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유에 누우신 하늘의 왕 눅2:1~14, 고후8:9
구유에 누우신 하늘의 왕 눅2:1~14, 고후8:9
설교 전 기도 / 이 시간 합심해서 기도할 때, 이 코로나 재난의 종식을 위해서 기도하고
또 625 한국전쟁 70주년을 맞이하는 올해에
이 나라 민족의 나아갈 방향을 주여 허락해 주시옵소서!
다시는 이 땅에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나님, 헛된 욕망을 꿈꾸는 자들이 없게 하시고
헛된 이념과 우상이 무너지게 하시고, 인간을 우상화하지 않게 하시고
절대 권력을 꿈꾸는 자들이 그 야심을 포기하게 하시고
북녘땅이 자유의 나라가 되게 하옵소서
이 나라 민족의 미래를 올려 드립니다
이 땅에 만연한 거짓과 부정과 음란의 죄악들,
헛된 우상과 탐심의 죄악들이 그리스도의 보혈로 정결케 되게 하옵소서
우리의 자녀들이 믿음 안에 자라게 하시고, 가정마다 교회가 되게 하시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역사가 일어나게 하옵소서!
(합심하여 함께 기도하며 나아가겠습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 아버지, 코로나 재난을 통하여 온 세상을 다스리시며
인간의 문명이 얼마나 헛되고 헛된 것인지를 깨닫게 하시는 하나님,
하나님 앞에 무릎 꿇어 경배하게 하시니
우리 모두가 참된 회개를 통해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되기 원합니다
이 땅에 만연한 죄악들을 회개하며
거짓과 부정과 음란을 회개하며
헛된 우상과 탐심을 끊어내는 시간이 되게 하옵소서
저 북녘 땅에 변화가 일어나게 하시고, 자유의 땅이 되게 하시며
예배가 회복되는 땅이 되게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이 한반도에 참된 평화가 임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믿음 안에 자라가기를 원하며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지켜가는 자녀가 되기를 원하오며
주여 우리의 자녀들을 붙잡아 주시옵소서
6.25 전쟁 70주년을 맞이하여 함께 <마리아 행전>으로 기도로 모입니다
비록 소수가 예배당에 모이고, 많은 이들이 영상으로 참여하지만
이 기도모임을 통하여 한반도에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게 하시고
이 나라와 민족의 미래가 하나님의 축복가운데 열리게 하시며
새로운 미래를 열어갈 수 있는 이 나라와 민족이 되게 하옵소서
살아계신 하나님, 역사하시는 하나님, 코로나 재난을 통하여
하나님 없는 인간의 문명이 얼마나 헛되고 헛된 것인지를 깨닫게 하소서
하나님의 뜻으로 멀리 떨어져 버린 저희들, *사회적 거리두기
하나님의 창조질서로 다시 돌이켜 그 질서를 회복하고 지키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이 땅의 만연한 죄악들을 회개하며 주 앞에 돌이키게 하옵소서
저 북녘땅에 진정한 변화를 허락하여 주시옵시고
자유의 땅이 되게 하시고, 예배의 땅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인간을 우상화하는 모든 헛된 노력들이 무너지게 하시고
참 되신 하나님 앞에 엎드리게 하옵소서!
6.25 한국전쟁을 통해 이 땅에 엄청난 상처와 아픔이 주어진 역사를 기억하며
다시는 이 땅에 전쟁 일어나지 않도록
하나님 앞에 바로 서며, 하나님의 백성들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오늘도 예배드리는 모든 성도의 자리가 거룩한 예배의 자리,
거룩한 성전이 되게 하시며
영상으로 함께 참여하는 모든 이들,
또 예배당에 나오지 못한 우리 자녀들도 지켜 주시고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설교 시작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믿기 어려워서 하는 까닭은
그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가 익숙한 세상의 가치와 기준을 뒤집으시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가치와 기준에서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우리가 당연하다고 여기고 익숙하게 여기는 모든 세상의 세계관과 가치와 기준들이
실상 하나님 그분으로부터는 멀리 떨어져 왜곡된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마리아가 자신에게 임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찬양했을 때 *마리아의 찬가, 마그니피캇
누가복음 1:46~55에 나오는 그의 노래 내용은
한마디로 제목을 붙이자면 "세상을 뒤집으시는 하나님을 찬양"한 것입니다
자기처럼 비천한 여종에게 임하셔서, 자신을 메시아의 조상이 되게 하시고
복된 통로가 되게 하신 그 하나님을 찬양한 것입니다
낮은 자를 높이시고, 교만한 자를 낮추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를 ,
마리아가 찬양한 것입니다
▲마리아와 같은 연약한 자를 들어 쓰시는 하나님께서는
능력과 존귀와 영광과 위대함을 가지신 그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자신을 낮추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겸손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능력이 무한 하시지만,
자신을 낮추시고 겸손히 섬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왕이신 그분이 종으로 섬기는 나라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우리가 세상에 익숙해 있기 때문에 다 이해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어느 날 제 아들에게 제가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공부하는 것 재밌니?' 라고 질문했더니 아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아빠 질문 자체가 틀렸어요,
공부라는 단어와 재미 라는 단어는 한 문장 속에 들어갈 수 없어요!'
물론 공부 와 재미가 하나가 되는 사람도 있긴 있겠죠...
▲이렇게 한 문장에 들어올 수 없는 단어가 있다면
우리 세상적인 기준으로 말하자면
'위대함'이란 단어와 '낮아짐' 이란 단어가 한 문장에 들어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위대한 사람' 그러면,
겸손, 낮아짐, 섬김, 희생 .. 등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익숙한 세상의 가치관입니다
그러나 홀로 높임을 받으실 존귀하신 하나님,
그분은 한없이 자신을 낮추시는 겸손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라고 했을 때
'이기적인 하나님이 아니냐?' 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은
모든 영광을 받기에 합당하신 그 하나님은
한없이 자신을 낮추시는 겸손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나타난 것입니다
예수님의 출생과 그 분의 삶, 그분이 행하신 모든 일들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에게 나타내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로 출생 부터 그분이 어떤 분인지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극히 높으시고 위대하신 하나님께서
한없이 자신을 낮추시는 겸손하신 분임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출생하신 때는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로마를 통치하던 때라고
누가복음 2:1~2절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눅2:1 '그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2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이 되었을 때에 처음 한 것이라'
'아우구스투스' 라는 말은 존엄자(사람을 신격화 해서 부르는 호칭) 라는 뜻입니다.
로마의 원로원에 의해서 부여된 호칭입니다
그의 원래 이름은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 이름이 길죠?
이게 원래 이름인데
거기에 '아우구스투스' 라는 호칭이 붙여진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 사람이 워낙 통치를 잘 했기에
그 이후의 황제들은 로마 황제의 직위 자체를
'시저 아우구스투스' 라는 호칭으로 사용한 유명한 인물이 되었던 사람입니다
세계사에서는 그가 통치했던 기간을 팍스 로마나 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최고의 전성기였습니다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법과 제도면에, 그리고 문화에 이르기까지
모든 영역에 있어서 최고의 전성기가 시작되었던 바로 그 통치자 때부터 였습니다
◑바로 그의 아구스도 황제 때, 예수님이 탄생하셨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대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눅2장
그것(탄생)은 허구나 신화가 아니라
실제 사실이 없다는 것을 강조할 뿐만 아니라
당시에 세계 최고의 권력자였던 아구스도 황제와
하늘에 가장 위대하신 왕이신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사건을 대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우구스투스 (이하 아구스도)가 통치하던 때에 예수님이 태어나신 것은
4가지 의미에서 매우 중요한 타이밍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타이밍입니다
1) 복음이 빠르게 안전하게 전해질 수 있는 길이 닦아졌습니다
당시에는 여행 자체가 매우 위험했습니다
곳곳에 도적들이 많았기에 여행 자체가 어려웠던 그런 시대였지만
로마의 길이 닦이면서 안전하게 여행할 수 있는 그런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약 8만 5천 KM에 달하는 길이 곳곳으로 깔리게 됩니다.
마차 2대가 빠르게 달릴 수 있는 이 길이
오늘날에도 곳곳에 가 보면 그 유적지로 남아있죠
돌로 만들어진 그 길이 아주 단단하고 견고하게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 길로 여행을 했고
또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이 길로 여행했습니다
물론 무역과 통상을 하는 많은 사람들도 그 길로 다녔지만
무엇보다 구속사적으로 볼 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라는 말이 이때부터 생기게 되었습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하지만,
동시에 복음이 그 모든 길로 전해질 수 있는 준비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2) 두 번째로 지중해권 세계가 헬라 문화로 통일되면서
구약성경이 헬라어로 번역되면서, 셉투아전트 (LXX) 역이 완성됩니다.
우리 말로 '70인역'이란 부르죠
이렇게 구약이 헬라어로 번역이 되면서
이제 히브리어를 모르는 많은 이들도 구약성경을 읽게 되면서
하나님의 놀라운 구속의 역사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3) 유대인에 관점에서 보면, 메시아를 더 깊이 갈망하는 시기가 되었죠
로마인의 관점에서 볼 때는, 팍스 로마나 시대지만, 즉 절대 통치의 시대이지만
지배를 받는 유대민족으로 볼 때는 희망이 없는 시대였다는 거지요
로마가 강력해질수록 유대 나라의 주권을 되찾을 수 있는 희망이 점점 없어지는 것이었어요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구약에 예언된 이 메시야에 대한 더 깊은 갈망을
가지게 되었던 때였던 것입니다
4) 네 번째 중요한 의미는 아구스도 황제의 강력한 행정 통치력으로 인해서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날 수 있도록 섭리된 것입니다
미가서 5:2절에는 이미 베들레헴에서 메시야가 태어난다는 예언이 주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임신하고 있는 마리아는 베들레헴으로 가서 출산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해보십시오, 만삭된 마리아가 특별한 일이 아니고는
살던 지역을 옮겨서 멀리 베들레헴으로 가야만 하는 이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마리아가 동정녀 탄생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들였지만
구약의 몇 구절에 나타난 베들레헴에서 메시야가 태어난다는 그 예언을
스터디를 통해서 알았을리도 거의 불가능하고,
설령 알았다 할지라도 만삭된 몸으로 굳이 베들레헴으로 가야만 했을 이유는 사실 없었습니다
이 아구스도 황제와 같은 강력한 통치력, 물샐틈 없는 행정력을 펴는 통치가 없었더라면
요셉과 마리아는 베들레헴으로 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구스도 황제는 세금을 더 걷기 위해서 호적을 시킨 것이죠
목적은 다른 데 있었습니다
사회적으로 보면 로마의 통치를 강화하기 위해서
세금 징수를 위해서 천하로 모두 호적을 시킨 거지만
하나님의 섭리로 볼 땐 예수님의 부모인 요셉가 마리아가 베들레헴으로 옮기도록
바로 그 타이밍에 거기서 출생 하도록 역사하신 것이지요
그러므로 넓게 보면 로마의 최고 지도자였던 아구스도 황제가 세상을 통치하고 있는 것 같지만
역사의 이면에는 하나님의 더 놀라운 섭리가 그를 사용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마치 고레스 왕을 통해서 바벨론 포로 이후에 유대 땅으로 귀환하도록 역사하신 것처럼
이방 왕일지라도, 어떤 세상의 강력한 통치자로 할지라도
그 사람이 선한 왕이든, 악한 왕이든 상관없이
여러분 이 세상에 그 어떤 강력한 통치자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통치를 거스를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세상을 보면서 너무 두려워하지 마세요
세상에 힘있다고 하는 통치자들이 아무리 음모를 꾸미고
아무리 무슨 궤계를 꾸민다 해도, 결국은 하나님의 역사대로 움직여 지는 것입니다
그 법칙은 무엇입니까?
교만한 자는 무너지게 되어 있고
겸손한 자는 이기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자기를 높이는 자는 무너지고
하나님의 성품처럼 자신을 낮추는 자는 높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편에 서는 자가 역사의 승리자입니다
아구스도 황제가 팍스 로마나는 이루었는지 모르지만
그가 지배하고 있는 시대에 아주 작은 마을,
로마도 주목하지 않았던 베들레헴!
베들레헴은 예루살렘의 작은 위성 마을이었을 뿐입니다
예루살렘이 중심 도시였기 때문에
예루살렘 주변에 베다니, 벳바게, 또 베들레헴 등 여러 위성 타운들이 있었죠
다 예루살렘을 서포트하는 그런 기능을 가진 마을들입니다
특별히 베들레헴은, 예루살렘에서 계속해서 이루어지는 절기들,
또 제사드릴 때 필요한 여러 동물들을 제공하는,
제물들을 제공하는 그런 마을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곳에는 많은 동물의 가축 사육장이 있었죠
그 가축 사육장들이 많았다는 것은, 냄새나는 마을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베들레헴에서 택하셔서 그 베들레헴에서
예수님이 태어나게 하셨는가요?
▲1. 그 첫 번째 이유는
베들레헴은 <작고 더럽고 지저분한 성읍>이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흠모하는 도시가 아닙니다
그 당시에 사람들이 흠모하는 도시는 나사렛이었습니다
그래서 요셉과 마리아가 나사렛에서 사는 이유가 뭡니까?
고향은 베들레헴 인데, 나사렛에서 산 이유는
나사렛이 비전이 있는 도시였기 때문이었습니다
특별히 목수가 할 일이 있다는 것은, 새로운 건축이 일어나고 있고
요즘 말로 하면 신도시라는 것입니다
베들레헴은 이제 사람들이 떠나는 도시,
그냥 동물들만 남아 있는 도시..
사람들이 등 돌리는 도시,
작고 지저분하고 더러운 성읍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성읍을 택하셨습니다
▲2. 또한 그 베들레헴은 <슬픔의 성읍> 입니다
창세기 35:18에 보면 야곱의 아내 라헬이 벧엘에서 돌아오는 길에
베냐민을 낳고, 베냐민의 처음 이름은 베노니, 즉 '슬픔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왜냐면 라헬이 베냐민을 낳다가 죽었거든요
라헬은 베냐민을 낳고 베들레헴에 묻힙니다
슬픔의 역사가 이 베들레헴에 있습니다
마2장 에서 동방의 박사들이 유대인의 왕이 태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경배하러 왔다 그랬을 때, 헤롯이 베들레헴과 그 인근에 태어난
두 살 아래의 아이들을 다 학살합니다
이 집, 저 집에서 통곡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슬픔의 도시'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도 곳곳에서 베들레헴같은 슬픔의 소식들이 들려오죠
자녀들을 학대하는 부모의 모습, 유기하는 모습,
정말 우리에게 충격적인 소식들이 곳곳에서 들려옵니다
인종차별해서 사람들을 죽이는 모습,
이런 모습들이 오늘 이 시대에도 즐비합니다
우리가 보기엔 아름다운 마을들 같지만, 사실은 베들레헴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베들레헴을 택하신 것은
이 땅에 가장 슬픔과 고통과 아픔과 학대와
살인과 끔찍한 범죄가 있는 한복판에 예수님이 오셨다는 겁니다
▲3. 그리고 베들레헴은 <다윗의 동네>였기 때문입니다
구약에 수 없이 약속한 다윗의 자손으로, 메시지가 오신다는 그 약속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은 베들레헴을 택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이라는 중심도시가 아니라
베들레헴이라는 누구도 주목하지 않는 변두리 도시에서
로마제국도 주목하지 않는 도시에 예수님은 오셨습니다
▲4. 그 뿐만이 아닙니다 그 베들레헴에 마리아가 도착했을 때 빈방이 없었습니다
한글성경에는 어느 번역이든지 다 '여관'
영어성경도 마찬가지로 'Inn' 으로 번역했는데,
사실은 그 당시 베들레헴은 그런 숙박업소가 없었습니다
그냥 가정집에 방 하나 두 개의 빈 방, 나그네들이 잠시 머물러 갈 수 있는
그런 민박에 가까운 거였죠 그러니 아예 제대로 된 숙박업소가 없었습니다
성경에 '빈 방이 없다'고 되어 있지만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하나님께서 준비하지 않으신 겁니다
하나님은 원하셨지만 방을 찾을 수 없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빈방을 준비하지 않은 것입니다
베들레헴에 태어났셨을 뿐만 아니라
베들레헴에서도 사람이 태어나지 않는 여건인
동물의 사육장에서
그리고 동물 사육장에서 가장 누추한 먹이통에서
예수님이 태어나도록 하나님은 작정하신 겁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선택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에게
예수님이 어떤 분이며, 또한 아버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우리에게 알려주기 위해서 베들레헴의 구유에서 태어나게 하신겁니다
하늘에 왕이신 그분이 동물의 먹이통에서 태어나신
이 <하나님의 낮아지심>이 얼마나 우리가 이해 되지 않습니까!
얼마나 우리에게 낯선 일입니까!
얼마나 우리의 가치를 뒤집는 겁니까!
세상의 왕과 얼마나 다른 일입니까!
우리는 고위공직자만 움직여도 그 대하는 의전이 달라지는 이 세상 아니겠습니까
세상에서 왕이 움직인다고 하면, 영국이나 일본 등
형식적이더라도 왕이 있는 나라들은, 왕에 대한 대우가 오늘날에도 다릅니다
그런데 하늘의 왕이신 그 분이 이 땅에 오실 때
어떤 곳에, 어떤 마을에, 어떤 모습으로 오셨는가요?
그것이 우리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보여주는 싸인입니다
세상의 가치를 완전히 뒤집는,
영어로 표현하면 업사이드 다운 시키는 하나님 나라의 역사 라는 것입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하늘의 왕이, 구유에 누이심으로
사람이 눕지 않는 곳에 누우심으로써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는
이 세상 가운데 자신이 누울 곳이 없는 버림받은 영혼들,
길에서 노숙하는 분들, 방황하는 분들, 난민들,
이 땅에서 버림받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과 고통까지도
이해하시는 분임을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든지 그 분앞에 가까이 나올 수 있는 분임을 알려 주신 겁니다
그리고 그 누구도 그 예수님 앞에 설 때
가난으로 인하여, 버림받음으로 인하여
삶의 고통으로 인하여, 살맛 나지 않는다 라고 말할 수 없게 하시려고
예수님은 가장 비천한 모습으로 오신 겁니다
그 예수님 앞에 설 때 우리 모두는 부유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것이 없으신 분이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어떤 종교지도자들은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그걸 버리고 훌륭하게 되었다면
그게 어떤 스토리가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출생 때부터 가장 비천한 모습이었습니다
남의 구유에서 태어나셨고,
남의 배에서 설교 하셨고,
남의 다락방을 빌려 만찬을 하셨고,
남의 무덤에 묻히셨고,
남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셨습니다
100% 순수한 헌신과 섬김의 낮아짐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분 앞에 서면 우리 모두가 부유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 땅에 가장 가난한 자도, 그 가난을 부끄러워 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하늘의 하나님, 모든 것을 가지신 주인이신 그 분이, 왕이신 그 분이
가장 가난한 자리에 계심으로 인해서
모든 자를 부요케 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우리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고린도후서 8장 9절 말씀입니다
'여러분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잘 알고 있듯이
그리스도께서는 부유하신 분으로서 여러분을 위해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그분의 가난하심을 통해 여러분을 부유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5. 베들레헴의 구유에 누우신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보여준 또 하나의 사건은
베들레헴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들판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의 경배였습니다
천사들을 통해 그 가장 가까운 근처에 있던 목자들에게
소식을 제일 먼저 전하셨고
그 목자들이 가장 먼저 경배를 했습니다
목자들은 오늘 우리가 생각하는 목가적이고 낭만적인 목자들이 아닙니다
당시에 베들레헴의 목자들은,
베들레헴 이라는 마을자체도 사람들에게 인기가 없는 누추한 마을이었지만
그 마을 조차 양떼를 치느라 들어갈 수 없었던
성읍 밖에서 들판에서 거주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베들레헴의 있는 사람들 보다 더 소외된 사람들,
그들이 바로 목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24시간 양들과 함께 살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어린 양은
흰 색에 귀여운 그런 애완동물처럼 생각할지 모르지만
실제 양은 가까이하기 어려운 그런 냄새나는 동물들이었죠
바로 그 양들과 함께 살아가기에
24시간 지켜봐야 되는 동물이 양이라고 하죠
그래서 사람들로부터 소외받았던 겁니다
이 말은, 목자들은 당시 사회에 전혀 영향을 줄 수 없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자 이제 온 세상에 구주가 되신 예수님이 오셨는데
그 중요하고 그 긴급하고 그 기쁜 소식을, 천사들이 누구에게 가장 먼저 전했는가요?
그 사회에서 가장 영향력 없는 사람에게 전해졌다는 것입니다
이 사회의 가치와 방법과 전혀 다른 방법인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는, 가장 중요한 소식은
중요한 사람에게, 중심부에 있는 사람에게 먼저 전해집니다
그것이 사회의 보편적 질서입니다
그래서 어떤 중요한 국가적 사고가 나면, 지도자가 얼마나 빨리 알았느냐,
어떻게 조치했느냐를 가지고 사람들이 추궁하지 않습니까
한 공동체가 움직여지는데도
마땅히 대화할 사람들이 먼저 대화 하지 않는다면 문제가 있는 거예요
교회 공동체도 마찬가지입니다
중요한 리더십 자리에 있는 분들이 중요한 대화를 먼저 나누지 않고
그 밖의 사람들이 나누었다 그러면
이 사회나 공동체가 무너지는 거죠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지금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다는 소식을
가장 먼저 알린 사람은
당시에 가장 중요하지 않아 보이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업사이드 다운 시킨 것입니다
세상을 뒤집으신 것입니다
※아기 예수님을 경배한 사람은, 복음서에 보면, 두 부류의 사람들이 나오죠
한 부류는 마태복음에 나오는 동방의 박사들이고,
또 한 부류는 누가복음에 나오는 이 베들레헴의 목자들입니다
그래서 성탄절에는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이 항상 등장하죠
동방의 박사들과 목자들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사실적으로 말하자면 이 동방의 박사들은
성탄절 연극에 나오면 안 됩니다
왜냐면 이 베들레헴의 목자들은 눅2장에 보면 '구유에 누워 있을 때',
그러니까 예수님이 태어난 지 얼마 안 돼서 바로 경배하러 왔기 때문에
성탄절 연국에 나와도 돼요.
그런데 동방의 박사들, 즉 페르시아의 박사들은, 마태복음에 보면,
'집에 있을 때'
이미 그 베들레헴 마굿간을 떠나서 어딘가에 집에 있을 때입니다
그리고 그 때에 박사들의 경배를 받았을 때의 시점을 보면
학자들은 예수님이 1~2세 사이라고 봅니다
왜냐면 헤롯이 베들레헴의 아기들을 죽이라고 그럴 때
동방의 박사들이 유대인의 왕이 태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경배하러 왔기 때문에 놀란 거죠
예수님 때문에 놀란 거죠 그래서 아기 예수님을 죽이려고
베들레헴의 두 살 아래 아기를 다 죽이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아기 예수님이 최대 두 살까지 자랐을 수 있다는 거예요
그러므로 동방박사들이 성탄절에 나오면 안 되죠
그렇다고 해서 우리 교회나 다른 데서 성탄절 연극에 박사들 나왔다 그래서
막 틀렸다고 비난하지 마세요!
너무 사실적으로 살려고 하지 마시고
넓은 의미의 성탄절이라고 이해하시면 돼요
또 박사도 꼭 세 사람이 아닐 수 있습니다
예물은 세 가지로 나오지만, 박사는 몇 명인지 성경에 정확히 나오지 않습니다
저는 동방의 박사들이 오히려 큰 무리였을 것이라고 봅니다
예루살렘 성이 소동할 정도라고 했으니까,
아마 큰 무리가 왔으니까 예루살렘이 소동한 것입니다
세 사람이 온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또한 페르시아의 지체높은 관리들이니까
아마 말을 끄는 종들도 대동했을 것이고
그런 신분사회에서 그런 사람들이 움직이면
적어도 몇 십 명의 일행이 함께 움직였을 것이기 때문에
예루살렘 성이 소동한 것입니다
어쨌든 이 동방박사들의 경배는, 아기 예수님이 태어나신지 한참 후였다는 것이죠
그러나 목자들의 경배는 즉시 경배였습니다
이걸 통해서 뭐를 보여 줍니까?
예수님은 저 멀리 동방박사들의 경배를 받아야 할 정도로
온 인류에게 구세주이시지만
그러면서도 제일 먼저 경배를 받은 사람은
가장 중요해 보이지 않는 사람들로부터 경배를 받으셨기에
어느 누구도 예수님 앞에서는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는 거죠
가장 중요하지 않아 보이는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소식을 전함으로써
세상의 기준을 뒤엎으시면서
'중요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 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목자들처럼,
이 목자들이 서둘러 가서 예수님을 경배하였던 것은
'과연 우리가 천사들에게서 들은 이 말씀이 사실인지 확인해 보자'
그래서 찾아와서 확인하고 경배했던 것처럼
목자들 처럼 그렇게 빨리 가서 무릎을 꿇고 경배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치는 말
천사들이 목자들에게 전한 소식은 10절에서 14절에 나옵니다
눅2:11.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12.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13.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14.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천사는 예수님이 오신 목적을 알려 주고 있는 겁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는 기뻐하심을 죽은 자들의 평화로다'
하나님께 마땅히 돌려드리게 될 영광이 왜 가려졌습니까?
인간의 죄가 가리운 것입니다
왜 이 땅에 평화가 깨졌으니까?
인간의 죄 때문입니다
예수님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로 그 모든 죄를 씻으시고 자유케 하심으로써
마땅히 올려드려야 될 하나님께 영광이 올려지고,
마땅히 이 땅에 임할 평화가 임하게 되었다는겁니다
왜 세상에 평화가 깨졌습니까?
누군가가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려 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그 영광을 독차지하고, 가리웠기 때문입니다
한 공동체에 평화가 깨지는 것은, 스스로 영광을 구하는 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교만한 자죠.
인간의 교만에 근거해서 영광을 탐내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관계가 깨지고
그 공동체는 무너지고 맙니다
그것이 교회이든, 국가이든, 어떤 사회이든
영광을 스스로 차지하려고 하는 자가 있으면 평화는 깨져버립니다
한반도에 평화가 깨진다면.. 영광을 가로채는 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로마의 황제 아구스도 라는 그 이름은 존엄자 입니다
이 아구스도, 즉 존엄자 라는 타이틀은 사실 하나님께만 붙여지는 칭호입니다
후에 로마의 황제들은 교만하여 박해시절에 크리스천들에게
'시저를 택할 것인가, 그리스도를 택할 것인가? 둘 중 하나를 택하라!'라고
질문함으로써 크리스천들을 판별해 내었습니다
신실한 사람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지 않아서
시저(가이사)를 신으로 인정하지 않아서, 아구스도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아서 순교한 것입니다
그처럼 위험한 호칭입니다
아구스도가 되려고 하는 사람들은 세상에 평화를 가져다 줄 수 없습니다
오히려 세상에 평화를 깨는 거죠
그는 자기가 통치하던 것은
법과 무력으로 팍스 로마나 는 이루었을런지 모르지만
진정한 평화는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진정한 평화는, 오히려 자신을 희생하고 낮아지므로 섬기며
종으로 자신을 십자가에서 기꺼이 못 박히신
하늘의 왕, 구유에 오신 겸손한 그분으로 인해서만
진정한 하나님께 영광이 올려지고 이 땅에 참된평화가 임하는 것입니다
그 분이 우리의 마음속에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에는 구유에 누우신 하늘의 왕의 주목해야 합니다
만일 우리의 마음속에 구유를 주목하지 않고 면류관을 주목한다면
우리는 아우스도 처럼 되는 겁니다 그건 절대로 성공할 수 없는 길입니다
어느 인간도, 어떤 지식을 가지고, 기술을 가지고, 권력을 가지고,
절대 통치자가 된다고 착각하며
스스로 아구스도(존엄자)가 되려고 하는 자는
반드시 멸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면 하나님께만 해당되는 호칭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구유에 누우신 하늘의 왕을 바라보며
스스로 낮은 자리에,
겸손하고 낮아진 자리로, 희생하는 자리로 주님과 더불어 나아가면
그는 참된 평화를 주님의 통로가 될 것입니다
그를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구스도가 아니라 평화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구유에 누우신 하늘의 왕, 그분을 목자들처럼 진정 찬양하고 경배하는,
그 구유를 바라보는 우리의 삶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 구유에 누우신 하늘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며
목자들의 경배를 받으심으로써 위대하심을 드러내신 것처럼
낮고 천하고 더러운 우리의 마음에, 구유보다 더 더러운 우리의 마음에 임하셔서
위대한 하나님을 나타내신 주님!
우리의 마음속에 주님 모시고 살아가는 저희들이 되게 하시고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