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명자의 기본 조건(요 21: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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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명자의 기본 조건(요 21:15-17)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또 두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세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
이 본문은 너무나도 잘 알려진 말씀입니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의미 깊게 생각해 보려 합니다. 사랑한다는 말은 여러 번 거듭해도 싫증나지 않는 말입니다. 그만큼 사랑은 신비롭고 귀한 능력이 있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조반을 드신 후에 하신 말씀입니다. 밤새껏 물고기를 잡으려고 애를 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여 피곤에 지친 제자들을 불러 숯불가에 앉히시고 먼저 식사를 하게 한 다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십니다. 여기에 깊은 뜻이 있습니다. 주께서는 우리 육신의 약한 점을 결코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밤새껏 수고하고 피곤한 그들에게 그 상태에서 "중요한 말을 하겠다. 앉으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조반을 미리 준비하시고 피곤과 추위와 배고픔에 시달린 그들을 충분히 이해하시어 그 문제들에 대해 해결을 주신 다음에 말씀을 하십니다. 이 방법은 오늘 제자들에게만 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병 고치신 일들이 다 이와 같은 방법입니다. 환자들을 앞에 놓으시고, 병 고치는 것이 중요하냐 하늘나라가 중요하냐 먼저 회개부터 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단 말입니다. 병 고치러 온 사람들은 병 때문에 컴플렉스가 있는 사랑들이므로 복음부터 믿으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연약한 마음, 상처난 마음부터 고쳐 주시고, 그리고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주님의 이 자비로운 의도가 오늘 여기에도 나타나는 것입니다. 먼저, 육신의 연약함을 채워 주시고, 그리고 귀한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다음은 베드로를 부르신 호칭의 문제입니다. 마태복음 16장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의 이름을 고쳐 주셨습니다. "너는 이제부터 베드로다" 하시고, 그 이후로는 계속 베드로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자리에서는 "요한의 아들 시몬아" 하고 자연인으로 돌아가서 시몬을 부르십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를 따르기 전의 시몬으로, 원점으로 돌아가서 부르신 것입니다. 베드로란 이름은 그의 신앙고백으로 예수께서 크게 칭찬하시며 상급으로 주시듯이 내리신 것으로, 반석의 뜻을 가진 좋은 이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름을 부르시지 않고 옛날 이름인 시몬을 불렀을 때, 베드로의 마음은 얼마나 뜨끔했겠습니까? 사실, 물고기 잡으러 다시 돌아온 그는 반석은 고사하고 주먹만한 돌도 되지 못한 시몬입니다. 이와 같은 예는 성경의 문맥 속에서 몇 군데 더 있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고쳐 주셨는데, 그러나 종종 야곱이라는 이름이 나옵니다. 형편없을 때는 야곱이고, 좀 믿음이 생겼을 때는 이스라엘입니다. 엎치락뒤치락 하면서 옛날의 이름을 완전히 떨쳐 버리지 못하고 사는 인간의 나약성을 여기서 볼 수 있습니다.
본래 가졌던 자기 모습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자기를 바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위해 주님은 "시몬아" 하고 부르신 줄 압니다.
한 가지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시몬아" 하고 부르셨지만, 그의 과거를 묻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미안한 말입니다만, 필자가 예수님의 입장이라면 한 마디 하고 싶습니다. "시몬아, 내가 조심하라고 얼마나 일렀느냐? 죽을찌언정 나를 따르겠다고 장담할 때에 조심하라고 말하지 않았느냐? 기도하라고 할 때에도 너는 졸고만 있더니 드디어 나를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부인하고, 그것도 모자라 저주하고 맹세까지 하다니…… 총칼 앞도 아닌 계집아이 앞에서 그렇게도 비겁할 수 있느냐?"라고 한번쯤 나무라고 싶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의 아픈 점을 찌르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본인도 죄송하게 생각하고 어쩔 줄 모를 때, 그 자리를 아프게 찌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종종 교육적이라는 미명하에 남의 아픈 점을 찔러가며 고쳐 보겠다고 하는데, 잘못된 생각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방법이 아닙니다. 남의 아픈 점, 특히 가리고 싶어하는 부끄러운 부분을 일부러 드러내려고 하지 말고 그대로 덮어두십시오.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세 번씩이나 부인한 엄청난 실수 때문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고도 제자 됨을 포기하고 갈릴리로 돌아간 그를 찾아가셨습니다. 그리고, 지난날의 과오를 묻지 않으셨습니다. 약점을 드러내지 않으셨습니다. 물론, 비판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고, 옛날과 똑같이 대접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자주 듣는 이야기입니다만, 탕자가 돌아올 때 그 아버지도 이런 자세였습니다. 왜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않고 나갔느냐고 묻지 않았습니다. 만일에 아버지가 돌아온 탕자에게 그의 아픈 점을 건드렸다면, 그는 다시 발길을 돌리며 떠났을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도 베드로에게 그의 아픈 과거를 물으셨다면, 그는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떠나소서"라고 결정적인 말을 하고 떠났을 것입니다.
다시는 내 이름을 부르지 말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베드로의 형편입니다. 정말, 면목이 없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주께서는 그의 과거를 전혀 묻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감히 베드로는 예수님을 사랑할 수가 있었고, 그 얼굴을 바로 뵈올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사랑을 묻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과거는 묻지 않으셨지만, 이 질문 속에는 암시적인 가르침이 있습니다. 질문의 깊은 뜻을 헤아려 보면, 베드로가 지난날 세 번이나 부인하게 된 그 이유는 바로, 주님을 사랑하지 아니한 연고라는 것을 깨우쳐 주고 싶은 것이 아닌가 합니다. 베드로가 실패한 원인은 능력 부족도, 용기 부족도 아니요 오직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물고기를 잡으러 다시 돌아온 것도 사랑의 결핍으로 된 것임을 암시적으로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정말로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면 동참하게 되고,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의 신비요 능력입니다.
사랑은 언제나 하나입니다. 아픈 사람을 사랑하면 나도 아프고, 기쁜 사람을 사랑하면 나도 기쁘고, 우는 자를 사랑하면 나도 웁니다. 그것이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는 마당에, 그를 사랑한다면 어찌 살아 남을 수 있겠습니까? 같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예수를 떠났습니다. 결국, 사랑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보다는 자기 목숨을 더 사랑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과 같은 실패를 가져온 것입니다. 가끔, 필자에게 가정 문제로 상담해 오는 분이 있습니다. 어려운 사정을 다 듣고난 뒤, 제가 묻기를 "정말로 남편을 사랑하십니까?" 하면, "네" 하고 대답하는 사람들이 별로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라고 대답하는데, 이 대답에 문제가 있습니다. 정말, 사랑하면 문제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 모두가 근본적인 문제를 잊어버리고 명예다, 돈이다 하며 복잡하게 얽히는데, 문제는 사랑입니다. 사랑하면 모든 것이 다 소화됩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께서 물으시는 것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사랑은 운명을 같이 하며, 생명을 바칠 정도로 엄청난 용기도 생기게 합니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 사랑은 무섭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세 번이나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는데, 세 번의 질문의 의미가 다 다릅니다. 첫째 질문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물으셨는데, 원문으로 보면 아가페스 메 플레온 투톤으로 아가페적인 사랑을 의미합니다. 둘째 질문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처음 질문에서 비교하는 "더"라는 말이 빠진 것으로, 그저 아가페스 메로 아가페의 사랑을 하느냐는 질문입니다. 같은 아가페이지만, 첫째 질문은 비교급을 썼고, 둘째는 빠졌습니다. 세째 질문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것은 아가페가 아니고 휠리야적인 사랑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종류가 다른 세 가지의 사랑을 묻고 계십니다.
헬라 사람들에게는 사랑이라는 말의 표현이 많습니다. 우리도 애국, 우정, 연애 등 사랑의 종류에 따라 여러 가지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만, 헬라어에서는 어원 자체가 다릅니다. 대략 크게 나누어 사랑의 어원을 네 가지로 나누는데, 첫째가, 가장 높고 고상하고 희생적인 사랑으로 아가페라고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아가페라고 하는데, 여기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희생적인 사랑은 아가페라고 합니다. 그래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할 때에 이것은 아가페적인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은 언제나 아가페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신 사랑,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신 사랑은 모두가 아가페입니다. 이 사랑은 하나님께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둘째는, '스톨게'인데, 핏줄기 사랑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하고, 어머니가 딸을 사랑하고, 어미개가 강아지를 사랑하는 종류의 사랑입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사실 자랑할 것이 못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왜입니까? 자식 사랑은 동물도 할 줄 아는 사랑이니 그 정도의 사랑을 사랑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핏줄 사랑은 동물적인 것입니다. 셋째는, 에로스로써 동경하는 사랑입니다. 그리워하는 사랑으로써, 철학적으로 말하면 잡아당기는 사랑입니다. 나를 저쪽으로 주는 것이 아니라 저쪽이 나와 같이 되는 것으로 연애입니다. 연애는 주는 것만이 아니라 잡아당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이일찌라도 한번 비뚤어지면 서리가 내리도록 상대방 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에로스를 일명 철학적 사랑이라고도 합니다.
그리워하고, 잡아당기고, 소유하고 싶어하고, 그런 의미를 가진 사랑입니다. 네번째는, '휠리아'로 친구의 사랑입니다. 프랜드쉽(friend- ship)이라는 말도 휠리아라는 단어에서 나왔습니다. 친구의 사랑은 수평적인 사랑입니다. 이상 네 가지 종류의 사랑을 열거해 보았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묻는 첫째 질문은,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여기에 베드로는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로 대답했는데, 베드로가 말한 사랑의 뜻은 원문에 보면 휠리아의 사랑입니다. 예수님과 운명을 함께 하지 못했으므로 아가페로는 감히 대답할 수 없고 휠리아로 대답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질문은 "네가 이 사람들보다 더 아가페적인 사랑을 하느냐?"고 지금 함께 있는 여섯 제자와 비교하여 묻고 계십니다. 대단히 어려운 질문입니다. 우리는 다 주님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그 중에 특별히 내가 더 주님을 사랑하느냐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항상 최상급을 요구합니다. 사랑은 받는 것도 최고를 원하며 주는 것도 최고로 주어야 합니다.
차선의 사랑은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랑에는 질투가 있는 것입니다. 어떤 시인이 새장 안에 있는 새에게 자기가 볼 때만 울라고 말했다는 우스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랑은 최상의 것으로 나만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이 모든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최상의 사랑, 최상급의 사랑을 찾고 계십니다. 최고의 사랑을 해야 최고의 사랑을 받을 수 있습니다. 어거스틴은 "하나님은 나 하나만 사랑하는 것처럼 우리 모두를 사랑하신다"고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정말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온 세상 사람들 중에 나만 사랑하는 것처럼 최고의 사랑을 느끼는 것입니다. 간혹, 선배 목사님들께서 필자에게 "하나님은 곽 목사를 너무 많이 사랑하십니다"라고 말하면, "네 저도 인정합니다. 하나님은 항상 내 편이시며 많이 사랑하시는 줄을 알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자부심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둘째 질문은, 같은 아가페의 사랑이지만, 다른 사람과 비교가 아니라, 네 자신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묻는 질문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너 자신을 부정하고 나를 사랑하느냐는 뜻입니다. 사랑하게 되면 자신을 부정하고, 사랑하게 되면 자존심이 없어집니다. 사랑한다고 하면서 아직도 자존심이 남아있어 손해보는 것 같고 아까와서 쩔쩔 맨다면, 그것은 덜 사랑하는 것입니다. 어떤 여성이 대학원을 마치고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고 바쁘게 살다 보니, 생각할수록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엇 때문에 대학원까지 다녔는지 모르겠다고 아주 분해했습니다. 필자는 "그렇게 억울하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슬그머니 권유했더니 그것은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럼, 어쩌겠다는 것입니까? 이미 없어진 것에 대해 미련을 버리는 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은 나의 모든 것을 다 주고도 모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존심 꺾기가 아까와서 뚝뚝 소리내며 희생하는 것이 분해서 살기가 힘들다면, 사랑의 "사"자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사랑이란 자기가 소멸되며, 증발하여 아까운 것이 없고 부러운 것이 없이 마냥 좋기만 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하면 미친다는 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자기 부정을 못했기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주님께서 물으 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셋째 질문은, 친구 사랑입니다. 이 때에 베드로의 대답은 대단히 어색합니다.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주님께서 아심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안다고 하는 말에도 두 단어가 있습니다. 첫째와 둘째 질문에서 베드로가 대답할 때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의 안다는 말은 '오이다'로 체험으로 안다는 뜻이며, 지금 세째 질문에서 안다는 말은 '기노스코'인데, 들어서 안다는 뜻입니다. 공부해서 안다는 것도 여기에 속합니다. 어쨌든 두 단어의 뜻이 이렇게 다릅니다. 그러니까, 첫째, 둘째 번의 대답은, 내가 주를 사랑한다는 것은 주님의 경험으로 알지 않습니까? 하고 대답하다가, 가혹하게 느낄 정도로 세 번째 다시 물으시니, 내가 비록 예수님을 모른다고 했지만, 주님은 들어서라도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을 아시지 않습니까? 하고 거의 사정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바닷가에 다시 와 있지만 주님은 모르시는 것이 없으신데 어찌 나의 중심을 모르시겠습니까? 하고 밑바닥까지 내려가며 대답하고 있습니다.
이 때에 주께서 말씀하십니다. "내 양을 먹이라." 주님은 베드로의 대답이 끝나고 나면 그 때마다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처음에는 "내 어린양을 먹이라"고 어린양이라고 하셨는데, 어린양은 사랑으로 먹어야 합니다. 말로만은 안 되고 오직 사랑으로 안아 주며 굽혀서 아가페적인 사랑으로만 키울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내 어린양을 치라" 하십니다. 이 양은 좀 큰 양으로 다스리라는 뜻입니다. 세 번째는 "내 양을 먹이라"고 하셨는데, 이것은 친구의 사랑을 가졌다는 베드로의 대답에, 그러면 친구를 가르치라는 뜻으로 교육적인 말씀입니다.
"내 어린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이렇게 차례대로 말씀하셨는데, 모두가 연결되는 뜻이 있습니다.
이제 사명을 주셨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 양을 먹이라." 사랑하고야 일할 수 있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랑해야 지혜도 생기고, 능력도 생기며,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도록 힘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참 사랑이 모든 사명 수행의 기본이고 가장 유일한 조건입니다. 정말로 사랑하십니까? 아무 말도 필요치 않습니다. 사랑하는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내 양을 먹이라고 하신 그 뜻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양을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그 소중한 양을 먹이라고 맡기시는 것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을 먹이라." 사랑의 구체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쳐다보고 말만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사랑하는 자가 소중히 여기는 것을 나도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사랑입니다. 정말 사랑을 아는 권사님을 필자가 만난 적이 있습니다. 권사님의 남편은 장로님이신데, 직장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권사님이 양품점을 하시며 어렵게 생활을 꾸려나가는 가정입니다. 장로님은 거의 사진작가라고 불리울 정도로 카메라를 사랑하며 오랫동안 취미 생활을 즐겨온 분입니다. 어느 부활절 날, 멋있는 사진 한 장을 찍으려고 교회에 카메라를 가져와서 옆에다 놓고 기도하고 나니, 감쪽같이 카메라가 없어졌습니다. 그 카메라는 최고품으로 대단히 고가품이었습니다. 장로님은 너무 속이 상해 사흘 동안이나 밥맛을 잃을 정도였습니다. 그때, 권사님은 빚을 내어 똑같은 카메라를 하나 사 드렸습니다. 이것을 본 다른 성도들이 어이도 없고 한편으로는 감격해서 "권사님, 그렇지 않아도 어려우신데, 그것을 또 사 드립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권사님은 "우리 장로님에게 카메라를 빼앗는 것은 죽으라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의 최고의 취미인데, 그것을 어찌 그냥 두고 보겠습니까?" 하며 빚은 비록 생겼지만 잘했다는 그의 대답에서 참 훌륭한 아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남편이 소중히 여기는 것을 아내도 같이 소중히 여기는 것,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상대방이 미적 감각을 소중히 여기면, 그 아름다움을 같이 느껴주고, 책을 소중히 여기면 같이 책을 소중히 여길 줄 아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그 소중한 양을 나도 사랑하는 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주께서 위하여 죽으신 이 교회를 사랑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교회 의자 하나라도 사랑하는 것, 이것이 바로 교회 사랑입니다. 사랑은 말로만 하는 감상이 아니라 구체적인 것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을 내가 사랑하는 것이 곧 하나님께 대한 사랑입니다.
새 신자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는 어린양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어린양을 먹이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그들을 사랑하는 것이 주님께 대한 사랑입니다.
끝으로, "내 양을 먹이라"는 말씀과 마태복음 16장에 있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의 베드로의 고백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비교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고백에 대한 예수님의 응답은 칭찬이면서도 맡기는 바가 없습니다.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 16:18), 즉 내가 내 교회를 그 반석 위에 세우리라고 말씀하셨지, 결코 맡기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 시간에는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다짐하시며 내려가고 또 내려가서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대답하는 이 순간에 "내 양을 먹이라"고 사명을 주십니다. 겸손한 바로 그 순간에 일을 맡기십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사랑하면 내 양을 먹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