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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양에게 가십시오//마태복음 10장 1-6절

by 【고동엽】 2023. 11. 28.

잃어버린 양에게 가십시오// 20010418

2001-12-08 17:19:54 read : 176

 

수요일 저녁예배// 마태복음 101-6

 

어제 성남에 사는 어떤 자매님이 만나자고 해서 같이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저의 인터넷 사이트에서 자기가 감동 받은 글을 발췌해서 복사한 뒤

직장에서 퇴근하는 길에 지하철에서 사람들에게 그 글을 주며 전도를 합니다.

하루에 100장씩 A4 용지에 카피해서 거의 매일 퇴근 시간 전철에서 나눠줍니다.

 

그 전도지 밑에는 우리 교회 연락처가 있고, 인터넷 사이트 주소도 있었습니다.

그분이 우리 교회에 올 것도 아닙니다. 지금 김포의 어떤 교회에서 충성합니다.

다만 분당선을 타니까 우리 교회를 소개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 그렇게 합니다.

외부 교인이 자발적으로 그렇게 전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도 이제는 더욱 전도에 관심을 기울이고, 전도에 동참해야 할 것입니다.

굳이 우리 교회로 인도하지 않아도 전도를 중요한 사명으로 알고 뛰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주님께서 12명을 부르시고 그들에게 '권능'을 주셨습니다(1).

그리고 그들을 부른 가장 중요한 목적이 무엇인지 본문에 잘 나와있습니다.

그들을 부르고 바로 전도하러 보낸 것을 보면 부름의 목적은 전도였습니다.

그 목적이 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제자로 부르신 후 바로 전도를 보내십니다.

 

그런데 전도를 보내실 때 따로 특별 훈련을 시키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전도에 특별히 탁월한 사람만 부른 것도 아닙니다. 그래도 그들을 보냅니다.

왜냐하면 전도에는 특별한 기술이나 재주보다 마음이 준비가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전도하라고 하면 자기는 능력도 없고 믿음도 크지 않다고 주저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오늘 본문과 같이 준비되지 못한 사람들을 전도하러 보내십니다.

그러한 장면들을 보면 주님은 초보를 대단히 좋아하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초보의 순수한 전도, 초보의 순수한 기도를 더 기뻐하실 것입니다.

 

교회를 살펴보면 전도는 충분히 준비되지 못한 사람들이 더 잘할 수 있습니다.

통계적으로 초신자에는 때 전도를 많이 하다가 직분이 올라갈수록 안한다고 합니다.

그 사실은 정확한 신앙지식과 믿음이 있어야만 전도하는 것이 아님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초신자가 전도를 많이 한다고 하는데 이런 모습은 참으로 안타까운 모습입니다.

이제 초신자나 오래된 신자나 누구든지 전도에 적극 참여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영혼을 구하는 일은 성경이 일관적으로 강조하는 성도의 중요한 사명입니다.

사도행전 1장을 보면 부활하신 주님께서 승천하실 때 제자들이 묻습니다.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할 때가 이 때입니까?"(1:6) 무슨 질문입니까?

"언제 로마로부터 나라를 되찾는 시도를 해야 합니까? 이때입니까?"라는 질문입니다.

 

그때 주님께서는 동문서답을 하듯이 전혀 다른 차원의 말씀을 하십니다.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제자들에게 있어서 '회복'은 꿈 같은 일이고, 참으로 소중한 축복일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제자들에게 회복의 때를 생각하지 말고 '전도하라'고 대답을 하십니다.

 

이처럼 주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고 처음 하신 일이 전도를 보내신 일이고,

승천하시면서 마지막 사명으로 주신 말씀도 "성령 받고 전도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전도란 얼마나 중요합니까? 우리는 이 중요성을 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전도를 할 때 어떤 자세로 임해야 할까요?

마태복음 10장은 흔히 전도장이라고 일컬어지는데 전도의 중요한 원리들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주님은 제자들을 전도하러 보내시면서 몇 가지 명령을 내리십니다.

 

1. 이방인의 길로 가지 말라

 

먼저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방인의 길로 가지 말라고 하십니다.

주님이 이방인을 미워하셨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은 이방인도 사랑하셨습니다.

당연히 이방인에게도 가야 하지요. 그러나 이방인의 길로는 가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이방인의 길이란 어떤 길입니까? 굳이 설명을 안해도 우리는 대략 알고 있습니다.

어떤 분은 전도한다는 명목으로 이방인의 길을 택합니다.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어떤 분은 전도에 대한 의식이 전혀 없이 이방인의 길을 택해서 전도를 막습니다.

어떤 분은 자기 교회로 전도하다가 안되면 탁 차버려서 다른 교회도 못가게 합니다.

믿는 사람들은 자신의 행동이 전도를 막는 행동이 되도록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주에 실망을 이기지 못해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의 모습을 봤습니다.

그런 모습을 주님은 기뻐하지 않습니다. 사람들도 그런 모습에는 매력을 못 느낍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항상 우리가 예루살렘 길에서 이탈하지 않기를 원하십니다.

그 길은 고난이 예상되는 길이기도 하지만 사실상 최종 축복이 예비된 길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모습이 있어야 사람들이 그 길에 동참하려는 마음이 생길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교인들이 축복이 눈에 보이지 않으면 그냥 엠마오 마을로 내려갑니다.

그런 연약한 모습을 보면 사람들은 절대 그로부터 믿음의 매력을 느끼지 못합니다.

요즘 한 단어가 참으로 아름답게 느껴졌습니다. 그것은 바로 '답게'라는 단어입니다.

우리는 항상 성도답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항상 교인답게 행동해야 합니다.

 

교회에 다니는 어떤 30대 주부가 있었습니다. 남편이 악성 뇌종양에 걸렸습니다.

그래서 생을 비관하다가 병든 남편과 어린 두 딸을 남겨놓고 목숨을 끊이었습니다.

엠마오 마을로 내려가는 모습입니다. 그런 모습에는 축복이 자리할 공간이 없습니다.

 

반면에 어떤 부인은 교통 사고로 식물인간이 된 남편을 정성스럽게 간호했습니다.

믿음으로 간호하니까 그 남편이 전주 예수 병원에서 6년만에 의식을 회복했습니다.

그 장면을 보고 수많은 사람들이 믿음의 축복을 느끼면서 교회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길을 고수하면 반드시 축복의 문이 열립니다.

그리고 그런 삶을 살아야 다른 사람들을 복음의 길로 초청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으로 향한 마음을 끊임없이 가진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도 그 쉽지 않은 일을 이룰 때 그 믿음은 정말 복된 믿음이 될 것입니다.

 

얼마 전 대도 조세형이 일본에서 도둑질하다가 잡혔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는 출소 후 영웅이 된 것처럼 강연 다니고 선교활동을 한다고 돌아다녔습니다.

저는 그런 모습을 보면 불안합니다. 말도 아슬아슬하고, 행동도 아슬아슬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가 15년간의 감옥생활에서 성자로 바뀌어 나온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일본에서 도둑질을 했습니다. 그것을 보고 무엇을 느끼게 됩니까?

순간에 목숨을 바치는 순교는 오히려 쉬울 수 있지만 꾸준함이 어려움을 느낍니다.

그분 이야기는 일생을 진실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를 말해줍니다.

 

우리는 꾸준한 믿음생활, 변함없는 내적 충일함의 생활이 얼마나 어려운지 압니다.

우리도 그런 드러나는 도둑질만 안했지 비슷한 모습, 비슷한 본능이 다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가 우리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진실하게 살려고 진정 노력한다면

반드시 축복이 있게 될 것이고 우리를 통해서 많은 영혼도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로 살면서 세 가지 확신을 놓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 세 가지 확신이 있는 삶과 확신이 없는 삶은 그 결과가 엄청나게 차이납니다.

우리에게 있어야 할 세 가지 확신이란 다음과 같습니다.

 

1) 첫째, 구원의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진정 주님을 영접하면 구원을 받습니다.

2) 둘째, 부르심의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구원하시고 사명을 주셨습니다.

3) 셋째, 하나님이 언제나 나와 함께 하신다는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는 믿음의 길은 힘든 길이어도 반드시 주님이 함께 하십니다.

 

2. 사마리아인의 고을로 들어가지 말라

 

주님은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라고 합니다.

주님도 사마리아인을 미워하셨습니까? 그렇지 않음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 잘 압니다.

그러므로 사마리아인에게도 가야 합니다. 영혼의 판단은 오직 하나님만 하십니다.

우리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최선을 다해서 영혼 구원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은 사랑해도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는 들어가지 말아야 합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사마리아 사람은 유대인도 아니고 이방인도 아닌 사람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믿음 생활을 하는데 인본주의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인본주의적 생각들이 복음을 방해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우리 영혼을 지키기 위해 인본주의적 소굴로 들어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사마리아인의 고을의 가장 큰 특징은 미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과 사마리아 사람들은 서로 전혀 관련이 없는 이방인이 아닙니다.

앗수르가 사마리아 지역을 점령해서 편 혼혈 정책으로 사마리아인이 생긴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혈통적으로 거의 관련이 없는 이방인들보다 서로를 더 미워했습니다.

유대인들도 사마리아인을 미워했고, 동시에 사마리아인도 유대인들을 미워했습니다.

 

그래서 사마리아인의 고을에 있는 가장 특징적 요소는 미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마리아인의 고을로 가지 말라는 말씀을 우리의 삶에 확대 적용하면

서로 간에 숨겨두었던 미운 감정을 떨쳐버리라는 말로 적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진정 우리 마음에 미움이 없어져야 영혼을 구하는 전도의 길이 열리지 않겠습니까?

 

우리 이 시간 모두 주님을 생각하고 교회를 생각하여 미움을 버리기로 다짐해봅시다.

저도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것 같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는 미움과 편견이 있습니다.

10년 전의 그 사람! 5년 전의 그 사람! 분명히 그런 사람들이 누구에게나 있을 것입니다.

이 시간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그런 사람을 용서하는 시간으로 작정해봅시다.

우리에게 진정 그런 마음이 있을 때 새로운 축복의 시간이 다시 펼쳐질 것입니다.

 

미국 아리조나 주의 피닉스에서 어느 날 한 죄인이 교도소에서 나왔습니다.

나오면서 자기를 감옥에 보낸 사람을 반드시 죽이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그런데 집에 돌아와 보니 아내와 두 딸이 있는데 참으로 처량한 모습이 듭니다.

자기 원수를 갚으면 자기 속은 시원해지지만 가족들은 또 불쌍하게 될 형편입니다.

 

고민하다가 그날 저녁 가족들과 함께 교회로 갔습니다. 특별집회가 있었습니다.

그 집회에서 강사 목사님의 말을 듣고 은혜를 받아 그는 마음을 고쳐먹었습니다.

집회가 끝난 후에 그는 자기의 사연을 말한 후 목사님께 가슴의 총을 건네줍니다.

얼마 후 그는 자기를 감옥에 보낸 사람을 총이 아닌 복음을 들고 찾아갔습니다.

극적이 화해가 이루어졌습니다. 희망이 빛이 아리조나 한 구석에서 빛났습니다.

그러한 빛은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는 빛입니다. 이런 빛의 근원이 되십시오.

 

이제 다시 사마리아인의 고을에 들어가 미움과 증오로 날을 세우지 마십시오.

가슴속의 칼을 품고 있기 때문에 내가 힘들고 나의 귀한 시간들이 불행하게 됩니다.

그러나 가슴속의 칼을 꺼내 버리십시오. 그때부터 시간의 역사가 새로 쓰여집니다.

그때부터 나의 시간들은 창조적 시간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권능이 생기게 됩니다.

바로 그때 우리의 삶은 수많은 사람들을 이끌 수 있는 능력 있는 삶이 될 것입니다.

 

3.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본문에서 주님께서는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믿다가 실망한 사람들을 먼저 찾아가서 전하라는 말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낙심한 사람, 어려운 사람, 주님이 필요한 사람을 찾아 전도하라고 보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할 때 항상 우리보다 연약한 사람들을 살필 줄 알아야 합니다.

그 말은 무슨 말입니까? 사실상 서로 서로가 다 살필 줄 알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 사람 중에서 이해와 관심이 필요 없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두 딸을 키우면서 가장 보람있을 때가 서로 양보하고 이해할 때입니다.

우리들이 그런 모습을 보인다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흡족하시고 영광 받으시겠습니까?

그러한 삶을 위해서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겸손한 삶의 자세일 것입니다.

너무 자신을 높여서 윽박지르고, 정죄하고, 판단하는 모습은 겸손한 모습이 아닙니다.

특별히 힘들고 어렵고 연약하다면 더욱 세심하게 그를 살피는 것이 겸손한 모습입니다.

 

서울 강남에 딸과 아들 하나씩을 둔 어느 단란한 가정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어린 남동생이 엄마에게 응석을 부립니다. "엄마! 귀신 꿈 꿨어요! 무서워요!"

그러자 엄마가 말했습니다. "요셉아! 걱정하지 말아. 예수님이 지켜줄 거야."

그러면서 엄마는 아이를 품에 꼭 안고 아이를 위해 사랑으로 기도해 주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딸아이가 자기도 어머니의 품이 그리워 가짜로 엄마에게 말했습니다.

"엄마! 나 귀신 꿈 꿨어요. 정말 무서워요."

그때 엄마가 말했습니다. "다 큰애가 뭐가 그리 무섭니? 예수님이 함께 하시잖아!"

그러면서 아무 조치도 없었습니다. 그런 엄마의 모습이 자기의 가슴이 상처가 되었다고

그 딸아이가 대학을 졸업한 후에 그 일을 고백하는 사연을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

 

여러분! 그것이 편애 때문일까요? 사려가 부족한 점은 있어도 편애는 아닐 것입니다.

어린 동생이니까 더 사랑했을 것이고, 아니면 그렇게 말할 때

제 삼자가 전혀 알 수 없는 무슨 짜증나는 일이 있었을 수도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물론 그래도 짜증을 참아야 할 책임이 있지 짜증을 내 버리면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가끔 가정에서나 교회에서나 항상 짜증난 언어로 남에게 상처를 주는 분들이 있습니다.

무슨 이유가 있고, 무슨 형편이 있겠지만 사실상 그런 이유가 없는 사람 있습니까?

그래도 다 참고, 조심하고, 인내하고 사는 것이 성도의 마땅한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반면에 별로 큰 일이 아닌 것으로 엉뚱한 오해를 하고 스스로 상처받는 분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상대방의 입장을 최대한 이해하려는 자세를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특별히 교인들은 처음 나온 사람은 <어린아이를 감싸는 사랑>으로 감싸야 합니다.

처음 나온 사람들을 위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배려해야 합니다. 아주 중요한 자세입니다.

누구나 처음 나올 때는 불안감이 있습니다. 그들을 왕자처럼, 공주처럼 모셔야 합니다.

그 첫 인상이 매우 중요합니다. 불안감이 있을 때 따뜻한 배려는 정말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대개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해주고 인정해주는 것으로 정을 붙이기 때문입니다.

 

잃어버린 양, 연약한 양에 대한 우리의 사랑과 관심은 좋은 신앙의 표현입니다.

그리고 그런 삶의 자세는 권능을 주고, 결국 전도의 열매도 얻게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최대 관심이 전도임을 알고 잃어버린 양을 항상 살피시길 바랍니다.

 

캐나다 토론토에 있는 오스왈드 스미스 목사님이 한번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가 한 교회의 영적 상태를 보려면 전도하려는 태도를 통해 알 수 있고,

한 사람의 영적 상태를 보려면 전도하려는 태도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여러분들에게 정말 잃어버린 양을 구하려는 태도, 전도하려는 태도가 있습니까?

 

오늘날 많은 교인들이 교회 프로그램이라는 것을 하려고 열심을 냅니다.

또한 많은 교인들이 생산적인 회의를 하지 못하고 회의 자체에 신경을 쏟습니다.

그리고 그 외의 여러 가지 일로 분주합니다. 물론 그런 일도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기초는 확실해야 합니다. 영혼을 구하기 위해 그런 일도 있는 것입니다.

영혼을 구하고, 영혼을 세우는 것이 없고 갈등의 씨앗만 제공하면 큰 문제입니다.

 

때로 어떤 분들은 크게 보면 될 일을 가지고 지나치게 사소한 문제에 매달립니다.

한 시간 회의하는 것보다 한 시간이 전도하는 것이 소중함을 설득하기 힘듭니다.

그러므로 다른 봉사보다 전도를 앞세울 수 있는 마음을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일차적인 문제를 제쳐놓고 이차적인 문제에만 시간을 허비하면 어찌되겠습니까?

 

어떤 교회가 성장할까요? 교회 성장을 원하시지요? 교인은 대개 원할 것입니다.

교회 성장의 비결을 알려드립니다. 그것은 전도하는 교회가 성장한다는 비결입니다.

복음을 전파하지 않는 교회는 축복의 샘이 막힌 것 같은 답답한 느낌을 줍니다.

그러나 교인들이 전도에 총력으로 경주하는 교회가 반드시 성장하게 되어 있습니다.

또한 복음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전도하는 것은 우리의 최대의 책임입니다.

 

성경에 가장 아름다운 발은 잃어버린 양에게 찾아가는 사람의 발이라고 했습니다.

요즘에는 인터넷으로 거부감 안주고 지혜롭게 손끝으로 복음을 전하기도 합니다.

여러분 모두 그런 아름다운 발과 아름다운 손끝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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