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5: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이요."
먼저 두 가지 예비적 소견을 말하겠습니다. 이 두 소견은 본문에 대해 살펴보고자 하는 어떤 관점을 제공해 줄 것입니다.
첫째로 앞의 강해에서 우리가 지적했듯이 이른 바 8복이라는 이 그리스도교적 삶 의 파라독스는 하나의 연결된 사슬, 혹은 한 공동 뿌리에서 자라 나온 싹입니다. 각각의 인격은 모두 선행하는 인격을 전제로 합니다. 물론 인격을 쌓아가는 과정에 서 어떤 단계적 획일성을 기대한다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생각으로는 상호 구분할 수 있고 연속적으로 배열할 수 있는 단계 들입니다. 실제로는 동시에 발생하거나 혼합적 양상을 띨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여기에서 진정한 그리스도교적 삶의 성장 단계들을 낮 은데서부터 차례로 약술하고 계십니다.
이 네번째 단계가 일련의 8복 중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대해서는 지금 여기서 단지 이것만을 지적해 두고 싶습니다. 그것은 이 네번째 단계는 앞의 체험들을 배경을 삼고 거기에서 흘러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을 선행하는 단계로부터 고립시켜 따로 떼어놓고 생각하게 되면 그 리스도의 말씀에 내포된 깊은 의미를 파악하지 못한다는 것도, 아울러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또 한 가지 고려할 사항은, 이 네번째 인격이 다른 것들과 놀라운 차이를 가지고 있다는 점입니다."온유한 자","긍휼히 여기는 자,""마음이 청결한 자,""화평 케 하는 자"는 모든 어떤 일정한 특성을 획득한 자들입니다.
그러나 이 네번째는 의를 획득한 자들에게 선포되는 복이 아니라 의를 갈망하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복입니다. 굶주린 사람이 음식을 갈구하는 것이나 몹시 목마른 자가 물을 갈망하는 것에 비견될 정도로 높은 수준에 다다른 이 욕망은, 일견하기 에 이상한 축복으로 생각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소유한 보다 낮은 선에 만족하는 것보다, 비록 아직 도달하지 않았더 라도 보다 높은 선(善)을 갈망하는 것이 훨씬 더 훌륭한 일입니다. 기름진 골짜기 에서 풀잎을 뜯어먹는 것보다, 정상은 높고 길은 가파르다 하더라도 위로 올라가는 것이 더 낫습니다. 값진 방향으로 지향되는 열망은 복된 것입니다.
이제 이 네 번째 복에 대하여 두 가지 요점을 살펴 봅시다. 첫째는 영혼의 복된 주림과 갈망, 둘째는 확실히 보장된 영혼의 만족입니다.
1. 영혼의 복된 주림과 갈망
"의"(디카이오쉬네; 헬1343)가 무엇인가? 를 먼저 생각해 봅시다. "의"라는 말은 일종의 신학적 용어가 되었습니다.
"의"는 신적 본질의 속성이며, 구원을 가져오는 능력이자 선물입니다. 이"의" 는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이며, 곧 그리스도입니다(롬 1 : 16).
믿음으로,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의가 되셨고(고전 5 : 21), 우리는 그 안에서 하나 님의 의가 되었습니다(고후 5 : 21). 이 의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이
며(빌 : 9), 곧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능력입니다(롬 1 : 16).
따라서 이러한 "의"를 가진 자는 하나님과, 자기 자신과, 이웃과, 자연과의 관계 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이 제시하는 법을 준수하고 의무를 이행하는 선행, 즉 하 나님의 명령이나 요구하는 것을 준행하는 것입니다. 그는 마음에 있어서는 의지를 하나님께 복종시키고, 행동에 있어서는 무슨 일을 하든 고상하고 사랑할만 하고 칭 찬할만 하게 처신하는 것입니다.
이"의"는 주기도문의 제 3 간구, 하나님의"뜻"과 같은 맥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통한 인간의 구원과 그것에 따른 의와 사랑과 진리 의 실현은 하나님의 뜻이요, 우리가 갈망하는 "의"입니다.
그러한 인격의 형성, 심령과 행위의 완전에 대한 지향은 인간의 가장 고상한 목표 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의로운 사람이 되기를 갈망하는 사람이요, 의로운 세계를 갈망하는 사람입니다.
정당한 영혼의 갈망에는 그 외에도 많은 종류가 있습니다. 힘을 붇돋우어 주고 고 상하게 하고 품위있게 하는 많은 굶주림이 있습니다.
육체적으로 필요한 것, 생활 필수품을 갈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지혜와 지식을 갈구하는 것도 선합니다. 그러나 선한 사람이 되기를 갈망하는 것은 더 더욱 좋은 일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이 땅에 삽니까? 즐기기 위해 삽니까? 일하기 위해 삽니까? 알기 위해 삽니까? 사실 그렇습니다! 하지만 인생의 목적, 우리가 지상에서 바라 보아야 할 지상 목표는, 어떤 행동이 아닙니다. 어떤 사상은 더더구나 아닙니다. 온 갖 종류의 즐김은 더 더욱 아닙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삶을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는 인격의 배 양과 형성이 우리 육신 생활 전반의 오메가가 되어야 합니다.
기타 모든 욕구와 목표, '지는 별처럼, 인간 사고의 가장 먼 한계를 넘어서까지, 지식을 좇고자 하는' 동경과 갈망은, 선한 인간이 된다는 이 고상한 목표에 종속 되어야 합니다.
그 모든 것들은 건물을 세우는데 필요한 비계와 같은 것입니다. 건물 자체는 하나 님의 뜻에 순응하고 그리스도의 형상과 같이 되는 인격입니다. 이성적이고 사려 깊 은 사람들은 모두가 가장 심오하고 가장 진실한 사고에 잠기는 순간 한결 같이 이 를 인간의 최고 목표로 선언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낮은 수준의 욕구들, 인간 존재의 다양한 측면에 필요한 여러 가지 선물 들을 추구하는 것도 우리에게 있어야 되겠지만, 한편으로, 인간 자신의 양심을 최 고의 주요 목표로 삼아야 한다고 분명하게 말하는 것, 그것은 바로 의를 향한 주림 과 목마름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나아가 주님께서 복이 있다고 선언하신 이 "의"에 대한 갈망이 일련의 8복 가운데서 어느 지점에 위치하는 가를 살펴봅시다. 이것은 "의"에 대한 갈망 이 어떤 결과로 오는지를 알려줍니다.
내가 알기로, 사람은 누구나 다 선을 향한 잠재적 산발적 욕구가 있어서 이 욕구가 때때로 삶 가운데서 부분적으로, 혹은 단편적으로 작용하며, 표면에 부상하기도 합 니다.
이 욕구의 존재가 인간과 마귀의 분수령을 이룹니다.오늘 현재보다 더 선해지고 싶은 욕구를 가끔씩 자의식적으로 느끼지 않는 인간 은 지
상에 없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복있다고 선언하신 이 갈망은, 앞절에서 묘 사된 인격적 특성들을 따라, 그 결과로서 나오는 것입니다.
먼저는, 우리 자신의 부족함과 무가치함을 인식하는 영의 가난이 있어야 합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알아야 합니다.
- 죄에 대한 애통과 통회가 있어야 합니다.
- 그래서 죄를 용서받는데서 오는 위로를 얻어야 합니다.
- 인간들로부터 오는 핍박과 환경으로부터 오는 고난에도 불구하 고 모든 온유의 주님 께 우리 자신을 복종시켜야 합니다.
- 그리하여 인간의 자만심이 무너지고 자신이 참된 의를 소유하 지 못했음을 뼈저리게 느낄 때,
- 인간의 가슴이 용서받았다는 감격으로 복받쳐올 때,
- 인간의 의지가 하늘 아버지 앞에 엎드리게 될 때 의에 대한 어떤 굶주 림과 목마름이
마음 속에서 솟아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그 자체를 복이라 할 수 있는 어떤 의로움을 소유하게 된다면 그것은 자신의 죄악에 대한 깊은 발견,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한 통회, 거저 주시는 완전한 용서에 대한 기쁜 확신 등을 통해 강화된 주림과 목마름이 우리에게 있었 기 때문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는 여기에서 복이 있다고 선언된 대상이 어떤 욕구의 실현이 아닌, 욕구 그 자체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복이 있다는 것은 단지, 앞서 지적한대로, 실현되었든 실현되지 않았든 고상한 욕망은 모두가 선하며, 목표가 실현보다 더 중요하고, 인간이 강렬하게 소원하는 것은 종 종 가장 깊은 자아의 표출이자 그의 미래 모습에 대한 일종의 예언이 될 때가 많 다는, 그런 이유들 때문만이 아닙니다. 그것이 복된 것은, 그리스도께서 이 일정한 특질에 대한 욕구를, 여러가지 여타 인격적 특질들의 소유와 동일 선상에 놓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욕구를 여타의 인격적 특질의 소유와 동일 선상에 놓은 것은 주님께서 여기서 영혼의 목마름과 주림을 충족시킬 의는 우리 자신의 노력에 의해 제조되는 것이 아니라 갈망에 대한 응답으로 받는 것임을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하신 것입니다.
이 "의"는 선물입니다. 이 선물을 받을 수 있는 조건은 정직하게, 간절하게, 가슴 깊게, 계속적으로 갈망하는 것, 그 한가지 뿐입니다.
시편 기자도 이 진리를 언급한 바가 있습니다.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며, 그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고… 저는 여호와께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께 의 를 얻으리니 이는 여호와를 찾는 족속이요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로 다"라고 어조를 높여 선언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하사하시는 이 복된 "의" 를 소유하고자 함에 있어 제 1 단계는 노력이 아닌 갈망입니다.
그렇다고하여 그 의의 지속적 보존과 인격 속에서 작용 및 행동은 우리 자신의 계속적인 부지런한 노력의 결과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믿음에 입각한 노력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주로 위대한 수여자(Giver)이신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교통 노선을 계속 열어 놓는 노력입니다. 그러한 노력은 하나님의 이 선물의 소유를 확실하게 하여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의는 우리 자신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 여 하나님이 하사하시는 것입니다.
본문의 두번째 대지로 넘어가기 전에 여기에서 잠깐 멈춰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 이 있습니다.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이 말씀이 그리고 있는 내용 을 생각해 봅시다. 굶주린 사람의 탐욕스런 욕구, 목이 타는 듯한 그 심한 갈증을 생각나게 합니다.
우리에게는 과연 선을 향한 강도 높고 깊은 욕구가 있습니까?
신앙을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로서 우리는 자신의 악에서 구원받고 의로 옷입기 를, 진실하고 간절하게, 그리고 계속적으로 갈망하고 있습니까?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본문의 말씀은 우리 자신들에 관한 한 극한 아이러니가 되 고 말 것입니다.
오늘날의 그리스도교를 바라보십시요. 아니 자기 자신의 마음 속을 들여다 보십시 요.
선을 향한 욕구는 미온적이고 나태하고 간헐적이고 그리 진실하지 못한 반면, 부유해지
고 현명해지고 번영하고 유명해지고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싶은 욕구는 너무나도 간절
하지 않습니까?
슬프다! 신앙을 고백하는 그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욕망은 마치 큰 강의 물 줄기처럼 세상적인 것, 물질적인 것으로 달려가고 있으나, 그 큰 물줄기에서 저 높은 것 들을 향해 튀어 올라가는 물방울들은 너무나도 적습니다. 진정 복된 것은, 의를 향 한 공복감과 갈증입니다.
2. 영혼의 해갈과 만족
여기서 영적 갈증의 해갈과 영혼의 만족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주님은 "의에 주 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십니다.
팔복에서 이어지는 모든 약속은 이중적 차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현세에서의 확실한 성취와 미래에서의 완성이 그것입니다.
이 모든 약속 중에서 첫번째 것,"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는 기타 모든 약속을 하 나로 포괄하고 있는 약속입니다. 즉 다른 약속은 이 첫번째 제반 양상과 측면에 지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첫번째 약속은 현재 시제로 되어 있고 나머 지는 미래 시제
로 되어 있습니다.
이런 사실들을 감안해볼 때 8복에 현재, 미래의 이중적 성격이 내재되어 있음을 명 백히 알 수 있습니다. 첫번째 약속은"천국이 (현재)저희 것임이요"라는 현재 시 제이며 (미래에될 것임이요가 아님), 나머지는"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등등 미래 시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본문의 이 위대한 약속이 두 시대에 걸쳐 성취되는 것으로 확실 히 간주할 수 있으며 또 그렇게 간주해야 마땅합니다. 즉 현재의 지상에서는 부분 적으로 성취되고 미래에는 완전하게 실현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 이중적 성취 는, 종류에 있어서는 다르지 않고 정도에 있어서만 다를 뿐입니다.
먼저 현재의 성취를 살펴봅시다.
현재에 있어서"저희가 배부를 것"이라는 표현이 가능합니다. 이것이야 말로, 헛 된 욕망의 격동(pang) 을 십자가에 못박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며, 결코 손에 잡히지 않는 대상에 마음을 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잘 알고 있는, 무언 가를 추구하는 인간의 영흔에 하나님의 복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떤 욕망방이 무위로 돌아가지 않는 영역, 어떤 바램이 이루어지는 영역은 확실히 존재합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께서 본문의 이 위대한 말씀에서 지적하신 영역 입니다.
땅에서 눈을 떼십시요. 지상의 욕망은 달성되든 되지 않든, 공히 실망스런 것으로 드러
나는 경우가 다반사입니다. 사랑, 지혜, 부요, 일시적 행복을 찾아나서는 자들 에게 오는 만족의 대상에서 돌아서십시요.
그리고 이것을 확신하십시요. 즉 결코 실망이 있을 수 없는 유일한 갈망, 우리에게 재가 아닌 빵을 확실하게 보장하는 갈망은, 하나님을 사모하며 그리스도를 닮고 싶 어하는 갈망이라는 사실입니다. 오직 이 욕구만이 틀림없이 충족됩니다. 그리고 충 족될 때 행복이 틀림없이 보장됩니다.
그러나 의를 향한 갈망이 모두 충족된다는 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앞서 언급한대 로, 본문의 체험을 배경으로 삼지 않고 인간의 마음속에서 산발적으로 일어나는 선 에의 욕구들은 충족되지 않을 경우가 많으며 충족된다 하더라도 국부적인 경우가 허다합니다.어느 땅에나 나름대로의 의를 목마르게 찾는 영혼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리는 이것을 확실히 믿습니다. 즉 어린 까마귀의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시는 (참조, 욥 38:41; 시147: 9) 주께서는 그와같은 노력과 갈망을 보고 계시며 선해지고자 하 는 사람들의 기원에 귀를 열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와는 동떨어져 있는, 대다수 인간들의 체험은"원하는 이것은 행치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한다"(롬 7:15)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들 이 간헐적으로 느끼는 의를 향한 공복감과 갈증은, 하나님과 자신의 양심이 볼 때 악한, 그러한 습관적 행위를, 중단시키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이 의를 향한 이런 욕구의 자극을 체험하지만 그 욕구가 대부 분 실현되지 않기 때문에 세상은 슬픔으로 가득 차게 되는 것입니다."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 : 24). 이것이 지 극히 고상한 한 인간의 절규였습니다.
그러므로 그 위대한 복음이 인간에게 주어졌습니다. 나사렛 예수는 자기의 곤핍을 희미하게 의식하고 있는, 때로는 그 곤핍으로 불행을 느끼는, 세상을 향해 외치십 니다: "누구든지 목마르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요 7: 37).그리스도에게 이처럼 대중 앞에 서서 선(善)을 향한 모든 욕구가 자기 안에서 충 족된다고 약속할 만한 무슨 권리가 있었습니까? 그렇습니다. 그에게는 그럴만한 자 격이 있었습니다. 주님 자신이 인간의 이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권능과 또 충족 시키고자 하는 뜻을 가지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복음의 핵심입니다 : 의를 구하는 모든 사람에게 주님은, "우리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킬"(롬 8:2), 주님 자신의 생명의 영을 주십니다.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우리는 받는 자의 자리에 앉는데 만족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의"를 우리 스스로 이룩하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여야 합니다. 단언하건대, 그 리스도를 떠나서는 누구든지 자신을 만족시킬 선을 인격 속에 결코 형성하지 못할 것입니다.
시베리아의 죄수들은 때로 쇠사슬을 끊고 어느 정도 멀리 도망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대개 다시 붙잡혀 감금당합니다. 우리가 내면에 있는 악의 속박 을 어느 정도 깨뜨릴수 있다 하더라도 자신의 어떤 솜씨나 노력, 행위를 통해서는 그 해방을 완성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 복을 받는 것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영흔에 맞는 순결한 의복을 짤 수 있는 베틀은 지상에 없습니다. 이런 의복을 꿰메 어 만들 수 있는 바늘은 지상에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만드신 의의 옷을 입는 것으로 만족해야 하며, 그리스도의 도움에 힘입어 세상의 오물에 젖고 육에 더럽혀진 옛 자아를 벗어 던지고,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그리고 오직 그리스 도만이 주실 수 있는"새 사람"을 입어야 합니다.
이 약속의 미래적 성취에 대해 살펴봅시다.
의의 욕구는 하늘에서도 여전히 살아 있을 것입니다. 이 욕구는 영을 확대시킬 것 이며 확대된 영은 하나님의 형상을 보다 완전하게 닮을 수 있는 수용 능력을 가질 것입니다.
그리고 증가된 이 수용 능력을 통해"하나님을 닮음"이라는 선물들이 확실하게 들어올 것입니다. 이와같이 하여 우리는 세세무궁토록, 새 선물을 가져다주는 욕구 와 새 욕구를 낳는 만족감을 체험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내가 이 설교에서 말하고자한 모든 내용은 다음과 같은 한 마디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그리스도 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 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빌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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