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의 신비를 보는 눈을 가져야 마1:18~23
기독교의 신비를 보는 눈을 가져야 마1:18~23
◑ ‘임마누엘’ 신앙의 신비를 보는 눈 마1:23
▲방송인 김제O 씨가 자기 모친의 신앙에 대해 이렇게 글을 썼다.
“사실 저는 아직까지 한 번도 하나님을 본 적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제 어머니를 통해서, 하나님을 봅니다.
나이 40세에 홀로 되셔서
1남5녀를 혼자 키워 오신 나의 어머니,
(그 때부터) 지금까지 하나님과 함께 데이트 중이시다.
아들인 제가 할 수 없는 어머니의 든든한 보호자 역할을
하나님께서 맡아주고 계신다.
하나님은 때때로 어머니의 오빠 같고,
어머니의 아빠 같고,
어머니의 남편 같았다.
하나님을 빼 놓고는,
지금 어머니가 느끼는 그 평안을
설명할 수가 없을 것이다.
어머니는 지금도, 방송에 나오는 나를 실시간으로 보지 않으시고,
항상 녹화해서 보신다.
이유는, 그 방송 시간에, 아들을 위하여, 바쁘신 하나님께 ‘떼’를 쓰기 때문이다.
누구도 채워주기 힘든 어머니의 빈 옆자리,
(여자 홀몸 40세에, 올망졸망한 아이 여섯을 키우기란 정말 쉽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도 채워줄 수 없는데,
하나님께서 그 자리를 채워주셔서
어머니 옆에서 위로하시고,
어머니 옆에서 희망을 주고 계신 것이다.
나는 어머니의 그 웃음에서, 그 희망에서
주름살 너머에 묻어나오는 평안으로
하나님을 만난다.
지금 이 순간에도...”
김제동 씨가 내 어머니를 통해 하나님을 본다는 말은.. 참 의미심장하다.
아무도 그 어머니와 함께 하기 힘들고
아무도 그 어머니를 채워 주기 힘든데,
그 빈자리 거기에
하나님께서 오셔서
세상이 설명할 수 없는 평안을, 어머니가 느끼는 것을 보면서
김제동 씨는 내가 어머니를 통해 하나님을 본다고 고백하고 있다.
▲임마누엘 신앙의 정곡을 찌르고 있다.
김제O 씨가 직접 쓴 글인지,
아니면 자기가 구술하고 누가 대필해 준 글인지.., 자세히 알 수 없지만
<그 어머니의 신앙을 보는 관점>만큼은
매우 예리하고, 정확하다. 기독교 신앙의 정곡을 찌르고 있다.
그의 어머니가 아무리 신앙이 깊어도
그것을 보는 눈이 없으면,
엉뚱한 소리를 늘어놓을 것이다. 예를 들면,
‘우리 어머니는 경로당 대신에 교회에 가신다. 교회 가면 좋은 친구가 많다’ 등
그의 어머니의 신앙은 물론 높은 경지에 있지만,
그것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임마누엘)임을 깨달아 아는 것도
보통 수준이 아니면.. 파악하기 어렵다.
보통 정도의 신앙 수준으로는, 그 '임마누엘' 신앙의 핵심을 보기 어렵다.
기독교의 '신비'를 보는 눈이 있어야, 임마누엘이 신앙의 핵심 임을 알아본다.
◑동정녀 탄생의 신비를 보는 눈
▲기독교는 출발부터가 ‘신비’다.
예수님이 성령으로 잉태되심으로.. 이 세상에 나타나셨다.
예수님은 애시 당초 신비로(성령으로 잉태) 오셨다.
예수님의 탄생으로 기독교가 시작되었다고 볼 때, 기독교는 출발부터가 신비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마1:18
이 말은,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은, 인간의 이성과 지혜로 이해할 수 없다는 뜻이다.
어느 누구도 자기 지혜/지식으로 예수를 믿을 수 없다.
예수를 믿으려면, 누구든지 자기 이성을 뛰어넘어야 한다.
자기 이성을 ‘초월해야 한다.’ (이성 무시와는 구분 필요)
즉, ‘믿음’을 가져야 한다.
신앙은 신비함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신비함을 놓치면 신앙이 아니다.
▲기독교가 신비를 놓칠 때.. 자꾸 세속화 된다.
‘신비함’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요즘 기독교 신앙이 자꾸 세속화 되었다고 말하는데,
‘신비한’ 것을 버리고, 자꾸 ‘눈에 보이는 것’을 추구할 때.. 그렇게 된다.
즉, 자기 삶에 물질적인 복이 임하면... ‘참 신앙’으로 여긴다.
자식이 잘 되어야... 복 받았다고 생각한다.
반대로 사업이 어렵고, 자식이 잘 안 풀리면... 신앙을 무가치하게 여긴다.
‘신비’는.. 아무 관심거리가 안 된다는 것이다.
눈에 안 보이는 그런 것은.. 필요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기독교의 출발 자체부터가
즉 그리스도의 ‘성령으로’ 잉태부터가 ... 신비라는 것이다.
▲신앙의 본질이 신비고, 인생이 신비니까,
우리는 늘 <신비함>을 생각하며 살아야 하는데...
보통 사람들을 보면, 늘 현세적으로 생각한다.
‘저 사람 학벌 좀 괜찮네. 우리 사위 삼았으면 좋겠네’
‘저런 사람은 우리 자식이 절대 만나서는 안 될 사람이지...’
사실은 별 거 없는데 말이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신비한 성령으로> 오신다.
절대로 우리 눈에 쉽게 보이는 현상으로 다가오지 않으신다.
이 ‘신비함’을 붙들 줄 알면... 그의 신앙은 제대로 된 것이다.
‘신비함’없이 눈에 보이는 것만 가지고 말하면... 그의 신앙은 별로이다.
▲한국의 대중가요 가사 분석가에 의하면,
10년 전만해도 그 시대에 인기 있었던 대중가요의 가사는
‘추상적인 가치’를 노래한 내용이 많았다고 한다.
인생은 나그네 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지금은 젊은 세대가 어떤 노래만 좋아하는가 하면
보이지 않는 추상적인 가치를 노래하면, 아예 듣지도 않는다고 한다.
난 널 만지고 싶어, 난 널 갖고 싶어,
구체적으로 적나라한 표현으로 인간의 욕망을 드러내거나
성적인 행위를 묘사해야만 ‘뜬다’고 한다.
이것이 대중문화, 현대문화의 흐름이라면,
현실의 기독교계도 예외가 아닌 것 같다.
우리만큼은, 눈에 보이는 그것을 가지면 ‘좋은 신앙’이라고
말하거나 생각하게 되지 않기를 바란다.
예수님처럼 우리도 ‘성령으로 거듭 태어난 신비’의 주인공들이기 때문이다.
◑아기, 어린 양, 비둘기의 신비를 보는 눈
간혹 사내아이 중에 ‘여자 이름’이 있는데, 그러면 보통은 싫어한다.
남자아이는 ‘강철’같은 남성적 강한 이름을 원할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을 표현하는 이미지가 주로 ‘아기, 어린양, 비둘기, 연한 순’ 등이다.
①유대인이 기대했던 메시야는 ‘강력한 군주’의 이미지인데
그 메시야는 ‘아기’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못 알아본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신비를 보는 눈이 있어야, '아기로 오신 메시야'를 알아 본다.
②신약성경 기자들은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께
성령이 ‘비둘기’처럼 임하시는 이미지를 기록하고 있다.
‘비둘기’는 성경 아가서에 나오는 바, 또한 상식적으로 <강한 남성, 마초>가 아니다.
오늘날에도 어떤 30대 초반의 건장한 청년에게 ‘너는 비둘기 같다’고 하면..
대부분 싫어할 것이다. 너무 유약한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도 ‘비둘기 같은 성령’이라면 별로 받고 싶은 마음이 없을 수도 있다.
공원에 가서, 비둘기 한 마리가 아니라 수 십 마리 내게 모여들어도 그만이다.
까짓 것 비둘기인데 뭐... 혹시나 매, 독수리라면 몰라도...
군대, 왕실의 문장emblem에 비둘기를 새기는 나라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공생애를 시작하시는 메시야, 만왕의 왕의 문장은.. 비둘기이다.
세속주의에 물든 오늘날 신자들은 자기도 모르게
비둘기의 약함과 순결함 보다는, 독수리의 강함과 용맹성을 더 좋아한다.
우리가 ‘비둘기’를 깊이 묵상하지 않는 이상...
예수님을 보는 눈,
기독교를 이해하는 눈이 잘못되고...
방향이 완전히 다른 길로 가게 된다.
③세례요한은 예수님을 보고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했다.
어느 목사님을 보고 ‘당신은 어린양 같군요’ 하면
헨리 나우웬 같은 사람이나 좋아할까, 대부분 시큰둥할 것이다.
물론 ‘어린양’은 구약성경에 예언된 이미지이지만,
세례요한이 그것을 볼 줄 아는 눈이 있었다는 것은,
깊은 신앙의 내공이다.
문제는, 오늘날 우리가 그런 ‘어린양’의 이미지를 못 보고, 봐도 싫어하는 것이다.
교회가 어린양 되기보다는 사자가 되기 원하고
자기가 어린양 되어서 세상을 변화시키기 보다는
호랑이가 되어서 세상에 영향력을 미치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