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의한 재판관(누가복음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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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한 재판관(누가복음 18:1-8)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저희에게 비유로 하여 가라사대,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관이 있는데,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하되,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나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주께서 또 가라사대, "불의한 재판관의 말한 것을 들으라.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이 비유 말씀 역시 내용 자체의 윤리성이나 사회 부조리적 측면에서 볼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당시에 있었던 현실 사건을 한 예로 들어 비유로 말씀하시고 있다는 점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지를 못하고 왜 이렇게 불의한 재판장을 그대로 두었는가? 그러한 세상을 왜 나쁘다고 말씀하시지 않았나? 그리고 어찌하여 가난하고 억울한 사람을 돌보라는 말씀도 없는가? 하며 부정적인 반문을 해서는 안될 것은 이 본문은 어디까지나 비유라는 점입니다.
따라서 이 비유를 말씀하시는 목적이 비유의 내용인 자체 사건의 윤리성이나 사회 질서, 도덕을 논하려는 데 있는 것이 아님을 다시 한 번 인식해야 합니다. 이는 특별히 누가복음 17장 후반부를 읽어보면 그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예수님께서 마지막 때에 있을 환난에 대하여 예언적인 말씀들을 하시며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경고를 하고 계십니다. 장차 이 세상은 점점 더 극악해져 소돔과 고모라와 같이 될 것이며, 노아의 때와 같이될 것이다. 홍수가 범람한 때까지 계속 범죄했던 것처럼, 세상 끝이 다가온 줄도 모르고 세상이 끝나는 그 시간까지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불의한 가운데 있으면서 죄를 지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너희들은 이런 환난의 때에 노아의 홍수를 생각하고 롯의 처를 생각하며, 앞만 바라보고 바른 신앙생활을 해야할 것이라는 경고의 말씀입니다. 이는 또한 예수님의 재림이 입박해지면 세상에는 악의 세력이 더욱 흥왕해져서 신앙의 사람들에게는 대 핍박이 있을 것이며, 그로 인해 바르게 살려는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큰 고통을 치르게 되리라는 예언적 말씀입니다. 이러한 말씀을 하신 다음 예수님께서는 오늘 본문의 이 비유를 이야기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때에 하여야할 일이 무엇인가? 기도해야 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진정 환난 때에는 기도할 뿐, 이제는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전적으로 기도해야 되겠는데, 그 기도를 끝까지 인내로 하라는 말씀입니다.
이에 오늘 본문은 항상 기도하되 낙심하지 말아야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의 주제는 기도요, 기도를 하되 쉬지 말고 계속하라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낙심치 말고, 더욱이 환난이 심할 때에, 세상 끝이 가까워질수록 더욱 열심히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데살로니가 전서 5 : 17에는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모든 생활, 모든 관계는 다 끊어져도 기도 생활만은 끊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저는 요즈음 우리 교회 새벽기도회에 천 명이 넘는 교인들이 참여하면서, 그것도 매일처럼 증가하는 것을 보고 감사를 드리면서도 슬그머니 걱정이 될 때가 없지 않아 있습니다. 물론 기도를 강요하거나 천 명, 이천 명하며 수치에 기준을 두고 기도회를 갖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문제는 이 분들의 기도에 대한 열정이 언제까지 갈 것인가? 끝까지 주의 전에서 기도할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며칠 나오다가 그만둘 것인가? 하는 노파심이 생긴다는 이야기입니다. 제가 드리고 싶은 이야기는 다른 일은 다 중단하여도 기도를 중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왜냐하면 맨 마지막, 최후에까지 있어야할 우리의 자세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우리가 세상 떠나는 그 최후의 순간에 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 순간까지 아직도 무엇을 달라고 하겠습니까? 어떤 사람들처럼 땅 문서를 베고 돈을 허리춤에 끼운 채 죽겠습니까? 오직 그 시간에 할 것은 기도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생명 마지막까지 지켜야할 우리의 생활 자세는 기도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단단히 훈련이 되어져서 어느 때 어느 곳에서 무슨 일을 당하더라도 먼저 "주여" 하고 기도할 수 있는 아예 체질적인 기도가 되게 해야 합니다. 그러지를 못하고 잘 나가다가 어려운 일을 만나게되어 도로아미타불이라도 하게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기에 이 기도를 끝까지 할 수 있는 체질이 되어야한다는 것입니다.
기도는 쉴 수가 없고, 끊을 수가 없습니다. 다른 일은 다 중단할 수 있어도 기도를 끊을 수 있는 핑계는 없습니다. 여기에는 다른 이유가 있을 수 없습니다. 구제야 하다가 돈 없으면 못하고, 몸으로 하는 봉사도 병들고 힘없으면 못합니다. 하지만 기도를 쉴 수 있는 이유는 없지 않습니까? 사무엘상 12 : 23에 보면 사무엘이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치 아니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기도하기를 쉬는 것이 죄가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기도를 하다가 쉬게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이제 그것이 왜, 얼마나 죄가 되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그 첫째는 자기는 기도의 응답을 받을 만한 자격이 없다고 생각될 때 기도를 쉬게됩니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나는 복을 받을 만한 사람이 못된다는 것입니다. 죄가 많고 허물도 많으며, 성격도 나쁘고, 회개하고 또 죄짓고, 계속 이렇게 악순환인데 어떻게 구원을 받겠는가? 구원받지 못할 바에야 그까짓 기도가 따로 필요 할게 없지 않는가? 하는 생각입니다. 자기의 부족함을 아주 극단적으로 꾸짖게될 때에 자기의 무자격함을 생각하면서 그만 기도를 쉬게됩니다. 이는 나의 부족함을 알고 하나님 은혜의 그 크심을 모르는 행위입니다. 내 자신이 얼마든지 후회하고 뉘우치며 자책할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고 십자가의 사랑을 부정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부정할 만큼 자기를 꾸짖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새로운 출발을 위한 뉘우침이 아니라 자학 행위입니다. 그럴 경우에 좋아하는 것은 마귀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주신 말씀은 깊이 생각할 것입니다. 그리고 기억할 것은 기도를 쉬게 되는 이유가 하나님께서 나의 기도를 멀리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너무 무능하고 너무 부족하여 구제불능한 것처럼 느껴 자기가 자기에게 실망하는 데에 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이유로는 지나친 역경과 환난으로 인해 하나님을 향한 신앙이 희미해졌다는 것입니다. 내가 당하는 환난이 너무도 심하고, 내가 겪는 사건이 하도 어려워 이제는 사방이 꽉 막힌 것 같단 말입니다. 그래서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마저 희미해져 이 정도 되면 하나님도 도리가 없지 않는가? 그러니 기도하여도 별 수가 없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부정입니다. 여기 히브리사람들이 하는 말이 있습니다. "앞이 막히고, 뒤도 막히고, 옆도 막혔다. 그러면 위를 보라"는 것입니다. 앞, 뒤, 옆, 뺑둘러 꽉 막혔으면 위를 보라! 위는 언제나 뚫려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제는 꽉 막혔으니 하나님도 별 도리가 없다는 어처구니없는 생각을 합니다. 이는 결국 내가 할 수 있으면 하나님께서도 할 수 있고, 내가 못하면 하나님께서도 못하신다는 생각입니다. 그 때문에 낙심하게 되고 그래서 기도하지 않게 됩니다. 그러니까 어느 정도까지는 기도하다가도 정 급해지면 오히려 기도를 포기하고 안 한단 말입니다. 이젠 도리가 없다! 다 끝났다! 하는 생각 때문입니다. 이것이 나아가 심하게되면 소위 말하는 사신론(死神論)에 이르게 됩니다. 진정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면 이럴 수가 있겠는가? 하나님의 살아 계심이 사실이라면 히틀러가 6백만 이스라엘 사람들을 참혹하게 죽일 당시 하나님은 무엇을 하셨단 말인가?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면 왜 죄 없는 하나님의 종들이 계속하여 순교의 피를 흘려야 하는가? 이것이 사실이요 현실이라면 과연 하나님은 살아 계시는가, 살아 계시지 않는가? 하는 등의 의혹을 갖게 됩니다. 이와 같이 환난과 고통이 너무 심하여 하나님의 능력마저 불신하는 경우, 여기에서 낙심하며 기도를 끊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세 번째는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셨나 하는 생각입니다. 이는 왜냐하면 너무 오랫동안 기도의 응답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지금은 스스로 지쳐 아무래도 하나님께서는 나를 버리셨다는 생각에 그만 기도할 힘이 없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마지막 네 번째로 가장 무서운 이유가 되는 것은 교만입니다. 이것은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간에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을 것 같은 교만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고라도 무엇인가 할 수 있을 것 같단 말입니다. 허구한날 기도해봤자 무슨 특별한 수라도 있었던가? 예수 안 믿고 기도 안 하는 저 사람이 더 잘 살지 않는가 하는 생각, 이것이 교만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누누이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지 말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없이도 될 것 같은 이 무서운 교만이 기도하는 것을 쉬게 하는 시험에 들게 한다는 사실을 기억할 것입니다.
이제 본문으로 돌아가 보면 낙심하지 말아야할 이유를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본문 중의 이 불의한 재판관을 하나님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비록 비유라고는 하지만 하나님에게는 너무나 희생이 큰 비유가 아닐 수 없습니다. 아무려면 하나님을 어찌 불의한 재판관에 비유하여 설명한단 말입니까? 그러나 이는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을 불의한 재판관에 비유할 만큼 우리가 하나님 앞에 악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얼마나 답답하셨으면 이렇게까지 설명을 하셨겠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재판관과 과부의 이야기를 그 내용으로 하여 비교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 당시 사회의 일면으로 재판관 하면 가장 권세 있는 자요, 과부하면 이는 아주 약한 사람입니다. 옛날 당시의 사회상이란 힘을 위주로 하는 남성 위주의 생활을 영위했습니다. 목축이나 농사일 모두가 남자들의 힘으로 가능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여자 편은 언제나 나약하고 보호받는 입장인 것입니다. 게다가 남편이라도 잃게 되면 남자만이 밖에서 일하는 사회라 생계까지 어려워지게 됩니다. 그러니까 과부는 외로운 사람이요, 무의무탁하여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모든 면에서 의지 없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타난 이 재판관은 대단히 나쁜 사람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는 이를 단적으로 표현하여 말하기를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관"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더 설명할 것도 없는 끝난 인격의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는 사람! 대개는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 사람을 무시하기 마련입니다. 자기 위에 창조주 하나님, 심판의 하나님이 계시는 줄 아는 사람이 어떻게 사람을 무시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기에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결코 다른 사람을 무시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 재판관은 하나님도, 사람도 다 무시하는 몹쓸 인격의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재판관 앞에서 한 과부가 자기의 억울한 사정을 하소연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그 억울한 사정의 내용은 기록되지 않았지만 강제로 재산을 빼앗겼든지 아니면 빚으로 아들을 노예로 붙들어갔든지, 좌우간에 대단히 억울한 사정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하여 이 재판관에게 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달라며 호소를 하고있는 것입니다. 이 과부의 호소인 즉 재판관에게 구제해달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당연히 하야여할 일을 해달라는 것입니다. 재판관의 하는 일이 무엇이며, 왜 있는 것입니까? 이는 선한 사람을 보호하고 악을 제거하며 하나님의 공의를 세우기 위하여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따라서 이 과부로 말하자면 당연히 도움을 받아야할 권리가 있으며, 반면에 이 재판장은 마땅히 이 과부를 도와야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과부는 재판관된 당신이 당연히 하여야할 일을 해달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재판관은 들어주지를 않습니다. 아마도 이 사람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대신에 권력은 두려워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공의와 진리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지만 돈에 대해서는 흥미가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니까 권력의 배경이 있든지 아니면 뇌물이라도 좀 많이 가지고 왔더라면 들어주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어쨌든 하나님도 무섭지 않고 공의도 상관없는 가운데 자기 기준이 따로 있기 때문에 들어주지 않는 것입니다.
잘못된 자기 중심적인 생각에서 자기가 하여야할 마땅한 의무나 하나님의 공의, 진리, 심판 등에는 아랑곳하지 않는 참으로 불의한 재판관이었다는 것입니다.
그 앞에 하소연하는 이 과부는 그야말로 무기력합니다. 그저 자주 와서 도와달라는 하소연만 할뿐이지 저를 설득시킬 만한 아무런 능력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에 본문에 의하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주소서" 하였다는 것입니다. 억울한 한 여인의 원한을 풀어준다면 이는 곧 하나님의 공의를 세우는 일이 되기도 하고 재판관으로서는 당연히 들어주어야 할 의무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들어주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앞서 밝힌 대로 이 재판관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사람을 무시하기 때문에 그 중에서도 이 과부쯤은 아주 무시해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주 와서 하소연을 하였지만 관심 밖의 일로 여겨 들어줄 생각을 안하고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제 이 재판관에게도 이 과부의 원한을 풀어주어야겠다는 결단의 시간이 오게되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그가 하는 말이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나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주리라"는 것입니다. 들어주지 않을 것이었지만 계속 와서 너무 번거롭게 하니 들어주지 않았다가는 귀찮고 피곤해서 못 견디겠다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들어주는 그 동기가 대단히 불순합니다. 공의도 아니고 진리도 아니며 구제도, 선행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당연한 의무로 생각한 것도 아닙니다. 다만 귀찮고 번거로워서 들어주었다는 동기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조심할 것은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도 우리가 자꾸만 기도하면 그저 귀찮아서 들어주시는 것은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입니다. 결단코 그렇게 생각할 것이 아닙니다. 더욱이 하나님을 귀찮게 하여 응답 받으려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여기에서 주는 교훈은 너무도 기도를 안 하는 것에 대한 경종으로, 이런 사람의 기도를 이런 동기에서라도 들어주는데 왜 안 들어주겠느냐, 그러므로 낙심하지 말고 항상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동기는 불순하지만 이 불의한 사람도 번거로워서 도와주었다는데, 그렇다면 그 다음의 이 "하물며" 하는 말씀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하물며" 하는 여기에 오늘 말씀의 초점이 있습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지 아니하시겠느냐?"는 말씀입니다. 또한 마태복음은 7 : 11에서도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이 "하물며" 라는 말씀, 안 주실 이치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낙심하며 기도를 중단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나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을 것 같고 못 받을 것같아서인데, 그러나 그럴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제 그러면서도 더 깊은 설명을 여기에 더하십니다.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속히 그 원한을 풀어주시리라." 이 악한 재판관은 대단히 오랫동안 괴롭히며 들어주지를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오래 참으시지 않으시겠답니다. 그렇게 번거로울 때까지 이 못된 재판관처럼 오랫동안 괴롭히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기도하라 속히 그 원한을 풀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약속입니다. 여기에는 주시고자 하는 뜻이 있고, 간절한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못 받는 것은 우리의 책임이요, 우리가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구하기 전에. 다 아십니다. 그러나 "구하라 주실 것이요, 찾으라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열릴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구하기 전에 다 아시는 하나님, 그러나 구한 다음에야 주시겠답니다.
그러면 이 구한다는 것, 이 기도한다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왜 꼭 구해야 주시겠다는 것입니까? 그것은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바로 겸손이기 때문입니다. 구하는 마음! 그 마음이 있어야 받는 바가 소중해집니다.
나아가서는 받은 바를 소중히 여길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구함으로 얻어내어야 내 것이 되는 것입니다. 수고하지 않고 얻는 것은 소중하지가 않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하나님께서 내 소유권을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즉 네가 구해서 네가 얻고, 그래서 네 것 삼으라는 그것뿐입니다. 그러면서 그 가치를 아는 지혜와 그것을 받아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돈을 구한다면 돈이 무엇이라는 것을 알고, 돈 쓸 줄도 아는 거기에 도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구한다는 것을 좀 더 나아가 생각해보면 이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많은 생각을 합니다만, 하나님 앞에 간구하는 이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자녀들이 무엇을 달라고 할 때에 척척 줄 수 있는 부모의 심정과도 같은 것입니다. 줄 것이 없고 주어서는 안되겠기에 못줄뿐이지 세상에 믿고 달라는 말처럼 좋은 것은 없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아내는 남편 몰래, 남편은 아내 몰래 주지 않아야 될 것까지 애들에게 주었다가 부부싸움까지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는 주는 재미가 좋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생각할 것은 사람도 하나님을 닮아 그런 것이라면 하나님께서는 먼저, 더 좋은 것으로, 더 많이 주실 마음이 있으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주시는 재미를 보시려고 한단 말입니다. 그런데 달라고 하지를 않으니 이걸 어떻게 하면 좋아요. 그만 못 주고 마는 것입니다.
저는 어느 때 한번 이런 경우를 직접 보았습니다. 아이들이 여덟인 어느 가정에 그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새 어머니인 계모가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이 애들이 새어머니를 어머니라고 부르지를 않고, 무엇이 필요하면 쿡 찌르며 그냥 손을 내미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어머니가 기분이 나빠서는 내의며 양말 등 필요한 것들을 한 곳에 넣어두고는 "어머니"하고 한 마디 하여야 내어주지 그러기 전에는 절대로 주지 않겠다고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을 본 일가 친척들은 그렇게도 어머니 소리가 듣고 싶은가 라며 쉽게 말을 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기막힌 사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구하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구한다는 것은 단순히 요청 이상의 관계성 때문입니다. 우리가 자녀를 키우면서도 어렸을 때는 "엄마, 엄마" 하며 마구 조르지만 그래도 그 때는 엄마 없이는 못살 것으로 압니다. 그러다가 조금 커지면 "어머니"라 부르고, 성인이 되어 출가하여 가정이라도 이루게 되면 이제는 "어머님" 하며 점잖게 부릅니다. 그저 엄마 때가 좋은 것이지 문제는 어머님 소리가 나오게되면 1년에 몇 번 못 듣는다는 것입니다. 결국 자꾸만 더 멀어지고 만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이 잦으면 잦을수록 하나님과 나와는 깊은 관계, 없어서는 안될 절대적인 관계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하루에 한 번도 안 하겠다면, 이는 온당한 하나님의 자녀라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분명히 기억할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와 간구 하는 이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며, 나아가서는 받을 그릇이 준비됨을 아뢰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기도는 계속하여야 합니다.
오늘 이 불의한 재판관을 예로 들어 말씀하시는 그 결론이 무엇입니까? 이렇게 불의한 재판관도 들어주었거든 하물며 주시기를 즐겨하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왜 주시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이제 그러면 우리가 기도할 때에 어떻게, 어떤 자세로 하여야되는 것이겠습니까? 먼저는 꼭 주실 줄로 믿을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받은 줄로 믿을 것이며, 그리고 기도한 다음에 되어지는 일은 그대로가 응답임을 알아야합니다. 또한 마지막으로 기억할 것은 기도는 반드시 이루어지기 때문에 응답 받을 인내를 가지고 살아야하는 것입니다. 여기 이 순간은 응답에서 제외된 것이 아니라 지금 응답의 길로 가고있는 것입니다. 내가 기도한 대로의 그 길을 가고있는 확실한 과정임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내로써 기도하며 쉬지 않는 가운데 이미 받은 줄로 믿고 미리 감사하며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신앙생활이 되도록 하여야될 것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의 맨 마지막, 예수님의 결론적인 말씀을 보면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믿음"이란 말은 헬라어로 '피스틴' 이라고 하는데 이는 믿음이라고도 번역할 수 있고, 믿는 자라고도 번역할 수 있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믿는 자를 보겠느냐로 하여 지금까지의 말씀과 연결해보면 무슨 말씀이 되는 것이겠습니까? 직결하면 믿고 기도하는 사람을 보겠느냐는 말씀이 됩니다. 다시 말하면 끝까지 기도하는 믿음을 볼 수 있겠느냐는 참으로 무서운 경고의 말씀입니다.
환난이 심해지면 기도마저 안 하는 사람이 늘어나게 되고 끝까지 낙심하지 않고 기도하는 사람을 만나보기가 힘들 것이라는 경고입니다. 그러니 조심할 것이며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내가 다시 올 세상 끝날, 환난이 극심할 그 때에 정말 깨끗한 믿음을 가지고 끝까지 기도할 사람을 보겠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개인적으로 보아도 그렇습니다. 어떤 때에 병에 걸리면 기도합니다. 그리고 조금 나으면 감사합니다. 또 걸리면 다시 기도합니다.
이제는 기도하고 기도해도 낫지를 않습니다. 그러면 마지막엔 기도할 마음도 없어지고 맙니다. 그리고 죽어갑니다. 원망합니다. 그러기에 다시 말씀드립니다. 끝까지 기도할 믿음의 사람이 있겠느냐? 우리는 내 기도가 응답되지 않은 채 그대로 세상을 떠난다 하더라도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며 끝까지 기도할 수 있어야합니다. 그리고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합니다"하는 그 기도까지 하여야되는 것입니다. 쉽게들 "주실 줄로 믿습니다", 다 죽어가는 사람보고도 "살아날 줄로 믿습니다" 하는 소리는 잘하면서도 마지막 기도를 잊어버립니다. "영혼을 부탁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고이 가게 해 주십시오" 하는 그 기도는 왜 못하는 것입니까?
진정, 우리의 생명이 끊어지며 마지막 숨을 몰아쉬는 그 순간까지, 이 세상 마지막의 환난과 어떠한 죄악 중에서도 기도만은 절대로 중단하지 않아야 하고 낙망치 말아야 합니다. 이는 예수님의 부탁이요, 약속입니다. 구약성경 다니엘서에 보면 왕의 신상에 절하지 않은 죄로 극렬히 타는 풀무에 들어가게 된 다니엘의 세 친구들은 말하기를, 우리가 섬기는 우리의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주실 줄을 믿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구원해주시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상에게 절하지는 않겠다는 것입니다(단 3:17~18). 그렇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고 갈 것입니다. 이것이 쉬지 않는 기도입니다. 어떤 환경에서도 끊어지지 않는, 이러한 기도를 드릴 수 있어야합니다. 단순히 내 소원대로 되면 좋고, 안되면 그만이고 하는 식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어떤 환난이나 수난으로 내 생애가 일시에 끝난다 하더라도, 내 기도는 이것이 내게 주신 가장 큰 축복으로 믿으며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끝까지 주를 찬양하는 기도를 하게될 때에 이 기도가 진정으로 쉬지 않는 기도요, 낙망치 않는 기도가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