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워하지 말고 말하라 (행 18:5-11)
바울이 고린도에 서 있습니다. 그가 서 있는 곳은 조용한 수도원이 아니었습니다. 고요한 산상도 아니었습니다. 영혼이 맑아지는 은둔의 골짜기도 아니었습니다. 고린도는 소리의 도시였습니다. 돈의 소리, 배들의 소리, 장사꾼들의 소리, 쾌락을 사고파는 소리, 철학과 웅변과 욕망이 뒤섞인 소리, 인간이 자기 이름을 높이기 위해 세운 수많은 보이지 않는 기념비들의 소리로 가득 찬 도시였습니다. 그곳은 인간의 가능성이 가장 화려하게 피어나는 듯 보였으나, 실상은 인간의 무력함이 가장 깊이 드러나는 도시였습니다. 부유했으나 가난했고, 말이 많았으나 진리를 잃었고, 몸은 즐거움을 좇았으나 영혼은 죽음의 그림자 아래 신음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도시에 한 사람이 들어왔습니다. 그는 제국의 장군도 아니요, 학문의 왕좌에 앉은 철학자도 아니요, 군중을 매혹시키는 연설가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약한 사람, 지친 사람, 눈물 많은 사람, 그러나 복음에 사로잡힌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바울이었습니다. 그는 아덴에서 인간 지성의 높은 언덕을 보았고, 그곳에서도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고린도에 왔을 때 그의 마음은 결코 가볍지 않았습니다. 고린도전서에서 그는 고린도에 처음 갔을 때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다”고 고백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도 두려워합니다. 믿음의 사람도 떨립니다. 사명자는 돌처럼 무감각한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눈물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눈물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놓지 않는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 떨림의 한복판에서 시작됩니다.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부터 내려왔습니다. 동역자들이 도착했습니다. 외로운 사역자의 곁에 하나님께서 사람을 붙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본문은 말합니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언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붙잡혀”라는 말은 헬라어로 συνείχετο τῷ λόγῳ(쉬네이케토 토 로고)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단순히 말씀을 연구했다는 뜻을 넘어, 말씀이 그의 안을 조여 오고, 붙들고, 몰아가고, 더 이상 침묵할 수 없게 만들었다는 뜻을 품고 있습니다. 바울이 말씀을 붙잡은 것이기도 하지만, 더 깊이 말하면 말씀이 바울을 붙잡은 것입니다.
참된 설교는 여기서 시작됩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이용하여 자기 말을 장식할 때 설교는 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을 사로잡아 그의 입술을 열 때, 그때 설교는 살아납니다. 인간의 말은 시간 속에서 태어나 시간 속에서 사라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시간 안으로 들어와 영원의 무게를 싣습니다. 한 방울의 영원은 시간의 바다보다 무겁습니다. 인간은 어리석게도 보이는 것, 손에 잡히는 것, 계산되는 것, 박수받는 것, 오늘의 유익과 내일의 안전만을 붙잡으려 합니다. 그러나 보이는 것만 붙잡는 순간 보이지 않는 영원을 놓치고, 영원을 놓치는 순간 인간의 모든 성공은 무가치의 법칙 아래 놓입니다. 돈도 무너지고, 명예도 시들고, 젊음도 지나가고, 권세도 교대되고, 인간이 자기 이름을 새겨 넣은 비석마저 언젠가는 바람과 먼지 속에 잠깁니다.
그러나 복음은 시간 속에 울려 퍼지는 하나님의 영원한 음성입니다. 복음은 인간이 만든 여러 진리 가운데 하나가 아닙니다. 복음은 모든 자칭 진리들을 하나님의 질문대 앞에 세웁니다. 복음은 인간을 위로하기 위해 인간이 고안한 종교적 장식품이 아닙니다. 복음은 죽음의 법 아래 있는 인간에게 하늘로부터 내려온 하나님의 판결입니다. 죄인은 의롭다 하심을 받고, 죽은 자는 살아나며, 존재하지 않던 생명이 존재하게 되는, 창조와 구속의 새 명령입니다.
바울이 증언한 내용은 복잡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는 그리스도라.” 이 한 문장 속에 하늘과 땅이 만납니다. 이 한 문장 속에 율법과 선지자가 완성됩니다. 이 한 문장 속에 아브라함의 약속, 다윗의 언약, 이사야의 고난받는 종, 유월절 어린양, 광야의 놋뱀, 성전의 제사, 대제사장의 중보, 모든 구속사의 흐름이 한 사람에게로 흘러 들어갑니다. 예수는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는 단지 선생이 아닙니다. 예수는 단지 모범이 아닙니다. 예수는 단지 종교적 감동을 주는 인물이 아닙니다. 예수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메시아요, 기름 부음 받은 왕이요, 선지자요, 제사장이요, 죄와 죽음과 사탄의 권세를 깨뜨리시는 구속자이십니다.
그러나 복음이 선포되는 곳에는 반드시 반대가 일어납니다. 본문은 유대인들이 대적하여 비방했다고 말합니다. 진리가 선포될 때 모든 사람이 박수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의 자아가 가장 깊이 숨어 있는 곳에서는 복음이 모욕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인간에게 말하기 때문입니다. 너는 스스로 구원할 수 없다고. 너의 의는 너를 살리지 못한다고. 너의 경건은 하나님 앞에서 거래의 화폐가 될 수 없다고. 너의 율법적 자랑은 십자가 앞에서 해체되어야 한다고. 인간은 하나님을 높인다고 말하면서 실상은 자기 자신을 의롭게 세우려 합니다. 인간은 종교의 옷을 입고도 자신을 숭배할 수 있습니다. 예배당 안에서도 자기 의를 높일 수 있고, 기도하면서도 자기 왕국을 세울 수 있으며, 봉사하면서도 자기 이름의 기념비를 쌓을 수 있습니다.
바울의 증언은 그런 인간의 숨은 왕좌를 무너뜨렸습니다. 그래서 대적이 일어났습니다. 바울은 옷을 털며 말합니다.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나는 깨끗하니라 이제부터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라.” 이것은 냉혹한 저주가 아닙니다. 이것은 복음 전도자의 마지막 눈물입니다. 바울은 자기 백성을 사랑했습니다. 그는 로마서에서 자기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자신이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마음이 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장면은 분노보다 더 깊은 슬픔의 장면입니다. 사랑했으나 거절당한 자의 탄식입니다. 복음을 전했으나 문이 닫히는 순간에, 사명자가 하나님 앞에서 자기 책임을 내려놓는 장면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복음을 거절하는 것은 단순히 어떤 종교적 의견을 거절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오시는 하나님 자신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거절한다는 것은 인간이 자기 어둠을 사랑하여 빛을 밀어내는 것입니다. 인간은 죽음 앞에서 자기의 모든 말이 침묵하게 될 것을 알면서도, 그 죽음을 이기신 주님 앞에 무릎 꿇기를 거부합니다. 죽음은 인간 생명의 끝이면서 동시에 인간이 붙잡고 있던 모든 허상의 박탈입니다. 죽음은 누구도 비켜갈 수 없는 이 세상의 엄숙한 법입니다. 그러나 죽음에서 인간이 만나는 것은 단지 죽음 자체가 아닙니다. 죽음 너머에서 인간은 삶과 죽음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만납니다. 참으로 두려워해야 할 것은 죽음이라는 사건이 아니라, 죽음 너머에서 우리를 부르시는 거룩하신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심판만이 아니라 은혜로 우리를 만나러 오셨다고.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심판과 하나님의 사랑이 한 몸에 드러났다고. 죄에 대한 하나님의 거룩한 진노가 그리스도의 몸에 쏟아졌고,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말할 수 없는 긍휼이 그 피로 흘러나왔다고. 십자가는 하나님이 죄를 가볍게 보지 않으신다는 증거이며, 동시에 하나님이 죄인을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증거입니다. 십자가는 인간의 자기 의가 사망 선고를 받는 자리이며, 하나님의 은혜가 새 창조의 아침처럼 떠오르는 자리입니다.
바울은 회당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디도 유스도라는 사람의 집으로 들어갑니다. 놀랍게도 그 집은 회당 옆에 있었습니다. 문이 닫힌 것처럼 보였으나 하나님은 바로 옆집의 문을 여셨습니다. 인간이 닫는 문이 하나님의 일을 끝내지 못합니다. 사람의 거절이 하나님의 선택을 취소하지 못합니다. 복음은 한 문 앞에서 거절당할 때,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다른 문으로 들어갑니다. 우리는 자주 닫힌 문 앞에서 절망합니다. 사람의 비난 앞에서 사명이 끝났다고 생각합니다. 관계가 끊어지고, 길이 막히고, 기대가 무너질 때, 하나님도 침묵하시는 것처럼 느낍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침묵은 부재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때로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가장 가까운 곳에 다음 문을 준비하십니다.
회당장 그리스보가 온 집안과 더불어 주를 믿었습니다. 이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방금 회당에서 바울은 대적과 비방을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회당장 그리스보가 믿습니다. 하나님은 가장 닫혀 보이는 자리에서도 택하신 백성을 부르십니다. 사람의 눈에는 고린도가 타락한 도시였습니다. 사람의 눈에는 회당이 닫힌 장소였습니다. 사람의 눈에는 바울이 실패한 전도자처럼 보였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에는 그곳에 이미 부르실 백성이 있었습니다. 복음 전도의 깊은 신비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누가 하나님의 백성인지 모릅니다. 우리는 누구의 마음속에 성령께서 이미 길을 내고 계신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해야 합니다. 두려워도 말해야 합니다. 약해도 말해야 합니다. 눈물이 나도 말해야 합니다. 말씀에 붙잡힌 사람은 결과를 계산하기 전에 순종합니다.
본문은 “수많은 고린도 사람도 듣고 믿어 세례를 받더라”고 말합니다. 듣고, 믿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복음은 귀를 통해 들어와 영혼을 깨우고,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하며, 세례로 보이는 표를 입게 합니다. 여기서 믿음은 인간이 자기 속에서 만들어 내는 종교적 감정이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 무너진 자가 성령의 은혜로 그리스도를 붙드는 손입니다. 그러나 그 손마저도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믿음은 인간의 공로가 아닙니다. 믿음은 빈손입니다. 믿음은 “주님, 저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 모든 것이 있습니다”라고 고백하는 영혼의 가난입니다. 값진 진주를 얻기 위해 자기 손에 움켜쥔 조개껍데기들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믿음은 새 방향입니다. 자기 자신을 향해 구부러져 있던 인간이 그리스도께로 돌이키는 것입니다. 세상의 인정, 종교적 자랑, 도덕적 우월감, 실패에 대한 절망, 죽음에 대한 공포, 그 모든 것에서 돌아서서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때 주님께서 밤에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주님께서 이 말씀을 하셨다는 것은 바울에게 두려움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필요 없는 말씀을 하지 않으십니다.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다면 바울은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침묵하지 말라”고 하셨다면 바울은 침묵하고 싶은 유혹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는 강철 같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상처받을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비난에 아파하고, 거절에 지치고, 위험 앞에서 떨고, 내일을 염려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바울을 책망만 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그 밤에 찾아오셨습니다.
밤은 인간의 힘이 가장 작아지는 시간입니다. 낮에는 사람들 앞에서 강한 척할 수 있습니다. 낮에는 일을 붙잡고 마음을 숨길 수 있습니다. 낮에는 말과 표정과 일정 속에 두려움을 감출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밤이 오면 영혼은 벌거벗겨집니다. 비난의 말이 다시 들리고, 실패의 장면이 다시 떠오르고, 내일의 위험이 커 보입니다. 그 밤에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복음의 사명자는 낮의 박수보다 밤의 음성으로 삽니다. 사람의 인정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으로 다시 일어납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헬라어로 μὴ φοβοῦ(메 포부)입니다. 이는 단순히 감정을 억누르라는 명령이 아닙니다. “두려움이 너를 지배하게 하지 말라”는 주님의 부르심입니다. 두려움은 인간에게 자연스러운 감정입니다. 그러나 두려움이 왕이 되면 우리는 침묵합니다. 두려움이 왕이 되면 우리는 복음을 타협합니다. 두려움이 왕이 되면 사람의 얼굴이 하나님의 얼굴보다 커 보입니다. 두려움은 우리의 입술을 닫고, 우리의 발걸음을 묶고, 우리의 사랑을 계산으로 바꾸며, 우리의 믿음을 생존 전략으로 축소시킵니다.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말하라.” 헬라어 λάλει(랄레이)입니다. 계속 말하라는 뜻입니다. 한 번 말하고 그치지 말라는 뜻입니다. 상황이 좋을 때만 말하지 말고, 반응이 있을 때만 말하지 말고, 박수받을 때만 말하지 말고, 거절과 비방 속에서도 복음의 말을 멈추지 말라는 뜻입니다. 또한 “침묵하지 말라”는 말씀은 μὴ σιωπήσῃς(메 시오페세스)입니다. 침묵은 때로 지혜일 수 있지만, 복음을 말해야 할 자리에서의 침묵은 두려움의 예배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입을 닫는 동안 누군가는 죽음의 법 아래에서 영원 없이 살아갑니다. 우리가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동안 누군가는 자기 죄를 해결할 길을 알지 못한 채 스스로를 정죄하거나 변명하며 무너져 갑니다.
물론 복음을 말한다는 것은 거칠게 사람을 몰아붙이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을 말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사랑으로 증언하는 것입니다. 진리는 칼처럼 날카롭지만, 그 칼자루는 눈물로 잡아야 합니다. 복음은 사람의 죄를 드러내지만, 정죄의 쾌감을 위해 드러내지 않습니다. 의사가 상처를 열어 고름을 빼내듯, 복음은 살리기 위해 아프게 합니다. 설교자는 사람을 이기기 위해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기 위해 우는 사람입니다. 전도자는 논쟁에서 승리하려는 사람이 아니라, 한 영혼이 그리스도의 품으로 돌아오기를 갈망하는 사람입니다.
주님은 이어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이것이 모든 사명의 중심입니다. 우리가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우리가 강해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침묵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우리가 설득력이 뛰어나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다시 일어서야 할 이유는 주님이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사람은 약해도 무너지지 않습니다. 사람에게 버림받아도 끝나지 않습니다. 세상이 닫아도 하나님이 여십니다. 바울의 안전은 고린도의 호의에 있지 않았습니다. 바울의 성공은 회당의 반응에 있지 않았습니다. 바울의 미래는 로마 제국의 법정에 있지 않았습니다. 바울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었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다.” 이 말씀은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임마누엘의 약속입니다. 아브라함이 고향을 떠날 때 하나님이 함께하셨고, 야곱이 벧엘의 돌베개 위에서 잠들 때 하나님이 함께하셨고, 요셉이 감옥에 있을 때 하나님이 함께하셨고, 모세가 바로 앞에 설 때 하나님이 함께하셨고, 여호수아가 요단 앞에 설 때 하나님이 함께하셨고, 다윗이 골리앗 앞에 설 때 하나님이 함께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됩니다. 예수는 임마누엘, 곧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죄인의 가장 깊은 자리까지 내려오신 사건입니다. 부활은 그 함께하심이 죽음조차 끊을 수 없다는 하나님의 선언입니다.
주님은 또 말씀하십니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것은 바울에게 고난이 전혀 없을 것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실제로 바울은 이후에도 수많은 고난을 겪습니다. 매 맞고, 갇히고, 배척당하고, 풍랑을 만나고, 감옥에 들어갑니다. 그러므로 이 약속은 고난 면제권이 아닙니다. 이 약속은 하나님의 뜻이 완성되기 전까지 어떤 대적도 바울의 사명을 끊을 수 없다는 보증입니다. 성도의 안전은 고난이 없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성도의 안전은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손이 놓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십자가를 지신 주님을 따르는 길에는 눈물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눈물은 버려진 자의 눈물이 아닙니다. 그 눈물은 주님의 손 안에 담긴 눈물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여기서 “백성”은 헬라어 λαός(라오스)입니다. 이는 단지 군중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백성이라는 의미를 품고 있습니다. 고린도는 사람의 눈에는 음란과 탐욕과 우상의 도시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에는 아직 불러내실 백성이 많은 도시였습니다. 이것이 전도의 소망입니다. 우리가 보는 것은 현재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은혜로 변화될 미래입니다. 우리는 사람의 겉모습을 봅니다. 하나님은 택하신 자를 부르시는 자신의 뜻을 보십니다. 우리는 “저 사람은 안 될 것이다”라고 쉽게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고,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부르시는 분입니다.
개혁주의 신앙은 전도를 약화시키지 않습니다. 오히려 전도의 근거를 가장 깊이 세웁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말합니다. 구원이 인간의 변덕에 달려 있다면 우리는 절망할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돌처럼 굳고, 죄는 깊고, 세상은 강하고, 전도자는 약합니다. 그러나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에 달려 있다면 우리는 소망을 가집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시면 닫힌 마음도 열리고, 교만한 지성도 무릎 꿇고, 상처 입은 영혼도 위로받고, 죄에 묶인 사람이 자유를 얻습니다. 우리는 누구를 구원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복음의 말씀을 통해 자기 백성을 부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합니다. 결과를 조작하려 하지 않고, 사람을 강제로 끌고 오려 하지 않고, 십자가의 복음을 신실하게 증언합니다.
어느 성도가 있었습니다. 오랫동안 가족을 위해 기도했지만, 가족은 복음을 비웃었습니다. 예배 가는 것을 시대에 뒤떨어진 일이라 말했고, 기도를 마음 약한 사람의 습관이라 여겼습니다. 그 성도는 어느 날 목회자에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이제 그만 말해야 할까요? 말할 때마다 상처가 됩니다.” 목회자는 한동안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말 속에 지친 사랑의 피가 묻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말을 줄일 때가 있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을 멈추지는 마십시오. 논쟁을 멈출 때가 있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를 멈추지는 마십시오. 복음은 우리가 원하는 속도로 열매 맺지 않아도, 하나님이 정하신 시간에 죽은 가지처럼 보이는 곳에서 싹을 틔울 수 있습니다.” 세월이 지나 그 가족 중 한 사람이 병상에서 성경을 읽기 시작했고, 눈물을 흘리며 예수님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그 순간 그 성도는 알았습니다. 오랜 세월의 침묵 속에서도 하나님은 일하고 계셨다는 것을. 사람이 보기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 같았지만, 하나님의 시간은 땅속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습니다.
복음의 역사는 대개 그렇게 옵니다. 번개처럼 오는 때도 있지만, 많은 경우 씨앗처럼 옵니다. 말씀이 뿌려지고, 눈물이 스며들고, 기다림이 흙이 되고, 성령의 바람이 불 때, 어느 날 닫힌 땅이 갈라지며 생명이 올라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낙심하지 마십시오. 자녀를 위해 기도하는 부모여, 낙심하지 마십시오. 남편과 아내를 위해 눈물 흘리는 성도여, 낙심하지 마십시오. 교회를 섬기다가 상처받은 일꾼이여, 낙심하지 마십시오. 말씀을 전하다가 거절당한 전도자여, 낙심하지 마십시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다.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다.”
바울은 그 말씀을 붙들고 일 년 육 개월을 머물며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환상은 도피의 신비가 아니라 순종의 능력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위로는 바울을 현실에서 빠져나가게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현실 한복판에 더 오래 머물게 했습니다. 참된 은혜는 우리를 무책임한 감상으로 끌고 가지 않습니다. 참된 은혜는 우리를 말씀의 자리, 사명의 자리, 사랑의 자리, 오래 견디는 자리로 보냅니다. 바울은 떠나고 싶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이 그를 머물게 했습니다. 사명은 때로 떠나는 용기이지만, 때로는 머무는 인내입니다.
우리 시대의 고린도는 어디입니까. 그것은 먼 고대 도시만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의 가정이 고린도일 수 있습니다. 말은 많지만 복음의 대화가 사라진 식탁, 물질은 있으나 감사가 메마른 생활, 지식은 늘었으나 하나님 경외가 희미해진 마음, 즐거움은 많으나 영혼은 외로운 사회, 정보는 넘치나 진리는 흐려진 시대, 바로 그곳이 고린도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오늘도 그 고린도 한복판에 우리를 세우십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조용히 하라. 믿음은 개인적인 취향으로 남겨 두라. 십자가는 불편하니 말하지 말라. 죄와 회개와 심판과 은혜를 말하지 말라. 사람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말라.”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물론 우리는 지혜롭게 말해야 합니다. 사랑 없이 진리를 말하면 사람을 찌르고, 진리 없이 사랑을 말하면 사람을 속입니다. 복음은 사랑과 진리가 십자가에서 입맞추는 하나님의 언어입니다. 우리는 오만하게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도 은혜가 아니면 같은 어둠 속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정죄의 자리에서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정죄에서 건지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두려움으로 침묵하지도 말고, 교만으로 소리치지도 말아야 합니다. 십자가 아래 무릎 꿇은 사람답게, 눈물과 담대함을 함께 가지고 말해야 합니다.
하나님에게 있어 겉모습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종교적 가면에 속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연출된 경건을 보시고 감탄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사람 앞에서 꾸민 얼굴이 아니라, 십자가 앞에서 찢어진 마음을 찾으십니다. 그리스도는 연출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는 우리 삶의 주인이십니다. 우리가 예수를 이용하여 더 높은 자리, 더 많은 소유, 더 안전한 인생만을 추구한다면, 우리는 십자가를 우회하는 사람들입니다. 십자가를 우회하면 부활도 놓칩니다. 십자가 없는 영광은 복음이 아니라 인간 욕망의 종교적 포장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통과한 사람은 압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값비싼지, 죄 사함이 얼마나 깊은지, 부활의 소망이 얼마나 찬란한지.
부활은 단지 죽은 후에 좋은 곳에 간다는 희미한 위로가 아닙니다. 부활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 세계를 시작하셨다는 선언입니다. 부활 가운데 성령의 새 세계가 육의 옛 세계와 접촉합니다. 낡은 인간이 무너지고 새로운 인간이 일어납니다. 절망의 시간 속에 영원이 침투합니다. 죄책의 무덤이 열리고 의롭다 하심의 아침이 밝아옵니다. 인간의 마지막 말처럼 보이는 죽음 위에 하나님께서 더 큰 말씀을 하십니다. “살라.” 그러므로 성도는 죽음을 모르는 사람이 아닙니다. 성도는 죽음보다 크신 하나님을 아는 사람입니다. 성도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아닙니다. 성도는 눈물 속에서도 부활의 아침을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바울이 고린도에서 들은 주님의 음성은 오늘 우리에게도 들려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무엇이 두렵습니까. 실패가 두렵습니까. 사람들의 말이 두렵습니까. 가족의 냉소가 두렵습니까. 늙어감이 두렵습니까. 병듦이 두렵습니까. 죽음이 두렵습니까. 교회의 미래가 두렵습니까. 자녀의 신앙이 두렵습니까. 내 믿음이 흔들리는 것이 두렵습니까. 주님은 두려움 없는 척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두려움보다 더 큰 현실을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다.”
이 말씀 하나면 충분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편에 서 계시지 않으면 온갖 무가치한 것들이 우리를 대항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면, 우리의 약함도 하나님의 능력이 머무는 자리가 됩니다. 우리의 실패도 하나님의 훈련장이 됩니다. 우리의 눈물도 하나님의 씨앗이 됩니다. 우리의 상처도 다른 영혼을 위로하는 통로가 됩니다. 우리가 붙잡은 것이 많아서 안전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붙잡고 계시기에 안전합니다. 믿음은 내가 하나님을 꽉 붙드는 힘이기 전에, 하나님께서 나를 놓지 않으시는 은혜에 대한 응답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다시 복음 앞에 서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동시에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질문입니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입니다. 인간이 누구인가, 죄인이 누구인가, 의가 무엇인가, 죽음이 무엇인가, 생명이 무엇인가, 하나님이 누구신가, 이 모든 질문의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삶의 한계를 넘어서는 하나님의 발걸음입니다. 그분은 낡은 세계의 끝이요 새 창조의 시작입니다. 그분은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셨고, 부활로 우리의 소망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침묵하지 맙시다. 그러나 사랑 없이 떠들지도 맙시다. 두려움으로 물러서지 맙시다. 그러나 교만으로 앞서지도 맙시다. 말씀에 붙잡힌 사람답게, 십자가에 무릎 꿇은 사람답게, 성령의 위로를 받은 사람답게, 우리에게 맡겨진 고린도에서 복음을 살아내고 말합시다. 가정에서, 교회에서, 일터에서, 병상에서, 노년의 조용한 시간 속에서, 아직 숨이 있고 아직 기도의 문이 열려 있을 때,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말합시다.
혹시 오늘 마음이 무너진 분이 있습니까. 너무 오래 기도했으나 변한 것이 없어 낙심한 분이 있습니까. 복음을 전했으나 거절당해 상처받은 분이 있습니까. 자기 자신조차 믿음이 약해져 부끄러운 분이 있습니까. 주님은 오늘 밤에도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침묵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있다.” 주님의 함께하심은 우리의 마지막 피난처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우리의 죄보다 깊고, 주님의 부활은 우리의 죽음보다 강하며, 주님의 은혜는 우리의 실패보다 큽니다.
바울은 고린도에 머물렀습니다. 우리도 오늘 머물러야 할 자리에 머물러야 합니다. 기도의 자리에 머물고, 말씀의 자리에 머물고, 사랑의 자리에 머물고, 사명의 자리에 머물러야 합니다. 떠나고 싶은 마음이 들 때,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포기하고 싶은 밤에, 주님의 약속을 붙들어야 합니다. 사람의 반응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오늘은 보이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부르실 사람이 있습니다. 오늘은 닫힌 것 같아도 하나님께서 여실 문이 있습니다. 오늘은 밤처럼 깊어도 하나님의 아침은 이미 오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십자가를 붙드십시오. 십자가는 우리의 변명이 끝나는 자리입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절망도 끝나는 자리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더 이상 자기 의로 살 수 없고, 더 이상 자기 죄 때문에 죽을 필요도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 죽으셨고, 우리를 위하여 살아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 일어납니다. 눈물이 있어도 일어납니다. 두려움이 있어도 일어납니다. 상처가 있어도 일어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주님의 말씀을 마음 깊이 받으십시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침묵하지 마십시오. 주님이 함께하십니다. 이 성중에, 이 가정 안에, 이 시대 속에, 이 교회 주변에, 아직 주님께서 부르실 백성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복음의 씨앗을 뿌리십시오. 기도의 눈물을 뿌리십시오. 사랑의 말을 뿌리십시오. 십자가의 은혜를 뿌리십시오.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실 것입니다. 마지막 날, 우리가 뿌린 눈물의 자리에서 주님은 영원한 기쁨의 단을 거두게 하실 것입니다. 그날에는 모든 두려움이 침묵하고, 모든 눈물이 닦이며, 모든 십자가의 길이 영광의 빛 안에서 해석될 것입니다. 그날까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말하십시오. 예수는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는 우리의 구원이십니다. 예수는 죽음보다 강한 생명이십니다. 예수는 오늘도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설교 준비와 묵상을 위한 간략 자료
묵상 포인트
바울은 고린도의 거대한 세속성과 종교적 반대 앞에서 두려움을 경험했으나, 주님의 음성으로 다시 말씀 사역의 자리에 섰습니다. 본문은 복음 사역의 근거가 인간의 용기나 환경의 호의가 아니라 “내가 너와 함께 있다”는 주님의 임재에 있음을 보여 줍니다.
강해 핵심
행 18:5는 바울이 말씀에 사로잡혀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증언한 장면입니다. 행 18:6은 복음 거절 앞에서 전도자가 자기 책임을 다한 후 하나님의 다음 인도하심으로 나아가는 장면입니다. 행 18:7-8은 닫힌 회당 옆에 열린 집, 곧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새로운 복음의 문을 보여 줍니다. 행 18:9-10은 사명자의 두려움 속에 찾아오시는 주님의 위로와 명령입니다. 행 18:11은 말씀을 붙든 인내의 열매입니다.
주석적 관찰
고린도는 상업과 항구 문화, 우상 숭배와 도덕적 타락이 뒤섞인 도시였습니다. 이런 배경에서 바울의 복음 증언은 단순한 종교 활동이 아니라 세상의 가치 체계 전체를 향한 하나님의 도전이었습니다. 주님은 바울에게 고난이 전혀 없을 것이라고 약속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명이 완성되기 전까지 어떤 대적도 그를 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보증하셨습니다.
원어 주석
συνείχετο τῷ λόγῳ(쉬네이케토 토 로고): “말씀에 붙잡히다, 말씀에 몰두하다”는 뜻으로, 바울의 사역이 인간적 열심이 아니라 말씀의 강권하심에서 나왔음을 보여 줍니다.
μὴ φοβοῦ(메 포부): “두려워하지 말라”는 명령으로, 두려움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의 지배를 거부하라는 뜻입니다.
λάλει(랄레이): “계속 말하라”는 의미를 지니며, 복음 증언의 지속성을 강조합니다.
μὴ σιωπήσῃς(메 시오페세스): “침묵하지 말라”는 뜻으로, 복음을 말해야 할 자리에서 두려움 때문에 물러서지 말라는 주님의 명령입니다.
λαός(라오스): “백성”이라는 뜻으로, 하나님께서 고린도 안에 이미 자기 백성을 두고 계셨음을 보여 줍니다.
금언
말씀이 사람을 붙잡을 때, 두려움은 사명의 종이 된다.
닫힌 문 옆에도 하나님이 여신 문은 있다.
복음 전도는 사람을 이기는 일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사람을 살리는 일이다.
하나님의 임재는 사명자의 가장 깊은 안전이다.
신학적 정리
본문은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복음 증언이 대립하지 않음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께서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바울은 침묵하지 않고 말해야 했습니다. 선택은 전도의 무용성을 뜻하지 않고 전도의 확실한 소망을 뜻합니다. 구원은 성령의 역사이며, 성령은 말씀을 통해 택하신 백성을 부르십니다.
주제별 정리
복음: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다.
사명: 두려움 속에서도 말하라.
임재: 내가 너와 함께 있다.
선택: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다.
인내: 바울은 일 년 육 개월을 머물며 말씀을 가르쳤다.
소망: 닫힌 문이 끝이 아니라 하나님의 새 문이 시작이다.
목회적 정리
성도는 가족과 이웃의 냉담함 앞에서 쉽게 낙심합니다. 그러나 복음의 열매는 인간의 즉각적 반응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주님은 오늘도 두려워하는 성도에게 말씀하십니다. 침묵하지 말고 사랑으로 말하라. 조급해하지 말고 기도하라. 사람의 마음을 강제로 열려 하지 말고, 말씀과 성령의 능력을 신뢰하라.
성도들의 결단과 적용
내가 두려워 침묵했던 복음의 자리가 어디인지 돌아봅니다.
내 힘으로 사람을 변화시키려 했던 조급함을 회개합니다.
가정과 일터와 교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사랑과 겸손으로 증언하기로 결단합니다.
닫힌 문 앞에서 절망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다음 문을 믿음으로 기다립니다.
오늘도 “내가 너와 함께 있다”는 주님의 약속을 붙들고 말씀의 자리로 돌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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