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이 태어나신 곳은 마구간인가, 일반 농가의 방인가?
예수님이 태어나신 곳은 마구간인가, 일반 농가의 방인가? 눅2:6~7
중동 문화로 복음서를 보면, 성경 이해에 도움을 줍니다.
예수 탄생에 대해 우리가 품고 있는 이미지,
즉 ‘마리아와 요셉이 베들레헴에 도착했지만 여관에 방이 없었고,
누추한 곳에서 태어난 아기 예수는 말구유에 눕혀졌다’는 이미지를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 팔레스타인의 흔한 시골집 구조는, 문을 열고 들어가면
다른 바닥보다 낮은 곳에 소와 나귀 등을 기르는 공간을 두고 (*위 사진 왼쪽)
그 반대쪽에 가족이 쓰는 방이 있었습니다.
같은 층인데, 마구간보다 약간 지대가 높았죠. (*위 사진 오른쪽)
우리나라는 외양간이 집 밖에 있지만, 중동에는 실내에 있었습니다.
특히 중동은 손님을 환대하는 문화가 있어
가족 방의 뒤쪽이나 지붕 위에 별도로 손님방을 두기도 했습니다. (*사진 위쪽)
눅2:7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위 누가복음에서의 ‘여관’은 숙박업소가 아니라,
당시 개인 집마다 뒀던 바로 그 ‘손님방’을 의미합니다.
(*그 손님방은, 손님이 없을 때는 ‘식사실 dinning room’로 쓰이기도 했답니다.
사실 이 말이 맞는게, 예나 지금이나 베들레헴은 아주 작은 동네입니다.
그런 작은 동네에, ‘여관’이 있기 어려웠을 거예요. 그건 큰 동네에나 있죠.)
결국 마리아와 요셉은 더러운 마구간이 아니라, 어느 시골 농가에서,
손님 방에 다른 손님이 머물고 있어,
할 수 없이 집안에서 출산했다는 얘기입니다. 마구간이 아닙니다.
왜냐면, 그들은 가축을 집안에서 키우는 문화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구유’라고 나오니까, 우리는 쉽게 ‘마구간’을 떠올리는데,
그건 우리 문화에서 성경을 본 결과입니다.
위 그림에 의하면, 주인집 방에 같이 생활을 했던 것입니다.
왜냐면 성경에 ‘구유’라고 했는데, ‘구유’가 실내에 있었으니까요.)
평범한 이들의 따뜻한 환대를 받는 가운데 아기 예수가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낮고 천한 곳으로 오신 예수 탄생의 본질적 의미마저 달라지는 건 아닙니다.
예수님이 낮고 천한 곳으로 오신 것은 맞습니다. 다만 외양간은 아니라는 거죠.
게다가 요셉이 아무리 몰락했어도 여전히 다윗 왕가의 후손이었고,
베들레헴에는 친척들이 있었고,
옆 마을에는 마리아의 사촌도 있었습니다.
베일리는 중동 지역이 그때나 지금이나
친족 중심의 대가족 공동체로 마을이 구성되어 있던 것에 주목합니다.
그러므로 요셉이 그들을 찾아가지 않고,
‘마을 광장의 공동 마구간’으로 갔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는 것입니다.
▲베일리는 신약성경의 주 무대가 되는 팔레스타인 지역의 가옥 구조에서
다른 마구간의 단서를 찾아냈습니다.
당시 평범한 농부들은 대부분 방이 하나 혹은 둘이 있는
소박한 가옥에서 살았습니다.
그런 집의 맨 왼쪽 낮은 곳에는 들어가는 문이 있고,
그 문을 열면 실내 마구간이 있습니다.
그리고 안쪽 오른편에 작은 계단이 있어 올라가면 그곳이 방입니다. (같은 1층)
베들레헴 마을 사람들은 대부분 농부였고 가난했습니다.
자기 집에 소, 나귀, 양을 겨우 몇 마리만 갖고 살았습니다.
이 짐승들은 귀한 재산이자 식구였습니다. 잃어버리면 큰 일이 아닐 수 없지요.
그래서 집 안에 같이 데리고 살았습니다. 이스라엘은 밤이 춥습니다.
난방 시설이 따로 없었습니다.
현관문 입구 쪽에 있던 마구간의 동물들과 벽도 없이 이어진 위쪽 방의 식구들이
서로 함께 체온으로 추위를 덜었습니다. (짐승들도 체온이 일종의 난방기 역할을 했죠)
간단히 말하면, 집 안에 1층에, 방이 둘 있는데
낮은 방은 마구간이요, 높은 방은 안방이었고,
그 사이에 벽은 없었던 것입니다.
경사지게 되어 있어 안방을 물로 청소하면, 곧장 마구간으로 흘러내려 갑니다.
이런 구조 속에서 <구유>는 마구간 바닥이 아니라,
약간 높은 지대의 가족 방 끝에다,
방바닥을 정성껏 파서 만들었습니다.
그러므로 ‘아기 예수님을 구유에 누이셨다’는 것은,
예수님이 마구간에서 태어나셨다는 게 아니라,
그 구유도 실내에 있었다는 거죠. 거기가 홈이 파져 있으니까,
아기 예수님을 거기에 누이신 것입니다.
소나 나귀는 가족 방 쪽으로 목을 내밀어, 구유에 놓인 여물을 먹었습니다.
키가 작은 양들은, 마구간 바닥에 만든 작은 구유에서 먹었습니다.
이것이 주님이 말씀하셨던 ‘등잔불을 안방에 켜 두면
그 불이 온 집을 환하게 비추었던’(마 5:15) 옛날식 가옥 구조입니다.
그러므로 베일리에 의하면,
들판의 목자들이 마구간 구유에 있는 아기를 보았다는 누가의 기록이나(눅 2:7, 12),
동방박사들이 어느 집 안에 들어가 아기를 보았다는 마태의 기록(마 2:11)이나,
하나의 같은 마구간에 대한 증언인 것입니다.
목자들도 박사들도 ‘마을 광장의 공용 마구간’을 찾아간 게 아니라,
어느 소박한 한 농가를 찾아갔던 것입니다.
아기를 뉘었던 구유(파트네)는,
그 농가의 단칸방과, 실내 마구간이 만나는 경계 부분에,
또 거기에는 구들장이 있었다고 합니다.
우리 주님은 차가운 광장의 길바닥이 아니라
어느 평범한 농가의 안방 따스한 구유(그 아래는 구들장)에 누이셨습니다.
마리아는 그 집의 문간 마구간에서 해산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만삭의 젊은 여인에게 있을 수 없는 인간 이하의 대접일 것입니다.
대신에 마리아는 그 집 안방에서 예수님을 낳았습니다.
해산할 때는, 당시 전통에 따라 남자들은 방을 비우고 나갔고,
여인들은 산파를 데리고 와서 해산을 도왔을 것입니다.
요셉은 그 집에서, 그 동네에 사는 여러 친척들과 오랜만에 만나
그간 살아온 이야기를 나누며, 밤새 이야기꽃을 피웠을지도 모릅니다.
▲마구간과 구유에 대한 의문은 이렇게 풀리게 되는데,
여관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누가는 누가복음 2:7에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성경에 나오는 ‘여관’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에 나오는 ‘판도케이온’ 여관은 여행객을 위한 숙소입니다(눅 10:34).
하지만 그날 “있을 곳이 없었다”(눅 2:7)라고 한 여관은
‘카탈뤼마’로 불리는 다락방이었습니다.
옛날 사랑방이나 요즘 게스트룸같이, 일반 가정집 안에 있는 손님방을 말합니다.
당시 베들레헴의 촌락 가옥은 대부분 단칸방 가옥이었지만,
약간 여유가 있는 집은, 약간 더 높은 위치에 다락방이 하나 더 붙어 있었습니다.
이것이 성경에 ‘여관’으로 번역된, 말하자면 ‘사랑방’입니다.
요셉과 마리아가 가난한 서민의 집이 아니라 넉넉한 중산층 집에서 해산했으면 더 편했겠지만,
인구조사로 판도케이온(여관)은 물론이고, 카탈뤼마(사랑방)까지 죄다 만원이었던 것입니다.
베일리의 마구간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우리 주님이 이 땅에 오실 때 가장 먼저 상류사회 저택도 아니고,
중산층 높은 아파트도 아니라, 도시 서민의 평범한 주거지를 찾아가셨다는 것입니다.
물론 시골 초가집 안방도 얼마든지 해당되겠지요.
그러니 크리스마스 하면 떠올려야 하는 이미지는, 화려한 백화점의 샹들리에가 아니라,
안방 구들장은 따듯하고 부엌에선 미역국이 모락모락 끓고 마구간에서는
소들이 음매 소리를 내는 시골집의 정겨운 풍경이 아닐까요?
평범한 가정의 보통 아이(common child)로 오신 아기 예수의 말구유 탄생은
차가운 거절이 아니라 구수한 환대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도 이렇게 따뜻하게
아기 예수님을 맞이하는 성탄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