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동엽】 2024. 12. 23. 0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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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난자의 기도(12:27-36)

 

"'지금 내 마음이 민망하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신대, 곁에 서서 들은 무리는 우뢰가 울었다고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천사가 저에게 말하였다고도 하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소리가 난 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이니라. 이제 이 세상의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 임금이 쫓겨나리라.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이렇게 말씀하심은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보이심이러라. 이에 무리가 대답하되 '우리는 율법에서 그리스도가 영원히 계신다 함을 들었거늘 너는 어찌하여 인자가 들려야 하리라 하느냐? 이 인자는 누구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직 잠시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두움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두움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바를 알지 못하느니라.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

 

앞 장의 내용을 간단히 추려 보면, 예수께서 헬라 사람들의 초청을 받으시고, 그들이 보장하는 세상적인 영광과 십자가를 통한 영광 사이에서 단호하게,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진리를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곧 십자가를 통한 영광을 택하셨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어서 이 본문에서도 예수님께서 중요한 결정을 내리시는 기로에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좀더 일찌기 십자가를 생각하시지 못했을까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누가복음 9 : 51에 보면,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즉 십자가를 미리 생각하셔서 굳게 결심하시는 장면이 있습니다. 이것은 벌써 십자가를 각오하신 것입니다. 물론, 그 이전에도 각오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진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이미 결정한 일이라도 사건마다 계속적으로 새롭게 결정해야 한다는 일입니다. 가령,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할 때, 이미 고백한 사랑이라도 다시 고백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한 번 결심하고 고백했다고 해서 그 사랑이 그대로 이어질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비인격적입니다. 인격적인 사랑은 적어도 계속적으로 재확인하고 재결단을 요구합니다. 이처럼 인격적인 신앙도 계속적으로 새로운 결단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의미에서는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새로운 결단이 필요했고, 사건 앞에서 십자가에 대한 결심을 새롭게 하고 있습니다. 현실적으로 바로 눈앞에 있는 십자가는 대단히 어려운 것입니다. 굴욕적이었고 육신적으로는 말할 수 없는 아픔과 괴로움이 있는 십자가입니다. 어느 모로보나 모순되고 부조리한 십자가였습니다. 이러한 십자가를 앞에 놓고 지금 한 쪽에서는 더없이 안일한 세상적인 영광의 길이 유혹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처럼 넓은 문과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두 길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고 하시면서 십자가의 좁은 문을 택하신 것입니다. 지금은 고통스럽지만 미래의 큰 영광을 보시고 현재의 고난을 택하시는 그런 순간을 지금 가지신 것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선택의 기로에서 기도하셨음을 볼 수 있습니다.

결정부터 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 속에서 결정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사람과 만나서 결정하고 또는 감정적으로 처리하여 내어 던지듯이 결정을 할 때가 있습니다. 모든 결정은 기도 중에 하나님과의 만남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전체가 기도로서 이루어진 것임을 성경에서 볼 수 있습니다. 제자를 선택하실 때도, 변화산에서도 기도하셨고, 전도 사업을 시작할 때도, 기타 모든 중요한 일을 할 때마다 기도하셨습니다.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도 기도하셨고, 기도하심으로 결단을 내리셨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결정하지 않고 하나님을 등지고 내린 결단은 언제든지 뒤에 가서 후회하게 됩니다. 지금 예수님은 제자들을 앞에 세워놓고 기도하고 계십니다. "지금 내 마음이 민망하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워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12:27) 이 기도는 대단히 중요한 기도로서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 내용과 비슷합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예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셨다는 이야기는 있지만 기도내용은 없고,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서는 겟세마네에서의 기도 내용이 적혀 있습니다. 그 이유는 처음 서론에서 누누이 밝혔듯이 요한복음은 마태, 마가, 누가복음을 다 읽고 난 뒤에 보충적이 의미로 기록한 것이기에 중복된 내용은 기록지 않고 대부분이 보충적인 것을 기록하는 데 주력했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오늘 본문에서의 기도 내용은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 내용과 거의 같은 것입니다.

이 기도에서 "내 마음이 민망하니 무슨 말을 하리요"라는 구절은 대단히 의미깊은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예수님이 당하시는 고통은 결코 육체적인 것만이 문제가 아니라, 인격체이신 예수님이므로 정신적인 고통이 더 힘들어서 고뇌하신 기도인 것입니다. 손과 발에 못이 박히고 여섯 시간 동안 피를 다 쏟으시는 고통도 굉장한 것이었습니다만 더 어렵고 큰 것은 정신적인 고통이었습니다. 인성을 가진 예수님이시므로 우리들이 경험할 수 있는 인간적인 아픔은 다 겪으셨습니다. 예루살렘에서는 사람을 십자가에 매달 때, 그 아픔을 조금이라도 잊게 해주기 위해서 예루살렘의 귀부인들이 독한 술을 죄인들에게 마시게 하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독주까지 거절하시고 완전하게 아픔을 다 겪으시며 정신적인 고통까지 함께 치루셨습니다. "민망해서 무슨 말을 하리요." 아주 괴로와하신 것입니다.

어느 책에서, 사람은 자기 명을 다 사는 사람은 10%밖에 안 된다고 이야기한 것을 보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아직도 육신적인 여건이 의학적으로는 더 살수가 있는데, 죽는다는 뜻입니다. 가령, 어느 죄수가 사형 선고를 받으면, 선고를 받는 그 순간 벌써 시커멓게 죽어간다고 합니다. 그래서, 제 명을 못살고 죽는다는 것입니다. 죽음을 앞에 둔 인간적인 고통을 잘 설명하는 말입니다. 예수님도 십자가로 인하여, 육체적인 고통은 물론 정신적으로나 영적으로 인간이 당하는 고통은 모조리 다 체험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니 하나님의 능력으로 십자가 고통쯤이야 충분히 감수할 수 있지 않았겠나 하고 억측을 합니다만 잘못된 생각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 피와 물이 다 빠져나갔을 때에 목마르다고 극히 인간적인 표현을 하신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본문에서도 십자가의 고통을 앞에 놓고 "민망하니 무슨 말을 하리요"라고 처절한 인간적인 고통을 표현하신 것입니다.

죽음은 누구나 반가와 하는 것이 아닙니다. 팝송 가사에서도 "천당을 나쁘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으나 천당가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는 노래가 있습니다. 사실입니다. 천당은 모두가 좋다고 하지만, 천당에 가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왜입니까? 죽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모순이 있는 것 같지만 일리 있는 이야기입니다. 옛날에 김익두 목사님으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목사님께서는 높은 산 위에 있는 광산을 방문하셨답니다. 아주 높은 곳이어서 광산까지 올라가려면 한 사람씩 한 사람씩 실어나르는 조그마한 케이블 카를 타야 했습니다.

목사님께서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시어 전도를 하시자, 어느 광부가 여기서는 전도하지 말라고 장난기가 섞인 농담을 했습니다. 이유를 알아본즉, 얼마 전에 미국 선교사가 이곳을 다녀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케이블카를 타고 광산에 올라가던 중 그만 고장이 나서 케이블카가 잠깐 멈추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당황하여 아래를 내려다보니 천길 만길 깊은 계곡이라 그 줄이 끊어지는 날이면 정말 끝나는 상황이었습니다. 선교사는 얼마나 놀랐던지 그 자리에서 기절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들려준 광부는 "당신들은 예수 믿으면 천당 간다고 전도를 잘하면서도 죽는 것은 우리와 똑같이 싫어하고 무서워한다"고 비꼬았습니다. 입장이 난감한 목사님은 돌아서서 잠깐 기도를 하셨답니다. "하나님, 급합니다. 지혜를 주셔야겠습니다"라고. 그랬더니 선뜻 머리에 한 가지 생각이 떠올라 광부에게 말했습니다. 그 당시는 학질이 유행하던 시기여서 "당신네들 학질을 앓아 본 경험이 있소?" 하고 물었습니다. 학질이란 병은 묘하게도 하루 건너뛰면서 증세가 나타나는데, 대단히 추워서 벌벌 떠는 무서운 병입니다. 광부가 앓아본 경험이 있다고 하자, 학질에 반드시 먹어야 하는 키니네 약 맛이 어떠냐고, 그리고 먹을 만하냐고 다시 물었습니다. 그 약은 쓴맛으로 유명해서 먹으면 나을 줄 알지만 다들 먹기 싫어하는 약이었습니다. 목사님은 이것을 응용해서 설명하시기를 천당 가는 것이 좋은 줄 알지만 죽는 맛이 쓰기에 죽는 것을 싫어하고 두려워한다고 잘 설명하셨다는 이야기입니다. 바로 앞에 되어질 일을 알지만, 지금 당장이 힘들고 어렵기 때문에 문제인 것입니다. 공부하는 학생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열심히 공부하면 다음에 기쁘고 좋은 날이 있을 것을 잘 압니다. 그러나, 오늘 공부하기가 어렵고 힘드니 어찌합니까? 당장 몰려오는 졸음과 책상에 오랫동안 앉아 있기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미래가 반드시 불확실해서 못하는 것만도 아닙니다. 아무리 미래가 분명해도 현실이라고 하는 어려움도 또한 사실이니 말입니다. 천당이 확실해도 죽음의 고통을 그렇게 쉽게 넘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도 부활의 아침을 모르시는 것이 아닙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썩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사실을 왜 모르십니까? 그러나, 썩는다는 것은 아픔이요 고통입니다. 얼만 전에 필자는 예전에 모시던 목사님의 하관예배를 인도하면서 다음과 같은 기도를 드린 기억이 납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썩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진리를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만, 그래도 오늘 눈물을 흘려야 하는 이 불신앙을 용서하옵소서." 죽으면 우리 앞에 영생이 있음을 믿습니다. 그러나, 죽음 앞에서 오늘도 우리는 울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인간의 고통이요, 인간의 한계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 앞에 있는 부활, 영생을 다 아셨지만 그 순간에 고민하시는 모습을 보면 얼마나 인간적인지 모르겠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인간적인 고뇌를 생생하게 보여 주셨고 고난을 겪으셨습니다. 이 고난이야말로 모순 투성이었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한창 일할 나이인 33세에 돌아가셨고 또한 가르치던 제자들은 한심한 상태였습니다. 의와 진리를 앞세워 생각하면 진리가 와르르 무너지는 고통이었습니다. 가식적이고 위선적인 가야바, 한심한 빌라도, 천인공노할 가룟 유다의 배반, 수제자 베드로의 배신, 앞뒤 어디를 보아도 이래서는 안 되는 것뿐입니다. 좋지 않게 표현하면 억울해서도 죽지 못할 상황입니다. 슈퍼스타의 작가는 이 죽음의 보상이 무엇인가를 예수께서 고민하셨다고 상상까지 했습니다. 어쨌든 "민망하여 죽게 되었다"는 기도는 인간적인 깊은 고뇌를 엿볼 수 있습니다.

다음 이어서 하시는 기도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12 : 27)라고 십자가를 면할 수 있으면 면하게 해달라는 간구입니다. 가능하면, 십자가가 없는 영광이 좋고 있더라도 좀 작은 것을 바라는 마음입니다. 왜 반드시 십자가를 져야만 하는가, 이것을 피할 길은 없을까, 하고 구하는 것이 예수님답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과연 이 기도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기도입니까? 결코 하나님을 배반한다거나 거역하는 기도는 아닙니다. 이왕이면 다른 길은 없습니까? 십자가를 꼭 져야 합니까? 있을 수 있는 기도요, 고백입니다.

이 고민 끝에 중요한 결론을 내리십니다.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12 : 27 하반절) 여기서 고민의 해결 방법을 우리에게 보여 주고 계십니다. "내가 이 때를 위하여 왔나이다." 무슨 말입니까? 첫째, 내가 왜 세상에 왔느냐 하는 본질적인 뜻(original meaning)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나는 왜 세상에 태어났으며, 왜 사는 것입니까? 나는 왜 존재해야 하는 것입니까? 한 번 자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당하는 고통 속에서 어찌하면 빠져나갈 수 있을까만 생각지 말고 왜 세상에 태어났는가,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부부간에 문제가 있습니까? 자녀와의 관계에 고민이 있습니까? 내가 왜 결혼했느냐고 본질적인 의미를 생각해 보십시다. 직장에서 문제가 생겼습니까? 인간이 왜 사는 것인지 자신에게 물음으로써 해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둘째는, 미래적인 의미를 묻는 말입니다. "이 때를 위하여 왔다"는 것은 이 때를 놓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언젠가는 끝이 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언제 어떻게 끝내야 합니까? 가장 아름답고 귀한 시간에, 즉 결정적인 시간에 끝내야 하는데, 그 때가 언제입니까? 본문에서 "이 때를 위하여 왔나이다"라는 말은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 왔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십자가를 져야 할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주님께서는 가능하면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십사고 기도하고, 다시 "그러나" 하고 새로운 차원의 결단을 하시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뜻, 즉 본래적인 의미를 통하여 궁극적인 미래를 바라보시는 것입니다.

정말, 아름답습니다. 이렇게 해피 엔드로 끝나야 합니다. 기도를 어떻게 시작했고 몸부림을 치며 고민을 했더라도 끝이 좋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끝에 가서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12 : 28)하고 결론을 맺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왔으니 영광이 아버지께 돌아가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그것 밖에는 소원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사랑해 본 일이 있습니까? 사랑이 순탄할 때는 그에게도 좋고 나에게도 좋습니다. 그러나, 어느 결정적인 시간에는 사랑하기 위해서 내가 희생해야 될 때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때로는 희생을 요구한단 말입니다. 한 가지 더 예를 들면, 가령 나는 나 자신만을 위한 이기심으로 산다고 합시다. 나 자신을 위한다고 반드시 남에게 해가 돌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나를 위한 다는 것이 남에게도 좋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나만을 위하려고 한다면, 어느 순간에서는 나를 위하여 남을 죽여야 할 순간이 오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해 오셨고 살아서 영광을 돌리셨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죽어서 영광 돌려야 할 때가 왔단 말입니다. 죽어야만 영광이 돌아가는 순간이 온 것입니다. 우리도 살아서 성공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릴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내가 건강하고 출세하고 행복해야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어느 순간에는 손해를 보고 병들어 죽어야 영광이 될 때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순교로써 결정적인 시간이라고 말합니다. 내 뜻과는 달리 실패하고 희생하고 죽어서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이 우리들의 기도의 결론이어야 합니다. 이런 기도는 하늘에서 응답이 내려옵니다.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12 : 28) 예수님께서 말구유에 오심으로, 도성인신(道成人身) 하심으로, 율법을 지킴으로, 봉사하심으로 이 모든 수고가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는 말은 십자가를 짐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갈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동안은 예수님의 행적에서, 즉 많은 봉사와 수고, 그리고 이적 속에서 영광이 돌아갔습니다. 병자를 고치고, 오천 명을 먹이고, 바다를 고요하게 하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등 이적이 일어날 때마다 사람들은 그 사건들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할 시간입니다. 형통함을 통해서도 영광을 받으시고 실패를 통해서도 영광을 받으시는 하나님께 자신전체를 바치고자 하신 것입니다. 바로 이 순간에 "영광스럽게 하리라"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누가복음 1:11에 보면, 예수께서 세례 받으실 때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는 하늘의 소리가 들렸고, 또 마가복음 9 : 7에 보면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고 변화산에서 변화하실 때 들려온 음성이 있습니다.

본문에서 들려온 "영광스럽게 하리라"는 이 음성과 다 같은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이 음성이 들려올 때, 옆에 섰던 사람들은 우뢰가 울었다고도 하고 천사가 말했다는 등 자기들이 느끼는 대로 말을 합니다.(12 : 29) 여기에 또 하나의 중요한 교훈이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 어떤 목적으로 기도해야 하며 응답은 어떻게 받아야 합니까?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살든지 죽든지 결정적인 시간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어야 합니다. 나의 형편이야 어떠하든 하나님의 영광만 드러낼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겠습니다라는 기도를 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이렇게 완전히 바쳐질 때에 하나님은 응답하여 주십니다.

예수님은 결정적인 시간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방향으로 결단을 하시고, 그리고서는 새로운 안목으로 새 세계를 보십니다. 다시 말하면, 영적인 안목으로 세상을 보고 비판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이 세상의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 임금이 쫓겨나리라."(12:31) 이 세상의 왕이 심판 받겠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심판주로 이 세상에 오셨으므로 그를 영접하는 자에게는 구원이 있고 배반하는 자에게는 심판이 있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심판의 기준입니다. 그런데, 헤롯왕과 빌라도는 예수를 재판했습니다. 예수님은 피고로서 매를 맞고 심판을 받고 있지만, 예수님을 기준으로 보면 지금 재판자는 예수님이며 피고는 빌라도입니다. 왜냐하면, 죄인이 아닌 자를 죄인이라고 판결하면, 판결한 그가 도리어 죄인이 되기 때문입니다. 빌라도는 양심의 가책을 받으면서도 의인을 죄인으로 내어주는 바로 그 순간에 자기가 죄인으로 심판 받는 시간임을 알아야 했습니다. 만약에 빌라도가 예수를 의인이라고 인정하고 무죄 석방했다면 그는 그대로 재판장이었을 것인데, 죄인으로 내어 주었기에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영원한 죄인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심판입니다. 심판의 결과를 보면, 빌라도는 예수를 재판한 지 7년 후에 쫓겨났고 예루살렘은 40년 후에 완전히 망합니다. 무서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는 사건은 세상 왕권이 심판 받는 시간임을 예수님은 아셨습니다. 그래서, 심판하는 빌라도를 불쌍히 여기신 것입니다.

이어서 32절은 구약을 배경으로 해서 주신 말씀입니다.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은 내게로 이끌겠노라."(12:32) 이 말씀은 십자가에 매달리는 현상을 의미하는 것으로 인자가 들리면, 즉 십자가에 매달리면 많은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다고, 십자가 뒤에 있을 부활의 아침을 내다보시며 하신 말씀입니다. 그 때에 가서야 내가 저들을 인도하고 왕이 되겠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을 듣고 유대 사람들은 예수님께 "우리는 율법에서 그리스도가 영원히 계신다 함을 들었거늘 너는 어찌하여 인자가 들려야 하리라 하느냐, 이 인자는 누구냐"(12:34)고 물었습니다. 저들은 영광의 메시야를 생각하고, 예수는 십자가를 통한 메시야를 생각한 차이입니다.

 

십자가를 통한 영광의 메시야, 영원한 메시야를 예수님은 생각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번 예수님께서 기도로 얻은 응답의 의미가 무엇이며, 고난을 통한 영광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깨닫는 귀한 신앙인이 되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