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동엽】 2024. 12. 14. 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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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의 빚 진 자(롬1:14~15)

 

 

오늘의 본문에는 확실한 복음적 사명이 나타나 있습니다. 바울은 스스로 복음을 위하여 세상에 태어났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갈라디아서 115, 16절에서 바울은 말씀합니다.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그래서 이방인의 사도로 세움을 받았다고 말씀합니다. 그는 자각합니다. 도대체 세상에 태어난 것 자체가, 자기존재의 목적 자체가 복음 전파를 위함이라고 말입니다. 그는 이렇듯 생의 목적이 분명했습니다. 그렇게 알고 그렇게 살았습니다, 한평생을. 그런고로 그는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해야 했습니다. 특별히 복음 전하는 자 중에서도 그는 이방인의 사도로 아주 분명하게 자기 기준이 정해져 있었습니다.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 받았고, 그것을 위하여 택함을 받은 사람이라고 하는 확실한 사명감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자신의 존재의식이었습니다. 내가 살아야 할 이유는 그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빌립보서 1장에서도 말씀하지 않습니까? "내가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21)." "For to me, to live is Christ and to die is gain."--유명한 말씀입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사는 것이 아닙니다. 사는 것 자체가 그리스도입니다. 내게서 그리스도가 빠지면 살아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으며, 또 살아지지도 않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파악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직 복음 전파를 위해서 내가 존재한다고 그는 믿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그는 오늘의 본문에서 상징적으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빚진 자'라고-복음의 빚 진 자라고 비유로 말씀합니다. 빚을 졌다는 것입니다. 강렬한 의무감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릇 의무라고 하는 것은 그것을 의무로 아는 자에게만 의무 되는 것입니다. 의무를 강하게 느끼느냐 약하게 느끼느냐-어쩌면 이에 따라 그 사람의 수준을 가늠할 수 있다 하겠습니다. 권리는 많이 주장하는데 의무는 생각지 않는 사람이라면 수준 이하의 사람입니다. 해야 될 일은 하지 않고 찾아야 될 권리만 다 찾겠다고 하는 사람은 인격이 떨어지는 사람입니다. 분명히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존재의 의미도 크게 느낄 뿐만 아니라 스스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무엇을 위하여 내가 존재하는지를 잘 알고 있고 또 강렬하게 느낍니다. 내가 복음의 빚을 졌다-아주 sensitive하게, 민감하게 그는 느끼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생각해봅시다. 어떤 사람이 공부를 잘했어요. 머리가 좋았어요. 고등학교 때부터 대학 때까지 줄곧 장학금을 받을 만큼 공부를 잘했어요. 이 사람이 드디어 사회로 나가게 됩니다. 이제 이 사람은 어떻게 생각해야 마땅한 것입니까? '나는 공부를 잘해서 그 덕에 장학금을 받아 공부했노라'하고 교만해야 마땅합니까, 아니면 '나는 빚을 많이 졌다. 공짜로 공부를 했으니까. 누군가가 이 사회에 유익한 일 하라고 내게 장학금을 주었다. 그 덕에 나는 이렇듯 어려움 없이 공부할 수 있었다. 나는 많은 빚을 졌다. 그런고로 나도 평생에 걸쳐 누군가에게 장학금을 주어야 한다'--이렇게 강한 의무감을 가지고 있어야 마땅한 것입니까?

저 잘나서 사는 줄 아는 사람이 있어요. 많은 사람으로부터 빚을 졌어요. 그러나 빚진 줄도 모르고 있습니다. 많은 사랑을 받고 살아요. 그런데 저 잘나서 사랑 받는 줄 착각을 하고 있어요. 그러나 바르게 생각하는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게 다 빚이에요. 엄청난 빚을 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평생을 두고 갚아야 돼요. 이런 사랑의 빚은 어쩌면 한평생 갚아나가도 다 갚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의무는 느끼는 자에게 있습니다. 의무를 강하게 느끼는 자일수록 엄청나게 빚진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둔감한 사람, 교만한 사람, 완악한 사람에게는 의미가 없는 얘기입니다. 더구나 오늘 주신 말씀은 더욱 그렇습니다. 은혜를 깊이 알 때에 더 큰 은혜가 있습니다. 그리고 강한 의무감을 느끼면서 살아가는 데에 더 큰 은혜가 있습니다. 바울은 스스로 빚을 졌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빚을 졌다고 생각합니다. 무릇 빚이라는 것은 먼저 꼭 갚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전에는 자유할 수가 없어요.

옛날사람들, 특히 로마사람들의 경우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돈으로 빚을 졌습니다. 갚아야 돼요. 이자까지 합쳐서 일생을 두고라도 갚아야 합니다. 만일에 돈으로 못갚으면 노동으로 갚아야 돼요. '하루에 얼마씩'이라 해서 몸으로 갚아요. 그것으로도 부족하면 어는 한계가 넘었을 때에 가서는 노예로 팔립니다. 이제는 아주 일평생 노예가 되고 맙니다. 또 당자가 다 못 갚고 죽으면 그 자식도 노예가 됩니다. 자식 때에 가서도 갚아야 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로마사람들의 강한 채무 감입니다. 빚은 꼭 갚아야 됩니다. 갚기 전에는 절대로 자유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시간, 마음, 지식, 건강, 생명까지 다 거기에 바쳐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빚입니다. 갚기 전에는 자유인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또한 빚이란 과거에 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빚은 아무리 갚아도 피곤한 것은 보상이 없어요. 이미 써버린 것 때문에 갚은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피곤한 것입니다. 적금하는 것과는 달라요. 얼마를 적금하든지 적금하는 것은 이제 자꾸 쌓여서 언젠가 타게 될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는 것이지만 빚이라는 것은 특별히 원금도 못 갚고 이자만 갚는 사람들이라면 허구헌 날 갚아나가도 언제나 제자리입니다. 뿐만 아니라 갚을 때마다 옛날에 잘못한 것에 대한 후회가 있고, 뉘우침이 있고, 그런가하면 어떤 사람은 심하게 표현해서 꼭 강도 만나는 기분이요 빼앗기는 기분이 됩니다. 아주 옛날에 돈 쓴 것 때문에 오늘도 계속 이자를 물고 있는 것입니다. 더욱이 빚이란 갚았다고 해서 칭찬 받는 일도 없어요. 보상이 없는 것입니다. 한평생 수고해도 칭찬 받을 일없습니다. 빨리 갚으라고 재촉이나 받을 뿐입니다. 보상받을 일이 없어요. 수고하고도 전혀 보상이 없는 것입니다. 보상을 바랄 수가 없어요. 이것이 빚입니다.

사도 바울의 마음이 그러했습니다. 꼭 복음을 전해야 된다는 강한 의무감이 있는가 하면, 내가 이렇게 수고해도 내가 받은 은혜가 이미 있어서 그 빚을 지금 갚고 있는 중이므로 내게는 칭찬도 보상도 있을 리 없다, 바랄 것이 없다, 하는 마음입니다. 복음의 빚 진 자된 의식이 분명합니다. 복음의 빚--사도 바울은 아마도 세 가지의 빚을 생각한 것 같습니다.

먼저는 구원 자체가 은혜입니다. 그 은혜 자체가 그에게는 빚으로 생각됩니다. 다시 말하면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인 주제에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어요. 자기로서는 아무 자격이 없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값 치르신 공로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어요. 예수께서 엄청난 값을 치르고 나를 사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래 '나는 빚진 자다'합니다. 구원 자체가 빚입니다.

또 하나, 그는 일찍이 핍박 자였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죽이려고 다메섹까지 가던 사람입니다. 스데반을 돌로 쳐죽이는 일에 가담한 사람입니다. 한마디로 예수를 핍박한 사람인 것입니다. 그것이 바울에게는 빚이었습니다. 쉽게 계산해본다면 예수믿는 사람을 죽였으니 저도 죽어 마땅합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죽어 마땅한 것입니다. 어쩌면 예수의 이름으로 죽어도 상 받을 것이 없어요. 이미 남을 죽였으니까요. 바울은 그런 사람입니다. 핍박자요, 포행자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박해했습니다. 교회를 박해했습니다. 이렇듯 빚 중에 또 더 큰 빚을 졌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빚은 바로 그에게 주신 은사입니다. 죄인이 사도가 되었는데다 이제는 하나님께서 많은 은사를 더 얹어주셨어요. 고린도후서 12장에 있는 말씀대로 말로 다 할 수 없는 은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높은 은혜를 받았어요. 삼층천에 가는 경험도 있었고, 감옥에서 기적을 베풀기도 하고, 많은 이적을 행했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영광도 누렸어요. 생각하면 엄청난 은혜인 것입니다. 여기저기서 핍박도 받고, 매도 맞고, 사자 굴에도 들어가고 했지마는 그가 받은 은혜는 너무 많아요. 은사가 많아요. 하나님께서 그에게 너무 많은 은혜를 주셨어요. 너무 많은 은사를 베푸셨어요. 그런 것이 다 바울에게는 빚인 것입니다. 그 카리스마가 다 빚인 것입니다. 내가 뭔데 나를 통해 이적이 나타납니까? 내가 뭔데 이렇게 하찮은 일을 하는데도 복음이 전파되는 것입니까? 큰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입니까? 내가 뭔데 옥문이 열립니까? 도대체 내가 뭔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나를 크게 써주시는 것입니까? 그에게는 그 모든 것이 다 빚입니다. 하나님께 그렇듯 많은 빚을 졌다고 그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821절로 35절을 보면 빚에 대한 예수님의 비유 말씀이 있습니다. 이 비유를 한번 마음깊이 상고해보시기 바랍니다. 1만 달란트 빚진 자가 채권자인 주인에게 불려와 그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서라도 빚을 갚으라는 영을 받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갚을 능력이 없으므로 참아달라고 통사정을 합니다. 주인이 이를 보고 불쌍히 여겨서 아예 그 빚을 없었던 것으로 깨끗이 탕감해줍니다. 갚을 길이 막막한 큰 빚을, 연기해주는 것도 아니고, 일부나마 갚으라는 것도 아니고, 아예 없었던 것으로 깨끗이 탕감해줌으로 온전히 빚으로부터 자유하게 되고 보니 이 사람이 얼마나 감사했겠어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하고 주인 앞을 물러나 밖으로 나옵니다. 우리, 여기서부터 생각해봅시다. 이 사람이 빚을 탕감 받지 않았다면 돈을 빚졌기 때문에 당연히 갚으면 그만입니다. 아무 때에라도 돈으로 갚으면 일은 계산상으로 끝납니다. 그런데 탕감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은혜를 입었습니다.

돈의 빚은 갚을 수 있지마는 은혜의 빚은 영원히 갚지 못합니다. 한번 가상해봅시다. 가령 이 사람이 나가서 다시 사업을 해 가지고 1만 달란트가 아니라 이만 달란트나 가지고 와서 "전일에 탕감해준 것 감사합니다, 이제 갚겠습니다"하고 이만 달란트를 내놓았다 칩시다. 그래도 은혜는 갚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1만 달란트를 탕감해주던 그 때의 감격, 그 때에 받은 그 은혜는 이제는 갚을 길이 없는 것입니다. 영원히 갚을 길리 없는 거예요. 이 점을 잊지 말아야 돼요.

오늘 내가 이만 달란트를 가지고 왔다 해서 은혜를 그렇게 물질적으로 계산할 수 있는 것은 아니거든요. 1만 달란트를 탕감해준 주인의 그 귀한 마음은 절대로 갚을 수 없는 은혜인 것입니다. 결코 잊지 말 것입니다. 돈의 빚은 돈으로 갚을 수 있지만 은혜의 빚이라는 것은 영원히 갚지 못하는 법입니다. 그런고로 갚을 양으로 살아가는 것일 뿐입니다. 갚는 마음으로 사는 것일 뿐, 그 은혜의 빚을 다 갚을 수는 없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한번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108절을 보세요.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거저 받는 빚을 졌으니 거저 주어라, 내가 너에게 탕감을 해주었으니 너도 남에게 탕감을 해주어라, 내가 너를 용서했으니 너도 남을 용서해라 하시는 말씀이요 이것이 복음입니다. 곧 우리가 하나님께 빚진 것을 갚는 길은 바로 하나님 기뻐하시는 일을 하는 데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이것이 내가 진 빚입니다. 이제는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죽을 수밖에 없어요. 그러면 그 빚이 갚아지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죄 없는 자로서 나를 위해 죽으셨고, 내가 죽는 것은 죄인으로서 죽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설사 내 생명을 순교자가 되면서 바친다고 해도 그 은혜가 갚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의인을 위해 죽는 것과 죄인을 위해 죽는 것은 원천적으로 다릅니다. 의인이 죽는 것과 죄인이 죽는 것은 본질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그런고로 그리스도께 진 빚은 결코 어떻게라도 갚아질 수 있는 성질이 못되는 것입니다. 잊지 말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 한다면 우리는 다만 이 빚을 만의 하나라도 갚는다는 마음으로, 그런 감격으로, 그런 강렬한 의무감으로 살아갈 따름입니다. 해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를 위하여 살고, 그리스도께서 사랑하신 자를 위하여 살고, 그리스도께서 하시던 일을 내가 다만 얼마만큼이라도 맡아 하면서, 내 마음을 기울이고, 충성되게 살아가는 것이 빚진 자의 마음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의 '빚을 졌다'고 했습니다. 갚았다고 한 것도 다 갚을 수 있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빚진 자의 마음으로 산다고 하는 뜻이었습니다. 특별히 오늘의 본문에 보면 사도 바울은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14)"--이렇게 말씀합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조금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은 지금 로마사람에게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로마사람을 대상으로 쓰면서 "로마인이나 야만인이나"하지 않고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하고 있으니 이 말이 로마사람에게는 다소 기분 나쁘게 들리는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왜 헬라냐--로마사람에게는 직접 관계가 되지 않는 것 같으나 사실은 여기에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지금 정치적으로는 로마가 세계를 지배하고 있지만 문화적으로는 헬라가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치는 로마정치이지만 문화는 헬라문화 곧 헬레니즘인 것입니다. 로마가 세계를 지배하기 전에 헬라가 세계를 지배했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이 세계를 지배하면서 전역에 헬레니즘을 심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기원전 32330년 사이에 걸쳐 그리스 고유의 문화가 지중해 연안, 시리아, 이집트, 페르시아 등지에 전파되어 오리엔트 문화와 융합 형성한 새롭고 세계적 성격을 띤 문화가 헬레니즘입니다. 이것은 히브리 문화 곧 헤브라이즘과 함께 서양 문화의 2대 흐름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당시에는 헬라인이라 하면 유식한 사람, 문명인을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헬라 문화권에 살며 헬라말을 하고 헬라철학을 아는 문명인을 '헬라인'이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공동번역성서에는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하는 대목을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나는 문명인에게나 미개인에게나 또 유식한 사람에게나 무식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전도할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말은 순하게 되어 있는데 그실 원문에서는 많이 멀어지고 있습니다. '빚진 자'라고 하는 말과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는 아무래도 뉘앙스가 달라요. '빚진 자'에 비하여 '책임을 지고 있다'라는 말은 약하지요. 아무래도 직역하는 편이 뜻을 좀더 강하게 전달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무튼 여기서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하는 것을 보면 모든 사람을 두 부류로 나누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헬라인'하면 문화인, 문명인이요, '야만인'하면 비문화인, 미개인이라는 뜻이 되겠습니다. , '지혜 있는 자'라 함은 지성인을 지칭함이요, '어리석은 자'라 함은 무식한 자를 지칭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 모든 사람에게 빚을 졌다고 바울은 말씀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생각해야 됩니다. 바울이 지금 관심이 있어서 로마에 가고자 합니다마는 그는 동시에 로마시민권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자신부터 헬라문화권에 사는 사람입니다. 그는 길리기아 다소에서 태어났을 뿐더러 유대 디아스포라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이 로마시민권을 가진 헬라문화의 대표격입니다. 헬레니즘의 인물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헬레니즘에 속한 사람입니다. 로마인과 마찬가지로 그는 문화적으로나 신분상으로나 우월감을 가질 수 있는 위치에 있습니다. 그런 그가 지금 '야만인에게도' 빚을 졌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이 말씀하고자 하는 가장 중요한 내용은 이것입니다. 유식하거나 무식하거나, 문명인이거나 야만인이거나, 모두가 복음 앞에서는 꼭 같다, 다같이 구원을 얻어야만 한다--이것입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한 선교학적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가끔 이런 경우가 있습니다. 세상적으로 지식이 많은 사람을 보고 전도하려고 할 때에 '아휴, 이 사람에게 전도해서 말발이나 서겠나'싶어서 엄두를 못내고, 혹은 담배도 안하고, 술도 안하고, 깨끗하게 정직하게 사는 사람을 보면 '아휴, 저 사람은 누구 말마따나 예수 믿는 사람들보다도 나은데' 싶어서 전도할 용기가 안 나고이렇게 저렇게 전도 대상에서 제외할 때가 많습니다. 잘못입니다. 지식 있는 사람도 예수는 믿어야 합니다. 깨끗하게 사는 것으로 보이는 사람도 예수 믿어야 됩니다. '야만인'이라 불리는 사람에게도 그렇습니다. '저런 야만인, 저런 무식한 사람, 저런 비문화적인 사람에게도 전도해봐야 소용없을 거야, , 알아들어야 말을 붙이지……'하며 지레 안될 거라 생각하기 쉽습니다. 역시 잘못이지요. 예수 믿는 일에서는 문명인이나 야만인이나 똑같습니다. 잊지 말 것입니다. 죽는다는 문제에서는 누구 할 것 없이 꼭 같다는 것과도 같습니다. 지식 있는 사람이라고 안 죽습니까? 돈 있는 사람이라고 안 죽습니까? 똑같아요. 적어도 죽음의 문제와 죄의 문제에 관한 한 예외는 없습니다.

그래, 사도 바울이 여기서 중요한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유식한 자나 무식한 자난 다 복음을 들어야 한다, 나는 양쪽에 똑같이 책임을 지고 있다, 그 누구에게나 전도할 책임이 있는 것이다--여러분, 전도 대상에 대해서 당당한 담력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웃사람, 아랫사람이 따로 없습니다. 지식인, 무식꾼이 따로 없습니다. 야만인, 문명인이 따로 없습니다. 다 복음을 들어야 합니다. 누구든지 예외 없이 복음을 들어야 합니다. 혹 여러분이 어쩌다 공산주의자를 만난다고 해도 그렇습니다. 그 사람도 예수 믿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저런 사람은 안될 거다, 공산당이니 안될 거다, '지존파'니 안될 거다-이러지 마세요. 그들도 믿어야 해요. 94년도에 세상을 놀라게 했던 이른바 '지존파'사건-그 범인들이 한 사람만 빼고 다 예수 믿게 됐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보고 꼭 전도해야 되겠다고 생각해서 여러 사람이 들락거리며 전도를 했어요. 그 결과로 지금은 그들이 얼마나 열심히 믿는지 몰라요. 저들은 참 기가 막힌 얘기를 했습니다. "이런 성경책이 있다는 것을 진작 알았더라면 내가 오늘날 이런 꼴이 되지 않았을 것인데" 보세요. 누구든지 예외가 없습니다. 이런 사람 저런 사람 가릴 것이 아닙니다. 남녀노소가 없습니다. 모두가 전도의 대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런 사람 만나면 이런 사람에게 전도하고, 병원에서 환자를 만나면 환자에게 전도하고, 군에 나가면 군에서 전도하고, 학교에 가면 공부하면서 친구들에게 전도하고, 교수님 만나면 교수님에게 전도할 것입니다. 학생으로서도 교수에게 전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전도에 관한 한 그 대상에 문화적인 차이 같은 것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특별히 좀더 깊은 뜻이 있습니다. 모든 문화가 복음에 다같이 유익하다는 것입니다. 이 점을 명심할 것입니다. 지성인은 지성인대로 그 지성적인 문화가 복음에 유익합니다. 복음 전파에 좋은 방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의 그릇이 될 수가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또 무식한 사람은 무식해서 전도하기가 좋아요. 그 나름대로의 유리함이 있습니다. 모든 문화가 선교에 다같이 유익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선교에 있어서, 복음 전파에 있어서는 예외적 문화란 없는 것입니다. 이런 문화, 저런 문화가 다 복음 전파를 위하여 쓰여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가끔 이런 경우가 있어요. 문화적인 차원에서 볼 때에 superiority, 우월성을 주장하는 경우가 있어요. 특별히 서양사람들에게 흔한 경향입니다. 웨스턴(Western)--서구문화에 속한 사람들이 스스로, 우리는 높은 문화에 위치해 있다, 저기 저 야만인들, 옷도 안 입고 다니는 저 사람들은 예외다--이렇게 생각하기 잘합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서구문화든, 원시문화든 상관이 없습니다. 어느 문화권에 있든지, 누구든지 다 복음을 들어야 하고, 누구에게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우리가 무심히 쓰는 말 가운데 조심스럽게 써야 될 말이 하나 있습니다. '기독교 문화'라는 말이 그것입니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있을 수 없는 용어입니다. 기독교는 문화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느 문화에 들어가서든 지 그 속에서 복음이 전파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기독교 문화라고 하는 별도의 문화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기독교 문화라고 하면 언뜻 서구문화를 떠올리게 됩니다. 이것은 잘못이며, '기독교 문화'란 잘못된 용어입니다. 한국사람이 믿으면 한국기독교입니다. 서양사람이 믿으면 서양기독교일 뿐입니다. 기독교라고 하는 것은 결코 문화화할 수 없는 것입니다. 초문화적 양상을 띠고 있다는 것을 언제나 명심할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나 다 그리스도 앞에 하나입니다. 어린아이와 같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마음으로 복음을 받아들여야 하고, 그런 마음으로 복음을 전할 것입니다.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바울이 로마인을 향해서 이 말씀을 하는 데는 저의가 있습니다. 주인도 예수 믿어야 되고, 노예도 예수 믿어야 된다, 자유인도 믿어야 되고, 억압 중에 있는 사람도 믿어야 된다, 군인도 믿어야 되고, 정치가도 믿어야 된다, 모든 사람이 다 예수 믿어야 된다고 하는 의미가 저변에 깔려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노예에게도 복음을 전했고, 친위대나 고위층에도 복음을 전했습니다. 전도하는 사람들을 보면 더러 가난한 사람에게만 복음을 전하고 사람에게는 아니 전하려 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그래서는 안되지요. 부한 사람에게도 전해야 합니다. 노동자에게는 열심히 복음 전하면서 '사장님'에게는 전하지 않을 생각을 가진 사람도 있어요. 그래서 는 안됩니다.

헬라인에게나 야만인에게나 모든 사람에게 나는 빚을 졌다, 나는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구원의 보편성과 구원의 절대성을 바울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특별히 사도 바울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이방인의 사도입니다. 그리고 바울 자신이 지성인입니다. 그런고로 지성인에게도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혹은 무식한 사람에게도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모든 사람에게 다 전할 수 있는 사명과, 기능과, 능력을 하나님께서 주셨다고 그는 믿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본문에서 그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인즉 반드시 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생각할 때에 반드시 전해야 한다는 것은 빚진 자의 자세입니다. 그는 복음을 전하지 못하면 자유할 수가 없어요. 편할 수가 없어요. 그는 그 자신의 몸에 병이 있음으로 인해서, 혹은 그 자신이 약함으로 인해서 복음을 전한다고 말씀합니다. 약함에도 불구하고 복음 전한다는 것이 아니라 약하기 때문에 복음 전한다고 합니다. 무슨 표현입니까? 부득불 전한다 함입니다. 그래서 스스로 자랑할 것이 없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우선 심리적으로 볼 때에 그는 복음을 전하지 않고는 편할 수가 없었어요. 복음 전하지 않고 있을 때에는 몸까지 약해졌던 것 같아요. 복음을 전하고야만, 스스로 할일을 다할 때에만 마음이 자유롭고, 영도 자유롭고, 몸도 건강했어요. 그러한 고백이 그의 글 속에 있는 것을 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사람은 하고 싶은 일을 해서 건강한 것이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할 때에 건강한 것입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남겨두고 있으면 절대로 그는 자유할 수가 없어요. 그 마음이 자유할 수가 없습니다. 아이들을 보세요. 공부해야 될 아이가 공부 열심히 하면 오히려 건강해요. 공부를 못하고 자꾸 성적이 떨어지면 공부만 못하는 게 아니라 몸도 약해져요. 무릇 우리의 한평생이 다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께로서 맡은 사명, 내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는 동안이라야 내 영이 자유하고, 내 몸도 자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그러한 생활철학으로 살았고, 또 그런 간증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좀더 깊은 말씀까지 합니다. 이미 빚을 진 사람이니까 내가 아무리 복음을 전하고, 아무리 수고를 한다 해도 수고로 끝날 따름이요 무슨 보상을 받을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칭찬 받을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핍박을 받는다, 매를 맞는다 하고 어떠한 고난을 당한다 해도 원망할 자격조차 없어요.

저는 가끔 생각해봅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 감옥에서 매를 맞아 죽을 지경이 되어 가지고 찬송을 불렀다는데, 과연 무슨 마음으로 찬송을 불렀을까? 이에 대하여 제 짐작은 이렇습니다. 나는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하다가 현장에서 벼락맞아 죽어 지옥으로 떨어져야 마땅한 사람이 아닌가,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고, 이제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자까지 되게 생겼구나, 이 얼마나 귀한 은혜냐! 이대로 죽어도 좋지 않은가--그래서 감사한 마음으로 찬송을 부르는 것이지, 혹이라도 찬송부르면 옥문이 열릴 거다 하는 생각에서 부른 것은 아닐 것이라고요. 이대로 죽어도 좋다, 할말이 없다, 오직 감사할 뿐이다, 왜냐, 빚졌으니까! 복음의 빚을 단단히 졌기 때문이다--그래서 그는 거저 받았기 때문에 거저 주려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916절에 유명한 고백이 있지 않습니까?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 어찌 생각하면 바울의 입장에서는 당연해요. 그가 어떻게 구원받은 사람인데, 어떻게 은혜 받은 사람인데 복음 전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겠어요? 전하지 않으면 당연히 화를 당해야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생각하면 바울뿐이겠습니까? 여러분, 내가 하나님 앞에서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래서 내 심령이 자유하지 못하다고 생각해본 적 있습니까? 우리는 언제나 당연히 해야 할 일을 그러구러 다 하지를 못해요. 그러나 하고 있어야 돼요. 하는 데까지는 해야만 내 심령이 자유할 수가 있어요. 여기서 떠나서는 도저히 살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빚을 졌습니다. 이 빚을 갚는 길은 하나님 앞에서 일하되 주께서 위하여 죽으신, 주께서 사랑하는 자들을 위해서 내 몸을 바치는 것입니다. 내 할 일을 무엇입니까? 어떻게 하는 것이 빚을 갚는 길입니까? 바울은 분명히 알고 있었어요. 여러분도 그와 같이 알고 있습니까? 오늘과 내일, 내가 무엇을 하는 것이 빚을 갚는 길이겠습니까? 바로 그 길을 갈 때에만 우리의 심령이 자유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나는 이 일을 하지 않으면 살수가 없는 사람이다, 존재의 이유가 없다-이만큼 생각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15)"합니다. 할 수 있는 대로, 하나님께서 길 열어주시는 대로, 오로지 내 정성, 내 마음, 내 진실을 다 바칠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감옥에 처넣으시면 감옥에 있는 사람에게 전도합니다. 감옥문을 열어주시면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전도합니다. 안식일이 되면 회당에 가서 전도합니다. 회당문이 닫히면 거리에 나와서 전도합니다. 과연 어디서든지 할 수 있는 대로 그는 다 했습니다. 아마누엘 칸트가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You can do it because you should do it.'--'너는 할 수 있다. 해야 하기 때문이다.'

반드시 해야 한다 할 때에 할 수 있게 됩니다. 정말로 해야 되겠다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안 해지고, 마지막에서는 못해지는 것입니다. 해보세요. 힘이 생깁니다. 길도 있습니다. 할 수 있고 말고요. 그런데 사도 바울이 가졌던 바 불붙는 확실한 사명감-이 빚진 마음이 없기 때문에 할 수 없게 되고, 무능하게 됩니다. 빚을 갚아가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심령은 어두워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다소라도 빚을 갚아나가면서라야 비로소 진정한 자유함이 우리에게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