 더욱이 독일은 미국인들의 빈번한 여행 장소이기도 했다. 그 결과 독일의 대부분의 아이들은 학교에서 수년 동안 영어를 공부하며, 많은 독일인들이 영어를 잘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독일에서의 영미의 영향은 팔레스틴에서의 그리스-로마의 영향에 비해 훨씬 더 강력했다. 하지만 [팔레스틴에서처럼 독일에서도 ― 옮긴이 주] 촌락을 위한 메시지를 가지고 있는 한 독일인 복음설교자가 나타난다면, 그는 읍락이나 촌락의 작은 교회들을 돌아다니면서 영어로 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 그의 금언에는 거의 영어가 포함되지 않았을 것이다. 어쩌다 우연히 그가 미군 기지 앞에 도달해서 헌병들의 제지를 받았다면, 필시 그는 서투른 영어로 말하고 어설프게 이해했을 것이다. 이런 경우가 아니라면 그가 영어를 사용할 기회는 거의 없었을 것이다. 예수에게도 이런 경우를 적용해도 충분하리라고 나는 확신한다. 그럼에도 일부 학자들은 예수가 그리스어로 가르쳤고, 특히 8그리스식의 금언을 말했다고 주장한다.

 


지금은 폐기된 예수의 배경에 관한 한 고전적 견해에 따르면, 바리사이들이 갈릴래아의 거의 모든 지역에 걸쳐 존재했다고 한다. 당시에 누군가가 생각했고, 누군가 지배하던 이가 존재했다면, 그런 일을 할 만한 이들은 필시 바리사이였을 것이라는 주장이다(19세기와 20세기 전반부의 학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말이다). 모든 사람들이 이들을 두려워했고, 언제나 이들의 방식대로 살아야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근거가 희박하다.52) 그 예의 하나로서, 안티파스와 바리사이의 관계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비록 안티파스도 자신의 아버지처럼 유다 율법을 일반적으로 준수하기는 했지만, 그는 한편에선 슬그머니 유다인에겐 혐오스런 행동을 했다. 티베리아에 있는 자신의 궁전을 동물들의 형상으로 꾸몄던 것이다. 주지한 대로, 안티파스는 대중과 접하는 문제에 있어선 율법에 충실했다. 요컨대 그는 궁전을 치장하는 일은 자기 개인적인 것으로 보았음이 분명하다. 여하튼 대 로마 봉기가 발발했을 때, 예루살렘 임시 해방정부는 이 궁전을 파괴하고자 했으며, 사피아스의 아들 예수(Jesus son of Sapphias)가 이끄는 일단의 어부들과 빈민들은 임시 정부의 명령 대로 이 건물이 해체되기 전에 약탈하고 불태워버렸다(Life 65-67). 이 사실은 그리스-로마의 예술과 문화가 갈릴래아의 빈민들에게 어떻게 인식되고 있었는지를 시사한다.

 


우리가 안티파스에 대해 익히 알고 있는 다른 사례들(아내를 바꿔쳤고 존경받던 예언자를 처형했던 것)에도 불구하고, 바리사이가 안티파스로 하여금 십계명 가운데 둘을 범하게 하고(우상을 새겼다는 것; 간음했다는 것) 예언자를 살해하도록 부추겼다고 주장하고픈 사람들이 있을까? 그러나 안티파스는 분명바리사이의 손아귀에 있지 않았다. 물론 이 점이 바리사이가 촌락에서의 삶을 지배했다는 널리 퍼진 가정에 대한 반론이 되지는 않는다. 이에 대하여는 나의 책 『유다교: 실행과 믿음』 Judaism: Praticeand Belef 에서 길게 논했고, 또한 나보다 앞서 제이콥 노이스너(Jacob Neusner)를 비롯한 몇몇 학자들이 어느 정도 주장한 바 있다(주 52>를 보라).

 


요컨대 예수 시대에 헤로데 안티파스는 훨씬 더 큰 영토을 다스렸던 자신의 아버지의 통치방법과 마찬가지로 갈릴래아를 다스렸다. 즉 그는 로마식의 정부와 법률을 유다인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그는 유다인들에게 자신들의 율법과 관습의 독특성을 폐기할 것을 강제하지 않았다. 이것들로 말미암아 유다인들은 이방인과 변별된 자의식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안티파스는 자신의 사분봉영지 어느 곳에서도 그리스식의 교육과 종교제도를 실시하지 않았다. 갈릴래아에는 로마군대가 주둔하지 않았고, 로마의 행정관도 파견되지 않았다.

 

 


(2) 예수시대의 유다지역


유다지역은, 그리고 특히 이 지역에서 가장 큰 도시인 예루살렘의 사정은 어떠했는가? 헤로데가 죽은 이후 이곳의 형편은 매우 달라졌다. 여기에서 우리는 예수 시대의 두 명의 다른 지배자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하나는 대사제 가야파이고, 다른 하나는 정무총감(perfect) 빌라도다. 안티파스가 갈릴래아를 다스리던 시절에 그들이 어떻게 그리고 왜 유다를 다스리게 되었는지를 이야기하기 위해 우리는 헤로데가 죽던 시기로 거슬러 올라갈 필요가 있다. 헤로데 사망 이후, 유다 지방, 사마리아 지방, 이두매 지방이 하나의 정치적 단위로 묶여서 '유다 지역'으로 불리우게 되었고, 헤로데의 또 다른 아들 아르켈라우스(Archelaus)가 이곳을 통치했다.

 

그는, 안티파스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아버지가 그 이전에 했던 방식으로 이 지역을 다스리는 것으로 통치를 시작했다. 그러나 여기서는 일이 그리 순조롭지 않았다. 아마도 아르켈라우스는 안티파스에 비해 유능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또한 이 지역은 통치하기가 상대적으로 퍽 용이하지 않은 곳이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의 유다인들은 대단히 다루기 어려운 이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아르켈라우스는 서투르게 이곳을 지배하고자 했던 듯하다. 그는 어떤 때에 주민들의 의지를 모울 수 있으며, 어떤 때에 저항이 일어나는지를 알지 못했다.53)

 

유다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이 모두 불만을 터뜨렸다.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10년 후인 주후 6년에 그를 퇴위시켰다. 황제는 이번에는 이곳을 헤로데의 다른 아들에게 맡기지 않았다. 직할 통치를 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기사계급 출신의 로마인인 코포니우스(Coponius)가 소규모의 부대와 함께 사마리아와 유다와 이두매 지방을 관장하기 위해 파견됐다. 이런 결정이 내려지자, 작은 소요가 일어났으나, 곧 진압되었다. 그리하여 로마인들이 팔레스틴의 일부분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말이다. 로마가 팔레스틴을 정복한 것은 이로부터 70년 전이었다. 하지만 이때까지는 이곳을 직접 통치하지는 않았다. 단 처음 정복했던 시절의 극히 짧은 기간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로마는 유다인들로 하여금 이 나라를 다스리도록 결정하기까지 잠시 동안 이 지역에 군사적인 통제를 가했던 것이다.

 


팔레스틴에서 로마의 이 첫 통치자들은 어떻게 행정을 조직화하였을까? 코포니우스와 그의 승계자들은 헤로데가 건설한 가장 그럴 듯한 도시였고 대다수 거류민이 이방인이던, 지중해 연안의 가이사리아에 거주했다. 그들에게 있어서 이곳은 가장 쾌적한 환경을 가진 공간이었다. 이곳에는 또한 3천 명 가량의 로마군도 주둔하고 있었는데, 이 정도의 병력은 대대적인 봉기가 발발했을 때는 제압하기에 역부족인 숫자였지만, 한 도시에 제한된 적은 규모의 반란 정도는 충분히 방어할 만했다.54) 그렇지만 우리는 여기서 2만 이상의 병력이 시리아에 주둔하고 있다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 밖에 가이사리아에는 기병대도 있었다. 또한 예루살렘의 성전(temple complex) 바로 옆에 세워진 한 요새에 수비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곳의 병력으로는 평시 치안을 유지하기에도 부족했다. 그리고 유다 지역의 요소요소마다 설치된 요새에 소규모의 주둔군이 진주해 있었다.55) 물론 이 병력으로도 평시 치안 유지를 감당할 수 없었다.

 


예루살렘은 순례의 한 중심지였고, 순례는 고대 세계의 대중적 현상이었다. 해마다 세 차례씩 메소포타미아와 북아프리카, 소아시아와 그리스, 이태리 등지의 세상 곳곳에서 유다인 무리가 예루살렘으로 몰려와서 축제를 벌인다. 이 축제는 국가적인 장터와, 경건한 예배, 짐승들의 도축, 그리고 [매우 드문 향응에 속하는 것이지만] 붉은 고기56) 식사, 및 포도주 마시기 등이 한데 어우러지는 그야말로 축제 중의 축제였다. 예루살렘에는 갑자기 인구가 열배나 증가한다(약 3만 가량에서 30만 이상으로). 그때에, 오직 그때에만 로마 정무총감(perfect)은 이 도시의 병력을 증강시킨다. 그때 그들은 아마도, 팔레스틴에서 가장 대규모의 집합소가 되는 성전 광장에 집중하여 어느 정도의 경찰기능을 행사했던 것 같다. 병사들은 광대한 성전 건물(temple complex)을 둘러치고 있는 콜로네이드 지붕을 따라 순찰을 돌았다.

 


봉기는 대규모 회중이 운집하는 곳에서 전형적으로 일어나는 것이기에, 로마는 사전예방에 만전을 기하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3천의 병력으로 30만의 군중이 들고일어서는 것을 막을 도리는 없는 일이다. 실제로 이런 상황이 벌어지면 시리아에 주둔한 부대의 출병을 요청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로마군 장교나 부대가 예루살렘에 진주하고 있지 않던, 매년 45주 가량의 기간 동안에는, 누가 도시의 치안을 유지했으며 누가 지방 정부를 이끌어 갈 책임을 지고 있었을까? 대사제와 그를 보좌하던 그밖의 귀족들이 바로 그들이다. 여기서 후자 가운데 많은 이들 역시 사제들이었다. 치안 유지의 임무는 대사제의 경비병들에 의해서 수행되었다. 예수의 성년 시절의 대사제는 요셉 가야파라는 출세가도에 있던 사람이었다. 그는 로마 통치 시대의 다른 어떤 대사제보다 훨씬 긴, 17년이라는 기간 동안 대사제로 재임하고 있었다. 왜 로마는 이 사고뭉치 지역의 통치를 지방의 사제귀족에게 위임했을까? 사실은, 로마의 첫번째 선택은 사제들이 아니었다. 로마는 헤로데같은 강력한 인물을 선호했다. 그러나 그러한 인물이 부재하게 되자, 지역의 자체 전통을 따르게 됐던 것이다. 즉 귀족들, 특히 사제 귀족들에 의한 대리 지배 방식이 선택된 것이다.

 


주전 6세기 말 혹은 5세기 초부터 헤로데가 예루살렘을 정복한 주전 37년에 이르기까지 4백 년 이상을 팔레스틴의 유다인들은 사제 귀족들의 지배 아래 있었다. 사울과, 다윗, 솔로몬, 그리고 그의 승계자들에 관한 성서의 이야기들이 너무나 잘 알려진 나머지 우리는 일반적으로 이스라엘을 군주제 사회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아마도 이런 오류가 상식처럼 인식되게 된 것은 우리 성서의 많은 비중이 군주제 시대를 묘사하는 책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일 게다. 반면 그 이후의 시대인 페르시아, 알렉산더 대제의 제국, 프톨레미의 에집트, 셀류커스의 시리아로 연이어지는, 멀리 떨어져 있고 대체로 식민지 내정에 관여하지 않는 경향이 있는 대제국들의 치하에서 사제들이 예루살렘과 유다를 다스리던 기간을 반영하는 성서들은 그다지 많지 않다. 그런데 군주제 시대 만큼이나 대사제 치하의 시대는 오래 지속되었고, 사제들의 시대는 보다 후대였다는 것을 주목하라. 1세기 팔레스틴의 유다인들은 자신들 이전에 역사적으로 단지 두 가지 유형의 정부에 관한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

 


군주체제와 사제계 귀족의 과두지배체제가 그것이다. 그런데 훨씬 많은 유다인들이 군주제보다는 귀족들의 지배를 선호했다. 그것은 많은 군주들이 독제적이었던 까닭이었을 것이다. 팔레스틴의 많은 유다인들은 가까운 과거의 두 왕족 가문들인 하스몬 왕가와 헤로데 왕가를 싫어했던 것이다. 사제귀족의 통치는 헤로데나 아르켈라우스에 비해 훨씬 협동적인(collegial) 지배의 형태를 띠었고, 대부분의 유다인들은 헤로데나 아르켈라우스에 비해 사제귀족들이 자신들 문화에 훨신 덜 간섭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결론적으로 많은 유다인들이 예루살렘과 유다 지방의 지배체계가 바뀌기를 고대했다는 것이다. 머나먼 곳에 있는 식민지 종주국인 제국은 팔레스틴 땅에서는 [소수의 군대에 의해 지탱되는] 한 사람의 고위층 로마인으로 표상될 뿐이었다.57) 이 로마인과 그의 소규모 병력은 이방인들이 다수인 가이사리아에서 살았고, 좀처럼 예루살렘으로 오지 않았다. 또한 그들은 이 나라의 유다적인 지역에 그리스-로마적인 법률과 관습을 도입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하지 않았다.

 

팔레스틴의 모든 대도시들 속에 있는 로마 관료들의 공관이나 읍락과 촌락을 순찰하는 로마 병사들의 초소들은 소매상인이나 토지보유농의 필요에 부응한 것이긴 하더라도, 이들에 대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상상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소수의 로마 병사들의 호위를 받는 한 로마 장교가 어떤 도시나 그 인근 지역의 작은 요새에 거주하고 있는 것은, 말하자면, 잠재적으로 적대적인 지역에 있는 아주 작은 전초기지에 주둔하고 있는 셈이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인디언 지역 한 가운데에 세워진 미국 기병대의 자그마한 요새의 처지와 마찬가지였다. 실질적인 지배는 지방 귀족들의 수중에 있었다. 이런 방식은 예루살렘뿐 아니라 보다 작은 공동체에도 적용되었다. 유다 지방 전역에 걸쳐 도시와 읍락과 촌락은 지역 유력층인 시민들에 의해 관장되었던 것이다.

 


이 정부는 실제로 어떻게 작동했는가? 우선적으로 귀족들은 로마의 정무총감(perfect) 혹은 총독(procurator)과 입장을 일치시켜야 했다. 귀족들은 어려운 상황이 닥칠 때를 대비해서 정무총감/총독의 후원을 필요로 했던 것이다. 또한 그들은 어떤 경우든 그를 거스를 수는 없었다. 그들은 정무총감과 백성 사이를 중개함으로써, 백성들의 행동이 정무총감에게 호의적으로 나타나게 하려 했다. 또 한편으로 그들은 대중이 로마에 대항하지 않도록 하려는 데 더욱 심혈을 기울였다. 만일 로마 병사와 유다 군중이 한데 붙어서 유혈사태라도 발생한다면, 귀족들의 통치는 실패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대체로 그들의 지배는 성공적이었다.

 


이 귀족정치(요세푸스의 용어에 따르면 '신정정치')의 정부 유형을 기술하는 최선의 방책은 사건들의 경위를 설명하는 것을 통해서일 것이다. 역사의 모든 장을 장식하는 유일한 사건을 들자면, 그것은 위기라 할 수 있다. 나는 그 중 하나에 대해 서술할 것이다.58) 주후 50년 경, 일단의 갈릴래아 순례자들이 축제에 참석하기 위해 사마리아를 통과해서 가고 있는 길이었다. 분쟁이 생겼고, 그 와중에서 순례자 한 사람이 살해당했다. 이에 군중이 갈릴래아에서 몰려와서 보복전을 펼쳤다. 그러나 "가장 명망있는"(the best known) 시민들이 로마 총독에게 찾아가서 살인자들을 징벌할 군대 파송을 호소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해 보고자 했다. 하지만 이 일련의 사태에서 체제는 효과적으로 작동되지 못했다. 그것은 총독이 신속한 행동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살해 소식이 예루살렘에 전해졌다. 그러자 수많은 사람들이 사마리아를 향해 쳐들어 갔다. '치안관'(magistrates) 혹은 '통치자'(rulers)가 그들을 제어해보려 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그렇지만, '치안관'은 포기하지 않았다. 이에 상복을 입고 재를 머리에 뒤집어쓴 사람들이 나타나서 성급하게 행동하려는 사람들을 막아섰다. 이들이 조급한 행동을 하지 말도록 설득하기 위함이었다. 만약 그랬더라면 로마의 광폭한 손길을 이 싸움터로 끌어들일 것이 자명했기 때문이었다.

 


이 호소는 효과가 있었다. 유다 군중은 흩어졌다(비록 소수의 무리는 약탈 행위를 계속했지만 말이다). "권세 있는"(the powerful) 사마리아 인들이 로마 황제 특사 앞에 이 문제에 대한 공소를 제기하기 위해 시리아로 향했고, 대사제를 포함한 "가장 명망있는" 유다인들도 마찬가지 이유로 시리아로 떠났다. 황제 특사는 가이사리아와 유다의 리다(Lydda)로 와서, 이곳에서 유죄로 인정된 일단의 사람들을 처형했다. 그리고 그는 다른 몇 사람을 클라우디우스 황제(Claudius) 앞에서 심리를 받도록 하기 위해 로마로 보냈다. 이들 중에는 "최고위층"(highest power)의 두 사람인, 사제들의 수장인 요나단(Jonathan)59)과 현직 대사제인 아나니아(Ananias)60)가, 아나니아의 아들과 그밖의 유다의 "명망있는" 인사들 및 사마리아의 "최고 지도층의"(the most distinguished) 사람들과 함께 포함되어 있었다.

 


이것은 매우 전형적인 설화다. 이 이야기들에서 사제귀족들은 종종 이름이 거명되기도 하고 때로 한 묶음으로 처리되기도 한다. 한편 유력층의 평신도들의 활동도 언급되어 있는데, 이들은 거의 익명으로 나온다. 여기서 고위사제들과 평신도 유력인사들은 백성들을 자제시키기 위해 서로 협력하고 있었고 그럼으로써 로마로부터 백성을 보호하려 했던 지배층 시민이라는 인상을 준다. 이들의 이러한 역할이 언제나 효과적이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종종은 그러했다. 이 사건의 경우에 이들의 활동은 어느 정도 성공적이었다. 이들은 로마에게 [백성들의 행동에 대해] 변명을 해야 했다. 그들이 바로 책임있는 정부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어떤 칭호와 관직을 가졌는가? '대사제'라는 칭호를 제외하고는 모두 일반적인 호칭으로 불리고 있다. 즉 "가장 명망있는", 혹은 "최고 지도층의", "가장 권세있는" 등등의 명칭으로 언급되어 있는 것이다.

 


이 귀족정치 사회에서 바리사이의 역할은 무엇일까? 필시 그들은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거나 미미한 정도의 역할만을 수행했을 것이다. 아나니아(위에서 언급한 이야기에 나오는 인물인)나 가야파(예수 시대의 인물인)같은 대사제들은 조력자를 자신과 같은 직급의 동료들이나 다른 사제귀족들, 그리고 부유한 평신도들 등에게서 찾았지만, 바리사이들에게서 구하지는 않았다. 요세푸스의 역사기술에 따르면 바리사이들은, 로마가 첫번쩨 정무총감을 파견할 때인 주후 6년과, 대 유다 봉기가 발발한 주후 66년 사이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요세푸스의 이야기에서 바리사이가 사라진 것은, 로마가 이 식민지 지배를 위한 최고위의 관료로 귀족, 특히 대사제를 위임하기로 결정한 데 기인한다.

 

바리사이가 다시 역사의 무대에 나타난 것은 로마 총독과 유다 주민 사이의 적대관계가 극에 달하게 될 무렵인 주후 66년에 이르러서다. 이 때는 유다인들이 로마를 향해 비난과 욕설을 퍼붓고 로마인들은 대량학살로 반응하고, 이런 일이 서로 반복적으로 되풀이되는 일이 벌어지면서 사태는 급전직하 악화일로에 놓이게 됐던 시기다. 이런 일이 벌어질 때마다 사제귀족들은 총독을 달래고 대중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그러나 그들은 상황이 더 이상 조정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고, 결국 바리사이의 지도급 인사들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렇지만 때는 너무 늦었다.

 

무르익을 대로 익은 꽃봉우리에서 씨앗들이 터져나오듯 봉기의 불씨가 갑작스레 치솟았다.61) 이 봉기에서 바리사이들의 역할은 두드러졌다. 바리사이파 사람인 시몬 벤 가말리엘(Simeon ben Gamaliel)은 혁명임시정부의 일원이었고, 다른 몇 사람의 바리사이들은 갈릴래아에서의 전쟁 수행 지도부의 상황을 조사하기 위한 혁명임시정부에서 파송한 조사위원으로 활약하기도 했다.62) 여하튼 이것은 대대적인 위기의 상황에 직면해서야 귀족들이 대중의 광범위한 지지를 얻고 있던 지도자들에게 협조의 손을 뻗쳤으나, 이 이전까지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III

 

로마와 팔레스틴 사이의 정부 차원에서의 관계는 직접적으로는 재정 문제에 초점을 두고 있다. 많은 신약성서 학자들은 팔레스틴의 유다 농민들이 다른 사람들에 비해 훨씬 심각한 조세 상황 아래 있었다고 상상하곤 한다. 그러나 그들은 에집트의 농민들에 비해 결코 불리한 상황이 아니었으며, 필시 시리아 지역의 농민들에 비해서도 나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현대의 학자들은 고대의 농민에 대해 논할 때 종종 도덕적인 문제의식을 갖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이러한 문제의식의 배후에는 고대 농민이나 노동자들의 빈곤을 현대 서구인들의 번영과 암묵적으로 비교하려는 의식이 깔려 있다. 그러나 우리가 고대 팔레스틴의 농민들을 그들 자신의 시야에서 보지 않으면 그 상황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고대 세계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팔레스틴에서와 꼭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본질적으로 농민들이었다. 그들은, 평균적으로 볼 때, 제1차 세계대전 이전의 미시시피 강 부근의 소작인들처럼 제법 살 만한 여건에 있었다. 어쩌면 좀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또한 '스케치 3'의 주장처럼 갈릴래아 사람들이 여가를 통해서 문화를 향유할 수 있었다고 보기에는 너무나 가난했고 너무나 과중한 노동에 시달리고 있었다. 실상 팔레스틴의 농민은 한 주에 6일간을 새벽부터 황혼녘까지 노동했고, 안식일에는 쉬었다. 그들은 정오에 상연하는 연극을 관람하기 위해 도시 근방으로 유람여행을 할 만한 돈도 시간도 갖고 있지 못했다. 물론 그들은 자신들이 생산한 상품을 팔기 위해 도시의 시장에 갈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그들은 여간해서는 하룻밤을 지내면서 문화적 이벤트에 참여할 돈을 갖지는 못했다. 더구나 훨씬 더 거대한 헬레니즘적 교역이 벌어지던 띠르(Tyre)와 시돈(Sidon) 지역으로 주말여행을 떠날 만한 여유재산이 있을 리 만무였다. 설사 그럴 만한 돈이 있다 하더라도 그들은 여행을 함으로써 안식일을 위반하려 하지 않았을 것이고, 너그러이 생각한다 하더라도 아주 극소수의 사람만이 그리하였을 것이다.

 


갈릴래아의 농민들이 어느 정도는 풍요로울 수 있었다고 보는 이유는 무엇인가? 나는 갈릴래아가 매우 비옥한 지역이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유다 고원지대에 비해 갈릴래아에는 작은 농장을 가지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갈릴래아의 소토지보유농들은 '스케치 2'에서 전제되고 있는 정도로 빈곤한 상태에 있었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63) 매 7년마다 농민들은 성서의 율법에 따라 안식년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땅을 휴한지로 삼을 수 있을 만큼의 여유가 있었던 것이다. 또한 대체로 해마다 한 차례씩 제2 십일조 용도로 예루살렘에서 재화를 지출할 수도 있었다. 더욱이 그들은 사제들뿐 아니라 레위인에게도 생계비를 조달할 수 있었고, 소량이긴 하지만 가난한 이들을 위한 여분도 남겨둘 수 있었다.

 


무토지 백성들의 수가 얼마나 됐을까? 호슬리를 포함한 여러 학자들은 무토지 상황의 원인을 로마와 유다의 조세 체계와 관련시키는 논의를 펴는데, 이때 이들은 근원적인 문제를 보지 못하고 있다. 즉 무토지 상황이라는 것은 하느님의 책임이라는 점이다. 하느님은 종종 한 가정에 한 명 이상의 아들을 준다. 하지만 [장자 이외의 ― 옮긴이 주] 나머지 자식들에게 상속할 여분의 땅까지 주지는 않는다.64) 이러한 것이 엄정하게 진행된 결과로, 각 세대마다 농부들의 어떤 자식들은 무토지의 사람이 되었다. 매우 유능한 군주인 헤로데는, 현대의 어떤 통치자들과는 달리, 이러한 결과로 빚어진 비고용 상태를 개선해 보기 위한 정책을 펼쳤다. 그는 수만명의 노동자들을 고용할 수 있는 대규모 건축계획에 착수했던 것이다. 그가 죽은 후 건 60년이 지난 뒤, 이 계획에 따른 성전이 완공되자, 일시에 18,000명에 이르는 실업이 발생했다(Antiq. 20,219). 헤로데의 손자인 아그리빠 2세(Agrippa II)는 이들 중 많은 사람을 예루살렘 시의 포장공사를 통해 재고용했다(Antiq. 20,222). 이것은 아그리빠 2세를 비롯한 여러 지도자들이 높은 실업상태가 초래할 사회적 정치적 파장을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안티파스 치하에서의 갈릴래아의 상황도 그의 아버지의 왕국에서와 기본적으로 마찬가지였다. 안티파스는 연이어 두 번이나 수도를 건설했고, 이것을 통해서 수천의 노동자들을 고용할 수 있었다(Antiq.18,26?36).65) 물론 그럼에도 구걸이나 도둑질로 연명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실업의 상태는

 


일부 학자들이 상상하는 것처럼 그렇게 절망적인 것이 아니었다. 주민들에게 부과되는 조세는 결코 과잉이 아니었다. 적어도 당시의 일반적인 상황하에서는 말이다. 오늘날 산업화된 세계에서 조세부담이 가장 적은 국민의 하나인 미국인들도 조세의 과중함에 대해 불평을 토로한다. 조세라는 것은 언제나 이처럼 실제보다 무겁게 느껴지기 마련인 것이다. 갈릴래아인들이 치뤄야할 조세부담도 자신들의 기대치보다는 높았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현대의 학자들이 로마시대의 이중과세에 대해, 전례없이 포악하기 짝이 없는 과중한 비용이 로마인들에 의해 첨가되었다고 호들갑스럽게 주장을 펴고 있는 것은, 고대 제국들과 유다의 역사에 대한 그들의 몰이해를 반영할 뿐이다.

 

페르시아 치하에 있을 때, 유다의 농민들은 성전세를 지불해야 했을 뿐 아니라, 많은 물품과 돈을 제국에게 공물로 바쳐야 했었다. 그후, 프톨레미 제국과 셀류커스 제국치하에서도 유다인들은 성전세와 공물을 바쳐야 했다. 하스몬 왕국시절에는 이방 제국에게 바쳐야 하는 공물은 없어졌지만, 성전세를 여전히 지불해야 했을 뿐 아니라 국가에도 조세를 지불해야 했다는 점에서 결국은 마찬가지였다. 물론 헤로데 치하에서도 성전과 국가를 지탱하는 부담을 져야 한다는 점에서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그리고 헤로데는 다시 로마에 조공을 바쳐야 했다. 당시 지중해 세계의 대부분의 다른 농민들의 사정도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다른 점이 있다면 농민들의 비용으로 지탱하는 유다의 정부에는, 종교기구들뿐 아니라 정부를 구성하는 두 부류의 평신도 계열이 있었다는 점이다. 오늘날에도 많은 나라의 국민들은 종교기구와 지방정부와 연방정부를 지탱해야 한다.

 


안티파스가 로마에 지불해야 하는 조공의 양은 평균적으로 계산할 때 심각할 정도로 과중했을까? 공물의 양을 조정했던 한 중요한 사례가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데, 그것은 줄리어스 카이자르(Julius Caesar; 이하에서는 우리에게 익숙한 통상 명칭으로는 '카이자르'를 '시이저'로 표기한다 ― 옮긴이 주)에 의한 것으로, 이것은 유다인에게 대단히 유리한 상황을 연출했다. 헤로데의 아버지였던 안티파터(Antipater)와 당시의 유다의 통치자였던 히르카누스 2세(Hyrcanus II)는 시이저를 지지하고 있었는데, 당시는 시이저가 자신과 함께 로마의 삼두의 하나였던 폼페이우스(Pompey)와 전쟁 중에 있던 때였다. 여기서 시이저가 승리했고, 그는 자신을 후원한 데 대한 대가로 매우 관대하게 식민지의 재정 부담금을 경감시켜 주었던 것이다.66) 그 이후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없지만, 처음에 유다인은 상대적으로 적은 양의 조공을 로마에 바쳤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IV

 

최근 예수의 배경에 대한 연구가 매우 활발해졌다. 고고학에서 괄목할 만한 발전이 있었고, 연구자들은 저마다 온갖 종류의 흥미로운 가설을 제시해댄다. 그런데 최근에 제시된 대부분의 가설들은 사실상 예수를 매우 비유다적 특성으로 그리고 있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예수는 대도시 지역(cosmopolitian world)에 살았고, 그러므로 유다적인 영향을 받은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스와 로마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들 학자들은 [전혀 엉뚱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 냈으며, [심지어] 이를 위해 예수의 시대에 적용하기 위해 2세기, 3세기, 혹은 4세기의 증거를 끌어들이기조차 한다.67) 그럼에도 이 모든 학자들은 예수가 유다적인 배경에서 살았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또한 유다교가 다양한 정도로 헬레니즘화되었다고 주장한다. 물론 이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이전 시기에는 훨씬 더 심하게 페르시아화되었다.

 

그런데 페르시아 식민지배 시대에서 마케도니아 시대를 거쳐 로마시대로 이어지는 전 기간을 거치는 동안, 히브리성서가 탄생했고, 안식일이나 다른 축제들과 같이 약속의 때를 선취적으로 경험하는 전통들이 확정되었다. 이것은 대부분의 유다인들이 자신들의 유산을 거듭거듭 재생시키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그들은 율법이나 전통을 포기하기보다는 차라리 생명을 버리려고 했으며, 이것을 보여 주는 증거는 무수히 많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논하는 많은 학자들의 견해는 예수의 배경을 기술하는 데 있어 크나큰 과오를 범하고 말았다. 그들은 몇 안되는 그리스 비문과 헤로데가 세운 헬레니즘적 건축물들을 증거로 제시하면서 유다인들 전체의 삶을 제단하고자 한다. 나아가 유다인들이 진정으로 그리스-로마 문화 전반을 받아들였다고 주장하기까지 하는 것이다. [그들이 보기에] 유다인들은 성서를 포기하고 호머(Homer)의 책을 더욱 즐겼으며, 성전의 축제에 순례하기보다는 그리스 연극을 즐겼고, 심지어 페니키아 해안의 이방 도시들로 주말여행을 다녀오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또한 이들 학자들은 유다인들이 엘리아나 이사야을 비롯한 예언자들을 스승으로 받들기보다는 견유철학자들을 존경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실상 증거들이 보여 주는 바에 따르면, 팔레스틴의 유다인들은 헬레니즘적 제도들이나 이방의 풍습의 물결에 결코 침식당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리스-로마 문화의 단지 주변적인 요소들에조차도 분노해 마지 않았다.68) 게다가, 이방 세계 한 가운데서 삶을 영위해야 했던 디아스포라의 유다인들까지도 그리스-로마의 어떤 측면들을 받아들일지에 대해 극도의 신중한 자세를 취했다. 실제로 이들은 극장에 가는 경우는 극히 예외적이었고, 이방인과 결혼하는 경우도 거의 없었으며,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그리스 철학을 공부했다.69) 하물며, 디아스포라 유다인들조차 극도의 조심스런 태도를 취했던 헬레니즘화라는 문화적 동화 현상이 팔레스틴의 유다인들에게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시사하는 근거는 전혀 없다. 오히려 많은 증거들은 이것에 반대하고 있다. 요세푸스의 모든 책들과 복음서들, 사도행전 등이 보여 주는 것처럼.

 

예수 자신은 어떠했는가? 예수와 유다의 다른 예언자들 사이의 유사성은, 성서나 성서 이후의 문서에서 수없이 많으며 생생하게 나타난다. 그 중 한 가지 만을 지적하자면, 복음서에 나타나는 예수 메시지의 핵심적 주제를 들 수 있다: 그는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가르쳤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느님이 역사를 지배하며 역사는 목표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매우 유다적인 사상에 기초하고 있다. 이것은 성서에 나오는 핵심적인 신학적 사상이며, 1세기 유다인들 사이에서 충분히 공유되고 있었다. 예수는, 자신의 청중들과 마찬가지로, 성서에 대한 이해에 깊이 뿌리박고 있다. 하느님이 역사를 지배한다는 믿음은 아주 독특한 세계관을 형성한다. 이것은 역사가 다른 곳을 향해 가고 있다거나, 현존하는 힘이 운명이라거나 하는 식의 세계관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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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논문은 E.P. Sanders, "Jesus in Historical Context", Theology Today 50/3 (1993), 429-448쪽을 번역한 것이다. 이 논문의 원본은 「성서연구기금」(The Endowment for Biblical Research), 「미국 종교학술원」(The American Academy of Religion), 「미국 고전연구 학회」(The American Society of Oriental Research), 「성서문학 협회」(The Society of Biblical Literature) 등의 단체에서 후원한 강좌의 하나인 제1회 「성서학의 전선」(Frontiers in Biblical Scholarship)에 제출되었던 것이다. 샌더스(E.P. Sanders)는 듀크 대학(Duke University)의 인문과학과 자연과학 교양학부의 종교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고, 그의 주요 저술들로는 Paul, the Law, and the Jewish People (1983) [이 책은 김진영에 의해서 『바울 율법 유대인』이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간되었다(크리스찬 다이제스트, 1995)]; Jesus and Judaism (1985) [이 책은 이정희에 의해서 『예수와 하느님나라』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간될 예정이다(한국신학연구소, 근간)]; Paul (1991); Judaism: Pratice and Belief (1992) 등이 있다 ― 옮긴이 주.

 

2) 예수의 역사적 배경을 충분히 파악하려면, 성서나 '약속의 때'에 관한 주의 깊은 연구를 필요로 한다. 나는 최근에 저술한 책에서 이 문제에 대하여 상세한 논의를 한 바 있다: E.P. Sanders, Judaism: Pratice and Belief, 63 BCE 66 CE (Philadelphia: Trinity Press, 1992).


3) Richard Horsley, Jesus and the Spiral of Violence (San Francisco: Harper & Row, 1987), 237쪽.


4) 같은 책, 232쪽.


5) Richard Horsley & John Hanson, Bandits, Prophets, and Messiahs (Minneapolis: Winston Press, 1985), 60-61쪽; 같은 저자, Spiral, 232-233쪽.


6) Horsley, Spiral, 11-13쪽.


7) 같은 책, 29-30쪽. 팔레스틴의 경제 상황에 대한 이와 비슷한 견해에 대하여는, Marcus J. Borg, Jesus: A New Vision (San Francisco: Jarper & Row, 1987) [이 책이 김기석에 의해 『예수: 새 시대의 비전』 (천안: 한국신학연구소, 근간)라는 제목으로 번역될 예정이다 ― 옮긴이 주.], 84-86쪽(이하 Vision). 이와는 그 뉘앙스가 다소 다르지만, S. Appelbaum의 견해도 기본적으로 마찬가지다. 그의 논문, "Economic in Palestine", Compendia Rerum Indaicarum ad Novum Testament I: The Jewish People in the First Century, eds. by Shmuel Safrai & Menachem Stern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76), 631-700쪽 참조. 또한 나의 책 Judaism, 157-169쪽을 보라.


8) Horsley, Spiral, 232쪽.


9) 같은 책, 188-190쪽.


10) Burton Mack, A Myth of Innocence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88), 66쪽.


11) John Dominic Crossan, The Historical Jesus: the Life of a Mediterranean Jewish Peasant (San Francisco: Harper & Row, 1991), 19쪽. 그의 이 주장은 Andrew Overman의 한 발제논문(seminar paper)의 견해를 받아들인 것이다.


12) 같은 책, 19쪽. 그는 여기서 Thomas Longstaff, "Nazareth and Sepphoris: Insights into Christian Origins", Anglican Theological Review 11 (1990), 8-15쪽을 인용한다.


13) Richard Batey, Jesus and the Forgotten City. New Light on Sepphoris and the Urban World of Jesus (Grand Rapid: Eerdman's, 1991).


14) F. Gerald Downing, Jesus and the Threat of Freedom (London: SCM Press, 1987); 같은 저자, The Christ and the Cynics (Sheffield: JSOT Press, 1988); Mack, A Myth of Innocent 참조. Downing의 주장은 예수가 견유철학자였다는 것인데 반해, Mack은 예수가 견유철학자와 '흡사'했다고 주장한다. 또한 Crossan, Peasant, 74-88쪽을 보라. 그에 따르면 예수는 "그리스-로마권의 여타 지역에 비해 유다적인, 그리고 도시적인 견유철학적 사상 대신에 시골적인 견유철학적 사상"을 확립하였다는 것이다.


15) 예컨대, Crossan, Peasant, 324쪽: 백성들의 영향상태가 악화되었던 것은 사제들이 백성들에게 무거운 조세를 부과했던 탓이었다. 그런데 사제들은 백성들의 질병을 죄의 대가라고 주장하면서, 사죄를 위한 사례를 지불받기까지 했다. 한마디로 이런 과정을 통해 '하나의 철저한 사기집단'(a perfect circle of victimization)이 탄생했다는 것이다.


16) Mack, A Myth of Innocence, 65쪽.


17) Batey, Forgotten City, 80쪽: 건설 사업에 동원된 병사들.


18) Harward Kee, "Early Christianity in the Galilee: Reassessing in the Evidence from the Gospel", in The Galilee in Late Antiquity, edited by Lee Levine (New York & Jerusalem: Jewish Theological Seminary, 1992), 15쪽: 예수시대 Sepphoris는 "로마제국의 문화적이고 행정적인 요충지"였다. 또한 Batey, Forgotten City, 56쪽도 마찬가지의 입장을 나타내고 있다.


19) Batey, Forgotten City, 56쪽. 그 증거로, 그는 Caracalla 시대의 동전을 제시한다(제1장의 주 34; Caracalla의 황제 제임기는 주후 211-216년). Kee는 Sepphoris가 이방 신전들의 본거지였다고 추정한다("Early Christianity", 15쪽).


20) 돼지와 노새에 대하여는 Batey, Forgotten City, 140쪽.


21) 예수시대 갈릴래아의 로마 정부에 대한 이같은 추정에 대하여는, 앞에서 인용된 Batey나 Kee의 책들뿐 아니라, 예를 들어 Crossan, Peasant, 19쪽; Borg, Vision, 83쪽(팔레스틴은 주전 63년에 합병되었다)?137쪽(이방 점거자들) 등을 보라. 또한 신약성서 학자가 아닌 이들 가운데도 이같은 오류가 나타난다. 가령, Alan Segal은 이스라엘 지역에 대한 로마의 점거는 주전 63년에 시작되었다고 주장한다. 그의 책, Rebecca's Children (Cambrigde, MA: Harvard, 1986), 35쪽.


22) 요세푸스에 따르면 헤로데는 승계자를 달리 표명하고 있는 두 개의 서로 다른 유언장이 있었다고 한다. 『유다전쟁사』 1,644-646 참조 ― 옮긴이 주.


23) 요세푸스, 『유다전쟁사』 1,356-357. 이하에서 나는 요세푸스의 저작들을 다음과 같이 약어로 표현할 것이다: War(『유다전쟁사』); Antiq.(『유다고대사』); Apion(『아피온 박박문』); Life(『자서전』).


24) 헤로데에게 부과된 공납의 양은 아마도 그리 과도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왜냐하면 충분히 막강한 세력을 유지하고 있던 로마의 입장에서 그는 매우 가치 있는 동맹자였고 여러 가지로 그를 후원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에컨대 War 1,280-285; Antiq. 15,342-364; War 1,399-400; Antiq. 15,366-369; Antiq. 15,100을 보라.


25) Ya'akov Meshorer, Ancient Jewish Coinage, 2 vols. (New York: Numismatics Fine Arts, 1982), vol. 2, 5-30쪽.


26) Antiq. 15,380-387.


27) Antiq. 15,390.


28) Sanders, Jewish Law from Jesus to Mishnah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90), 220-221쪽.


29) 유다의 율법에 따른 식사 규범을 말하는 것으로 레위기 11장에 기초한 것이다 ― 옮긴이 주.


30) Antiq. 16,29-58. 여기서는 이오니아 지역에서의 예가 나온다.


31) War 1,414. 이에 따르면 가이사리아에는 이미 원형경기장(hippodrome)이 존재했었던 것으로 보이며, 다른 어떤 시기에 경기장(stadium)도 건설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필시 가이사리아에는 여러 유형의 경기와 여흥양식을 위한 시설이 구비되어 있었던 것 같다. Antiq. 16,136-141; Emil Schürer, The History of the Jewish People in the Age of Jesus (이하에서는 HJP), vol. 2, rev. and ed. by Geza Vermes & Fergus Millar (Edinburgh: T. & T. Clark, 1979), 46-47을 보라. 또한 War 1,403-404를 보라. 헤로데의 건축물들에 대하여는 Antiq 16,136-139 참조.


32) Schürer, HJP, vol. 2, 45-47쪽; 참조. vol. 1, 309족; Joachim Jeremias, Jerusalem in the Time of Jesus (Philadelphia: Fortress, 1969) [『예수시대의 예루살렘 ― 신약성서시대의 사회경제사 연구』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88)], 74쪽; M. Stern, "The Reign of Herod and the Herodian Dynasty", The Jewish People in the First Century, 256쪽; Abraham Schalit, Kö.nig Herodes (Berlin: De Gruyter, 1969), 370-371?417-418쪽. 어떤 경우에는 어느 입장인지가 불분명한 경우도 있다. 한편 또 다른 학자들은 예루살렘이 여러 운동경기들과 검투를 받아들였다는 암시를 받을 수 있음을 주장하는데, 이것은 거룩한 도시 근방에서 이교도들의 예배가 드려졌다는 주장을 함축한다. 위에서 열거한 학자들 가운데 Schalit은 예루살렘에서 운동경기가 벌어졌다는 가정에서 가장 폭넓은 결론을 도출해 내는데, 그럼에도 그는 어디에서도 우상숭배 문제를 언급하지는 않는다. 반면 Batey(Forgetten City)는 헤로데가 과격한 헬라주의자라는 자신의 관점에 기초해서 그것의 사회적 의미를 추론한다. 그리하여 그는 검투사들이 모자를 쓰고,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 옮긴이 주] 단지 모자만 쓴 채 예루살렘 거리를" 활보하였다고 추정하기까지 한다(44쪽). 예루살렘은 곧 돌로 무장한 벌거벗은 검투사들로 뒤덮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33) Antiq. 15에 나오는 헬레니즘적 건축물들과 기구들은 헤로데를 비판하려는 의도에서 기술된 것이다. 한편 War 1,400에서 요세푸스는 헤로데가 건축한 이방신전들과 다른 건축물들을 가리켜 "경건한 사업"(works of piety)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아마도 그가 Damascus의 Nicolaus의 자료를 원본으로 한 것이기 때문으로 보인다.


34) 내가 아는 한, 유일한 예외는 Antiq. 1,179뿐이다. 여기서 Josephus는 예루살렘 근방의 "왕의 계곡"을 "왕의 평원"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것은 이 '평원'이, 더 이상의 정보가 없는 한, 예루살렘 근방의 계곡을 가리킨다고 볼 근거는 없다. 그렇게 보는 것은 요세푸스의 용례와 어긋난다.


35) 요세푸스는 봉기에 대해 논술하면서, 예루살렘 남부의 원형경기장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War 2,44; Antiq. 17,255). 극장이 발굴된 유적은 예루살렘 남쪽 850m 지점에 있다(Loeb Classical Liberary의 요세푸스의 판본의 Antiq. 15,268의 각주를 보라). 아마도 이 둘은 동일한 것을 가리키는 것 같다. 오래 전에 Gustaf Dalman은, 다른 학자들과 마찬가지로, 헤로데가 예루살렘에 원형경기장을 세웠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그는 이 원형경기장이 원형극장과 동일한 것이라는 주장을 편다. 그의 책, Sacred Sites and Ways (London: Society for Promoting Christian Knowledge, 1935), 277-278쪽.


36) War 1,415; Antiq. 15,268; 16,137-138.


37) Schalit, König Herodes, 417-418쪽.


38) 여기서 자료들이 침묵하고 있다는 것이 이러한 논거의 중요한 단서다. Josephus는 헤로데의 이방 건축물들에 대해서 칭송하기도 하고 비난을 가하기도 하면서 그의 건설사업에 대해 열거한다. 그런데 그의 언급 어디에도 헤로데가 자신의 영역에 gymnasia를 건축했다는 것은 발견되지 않는다. 만일 그가 이것을 건설했다면, 일부의 사람들(Damascus의 Nicolaus같은)은 그를 칭송했을 것임이 분명하며, 반면 대다수의 유다 주민들은 그에게 비난을 퍼붓는 것을 자제하지 않았을 것이다. 더욱이 Josephus는 헤로데가 '자신의 영토 밖에' gymnasia를 건축했다고 분명하게 지적하고 있다(War 1,422).


39) 봉기가 일어나던 시기에 알려진 바에 따르면, 헤로데 시대에도 도시 의회가 존속하고 있었던 것 같다.


40) Sean Freyne, Galilee, Jesus and the Gospels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88), 173쪽.


41) 이 유명한 사건에 대한 간략한 개요를 보려면, Sanders, Judaism, 38-39?402-403쪽을 보라.


42) Agrippa II와 관련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참조하라: 그는 한 경건한 비판자를 극장으로 데려오도록 명했다(이 극장은 예루살렘이 아니라 가이사리아에 있는 것임이 분명하다). 그리고는 그는 이 사람을 향해서 물었다. "여기서 수행되는 것에서 율법에 거스르는 것이 무엇인지 말하라?" 이것은 이 사람을 침묵하게 했다(Antiq. 19,333-334).


43) Schalit, König Herodes, 421쪽. 여기서 그는 이러한 계획이 헤로데 시대 "로마인들의 의도"였다고 말한다.


44) Meshorer, Ancient Jewish Coinage, vol. 2, 35-41쪽.


45) 극장 하나가 Sepphoris에서 발굴되었다. 그렇지만 이것이 건축된 시기에 대하여는 아직 불확실하다. Eric Meyers, Ehud Netzer, & Carol Meyers, "The Roman Theater at Sepphoris", Biblical Archeologist 53 (1990), 190-191쪽; 같은 저자들, Sepphoris (Winona Lake, 1992), 33쪽; Stuart Miller, "Sepphoris, the Well Remembered City", Biblical Archeologist 55 (1992), 77-78쪽을 보라. 앞서 말한 '스케치 2'의 입장을 취하는 학자들 가운데는 예수가 Sepphoris의 극장 건설에 참여했으리는 주장을 펴는 이도 있다. 예컨대 Batey, Forgotten City, 90쪽.


46) 예컨대, Antiq. 13,338을 보라. 여기에는 이 도시가 하스몬 왕국의 왕인 Alexander Jannaeus에게 충성하였다고 언급되어 있다.


47) Josephus, Life, 32-42?354.


48) 보다 자세한 이야기는 Antiq. 18,109-119를 보라.


49) Antiq. 18,115?120-125.


50) 시리아의 로마 군단의 병력 수에 대하여는 HJP, vol. 1, 42쪽; J.G.C. Anderson, "The Eastern Frontier under Augustus", The Cambridge Ancient History 10 (1934), 279-283쪽을 보라. 나는 War 3,66의 다음가 같은 언급을 근거로 기병대의 수를 추정하였다: 유다 봉기 기간 중에 보병 18개 대대와 기병 5개 ala(약 2천 5백명의 기병)가 시리아에서 왔다. 18개 대대란 시리아에 주둔한 군단 병력의 절반에 해당하는 수자다. 마찬가지로 팔레스틴으로 파병된 기병대의 수도 시리아의 총 기병 병력의 절반을 가리킬 것이라고 추정한 것이다. Josephus가 같은 쪽에서 시사하는 바처럼, 5:1이라는 보병 대 기병의 비율은 대략적으로 타당한 것으로 보인다.


51) 지리상 갈릴래아에 살던 이방인들의 대부분은 Scythopolis에 속하는 지역에 거주하였다. 이 지역은 Antipas가 통치하던 지역이 아니었다.


52) Sanders, Judaism, 388-402?458-472쪽을 보라. Morton Smith로부터 비롯되는 이런 입장을 취하는 다른 학자들의 견해에 대하여는 같은 책, 401쪽 및 535쪽의 주 45)를 보라.


53) Antiq. 17,206-218을 보라.


54) Schürer, HJP, vol., 363쪽을 보라.


55) 같은 책, 365-366쪽.


56) 붉은고기(red meat)는, 돼지고기 따위를 가리키는 흰고기(white meat)와 대조되는 표현으로, 소고기나 양고기를 가리키는 것으로, 대체로 유다인들은 후자에 대해서는 부정한 것으로 보았던 반면, 전자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태도로 받아들였다 ― 옮긴이 주.


57) Herod와 Archelaus 이후, "귀족정치가 들어서게 되었고, 대사제가 국가의 수반으로 받아들여졌다"(Antiq. 20,251). 또한 Pompey의 정복 이후의 유다 정부에 관한 Josephus의 다음과 같은 묘사를 참조하라: "백성들은 군주들의 지배에서 벗어나 귀족정치 아래서 살게 되었다"(Antiq. 14,91; War 1,170). 귀족정치라는 정부 유형은 1인에 의한, 특히 왕에 의한 전제적 지배와는 상반되는 형태다(War 2,205에 나오는 Claudius 황제에 대한 반란 이야기를 참조하라). Josephus는 한 구절에서 이런 형태의 정부를 하느님에 의한 지배인 '신정정치'라 하면서, 자신의 분명한 선호도를 명시하고 있다(Apion 2,165). 그가 이렇게 보는 것은 정부의 수반이 대사제이며 다른 귀족들의 대다수도 사제들이기 때문이다.


58) 이 사건은 War 2,232-44를 요약한 것이다.


59) Jonathan은 제1차 총독령 시절(주후 6년) 이후 절대권력을 휘두르던 사제가문 출신으로, Ananus 1세 또는 Annaus(주후 6-15년에 대사제 지냄)의 아들이며, Annaus의 후임 대사제이자 예수를 처형하는 데 일익을 담당한 Caiaphas(주후 18-36년에 대사제 지냄)의 처남이다. 그러나 그의 재위기간은 매우 짧았다(36-37년). Jonathan의 대사제 위임과 해임에 대하여는 Antiq. 18,95와 18,123을 보라. 또한 Agrippa 1세가 Jonathan의 대사제 복권을 허락했으나 사양하고 자신의 형 Matthias를 추천한 것에 대하여는 Antiq. 19,313-316 참조. 그는 로마의 유다 총독 Felix 치하에서 Felix의 사주로 "약탈자들"에 의해 살해당한다(Antiq. 20,162-164) ― 옮긴이 주.

 

60) Ananias는 예루살렘에서 바울을 심리할 때 현직 대사제로 임직하고 있었는데(사도 23,2; 주후 47-59), 그는 Annaus 가문 출신이 아니었고, 다만 Josephus에게는 그의 '부유함'이 인상적이었던 것 같다(Antiq. 20,205). 한편 그가 대사제직에서 퇴임하고 난 뒤, 유다전쟁 발발 초기에 시카리의 지도자 Menahem에 의해 처형되었다(War 2,441) ― 옮긴이 주.


61) War 2,301-422를 보라.


62) 바리사이들의 활약상을 보여주는 이 인물들에 관하여는 Josephus, Life 189-198를 보라. [갈릴래아에 파송된 바리사이 조사위원회의 배경을 이야기하자면 이렇다. 예루살렘 혁명지도부 내부의 Simeon을 필두로 하는 바리사이들을 포함한 민중파와 대사제 Ananus를 필두로 하는 귀족파 사이의 혁명의 주도권을 둘러싼 갈등상황이, 갈릴래아에서 전자와 연계를 맺고 있던 젤롯 좌파(과격파)의 지도적 인물인 Gischala의 John과 후자와 연계를 이루고 있던 타협주의 노선의 Josephus 사이의 갈등으로 재현되었다. 아마도 예루살렘의 혁명지도부 내부의 갈등에서 민중파가 주도권을 쥐게 됨으로써 혁명지도부에서 파견한 조사단의 주축이 바리사이들로 구성되게 되었던 듯하다 ― 옮긴이 주].

 

63) 갈릴래아 경제의 강고함에 대한 견실한 논술을 보려면 Douglas Edwards, "The Socio-Economic and Cultural Ehtos of the Lower Galilee in the First Century: Implications for the Nascent Jesus Movement", in Galilee, ed. by Levine (앞의 주 17>), 55-65, 특히 63쪽 참조.


64) Horsley는 [이스라엘에서] 한때는 대대손손 같은 조상의 땅에 의존하며 살고 있었던 때가 있었다는 상상을 편다(Spiral, 232쪽).


65) Edwards, "The Socio-Economic and Cultural Ehtos of the Lower Galilee in the First Century: Implications for the Nascent Jesus Movement", in Galilee, 69-70쪽에서도 같은 견해가 피력되고 있다.


66) Antiq. 14,190-210.

 

67) 이런 대표적인 예로는 Kee와 Batey의 주장을 들 수 있다(앞의 주 18>과 19>를 보라). 이들은 예수시대에 Sepphoris가 로마 식민지배의 행정적 본거지였으며, 이방신전이 들어서 있었다고 주장한다. 예컨대 [이를 위해서] Batey는 예수시대에 로마의 신전이 세워져 있었다는 증거로 제3세기에 주조된 동전을 제시한다(주 19>). 그러나 Sepphoris 시의 이름과 그곳에 세워진 정부는 주후 130년대에 일어난 제2차 봉기 이후 바뀌었다. 그리하여 이방신전이나, 로마의 병사들과 관료들이 존재했음을 보여 주는 증거는 주후 135년 이후에야 나타나고 있다. [이에 대하여는, 예를 들어, Eric Meyer, "Aspects of Roman Sepphoris in the Light of Recent Archeology", Liber Annuus: In honor of Father E. Testa <근간>을 참조하라.] 대체로 갈릴래아에서는 제2세기에서 4세기 사이에 극적인 변화가 있었다. 결국 Kee나, Batey 등을 포함한 많은 학자들이 주후 70년 이전으로 소급시켜 해석하는 상황의 전개는, 사실은, 주후 135년 이후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68) Sean Freyne의 Galilee에 수록된 논문 "Urban-Rural Relations in First-Century Galilee: Some Suggestions from the Literary Sources", 84쪽의 다음과 같은 진술을 참조하라: "유다인들은 [헬레니즘적] 환경에 적응하며 살기를 배워야 했다. 그러나 Scythopolis나 Caesarea의 예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갈릴래아에서조차 그들은 자신들 특유의 정체성을 확고히 지키고 있었다."

 


69) 물론 Philo는 그리스 철학을 공부했다. 그러나 그리스어로 말하는 유다인 디아스포라에서 쓰여진 다른 이들의 문헌들은 성서에 대해서는 해박한 지식을 보여 주는 반면, [그리스] 철학에 대해서는 천박한 수준을 보여 주고 있다. 가령 바울은, 스토아적 말씀들을 알고 있었고 실제로 즐겨 사용하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철학 교육을 제대로 받은 흔적은 거의 찾아 볼 수 없을 만치 그 순준이 형편없다(예: 고후 9,8의 autarkeia나, 필립 4,11의 autarkes). 바울의 이런 모습을 보여 주는 다른 점들에 대해서는 나의 책, Jewish Law from Jesus to the Mishnah (Philadelphia: Trinity Press, 1990), 제4장; 그리고 이에 관한 축약적인 견해를 보여 주는, 역시 나의 책인 Judaism, 211-212쪽을 보라.

 

http://www.minjungtheology.net/mook/3ho/sanders.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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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kbible.net/technote/read.cgi?board=k02theo&nnew=2&y_number=36

 


“로마서 2장에 나타난 바울의 유대교 비평”
강대훈

 

※ 제가 쓴 ‘논문’을 발표를 위해 ‘요약한’ 자료이므로, 각주/참고문헌은 생략했습니다.

 

 

1. 시작하며


바울의 유대교 비평에 대한 입장은 ‘율법 문제’와 연결된다. 바울 당대의 유대인들이 ‘율법(의 행위)’를 어떤 입장에서 ‘구원’과 연관시켰는가에 대한 입장이 저마다 다르다. ‘유대인과 율법’의 관계에 대해서 바울은 로마서 2장에서 자신의 입장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로마서 2장에 가장 핵심적으로 등장하는 단어 역시 ‘율법’(노모스)이고, 1세기의 유대교의 상황에 대해서 바울만큼 더 자세히 언급할 수 있는 사람은 없으므로(Charles Kingsley Barrett), 우리는 바울이 기록한 로마서 2장에 관심을 갖고자 한다.

 

 

2. 로마서 2장에 나타난 바울의 유대인 이해


2.1. 본문 주해


2.1.1. 하나님의 공평한 심판(2:1-11): 바울은 여기서 유대인과 이방인을 다루시는 하나님은 편벽하시지 않다는 것을 강조하는데, 이런 논증은 “오히려 유대인이 전제로 삼는 특권들에 ‘반대하여’ 논쟁하며 이방인의 구원의 합법성을 ‘위하여’ 논쟁”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최종상 교수는 2:1-4을 주석하면서 이방인의 구원의 합법성을 확립하기 위해서 심판의 공평성을 강조하는데, “논쟁을 제시할 때 바울은 공평하게 서 있기보다는 ‘이방인을 향해 기울어져’ 있다.”고 주장한다.

 

2.1.2. 율법의 소유가 안전책이 되지 못한다(2:12-16): 바울은 유대인들이 토라를 소유한 것으로 특권의식을 갖는 것에 대해서, 그렇다면 이방인들도 율법을 갖고 있다고 논증한다. 바울은 유대인에 대해서는 혹독하게 비판하지만 이방인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긍정적이다.

 

2.1.3. 유대인의 특권적 신분도 안전책이 되지 못한다(2:17-24): 2:17에서 바울은 ‘너’라고 지칭하던 대상을 ‘유대인’으로 밝힌다. 이스라엘의 특권을 자랑했던 그들의 조상들도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 갔다면, 유대인의 특권과 정반대의 행동을 하는 바울 당대 유대인들도 심판에서 예외가 될 수 없다.

 

2.1.4. 할례도 안전책이 되지 못한다(2:25-29): 유대인들은 육신적 혈통이나 조상들의 유전이나 선민적 배타주의 같은 인간적인 삶의 표준을 의지하던 자들이었다. 바울은 유대인들이 율법을 준수하지 못할 때도 그들의 특권이 유지되고 심판에서도 우월한 지위를 보장받는다고 확신하는 오해를 지적한다.

 

 

2.2. 율법의 행위


던(J. Dunn)은 ‘율법의 행위’에 대해서 하나님의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의 독특성이라는 제한된 의미로 보려고 한다. 최종상 교수는 던을 비판하면서 이스라엘의 언약적 독특성을 나타내는 것뿐만 아니라 도덕법도 포함하는 개념으로 이해한다. 김세윤 교수는 이 부분에서 최종상 교수와 비슷한 입장을 취하면서, 새관점학파는 칭의론의 범위를 선교적, 교회론적 의미만으로 축소 해석한다고 비판한다.

 

2.3. 바울의 유대교 비평의 원리와 기준


바울의 유대교 비평 기준과 원리? 2장의 유대교 비평이 갖는 본질을 보면 크게 세 가지 방향에서 해석될 수 있다. 1) 유대교는 율법을 지켜 스스로 구원을 얻어 보려고 시도했던 ‘행위의 종교’였다. 2) 유대교는 하나님의 언약적 성실성을 믿었지만, 행위를 언약 백성됨의 조건으로 삼았다. 3) 유대교는 하나님의 언약적 성실성을 피상적으로 이해하여 육신적 혈통, 육신의 할례, 율법의 소유와 같은 언약의 ‘표면적인’ 요소를 붙잡고는 이런 율법의 행위가 가리키는 참 뜻을 깨닫지 못했다. 이 세 견해 중에서 이한수 교수는 세 번째 입장을 따른다.

 


3. 로마서 2장의 ‘유대인 비평’에 대한 견해들


3.1. 전통적 입장: ‘행위 구원의 종교’ 로서의 유대교 전망에서 본 관점


<내용> 로마서 2장 등에 나타난 바울의 유대교 비평에 대해서 전통적인 입장은 “유대교는 율법을 지켜 스스로 구원을 얻어 보려고 시도했던 행위의의 종교였다.”고 본다(김세윤 교수). <난점> 1) 바울은 유대인들이 선민의식을 자랑하면서도 율법 백성답게 사는데 실패한 유대인들의 자기 모순을 공격했다. 2) 자기들도 공로로 이르지 못해 고생하는 행위-구원의 길을 이방인들에게 율법을 짊어지게 가도록 했을까? 바울이 유대교의 특권의식을 허물고 율법의 외인이었던 이방인들이 언약 백성이 된다고 선포했기 때문에 핍박을 했다.

 

3.2. ‘언약적 신율주의’(covenantal nomism) 종교로서의 유대교 전망에서 본 관점


<내용> 이 견해는 최근에 샌더스(E. P. Sanders)와 제임스 던(J. Dunn)을 중심으로 한 ‘바울신학에 대한 새관점학파’의 입장이다. 샌더스는 유대교 종교의 본질을 ‘언약적 신율주의’(covenantal nomism)라는 말로 요약하고 한다. 로마 제국의 문화에 직면해 있던 유대인들은 할례, 음식법 등과 같은 ‘사회적 표지’를 중요시하고 자랑하며, 이것을 기준으로 배타적인 종교의식을 가졌다고 본다. <난점> ‘언약적 신율주의’의 핵심이면서 동시에 난점은 “언약에 대한 집단적이고 국가주의적인 이해”에 있다. “언약은 은혜성’(gift)과 ‘요구성’(demand) 모두를 포괄하는 신학 구조이다. 하지만 이들은 전자만을 강조하는데 만일 은혜성만 일방적으로 강조하고 그 선택의 폭이 국가적이라면 “이스라엘이 국가적이며 집단적이며 혈통적으로 하나님의 백성된 신분은 어떤 조건하에서도 변개될 수 없는 확정된 사실”이 되므로, “그들이 어떠한 순종의 행위를 했는가는 그리 중요한 요소가 아닐 수 있다.” 결국 하나님의 선택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없이도 바울 당대의 유대인들에게 임했다면, 유대교와 기독교 사이에 차이점이 없어진다. 차이가 있다면, ‘기독론’에서만 나타난다(샌더스).

 

3.3. ‘행위의의 요소를 지닌 언약적 신율주의’ 전망에서 본 관점


<내용> “우리는 유대교를 순전한 행위-의의 종교로 보는 전통적 견해도, 유대교 안에 있는 모든 행위-의의 요소를 부인하는 새 관점주의자들도 옳지 않으며, 유대교는 행위-의의 요소를 지닌 언약적 신율주의였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김세윤 교수) 샌더스는 언약신학의 ‘은혜성’에만 관심을 가진 반면 ‘라토’는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 라는 은총의 신분을 소홀히 하고 율법을 온전히 지키지 않으면 언약 밖으로 떨어져나갈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가능한 한 철저하게 율법을 준수하려고 함으로써 행위-의의 종교로 변화되었다고 본다. <난점> 김세윤 교수는 두 관점을 인정하면서 전통적인 입장을 지지하고 있다.

 

3.4. ‘남은 자 그룹’의 유대교 전망에서 본 관점


<내용> 샌더스의 이러한 보편 구원론에 결정적인 제동을 엘리옷(M. A. Elliott)은 중간기 시대의 유대교 문헌을 광범위하게 검토했는데, 그 자료를 보면 제2성전 시대에 와서는 대중적인 배교 현상에 직면하여 경건주의자들의 반발이 두드러져서 남은 자 운동이 태동하였다. 이 시대의 분파 운동사상은 ‘남은 자’ 신학에 기초하는데, 이 견해를 보면, 유대교가 그렇게 획일적인 단체가 아니고 그 안에서 남은 자(the remnant) 그룹과 같은 분파 운동이 왕성하게 일어나고 있었다는 것이 드러난다. 엘리옷의 관찰은 샌더스가 주장하듯이 유대교가 그렇게 획일적인 단체가 아니고 그 안에서 담은 자(the remnant) 그룹과 같은 분파 운동이 왕성하게 일어나고 있었다는 것을 잘 밝혀주었다. <난점> 그러나 엘리옷이 분파 운동의 ‘남은 자 신학’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유대인 대중이 인식했던 배타적인 선민주의 의식을 간과한 약점이 있다.

 


4. 바울의 유대교 비평 논쟁에 대한 대안적 정리


4.1. 유대교의 오류는 무엇인가: ‘표면적 유대인’의 관점에서 비판


2:28,29에서 바울은 “행위로 의롭게 되려고 애쓰는 유대인”을 비판한다기 보다는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 언약 백성이 되었다고 확신하면서도 언약 백성다운 삶을 살지 못하는 유대인”을 비판하고 있다. 바울은 껍데기 신앙을 갖고 있으면서 진짜라고 확신하여, 언약을 배타적이고 협소하게 여긴 유대인의 ’오해‘를 비판했다.

 


4.2. 이스라엘은 국가적으로 택함을 받았는가: ‘남은 자’의 사상에서


바울 당시 이스라엘 대중은 국가적으로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백성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언약적 신율주의’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유대교 안에는 이스라엘의 배교 행위에 맞선 분파주의자들이 ‘남은 자’ 사상을 갖고 분파 운동을 했다. 그들은 율법에 대한 충성과 순종의 삶을 통해 자신들을 다른 사람들과 구분하려는 분파적 의식을 가졌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국가적으로 언약신학이 갖는 ‘은혜성’에 따라서 자동적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새관점 학파의 논리는 분명히 치우쳤다. 바울은 “이스라엘은 국가적으로 택함을 받았는가”에 대해서 대안으로 제시할 때는 ‘남은 자’ 사상을 피력했다. ‘마음’의 할례를 받은 사람들이 곧 ‘남은 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4.3. 왜 바울은 유대인에게 비판을 받았는가: 이신칭의와 이방인 선교의 관점에서


바울의 이신칭의 복음에는 ‘법정적 의미’도 있지만, ‘언약적 의미’도 나타난다. 언약적 의미에서 본다면, 이방인도 언약의 백성이 된다는 점에서는 유대인과 동등하며, 불순종으로 언약 백성이 되지 못한다는 점(심판)에서도 동등하다. 유대인들이 기독교인들을 핍박한 것은 자신들도 율법 준수를 통해 얻을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는 구원을 이방 기독교인들이 너무도 손쉽게 얻을 수 있다고 떠들었기 때문에 시기심으로 한 것이 아니다. 기독교의 이신칭의 복음과 그것에 기초한 이방 선교 사역이 유대교의 우월한 중심성에 도전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4.4. 왜 바울은 언약신학을 가진 유대인을 ‘행함’으로 비판하는가: ‘실천적 유추’의 관점에서 접근


바울의 유대교 비평에 대한 전통적 입장에서는, 유대교가 아직 얻지 못한 구원을 얻으려고 율법을 완벽하게 지켜 스스로 의롭다 함을 얻으려고 노력한 ‘강성 율법주의’(hard legalism)라고 본다. 그러나 유대교가 유일신론과 선택론을 붙들고 있는 한 강성 율법주의로 넘어가는 일은 어렵다. 다만 이미 언약 안에 들어간 상태에서 하나님 백성답게 살려고 가능하면 철저하게 율법을 지키려한 ‘온건 율법주의’(soft legalism)의 경향은 있다. 바울은 ‘표면적 유대인’들이 ‘은혜성’만 강조한 특권의식을 비판하고 있는데, 그는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신다는 입장으로 접근한다. ‘은혜성’을 오해한 부분을 ‘행함’으로 비판하는 부분은 ‘행위구원’이란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 있다. 우리는 여기서 ‘실천적 유추’(practicus syllogismus) 개념을 생각할 수 있다: “그 열매로 그 나무를 알리라.” 과연 언약 백성인지 아닌지, 남은 자인지 아닌지, 이신칭의를 깨닫는지 아닌지의 여부는 실천되는 ‘삶’을 통해서 ‘유추’되는 것이다. “신자들도 ‘행위’에 기초해서 심판을 받는다는 것은(롬 14:12; 고후 5:10) 결코 바울의 이신칭의 원리와 모순되는 유대교 신학의 잔재가 아니다. 신자들은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지만 그들을 구원하는 믿음은 선한 행실로 논증되고 표현되는 실재이다.

 


4.5. 율법의 한계는 무엇인가: ‘구원사적 한계’와 ‘이방선교’ 전망에서


던은 바울이 율법 그 자체의 한계가 아니라 율법에 대한 유대인들의 오해만 지적했다고 주장하는데, 과연 율법의 한계는 없는가? 1) 유대인이 강조한 율법은 이방 선교를 가로 막는 장벽이 되었다(엡 2:11-16). 2) 율법은 ‘구원사적 한계’를 갖는다. 이것을 ‘율법의 구조적 약점’이라고 할 수 있다. 바울은 율법으로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다고 주장한다(갈 2:1). 이 주장은 유대인들이 실제로 율법을 통해 스스로 구원을 얻어보려고 했기 때문에 말한 것이라기 보다는 다메섹 계시 사건으로 인해 생긴 새로운 인식이었다. 유대인들은 문자 언약에 불과한 율법이 죄의 세력에 이용 당할 수밖에 없었던 구원사적 한계를 깊이 간파하지 못하고 그들의 선민적 특권의식의 발판으로 율법을 의지하고 자랑하면서도 실제는 그것을 범하므로 율법 백성답게 사는데 실패하고 말았다(롬 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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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dd A. Wilson의 "The Law of Christ and the..." 비평

 


윌슨(Todd A. Wilson)은 본 article에서 갈 6.2의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avnaplhrw,sate to.n no,mon tou/ cristou/)"와 관련된 과거에서부터 지금까지의 연구사를 주요 학자들을 중심으로 정리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법"을 해석하는 데 가장 눈에 띄게 나타난 변화는 "그리스도의 법"을 "모세의 율법"을 "대체하고 있다(replace)"는 관점에서, "직접적인 지시를 하고 있다(direct reference)"는 관점으로 변화했다는 점이다. 윌슨은 이와 같은 해석상의 변화과정에 대한 연구사를 그의 논문 속에서 개괄적으로 기술(記述)한다.

 

윌슨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법"이라는 바울의 표현이 아주 낯설고 독특하다는 것에는 대부분의 학자들이 동의하고 있다. 또한 그 표현이 갈라디아서가 담고 있는 신학과 주장들과는 눈에 띄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에도 의견을 같이한다. 특별히 갈라디아서가 "그리스도"와 "율법" 사이의 두드러진 대조를 보여주고 있기에 "그리스도의 법"이라는 표현은 헤이즈(R. B. Hays)의 표현을 빌리자면, "깜짝 놀랄만한 역설(a breathtaking paradox)"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최근 들어 "그리스도의 법"이라는 표현을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완곡어법" 내지는 "어떤 또 다른 법"을 의미하는 것으로 봄으로써 바울의 율법에 대한 부정적 언급과 "그리스도의 법"을 조화시키고자 하였고, 그러한 움직임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법"이 "모세의 율법"에 대한 언급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보는 학자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윌슨은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법"을 "모세의 율법"에 대한 언급이라고 보는 일군의 학자들의 의견에 동의하면서, 그러한 해석을 가능하게끔 하는 증거를 추가적으로 제시한다.

 

윌슨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법"을 "모세의 율법"에 대한 언급이라고 보는 관점은 19세기 말 이전에는 없었고, 전반적으로 "그리스도의 법"은 "모세의 율법"을 대체하는 항목으로 처리되었다. 이러한 학계의 흐름 속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킨 사람이 바로 바울 연구에 괄목할만한 업적을 남긴 샌더스(E. P. Sanders)였다. 샌더스는 "바울, 율법, 유대인(Paul, the Law, and Jewish People)"라는 책에서 "율법에 대한 바울의 모순적인 표현처럼 보이는 것들은 각각의 다른 질문들에 대한 대답으로 주어진 다양한 답변들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답변들은 하나의 일관성 있는 맥락에서 나온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샌더스는 "그리스도의 법"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함으로써 더 이상 율법과 그리스도가 대조적으로 해석될 수만은 없음을 밝혔다: "지금 '그리스도의 법'으로 특징 지워져 있는 율법은 서로 짐을 질 때 사실상 이루어진다. 갈라디아서에 기초를 두고 생각할 때, '그리스도의 법'이 갈 5.14의 '온 율법'이나 모세의 율법과 어떻게 다른지 결정하려고 애를 써 봐야 무익하다."

 

"그리스도의 법"을 "모세의 율법"에 대한 언급으로 이해할 수 있게끔 설득력 있는 답변을 제시한 학자는 바클레이(John M. G. Barclay)였다. 바클레이는 갈라디아 교회들 안에서 바울의 윤리적 가르침에 대한 타당성에 의심이 생겨나기 시작한 정황을 상정하면서, 바울이 모세의 율법에 대한 완전한 부정은 할 수 없었다고 본다. 즉, 모세의 율법이 내포하는 도덕적 기준들을 수용하는 가운데 그것을 성령의 동행 가운데 성취할 수 있는 것으로 보고 그러한 의미에서 바울이 "그리스도의 법"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는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의 법"이라는 표현은 바울의 대적자를 향한 논쟁적 도구로 사용되었다고 본다. 즉, 바울의 대적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할례나 율법준수가 아닌 성령의 이끄심이 모세의 율법에 부합되는 데 필요한 도덕적 근거들을 제공해줄 수 있다고 갈라디아 교인들을 바울이 확신시키고 있다고 본 것이다. 결론적으로 샌더스와 바클레이가 "그리스도의 법"을 "모세의 율법"에 대한 언급으로 이해할 수 있게끔 하는 중요한 근거들을 마련하였다고 볼 수 있다.

 

윌슨은 샌더스와 바클레이의 의견을 수용하면서 "그리스도의 법"을 "모세의 율법"에 대한 언급으로 보는 견해의 주석적․신학적 배경들을 더욱 자세하게 밝힌다. 1970,80년대에 나타난 바울의 율법이해에 대한 새로운 관점들은 유대교적 율법에 대한 긍정적인 언급과 바울서선 속의 율법에 대한 긍정적인 선언에 대해 개방적인 자세를 가지게끔 해주었다. 데이비스(W. D. Davies)는 "유대교와 헬레니즘 사회의 구분", "묵시적인 것으로부터 바래새주의를 구별 짓는 것", "복음과 율법 사이의 재개방성"으로 대표되는 "이분법의 상실(the eclipse of dichotomies)"이 나타났다고 보고, "그리스도의 법"이라는 표현은 바울이 어떠한 율법에 대해 단지 반(反)하는 입장만을 취하고 있다고 보는 사람들에게 계속적으로 걸림돌이 될 것이라고 보았다.

 

한편, "그리스도의 법"과 관련된 유대적 배경을 연구하는 흐름도 있었다. 신약문서 밖에서 "그리스도의 법"과 유사한 언어적․개념적 병행구를 찾아보려는 시도가 있었던 것이다. 특별히 슈툴마허(P. Stuhlmacher)는 "그리스도의 법"에 대해 가장 철저한 전승사적 연구를 한 학자로 평가받고 있다. 슈툴마허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법"이라는 표현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확립된,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지칭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법"은 구약성서의 "시온율법(Zion Torah)" 전승과 연계성을 가지고 있고, 시나이 율법과는 한 쌍을 이루는 종말론적 기록으로 기능하는 동시에 시나이 율법의 기본적인 변형을 반영하고 있다고 슈툴마허는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슈툴마허의 주장은 바울 율법 연구의 또 다른 주요학자 레이제넨(Heikki Räisänen)에 의해 신랄하게 비판을 받게 된다. 레이제넨은 "'시온율법'이라는 것은 광범위하게 다른 정황들로부터 나온, 증거가 거의 없는 인공적인 가공물"이라고 말하면서 바울이 모세의 율법들의 조건들을 말하면서 시나이 율법의 변형을 언급한 경우는 어디에도 없다고 못 박는다. 20세기에 들어서는 유대교적 배경 내지는 정황을 "그리스도의 법"에 대한 해석적 핵심으로 상정하려는 학문적 노력들을 지금까지는 실패로 보인다. 이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에 대한 해석은 미시적인 갈라디아서 안에서의 연구로 좁혀지게 된다.

 

"그리스도의 법"에 대한 해석을 위해서 학자들은 갈라디아서, 특별히 그 표현에 인접해있는 본문들에 주목하였고, 그 결과 갈라디아서 5장 13절부터 14절을 "그리스도의 법"을 해석하는 주요한 자료로서 보게 되었다. 이는 두 곳 모두 "모세의 율법"을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욱 용이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윌슨은 논문의 마지막 부분에서 "그리스도의 법"을 갈 5.13-14와 연관 짓는 가운데 모세의 율법을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근거를 4가지로 요약하여 제시한다. 첫째로, 두 본문 간의 술어상․개념상의 병행이다. 그 안에는 "성취", "율법", "서로에게"라는 의미가 각각 나타난다. 둘째로, 갈라디아서에서 두 본문 간의 근접성이다. 바울이 갈 6.2에서 실제적으로 몇 구절 앞의 내용(5.13-14)과 똑같은 것을 언급하고 있었을 때, 모세의 율법 이외의 다른 어떤 것을 진술하려고 시도했다고 보기에는 논리적 개연성이 낮다. 셋째로,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이 보여주는 "율법(no,moj)"이라는 용어사용의 일관성이다. 갈 6.2의 no,moj는 갈라디아서에서 31번째로 등장하는 것인데, 그 이전에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이 no,moj를 모세의 율법 이외의 것으로 언급한 적이 없다. 넷째, 바울은 모세의 율법의 원래적인 언급들을 보존하지만 새로운 정황 속에서 모세의 율법이라는 구(句)를 그리스도의 법이라고 바꿔서 말하고 있다. 이것은 갈라디아서가 전적으로 그리스도를 위해 율법을 파면시키는 것 없이 율법과 그리스도 사이의 양립 가능성에 대한 적절한 관점을 제공하고자 하였다고 볼 때 논리적 타당성을 가진다.

 

윌슨은 이와 같은 논리적 근거를 바탕으로 자신도 "그리스도의 법"을 "모세의 율법"에 대한 언급으로 보는 일군의 학자들과 입장을 같이한다. 그렇지만 윌슨은 또 다른 의문점을 제시한다: "왜 '그리스도의' 율법인가?", "그리스도의 율법이 모세의 율법에 대한 것이라면, 모세의 율법을 성취하라고 말하면 되었을텐데, 왜 굳이 바울이 이런 혼란스러운 표현을 사용하였는가?" 윌슨은 이와 같은 질문에 대해 두 가지로 답변한다.


첫째로, 바울이 사랑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과 계명에 의존하여서 사랑과 그 사랑의 대표적인 예시인 그리스도 사이의 긴밀한 연관성을 보았기 때문에 바울이 "그리스도의 법"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한 마디로 이것은 모세의 율법을 그리스도와 같은 방식으로 성취하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둘째, 갈라디아 교회들의 위급한 정황과의 연관성 때문이었다. 바울은 자신의 가르침에 대해 의심을 가지는 갈라디아 교인들을 꾸짖으면서 육신에게 참으로 자유를 줄 수 있는 그리스도에 대해 갈라디아 교인들을 재교육시키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고 언급하는 것이다.


또한 바울이 "그리스도의 법"이라고 말하는 것은, 바울의 대적자들이 주장하는 것과는 달리, 바울의 복음이 모세의 율법에서 제시하는 것들을 무시하고 있다는 것이 결코 아님을 보여주는 근거로 작용하고 있다. 단지 그러한 율법의 성취가 할례나 율법준수가 아닌 그리스도와 사랑의 섬김으로 이뤄지는 것임을 바울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윌슨은 이와 같은 주장들을 근거로 "그리스도의 법"이라는 표현이 바울의 율법관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부수적이거나 2차적인 자료가 아니라 바울의 율법이해의 핵심에 더욱 가까이 다가갈 수 있게 해주는 단초가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리스도의 법"(갈6.2)을 "모세의 율법"(갈5.13-14)으로 볼 수 있는가?하는 문제에 대해 긍정적인 대답을 하는 기존의 학자들과 윌슨의 대답은 본문상으로 보았을 때, 설득력 있는 답변이라고 평가될 수 있다. 하지만 두 본문상의 일치점을 발견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왜 바울이 그러한 표현을 사용하였는지, 갈라디아 교회의 사회적 정황을 재구성 하는 가운데 설득력 있는 답변들이 제시될 필요성이 있다. 윌슨은 바울이 모세의 율법을 무시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기 위해 "그리스도의 법"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고 보지만, 이방인들로 구성되어있는 갈라디아 교회들의 정황 가운데서 왜 모세의 율법을 일방적으로 무시할 수는 없었는지, 그렇다면 이러한 바울의 조심스러운 표현과 갈2.16의 율법행위와 신앙인의의 날카로운 대조표현을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을 것인지 한층 더 설득력 있게 규명하는 작업이 계속적으로 뒤따라야 할 것으로 보인다.

 

 


http://nbible.tv/wwwb/CrazyWWWBoard.cgi?db=biblical09&mode=read&num=103&page=1&ftype=6&fval=&backdepth=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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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예수 연구

 


<제2강> 제3장: 후기 불트만 학파(Post Bultmann Schule) 8)케제만(E.K semann)(1954): 후기 불트만학파의 주도적으로 이끌어 온 케제만은 역사적 예수와 케리그마적 그리스도 사이의 연속성(Kontinuit t) 여부를 밝히는 것을 신학의 주요 과제로 삼는다. 케제만은 복음서가 초대교회 공동체의 신앙고백의 산물이라는 불트만의 견해를 일정한 한도 내에서 수용하면서도, 만약 복음서 연구가 역사적 예수 추구를 포기한다면, 신학은 가현론(Doketismus)에 빠질 위험성이 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그의 스승의 케리그마 신학을 비판하고 있다.


케제만에 따르면 초대교회 공동체는 공동체 구성원들의 신앙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하여 케리그마를 전승하였다. 그러나 초대교회는 그들에게 이미 역사로 된 케리그마를, 자신의 경험으로부터 설교라는 매체(媒體)를 통하여 해석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케리그마는 역사적 사실(bruta facta)인 나사렛 예수를 파괴하는 것같이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고, 역사적 예수의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케리그마를 참되게 해석함으로써 역사적 예수를 만날 수 있다고 케제만은 생각한다.


초대교회 공동체는 신화적 인물이나 신적 존재를 주님(Kyrios)과 일치시킨 것이 아니라, 하나의 역사적 실존 인물, 곧 나사렛 출신의 청년 예수를 주님과 동일시하였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케제만은 '역사적 예수'와 '케리그마적 그리스도' 사이의 연속성(連續性)을 주장한였다. 9)훅스(E.Fuchs)(1956): 훅스는 복음서에서 예수의 행태(Verhalten)를 먼저 설정하고, 그것을 예수말씀 연구의 틀로 사용할 것을 제안하였다. 복음서가 증언하는 역사적 예수의 행태(行態) 가운데 두드러지는 것으 하나로 그는 죄인과의 식탁교제(table fellowship)를 들고 있다. 그러한 예수의 행태는 사회에서 소외된 가난한 사람들과 죄인을 부르고, 그들을 일차적으로 하나님 나라에 초대하는 예수의 말씀과 상호연관성이 있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훅스는 바울의 서신들이 복음서보다 20여 년 먼저 쓰여진 것에 착안하여, 복음서에 앞서 바울의 저작에서 나타나고 있는 신학과 신앙을 분석하여 역사적 예수에 도달하려고 하였다. 물론 바울이 생전에 예수를 직접 만나거나 그의 설교를 들을 기회는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훅스는 바울이 증언하는 '부활의 그리스도'와 '역사적 예수' 사이에는 불연속성이 아니라 연속성이 있음을 주장한다.


특히 그는 인종, 성별, 사회적 신분과 계급을 초월하여 인간은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만'(sola fide)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회복할 수 있다는 바울의 칭의사상(稱義思想)이 가지는 '민중적 성향'에 주목한다. 당시 엄격한 율법의 행위와 자비행에 근거하여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친 유대교나, 심오한 우주적 진리를 깨닫고 그것과 하나됨을 추구함으로써 구원과 해방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친 헬라세계의 스토아 철학이 당시 엘리트 지식인 계층에게 호소력을 지니고 있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구원받기 위한 까다로운 조건, 지식, 수행, 절차를 일체 생략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pistis) 하나만으로 족하다는 바울의 칭의사상은 하루 하루 살아가기에 바쁜 헬라세계의 일반 민중에게 큰 호소력이 있었음에 틀림없다. 훅스는 이러한 바울의 칭의사상이 극빈자, 세리, 창녀, 죄인 등 팔레스틴 사회의 중심부에서 주변부로 밀려난 소외계층의 삶의 동반자(同伴者)로 살았던 역사적 예수의 가르침 및 행태와 일치한다고 보았다. 그런 면에서 훅스는 신앙의 그리스도와 역사적 예수 사이에 본질적인 동일성이 있음을 밝히려고 하였다.

 

10)본캄(G.Bornkamm)(1956): 본캄은 복음서에 등장하는 역사적 예수의 인격과 그의 사역(使役)에 관심을 기울인다.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의 인물과 그의 교훈에 대한 증언들은 모두 초대교회의 신앙고백에 근거한다. 그런데 그 신앙고백 전승들은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제자들이 주관적으로 체험한 환상(幻想)의 산물이 아니라, 역사적 예수의 인격과 사역에 대한 초대교회의 응답을 담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은 그가 행하고 가르친 모든 일 가운데서, 미래적인 하나님 나라가 우리 가운데서 현재화하고 있음을 보았다는 것이다.


왜 예수는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는가? 본캄은 예루살렘 입성에서 예수의 메시아적 자의식을 발견할 수 없다고 본다. 그러나 예수는 그곳에도 하나님 나라 도래의 메시지가 전해져야 한다는 사명감을 완수하기 위해서 갔다. 성전숙청 사건은 단순히 부정과 부패의 온상이 되고 강도의 소굴이 되어버린 예루살렘 성전 예배의식을 바로잡는다는 차원을 넘어서 도래하는 하나님 나라를 준비하는 과정으로써 단행하였다. 본캄은 복음서가 역사적 예수를 신화화(Mythologisierung)하려는 목적에서 쓰여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와 반대로 지상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 사이의 통일성(Einheit)을 유지하기 위해서 쓰여졌다고 본다.


이상에서 살펴본 후기 불트만 학파의 역사적 예수 연구는 주로 '신앙의 그리스도'와 '역사적 예수' 사이에 도대체 어떤 상관성이 있는가 하는 문제를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불교의 사상에 색신(色身)과 법신(法身)이 있다. 색신은 역사적 실존인물인 석가모니 붓다를 말하는 것이고, 법신은 화엄의 본존불(本尊佛)에 해당하는 진리자체로써의 비로자나 붓다를 말한다. 색신은 법신이 드러나는 양태인데, 그것은 응신(應身) 또는 화신(化身)이라고도 불리운다. 색신은 법신이 드러나는 양태의 하나에 불과하기 때문에 대승불교 사상의 주류는 색신이 아니라 법신에 보다 큰 비중을 둔다. 카필라성의 왕자 싣다르타는 여러 색신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 이와 관계성 속에서 우리는 기독교의 성육신(Incarnation) 사상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요한복음 1장 14절에 등장하는 "말씀이 육신이 된" 사건이 다름 아닌 역사적 예수이다. 우리말 '말씀'으로 번역된 헬라어 "로고스"(Logos)는 인간의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오히려 신성을 지닌 진리자체를 지칭하는데, 따라서 '말씀'이라는 번역은 로고스가 가지는 본래의 포괄적인 뜻을 제한시킨다. 중국성경에서 번역된 '도'(道)가 로고스가 함의(含意)하고 있는 본래적 의미에 훨씬 충실한 번역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요한복음이 말하는 역사적 예수사건은 곧 로고스가 육(sarx)이 된 성육신 사건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로고스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신앙의 대상인 케리그마의 그리스도인데, 불교적인 언어로는 법신불에 해당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적 예수는 불교적 지평에서 법신이 색신이 된 사건에 비유될 수 있을 것이다. 대승불교에서는 수 많은 붓다를 말한다. 역사적 석가모니 붓다는 그 여러 방편중에 하나인 것이다. 법신은 하나이지만, 그것이 나타나는 색신, 곧 법신의 화신이나 응신은 여러 가지 모양으로 나타난다. 물론 기독교 신학에서도 하나님(법신)이 자기를 드러내는 방편으로 특수계시와 자연계시를 말한다.


그러나 특수계시는 어디까지나 역사적 예수에 국한시켜 이해한다. 역사적 인물 석가모니는 붓다이다. 그렇다고해서 붓다가 곧 석가모니라고 말할수 있는가? 아마도 대승 사상에서는 이러한 등식이 성립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다르다. 예수는 그리스도요, 동시에 그리스도는 예수이다. 왜 그런가? 하나님은 오직 역사적 예수를 통해서만 자기자신을 계시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역사적 예수야말로 하나님이 지상에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유일무이한 사건, 곧 '에파팍스'(ef apax)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 점에서 불교와 기독교 신학은 차이가 있을 것이다. 신학이 역사적 예수 연구에 관심을 갖지 않으면 안 되는 소이(所以)가 여기에 있다. 역사적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는 서로가 분리되어 이해될 수 없다. 양자는 둘이며 동시에 하나이고, 하나이며 동시에 둘의 관계, 곧 부즉불이(不卽不二)의 관계에 있다. 그것은 서로가 서로를 해석한다. 양자 사이의 엄격한 분리를 주장하고, 케리그마의 그리스도(법신)에 매달렸던 불트만의 케리그마 신학이 관념론적이고 추상적이며 가현론(假顯論)에 빠질 수 있다고 경고한 후기 불트만 학자들의 주장은 일면 타당성이 있어 보인다.

 

 

제4장: 역사적 예수에 관한 "제 3의 물음" 이상에서 살펴본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역사적 예수에 관한 '고전적 물음'(Old Quest)이나 후기 불트만 학파의 '새로운 물음'(New Quest)은 방법론에 있어서 여러 가지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연구가 한 역사적 인물, 곧 나사렛 예수와 초대교회에 의해서 신앙고백의 대상이 되어버린 그리스도 사이의 관계성 연구에 집중되어 있다는 점에 대해서 양자는 동일선상에 놓여있다. 불트만이 양자 사이의 불연속성(Unkontinut t)석과 차이성(Differenz)을 강조했다면, 그의 제자들은 연속성(Kontinuit t)과 동일성(Einheit)을 강조했다고 볼수 있다. 그러나 양자는 역사적 예수 연구를 그 시대적 상황이나 다른 종교적 단체들과의 상호연관성 가운데서 해석하는데는 일정한 한계를 지닌다.


1970년대부터 '예수 르네상스' 운동으로 진행되는 역사적 예수에 관한 '제 3의 물음'(Third Quest)은 이 한계를 극복하려는 하나의 시도이다. 예수 르네상스 운동은 학문적 연구의 거시적 틀에서 보면, 후기 불트만 학파의 역사적 예수에 관한 '새로운 물음'과 맥(脈)을 같이 하고 있지만, 새로운 물음이 주로 양식비평이나 편집비평에 의존하여 역사적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 사이의 연속성 탐구에 몰두하고 있다면, 제 3의 물음에서는 역사적 예수의 인격에 관심을 기울이기보다는 예수운동을 '공시적 지평'(Synchronische Horizont)에서 해석하는데 관심을 기울인다. 그들은 예수시대의 헬레니즘 문화 또는 유대교 문화와의 '간학문적 대화'(interdisciplinary Dialogue)를 통하여 사회문화적 연관성 속에서 역사적 예수를 조명하는 것이 특징이다.


1983년 미국성서학회 소속의 로버트 펑크(R.Funk)를 중심으로 <예수 세미나>가 결성되었고, 이들은 예수의 인격적 측면이 아니라 예수운동이 주변 문화, 종교, 사회정치집단의 도전(challenge)에 어떻게 응전(response)하고 있는가를 지식사회학 또는 인접학문의 도움을 받아 밝혀내려고 노력한다. 예수 세미나에 속한 학자들은 무엇보다도 신학의 '사회적 책임성'(social responsibility)을 강조하는 것이 특징이다. 본문비평, 양식비평, 편집비평 등이 주로 성서 텍스트 내부 문제에 국한하여 역사적 예수를 탐구하면서 신학의 문제를 인간 실존의 개인문제로 축소시켜버리고, - 우리는 불트만 신학에서 바로 이러한 한계점을 찾아볼 수 있다 - 오늘의 현실문제와 동떨어진 신학을 해 왔다면, 예수 세미나는 이에 대한 일종의 자기성찰(自己省察)이라고 볼 수 있다.


신학은 현실의 문제에 어떤 형식으로든지 책임을 통감하고 그에 대하여 답변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예수 세미나의 입장인데, 지금까지 기독교가 예수를 신학화(Theologisierung) 또는 신앙의 대상화(Kerygmatisierung)하는 과정에서 역사성과 구체성을 상실하고, 예수는 본래의 모습과 거리가 먼 지배 이데올로기를 확대 재생산하는 모체로 변질되었다는 것이그들의 주장이다.


그런 면에서 드라이버(T.Driver)는 기독교 신학이 전통적인 그리스도론을 해체시켜야 참된 예수의 윤리가 가능함을 역설하기도 하였다. 이와같은 신학의 현실비판과 신앙의 사회적 책임에 관한 관심으로부터 그들은 신학화, 교리화되기 이전 예수의 본래적인 모습을 1세기 팔레스틴 사회문화적 관계성 속에서 새롭게 살펴보고, 그 빛에서 현재 우리의 신앙의 상태를 바르게 재구성하려고 한다. 이러한 시도는 일찍이 타이쎈(G.Thei en)에서 볼수 있다, 그는 초대그리스도교에서 예수 말씀을 전승했던 카리스마를 지닌 떠돌이 예언자(Wandercharismatiker)들의 선교적 상황을 사회학적 방법론을 동원하여 연구하였다. 그는 한 인격 예수 대신에 예수운동(집단)을 신학의 대상으로 삼았고, 다른 한편으로 예수운동을 '독립변수'가 아니라 주변세계와의 '관계변수'로서 파악하려고 하였다.


이를 위해서 그는 예수운동에 영향을 끼친 4가지 요인을 제시하였는데, '사회경제적 요인'(sozio- konomishche Faktor), '사회정치적 요인'(sozio-politische Faktor), '사회문화적 요인'(sozio-kulturelle Faktor), '사회생태적 요인'(sozio- kologische Faktor)이 그것이다. 이러한 4가지 사회적 요인들과의 상호연관성 속에서 타이쎈은 초창기 교회의 역사적 예수운동의 모태(母胎)를 추적한다. 타이쎈의 영향을 받고 있는 최근 <예수 세미나>의 역사적 예수 연구는 크게 두 흐름으로 나누어지는데, 한편으로 유대교 문화전통과의 연관성 속에서 역사적 예수를 재구성하려는 시도가 그 하나이고, 헬레니즘 문화전통 속에서 예수운동을 해석하려는 시도가 다른 하나이다.


헬레니즘 문화전통에서 예수운동을 새롭게 해석하려는 시도는 버튼 맥(B.Mack)(1988)에서 발견되는데, 그는 예수의 활동무대인 갈릴래아가 당시 철저하게 헬라화된 지역이었다는 점에 착안하여 예수운동을 헬라세계에서 유행했던 견유학파 철학운동의 지평에서 해석한다. 그래서 그는 예수의 떠돌이 선교행태에서 헬레니즘 세계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견유학파 지혜교사의 모습을 발견한다. 비록 예수가 유대교적 배경에서 성장했지만, 그의 가르침이나 행동에는 비(非)유대적 성향이 짙고, 후기유대교 사상의 핵심을 이루고 유대 민중 사이에 널리 퍼져있는 종말론적 요소들도 거의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견유학파의 사상과 삶을 본받은 예수는 유대사회의 전통적인 가치관을 뒤흔들어놓는 전복적(subversive)인 지혜교사라는 것이다. 마커스 보그(M.J.Borg)(1987)는 역사적 예수를 이해할 수 있는 물적 토대로써 문화, 영, 지혜를 제시한다. 그는 지혜를 대안적 지혜(Alternative Wisdom)와 인습적 지혜(Conventional Wisdom)로 구분한다. 인습적 지혜가 사회문화 전반과 연관되어 있다면, 대안적 지혜는 하나님의 영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예수는 팔레스틴 사회의 인습적 지혜를 타파하고 대안적 지혜를 세우기 위하여 하나님 나라 운동을 전개한 지혜교사. 예언자요 카리스마적 지도자이다.


보그는 예수의 죽음에 대해서도 '누가 예수를 죽였는가'가 아니라 '무엇이 예수를 죽게 만들었는가'에 관심한다. 인습적 지혜에 의하여 대안적 지혜, 곧 하나님의 지혜가 억압당하고 말살된 사건이 곧 십자가 사건이라는 것이다. 타이쎈과 같이 보그는 예수가 새로운 종교의 창시자가 아니라 부패한 유대교를 바로잡기 위한 유대교 내의 갱신운동의 선구자라고 본다. 예수는 유대 공동체와는 달리 하나님의 거룩성이 아니라 자비성에 근거하여 사랑과 평화를 내용으로 하고 소외된 민중과 연대하는 대안공동체 건설을 꿈꾸었다는 것이다.


예수가 사회에서 소외당한 사람들과 밥상공동체(table fellowship) 결성한 것은 유대사회의 정결법에 근거한 인습적인 계층구조를 타파하려는 자비의 정치학을 보여주고 있다. 크로싼(J.D.Crossan)(1992) 역시 역사적 예수의 원초적 모습을 헬레니즘 문화전통의 지평에서 찾는다. 예수의 삶의 스타일은 떠돌이 삶을 살면서 대중에게 지혜(Sophia)를 설교하던 유대적 견유학파의 지혜스승과 같다. 예수와 지혜스승은 가르침과 행동에 있어서 동일할뿐 아니라, 삶의 스타일에 있어서 동일하다.


다른 것이 있다면 견유학파의 지혜스승이 도시인이라면, 예수는 시골사람이라는 것과, 견유학파가 개인주의적 입장을 위하고 있다면, 예수는 공동체 운동을 조직했다는 점이다. 견유학파는 배낭과 지팡이를 허용하고 있다면, 예수는 제자들에게 그것들 조차도 불허한다는 점에서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쿠로싼은 그런 의미에서 예수를 농부출신의 유대교적 견유학파의 전형으로 보고 있다. 예수의 프로그램은 사회의 두 계층, 곧 부자와 가난한 자가 아니라, 상대적 가난에 처한 사람들과 절대적 가난에 처한 극빈자들을 상호교류케함으로써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려고 했다. 크로싼은 특히 예수 담론이 지니는 대안적 성향에 주목하면서,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를 밥상공동체와 병자치유로 요약한다.


먹는 일과 치료하는 일은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에서 하나로 통전된다. 민중(세리, 죄인, 실업자)과의 밥상 공동체와 무상(無償)의 치료를 두 축으로 한 하나님 나라 공동체 결성을 꿈꾸던 예수의 비젼은 당시 성전숙청 사건을 계기로 유대 기득권층과 충돌을 일으킨다. 성전숙청이라는 상징적 행위는 예수의 하나님 나라 실천을 더욱 강화시켰다. 크로싼에 따르면 예수는 단순히 깨끗게 한다(cleansing)는 차원에서 성전숙청을 감행하지 않았다. 그의 행동은 기독교 대 유대교의 대립도 아니었다.


로마 식민지 지배의 센터에 해당하는 성전에 대한 숙청 감행은 로마의 식민지 지배에 항거하는 상징적 행위라는 것이다. 이를 계기로 예수는 빌라도 총독 본디오 빌라도 치하에서 로마의 정치범으로 십자가에 처형되었다.(역사) 그런데 예수의 따르던 신앙의 무리들은 그의 십자가 처형 속에서 의미를 발견하였다. 예수는 우리를 위해서 죽었다는 것이다.(신앙) 이러한 신앙 하에서 초대교회는 예수의 죽음이 인간의 죄를 대속하는 속죄적 기능을 가지고 있다.


초대교회는 하나님은 인간과 화해를 위하여 아들의 피를 요구하신다는 희생교리를 발전시켰다.(신학) 예수운동을 이와 유사한 사회정치적 지평에서 연구하고 있는 대표적인 학자로는 일본의 아라이 사사구(荒井獻)<イエスと その 時代>, 다가와 겐조(田川建三)<原始 キリスト敎の 一斷面>, 미국의 펑크(R.Funk), 크로싼(J.D.Crossan), 스코트(B.B.Scott)를 들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샌더스(E.P.Sanders)(1988)는 역사적 예수운동을 유대의 문화전통 맥락에서 해석한다. 그는 타이쎈과 같이 예수운동을 유대교 내의 갱신운동의 하나로 평가한다. 샌더스는 성전숙청 사건과 같은 복음서에 수록된 비교적 역사적 개연성이 높은 전승들에 근거하여 예수의 행태를 유대 문화전통과의 연관성 속에서 재구성한다. 역사적 예수는 유대교 신학의 재건을 꿈꾼 사람(Jewish Restoration Theology)이라는 것이다.


예수는 유대민중이 꿈꾸던 메시아적 자의식을 가지고 행동하였을 뿐만 아니라, 성전숙청 사건이야말로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한 예수의 상징적 행위였다는 것이다. 복음서에서 찾아낸 역사적 예수 사건의 흔들릴 수 없는 근거로써 샌더스는 몇 가지를 제시한다: 예수는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았고, 갈릴래아를 무대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귀신을 내 쫓으며 병자를 고쳤으며, 하나님 나라 선교를 시작하기 앞서 제자들을 부르고 그 중에서도 특히 열둘을 택하여 하나님 나라 동역자(Partner)로 삼았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교는 주로 이스라엘 민중으로 국한되었고, 성전을 숙청하였으며, 유대 지도층과 로마 권력에 의해서 체포되어 사형판결을 받고 예루살렘 변두리에서 정치범의 하나로 십자가에 처형되었다.


예수가 죽은 후 그의 제자들은 좌절하지 않고 스승의 운동을 계속 이어갔고, 이러한 예수운동은 유대의 회당종교의 지도자들로부터 박해를 당하였으며, 이런 박해는 바울이 선교활동을 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샌더스는 특히 예수를 죽음에로 몰고 간 원인이 되는 성전숙청 사건을 역사적 예수 연구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성전숙청 사건이야말로 예수의 공생애 그리고 역사적 배경 연구를 위한 출발점을 제시하며, 예수와 하나님 나라의 관계성을 풀 수 있는 열쇠가 된다는 것이다. 샌더스와 유사한 입장에서 예수를 유대교 문화권에서 해석한 예로는 클라우스너(J.Klausner), 하아비(A.E.Harvey), 버메스(G.Vermes)를 들 수 있고, 비록 예수를 보는 시각은 다르지만 홀슬리(R.Horsley)도 이 계열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이상에서 우리는 계몽주의 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역사적 예수의 연구사를 제한된 인물들을 중심으로 간략하게마나 살펴보았다. 역사적 예수를 주변환경과의 연관성 속에서 해석하려는 1세계 신학자들의 이러한 시도들은 흑인신학, 여성신학을 비롯하여 제3세계에서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는 해방신학의 역사적 예수연구와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한국의 민중신학도 케리그마가 아니라 역사적 예수를 신학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특히 안병무는 역사적 예수를 개체 인격으로 보는 것에서 탈피하여 그의 '사람의 아들'호칭에 근거하여 그와 함께 동고동락하였던 주변부 민중(ochlos)과의 관계성 속에서 "집단적인 해석"(corporative interpretation)을 시도한다. 예수는 출신상으로 볼 때 민중이며, 예수가 사용한 언어 역시 민중언어이다.


그는 하나님 나라를 설명할 때 남녀노소, 지식이 많은 사람이나 짧은 사람을 막론하고 누구든지 알아들을 수 있는 비유 이야기(Erz hlung)를 즐겨 사용하였다. 예수가 벌인 하나님 나라 운동의 현장은 도시가 아니라 주로 농촌이다. 예수가 있는 곳에 민중이 있고, 민중이 있는 곳에 예수가 있다. 예수의 수난과 처형은 집단적 표상이다. 복음서 기자는 예수의 수난과 처형에서 바로 민중의 운명을 보고 있다. 민중의 운명에서 예수의 수난이 현재화되고 있음을 본다. 민중신학은 지금까지 신학에서 주목하지 못했던 민중을 신학의 대상으로 부각시키고, 역사적 예수를 식민지 민중과의 연관성 속에서 이해하며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을 종말론적인 민중해방의 전통에서 재해석하고 있다. 민중신학은 '민중사건'을 해석학적 고리로 삼아 성서의 민중(Text)과 오늘의 민중(Kontext)이 만나도록 주선한다.


곧 민중신학은 성서의 민중에서 오늘의 민중을 보고, 역(逆)으로 오늘의 민중에서 성서의 민중을 본다. 텍스트(Text)와 콘텍스트(Kontext), 예수 사건과 오늘의 민중사건은 '고난'과 '해방'을 두 축(軸)으로 삼아 지평융합(Horizontverschmolzung)을 이룬다. 우리는 현존(現存)의 그리스도를 만나는 장소는 어디인가? 성례전인가?(가톨릭) 설교(케리그마)인가?(개신교), 민중신학은 민중의 고난과 해장 사건 속에서 현존의 그리스도를 해후한다. 역사적 예수에 대한 오래된 물음과 새로운 물음이 주로 복음서 텍스트에 충실한 해석을 시도했다면, 제 3의 물음과 민중해방 신학은 콘텍스트에 충실한 해석을 시도했다고 볼수 있다. 역사적 예수 연구는 이 두 가지 방향을 상호 배타적이 아니라, 상호 보완적인 관계에서 수용되어야 할 것이다.

 

http://doingtheology.co.kr/jboard/?p=detail&code=otherpaper&id=108&page=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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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로, 예수와 더불어 신학 하기

 

차정식(한일장신대 신학과 교수)

 

신학의 진화, 그 뒤안길

 

일단 써놓긴 써놓았지만 어쩐지 '진화'라는 말을 쓰기가 쉽지 는 않다. 그것은 그 말에 대한 나의 부정적 선입견 때문이다. '진화' 하면 으레 떠오르는 것이 찰스 다윈의 진화론이다. 그 이론에 대한 피상적인 이해는 인간의 조상이 원숭이라는 식의 궁색한 편견을 증폭시켜 하나님한테 공연히 불경을 자초하는 게 아닐까 하는 분위기의 강박과 그에 따른 심리적 억압의 메커니즘을 작동시키기 십상이다. 그런데 그런 강박과 억압이 그 어휘에 대한 금기의 두려움을 높이는 반면 동시에 그 금기에 대한 파탈(擺脫)의 호기심과 해방의 욕구도 증대시킨다. 애써 '진화'라는 말에 대한 편견을 벗어나 곰곰이 이 말의 의미를 뜯어보면 우스꽝스럽게도 이 세상사에 진화 아닌 것이 없다. 모든 것이 시간의 흐름과 공간의 이동과 함께 앞으로 전진하려는 욕구와 충동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고, 그 과정에서 모든 생명체들이 성장과 발전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또한 그렇다.

 

그러고 보면 신학도 인간이 하는 것인지라 그 유구한 역사 속에 진화의 흐름이 없을 리 만무하다. 태어나 성장하다가 그 정점을 지나면서 노쇠하여 죽는다는 점에서 모든 생명체의 진로가 대동소이하거니와, 인간이 만들어 낸 신학이란 것도 그러한 진화적 경로를 밟으며 발전해 가게 마련인 것이다. 개인은 죽어 이 땅에서 소멸하지만 그 세대적 유산이 후속 세대로 이어져가듯이, 신학을 포함한 제반 학문도 꼬리에 꼬리를 물고 시대의 요청에 부응하여 진화하며 유전된다. 그 면면한 역사적 과정에서 우리는 이따금 묻는다. 과연 이 신학이란 것이 어디로부터 생겨나 어떻게 여기까지 흘러왔는지, 그 와중에 신학의 물줄기를 크게 부풀린 역사적 동인은 무엇이었으며 또 그 의의는 무엇인지. 한편 궁금하다. 그간 신학의 역사적 진화 과정이 긍정적인지 부정적인지. 혹 그 평가가 양가적이라면 그 이유와 근거는 무엇인지. 또 내심 절박해진다. 어떻게 이 시대 우리의 신학이 그 부정성을 뒤집어 긍정성으로 변환시키며, 나아가 그 기준은 무엇이고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 얼른 판단하고 단호히 행동해야 하기에.

 

그런데 이러한 질문들은 우리가 거듭 비슷하게 던지는데도 그 해답은 매번 달라지는 듯하다. 그것은 신학의 역사가 신의 역사와 신에 대한 물음의 역사만큼 장구하며 묘연하기 때문이다. 나에게 신학은 일단 예수를 정점으로 하는 일체의 기독교 신학을 말하지만, 기실 이 세상에는 기독교 신학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기독교 신학이란 것도 기독교라는 제도적 종교에의 신앙적 연관성과 별도로 존재한다고 보기 어렵다. 그렇다면 신에 대한 신앙적 실천과 관련하여 신학이란 무엇인가. 두루뭉수리로 말해, 신앙이 신에 대한 신뢰와 의존에 따른 고백의 행위를 통해 자신의 일상적 삶을 반성하는 공간이라면, 신학은 신에 대한 총체적이고 체계적인 이해의 맥락에 비추어 각자의 신앙적 실천을 한 꺼풀 더 뒤집어 살피는 메타 반성의 세계라 할 수 있다. 이미 제출된 그 다채로운 반성의 기준에도 불구하고 그나마 우리에게 공통된 것은 '예수의 신학'이다. 예수의 신학은, 효율적으로 탐구하고 지혜롭게 활용할 때 예수 이전과 이후의 신학을 두루 비판적으로 점검하면서 현재 우리의 신앙 생활에 나타나는 패턴을 성찰하고 개선하는 일석이조의 잣대로 기여할 수 있다.

 

미국 유학 시절 읽은 어느 신학 관련 잡지의 한 에세이는 현대 신학의 흐름을 진단하는 차원에서 매우 흥미로운 지적을 하고 있었다. 지금 자세히 기억나진 않지만, 오늘날 주류 신학교를 주름잡고 있는 것은 '예수의 신학'이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적 신학'이며, 당연히, 대다수 신학자들은 예수 신학자가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적 신학자라는 게 그 대강의 내용이었던 것 같다. 어디 아리스토텔레스적 신학뿐이겠는가. 그의 스승 플라톤은 기독교 신학에 중대한 영향을 끼치지 않았던가. 또 그들의 자양분을 흡수하여 한 시대의 신학을 집대성한 어거스틴과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은 후대에 얼마나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여 왔던가. 그 뒤로 종교개혁 시대를 풍미한 루터와 칼빈(주의) 신학, 웨슬리의 경건 신학, 슐라이어마허의 자유주의 신학, 칼 바르트의 신정통주의 신학, 불트만의 실존주의 신학 등등 예수 이후 신학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역사의 요청에 따라 참으로 다채로운 가지를 쳐 왔다. 또 우리 나라의 역사에서는 선교사와 맞물려 신학적 주류를 이루어온 근본주의 신학, 복음주의 신학이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으며, 그 교리적 폐쇄성과 식민성을 극복하기 위한 신학적 대안으로 토착화 신학, 민중 신학 등이 제출된 바 있다.

 

그런데 이처럼 다양하고 화려한 신학의 역사를 뒤돌아볼 때, 그것이 예수라는 한 인물의 삶과 죽음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그의 가르침과 행적에 사상적 물꼬를 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신학에 대한 천착은 상대적으로 미미하거나 피상적인 편이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 있겠지만 무엇보다 예수를 신학의 대상으로 해석하는 데 급급한 나머지 예수에 의한, 예수의 신학을 등한히 여기는 때문이다.1) 이에 대한 문제 의식을 기반으로 복음서의 일부 구절을 재해석하여 예수의 신학을 조형해보고자 필자는 최근 다음의 졸저를 낸 바 있다:차정식,《묵시의 하늘과 지혜의 땅:예수신학 비평》대한기독교서회, 2001. 더구나 예수에 대한 걸출한 해석자였던 사도 바울을 위시하여 예수의 사후 그에 대한 해석은 주로 그의 죽음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던 터라 예수의 살아생전 그가 보여준 신학적 입장을 풍족히 재구성한다는 것은 이미 신약성서 자체 내에서 태생적인 한계를 노출한 것이었다.

 

장구한 세월을 복잡하게 걸어 온 신학적 진화의 이력에 비추어서 현재 잃어버린 길을 되찾는 것이 가능하고 또 정당한 것일까. 뒤엉킨 실타래를 풀기 위해 일단 그 실마리를 찾아내는 작업이 필요할진대 예수의 신학이 그 실마리를 제공해줄 수 있으리라고 일단 수긍해 본다. 그 예수의 신학 또한 다양한 버전이 있을 텐데, 일단 그 가운데 역사적 진정성을 띠는 예수의 전승을 어디서 어떻게 추출해 낼 수 있을까. 이러한 사연으로 예수의 신학에 대한 탐색은 불가피하게 역사적 예수의 물음과 맞물려 있다.

 

 

신학적 예수, 역사적 예수

 

신약성서에서 예수에 대한 신학화 작업이 문서로 남은 최초의 예는 복음서가 아니라 바울 서신이다. 그 가운데 예수와 관련하여 가장 집중적으로 조명된 부분은 그가 이 땅에 온 목적과 그의 죽음에 내장된 의미였다. 이에 관하여 바울이 전승 받은 신학적 메시지 (일명 케리그마)로 대표적인 것은 다음 구절이다.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고전 15:3). 이 초창기 교회의 전승에 따르면 예수는 성경에 약속된 메시아(=그리스도)로 그의 죽음은 성경의 예언에 따른 대속적인 죽음이었고, 또한 부활함으로써 성경의 예언을 실현하였다는 것이다. 인간의 아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된 것은 바로 죽음 가운데 부활한 그 극적인 사건을 통해서이다(롬 1:4). 그리스도와 주로 고백된 예수는 이제 토라(Torah)를 대신하여 모든 인간들의 구원론적 공간으로 제시되고(갈 3:28-29), 그로부터 모든 우상을 버리고 회개하여 새 시대에 그를 통해 계시된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한다는 선교 메시지가 생성된다(살전 1:9). 여기에 예수의 재림과 종말론적 심판의 교리가 더해지면서 예수에 대한 신학화 작업은 한층 더 포괄적으로 진척되기에 이른다.

 

예수에 대한 이러한 신학적 이해는 복음서에도 투영되어 예수의 지상적 삶을 규정하고 특징짓는 잣대로 작용한다. 그리하여 예수의 가르침과 행적은 그 자체로 예수의 신적인 정체성을 드러내고 그의 구원을 선포하는 신학적 방편으로 취급되었던 것이다. 이를테면, 마가복음의 모든 서사적 줄거리는 예수의 수난과 죽음을 향한 예비적 암시로 해석되고,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담긴 일련의 가르침은 장차 '교회의 선교'(missio ecclesio)를 예비하는 '그리스도의 선교'(missio Christi)란 관점에서 조명된다. 그런가 하면 요한복음은 예수의 정체를 천지 창조 이전의 시점으로 소급시켜 이 세상의 구세주이자 성육한 '말씀'으로서의 예수 상을 조형한다. 요한복음에서 특히 강조되는 것은 예수의 삶과 죽음이 하나님의 '사랑'(agape)을 구현한 결과였다는 시각이다.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신학이 기실 초기 교회 공동체의 신학적 프리즘을 통과한 2차적 해석의 결과라는 점에 눈뜰 때 예수의 역사적 실체는 묘연해진다. 복음서의 예수 신학이 예수에 의한 예수의 신학이라기보다는 마가, 마태, 누가, 요한에 의해 구축된 예수에 대한 신학으로 자리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신학화한 예수의 전승층을 뚫고 어떻게 역사적으로 진정한 예수의 초상을 재구성하느냐 하는 문제로 서구의 신약성서학은 200년 넘도록 복잡한 논의의 가지를 쳐왔다. '역사적 예수'(the historical Jesus) 탐구로 명명되는 이 학계의 논의는 그간 백인백색의 다양한 이론과 방법의 실험을 거친 뒤 여전히 미완의 과제로 남아 있다. 한때 이 탐구 자체의 무용론과 불가론 등이 거론되면서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끈질긴 생명력을 유지하며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2)그간 서구 학계에 의해 진행된 역사적 예수 연구의 흐름을 정리하고 그 공과를 비판적으로 점검하면서 국내의 민중신학적 관점에서 그 대안을 제시한 책이 있어 주목된다. 김진호,《예수 역사학》다산글방, 2000. 그 동안 진행된 역사적 예수의 연구는 대체로 세 방향으로 그 출구를 뚫어 왔다.

 

먼저, 예수의 지혜 어록과 비유를 중심으로 예수를 현자로 보고자 하는 시각이 있다. 이는 19세기 예수전 집필의 전성 시대에 예수를 당대 서구 사회의 이상형에 맞추어 합리적인 계몽의 스승으로 예수의 초상을 그린 전례로부터 예수 당시의 통념적 인습과 가치를 전복하고 대안적 가치를 선포한 씨닉(Cynic) 계통의 현자로 보는 모델을 두루 포괄한다. 이러한 각도에서 예수를 이해할 때 예수는 삶의 감추어진 비의를 탐구하는 구도자이자 스스로 깨달은 삶의 의미를 가르치는 선생이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의 주된 메시지인 하나님의 나라도 하나님의 지혜를 깨달은 자의 내면에 깃드는 황홀한 삶의 풍경이다. 그 때 지혜의 왕국(the sapiential Kingdom)으로서의 하나님의 나라는 스승 예수의 말씀을 들을 귀 있는 자만이 제대로 듣고 헤아려 마음속에 일구어 나가야 할 개인적 삶의 이념형으로 자리매김 된다.

 

둘째, 예수의 종말론적 선포와 묵시적 행적에 기초하여 재구성한 묵시적 종말론자 또는 종말론적 묵시주의자의 모델이 있다. 이는 19세기 말 슈바이처(A. Schweitzer) 등이 고안한 이래로 한풀 꺾였다가 새롭게 변용되면서 다시 주목받고 있는 관점이다. 이에 따르면 예수는 전통적인 묵시주의자들의 비전에 따라 이 땅의 역사가 하나님의 개입에 의해 파국에 이르고, 특정한 때가 이르러 그 대안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긴박하게 임하리라고 예언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예수의 교훈과 행적은 그 종말론적 파국과 하나님 나라의 임재라는 사건에 초점을 맞추어 이루어졌으며, 유월절을 겨냥한 그 예언의 실패로 말미암아 예수의 비극적 죽음이 발생했다는 식으로 해석된다. 그 때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나름의 신학적 이념과 정치, 사회적 프로그램을 내포한 가시적인 조직체로 이해된다.

 

셋째, 율법을 둘러싼 예수의 논쟁담과 그의 대중적 활동에 주로 근거하여 예수를 사회 개혁가나 정치적 혁명가로 보려는 관점이 존재한다. 이는 예수 당시의 상황이 로마의 식민 지배라는 정치 사회적 압제의 현실과 따로 떼어 놓고 이해할 수 없다는 전제 위에 성립한다. 그 때 예수의 제반 활동은 로마의 식민 정권과 그에 빌붙어 민중을 착취하는 당시의 종교 및 정치 지도자들의 2중적 억압 구조를 타파하는 데 이바지한 것으로 해석된다. 여기서 그의 역할은 민중을 계몽하여 당시 억압적인 유대교를 개혁하거나, 그 종교 및 정치 권력의 억압하에 신음하던 민중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민중을 조직, 동원하여 봉기를 일으키는 것이다. 이 관점에 의하면 실제로 예수는 당시의 열심당원(the Zealots)들처럼, 성전에서 기물을 뒤집어엎고 상인들을 채찍으로 내침으로써 유월절에 즈음하여 예루살렘으로 몰려든 군중들을 선동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그 정치적 봉기의 기획이 실패로 끝남에 따라 예수가 정치범으로 죽게 된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는 주장이다.

 

이렇게 볼 때 지금까지 진행되어 온 역사적 예수 연구는 주로 예수의 사회적 역할, 정치적인 지향성에 집중된 듯한 인상이다. 그러다 보니 그 모든 것들의 출발점이 되는 예수의 신학적 입장에 대한 고려가 별로 없었거나 신통치 않았다. 복음서의 신학화한 예수상에 딴지를 걸며 그것을 탈각시키고자 한 노력이 예수와 신학 사이의 거리를 더욱 멀어지게 만든 셈이다. 그러나 예수의 모든 가르침과 행적은 당시 유대교적 전통에 대한 예수의 신학적 재해석의 결과였음이 분명하다. 여기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은, 예수가 경건한 유대인으로 성장하였고 그의 사상적 토대가 바로 유대교의 경전 토라에 있었다는 점이다. 예수는 그의 참신한 토라 해석과 실천을 통해 비록 전통적인 유대교의 통념과 일정한 거리를 두게 되었지만 그는 무엇보다 신학자였다. 물론 요즘처럼 신학을 전공하는 학자라는 의미에서라기보다 당시 유대교 신학 전통을 창조적으로 재해석하고 그 위에 자신의 신학적 신념을 정립할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였다는 점에서 그는 명실공히 신학자로서 사고하고 행동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 신학적 토대 위에서 그는 동시대적인 삶의 현장을 관찰하고 진단하며 구체적으로 개입할 수 있었을 터이다. 그것이 바로 내가 예수의 신학 연구로 이어지지 않는 역사적 예수 연구는 공소해지리라고 생각하는 이유이다.

 

예수와 신학 사이의 소외를 극복하고 다시 밀접히 연계시킨다면 우리는 좀더 여유 있게 예수의 신학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예수의 신학을 특징짓는 가장 큰 변수로 자리잡은 묵시와 지혜의 요소를 상호 배타적이 아닌 삼투적인 관계로 재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신학은 보이지 않는 신을 대상으로 하는 지적 작업이기 때문에 묵시적 요소 없이는 불가능하다. 묵시적 통찰과 비전은 기도나 간구를 위해 필요하고 말씀의 묵상을 위해서도 요긴하다. 즉, 신앙의 대상을 향한 묵시의 공간이 없이 하나님에 대한 종교적 신뢰는 발생하지 않는다. 그러나 묵시적 통찰과 비전은, 이 땅의 인간적 삶에 내포된 다양한 현실을 끌어안고 그 개방적 소통과 풍요한 운용을 위해 요구되는 살림의 지혜를 빠뜨릴 때 위험하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뜻을 자기 맘대로 조종하고 통제하려고 하는 자폐적 묵시주의의 무모한 열정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예수는 갈릴리 민중들과의 정서적 교감을 통해 현실적 지혜의 세계에 눈뜸으로써 그러한 무모한 묵시주의자의 길에서 한발 비켜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나는 쿰란의 에세네파 성원들을 비롯한 당시의 열정적 묵시주의자들과 예수가 거기서 결정적으로 갈라진다고 본다.

 

 

예수 신학의 방법론적 미로

 

예수의 신학적 경향을 묵시와 지혜의 요소가 역동적으로 만나는 맥락에서 대강 가늠하더라도 일단 세부적인 텍스트로 들어가면 적잖이 혼란스러워진다. 예수의 신학이 역사적 예수의 탐구와 분리될 수 없는데 역사적 예수의 탐구를 위한 자료와 그 검증 방법이 일정치 않기 때문이다. 예수와 관련하여 가장 풍성하고 방대한 자료는 신약성서의 복음서이다. 그런데 이 복음서 내용 전체를 수용하여 역사적 예수의 말씀과 행적을 드러내는 무오한 자료로 삼는 보수적인 입장이 있는가 하면, 그 가운데 지극히 적은 그 일부만을 취하여 역사적 진정성을 담보하는 예수 관련 자료로 여기는 비판적 입장이 제출되어 서로 첨예하게 대립해 온 형편이다. 3) 복음서의 자료에 대한 비판적인 입장을 대표하는 집단이 이른바 미국의 신약성서 학자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예수 세미나'(Jesus Seminar) 팀이다. 이 팀은 200여 학자들의 투표를 통해서 복음서의 내용에 대한 진정성 여부를 판별하여 왔는데 그 일련의 성과를 두 권의 책으로 펴낸 바 있다. 예수의 말씀을 대상으로 삼은 책이 The Five Gospels: The Search for the Authentic Words of Jesus (New York: Macmillian Publishing Company, 1993)이고, 예수의 행적을 대상으로 한 그 후속 작품이 The Acts of Jesus: The Search for the Authentic Deeds of Jesus (New York: Macmillian Publishing Company, 1998)이다. 복음서를 역사적 예수 연구의 자료로 사용하는 데 한 가지 비판적 전제는, 복음서가 근대적 의미의 역사서를 목표로 저술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앞서 적시한 대로 거기에는 저자의 신학적 의도가 투영되었을 뿐 아니라 고대 근동의 신화적 세계관과 우주관이 그 배경에 자리 잡고 있다. 더구나 복음서가 있었던 사실 그대로를 재현해 내기가 어려웠던 것은 구전을 위주로 한 당시의 자료 전승 채널과 기록 문화의 한계에 기인했을 터이다.

 

그러면 어떻게 역사적 예수의 육성이 아닌 어록이나 그의 실제 행적이 아닌 것들이 그에 의한 것들로 둔갑할 수 있었을까. 그 일차적인 근거로 초기 교회의 '영감적 인식론'(pneumatic epistemology)을 들 수 있다.4)('영감적 인식론'에 대한 대표적인 연구로 바울의 신학적 수사학을 그 맥락으로 삼아 해석한 다음의 학위 논문을 참조할 것:Seung Won Yu, "Paul's Pneumatic Epistemology:Its Significance in His Letters," Duke University, Ph. D. Dissertation, 1998. 이는 부활의 주 예수께서 자기 안에 영적으로 현존, 내주하면서 직접 말하고 분별하며 지시한다는 믿음에 근거한 것이다. 5) 이에 대한 가장 좋은 예시는 예수의 파송 설교에 나오는 다음의 구절일 것이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마 10:20). 이 믿음에 촉진제 역할을 한 것이 전승된 예수의 역사적 유산과 예수에게 적용된 구약성서의 일부예언 구절들이었다. 가령, 예수의 특정 어록이 특정 개인이나 신앙공동체의 계시적 감화를 통해 스스로 증식될 수 있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구약성서의 특정 구절이 예수의 사역과 그 제자들의 선교사적 맥락에 맞추어 재해석되면서 예수의 언행을 확장하는 데 기여할 수 있었으리라 짐작된다. 그 과정에서 특정 양식별로 수집된 자료들이 자체 증식 과정에서 유사한 패턴의 이야기들을 확대, 심화해 나갔을 가능성도 점쳐진다. 이러한 영감적 인식론의 발전은 후대의 그리스도인이 스스로 예수와의 영적 동일성을 내세우는 단계로까지 이어져 영적 엑스터시 속에서 예수의 영적 권위에 기대어 예수가 직접 말하듯이 말하면서 예수 관련 자료들을 지속적으로 생산해내는 동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그런데, 영감적 인식론에 근거한 계시적 체험, 이를테면 환상과 환청 같은 것도 이를 촉발시키는 사전 경험과 신학적 전제가 필요한 법이다.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 그 경험은 주로 복음 선교 활동, 이에 따른 외부로부터의 억압과 핍박, 나아가 공동체 내부의 혼란과 정체성 문제가 주를 이루었다. 이러한 안팎의 도전에 대한 응전의 일환으로 예수의 역사적 유산은 지속적으로 신학적 재해석의 여정을 통과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각 복음서는 응당 각 복음서의 저자와 그를 둘러싼 신앙공동체의 주된 신학적 관심사와 정치적 이해 관계가 투사될 수밖에 없었고, 그들의 내적 연대와 보편적 선교 비전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그 집필의 초점이 맞추어졌을 터이다.

 

이와 같이 예수 이전과 예수 당시, 그리고 예수 이후의 전승 단위를 층층 켜켜 해부하고, 역사적 예수의 진정성을 내포한 자료를 솎아내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론적 기준이 고안된 바 있다. 먼저 복음서 중에 공관복음서를 요한복음보다 덜 신학화한 자료로 판단하여 거기에 우선권을 주는 선택을 기본으로 한다. 다음으로, 공관복음서 가운데 가장 먼저 씌어진 마가복음이 그것을 자료 삼아 재생산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평행구보다 더 신뢰할 만한 역사적 예수의 자료로 승인되는 경향이 있다. 이와 더불어,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또 다른 공동자료를 이루는 예수의 어록(이른바 Q문서)을 비중 있게 생각하는 편이다. 그러나 이러한 초기 자료들 또한 예수 사후 한 세대 이상에 걸쳐 신학적 편집을 거친 것들이어서 그들의 전승층을 뚫고 예수에게로 더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작업이 요청된다.

 

이 대목에서 그나마 역사적 예수의 복원 차원에서 상당수의 공감을 얻은 것이 (1) 비유사성의 원칙(criterion of dissimilarity) (2) 다층적 탐지의 원칙(criterion of multiple attestation) (3) 일관성의 원칙(criterion of coherence) (4) 언어학적 원칙(linguistic criterion) 등에 따른 분석 방법이다. 이는 특히 역사적 예수의 진정한 '말씀'을 분별해 내는 데 효과적인 것으로 활용되어 왔다. '비유사성의 원칙'은 예수의 가르침 가운데 유대교 및 헬레니즘 문헌 등과 비교하여 독특한 차별성을 띠는 것에 높은 신뢰도를 부여한다. '다층적 탐지'의 원칙은 한 군데에 나오는 희소한 말씀보다 여러 곳에서 탐지되는 말씀에 더 높은 신뢰도를 부여하는 분석 기준이다. 예수의 특정 말씀이 여러 경로를 거쳐 전승되었다는 사실은 그 말씀의 역사적 진정성을 높이는 증거로 취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기준에 따라 검증된 예수의 진정한 말씀과 비교하여 신학적으로 일관성을 띠는 다른 말씀들은 '일관성의 원칙'에 따라 그 역사적 진정성을 평가받는다. 한편, 예수의 일상어가 아람어였다는 점에 착안하여 헬라어 표현의 이면에 아람어의 흔적이 탐지되는 문구나 문장은 '언어학적 원칙'에 따라 예수의 진정한 말씀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방법들은 역사적 예수의 복원에 남긴 그 일정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점점 더 회의의 대상으로 거론되곤 한다. 예수의 말씀이 얼마나 유대교와 인근 헬레니즘 문화에 영향을 받았는지, 얼마나 독창적인 그만의 작품인지 따질 수 있는 역사적 근거가 희박한지라 비유사성의 원칙이 지닌 효율성에 의문이 제기되는 것이다. 가령, 예수의 말씀과 유대교 랍비의 가르침, 헬레니즘 시대 현철의 어록 사이에 설정해야 할 유사성과 비유사성의 경계가 모호하고 지극히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는 문제점이 생긴다. 또한 공관복음서가 서로 자료를 주고받은 상태이고, 도마복음이나 디다케(Didache) 같은 다른 관련 문헌들과의 관계도 이미 편집된 자료의 복잡한 유통 경로를 거치면서 설정된 것일진대 복합적 탐지의 원칙이 객관적 엄정성을 띠기란 난망하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최근 어록 자료를 중심으로 역사적 예수의 초상을 재구성하는 방식에 근본적인 회의를 제기하고 그 대안으로 사건 중심의 복원 작업이 활발해지고 있다. 복음서의 자료 가운데 예수와 관련하여 부인하기 어려운 사건이나 상황을 추출해내고 이를 중심으로 다른 사건들을 투사하여 그 신뢰의 정도를 가늠하고자 하는 시도가 그것이다. 6) 이 계통의 대표적인 학자가 샌더스(E. P. Sanders)이다. 이와 관련된 그의 최근 저서로 The Historical Figure of Jesus (New York:Penguin Books, 1993) 참조. 예수와 사건 또는 상황을 연계시킬 때 신빙성이 높은 것들은 가령 다음과 같은 항목들을 포함한다. 예수가 유대인으로 갈릴리 출신인 것, 예수가 세례 요한 밑에서 세례를 받고 그의 영향 하에 초기 사역을 실행한 것, 예수가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메시지를 선포하고 가르친 것, 예수가 병자들을 치유하고 비유의 방식으로 가르친 것, 예수가 성전의 상인들을 내치고 성전과 관련한 예언을 한 것, 예수가 이른바 '죄인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고 그들을 하나님 나라의 성원으로 포용한 것, 예수가 '유대인의 왕'으로 십자가에 달려 처형된 것.

 

나는 역사적 예수 연구를 위해 그간 서구 학계가 취해 온 이런저런 방법론과 이에 따른 성취를 무시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여정이 기왕의 학문적 축적 위에 그 무늬를 다소 변색하는 백화제방의 풍경을 연출해 왔음도 부인하기 어렵다. 이를테면, 어록 자료를 중심으로 역사적 예수상을 재구성하고자 할 때 그 결론은 유대교의 특수성을 넘어 보편적인 가치를 창출한 진보적 현자 예수의 창조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흐른다. 그것은, 19세기 예수전 전성기의 합리적인 예수상에 해석적 계보를 잇대고 있거니와, 이 계통에서 요즘 유행하는 씨닉 예수 모델 또한 이미 니체(F. Nietsche) 등에 의해 19세기 제출된 주장을 치밀한 자료 검증을 통해 부활해 놓은 사례에 불과하다. 마찬가지로, 역사적 예수 연구에 사건을 중시하는 흐름은 예수를 묵시적 종말론자의 이미지로 부각시키는데, 이 또한 지난 19세기 말 슈바이처(A. Schweitzer)나 바이스(J. Weiss)의 주장을 좀더 현란한 논증 과정과 방법을 통해 동 이미지를 세밀화한 결과로 비친다.

 

이렇게 망각과 재현의 연구사가 반복, 진행되어 온 그 간의 추세를 감안할 때 또 다른 연구 방법의 제시와 그 결과는 또 하나의 개연적인 주장을 덧보태는 데서 그리 벗어나지 못하리라는 짐작이다. 그러므로 기상천외한 발상으로 기괴한 예수상을 만들어 내어 세간의 대중적 호기심을 자극하려는 상업주의적 속내가 아니라면, 지금까지의 연구사를 무시하고 막연히 초월하기보다는 역으로 파고들어 그 간의 크고 넓은 길들을 따라가느라 대강 지나쳤던 좁은 오솔길을 개척하려는 방향 전환이 요청된다. 그 미시적인 천착을 통해 우리는 이른바 엄정한 '객관주의'의 미망을 벗어나 좀더 자유스럽게 예수의 역사상을 풍요롭게 해석하려는 모험의 여로에 닻을 올릴 수 있다. 이는 역사적 예수 연구가 예수의 몇 가지로 집약된 특징적 초상 -가령, 그의 사회적 역할과 정치적 목표 등- 에 관한 지루한 재론에 매몰됨으로써 예수를 형해화 시키는 오류를 범하지 않고, 예수의 삶과 사상을 심도 있고도 세밀하게 우려내려는 의도와 맞물려 있다. 요컨대, 각종 비평과 사회사적 해석의 재료에 불과한 역사적 예수의 연구가 예수를 주체로 한 예수와 그 주변 인물들의 생활사를 거쳐 그의 신학에 관한 탐침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말이다.

 

예수의 신학으로 난 오솔길 셋

 

이와 같이 나는 그 간의 역사적 예수 연구 성과를 존중하면서 내 나름의 작은 오솔길을 몇 개 내고자 한다. 물론 그것은 색다른 예수상의 창출이 아니라 기존의 예수 연구에서 소홀히 취급받거나 아예 무시되어 온 부분들에 대한 지적이다. 그 첫 번째는 예수를 둘러싼 사역의 조건, 그러니까 사건이랄 것도 없는 자그만 상황에 관한 것이다. 그것은 내가 예수의 일상사와 관련하여 주목하는 것으로 곧 그의 기동성(mobility)과 관련된다. 아울러, 예수가 이를 통해 지리적, 문화적, 종교적 경계를 집적이고자 한 반복적 시도와 그것에 담긴 모험 정신이다. 나는 이로써 예수의 사역 무대가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이동해 간 사실과 거기에 담긴 신학적 의도를 염두에 두고 있지는 않다.7) 이 점은 공관복음서에서 그 작위적인 신학화의 흔적이 역력한 부분이다. 가령, 마가복음에서 보여주는 갈릴리-예루살렘-갈릴리의 지리적 순환 경로가 그렇거니와, 누가복음-사도행전에서 제시하는 갈릴리-예루살렘-사마리아-로마의 선교 여정이 또 그러한 도식적 프로그램 하에 있다. 그는 갈릴리에서도, 유대 땅에서도 중심지(예컨대, 가버나움, 예루살렘)로부터 변두리 지역으로, 한 변두리 도시에서 또 다른 변두리 성읍으로 거듭 움직이며 여행했다.

 

  의심의 여지없이 그는 부지런한 보행자였고, 걸으면서 한 군데서 다른 곳으로 쉴새없이 이동한 그는 길 위의 전도자와 다를 바 없었다.8) 흔히 한 동네에서 다른 동네로의 이동을 해석하면서 그 근거를 종말론적 맥락에서 핍박의 현실과 연계시키는 경향이 있지만(마 10:23) 예수의 경우 그 보행의 기동력이 그러한 맥락과 별로 상관없이 일상사의 일부로 자연스럽게 수용, 활성화되었다는 특징이 있다. 그의 그 행보 가운데 특히 주목되는 것은, 그가 이따금 좀 멀리 떨어진 두로와 시돈, 가이사랴 빌립보 같은 곳을 찾아 간혹 이방인들과의 접촉 기회를 가졌으며, 그리고 종교, 문화적으로 이단적인 사마리아 지역을 통과해 가길 꺼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처럼 지리적 경계를 넘어서는 보행의 여정은 종족적 문화적 종교적 경계를 집적이는 정신적 모험의 여정으로 이어졌을 터였고, 그것이 반복될수록 경건한 유대인으로 정통 유대교 문화에 익숙하게 살아온 예수에게 준 도전과 자극은 적지 않았으리라 사료된다. 경계에 선 존재로서 예수가 펼친 하나님의 나라 사역은 마침내 후대의 보편적 선교 비전에 태반을 제공한 개척적 선교 정신의 이정표가 되지 않았을까 짐작된다.

 

  예수가 그의 살아생전 헬레니즘의 보편적 가치를 구현했다고 보는 시각은 너무 이상적이다. 마찬가지로, 예수를 전통적 유대교의 틀 속에 묶어두려는 시각도 지나치게 일방적이다. 그의 삶은 오히려 본향과 변방의 경계에서 가열되었으며 이에 따라 그의 신학 사상은 후대의 보편적 비전에 돌파구를 가능케 한 모험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와 같이 자신의 태생적 한계를 집적이며 그 경계를 확대하려는 모험적 통풍구가 마련되어 있었기에 그는 당시 터부시된 '죄인들'을 하나님의 나라에 포용할 수 있었고, 주어진 토라(Torah)의 전승을 새롭게 해석하여 그것을 억압의 굴레가 아닌 자유와 해방의 메시지로 우려내는 시대 감각을발휘할 수 있었다. 그런 예수에게 태생적 경계를 집적이는 모험 정신을 제거하거나 그에게 현실적 삶의 토대가 된 경계 자체를 무시하는 시각 모두가 온당치 못한 것으로 판단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역사적 예수는 여러모로 유대교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에서 일면 보수적이었으되 마냥 수구적이지 않았으며, 동시에 그의 신학적 창조성과 도전성은 끊임없는 보행의 여정 가운데 서서히 형성되어 갔지 하루아침에 생겨난 것이 아니었다.

 

  두 번째로 내가 내고자 하는 오솔길은 예수의 가르침과 관련된다. 그것은 내가 예수의 신학 사상을 가장 절묘하게 응축하고 있는 자료로 보는 이른바 '주의 기도'이다. 내가 이 기도를 특별히 주목하는 것은 이 기도가 역사적 예수의 말씀을 검증하는 주요 기준인 '비유사성의 원칙'과 '복합적 탐지의 원칙'을 두루 충족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주의 기도를 이처럼 후하게 대접하는 것은 그보다 기도라는 양식이 지닌 전승사적 특수성에 기인한다. 특히, 고명한 스승이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줌으로써 그 기도 가운데 자신의 사상이 간결하고도 극적으로 응축시키는 당대의 관례에 따른 경우라면 더더욱 그것은 역사적 신빙성이 높아진다. 그렇게 제자들에게 기도를 남긴 것은 세례 요한의 경우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의 기도는 사라졌지만 소크라테스가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사상적 신념과 비전을 간결하게 응축시킨 형식 속에 남긴 기도문은 지금도 현존한다. 그뿐 아니라 그레코-로마의 현철들이나 유대교의 랍비들 가운데 적지 않은 자들이 기도나 그에 준하는 문학적 양식 속에 그들의 사상적 핵심을 담아낸 적이 있다. 그것들은 제자들 사이에 스승의 상징적 유산으로 간주된 나머지 그 비중으로 인해 첨삭의 절차를 통해 편집하거나 변개 또는 훼손하는 것이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

 

  기도는 그 양식적 속성상 예전적 맥락에서 되풀이되며 전승되는 경향이 있다. 주의 기도도 이와 관련하여 예외가 아니다. 이미 복음서의 가장 이른 한 맥락에서도 '이렇게 기도하라'는 훈계와 더불어 그 기도가 전수되고 있다(마 6:9a). 더구나 그것은 사적인 경건을 증진하는 목표로도 사용되었지만 애당초 집단 기도의 형식을 갖추고 있었기에 생산되자마자 즉시 예전적으로 유통될 가능성이 높았다. 실제로 그것이 초기 교회에 예전적, 주술적 맥락에서 사용된 증거는 심심찮게 발견된다. 물론 주의 기도에 나오는 모든 내용들이 기존의 기도들과 전혀 다른 예수의 100% 창작품이라고 우기는 것은 아니다. '해 아래 새 것이 없다'는 전도서의 원리는 기도의 전승사에도 적용된다. 이미 유대교의 카디쉬 기도(Kaddish prayer)와의 비교 연구를 통해 그 어휘 및 문구상의 유사점이 지적되었거니와, 이는 예전적 언어의 통상적 특징에 해당된다. 그러나 예수는 그 전통적 어휘의 적용 방식과 맥락을 달리하여 그 나름의 독특한 기도 신학의 세계를 펼쳐 보인다. 9) 이에 대한 상세한 해설은 H. D. Betz, The Sermon on the Mount (Minneapolis: Fortress Press, 1995) 370-383쪽 참조.

 

  그 세계 속에는 유대교 사상의 엑기스가 녹아 있지만 그것들을 변용시켜 예수는 새로운 신학적 지평을 내다본 바, 여기서도 경계에 선 존재로서의 예수상은 어김없이 투시된다. 비록 그 세부적인 사항은 별도의 검토를 요하지만 10) 나는 이와 관련하여 월간《성경연구》의 연재물로 두 편의 에세이를 구상, 집필하고 있는 중이다. 하나님의 이름, 뜻, 왕적 통치, 일용할 양식, 빚의 탕감, 시험, 악 등의 전통적인 주제들은 예수의 신학적 사유 속에 고스란히 녹아들어 당시의 유대교와 접속, 교통하면서도 긴장, 대립하는 예수 신학적 풍경을 펼쳐 보여주는 것이다. 이로써 주의 기도는 예수가 유대교와 더불어 살면서 어떻게 유대교로써 유대교를 넘어서고자 했는지 그 경계의 창발적 접점을 잘 예시해 준다. 여기서 내 주장의 요지인즉, 주의 기도가 역사적 예수와 관련하여 나머지 복음서 자료들의 진정성을 검증하는 하나의 독특한 예수 신학의 기본 틀로 기능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 세 번째로 내가 예수 신학의 명료한 차별화와 풍요한 재구성을 위해 구상하는 것은 '생기의 해석학'으로 명명하고 싶은 해석의 전략과 상관된다. 그것은 현재 논의의 맥락에서 예수로부터 신학하는 법을 배우는 데서 출발한다. 예수 신학자는 예수가 예수의 신학을 한 대로 신학을 할 줄 아는 신학자이다. 그러면, 예수의 신학함은 어떠했는가. 예수는 어떻게 그의 신학적 토양을 일구었는가. 오늘날 예수 신학자는 예수의 신학에서 신학하는 어떤 방법과 자세를 배워야 하는가. 그것은 무엇보다 신학하는 주체와 객체 사이의 간격을 역동적으로 조율하면서 이론적 실천과 실천적 이론 사이를 넘나드는 탄력적인 자세이다. 그 자세는 곧 분석과 고백이 따로 놀지 않고 지식과 상상력이 결속하며 해석과 삶이 함께 어우러지는 원융 일체의 신학, 다시 말해 '샬롬'의 신학을 지향한다.

 

  그러므로 예수 신학에서 그 '학'(學)은 객관화한 체계로서의 학문이기에 앞서, 예수가 그의 발바닥 품을 팔면서 보여주었듯이, 꾸준히 새로운 것을 향해 탐험하는 '배움'의 보행이다. 더구나 그 배움의 대상이 가장 신묘한 하나님일진대 그것을 틀 지워 조급한 확신의 미끼로 삼고자 하는 것은 예수의 신학을 잘못 배우는 부정적 사례에 불과하다. 예수 신학자로서 우리가 지녀야 할 확신이란 것은, 마치 예수가 그러했듯이, 끊임없이 걷는 보행의 여정 위에서만 명멸하는 항구의 등대불빛과 같은 것이다. 따라서, 한군데 고여 있는 물이 반드시 썩는 자연의 이치대로, 자기만의 성채로 내세우는 절대 확신의 도그마는 반드시 타락할 소지가 있기에 일단 의혹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예수 신학의 맥락에서 종교적 신념과 경건은 보행자의 일용할 양식과 같이 일회적이고 결단적이며 소박한 자족을 추구해야 하기 때문이다. 묻고 추구하는 대로 얻고, 찾는 대로 발견하며, 문을 두드리는 대로 열릴 것을 믿는 '담백한 낙관주의'란 기실 그러한 자족적 소박함 가운데서나 생겨날 수 있는 것이다. (여담이지만, 오늘날처럼 자본주의적 욕망에 찌들대로 찌든 인간 군상들에게 예수의 하나님 아니라 그 할아버지의 은혜라도 쾌히 만족스러울까 의심이 들 지경이다.)

 

  한편, 예수 신학의 생기가 사변적(또는 궤변적) 형이상학보다 일상적 삶의 경험과 그에 대한 섬세한 관찰에서 말미암았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거기서 중요한 것은, 씨와 밭, 나무와 나물, 새와 하늘, 바다와 폭풍, 꽃과 풀, 떡과 향유 등과 같은 물질적 이미지의 요소이다. 또한 인간적 삶의 현실과 관련하여 예수 신학의 주된 소재가 되는 것들은 잔치와 음식, 질병과 치유, 부와 가난, 명예와 권력, 음모와 죽임과 같은 세속적 삶의 관심사들이다. 바로 이것들이 예수의 신학을 구축하기 위해 예의 물질적 이미지에 대한 비평적 해석과 인간의 욕망에 대한 정치, 경제, 사회, 종교적인 다각도의 천착을 필요로 하는 세목이다. 그리하여 예수의 신학이 허황한 공중의 구름 잡는 소리가 아니라 우리의 일상사처럼 모순되고 부조리한 삶의 현실을 뒤집고 새로 시작하는 데 어떻게 도전할 수 있는지 구체적인 개입의 층위를 설정해야 하는 것이다.11) 예수의 가르침에 나오는 물질적 이미지들을 다층적으로 분석함으로써 예수의 신학적 생기를 우려내는 이른바 '이미지 비평' 작업의 일환으로 나는 최근 '불'과 '칼'의 이미지를 집중적으로 분석하여〈불과 칼을 던진 예수〉라는 제목의 에세이를 발표한 적이 있다. 이 에세이는《기독교사상》509호(2001/5)에 게재됨. 

 

  그 각론의 구체성과 관련하여 생기의 해석학에 관심을 가진 예수 신학자는 예수의 어법에 대한 충분한 고려가 필요하다. 예수의 날카로운 통찰과 기지가 그대로 드러나는 아포리즘과 상상의 촉수를 자극하는 비유의 교훈을 배워 열린 글쓰기, 자유스런 글쓰기, 창조적인 글쓰기로서의 신학이 요청된다. 예수가 그 나름의 구연(口演)으로 시도한 그 하나님 나라의 세계를 오늘날 예수 신학자는 글쓰기의 체험을 통해 변주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신학이 신학으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담론의 생산이 불가피한데, 그것은 글쓰기의 양식을 통해 구체적으로 실현된다. 그 간의 연구 성과를 나열하는 장식적 각주와 천편일률적 논문의 문체로써 예수의 신학을 풍요하게 우려내는 일은 그 연장의 질적 수준과 천착의 방법상 함량 미달이다. 따라서 당대적 맥락에서 양식화하여 전승된 예수의 신학을 풀어내기 위한 또 다른 메타 양식적인 글쓰기의 전략이 절실한 형편이다.

 

  이렇듯, 예수 신학의 정신에 잇닿은 그 일련의 글쓰기 작업은 분석과 해석을 거친 사상의 구축이자 비평과 연구를 통과한 삶의 진경으로 거듭나야 한다. 그 가운데 예수의 어법이 나의 개성적인 신학적 글쓰기로 거듭날 때, 나의 사상이 예수의 신학과 더불어 진화할 때, 우리는 비로소 예수로, 예수와 더불어 신학하는 예수 신학자로서의 결기와 생기를 두루 회복하게 될 것이다.

 

http://saegil.or.kr/quaterly/sg01s/01theology.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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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내용과 신학적 메시지”(샌더스와 갈라디아 해석)


Ⅰ. 갈라디아서 내용


  1. 갈라디아 교회의 위기 상황 (1:1-10)

  서문인 1:1-5에서 바울은 감사를 표하는 일반적인 인사와 달리 바울은 처음부터 “사도직”을 강조한다. 당시 갈라디아의 유대주의 선동자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평가절하 하면서 십자가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선동했다. 선동꾼들은 바울의 사도직을 공격하여 결국 기독교 세력을 유대교나 유대주의적 기독교로 만들려고 했다. 갈라디아 성도들은 이전에 율법과 우상 숭배에 빠져 살다가, 주님의 부름을 받아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 거하게 되었다(1:6). 갈라디아 성도들이 복음을 바울을 통해서 받았지만 그들이 ‘너무 쉽게’(so quickly; tace,wj), ‘너무 경솔하게’ 입장을 바꾸어(복음에 반대하여) ‘다른 복음’ 쪽으로 전향했다. 선동꾼들은 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metastre,yai) 해서 그들은 기독교의 배교자들로 만들려고 했다(1:7).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은 “우리 죄를 위하여”(u`pe.r tw/n a`martiw/n h`mw/n) 죽으셨다고 한다. 1:8에서 바울은 ‘메시지의 내용, 복음 자체’에 관심을 둔다. ‘누가’ 전했는가를 따지는 것보다 ‘어떤 내용’을 전하느냐가 더 중요하다. 바울이 받은 ‘복음’은 하늘에서 온 것이기에, 만일 하늘에서 온 천사라도 하나님의 권위를 능가해서 자기 말을 전하면 “저주”(avna,qema)를 받을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계시하신 복음을 전하기 때문에 자신의 복음을 위해서 사람을 설득하지도, 하나님을 설득하지 않았다!(1:10)

 

 

  2. 복음과 사도직에 대한 바울의 자기 변호 (1:11-2:10)

 

  2.1. 바울 복음의 기원 (1:11-17)


  바울은 자신의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kata. a;nqrwpon) 된 것이 아니라”(1:11)고 한다. ① 바울의 복음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는 인간적인 동기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② 바울의 복음은 사람을 통해 온 복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 직접적인 가르침을 따라 된 것이다. 바울은 사도들을 통해서 복음을 받지도 않았다(1:12). 유대교를 연구하면서 얻어내지도 않았다. 바울은 자신에게 직접 계시로 나타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복음을 받게 되었다. 이전에 “바울은 왜 교회를 파괴(evpo,rqoun)하려고 했는가?”(1:13,14). 모든 동년배들 보다 더 유대교 신앙, 신학에 뛰어난(proe,kopton evn tw/| VIoudai?smw/|) 바울은 ① 기독교인들이 율법을 버린 배교자들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박해했다. 예수의 가르침을 따른 기독교인들은 유대교의 가르침과 달리 성전이 구원의 장소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예수의 가르침이 모세가 가르쳐 준 율법을 완성하는 것이요 더 상위의 계명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바울은 성전과 율법을 무시하는 기독교인들을 배교자로 정죄하게 되었던 것이다. ② 십자가에 못박힌 사람은 저주받은 사람인데, 그런 사람을 메시야로 확신하고 있는 기독교인들의 생각은 율법과 전통을 모욕하는 짓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기독교를 파괴해 나갔다(갈 3:13; 고전 1:23; 갈 5:11).


  이처럼 핍박자인 바울이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받은 것은 “하나님의 계획을 따라”(kata, to, qe,lhma tou/ qeou/) 되었으며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다. 하나님은 그 아들을 이방인들에게 전하기 위해서 바울을 부르셨기 때문에 기뻐하셨다(1:16). 부르심의 목적은 그 아들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방인에게 빚을 진 셈이다(롬 1:14). 바울은 ‘하나님’에게서 계시를 직접 받았으므로 자신의 계시는 혈육과 의논(prosaneqe,mhn)할 주제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부름받은 것은 모두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ca,rij h` doqei/sa moi)다.

 


  2.2. 예루살렘 교회와 바울의 권위 (1:18-2:10)


  유대주의 선동꾼들은 바울의 복음이 예루살렘의 사도들에게 기원한다고 소문을 냈다. 그들은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율법’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사실을 배웠는데도 불구하고 그 사실을 부인하고 이방인에게 쉽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조작한 것이 “이신칭의의 복음”이라고 했다. 바울의 권위도 예루살렘의 사도들보다 못하다고 하여 바울이 전한 복음을 평가절하시켜 나갔다. 이에 대해서 바울은 자신의 복음은 ‘독립적’을 받았지만 예루살렘 사도들에게서 ‘인정받은 것’이라고 변증해 나간다. 바울은 회심 후 삼년만에 예루살렘에 가서(1:18) 우선 자신의 회심을 알리고 교제하기 위해 베드로를 심방했을(i`store,w) 것이다. 예루살렘 교회는 바울의 복음을 인정했고, 바울은 사도들로부터 역사적 예수에 대한 전승을 얻었을 것이다.

 

 


 3. 유대주의 선동꾼들에 대한 응답

 

 3.1. “바울의 이신칭의 복음”(2:11-21)

  (1) “안디옥 사건”(2:11-14): 2:11 이하의 안디옥 사건에서 게바가 음식을 먹을 때 예루살렘에서 온 사람들을 보고 피하여, “외식”했다. 게바와 바나바는 이신칭의의 복음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예루살렘에서 파견된 사람들이 두려워 내면과 다르게, 눈치를 보면서, 자리를 피했다(2:12-13). 이 안디옥 사건을 계기로, 바울은 이신칭의와 이방인을 위한 사도직에 대해서 합의한 내용을 다시 밝혀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2) “이신칭의 복음”(2:15-21): 유대인들은 이스라엘 국가, 유대민족 자체가 혈통적으로 언약 백성이라는 자긍심을 갖고 있었다. 유대 기독교인들은 이방 기독교인들이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해도 유대의 관습을 따라 ‘유대인처럼’, 즉 “율법의 행위”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여기서, ‘율법의 행위’(e;rgwn no,mou)는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 가운데 속해 있음을 보여주는 신분 표지의 행위들을 가리킨다(2:16). 그러나 2:16에서 바울은 율법의 행위와 믿음을 대조시키면서 이방인이 의롭게 되는 길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evk pi,stewj Cristou/ kai. ouvk evx e;rgwn no,mou) 열린다고 강조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h` pi,stij vIhsou/ Cristou/)만이 언약 백성이 되는 데 유일한 길이다. 참된 백성은 ‘믿음’과 ‘성령’의 법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들이다.


 “믿음”을 강조한다고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만들고 죄를 조장하는 분이라는 유대 선동꾼들의 질문은 잘못되었다. “결코 그럴 수 없다.”(mh. ge,noito).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은 십자가에 못박혔기 때문이다(2:19-21). 바울은 “내가 율법을 통해서 율법에 대해서 죽었기 때문에”(evgw. ga.r dia. no,mou no,mw| avpe,qanon)라고 했는데, 유대 지도자들은 ‘율법’을 잣대로 해서, 그들이 주장한 율법을 통해서 예수님을 못박았다. 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율법을 통해서(율법에 의해) 죽은 것처럼 그들 역시 율법을 통해서 죽게 된다. “죽고 살아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은 “존재의 변화”를 증명한다(2:19). 그리스도인인 바울은 십자가에 못박혀 믿음으로 신분이 바뀌었다. 살아 갈 때도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되려는 ‘육체’의 방법으로 살지 않는다(2:20).


유대인들은 바울의 율법없는 복음이 하나님의 은혜를 오용하도록 만들어 결국 도덕적인 혼란이나 방종에 빠지게 만든다고 주장했을 것이다(2:21). 그러나 바울이 보기에, 하나님의 은총을 폐하는 자들은 유대인들이었다. 십자가 사건은 하나님의 은혜를 증거하는 사건이다. 이방인들이 십자가를 믿음으로 새 언약 백성이 되는 것은 정당하고 약속에 근거한 것이요 하나님의 은총을 경험하고 고백하게 만든 사건이다.

 

 

  3.2. “누가 아브라함의 가족인가?”(3:1-4:31)


  (1) 바울은 “성령 경험”을 한 사람이야 말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논증한다(3:1-5):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듣고 믿음에서냐”(3:2-5)
  (2) 바울은 “성경을 통한 논증”을 시도한다(3:6-14): “그리스도께서…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3:13,14). “율법의 저주 아래 있는 자들”(3:14)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포함한 사람이다. 신약의 계시에서 보면 시내산 멤버쉽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유대인의 ‘대다수’가 언약 백성이 아니다. 그러나 이제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십자가 사건”으로 이방인과 유대인을 속량하는 길이 열렸다.


  (3) 바울은 아브라함의 가족에 대해 “인간의 관습을 통한 논증”을 한다(3:15-18): 바울은 아브라함의 유일한 씨(단수)는 ‘그리스도’라고 본다. 아브라함의 유일한 담지자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형성한다.
  (4) “율법의 기능과 목적”(3:19-25): 율법은 인류를 죄 아래 가두어(3:22) 인류의 절망적인 상황을 폭로하여 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통해서 하나님의 약속이 “믿는 자들”에게 주어질 수밖에 없는가를 드러내 준다(“율법의 긍정적인 역할”, 3:22). 율법이 기독교 복음을 받아들이도록 준비역할을 했다기 보다는, 율법의 통제를 받는 인류의 부정적인 모습이 드러났다. 율법은 잠정적으로나마 그리스도가 오실 때까지 몽학선생과 같이 통제하고 감독하여(“율법의 부정적인 의미”, 3:23)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는 축복이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3:24,25).


  (5)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된 신분”(3:26-29):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3:26,29). 이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시기 때문에 양자의 영이신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 갈라디아인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다.

 


  3.3. 종에서 아들로 변화된 신분 (4:1-31)


  (1) “종에서 아들로”(4:1-11): 하나님께서 갈라디아 신자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영을 보내셔서 그들은 하나님을 가리켜,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을 수 있게 되었다. 성령은 “하나님의 아들의 영”이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의 영을 받은 신자들은 하나님 아버지와 밀접하고 친밀한 관계를 경험하게 되었고, 성령님의 감동을 받아 마음속에서 진심으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다. 종이 아니라 아들이다!


  (2)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기까지”(4:12-20): 바울은 참된 그리스도인들로서의 갈라디아 교인들이 갖고 있는 신분을 의심하고 있다. 배교의 상황에서 바울은 처음에 복음을 전할 때처럼 갈라디아인들이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를 닮은 참된 그리스도인들이 될 때까지 해산의 고통을 다시 치러야 한다.


  (3) “사라와 하갈의 비유: 자유의 자녀들”(4:21-31): “형제들아 우리는 계집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하는 여자의 자녀니라”(4:31). 구원사에는 “계집종 라인의 구원사”와 “자유하는 여자 라인의 구원사”가 있다. 육체를 따라 난 사람들은 일차적으로는 이스마엘이다. 그러나 구약 역사에서 적용해 보면, “혈통이나 내세우는 불순 유대인”을 가리킨다. 바울은 4:24에서 하갈 계통 언약을 시내산 언약과 연결하여 시내산 언약으로 혈통적으로 언약 백성이 되었다고 하는 유대인들을 비판한다. 계집종 (육체를) 따라난 자는 그럴듯하게 행동하지만 언약의 백성이 의미하는 바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성령을 따라난 자들”은 혈통이 아니라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의 후손이 된 자들이다.

 


  3.4. “자유를 위하여, 성령을 따라”(5:1-12): “믿음은 사랑으로 나타난다”


  유대주의자들은 시내산 율법을 통해서 자유를 얻는다고 했다. 그러나 참 자유는 “사라와 이삭 이야기”에서 본 것처럼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자유다. ‘자유하게 하셨다’(hvleuqe,rwsen)는 “과거형”으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목적을 말해 준다. 그리스도를 주로 믿는 자들은 자유를 가진 자들이다. 자유의 백성들이다. 그러므로 자유한 자들은 지금 의롭게 되려고 할례를 하거나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 유대인들은 “율법의 행위”인 “할례”, “음식법”, “안식법” 등이 언약 백성이 되는 공인된 행위라고 주장했으나(5:4)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로써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완성’하셨다(5:4). 이제는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 다른 조건은 필요없다.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만이 참 자유를 줄 수 있다. 자유의 삶은 어떤 방식으로 나타나는가? 믿는 자들은 미래에 임할 ‘(칭)의의 소망’(evlpi,da dikaiosu,nhj)을 간절히 기다린다”(h`mei/j ga.r pneu,mati evk pi,stewj evlpi,da dikaiosu,nhj avpekdeco,meqa; 5:5). 현재는 “사랑으로” 믿음이 증거되는데, 새 언약백성은 “윤리적 열매”를 맺게 된다. “성령의 능력”을 통해서 맺히는 열매가 있어야 참 자유를 누리는 사람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은총으로 의롭게 되고 은총으로 선한 행위인 ‘사랑’을 나타낸다.

 

 

  4. 윤리적 권면 (5:13-6:18)


  4.1. 참 자유의 길: 성령을 따라 사는 삶 (5:13-24)


  (1) “사랑은 율법의 완성”(5:13-15): 갈라디아 성도들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다(5:13). 바울은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로”(avformh.n th/| sarki) 삼지 말라고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얻는 자유는 자기 멋대로 하는 방종이 아니라 “사랑의 의무”를 담고 있다. 기독교인이 율법의 멍에, 종의 멍에에서 해방되었다고 해서 윤리적 책임이나 의무에서 자유롭게 된 것이 아니다. 변화된 성도는 종 노릇을 하는 패턴을 바꾼다. 기독교인은 재림 때까지 율법의 멍에, 죄의 소욕이 아니라 사랑으로 종노릇을 한다.


  (2) “육체의 욕심과 성령의 열매”(5:16-24): 5:17에서 바울은 인간을 두 종류로 구분한다. 한 부류는 예수를 믿는 새 언약 백성이요(“성령에 속한 사람”), 다른 부류는 혈통과 조상의 유전에 의존해서 살아가는 배타적인 사람들이다(“육체에 속한 사람”). 하나님의 자녀들은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성령을 경험했고(3:2-5)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3:26-4:7). 하나님의 자녀는 성령님의 능력으로 새 백성이 되었고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특징을 갖고 있다. 육체를 따라 사는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다(5:21). 최종 판단은 하나님께서 하시지만 지상의 교회는 윤리적인 열매를 통해서 구원과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자인가의 여부를 판단하고 유추할 수밖에 없다. 5:22-24에서 열거한 성령의 열매는 윤리적인 열매다. 성령으로 난 사람들은 열매맺는 백성들이다.

 


  4.2. 성령의 실천적 가치 (5:25-6:10)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성령을 좇아 행하는 것이 과연 어떤 삶인가에 대해서 좀더 분명하고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5:25-6:10). 성령을 좇지 않고 육체의 유익을 따라 살다가 맺은 열매(6:1)는 철저하게 처리되어야 하지만 죄를 처리하는 과정에서도 성령의 열매가 나타나야 한다. “육체를 위하여(eivj th.n sa,rka) 심는 자”는 육체의 열매를 맺고 “성령을 위하여(eivj to. pneu/ma) 심는 자”(성령의 밭에 뿌리는 자)는 성령의 열매를 맺기 때문에,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은 낙심하지 말고 자신의 삶을 통해서 나타내고 논증해야 한다.

 


  5. 결론적 훈계(6:11-18): “새로 지음받은 자답게 살라”


  다른 서신과 달리 기쁨을 표하거나 기도를 요청하거나 송영을 담고 있지 않다. 편지를 쓰고 있는 마지막 순간까지 바울과 갈라디아 성도들 사이에 긴장감이 있다. 유대주의자들은 자신들이 박해를 받지 않으려고 할례를 억지로 받게 한 점도 있고, 육체로 자랑하기 위한 이유도 있다(6:12). 그러나 그들이 실제로는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 않는다. 자신들도 율법을 스스로 지킬 수 없으면서도, 할례를 그렇게 강조하는 것은 논리적인 모순이다. 한편, 성령께 속한 사람들, 십자가에 못박힌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은 할례나 무할례가 아니다. 새 백성, 새 피조물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존재의 변화가 일어났다. 십자가에서 못박혔으므로 새 사람이다. 새 피조물은 성령을 따른다. 옛 방식으로 사람을 구분하지 않는다. 십자가는 하나님께 나가는 옛 방식을 폐지하고 막힌 담을 허무는 등, 새로운 피조물들을 만드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를 믿고 신앙고백을 하는 것은 모두 그리스도의 은혜로 된 것이다.

 

 

 

Ⅱ. 갈라디아서의 신학적 메시지

 


  1. 바울 복음의 기원


  유대주의 선동꾼들은 바울의 사도직에 대해 의심을 던지고 그가 전한 복음은 예루살렘에서 받은 복음과 달리 이방 선교 과정에서 스스로 변경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바울은 ‘사람을 따라’(kata. a;nqrwpon) 복음을 받지 않았고 사람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조작한 것도 아니라고 한다. 바울의 복음은 그를 태에서부터 ‘작정’하시고 다메섹 도상에서 구체적으로 부르신 “하나님의 계획을 따라”(kata, to, qe,lhma tou/ qeou/),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o`…kale,saj dia. th/j ca,ritoj auvtou/)에게서 직접 받은 것이다(1:15-17).


바울이 다메섹에서 계시를 통해 받은 복음은 “이신칭의의 복음”(2:11-21)은 예루살렘 사도들도 알고 있는 복음이지만 바울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직접 계시를 받았다. 계시를 직접 받았으므로 혈육과 “의논하지”(prosaneqe,mhn) 않았다. “이신칭의”의 복음은 신적 계시이므로 만일 자신이 다메섹 계시를 통해서 받은 “이신칭의의 복음” 외의 것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며 바울은 “아나떼마”를 선언했다. 유대주의 선동꾼들이 전한 “사상”은 “다른 복음” 곧 “복음이 아님”이었다. 바울은 계시로 받은 “이신칭의”의 복음을 지키기 위해서 유대주의 선동꾼들 뿐만 아니라 게바도 책망한다(안디옥 사건).


바울이 받은 “이신칭의” 복음은 ① 한편으로는 이신칭의 복음은 유대주의에 대한 전투교리가 된다. “율법 아래서”(4:4), “육체를 따라 난”(4:23,29) 불신 유대인들이 아브라함의 가족이 아니라는 것을 드러낸다. ② 다른 한편으로는 “율법의 행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령의 능력”을 따라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다면서 아브라함의 가족을 재정의한다.

 


  2. 육체와 성령


  바울은 “영”과 “육”을 날카롭게 구분하고 있는데, 갈라디아서에서 말한 ‘육체’(3:2-5; 4:23,29; 5:16; 6:8)를 보면, 할례나 율법 준수처럼 유대인의 신분을 결정하는 표지들이 ‘육에 속한 것’이 될 수 있다. ‘육체’는 성령의 뜻을 거스리는 범죄 행위, 율법준수나 할례 등으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주장하는 태도, 자유방임적 삶, 분쟁 등을 포괄하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바울은 2:19에서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다”(evgw. ga.r dia. no,mou no,mw| avpe,qanon)고 선언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을 통해서(율법에 의해) 십자가에서 죽게 되었다. 성령을 따라 신분의 변화를 경험한 그리스도인들은 “이미”와 “아직”의 세상에서 육체의 삶과 전쟁 중에 있으므로(5:16-24) 살아갈 때도 “성령을 따라” 행동해야 한다.

 


  3. 누가 언약백성(아브라함의 가족)인가?


  (1)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그리스도인의 존재와 실존을 결정하는 기준은 “육체의 행위”가 아니라 “성령의 능력”이다. 유대인들은 유대인의 음식법(2:14-14), 월력준수(4:10), 할례(6:12f), 즉 “율법의 행위”(ta. e'rga tou/ no,mou)와 같이 “유대인의 신분표지의 행위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바울은 이방인이 의롭게 되는 길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evk pi,stewj Cristou/ kai. ouvk evx e;rgwn no,mou) 열린다고 강조한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언약 백성이 태어난다고 본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2:20).


  (2) “십자가 사건으로”: 바울은 아브라함의 자손을 규정하는 기준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십자가 사건”이라고 밝힌다(3:14). 아브라함의 언약 백성은 시내산 언약으로 들어갈 필요가 없다.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아브라함의 언약”에 따라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고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가 된다(3:29). 십자가 사건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을 포괄하는 언약의 사건이다. 이방인에게 아브라함의 복이 넘어가도록 하는 사건이다.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율법이 아니라) 아브라함 언약의 비전과 목표가 성취되고 이방인에게 미치게 된다. 바울은 4:1-11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으로 “종에서 아들로” 신분의 변화가 일어난다고 선언한다. 성령은 “하나님의 아들의 영”이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의 영을 받은 신자들은 하나님 아버지와 밀접하고 친밀한 관계를 경험하게 되었고,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다.


  (3) “자유하는 여자의 구원사”: 바울은 4장에서 “하갈과 사라”의 비유로 누가 자유한 신분인가를 논증한다. 유대인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시내산 언약 백성으로 지위를 얻게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바울은 구원사적인 두 언약(시내산, 아브라함)이 다른 목적과 다른 비전을 갖고 있다고 본다. 구속사에는 “계집종 라인의 구원사”와 “자유하는 여자의 라인의 구원사”가 있다. 바울은 4:24에서 하갈 계통 언약을 시내산 언약과 연결하여 시내산 언약으로 혈통적으로 언약 백성이 되었다고 하는 유대인들을 비판한다. “성령을 따라난 자들”은 혈통이 아니라 “약속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능력으로”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되었고 아브라함의 유산을 물려받을 자들이다.
 

 

  4. 언약 백성의 신분과 행위


  2장에 나타난 안디옥 사건은 “신분”(status)과 “행위”(behaviour)의 문제가 둘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하나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복음의 진리가 만일 유대인이나 이방인 모두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사실을 교훈한다면(신분) 그들은 더 이상 유대인처럼 살아서는 안 된다(행위). 복음의 진리는 사람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아”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만 말하지 않고(2:16) 하나님 백성답게 “믿음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도 요구한다(2:20). 샌더스(E. P. Sanders)는 신분(getting in)과 행위(staying in)를 마치 두 다른 구원론적 원리인 것처럼 날카롭게 분리하지만 신분과 행위는 다른 원리가 아니라 동전의 양면과 같다. 바울의 “이신칭의 구원론”은 그의 윤리사상의 기초와 근거가 된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면(we are justified by faith), 이제 동일한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we live in faith). 그러나 ‘이미’와 ‘아직’ 사이에 살고 있는 기독교인 개인이나 공동체는 성령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 애써야 한다. 성령의 뜻을 따르고 있는 여부는 성령의 열매를 통해서 증명된다. 바울은 6장에서도, 새롭게 변화된 존재는 “새로 지음받은 자답게 살라”(6:11-18)고 가르친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는 십자가 사건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난다(6:18). 이 십자가는 하나님께 나가는 옛 방식을 폐지하고 막힌 담을 허무는 등, 새로운 피조물들을 만드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를 믿고 신앙고백을 하는 것은 모두 그리스도의 은혜로 된 것이다.

 


  5. 갈라디아서의 성령론: “신분변화의 주체, 윤리적 열매를 창출”


  갈라디아서에 나타난 성령은 언약 백성을 출생시키는 능력이 되면서 동시에 “윤리적 삶”을 살게 하는 능력을 준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복음을 듣고 성령을 경험했고(3:2-5)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3:26-4:7). 갈라디아 기독교인들은 아브라함의 약속을 따라 난 “약속의 자녀들”(3:14)이요 “성령을 따라 자들”(4:29)이다. 만일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다면 앞으로도 성령을 따라 살아야 한다. 바울은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 뿐”(avlla. pi,stij diV avga,phj evnergoume,nh)이라고 하면서 ‘사랑’(avga,ph)은 성령의 열매, 삶으로 나타난 윤리적인 열매를 강조한다.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 사랑이라는 행위로 일하지 않는다면 참된 믿음이라고 할 수 없다. 그리스도인에게서 나타난 “사랑이라는 행위”는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행위요 “성령의 열매”(5:22)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이라면, 이제는 할례와 같은 표시가 아니라 사랑이라는 행위를 통해서 증명해야 한다(5:6).


이 사랑의 행위는 “성령의 능력”으로 가능하게 된다. 성령의 뜻을 따르고 있는 여부는 성령의 열매를 통해서 증명된다. 성령의 열매는 “윤리의 열매”다. 이처럼 크리스천은 십자가 복음을 통해서 실제로 사람들이 변화되어 윤리적 변화를 일으킨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복음은 윤리를 갖고 있다. 만일,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하면서 그러한 나타난 열매를 보여주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다(5:19-21). 최종 판단은 하나님께서 하시지만 지상의 교회는 윤리적인 열매를 통해서 구원과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자인가의 여부를 판단을 유추할 수밖에 없다.

 


http://www.kbible.net/technote/read.cgi?board=k02theo&nnew=2&y_number=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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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예수 연구의 코페르니쿠스적 변화

 

- [예수 세미나]를 중심으로 -


                                                                     
김준우박사 (한국기독교연구소 소장) 

 

 
 

  I. 문제제기: 세계/한국 기독교의 몰락 위기 -- 윤리학자가 최근의 예수 연구 소개에 전념하는 이유 
 
 

1.  한국교회/이민교회는 지난 세대 동안 급성장했기 때문에, 서구교회의 몰락을 강 건너 불구경하듯 했다.  그러나    2000년 1월 London Sunday Times 보도 - "영국 전체국민의 70%가 하나님을 믿지만, 18세 연령층의 경우는 77%가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 기독교가 한 세대만에 이렇게 몰락하는 위기는 조만간 한국교회의 현실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 한국교회의 성장 둔화와 쇠퇴는 젊은층과 고학력자가 교회를 빠져나가기 때문으로 조사. 새신자 전도의 어려움 - 영남지역의 꽤 큰 교회에서 "30년 목회하는 동안 새신자는 10명쯤"- 3년에 1명꼴. 2천년 동안 확장을 거듭한 기독교가 서구에서 한 세대만에 급속히 몰락하고 있으며, 국내에서도 새신자를 얻기 힘들어 교회가 점차 "양로원"으로 바뀌어가는 현실적 위기의 신학적 이유는 무엇인가? 교회 외적인 요인들, 즉 유물론적 세계관, 세속주의, 소비주의, 주5일 근무제 등의 도전 앞에서 교회 내적인 요인 해결이 시급하다.
 

 

2. 귀국해서 두세 군데 기독교 대학들에서 몇 년 동안 [기독교 개론]과목을 가르친 경험: 신학생들 가르치는 것과는 많이 달랐다. 신학생들은 기독교 전통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는 학생들을 상대로 설명하는 작업이지만, 기독교 대학들의 학생들 가운데 기독교인은 5-10%에 불과했다.  대다수 비기독교인 대학생들이 교회에 등을 돌리는 이유는 첫째로, "기독교인들은 언행이 일치하지 않는다",  둘째로, "교회가 가르치는 것들은 동정녀 탄생, 육체부활 등 이해할 수 없는 것, 믿을 수 없는 것들이 많다."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를 무조건 믿으라고 한다."  "믿을 수 없는 것을 믿는 것이 참 믿음이라고 억지부린다."
 

 


3. 물음


   1: 왜 기독교인들은 언행이 일치하지 않는가?


왜 기독교인들은 정직하지 않은가?
왜 기독교인들 가운데 부정부패와 비리에 연루되는 사람들이 비기독교인들보다 그 비율이 많은가?
왜 기독교인들이 예수는 믿으면서, 예수처럼 목숨 걸고 살려 하지 않는가?
생태계 파괴에 대한 무관심.
 

 


물음


    2: 교회가 가르치는 동정녀 탄생이나 육체부활은 교회 안에서만 통하는 말이지, 교회 밖의 비기독교인들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교회 언어가 매우 게토화된 언어이다.- 새신자들의 장벽.


교회는 오늘날 교육받은 비기독교인들에게 동정녀 탄생이나 육체부활을 어떻게 이해시킬 것인가?  아니 비기독교인들만이 아니라, 교인들은 동정녀 탄생이나 육체부활을 정직하게 이해, 수긍하는가? 
 

4. 이 문제는 기독교의 미래를 위해 사활이 걸린 문제이다. 정직한 이해 -> 확신 -> 열심 -> 교회부흥.  "교회의 게토화된 언어를 비기독교인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하지 못한다면," 그래서 "믿을 수 없는 것을  믿는 것이 참 믿음"이라고 윽박지르는 한, 기독교가 몰락하고 만다는 것은 서구교회가 이미 입증했다.


오강남 박사의 {예수는 없다}가 1년 넘게 기독교 학술서적 베스트셀러 1위- 성경에 대한 정직한 이해를 추구.  청년층의 갈증 반영, 그러나 예수에 대해서는 고작 "성불하신 예수", "유영모와 함석헌의 예수"가 전부이다. 
 
 

 


    II. 최근의 "예수 르네상스" - [예수 세미나](Jesus Seminar)를 중심으로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데, 굳이 예수를 "따라서 살아야" 할 필요가 있는가? -> 언행 불일치의 근본 이유.
매주일 사도신경의 내용에 대해 머리로는 정직하게 이해하지 못하면서 그냥 고백하는 것, 외우는 것은 기독교인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


기독교인의 정직하지 못하다는 평을 받는 이유는 근본적으로 기독교인이 신앙고백조차 정직하게 고백하지 않기 때문은 아닌가? 존 캅 박사의 지적대로, 기독교인들이 교리를 이성적으로 검토하고 토론을 통해 자기 나름의 신앙으로 다듬어내지 못하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이 열정이 없는 것 아닌가?  사도신경에는 알맹이가 빠져 있다. 즉 예수의 잉태/탄생, 죽음과 부활/승천만 있지, 예수의 행적, 교훈은 없다.  이렇게 된 이유는 당시 헬레니즘 밀의종교 영향을 받은 바울의 구원자 이해(하늘에서 내려왔다가 다시 승천한 구원자)가 압도하게 된 때문이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잉태, 탄생, 수난, 죽음, 승천)은 모두가 수동태로 되어 있다.- 예수의 일생이 이처럼 수동적이라면, 기독교인의 생활태도도 자연히 수동적, 비주체적, 노예적이 된다. 
 

 

1. 예수 이해는 본문(text)과 상황(context)의 관계 이해가 기초이다 - 예수와 폭력 문제에 대한 오해를 중심으로 9․11 동시다발 테러사건 이후 모슬렘 근본주의자들의 폭력에 대한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의 대응폭력이 문제가 되고 있다. 다른 한편에서는 기독교인들이 원수 사랑을 내세워 폭력에 굴종함으로써, 인간의 존엄성이 짓밟히고, 결과적으로 폭력을 부추기고 있다. 폭력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은 정확히 무엇이었는가? 
 
 


   1)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가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라"(마태 5:39).


이 말씀은 기독교인들이 일반적으로 오해하듯이 폭력에 대한 굴종이 아니라, 절대로 폭력을 용납하지 말고, 자신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폭력에 반항하라는 가르침이었으며, 폭력에 대한 피해의식이 복수심으로 발전하여 똑같이 폭력을 사용하는 가해자가 되지 말라는 가르침이었다.


누가 오른편 뺨을 친다는 것은 가해자가 왼쪽 손바닥이나 왼손 주먹으로 친다는 뜻이다. 즉 가해자가 오른쪽 손바닥이나 주먹으로 칠 경우에는 왼뺨을 맞게 된다. 따라서 누가 오른편 뺨을 친 경우, 즉 가해자가 왼쪽 손바닥이나 왼손 주먹으로 치는 것은 상처를 주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예수 당시 유대사회에서는 공개적인 장소에서 왼손을 사용하지 않았다. 쿰란 공동체에서는 심지어 왼손을 사용하여 제스처를 하는 경우, 열흘 동안 회원직을 박탈하고 참회를 해야만 했다.  오른쪽 손을 사용하여 오른편 뺨을 때릴 수 있는 것은 손등으로 때릴 경우뿐이다. 이것 역시 상처를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창피와 모욕을 주기 위한 상징적 행위이다.  그러므로 "누가 오른편 뺨을 치거든"이라는 말은 가해자가 왼손으로 상대방의 오른편 뺨을 치거나, 아니면 오른쪽 손등으로 오른편 뺨을 치는 것으로서, 이것은 모두 상급자가 하급자에게, 주인이 노예에게, 남편이 아내에게, 부모가 아이에게, 로마인들이 유대인들에게 "네 주제를 파악해라"는 뜻으로, 혹은 "너는 내 부하이니 권위에 복종하라"는 뜻으로 손등으로 치는 것이었다. 이것은 한 마디로 말해서, "너는 쓰레기 같은 존재다"라는 뜻을 전달하는 수단이었다.


예수는 그의 청중들, 즉 당시의 소작농들과 병자들, 여인들이 이런 모욕을 당하는 것에 익숙해 있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예수의 이 말씀은 "그런 비인간적인 모욕을 더 이상 당하지 말고, 왼쪽 뺨도 돌려대라"는 가르침이었다. 이것은 반항하라는 뜻이 분명하다. 즉 오른쪽 뺨을 맞은 사람이 왼쪽 뺨을 돌려댈 경우에는 가해자가 더 이상 손등으로 때릴 수 없게 된다. 또한 가해자가 왼손으로 친 것은 상처를 주지 않고 단지 모욕할 생각으로 친 것인데, 왼쪽 뺨을 돌려댈 경우에는 부득이 오른쪽 손으로 때릴 수밖에 없게 된다. 오른쪽 손으로 때린다는 것은 동등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싸울 경우뿐이기 때문에, 상급자가 오른 손으로 때리는 것은 결국 하급자를 자기와 동등한 위치에 있는 존재로 인정하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왼쪽 뺨을 돌려대는 것은 소작농이나 노예가, 혹은 유대인이 그 상급자에게 대하여 "나는 인간이다"라고 선언하는 행위이다. "나를 존엄성이 있는 존재로 취급하라"는 말이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즉 "당신이 나를 때려죽일 수도 있지만, 나는 더 이상 쓰레기가 아니며, 당신과 동등한 사람이다"라고 행동으로 선언하라는 것이다.  따라서 왼쪽 뺨을 돌려대라는 것은 폭력에 굴종하여 눈을 내리깔고, 주인의 처분에 맡기라는 것이 결코 아니다. 예수는 지금 "절대로 굴종하지 말라"고 가르치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시작되었기 때문에, 현재의 폭력적 세계 속에서 새로운 인간관계를 만들어나가라는 것이다. 그러나 혼자서 그런다면 맞아죽을 것이다. 모든 약자들이 함께 왼뺨을 돌려댈 때 비로소 사회적 혁명이 일어날 수 있다는 말이다. 
 
 

 

2) "너를 고소하여 네 겉옷을 달라 하면 속옷까지 내주어라."


이 말씀 역시 불의를 조장하는 것으로 오해되어 왔다.  예수 당시 유대인들은 겉옷과 속옷이 입은 옷의 전부였다.  이 말씀의 배경이 되는 담보물 규정은 신명기 24:10-14에 나와 있다. 보통 담보물은 양이나 염소처럼 동산(動産)을 담보물로 잡지만, 그런 종류가 없을 경우 부동산을 담보물로 제공했다. 그러나 궁핍한 사람들은 겉옷을 담보로 잡혔지만, 낮 동안뿐이고, 해가 질 무렵에는 채권자가 반드시 채무자에게 겉옷을 되돌려주어, 추운 겨울에 채무자가 그 겉옷을 덮고 잘 수 있도록 했던 것이다.  예수 당시에 빚 문제는 가장 심각한 사회적 문제였다.  로마제국은 제국을 유지하기 위해 갖가지 세금을 부과했다. 부자들이 세금을 탈루하는 방식은 제국의 변방에 있는 토지를 매입하여 재산을 은닉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농민들은 토지를 팔려고 하지 않았다.  가족의 생계가 그 토지에 달려 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부자들이 농민들의 토지를 빼앗는 방식은 빌려준 돈이나 곡식에 대해 25% 내지 250%의 엄청난 이자를 붙이는 방식이었다. 농민들은 결국 이자를 갚지 못해 땅을 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예수는 이런 상황에 대해 채권자들이 아니라 채무자들을 상대로 이 말씀을 가르친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이 법정에서 이길 수 있는 길은 없었다. 그러므로 "너를 고소하여 겉옷을 달라하면 속옷까지 내어 주라"는 말씀은 채무자가 입고 있는 속옷까지 벗어주어 완전히 벌거벗고 나체가 되라는 말이다. 당시 유대인들 사회에서는 자신의 벗은 몸을 남에게 보이는 것이 금기시되었기 때문에, 알몸이 되는 것은 최소한 사람들을 찡그리게 만드는 일이었다. 로버트 펑크의 연구에 따르면, 사해사본의 하나인 {훈련교범}에 따라, 옷에서 팔을 빼면서 우연히 맨몸을 드러내면 30일 간 참회해야 했다. 친구에게 아무 이유 없이 맨몸을 드러낸 경우에는 6개월 간 벌을 받았다(Manual of Discipline 7:12, 14.). 수치를 당하는 것은 그 나체가 된 사람을 보는 사람들이다. 이것은 게릴라 전술이다. 채권자 앞에서 벌거벗고 떠남으로써, 고리대금에 근거한 경제구조가 어떤 것인지를 남김없이 폭로하라는 가르침이다. 
 


 
3) "누가 너더러 억지로 오 리를 가자고 하거든 십 리를 같이 가 주어라."


이 말씀 역시 많이 오해되어 왔다. 소요사태가 발생할 경우 로마 군단들은 신속하게 이동할 필요가 있었다.  하루에 100리를 행군해야 할 경우도 있었다. 30~40 킬로그램에 달하는 배낭을 지고 행군하는 것을 쉽게 하기위해 로마의 군법은 군인들이 민간인들을 시켜 대신 배낭을 지고 가도록 하는 권리를 허락했다. 이러한 명령에 따르는 것은 예속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불응하는 것은 반역에 해당되었다. 그러나 그 권리를 남용할 경우 토착민들의 불만을 고조시킬 위험이 있기 때문에, 반드시 오리로 제한시켰다. 또한 로마의 모든 도로에는 오리마다 표지석이 세워져 있기 때문에, 이 군법을 어기는 군인들에 대해서는 장교들(백부장)이 적절한 처벌을 주도록 했던 것이다.  예수는 그 청중들에게 단지 로마군인들이 시키는 대로 하라는 것이 아니라, 배낭을 지고 오 리를 걸어간 후에 오리를 더 가겠다고 우기라는 것이다. 그러면 누가 피해를 입는가? 그 병사로 하여금 군법을 어기도록 만들어 난처한 입장에 빠지게 하라는 것이다. 로마 병사가 유대인에게 싹싹 빌도록 만들라는 것이다. 유대인이 1마일을 더 지고 가겠다고 맞설 때 로마 군인이 당황해하는 모습을 우리는 쉽게 상상할 수 있다.


한 마디로 예수는 식민지의 폭력적인 억압과 수탈 체제 속에서 사회적 약자들의 존엄성과 자주성을 목숨 걸고 지키는 전략을 통해 개인의 해방과 하나님 나라의 정의와 평화를 확보하려 했다고 볼 수 있다. 폭력 앞에서 굴종하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비폭력 투쟁을 전개함으로써 폭력을 극복하라는 가르침이다. 또한 우리의 안전은 타인의 불안전 위에 확보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안전을 보증할 때만 우리가 안전할 수 있다는 가르침이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가르침 역시 우리가 폭력을 당할 때라도 비폭력 투쟁을 통해 우리의 존엄성을 지킬 뿐 아니라, 가해자의 폭력을 철저하게 폭로하여 자신들의 폭력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 후에 그를 용서함으로써, 우리도 용서받을 수 있다는 가르침으로서, 인간 사이의 철저한 신뢰에 바탕을 둔 윤리이다.
 

 


2. "예수 르네상스"의 신학적 배경과 방법론


18세기 계몽주의 이전의 성서연구: 교의학에 종속되어 교리를 변증하는 수단/도구.
18세기 계몽주의 이후의 성서연구: 역사비평이라는 합리성을 통해 본문 배후 탐구 - 교리와 교권으로부터 해방.
20세기 전반부: 역사적 예수는 알 수도 없고, 케리그마의 그리스도가 우리를 구원하기 때문에, 알 필요도 없다.   
1960년대 해방신학: 현재적 해방실천에 초점 - 텍스트 자체보다는 해석자의 컨텍스트에 초점을 맞추었다.  
1970년대 사회학적 방법(Gottwald, Kee, Horseley, Teissen): 본문의 사회적 요소들의 상호작용 관계 관찰.
1980년대 구조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 해석: 본문 배후가 아니라 본문 자체의 구조 속에서 의미 해석.
1980년대 이후 "예수 르네상스" - 역사적 예수에 관한 연구서들이 수 십 권 출판.
1983년 Society of Biblical Literature 산하에 Historical Jesus Section 구성됨
1985년 [예수 세미나] 조직 
 

 

 
1) 예수찾기의 간략한 역사 (게르트 타이센․아네테 메르츠, 손성현 역, {역사적 예수}, 다산글방, 2001, 31 이하를 중심으로 정리) 
 
(1) 1단계(Old Quest): 18세기 중엽-19세기 독일

합리주의, 중세의 권위에서 벗어나 기독교 신앙의 "참된 근거" 추구

교회가 가르쳐주는 신격화된 "그리스도"가 아니라, 성서와 역사와 이성이 가르쳐주는 "진짜 예수"를 찾기 시작.

라이마루스(1694-1768): 네 복음서들에 기록된 사건들의 순서들이 서로 다르다 - 복음서들의 불일치 문제 지적.

예수는 실패한 유대인 혁명가였다. 예수는 예언자적-묵시적 성격의 유대인인데 반해, 기독교는 사도들이 만들어낸 것이다. 예수의 정치적-메시아적 메시지와 사도들의 그리스도 선포 사이의 불일치는 사기 때문이다.

슈트라우스, {예수의 생애}(1835/36): 예수는 위대한 종교적 천재 가운데 하나, 기적적으로 종말을 기대하다.  비극적 최후를 맞이한 "열광적" 유대인이었다. 복음서들은 역사가 아니라 "신화적 진술"이다. 예수 전승이 신화적으로 변형된 것은 사도들이 사기친 것이 아니라 신화적 상상력의 무의식적 과정 때문이다.
    

 


(2) 2단계: 역사적 예수 탐구에 대한 자유주의 신학의 낙관론,

18세기 말부터 100년 동안 수많은 "예수전" 연구 - 르낭(1863), 슐라이에르마허(1864), 슈트라우스(1835, 1865) 등 교회의 선포와 역사적 예수를 대치시킴.

예수의 도덕적 가르침"만으로도 충분한 기독교인이 될 수 있다 -> 기독교의 신빙성 근거 -> 자유주의 신학

르낭: 초기에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으나, 차츰 너무 높은 수준의 것을 요구함으로써 배척받음.

홀츠만: 무시간적인 윤리적 진리를 설파하는 교사의 모습,  

요하네스 바이쓰: 임박한 종말을 선포한 이

슈바이처(1906): 예수는 "철저한 종말론자" 곧 가까운 장래에 하느님의 기적적 간섭에 의해 종말이 일어날 것 기대.  자신의 선교중에 사람의 아들이 도래하리라는 기대를 갖고 사역하였으나, 이런 기대가 빗나갔음을 알고 자신의 백성을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자신에게 메시아적 고난을 체현하기 위해 자발적 죽음 선택. 그러나 그 종말이 일어나지 않았다. 예수는 "착각한 묵시종말론자"(mistaken apocalypticist)였다. 슈바이처는 역사적 예수 찾기를 포기하고 다시 "신앙의 그리스도"에게 돌아갔다.

비판: 예수전 연구는 역사적 예수의 참 모습이 아니라, 각 저자의 시대정신과 이상이라는 의상을 예수에게 덧입힌 현대적 예수를 그린 것이다.

 

 

(3) 3단계: 역사적 예수 안 찾기 시대(no quest): 질문의 폐기 시대

신정통주의(불트만, 바르트, 틸리히 등) - 케리그마의 그리스도 // 역사적 예수 역사적 예수를 찾는 일은 역사적으로 불가능하며 신학적으로 불필요하다.

양식비평: 복음서의 전승들이 직접 반영하는 것은 초대교회의 삶의 모습이지 역사적 예수의 모습이 아니다.

켈러(1896): 진짜 예수란 역사가가 발견할 수 있는 예수가 아니라, 처음 신앙인들이 믿었던 케리그마 그리스도.

바르트의 <교회교의학>(1932): 예수의 삶의 의미와 존재 자체의 의미는 그의 죽음에서만 발견할 수 있다.

불트만의 <예수>(1926), <신약성서와 신화론>(1941): "역사적 예수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 바가 없다."

불트만: 예수의 가르침은 지금 여기에서의 결단을 촉구하는 실존주의적 도전.  예수의 인성을 발견하는 일은 불가능하며 필요하지도 않다. 필요한 것은 그가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사실뿐이다.  초기 그리스도교는 유대교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라 헬레니즘에서 유래했다.

비판: 공적: 세상의 역사를 최고의 왕좌에 모시는 이른바 역사절대화라는 우상숭배로부터의 탈출 극단적인 역사회의주의라는 불안의 늪에 빠지지 않도록 보호함,  "믿음만으로"라는 신앙우선의 정신을 재생.

폐해: 케리그마 신학과 실존론적 해석학의 결합은 성서의 구원의 메시지를 극단적으로 사사화, 내면화, 정신화, 추상화시키는 엄청난 폐단을 야기시켰다(김창락, 62) 
 

 


(4) 새로운 탐구(New Quest): 역사적 예수 연구는 방법론적으로 가능하며 신학적으로 필요하다.  다만 역사적 예수의 독특한 언동 속에서 그리스도 케리그마의 근거를 찾으려함.  
예수의 가르침 속에 내포된 자기 이해는 초기 기독교 선포 속에 드러난 자기이해와 비교함으로써 새로운 탐구를 이룩할 수 있으며, 신정통주의의 지침 아래에서 타당하다. 문학적 방법과 역사적 방법.


케제만의 {오늘의 신약성서 문제}, 본캄의 {나사렛 예수}(1956), 로빈슨의 {역사적 예수에 대한 새로운 탐구}(1983)  신정통주의의 틀 속에서, 복음서 속의 예수와 바울서신들 속의 그리스도 사이의 연속성 찾기에 주력하였다.

 

보른캄: 역사적 예수와 케리그마의 그리스도 사이에 내용상 연속성 있다. 현재적인 종말론적 성취

예레미아스: 모든 세대의 사람들을 향한 하느님의 부르심의 육화된 존재

비판: 신정통주의는 예수의 중요성을 단지 그의 죽음과 부활에만 국한시켰기 때문에, 부활절 이전의 예수의 생애는 기독교 신앙의 출발과 연관성이 없는 것으로 만들었다.(펑크, 109)
 


(5) 세 번째 탐구(Third Quest) - 예수 르네상스 1975년 이후 신정통주의 붕괴, 나그 함마디 문서, 사해 두루마리 발견, 비유와 지혜전승 재발견,  -  종교사학, 문화인류학, 사회과학 등으로부터 배운 모델, 학제간 연구
a. 역사적 예수와 복음서들의 예수 사이를 구별한다.(근본주의자들과 복음주의자들은 이 둘이 똑같은 존재라고 주장)
b. 신약성서 복음서들 이외의 자료들도 이용한다.   (   ꡒ    비정경 자료들은 중요하지 않음을 주장)
c. 교회의 모든 교리들을 역사적 탐구에서 제외시키지 않는다 (   ꡒ    역사적 예수를 신조의 그리스도에게 복종시킴)
d. 예수의 말씀과 행적들 가운데 진정한 것을 가려낸다. (    "     가려내지 않는다)

 

샌더스: 예수는 유대민족 복권의 신학 전통에서 이해되는 묵시종말론적 예언자이다.

버튼 맥: 방랑하는 견유학파적 현자, 전복적인 지혜의 교사

엘리자베쓰 쉬쓸러 피오렌자: 예수는 지혜의 예언자, 평등한 제자직

존 도미닉 크로산: 브로커 체제에 대항하여 치유와 개방된 식탁을 통해 철저한 평등주의를 실천한 사회적 혁명가

마커스 보그: 카리스마적 치유자, 성인, 전복적 현자, 사회적 예언자, 이스라엘의 재활성화를 추구하는 운동의 창시자

유대교: "하느님이 거룩하신 것처럼 너희도 거룩해라"(레 19:2), 예수: "하느님이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워라"(눅 6:36)

리처드 호슬리: 정치적 혁명이 아니라 밑바닥에서부터의 사회적 혁명가 
 
 

 

2) 예수 세미나


[예수 세미나]는 1985년에 로버트 펑크가 중심이 되어 신약학자 200여 명이 조직한 공동연구 모임으로, 정회원에 속하는 신약학 전공 박사만 76명에 이른다. 이들은 1985년 이후 매년 두 차례씩 나흘 동안 40명 내지 50명이 참석하여 공동 세미나를 개최하여, 새로운 천년기를 앞두고, 그 동안의 역사적 예수 연구에 대한 여러 학자들의 연구 결과들을 종합하기 위해, 역사상 처음으로 예수의 말씀과 행적들로 되어있는 모든 기록들을 수집하여, 그 진위를 투표로 평가하여, {5복음서: 예수의 진정한 말씀을 찾아서}(The Five Gospels: The Search for the Authentic Words of Jesus, 1993 - 네 복음서와 도마복음을 새롭게 번역했기 때문에 이 책은 "학자역본"이라고 불리기도 한다)와 {예수의 행적: 예수의 진정한 행적을 찾아서}(The Acts of Jesus: The Search for the Authentic Works of Jesus, 1998)를 출판하여, 전세계 기독교계에 큰 충격을 던진 학자 집단이다. 그 충격은 타임지(1996년 4월8일자, pp. 52-60), 뉴스위크지(1996년 4월8일자, pp. 60-70),  유에스 뉴스 & 월드리포트지(1996년 4월8일자, pp. 47-53)에도 잘 소개되어 있다.  최근의 보도(Ministry, 1999, Jan.)에 따르면, [예수 세미나], 특히 크로산과 펑크의 저서들을 통해, 미국 교회 교인들 사이에 "예수 붐"이 일어나고 있어, 목회자들이 이 저서들을 읽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예수 세미나의 공동대표를 맡고 있는 존 도미닉 크로산 박사의 {예수는 누구인가}는 그가 1991년에 출판한 책으로서 500쪽이 넘는 방대한 저작 The Historical Jesus: The Life of a Mediterranean Jewish Peasant의 축소판으로서, 이 책 Historical Jesus는 출판된 지 1년 반만에 4만 부가 팔린 책이었다. 크로산 박사는 1950년 나이 16살에 가톨릭 수도회(세르비떼)에 들어가 1969년 결혼을 위해 사제직을 떠나 드폴 대학교의 교수가 된 후 1995년 그 대학의 명예교수로 은퇴할 때까지, 평생 동안 역사적 예수 연구에만 일생을 바친 학자이다. {예수는 누구인가}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예수에 관해 질문하는 물음들에 대해 대답하는 형식으로 쓴 책이다. 그는 특히 예수의 탄생 이야기들이 복음서들마다 서로 다르게 기록된 이유, 예수가 세례 요한과는 달리 당시의 민중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선택한 전략들과 그 신학적 이유, 예수가 처형된 이유, 십자가에 처형된 사람들에게 무덤 같은 것이 있을 수 있었는지, 예수를 매장했다고 기록된 아리마대 사람 요셉의 이야기가 복음서들마다 서로 다르게 기록된 이유, 부활절에 일어난 일 등을 역사적으로 정직하게 설명해주고 있다. 로버트 펑크는 35년간 대학에서 역사적 예수를 가르치다가 몬태나 대학교에서 은퇴한 학자로서, [예수 세미나]를 설립하고 그 세미나의 결론들을 위의 두 책으로 엮어내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다. 따라서 {예수에게 솔직히}는 그 개인의 저작이라기보다는, [예수 세미나]에 적극 참여한 75명의 통찰력이 결집된 책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이 책의 1부 "나사렛으로 되돌아가는 길"에서 어떻게 우상파괴자 예수가 기독교의 성상/우상이 되었는지를 설명하고, 2부 "예수의 복음"과 3부 "복음서들의 예수" 즉 "예수에 관한 복음"을 구별하고 있다. "예수의 복음"은 예수의 비유들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내부인"들(제사장, 바리새인들, 즉 경건하고 정결한 종교인들)과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리라고는 꿈도 꾸지 못하고 있던 "외부인들"(병자들, 죄인들, 불구자들, 즉 율법적으로 부정한 사람들)이 뒤바뀌게 되는 것, 즉 "첫째가 꼴찌가 되고, 꼴찌가 첫째가 된다"는 말씀의 구체적인 예증들이라고 설명한다. 둘째로 "복음서들의 예수"는 처음 기독교인들이 예수를 "마케팅"하기 위해 예수의 기적 이야기들, 죽음, 부활, 재림, 출생 이야기들을 어떻게 신화적으로 덧칠하였는지를 하나하나 집어내고 있다. 이 책은 존 로빈슨의 {신에게 솔직히} 이상으로 학문적 정직성을 고집한 책이다.
 
 

 


3) 최근 역사적 예수 연구의 방법론 - 학제간 연구
 


최근에 학자들이 제안한 예수상들은 정치적 혁명가로서의 예수(S. G. F. Brandon, 1967), 주술사로서의 예수(Morton Smith, 1978), 갈릴리의 카리스마적 인물로서의 예수(Geza Vermes, 1981, 1984), 갈릴리의 랍비로서의 예수(Bruce Chilton, 1984), 힐렐 학파 혹은 최초의 바리새파로서의 예수(Harvey Falk, 1985), 에세네파 예수(Harvey Falk, 1985), 그리고 종말론적 예언자로서의 예수(E. P. Sanders, 1985) 등이 그것이다. 여기에 마커스 보그(Marcus Borg, 1984)의 "종교적 달인""카리스마적 존재로서 병고치는 자""지혜의 스승""사회적 예언자""운동의 촉매자"와 리처드 호슬리(Richard Horsley, 1987)의 예수상도 덧붙일 수 있다. 크로산은 학제간 연구를 통해 이처럼 다양한 예수상들의 혼란을 돌파한다.


(1) 교차문화적이며 통시적인 사회인류학: 接神종교 이론, 질병과 고통, 주술, 식사, 사회계층론, 저항운동이론 등.


(2) 헬레니즘 혹은 그리스-로마의 역사: 브로커체제-지배체제 분석, 노예제 농경사회의 피지배층의 생활, 각종 저항운동,


(3) 예수 전승의 문헌 분석을 통한 미시적 차원: 522개 예수전승의 단락들에 대한 전승층 구분.


(4) 성서와 기독교 전통, 특히 교리의 신화적 언어와 세계관 배후에 놓여있는 체험 탐구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관계의 유비 -> 생물학적 유비 -> 형이상학적 유비(보그, {예수의 의미})


(a) 예수는 언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는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 된 순간에 대해 바울은 "부활"을 통해서(롬 1:4), 마가는 "세례"를 통해서(막1:11), 마태와 누가는 "잉태"를 통해서(마 1:20; 눅 1:32), 요한은 "태초"부터(요 1:1-18)라고 주장한다.


(b)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란 고백의 근거가 된 체험의 내용은 무엇이었나?  예수의 "동정녀 출생" "부활/승천"을 고백하게 된 체험의 내용은 무엇이었나?
 
 

 


           3 최근 역사적 예수 연구의 새로운 강조점들 - 코페르니쿠스적 변화 
 

 1) 예수의 사회적 세계: 농경사회, 후견인-의뢰인의 착취체제, 절망의 시대, 100년 동안 33회의 농민저항 시대.
이러한 학제간 연구 방법론에 따른 크로산의 분석에 의하면, 예수운동의 핵심은 1세기 로마제국의 세계화에 대한 저항이었다. 역사상 가장 강력한 군사력을 통해 지중해 세계를 정복한 로마제국은 정복을 통한 약탈과 대농장을 중심으로 한 노예경제를 바탕으로 전세계의 상업화, 도시화를 추진했다. 크로산은 {역사적 예수} 한국어판 서문(2000년)에서 예수가 "로마제국의 세계화, 도시화, 상업화에 맞서서 저항하였다"고 말한다. 
 

(1) "로마의 평화"는 주변부에 대한 폭력과 전쟁을 통한 중심부의 평화였을 뿐 아니라, 내국인들에게도 보복을 은폐하는 신화였다.  우선 크로산은 {역사적 예수} 제1부 "브로커들의 제국"에서, "로마의 평화"가 허구적인 정치적 선전이었다는 사실을 밝힌다. 이를 위해 크로산은 엘리트층의 문학적 기록이 아니라, 옥시린쿠스 파피루스 속에 나타난 식민지 농민들의 문서, 즉 예수 당시의 예수와 같은 계급이었던 노동자 힐라리온의 편지를 인용하고, 직조공 트리폰의 일대기를 추적하여, 당시의 노동자들의 힘겨운 일생과 무거운 세금, 벌금, 징병제도 등을 분석한다. 이어서 그는 로마제국의 평민들의 고통을 입증하기 위해 [투리아에 대한 추도]에 나타난 일화를 추적하고,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대의 여러 시인들, 즉 버질, 호레이스, 프로퍼티우스, 오비드 등의 생애와 작품을 통해 로마제국의 "보복"과 "공포"를 설명한 다음, 타키투스의 기록에 나타난 브리튼의 장군 칼가쿠스의 로마제국에 대한 평가를 인용하여 로마제국의 실상을 밝힘으로써, "로마의 평화"라는 허상을 벗긴다. "그들은 약탈, 살육, 강탈을 제국[imperium]이라 부르고, 폐허로 만드는 것을 평화라 부른다."


(2) 로마제국은 의뢰인-후견인체제로 연결된 친분중심사회로서, 부패와 불평등, 억압과 착취의 사회였다.  크로산은 토마스 카니(Thomas Carney)의 고대사회에 대한 분석을 통해, 로마세계가 계급이 아니라 후견인 체제(patronage)에 기초한 사회로서, 사회전체가 의뢰인-후견인의 고리들로 연결된 친분관계의 사회이며, 가부장적 사회로서, 억압과 착취의 사회이며 "부패한 사회"임을 밝힌다. 크로산은 이렇게 된 원인이 로마제국의 경우, 중국처럼 경쟁적인 과거제도나 터키처럼 황실학교와 같은 관리 선발을 위한 공식적 기구가 없었기 때문에, 황제의 사적인 친분과 추천에 의해 모든 관리를 임명하여, 사회 전체가 브로커로 연결된 체제였다고 지적한다.  후견인 사회의 도덕적 이데올로기는 "영향력 있는 권력 브로커의 도움을 통해 관직과 이익을 기대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후견인과 의뢰인 관계로 이어진 로마 사회는 사회적으로 신분이 같은 사람들끼리 유유상종하는 족벌주의, 연고주의로 연결된 철저한 불평등 사회였으며, 억압과 착취의 사회였다. 이러한 브로커 관계는 현대의 종속이론에서 제3세계의 엘리트들과 중심부의 엘리트들의 관계처럼, 착취와 억압의 관계였다는 것이다.

 

 

(3) 1세기 팔레스타인은 농경사회로서, 토지세만 생산물의 2/3에 달했던 극도의 착취구조였다.


예수가 살았던 1세기 팔레스타인은 농경사회였다.  크로산은 농경사회의 구조적 특징이 도시의 극소수 지배계급과 농촌의 대부분의 소작농으로 구분되는 계급사회였고, 제조업은 소규모의 수공업 단계에 불과하여 지배계급의 재산 축적은 토지 임대와 세금, 그리고 대부업을 통해 이루어졌음을 분석한다. 그는 먼저 오늘날 성서를 읽는 독자들이 쉽게 간과하는 당시의 평균수명과 세금제도에 관해 주의를 환기시킨다.


"그러나 산업사회 이전 시기에는 출생하는 아이들의 거의 1/3이 여섯 살이 되기 전에 죽었다. 열 여섯 살이 되었을 때는 거의 60%가 죽고, 스물 여섯 살이 되었을 때는 75%가, 마흔 여섯 살 때는 90%가 죽었다. 3%만이 예순 살이 되었다"(Carney, 88). 한편 세금에 관해서는 "일반적으로 세금으로 뽑아낸 자원들은 대부분행정가들에게 재분배되었는데, 이들은 큰 토지로부터 많은 소득을 벌어들이는 자들이었다. 세금징수는 보통 세원(稅源)을 까먹는 방식이었다. 기껏해야 세원을 보호하는 것이었고, 세원을 개발하는 일은 매우 드물었으며, 흔히 세원 자체를 무너뜨렸다. 그들은 사실상 그들 이전의 원시사회의 엘리트들이나, 그들 다음의 산업사회의 엘리트들이 차지했던 것보다 더욱 큰 몫을 차지하였다".


크로산은 이어서 게하르트 렌스키의 농경사회의 아홉 계층 이론을 통해, 당시의 별도의 계급이었던 통치자는 사실상 자기의 세력 범위 안의 모든 영토에 대한 상당한 소유권을 누리고 있었다는 점과, 그 다음의 지배계급은 보통 인구의 1% 정도였지만, 대부분의 농경국가의 국가 수입의 적어도 1/4 정도를 받아, 지배계급과 통치자는 모두 그 절반 이상을 차지했으며, 신하계급은 대개 인구의 5%로서, 서기관들과 관료들로부터 군인들과 장군들까지 포함하여, 모두 "정치적 엘리트를 위해 봉사"했다고 본다.  상인계급은 상당한 부를 쌓았으며, 몇몇 경우에는 정치권력도 갖고 있었으며, 사제계급은 농경사회에서 마지막 특권층으로서, 예를 들어, B.C.E. 12세기의 이집트에서는 전국 토지의 15%를 차지했으며, C.E. 18세기의 프랑스에서도 전국 토지의 15%를 차지했다고 지적한다. 크로산은 이들 상층계급이 각종 세금을 통해 농민들의 생활필수품조차 빼앗아감으로써 농민들을 철저히 착취하였음을 입증한다.


크로산은 {역사적 예수} 제2부, "브로커 체제와의 싸움"에서 로마제국의 식민지 팔레스타인에서의 반세계화 운동을 유형적으로 분석한다. 그는 주로 요세푸스의 저작들을 비판적으로 주석하는 가운데, 주전 63년 팔레스타인이 로마의 식민지가 된 이후, 주후 66년 제1차 유대-로마 전쟁이 발발할 때까지, 식민지 팔레스타인에서 일어난 33 차례의 반로마, 반귀족 농민저항과 반란을 유형별로 자세하게 분석하고 있다. 무장 폭력투쟁을 벌인 의적들, 하느님의 폭력에 의존한 천년왕국적 예언자들, 자칭 메시아들, 주술사, 혁명가와 반란자들의 저항에 관해 그는 사회적 출신계급과 이념, 전략, 로마의 대응에 관해 자세하게 해명한다. 그는 우선, 로마가 팔레스타인을 지배하기 직전의 천년왕국적 기대와 관련하여 당시의 상황을 설명한다.


그러나 B.C.E. 160년대의 천년왕국적 완성에 대해 치솟았던 비전은 그 이후에 매우 다른 상황으로 전개되었다. 경건한 사람들의 시대는, [희년](Jubilee) 23:27에 그려진 대로, "천년에 도달하"지 않았다. [모세의 언약](Testament of Moses) 10:1에 약속된, "악마"도 "끝장나지" 않았으며, "슬픔도 사라지"지 않았다. 다니엘7:27의 "영원한 나라"는 "가장 높으신 분의 거룩한 백성에게" 주어지지 않았으며, "권세를 가진 모든 통치자가 그를 섬기며 복종"하지도 않았다. 마지막으로 에녹 1서 90:33의 동물들의 묵시(Animal Apocalypse)에 극적으로 그려진 것, 즉 모든 양들과 짐승들, 새들이 마침내 하나가 되어 "그들이 모두 순하게 되고 그의 집으로 되돌아왔기 때문에 주께서 크게 기뻐하셨다"는 꿈도 이루어지지 않았다(OTP 2.102; 1.931; 1.71). 그 대신에 실제로 일어난 것은 우선 마카비 형제들이었고, 그 다음에는 로마인들의 지배였다. 그래서 묵시종말적 비전, 천년왕국에 대한 꿈, 그리고 초월적인 희망은 계속해서 새로 기록되었고 다시 읽혀졌다.

유대인들은 이런 절망 속에서도 또 다시 희망을 바라보았다. 참담한 아이러니(irony)는 다니엘 7-12장의 천년왕국적 소망이 천사들을 기다렸으나 결국 하스몬 왕가를 보게 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솔로몬의 시편]도 주님 메시아, 즉 다윗의 아들을 기다렸으나, 그 대신에 나타난 것은 지긋지긋한 헤롯, 즉 안티파터의 아들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완전한 세상에 대한 비전들이 인간의 가슴속에 깊이 자리잡아 계속해서 나타나고, 또 다시 패배하고 또 다시 되풀이되는 비전들을 조롱하기보다는 슬퍼하는 것이 옳다. 그 비전들은 완전한 정의에 대한 희망을 계속 살아있게 함으로써 작은 이익들을 수단과 방법으로 성취하고, 전략과 전술들을 서서히 고통 가운데 깨닫도록 만든다.


그 이상적 나라에 대한 희망이 로마제국의 식민지가 됨으로써 완전히 꺾였으며, 로마제국조차 자신이 그 이상적 나라라고 자칭하고, 유대인들조차 이를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페르시아인들의 [바만 야수트](Bahman Yasht, Eddy 343-349)에 나오는 천년왕국적 비전과 다니엘 2장과 7장에 나오는 유대인들의 천년왕국적 비전(Collins 1984a:21-26)은 세계의 패권이 네 차례 바뀌는 것을 상상하고 있는데, 그 둘 모두의 과거 역사에 대한 묵시적 회고는 미래 역사에 대한 예언처럼 꾸며져 있다. 그 페르시아 선지자에게 있어서 네 왕국들은 아시리아, 메대, 페르시아, 그리스 제국들이며, 이 제국들은 다섯 번째 제국, 즉 구원자 왕 아후라 마즈다와 페르시아 민족이 회복한 제국에 의해 완성될 예정이었다. 유대인 예언자 다니엘에게 있어서는 그 네 왕국들이 바빌로니아, 메대, 페르시아, 그리스 제국들이며, 이 제국들은 다섯 번째 제국, 즉 천군천사들의 주인인 야훼와 유대 민족이 찾은 제국에 의해 완성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다섯 번째 제국은 페르시아 제국의 회복도 아니었고, 유대인들의 회복도 아니었으며, 로마의 식민지였다. 로마제국은 자체의 정치적 선전을 위해 그 세계적 패권의 순서를 수정하여 이용했다. 카이우스 벨레이우스 파터쿨루스는 C.E. 30년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C.E. 1세기 말엽에 이르러서는 심지어 유대인 저술가조차도, 비록 마지못해 했을지라도, 로마가 그 다섯 번째 제국임을 인정하게 되었다. 마케도니아인들에 대항하는 종교정치적 예언 [네번째 시빌의 신탁](The Fourth Sibylline Oracle)은 아마도 B.C.E. 3세기 초에 비유대인이 기록한 것으로 생각되는데, C.E. 70년에 로마가 성전을 파괴시킨 후, 어느 유대인 저자가 이 신탁을 수정하였다. 네 제국에 대한 원래의 신탁(4.49-101)과 그 후의 묵시종말적 완성(4.173-192) 사이에, 로마의 패권에 대한 묘사가 후대에 삽입되었다(4.102-172).... 그 다섯번째 왕국은 야훼의 우주적 신정통치와 신실한 유대백성들의 설욕이 아니라, 단순히 그리스인들을 대신한 로마인들의 제국이었다.  묵시종말적 심판과 천년왕국적 완성은 또다시 연기되었다.


크로산은 이처럼 묵시종말적 희망이 계속해서 수포로 돌아가는 절망적 상황에서, 농민들이 입에 풀칠만 할 수 있어도 참고 견디는 계급이지만, 이처럼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많은 농민저항운동이 일어났다는 사실은 당시의 농민들이 로마 총독부와 성전으로부터 얼마나 철저하게 착취당했는지를 반증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다시 말해서, 기원전 6세기 이래로 팔레스타인 농민들은 바빌로니아,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의 지배를 계속적으로 받아왔는데, 특별히 로마제국 시대에 그처럼 많이 저항운동을 벌이게 된 이유는 농민들이 생존의 차원 이하로 떨어져 천민계층이 되었기 때문임을 밝힌다.  


그 농민들은 거의 5백 년 동안이나 제국주의적 지배자들 밑에서, 즉 페르시아인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셀류코스 왕조, 그리고 이제는 로마인들 밑에서 그처럼 겨우 입에 풀칠이나 하면서 살아왔다. 그들은 언제나 이중으로 세금을 물어야만 했다. 즉 외국의 제국들에 대해, 또한 성전에 대해 세금을 이중으로 내야만 했다. 또한 언제나 가뭄과 기근으로 고통을 받아왔다. 그러나 그들은 페르시아인들에 맞서 반란을 일으키거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에 맞서 반란을 일으킨 적은 없었다. 그들이 셀류코스 왕조에 맞서 반란을 일으켰던 것은 극심한 종교정치적 도발 때문이었으며, 또한 그 반란은 하스몬 가문의 지휘와 통제를 받았는데, 하스몬 가문은 그들 자신의 지배계급에 속하였던 제사장 가문으로서 귀족 가문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러나 로마인들에 맞서 전쟁을 일으킨 것은 이제까지의 저항들과는 매우 다르며, 특별한 설명이 필요하다. 특히 피터 브런트(Peter Brunt)의 표현처럼, "66년의 반란은 이방인 지배자들에 대항한 것만큼이나 동족(同族) 가운데 지주들과 고리대금업자들에 대항한 것"(149)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약간의 사회 및 정치 윤리의식을 갖고, 유대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킨 것은 로마인들이 제국주의자들이었으며, 무자비하게 세금을 부과했고, 생존 차원에 머물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인식된 박탈감이 있기 위해서는 농민들이 정상적인 빈곤의 차원이 아니라, 생존의 차원 이하로 떨어져, 핍절(乏絶)과 극빈 상태로 떨어졌음에 틀림없다.  렌스키의 사회 계층화 이론에 따르자면, 농민계급의 수많은 사람들이 불결하고 비천하며 소모적인 계급으로 떨어졌던 것이다.


크로산은 이어서, "로마제국 치하에서 과연 정확히 무엇이 팔레스타인의 유대인 농민계급을 '정상적인' 생존의 차원 이하로 떨어뜨리고, 상대적 박탈감과 인식된 박탈감, 그리고 감소로 인한 박탈감에 빠트려, 결국 대대적인 농민 반란을 일으키도록 만든 것은 무엇이었는가?"라고 묻고,  마틴 굿맨, 메이건 브로쉬, 빅터 체리코버 등의 저술을 통해, 그 원인이 부채에 있었음을 지적한다.


우선, 메이건 브로쉬(Magen Broshi)에 따르면, "우리가 알고 있는 헤롯 왕 당시의 팔레스타인에서는, [헤롯왕이 벌인] 사업들 가운데 적어도 20개의 사업들은 그 규모에 있어서 당시 세계적인 기록을 세운 것들이었다. 그가 다스리는 동안 그 나라가 전례 없이 번성하였다는 것은 분명하며, 또한 상당한 잉여생산물을 확보할 수 있었다는 것도 분명하다"(31). 그러나 마틴 굿맨이 지적하였듯이, 비록 "그 효과가 유익한 것이었다 할지라도, 실제로 이익을 보는 사람들은 극히 소수의 부자들뿐이었으며, 귀족들은 자신들의 재산으로 무엇을 할지 몰랐던 반면에, 가난한 사람들은 결국 이득도 없었고 실제로 많은 경우에 고통을 겪었다.  유대의 경제는 투자한 자본이 이윤을 확보할 수 있는 충분한 사업이 없었으며, 부유한 귀족들이 새로운 제조업이나 장거리 무역에 돈을 투자했다는 증거는 거의 없다. 대신에 그들은 재산을 토지나 대부(貸付)에 투자했다"(1982:419-421). 부자들이 재산을 토지에 투자함으로써 결국 농민들은 토지에 대한 소유권을 잃고 소작농으로 전락하거나 일일 노동자가 되거나, 아니면 노예가 되었다. 그러나 정말로 악했던 것은 대부업에 투자하는 것이었다.


크로산은 여기서 로마제국 당시 부자들의 대부업을 통한 농민들의 부채문제가 율법 조항, 즉 동족들로부터는 이자를 받지 못한다는 조항(출 22:25; 신 23:20)과 안식년이 되면 모든 부채를 면제시켜야 한다는 조항(신15:1-8)을 어떻게 회피하였는지를 설명한다.  


유대인들이 유대인들에게 돈을 빌려주는 데에는 크게 두 가지 문제가 있었다. 우선 첫째로, 동족 유대인으로부터는 이자를 받지 못한다는 성서적 금지조항이 있었다(출22:25; 신 23:20). 물론 사람들이 이 조항을 무시할 수는 있었지만, 율법을 준수하고 싶다면, 율법을 준수하면서도 여전히 상당한 투자이익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 있었다.  실제로 빅터 체리코버(Victor Tcherikover)가 지적했듯이, "무이자(無利子) 대출, 특히 옥수수에 대한 무이자 대출은 성서의 율법보다 오래된 것이며, 이런 대출은 고대 근동지방의 많은 농경민들 사이에서 일반적으로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무이자 대출은 때때로 이자를 갚는 대출보다 채무자에게 더욱 무거운 짐이 되었는데, 그 이유는 무이자 대출이 대개 단기간의 대출이며, 그 약정한 기간 내에 갚지 못할 경우에는 무거운 벌금을 물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Tcherikover et al. 1.35-36). 다시 말해서, 채권자는 채무자로부터 이자를 받는 것보다 단기간에 갚지 못할 경우 무거운 벌금을 물림으로써 더욱 큰 이득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책의 제1장에서 사래우스가 트리폰에게 예탁-대출을 얻었던 것을 기억하기 바란다. 마틴 굿맨은 팔레스타인에서의 그러한 무이자 예탁-대출에 관해 말하면서, "만일 채무자가 정해진 기간 내에 대출금을 상환하면, 채권자는 아무것도 잃지 않고 대신에 고마워하는 친구를 얻는다. 그러나 정해진 기간이 지나서 상환할 경우에는, 흔히 그럴 것으로 기대되었을 것이지만, 유대 광야에서 발견된 문서에 나타난 벌금은 20%의 이자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동족 유대인으로부터 이자를 받지 못한다는 성서적 조항은 매우 쉽게, 또한 매우 큰 이익을 남기는 것으로 극복될 수 있었다.


두 번째 난관도 똑같이 중요한 것으로서, 그 해결책은 더욱 중요하였다. 신명기 15:1-8에 따르면, 유대인들 사이의 모든 빚은 일곱째 해(안식년)가 되면 면제시키도록 되어 있으며, 15:9-11은 일곱째 해가 가까이 왔다고 해서 채권자가 대출을 거부하지 않도록 경고하고 있다. 그러나 일곱째 해가 다가올수록 채권자들은 돈을 빌려주기를 더욱 꺼려하였기 때문에, 돈을 빌리려는 사람은 더욱 돈을 구하기가 어려워졌던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해결책은 차압 동의서(prosbul)였는데, 이것은 심지어 일곱째 해 동안에도 아직 갚지 않은 대출금을 법정으로 하여금 상환받도록 허락하는 문서였다. 그들은 성서의 율법이 일곱째 해에 개인이 상환을 요구하는 것을 금지시키고 있지만, 법정이 상환을 요구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여기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해결책을 처음 도입 것이 위대한 랍비 힐렐이었다고 주장하는 것인데, 그는 B.C.E. 1세기 중엽부터 C.E. 1세기의 첫 10년대까지 살았던 인물이었다.  이에 대해 마틴 굿맨은 "힐렐이 실제로 차압 동의서를 만든 것과 관련이 있던, 아니면 없던 간에, 유대 광야에서 발견된 문서는  이런 제도가 네로 황제 초기에, 아마도 법정의 지지를 받아, 이용되었음을 보여준다"(1982:422)고 말했다.  


그러나 일곱째 해가 임박하게 되면 돈을 빌려주지 않으려 하는 문제는 힐렐보다 훨씬 이전부터 있었는데, 왜 이 문제가 그에 "의해" 해결되었거나, 아니면 적어도 그의 시대에 해결되었는가? 만일에 가난한 사람들이 돈을 빌리고 싶지만 빌리지 못한다면, 이것은 그들의 문제일 따름이다. 그러나 만일 부자들이 돈을 빌려주고 싶지만 빌려주지 못한다면, 그것 역시 그들의 문제일 따름이다.  다시 말해서, 차압 동의서 제도가 시행되는 것을 원했던 것은 부자들이었으며, 그들이 이런 제도를 원했던 것은 정확히 그들이 대부업에 투자할 만큼 과잉 재산이 많았던 때였다. 가난한 사람들 역시 일곱째 해가 다가와도 돈을 빌릴 방법을 찾아야만 했지만, 그 법이 바뀐 것은 부자들이 그런 제도를 더욱 원하게 되었던 때였다. 즉 C.E. 1세기가 시작되기 전후에 힐렐이 이런 제도를 주창했던 아니했던 간에, 부자들로서도 이런 제도가 절실했기 때문에, 법이 바뀌게 되었다는 말이다.  


크로산은 결론적으로 예수 당시의 가장 큰 사회적 모순이며 "유대 사회가 속속들이 ?게 된 것은 팍스 로마나(Pax Romana) 동안에 거룩한 도시 예루살렘에 유입된 과잉 재산이 초래한 사회적 불균형," 즉 극심한 빈부격차로서, 부자들의 막대한 잉여재산을 통한 대부업의 결과로 농민들이 부채에 허덕이게 되어, 결국 농민들이 자포자기한 상태에서 반란을 일으키게 되었으며, 유대-로마 전쟁 초기에 "요세푸스가 인솔했던 의적 군대와 그를 지원했던 그 지방의 농민들은 그 지방의 수도들이었던 셉포리스나 티베리아스를 공격할 준비가 되어 있었는데, 이것은 그 도시들에는 세금에 대한 사정(査定)과 빚 문서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지적한다. 
 

2) 비정치적 예수상에서 정치적 예수상으로 200년 전에 이미 라이마루스는 예수의 하느님 나라 메시지가 "이 세상의 나라"로서 로마로부터의 해방과 직결된 것이며, 예수의 처형도 성공적인 반란을 일으킬 수 있으리라는 소박한 기대 때문이었다고 주장했지만, 지난 200년 동안 대부분의 신약성서 학자들은 예수가 정치적 인물이었다는 사실을 부인하였다.  그 첫 번째 이유는 "정치적"이라는 말을 좁은 의미로 사용하여, 정부의 정책에 영향을 미치거나, 권력을 장악하려 하거나, 정부를 전복하려는 시도와 관련된 것으로 이해하여, 예수를 비정치적 인물로 간주하였던 것이다.


둘째로는, 예수를 종말론적 인물, 즉 이 세상이 하느님의 초자연적 행동에 의해 곧 끝나고 마지막 심판이 올 것을 예상하였던 인물로 간주하여, 예수는 사회적 혹은 정치적 물음들에 대해 관심이 없었다는 입장이다.


셋째로는 현대 신약학이 개인주의적 입장을 견지하여, 예수가 개인과 하느님과 이웃과의 관계에 대한 종교적 문제들에 관심을 기울였지, 구체적인 사회 정치적 문제들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는 주장 때문이었다. 오늘날 예수를 그리스적인 견유철학자 전통에 서서 개인의 생활방식에 관해 말한 현인으로서 간주하는 입장도 이런 개인주의적 이해의 연장이다.


넷째로, 현대 신약학자들이 주로 유럽과 북미의 백인 남성 중산층 출신으로서 교회와 관련된 기관에서 교수직에 있던 학자들이었다는 사실로 인해, 예수의 메시지가 정치적으로 체제전복적인 것이었다는 점을 간과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해방신학과 여성신학의 "아래로부터의" 시각, 학자들의 현장이 신학대학에서 일반대학으로 바뀌었다는 점, 그리고 학제간 연구와 교차문화적 관점의 등장으로 인하여 예수의 사회적 세계에 대한 종합적 분석이 가능하게 되어, 예수 전승을 재조명하게 된 결과, 오늘날 예수는 넓은 의미에서 "정치적" 인물, 즉 사회적 생활에 대한 비판과 대안적 사회적 비전을 제시한 "정치적" 인물로 인정받게 되었다. 
 

3) 묵시종말론적 예언자에서 사회적 혁명가, 체제전복적 지혜의 스승 (자생적 견유철학자)으로 요하네스 바이스-알버트 슈바이처-루돌프 불트만 이후의 묵시종말론적 합의가 1980년에 와해되었다. 묵시종말적 예언자의 근거로 제시되었던 "오실 사람의 아들"과 "하나님 나라"에 관한 말씀들이 예수의 진정한 말씀들이 아니라, 재림을 기다린 초대교회의 고백이었던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이다.  


(1) 금식하는 세례요한(fasting John)과 잔치하는 예수(feasting Jesus)의 전략적 차이: 현재적 치유와 개방된 공동식사 크로산은 결론적으로 역사적 예수는 유대인 농민 견유철학자였으며, 그의 무상의 치유와 개방된 공동식사 전략은 당시의 착취체제의 심장을 겨냥한 계산된 전략이었다고 주장한다.


역사적 예수는 유대인 농민 견유철학자(a peasant Jewish Cynic)였다. 그의 농촌 마을은, 견유철학을 볼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알고 있었던 셉포리스와 같은 그리스-로마 도시와 충분히 가까웠다. 그러나 그의 사역은 저지대 갈릴리의 농촌 마을들에서 이루어졌다. 그의 전략은 그 자신에게 암묵적이었으며 그의 추종자들에게는 명시적이었던 전략으로서, 무상의 치유와 공동 식사(free healing and common eating)를 결합한 것인데, 이것은 당시의 유대교의 종교권력과 로마의 권력의 위계적이며 후견인 체제를 당연시하던 것을 단번에 부정한 종교적 및 경제적 평등주의의 전략이었다. 예수 자신이 단순히 새로운 하느님에 대한 새로운 브로커로 해석되지 않도록, 그는 항상 옮겨다녔으며, 나자렛이나 가버나움에 정착하지 않았다. 그는 브로커도 아니었고 중보자도 아니었으며, 역설적으로, 인간과 하느님 사이에, 혹은 인간들 사이에 아무도 존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선포한 사람이었다. 기적과 비유, 치유와 식사는 개인들로 하여금 하느님과 아무런 중개자 없이 육체적으로 또한 영적으로 접촉하도록 만들며, 사람들 서로 간에도 아무런 중개자 없이 육체적으로 또한 영적으로 접촉하도록 만들기 위해 계산된 전략이었다. 다시 말해서, 그는 브로커 없는 하느님 나라를 선언하였다.   


(2) 하나님 나라: 브로커 없는 나라, 성가신 자들과 천민들의 나라 크로산은 예수의 사회적 비전이었던 브로커 없는 하느님 나라를 해명하기 위해 우선 '가난한 사람'으로 번역된 그리스어 '프토코이'의 당시 용법을 추적하여, 하느님 나라가 극빈자들의 하느님 나라였음을 밝힌다. 하느님 나라는 천민들의 나라였다는 말이다.


예수는 충격적인 역설을 통해, 가난한 사람들의 하느님 나라(Kingdom of the Poor)에 관해서 말한 것이 아니라, 극빈자들의 하느님 나라(Kingdom of the Destitute)에 관해 말했다. 이런 사실은 루가 6:20과 마태오 5:3 모두의 배후에 있는 말씀복음 Q의 그리스어에 매우 분명히 나타나 있는데, 그 구절들에서 복이 있는 자들이라고 선언된 사람들은 그리스어로 페네테스, 즉 가난한 사람들이 아니라, 프토코이, 즉 극빈자들이다. 그렇다면, 예수가 선포한 팔복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극빈자들, 가난이 아니라 거지 신세에 대한 것이다.  예수는 농민들이나 장인 계급의 하느님 나라를 말한 것이 아니라, 불결한 자들, 천민들, 소모계층의 하느님 나라를 말했던 것이다.   

   
크로산은 또한 겨자씨의 비유, 가라지의 비유, 누룩의 비유, 진주의 비유 등을 들어 하느님 나라가 성가신 자들의 나라임을 규명한다.


이 비유의 요점은 겨자 식물이 속담처럼 작은 씨앗에서 출발해서 1 미터 정도의 작은 관목이나, 아니면 그보다 더 큰 나무가 된다는 것만이 아니라, 겨자는 원치 않는 장소에 퍼져나가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 통제하기가 매우 어려운 경향이 있다는 사실, 그리고 특별히 원치 않는 경작지에 새들이 꼬이도록 만드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이다. 바로 이것이 하느님 나라와 같다고 예수는 말했던 것이다. 즉 하느님 나라는 레바논의 거대한 백향목과 같은 것이 아니며, 일반적인 잡초와 같은 것도 아니라, 얼얼한 맛을 지니고 있으며 경작지를 망쳐놓을 위험성이 있는 겨자 식물과 같다는 말이다. 즉 그 나라는 단지 조금만 원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통제할 수 있다면, 주의 깊게 통제된 적은 분량만을 원하는 그런 것이라는 말이다. 
 
 

 

(3) 성전의 상징적 파괴


예수 주변에 병자들이 많이 있었던 것은 사회구조적 이유 때문이었다. 즉 대다수 소작농들이 입에 풀칠도 할 수 없어, 영양실조에 걸림으로써 병에 걸리게 된 것이지만, 제사장들은 개인적인 죄, 혹은 부모의 죄 때문에 병에 걸린 것으로 가르치고, 병이 나을 경우 그 몸이 깨끗해진 것을 제사장이 선언하도록 함으로써, 또다시 제물을 바치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이처럼 브로커 노릇을 통해 이득을 보는 성전과 자비심을 상실한 제사장들은 근엄한 얼굴로 벼룩이 간마저 빼먹는 제도를 하느님의 이름으로 시행하였기 때문에 예수는 성전을 상징적으로 파괴하였다고 본다. 크로산은 이 점이 분명히 드러난 것이 바로 마르코복음서 기자가 예수의 성전 사건을 무화과나무에 대한 저주와 연결시킨 점이라고 논증한다.  그 대답은 마르코 11:15-19에 있는데, 이 구절은 흔히 성전 정화라고 잘못 불려지고 있다. 그것은 결코 정화가 아니라, 오히려 상징적 파괴이다.  소용없는 무화과나무가 파괴된 것과 마찬가지로, 소용없는 성전도 상징적으로 파괴되었다.... 그 행동은 물론 성전을 물리적으로 파괴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고의적인 상징적 공격이다. 그 행동은 성전의 재정적, 희생제사적, 예배적 기능을 "중단"시킴으로써 성전을 "파괴시킨" 것이다.
 

 


III. 최근의 역사적 예수 연구와 목회적 의미


한국사회는 거의 한 세기 동안의 "組暴 국가"에서 벗어나, 정치 경제는 민주화의 길로 들어섰다. 그러나 종교는 여전히 "전근대적인 비합리성, 비민주성, 배타성, 수동성, 레드 콤플렉스의 온상"으로 지탄받고 있다(박노자, 최상천, 김진호). 또한 교회는 타계주의와 이기주의를 조장하며, 특히 연고주의가 한국사회의 부정부패의 원흉으로 지목되는 상황에서, 교회 역시 지역교회의 계층화로 인해 사회적 연고주의를 조장하는 요인으로 비판받고 있다. 그러나 최근의 역사적 예수 연구는 교회의 합리성, 민주성, 개방성, 능동성을 위해 공헌할 수 있으며, 연고주의 극복 가능성의 길을 열어준다. 
 

(1) 성경을 사용한다고 해서 모두 기독교는 아니다(예: 몰몬교. 통일교). 기독교는 나사렛 예수라는 특정한 역사적 인물에 기초해 있다. 그러나 현대 이후의 역사적 예수 연구는 그 역사적 인물에 대해 알 수도 없고 알 필요도 없다고 주장했다(루돌프 불트만).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에 대한 역사적 지식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기 때문에 그를 알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는 지성인들의 정직한 물음들을 불신앙의 소산이라고 간단히 치부해왔던 것이다. 그 결과 교회는 종교적 무지의 해결자가 아니라, 종교적 무지의 원천이 되어왔다. 최근의 역사적 예수 연구서들은 역사학, 문화인류학, 본문비평 등의 학제간 연구를 통해 독자들로 하여금 정직하게 예수의 모습을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기독교 2천 년 역사에서 오늘날처럼 역사적 예수에 대해 상당히 많은 부분을 종합적으로 알 수 있게 된 시대는 없었으며, 그렇게 된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바로 [예수 세미나]의 공동작업의 결과 때문이다. 최근의 예수 연구는 기독교의 뿌리를 역사적 예수 위에 바로 세우게 한다. 
 

(2) 최근에 한국교회가 성장을 멈추게 된 가장 중요한 원인 가운데 하나는 젊은층과 고학력자들이 교회를 빠져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비기독교인들이 기독교에 대해 호감을 갖지 못하는 이유는 기독교인들의 부도덕함만이 아니라, 기독교가 가르치는 내용들, 즉 동정녀 탄생, 기적, 육체 부활, 재림, 예수의 피를 통한 구원 등, 기독교의 핵심적 가르침들이 전혀 이치에 맞지 않는, 넌센스에 불과한 것처럼 보인다는 판단 때문이다.  그러나 이 책들은 이런 전통적 교리들에 파묻혀 있던 예수를 발굴하여, 인간 예수의 모습을 생생하게 되살려내며, 특히 이런 전통적 교리들의 신화적 언어들과 세계관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 예수의 모습 위에 덧칠되었는지를 상세하게 밝혀준다는 의미에서, 전근대적 비합리성을 극복하고 교회의 합리성을 확립할 수 있는 기초가 된다.

 
(3) 기독교는 2천년 동안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어왔다. 이것은 예수가 보라고 한 것 대신에 예수 자신을 바라본 결과이며, 예수가 믿으라고 한 것 대신에 예수 자신을 믿은 결과였다. 크로산과 펑크는 우리로 하여금 예수의 손가락을 바라보지 말고, 예수가 보라고 가리킨 것(하나님 나라)을 보라고 말한다. 예수를 기독교의 교리로부터 해방시켜야만 비로소 진정한 인간 예수를 볼 수 있게 된다는 주장이다. 또한 예수에 대한 모든 고백은 수동태로 되어 있어 우리의 신앙도 수동적이 될 수밖에 없다는 주장이다. 니이체의 지적대로 교회가 비주체적이며 수동적인 노예의지를 가진 자들을 생산하는 공장이 되어버린 원인이 바울의 구원자 이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최근의 역사적 예수 연구를 통해 교회는 이제까지의 그리스도 신화를 믿은 것에서부터 예수의 실천(제자직)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예수처럼 살 수도 없고, 살 필요도 없다"가 아니라, 예수를 따르는 구체적 길을 제시한다. 

 
(4) 예수는 이제까지 하나님의 기적적인 역사 개입을 믿고 기다렸던 묵시적 종말론자로 이해되어 왔다. 슈바이처 이후 최근의 샌더스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한국의 소위 "시한부 종말론"에 이르기까지, 예수가 세상의 종말을 가르치고 그 종말을 믿고 준비하도록 가르쳤으나, 그 종말이 오지 않았다는 사실은 예수의 종말론 믿음이 잘못된 것이었음을 보여준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슈바이처). 그러나 크로산과 펑크, 보그는 모두 예수의 진정한 말씀들을 분석한 것을 토대로, 예수가 종말론자가 아니라, 사회적 혁명가였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의 기적적인 역사개입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들 인간의 역사참여를 기다리고 계신다는 것이 예수의 믿음이었다는 주장이다. 이것은 교회의 수동성을 극복하고 적극적인 능동성을 확립하는 기초가 된다. 

 
(5) 더욱 중요한 것은 예수가 "수퍼맨"처럼, 외계로부터 이 지구에 기적적으로 출생하여 활동하다가 죽은 후에 다시 외계로 돌아간 "외부적 구원자"일 경우, 그런 외부적 구원자를 믿는 사람들은 의존적이며 수동적이 되는 반면에, "내부적 구원자"일 경우에는 그를 믿는 사람들이 주체적이며 적극적인 신자들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그래서 펑크는 소위 "예수의 보혈에 의한 代贖的 구원의 교리"({잃어버린 복음서}를 쓴 버튼 맥 교수에 따르면, 대속의 교리는 히브리 전통에서는 저주였으며, 그리스 전통에서만 군인들이 도시국가를 '위해', 즉 "남을 위해 대신 죽었다"는 영웅들의 이야기가 받아들여졌다고 한다)를 폐기하고, 묵시종말론적 요소들도 모두 제거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기독교인의 주체성을 확립하는 기초가 된다.

 
(6) 예수는 당시 끼리끼리 노는 브로커 사회에서, 그 브로커 체제의 심장을 겨냥하여 아무나 참석하는 공동식사를 실천했으며, 사회적으로 소외된 병자들과 천민들을 품어 안았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연고주의를 타파할 책임이 있다는 말이다. 또한 예수는 여성과 어린이들에 대한 차별을 하지 않았으며, 특히 많은 무리들을 먹이신 기적 이야기의 핵심적 동사("들어""축사하고""떼어""나누어주었다")는 예수가 주인과 하인의 일, 남성과 여성의 일을 모두 했음을 보여준다. 최근의 역사적 예수 연구는 오늘날 매우 배타적인 집단인 기독교, 특히 개신교도들에게 더욱 겸손하게 관용을 배울 것을 요구한다. 즉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을 구원받지 못한 자들이라고 매도하고, 불상이나 단군신상을 파괴할 것이 아니라, 예수가 가르친 대로 기독교인들이 "내부인들"이라고 믿고 있는 한,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초대되지 못할 "꼴찌"들이 될 운명임을 기억해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세계도처의 분쟁을 통해 드러나고 있듯이, 종교가 인류의 화합과 평화의 요소라기보다는 여전히 전쟁과 증오의 원인이 되고 있는 현실에서, 특히 북한의 기아현실과 남한의 고실업과 고용불안 사회 속에서, 크로산과 펑크의 책은 한국교회가 예수의 정신을 몸으로 실천하는 일이 얼마나 시급한지를 분명히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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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 것인가? 규범적 제안들

유승원

 

 

 


1. 요약과 규범적 성찰


라인홀드 니이버, 칼 바르트, 죤 하워드 요더, 스탠리 하워즈, 엘리사벳 쉬슬러 피오렌자 들이 윤리학에서 신약성경을 어떻게 사용하는가를 조사했으므로, 이제 우리는 약간의 요약을 겸한 결론을 도출하고, 신약성경의 증언에 대한 반응으로 그리스도교 윤리학을 조각하는데 있어 신실하고 결실 있는 접근 방법에 대해 규범적인 제안을 마련해도 좋을 것 같다.

 


(가) 서술과 종합 과제: 비교와 제안


무엇보다 우선, 신약성경 본문을 세밀하게 읽기 위해 지속적인 씨름을 하는 신학자는, 본문을 대충 훑어서 피상적으로 읽는 사람보다 훨씬 더 설득력 있고 세련된 결과를 만들어낼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진중한 석의는 신약 윤리학을 위해 필수적인 조건이다. 이 점에 있어서 신약성경과의 깊은 석의의 연계를 기초하여 규범적인 자신의 입장들을 주장한 바르트, 요더, 쉬슬러 피오렌자는 확실히 니이버와 하워즈보다 좀더 독자의 주의를 끌게 된다.

 

마찬가지로, 정경상의 증거의 전체 범위에 신경을 쓰려 했던 신학자들은, 자신들의 규범적 입장을 정경 중에서 제한된 내용에 기초했던 사람들보다 더 견고한 신학적 바탕을 이루고 있다. 이 점에 있어서, 바르트와 요더는 정경의 전체 증언을 순종하여 들으려 하는 철저한 노력으로 다시 한번 귀감이 된다. 하워즈에게는 정경 자체가 상대적으로 무게 있게 다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실제적 성서 원용은 그 범위에 있어서 니이버보다 훨씬 종합적이다. 니이버는 자신의 규범적 원리들을 위한 근거로서 몇 가지 선호하는 핵심 사항들만 필요로 하고 있을 뿐이다. 이 이슈에 있어 쉬슬러 피오렌자는 다소 다른 위치에 놓여있다. 그녀는 초기 그리스도교에 대한 자신의 역사적 설명을 위한 증거로서 전체 정경을 놓고 사고를 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녀는 해방을 위한 여성의 투쟁으로부터 유래하는 외부 규범의 입장에서 정경을 점검하여 살피는 방법을 취한다. 결과적으로 신학적 윤리학을 위한 규범으로서 그녀의 실질적인 신약성경의 사용은 고도로 선별적이다. 그래서 그녀는 신약의 본문 자체에 있어 핵심이 되는 주제와 규범들보다는 단편적이고 주변적인 자료들에 더 초점을 맞추게 된다. (예를 들면, - 복음서 기자들의 가장 중요한 초점인 - 기독론은 배경으로 퇴행한다.)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이 수정주의 해석학적 전략은 의도적 선택이다. 그러나 이것이 자신의 정체를 신약성경에 기초하여 정의하기를 원하는 공동체를 - 즉, 교회 - 위해서 가치가 있는지는 의심스럽다.

 

해석자들이 자신의 규범적 비전과 긴장을 불러일으키는 신약성경의 본문들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 이 다섯 명의 신학자들을 조사하는데 있어서 결정적인 이슈로 떠올랐다. 우리는 다섯 사람 모두 이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정교한 해석학적 전략들을 사용하고 있는 것을 살펴보았다. 다섯 모두 정경의 본문들의 다양성에 의해 만들어진 이 문제들을 다 알고 있다. 그리고 그들 중 누구도 이 어려운 문제를 적당하게 손쉬운 조화를 통해서 피해가려 하지 않았다. 다섯 중에서 요더는 가장 종합적이고 통일된 정경 내의 비전을 위해 주장하기 원했다. 반면에 쉬슬러 피오렌자는 정경 내의 이데올로기적 다양성이 축소될 수 없다는 점을 가장 강력하게 피력했다. 이 두 신학자는 이렇게 이 이슈에 대해 서로 다른 양극에 위치해 있지만 - 하워즈와 달리 - 역사적 조사와 설명이 정경 내의 다양성에 대한 우리의 해석학적 반응에 좋은 정보를 주리라는 점에 대해 서로 일치하고 있다.

 

나는, 신약성경 증거의 '다양성 속의 통일성'은 세 초점 이미지인 공동체, 십자가, 새 창조의 도움으로 가장 잘 파악해 낼 수 있다는 제안을 했다. 우리는 이 세 이미지가 교회를 위해 안고 있는 함의를 하나의 복잡한 내러티브 요약에 담을 수 있다. 신약성경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하나님의 '새 창조'의 선구자로서의 공동생활의 패러다임이 되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백성의 언약의 '공동체'를 불러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동참하도록 한다. 다섯 신학자들 중에서 바르트, 요더, 하워즈가 이러한 이미지들에 의해 윤곽이 잡힌 전체 이야기를 가장 적절하게 잡아내고 있다. (그러나 바르트의 전쟁 문제 취급에서 공동체의 이미지는 「교회 교의학」에 있는 다른 곳에서보다 적게 강조가 되어있다.)1

 

니이버는 신약의 윤리학에서 한 주제로서의 언약 공동체를 악평이 날만큼 무시하며, 사랑의 이상의 모든 근사치에 대한 심판 안에 서있는, 역사적으로 불가능한 자아-포기의 예로서 '십자가'에 이상할 정도로 간접적인 역할만을 부여한다. 또한 그의 신약 종말론 취급에 있어서 - 이것은 그의 신학적 프로그램에 핵심이 된다 - 니이버는 "이미"보다는 변증법의 "아직" 측면에 더 많은 강조를 둔다. 그래서 '새 창조'의 메시지는 의례 정치학의 세속적인 "현실주의"에 의해 잠식이 되는 위험에 빠진다.

 

다른 한편으로, 쉬슬러 피오렌자의 "여성의 에클레시아" 비전은 신약성경을 의도적으로 '공동체'와 '새 창조'의 초점 이미지들을 통하여 읽음으로써 나온 결과이다. 사실 20세기 후반의 그리스도인 페미니스트 운동의 경험은 초기 그리스도교의 공동체 됨의 의식에 강력한 유비를 이룬다. 초기 그리스도교의 공동체는 "말세를 만난"(고전 10:11의 개역, 원문의 직역은, "시대들의 가장자리들이 그 위에 임한"--역주) 장소이고, 아직 사라져 가는 옛 질서의 골치 아픈 흔적에 둘러싸여 있으면서 구속의 동틈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러한 경험의 해석학적 렌즈를 통하여 신약의 본문을 읽으면서 쉬슬러 피오렌자는 여러 가지 중요한 신약 윤리학의 단면들을 날카롭게 초점으로 모으고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녀의 신학에서 '십자가'의 이미지는 사실상 시야에서 사라져 버린다. 이러한 십자가의 생략은 실수에 의한 간과라기 보다는 억압 속에서 여성의 수동적 굴종을 주입하기 위하여 십자가에 호소한 그리스도교 신학의 왜곡에 대한 반작용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그녀가 신약 윤리학의 초점 이미지로서 십자가를 생략하는 것은 최소한 니이버가 공동체를 생략하는 것만큼이나 심각한 해석학적 왜곡을 만들어 낸다. 신약의 윤리는 이 세 가지 이미지 모두에게 지속적이고도 진지한 신경을 쓰는 독해를 통하여 균형을 이루어야만 한다.

 

 

(나) 해석학적 과제: 비교와 제안

 

이 다섯 신학자들에 의한 신약성경의 사용을 조사하면서 우리는, 각 신학자가 나름대로의 특징 있는 양식으로 성경 본문에 호소하고 있다는 것을 관찰했다. 니이버는 신약성경에서 인간 조건의 냉정한 묘사와 더불어 사랑, 정의, 평등의 '원리'를 발견한다. 반면에 바르트는 원리에 호소하기를 꺼리고 하나님의 성품과 행동의 묘사와 더불어 본문에서 독자에게 직접적으로 전하는 구체적인 '규정들'과 계명들을 발견하기를 선호한다. 요더와 하워즈는 예수의 이야기에서 충성된 삶의 '패러다임'을 보며, 하워즈는 본문이 교회 내에서 읽힐 때 발생하는 본문과 공동체의 변증법적 모양의 형성을 강조한다. 쉬슬러 피오렌자는 신약성경에서 추상적인 윤리 원리들을 분해해내는 것을 거절하는데 있어 바르트와 생각을 같이 한다. 그러나 성경에서 하나님의 직접적인 명령의 음성을 듣기보다는 초기 그리스도교의 역사적 구체성 속에서 개방적인 패러다임, 상상력에 입각한 정교화와 변형을 대면하는 원형을 보고자 한다. 이 후자의 경우에 있어 그녀의 관점은 하워즈의 것과 다르지 않다. 물론 쉬슬러 피오렌자는 신약성경을 성품 형성의 도구로 보는 하워즈의 관심을 공유하지는 않는다.

 

이미 이전에 관찰을 했던 바와 같이, 세 다른 윤리적 담화의 양식들이 모두 신약성경 내에서 발견될 수 있다.2 이러한 관찰로부터 나오는 논리적 추론은, 신약성경의 윤곽과 강조들에 제대로 신경을 쓰는 윤리는 이러한 모든 양식들을 적절하게 교회 내의 윤리적 가르침 내에 편입시키려 할 것이라는 점이다.3 이것을 하기 위한 첫 번째 단계는 개별 신약성경의 본문들 자신이 그 안에서 자기 말을 하는 양식에 사려 깊게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우리는 규범적인 치침으로서 이 점을 명확하게 할 수 있다. 신약의 본문은 그것들이 말하는 양식 안에서 권위를 부여받아야 한다(또는, 권위를 부여받지 말아야 한다).4 본문의 권위에 대한 주장은 그 내용뿐 아니라 그 형태도 존중을 해야만 한다. 해석자는 내러티브들을 율법으로 바꾸어 버려서는 아니 된다(예를 들어, 사도행전 2;44-45에 따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재산을 공유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또는 규정들을 원리로 바꾸어서도 아니 된다(예를 들면, 소유를 팔아 그것을 구제에 사용하라는 명령[눅 12:33]이 글자 뜻 그대로 그렇게 하라는 것이 아니고 정신적으로 부(富)에게서 마음을 멀리하라는 원리를 가리킨다고 주장함으로써). 율법주의자와 무규범주의자는 똑같이, 신약성경의 본문들을 이상한 윤리적 담화의 양식으로 병합시키기 위해 자기 편리한대로 조정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 최소한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이후 그리스도교 설교자들은, "지금 본문은 x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물론 진짜 그런 의미는 아니지요. 그러니까 우리는 그것이 가리키는 바탕의 원리를, 즉 y를 보아야만 합니다."라고 말하는, 수없이 많은 비참한 설교를 해 왔다. 그런 설교에게 모라토리움(지불유예--역주)이 있을지어다! 신약성경의 윤리적 명령은 각기 자신의 주장의 차원에서 규범성을 가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들은 타당성이 없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학적 지침은 두 가지 추론을 이끌어낸다. 첫째, 우리는 신약성경의 윤리적 본문들을 한가지 양식으로만 읽는 습관에 빠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우리가 신약성경을 읽으면서 오직 율법만을 발견한다면 우리는 분명히 커다란 해석학적 왜곡에 말려들어 간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신약성경을 읽고 나서 오직 초시간적 도덕 원리만을 발견한다면, 바르트가 경고를 했듯이 우리는 우리의 삶에 대한 성경의 구체적 주장을 회피하는 잘못을 범하게 된다. 둘째, 우리는 한 양식에 있는 신약성경의 증거들을 덮어버리기 위해 다른 양식의 성경 호소에 의존하려는 시도를 조심해야만 한다. 우리가 보았듯이 니이버는, "불가능한 윤리적 이상의 현실적합성"에서 예수에게서 귀람을 보는 사랑의 이상에 대한 충성이 우리로 하여금 정의를 추구하기 위해 종종 폭력을 사용하도록 요구한다고 주장할 때, 본문에 대해 이런 종류의 해석학적 수단을 사용하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의 사랑의 이상에 대한 고수는 (실천에 있어서) 산상수훈에서 폭력에 반대하는 예수의 분명한 그러나 비현실적인 교훈의 거절을 필연적인 것으로 만든다. 그러나 마태의 눈으로 세상을 보도록 가르침을 받은 공동체는, 여기서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사실상, 니이버의 논쟁은 종국적으로는 비용이 드는 제자도로의 예수의 소명을 교묘하게 피해 가는 길이 되어, 결국 우리로 하여금 예수를 "주여, 주여" 부르기는 하면서도 그가 명령한 것을 행하지 않도록 허락을 해 주는 셈이 된다.

 

따라서 반복하여 이야기한다면, 신약의 본문에 충실하게 응하기를 구하는 그리스도교 윤리는 본문이 자신을 우리에게 제시하는 그 형태로부터 도피하여 추상적으로 해석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전체 정경의 전체 증거가 우리에게 자기 주장을 하는 형태의 특정성을 존중해야만 된다. 그리스도교 전통은 우리가 여기서 서술한 '규정', '원리', '패러다임', 그리고 '상징적 세계'의 모든 네 가지 양식 안에서의 신약 주장의 중요성에 대해 증언을 하고 있다. 성경에 의해 조각된 공동체는 이러한 각 양식들에 있는 성경의 목소리에 응하는데 필요한 기술들을 배울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고 난 뒤, 우리는 특별한 해석학적 우선권을 이 양식들 중의 한가지에 부여하는 것이 필요한가를 물어볼 수 있다. 신약 정경의 모양은 한가지 답변을 암시한다. 바르트, 요더, 그리고 하워즈가 보았듯이, 신약성경은 무엇보다도 자신을 이야기의 형태로 우리에게 제시한다. 네 복음서들은 내러티브의 매개를 통하여 예수의 인물을 제시하고, 사도행전은 지중해 세계에서의 복음 메시지의 초기 확장의 이야기를 다루고, 계시록은 하나님께서 온 창조세계를 다루시는 완성의 대 상징 내러티브를 제공한다. 신약의 서신들조차도 명제적 신학이라기보다는, 초기 교회의 수난/부활 케리그마에서 이야기된 대로의 예수 그리스도의 스토리에 대한 성찰로 이해가 되어야만 한다.5 결과적으로, 신약성경 본문의 특정 형태에 응하는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거기에서 이야기되는 스토리와 공동체의 삶 사이의 유비를 형성하고자 하면서 반복해서 '패러다임' 양식의 신약 사용에 끌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 점은 이어지는 단원에서 상술될 것이다.) 따라서, 신약성경 내의 내러티브 텍스트는 규범적인 윤리를 위하여 근본적인 권위의 원천이다. 복음서와 사도행전에서 주어진 이야기들은 잠재적으로 신실한 삶이 어떠한 모양을 갖고 있는가에 대한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사고를 형성한다. 그 이야기들은, 그 안에서 우리가 우리의 삶을 이해하고 측량하는 구조가 된다. 내러티브들은 그들의 윤리적 중요성을 걸러내고자 하는 다른 어떤 2차적인 추상화 과정보다도 근본적이라 할 수 있다.

 

신약성경의 내러티브 특정성이 약화될 때 규범적 신학 윤리학에는 어떤 일이 발생할까? 우리는 니이버의 예수 윤리 취급에서 이러한 경우를 분명하게 보게 된다. 우리가 주목했듯이, 그는 산상수훈의 가르침들을 그것들의 내러티브 배경에서 분리시키고 수난 이야기를 무시한다. 그래서, 그는 예수의 윤리를 "불가능한 이상"으로 특징짓는다. 그러나 누구든지 마태복음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사람이라면 무저항의 원수 사랑이 "불가능한 이상"이 아니라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것은 오히려 엄청난 희생의 비용을 요구하는 인간적 가능성이다. 복음 메시지의 내러티브 형태에 주의를 기울이는 해석학은, 예수의 제자들이 고난의 원수 사랑 안에서 예수를 따르도록 부름을 입었다고 주장을 할 것이다. 따라서 이상 또는 원리로서의 사랑의 의미는 이야기 안에서 그리고 이야기를 통하여 우리를 위해 구체화된다. 그리스도교 신학에 있어서, 규정들과 원리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세상 구속의 이야기 내에서 그 장소를 찾아야만 되고 신약성경의 상징적 세계는 그 통일성을 오직 그 이야기 속에서만 발견한다.

 

신약의 본문들을 어떻게 조직적으로 사용하는가를 결정하는 것 외에, 해석자는 신약성경의 증언을 다른 권위의 출처들인 전통, 이성, 경험으로부터 오는 도덕적 지혜와 어떻게 조정하는가의 문제와 씨름을 해야만 한다. 우리가 아무리 진지하게 성서의 권위를 확언한다 하더라도, 이 다른 원천들의 역할은 피할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의 성서 읽기는 교회의 전통, 우리가 그 안에서 살고 움직이는 문화의 합리성의 규범들, 그리고 우리가 본문 속에 끌어들이는 삶의 경험 등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따라서 우리의 신약 윤리 구성을 조각하는데 있어 이런 다른 요인들의 영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고 그래서 이들의 적절한 역할을 가능한 조심스럽게 확인하는 것이 옳다.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우리의 다섯 신학자들은 이 이슈에 대해 극적으로 서로 다른 입장을 취하고 있다. 신학의 모든 "자연적" 원천에 대해 '아나쎄마'(저주)를 선언하는 바르트에서, 여성의 현재 경험을 신약의 가르침까지 그것에 의해 평가를 받아야 되는 "계시의 정경"으로 열렬하게 끌어안는 쉬슬러 피오렌자에 이르기까지 그 편차는 다양하다. 니이버 역시 인간의 경험을 신학의 결정적인 규범 요인으로 보고 인간 이성의 능력에 견고한 확신을 주어 그것으로 하여금 우리의 선택의 결과를 예고하고 평가함으로써 윤리적 결정을 내리는데 기여하게 한다. 하워즈는 교회의 전통의 역할을 고조시켜 그것이 우리의 성경 읽기를 조각하게 한다. 그리고 요더는 성경이 계시의 근본적 원천이라는 바르트의 확신을 공유하면서 성령을 통하여 인도를 받는 교회의 경험에 큰 역할을 부여한다. 이러한 선택의 연구조사를 염두에 둘 때, 우리는 어떤 결론을 내려야 할까? 조직적인 윤리의 형성에 있어서 성경 이외의 권위의 출처들에게 어떤 역할을 부여해야 하는 것일까?

 

나는 다음과 같이 최소한의 지침을 제안하고자 한다. 성서 외적 원천들은 신약성경과 해석학적 관계를 갖고 있다. 이것들은 독립적이지는 않고 상호 균형을 이루는 권위의 원천들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성경의 관점에 특권이 부여되어야지 우리의 관점에 우선권이 부여되어서는 아니 된다. 이 지침을 적용하여 실천한다는 것이 아무리 미묘하다 하더라도, 사실 이것이, 신약 윤리학의 각기 다른 접근 방법들을 의미있게 분별하는 대략의 원칙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지침이 다른 지혜의 출처들의 진지한 고려를 배제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 권위의 출처들에게 규범적 판단에 있어서 분명하게 종속적인 역할을 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것들은, 우리가 성경을 해석하고 적용할 수 있도록 수단으로서 도와주는 기능을 할뿐이다. 그러나 그것들이 신학적 규범을 위하여 서로 경쟁하는 권위 출처들이 되도록 허용해서는 아니 된다.

 

왜 성경이 이와 같이 해석상의 우선권을 부여받아야 하는가? 이 질문에 제대로 답을 하려면, 정경 형성의 역사, 교회 내의 성경의 수용과 사용, 그리고 권위와 해석학에 대한 최근의 신학적 논쟁 등을 취급하는 별도의 책 한 권 분량의 논의가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의 목적은 성서의 권위를 변호하는 정당성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성서가 어떻게 그리스도교 교회 내에서 도덕적 판단을 형성하고 그 판단에 필요한 지식을 제공해 줄 수 있는가에 대해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것이다. 물론 이 그리스도교 교회는 그 정체가 이미 근본에서부터 신약성경의 본문이 처음부터 그것에 대한 증언이 되고 있는 복음에 의해 조각이 된 그러한 공동체이다. 이러한 공동체에게는, 성서가 여러 "고전"들 중의 하나가 아니다. 개념과, 경험과 느낌의 시장에서 경쟁하는 도덕적 지혜 중의 한 원천이 아니다. 성서는 생명의 샘이며 교회의 아이덴터티를 위한 근본적 원천이다. 따라서 신약성경의 해석학적 우선권은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생명의 공리이다. 전통, 이성, 경험은 신약의 증언들에 의해 이야기가 된 세계 내에서만 제 위치를 찾아야 한다.

 

'전통'은 들어야 하고 또한 무게를 재어 보아야 한다. 전통은 성서의 의미에 대해 귀중한 영감을 주고 성서가 분명하게 다루지 않고 있는 일들에 대하여도 영감을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통은 신약의 본문의 견지에서 끊임없이 비판적 검토에 붙여져야만 한다. (사실, 그리스도교 전통 자체가 성서의 권위의 최우선성에 대해 증거를 하고 있다.) 그렇지 않을 경우 전통은 본문을 질식시킬 수도 있고 또는 본문의 근본적인 도전을 잠식하여 나누어 가질 수도 있다. 교회 내에서 우리는 항상, 예수께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이사야서를 인용하여) 선언했던 심판 아래 놓이게 될 위험이 있다.

 

가라사대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유전(전통--역주)을 지키느니라. (막 7:6-8).

 

전통이, 신약성경에 의해 그려지고 있는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삶과 소명의 모습과 갈등을 일으킬 때, 그것은 심판과 회개와 개혁의 시간이 가까이 왔음을 뜻한다. 예를 들어서, 폭력의 이슈와 관련해서, 나는, 그리스도교 왕국이 오랫동안 지켜왔고 또 분명하게 공식화했던 정의의 전쟁 전통은, 십자가를 짊어지고 예수를 따르도록 부름을 입은 백성으로서의 교회의 신약 비전과 종국적으로 양립할 수 없다고 단언하고 싶다. 만일 양자가 갈등한다면, 전통을 버려야만 한다.

 

'이성'은 우리의 성경 읽기를 명료하게 만들고 질서를 잡아 준다. 이성은 성경의 본문들을 다른 지식의 출처들의 배경 속에 위치시킨다. 그러나 십자가의 복음은 자주 이성을 논박한다.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고전 1:25a, 18-31절을 보라). 이성은 - 이성은 언제나 특정의 인간 문화에 구체적이다 - 하나님의 지혜에 의해 고침을 받고 가르침을 받아야만 한다. 그 하나님의 지혜는 주로 성경을 통하여 접근할 수 있는 것이다. 이성은 결코 진공 속에서 작동하지 않는다. 이성이 성서와 갈등관계에 있는 것처럼 보일 때, 세계에 대한 우리의 "지식"의 조심스러운 평가의 시간이 되었음을 알아야 한다. 아마 우리가 사물을 비뚤어지게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이미 주목했던 바와 같이 '경험'은 믿음의 공동체에 의해 널리 공유된 체험일 때만 신학적인 권위를 주장할 수 있다.6 경험의 주된 역할은, 그것이 공동체에 의해 고백되고 삶으로 실천되었을 때, 성서의 가르침의 진리를 확인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소망이 무익한 것이 아님을 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롬 5:5) 된 것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물론 경험은 악명이 높을 정도로 애매한 인도자이다. 인간이란 모든 종류의 착각과 자기-기만에 붙여지기 쉬운 존재이다. 그래서 신학적 권위로서의 경험에 대한 주장은 언제나 성서의 관점에 의해서 그리고 믿음의 공동체의 집단적인 분별을 통하여 검증을 받아야만 한다. 확실히 개인의 사적인 경험이 신약 성경의 신학적 권위를 뒤집어 놓을 수는 없다. 그러나, 전체로서의 교회가 어떤 새로운 경험을, 명백한 성서의 증거에 위배됨에도 불구하고 계시로서 인정해야만 하는 경우들이 있을까? 그러한 가능성에 대한 패러다임은 베드로가 이방인 고넬료의 집에서 말씀을 전하는 사도행전 10-11장에서 발견된다. 여기서, 성경의 규범에 따르면 "부정했던" 사람들에게도 하나님께서 성령을 주셨다는 것에 대해 교회가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인정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책의 4부에서 우리는 이런 종류의 권위가 경험에 관해 주장되는 이슈들을 다루게 될 것이다. 그러한 가능성들은 선험적으로 배제될 수 없다. 바르트가 주장하듯이, 하나님은 인간을 놀라게 하시는 방법으로 자유롭게 행동하신다. 그러나 성서의 증거에 어긋나는 신적인 영감을 받은 경험에 대한 주장들은, 오직 신실한 사람들의 총의(總意)에 의한 지속적이고 고민스러운 검토 후에만 교회에서 규범적 지위를 누리도록 허용이 되어야 한다. 일반적으로, 우리의 경험은 애매모호하며 죄에 찌들어 있기 때문에 성서의 입장에 의해 심판을 받고 교정을 입어야 할 필요가 있다. 성서는 반복해서 우리를 가르치기를,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분별하라고 명하고 있다(롬 12:2).

 

우리는 아직 신약성경 윤리의 실천적 과제를 위한 규범적 제안들을 고려하지 않았다. 우리는 이것을 아래의 제 3단원에서 다루고 다시 4부에서 취급하게 될 것이다. 그러한 제안들을 즐기기 전에 우선 우리는 간략하게나마 메타포와 도덕적 상상력의 관계에 대해 묵상을 해야 할 것이다.

 

 

2. '메타포-만들기'로서의 도덕적 판단

 

나는, 신약의 윤리학을 규범의 신학적 학문으로 실행하기 위해서는 본문에서 주어지는 이야기와 그와는 상당히 다른 역사적 상황 속에 있는 우리의 공동체가 살아가는 이야기 사이에 상상력에 입각한 '유비'(類比, analogies)를 형성시켜야 할 것이라는 점을 위에서 제안했다.7 이것은 조금 더 성찰을 요하는 사안이다.

 

어떤 본문이든지 그 본문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것의 말과 우리의 경험 사이에 놓인 유비(analogies)를, 즉 본문이 제공하는 세계와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 사이에 존재하는 유비를 발견하는 것이다. 따라서 단순하게 읽는다는 행위 자체가 이미 유비적 상상력의 초보적인 실행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본문의 세계가 우리의 세계와 매우 가까울 때도 마찬가지이다. 고대 본문 읽기의 해석학적 문제는 모든 독해 행위에 수반되는 해석학적 문제의 특별한 경우에 지나지 않는다. 20세기말에 신약성경을 이해하면서 읽는다는 것은, 그것이 뉴욕에서든 사라예보, 또는 요하네스버그나 동경에서든 간에, 우리의 세계와 신약성경 저자들의 세계 사이의 유비를 분별하는 상상력의 작업에 참여하는 것이다.8

 

그러나 이것을 넘어서서 본문을 "성서"라고 선언하는 것은 상상력 읽기에 좀더 야심적인 요구를 부과하는 것이다. 본문이 우리의 공동체를 위한 '성서'라고 말할 때, 우리는 본문과 우리 공동체의 삶 사이의 유비적 관계를 분별하려는 부지런한 노력에 우리 자신을 전적으로 드리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또한 우리는, 그 유비들이 좀더 분명하게 보여지게끔 우리의 공동의 삶이 형성되도록 - 그리고 재형성, 즉 개혁하도록 - 우리 자신을 헌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결론을 일찍이 기대하는 것이다. 나는 곧 이 점을 다시 논의하게 될 것이다.

 

현재로서 핵심이 되는 내용은 이것이다. 규범적인 윤리학에서 신약성경의 사용은 통합적인 상상의 행위, 즉 우리의 삶이 신약성경에서 이야기된 삶과 역사적으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그 이야기에 어떻게 적절하게 대답하여 그것이 이야기해 주는 진리에 참여할 수 있는가를 잘 분별하는 일을 요청한다. 나는 여기서 도입에서 명확히 밝혔던 주요 주장을 되풀이하고자 한다. 신약성경의 권위에 호소할 때마다, 우리는 필연적으로 메타포-만들기에 관계하며, 우리의 공동체의 삶을 상상력에 입각하여 본문이 상술하는 세계 내에 위치시키고 있는 것이다. 두 세계가 결합이 되려면 심미적 판단의 실행은 불가피하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예술적인 재치만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상상력에 입각한 통합의 행위 속에서 교회는 성령의 역사를 인식해 왔다. 충성된 해석자들이 인내심을 갖고 성경 안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성서적 이야기와 우리의 시대 사이의 상상력에 입각한 연계성을 분별해 내는 곳에서, 우리는 - 언제나 경외와 신중함으로 - 성령께서 그러한 독해를 영감하고 있다고 고백을 한다.

 

만일 "문화적으로 조건지어진" 요소로부터 신약성경 안에 있는 "초시간적 진리"를 분리시켜 내는 것이 가능하다면 그러한 상상력에 입각한 통합은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초시간적 진리가 있었다면 그것은, 모든 시간, 모든 장소, 모든 문화 속에서 정확하게 같은 방식으로 직접적으로 적합성을 갖는 특별한 형태의 계시를 구성했을 것이다. 그럴 경우 문화적으로 조건지어진 요소들은 규범적 중요성이 없는 우발적 특성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이것은 우리가 신약성경 본문을 다루는데 있어서 적합하지 못한 것으로 보는, 그러나 일반적으로 자주 눈에 띄게 되어 있는 전략이다. 예를 들어 이런 전략은 신약성경 내의 여성의 역할과 성윤리에 대해 논의할 때 자주 대면하게 된다. 불행하게도 이 전략은 개념적으로 일관성이 없다. 신약성경의 일점 일획 모두가 문화적으로 조건지어져 있기 때문이다. 신약성경에서 초시간적 진리를 문화적으로 조건지어진 요소들로부터 구분해 내려는 노력은 방향을 잘못 잡은 것이며 가능하지도 않다. 신약성경의 글들은 특정의 시간과 장소에서 인간에 의해 쓰여진 본문들이고, 그것들은 - 모든 인간의 발언이 그러하듯이 - 역사적 지역성의 표식을 담고 있다.


신약성경 기자들의 가장 근본이 되는 신학적 확언들이라도 오직 1세기 유대교의 구조틀 내에서만 이해가 가능하다. 한 가지 예만 들어도 이 점이 잘 드러날 것이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고전 15:3-5).

 

이 초기 그리스도교 고백적 진술의 모든 요소들은 다 유대의 묵시적 사상의 특정 상징적 우주에 참여함으로써 그 의미를 끌어온다. 그리스도(즉, "메시아"), 죄, 성경, 부활, 열둘(상징적으로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와 일치한다) 등은 모두 유대의 묵시 사상의 요소들이다. 여기서 초시간적 초역사적 진리는 어떤 것인가? 요점을 파악하기 위해 고생을 할 필요도 없다. 가장 오래된 케리그마는 매우 구체적으로 문화적인 전통과 상황 내에서 복음을 이야기한다. 만일 신약성경의 근본적인 신학 명제들이 그렇게 완전히 문화적으로 구체화 된 것들이라면, 그 윤리적 규범들은 얼마나 더 완전히 문화 속에 들어가 있겠는가? 확실히 그들의 타당성 또는 계속되는 규범성은 그들의 무(無)역사적 특성에 의존할 수 없다. 그들의 뿌리는 땅에 있지 공중에서 날아다니는 것이 아니다.

 

문화적으로 조건지어진 요소들을 증류시켜 날려 버림으로써 초시간적인 진리를 잔류물로 바닥에 남기겠다는 생각은 칸트 형이상학의 유산이다. 계몽주의 시대 성서 비평의 근본적인 작업목적은 "성서 종교의 다양한 외모 속에 숨져져 있는,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인 합리적 '자연 종교'를 들추어내는 것"이었다.9 요한 필립 가블러(Johann Philipp Gabler)의 유명한 1787년 취임 강연이, 성서 종교의 과제는 "진정한" 성서신학(즉, 본문의 분명한 신학의 서술적 설명)과 "순수한" 성서신학(즉, 본문 뒤에 또는 본문 내에 암시되어 있는 보편적 체계적 진리의 설명)을 구분하는 것이라고 제안을 한 이후, 성서학자들과 신학자들은 초시간적 진리의 '키메라'(chimera, 가공의 괴물--역주)를 좇아 다녔다."10

 

20세기말의 지적 풍토는 그러한 작업의 무용성을 들추어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이러한 구분을 발견하고 있다. 가장 자주 그리고 가장 놀랍게 그러한 구분의 의도를 보이고 있는 것은, 이렇게 함으로써 성경의 권위를 보전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그리스도인들이다. 성서적 권위가 역사적으로 조건지어진 본문에서 역사라는 포장지로 포장한 초역사적인 진리로 전가되는 형국이다. 이런 식으로 성경을 개념화하는 것의 문제는 분명하다. 일단 우리가 진리를 찾게 되면, 더 이상 포장지는 필요 없다 할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의 성육신 이해는 그러한 계몽주의의 이상주의에게 근본적으로 우호적이지 않다. 진리는 특정의 인격 안에서 특정의 시간과 장소에서 우리에게 주어진다. 바로 나사렛의 예수이다. 하나님께서는 특정의 사명을 위해 특정의 백성(이스라엘/교회)을 불러내어 역사 속에서 행동하셨다. 확실히 계몽주의 이후 많은 사상가들에게 성서의 역사적 특정성은 거치는 돌이 되었다. 쥐 이 레싱(G. E. Lessing)은 역사적 사건과 합리적 진리 사이의 간격을, "아무리 자주 그리고 아무리 진지하게 내가 ?어 넘으려 해도 건널 수 없는 흉칙하게 넓은 도랑"으로 묘사했다.11 그러나 교회가, "역사의 우연적 진리가 이성의 필연적 진리의 증거가 결코 될 수 없다"는 레싱의 공리에 의해 어떻게 저지를 당할 수 있겠는가?12 복음은 "이성의 필연적 진리들"의 요약이 아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미련함의 입장에서 인간의 이성을 부수고 다시 조각하는 계시이다. '말씀'은 가변적인 인간의 형태로 우리에게 알려졌다. 오직 그러한 형태로만 우리에게 알려졌다. 그것이 복음의 스캔들이다.

 

결과적으로 우리의 해석학은 신약성경 본문의 특정성을 폄하하기 보다는 오히려 그 점에 가치를 부여해야 한다. 사도적 간증의 구체적, 문화적 형태를 지니고 이야기가 된 것들은, 우리에게 자신들을 제시한 그대로 수용되고 우리는 그것들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신약성경의 윤리학이 필연적으로 메타포-만들기의 행위라는 나의 제안으로 다시 되돌아간다. 만일 우리가, 지배적으로 내러티브이며 상황적인 본문들의 특정 형태를, 일반 원리를 추상화시켜 끄집어내기 위한 분석적 절차에 붙이지 않고, 그대로 존중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가장 바람직한 해석학 전략이 본문의 세계와 우리 세계 사이의 메타포적인 병렬이라는 점을 깨닫게 될 것이다.

 

메타포는 서로 조화되지 않는 두 이미지의 - 또는 두 어의 영역의 - 연결이다. 서로 어긋나는 것 같은 이 두 이미지는, 잘 성찰해 보면 일상적으로 감지되지 않는 방식으로 서로 비슷한 면이 발견되는데 이것이 메타포이다. 메타포는 기대하지 않았던 유비를 - 관행의 지식 범주 내에서는 분별할 수 없는 유비 - 설정함으로써 우리에게 충격을 주어 생각하게 한다. 따라서 메타포는 인지(認知, perception)를 재형성한다. 예를 들어, 요한복음에서 예수가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요 6:51a)라고 말했을 때, 이 메시지는 듣는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어 그들의 생각을 뒤흔들어 놓는다. 그들은 예수가 모세와 같은 역할을 하여 그들에게 기적적인 빵을 주어 먹게 하기를 기대하고 있다(6:30-31). 예수의 인상적인 반응은 자신을 모세와 동일시하는 것을 거부하고 대신 자신과,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먹였던 만나 사이에 메타포적인 결합을 설정한다.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고,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다고 확언을 한다(6:51b, 54a). 한 차원에서 볼 때, 메타포적인 충격은 독자로 하여금,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요한의 주장의 스캔들을 대면하게 한다. (사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진술은, "우리의 의미의 세계를 난도질"하고 인식을 위한 새로운 틀을 창조하는 메타포의 능력을 강력하게 보여주고 있다.)13 또 다른 차원에서 불 때, 이 메타포는, 예수의 살이라는 놀라울 정도의 보통 언어를 사용해 독자로 하여금 출애굽 이야기와 교회의 성만찬 사이에 상상력에 입각한 연계를 이루게 한다. 이러한 메타포를 듣는 사람은 두 가지 선택에 직면한다.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고(요 6:60) 중얼거리며 떠나버린 제자들처럼, 우리도 이 삐꺽거리는 이미지의 결합에 거부감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이해하는" 것은 그 권위 아래 서서, 메타포적 결합이 창조하는 "존재론적 섬광"의14 빛 속에서 우리의 삶과 실재의 인지가 변화되도록 허락하여, 베드로와 함께,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6:68)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메타포적 과정은 개별적 이미지의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공관복음서의 비유에서 보듯이, 이야기의 더 높은 차원에서도 발생할 수 있다.15 예를 들어, 누가복음의 정직하지 못한 청지기에 대한 비유는(눅 16:1-9), 주인에 의해 해고당하기 직전에 놓였을 때 주인의 채무자들의 빚을 극적으로 할인해 줌으로써 그들의 비위를 맞추어 주는 영리한 종에 대한, 혼란스러운 내러티브를 담고 있다. 이 비유에서 독자를 깜짝 놀라게 하는 것은, 청지기에게 더 격하게 분노해야 할 주인이 오히려 그 약삭빠른 거래를 칭찬을 하는 점이다! 정직하지 못한 청지기에게 자로 잰 듯한 분명한 도덕적 심판이 임하면서 비유가 마무리될 것을 기대하던 우리 독자들은 무방비 상태가 되어 사안에 대한 도덕적 질서의 이해를 다시 고려하도록 강요를 당한다. 왜 주인은 이 청지기를 심판하지 않았을까? 아마 그것은, 그가 심판의 순간이 가까웠다는 것을 깨닫고 그에 합당하게 결정적인 움직임을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마치 예수의 하나님 나라 메시지를 듣는 자들이 평상시와 같이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것이 아니라 결정적으로 응하도록 부름을 받는 것과 같이… 이러한 결론에 대한 우리 마음의 불편함은, 우리가, 누가의 이야기 속에서 정직하지 못한 청지기의 비유 바로 앞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에(눅 15:11-32) 등장하는 까닥스러운 형과 동일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도록 강요하고 있다. 만일 우리가 사람들이 자신들에게 닥치는 벌을 받아 마땅하다는 것만 고집하고 있다면, 그 이야기 속의 형과 같이 우리는 축연(祝宴)에서 벗어나 밖에서 화만 내고 서있는 셈이다. 이 비유들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것들에 의해 변화가 되는 것이고, 우리의 세계에 대한 비전이 그것들에 의해 재형성된다는 것이다. 그것들을 "이해한다"는 것은, 우리의 삶이 그 복음에 - 우리가 책임과 윤리에 대하여 "알고 있는 것"을 뒤흔들어 놓은 복음 - 반응하여 어떻게 변화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성찰의 과정에 들어가는 것이다.


우리가 복음서들을 읽고 "이해하게" 될 때 - 좀더 광범위한 차원에서 - 십자가에 달린 메시아의 이야기와 관계해서도 비슷한 인식의 재조정이 발생한다. 이 이야기가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 1:23-24). 신약 윤리학의 근본적 과제는, 이 이야기와의 메타포적인 배치 속에서 그것들을 "읽음"으로써 우리의 삶이 부서지고 새롭게 조각되는 것을 반복하여 볼 수 있도록 소명하는 것이다.16


스티븐 제이 크래프트칙(Steven J. Kraftchick)이 이 문제를 요약했듯이, "메타포는 의미의 관계를 구성하기 위하여 사고의 불일치를 창조해내는 방식이다."17 이것이 바로 신약성경이, 우리의 세계의 경험과 연계되어 메타포로 읽힐 때, 하는 일이다. 우리가 알고있는 세계는 - 또는 우리가 알았던 사고 - 우리가 신약성경과의 대위(代位) 속에서 그것을 "읽을" 때 다시 정립이 된다. 해석학적 과제는 우리의 현재 경험을 신약성경의 예수 이야기의 지도 위에 다시 위치시키는 것이다. 우리의 관행적인 세계 관찰의 방식을 뒤엎는 이야기를 우리에게 해 줌으로써, 신약성경은 우리의 공동체의 삶이(메타포의 "과녁 영역") 재해석되는 이미지와 범주들을 제공한다.18


일세기 그리스도인들과 20세기말의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시간적 간격은 오직 상상력의 점화 불꽃에 의해서만 다리를 놓을 수 있다. 이 상상력에 입각한 상관관계의 작업이 어떻게 신약성경 윤리학에서의 규범적 판단 형성에 필요한 지식을 제공할 수 있을까? 몇 가지 예들을 살펴보도록 하자.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읽을 때(눅 16:19-31), 우리는 이 이야기에 입각하여 우리의 삶을 다시 상상해 보게 된다. 누가에 따르면 이 비유는, 자신들이 "돈을 사랑하는 자들이기" 때문에 예수의 가르침을 비웃었던 바리새인들에게 들리어졌다(눅 16:14). 그러나 우리가 그 본문을 메타포로 읽을 때, 우리는 그것이 우리를 향하는 것을 듣게 된다. 이러한 상상력에 입각한 읽기는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인물과 요소들을 일대일로 맞추어 알레고리로 풀어 해석을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 자신의 경제 행위들을, 이야기 속에서 문간에 있던 가난한 나사로를 무시했던 부자의 경제 행위와 병렬시켜 투사하여 살펴볼 때 메타포적인 충격이 발생한다. 하데스의 불길 속에서 고문을 당하게 되는 그의 운명은 우리에게 준엄한 경고가 된다. 우리는 부자가 뒤에 남겨두고 떠난 형제들에 대한 아브라함의 슬픈 선언에 사로잡히게 된다.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이것이, 예수 부활의 이쪽에 서 있는 우리를 위한 경고의 말이 될까? '말씀'은 간격을 뛰어 건넌다.


사도행전 2:42-47과 4;32-37에 있는 초기 예루살렘 공동체의 이야기는 교회를 위해 부정적 경고가 아닌 긍정적 패러다임을 제공한다. 그러나 이 내러티브의 규범적 기능은, 내가 묘사하는 그런 의미에서 여전히 메타포적이다. 이 본문에서 우리는 공동체의 삶을 위한 규정이나 경제적 행위의 원리를 제공받지 않는다. 대신, 어떻게 우리 자신의 공동체들 속에서 우리가 비슷한 방식으로 살 수 있을까, 그리고 우리 자신의 경제 행위가 부활을 강력하게 증거하여 나중에 우리의 이야기를 쓰는 사람들이 "무리가 큰 은혜를 얻었다"고 말할 수 있게 될 것인가를 고려하도록 우리를 부르는 이야기를 받은 것이다. '말씀'은 간극을 뛰어 건넌다.


성서의 이야기들을 우리의 삶에 배치시키는 이러한 메타포적 읽기는 우리가 이야기된 행동을 있는 그대로 한가지 한가지 모방하거나 고대의 경제적 관행을 좇아 상세하게 옛날의 행습으로 되돌아갈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19 (사실, 메타포의 현저한 특징 중의 하나가, 메타포로 연결된 어의상 영역 사이의 유사성과 비유사성의 동시적 긴장을 유지시키는 능력이다.)20 사도행전 2장과 4장에서 이야기된 교회와 우리가 경험하는 교회 사이의 메타포적 결합은 경제적 실체에 대한 우리의 "상식"을 뒤흔들어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실천을 철저한 방식으로 다시 돌이켜 생각하게 한다.


이러한 종류의 메타포적 해석학은 성서 자체에 침투해 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0장에서 광야의 이스라엘 이야기를 사용하는 방법을 상고해 보라. 고린도에 있는 이방 신자들에게 쓰면서, 바울은 광야의 사건들을, 우상에게 희생제물로 드려졌던 고기를 먹어야 하는가의 이슈로 씨름하는 고린도 교인들의 상황에 연결시키는 놀라운 메타포의 접시를 돌린다. 생각건대, 그들 중 일부는, 자기들이 세례와 주의 만찬에 참여한 것이 그들로 하여금 악한 영적 영향력에 면역을 준다는 생각에 그러한 고기 먹는 행습을 정당화했다. 그러나 바울은 이 문제에 대한 좀더 복잡한 성찰을 이끌기 위해 메타포적인 읽기 전략을 채택한다.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그러나 저희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신 고로
저희가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고전 10:1-5).


여기서 출애굽 이야기와 고린도교회의 상황이 상호 작용하는 메타포는 다소 복잡하다. 첫째, 바울은 이스라엘의 이야기를 그리스도인의 상징의 용어를 사용하여 시대착오적 방식으로 읽는다. 즉 성례전을 구약의 내러티브 속으로 뒤돌려 읽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이 교회의 위험한 상황을 이스라엘에 임한 운명의 입장에서 읽을 때 방향은 거꾸로 뒤집어진다. "그러면 우리가 주를 노여워하시게 하겠느냐?"(고전 10:22a, 참고 신 32:21). 따라서 이스라엘과 고린도 상황 사이의 메타포적 결합은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내리도록 요청하는 도덕적 판단의 근거를 제공한다. "그런즉 내 사랑하는 자들아 우상 숭배하는 일을 피하라"(고전 10:14).21


잠간만 묵상을 해보면 고린도 교인들에게 주는 바울의 조언은 이제 우리가 우상숭배의 유혹을 저항하기 위해 하는 투쟁을 위한 메타포가 될 수 있다. (우리의 경우, 우상들은 우리를 고기가 아니라 "국가 안전 보장," 성적인 만족, 사회적 지위의 보증으로 유혹할 것이다.) 만일 이 메타포적 전가가 발생한다면, '말씀'은 출애굽에서 고린도로 건너뛰었던 것처럼 고린도로부터 미국으로 건너 뛰어 간격을 넘어서게 될 것이다.


만일 이러한 종류의 메타포적 해석학이 신약성경의 윤리에 근본적이라면 성서에 대한 우리의 규범적 호소는 '패러다임'의 양식이나 '상징적 세계'의 구성 양식을 통해 가장 자주 이루어질 것이다. 우리는, 성령의 영감과 인도 아래 신약성경의 내러티브 구조 내에서 우리 자신의 삶을 다시 읽고자 하며, 정경상의 이야기들과 우리 공동체의 상황 사이의 - 아마 놀라운 것들로 - 유비들을 분별한다.


물론, 큰 어려움은 신약성경의 제안된 메타포적 활용의 타당성을 어떻게 판단하는가를 아는데 있다. 이에 대해 안전한 자동 절차는 없다. 우리의 메타포적 읽기는, 자세한 본문 읽기를 통해 우리와 더불어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다른 이들에 의해 믿음의 공동체 내에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검증을 받아야만 한다. 성서에 의해 조각되기를 구하는 공동체는 종국적으로 좋은 독해와 나쁜 독해 사이에서 판단하기 위한 책임을 주장해야만 한다. 이 책에서 나는 이를 위해 한가지 길을 제안했다. 주어진 해석이 어떤 해석이라도, '공동체', '십자가' 그리고 '새 창조'의 초점 이미지에 의해 확인된 성서적 이야기의 기본적 플롯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가를 물어보아야만 한다.

 

 

3. 실체화된 메타포로서의 교회

마지막으로, 신약성경과 현재 시간 사이의 메타포적 관계를 분별하는 과제는, 우리의 공동체를 신약의 본문의 의미가 살아있는 실체로 구현하는 과제 속으로 미세하게 스며들어가는 것이다.


제 멋대로 하기 좋아하는 성숙치 못한 고린도의 작은 공동체에게 편지를 쓰면서 바울은 인상적인 메타포를 만들어낸다.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한 것이며 또 돌비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심비에 한 것이라"(고후 3:3).22 그들의 말다툼과 과실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지는 않는다. "정신 차려요. 당신들이 그리스도의 편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모르나요?" 대신, 메타포적인 담대함으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당신들은 [복수에 주목--역주] 모든 사람이 알고 읽을 수 있도록 쓰여진 그리스도의 편지입니다." 갈등하는 이 공동체의 실존은 세계를 향한 복음의 전달이다.23


이 놀라운 주장은, 본문과 공동체의 관계, 신약성경과 교회의 관계 속에 결정적인 영감을 열어준다. 만일 도덕적 판단이 - 내가 위에서 주장한 바와 같이 - 신약성경이 우리의 공동체적 정체에 대한 이해를 재구성하는 메타포 만들기를 이끌어 낸다면, 그 반대 또한 사실이다. 변화된 공동체는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하고 그래서 본문의 의미를 밝혀준다. 바울에 따르면,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성경이 읽혀질 때 듣는 자들의 마음에 베일이 드리워진다.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어지리라…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고후 3:16, 18)


따라서, 교회 자체는 그리스도의 이미지로 변화되어가면서, 본문이 증거를 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위한 살아있는 메타포가 된다.24 메타포의 능력은 변증법적이다. 본문이 공동체를 조각하고, 공동체는 본문의 의미를 구현하다. 따라서, 공동체가 성숙 안에서 자라고 그것이 변화되는 상황을 대면함에 따라, 신약성경의 신선한 읽기를 발생시키는 해석학적 피드백의 고리가 있어지게 된다.


확실히 공동체의 변화는 단순하게 인간적 해석학의 기발함의 입장에서만 이해할 수는 없다. 바울이 주장하듯이,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 3:18). 교회는 공동체 내에 있는 성령의 역사에 의지하기 때문에 이렇게 성경을 신선하고 담대하게 읽어서 풀이할 수 있는 것이다 - 신약성경의 본문에서 그렇게 약속이 되어 있듯이(참고, 고전 2:6-16; 요 16:12-15). 성령은 공동체를 예상치 못했던 성서적 이야기의 메타포적 성찰로 재형성하고 그로 말미암아 본문에게 다시 새로운 빛을 던져준다. 그러한 계몽적 결합은 예측이 불가능하며 분별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런 것들을 부인하거나 배제시키려는 교회는 스스로 "의문"(儀文, letter, gramma, 고후 3:6)의 질식(窒息)에 사로잡히는 것을 보게 되며,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게 된다. 이 점을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메타포를 쓰는 분은 결국 하나님이시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관찰을 통해 우리는 해석 과제의 최종적 차원을 설명해야 할 것이다. '말씀'이 구현되는 곳에서만 올바른 성경 읽기가 발생한다. 오직 우리가 본문에 의해 바뀔 수 있는 방식으로 자신들을 그 능력에 맡길 때에만, 본문이 의미하는 바를 배운다.25 이것이야말로 죠지 스타이너(George Steiner)가 그의 중요한 책 「진짜 임재」(Real Presences)에서 해석학을 "대답할 수 있는 이해, 적극적인 이해의 구체화"로 정의하기 원했던 이유이다.26 해석의 과업은 분석과 주석의 작업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본문을 바로 해석한다는 것은 그것을 일로 전환하는 것, 즉 우리의 해석이 "위험을 감수하는 헌신"의 행위가 되도록 자신을 개입시키는 방식으로 해석이 수행되도록 하는 것이다.27 니콜라스 래쉬(Nicholas Lash)가 그의 에세이 "성경 공연하기"(Performing the Scriptures)에서 주장하듯이, "그리스도인의 성서 해석의 근본적인 형태는 믿음의 공동체의 삶, 활동, 그리고 조직이다."28


이러한 해석학적 지침의 한가지 결과는, 신약성경의 해석이 고립된 개인에 의해 수행될 수 없다는 것이다. 말씀의 구현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안에서 발생한다. 해석은 필연적으로 공동체의 활동이다.29 "성경의 공연"은, 래쉬가 주장하듯이, "교회의 삶이다. 고립된 개인이 이 본문들을 실행하는 것은 그 사람이 베토벤 4중주를 연주하거나 쉐익스피어의 비극을 혼자서 공연하는 것보다 더 불가능한 일이다."30 공동체의 중요성을 인정할 뿐 아니라 실제로 공동체 내에서 성경의 구체화를 경험하는 해석자들은 좀더 인지상 수용적이고 깨우침을 주는 방식으로 본문 읽기를 제공할 것이다.


물론, 성경이 구현되는 것을 본 후에야 성경을 이해할 수 있다고 단언하는 것은 역설이다. 행동이 가능해지기 전에 어느 정도의 이해를 가지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이 역설을 파악하기 위해서 두 가지 사항을 제안한다.


첫째, 우리는 성경이 이제 막 동굴에서 봉인된 채 발견된 것처럼 완전히 처음부터 시작하여 성경을 읽지는 않는다. 우리는 이미 1900년 동안 이 본문들을 읽고 실행해온 공동체의 후예들이다. 마치 "리어 왕"(래쉬의 예)의 새 공연이 배우들의 숙련과 감지력의 신선한 산물이 되는 것처럼, 우리의 해석은 우리 자신의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해석은 우리 전에 앞서 간 사람들의 어깨 위에 서 있을 것이다. 우리는 본문의 의미를 조명해 주는 이 전의 실행을 가리킬 수 있다. 스탠리 하워즈가 항시 즐겨하는 말이다. "성인들의 삶은 성경에 대한 해석학적 열쇠이다."


둘째, 드라마 공연이나 집단 뮤지컬 공연 또는 팀 스포츠에 참여해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실제 공연이나 실행에 있어서는 사적인 리허설이나 연습의 경험을 초월하는 그 무엇이 발생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막이 올라가고, 청중의 반응이 있고, 다른 공연자 또는 연주자들과의 상호작용이 예기치 못했던 화학 반응을 일으키며, 그렇게 연극이 끝날 때쯤이면 우리는 이전에 알지 못했던 어떤 것을 배우게 된다. 가장 좋은 결과로서 - 위대한 본문을 진지하게 실행했을 때 - 우리는 본문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 대해서도 무엇인가를 배우게 된다.31


신약성경 자체도 반복해서 말씀 구현의 필요성을 고집한다. 로마서 12:1-2의 동사들의 진행 순서가 의미심장하다. "너의 몸을 산 제사로 드리라[메타포를 들으라!]…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가 분별하도록…"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은 공동체가 자신을 드리고 변화를 받은 후에 온다. 왜? 본문이 '살아지는' 것을 보기 전까지는 우리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인식하기 시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 가운데 역사하는 것을 보기 전까지, 우리는 우리가 읽고 있는 것을 알 수가 없다. 따라서, 가장 결정적인 해석의 과제는 말씀 아래서 살고자 애쓰는 공동체의 형성이다.

 

 


4. 신약 윤리학에 있어서 구약성경의 역할

독자들 중에서는, 혹시 이 책이 신약성경의 윤리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구약성경을 기능상 정경에서 배제할 의도를 갖고 있거나 배제하는 효과를 발생시키는 것이 아닌가 의아해 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여기서 채택된 방법론이 비밀리에 마르키온주의자로서 이스라엘과 이스라엘의 성서를 격하시키는 것은 아닐까? 절대로 그럴 수 없다! 그러나 그 질문은 매우 중요하며 그래서 조심스러운 답변을 요한다.

우리가 여기서 신약성경에만 주로 집중하는 주된 이유는 단순히 문제의 복잡성 때문이다. 신약성경에만 기초한 규범적 윤리를 통일성 있게 만들어내는 것도 충분하게 어려운 일이다. 여기에다가 전체 구약성경을 더하여 섞어버릴 경우 사안은 엄청나게 복잡해진다. 짜임새 있는 신약성경 윤리를 구성하는 것이 가능한 것으로 증명이 되면, 논리상 다음 단계는 어떻게 이 윤리를 더 광범위한 정경의 구조에 맞출 수 있을까를 묻는 것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러한 체계적인 과제는 안타깝게도 현재 프로젝트의 시야를 넘어서는 것이다.33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교 윤리학에 있어서 성경의 규범적 사용에 대한 제안을 하려면 구약성경을34 고려하지 않고는 진행이 될 수가 없다. 그렇다면 그것이 어떻게 이루어져야 할까? 윤리적 성찰의 과정 중 어디에 구약성경을 개입시켜야 할 것인가? 이 중요한 문제에 대해 세가지 일반적인 반응을 제공한다.

 


(가) 신약성경 내에서 듣는 구약성경의 목소리

신약성경의 글들은 이스라엘의 성경의 산실(産室) 내에서 형성이 되었다. 결과적으로 그 성경과 이루어지는 '텍스트간의'(intertextual) 대화는 신약성경의 저자들에게 주요 관심으로 남아있다. 이 초기 그리스도인의 문서들 내에서 이스라엘 성서의 목소리를 듣지 않고 신약성경을 올바로 읽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신약성경의 본문은, 존중을 받는 선구자와의 신학적 대화를 수행하면서 성서의 증거를 붙잡는 해석학적 실행이 수반될 때만 이해가 가능해 진다.35

예를 들어 바울은 로마서에서 복음이 하나님께서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롬 1:2)이라 선언함으로써 그의 대 장정의 논의를 시작한다. 로마서 본론에서 바울은 자기 주장을 펴기 위해 성서를 50회 이상 인용한다. 고린도전서 15:3에서 바울은 "제일 중요한 것"들이라 하면서(개역성경에서는 "먼저"라 번역되어 있으나, 헬라 원문은 "가장 중요한 것으로서"로 번역이 될 수도 있다--역주)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성경대로" 발생했다는 고백의 전승을 확증한다. 방금 인용한 두 구절 모두 바울 이전의 고백적 형식들을 보전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구절들은, 복음이 성경의 전통과의 관계에서 이해가 되어야만 한다는 것이 초기 그리스도교에서 일찍이 널리 퍼진 확신이었다는 증거가 되고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교의 선포를 구약성경에 기초하기 원하는 비슷한 관심을 마태복음, 누가복음-사도행전, 요한복음, 히브리서, 베드로전서 등에서도 보게 된다.

이 상황이 신약성경의 윤리에서 구약성경의 역할에 대해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가? 그것은, 어떤 윤리적 주제를 신약성경이 다룬다 하더라도 온전한 전체 정경이 이해를 위한 필수적 배경이 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신약성경에서 구약성경의 목소리를 인식하기 위해서는 특정 본문들에 대한 자세한 석의 작업이 이루어져야만 한다. 신약성경의 윤리적 본문들에서 구약의 사용에 대한 전체적인 조사를 하는 대신 몇 가지 예를 들어 이 점을 충분하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구약성경의 권위가 인용이나 코멘트 없이 암묵적으로 전제되어 있다. 예를 들어 성적 도덕에 대한 신약성경의 교훈은 꽤 규칙적으로 음행과 동성애에 대한 구약의 명백한 정죄를 전제하고 있다. 다른 경우들에서는, 구약의 규범이 일반적 언급을 통해 상기된다. 예를 들어, 가난한 자들과 집 없는 자들을 돌보라는 명령은, 누가복음 16:19-31과 같은 구절이 보여 주듯이 이스라엘의 언약의 의무에 근거하고 있다. 만일 부자와 그의 형제들이 "모세와 선지자들"을 듣기만 했어도, 그들은 나사로에 의해 상징적으로 나타난 가난한 자들을 돌보아야 하는 자신들의 책임을 깨달았을 것이다. 여기서 암시는 언약의 백성들에게 "너는 반드시 네 경내 네 형제의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신 15:11)고 명령하는 신명기 15:7-11과 같은 구절을 겨냥하고 있다.

신약의 기자들이 구약의 가르침을 넘어서는 규범을 전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차이를 인식하여 구약성경의 더 깊은 신학적 근거의 차원에서 그것을 설명하려는 노력이 분명하게 엿보인다. 마가 10:2-12와 마태 19:1-9에 있는 이혼에 대한 가르침은 이러한 해석학 전략의 분명한 예이다. 역시 주목할만한 것은 마태의 산상수훈에 있는 여섯 대립 명제들이다(마 5:21-48). 여기서 예수가 도덕적 요구를 강화하는 것을, 율법의 폐지가 아니라 성취라고 제시한다.

이 모든 경우에 있어서, 신약성경의 윤리적 가르침에 대한 해석이 우리로 하여금 그것들을 정경의 전체 배경 안에서 읽도록,36 그리고 필연적인 전제가 되는 구약의 구절들과 대화하면서 읽도록 요구하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따라서, 구약성경 윤리의 공개적 조사를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구약의 목소리는 신약 윤리학을 책임감 있게 잘 수행하면 그 안에서 들려지게 되어있다.

 


(나) 공동체, 십자가, 새 창조의 바탕으로서의 구약성경

내가 신약성경의 윤리적 증거 내의 통일성을 분별하기 위해 제안한 통합적 절차의 차원에서 볼 때, 전체 정경이 '공동체'와 '새 창조'의 초점 이미지를 정의하는데 있어서 결정적이다. 십자가 전에 공동체를 앞에 두었던 것은, 이미 교회가 있었기 때문에, 즉 이스라엘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가 교회를 설립할 필요가 없었다는 게하르드 로핑크(Gehard Lohfink)의 설명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37 신약성경의 공동체 비전의 의미는 이스라엘 언약 공동체에 의해 결정적으로 조건지어진다.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임명한 것은 아마도 회복된 이스라엘을 존재하게 한다는 것을 가리키는 상징적 행위였을 것이다.38 바울은 그의 이방인 선교 공동체의 정체를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갈 3:20)로 해석하며 그들을 출애굽 세대의 이스라엘의 영적인 후손으로 간주하여, 출애굽 시대의 이스라엘 사람들을 "우리 조상들"(고전 10:1-13)이라 부른다. 구약에서 이야기된 하나님의 언약 백성의 선행된 실체와 유리된 채 신약성경에서 교회라 부르는 공동체에 대한 이해를 하는 것은 어렵다.

마찬가지로, 신약성경의 '새 창조'에 대한 소망도 구약성경의 예언자 전통, 특히 이사야에 기초하고 있다.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너희는 나의 창조하는 것을 인하여 영원히 기뻐하며 즐거워할지니라
보라 내가 예루살렘으로 즐거움을 창조하며
그 백성으로 기쁨을 삼고. (사 65:17-18)

새 창조에 대한 신약성경 비전의 내용은 창조주요 이스라엘의 종말론적 구속주이신 하나님의 구약적 이미지에 의해 그 지식을 공급받는다. 하나님께서 그 안에서 모든 눈물을 씻겨주는 새 예루살렘의 모습을 계시록이 구약의 이미지에 의해 공급된 건축 자재를 사용하여 건축하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십자가'와 구약의 증거의 관계에 대한 문제는 물론 고전적이면서도 흥미로운 질문거리가 된다. 십자가의 초점 이미지는 내가 제안한 다른 두 초점 이미지들보다 훨씬 분명하지 않게 구약성경에 기초하고 있다. 우리는, 예수와 십자가가 구약에서 예언이 되어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인위적인 작업을 통해 억지로 꾸며내는데 빠져서는 아니 된다. 그보다는 오히려, 십자가의 복음이 그리스도교 전통에, 그것을 통하여 이스라엘의 성서가 새롭게 읽히고 그래서새로운 의미가 분별되는 해석학적 렌즈를 제공한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한 것이리라. 예수의 죽음은 "성경대로"(예를 들자면, 아브라함이 이삭을 희생으로 드리려 한 일, 유월절, 속죄일의 희생제사, 이사야의 고난받는 종, 또는 탄식 시편에 묘사된 고난의 인물 등의 모형론적 성취로서) 구성이 될 때만 구원의 사건으로 이해가 될 수 있다. 그러나 해당 성경의 내용들이 그러한 사건들을 전조(前兆)한다는 것은 오직 발생한 사건의 입장에서 되돌아 볼 때만 인식 가능한 것이다. 우리의 주된 관심 내용에 더 적합한 것은, '윤리'를 위한 패러다임으로서의 십자가는 독특하게 신약성경의 새로운 기여라는 사실이다. 이것이야말로 신약성경을 구약성경으로부터 가장 날카롭게 구분하는 특징들 중의 하나이다. 이러한 관찰을 통해 나의 마지막 주장으로 이행하고자 한다.

 


(다) 구약을 읽는 렌즈로서의 신약성경

그리스도인의 신학과 윤리에 있어서 신약성경은 구약의 역할과는 다른 규범적 역할을 하고 있다. 우리는, 창세기에서 계시록으로 단순하게 그리고 아무 변이(變異) 없이 흐르는 정경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인류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중추적, 결정적 행동이었다는 주장은 십자가가 전체로서의 정경의 해석학적 중심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정경 내에서 신약성경은 특권적인 해석의 기능을 갖고 있다. 이것은 전쟁과 폭력의 이슈와 관련해서 특히 중요한 점이 된다. 구약성경만 갖고 논할 경우 그것은 분명히 무장 폭력에 권위를 부여하는데 사용될 수 있다. 그러나 신약성경이 순종의 개념을 십자가를 통해 급진적으로 재정의 하였고, 그런 방식으로 볼 때 예수의 제자들은 더 이상 칼을 휘두를 수 없다. (이 주장은 이 책은 4부에서 더 충분하게 다루어질 것이다.) 우리가 보았듯이 계시록은, 하나님의 우주적 승리가 죽임을 당한 어린양에 의해 획득되었고 성도들의 소명은 폭력을 통해서가 아니라 "간증의 말씀"을 통해서 그 승리에 동참하는 것임을 선포함으로써 구약의 성전(聖戰, holy war) 이미지를 전복(顚覆)시켜 버린다.

비슷한 판단이 다른 이슈들에 관해서도 적용이 될 것이다. 예를 들면 부와 물질의 소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리스도교 신학은 신약의 렌즈를 통하여 구약성경을 읽는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새롭고 확정적인 자기 노출이 고백되는 것을 감안하면 그렇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요약하자면, 신약 윤리학의 다루는 일이 구약성경을 단순하게 윤리적 심사숙고의 과정 속에 주도면밀한 한 조각으로 끼워 맞출 수는 없다. 그보다는 오히려 구약성경이 전 작업을 널리 덮고 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신약의 신학적 카테고리와 이미지들이 널리 구약으로부터 가져온 것들이기 때문이다. 신약이 하고 있는 이야기는 오직 이스라엘의 이야기의 연속과 절정으로 볼 때만 이해가 가능해진다. 따라서, 복음과 구약성서와의 근본적 연속성을 확인하면서 동시에 성서의 해석학적 재활용을 요청하는 복음의 새로움을 확증하고자 노력하는 신약의 기자들은 구약성경을 변증법적으로 그리고 대화의 자세로 취하여 사용하였다.39 신약 윤리학에 있어서 이러한 복잡한 상황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유일한 길은 신약 안에 있는 구약 서브텍스트(subtexts)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면서 신약의 본문을 읽는 것이다. 이 책의 제 1부와 4부에서 주어진 석의의 작업은 이런 것을 염두에 두고 이루어진 것이다.

 


5. 요약: 신약 윤리학을 위해 제안하는 지침들


이제까지, 신약성경이 규범적인 그리스도교 윤리학을 구성하는데 있어서 어떻게 기능해야 하는가에 대한 여러 가지 방법론적 제안을 했다. 우리 앞에 남겨진 과제는 이 제안들이 실제로 어떻게 작동할 수 있는지를 실례(實例)로 보여주는 것이다. 이 책의 마지막 부에서는 윤리적 문제들의 샘플을 검토하면서 신약의 증거가 어떻게 우리의 윤리적 반응을 조각할 수 있는가를 묻고자 한다. 그러나 그 과제에 착수하기 전에 윤리적 성찰에 있어서 신약성경의 사용에 대해 내가 제시했던 규범적 권고 사항들을 한 자리에 모아 최종적인 정리를 해 보는 것이 유익할 것이다.


나는 열 가지 근본이 되는 제안을 내 놓았다. 이들 중 몇은 이 근본적 제안들에 부착되는 추론들이다. 그 열 가지는 다음과 같다.
 


1. 진중한 석의(釋義, exegesis)가 기본적 필수 사항이다. 윤리적 논의에서 사용된 본문들은 가능한 온전하게 그 역사적 배경과 문헌 내의 배경에서 이해가 되어야만 한다.


가. 신약의 본문들은 그 안에 있는 구약성경 서브텍스트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면서 읽어야 한다.


2. 우리는 정경의 증거의 전 영역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3. 정경 내에 존재하는 실질적 긴장은 공개적으로 인정이 되어야 한다.


4. 우리의 종합적 신약 정경 읽기는 세 초점 이미지인 공동체, 십자가, 새 창조를 지속적으로 사용함으로써 균형을 유지하도록 해야 한다.


5. 신약의 본문들은, 그 본문들이 자신을 전달하는 양식(예를 들면, 규정, 원리, 패러다임, 상징적 세계 등) 안에서 권위를 인정받아야 (또는 인정하지 않아야) 한다.


가. 네 가지 양식은 모두 타당하고 필요하다.

나. 우리는 한가지 양식에 호소함으로써 다른 양식 안에 있는 신약성경의 증거를 대체해서는 아니 된다.

 

6. 신약성경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구속 행동의 이야기(story)이다. 따라서 패러다임의 양식이 신학적 우선권을 가지며 내러티브 본문들은 규범적 윤리를 위해 근본적인 원천이 된다.


7. 성서 이외의 권위 원천들은 신약성경과 해석학적 관계를 갖는다. 이들은 독립적이지 않으며 서로 상호균형을 이루는 권위의 원천들이다.


8. 신약성경 내에서 "문화적으로 조건지어진 요소들"로부터 "초시간적 진리"를 구분해 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9. 규범적 윤리학에 있어서 신약의 사용은 통합적인 상상력의 행위를 필요로 한다. 따라서 신약성경의 권위에 호소할 때마다 우리는 필연적으로 메타포-만들기에 관여하는 것이다.


10. 올바른 신약 읽기는 오직 '말씀'이 구현되는 곳에서만 발생한다.

 


이 열 가지 제안은 규범 신학적인 학문으로서 신약 윤리학을 위해 실용적인 지침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모든 독자가 다 이 지침들이 마음에 들지는 않을 것이다. 특히 4, 5, 7, 9 번은 특히 논란이 많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지침들을 수용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여기서 보는 것과 같은 방법론적 명료(明瞭)함을 독려하는 대안의 지침들을 명확하게 밝히기 위한 도전을 시도해야만 될 것이다. 이 책의 4부에서 나는 이러한 지침들의 견지에서 신약성경이 윤리적 문제들을 짊어지도록 하여 몇 가지 선별된 이슈들을 다루고자 한다. 이러한 실습의 목적은 신약 윤리학에 일관성이 있는 접근 방법의 한 가능 모델을 제시하려는 것이다.
 

 


미주


1. 비교를 위해 CD I/2, 588에 있는 이 체계적 설명을 참조하라.


교회가 교회인 곳에서는 공동의 듣기와 받기가 필연적으로 어느 쪽으로든 관계가 되어있다. 교회의 삶은 한 몸의 지체들의 삶이다. 듣기와 받기의 공동체로부터 떨어져 나가려는 시도가 있는 곳에서는, 즉 하나님의 말씀을 고립된 상태에서 듣고 받으려는 시도가 있는 곳에서는 - 성경의 형태로 된 하나님의 말씀이라도 - 교회도 없고, 참된 의미에서의 듣기와 받기도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개인들에게 선포되지 않고 하나님의 교회, 그리고 교회 안에 있는 개인들에게만 들려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는 이 듣기와 받기의 공동체를 요구한다. 말씀을 진정으로 듣고 받는 사람들은 이 공동체 안에서 그렇게 한다. 그들이 이 공동체로부터 물러나려 한다면 그들은 듣고 받는 것이 아니다.

또는 II/2, 718에서 바르트는 다시 이렇게 쓰고 있다.

사도적 권면에 의해 초점이 맞추어진 신성한 명령이 각 개인에게 무엇을 의미하든지 간에, 그것이 한 인류를 이루는 형제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제사의 행위에서, 어느 한 개인의 사적인 일이 아니고, 그 안에서 누구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다른 사람들에 반대하여 행동할 수 없고 공동으로만 이루어질 수 있는 하나님의 봉사에서, 자신의 몫을 가리키는 것이 확실하다.

따라서 III/4에서의 전쟁과 폭력의 논의는 이러한 공동의 준거틀 내에서 읽혀야만 한다. 나는 스커트 사이어(Scott Saye) 덕택에 이 구절들에 주의를 기울이게 되었다.

2. 2장 1을 보라.

3. 그러나 Verhey 1984, 176-177을 보라. 그는 "도덕률" 차원에서는 신약성경에 호소하기를 배제시키려 한다.

4. 여기서 나는 Barlett 1983, 5-6과 같은 의견이다.

5. 나는 Hays 1983에서 그리고 Bassler 1991, 227-246에 있는 나의 에세이에서 상당한 분량 이런 식의 바울 해석을 주장했다. 이 책에 있어서 내가 바울을 다루는 방법도 - 그의 윤리가 묵시적 세계 - 이야기의 배경 속에서 십자가의 모형에 맞추어가는 공동체의 전개로서 읽혀야 하는 가를 보여주었다 - 바울 신학의 내러티브 하부구조를 보여주려는 또 하나의 시도로 이해될 수 있다.

6. 11장 2를 보라.

7. 나의 이 제안은 William Spohn(1995, 94-126)의 조직적 제안과 비슷한 면이 있다. 안타깝게도 그의 글을 알게 된 것이 너무 늦어 뒤이어지는, 유비적 상상력의 행위로서의 도덕적 판단에 대한 논의에 같이 다루지를 못했다.

8. 유비(analogy)와 메타포(metaphor, 은유) 사이의 구분은 종종 지나치게 엄격한 경향이 있다. 사실, 이 두 언어 현상은 모두 한 어의적 영역을 또 다른 어의적 장(場)에 덮어 배치를 하는 것이다. 이 둘 사이의 주요 차이는, 일반적으로 메타포가 관행상의 인지(認知)를 더 크게 비틀거나 왜곡시켜 좀더 과격하게 의미를 재조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있다. 그러나 차이는 정도에 있지, 종류가 다른 것은 아니다. 메타포나 유비나 둘 다 서로 상이한 실체나 영역들 사이에 연계를 상정하는 것이다. 이어지는 논의에서, 나는 둘을 날카롭게 구분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리스도교 윤리학을 형성하는 신약의 역할을 '메타포-만들기'의 과정으로 말하고 싶다. 왜냐하면 신약에서 선포된 복음은 묵시적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복음은 일상적인 세계를 부수고 익숙지 않은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따라서 신약의 이야기들과 우리의 세계 사이의 연계는 메타포와 관련된 급격한 재방향화의 효과를 가져올 것이다. 메타포에 대한 저술은 방대하다. 유익한 논의를 위해서는, 다음을 살펴보도록 하라. Wheelwright 1962; Wheelwright 1968; Ricoeur 1976, 45-69; Ricoeur 1977; M. Johnson 1981, 3-47; McFague 1982; Gerhart and Russel 1984; Lash 1986, 95-119; Kittay 1987; Soskice 1985;p Ollenburger 1990; Kraftchick 1993.

9. R?is?nen 1990, 3.

10. Gabler 1980 [1787]. 스탠리 하워즈는 개인 서신에서(1994년 8월 15일), "순수한" 성서신학을 성서의 실질 역사적 형태로부터 뽑아내려는 작업은 암묵적으로 반유대적이라는 흥미있는 주장을 나에게 알려 주었다. 계몽주의가 추구했던 것은 자신들이 동의하기 꺼리는 역사적(유대적) 특정성으로부터 순결하게 된 신학이었다는 것이다.

11. Lessing 1956 [1777], 55.

12. Lessing 1956 [1777], 53.

13. Gerhart and Russel 1984, 112-114.

14. Gerhart and Russel 1984, 114.

15. Ricoeur 1975, 75-106.

16. 바울의 초기 그리스도교 찬송 인용이(빌 2:5-11) 이런 종류의 실존의 "재배치"를 실행하는 방식에 대한 자세한 논의를 위해서는 Kraftchick 1993을 보라. 나는 메타포의 주제에 대해서 그리고 몇 가지 중요한 문헌상의 참조에 대한 대화에서 스티브 크래프트칙의 도움을 받았다.

17. Kraftchick 1993, 15. 여기서 크래프트칙은 Kittay 1987의 생각들을 요약했다.

18. 물론, 메타포의 병렬 배치는 의미의 전가를 양쪽의 방식으로 허락한다. 공동체 또한 교회 경험의 입장에서 본문을 재해석한다. 아래의 단원 3을 보라.

19. 다시 Kraftchick(1993, 23)을 보라. "메타포는 각 요점을 하나씩 모두 연관시키는 동형의 재배치가 아니고 어떤 것들은 하이라이트로 비추고 다른 것들은 억제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신자들에게 하나도 빠짐없이 매 사안마다 배치시킬 필요가 없다… 현재의 경우에 있어서[빌립보서의 찬미], 높임을 받음과 마지막 부활 사이에 있는 그리스도인 실존의 영역은 그 찬미에 의해 제공된 어의상의 영역에 의해 질서 지워지고 또한 구조를 부여받는다."

20. 그러한 긴장은, 독자들로 하여금 시적인 단언의 "is"와 "is not"을 모두 분별할 것을 요구하는 "메타포상의 발언의 연결사" 속으로 지어져 들어가게 한다. Thomas Greene이 관찰했듯이(1982, 26), 그러한 메타포적 연결은 "비합리성의 심오함"을 감춘다. 다음의 예들을 생각해 보라.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요 15:1).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막 8:15).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마 3:11).

21. 이 본문에서 작용하고 있는 메타포 전략의 자세한 논의를 위해서는 Hays 1989, 91-104를 읽으라.

22. 이 구절에 대한 논의와 이 번역의 설명을 위해서는 Hays 1989, 125-131을 보라.

23. 메타포적인 진술이 문자적 동형의 해석에 도전하는 또 하나의 예가 되고 있다.

24. 이점에 대한 더 자세한 논의를 위해서는, Hays 1989, 131-149를 보라.

25. "우리 자신을 성서 본문에 복종시키는 것이 언제나 비윤리적인 것일까요?" 이 도전적인 질문은 사적인 편지에서 A. Katherine Grieb이 내게 던진 것이다(1995년 6월 15일). 나는 이렇게 대답을 하고 싶다. 내가 "본문"에의 복종을 말할 때, 증명 자료로서 구성되는 개별 본문들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예, 딤전 2:11-15). 나는, 공동체, 십자가, 새 창조의 이미지들의 견지에서 구성된 성경 전체로서의 본문을 말한다. 사실상 종종 격리된 가르침에 복종하는 것은 좀더 전체적인 정경의 증거로서 하나님의 뜻에 "비윤리적"이거나 불성실한 것일 수 있다.

26. Steiner 1989, 7.

27. Steiner 1989, 8.

28. Lash 1986, 42. 참고, Steiner 1989, 8. "참된 드라마의 해석은 무대에 서는 것이다."

29. Fowl and Jones 1991을 보라.

30. Lash 1986, 43.

31. 참고, Lash 1986, 41.

32. Meeks 1986a; Hays 1989, 125-131, 149-153, 191-192를 보라.

33. 구약 윤리학에 대한 다양한 접근 방법을 위해서는, J. Barton 1982; Wilson 1988; Birch 1991을 보라.

34. 최근 많은 학자들이 "구약성경"(the Old Testament)이란 말보다 "히브리 성경"(the Hebrew Bible)이란 말을 선호한다. 이러한 용어 선정은 이스라엘 종교의 통합성을 존중하고 가능한 억제주의자(suppressionist)의 "구약"과 "신약" 구분을 피하기 위한 훌륭한 관심을 반영하고 있다. 순수하게 역사적인 본문 연구의 배경에서 보자면 "히브리 성경"이란 용어는 서술상 정확하고 또한 지각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신학의 배경에서 보면 몇 가지 이유로 해서 이 용어가 꼭 정확한 것은 아니다. 첫째, 이 용어는, 이 본문들이 정말 다른 누구에게 속한 것이고 어떤 의미에서 볼 때 그리스도교 성경의 한 부분이 아니라는 것을 암시한다. 그러나 교회는 시작부터 이 본문들을 성서로 강조 고백하여, 아바라함, 모세, 선지자들에게 말씀하셨고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며 아버지이셨던 같은 하나님으로부터의 계시와 약속(그래서, "testament" 즉 [구]약[約])으로 여겼다. 따라서 이 본문들의 규범적 사용에 대한 탐구라면 이것들을 역사적 연구의 중립적 객체로 부르는 것보다는("히브리 성경") 공동체의 고백적 유산의 통합적 부분으로("구약성경") 명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본다. 둘째, 구약성경은 교회에서 히브리어 이외의 용어들로 수용되었다. 초기에는 그리스도인들이 - 신약의 저자들을 포함해서 - 헬라어로 된 성경을 읽었다. 이 본문들은 라틴어를 통해 교회에 알려졌고 그 이후 각 지역의 통용어를 통해 전해졌다. 물론 히브리어 본문은 이 모든 번역본들이 점검을 받아야 하는 권위의 바탕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이 자료가 교회에서 '히브리 성경'의 권위로 운용이 되지 않았다는 것도 사실로 남아있다. 이러한 명칭의 어색함은, 만일 우리가 신약성경을 "희랍 성경"(The Greek Bible)이라고 부르는 것이 신학적으로 적절한 것이지를 묻는 질문에 의해 잘 예증이 된다. 이러한 언급은 오직 우리가 구체적으로 원어 매개에 신경을 쓰는 배경에서만 의미가 있을 것이다. 따라서 히브리 성경과 헬라 성경을 말하는 것보다는 전통적인 구약과 신약의 명칭을 보전하는 것이 더 의미가 있는 일일 것이다. 물론 "구"(舊)가 "나쁜 것"이나 "무용지물"을 가리키는 아니라는 단서를 분명하게 달아야 한다. "구약성경"이란 말에 다소 경멸적인 점이 있다고 보는 생각은 부분적으로 20세기말의 '새 것'에 대한 집착의 특징이다. 고대에는 모든 사람들이 새 것은 의심스럽고 별 것 아니라고 믿었다. 확증할만큼 오래된 전통들만이 존엄성과 권위를 인정받을 수 있었다. "옛 것"에 대한 현대의 거부감을 감안해서, 제임스 에이 샌더스(James A. Sanders)는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의 언약들을 "제 1 언약"(the First Testament)과 "제 2 언약"(the Second Testament)이라고 부를 것을 제안했다. 이러한 용법은 한 하나님의 약속과 행위의 연속성에 대한 신학적 강조를 암묵적으로 보전한다. 그러나 그것은 독자로 하여금 세 번 째 언약을 기다려야 하는가 또는 시리즈가 계속 이어져야 하는 것인가를 의아하게 생각하게 만들 것이다. "신약"과 "구약"이란 용어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하나님께서 인류를 다루시는 역사 속에서 결정적 중추점이라는 그리스도인의 고백을 담고 있다. 따라서, 이 모든 것들을 고려할 때 전체 정경의 신학적 권위에 대한 우리의 논의에서, 나는 계속 "구약성경"을 언급할 것이다.

35. 바울 서신에 있어서 이 현상의 논의를 위해 Hays 1989를 보라.

36. Brevard Childs 1970, 123-138의 체계적 제안을 보라.

37. Lohfink 1984 [1982], xi.

38. E. P. Sanders 1985, 98-106.

39. 이 점에 대한 최근의 문헌을 위해서는 H?bner 1990; H?bner 1993; Childs 1992를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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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의 역사적 바리새인 연구”


 

 


 

 


 

I. 바리새인 연구


 

A. 문제 제기


 

바리새인들은 두 가지 이유로 중요하다. 첫째, 복음서들은 그들을 예수에 대한 주된 반대 집단으로 묘사한다. 둘째, 우리가 알고 있듯이 (랍비적) 유대주의는 바리새인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이 두 가지 이유에는 서로 상반된 전제를 함축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신약성서의 독자들은 서기관, 바리새인, 그리고 사두개인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다고 평가될 수 있는 데, 왜냐하면 신약성서가 이 집단들에 대한 균형있게 묘사를 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신약성서를 무비판적으로 이해하는데서 오는 몇 가지 공통적인 오해가 있다. 첫째, 바리새인들은 모두가 위선자들이다; 둘째, 바리새인들은 예수 시대에 팔레스틴에서 막강한 정치력을 행사했다. 셋째, 바리새인이 예수의 죽음 초래했다. 복음서의 예수 이야기에서 예수에 반대하는 바리새인을 두고 일부 학자들은 평면적 인물이라 부르기도 한다. 특히 개신교인들은 로마 가톨릭의 형식주의를 비난하는 한 방식으로서 바리새인들의 형식주의(legalism)을 비판적으로 강조한다. 가톨릭인들은 바리새인을 위선자로 말하는 복음서의 기록에 관심을 두고 있다.


 

바리새인에 대한 부정적인 이해에 제동을 가하는 경향도 있다. 그 한 예를 들면, 노이스너(Jacob Neusner)가 1970년 이전에 바리새인에 대해 기록된 모든 것은 개정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의 주장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바리새인에 대한 오해가 편만함을 함축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일반적으로 유대인들은 바리새인들을 지혜와 학식의 근원으로 칭송하는 경향이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의 종교적 전통을 바리새인들에게로 소급하기 때문이다. 또한 샌더스는 “언약적 규범주의”를 주장하면서 바리새인에 대한 일반적 이해를 비판하고, 개념의 전이를 시도한다.


 

B. 바리새인 연구 동향


 

지난 세기에 바리새인에 대한 연구들은 많은 정치적 및 방법론적 문제들을 중심으로 골치를 앓았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프로그램에 대한 유대적 해석들은 전통적 그리고 진보적인 유대인들간의 현대적 갈등에 의해서 암암리 영향을 받아 왔다. 바리새인에 대한 많은 기독교인들의 기록들은 신약성서의 반-유대적 변증의 무비판적 수용이나 현대의 반-셈족주의에 의해서 그 가치가 하락되었다. 유대인과 기독교인 학자들에 의한 바리새인에 대한 변증적 변호는 바리새인을 왜곡시키거나 낭만적으로 만들었고, 또한 그들을 그들의 역사적 상황으로부터 분리시켰다.


 

최근의 유대교 학계는 “역사적 바리새인은 어떤 사람들이었는가?”를 중심으로 활발한 논의를 진행한다. 이 분야에 공헌을 남기고 있는 주요 학자들은 노이스너(J. Neusner), 리프킨(E. Rivkin), 살다리니(A. J. Saldarini), 그리고 마슨(Mason) 등이다. 예를 들면 노이스너는 랍비 문헌에 대한 비판적 고찰의 새로운 방법론을 제시했다. 리프킨은 바리새인을 정의하는데 사용될 자료의 범위를 정했다. 살다리니는 1세기 “분파/종파”를 연구하는데 사회 과학적 모델을 소개했다. 마슨은 바리새인을 다루는 요세푸스의 모든 문헌을 문학적으로 연구했다.


 

하지만 최근 20년간의 연구 결과중 한가지 분명한 것은 바리새인에 관하여 이전의 세대보다 더 모른다는 것이다. 그리고 더 많은 질문들이 던져지고 있다: 자료의 신뢰성, 바리새인의 기원과 그 역사, 그들의 가르침, 그리고 랍비적 유대주의를 포함하여 당대의 집단들과의 관계. 이러한 질문들의 복잡성 때문에 서로 다르고 모순되는 답변들이 제시되었다. 이제 가장 영향력 있는 작가와 이론들을 간략하게 검토하겠다.


 

a) 가이어(A. Geiger)


 

가이거의 바리새인에 대한 연구 결과는 19, 20세기의 논쟁의 토대를 놓았다. 그는 힐렐학파를 보다 보수적이고 문자적인 사두개파 및 바리새적인 샴마이학파보다는 환경에 대해 더 자유적이고 적응적이라고 해석했다. 옛 할라카의 엄격성과 바리새인의 새로운 할라카간의 대조는 19세기 독일에서 전통적 유대주의와 개혁적 유대주의간의 갈등을 평행시켰다. 


 

b) Wlelhausen, Schürer, Bousset, Meyer


 

이 네 사람은 예언적 윤리에 대조하여 “후기” 유대주의를 초기 유대주의의 형식적 퇴보로 해석했다. 벨하우젠과 19세기 작가들은 헹겔 철학에 의해서 영향을 받았고, 또한 진화적 사고는 바리새인을 형식적 그리고 물질적 유대주의의 징조로 간주했다. 이러한 유대주의는 타락하여 기독교에 의해서 대체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c) 금세기 초의 유대인 학자들


 

많은 유대인 학자들은 바리새인에 대한 기독교인 학자들의 해석에 반론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금세기 초에 영국과 미국의 학계는 J. Lauterbach(진보적인 평신도 지도자들로서 바리새인), L. Ginzberg(가이거의 견해와 유사), L. Finkelstein(사회학적 연구를 통해 계층과 위치를 연구), L. Baeck(종교적 지배를 추구한 운동), H. Loewe 등에 의해서 영향을 받았다. 이러한 학자들은 자료들의 가치를 인정했지만, 모순적이거나 개연성이 없을 때에는 비판적으로 고찰하기도 했다. 


 

d) R. T. Herford


 

헤르포드는 기독교적 변증과 반-셈족주의를 중화시키는 일련의 저서들을 발간했다. 그는 랍비적 문헌에 기초하여 바리새인을 구전 율법에 대한 교사로 묘사했다.


 

e) G. F. Moore


 

처음 두 세기 동안의 유대적 사상에 대한 능란하고 분별력있는 종합, 즉 “규범적 유대주의”(normative Judaism)라는 무어의 연구는 영어권 세계에 영향을 주었다. 무어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간의 신학적 불일치를 강조했다.


 

f) S. Zeitlin


 

자이틀린은 랍비 문헌에서 “바리새인” 용어의 다양한 의미를 구분했는데, 그 의도는 사두개인에 대립되는 역사적 집단이 바리새인이 아닌 “분리자들”의 다른 집단과 구분하려는 것이었다. 그는 바리새인의 기원을 주전 5세기에 두었고, 종파가 아니라 구전 율법에 초점을 둔 평신도 서기관 운동에서 기인한 것으로 말한다. 물론 그가 비판적으로 자료들을 사용하지만, 그의 방법론은 특이하기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g) Ellis Rivkin


 

리프킨의 바리새인 연구의 핵심은 "Defining the Pharisees: The Tannaitic Sources"에 있는데, 그는 이 자료에 있는 “perushim”을 바리새인과 동일시 하면서 바리새인의 모습을 구축하려 한다. 리프킨은, 자이틀린의 바리새인에 대한 견해를 다소 수정하여, 바리새인을 종파나 운동이 아니라 이중적 율법―구전 율법과 기록된 율법―을 가르치는 일에 헌신한 학자 계층으로 말한다. 하지만 리프킨은 무비판적으로 자료들의 역사성을 신뢰하면서, 시대착오적으로 자료들을 연결시켰다. 예를 들면, 이중적 율법의 구분은 야브네에서 유대주의 재건의 특징이다.


 

리프킨의 근거없는 역사적 진술들은 노이스너와 라이트스톤(Jack Lightstone)에 의해 비판받았다. 라이트스톤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논쟁을 보이는 텍스트를 연구하고서, 이중적 율법을 찾아 볼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바움가텐(Joseph Baumgarten)은 동일한 본문을 연구한 후, Tannaitic 본문이 바리새인에 대한 적절한 묘사를 제시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러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리프킨은 요세푸스의 문헌과 신약성서를 고찰함으로 자신의 이전의 논제를 계속하여 주장했다. 요세푸스의 자료에 대한 리프킨의 평가는 코헨에 의해서 심한 비판을 받았다.


 

리프킨에 대한 두 결론은 이렇다: 첫째, 그는 요세푸스와 Tannaitics의 자료를 전적으로 신뢰하면서 단순하게 취급했다. 둘째, 리프킨은 요세푸스의 바리새인에 호감을 갖는다. 리프킨의 접근은 지적인 경제와 정밀함으로 특징된다. 하지만 증거의 복잡성이 직면했을 때, 이러한 장점들은 오히려 단점이 된다. 따라서 랍비 문헌에 대한 이해는 다소 전문적이지 못하다.


 

h) Jacob Neusner


 

노이스너의 유대교 연구는 그의 멘토인 스미쓰(Morton Smith)의 저서에 기초한 것으로 특정 주제들에 대한 견해를 수정한다는 평을 받는다. 따라서 노이스너에 대한 평가는 스키쓰/노이스너의 제안과 노이스너 제안으로 나누어서 진행되어야 한다. 보다 구체적인 내용은 연구 방법론에서 고찰하기로 하고, 다만 랍비적 문헌들에 대한 엄밀한 역사-비판적 분석의 결과를 언급한다. 제 2 성전기의 현자들에 대한 이야기는 일반적으로 신뢰성이 없는 것으로 판명되었고, 그들의 가르침은 1, 2세기의 것으로 수용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저자와 시대의 검증을 받은 자료들은 더 신뢰성을 갖게 되었다. 그의 방법론에 의해서 바리새인의 가르침에 대한 개연적 결론을 얻을 수 있게 되었을 뿐 아니라, 요세푸스와 신약 성서의 증거와 관련을 맺게 했다. 예를 들면, 의식적 정결, 십일조와 다른 음식법, 안식일과 축제일 준수 등이다. 노이스너는 바리새인이 하즈모니안 치하에서는 정치적 당파였지만, 헤롯에 의해서 그 자리를 박탈 당했다고 주장할 뿐아니라 또한 바리새인들이 성전 제의나 지배 세력의 통제 아래에 있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바리새인들은 정치적 관심을 지닌 집단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노이스너의 바리새적 전통과 랍비적 구전 율법간의 구분, 그리고 야브네에서 발생한 변화의 중요성을 이해하려는 코헨(S. J. D. Cohen)의 시도를 고찰할 필요가 있다. 70년-이전의 바리새인의 모습은 어떻했는가? 요세푸스의 바리새인에 대한 묘사는 복잡하지만, 후기 작품에서 바리새인에 대한 호의적 태도는 스미쓰/노이스너의 제안으로 설명되지 못한다. 그 두 학자는 70년-이전의 바리새인에 대한 상대적 비중요성을 과도하게 진술했다. 4QMMT는 쿰란 공동체와 공식적 유대주의간의 차이점에 대한 목록이다. 공식적 유대주의를 특징짓는 율법의 요점들은 랍비의 할라카에도 나오고 랍비적 전승에 뿌리를 두고 있는 듯하다. 그렇다면 그것들은 바리새인에게로 소급된다. 그러나 이러한 요점들은 공식적인 유대주의의 것들이다. 그렇다면 쿰란 공동체의 시각에는 공식적 유대주의와 바리새주의는 다소 동일하게 보였다는 것인가?


 

노이스너는 바리새주의에서 변화에 대한 기록을 힐렐에게로 돌린다. 힐렐에 관한 랍비적 전승들은 그 사람에 대해서 거의 말하고 있지 않다. 바리새인에 관한 랍비적 전승을 요약한 노이스너는 그 집단이 전적으로 내적인 모습으로 제시된다는 것이다. 헤롯 왕조 시대에 바리새주의는 비정치적 운동이었다고 노이스너는 결론 짓는다. 그 집단의 이러한 모습은 공관복음서의 증거와 일치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요세푸스의 바리새인들은 정치적 운동이었다. 이러한 차이를 노이스너는 집단의 특성상의 변화로 설명한다: 정치당으로 시작하여 조만간에 식탁 교제가 되었다. 그렇다면 그 변화의 책임 소재는 어디에 있는가? 노이스너는 힐렐에게 그 책임을 돌린다. 힐렐에 대한 자료를 비판적으로 다루는 노이스너의 방법론은 타당치 않다는 비판을 받는다.


 

노이스너(Jacob Neusner)와 리프킨(Ellis Rivkin)이 제시한 역사적 바리새인(historical Pharisees)에 대한 연구는 요세푸스와 신약 성서의 해석과 더불어 랍비 문헌에 대한 복잡한 접근을 제시했다. 리프킨이 바리새인을 말하는 텍스트를 주된 집단으로 사용하면서 랍비 문헌에 대한 자신의 해석을 통제하려고 노력하지만, 그는 그 주된 집단을 다른 자료들과 기간들에 해당하는 랍비 텍스트를 해석하는데 사용한다. 게다가, 그는 바리새인을 확립된 권위에서 유대주의를 지배하려는 학자들 그리고 유대주의의 국제적 형태 형성자로 잘못 생각한다. 미쉬나와 70년-이전의 현인들에 관한 기록에 대한 노이스너의 해석은 역사 비평적이다. 바리새인에 대한 그의 관심의 주제에 대한 그의 설명은 근본적이지만, 바리새인을 비정치적 집단으로 특징짓는 것은 어떻게 종교가 1세기에 사회적 그리고 정치적 국면의 일부인지에 대한 오해에 기초하고 있다. 그의 작품이 많이 사용되지만, 다른 사회적 상황이 제시될 것이다.


 

i) J. Bowker와 H. Mantel


 

보우커는 율법을 매일의 삶에 적절하게 만들고 제사장의 거룩을 백성들에게까지 확대하려고 한 현자들의 운동에 대한 경멸적인 용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히르카누스에 의해서 산헤드린에서 추방되었을 때 종파(sect)가 되었고, 성전 멸망 후에 유대주의를 지배했다. 하지만 그의 자료 활용은 인위적이라는 비판을 받는다. 맨텔은 랍비적 문헌을 역사적으로 정확한 것으로 간주하지만, 모순이 되는 경우엔 비판적으로 평가하면서 사용한다. 그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분리가 에스라 시대에 있었다고 주장하고, 또한 바리새인을 토라에 대한 학자적 연구의 운동을 말한다.


 

j) 바리새인 재평가


 

던은 바리새인 재평가로 특징되는 바리새인 연구의 요점을 제시한다:


 

첫째, 예수 시대의 바리새인은 복음서, 특히 마태복음과 요한복음에서는 70년-이후 기독교와 유대주의간의 대립을 반영하면서 그릇되게 제시되었다. 이러한 판단은 유대인 학계 뿐 아니라 신약학계에서도 거의 지지받고 있다.


 

둘째, 유대인 학자들은 바리새인이 예수의 죽음에 책임을 없을 뿐 아니라 그 사건에 관여하지 않았다(H. Maccoby, “the Jewish view of Jesus”).


 

셋째, 바리새인들은 예수께 적대적이기 않았을 것이다. 예수도 한 바리새인이었다.


 

샌더스는 「예수와 유대교」에서 이상의 요점들, 특히 세 번째를 상세히 다룸으로 재평가의 분수령을 세운다. 샌더스는 예수와 바리새인간의 본질적인 불일치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바리새인들은 일반인들을 죄인으로 여기지 않았을 것이고, 또한 그들과 식사를 나누는 예수를 비난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다른 사람들을 유대교의 사회적 및 종교적 생활에서 배제시킬 권한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C. 연구의 범위


 

바리새인 연구사를 개관함에서 얻은 것은 문헌들에 대한 비판적 고찰의 필요성이다. 그리고 바리새인의 조직, 사회적 형태, 프로그램, 그리고 목적 등이 바리새인 연구의 주제들이라는 점이다. 이제 바리새인에 관한 이론들은 적절한 문헌 고찰을 토대로 제시되고 검증되어야 한다. 특히 바리새인의 내적 행위들과 사회에서 그들의 사회적 역할이 1세기 유대주의의 다양성과 로마 제국의 사회적 구조안에서 밝혀져야 한다.


 

바리새인 연구에 사용되는 문헌은 세 가지 부류다―요세푸스의 문헌들, 신약성서, 그리고 랍비 문헌들. 역사적 재구축을 시도함에서 있어서 이러한 자료들이 갖고 있는 특성과 문제들에 대해서 염두할 필요가 있다. 우선적으로 자료들의 객관성을 말하기는 힘들다. 왜냐하면 요세푸스는 자신이 한 바리새인이라고 주장하고, 신약성서는 바리새인을 예수의 반대자로 간주하고, 그리고 랍비들은 바리새인을 그들의 선조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각각의 자료는 비평적으로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자료에 대한 비판적 고찰들, 즉 자료의 목적, 연대, 그리고 특성 등에 대한 고찰이 요구된다. 특히 바리새인을 직접 언급하는 단편적 자료들만이 고찰의 대상임을 기억해야 한다.


 

연구자의 관심은 일차적으로 1세기 팔레스틴의 사회 속에서 바리새인에 대한 이해에 있기 때문에, 본 연구의 시대적 범위를 원칙상 헤롯 왕조에서 예루살렘 함락 이전에 국한하고자 한다. 이러한 제한으로 바리새인의 기원은 범위 밖으로 밀려난다. 또한 연구에서 고찰하게 될 요세푸스의 자료는 「유대인 전쟁사」, 「유대인 고대사」, 그리고 「생애」 중에서 바리새인을 언급한 부분이 될 것이다. 그리고 신약성서는 팔레스틴을 중심으로 한 예수의 이야기, 즉 복음서에 국한하기로 한다. 또한 랍비 문헌은 70년 이전의 바리새인에 대한 기술을 제시한 부분에 국한하기로 한다.


 

본고에서 중심적으로 다룰 주제는 최근의 학계에서 중심적으로 논의되는 바리새인을 증거한 자료에 대한 검토와 분석 및 그 신뢰성, 바리새인의 가르침 혹은 신학, 그리고 유대교 안에서 유대주의 체제와 다른 체제와의 기능적 관계 등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바리새인의 기원과 역사는 제외하기로 하지만, 다른 주제를 다룰 때 간접적으로 반영될 것이다. 발표자는 언급한 주제별로가 아니라 이해의 밥법론에 따라 제시할 것이다.


 

D. 연구 방법론


 

우리가 문헌을 중심으로 바리새인을 고찰할 때, 집단으로서 바리새인을 연구할 경우가 있겠고 또한 개인으로서 바리새인을 연구할 경우가 있다. 이렇게 구분되는 바리새인의 경우를 동일한 모델로 고찰하는 것보다는 상이한 방법을 통해 고찰하는 것이 더 효과적인 것으로 판단됨으로 여러 해석적 모델 중에서 연구자가 고찰하기로 정한 주제들에 적절한 방법론을 간략하게 제시하고자 한다.


 

1. 역사-비판적 방법론


 

노이스너는 「정치에서 신앙으로」(From Politics to Piety)에서 가능한 자료에 근거하여 역사적 바리새인을 구축하는 복잡한 문제를 다룬다. “삼각 구도”라 불릴 수 있는 방법을 사용하여 그는 자료들의 특성을 파악학 후, 자료들의 일치와 불일치를 비교했다. 그리고 의도적인고 우연적인 왜곡들을 수정했다.


 

스미쓰와 노이스너는 요세푸스 문헌에 대한 비평적 이해를 제안한다. 요세푸스는 자신의 「생애」에서 바리새인에 관하여 호의적인 진술을 한다. 상황은 거의 동시에 기록된 「유대인 고대사」에서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 이전의 작품인 「유대인 전쟁사」에서는 덜 호의적이다. 그들은 이러한 차이를 바리새인의 변화하는 정치적 운명에 대한 반응으로 설명한다. 후기의 저서에서 더 호의적인 진술은 야브네에서 R. 가말리엘 II의 정치적 상승에 의해서 고무된다. 바리새인의 대중성과 영향력에 대한 「유대인 고대사」와 「생애」의 증거는 실제적 규모로 축소된다. 70년 이전의 바리새인의 영향력은 상당히 감소된다.


 

우리는 노이스너가 세 개의 독립된 자료집들을 역사-비판적으로 분석한 것에 귀기울일 필요가 있다:


 

첫째, 유대인으로서 로마의 역사가인 요세푸스가 75-100년 동안 활동하면서 저술한 역사적 이야기(historical narratives)가 있다. 그는 유대인들의 역사를 시작부터 예루살렘 멸망까지 기록했다. 따라서 그의 역사적 기록은 70년 후 로마 정치에서 그의 입장의 견지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둘째, 기독교인 공동체가 50-90년간에 기록한 예수에 관한 전기적 전승(biographical traditions)과 말씀들(sayings)이다. 변증적이고 서사적인 이 기록은 바리새인에 세심한 관심을 쏟지 않는다. 이 기록에서 바리새인들은 십일조를 강조하고, 성전 밖에서 정결법 준수에 헌신한다.


 

셋째, 바리새인의 후계자들로 간주되는 1세기 후반과 2세기의 랍비들에 의해서 70년 이전의 바리새인들에게로 돌려지는 율법들과 말씀들에 대한 복잡한 기록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자료들은 역사적 바리새인의 상황, 관심, 그리고 관점이 아니라 화자의 것들을 반영할 뿐이다.


 

슈바츠(Daniel Schwartz)는 「유대인 고대사」에는 바리새인이 유대전쟁에 대한 실패에 책임이 있는 것으로 제시된다고 주장하면서 스미쓰/노이스너를 비판한다. 슈바츠의 제안은 요세푸스의 의도가 바리새인을 비정치적이고 반로마 전쟁에 가담하지 않은 것으로 제시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스미쓰/노이스너의 가설은 굳블라트(David Goodblatt)에 의해서 변호되었는데, 그는 「고대사」에서 바리새인에 대한 적대적 묘사를 인정하면서도 바리새인에 관한 요세푸스의 증거는 스미쓰나 노이스너가 생각하는 것보다 매우 복잡하다고 말한다. 이러한 그의 결론은 오히려 스미쓰/노이스너의 출발점을 손상시킨다. 그렇다면 70년 이전에 바리새인은 더 현저한 모습을 보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바리새인은 단순하게 랍비와 동일시 될 수 없다. 랍비 문헌을 통해서 바리새인의 모습을 발견하려는 시도는 수정되어야 한다.


 

2. 인물 연구 방법론(prosopographical investigation)


 

“역사적 바리새인”(historical Pharisees)에 대한 재현의 한 방법론에는 자신들을 바리새인으로 동일시하거나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바리새인으로 동일시되는 사람들을 연구하는 것이다. 그 수효는 소수, 4세기 이전으로 확인된 자료에서는 단지 12명에 불과하다. 그 바리새인들을 비-조직적인 집단이 아니라 동일한 집단의 구성원이 된 개인들로 다루는 것이 적합할 것이다. 이러한 접근을 통해 우리는 바리새인에 관한 최근 이론들의 입증(verification) 혹은 허위(falsification)에 대한 단서들을 발견할 것이다. 이 제한된 연구는 바리새인의 정체, 그들의 지지 대상, 후기 랍비적 유대주의와의 관계 등에 대한 질문에 유용한 긍정적 결과뿐 아니라 부정적 결과를 제공할 것이다.


 

한 부정적 결과는 노이스너에 의해서 연구된 현인들(sages) 중에 단지 세 혹은 네 명만이 현재의 연구에 적절하다는 평을 받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고대 자료에서 바리새인으로 동일시되지 않는데 그 이유는 분명하지 않다. 


 

분명히 바리새인 집단과 동일시된 개인들에 관한 자료들을 수집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러한 방법은 바리새인에 관한 확언을 위한 보다 안전한 기초를 제공할 것이다. 또한 이 방법은 호의적이든 비호의적인든 간에 그 집단에 대한 진부한 견해를 의문시 할 때 도움이 될 것이다. 


 

3. 사회학적 모델: 바리새인의 정체성 확인을 위한 질문들.


 

요세푸스가 제시한 세 철학파―바리새파, 사두개파, 에세네파―중에 바리새인에 대한 다양한 묘사들이 있는데, 예를 들면 다음의 것들이다: 유대주의의 한 종파, 강력한 종교 지도자 집단, 정치적 지도자 집단, 학식 있는 학자 집단, 제사장과 경쟁하는 평신도 운동, 도시 자영업의 중산층, 혹은 이러한 것들의 혼합. 일반적으로 바리새인에 대한 이해는 예루살렘의 정치 세력과 신앙 생활에 관련되고, 그리고 도서관의 기록물을 남기지 않았다고 평가된다. 바리새인을 이해함에 있어서 그 토대를 어디에 두어야 할 것인지에 대한 고찰에 요구된다. 단지 그들의 신념체계에 기초할 것인지, 아니면 그것과 연관되어 있는 정치적, 경제적, 그리고 사회적 요소들과 관심사에 기초할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


 

그들의 사회적 정체를 이해하기 위한 여러 질문들이 있을 수 있다: 


 

바리새인은 어느 사회 계층에서 기원했는가; 유대인 사회에서 바리새인들은 어떤 사회적 신분을 누렸는가; 다른 역사의 전개 과정에서 어떤 정치적 경험을 하였는가; 백성들과 다른 지도자 집단에 어떤 권위와 영향력을 발휘했는가; 유대인 사회에서 어느 정도로 중요했는가; 어느 정도로 직접적인 정치력 영향력을 발휘했는가; 자신들과 유대인 사회를 향한 그들의 목표는 무엇이었는가; 유대인 사회를 위하여 어떤 프로그램을 제시했는가?


 

위에 언급된 질문들은 다음과 같은 내적인 면에 대한 단서를 제시할 수 있다:


 

어느 정도의 구성원으로 어떤 조직을 지녔는가; 회원은 어떻게 정의되었는가; 어떤 신념, 사상, 그리고 규칙이 공동 생활을 지배했는가?


 

문학적 및 역사적 분석과 관련된 사회학적 방법론의 활용은 적절한 상황에 증거에 대한 체계적이고 지배적이 이해를 제공할 것이다.


 

E. 용어 정의


 

연구에 필요한 일부의 용어들에 국한하여 정의하고자 한다. 특히 사회학적 용어들과 유대주의 연구에 자주 등장하는 용어들을 제시한다.


 

a) 유대교(Judai는)와 유대주의(Judaism)


 

일반적으로 “유대교”라고 불리는 용어는 하부의 모든 다양성을 포함한 총체적 종교를 언급하는 것으로 정의된다. 최근에 일부 학자들은 “Judaism”을 독립적인 유대인의 종교 체제를 의미하는 것을 선호하는데, 그래서 하나 이상의 체제를 말할 때는 “Judaisms”이라 한다. 따라서 연구자는 총체적인 유대인의 종교 체제들을 부를 때는 유대교(Judaisms)라 하고, 특정의 한 종교 체제를 말할 때는 “유대주의”(Judaism)이라고 부를 것이다.


 

b) “종파”


 

요세푸스는 헬라어 사용 독자의 이해를 위하여 “sect/hairesis”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팔레스틴의 유대인 사회를 세 학파(school)로 구분한다: 사두개인, 바리새인, 그리고 에세네파. 이 용어에 대한 코헨 교수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종파”를 좀더 큰 종교적 집단으로부터 이탈하고 자신들만이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기 때문에 좀더 큰 집단의 이상을 자신들만이 구현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소규모의 조직된 집단으로 정의한다. 종파의 수준을 넘게되면 독립된 종교를 형성하게 되는데, 이러한 부류에 해당하는 것이 바로 기독교 종파에서 성장한 기독교와 바리새 종파에서 성장한 랍비 유대교다.


 

c) “바리새인” 그리고 “바리새주의”(Pharisaism)


 

반-유대적 기독교 신학의 관점의 관점에 반대하여 노이스너는 힐렐의 경구를 들어 바리새인에 대한 개념을 전환시킨다: “당신에게 혐오스런 것을 이웃에게 행하지 말라. 그것이 토라의 전부다. 나머지 모든 것은 주석이다. 자, 가서 배우라.” 그리고 “만일 내가 내 자신을 위하지 않는다면, 누가 나를 위할 것인가? 그러나 내가 내 자신을 위할 때, 나는 무엇인가? 그리고 지금이 아니라면, 언제?” 그렇다면 바리새인은 위선자, 형식주의자 혹은 자기-의 사람이 아니다. M. 스미쓰는 바리새주의를 고대 문명의 관점에서 바리새주의는 유대교 철학안에서 한 분파라고 한다.


 

II. 사회학적 분석을 통한 역사적 바리새인 이해


 

앞서 언급하였듯이, 바리새인에 대한 문헌들은 세 부류로 나뉜다: 첫째, 요세푸스의 문헌; 둘째, 신약성서의 기록; 셋째, 랍비 문헌. 이러한 자료들이 야기하는 문제들에 대한 인식이 바리새인에 대한 역사적 재구축보다 선행하다. 따라서 이러한 문헌들을 다루는 방법에 공헌한 학자들의 조언에 귀기울여야 한다. 스미쓰(M. Smith)는 요세푸스 문헌을 다루는 단서를 제공하고, 쿡(M. J. Cook)은 예수 시대에 유대주의의 다양성에 관한 복음서들의 증거의 타당성에 관한 흥미로운 논증을 제시했다. 비슷하게 노이스너(J. Neusner)는 랍비 문헌을 연구하는 길을 제시했다. 이제 이 문헌들을 차례대로 고찰하고자 한다.


 

A. 요세푸스의 바리새인


 

로마에서 기록된 요세푸스의 네 작품들은 고대로부터 전수되어 왔다: 「유대인 전쟁사」, 「유대인 고대사」「생애」, 그리고 「아피온에 대항하여」. 「유대인 전쟁사」는 처음에 아람어로 기록되었는데, 그 목적은 파르티아 제국(Parthian Empire)의 유대인들에게 예루살렘의 함락을 두고 로마를 비난하지 않도록 호소하려는 것이었다. 요세푸스는 그 결과가 유대인 자신의 그릇된 행위의 결과로 주장한다. 또한 그의 의도는 로마인들의 팔레스틴 행정과 전쟁 행위를 방어하려는 것이었다. 이 작품은 후에 헬라어로 번역되어 A.D. 75년과 79년간에 발행되었다. 그로부터 16년 후인 A.D. 93-94에 그는 A.D. 70년에 이르는 고대 이스라엘 역사를 다루는 「유대인 고대사」를 발행했다. A.D. 100년 후에 「생애」를,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피온에 대항하여」를 썼다. 요세푸스의 문헌에는 “바리새인”이 20회 정도 언급되는데, 그러한 언급은 유대인 사회에서 소극적 역할을 반영한다.


 

헤롯이 죽고 그의 아들 아르켈라오가 통치를 시작하기 전에, 팔레스틴 사람들은 반로마 운동으로 그 지역의 무질서를 야기시켰는데, 이것은 주로 다양한 정치적이고 메시아적 유대인들에 의해서 지시되었다. 아르칼레오의 폭정으로 유대인들과 사마리안들은 그를 제거할 것을 요청했다. 그래서 그 지역은 6CE-66 동안 로마 총독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첫 총독인 코포니우스의 치하에서 갈릴리 사람 유다는 로마에 세금을 거부하면서 오직 하나님 만의 통치를 주장했다. 그의 반로마운동이 특이한 점은 그가 넷째 철학파의 교사이고 창시자라는 점이다. 그는 바리새인 사독의 도움을 받아서 백성들도 반로마운동에 동참케 했다. 요세푸스는 이 사건을 들어 혁신과 개혁은 위험한 것이고, 또한 유대인의 정치를 파괴하는 것임을 경고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 운동은 유대주의 세 학파와는 공통점이 없다고 덧붙인다. 그렇지만 관련은 있다고 제시한 듯하다.


 

1. 「유대인 전쟁사」의 바리새인


 

바리새인은 「유대인 전쟁사」의 세 주요 구절에 나온다. 바리새인들은 알렉산드리아 살로메의 통치 때에 갑자스럽게 지배적 새력으로 등장한다. 후에 그들은 헤롯의 궁정의 일과 과련하여 언급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바리새인들은 중요한 관심을 받는다.


 

(1) 바리새인과 알렉산드라 살로메 (1권, 107-114): 바리새인들은 종교와 율법을 가르치는 분야에서 “탁월하기” 제시된다. 그러나 그들이 가르친 신앙의 내용이나 율법의 내용은 묘사되지 않는다. 바리새인들은 왕비의 신앙을 강조하고, 그녀의 신뢰를 이용하고, 점차적으로 권력을 잡는다. 게다가 그들은 자신들의 유익을 위하여 그 권력을 사용한다. 그들은 반대자들을 숙청하는 과오를 범한다. 


 

(2) 헤롯의 궁정에서 (1권, 571): 바리새인들은 다른 정치 당파처럼 한 당파를 지지하고 다른 당파를 반대하도록 매수되었다.


 

(3) 철학파 (2권, 162-166) : 요세푸스는 「유대 전쟁사」에서 바리새인, 사두개인 그리고 에세네파를 순서대로 다루는데, 에세네파에 대해서 좀더 자세히 다루는 이유는 그들의 생활 양식이 정치적 위협을 제시하지 않는다는 것을 로마인들과 동양 철학자들로 하여금 알도록 하려는 것이었을 것이다. 세 철학파의 철학적 및 신학적 논제에 대한 신념들인 운명(신의 섭리), 자유 의지와 인간의 책임, 상벌을 동반한 불멸 등의 대조된다. 그리고 그들 안에서 상호 관련성 및 다른 학파들과의 관련성이 대조된다.


 

 








































 

바리새인

cf. 사두개인

생활 양식

상호 애호적

상호 무례한

공동체의 조화를 배양

이방인에게 하듯이 동료들에게 무례

사상

운명

모든 일을 운명과 하나님께 돌림

운명을 부인하고, 하나님은 직권과 악의 견지를 초월

자유의지와 인간의 책임

옳고 그르게 행하는 것은 거의 인간에게 달렸지만, 운명도 각각의 행동에 협력한다.

인간은 전적으로 악과 선의 선택을 통제한다.

사후 문제

모든 영혼은 불멸한다.

영혼의 내구성은 없다.

선한 사람의 영혼만이 다른 몸을 입는다.

보상이나 징벌은 없다.

악한 사람은 영혼은 영원한 징벌로 고생한다.

 

영향력

율법에 대한 정확한 해석자들로 간주되었다.

(정보 없음)

주도적 학파의 자리를 차지했다.

 


 

여기서 요세푸스는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을 칭찬하거나 비난하지는 않는다. 요세푸스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신학적 그리고 철학적 차이를 밝히지만, 그들의 입장에 대한 논평을 하지는 않는다. 바리새인들은 내적인 사회적 관계와 공적으로 조화로운 관계를 육성한다. 요세푸스는 신념과 관련하여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행위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2. 「유대인 고대사」의 바리새인


 

이 책에서 바리새인은 매우 지배적이다. 이제 요세푸스가 말하려는 것은 바리새인의 도움 없이는 국가가 통치될 수 없다는 것이고, 자신도 그들 중의 하나라는 것이다.


 

(1) 「유대인 고대사」, 13권: 「고대사」, 13권에서 처음으로 바리새인, 사두개인 그리고 에세네파가 소개되는데, 그 목적은 헬라 세계에서 유대주의의 지위를 확립하려는 것이다.


 

(2) 「고대사」, 18권: 요세푸스는 집단과 철학파로서 바리새인의 신념과 행위를 자세하게 제시한다.


 

 








































 

바리새인

사두개인

생활 양식

사치를 용인하지 않으면서 삶의 표준을 단순화시킨다.

 

장로들에게 존경과 복종을 하고, 그들의 제안에 반박하지 않는다.

그들이 따르는 지혜의 길의 교사들과 논박한다.

사상

운명

로고스가 말하는 선의 지침을 따른다.

율법과 무관한 준수 사항을 수용하지 않는다.

자유의지와 인간의 책임

인간의 행동은 운명과 인간의지의 결합에 의해 설명된다.

 

사후 문제

영혼은 죽음 후에도 존속된다.

영혼은 육신과 함께 사라진다.

지하 세계에서 보상과 심판이 있다.

 

영향력

그들의 견해로 소도시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했다.

로고스에 대해 아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지고의 입장을 지녔다.

그들의 견해에 따라 예배가 드려졌다.

대중이 바리새인의 가르침을 추종한 관계로 공적으로 거의 성취하지는 못했다.

생활과 강론에서 지고의 이상을 실천하는 바리새인의 탁월함에 대한 시민의 증거

 


 

요세푸스는 행위에 근거하여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을 칭찬하거나 책망하지 않고, 단지 그들의 세력과 영향력을 언급한다. 그의 의도는 전통적인 유대인의 사고 방식이 헬라 철학만큼 존중될 수 있고 혁신적이지는 않다는 것을 보이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70년 이후의 상황을 고려하여 바리새인에 대해 요세푸스가 과장을 했다고 말하기도 한다.


 

3. 「생애」


 

자신의 인격에 대한 공격의 답변으로 그리고 「고대사」의 부록으로 기록된 「생애」에서, 요세푸스는 몇 집단에서의 3년간의 훈련과 19살 때 스토아학파와 유사점을 가진 바누스의 제자가 되기로 선택한 것에 대해 말한다. 일반적으로 바리새인은 12개월간의 훈련을 요구했고, 사두개인에 대한 정보는 없고, 그리고 에세네파는 긴 견습 기간을 부과했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하자면, 요세푸스가 바리새주의, 에세네주의, 그리고 사두개주의를 연구하기 위하여 상당한 시간을 들이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종파와 자신의 삶에 대한 요세푸스의 증거는 서로 관련이 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그가 원하는 것은 그가 말하는 것을 자신이 알고 있다는 것과 자신이 바리새인이라는 것을 독자들에게 알리는 것이다. 코헨은 요세푸스가 자신을 바리새인과의 동일시한 것이 적절하다고 평가한다. 라작(Rajak)은 바누스가 광야에서 정치적으로 급진적인 집단을 인도했을 것이라고 명시한다. 그렇다면 요세푸스가 바리새인을 선택한 것은 혁명에 대한 반대였을 것이고 제국과의 조정을 수용한 것이다.


 

하지만 노이스너는 요세푸스의 이야기를 토대로 바리새인들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추정한다:


 

일부 바리새인들은 중요한 정치가로서 전쟁을 지휘하거나 전장터의 지휘관을 세우거나 제거할 수 있었다. 예루살렘에서 그들은 고위직을 누렸다. 그들의 지도자들은 정치적 경험과 상당한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요약


 

이상 고찰한 내용을 요약하겠다. 요세푸스는 팔레스틴의 지배력의 전환에 따라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을 세력과 영향력을 위한 정치적 및 사회적 경쟁의 부분으로 다룬다. 바리새인들은 정치적 관심을 가진 집단이었지만,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그래도 그들은 조직된 자유 집단으로서 세력 확보에 집요한 관심을 보였다. 그렇다면 그들은 렌스키가 말하는 가신 집단이었다.


 

바리새인들이 사회와 율법에 대해서 원하는 정확한 목적을 요세푸스는 서술하지 않는다. 하스몬니안 시대로부터 아르칼레오의 통치 시기까지 그들은 전통적이었고, 비혁명적 유대주의였다. 어떤 종류의 영향력을 행사하였을 지라도, 그들은 강력한 후견인의 도움으로 영향력을 발휘하였고 그리고 상위 계층의 다른 집단들과 제휴했다.


 

요세푸스는 사두개인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하지는 않지만, 그들은 지배 계층의 일원이었다. 사두개인들이 촉진시킨 성서적 전통과 해석들은 지위와 지배 계층의 정치적 및 재정적 이익을 육성시켰다. 이것은 그들의 지지와 비대중성을 설명한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에 대한 요세푸스의 기술은 그들의 행동과 일치하지만, 결코 완전하지 않고 그들의 사상과 조직에 대해 일관적인 서술을 하지 않는다.


 

4. 요세푸스의 문헌에 대한 평가


 

바리새인은 대중의 신뢰와 지지를 받으면서 대중에게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한 대규모 집단이라고 일반적으로 가정된다(Rivkin; Davies; Finkel; Jeremias; Meyer; Marcus). 하지만 스미쓰(Smith)는 「유대 전쟁사」와 「유대 고대사」에서 요세푸스의 바리새인에 대한 묘사를 비교 분석하여, 결과적으로 그의 증거의 가치에 의심을 제시했다. 그의 논평은 우리가 요세푸스의 두 작품간에서 발견할 수 있는 차이점들을 얼버무릴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만든다.


 

a) ai[resij: 종파 혹은 학파


 

요세푸스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내적 조직과 지도력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다. 또한 용어를 정확하게 사용하고 있지도 않다. 그 한 예가 바로 특정 학파의 사상을 의미하는 “ai[resij”다. 요세푸스는 이 용어를 유대주의에서 사상과 실천의 경향을 묘사하는데 사용한다. 이 용어를 종파 혹은 분파로 번역하는 것을 정확하지는 않지만, 학파가 더 정확한 번역일 것이다. 왜냐하면 요세푸스는 바리새인, 사두개인 그리고 에세네파를 헬라 철학과 비교하여, 유대인이 존중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증거를 요구한다면 어려운 문제다. 또한 헬라의 철학파들은 교리에 대한 학적인 연구에 종사하지 않고, 오히려 생활 양식에 관심을 두었다. 정치적 관심에서 보자면, 학파라 할 수 없고; 생활 양식의 관점에서 보자면, 학파가 적절할 것이다.


 

b) 여록, 「유대 고대사」의 친-바리새적 성향?


 

요세푸스가 친-바리새적이었다는 주장이 있다(R. Laqueur; Hans Rasp; Morton Smith; Jacob Neusner). 노이스너는 미쉬나와 복음서에 근거하여 바리새인은 종파 집단과 같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요세푸스의 친-바리새적 성향의 주장에는 난점도 있다. 첫째, 다른 집단들도 동일한 방식으로 다루고 또한 반-바리새적인 부분도 있다. 둘째, 유대인 안정의 입장에서 집단들에 대한 태도를 보일 뿐이다. 셋째, 90년경 팔레스틴에서 그들의 역할은 불확실하다.


 

c) 바리새인의 정치적 영향력


 

노이스너는 바리새인들이 헤롯과 로마의 통치 시기에 정치적으로 활약하는 집단으로 존재하는 것을 종식하고 분파적 특성을 갖게 되었다고 주장하지만, 그렇게 첨예한 대조는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다양한 사회에서 왕권의 후견인을 갖지 못한 미력한 요소(minor factor)로서 존재했지만, 세력과 영향력에 관심을 두었다.


 

B. 신약성서의 바리새인


 

복음서는 예수의 시대와 그 생애를 직접적으로 제시하지 않고 있기에, 우리가 역사적 바리새인을 연구하는 필요한 자료들을 제공하는데는 한계가 있다. 특히 복음서 저자들은 서사적 및 신학적 목적을 위해 바리새인들을 다소 변화시킨다(Malbon). 따라서 복음서를 분석할 때, 특별한 관심은 사람들을 하나로 묶는 사회적 관계, 명예와 수치 체제, 후견인과 의뢰인 관계, 연맹 그리고 당파 등에 있어야 한다.


 

1. 신약성서의 바리새인 묘사들


 

신약성서의 바리새인에 대한 묘사를 요약한다:


 

첫째, 복음서의 여러 곳에서, 바리새인들은 여러 집단들과 관련되어 묘사된다: 서기관들(막 7:1-23), 헤롯당(막 3:1-6; 12:13), 사두개인들(마 3:7-10), 심지어 대제사장(마 21:45). 때때로 집단들은 서로 대적하기도 하지만, 예수에 대항할 경우에는 서로 연대한다. 그러나 이러한 묘사들을 이차적인 것으로 간주할 만한 타당한 이유가 있다. 마가복음 2장 6절과 12장 38절이 “서기관들”만 언급하는데, 마태복음 23장과 눅가복음 5장 21절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언급한다. 학자들이 Q로 간주하는 구절에서 마태복음의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3:7-10)은 누가복음의 “군중들”(3:7-9)보다 원형적이지 못하다. 이와 비슷하게 마가복음 8장 11절의 바리새인들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마 16:1) 또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마 12:38)이 된다. 그러므로 후기의 자료에는 이름들을 덧붙임으로 일부 에피소드에서 예수의 반대자들을 과장하는 경향이 있는 듯하다. 


 

둘째, 바리새인들은, 비록 그것이 “구전 토라”의 형태가 아닐지라도 “장로들의 유전들”을 가지고 있다(막 7:5).


 

셋째, 먹는 것과 의식적 정결이 많다(막 2:15-17// 마 9:10-13// 눅 5:29-32; 막 7:1-23// 마 15:1-20// 눅 11:37-41).


 

넷째, 다른 문제들에 관한 묘사가 있다. 예를 들면, 안식일(막 2:23-28// 마 12:1-8// 눅 6:1-5; 막 3:1-6; 마 12:9-14// 눅 6:6-11), 결혼(막 10:2-12// 마 19:3-12// 눅 16:18), 메시아 인식법(막 12:35-37// 마 22:41-46// 눅 20:41-44), 그리고 로마의 권위에 대한 순종(막 12:13-17// 마 22:15-22; 눅 20:20-26).


 

다섯째, 대체로 바리새인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예수를 부각하는 역할만을 한다. 그들은 와서 예수께 질문을 하지만, 초점음 예수의 답변에 있고; 바리새인은 다시 재치있는 말대꾸를 하지 않는다.


 

이러한 증거를 해석하는 여러 가능한 방법들이 있다. 첫째, 바리새인에 관한 대부분의 진술, 특히 바리새적 지배를 나타내는 진술이 전승에 대한 70년 후의 추가이고, 또한 후기의 논쟁을 반영하는 것으로 결론짓는 것이다. 둘째, 빌트(Wild)는 묘사들이 기독교인이 된 바리새인들과 그렇치 않은 바리새인들간의 내부적 논쟁을 나타내는 것으로 간주한다. 아마 일부는 기독교인 내부의 논쟁일 수도 있을 것이다. 셋째, 대부분의 신약 학자들은 예수의 시대까지 소급되지는 않을 지라도 70년 이전의 상황을 다소 제시한다고 한다(Saldarini, 1988: 144-98).


 

2. 마가복음의 바리새인


 

a) 텍스트들


 

연구자가 네 복음서 중에서 마가복음을 우선적으로 다루는 이유는, 살다리니의 견해와 같이 마가 우선설을 따르기 때문이고, 또한 마가복음이 마태복음보다는 바리새인에 대해 독특하게 제시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마가복음의 저자는 바리새인과 다른 지도자 집단에 대하여 조리있고 일관된 모습을 제시하는데, 이러한 제시는 팔레스틴 사회에서 예수의 사역과 위치를 이해하는데 적절하다. 하지만 마가복음의 제시는 요세푸스의 제시와 차이가 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아마도 그 차이는 저자의 관점과 관심의 차이때문일 것이다.


 

마가복음에서 서기관들과 더불어 바리새인은 갈릴리에서 예수의 주된 반대자로 활동한다. 마가복음을  70년 이전의 전쟁 상황에서 기록된 가정을 수용한다면, 마가복음의 저자는 자신의 지식 혹은 전승 자료에 기초하여 1세기 중엽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고 간주할 수 있다(Hengel).


 

마가복음에는 “바리새인”이 단독으로 제시된 경우가 5회인데, 그 때마다 그들은 예수와 갈등 관계에 있다(2:18; 2:24; 3:2; 8:11, 15; 10:2). 바리새인과 서기관이 함께 언급되는 경우는 2회인데, 그 때도 예수와 갈등 관계이 있다(2:6; 7:1, 5). 또한 바리새인은 정치적인 문제에서 헤롯당과 관련하여 2회 제시된다(3:6; 12:13). 이러한 바리새인의 사회적 계층 및 지위 그리고 사회에 대한 그들의 관계는 그들의 지역적 위치와 그들이 다루는 논제들에 의해서 결정된다.


 

b) 바리새인의 위치


 

마가복음의 저자는 한 경우(12:13)를 제외하고는 바리새인을 갈릴리에 위치시킨다. 바리새인은 가버나움과 다른 전원 소도시(3:2, 6; 7:1, 5)와 다른 중간지(2:18, 24; 8:11; 10:2)에서 만난다. 그들은 갈릴리에서 매우 활동적이다. 그들은 다른 집단들과 접촉을 하였는데, 예를 들면 헤로디안들(3:6)과 서기관들이다. 그들은 예루살렘에는 단 한 번 등장하지만, 이것은 저자의 문학적 배열 때문이다. 예루살렘에서 그들의 등장은 그곳에서도 그들의 활동이 있었다는 가능성을 전적으로 배제하지는 않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c) 논제들


 

바리새인들은 예수와 금식(2:18), 안식일 준수(2:24; 3:2), 이혼(10:2)의 문제들을 두고 예수와 논쟁한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손 씻기(7:1) 문제를 놓고 논쟁하고,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은 예수가 죄인들과 식탁 교제 나누는 것(2:16)을 문제시 한다. 또한 바리새인들은 기적을 요구하면서 예수의 권위(8:11)를 문제시한다. 헤롯당과 함께 바리새인들은 정치적 문제, 즉 로마 세금 문제(12:13)를 두고 예수를 체포하고자 한다.


 

마가복음에서 바리새인들은 사회의 다른 집단들과 관계를 지니고 있고, 예수에게 반대하여 헤롯당과 정치적 동맹을 맺고, 그리고 헤롯당과 함께 예루살렘 지도자들의 선동으로 예수를 시험하기 때문에, 그들은 정치적 유익 집단과 연합하여 활동한다. 특히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은 아마도 예루살렘의 대표자들일 것이다. 그들의 종교관은 유대인들이 팔레스틴에서 생활하는 방식에 필수적인 요소이기 때문에, 그들은 사회적 실천과 공동체의 가치관을 결정하는 정치적, 범적 그리고 사회적 요소들에 가능한 많은 통제와 영향력을 추구했다.


 

노이스너는 신약성서에서 바리새인의 관심사들이 의식적 정결, 농업적 십일조 그리고 안식일 준수인 것에 기초하여 바리새인이 정치적 활동 세력이 아니라 종교적 분파 혹은 식탁 교제 집단이라고 제안했다. 하지만 그 당시 정치와 종교는 분리될 수 없는 상황이었음을 감안한다면, 노이스너의 제안은 설득적이지 못하다. 더글라스(Mary Douglas)의 인류학적 연구에 기초하여 네이레이(J. Neyrey)는 마가복음에서 정결법이 공동체의 기구(mechanism)를 설정하는 기능을 하는 것을 제시하기 위하여 연구했다. 그렇다면 바리새인들은 특정 공동체를 옹호하는 자들이었다.


 

예수와 바리새인이 일부 유대인들에게 관심사였던 신학적 논제를 두고 논쟁하지 않았고, 오히려 공동체의 지배를 놓고 경합했다. 마가복음에 따르면, 바리새인들은 갈릴리에서 지도자들로 인정받았다. 이것은 그들이 공동체 안에서 상당한 지위를 가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d) 바리새인의 계층과 지위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많은 공통의 관심사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면, 그들은 예수의 가르침과 전통에 도전하는 것에 거스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사이에는 다소 사이점이 있다. 바리새인들은 안식일과 음식법을 언급하고, 반면에 서기관들은 가르치는 권위를 논쟁한다. 그렇다면 서기관들은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권위있는 교사였다는 것이고, 반면에 바리새인들은 특정의 율법과 실천에 대한 특별한 해석을 지닌 집단이었다는 것이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종교적 전문가로서 백성들 중에서 영향력과 합성적인 통제를 추구했고, 그리고 이러한 추구에서 예수와 경쟁했다.


 

C. 랍비적 문헌의 바리새인


 

1. 랍비 문헌 사용의 타당성


 

기독교인들은 신약성서에 제시된 바리새인에 대한 변증적 기록을 역사로 이해하는 경향을 보였고, 또한 그것을 랍비 문서를 이해하는데 사용하려 했다. 이러한 연구에 영향을 끼친 학자는 쉬르어(Schürer)다. 새로운 연구가 그 동안의 연구에서 간과된 제 2 성전기를 중심으로 다루려할 때 직면되는 문제는 자료와 근거의 부족이다.


 

랍비 문헌을 1세기의 자료로 활용할 때, 그 전제들이 있다:


 

첫째, 2, 3세기의 랍비들은 바리새인의 후기 모습이다; 둘째, 그들간의 생활 양식이 거의 변하지 않았다; 셋째, 제 2 성전기 사건들과 제도들에 대한 기록들은 자세한 정보에 입각한 것이고 편견이 없는 것이다; 넷째, 랍비 문헌은 바리새인에 대한 적절한 이해를 위한 충분한 정보를 제시한다.


 

하지만 이러한 전제들은 바리새인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잘못된 것이거나 오용된 것이다:


 

첫째, 70년 이전의 바리새인들은 70년 이후의 랍비들의 등장에 공헌했지만, 증거는 충분치 않다. 초기 랍비 자료의 tannaitic 저자는 자신들을 바리새인들과 동일시하지 않았고, 바리새주의 외에 유대인 사회와 전통의 많은 다른 요소들은 유대주의가 제 2 성전의 파멸 후의 여러 세기 동안에 취한 모습에 공헌했다. 둘째, 바리새인과 랍비간에 연속성이 있을 지라도, 성전, 예루살렘 지도력, 그리고 분명한 정치적 정체성 등의 상실은 그 상징적 체제, 행동 양식 그리고 가치 등에 뿐아니라, 세계에 대한 유대인의 이해에 주요한 조정을 일으켰다. 셋째, 랍비 문헌(미쉬나, 토세프타, 두 탈무드, 그리고 미드라쉬 수집)과 수집된 전승들은 장르, 목적, 연대, 그리고 기원 등에 있어서 다양하다. 넷째, 다소 믿을 만한 전승들은 예외가 되겠지만, 전승들은 불완전하고 또한 랍비 문헌의 저자들은 역사에 대한 관심을 심도있게 두지 않았다.


 

그렇다면 랍비 문헌은 바리새인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핵심 자료로 사용될 수 없다. 오히려 그 주장의 신뢰성을 결정하기 위하여 역사-비평적 고찰이 필요하다.


 

2. 70년 이전의 바리새인 전승들


 

노이스너는 자신의 연구 범위를 70년 이전의 바리새인들에 관한 전승에 한정한다. 그는 655개의 본문에서 371개의 분리된 바리새적 전승들을 발견한다. 이것들 중에 462개의 본문에서 280개의 전승은 힐렐이라 불리는 바리새인 및 그와 관련된 사람들인 샴마이학파에 관한 것이다. 이것은 70년 이전의 바리새인에 관한 전체 전승의 75%에 해당한다. 힐렐은 랍비들에게 매우 유명한 인물로, 바리새인 운동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인물처럼 보인다. 그는 바벨로니아에서 유대로 왔는데, 그를 따르는 힐렐 해석학파는 샴마이 해석학파보다 우세했다.


 

노이스는 이 전승들이 관심을 둔 첫째 부류에는 농업의 십일조, 제사, 그리고 금기 사항들 등이었고, 둘째 부류에는 의식적 정결례이었다고 한다. 바리새인들을 다른 유대인들과 분리시킨 것은 바로 이전에 성전의 제사장들에게만 적용했던 정결법을 이제는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특히 식사 배경에 적용한다는 원칙이었다. 그것이 암시하는 바는 식탁이 제단과 유사하고, 또한 모든 유대인들이 제사장들이라는 것이었다. 모든 백성들 혹은 적어도 바리새적인 정결법을 따르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거처에 존재했다. 비록 바리새인이 성전을 반대했다고 믿을 만한 근거가 없을 지라도, 이것은 성전없는 유대주의에 대한 이론적 토대를 제공했다. 아마도 십일조에 대한 바리새인의 강조는 식탁의 정결과 관련된 것으로 간주되어야 할 것이다. 십일조는 팔레스틴 지역에서 섭취된 것의 대부분을 구성하는 농업 생산물과 주로 관련되었다. 따라서 십일조 규칙은 식탁-교제에 영향을 주었다. 십일조를 드리지 않은 음식을 먹는 것은 식탁에서 토라를 거역하는 것이었다.


 

바리새인들은 그들의 공동체 및 다른 집단들과의 차이를 기념하는 의식적 식사를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 식사들은 기독교의 성만찬(eucharist)이나 쿰란의 메시아적 식사와 유사하지도 않다. 거룩하게 하는 신성화(sanctification)는 의식적 행위가 아니라 가정에서 모든 식사에 적용되는 그러한 범주였다. 모든 식사는 백성들 중에서 하나님의 임재의 생생한 신호였다.


 

3. Perushim의 정결법


 

“분리주의자들”을 의미하는 “perushim”은 아마도 외부인들이 바리새인들에게 부여한 부정적인 명칭이었을 것이지만, 후에는 바리새인들에 의해서 적절한 적절한 이름으로 채택되었다. “거룩함”(Holiness)는 하나님께 받아 들여짐을 의미했는데, 왜냐하면 하나님을 기쁘게하지 목하는 것으로부터 분리해서 제의(cult)에 참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의식적으로 불결한 것으로부터 자신들을 분리시키는 과정에서 바리새인들은 그들 자신의 사회에서 자신들을 분리시켰다. 토라에 대한 바리새적 해석은 그들을 다른 유대인들과 분리시켰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해석을 전체 사회에 적용하기를 원하는 모습으로 제시된다. 이것은 그들이 정치에 관심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랍비 문헌에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요세푸스의 요한 하르카누스의 축제에 대한 이야기에서처럼 서로 경쟁적이다. 그 경쟁은 랍비 전승들에서 의식적 정결과 관련되지만, 정결법은 정치적 결과를 낳았다. 사두개인들과의 경쟁은 바리새인들이 예루살렘에 존재했음을 가늠하게 한다. 랍비적 전승은 토라에 대한 바리새인들의 해석이 갈릴리에서는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았다는 것을 나타내는데, 이것은 요세푸스의 제시와 일치한다.


 

랍비 문헌들은 바리새인들을 식탁-교제 집단으로 묘사한다. 그들의 식사를 중심으로한 규칙들은 자신들을 다른 사람들과 분리시킨 것이었다. 이러한 분리의 목적은 거룩하게 되기 위함으로, 결국은 그들 중에 하나님의 임재를 위한 것이었다. 그러한 행위는 사회적, 정치적, 그리고 경제적 결과를 낳았고, 또한 현대적 의미로 단지 “종교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특히 랍비 문헌에서 의식의 문제에 대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상반된 태도는 정치적 의미를 가졌다. 바리새인의 영향력은 예루살렘에서도 있었을 것이다. 랍비 문헌은 바리새인들이 갈릴리에서 상당히 영향력이 있었다는 생각에 지지를 보내지 않는다.


 

III. 인물 연구 모델을 통한 역사적 바리새인 이해


 

a) Eleazar


 

바리새인으로 간주될 수 있는 첫 번째 개인은 어떤 엘레자르다. 요세푸스에 의해서 자세히 제시되고 있듯이(「유대인 고대사」 13.288-98), 엘레자르는 요한 히르카누스(135/4-104 B.C.E)와 바리새인간의 단절에 관한 유명한 이야기에서 핵심 인물이다. 바리새인 동료들을 위하여 하르카누스가 베푼 축제 동안에, 그들은 그를 비난할 것을 전혀 찾지 못했다. 오직 엘레자르만이 그가 대제사장직을 사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르카누스는 분노하여 바리새인들로 하여금 그러한 오만에 대한 죄과를 결정하도록 요청한다. 바리새인들은 엘레자르를 매질할 것을 제안하지만, 하르카누스는 그렇게 가벼운 형벌은 자신의 위엄에 대한 모욕이라고 간주한다. 그래서 그는 바리새인들과 단절하고서 사두개인들과 동맹한다. 전체 이야기는 매우 전설적이어서 역사적 자료로써 신뢰성이 없다. 엘레자르는 바리새인과 관련되어 언급되지만, 한 바리새인으로 확인되지는 않는다. 만일 그가 바리새인이었다면, 그는 바리새인으로 정확하게 언급될 것인데, 왜냐하면 대제사장에 대한 그의 경시는 이례적이었기 때문이다.


 

b) 폴리온(Pollion)


 

우리의 관심을 끄는 두 번째 인물은 헤롯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요세푸스는 그를 “바리새인 폴리온”이라고 부른다. 그와 그의 제자 “샴마이아스”(Samaias)는 헤롯이 평민으로 있을 동안에 지지한 대가로 헤롯에 의해서 영예를 받았다(「고대사」 15.3-4). 요세푸스가 폴리온과 샴마이아스를 같이 언급할 때, 두 번씩이나 폴리온만을 바리새인이라 부른다. 우리는 이 구분을 심도있게 다루어야 한다. 하르카누스와 샴마이아스가 바리새인의 제자로 불리는 것은 그들을 바리새인으로 간주하지는 않는다.


 

요세푸스에 따르면, 바리새인 폴리온은 헤롯을 지지한 중요한 인물이다. 이것 때문에 그와 그의 제자들은 왕에 대한 서약으로부터 면제될 수 있었다(「고대사」 15.370):


 

sune,peiqe de. kai. tou.j peri. Polli,wn to.n Farisai/on kai. Samai,an kai. tw/n evkei,noij sundiatribo,ntwn tou.j plei,stouj ovmnu,ein


 

폴리온은 바리새인의 권위있는 대표자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고대사」 14.172-76에 따르면, 그의 제자 샴아미아스는 헤롯의 지지를 받는 산헤드린의 일원이었다. 헤롯과 관련하여 그 두사람의 역할들은 요세푸스에 의해 혼동되어 있다.


 

c) 사독(Saddok)


 

사독은 갈릴리 사람 유다(Judas the Galilean)와 함께 퀴리누스(Quirinus)의 호구조사 때(c. 6 C.E.) 소위 제 4 철학파를 세웠다. 요세푸스는 사독에 관한 다른 말을 하지는 않지만, “유다와 사독이 고무시킨 열심은 우리의 폐허의 원인이었다”(「고대사」 18.10)고 비난한다. 요세푸스는 일관성없이 처음으로 제 4 철학파가 다른 유대인 집단과는 공통점이 없다고 진술한다(「전쟁사」 2.118). 오히려 후에 그는 “그들의 다른 모든 것이 바리새인들의 견해와 일치했지만, 그들이 자유를 향한 열망만은 예외였다”(「고대사」 18.23)고 주장한다. 사독은 그 집단의 대표자가 아닌 다른 바리새인이었다.


 

d) 시몬(Simon)


 

누가복음 7장 40-44절에는 처음으로 시몬이라는 바리새인의 이름이 나온다. 누가복음의 저자는 이야기의 배경을 갈릴리로 삼는다. 이야기를 통해서 복음서 저자는 긴장과 논쟁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는 몇몇 바리새인들과 접촉했다는 요점을 말하고자 한다. 그들 모두는 몇몇 손님들에게 숙박을 제공할 수 있는 집주인으로 묘사된다.


 

e) 니고데모(Nicodemos)


 

복음서에서 바리새인으로 불리는 다른 인물은 니고데모다. 그는 처음엔 밤에 예수와 대화하고(요 3:1-15), 산헤드린에서는 예수를 변호하지만 성공하지는 못했고(7:50-52), 마지막으로는 예수의 장사에 동참한다(19:39). 이 정보에 대한 역사적 신뢰성을 평가하기는 어렵지만, 니고데모는 평면적이고 진부한 인물(falt, stereotypical character)이 아니라, 지배 계층의 특출한 인물이다(3:1, V/Hn de. a;nqrwpoj evk tw/n Farisai,wn( Niko,dhmoj o;noma auvtw/|( a;rcwn tw/n VIoudai,wn\).


 

f) 가말리엘(Gamaliel)


 

가말리엘은 두 구절에서 현저하게 다루어진다(행 5:34; 22:3). 가말리엘은 바리새인 운동에 대한 평가에 매우 중요한 인물인데, 왜냐하면 가말리엘과 그의 아들 시몬 벤 가말리엘(Simon ben Gamaliel)은 요세푸스와 랍비 문헌에서 바리새인으로 확인되는 유일한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바리새인과 랍비 문헌의 현인들을 연결하는 한정된 인물들이다. 그렇지만 학자들은 가말리엘과 그의 아들이 기존의 랍비 문헌에 후대에 삽입된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가말리엘의 가문과 다른 현인들과의 연결은 희박하다.


 

사도행전에서 가말리엘은 바리새인으로, 그리고 산헤드린 의원으로 소개되며, 또한 모든 사람들에 의해서 율법 교사로 인정을 받고 있다. 비록 산헤드린에서 가말리엘의 연설이 후대의 작문이라고 평가되지만, 사도행전의 저자는 예수의 제자들과 바리새인간의 긍정적 관계를 강조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g) 바울(Paul)


 

사도행전 22장 3절은 바울을 가말리엘의 제자로 소개한다. 이러한 주장에 대한 의구심도 있다. 바울은 자신의 삶의 일부 동안은 바리새인이었다(빌 3:5-6). 신약 성서에서의 99회 바리새인 언급 구절 중에서, 빌립보서의 구절은 복음서와 사도행전을 제외한 곳에서 바리새인을 언급하는 유일한 구절이다. 바울의 서한은 더 이상 바리새인을 언급하지 않는다. 바울은 바리새인이 되는 것과 율법을 관련짓지만, 문맥은 이러한 동일시가 청중의 관점에서 그에 대한 신뢰성을 강화시킨다는 것을 나타낸다.


 

바울은 율법에 대한 특별한 관점이나 태도를 바리새인에게 분명히 돌린다. 자신의 과거를 언급하는 갈라다아서 1장 14절을 근거로 말하자면 다메섹 경험 이전의 바울은 진정한 바리새인이었을 것이다. 이 구절에서 바울은 바리새적 유대주의를 이해함에 있어서 토라와 조상들의 유전을 강조하고 있을 뿐이지 다메섹 체험 이전의 삶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지 않다.


 

사도행전은 바울의 바리새인과의 관계에 대한 많은 자료를 담고 있지만, 저자 자신의 관심을 반영한 것들이다. 저자는 토라 준수와 열심을 바울의 바리새주의의 핵심적 요소들로 강조한다(22:3). 사도행전 23장 6절은 말한다: a;ndrej avdelfoi,( evgw. Farisai/o,j eivmi( ui`o.j Farisai,wn\ 이러한 진술을 하는 저자의 관점으로는 당시 바울은 예수의 추종자이면서 동시 바리새인이다.


 

예루살렘 회의에서 사도행전의 저자는 “바리새 학파에 속했던 일부 신자들”을 언급하는데(행 15:5), 이것은 바리새인과 초기 기독교 공동체간의 친밀함을 강조하는 것이다. 헨첸(Haechen)은 저자가 양자간의 가교가 가능한 것으로 확신했다고 말한다.


 

h) 요세푸스(Josephus)


 

요세푸스는 그 자신을 바리새인으로 말하지만, 바리새인과의 관계예 대한 그의 입장을 볼 때 다소 의심적이다. 게다가 마슨은 요세푸스가 자신을 바리새인이라고 말하지 않았고, 단지 자신의 공적 삶의 진보에 필요한 경우에는 바리새적인 정치적 프로그램을 따랐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요세푸스가 바리새인과 스토아학파를 비교한 것은 이상하다.


 

i) 시몬 벤 가말리엘(Simon ben Gamaliel)


 

요세푸스가 자신을 체포하려는 사람을 긍정적으로 평가(「생애」 191-92)한 이유는 불확실하다. 마슨은 요세푸스는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반대자의 유명한 특징을 인정하는 것으로 간주한 반면에, 코헨은 화해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어느 경우든간에, 시몬이 저명한 인물임을 분명하다. 그가 기스칼라의 요한(John of Gischala), 즉 갈릴리 출신의 저항 지도자와 오랫 동안 가까이 지낸 것은 주목할 가치가 있다.


 

시몬은 예루살렘과 깊은 관련이 있고 사두개인 대제사장 안나누스(Ananus)에게 영향력을 행사했고, 요세푸스를 제거하기 위한 사절단-바리새인과 관련된 평신도인 요나단와 안나니아스, 그리고 제사장 가문에 속한 요자르, 그리고 대제사장 후손인 시몬-을 보내기도 했다. 이로 보자면, 바리새인들이 사두개인이나 다른 집단들과 조직적으로 반대한 것은 아니다.


 

IV. 역사적 바리새인과 관련 집단들


 

A. 바리새인과 토라


 

일부 학자들은 집단의 원리적 특성인 토라에 대한 랍비적 개념을 지적했다. 리프킨은 바리새인들이 모든 텍스트에서 이중적 율법―구전 율법과 기록된 율법―의 옹호자라고 진술한다. 그는 바리새인들이 이중적 율법의 우위성에 헌신한 학자 계층(scholar-class)이었다고 생각한다. 핑켈(Finkel)은 바리새적 교사의 주요 임무는 이전 세대들에 의해서 전수된 어떤 논박을 전수하는 것이었다고 주장한다. 블랙(Black)은 기독교의 성서의 진술에 자신의 논증을 기초하면서 바리새인의 근본적으로 형식적인 특성과 장로들의 전통에 대한 그들의 존중에 초점을 두었다. 만수르(Mansoor)는 바리새인을 그들의 형식적 차원에 대한 진화적이고 비-문자적인 접근을 따르는 것으로 그리고 그리고 구전 율법이 기록된 율법과 동일 효과가 있는 것으로 믿는 것으로 기록한다(Baron; Bowker; Guttman; Le Moyne; Zeitlin). 학자들은 공통적으로 요세푸스의 바리새인에 대한 묘사가 그들이 구전 전승을 가졌다는 생각을 지지한다고 주장한다(Rivkin; Finkel; Zeitlin). 요세푸스는 바리새인들이 그들 자신의 전승을 가졌다고 진술하지만, 그는 이것들이 구전적으로 형성되었거나 전수되었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노이스너는 랍비적 전승의 구전 전수에 대한 가장 초기의 주장이 바 코흐바 전쟁 뒤에 있었다고 증거했다.


 

B. 바리새인과 정결법


 

일부 학자들은 정결에 대한 바리새인의 관심이 그 집단의 중심적 특징이라고 주장했다(Meyer; Le Moyne). 노이스너는 “식탁 교제”를 특별히 언급하면서 바리새인 중에서 정결의 역할을 강조한다. 그는 바리새인에 관한 랍비적 전승의 67%가 식탁 교제와 관계된다고 특별히 언급한다. 그는 힐렐파와 샴마이파의 많은 규정들이 음식과 직접적으로 혹은 간접적으로 관련된다는 것을 제시했다. 그러나 노이스너는 식탁 교제가 특별한 제전이나 특별한 의식을 요구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것이 “매일의 일상 생활에 적용되고, 또한 모든 비-의식적 식탁 교제가 발생하는 동일한 경우에 개인 가정에서 준수되었다.... 이것은 실제의 정결-규율과 음식 규제를 더욱 중요하게 만들었는데, 왜냐하면 그것들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세계에서 바리새인들을 사람들과 분리시켜 주기 때문이다”고 주장한다.


 

C. 바리새인과 #rah ~[


 

블랙은 매우 일반적인 견해, 즉 바리새인들의 주요 관심이 불결, 특히 땅의 불결한 사람들로부터 분리였다고 표현한다. 바리새인과 #rah ~[간의 관계는 모호한데, 왜냐하면 후자 집단의 정체가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핑켈은 #rah ~[이 바리새인을 존중하는 시골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이 바리새인들은 도시에 살았기에 분리하였다고 주장한다. 게다가, 바리새인들은 그들의 가정 혹은 그들의 생산물에 대해 지시된 엄격한 규범(code)을 준수할 수도 없었다. 불행하게도 핑켈의 사회학적 구별을 지지하는 증거는 없다. 마이어는 #rah ~[이 제사장의 정결 규례를 추종하지 않은 비-제사장적 다수파(non-priestly majority)였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서술을 지지하는 증거도 없다.


 

옾펜하이머(Oppenheimer)의 #rah ~[에 대한 최근 연구는 세 가지 약점을 가지고 있다. 첫째, 그는 현대의 비-이스라엘 학계를 실제로 무시한다. 그가 언급하는 많은 비-이스라엘 저자들은 지난 세기의 독일-유대인 저자들이다. 종종 사람들은 그 저자들의 논제들과 문제들 중에 많은 것들이 시대엥 뒤진 학계의 결과들이라는 인상을 가진다. 둘째, 옾펜하이머는 텍스트의 문자적 의미를 맹목적으로 수용하는 것과 자료 비평과 문헌비평에서 사소한 시도 사이를 오고간다. 이러한 동요는 동등하지 않은 가치의 논증을 하게 만든다. 셋째, 그는 후기 랍비의 수집들이 초기에 관한 앞선 수집들과 동일한 가치의 증거를 포함하고 있지 않았다는 가능성을 무시한 듯하다.


 

이러한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옾펜하이머는 몇 가지 흥미로운 관찰을 제시한다. 그는 #rah ~[이 계명들을 준수하길 갈망했지만, 그들이 그 준수에 철저히 그리고 전적으로 헌신하지 않았다고 제안한다. 여기서 옾펜하이머는 예레미야스와는 다른데, 왜냐하면 예레미야스는 #rah ~[에게서 정확한 율법 준수를 기대할 수 없는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로 #rah ~[을 말하기 때문이다. 옾펜하이머는 율법의 문제에 관한 #rah ~[과 연구 문제에 관한 #rah ~[간을 구분지었다. 바리새인과 상반된 집단이 바로 율법의 문제에 관한 “#rah ~[”이었다. 게다가, 그는 대다수의 #rah ~[이 아마도 대중에 속했을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그들 중에 일부는 부자였을 것이고 귀족 계층의 일원들이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는 정결과 십일조 문제가 바리새인과 #rah ~[을 구분한 주요한 문제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분리는 절대적이지 않다. 옾펜하이머는 바리새인과 #rah ~[이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고 주장하는데, 이 관계는 특정 영역에서 #rah ~[와 접촉을 자제할 때 바리새인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약화되지 않고 지속되었다. 이 진술은 노이스너의 진술, 즉 일반적인 경건으로부터 바리새인의 분리가 거의 분명하게 오랫동안 그리고 점진적 과정에 있었다..... 왜냐하면 신앙 생활의 생부 사항에 대한 새롭고, 정확한 율법이 즉시로 고안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는 말과 연결되어 이해되어야 한다.


 

D. 바리새인과 tworWbx''


 

tworWbh''(비밀 모임, 성직자 수도단)의 문제는 바리새인과 #rah ~[의 문제와 관련된다. ~yribex''(동료들)이 그들의 분리를 정결과 십일조에 근거했다고 일반적으로 주장된다(Westerholm; Meyer; Neusner; Oppenheimer). 반면에 리프킨은, 비록 ~yribex이 바리새인과 “매우 친밀한” 상태였을 지라도, 그들은 동일하지 않다고 주장하는데, 왜냐하면 바리새인은 영적인 사회적 운동을 구성해지만, 반면에 ~yribex은 폐쇄된 모임을 속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노이스너는 비록 ~yribex이 바리새인이었을 지라도, 모든 바리새인이  ~yribex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옾펜하이머와 노이스너는 ~yribex이 자신들을 전적으로 바리새인 사회와 분리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노이스너는 옾펜하이머가 말하는 것보다는 더 공식적인 분리를 선호한다.


 

V. 역사적 바리새인의 이미지(image)


 

A. 영향과 통제


 

유대교에 대한 현재의 학자들의 글을 읽는 독자들은 편재할 뿐아니라 지배적인 두 유령적 모습, 즉 바리새인과 산헤드린을 발견할 것이다. 또한 우리는 극단적인 가정을 가지고 있을을 수도 있다: 첫째, 바리새인들이 삶의 모든 국면에 일반적인 감독을 했다; 둘째, 그들은 개인적인 식탁 모임을 구성하기 위하여 사회에서 분리했다.


 

그러나 인물 연구를 통해 보았을 때, 바리새인들은 정치적으로 활동적이었지만, 소수당의 입장이었거나 다른 사람의 권위를 받아들여야 했다. 바울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유다 지역에서 활동했거나 유다 출신들이었다. 필리온, 가말리엘, 가말리엘과 그의 아들, 시몬 등은 지도력을 행사했다. 여성의 이름이 바리새인으로 제시되지는 않았다. 요세푸스의 애매한 표현이 있기는 하지만, 바리새인이 되는 방법에 대한 진술은 없는 실정이다. 이러한 바리새인의 이미지는 사회학적 분석에서도 동일하다. 유대인 지도층, 즉 대제사장, 대제사장들, 장로들, 그리고 유명 인사들은 렌스키(G. Lenski)가 말하는 가신(retainers)들의 원조를 받았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은 바로 이러한 가신의 부류에 속했다. 샌더스는 바리새인의 영향력에 대해서 다음처럼 정리한다. 헤롯의 시대에 그들의 힘을 미력했고, 제도적 권위를 지니지도 않았다. 물론 요세푸스의 기록에는 그들이 간접적으로 막강한 세력을 가지고 있다고 진술하지만, 살로메 통치 이후로는 온건하고 비효과적 반대를 주도했을 뿐이다. 바리새인들이 모든 회당을 주도한 것은 아니다. 그는 심지어 디아스포라에게알려진 정결 관행도 바리새적 영향력이 아니라고 지적한다.


 

비록 그들이 1세기에 다소 영향력을 행사했을 지라도, 정치적으로 막강하지는 않은 듯하다. 로마 전쟁으로 다른 집단들이 정치적 근거를 상실했거나 혹은 그들이 타락한 모습을 보였을 때, 토라에 전문가였고 토라를 지속적으로 해석했던 바리새인들은 그들 자신의 정의(definition)에 따라 유대주의를 다시 세울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그들의 가치관은 항상 정치적 함축성을 지녔고, 그 실현을 이룩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들이 정치권에서 밀려 났을 때, 그들의 해석과 실천들은 그들의 정체성을 유지시켰고 사회에 대한 동화에 저항케 했다. 일단 세력을 확보했을 때에는 프로그램을 준비시켰다.


 

B. 바리새적 통제와 대중성: 변증자의 관점


 

전통적으로 유대인 학자들(A. Guttman; H. Maccoby)과 기독교인 학자들은 바리새인들이 실제로 사람들의 관심 영역인 종교적 생활의 부분들을 통제했다고 주장해 왔다. 하지만 한 진영의 변증적 견해는 바리새인이 유대교를 통제했고, 그들은 모든 사람들을 향한 사랑으로 충만했다는 것이고, 반면에 다른 진영의 견해는 바리새인이 유대교를 통제했고, 그들은 무시무시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이다. 아무튼 양진영의 학자들은 바리새인들이 “새로운 지배 계층”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샌더스는 양진영의 변증으이 출발점을 부인한다. 바리새인의 통제력이 미력했다는 점에 동조하는 학자들도 많다(Smith, Neusner, Cohen, Goodman).


 

주전 63년에서 주후 66년간에 바리새인은 역사의 뒤안길에 있으면서, 몇 차례의 반-로마 운동을 전개한다(주전 20년과 4년 그리고 주후 6년). 그들의 분출은 그들이 존재한다는 것, 그들이 지속적으로 가르쳤다는 것, 그들이 영향를 끼쳤다는 것, 그리고 때로는 저항을 야기시켰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그들의 분출은 바리새인들이 공적 생활에서 분리했다는 노이스너의 견해를 반대하지만,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그들이 정부 혹은 종교를 주도하지 않았다는 것을 지지한다. 


 

C. 사회적 및 경제적 상태


 

고대 종교 사회에서, 특히 로마 제국과 팔레스틴의 유대인 사회에서, 종교는 공동체의 정치적 그리고 사회적 조직과 어우려져 있었다. 그러한 사회에서 살았던 바리새인은 정치적 영향력을 전혀 지니지 못한 채로 사회로부터 소외된 종파(sects)로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 유대인이 된다는 것은 곧 유대인 사회의 일부가 되는 것이었다. 물론 제의적 혹은 종교적 기능을 가진 사람들이 다소의 독립적인 분파나 집단들 혹은 지도력을 형성할 수 있었을 지라도, 전체 신앙 공동체의 정체성은 지역 공동체의 정체성에 묶여 있었다. 바리새인도 바로 그러한 구도에 속했던 것처럼 보인다.


 

바리새인의 사회적 위치는 불명확하다. 바리새인이 된다는 것은 직업이 아니었고, 유대인으로서 사는 방식이었다. 대부분의 바리새인들은 평신도들로 구성되었다. 평신도들인 바리새인들은 토라를 연구하여 자신들의 견해를 형성했다. 모든 자료들이 보여주는 그들의 토라에 대한 일관된 헌신은 그들의 본래적 프로그램이 헬레니즘의 영향으로 야기되는 문제들에 대처하기 위한 토라 준수의 회복과 관련되었을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토라에 대한 엄격한 해석에 따라서 유대주의를 건설하고자 했다. 이것은 바리새인을 정치적 관심을 가진 집단으로 만들었다. 만약에 바리새인들이 율법 전문가들이었다면, 그들 중에 대부분은 서기관들이었음에 틀림없다(참고. 막 2:16).


 

일부 바리새적 제사장들이 있었고, 바리새적인 지배 계층도 있었다. 대부분의 바리새인들은 지배 계층에 종속된 상태였지만, 소작농민이나 장인들과 같은 하위 계층의 사람들보다는 높은 지위의 상태였다. 요세푸스는 제사장인 바리새인 한 사람을 언급하고, 랍비 문헌은 중요한 직책을 감당한 몇 사람을 제시한다. 물론 소수의 바리새인은 상인이나 무역상이었다는 주장도 있었고, 노이스너는 소수의 독립지주도 있었다고 말한다.


 

바리새인들이 서기관들, 재판관들, 교사들, 그리고 제사장들이었다는 인식은 집단들에 대한 세 가지 일반적 고찰로 이끈다. 첫째, 집단들은 서로 배타적이지 않았다. 개인들은 동시에 한 집단 이상에 속했을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하나의 이상의 사회적 집단에 속했을 것이고, 하나 이상을 직업을 가졌을 것이다. 둘째, 집단들은 시간에 따라 변했다. 하즈모니안 왕조 때의 바리새인들은 1세기 바리새인들과는 달랐을 것이다. 셋째, 집단들은 몇가지 기능을 했다. 바리새인들은 종교적 교제였고 동시에 정치적인 관심을 가진 집단이었을 것이다.


 

D. 대의를 위한 죽음


 

황금 사자 사건, 갈릴리 유다의 봉기, 그리고 반-로마 전쟁 등의 세 사건은 하나님을 위하여, 율법을 위하여, 그리고 참가자 자신의 명분을 위하여 죽은 가치있는 예들이다. 이 사건들은 바리새인들과 관련있고 시카리들과는 더 깊은 관련이 있다. 특히 갈릴리 유다의 봉기는 바리새인 사독과 관련이 있다. 그렇다면 반-로마 운동의 주동자들과 바리새인간에는 역사적 및 이념적 관련이 있다. 


 

E. 바리새인의 신학


 

초기의 랍비 문헌들은 주로 형식적이고 법적인 것들을 논쟁적 형식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에, 바리새인의 신학에 대한 단서를 제공하지 못한다. 하지만 바리새인의 “자선”에 대한 문서는 도움이 되겠지만, 남아있지 않다. “18개 축복문”은 바리새인의 신앙을 반영할 수도 있다. 또한 신약성서와 요세푸스의 문헌도 바리새인의 신학에 대한 적절한 정보를 제시하지는 않는다. 그래도 요세푸스는 바리새인의 신학에 대한 두 요점을 간략히 제시한다: 부활에 대한 신앙과 하나님의 섭리와 인간 의지의 협력.


 

샌더스는 「바울과 팔레스틴 유대교」에서 1-2세기 랍비 문헌과 200BC-200CE의 주요 문헌에 “언약적 규범주의”(convenantal nomism)가 전제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러한 신학을 탄나이틱 미드라쉼(tannaitic midrashim)의 비-형식적 부분과 바울의 주장을 비교적으로 고찰한 후 이러한 언약적 규범주의를 70년 이전의 바리새인의 신학으로 제시한다.


 

1. 하나님의 섭리와 자유 의지


 

우리는 이미 요세푸스가 하나님의 섭리(운명)와 자유 의지에 대한 신앙을 바리새인들에게로 돌림을 고찰했다. 이전에 바리새인이었던 바울은 하나님의 섭리와 개인의 자유 의지를 주장한다(롬 8:28f; 롬 9; 롬 10:14-17). 미쉬나 역시 이러한 견해를 R. 아키바에게 돌린다(Avot. 3.16). 이 세 사람은 철학자가 아니기 때문에 두 견해가 조화되는 방법은 설명하지 않는다. 종교적 양심은 하나님에 의한 전적인 결정과 개인의 책임을 표현하게 한다.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를 믿는 믿음은 하나님의 섭리와 예정(foreknowledge)를 고백하게 하고, 계명들을 믿는 믿음은 개인의 선택에 대한 가정을 요구한다. 바리새인들은 은혜에 의한 선택과 자유 의지에 의한 순종을 믿었다.


 

2. 자비(leniency)


 

요세푸스는 자비를 바리새인들에게 돌린다. 예를 들면 바리새인들은 하르카누스가 엘레자르를 처형하는 것에 반대하고(「고대사」 13.294), 안나누스가 주의 형제 야고보를 처형할 때도 바리새인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은 반대한다(「고대사」 13.299-200). 사도행전에서 바리새인 가말리엘은 산헤들린에서 베드로와 요한에게 선대한다(행 5:33-40). 미쉬나 논문집 산헤드린은 주로 법정과 변호를 다루는 것인데, 그 문헌 역시 관대함을 보인다.


 

3. 엄격성과 정확성


 

요세푸스에 따르면, 바리새인들은 율법과 관련해서 엄격 혹은 정확하다고 한다. 그가 바리새인을 다룰 때 사용하는 용어인 “avkri,beia”는 율법을 정의함에서 ‘정확’을 그리고 율법을 준수함에서 ‘엄격’을 의미할 개연성이 있다. 하지만 요세푸스는 대개 해석의 정확성을 언급할 때 사용한다(「전쟁사」 2.162; 1.108-9; 「생애」 191). 사도행전 22장 3절과 26장 5절은 동일한 용어를 바리새인에게 사용한다. 랍비 문헌도 예외는 아니다.


 

4. 하나님을 향한 경건


 

모든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여 살게 되기를 바랬다; 이것이 가능하지 않을 경우, 그들 중에 많은 사람들은 그들에게 새로운 존재를 허락하실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자신들의 대의를 위해 기꺼이 죽기를 원했다. 집단으로서 바리새인은 이러한 신념을 확고하게 나타냈다. 이러한 신앙을 샌더스는 하나님을 향한 경건으로 말한다. 이러한 신앙은 죽음 이후의 개인의 생명에 대한 언약적 원칙의 적용을 보여준다.


 

5. 전통들


 

바리새파의 두드러진 특징 중에 하나는 “장로들의 유전”에 대한 헌신이다. 요세푸스(「고대사」 13.297)와 신약 성서도 이를 지지하는데, 신약성서에는 이러한 유전 중에 두 가지를 “손 씻기”(막 7:1-8)와 고르반(7:11)으로 부른다. 랍비 문헌과 미쉬나 Avot는 장로들의 유전들을 언급하고 있다. Avot는 장료들의 유전 계보를 제시한다:


 

모세


 

.....


 

힐렐과 샴마이


 

가말리엘      요하난 b. 잨키


 

시메온 b. 가말리엘        그의 제자들


 

랍비(유다 하-나시)           (특히 엘리제르 왕과 요수아)


 

이 계보는 경쟁 관계를 보여주고 있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그들 모두가 자신들을 70년 이전의 바리새인의 후예로 간주한다는 점이다.


 

신학적으로, 전통들에 관한 가장 중요한 질문은 그것들의 상태(status)다. 학자들은 랍비 문헌에 따라 바리새인의 성서외의 규율을 ‘구전 율법’이라 부르고, 또한 바리새인들이 구전 율법의 기원을 기록된 율법, 즉 시내산에서의 모세에게 둔다고 주장하지만, 샌더스는 그러한 경향에 반대하면서 그 예들을 제시한다.


 

F. 바리새인의 행습


 

1. 


 

바리새인들은 안식일 법의 반-사회적 국면들이 된 전통을 만들었다. 한 예가 음식을 나르도록 집들을 연결지어 건축한 경우다(헤루빈). 축제일 동안의 일로 간주되는 논제들, 예를 들면 사다리를 옮기는 것 또는 희생 제물의 머리에 손을 놓는 것은 바리새적 전통으로 간주 될 수 없다. 왜냐하면 후기에도 샴마이학파와 힐레학파간에 계속적으로 논의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안식일에 의도적 범죄에 대한 징벌을 직접적으로 말하는 근거는 없지만 아마도 화목제를 드림으로 해결했을 것이다. 샌더스는 노이스너의 견해와는 달리 유대인들이 안식일과 안식년을 준수했다고 말한다. 안식년의 의도는 차용자에게 정기적인 쉼을 주려는 것이었다. 바리새인들이 채무를 받기 위해서는 “공회 앞에서”(prosbul) 그 의도를 선언한 것으로 보아 바리새인들은 귀족들은 아니었을 것이다.


 

2. 십일조, 정결 그리고 배타주의


 

바리새인들은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고, 식탁 교제를 중심으로 한 배타주의적 종파였는가? 바리새인들은 공공 생활에 동참했고 사회의 다른 구성원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생활했다. 그들은 활동을 위하여 여행을 하기도 했다(바울, 마 23:15). 센더스는 바리새인들이 안식일 준수와 식탁-교제에 특별한 관심을 둔 폐쇄 공동체라는 가정에 반대한다.


 

바리새인들은 의식적 정결에 관심을 두었다. 제사장 종교에서 제사장은 정결한 것과 불결한 것을 선언했다. 정결의 정도는 하나님께 나아감의 정도를 결정했다. 하나님께 가장 접근한 사람은 사회의 중요한 일원이었고, 또한 그것은 권세, 영향력, 그리고 부와 관련되었다. 제사장은 그러한 선언을 통해서 사회를 통제했다. 그러한 사회에서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권위를 토라에 대한 정확한 해석과 준수에서 확보했다. 이러한 권위는 제사장의 권위를 위협했고, 또한 재정의된 정결법에 따라 공동체에서 가장 거룩한 사람은 반드시 제사장일 필요는 없다고 했다. 그래서 거룩은 바리새인의 정결법에 따라서 결정되었다.


 

VI. 맺는 말


 

이상으로 발표자는 “최근의 역사적 바리새인 연구”라는 제목으로 바리새인 연구를 소개했다. 특정 주제에 대한 창조적 탐구라기 보다는 기존의 연구 경향들을 소개했다는 점을 우선적으로 밝히고 싶다. 바리새인 연구에 대한 개관이 주는 가치를 경시해서는 안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고찰은 우리로 하여금 바리새인 연구에 대한 여러 지침들을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


 

첫째, 문헌을 중심으로 바리새인을 연구할 때, 연구자는 개개 문헌들이 제 각기의 이념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을 염두해야 한다. 요세푸스의 이념, 신약성서 각권의 이념, 그리고 랍비 문헌의 이념 등은 공유적일 수도 있고 상이적일 수도 있다. 문헌의 이러한 특성을 무시한 채로 무비판적으로 이해하고 수용하는 태도는 바랍직하지 못하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선이해로 갖고 있는 바리새인의 이미지는 어느 이념에 속한 것인가를 질문할 필요가 있고, 새롭게 이해될 부분의 필요도 자각해야 한다.


 

둘째, 문헌을 이해하는 연구자의 입장, 즉 전제의 타당성을 질문해야 한다. 연구자가 단지 역사가인가 아니면 신앙인인가? 만일 신앙인이라면, 유대주의를 신봉하는가, 개신교인인가, 혹은 가톨릭 교인인가? 독자-반응 비평을 말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연구자의 입장에 따라 문헌이 달리 이해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실정이다. 바리새인 연구사에서 밝혀듯이 학자들마다 주장이 상이하다. 객관적 이해를 시도하려는 목적에서 적절한 방법론을 계발하는 것이 요구된다. 발표자는 역사-비판적 모델, 인물 연구 모델, 그리고 사회학적 모델 등을 소개하고 그 결과들을 제시했다. 이러한 제시에 남는 아쉬움은 일관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모델을 소개하지 못한 점이다.


 

셋째, 바리새인을 중심으로 한 주된 논제들에는 문헌과 이해 방법론 외에 바리새인의 기원과 역사, 바리새인의 정치성 및 사회적 관계, 바리새인의 신학과 행습, 집단으로서 바리새인과 개인으로서의 바리새인 등이다. 이러한 주제들에 대한 학자들의 결론은 무지함의 고백일 것이다. 이러한 결론의 원인은 자료의 성격 문제가 크다. 그리고 방법론의 문제도 있다. 발표자는 이러한 주제들에 대한 여러 모델들의 결론을 제시하면서 여전히 질문으로 삼고 있는 주제가 있다. 그 주제는 바로 바리새인의 조직이다. 발표자가 이 주제에 관심을 둔 이유는 바리새인이 획일적이지 않았다는 것을 인물 연구를 통해서 알았기 때문이다. 또한 예수의 사역 및 초기 기독교 운동에서의 그들의 역할을 재평가함으로 바리새인에 대한 새로운 이미지를 구축할 수 있다고 기대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신약성서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바리새인의 부정적 이미지와 긍정적 혹은 중립적 이미지에 주목해야 한다. 인물 연구를 통해 보았듯이 마가복음보다는 마태복음은 예수와의 관계에서 바리새인을 더 부정적으로 제시한다. 하지만 누가-문서는 바리새인과 기독교 공동체간의 화해를 반영한다. 그리고 바울은 긍정적 혹은 부정적 입장을 보인다. 그렇다면 신약성서 자체도 바리새인에 대한 다양한 이해를 반영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우리를 지배하는 사상은 주로 부정적인 면이 강하다. 그렇다면 신약 성서 연구자는 이렇게 다양한 가치 이념들을 균형있게 설명할 수 있 수 있어야 한다.


 

발표자는 이러한 해결 문제들을 제시한 채로 발표를 마칠 수 있다는 것에 만족한다. 왜냐하면 이것을 토대로 새로운 차원의 바리새인 이해를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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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는 본고에 인용된 자료들이고, 그 밖의 자료 목록은 //:starwww.uibk.ac.at 검색 결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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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제공 : 김 광 모(Ph.D/NTS-4th

http://www.kdmin.com/new_mts/view.html?toplink=6&codel=107&codem=29&codes=121&mode=view&id=9386&page=1&num=57&nowpos=287&type=&sermun=&qu=

출처 : 주님의 뜰-행원소구
글쓴이 : xian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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