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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이 육신이 되다 (요한복음 1:1-14)

by 고동엽 2026. 5. 5.

말씀이 육신이 되다 (요한복음 1:1-14)

태초에 말씀이 계셨습니다. 요한은 복음서를 시작하면서 베들레헴의 마구간으로 곧장 달려가지 않습니다. 목자들의 들판으로도, 동방 박사들의 별빛으로도 먼저 우리를 데려가지 않습니다. 그는 더 깊은 곳, 더 먼 곳, 아니 시간이라는 말조차 아직 태어나지 않았던 자리로 우리를 이끌고 갑니다. “태초에.” 이 한마디 앞에서 인간의 모든 시계는 멈춥니다. 인간의 모든 달력은 접힙니다. 우리의 생애를 재던 자도, 우리의 공로를 세던 자도, 우리의 눈물과 실패를 헤아리던 자도, 이 말씀 앞에서는 조용히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여기서 말씀은 단순한 음성이 아닙니다. 지나가는 문장이 아닙니다. 인간이 자기 생각을 꾸미기 위해 사용하는 언어가 아닙니다. 요한이 말하는 말씀, λόγος(로고스)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요, 하나님의 마음이요, 하나님의 뜻이요, 하나님 자신을 우리에게 향하여 여시는 영원한 통로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앙은 인간이 하나님을 찾아 올라가는 종교적 사다리가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향해 내려오신 사건입니다. 인간이 하늘을 붙잡은 것이 아니라, 하늘이 인간의 어둠 속으로 자신을 낮추어 들어오신 은혜입니다.

사람은 오래전부터 빛을 갈망했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사람은 빛을 갈망하면서도 어둠을 사랑합니다. 사람은 영원을 말하면서도 순간에 묶이고, 진리를 찾는다 하면서도 자기에게 유리한 거짓을 진리처럼 장식합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이름을 입술에 올리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자기 이름이 높아지기를 바랍니다. 사람은 성전을 세우고 제단을 쌓고 기도를 드리지만, 때로 그 거룩한 행위마저 자기 의의 기념비로 바꾸어 버립니다. 인간은 어리석게도 보이는 것, 만져지는 것, 계산되는 것, 자기 손 안에 들어오는 것만을 붙잡으려 합니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영원을 잃어버리고, 영원을 잃어버린 뒤에는 시간 속에서조차 길을 잃습니다.

세상은 눈부시게 많은 말을 가지고 있습니다. 정치의 말, 경제의 말, 철학의 말, 성공의 말, 위로의 말, 자기계발의 말, 욕망을 포장한 말, 상처를 감추는 말, 죄를 합리화하는 말들이 거리마다 넘칩니다. 그러나 많은 말이 있다고 해서 말씀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소리가 많다고 해서 진리가 들리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은 말을 많이 하지만, 자기 영혼을 살릴 말씀은 스스로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 인간의 말은 종종 자기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태어나고, 자기 죄를 가리기 위해 길어지고, 자기 두려움을 숨기기 위해 화려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변명이 아니라 창조입니다. 장식이 아니라 생명입니다. 인간의 말은 공허를 감추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공허 위에 세계를 세웁니다.

요한은 말합니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단지 신앙의 위대한 스승이거나 도덕의 모범이거나 감동적인 인류의 지도자가 아니라는 선언입니다. 그분은 만물의 근원이십니다. 그분 없이 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가 마시는 공기, 우리가 걷는 땅, 우리 눈에 들어오는 아침 햇살, 밤하늘을 건너가는 별빛, 어머니의 품에서 처음 울음을 터뜨리는 생명, 늙은 손등 위에 내려앉은 세월의 주름까지도 그분 없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세계는 우연의 먼지가 아닙니다. 생명은 무의미한 화학 작용의 불꽃이 아닙니다. 모든 존재의 깊은 곳에는 말씀의 흔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보는 세계는 침묵하는 것 같으나, 그 침묵 속에서도 창조주의 음성이 울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 안에 생명이 있었습니다.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습니다. 여기서 요한은 우리를 더 깊은 심연으로 데려갑니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단지 정보가 아닙니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단지 지식도 아닙니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생명입니다. 지식은 많아도 죽을 수 있습니다. 성공은 많아도 공허할 수 있습니다. 재물은 쌓여도 영혼은 굶주릴 수 있습니다. 사람들의 박수를 받아도 밤이 깊어지면 자기 마음의 빈방에서 울 수 있습니다. 사람은 빵으로만 살 수 없습니다. 사람은 칭찬으로만 살 수 없습니다. 사람은 세상이 주는 안정감으로만 살 수 없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생명으로 살아야 합니다.

빛이 어둠에 비쳤습니다. 그러나 어둠이 깨닫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인간 역사의 비극을 한 문장으로 압축한 말씀입니다. 빛이 없어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빛이 오지 않아서 절망이 아니었습니다. 빛은 비쳤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찾아왔습니다. 생명의 말씀이 인간의 역사 속으로 들어왔습니다. 문제는 어둠이 빛을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더 무서운 것은 어둠이 빛을 거부했다는 것입니다. 죄는 단순히 윤리적 실수가 아닙니다. 죄는 빛 앞에서 눈을 감는 것입니다. 죄는 하나님을 모르는 무지가 아니라,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다고 주장하는 교만입니다. 죄는 창조주의 세계에 살면서 창조주의 영광을 자기 소유로 바꾸려는 반역입니다.

우리 안에도 그 어둠이 있습니다. 교회 안에 앉아 있으면서도 빛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말씀을 들으면서도 내가 변화되기보다는 다른 사람이 변화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습니다. 은혜를 말하면서도 여전히 자기 의를 붙잡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십자가 앞에 서면서도 아직도 자기 공로의 작은 조각 하나를 숨겨 두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우리는 입술로는 “주여”라고 부르면서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내 뜻대로”라고 말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구한다고 하면서 사실은 하나님께서 내 계획을 승인해 주시기를 기다릴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빛을 사랑한다고 고백하지만, 빛이 내 죄를 드러내기 시작하면 슬그머니 그 빛을 피하려 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바로 그 어둠 속으로 들어온 빛입니다. 복음은 준비된 자에게만 주어진 상장이 아닙니다. 복음은 실패한 자에게도 찾아오는 하나님의 방문입니다. 복음은 자기 의에 지친 사람, 자기 죄에 눌린 사람, 자기 인생의 문장들을 더 이상 아름답게 꾸밀 힘이 없는 사람에게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빛이 어둠에 비치되.” 이 말씀 속에는 놀라운 인내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어둠을 보고 즉시 심판의 불로만 응답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빛을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만든 밤 속으로 낮을 들여보내셨습니다.

요한은 한 사람을 소개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었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입니다. 그는 빛이 아니요,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자였습니다. 이것이 모든 참된 설교자의 자리요, 모든 참된 성도의 자리입니다. 우리는 빛이 아닙니다. 우리는 빛을 만들어내는 자도 아닙니다. 우리는 빛을 증언하는 자입니다. 교회가 무너지는 순간은 자신이 빛인 줄 착각할 때입니다. 설교자가 타락하는 순간은 자신이 말씀의 주인인 줄 착각할 때입니다. 성도가 어두워지는 순간은 자기 경건이 그리스도의 빛을 대신할 수 있다고 생각할 때입니다. 요한은 위대한 사람이었지만, 자신이 중심이 되기를 거절했습니다. 그는 손가락이었습니다. 그의 영광은 자기에게 시선을 모으는 데 있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데 있었습니다.

참된 신앙은 언제나 자신을 낮추고 그리스도를 높입니다. 참된 교회는 자기 이름을 크게 새기는 건물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이름 앞에서 자신을 잊어버리는 공동체입니다. 참된 설교는 사람들의 감탄을 얻는 언어의 예술이 아니라, 죄인들의 영혼이 십자가 앞에 무릎 꿇게 하는 성령의 도구입니다. 참된 믿음은 나의 믿음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나처럼 흔들리는 자를 붙드시는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참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습니다. 이 빛은 특정한 시대의 사상으로 갇히지 않습니다. 특정한 민족의 종교적 유산으로 제한되지 않습니다. 이 빛은 각 사람에게 비춥니다. 부자에게도, 가난한 자에게도, 많이 배운 자에게도, 배우지 못한 자에게도, 병상에 누운 자에게도, 권좌에 앉은 자에게도, 어린아이에게도, 늙은이에게도 비춥니다. 빛 앞에서는 인간이 세운 모든 계급이 벗겨집니다. 빛 앞에서는 우리가 입고 있던 가면이 떨어집니다. 빛 앞에서는 성공한 사람도 죄인이며, 실패한 사람도 은혜의 대상입니다. 빛 앞에서는 종교적 업적을 많이 쌓은 사람도 긍휼을 구해야 하고, 아무것도 내세울 것 없는 사람도 담대히 주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했습니다. 이 말씀은 읽을수록 가슴이 아픕니다. 주인이 자기 집에 왔는데 집이 주인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창조주가 피조 세계 안으로 들어오셨는데 피조물이 창조주를 낯선 자처럼 대했습니다. 생명의 근원이 생명 없는 자들을 살리러 오셨는데, 인간은 그 생명을 귀찮은 방해처럼 여겼습니다.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여기에 인간의 죄가 드러납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없어서 방황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오셨는데도 거부했기 때문에 멸망의 길을 걸었습니다.

왜 인간은 그리스도를 거부합니까? 그리스도께서 너무 작게 오셨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화려한 왕궁의 하나님을 원했지만, 하나님은 구유에 누운 아기로 오셨습니다. 인간은 즉각적인 승리의 하나님을 원했지만, 하나님은 십자가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인간은 내 욕망을 성취시켜 주는 하나님을 원했지만, 하나님은 내 욕망을 죽이고 나를 살리시는 주님으로 오셨습니다. 인간은 자기 인생의 보조자가 되어 줄 신을 원했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인생의 주인으로 오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분을 불편해했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자존심을 찢으시고, 우리의 숨은 죄를 드러내시며, 우리의 종교적 포장을 벗기시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빈손이라는 사실을 알려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복음의 놀라운 문이 열립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여기서 권세는 ἐξουσία(엑수시아)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획득한 자격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신분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 못합니다. 혈통으로도 아닙니다. 육정으로도 아닙니다. 사람의 뜻으로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인간의 자기 완성이 아닙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새 창조입니다. 구원은 인간이 자기 안에서 발견한 가능성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열어 주신 불가능의 가능성입니다.

하나님의 자녀, τέκνα θεοῦ(테크나 테우)라는 말은 얼마나 깊은 위로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단지 용서받은 범죄자로만 남겨 두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기 집 문밖에 세워 두고 “너는 벌은 면했지만 가까이 오지는 말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자녀라 부르셨습니다. 아버지의 식탁으로 부르셨습니다. 상속의 자리로 부르셨습니다. 눈물의 골짜기에서도 아버지의 품을 기억하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넘어질 때에도 “내 자녀야”라고 부르시는 음성을 듣게 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은혜의 깊은 질서를 봅니다. 믿음조차 인간이 하나님께 내미는 공로가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닫힌 눈을 열어 빛을 보게 하시는 은혜입니다. 믿음은 내가 하나님을 붙잡는 힘이기 전에 하나님께서 나를 붙잡으신 사건입니다. 믿음은 자기 확신의 높은 탑이 아니라, 십자가 아래에서 무너진 자가 그리스도의 손을 붙드는 떨림입니다. 믿음은 완성된 인간의 훈장이 아니라, 날마다 은혜 없이는 살 수 없음을 고백하는 가난한 영혼의 호흡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쉽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께 나아오면 되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믿음은 어렵습니다. 인간의 교만이 죽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습니다. 또한 모든 사람에게 불가능합니다. 오직 성령께서 역사하실 때, 그 불가능이 은혜 안에서 가능이 됩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1장 14절은 하늘과 땅이 맞닿는 말씀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이 문장 앞에서 우리는 숨을 고르게 됩니다. 영원하신 말씀이 육신이 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살을 입으셨습니다. 무한이 유한 속으로 들어오셨습니다. 영원이 시간 속으로 들어오셨습니다. 창조주가 피조물의 자리로 내려오셨습니다. 심판주가 심판받는 자들의 역사 속으로 들어오셨습니다. 이것은 종교적 상징이 아닙니다. 이것은 신화가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실제 역사 속에서 행하신 구속의 사건입니다.

“육신”이라는 말은 단지 몸을 뜻하는 말이 아닙니다. 인간의 약함, 피곤함, 배고픔, 눈물, 고독, 상처, 죽음에 노출된 우리의 현실 전체를 가리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고통을 멀리서 해석만 하지 않으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눈물을 하늘의 논리로 설명만 하지 않으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눈물 속으로 들어오셨습니다. 하나님은 피곤 속으로 들어오셨습니다. 하나님은 배신당하는 자리로 들어오셨습니다. 하나님은 무덤 냄새가 나는 세계 속으로 들어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죄는 없으시되 죄인들의 자리에 서셨고, 죽음의 권세 아래 신음하는 자들을 살리기 위해 죽음의 문턱까지 내려가셨습니다.

여기서 요한은 놀라운 표현을 사용합니다.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이 말은 헬라어 σκηνόω(스케노오)로, 장막을 치다, 거처를 두다라는 뜻을 품고 있습니다. 광야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가운데 성막으로 임재하셨던 그 기억이 여기서 새롭게 빛납니다. 광야의 백성은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받았습니다. 그들 가운데 성막이 있었고, 성막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과 함께하신다는 표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참된 성막이 오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완전한 성전이 되셨습니다. 이제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특정한 장소와 제도의 담을 넘어가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그리스도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이 영광은 세상의 영광과 다릅니다. 세상의 영광은 높아짐의 광채입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은 낮아짐의 광채입니다. 세상의 영광은 많은 사람 위에 올라서는 힘입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은 많은 사람 아래로 내려가 그들을 섬기는 사랑입니다. 세상의 영광은 왕관에서 빛납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은 가시관에서 빛납니다. 세상의 영광은 자기 생명을 보존하려 합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은 자기 생명을 내어 주어 죄인을 살립니다. 그래서 요한이 본 영광은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영광입니다.

은혜와 진리, χάρις καὶ ἀλήθεια(카리스 카이 알레테이아)가 그분 안에 충만합니다. 은혜만 있고 진리가 없으면 죄는 치유되지 않고 덮여만 있습니다. 진리만 있고 은혜가 없으면 죄인은 드러나기만 하고 살아나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은혜와 진리가 함께 충만합니다. 그분은 우리의 죄를 가볍게 여기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그 죄인을 버리지도 않으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어둠을 정확히 드러내십니다. 그러나 그 어둠 속에 빛을 비추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거짓을 폭로하십니다. 그러나 폭로하여 죽이려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게 하여 살리려 하십니다.

십자가는 은혜와 진리가 만나는 자리입니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은 죄를 얼마나 미워하시는지를 보이셨습니다. 동시에 죄인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도 보이셨습니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공의는 침묵하지 않았고, 하나님의 사랑도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죄는 심판받았고, 죄인은 용서받았습니다. 저주가 쏟아졌고, 은혜가 흘러나왔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버림받으셨고, 버림받아 마땅한 우리가 자녀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죽음이 자기 권세의 마지막 깃발을 꽂았다고 생각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은 생명의 새 아침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그러므로 성육신은 십자가를 향합니다. 구유는 골고다를 향해 놓여 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것은 단지 우리와 가까워지기 위함만이 아니라,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시기 위함입니다. 피 흘릴 수 없는 영원한 말씀이 피 흘릴 수 있는 육신을 입으셨습니다. 죽으실 수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 죽을 수 있는 사람의 몸을 취하셨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죽음을 자기 죽음 안으로 끌어안고, 우리의 죄를 자기 몸에 짊어지고, 우리의 저주를 자기 십자가 위에서 끝내기 위함이었습니다. 아담 안에서 무너진 인간을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창조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는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죽음은 인간이 만든 모든 안전장치 앞에서 웃습니다. 권력도 죽음을 막지 못합니다. 돈도 죽음을 취소하지 못합니다. 지식도 죽음을 설득하지 못합니다. 젊음도 죽음 앞에서는 잠시 유예된 꽃잎일 뿐입니다. 인간은 시간 속에 태어나 시간 속에서 늙고, 결국 시간의 끝에서 자기 유한성을 경험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죽음이 마지막 주인이 아니라고 선포합니다. 죽음에서 우리가 만나는 것은 죽음 그 자체가 아니라, 죽음보다 크신 하나님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음 속으로 들어가셨기 때문에, 죽음은 더 이상 믿는 자를 삼키는 심연이 아니라 부활의 아침으로 건너가는 어두운 문이 되었습니다.

한 오래된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겨울밤, 한 아버지가 어린 딸과 함께 시골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길은 어둡고, 바람은 매서웠습니다. 딸은 아버지의 손을 붙잡고도 계속 무서워했습니다. 그때 멀리서 큰 마차가 지나갔고, 마차의 그림자가 길게 딸의 몸 위로 덮쳤습니다. 딸은 놀라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아버지가 딸을 품에 안고 말했습니다. “얘야, 무서워하지 마라. 그림자는 너를 다치게 할 수 없다. 마차가 너를 치면 죽을 수 있지만, 그림자는 너를 치지 못한다.” 그리고 아버지는 조용히 덧붙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음의 마차를 맞으셨기 때문에, 우리에게 남은 죽음은 그림자일 뿐이다.” 이것은 단순한 위로의 말이 아닙니다. 복음의 핵심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음의 실체를 담당하셨기에, 믿는 자에게 죽음은 더 이상 정죄의 칼이 아닙니다. 그것은 아버지의 품으로 들어가는 마지막 그림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이 땅에서 울며 살아갑니다. 믿음이 있다고 해서 눈물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은혜를 안다고 해서 상처가 없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해서 인생의 겨울이 모두 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달라지는 것이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어둠 속에 버려진 사람들이 아닙니다. 빛이 우리에게 왔습니다. 이제 우리는 세상의 말들 속에서 길을 잃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말씀이 우리 가운데 거하십니다. 이제 우리는 죄책감과 후회의 감옥에 갇힌 사람들이 아닙니다. 십자가가 우리를 부르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죽음 앞에서 끝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생명을 하나님 안에 감추어 두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자주 눈에 보이는 것에 마음을 빼앗깁니다. 숫자가 많으면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줄 알고, 숫자가 적으면 하나님이 떠나신 줄 압니다. 건강하면 은혜라 말하고, 병들면 버림받은 듯 느낍니다. 일이 잘되면 믿음이 강해지고, 일이 막히면 하나님이 침묵하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원은 우리의 시간보다 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감정보다 신실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형편보다 견고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잘될 때만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밤에도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침묵 속에서도 여전히 말씀하시는 분입니다.

성육신의 신비는 우리에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멀리 계신 관찰자가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고통의 가장 깊은 곳에 찾아오신 분입니다. 우리가 외로울 때, 그리스도는 버림받음의 깊이를 아십니다. 우리가 배신당할 때, 그리스도는 친구에게 팔린 밤을 아십니다. 우리가 억울할 때, 그리스도는 거짓 증언 앞에서 침묵하신 법정을 아십니다.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할 때, 그리스도는 겟세마네에서 땀이 피처럼 떨어지도록 기도하신 떨림을 아십니다. 우리가 죄책감에 눌릴 때, 그리스도는 죄 없으신 분으로 죄인의 자리에 서신 십자가를 보여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 하나님께 나아갈 때 자기 의를 들고 갈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갈 수 있는 것은 오직 빈손입니다. 그러나 그 빈손이 복된 손입니다. 은혜는 빈손에 담깁니다. 자기 의로 가득 찬 손은 십자가를 붙잡을 수 없습니다. 자기 공로로 무거운 손은 은혜를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주님, 저는 어둡습니다. 주님, 저는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라고 고백하는 손, 그 떨리는 빈손 위에 하나님은 독생자의 은혜를 부어 주십니다.

교회는 이 은혜를 잃어버리면 안 됩니다. 교회가 세상의 성공 방식을 흉내 내기 시작하면, 복음의 빛은 흐려집니다. 교회가 십자가보다 사람의 인정과 규모와 명성을 더 사랑하면, 우리는 빛을 증언하는 자가 아니라 빛을 가리는 자가 됩니다. 성도는 이 은혜를 잃어버리면 안 됩니다. 신앙생활이 오래될수록 우리는 더 낮아져야 합니다. 말씀을 많이 알수록 더 부드러워져야 합니다. 기도를 오래 할수록 더 긍휼이 많아져야 합니다. 십자가를 깊이 알수록 다른 죄인을 향해 돌을 들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도 그 십자가가 아니면 설 수 없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장은 우리를 웅장한 영원에서 시작하여 낮고 낮은 육신의 자리로 데려갑니다. 태초의 말씀이 구유에 누우십니다. 만물을 지으신 분이 사람의 손에 안기십니다. 생명의 근원이 목마르다고 말씀하십니다. 빛이신 분이 어둠의 권세 아래 재판받으십니다. 영광의 주께서 십자가에 달리십니다. 그러나 바로 그 낮아짐이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바로 그 찢기심이 우리의 치유입니다. 바로 그 죽으심이 우리의 생명입니다. 바로 그 버림받으심이 우리의 받아들여짐입니다.

우리가 참으로 두려워해야 할 것은 세상의 실패가 아닙니다. 우리가 참으로 두려워해야 할 것은 빛이 왔는데도 어둠을 더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우리가 참으로 슬퍼해야 할 것은 재물이 부족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참으로 슬퍼해야 할 것은 은혜 없이도 살 수 있다고 착각하는 영혼입니다. 우리가 참으로 회개해야 할 것은 겉으로 드러난 몇 가지 실수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참으로 회개해야 할 것은 그리스도보다 자기 자신을 더 사랑한 깊은 중심입니다.

그러나 두려움보다 더 큰 소식이 있습니다. 빛은 아직도 비추고 있습니다. 말씀은 아직도 우리를 부르고 있습니다. 은혜의 문은 아직도 열려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실패한 베드로를 다시 부르셨고, 의심하던 도마에게 못 자국 난 손을 보여 주셨고, 죄인과 세리의 식탁에 앉으셨고, 울고 있는 마리아의 이름을 불러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당신도 주께 나아올 수 있습니다. 너무 늦었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너무 더럽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너무 많이 무너졌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은혜는 인간의 가능성이 끝나는 자리에서 하나님의 가능성으로 시작됩니다.

오늘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은 하나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의 사상보다 크시고, 우리의 상처보다 깊으시고, 우리의 죄보다 강하시고, 우리의 죽음보다 영원하신 주님입니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습니다.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입니다. 그 빛은 우리의 밤을 지나 십자가로 가셨고, 십자가의 어둠을 뚫고 부활의 아침으로 일어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낙심 속에서도 다시 일어섭니다. 눈물 속에서도 다시 찬송합니다. 실패 속에서도 다시 회개합니다. 죽음의 그림자 아래서도 다시 소망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여러분의 마음에 어둠이 있습니까. 그 어둠을 감추려 하지 마십시오. 빛 앞에 내어놓으십시오. 오늘 여러분의 영혼이 지쳐 있습니까. 자기 힘으로 더 버티려 하지 마십시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주님께 기대십시오. 오늘 여러분이 죄책감으로 눌려 있습니까. 자기 자신을 더 벌한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 앞으로 가십시오. 오늘 여러분이 죽음을 두려워합니까. 부활하신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죽음보다 먼저 주님이 거기 계십니다. 죽음보다 깊이 주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죽음보다 강하게 주님의 생명이 우리를 붙듭니다.

이제 우리의 결단은 거창한 자랑이 아닙니다. 조용하지만 분명한 돌이킴입니다. “주님, 다시 빛으로 걷겠습니다. 주님, 다시 말씀 앞에 서겠습니다. 주님, 다시 십자가를 붙들겠습니다. 주님, 나의 어둠을 변명하지 않고 주님의 은혜 안에 내어놓겠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이것이 회개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가 살아가는 길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더 이상 우리에게 낯선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찾아오신 아버지이십니다. 그분은 은혜와 진리로 충만하신 구원자이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밤에 비치는 빛이시며, 우리의 죽음에 심겨진 생명이시며, 우리의 죄 위에 세워진 십자가의 용서이십니다. 이 은혜를 붙드십시오. 이 빛 안에 거하십시오. 이 말씀을 마음에 모십시오. 그러면 눈물이 있어도 무너지지 않을 것입니다. 상처가 있어도 버림받지 않을 것입니다. 죽음의 그림자가 지나가도 생명의 아침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태초에 계셨던 말씀이 오늘도 우리를 부르십니다. “내게로 오라.” 육신이 되신 말씀이 오늘도 우리의 상처 곁에 서서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십자가에 달리신 말씀이 오늘도 우리의 죄를 향해 선포하십니다. “다 이루었다.” 부활하신 말씀이 오늘도 우리의 미래를 향해 약속하십니다. “내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시 일어나십시오. 빛이 왔습니다. 생명이 왔습니다. 은혜가 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습니다. 그분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분 안에서 우리의 어둠은 끝이 아니라 빛을 만나는 자리입니다. 그분 안에서 우리의 시간은 허무가 아니라 영원을 향한 순례입니다. 그분 안에서 우리의 눈물은 버려진 물방울이 아니라 하나님의 병에 담기는 기도입니다. 그분 안에서 우리의 죽음은 절망의 문이 아니라 부활의 아침으로 열리는 마지막 밤입니다.

그러니 오늘도 십자가를 붙드십시오. 은혜를 붙드십시오. 말씀을 붙드십시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 그리스도,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독생자의 영광을 바라보십시오. 그 빛이 여러분의 가정에 비치기를 원합니다. 그 생명이 여러분의 지친 심령을 일으키기를 원합니다. 그 은혜가 여러분의 죄책감을 씻기를 원합니다. 그 진리가 여러분의 길을 바르게 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 모두가 시간의 마지막 강을 건널 때, 우리를 기다리시는 주님의 얼굴 앞에서 고백하게 되기를 원합니다. “주님, 참으로 주님은 생명의 말씀이셨습니다. 주님, 참으로 주님은 나의 빛이셨습니다. 주님, 참으로 주님은 은혜와 진리로 충만하셨습니다.”

설교 준비와 묵상 자료

묵상 포인트
요한복음 1장 1-14절은 예수 그리스도를 단순한 역사적 인물로 소개하지 않고,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곧 하나님이신 영원한 말씀으로 선포한다. 이 본문은 창조, 계시, 성육신, 구속, 새 창조의 흐름을 하나로 묶는다. 성도는 이 말씀 앞에서 예수님을 인생의 조언자가 아니라 생명의 주님으로 영접해야 한다.

강해 핵심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는 창세기 1장 1절을 의도적으로 떠올리게 한다. 요한은 새 창조의 복음을 선포한다. 만물이 말씀으로 창조되었고, 죄로 어두워진 세상에 참빛이 비쳤으며, 그 빛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절정에 이른다. 성육신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와 죽음의 현실 속으로 직접 들어오신 구속사의 중심 사건이다.

주석 요약
1절은 그리스도의 선재성과 신성을 증언한다. 3절은 그리스도께서 창조의 중보자이심을 말한다. 4-5절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과 빛이 죄의 어둠을 이기는 능력임을 보여 준다. 11절은 인간의 거부와 불신앙을 드러내며, 12-13절은 하나님의 자녀 됨이 인간의 혈통이나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짐을 밝힌다. 14절은 성육신과 임재, 은혜와 진리의 충만함을 선포한다.

원어 주석
λόγος(로고스): “말씀”이라는 뜻으로, 하나님의 자기 계시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신성을 나타낸다.
σκηνόω(스케노오): “장막을 치다, 거하다”라는 뜻으로,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임재가 우리 가운데 머무셨음을 보여 준다.
χάρις καὶ ἀλήθεια(카리스 카이 알레테이아): “은혜와 진리”라는 뜻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가 함께 충만하게 나타났음을 의미한다.
ἐξουσία(엑수시아): “권세, 자격”이라는 뜻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신분은 인간의 성취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임을 말한다.

금언
말씀이 육신이 되신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어둠을 멀리서 책망하지 않으시고, 그 어둠 속으로 빛을 들고 들어오셨다는 뜻이다.

신학적 정리
이 본문은 그리스도의 선재성, 신성, 창조 사역, 성육신, 구속 사역을 모두 포함한다. 개혁주의적 관점에서 구원은 인간의 결단이나 혈통에서 비롯되지 않고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에서 비롯된다. 구속사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성막과 성전의 완성이며, 창조의 말씀이자 새 창조의 주님이시다.

주제별 정리
빛은 어둠을 폭로하지만 동시에 살린다. 말씀은 인간의 공허한 말과 달리 생명을 창조한다. 성육신은 하나님이 죄인에게 가까이 오신 은혜이다. 십자가는 은혜와 진리가 함께 충만하게 나타난 자리이다. 하나님의 자녀 됨은 인간의 자격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목회적 정리
성도는 신앙생활을 자기 의의 증명으로 삼지 말아야 한다. 오래 믿을수록 더 낮아지고, 더 긍휼히 여기며, 더 십자가를 붙들어야 한다. 어둠을 감추는 것이 신앙이 아니라 빛 앞에 내어놓는 것이 신앙이다. 교회는 자신이 빛이 아니라 빛을 증언하는 공동체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성도들의 결단과 적용
오늘도 말씀 앞에 자신을 세우라. 죄를 변명하지 말고 빛 앞에 내어놓으라. 자기 의를 내려놓고 십자가의 은혜를 붙들라. 고난과 죽음 앞에서도 부활의 생명을 바라보라. 예수 그리스도를 단지 위로의 대상이 아니라 삶의 주인으로 영접하라.

𝕱𝖚𝖑𝖑𝕾𝖔𝖚𝖗𝖈𝖊 : 𝕬𝖗𝖙𝖎𝖋𝖎𝖈𝖎𝖆𝖑 𝕴𝖓𝖙𝖊𝖑𝖑𝖎𝖌𝖊𝖓𝖈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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