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교리에 대한 관심(사도행전 17:16~21)
목차로 돌아가기 |
새 교리에 대한 관심(사도행전 17:16~21)
바울이 아덴에서 저희를 기다리다가 온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분하여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또 저자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니 어떤 에비구레오와 스도이고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새 혹은 이르되 이 말장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뇨 하고 혹은 이르되 이방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또 몸의 부활 전함을 인함이러라 붙들어 가지고 아레오바고로 가며 말하기를 우리가 너의 말하는 이 새교가 무엇인지 알 수 있겠느냐 네가 무슨 이상한 것을 우리 귀에 들려주니 그 무슨 뜻인지 알고자 하노라 하니 모든 아덴사람과 거기서 나그네 된 외국인들이 가장 새로 되는 것을 말하고 듣는 이외에 달리는 시간을 쓰지 않음이더라
오늘의 본문말씀에 나타난 내용은 좀 뜻이 깊은 데가 있어서 좀더 집중적으로 침착하게 생각해야만 바울의 심성이랄까 당시에 되어졌던 사건의 의미를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도 바울은 드디어 아덴이라고 하는 도시에 도착합니다. 지금도 '아덴'이라고 부릅니다마는 이 아덴은 대단히 중요한 도시입니다. 여기서 먼저 생각할 것은, 사도 바울이 본래 예수 믿기 전에는 헬라 철학과 히브리 종교를 함께 배운 사람입니다. 바울이 그렇게 열심히 공부해서 장차 어떠한 사람이 되려고 했는지―아마도 필로 같은 사람이나 가말리엘 같은 사람이 되고자 하지 않았나 싶어요.
히브리 종교와 헬라 철학을 둘 다 통달해 가지고 히브리 종교를 철학적으로 파악하려들고, 헬라 철학을 종교화하려 한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고 지향했던 것이 그의 본래 가졌던 이상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해봅니다. 그런고로 그는 히브리 전통에 능통해서 바리새인도 되고, 또 성경을 많이 아는 사람이기도 하지만, 그와 동시에 어느 헬라 철학자 못지 않게 헬라 철학을 많이 공부한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었으므로 바울은 당연히 아덴을 흠모했을 것입니다. 자, '종교'하면 예루살렘이요, '정치'하면 로마요, '철학'하면 아덴입니다. 아덴은 곧 철학의 본산지입니다. 여기에 바울이 이른 것입니다. 아덴은 헬라 문화의 중심이요 서양문명의 요람입니다. 많은 사람이 철학을 추구하고 있는 곳입니다.
철학을 공부하면 할수록 놀라운 것은 옛날의 그 헬라 철학자들입니다. 좀 지나치게 얘기하는 사람은 어느 누가 철학을 연구해보아도 당시에 헬라 철학자들이 시작해놓은 체계 이상을 넘어서지 못한다고 까지 합니다. 대단히 중요한 점입니다. 인간의 이성을 계발하는 철학적 사고에 대해서는 단연코 헬라 철학이 우수한 것은 당연합니다. 그 방면의 인재로 말한다면 철학자 아낙사고라스라든가 프로타고라스, 그리고 우리가 익숙히 아는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기라성들이 다 아덴에서 역사 했습니다. 아덴에서 나고, 아덴에서 전하고, 아덴에서 죽었어요. 철학에 뿐만 아니라 또한 기라성 같은 예술가, 미술가, 음악가들이 있는가 하면 마라톤이라는 것도 아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렇고 보니 고대 문명으로서는 대단히 중요한 곳이 아덴입니다. 헬라 철학의 본산이요 고향입니다.
자, 이제 헬라 철학을 공부한 사도 바울이 바로 이 아덴에 이릅니다. 그는 가슴이 부풀었습니다. 감회가 남다릅니다. 그 아덴에 들어서면서 그는 생각했을 것입니다. 저들이 철학을 안다는 데 얼마나 아나 보자, 내가 배우기는 비록 길리기아에서 배웠고, 예루살렘에서 배웠지만 내 수준이 어디까지 왔는지 한번 대결해 볼만하다―이같이도 생각한 것 같아요. 그러니까 전도자로서보다도 우선 은연중에, 자기도 모르게 일개 철학도의 위상을 가지고 아덴에 들어갔다는 말입니다. 평소에 늘 가보고 싶던 곳입니다. 거기에 들어섰습니다. 여기서 다시한 번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본문에 보는 대로 그는 지금 디모데와 실라를 멀리에 두고 왔거든요. 데살로니가 혹은 베뢰아에 두고 왔는데 저들을 기다려서 일행이다 합류한 다음에 복음을 전해도 될 것 같은데 본문에 보는 바와 같이 기다리다가 더 기다리지 못하고 길거리에 나가 혼자서 복음을 전하게됩니다. 혼자서―이것도 생각하면 여러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그렇게 복음을 전하는데 다른 데서는 볼 수 없었던 사건이 나타납니다.
"온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분하여"라고 합니다. 바울이 화를 내면서 복음 전하는 법이 없어요. 분통터져가면서 복음 전할 일이 없다는 말입니다. 분하다―심한 자극을 받아서 분노했다는 뜻입니다. 노여워했다는 뜻입니다. 어느 누가 때리는 것도 아니요, 핍박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 정도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아무튼 그는 아덴을 보면서 분한 마음이 있었어요. 그리고 또 하나, 바울은 변론을 벌입니다.
복음을 전파한 게 아니라 변론을 했어요. 분하다는 말은 '파록쉬네토'라고 해서 마음속에 아주 고통이 있고 분통이 터지는 상태를 말함이며, 변론이란 '디엘레게토'라고, 하나의 강의를 하는 것입니다. 복음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을 가지고 어떤 것을 증명하고자 스스로 논리를 전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자세로, 한마디로 말하면 철학적 방법으로 복음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쨌든 복음을 전파했다기보다 변론을 벌인 것이었습니다.
그랬더니 아덴에 있는 철학자들, 에비구레오와 스도이고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하게 됩니다. 쟁론―'쉬네발론'이라고 하는 말은 말싸움을 벌이는 것입니다. 돌을 던져 싸우듯 말싸움을 벌이는 것입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연결해보면 이렇습니다. 분하여, 변론하고, 쟁론했다―분하여 변론했더니 쟁론하게 되더라는 말입니다. 사건이 이렇게 되었어요.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사도 바울의 별명이'말쟁이'입니다. 말쟁이가 되어버렸어요. 말쟁이라는 말이 재미있는 말입니다. '스페르모로고스'라는 이 말의 뜻은 원문대로 해석하면 곡식을 쪼아먹는 참새라는 뜻입니다. '스페르모'가 참새이고 '로고스'가 말이거든요. 그러니까 말로 쪼아대는 참새라고 비웃게 된 것이지요. 다르게 말하면 이 말은 시장에서 물건 팔면서 "싸구려 싸구려"라고 외치는 그 소리가 됩니다. 아무튼 사도 바울이 '말쟁이'로 되어버렸어요. 이방에서 온 이 키 조그마한 양반이 말은 곧잘 하누만―이렇게 된 것입니다.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아듣지 못하겠지만 말을 잘도 하고 있구나―이런 인상을 준 것입니다. 그래서 저들은 "이 말쟁이가"하고 나옵니다. "이 말쟁이가"―위대한 사도가 아덴에 와서 이 꼴이 되어버렸어요. 이 모습을 우리가 깊이 생각해봐야 합니다.
특별히 오늘의 본문을 보면 "아레오바고로 가며"합니다. 아레스, 바고스가 합쳐진 '아레오바고'란 화성 신이라는 것은 섬기는 산언덕을 가리킵니다. 넓은 언덕이 있고 거기 신전이라는 게 있는데, 여기에 사람들이 모여서 서로 토론을 하고 가르치고 했습니다. 말하자면 공동 집회장소입니다. 여기서 바울이 저들과 변론을 벌이게 되었으며, 저자에서도 그리했습니다. 저자 곧 시장바닥입니다. marketplace입니다. 이것은 그리스 문화의 심장부가 됩니다. 도시의 한가운데로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여기서 바울이 변론을 했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파했다는 말씀은 없어요. 전도했다는 말씀이 없어요. 변론만 벌였어요. 쟁론만 했어요. 이래서 다음 시간에 보게 됩니다마는 사도 바울은 아덴 전도에 실패하게 됩니다. 이는 바울에게 큰 충격을 안겨줍니다. 바울은 그 생애 위에 큰 충격을 받게 됩니다. 다시 한번 생각해봅시다.
"분하여" 했는데 왜 분했느냐 입니다. 우상 섬기는 사람들이 많다, 온 도시에 우상이 가득했다고 합니다. 얼마나 많았느냐 하면 사람의 수보다 많았다고 합니다. 그랬을 것입니다. 사람 만나기보다 우상 만나기가 더 쉬었습니다. 이를테면 우리 이웃 일본에도 우상이 얼마나 많은지, 물경 800만 종이 있어요. 신이라는 게 800만 개나 되니 신상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골목이 전부 신상입니다. 사람보다 많으니까 이걸 어떻게 보아야 하겠습니까? 원리대로 말하면 불쌍히 여겨야지요. 이런 불쌍한 사람들 봤나, 어쩌자고 이 짓들을 하고 있나―이렇게 생각해야지요. 분하긴 왜 분해요? 안 그렇습니까? 어째서 우상을 섬기는 사람을 보고 분했느냐, 이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가 생각해야 할 중요한 포인트가 있어요. 왜 사도 바울이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불쌍히 여겨서 아, 이 어리석은 사람들을 전도해야겠다, 깨우쳐야겠다고 생각하며 목이 터져라 복음을 전했다고 되어 있지 않고 "분하여"라 되어 있느냐 입니다. 원문대로 보면 심령에 아주 분통이 터졌다, 화가 나서 변론을 벌였다 합니다.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바울의 심경을 우리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헬라 철학의 본산지거든요.
요샛말로 말하면 그는 지성인입니다. 헬라철학에 자부하고 있었어요. 나는 지성인이다, 나는 히브리 종교도 알고 있지만 헬라 철학에도 능통하다―이 같은 자부심이 있었어요. 나는야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를 알고 있는 사람이다, 헬라말을 유창하게 하고 있는 사람이다―이것을 큰 자랑으로 여겼는데 그 헬라 철학의 본산지에 와본즉슨 모조리 우상을 숭배하고 있어요. 세상에 이럴 수가 있나, 지성인들이 왜 이 모양이 되었느냐,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철학적 지성과 우상이 공존하는 것을 보고 화가 난 거예요. 그럴 수가 없다는 것이지요. 학문이 있고 철학자들을 가졌고, 이치를 논리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사고력을 가진 사람들이 어떻게 우상을 섬길 수 있느냐, 그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생각해야 됩니다. 철학과 우상이 공존하는 것을 보고, 분이 났습니다. 철학을 하는 사람들이면 우상을 섬기지 않아야지, 우주의 이치를 생각하고, 철학을 운위하는 사람들이 우매한 우상을 섬기다니 말도 안돼―이렇게 생각한 것이지요. 한마디로 철학에 대한 그의 잘못된 기대 때문입니다. 철학이 뭔지를 그가 몰랐어요. 철학에 대해서 기대를 걸었어요. 적어도 교육에 대해서는 기대를 걸었어요. 철학적 지식이 높아지면 사회가 달라질 줄 알았어요. 적어도 우상숭배 따위는 없을 것으로 착각했어요.
잘못된 철학적 기대 때문에 내심 갈등을 일으키고 있음입니다. 지성이라는 허상에 대해서 실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분함으로 폭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스스로는 철학에 뭐가 있는 줄 알았어요. 바울은 철학을 완전히 버리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와보니 철학이 아무 것도 아니예요.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계제에 이르러 철학을 버린 것이 아니라, 오히려 철학을 아는 사람들이 우상 섬기는 것을 보고 화를 내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이 점을 잊지 말아야 됩니다. 종교 문제는 완전히 별개라는 것을 잊지 마세요. 공부를 아무리 많이 해도 그렇습니다. 공부 많이 했다고 해서 우상을 섬기지 않고 종교적으로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게 아니예요, 참 이상한 일입니다. 심지어는 도덕과도 무관합니다. 이걸 알아야 합니다. 공부를 많이 하면 도덕적인 존재가 될 줄 알지만, 공부 많이 하니까 더 지능적으로 죄를 지어요. 간교만 발달해 가지고 말입니다.
철학을 알고, 지식을 쌓고 하는 것, 종교적으로 보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장례식에를 다니다보면 가끔 안 믿는 사람 장례식에도 참석할 때가 있는데, 보아하면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이 죽음 앞에서는 형편없습니다. 몸부림치면서 울고불고, 중얼중얼 한심한 소리나 하고 있어요. 그 많은 지성은 어디 가고 그 꼴입니까? 종교적 뿌리가 없는 철학이라고 하는 것은 실로 아무 것도 아닙니다. 대학인이라고 하면 지성인이 아닙니까? 그런데 대학교 앞의 점치는 집은 항상 문전성시를 이룬다고 해요. 대학생들이 가서 내고 점치고 앉았어요. 이거 못 말려요. 그뿐입니까? 국회의원 출마할 때에도 가서 물어보고 하잖아요? 이런 사람들이다 지성인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도 보면 많은 사람들이 궁합을 보는 판국입니다. 가만히 보면 우스워요. 궁합이 안 맞다면서 저희들끼리는 연애하는데도 결혼은 안 된다느니, 모든 조건이 다 좋은데 궁합이 안 맞아서 안 된다느니 합니다. 지성인이 이 꼴이라면 그놈의 지성이 무엇에 쓰는 지성입니까? 우리도 화낼만해요. 사도 바울처럼 한번 화내어봅시다. 참 멍청한 사람들이지요.
사도 바울이 화를 내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 세계에서 가장 잘산다 하고, 기술적으로나 모든 면에서 앞섰다고 하는 일본을 보세요. 일본에 가보면 웬 우상이 그렇게 많은지 골목골목이며 식당이며 호텔이며 할 것 없이 죄다 사방에 부적 붙여놓고 촛불 켜놓고, 뭘 해놓고, 집집마다 들어가 보면 으레 우상 만들어놓았고…… 한심해요. 소위 첨단을 간다고 하면서 마음들은 여전히 우상을 섬기고 있어요. 일본의 우상들은 날마다 더 많아져요. 점점 더합니다. 천황까지 모셔보겠다고 합니다. 신사 앞에서 꾸벅꾸벅 절을 하고, 가관입니다. 보세요. 지성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없는 지성이라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닌 것입니다.
아덴이 철학의 본산지입니다. 그러나 종교적으로는 아무 것도 없어요. 그래서 우상이 있어요. 우상은 어느 도시보다 많았어요. 우상과 지성이 공존하고 있었어요. 바울은 그가 기대했던 철학이 너무나도 어긋나 있음으로 해서 분해하고 저들과 변론을 벌이게 되었다는 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지성과 종교는 아무 상관이 없어요.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해도 종교 문제에 관한 한 그건 아무 상관도 없습니다. 때때로 여러분가운데도 그런 분들이 있어요. 대단한 지성인입니다. 책도 많이 보고, 공부도 많이 했다고 생각했어요. 그 아내가 남편을 지칭하면서 "제 남편은 교회에는 안나가지만 예수 믿는 사람들보다 나아요"합니다. 소위 신사도가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어림도 없는 얘기지요. 종교 문제에 관한 한, 신앙에 관한 한 완전히 별도의 문제라는 것을 깊이 깨달아야할 것입니다.
바울은 선교 방법에 있어서도 실책을 범합니다. 철학적 방법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파하지 않고, 변론을 벌였어요. 그래서 실패하였기 때문에 먼 훗날에 그는 깊이 뉘우치면서 사랑하는 디모데, 믿음의 아들 디모데와 디도에게 간곡히 부탁합니다. 여러 곳에 나옵니다만 대표적으로 디모데전서 6장 20절이나 디모데후서 2장 23절, 디도서 3장 9절을 보세요.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 "변론하지 말라. 그것은 무익한 것이다"라고. 내가 다 해봤다, 그 말이 되겠습니다. 내가 해봤는데 별거 아니더라, 그 말이 되겠습니다. 사실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래서 다시 고린도전서 2장에 보면 "내가 너희 가운데 있을 때에 심히 떨었노라"―철학을 의지했기 때문에 아덴에서 실패하고 고린도에 갔거든요.
고린도에 가서 몹시도 마음이 괴로웠어요. 실의에 빠졌어요. 그리고 다시 한번 중생을 합니다. 신앙적으로 중생을 하면서 신학적으로 중생을 합니다. 그리고 유명한 말씀을 합니다. "십자가 외에는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했다"―그래서 새로워집니다. 이것을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됩니다.
본문에 나타나는 이야기 몇 가지를 더 하고자 합니다. 18절에 보니"어떤 에비구레오와 스도이고 철학자들도"라고 말씀합니다. 이것 또한 재미있는 말입니다. 에비구레오라고 하는 것은 에비구레오 철학의 학파를 말하는 것이고, 스도이고는 스도이고 철학 유파를 말하는 것입니다.
에비구레오 곧 에피쿠로스라고 하는 철학자는 주전 341년에서부터 271년까지 있었던 사람입니다. 쾌락주의 철학을 펼친 사람입니다. 플라톤 철학을 공부하다가 불만을 품고, 독자적으로 사상을 정립해서 많은 아덴 사람들에게 꽤나 매력 있는 철학을 내놓은 것입니다. 오늘도 이런 철학을 가진 사람이 많습니다. 우리네 젊은이 가운데나 지성인 가운데 에비구레오 식의 인간들이 적지 않습니다. 어떤 사상인가 보세요. 이렇습니다. 현실주의입니다. 미래나 내세는 상관할 것 없다, 현재가 중요하다, 현재의 행복을 추구하는 게 중요하다, 죽음은 모든 것의 마지막이다, 합니다. 이 사람들은 죽음이라는 말을 하기 싫어해요. 기분 나쁘게 죽음 얘기는 하지 말라 합니다.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싫어하는데 그러나 단 한번, 이렇게는 말했다고 해요. "죽음을 걱정하지 말라. 살아있을 때에 죽음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죽을 때에 우리는 이미 죽음에서 떠나 있으니 걱정할 것 없다. 죽음을 생각하지 말라. 오직 현실이 중요하다"라고.
두 번째는 향락주의입니다. 행복의 근원은 감각적 향락에 있다고 합니다. 고통 없는 행복, 고통 없는 쾌락만 인간의 최종 목적이라고 말합니다. 최대한도로 쾌락을 즐기는 것이 인생을 바로 사는 길이라고 합니다. 이게 헬라 철학입니다. 또 유물주의입니다. 쾌락을 물질에서 찾고, 육체에서 찾으려 합니다. 그래서 유물론적 쾌락주의라고 평가를 합니다. 또 하나는 무신론입니다. 신을 믿기는 합니다. 원자론적 우주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신에 대한 신앙은 전적으로 부인하지만 신이 있기는 있다고 하자, 그래도 신은 인간에게서 멀리 있기 때문에 우리 인간세계에 대해서는 간섭이 없다, 그러니 있다고 할 필요도 없다―이렇게 주장을 합니다. 철저하게 현실적 육체적 물질적 쾌락주의입니다. 철학가가 별것이 아니예요. "노세 노세 젊어 노세, 늙어지면 못 노나니"―일견 맞는 얘기인 것 같습니다. 노인들 여기저기 구경한다면서 지팡이 짚고 어정어정 다니는 것 보니까 안 되겠던데요. 구경도 좀 젊었을 때 다녀야지 나이 많아서는 별 볼일 없겠더라고요. "노세 노세 젊어 노세 늙어지면 못노나니"―에비구레오 학파와 상통하는 얘기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사람들에게 변론을 벌입니다.
스도이고 철학이라는 것은 스토아 철학인데 자연신을 믿습니다.
'신은 자연이요, 자연은 신이다'라고 범신론을 폅니다. 사람 안에 작은 불꽃이 있고, 죽을 때에 그 불꽃이 신에게로 돌아간다고 생각합니다. 범신론적입니다. 그래서 만물이 신의 뜻이고, 인간에게는 자유가 없다는 운명론을 믿습니다. 정해진 운명을 살고, 모든 것이 신의 의지에 의해서 진행되어질 뿐이다, 그런고로 운명의 법칙과 자연의 법칙을 바로 이해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고, 인생을 바로 사는 길이다―이렇게 생각합니다. 또 순환론입니다. 세계는 여러 해를 주기로 해서 계속 어려운 일이나 혹은 재난이 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가장 특기할만한 것은 금욕주의입니다. 이 사람들은 에비구레오 학파와는 정반대입니다. 저쪽은 육체적 쾌락을 추구하는 데 반해서 이 사람들은 육체적 쾌락은 허무한 것이므로 극기와 자제로 모든 정욕을 억제하고, 감각적 쾌락을 멀리해라, 그래야 진정한 인간의 행복을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래서 당시의 많은 철학자 가운데 이 스토아 철학에 영향을 받은 사람이 많습니다. 특별히 죽음에 대해서는 불가지론입니다. 죽음의 세계는 우리가 알 수 없다, 인생을 바로 살고, 행복하게 사는 길은 금욕하는 데 있다, 라고 하는 철학입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이들을 상대로 복음을 전합니다. 한번 생각해봅시다. 죽으면 그만 이라는 사람들에게 십자가와 부활을 전합니다. 영생을 전합니다. 쉽게 먹혀들겠습니까? 운명론자들을 향하여 믿고 구원 얻으라 했습니다. 불가지론자들에게 영생과 부활을 전했습니다. 이것이 전해지지 않았어요. 그런고로 변론을 벌였습니다. 계속 변론을 벌이는 동안 저 사람들은 사도 바울을 보고 '말쟁이'라고 낙인찍었습니다.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도 본문에 보니 흥미가 있어요. "새 교리가 무엇인지 알 수 있겠느냐" 좀 더 설명해보아라 합니다. 비난하는 것인지 비아냥거리는지 알 수가 없어요. 어쨌든 저들은 사도 바울과 말싸움을 벌이고 그것을 즐기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여기서 크게 실망하게됩니다. 새 교리에 대한 관심이 있습니다. 이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 사도 바울은 어쩌면 복음을 전해야 했습니다. 회개의 복음을 전해야 했습니다. "회개하고 주 예수를 믿어라"―이렇게 말했어야 되는데 그러지 않고, 철학을 철학적 방법으로 변론 벌여 대결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리하여 결국 아덴에서는 교회를 세우지 못하는 큰 실패를 보게 됩니다.
여러분, 이 이야기는 먼 얘기가 아닙니다. 가끔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가난하고 무식하고 소외당한 사람들에게는 '아, 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야겠다'고 쉽게 생각하고 지성이 있는 잘사는 사람들에게는 '저 사람은 괜찮겠구만'하고 복음의 대상에서 제외하는 경향이 있어요. 여러분, 부자도 예수를 믿어야 되고, 박사도 예수를 믿어야 돼요. 지성인도예수를 믿어야 돼요. 저들도 영적으로는 완전히 공백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돼요. 그런고로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에게만 복음을 전할 게 아닙니다. 지성인들에게, 소위 많이 안다는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꼭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자기가 가진 지식을 자랑하려고 하면 됩니다. 바울이 여기서 실패한 것입니다. 예수의 복음을 전하기는 하면서도 자기가 철학을 가지고 한번 대결해보고자 했어요. 이것이 잘못입니다. 여러분이 지식이 있다고 해서 지식을 말하고, 아는 것이 많다고 해서 변론을 벌이려든다면 절대로 복음 전파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설사 말싸움을 해서 이겼다고 합시다. 상대는 지고 돌아가면서 '두고보자'할 것입니다. 기분 나빠 돌아갔을 것입니다. 마음 문을 더 굳게 닫아버릴는지도 모릅니다. 순수한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서에서 누누이 말씀합니다. 지혜로운 자를 부끄럽게 하신다고―어리석은 자를 들어서 지혜로운 자를 부끄럽게 하는 것이 복음이라고 말씀합니다. 복음은 십자가 권능입니다. 복음은 생명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렇게 전합니다. 아덴에서 떠나 고린도에 가서 그렇게 전하게 됩니다. 모름지기 복음만이 생명의 길이요, 복음만이 구원의 길이라는 것을 깊이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