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로 사신 교회 (사도행전 20:26~38)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사도 바울의 마지막 눈물 앞에 서 있습니다. 이 본문은 단순한 작별 인사가 아닙니다. 이것은 한 사도가 자기 생애를 불태운 뒤 남기는 영혼의 유언이며, 한 목자가 양 떼를 향해 흘리는 마지막 눈물이며, 한 복음의 증인이 자기 피와 땀과 기도를 다 쏟아부은 교회를 하나님의 손에 맡기는 거룩한 순간입니다. 이 장면은 밀레도 바닷가의 어느 조용한 만남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하늘과 땅이 만나는 깊은 떨림이 있습니다. 시간 속에 서 있는 한 인간 바울이 영원의 주인이신 하나님 앞에서 자기 사명의 시간을 결산하고 있습니다. 지나온 길은 고난이었고, 앞에 놓인 길도 결박과 환난이었지만, 그의 입술에는 자기 연민이 아니라 복음의 엄숙한 확신이 흐릅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증언하거니와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니.” 여기서 “깨끗하다”는 말은 헬라어로 καθαρός, 카타로스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도덕적으로 흠이 없다는 뜻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서 맡겨진 말씀을 감추지 않았고, 두려움 때문에 축소하지 않았고, 사람의 비위를 맞추기 위하여 복음을 희석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자기 양심을 하나님 앞에 세웁니다. 그는 사람들의 박수 앞에 서지 않았습니다. 시대의 유행 앞에 서지 않았습니다. 종교적 성공의 무대 앞에 서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 있었습니다. 인간은 얼마나 자주 보이는 것에 속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붙드는 것은 대개 가시적이고 시간적인 것들입니다. 이름, 명예, 재물, 지위, 평가, 성취, 소유, 건강, 관계, 업적, 눈에 보이는 기념비들입니다. 인간은 자기 시간을 영원처럼 꾸미고, 자기 업적을 구원처럼 포장하며, 자기 이름을 무너지지 않을 성처럼 세우려 합니다. 그러나 시간은 아무에게도 영원한 왕좌를 허락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손으로 세운 탑은 결국 바람 앞에 먼지가 되고, 인간의 혀로 쌓은 명성은 침묵 속에 가라앉으며, 인간의 마음이 숭배하던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빛 앞에서 자기 무게를 잃어버립니다.
바울이 “나는 깨끗하다”고 말할 수 있었던 까닭은 자신이 위대한 사람이어서가 아닙니다. 그는 자기 안에서 의로움을 발견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자기 열심을 자랑한 것도 아닙니다. 그는 다만 하나님께서 맡기신 말씀을 남김없이 전했습니다.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여러분에게 전하였음이라.” 여기서 “하나님의 뜻”은 헬라어로 βουλή, 불레입니다. 이것은 일시적인 생각이나 변덕스러운 계획이 아니라 하나님의 깊은 경륜, 하나님의 구속의 의논, 창세 전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품으신 구원의 뜻을 가리킵니다. 바울은 자기 의견을 전한 것이 아닙니다. 자기 사상을 전한 것도 아닙니다. 종교적 위로의 문장을 나누어 준 것도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인을 구원하시고, 십자가에서 원수를 자녀 삼으시며, 부활 안에서 죽음을 새 생명의 문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계획을 전했습니다.
교회가 잃어버리기 쉬운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교회는 때때로 하나님의 뜻을 전한다고 말하면서 사람의 기대를 전합니다. 복음이라 말하면서 성공의 욕망을 전합니다. 은혜라 말하면서 세속의 안락을 약속합니다. 십자가를 말하면서도 십자가의 걸림돌은 조심스럽게 치워 버리고, 부활을 말하면서도 죽음을 통과한 생명의 신비는 희미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러나 바울의 복음은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복음은 인간의 자존심을 부드럽게 마사지해 주는 종교적 언어가 아니었습니다. 그의 복음은 하나님 앞에서 인간을 벌거벗게 세우는 말씀입니다. 인간이 자기 의로 숨고, 자기 공로로 변명하고, 자기 종교성으로 치장할 때, 복음은 그 모든 옷을 벗기고 십자가 앞에 세웁니다. 그리고 거기서 말합니다. 너는 스스로 살 수 없다. 너는 스스로 의로울 수 없다. 너는 네 피로 너를 구원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이 피 흘리셨다. 그 피가 너보다 크고, 네 죄보다 깊고, 네 죽음보다 강하다.
바울은 이어서 장로들에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참으로 놀라운 순서입니다. 그는 먼저 양 떼를 살피라고만 하지 않습니다. “자기를 위하여” 삼가라고 합니다. 목자는 먼저 자기 영혼을 하나님 앞에 세워야 합니다. 교회를 돌보는 사람은 먼저 자기 마음의 제단이 식지 않았는지 살펴야 합니다. 설교하는 사람은 먼저 자기 귀가 말씀 앞에 열려 있는지 물어야 합니다. 가르치는 사람은 먼저 자기 무릎이 기도의 자리에서 무너져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남의 영혼을 걱정하면서 자기 영혼을 방치하는 것은 거룩한 일이 아니라 위험한 일입니다. 불 꺼진 등대는 배를 구할 수 없습니다. 물 마른 우물은 목마른 사람을 살릴 수 없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울어 본 적 없는 입술은 십자가를 말할 수는 있어도 십자가의 향기를 전하기는 어렵습니다.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교회의 직분은 단순한 조직의 자리가 아닙니다. 교회는 인간이 만든 종교 단체의 장식품이 아닙니다. 바울은 장로들에게 말합니다. 성령께서 여러분을 세우셨다고. 교회 안의 참된 직분은 인간의 야망이 올라가는 계단이 아니라 성령의 손에 붙들리는 멍에입니다. 그것은 권세라기보다 책임이고, 명예라기보다 눈물이며, 지배라기보다 섬김입니다. 세상은 자리에 앉은 사람을 높게 보지만, 하나님은 그 자리에 엎드린 사람을 보십니다. 세상은 얼마나 많은 사람이 따르는지를 묻지만, 하나님은 한 영혼을 위해 얼마나 울었는지를 물으십니다. 세상은 성취를 계산하지만, 하나님은 충성을 달아 보십니다.
바울은 교회를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라고 부릅니다. 이 말씀 앞에서 우리는 신발을 벗어야 합니다. 교회는 사람들의 취향으로 모인 동호회가 아닙니다. 교회는 인간의 종교성이 만든 문화 기관도 아닙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피로 사신 공동체입니다. “사셨다”는 뜻을 가진 헬라어 표현은 περιεποιήσατο, 페리에포이에사토인데, 값을 치르고 자기 것으로 삼으셨다는 의미를 품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얻으신 값은 금도 아니고 은도 아니고 인간의 공로도 아닙니다. 그 값은 피였습니다.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피였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가볍게 다룰 수 없습니다. 성도 한 사람도 가볍게 볼 수 없습니다. 연약한 성도, 느린 성도, 상처 많은 성도, 자주 넘어지는 성도, 아직 믿음이 어린 성도도 주님의 피 값으로 산 영혼입니다.
우리는 사람을 너무 쉽게 판단합니다. 저 사람은 도움이 된다, 저 사람은 부담이 된다, 저 사람은 쓸모가 있다, 저 사람은 골치 아프다, 저 사람은 우리 편이다, 저 사람은 불편하다. 그러나 십자가는 우리의 계산표를 찢어 버립니다. 주님은 우리가 효율성으로 분류한 사람들을 피로 사셨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귀찮다고 밀어낸 사람들을 자기 품에 안으셨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가능성이 없다고 단정한 사람들에게 새 이름을 주셨습니다. 교회 안에서 사람을 볼 때, 우리는 먼저 그 사람의 성격을 보기 전에 그 사람 위에 묻어 있는 그리스도의 피를 보아야 합니다. 그 피를 보는 순간, 우리의 말은 조심스러워지고, 우리의 판단은 낮아지고, 우리의 사랑은 깊어집니다.
하나님의 영원성은 모든 시간성의 근원입니다. 인간은 자기 시간 안에서 살다가 자기 시간의 끝을 만납니다. 죽음은 인간의 모든 일정표를 중단시키는 신적 정지처럼 우리 앞에 서 있습니다. 누구도 죽음을 비켜갈 수 없습니다. 죽음은 부자의 문 앞에도 오고, 가난한 자의 방에도 오며, 학자의 책상에도 오고, 아이의 장난감 옆에도 그림자를 드리웁니다. 그러나 성도에게 죽음은 마지막 주인이 아닙니다. 죽음은 우리를 삼키는 신이 아니라,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세우는 문지기일 뿐입니다. 우리가 참으로 두려워해야 할 것은 죽음 자체가 아니라 죽음 너머에서 우리를 만나시는 거룩하신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무한히 소망해야 할 것도 바로 그 하나님입니다. 왜냐하면 그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심판의 어둠에 버려두지 않으시고, 피로 씻어 자녀 삼으시며, 영원한 시간의 새 아침으로 우리를 부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시간 속에서 영원을 증언하는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사라질 세상 한가운데서 사라지지 않을 나라를 바라보는 백성입니다. 교회는 죽음이 여전히 현장에 먼저 와 있는 이 세상에서 부활의 새벽을 미리 들이마시는 사람들입니다. 교회는 세상의 가능성 위에 서 있지 않습니다. 교회는 인간의 능력 위에 서 있지 않습니다. 교회는 십자가라는 불가능성 위에 서 있습니다. 십자가는 인간의 눈에는 패배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에는 승리입니다. 십자가는 세상의 언어로는 수치입니다. 그러나 하늘의 언어로는 영광입니다. 십자가는 인간의 역사 안에서는 처형장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속사 안에서는 새 창조의 문입니다.
바울은 장로들에게 경고합니다. “내가 떠난 후에 사나운 이리가 여러분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사나운 이리”는 헬라어로 λύκοι βαρεῖς, 뤼코이 바레이스입니다. 무거운 이리, 난폭한 이리, 양 떼를 해치는 이리입니다. 교회는 언제나 사랑의 공동체이지만, 동시에 깨어 있어야 하는 공동체입니다. 사랑은 순진함과 같지 않습니다. 용서는 분별 없음과 같지 않습니다. 은혜는 진리를 포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모든 사람을 품지만, 모든 거짓을 허락하지는 않습니다. 교회 안에는 언제나 양 떼를 아끼지 않는 말들이 들어올 수 있습니다. 그럴듯한 경건의 모양을 하고 들어오지만, 결국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흐리게 하는 말들이 있습니다. 은혜를 말하지만 회개 없는 안일함을 조장하는 말이 있고, 거룩을 말하지만 사랑 없는 정죄로 영혼을 짓누르는 말이 있습니다. 축복을 말하지만 하나님 자신보다 하나님의 선물만을 탐하게 하는 말이 있고, 자유를 말하지만 십자가의 순종을 조롱하는 말이 있습니다.
더 무서운 것은 바울이 말한 다음 경고입니다. “또한 여러분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라.” 밖에서 오는 이리도 무섭지만, 안에서 일어나는 자기중심의 말은 더욱 아픕니다. 교회가 무너지는 것은 언제나 외부의 박해 때문만이 아닙니다. 때로는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보다 자기를 더 크게 만들려는 마음 때문에 무너집니다. 사람들을 주님께 데려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묶어 두려는 마음,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영향력을 확장하려는 마음, 양 떼를 먹이는 것이 아니라 양 떼를 자기 존재의 증거로 삼으려는 마음, 이것이 교회의 깊은 위험입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얼마나 교묘하게 숭배하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을 높인다고 말하면서 사실은 자기 이름의 탑을 쌓고, 진리를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사실은 자기 의견의 왕국을 세웁니다. 경건의 말로 포장된 자아 숭배는 세속의 노골적인 탐욕보다 더 위험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깨어.” “일깨어”는 헬라어로 γρηγορεῖτε, 그레고레이테입니다. 깨어 있으라는 뜻입니다. 잠들지 말라는 뜻입니다. 영혼의 눈을 감지 말라는 뜻입니다. 깨어 있음은 불안에 떠는 삶이 아닙니다. 깨어 있음은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삶입니다. 깨어 있는 사람은 세상의 소리를 다 듣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음성을 놓치지 않는 사람입니다. 깨어 있는 사람은 모든 위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아니라 복음을 잃어버리는 것을 가장 두려워하는 사람입니다. 깨어 있는 교회는 유행의 파도에 쉽게 떠내려가지 않습니다. 깨어 있는 성도는 자기 감정이 진리의 왕좌에 앉지 못하게 합니다. 깨어 있는 목자는 사람들의 칭찬보다 하나님의 맡기심을 더 무겁게 여깁니다.
바울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도의 사역이 얼마나 인격적인지 봅니다. 그는 군중을 상대했지만 군중으로만 보지 않았습니다. 그는 “각 사람”을 보았습니다. 교회는 숫자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교회는 얼굴로 존재합니다. 교회는 통계표가 아니라 이름입니다. 교회는 좌석 수가 아니라 영혼입니다. 바울의 눈물은 추상적인 인류애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각 사람을 위해 울었습니다. 넘어지는 사람을 위해 울었고, 미혹되는 사람을 위해 울었고, 완고한 사람을 위해 울었고, 약한 사람을 위해 울었고, 자기 자신을 보지 못하는 사람을 위해 울었습니다. 참된 목회는 언제나 눈물의 문법을 가집니다. 눈물이 없는 권면은 쉽게 칼이 되고, 사랑 없는 진리는 쉽게 돌이 됩니다. 그러나 눈물로 전해지는 진리는 영혼 깊은 곳에 스며듭니다.
오늘 우리는 눈물의 가치를 잃어버린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빠른 시대입니다. 계산하는 시대입니다. 효율을 숭배하는 시대입니다. 사람의 마음도 성과표 안에 넣으려 하고, 영혼의 회복도 프로그램으로 단축하려 하며, 교회의 성숙도 숫자의 그래프로 증명하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을 그렇게 다루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기다리십니다. 오래 참으십니다. 다시 부르십니다. 탕자가 먼 나라에서 돌아올 때까지 아버지의 마음은 문 밖에 서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세 번 부인한 뒤에도 부활하신 주님은 숯불 곁에서 그를 다시 부르셨습니다. 도망친 제자들을 향해서도 주님은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서두르지 않지만 결코 늦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조급하지 않지만 결코 식지 않습니다.
바울은 이제 그들을 자기 손에 붙들 수 없습니다. 그는 떠나야 합니다. 그래서 말합니다. “지금 내가 여러분을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얼마나 아름다운 장면입니까. 참된 목자는 결국 사람을 자기에게 붙들어 두지 않습니다. 주님께 맡깁니다. 말씀께 맡깁니다. 은혜께 맡깁니다. “은혜”는 헬라어로 χάρις, 카리스입니다. 받을 자격 없는 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호의, 죄인을 향하여 낮아지시는 하나님의 선물,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바울은 자기 부재를 하나님의 은혜로 메웁니다. 그는 말하지 않습니다. 내가 없으면 너희는 끝이다. 내가 없으면 교회는 무너진다. 내가 없으면 아무것도 안 된다. 그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압니다. 교회는 바울의 피로 산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로 산 것입니다. 교회는 바울의 능력으로 세워진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세워진 것입니다. 교회는 인간 지도자의 존재감으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은혜의 말씀으로 자랍니다.
여기에 교회의 자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에게 감사해야 하지만 사람을 구주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목회자를 존중해야 하지만 목회자를 그리스도의 자리에 올려놓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사역자를 사랑해야 하지만 사역자를 은혜의 근원으로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모든 참된 사역자는 결국 자기 손을 내려놓고 말해야 합니다. 주님께 부탁합니다. 은혜의 말씀께 맡깁니다. 내 말보다 큰 말씀이 여러분을 세울 것입니다. 내 눈물보다 깊은 은혜가 여러분을 붙들 것입니다. 내 품보다 넓은 하나님의 품이 여러분을 지킬 것입니다.
은혜의 말씀은 “능히 여러분을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말씀은 단지 위로의 문장이 아닙니다. 말씀은 세우는 능력입니다. 말씀은 무너진 마음을 다시 일으키고, 길 잃은 영혼을 다시 돌이키며, 죄의 감옥에 갇힌 사람에게 자유의 창을 열어 줍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말이 있습니다. 인간을 부추기는 말, 인간을 취하게 하는 말, 인간을 분노하게 하는 말, 인간을 속이는 말, 인간을 높이다가 결국 더 깊은 공허로 떨어뜨리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은혜의 말씀은 인간을 자기 자신에게서 해방하여 그리스도께로 데려갑니다. 이 말씀은 인간의 가능성을 찬양하지 않고 하나님의 가능성을 선포합니다. 이 말씀은 죄인의 자기 개선을 최종 희망으로 삼지 않고 십자가와 부활을 새 창조의 근거로 세웁니다.
인간은 자기 힘으로 영원을 붙잡으려 하지만, 영원은 인간의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영원은 소유물이 아닙니다. 영원은 은혜입니다. 한 방울의 영원은 시간의 지배 아래 있는 사물들의 망망대해보다 무겁습니다. 세상의 모든 소유를 다 모아도 하나님 없는 영혼의 공허를 채울 수 없습니다. 인간은 자기 인생을 연장하고 싶어 합니다. 더 오래 살고, 더 많이 가지고, 더 높이 올라가고, 더 깊이 기억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갈망의 밑바닥에는 영원을 향한 목마름이 있습니다. 문제는 인간이 영원을 향해 창조되었으나 영원의 주인을 떠났다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시간적인 것으로 영원한 갈증을 해결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시간적인 것은 시간적인 것일 뿐입니다. 썩을 것은 썩고, 사라질 것은 사라지며, 흔들릴 것은 흔들립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흔들리지 않는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은 인간이 스스로 만든 작은 진리들 옆에 놓이는 또 하나의 종교적 진리가 아닙니다. 복음은 모든 인간적 진리들을 하나님의 질문대 앞에 세웁니다. 너희가 말하는 구원은 무엇이냐. 너희가 붙드는 의는 무엇이냐. 너희가 자랑하는 자유는 누구를 향한 자유냐. 너희가 두려워하는 죽음 앞에서 너희 희망은 어디 있느냐. 복음은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모든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삶의 한계를 넘어서는 하나님의 발걸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죄와 죽음과 율법 아래 갇힌 인간 현실을 뒤집는 새 창조의 시작입니다.
바울은 자기의 삶으로 이 복음을 증언했습니다. 그는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않았습니다. 이 말은 단순한 청빈의 미덕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 사역의 중심이 무엇인지를 보여 줍니다. 바울은 사람의 영혼을 자기 이익의 수단으로 삼지 않았습니다. 그는 양 떼를 사랑했지 양 떼의 것을 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교회를 섬겼지 교회를 이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손수 일하여 자신과 동행들의 필요를 감당했습니다. 복음의 자유가 돈의 포로가 되지 않도록, 사역의 순수성이 탐욕의 그림자에 가려지지 않도록, 그는 자기 손에 굳은살이 박히도록 일했습니다.
오늘 이 시대에 교회가 다시 들어야 할 말씀이 이것입니다. 교회가 세상 앞에서 잃어버린 신뢰를 회복하는 길은 화려한 구호가 아닙니다. 더 세련된 포장이 아닙니다. 더 강한 영향력의 과시가 아닙니다. 교회가 다시 복음 앞에 가난해지는 것입니다. 교회가 다시 십자가 앞에 무릎 꿇는 것입니다. 교회가 다시 약한 자를 붙드는 손이 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다시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복되다는 주님의 말씀을 몸으로 살아내는 것입니다. 바울은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는 말씀을 기억하라고 합니다. 이 한 문장은 교회의 심장을 다시 뛰게 합니다. 세상은 받는 자가 복되다고 말합니다. 더 많이 쌓는 자가 성공했다고 말합니다. 더 많이 움켜쥔 자가 안전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정반대로 말씀하십니다. 주는 것이 복되다. 왜냐하면 하나님 자신이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성부께서 아들을 주셨고, 성자께서 자기 생명을 주셨고, 성령께서 은혜를 부어 주셨습니다. 삼위 하나님의 생명은 자기 증여의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주는 삶은 손해 보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삶입니다.
여기 한 비유를 생각해 봅시다. 어느 바닷가 마을에 오래된 등대가 있었습니다. 그 등대는 화려하지 않았습니다. 관광객들이 사진을 찍으러 찾아오는 유명한 장소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밤마다 그 등대는 어김없이 불을 밝혔습니다. 폭풍이 치는 밤에도, 짙은 안개가 바다를 덮는 밤에도, 등대지기는 계단을 올라가 기름을 살피고 불빛을 지켰습니다. 어느 날 젊은 사람이 물었습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데 왜 그렇게 하십니까? 배가 몇 척이나 이 빛을 보는지 어떻게 아십니까?” 늙은 등대지기는 조용히 대답했습니다. “나는 몇 척이 보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한 척이라도 이 빛을 보고 암초를 피한다면, 오늘 밤 내가 깨어 있었던 이유는 충분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는 이 땅의 등대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사람이 우리의 수고를 알아주는지 모를 수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 한 번이 누구의 밤을 살리는지 모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작은 섬김이 누구의 절망을 돌이키는지 모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십니다. 한 영혼이 빛을 보고 돌아온다면, 한 사람이 십자가를 붙들고 다시 일어난다면, 한 가정이 말씀 앞에 무릎 꿇는다면, 우리의 눈물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바울은 무릎을 꿇고 그 모든 사람들과 함께 기도했습니다. 설교의 마지막은 논쟁이 아니라 기도였습니다. 경고의 마지막도 기도였고, 권면의 마지막도 기도였고, 사랑의 마지막도 기도였습니다. 참된 말씀은 결국 무릎으로 내려갑니다. 인간의 언어가 다 끝나는 자리에서 기도가 시작됩니다. 우리가 더 이상 붙들 수 없을 때,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기도입니다. 우리가 더 이상 설명할 수 없을 때, 하나님 앞에 우는 것이 기도입니다. 우리가 더 이상 해결할 수 없을 때,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에 사람을 부탁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그들은 다 크게 울었습니다.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다시 그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는 말 때문에 더욱 근심했습니다. 이 장면은 너무 인간적이어서 오히려 거룩합니다. 믿음은 사람을 무정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복음은 이별의 아픔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성령 충만은 눈물을 없애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성령은 우리의 눈물을 거룩하게 하십니다. 믿음 있는 사람도 웁니다. 소망 있는 사람도 이별 앞에서 가슴이 찢어집니다. 그러나 성도의 눈물은 절망의 바다가 아닙니다. 그 눈물 아래에는 부활의 강이 흐릅니다. 성도는 울지만 무너지지 않습니다. 성도는 헤어지지만 영원히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성도는 죽음을 통과하지만 죽음에게 최종 발언권을 넘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 본문은 결국 우리에게 묻습니다. 우리는 무엇에 생을 걸고 있습니까? 우리는 무엇을 남기고 떠날 사람들입니까? 바울은 에베소 장로들에게 자기 이름을 남기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 업적을 기념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 동상을 세우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들을 주와 은혜의 말씀에 맡겼습니다. 이것이 참된 신앙인의 마지막 모습입니다. 나는 사라져도 말씀은 남아야 합니다. 나는 떠나도 그리스도는 보여야 합니다. 내 이름은 잊혀도 십자가는 붙들려야 합니다. 내 손은 약해져도 하나님의 손이 그들을 지키셔야 합니다.
인간은 언젠가 반드시 자기 시간의 끝에 섭니다. 그때 우리는 무엇을 붙들겠습니까? 금과 은입니까? 옷입니까? 명예입니까? 사람들의 기억입니까? 우리의 자녀입니까? 우리의 건강입니까? 우리의 종교적 성취입니까? 그 모든 것은 귀할 수 있으나 구원이 될 수는 없습니다. 죽음 앞에서 인간이 만나는 것은 죽음 자체가 아니라 삶과 죽음의 주인이신 하나님입니다. 그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살리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은 더 많은 소유가 아니라 더 깊은 은혜입니다. 더 큰 이름이 아니라 더 낮은 십자가입니다. 더 안전한 세상 자리가 아니라 더 확실한 하나님 나라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율법적 행위는 우리의 안전 보장이 되지 못합니다. 우리의 선행도, 우리의 종교적 열심도, 우리의 오래된 교회 생활도, 우리의 직분도, 우리의 눈물도 그 자체로 하나님 앞에 설 근거가 되지 못합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말합니다. 네가 설 수 없는 자리에 그리스도가 서셨다. 네가 감당할 수 없는 심판을 그리스도가 감당하셨다. 네가 갚을 수 없는 빚을 그리스도가 피로 갚으셨다. 네가 넘어갈 수 없는 심연을 그리스도가 자기 몸으로 건너셨다. 그러므로 믿음은 자기 자신을 붙드는 손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붙드는 빈손입니다. 믿음은 인간의 위대한 업적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가난해진 영혼의 항복입니다. 믿음은 텅 빈 공중으로 떨어지는 무모함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품으로 자신을 맡기는 성령의 역사입니다.
우리가 오늘 다시 들어야 할 말씀은 이것입니다. 교회는 주님의 피로 산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거룩해야 합니다. 교회는 주님의 피로 산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사랑해야 합니다. 교회는 주님의 피로 산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깨어 있어야 합니다. 교회는 주님의 피로 산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약한 자를 도와야 합니다. 교회는 주님의 피로 산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이름을 높여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여러분의 마음이 지쳐 있습니까? 오래 섬겼지만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것 같습니까? 기도했지만 변화가 더딘 것 같습니까? 사랑했지만 상처만 남은 것 같습니까? 말씀을 붙들었지만 현실은 여전히 무겁습니까? 바울의 눈물을 보십시오. 그는 승리의 길을 눈물 없이 걷지 않았습니다. 그는 사명의 길을 상처 없이 걷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복음을 붙들었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그의 감정보다 크고, 고난보다 깊고, 이별보다 강하고, 죽음보다 영원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약할 때 주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실패했을 때 주님은 우리를 폐기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눈물 가운데 무릎 꿇을 때 주님은 우리 눈물을 낭비하지 않으십니다. 십자가 아래 떨어진 눈물은 땅에 묻혀 사라지는 물방울이 아닙니다. 그것은 부활의 아침을 기다리는 씨앗입니다. 오늘 우리가 드리는 작은 순종, 작은 기도, 작은 용서, 작은 섬김, 작은 인내가 하나님의 손에 들리면 영원의 무게를 갖습니다. 세상은 그것을 보잘것없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것을 기억하십니다.
그러므로 다시 일어나십시오. 주님의 피가 여러분보다 먼저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은혜가 여러분보다 깊이 일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여러분을 다시 세울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가정이 흔들려도 은혜의 말씀에 맡기십시오. 여러분의 자녀가 멀어 보여도 주님께 맡기십시오. 여러분의 교회가 연약해 보여도 주님의 피로 산 교회임을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의 삶이 끝없는 이별과 눈물의 길처럼 보여도 부활의 아침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바울은 떠났지만 복음은 남았습니다. 사도는 보이지 않게 되었지만 은혜의 말씀은 교회를 세웠습니다. 눈물의 작별은 있었지만 성령의 역사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밀레도의 바닷가에 울음소리가 있었으나, 하늘에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오늘 우리도 언젠가 누군가에게 마지막 말을 남기게 될 것입니다. 그때 우리의 입술에 남아야 할 고백은 이것이어야 합니다. 나는 너희를 주와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한다. 나는 완전하지 않았으나 그리스도의 피는 완전하다. 나는 약했으나 하나님의 은혜는 강하다. 나는 떠나지만 주님은 너희와 함께 계신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눈물 속에서도 십자가를 붙드십시오. 흔들리는 시간 속에서도 영원의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보이는 것이 무너질 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를 기억하십시오. 죽음이 우리보다 먼저 와 있는 것처럼 보여도,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죽음보다 먼저, 죽음보다 깊이, 죽음보다 강하게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주님이 피로 사신 교회를 주님이 끝까지 지키실 것입니다. 주님이 부르신 영혼을 주님이 끝까지 붙드실 것입니다. 주님이 시작하신 은혜를 주님이 완성하실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다시 무릎을 꿇고, 다시 말씀을 붙들고, 다시 사랑을 선택하고, 다시 약한 자의 손을 잡고, 다시 복음의 길을 걸어갑시다.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복되다고 말씀하신 주님의 길을 따라, 우리도 우리의 남은 시간을 사랑으로 태우고, 우리의 남은 힘을 섬김으로 드리고, 우리의 남은 눈물을 기도로 바치며, 마침내 우리의 모든 생을 주와 그 은혜의 말씀에 맡깁시다. 아멘.
설교 준비와 묵상 자료
묵상 포인트
사도행전 20:26~38은 바울의 에베소 장로들에 대한 고별 설교의 절정입니다. 중심은 목회자의 충성, 교회의 거룩성, 성령의 세우심, 거짓 교훈에 대한 경계, 약한 자를 돕는 섬김, 그리고 모든 것을 주와 은혜의 말씀께 맡기는 믿음입니다.
강해 핵심
바울은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깨끗하다”고 말합니다. 이는 복음을 남김없이 전한 자의 양심 선언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축소하지 않았고, 교회를 자기 소유로 삼지 않았으며, 장로들에게 양 떼를 성령의 맡기심으로 돌보라고 권면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이므로 목회와 성도의 교제는 언제나 십자가의 무게 아래 있어야 합니다.
주석 요약
본문은 밀레도에서 에베소 장로들을 불러 전한 바울의 마지막 권면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과거 사역을 회고하고, 장로들의 현재 책임을 일깨우며, 장래의 위험을 경고합니다. 그는 사람에게 교회를 맡기지 않고, 궁극적으로 주와 은혜의 말씀에 맡깁니다.
원어 주석
καθαρός, 카타로스: “깨끗한, 무죄한”이라는 뜻으로, 복음을 전할 책임을 다한 바울의 양심을 나타냅니다.
βουλή, 불레: “뜻, 계획, 경륜”이라는 뜻으로, 하나님의 구속 계획 전체를 가리킵니다.
περιεποιήσατο, 페리에포이에사토: “값을 치르고 자기 것으로 삼다”라는 의미로, 교회가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산 공동체임을 보여 줍니다.
γρηγορεῖτε, 그레고레이테: “깨어 있으라”는 명령으로, 교회가 진리와 양 떼를 지키기 위해 영적으로 방심하지 말아야 함을 뜻합니다.
χάρις, 카리스: “은혜”로, 받을 자격 없는 자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구원 선물입니다.
금언
교회는 사람의 열심으로 세워지는 곳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로 산 공동체입니다.
참된 목자는 사람을 자기에게 묶어 두지 않고 주와 은혜의 말씀께 맡깁니다.
눈물 없는 권면은 칼이 되기 쉽고, 사랑 없는 진리는 돌이 되기 쉽습니다.
주는 것이 복된 까닭은 하나님 자신이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신학적 정리
이 본문은 교회의 주인이 그리스도이심을 선명하게 증언합니다. 성령은 교회의 감독자를 세우시고, 그리스도는 자기 피로 교회를 사셨으며, 하나님은 은혜의 말씀으로 성도를 세우십니다. 그러므로 교회론, 구원론, 성령론, 목회론이 모두 십자가 중심으로 결합됩니다.
주제별 정리
복음의 충성: 하나님의 뜻을 다 전하는 것.
목자의 책임: 자신과 양 떼를 살피는 것.
교회의 본질: 피로 사신 하나님의 공동체.
영적 경계: 거짓 교훈과 자기중심적 사역을 분별하는 것.
섬김의 윤리: 약한 자를 돕고 주는 복을 살아내는 것.
최종 의탁: 사람보다 주와 은혜의 말씀께 맡기는 것.
목회적 정리
성도는 목회자를 존중하되 그리스도의 자리에 올려놓지 말아야 합니다. 목회자는 성도를 사랑하되 자기 영향력의 소유물로 삼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는 서로를 주님의 피 값으로 산 영혼으로 보아야 하며, 약한 자를 귀히 여기고, 말씀과 기도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성도들의 결단과 적용
오늘 내가 맡은 영혼을 가볍게 여기지 않겠습니다.
복음을 사람의 기호에 맞추어 줄이지 않겠습니다.
교회를 내 뜻의 도구가 아니라 주님의 피 값으로 산 공동체로 섬기겠습니다.
약한 자를 외면하지 않고, 주는 것이 복되다는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겠습니다.
내 가족과 교회와 남은 생을 주와 은혜의 말씀께 맡기겠습니다.
𝕱𝖚𝖑𝖑𝕾𝖔𝖚𝖗𝖈𝖊 : 𝕬𝖗𝖙𝖎𝖋𝖎𝖈𝖎𝖆𝖑 𝕴𝖓𝖙𝖊𝖑𝖑𝖎𝖌𝖊𝖓𝖈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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