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전파의 책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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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전파의 책임
오늘의 본문은 복음 전파하는 일에 대한 책임이 얼마나 큰가를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이미 우리가 지난 시간에 생각한 바와 같이,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것은 한마디로 말하여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자입니다. 그리고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자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를 나의 주로, 나의 하나님으로 모시고 그 예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자-바로 이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을 하나의 성자로, 어떤 훌륭한 분으로, 스승으로 선생으로 생각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아주 철저하게 예수를 하나님으로 믿는 것입니다. 거기에 큰 차이가 있는 것이에요. 다른 종교와 비교하고 싶지 않습니다 마는, 굳이 이 시간에 말씀드리자면 불교에서 석가모니를 생각하는 것 같은, 혹은 유교에서 공자를 생각하는 것 같은 관계가 아닌 것입니다. 그들은 석가모니를 신으로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어디까지나 먼저 깨달은 자일뿐입니다. 결코 그는 신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기독교의 교리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곧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를 주로 고백하고, 그의 이름을 부릅니다. 바로 이런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런고로 여기에는 신앙고백적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신앙을 고백하려면, 예수를 하나님으로 고백하고, 예수를 그리스도로, 내 주로 personal savior, 나의 구주로 고백하게 되기 위해서는 여기에 몇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첫 번째로, 자기가 지금까지 부르던 신을 버려야 합니다. 혹은 자기가 지금까지 숭상해오던 이데올로기를 버려야 합니다. 혹은 자기가 지금까지 가장 귀하다고 생각해왔던 철학도, 세계관도 버려야 합니다. 이렇듯 버려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이것을 버리기가 참 어려운 것이에요. 만일 이것을 못 버리고 예수를 믿는다면 그것은 예수 믿는 게 아닙니다. 그저 교회에 다니는 것일 뿐이지요. 예수 믿는 일을 향해 가고 있을 뿐이지요. 이것을 버리기까지는 진정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가끔 우리 교회에서 결혼식을 할 때에 보면 많은 손님들이 찾아와요. 대개 결혼식에 오는 손님 절반은 교인이고, 절반은 교인이 아닙니다. 하지만 교인이 아니더라도 기왕에 여기까지 왔으니까 축하하러 왔으니까 예식장에 들어와야 하지 않아요? 그런데 안 들어와요. 일껏 와 가지고는 신랑 신부측과 부모님들하고 인사만 하고 그냥 가려고 해요.
바빠서 가는가보다 할 수도 있지만 실은 그런 게 아니예요. 문간에 서 있으면서도 안 들어와요. 왜 안 들어오는지 그 이유를 아십니까? 여기에 한번 들어왔다가 집에 가면 집에 있는 귀신이 가만히 있지 않거든요.
너, 어디에 갔다왔냐 하고요. 이렇게 되면 참 큰일이에요. 종교적으로 혼란이 생기고, 귀신의 세계에서 엄청난 일이 생기는 거예요. 싸움을 붙이는 거예요. 그러니까 결혼식에 왔더라도 절대 교회당 안에는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서도 앉으려고 하지 않아요. 만약 한번 들어와서 앉았다가 집에 갔는데 아이들이 감기라도 들렸다 하게 되면 반드시 이런 말이 나옵니다. '어디 못갈 데 갔다왔구만.' 보세요. 이것을 버리기가 참 어려운 거예요. 지금가지 섬겨오던 우상, 가정의 신… 많지요.
이 복잡한 것들을 다 버려야 하는데 못 버리는 거예요. 버리기가 어려워요. 또 어떻게 생각하면 자기가 유치하다는 것도 알아요.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것도 알고, 비과학적이라는 것도 알아요. 알지만 웬지 버리는 데는 꺼림칙하거든요. 아주 힘들어요. 그런고로 이 옛세계관, 혹은 지금까지 섬겨오던 자기 자신이 신을 버려야 해요. 그런데 이것을 우리가 임의로 할 수 있습니까? 그야말로 하나님께서 특별한 은혜를 주셔야 비로소 버릴 수 있지요. 함부로 버리지 못해요. 참 어려운 일인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두 번째로, 자기를 부정해야 됩니다. 그래서 마음 밭을 비워야 됩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로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길가와 같은 마음도 있고, 돌밭과 같은 마음도 있고, 가시덤불과 같은 마음도 있다. 여기에는 싹이 날 수가 없다'-이런 사람은 예수 믿을 수가 없어요. 결국은 옥토와 같이 아주 부드럽고 깨끗한, 잡초가 없는 그런 깨끗한 마음 밭이 되어야 이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고, 또 그 씨앗이 내 심령에 들어와서 결실을 하게 된다는 말씀이지요. 마음 밭이 깨끗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느 고명한 수도사가 있었는데, 어떤 사람이 자기의 숱한 고민들을 가지고 그를 찾아갔습니다. 그래 무엇 무엇은 이렇고 저렇고, 이것은 이래야 될 것이고 저것은 저래야 될 것입니다, 하고 줄줄이 늘어놓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대답할 시간을 주지 않고 그저 자기 말만 하고 있는 거예요. 수도사는 조용히 자기가 마시던 찻잔에다가 물을 계속 부었습니다. 넘쳤는데도 또 붓고 또 붓고… 보다못한 이 사람이 수도사에게 말했습니다. "그만 부으시오. 물이 다 넘쳤지 않소?" 그러니까 수도사는 껄껄 웃으면서 대답했습니다. "당신의 마음이 이같이 철철 넘치니 내 말이 들어갈 데가 없습니다. 당신 말만 하자고 여기에 온 것입니까?"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그래도 들을 수 있는 마음의 준비가 있어야지요. 들을 수 있는 귀가 있어야지요. 받아들이는 마음이 없는데 자기 말만 열심히 한다면 어떻게 되겠어요? 저는 기도하는 것도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혼자서 기도하는 시간이 있습니까? 어떤 때, 혹은 조용한 시간에 혼자서 기도한다면 적어도 이렇게 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30분 기도했으면 30분 성경을 읽으세요. 또 조금 더 높은 수준이면 30분을 명상하세요. 그렇게 30분 기도하고, 30분 성경 읽고, 30분 조용히 명상하고, 또 30분 기도하고, 30분 성경 읽고, 30분 명상하고… 그렇게 하는 것이 잘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분은 이렇습니다. 성경도 안 읽고, 명상할 시간도 없어요. 그저 자꾸 뭘 달라고만 기도해요. '이것 주세요, 저것 주세요. 주실 줄로 믿습니다. 아멘.' 그리고 휑하니 가버려요. 보세요.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시간이 있어야 말씀을 하시지요. 그런데 하나님한테 기회를 드리지 않아요. 말씀하실 기회를 안 드리는 거예요. 내 얘기만 다하고 갑니다. 이렇게 되면 어떻게 응답이 있겠어요? 그렇지 않아요? 말씀을 듣고, 응답을 받을 수 있는 그릇이 있어야 해요.
우리가 지금 삼일기도회를 합니다. 그런데 기도회라고 해놓고는 왜 기도는 조금 하고 성경공부를 하느냐-그게 아니예요. 우리는 이 성경강해를 들으면서 이 속에서 기도하고, 이 말씀을 들으면서 여기서 기도응답을 받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자, 이렇듯 자기 마음, 자기를 부정하고, 자기 마음을 깨끗이 비워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또하나 문제가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 마음대로 못하거든요. 비워야 될 줄을 알면서도 못해요. 지금 교회에 나와 앉은 이 자리에서도 자꾸 다른 생각이 나요. 어떤 분은 가만히 앉아 있다가도 갑자기 벌떡 일어서 나가요. 왜 나가냐고 물어보니까 자기가 문을 잠그고 왔는지 안 잠그고 왔는지 몰라서 확인하러 간다고 합니다. 잠겄던 안잠겄던 그까짓 것, 예배드리고 볼일이지, 조금 더 일찍 가면 뭘하고 더 늦게 가면 뭘해요? 그런데 그걸 가지고 집에까지 가는 거예요. 가보니까 잠겼더래요. 그런데 이런 생각이 자꾸 나는 거예요. 쓸데없는 생각이지요. 이런 것들이 다 자기 마음대로 못해서 그래요. 그러니까 사실 알고 보면 마음을 비우는 것도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 아니겠나 싶습니다. 내 마음대로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세 번째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이라는 것이 참 소중하지만 사랑이라는 것을 믿지 않으면 사람은 일방적인 짝사랑이 되어버립니다. 받아들이는 입장에서는 아무 의미도 없어지고 맙니다. 사랑은 꼭 믿어야만 됩니다. 지식도 믿어야 되고, 말씀도 믿어야 됩니다. 믿음이라는 것이 참 중요해요. 제가 북녘 땅에 갔을 때에 그쪽 분들하고 이야기를 나누다가 '남쪽은 이렇고 저렇고…'라고 얘기하니까 이런 말을 합디다. "듣기는 들었는데 그게 사실이군요." 또 제가 보고 온 것을 남한에 와서 '북한이 이렇고 저렇습니다…'하고 얘기하니까 이쪽 분들도 똑같은 말을 합니다. "신문에 나는 것 보기는 보면서도 설마 그럴까 했는데 목사님 말씀을 듣고 보니까 그게 사실이군요." 결국은 안 믿었다는 얘기예요. 듣기는 들었어요. 그런데 믿지는 않아요.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남한이 잘산다고 북한사람들이 듣기는 들었어요.
그런데 믿지를 않아요. 지식이 성립되지를 않아요. 사실은 믿을 수도 없지요. 봤어야 알지요. 이런 세계가 있다는 것을 못 봤으니까 듣기는 들어도 믿어지지 않는 게 당연하지요.
다시 생각해보세요. 믿지 아니하면 지식이 성립하지 않아요. 요새도 보니까, 간첩이 내려왔다 해서 '지금 어느 때인데 또 간첩이 내려오는가 하고 걱정들을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이를 두고 '조작이다'해요. 안 믿겠다는 것이지요. 이를 어쩌겠습니까? 안 믿는대야 어떻게 하겠습니까? 정치적으로 이용하려고 조작한다는 것입니다. 참 문제예요. 모름지기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사실은 믿음이 있어야 회개도 할 수 있어요. 어떤 믿음이어야 합니까? 하나님이 계실 줄로 믿어야지요. 하나님의 능력을 믿어야지요. 하나님의 사랑을 믿어야지요. 내가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용서해주신다는 것도 믿어야지요. 탕자를 보세요. 그도 막연했지마는 아버지가 계시고, 아버지 집이 있고, 아버지께 돌아가면 영접해줄 것이라고 하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돌아온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이것은 대단한 것이에요. 믿음이 없으면 회개할 수도 없고, 돌아올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이 믿음이야말로 참으로 소중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닐 수 없어요.
회개---그것은 내 마음대로 못해요.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셔야 해요. 어떤 사람은 스스로 뉘우치기도 하고, 늘상 고쳐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냥 그냥 끌려가요. 회개해야지, 회개해야지, 하면서 세월 다 보내다가 그만 차사고로 죽었어요. 결국 회개를 못하고 말았어요. 그래서 저는 병원에서 돌아가시는 분들을 보면 가끔 이런 생각이 듭니다. 본인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이게 보통 복이에요? 요새같이 차사고도 많고, 돌연한 사고도 많은 때에 그래도 가만히 앉아서 기도도 하고, 회개도 하고, 목사님도 부르고…… 이쯤되면 상팔자지, 이게 보통 팔자입니까? 이게 보통 은혜입니까? 좌우간 그래도 병원에서 기도하면서 죽어갈 수 있다면 특혜입니다. 특별한 은혜예요.
변화가 많은 이런 세상에, 언제 어떻게 끝날지 알 게 뭐예요?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 자동차를 타고 안전벨트를 맬 때에 무슨 생각을 합니까? 무슨 기도를 합니까? '주여, 내 영혼 받으시옵소서'-이런 기도를 해야 합니다. 가다가 꽝하면 기도할 시간이 없지 않아요? 그러니까 미리 기도하고 떠나야지요. 차사고는 언제고 있는 일 아닙니까? 사고가 안 난다는 법이 어디에 있어요? 내 차는 사고 나지 말라고 써 붙였어요? 사고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해요. 그런 가운데 우리가 살아가는 것입니다.
무릇 회개는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셔야 합니다. 하물며 넉넉한 기회를 주셨다면 이것이야말로 큰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고로 하나님께서 회개의 기회를 주셔야 됩니다. 회개의 힘을 주셔야 됩니다. 회개할 수 있는 힘을 하나님께서 주셔야 됩니다. 이것 또한 중요합니다. 우리가 '해야겠다'하면서도 못하지 않습니까? 자, 이런 일이 있지요? 내가 누구한테 뭔가 조금 잘못한 게 있어요. 그래 그 사람을 찾아가 "미안합니다" 한마디 해야겠거든요. 꼭 하기는 해야겠어요. 언젠가라도 하기는 해야겠어요. 그런데 아직까지 못했어요. 이 한마디만 할 수 있다면 참 좋겠는데 못했어요. 힘이 없는 거예요. 이 한마디만 하면 참으로 좋을 텐데, 나도 좋고 그도 좋고, 사이도 좋고… 그런데 이 한마디를 못하는 거예요. 이것이 그렇듯 어려운 거예요. 보아하니, 요즘도 그저 '정말 내가 잘못했습니다'라는 말 한마디만 솔직하게 해줬으면 참 좋겠다 싶은 사람들이 있어요. 그런데 그것을 못하는 거예요. 왜 이렇게 힘든 것입니까? 회개는 하나님께서 힘을 주시지 아니하면 못하는 것입니다. 또한 회개에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용기는 큰 은혜입니다. 무릇 회개의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회개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도 회개해야 될 줄을 알면서도 미루고, 또 미루다가 결국은 못하고 마는 경우가 많아요. 그런고로 이렇게 생각할 때에 모든 것이 다 은혜가 아니겠어요?
다시 한번 돌이켜 생각해보세요. 내가 나를 이기는 것, 내가 가졌던 옛생활을 버리는 것, 또한 귀한 믿음을 가지는 것-어떻게 이것이 내 것이라는 말입니까? 하나님의 은혜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또 믿어야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어요. 또 불러야 구원을 받을 수 있어요.
그런데 믿음은 내 것이 아닙니다. 믿음 얻는 길-나름대로 여러 가지로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마는 이것은 역시 하나님의 특별한 경륜이요 은혜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2장 8절에 보면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씀합니다. 특별히 귀한 본문이 하나 더 있습니다.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님이라(살후 3:2)"-엄청난 얘기지요.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님이라-믿고 싶어도 못 믿어요. 하나님께서 믿게 하셔야 믿어요. 하나님께서 믿음을 주셔야 믿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믿으려고 무척 애를 씁니다. 그런데 도저히 믿음이 안 생긴답니다. 교회도 나와봤어요. 그래도 믿음이 안 생긴다고 해요.
이를 어떻게 하면 좋아요? 그래서 그런 분하고 만나보면 나는 이렇게 믿어져서 참 좋구나 싶어요. 저 사람은 간들간들해요. 믿는 것도 같고, 안 믿는 것도 같고, 그렇게 수십 년을 살았어요. 왜 이 모양입니까? 그것은 은혜 안에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런고로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닙니다.
자, 이렇게 말씀드리고보니까 일반적인 믿음도 그런 것 같습니다.
가만히 보면 참 인간적으로 믿음이 있는 사람이 있어요. 모든 일을 다 믿고, 진실하게 받아들입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은 모든 일에서 의심을 해요. 먼저 의심부터 하고 보는 거예요. 이것, 참 무서운 거예요. 죄송한 말씀이지만 속을 때에 속더라도 믿는 동안은 믿어두는 게 좋아요. 왜 그렇게 꼭 의심을 해야 됩니까? 제가 결혼식을 주례할 때마다 꼭 신랑 신부에게 이런 부탁을 합니다. '의심하지 말라. 남편을 의심하기로 들면 끝도 없다. 아내를 의심하기로 들면 하룻밤도 무사히 자지 못한다.' 그렇지 않아요? 옆에서 자기는 자는데 누구 꿈을 꾸고 있나, 생각하면 기가 막히는 것이지요. 어떻게 그 마음속을 내가 압니까? 믿음이라는 것은 믿어야 되는 거예요. 제가 결혼식을 주례하면서 늘 그런 얘기를 하니까 여러분이 많이 웃습니다마는, 남편이 저녁에 늦게 들어올 때에 왜 늦었느냐고 묻지 마세요. 물어봐서 무엇합니까? 또 아내가 어디 간다고 할 때에 어디 가느냐고 묻지 마세요. 시시하게 그런 것은 왜 묻습니까? 그냥 믿으세요. 어차피 다 알지 못하는 것 아닙니까? 다 보고한다고 압니까? 다 말해야 될 필요도 없고, 다 들을 필요도 없어요. 그저 믿으세요
그런데 도저히 안 믿어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들어도 안 믿어지고, 보아도 안 믿어지고, 증거를 대도 안 믿어지고, 혈서를 써도 못 믿어요. 안 믿어지는 데야 도리 없지 않습니까? 더구나 '과거에 대한 것도 믿기가 어려운데 앞으로 될 일을 어떻게 믿어? 내가 내 마음도 못 믿는데 누구를 믿어?'-이렇게 되기 시작하면 끝도 없어요. 그야말로 신경쇠약, 신경성 위장병, 불면증…… 그런 병에 걸릴 수밖에 없어요. 그런가 하면 어떤 때에는 또 잘 믿어져요. 마음이 든든해요. 아무 걱정도 없어요. 이런 믿음, 이것은 누구의 것이냐,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예요. 그런고로 성경은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를 내 구주로 영접하는 이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씀합니다.
구원 얻는 믿음은 객관적으로는 말씀에 의해서 주어지고, 주관적으로 성령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객관적 계시인 말씀과, 주관적 계시인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확실한 믿음이 이루어집니다.
이제 이 믿음을 주시기 위한 은혜의 방편이 있습니다. means of grace, 은혜의 방편이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이것을 자세히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먼저는 이렇게 은혜가 주어질 때, 복음을 내게 전해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personnel, 사람이 있어야 됩니다. 누군가가 전해줘야 됩니다. 요새는 문서로 전하고, 방송으로 전하고, 전파로 전하고…… 여러 방법이 있겠습니다마는, 그 방송이라는 것도 깊이 생각해보면 결국은 사람이에요. 인격이에요. 누군가가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꼭 인격을 통해서 전해집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필요해요. 복음을 전하는 사람-그런데 일단 그 사람에 대하여 믿음이 가야 됩니다. 이 또한 중요한 것이에요. 인격적인 것이거든요. 무릇 말이라는 것은 인격과 인격의 만남이에요. 그래서 말을 많이 안해요 '아무개'하면 믿음이 가면서 잘 이해가 되고, 어떤 사람은 아무리 말을 많이 해도 들려지는 게 없어요.
믿어지지도 않아요. 그런고로 복음을 담아 가는 그릇, 그것은 바로 인격이에요. 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 복음을 담은 사람-오늘의 본문은 말씀합니다.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15절)"-참 귀한 일이지요. 복음 전하는 자, 꼭 필요합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해준 분이 있지 않습니까? 오늘도 여러분에게 생명의 복음을 전해주는 분이 있습니다. 계속 그 누군가를 통해서 내가 복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 인격, 그 사람이 먼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효과적 언어가 있어야 됩니다. 이것은 문화적 문제입니다. 잘 통하는 설명이 필요하다는 거예요. 똑같은 이야기인데, 저 분을 통해서 설명을 들으면 잘 이해가 가고, 이 분을 통해서 설명을 들으면 이해가 안돼요.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요. 말은 많이 하기는 하는데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어요. 이러면 안 되는 거예요. 더구나 지금 제가 여러분이 쓰는 한국말을 하고 있습니다마는, 만일에 제가 영어를 하든가, 히브리말을 하든가, 헬라말을 하든가, 다른 나라 말을 한다면 여러분이 알아듣겠습니까? 몇 사람이나 알아듣겠습니까? 이렇듯 같은 언어권에서 말하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몰라요.
그런고로 하나님께는 반드시 그 문화권에 속한 복음 전달자가 필요해요. 또 가장 효과적인 effective language, 효과적 언어가 필요합니다. 가장 적절한 언어, 가장 효과적인 언어, 가장 알기 쉬운 언어가 필요합니다. 그 언어를 매개로 해서 오늘 복음이 전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가장 적절한 표현이 꼭 필요한 것입니다. 적절한 설명, 그런 것이 중요합니다.
간혹 여러분이 누구에게 전도를 하려고 하는데, 도대체가 말이 안통해서 힘들 때가 있을 거예요. 예수 믿는 사람의 언어와 안 믿는 사람들이 쓰는 언어가 다르거든요. 예를 들어서, 이런 일이 있다고 해요.
세례문답 할 때에 "왜 예수 믿습니까?"라고 물어보니까 "구원받기 위해 믿습니다"하고 대답해요. 그래, "구원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어보니까 "십 원에서 하나 모자란 것이 구원이지요"하더랍니다. 보세요.
이런 사람하고 얘기하면 일이 되겠어요?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여인하고 얘기하실 때에도 그랬습니다. '내가 주는 물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다'고 말씀하시니까, 이 여자, 가만히 있더니 불쑥 '그런 물이 있다면 나에게도 좀 주셔서 목마르지도 않고 물길으러 오지도 않게 해주세요 라고 말을 합니다. 보세요. 이런 맹추 같은 사람하고 무슨 얘기가 됩니까? 지금 언어가 안 통하는 거예요. 말은 하지만 통하지 않고 있어요. 그런고로 가장 적절한 언어-이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입니까? 이것이 있어야만 이를 통해서 우리가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셋째가 사랑입니다. 언어라는 것은 말만 가지고 되는 게 아니예요. 저 분이 나를 사랑한다, 하는 뜨거운 정열이 네게 전달되어야 합니다. 말을 다 못해도 괜찮아요. 말은 서툴어도 됩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있을 때에 통하는 것입니다. 마치 어머니와 그 어린아이 사이에 통하는 것처럼. 말이 안 통하는 것 같아도 다 통하지 않습니까? 사랑으로 통하는 거예요. 복음도 희생적 사랑의 채널(channel)을 통해서 전해지는 거예요. 여러분들의 수고가 참 중요합니다.
일전에 샌프란시스코에 사는 어떤 분이 저를 찾아왔었습니다. 이분은 아주 유명한 과학자입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 어느 장로님 한 분이 오래 전에 '이 분이 예수를 믿으면 앞으로 전도사업을 참 많이 하시겠구나'하고 생각했던가 봅니다. 그래, 그 분에게 말씀이 담긴 카세트테이프를 무려 3년 동안 계속 보냈다는 것입니다. 이 분의 말인즉, 처음 6개월 동안은 그냥 쌓아두었답니다. 버리기는 아깝고, 모처럼 보내온 것이니까요. 그런데 어느 날, 좀 어려운 일이 생겨서 마음이 껄끄럽고 해서 '어디, 이거나 한번 들어볼까?'하고 듣기 시작했답니다. 그래 가지고 6개월 동안 보낸 것을 다 들었어요. 계속해서 들었습니다. 그래 결국은 3년을 듣고, 예수를 잘믿고, 교회봉사도 하게 되었답니다.
이 분이 일부러 저를 찾아와서 인사를 하고 갔어요. "제가 3년 동안이나 아무개 장로님이 보내준 카세트테이프를 통해서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 정성이 너무도 귀해서 듣기 시작했지요. 처음부터 무턱대고 들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자기 돈을 없애가면서 정성껏 부쳐주시니까 어디 한번 들어나보자 하고 들은 것입니다." 보세요. 뜨거운 사랑, 이것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이런 정열을 통해서 복음이 전해지는 것입니다. 이렇듯 내가 알 수 있는 문화 속에서 복음이 내게 전해질 때, 특별히 내가 고통 당하고 어려울 때에 나와 함께 고난 당하는 자를 통해서, 나와 같은, 동질의 고난 속에 있는 분을 통해서 전해진다면 더더욱 효과적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본문은 말씀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17절)"-복음은 들음으로써 이루어진다 함입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들어지는 거예요. 들어서 옥토에 뿌려지게 되는 그 때에 생명의 역사가 일어난다 하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보세요. 들려지는 역사와 듣게 하는 역사는 달라요. 듣는다고 다 듣는 게 아니거든요. 듣게 되어야 듣지요. 내 마음이 열려야 듣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것은 훌륭한 설명만 가지고 되는 게 아니예요. 그런 계기를 만들어줘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마음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심령이 가난할 때에 말씀이 들려져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마 5:6)"-그 때에야 들려지는 거예요. 막 잡아당기고, 받아들이는 흡입력이 있어요. 그러나 배부른 사람, 편안한 사람, 교만한 사람, 저 잘났다는 사람은 들어도 안 들려요. 보아도 안보여요. 그런고로 듣게 하는 역사가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이럴 때에는 병든 것도 은혜요, 실패도 은혜요, 역경도 은혜요, 배신당하는 것도 은혜요. 내게 있는 많은 고통도 결국은 은혜일 수밖에 없어요. 왜요? 나로 하여금 복음을 듣게 하는 역사이니까요. 복음을 믿게 하는 역사이니까요. 복음을 받아들이게 하는 역사이니까요. 이 얼마나 소중합니까? 그런고로 복음을 받아들이게 하는 역사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래도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한번도 들은 바가 없으면 믿을 수 없으니까요. 제가 북한에서 어느 청년한테 이렇게 물어봤어요. 딱 이렇게만 얘기해보았지요. 성경책이라는 것이 있는지 아느냐고요. 그랬더니 "그게 무슨 책입니까?"하고 되물읍디다. 성경이란 말을 한번도 못 들어봤대요. 하나님이라는 말도 한번도 못 들어봤대요. 이를 어떻게 하면 좋아요? 그가 아무리 옥토라고 하더라도 한번도 들은바 없으면 예수를 믿을 수 없지 않느냐 그 말씀입니다. 그래서 에스겔 2장 5절로 7절은 말씀합니다. '듣든지 아니 듣든지 복음을 전하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 씨뿌리는 비유를 자세히 보면 상당히 낭비적인 데가 있어요. 옥토만 골라서 씨를 뿌려야 하는데 그냥 마구 뿌리라고 하시는 거예요. 길가에도 뿌리고, 가시덤불에도 뿌리고, 돌밭에도 뿌리고 옥토에도 뿌리고…… 좌우간 뿌려라 하십니다. 이 말씀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듣든지 아니 듣든지'입니다. 왜요? 듣게 만드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실 것입니다. 일단 종자가 그 속에 들어갔어요. 들어가는 것과 마음 밭에 심어지는 것은 같은 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렇듯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저는 이런 이야기를 듣고 굉장히 놀랐습니다. 기록에 있는 얘기입니다마는, 3천 년된 미라가 있는데, 그 미라의 손에 밀알 몇 개가 있었습니다. 그래 그 밀알을 땅에다 심었더니 놀랍게도 싹이 나더랍니다. 보세요. 죽은 사람의 손에 들려져 있는 밀알은 싹이 나지 않아요. 땅에 들어가서 썩어야 비로소 싹을 내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일단은 복음을 들어둘 필요가 있어요. 일단은 복음을 전해서 듣게 해두어야 그 다음에 감기라도 걸리면 '예수라도 믿을까?'라고쯤은 생각하지 않겠어요? 들어두고야 얘기지, 안 듣고야 이것이 될 수 있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그런고로 복음은 전해야 된다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다시 중요한 말씀이 있습니다.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15절)"-보냄 받는다는 것, 복음 전한다는 것이 아무나 하는 일입니까? 무릇 들음이 은혜요, 들려지는 것이 은혜요, 전함이 은혜요, 보냄 받는 것이 은혜입니다. 여러분, 내가 한 번 복음을 전했어요. 또 유년주일학교 아이들에게도 가르쳤어요. 누구에게 든 한마디 전했어요. 그런데 나중에 와서, 얼마 후에 '그 때에 복음을 들은 대로 제가 예수를 믿었습니다'하는 말을 듣는다면 이 얼마나 소중하겠습니까? 그렇지 않아요? 이 얼마나 귀하겠습니까? 얼마전의 얘기입니다. 언젠가 저는 안동에서 부흥회를 한번 인도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3년이 흘러 제가 신학교에서 강의를 하고 있을 때, 어떤 학생이 저한테 오더니 이런 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 제가 지금 신학교 졸업반입니다." "아, 그래요? 그런데 누구요?" "목사님이 안동에 와서 부흥회 하실 때, 당시 저는 고등학교 선생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부흥회에서 은혜 받고 목사 되기로 결심을 했었지요. 그래 모든 어려움을 무릅쓰고 신학교에 들어왔습니다. 그 때에 주신 말씀도 외우고 있어요. 그 말씀이 제게 그렇듯 강하게 역사해서, 제가 지금 여기서 공부하게 된 것입니다." 저는 너무도 반가웠어요. 나도 모르고 뿌렸어요. 그런 역사가 일어날 줄은 몰랐어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역사 하셨어요. 저는 이럴 때마다 생각합니다. '이렇게 씨뿌리는 자가 되고 복음 전하는 자가 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자랑스러운가?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하고요. 여러분, 다른 일은 다 헛된 일이에요. 그러나 복음 전하는 일-여기에 가담하고, 여기에 동참하고, 여기에 협력하는 것 하나만으로도 하나님 앞에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중요한 일입니까? 그런고로 생각해보세요. 오늘의 본문 17절은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라고 말씀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그러므로 들어야 되고, 또 듣도록 해야 되고, 또 열심히 전해야 된다 함입니다.
그리고 오늘의 본문에 대단히 중요한 말씀이 이어집니다. 그것은 바로 심판적 요소가 있다는 것입니다. 보세요. 들려지지 않는 자가 있고, 듣고도 믿지 않는 자가 있어요. 그리고 그럴 수밖에 없어요. 이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못 들어서 안 믿고, 어떤 사람은 일부러 안 믿어요. 또 어떤 사람은 의심이 너무 많아서 못 믿어요.
어떤 사람은 믿고자 하면서도 기회가 주어지지 않아요. 결국 소외되고 맙니다. 결국은 믿음 밖의 사람이 되고 만다는 말입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들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할 일입니까? 단 몇 사람에게라도 내가 복음을 전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그래서 에스겔 3장 18절로 19절에 보면 아주 강한 말씀이 있습니다. 비유로 말씀합니다. '군대가 있다. 수백 명의 군사가 잠을 자고 있고 여기에 보초를 서는 군사도 있다.' 그런데 적군이 오는 것을 발견하고 이 보초서는 군사는 '모두들 일어나라'하고 나팔을 분다. 나팔을 불고 도망을 갔더라도 그는 책임이 없다. 그는 분명히 나팔을 불어 군사들을 깨우고서 도망갔으니까. 그러나 만일에 나팔을 불어야 할 사람이 나팔을 불지 않아서 미처 잠을 깨지 못한 모든 사람이 죽었다고 한다면 그 책임은, 그 빚은 그 사람에게서 찾으리라. 여러분, 우리가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데까지는 다 전해놓아야 합니다. 그 다음에 믿고 안 믿고는 하나님께서 하실 일입니다. 내 책임이 아닙니다. 그러나 네가 전하지 않아서, 꼭 전해야 될 사람에게 전하지 않아서 그가 복음을 듣지 못해서 구원을 못 받았다면, 그것의 피값을 네게서 찾으리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얼마나 무서운 말씀이에요?
그런고로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지는 모든 기회를 통해서 힘껏 전해야 합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전하고, 감사함으로 전하고, 사랑으로 전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전해야 합니다. 이렇게 복음의 역사가 계속 확장되어나가고 그 복음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바로 거기에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