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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기 목사 설교 21편~30편

by 【고동엽】 2023. 1.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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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제목 : 네가 낫고자 하느냐

자료원 : 조용기목사 여의도순복음교회

발행일 : 95년 07월 02일

 

예루살렘 성내에 베데스다라는 연못이 있었습니다. 그 연못은 하나님의 성

전에 제물로 드리려고 하는 양이나 염소를 씻는 장소였다. 그런데 어떤 병

든 사람이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기 위해서 양을 끌고 베데스다라는 연못에

서 양을 싯다가 자기 몸의 병이 깨끗이 나아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그

소문이 온 이스라엘에 퍼져 나가자 베데스다의 연못물이 끓어 오를 때 손을

넣는 사람은 병이 낫는다는 그러한 소문이 널리 퍼졌습니다. 그때에 수많은

사람들이 그곳을 찾아왔습니다.

 

베데스다의 연못가에는 행각 다섯이 있는데 그 안에는 많은 병자, 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른 자 온갖 병자들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르

에서 천사가 내려와서 가끔 물을 동하는데 언제 물이 동하는지 알 수 없었

습니다. 물이 동할 때 가장 먼저 뛰어 들어간 자마다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38년된 혼자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너무 병이 오래되

고, 지쳐 있었고 친척들도 없습니다. 그래서 38년 된 그 병자는 물이 동할

때 다른 사람은 다 들어가서 고침받을 때 그는 항상 느려서 물이 동할 때

베데스다 못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런에 어느날 예수님께서 누워있는 그 병자를 보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

람에게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요5:6)그 환자는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

이 먼저 내려가나아디"(요한복음5:7)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는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요5:8)고 명하셨습니다. 그러자 그

38년된 병자는 자신이 누웠던 자리를 들고 걸어갔습니다. 이 베데스다의 연

못의 사건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많은 교훈이 있습니다.

 

1. 베데스다의 연못이 상징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연못에 우리 자신

을 씻어야 합니다.

 

히브리서9장 14절에 보면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

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

의 모든 죄는 오늘 베데스다 연못물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못에 뛰

어 들어가서 우리가 씻을 때 정결함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 씻지 않고는 하나님의 제단에 우리 자신을 드릴 수

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베데스다의 연못물에 양을 씻어서 하나님 제단에 드

린 것처럼 오늘 하나님의 양인 우리들은 모두 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연못에 들어가서 우리 자신을 씻어야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납하시고, 우

리의 기도를 받아주시고, 우리의 헌신을 받아주시고 우리의 간구를 받아주

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를 의지하지 않고는 아무도 하

나님 앞에 나설 수가 없습니다.

 

기독교는 그리스도의 보혈의 종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보혈을 의지

하고 나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신약시대 성도들이 베데스다의 연못에서 씻

은 양을 제단으로 내려가서 제물로 드린 것처럼 우리 자신도 예수 그리스도

의 보혈로 우리 자신을 씻고 나서 주의 제단에 들어가서 산 제물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

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

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

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1-2)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에게 제물이 되라고 말씀한 것인 보혈로 씻김 받은 후 우리

의 삶을 산 제물로 드려야 되는것입니다. 원래 제물은 죽여서 드리는 것이

지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죽었으므로 이제 우리 자신을 산제물

로 드려야 되는 것입니다. 살아있으면서도 제물이 된다는 것은 자아가 죽고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성경은 거기에 대해서 로마서 14장 8절에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

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는 주의 것이로

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도 "내가 그리스도와 함

께 십잎나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

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나 중심으로

살지 않고 주님 중심으로 살고, 나를 위해서 살지 않고 주님을 섬기기 위해

서 사는 생활이 산 제물이 되는 삶인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예수님께서 우리가 이 세상의 풍속을 좇지 말고 살아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골로새서 3장 5절에는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나 탐심은 우상숭배니라"고 말

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 세상의 부귀 속에 유물주의나 탐욕을 버리고 우

리는 주님을 섬기는 마음으로서 살아갈 때 에스겔 18장 31절에는 "너희는

범한 모든 죄악을 버리고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할지어다 이스라엘 족속아 너

희가 어찌하여 죽고자 하느냐"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

를 구주로 모시고 성령으로 거듭나서 새로워지는 사람마다 영원한 삶을 얻

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일생을 하나님의 책에 다 기록해

놓았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야웨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

고 그 길을 기뻐하시나니"(시편37:23)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시는

정하신 뜻이 계시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고 모든 생활에서 하나님의

뜻을 알고 분별하고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살게 될 때 우리의 기도는 응답되

고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베데스다 연못에서 양을 씻어서 하나님의 제단에 제물로 드린 것처럼

오늘 우리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연못에 우리 자신을 씻고 우리를 산

제물로 드려서 하나님 앞에 세상을 좇지 아니하고 마음을 새롭게 하고 하나

님의 뜻을 분별하면서 살게 될 때 주님이 은총이 우리의 삶에 임하게 될 것

입니다.

 

2. 다섯 행각은 인간의 다섯가지 부류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첫째, 행각은 죄인의 행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죄인은 그 행각에 있어서 물이 동할 때 그 물에 뛰어들어가서 치료함을 받

는 것처럼 보혈로 뛰어들어가서 그 피로 말미암아 죄사함을 받아야 하는 것

입니다.

죄인들이 아무리 종교를 가진다고 해서 종교가 죄인을 의롭게 만들지 못합

니다. 아무리 율법이 주어져도 육신이 연약하여 율법을 시행할 힘이 없습니

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

의 연못속으로 뛰어 들어가는 것 밖에 없습니다.

 

둘째 행각은 더러운 자들의 행각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정결함을 받지 못하고 더러운 손과 더러운 말, 더러운 행동을 하고 음란

하고, 방탕하고, 추악하고, 술취하고, 방황하는 이러한 사람들이 그러한 행

동에서 누가 정결함을 받을 수 있습니까.인간이 각오와 결심으로서 아무리

정결함을 받으려고 해도 정결함을 받지 못하빈다. 이런 것을 씻어낼 수 있

는 길도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연못으로 뛰어들어가는 길 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예수 안에 있는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

다고 말하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에 뛰어들어가면 하나님께서 용서하여 주시는 것입니

다.

 

셋째 행각에는 병든자의 행각이라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수많은 병든 자들이 그곳에 모여 있습니다. 영적으로 병들고 마음으로 병

들고 육체로 병든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입니다. 제가 불란서 파리에 가서

집회할 때마다 느끼는 것은 그들은 우리보다 훨씬 잘 살고 자유분방합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영적으로 병들었습니다. 불란서에는 점치는 곳이 얼마

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들은 마음의 평화와 기쁨과 행복과 같은 것을 느끼

지 못하고 있습니다.

 

정신적으로 많은 고통 속에 있으며 육체적인 병은 말할 수 없습니다. 오늘

날 온 세계가 다 병들었습니다. 온 세계가 다 세번째 행각에 들어있는 것입

니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리스도를 통해서 얻는

마음의 치료가 있어야 육신도 치료받고 영의 질병도 치료 받을 수 있는 것

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연약을 책임지시고 병을 짊어지고 가셨습니다. 성

경에는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가 병고침을 받았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

입니다.

 

넷째 행각은 낭패당한 자의 행각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낭패와 실망을 당한 사람인 것입니다. 혹은 사업에 실패

하고 가정에 실패한 사람, 직장을 잃어버린 사람, 생활에 실패한 사람 그리

고 삶의 목적과 방향을 잃어버리고 방황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연못에 뛰어들어가서 그리스도를 만나고 하나님의 은총

을 받으면 낭패와 실망에서 벗어나올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고 강건한 것입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나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이끌어 주십니다.

 

우리는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말아야 합니

다. 우리는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예수님은 약속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을 하나님께 구할 때 넘치게 채워주십니다. 우리가 일할 때마다 하나님이

복을 주셔서 하나님이 더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힘으로만 살려 하면

가시와 엉겅퀴에 찔리고 고통만 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

의 보혈의 연못에 뛰어 들어가서 하나님과 화해하고 하나님의 은총과 축복

을 받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총과 축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성경은 고린도후서 6장 1절에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

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헤를 헛되이 받지 말라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받을

만한 때요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가 보혈에 의지해 하나님과 화해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와 의를 먼

저 구하면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구원을 베풀어 주시고 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더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다섯째 행각은 사망과 절망에 처한 자의 행각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소망이 없고 이제는 죽어서 영원히 지옥에 떨어질 수 밖에 없

는 절망적인 사람들이 모여 있는 행각이 바로 다섯째 행각인 것입니다. 그

러나 이 사망에 처한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연못에 뛰어들어 가

서 보혈로 씻기면 영생이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

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7)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 주님께서

는 하늘에 우리가 영원히 있을 곳을 예비해 놓으시고, 그 보혈을 통해서 그

곳에 우리가 거할 수 있는 축복을 주신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

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

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라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

소를 예비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

게 하리라"(요14:1-3)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보혈의 연못에

뛰어들어 가면 사망의 소리는 철폐되고 영원한 천국과 영광의 길이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들을 때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감동시켜 베데스다

연못 물이 동하듯이 우리의 영혼이 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

께서 믿음을 주시고, 그 믿음을 가지고 뛰어들어가면 죄인도 용서받고 더러

운 자도 거룩함을 입고, 병든 자는 치료를 받고 낭패당한 자는 은총을 입

고, 병든 자는 치료를 받고 낭패당한자는 은총을 입고, 사망과 절망에 처한

자는 영생과 하나님의 영광의 복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을 믿는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그 보혈의

연못에 뛰어 들어가서 피로 씻고 말씀과 성령으로 감동해서 예수를 믿을 때

우리의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며 성령으로 넘치게 얻는 하

나님의 기적이 우리 가운데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행각 다섯에 가득가득 인생 실패자들이 그 물의 동함을 기다릴 때 거기에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38년 동안 병든 자를 구하시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굉

장한 변화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젠 베데스다의 연못들이 동함으로 치료

를 받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예수님이 직접오쇼서 치료해 주시겠다는 약속

의 상징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나무에 달림으로 말미암아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다 청산하시고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화목케 하시고 우리의 질병과 고통을

짊어지시고 대죄를 담당하시고 우리 대신 죽음을 맞으셔서 영원한 생명을

우리에게 허락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우리의 모든 인류를

새롭게 하는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십자가 밑에 나가서 그리스도가

흘리신 피의 연못에 뛰어 들어가면 그곳에서 우리의 옛 사람은 벗어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새롭게 되는 것입니다. '누

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

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7)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베데스다 연못은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 가운데

우뚝 서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두 세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18:20)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예수님이 와서 계십니다. 우리 곁에 예수님이 함께 계십니다. 그리스도는

성령을 통하여 오늘 우리와 같이 계십니다. 우리와 함께 거하시고 우리의

손을 잡기를 원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이러므로 그리스도의 손을 잡고 이제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의 영육간의 치료를 받고 성령으로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어야 되는 것입니다.

 

요한1서 1장8절로 9절에는 "만일 우리가 죄 없다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

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의 죄를 자백하면 저

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의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신 것이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죄를 감추는 자는 용서함을 받지 못

해도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는 자는 그리스도의 그 놀라운 보혈의 능력으로

 

 

 

치료함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베데스다의 씻긴 양은 반드시 제단에 올라가는 것처럼 우리도

예수의 보혈로 씻고 난 다음에는 반드시 산 제물이 되어 주님께 헌신해야

되빈다. 이러므로 로마서 6장13절에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

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자와 같이 하나

님께 드리라"는 말씀처럼 우리는 하나님께 드리는 삶을 살아야 되는 것입니

다.

 

예수님의 보혈로 씻고 그 다음 우리는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아 버리고 그

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되어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드려서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선한 삶을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는 주님을 믿고 세상을 믿지 않습니다. 환경을 바라

보고 믿지 않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다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는 믿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선한 목자가 되는

것입니다. 목자는 양을 인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목자가 양을 먹이듯이 우

리를 먹여주시고 목자가 양을 보호하듯이 우리를 보호하여 주시는 것입니

다. 또한 목자가 양을 치료하듯이 우리를 치료해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

은 죽었다가 부활하셔서 성령으로 우리와 같이 계시며 우리의 선한 목자가

되셔서 우리를 돌보고 계시므로 이제 우리가 예수 앞에 전적으로 마음을 다

해서 믿고 순종하며 나가면 오늘날 주님은 그 능력의 손에 베풀어 주셔서

우리에게 안식을 주시고, 우리의 영혼의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

를 생명을 얻되 영원히 얻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우리의 살길은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갈길은 예수님 밖에 없습니

다. 예수그리스도를 떠나서 구원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찾을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참 행복도, 참평안도, 참 기쁨도, 참 인류의 가치도 목적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을 섬기는데 있는 것입니다.이 세상과 세상의 것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인생은 풀과 같고 그

영화는 풀의 꽃과 같아 풀은 시들고 꽃은 떨어지지만 야웨의 말씀은 영원합

니다.

 

그러므로 오늘 잠시 있다 사라질 인생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버리고 육신의

정욕이나 안목의 정욕이나 이 세상의 자랑에 따라 산다면 그보다 더 불쌍한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바로 베데스다의 연못물이 보혈의 샘

물이 넘쳐나고 보혈의 열매가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곳에서 예수님이 찾아

와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죄인, 더러운 자, 병든자, 낭패당한 자, 사망자,

절망에 포로된 자 들의 모이는 곳이 이곳이요, 이곳에서 에수님은 우리를

향하여 손을 내밀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낫고자 하느냐, 너희가 용

서받고자 하느냐, 너희가 거룩함을 얻고자 하느냐, 너희가 치료받고 싶으

냐, 낭패에서 해방되고 싶으냐 천국영생을 얻고자 하느냐, 그렇다면 수고하

고 무거운 짐진자들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2

제목 : 조국이 위기에 처해 있을 때

자료원 : 조용기목사 여의도순복음교회

발행일 : 95년 06월 25일

 

6.25 사변이 일어난 지 올해로 꼭 마흔 다섯 해가 됩니다. 북한 공산당이

저지른 민족과 역사에 대한 범죄행위는 지난해 김영삼 대톨영의 모스크바

방문시 옐친 러시아 대통령이 전해 준 전쟁문서에서 밝히 드러나고 말았습

니다. 소련의 스탈린과 중국의 모택동과 더불어 어떻게 6.25라는 전쟁을 계

획해서 발발시켰는가가 온 천하에 공개된 것입니다. 6.25로 인한 피해손실

은 유엔군과 한국군을 포함 18만 명이 생명이 잃었고 북괴군 52만명, 중공

군 90 만명의 병력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또한 99만명의 민간인이 목숨을

잃거나 부상을 당했으며 8만5천여 명의 지도급 인사를 납치해 갔습니다.

 

북한 공산주의자들은 전쟁 후에도 청와대 기습사건, 아웅산 테러, 중동 근

로자 귀국 비행기 폭파사건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만행을 저질러 왔습니

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우왕좌왕해서는 안됩니다. 단호하고도 의아한 자세

로써 조금도 당황하지 말고 삶에 전심전력해야 합니다. 그리고 특히 우리

기독인들은 이러한 때에 유다 왕 여호사밧 왕이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성경

을 통해 유다 여호사밧 왕이 국가적인 위기에 어떻게 대처했었는가를 알아

봄으로써 현 상황에서의 우리의 자세를 가다듬고자 합니다.

 

1. 국가적 위기에 대처한 유다왕 여호사밧의 자세

 

유다의 여호사밧 왕은 하나님을 공경하고 정치를 잘해서 나라가 흥왕하고

국민들이 평안하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모압과 암몬과 마온 연합군

이 유다를 침공해 왔습니다. 유다 왕이 미처 반격을 가하지 못하는 사이에

유다의 철벽성들은 한,둘 무너지고 적군들은 예루살렘 가까운 곳까지 진격

해 왔습니다.

 

유다 왕은 몹시 당황했습니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이 여러가지 있었습니다. 우방으로써 늘 도움을 주던 애굽 군대를 돈을

주고 청해 올 수도 있고 아니면 자신들의 군사력에 의지해 침략군에게 결사

적으로 대항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사밧 왕은 애굽에 지원군을 요

쳬하지 않았고 자기 나라의 군사력으로 대항하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왕이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은 하나님의 전이었습니다. 왕은 전 국민에게 금

식령을 내리고 성전에 나가 엎드려 하나님께 부르짖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점이 역사를 좌우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위기를 맞자 하나님께 나아가 눈물로 간구하였던 것입니다.

 

적의 연합군이 물밀듯이 진격해 오는 다급한 상황에서 하나님을 찾아 성전

으로 나갔다는 것은 오늘날 인간적으로 생각해 볼 때 너무나 어리석고 어린

아이의 행동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의 하나님께서는 여호사

밧 왕의 이 신앙을 높이 평가해 주셨습니다.

 

현재 우리들이 취해야 할 길도 바로 이 길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

은 어찌할 수 없지만 하나님을 알고, 믿는 사람들은 모두 다 회개하며 하나

님의 도움을 간절히 간구해야 합니다. 이 길이 최선의 길인 것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영국의 30만 대군이 독일 기계부대에 쫓겨서 프랑스의

작은 어촌 덩커크에 포위된 적이 있었습니다. 공중에서는 그 유명한 독일

비행기가 폭탄 세례를 계속 퍼붓고 바다에서는 그 유명한 독일 잠수함들이

영국의 군함들을 모조리 폭파시켜 버렸습니다. 30만 영국대군을 구할 길은

전혀 없었습니다. 만약 영국군 30만 영국 대군을 구할 길은 전혀 없었습니

다. 만약 영국군 30만이 그곳에서 포로로 잡히면 구라파 대륙은 무너지고

영국까지도 독일의 손에 함락될 수 밖에 없는 기막힌 위기상황이었습니다.

 

영국 왕실과 수상 처칠은 중대 결단을 내렸습니다. 하루동안 전 국민이 모

든 일손을 멈추고 오직 하나님께 부르짖는 기도회를 선포한 것입니다. 당시

의 기록에 의하면 처칠 수상도 그날 온종일 웨스트민스터 성당 성가대석에

앉아 부르짖어 기도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영국 국민들의 부르짖음에 기적으로 응답하셨습니다. 덩커크

에 억수같은 비가 쏟아져 독일 기계부대의 기계와 탱크들이 진흙탕에 빠져

전혀 움직일 수 없었고 비행기도 뜰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바다에도 파도

가 너무 심해 모든 배들은 다 철수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며칠 동안 계속해서 쏟아지던 비가 어느날 저녁 갑자기 멈추었습니다. 주

위 전선에는 여전히 비가 쏟아지는데 덩커크만은 비가 그치고 별빛이 보이

며 잠잠했습니다. 영국은 재빨리 모든 군함, 개인 보트까지 동원해 30만 대

군을 안전지대로 실어냈습니다. 그후 주의 전역에 비가 그치자 독일군 부대

는 순식간에 밀고 들어왔으나 덩커크는 텅 비어 있었습니다.

 

덩커크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기적적으로 철수한 영국 30만 대군은 곧

재편성돼 아프리카로 진격, 몽고메리 원수의 지휘로 아프리카 전투에서 연

전전승, 결국 독일을 패망시키고 만 것입니다.

 

이러므로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유다의 여호사밧 왕이 하늘의 하나님을

찾은 것처럼,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위기에 처한 영국이 거국적으로 기도하

여 위기에서 벗아날 수 있었던 것처럼 오늘날 우리도 현재의 국가적인 위기

상황에서 대통령 이하 국민 전체가 하나님을 간절히 찾으면 문제는 쉽사리

해결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저버리고 우리의 육신의

팔이나 오늘날의 애굽인 강대국 등 인간의 힘을 의지한다면 하나님은 우리

에게 등을 돌려버리고 말 것입니다.

 

2. 여호사밧 왕의 기도

 

여호사밧왕은 하나님께 이렇게 부르짖었습니다. "우리 열조의 하나님 야웨

여 주는 하늘에서 하나님이 아니시니이까 이방 사람의 모든 나라를 다스리

지 아니 하시나이까 주의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능히 막을 사람이

없나이다"(대하 20:6).

 

이 기도 속에서 우리는 그가 왜 세상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찾아 나왔

는지 그 이유를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뚜렷해

졌습니다. 하나님은 하늘을 완전히 통치하시고 이 땅에서도 이스라엘 뿐 아

니라 모든 이방나라도 다스리시는 즉 하늘과 땅과 세계의 모든 것을 다스리

시는 절대주권자라는 사실을 그는 인식한 것입니다. 권세와 능력이 하나님

의 손에 있기 때문에 그 누구도 하나님을 대적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

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연합군이 쳐들어와도 하나님의 손이 움직이면 그들

은 패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에 대해

여호사밧 왕처럼 분명한 인식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호사밧은 하나님은 은혜와 주신 언약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하

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신 대로 가나안 땅을 허락하셔

서 이스라엘이 뿌리를 내리고 살게 하신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고 하나님 앞

에서 부르짖을 때 약속을 강하게 가지고 나왔습니다. 그것은 솔로몬이 성전

을 하나님께 헌당할 때, 하나님의 성령의 권능이 성전에 충만했고 그때에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입니다.

"만일 재앙이나 난리나 견책이나 온역이나 기근이 우리에게 임하면 주의

이름이 이 전에 있으니 우리가 이 전 앞과 주의 앞에 서서 이 환난 가운데

서 주께 부르짖은즉 들으시고 구원하시리라 하였나이다"(역대하 20:9).

 

우리도 하나님께 기도드릴 때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들고 나와야 합니

다. 내가 일방적으로 부르짖는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변호사가 육법전서

에 따라 변호하는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언약을 사용해서 주께 부르짖으

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약속의 말씀을 저버리시지 않고 우리의 기도를 응

답해 주시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을 부지런히 읽고 설교말씀을 부지런히 들어서 늘 하

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마음깊이 간직하시고 이 말씀에 의지해 하나님께 기

도드리시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

하다"고 하셨으니 하나님은 약속하신 이 말씀대로 어제 귀신을 내어쫓고 병

을 고치고 가난한 자를 먹이신 것처럼 오늘날도 우리 가운데서 동일하게 역

사하시며 돌보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사밧 왕은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해 낸 다음, 하나님의 도우

심을 간구했던 것입니다. 그는 과거에 선을 악으로 갚은 모압과 암몬과 세

일산 거민들을 하나님앞에 고소했습니다.

 

"우리 민족이 출애굽할 때 하나님께서 롯의 자손인 모압과 암몬, 에서의

자손인 세일산 거민은 침공하지 말라고 하셔서 그들을 피해 돌아서 가나안

땅에 왔는데 지금 저들이 우리를 침략하여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땅을 빼

앗으려고 하는 것을 보옵소서."

 

그리고 또한 적을 대적할 능력이 없음을 아뢰고 도움을 청했습니다. "우리

는 적을 대적할 만한 능력도 없고 방도도 없사오니 오직 주님만 바라보고

주님만 의지합니다. 주님이여, 오셔서 우리를 도와주소서." 그는 기도할 때

먼저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인정했고, 두번째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강

력하게 시인, 제시했고 세번째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말씀대로 현재의 위

기에서 건져주시기를 명료하게 간구했습니다.

 

우리도 기도할 때 장황하게 중언부언할 필요가 없습니다. 여호사밧 왕과

같은 순서로 명료하게 도우심을 간구하고 탄원하면 하나님께서 들어주시는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부여잡고 하나님께 간절히 탄원하면 오늘

날도 하나님께서는 동일하게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 주시는 것입니

다.

 

3. 하나님의 응답

 

하나님께서는 유다에게 레위인 야하시엘을 통해서 응답하셨습니다.".. 두

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이 전쟁이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대하20:15) 이 얼마나 놀라운 응답입니까? 이야말로 우리

주 예수께서 우리에게 주신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 오라 내

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는 약속과 같지 않습니까?

 

현재 우리가 처해있는 남북한 간의 위기의 문제도 우리가 거국민적으로 하

나님게 나와 부르짖으면 하나님게서 책임져 주십니다. 외교를 통해서든, 전

쟁을 하든 이 문제는 하나님의 문제가 되어야지 우리의 문제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과거에도 민족적인 위기에 처할 때마다 우리는 여의도 광장에 모여서 부르

 

 

 

짖어 기도했고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놀라운 능력을 베풀어서 문제를 해결해

주셨던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또 말씀하기를 "이 전쟁에는 너희가 싸울 것이 없나니.. 너희와 함

께 한 야웨가 구원하는 것을 보라"(대하 20:17)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는 평화를 줄 뿐만 아니라 싸워야 할 때에는 하나님께서 직접 나가서 싸우

신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를 내

어 맡기면 우리의 목자되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양떼인 우리를 위해 꿈과

이리와 싸워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또 으다 백성에게 야하시엘을 통해 말씀하시기를 "이 큰 무리를

인하여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이 전쟁이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오 한

님께 속한 것이니라"(대하 20:15) 또한 " 이 전쟁에는 너희가 싸울 것이 없

나니 항오를 이루고 서서 너희와 함께 한 야웨가 구원하는 것을 보라 유다

와 예루살렘아 너희는 두려워하며 놀라지 말고 내일 저희를 마주 나가라 야

웨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 하셨느니라"(대하 20:17) 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너희가 군대를 보내는 등 전쟁의 형식은 다 취하라 그러나 싸움은 내가 할

것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여호사밧은 군대를 정렬하고 그 앞에 찬양하는 사람들을

세웠습니다. 그리고는 백성들을 향해 외쳤습니다. "너희는 하나님을 신뢰하

라 그리하면 견고히 서리라. 그리고 그 선지자를 그리하면 형통하리라:"는

전쟁터에 나가는 군대 앞에 거룩한 예복을 입은 성가대를 세워 찬양케 한

것은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유다 군대는 성가대를 앞세워 찬송을 부르며 적진을 향해 나갔습니다. "야

웨를 찬미하라 그는 지극히 크시고 영화롭도다"하고 찬송을 시작하자 마자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시매 적의 연합군이 서로 살륙하여 모두 죽고 말았습

니다. 유다의 군인과 백성들은 구경하고 성가대들은 찬양하는데 그들은 자

기들끼리 찌르고 싸워 진멸해 버리고만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한 것은 적군

의 금은보화를 노획하는 일 뿐이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친히 싸워서 원

수를 진멸하신 역사적인 위대한 사건인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은 종교적인 일에만 관심을 가지시는

분이 아니시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일상생활과 우리의 나라를 지키고 보호

하는 일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계신 것입니다. 자기 백성들을 위하여 전

쟁도 불사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출애굽한 이스라

엘은 구하기 위해 홍해수가에서 애굽군을 섬멸하시고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

에 들어갈 때 그들과 함께 싸우시며 가나안 주민들을 쫓아 내셨던 하나님이

십니다.

 

그러므로 요엘은 요엘서 2장 15절로 20절을 통해 이렇게 우리에게 권면하

고 있습니다.

"너희는 시온에서 나팔을 불어 거룩한 금식일을 정하고 성회를 선고하고

백성을 모아 그 회를 거룩케 하고 장로를 모으며 소아와 젖먹는 자를 모으

며 신랑을 그 방에서 나오게 하며 신부도 그 골방에서 나오게 하고 야웨께

수종드는 제사장들은 낭실과 단 사이에서 울며 이르기를 야웨여 주의 백성

을 긍휼히 여기소서 주의 기업으로 욕되게 하여 열국들로 그들을 관할하지

못하게 하옵소서 어찌하여 이방인으로 그들의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말하게

하겠나이까 할지어다.

 

그때에 야웨께서 자기 땅을 위하여 중심이 뜨거우시며 그 백성을 긍휼히

여기실 것이라 야웨께서 그들에게 응답을 주리니 너희가 이로 인하여 흡족

하리라 내가 다시는 너희로 열국 중에서 욕을 당하지 않게 할 것이며 내가

북편으로 쫓아내리니 그 전군은 동해로, 그 후군은 서해로 들어갈 것이라

상한 냄새가 일어나고 악취가 오르리니 이는 큰 일을 행하였음이니라 하시

니라"

 

"하나님이여, 공산주의자들이 또다시 우리를 침략하는 일이 없게 하여 주

옵소서, 우리나라가 열국의 수치거리가 되지 말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강

토가 초토화되고 헤매이는 비극이 일어나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가 합심하여 우리의 마음을 찢고 회개하며 부르짖음으로 말미암아 하

나님의 마음이 뜨거워져서 우리를 위하여 일어나시게 해야 합니다. 그리하

여 당신의 백성들을 위하여 전쟁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께서 능력과 권세

로써 우리 조국과 민족을 보호해 주시며 오히려 복을 부어 주셔서 우리의

영혼이 잘되고 범사가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는 역사가 일

어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또 우리나라가 열국 중에서 머리가 되고 꼬리되지 않으며 위에 있

고 아래 내려가지 않으며 남에게 꾸어줄지언정 꾸지 않는 백성이 되고 온

천하에 복음을 전하는 제사장 국가로서의 사명을 다할 수 있게 되어야 하겠

습니다. 오늘날과 같은 국가적인 위기상황에서 우리는 마음을 합하여 첫째

도 기도요, 둘째도 기도요, 셋째도 기도로써 하나님의 얼굴을 간절히 찾는

모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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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믿음은

자료원 : 조용기목사 여의도순복음교회

발행일 : 95년 06월 18일

 

오늘 저는 '믿음은..'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날은

불신의 시대라고 말합니다. 사람이 사람을 안심하고 믿을 수 없는 것은 말

할 필요도 없거니와 정부나 은행 및 공동기관까지라도 믿을 수가 없는 처지

에 이르렀습니다. 오늘날 같은 시대보다 하나님의 신앙이 절실히 필요한 시

대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불안과 공포를 극복하고 마음속에 평안

을 가지고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삶의 어느 것

을 돌보아도 무엇이든지 내일의 부정적 확실성이란 아무 것에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신앙도 그 신앙의 길을 알지 못하면 오직

방황만 있을 뿐이지 확실한 믿음의 길에 들어설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떻

게 하나님을 믿어야 우리가 올바르게 믿고 확신을 가지고 평안을 가지고 살

아갈 수 있겠습니까. 그일에 관해서 오늘 말씀을 나누고자 하는 것입니다.

 

1. 믿음은 우리 마음속에 간절히 바라는 것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마음속에 하나님을 알고 싶다는 간절한 소원이 없는 사람은 아무리 하나님

에 대한 이야기를 해도 마이동풍인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

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더욱 알고 싶고, 만나서 체험하고 싶다는 간절

한 기대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고 신앙심이 마음속에 살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일상생활 가운데 하나님과 함께 살고 주님

의 은혜 속에 살면서 하나님의 응답을 받고 기적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마음

속에 뜨거운 기대가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마음에 뜨거운 소원이 없는 사

람은 믿음의 뿌리를 내릴 수가 없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인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속에 뜨겁게 바란다고

하더라도 막연한 소원은 바람을 잡는 것과 같습니다. 믿음이 실제로 역사하

기 위해서는 목표있는 소원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마치 돋보기로 햇빛을

비춰서 이렇게 저렇게 돌리면 불타지 않습니다. 초점을 맞추어서 빛을 계속

비추면 불이 일어납니다. 이처럼 간절히 소원하는 문제를 집중적으로 투자

를 하면 목표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남편을 주께로 구원하겠다는 목표를 간

절히 소원하게 되면 남편에 대한 구원의 믿음이 마음속에서 자생적으로 생

기게 됩니다. 자녀들을 주께로 인도해야겠다는 간절한 소원과 목표를 가지

고 있으면 자녀를 구원하는 믿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물질적인 축복을받

겠다는 간절한 소원을 가지고 기도하면 물질 축복의 믿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혹은 병고침을 받기 원하며 병고침 받는 것을 목표로 해서 간절

한 소원을 가지고 부르짖어 기도하면 거기에 대한 믿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

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분명한 목표를 설정하고 간절히 바라고 기도할 때 믿음이

마음속에 생겨나게 되는 것이빈다. 그래서 우리가 간절한 소원을 가지고 목

표를 향하여 기도할 때 바라봄의 법칙을 사용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이루어진 모습을 우리는 늘 바라보고, 간절한 소원으로 기대하

여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애굽에서 가나안 땅으로 향할 때 하나님께서는 아

브라함에게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창13:14-15)고 말씀

한 것입니다. 간절한 소원과 함께 분명한 목표로 바라봄의 법칙을 사용하는

것은 마음속의 큰 믿음을 가져올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주신 지혜를 보아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21년동안

외아저씨 집에서 머슴살이 하다가 고향으로 돌아올 때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습니다. 이때에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순식간에 부자가 될 수 있는 길

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외아저씨의 양무리 중에 얼룩얼국한 것과 점이 있고

 

 

 

아롱진 것을 삯으로 받아서 단풍나무와 신풍나무와 버드나무를 꺽어다가 양

떼들이 물을 먹는 구유 앞에 세워 놓고, 그것을 바라보게 하였습니다. 바라

봄의 법칙을 사용하여 많은 새끼들이 얼룩얼룩한 것이 나오기를 간절히 기

대한 것입니다. 그때로부터 시작해서 짐승들이 새끼를 낳기만 하면 얼룩 얼

룩한 새끼를 낳았습니다. 그래서 순식간에 야곱은 한떼두떼 바다에 모래 때

와 같은 동방에서 손꼽히는 부자가 되어서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된 것

입니다.

 

이것은 바로 바라봄의 법칙을 사용한 획기적인 사건인 것입니다. 오늘날

또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분명하게 바라봄의 법칙을 사용해야 되는 것입니

다. 예수님께서 2천년 전에 몸찢고 피를 흘린 십자가에 얼룩얼룩한 피로 물

든 십자가를 바라보고, 죄사함 받은 것을 마음속에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볼 때, 성령이 임하셔서 우리를 성결케 한 것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고, 주님께서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고 간 것을 믿어야 됩니다. 십자가를 바라보고 예수께서 피를 흘리심

으로 우리의 저주를 다 짊어지고 간 것을 믿어야만 되는 것입니다.

 

바라봄의 법칙을 통해서 하나님의 성령께서는 우리의 마음속에 믿음을 넣

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믿음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해

야 되는 것입니다.

 

2. 바라봄의 법칙을 통해서 믿음이 생겼을지라도 그 믿음 자체가 응답은

아닙니다.

 

믿음 그 자체는 실상입니다. 실상이라는 것은 헬라어로' 히포테스타시스'

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밑에서 바치는 받침대'라는 뜻인 것입니다. 그러므

로 내가 믿었다고 해서 믿음 자체가 응답은 아닙니다. 믿음은 응답을 올려

놓은 받침대인 것입니다. 여러분 이 강대를 강단위에 얹혀 놓았었습니다.

이 강단이 약하면 성단은 무너질 것입니다. 화병을 얹어 놓아도 받침대가

튼튼해야 화병을 얹어 놓습니다. 받침대가 약하면 화병이 무너지는 것입니

다. 그러므로 믿음이라는 것은 바라봄의 법칙으로 마음속에 생겨났어도 그

것이 실상에 불과한 것입니다. 받침대가 있어야 하나님이 그 위에 응답을

갖다 놓는데 그 받침대가 튼튼한지 안한지를 하나님께서 살펴보시는 것입니

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이 마음속에 생겼으나 당장 응답이 안 온다고 불평

이나 원망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튼튼한 받침대가 있어서 그곳에 응답

을 얹어 놓을 수 있는지 없는지를 시험하기 위해서 받침대를 흔들어 보시

고, 눌러 보시고, 무너뜨려 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에는 반드시 시

험이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야고보서 1장 12절에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1장 7절

에도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시험에 들지 않는 믿음 즉 받침대 위에 응답을 갖다 놓

지는 않습니다.여러분께서 믿음으리 얻고난 다음에는 그 믿음과 과연 확실

한지 안한지는 하나님께서 흔들어 보는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여리고성을

무너뜨리겠다는 약속에도 불과하고 진실로 그 믿음이 튼튼한 받침대 위에

섰는가를 시험해 보기 위해서 여리고 성을 6일동안에 6바퀴 돌게하고 마지

막날 7일에 7바퀴 돌게 한 것입니다. 이러므로 눈에는 아무 증거 안보이고

귀에는 소리 안들리고 손에는 잡히는 것 없어도 하나님의 약속 위에서는 흔

들리지 않는 믿음을 시험해 본 주님께서는 여리고를 무너뜨리게 하시는 것

입니다.

 

나아만 장군이 요단강 물에 목욕을 해서 문둥병이 나은 사건도 한가지 입

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사를 통해서 요단강에 일곱번 목욕하면 병이 나을

것이라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과연 이것을 인내하는 믿음을 가져서

실제로 실천하냐 안하냐를 하나님은 시험에 보셨습니다. 나아만 장군은 요

단강물에 들어가서 한번 목욕하고 나오고, 두번 목욕하고 나오고 세번 목욕

하고 나오면서 다가오는 거센 의심과 고통을 이겨내고,다음에 7번째 목욕을

하고 나오지 몸이 나아서 어린아이의 살같이 깨끗하게 회복된것입니다. 이

러므로 믿음은 반드시 시험을 해보는 것입니다. 여러가지 어려움이 다가와

도 말씀 위에 굳게 서서 주님을 감사하고 찬미하고, 나가는 것입니다. 이

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나이 1백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

은 것 같았으나 약하여 지지 아니하고, 오히려 믿음 위에 굳세게 서서 하나

님의 약속의 집에서 반드시 이루어 주실줄 믿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미하

며 나갔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믿음대로 된 것입니다. 이러므로 바라봄의 법책을 통해서 마

음속에 믿음이 실상이 생겼으면 그것을 굳세게 쥐어잡고, 조금도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믿음은 반드시 세찬 시련의 시험을 통과해야만 믿음이 된다는 사실을 여러

분 마음속에 깊이 명심해 두시기 바랍니다.

 

3.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바라봄의 법칙을 통해서 믿음을 가졌었으면, 믿음이 시험을 세차게 당할

때, 아직까지 응답이 다가오지 않았어도 우리는 응답받은 증거를 내 놓아야

되는 것입니다. 사탄은 말합니다. "너의 믿음은 헛된 것이다. 다 공수래 공

수거다. 안 이루어진다"그럴 때 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께서 역사하셨다는

증거를 내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입술의 고백이 증거인 것입니다. 성

경 마가복음 11장 23절에 말하기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

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로 말한 것입니다. 말하는 것이 바

로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아들을 주겠다고 말씀

하시고 난 다음에 그 믿음의 증거로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아브라함을 아

브라함(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사래를 사라(많은 자식을 가진 여주인)으로

바꾸어 버리신 것입니다. 입술의 고백이란 놀라운 믿음의 증거가 되는 것입

니다. 사람이 마음속에 믿음이 없으면 입술로 불평하고 원망하고 탄식하게

됩니다. 마음속에 의심으로 꽉들어찬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속에

믿음이 꽉들어 차면 입술로 확증한 증거의 고백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때문에 우리는 입술의 증거를 굳세게 부여 잡는 성도가 되어야 합

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성령이 나와 같이

계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말미암아 나는 거룩한 삶을 살수가 있습니다

"라고 고백할 수가 있어야 합니다. 예수께서 나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

시고, 병을 짊어지고 가셨다는 입술의 증거를 내놓은 것입니다. 믿음의 증

거를 내놓으면, 주님께서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라고 말씀하는 것이빈다. 믿

음에는 증거가 필요한 것입니다. 내가 주님께 십일조 드리고, 하나님을 조

심스럽게 섬겨야 합니다. 아브라함의 복이 내게 임하였습니다. 나는 복받은

사람입니다 라고 입술로 증거해야 됩니다.

 

우리는 환경이 조금만 어려워지고 감각적으로 조금만 고통이 다가와도 부

정적인 말을 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받을 은총을 다 잃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여러분께서는 여러분의 믿음의 도리의 신

앙 고백을 굳세게 잡아야 합니다.

 

바로 여러분 입술이 여러분의 미래를 좌우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입술을 사용하기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으리라고 말했으며, 죽고 사는

권세가 입술에 있다고 성경에서는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

리 마음속에 내가 믿습니다. 라고 말해도 시인하지 아니하면, 그는 구원에

이르지 못합니다.

 

이르므로 오늘 이 시간부터 마음속에 믿음이 있으면 그 믿음을 고백하는

여러분이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 다음 또 믿음은 행함으로

증명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으면 그 행함에 있어서 믿음의 씨앗을

심어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나사로의 무덤가에 갔었을 때 마르다에게

무덤에 돌을 옮겨 놓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마르다는 죽은지 나흘이 되어

서 썩은 냄새가 납니다. 라고 대답하자 주님께서 호통을 치셨습니다. 예수

께서 마르다에게 네개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하자 그들은 죽은

지 나흘이 되어 썩은 냄새가 나는 오라버니의 무덤에 가서 무덤의 돌을 옮

겨 났습니다.

 

두 사람은 있는 힘을 다해서 넘어지고 쓰러지면서 발이 찢기면서도 돌에

매달려서 무덤의 돌을 옮겨놨습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의 증거인 것입니다.

이때에 예수께서 무덤에 문 앞에 서서 나사로야 나오라고 하자 죽은 나사로

가 일어나 걸어나왔습니다. 이처럼 믿음의 증거가 있을 때 주님께서 역사하

시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벳세다 광야에 나갔을 때 저녁이 되어 먹을 것이

없고, 허기증에 걸려서 풀밭에 드러누워 있었습니다. 이때에 빌립을 불러서

저희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빌립은 믿음의 증거를 내놓지

않았습니다. 저들에게 조금씩 먹일지라도 3백 데나리온이라는 돈이 필요하

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나 안드레는 보리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마리를

들고 나왔습니다. 그 보리떡 다섯개와 몰고기 두마리는 하찮은 것입니다.

모든 사람 보기에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비난 받을만 한 그러한 행

동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 앞에 다가가자 그 위에 축사하신 후

에 수많은 군중을 배가 부르게 먹고 12광주리가 가득히 남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기적을 행하는 것입니다. 하늘과 땅을 지으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

고 없는 것을 있게 하신 하나님께서 믿음을 통해서 주님께서 역사하여 주시

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구만리 장성 멀리 계시지 않습니다. 지금 이 시간에

도 나와 함께 계십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증거를 통해서 살아계신 주님의

은총을 체험하시길 바랍니다.

 

 

 
 
 

24

제목 : 보혜사 성령님

자료원 : 조용기목사 여의도순복음교회

발행일 : 95년 06월 11일

 

오늘도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성령께서 우리들에게 넘치는

은혜를 주시고 계십니다. 인간에게 견디기 힘든 것은 고독과 소외 감정입니

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가장 두려워했던 사실도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왜냐

하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공생에 동안 열심으로 주를 따랐습니다.

그러나 3년이 지난후 예수님께서 갑자기 이 세상을 떠나서 하늘 아버지께로

돌아가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에 제자들은 너무나 충격을 받고 아예

망연자실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 예수님은 조금도 동요하지 아니하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요14:16)"내가 떠나가

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요16:7).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다른 보혜사를 보내겠다고 말씀하시는지 그 이유를

전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제자들은 절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슬

픔에 꽉 들어찼습니다. 급기야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고 사흘

만에 다시 부활하셨지만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나타나셨다가 사라지시기 때

문에 제자들은 마음에 안정함을 가질 수가 없었습니다.그래서 제자들은 뿔

뿔이 헤어지기도 하고 또 유대인이나 관원들을 두려워 해서 숨어서 지냈습

니다. 그러던 오순절이 가까운 어느날 제자들은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한

열흘동안 주님께서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하늘에서 강한 바람같은 소리가 나고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각 사람의 머리에 임하였더니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성경이

말하심을 좇아 다른 방언으로 말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임재하심이 그들의 마음을 꽉 잡았습니다.

제자들은 그들 안에 임재하신 성령님을 필연적으로 알게 되자 그들은 불안

과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절망에서 소망으로 슬픔에서 기

쁨으로 죽음에서 삶으로 놀라운 변화의 역사가 그들 속에 가득차게 되었습

니다. 그들은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셨다 부활하신 그 의미

를 깊이 깨달아 알게 되었습니다.

성령을 받기 전에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오시자

마자 성령께서 그들의 눈을 밝히시고 마음의 깨달음을 주시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의미를 깊이 알게 된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은 우리의 저가

악을 대속하기 위함이요, 우리에게 하나님의 음성을 들려주기 위함이요, 성

령을 받아서 세속을 이기고 마귀와 싸워 승리할 수 있음을 가르쳐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또한 우리의 연약함과 질병을 대신 짊어지셨고 모든 저주를 다 대속하시고

아브라함의 축복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한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런 사실

들을 깨닫게 되면 우리에게 기쁨이 넘쳐납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시면 거대한 변화가 다가오게 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 되빈다. 이전 것은

다 지나고 새 것이 된다는 사실을 그들은 마음 속에 깊이 깨닫게 되는 것입

니다.

 

오순절 성령을 받은 제자들은 자신들이 고아와 같이 버림받지 않았다는 것

을 알게되고, 그들과 함께 예수님께서 끊임없이 임재하여 계신다는 것을 깨

달을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이 가져오는 온천하 역사적인 우주

 

 

 

적인 구속의 의미를 깨닫게 되자 그들은 지혜와 총명을 얻어서 담대하게 일

어나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게 된 것입니다.

 

오순절인 그날에 베드로가 일어나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했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성령을 체험한후 이후 일어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주되심을 선포할 때 하

루에 3천명이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고 앉은뱅이를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일으켰으며 장정만 5천명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나게 된 것입니

다.

 

1. 다른 보혜사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다르다"는 의미가 헬라어에는 두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알로스"라는

말이고 또 하나는 "헤피로스"라는 말인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4장에

예수께서 다른 보헤사라고 말한 그 헬라어는 알론 파라크레톤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알로스"라는 말은 전부 똑같은 것이 두개 있는데 그중에

하나가 다른 것을 말할 때 알로스라는 어휘를 씁니다. 그러나 헤피로스라는

말은 전혀 다른 두개가 있을 때 첫째고 그 다음 다른 것을 말할 땐 헤피로

스라는 말을 쓰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다른 보혜사를 보낸다는 의미를 헤피렌 파라클로레톤

이라고 말하지 아니하시고 알론 파라크레톤을 보낸다고 말씀하시므로 내가

첫 보혜사인데 나와 꼭같은 다른 보혜사를 보내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 강림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강림이요 성령임재하심은 예수님

의 임재하심이요 성령의 사역은 바로 예수께서 사역하시는 것입니다. 예수

님이 하나님이시면 성령님도 하나님이시요 예수님이 사랑이시면 성령님도

사랑하시고 예수님이 권능이시면 성령님도 권능이시고 예수님이 구원사역을

하신 것처럼 성령님도 예수님의 이르믓로 구원사역을 하시고 예수님께서 귀

신을 쫓아낸 것처럼 성령님도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시고 예수님

께서 병을 고치신 것처럼 성령님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병을 고치시고 예수

님의 가르치신 것처럼 성령님도 가르치시고 예수님이 일을 한 것처럼 성령

님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일을 하시고 오히려 성령 강림으로 말미암아 예수

님의 행한 일을 제자들이 할 것이요 이보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다고 말씀

하신 것입니다.

 

보혜사라는 말은 파라클라투스라는 말인데 그 의미는 하나님께 보내심을

받아 우리를 돕기 위해서 항상 곁에 계시리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오순

절 다락방에 강림하신 성령님은 2000년의 세월을 지났지만은 조금도 변치

아니하시고 주님께서는 초대교회 주의 백성들과 같이 있으셨던 것처럼 지금

도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영원이라는 것은 무한한 과거와 무한한 미래를

창조적으로 표하는 것이기 때문에 언제나 우리와 같이 계신 성령님을 의미

하는 것이기 때문에 언제나 우리와 같이 계신 성령님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우리들은 절대로 고아와 같이 버림을 받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

도께서 자신의 자리에서 그리스도의 사역을 대신하실 성령님을 우리에게 보

내신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와 같이 계심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이 우리함께 계신다는 것

을 알게 됨으로 눈에는 아무 증거 안보이고 귀에는 아무소리 안들리며 손에

는 잡히는 것 없어도 두렵지가 않습니다. 세상은 변화에 변화를 가져오고

엄청난 속도로 소용될이 치고 있습니다. 이 불확실한 시대속에 몇분 후에

무엇이 일어날지 알 수 없습니다.

 

사할린에 일어난 천재지변을 보십시요. 밤1시에 사람들이 잠 속에 깊이 빠

진 시간 순식간에 천지가 진동하고 건물이 무너져내려 앉고 땅이 갈라지고

 

 

 

삼천여명의 사람들이 일순간 객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사는 현

실적인 세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사람들은 모두다 불안하고 공포에

떨고 있으며 순간을 예측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불확실한 시대에 살면서도 우리가 마음속에 평안과 확신을 가지고 살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성령께서 우리속에 임재하셨기 때문에 강하고 담대

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육체를 가지고 오셨기 때문에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아 소수의 사람과 같이 계셨지만은 성령은 바람처

럼 우리 속에 들어와 계시고 시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기 때문에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함께 거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2. 성령께서 하시는 일

 

이사여서 11장 2절에 보면 "야웨의 신 곧 지혜와 총명의 신이요 모략과 재

능의 신이요 지식과 야웨를 경외하는 신이 그 위에 강림하시리니"라고 말씀

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성령을 통하지 않고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고 고

백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시며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십

니다. 또한 성령은 지혜의 영이십니다. 지헤는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입니

다.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여러가지 문제에 부딪히고 고통당할 때 성령께서

문제를 해결할 지혜를 주십니다. 성령은 지혜의 영이기 때문에 우리와 같이

계셔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며 성령은 또한 총명의 영이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총명함을 주셔서 모든 것을 깨닫게 해주시는 것입니다.특

별히 하나님을 알게하시며 진리의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마음에 총명을 주

셔서 하나님의 진리뿐만 아니라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총명을 주시

는 것입니다.

 

성령은 또한 모략의 영이십니다. 모략이라는 것은 나쁜 의미로서 모략이

아니라 카울셀링이라는 말인 것입니다. 어떤 일을 당했을 때 이것을 어떻게

이것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하는 것을 조언해 주어 가르치는 것이 카운셀

링입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어떻게 해야될 것인가를 성령은 가르쳐 주십니

다. 범사에 우리가 기도하고 성령의 가르침을 기다리면 성령은 마음속에 깨

닫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성령은 또한 재능의 영이십니다. 재능이라는 것은 능력을 말하는 것이빈

다. 능력은 여러가지로 나타납니다. 기도하는 것과 복음을 증거하는 것, 그

리고 가르치고 구제하는 능력 등으로 나타납니다. 특별히 성령을 통해서 지

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영분별, 그리고 방언과 방언통역,예언,믿음,기도,

병고침의 은사등이 나타납니다.

 

성령은 또한 지식의 영인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오셔서 진리를 가르

칩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심으로 우리가 깨달아서 많은

지식을 얻게되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오시기전에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었다가 부활하시는 의미를 전혀 몰랐습니다. 패배로 알았습니다.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죽음은 하나의 비극이라고 생각합

니다. 그러나 성령이 오셔서 깨닫게 하심은 이것이 일대의 우주적인 구속의

대 역사임을 알게 된것입니다. 성령님께서는 우리에게 새로운 지식을 주신

것입니다. 용서의 의미와 순결하겠다는 지식을 주시며 저가 채찍에 맞음으

로 병이 고쳐졌다는 지식을 주시며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의 복을

받고 저주에서 해방됐다는 지식을 주시며, 사망과 음부에서 해방되어 천국

과 영생을 얻게되었다는 새로운 지식을 주시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말미암

지 않고는 절대로 깨달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성령님께서 오셔서 야웨를 경외하는 일이어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참으로 공경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섬기도록 만들어 주

시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성령은 거룩한 영이십니다. 그러므로 오셔서

 

 

 

우리의 죄 속에서 분리되어서 생각이 거룩하고 말이 거룩하고 행동이 거룩

하게 만드는 역사를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성령은 또한 미래이 영이십니다. 우리가 세상에 사련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질때도 있고 논아에 부딛힐 때도 있고 큰 슬픔에 들때도 상처 될때도

있습니다. 그럴때 성령은 오셔 우리 마음을 붙잡아서 위로해 주심으로 말미

암아 그 큰 충격과 고통과 상처를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성령은 또한 인도하는 영으로서 우리의 삶의 길을 인도하십니다. 목자가

양을 이끌어 주듯이 성령은 우리를 인도하시고 우리 연약함을 도우십니다.

성령은 또한 책망하는 영으로서 우리와 같이 계셔 우리의 잘못된 일을 준

엄하게 꾸짖습니다.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했

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성령이 죄책, 책망을 듣고 우리는 통회하고 자백하

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하나님의 성령은 우리와 같이 계셔서 놀라운 많은 역사를 베푸시

는 것입니다.

 

3. 성령의 교통하심을 배워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13장 13절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

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

령은 인격적인 하나님이십니다. 지식을 가지고 계시고 감정을 가지고 계시

고 의지를 가지고 계십니다. 비록 눈에 보이는 육체를 안 가지고 있지만 성

령은 바람과 같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 인격자이신 것이빈다. 인격자는 인격

자로서 인정하고 환영하고 모셔드리고 의지하고 감사하고 찬양하고 대접해

야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것은 인격적인 모욕을 주는 것입니다. 아무리 부부

간에 사랑하고 백년해로 한다 하더라도 만일 서로가 상대방의 자존심을 짓

밟아 버리고 인격을 무시하는 모독적인 말을 하면 그러한 가정은 깨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인간은 인격을 가진자이기 때문에 인격을 모독하는 말을 하

는 사람을 견디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죽더라도 자존심

이 있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마지막까지 지키려고 몸부림치는

것이 자존심인 것입니다. 인간이 자존심마저 짓밟혀 버리면 인생의 종착역

에 도달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물며 보혜사 성령님은 위대한 하나님이십니

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인격을 가지고 계신 성령님은 무한한 자존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이러므로 성령님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히면 성령님은 손

을 들고 맙니다. 성령님은 떠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을 슬프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성령의 손을 놓지 말아야 합니다. 성령은 이러한 큰 자존심을 가진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와 늘 같이 계시기 때문에 성령과 한모습이 되어야 하

는 것입니다. 교통이라는 헬라어는 코이노니아입니다. 다시말해 코이노니아

라는 말은 교제를 의미합니다. 교제는 어떻게 합니까. 서로 얘기도 하고 다

정하게 악수하며 사랑하는 사람끼리도 포옹하고 상대를 인정하고 환영하고

기뻐합니다. 성령은 우리 눈에 안보이기 때문에 우리가 성령과 친교하기 위

해서는 "성령님을 인정합니다. 환영합니다. 모셔들입니다. 의지합니다. 보

혜사 성령이여 감사합니다. 저를 이끌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고백하며

그분을 높여 들여야 합니다.

 

또한 성령님은 우리와 함께 일하시길 원하십니다. 성령은 추수때의 주인입

니다. 교회의 책임자요 영혼을 구원하기 위한 총사령관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 영혼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사역에 부름받은 청지기들입니다. 청지기인

우리가 주인되시는 보혜사 성령님과 동업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나 성령님의 뜻을 받들어 일을 해야지 하나님의 사업을 내 마음

대로 하겠다고 '내가 오늘은 동쪽 밭으로 가고 다음은 서쪽 밭으로 가리라

'이렇게 생각하고 우리 마음대로 일해서는 안됩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령

께서 다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는 성령이 시키는 일을 해야하는 것

입니다. 우리는 항상 성령님의 음성을 기다리며 종이 주인을 온전히 바라봄

과 같이 우리가 야웨 하나님만 바라보며 성령님의 인도를 구하여야 됩니다.

성령님은 우리와 항상 함께 일하시길 원하십니다.

 

또 그뿐 아니라 성령과의 교통은 성령과 일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항상 성

령과 우리는 하나되어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성령과 분리된 삶을 살아서

는 안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성령을 슬프게 해서는안되는 것입니

다. 성령이 말하는 실망하는 일을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기뻐하

시는 일을 함으로 말미암아 성령님과 항상 일치된 삶을 살 때 우리는 참된

새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또 그뿐 아니라 코이노이아 즉 교통이라는 의미 속에는 "우송한다"는 뜻도

있습니다. 제가 한국에서 해외로 선교 여행을 떠날 때 비행기가 없이는 도

저히 불가능합니다. 비행기라는 교통수단이 있기 때문에 왔다갔다 할 수 있

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를 오고 갈 때 여러 교통수단을 이용해서 오시지

않았습니까.우리는 성령의 교통하심을 통하여 성령과 친교하고 동업하고 하

나를 이루며 그리고 성령님의 음성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

님의 사랑을 우리의 삶 속에 받아서 누릴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성령께서는 예수님을 믿지 않고 불신자들을 감화 감동

시키시고 책망하셔서 회개하게 만들어주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구주로 모

시면 성령께서 속에 들어오셔서 거하시면서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채워

주시고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

제 열매를 맺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성령충만한 세례를 받으

면 성령께서 권세와 능력을 주셔서 우리가 권능과 능력을 가지고 힘있게 그

리스도의 복음을 천하에 전할 수 있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신인격을 가지신 분이시기 때문에 항상 성령님을 인정하고 환영하고 모셔드

리고 의지하고 성령과 동일하게 될때 우리 고아와 같이 살지 않고, 소외 되

지도 아니하며 물땐 동산같이 넘치는 하나님의 영광과 은총 속에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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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보혜사 성령님

자료원 : 조용기목사 여의도순복음교회

발행일 : 95년 06월 11일

 

오늘도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성령께서 우리들에게 넘치는

은혜를 주시고 계십니다. 인간에게 견디기 힘든 것은 고독과 소외 감정입니

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가장 두려워했던 사실도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왜냐

하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공생에 동안 열심으로 주를 따랐습니다.

그러나 3년이 지난후 예수님께서 갑자기 이 세상을 떠나서 하늘 아버지께로

돌아가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에 제자들은 너무나 충격을 받고 아예

망연자실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 예수님은 조금도 동요하지 아니하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요14:16)"내가 떠나가

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요16:7).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다른 보혜사를 보내겠다고 말씀하시는지 그 이유를

전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제자들은 절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슬

픔에 꽉 들어찼습니다. 급기야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고 사흘

만에 다시 부활하셨지만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나타나셨다가 사라지시기 때

문에 제자들은 마음에 안정함을 가질 수가 없었습니다.그래서 제자들은 뿔

뿔이 헤어지기도 하고 또 유대인이나 관원들을 두려워 해서 숨어서 지냈습

니다. 그러던 오순절이 가까운 어느날 제자들은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한

열흘동안 주님께서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하늘에서 강한 바람같은 소리가 나고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각 사람의 머리에 임하였더니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성경이

말하심을 좇아 다른 방언으로 말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임재하심이 그들의 마음을 꽉 잡았습니다.

제자들은 그들 안에 임재하신 성령님을 필연적으로 알게 되자 그들은 불안

과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절망에서 소망으로 슬픔에서 기

쁨으로 죽음에서 삶으로 놀라운 변화의 역사가 그들 속에 가득차게 되었습

니다. 그들은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셨다 부활하신 그 의미

를 깊이 깨달아 알게 되었습니다.

성령을 받기 전에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오시자

마자 성령께서 그들의 눈을 밝히시고 마음의 깨달음을 주시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의미를 깊이 알게 된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은 우리의 저가

악을 대속하기 위함이요, 우리에게 하나님의 음성을 들려주기 위함이요, 성

령을 받아서 세속을 이기고 마귀와 싸워 승리할 수 있음을 가르쳐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또한 우리의 연약함과 질병을 대신 짊어지셨고 모든 저주를 다 대속하시고

아브라함의 축복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한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런 사실

들을 깨닫게 되면 우리에게 기쁨이 넘쳐납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시면 거대한 변화가 다가오게 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 되빈다. 이전 것은

다 지나고 새 것이 된다는 사실을 그들은 마음 속에 깊이 깨닫게 되는 것입

니다.

 

오순절 성령을 받은 제자들은 자신들이 고아와 같이 버림받지 않았다는 것

을 알게되고, 그들과 함께 예수님께서 끊임없이 임재하여 계신다는 것을 깨

달을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이 가져오는 온천하 역사적인 우주

적인 구속의 의미를 깨닫게 되자 그들은 지혜와 총명을 얻어서 담대하게 일

어나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게 된 것입니다.

 

오순절인 그날에 베드로가 일어나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했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성령을 체험한후 이후 일어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주되심을 선포할 때 하

루에 3천명이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고 앉은뱅이를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일으켰으며 장정만 5천명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나게 된 것입니

다.

 

1. 다른 보혜사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다르다"는 의미가 헬라어에는 두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알로스"라는

말이고 또 하나는 "헤피로스"라는 말인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4장에

예수께서 다른 보헤사라고 말한 그 헬라어는 알론 파라크레톤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알로스"라는 말은 전부 똑같은 것이 두개 있는데 그중에

하나가 다른 것을 말할 때 알로스라는 어휘를 씁니다. 그러나 헤피로스라는

말은 전혀 다른 두개가 있을 때 첫째고 그 다음 다른 것을 말할 땐 헤피로

스라는 말을 쓰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다른 보혜사를 보낸다는 의미를 헤피렌 파라클로레톤

이라고 말하지 아니하시고 알론 파라크레톤을 보낸다고 말씀하시므로 내가

첫 보혜사인데 나와 꼭같은 다른 보혜사를 보내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 강림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강림이요 성령임재하심은 예수님

의 임재하심이요 성령의 사역은 바로 예수께서 사역하시는 것입니다. 예수

님이 하나님이시면 성령님도 하나님이시요 예수님이 사랑이시면 성령님도

사랑하시고 예수님이 권능이시면 성령님도 권능이시고 예수님이 구원사역을

하신 것처럼 성령님도 예수님의 이르믓로 구원사역을 하시고 예수님께서 귀

신을 쫓아낸 것처럼 성령님도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시고 예수님

께서 병을 고치신 것처럼 성령님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병을 고치시고 예수

님의 가르치신 것처럼 성령님도 가르치시고 예수님이 일을 한 것처럼 성령

님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일을 하시고 오히려 성령 강림으로 말미암아 예수

님의 행한 일을 제자들이 할 것이요 이보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다고 말씀

하신 것입니다.

 

보혜사라는 말은 파라클라투스라는 말인데 그 의미는 하나님께 보내심을

받아 우리를 돕기 위해서 항상 곁에 계시리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오순

절 다락방에 강림하신 성령님은 2000년의 세월을 지났지만은 조금도 변치

아니하시고 주님께서는 초대교회 주의 백성들과 같이 있으셨던 것처럼 지금

도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영원이라는 것은 무한한 과거와 무한한 미래를

창조적으로 표하는 것이기 때문에 언제나 우리와 같이 계신 성령님을 의미

하는 것이기 때문에 언제나 우리와 같이 계신 성령님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우리들은 절대로 고아와 같이 버림을 받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

도께서 자신의 자리에서 그리스도의 사역을 대신하실 성령님을 우리에게 보

내신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와 같이 계심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이 우리함께 계신다는 것

을 알게 됨으로 눈에는 아무 증거 안보이고 귀에는 아무소리 안들리며 손에

는 잡히는 것 없어도 두렵지가 않습니다. 세상은 변화에 변화를 가져오고

엄청난 속도로 소용될이 치고 있습니다. 이 불확실한 시대속에 몇분 후에

무엇이 일어날지 알 수 없습니다.

 

사할린에 일어난 천재지변을 보십시요. 밤1시에 사람들이 잠 속에 깊이 빠

진 시간 순식간에 천지가 진동하고 건물이 무너져내려 앉고 땅이 갈라지고

삼천여명의 사람들이 일순간 객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사는 현

실적인 세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사람들은 모두다 불안하고 공포에

떨고 있으며 순간을 예측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불확실한 시대에 살면서도 우리가 마음속에 평안과 확신을 가지고 살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성령께서 우리속에 임재하셨기 때문에 강하고 담대

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육체를 가지고 오셨기 때문에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아 소수의 사람과 같이 계셨지만은 성령은 바람처

럼 우리 속에 들어와 계시고 시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기 때문에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함께 거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2. 성령께서 하시는 일

 

이사여서 11장 2절에 보면 "야웨의 신 곧 지혜와 총명의 신이요 모략과 재

능의 신이요 지식과 야웨를 경외하는 신이 그 위에 강림하시리니"라고 말씀

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성령을 통하지 않고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고 고

백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시며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십

니다. 또한 성령은 지혜의 영이십니다. 지헤는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입니

다.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여러가지 문제에 부딪히고 고통당할 때 성령께서

문제를 해결할 지혜를 주십니다. 성령은 지혜의 영이기 때문에 우리와 같이

계셔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며 성령은 또한 총명의 영이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총명함을 주셔서 모든 것을 깨닫게 해주시는 것입니다.특

별히 하나님을 알게하시며 진리의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마음에 총명을 주

셔서 하나님의 진리뿐만 아니라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총명을 주시

는 것입니다.

 

성령은 또한 모략의 영이십니다. 모략이라는 것은 나쁜 의미로서 모략이

아니라 카울셀링이라는 말인 것입니다. 어떤 일을 당했을 때 이것을 어떻게

이것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하는 것을 조언해 주어 가르치는 것이 카운셀

링입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어떻게 해야될 것인가를 성령은 가르쳐 주십니

다. 범사에 우리가 기도하고 성령의 가르침을 기다리면 성령은 마음속에 깨

닫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성령은 또한 재능의 영이십니다. 재능이라는 것은 능력을 말하는 것이빈

다. 능력은 여러가지로 나타납니다. 기도하는 것과 복음을 증거하는 것, 그

리고 가르치고 구제하는 능력 등으로 나타납니다. 특별히 성령을 통해서 지

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영분별, 그리고 방언과 방언통역,예언,믿음,기도,

병고침의 은사등이 나타납니다.

 

성령은 또한 지식의 영인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오셔서 진리를 가르

칩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심으로 우리가 깨달아서 많은

지식을 얻게되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오시기전에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었다가 부활하시는 의미를 전혀 몰랐습니다. 패배로 알았습니다.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죽음은 하나의 비극이라고 생각합

니다. 그러나 성령이 오셔서 깨닫게 하심은 이것이 일대의 우주적인 구속의

대 역사임을 알게 된것입니다. 성령님께서는 우리에게 새로운 지식을 주신

것입니다. 용서의 의미와 순결하겠다는 지식을 주시며 저가 채찍에 맞음으

로 병이 고쳐졌다는 지식을 주시며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의 복을

받고 저주에서 해방됐다는 지식을 주시며, 사망과 음부에서 해방되어 천국

과 영생을 얻게되었다는 새로운 지식을 주시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말미암

지 않고는 절대로 깨달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성령님께서 오셔서 야웨를 경외하는 일이어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참으로 공경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섬기도록 만들어 주

시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성령은 거룩한 영이십니다. 그러므로 오셔서

 

 

 

우리의 죄 속에서 분리되어서 생각이 거룩하고 말이 거룩하고 행동이 거룩

하게 만드는 역사를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성령은 또한 미래이 영이십니다. 우리가 세상에 사련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질때도 있고 논아에 부딛힐 때도 있고 큰 슬픔에 들때도 상처 될때도

있습니다. 그럴때 성령은 오셔 우리 마음을 붙잡아서 위로해 주심으로 말미

암아 그 큰 충격과 고통과 상처를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성령은 또한 인도하는 영으로서 우리의 삶의 길을 인도하십니다. 목자가

양을 이끌어 주듯이 성령은 우리를 인도하시고 우리 연약함을 도우십니다.

성령은 또한 책망하는 영으로서 우리와 같이 계셔 우리의 잘못된 일을 준

엄하게 꾸짖습니다.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했

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성령이 죄책, 책망을 듣고 우리는 통회하고 자백하

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하나님의 성령은 우리와 같이 계셔서 놀라운 많은 역사를 베푸시

는 것입니다.

 

3. 성령의 교통하심을 배워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13장 13절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

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

령은 인격적인 하나님이십니다. 지식을 가지고 계시고 감정을 가지고 계시

고 의지를 가지고 계십니다. 비록 눈에 보이는 육체를 안 가지고 있지만 성

령은 바람과 같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 인격자이신 것이빈다. 인격자는 인격

자로서 인정하고 환영하고 모셔드리고 의지하고 감사하고 찬양하고 대접해

야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것은 인격적인 모욕을 주는 것입니다. 아무리 부부

간에 사랑하고 백년해로 한다 하더라도 만일 서로가 상대방의 자존심을 짓

밟아 버리고 인격을 무시하는 모독적인 말을 하면 그러한 가정은 깨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인간은 인격을 가진자이기 때문에 인격을 모독하는 말을 하

는 사람을 견디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죽더라도 자존심

이 있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마지막까지 지키려고 몸부림치는

것이 자존심인 것입니다. 인간이 자존심마저 짓밟혀 버리면 인생의 종착역

에 도달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물며 보혜사 성령님은 위대한 하나님이십니

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인격을 가지고 계신 성령님은 무한한 자존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이러므로 성령님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히면 성령님은 손

을 들고 맙니다. 성령님은 떠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을 슬프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성령의 손을 놓지 말아야 합니다. 성령은 이러한 큰 자존심을 가진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와 늘 같이 계시기 때문에 성령과 한모습이 되어야 하

는 것입니다. 교통이라는 헬라어는 코이노니아입니다. 다시말해 코이노니아

라는 말은 교제를 의미합니다. 교제는 어떻게 합니까. 서로 얘기도 하고 다

정하게 악수하며 사랑하는 사람끼리도 포옹하고 상대를 인정하고 환영하고

기뻐합니다. 성령은 우리 눈에 안보이기 때문에 우리가 성령과 친교하기 위

해서는 "성령님을 인정합니다. 환영합니다. 모셔들입니다. 의지합니다. 보

혜사 성령이여 감사합니다. 저를 이끌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고백하며

그분을 높여 들여야 합니다.

 

또한 성령님은 우리와 함께 일하시길 원하십니다. 성령은 추수때의 주인입

니다. 교회의 책임자요 영혼을 구원하기 위한 총사령관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 영혼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사역에 부름받은 청지기들입니다. 청지기인

우리가 주인되시는 보혜사 성령님과 동업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나 성령님의 뜻을 받들어 일을 해야지 하나님의 사업을 내 마음

대로 하겠다고 '내가 오늘은 동쪽 밭으로 가고 다음은 서쪽 밭으로 가리라

'이렇게 생각하고 우리 마음대로 일해서는 안됩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령

께서 다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는 성령이 시키는 일을 해야하는 것

입니다. 우리는 항상 성령님의 음성을 기다리며 종이 주인을 온전히 바라봄

과 같이 우리가 야웨 하나님만 바라보며 성령님의 인도를 구하여야 됩니다.

성령님은 우리와 항상 함께 일하시길 원하십니다.

 

또 그뿐 아니라 성령과의 교통은 성령과 일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항상 성

령과 우리는 하나되어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성령과 분리된 삶을 살아서

는 안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성령을 슬프게 해서는안되는 것입니

다. 성령이 말하는 실망하는 일을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기뻐하

시는 일을 함으로 말미암아 성령님과 항상 일치된 삶을 살 때 우리는 참된

새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또 그뿐 아니라 코이노이아 즉 교통이라는 의미 속에는 "우송한다"는 뜻도

있습니다. 제가 한국에서 해외로 선교 여행을 떠날 때 비행기가 없이는 도

저히 불가능합니다. 비행기라는 교통수단이 있기 때문에 왔다갔다 할 수 있

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를 오고 갈 때 여러 교통수단을 이용해서 오시지

않았습니까.우리는 성령의 교통하심을 통하여 성령과 친교하고 동업하고 하

나를 이루며 그리고 성령님의 음성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

님의 사랑을 우리의 삶 속에 받아서 누릴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성령께서는 예수님을 믿지 않고 불신자들을 감화 감동

시키시고 책망하셔서 회개하게 만들어주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구주로 모

시면 성령께서 속에 들어오셔서 거하시면서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채워

주시고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

제 열매를 맺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성령충만한 세례를 받으

면 성령께서 권세와 능력을 주셔서 우리가 권능과 능력을 가지고 힘있게 그

리스도의 복음을 천하에 전할 수 있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신인격을 가지신 분이시기 때문에 항상 성령님을 인정하고 환영하고 모셔드

리고 의지하고 성령과 동일하게 될때 우리 고아와 같이 살지 않고, 소외 되

지도 아니하며 물땐 동산같이 넘치는 하나님의 영광과 은총 속에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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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밤낮 부르짖는 기도

자료원 : 조용기목사 여의도순복음교회

발행일 : 95년 05월 28일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찬양하며 기도드리는 것 외에 하나님께 무엇

을 구할 때는 적극적이고 끈질기게 기도하라고 말씀하고있습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18장에는 우리가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것을 가르치고있습니

다. 그 예로서 어떤 도시에 한 과부가 있었는데 억울한 일을 당히 그 도시

의 재판장에게 가서 나의 얼울한 사정을 해결해 달라고 호소했습니다. 그러

나 그 재판관은 하나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무시하는 사람이었습니

다. 더구나 불쌍한 과부가 오라서 간청하가 것도 돌아보지 않았습니다.그러

나 이 과부가 자주 찾아와 불의한 재판관을 번거롭게 하자 나중에 견딜 수

가 없어서 그가 말했습니다. "이 과부가 나르 띵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

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안으면 늘 와서 나르 띵괴롭게 하리라"(누가복음

18:5).

 

왜 하나님께로 나오는데 하나님이 이 불의한 재판관처럼 보일까요?그것은

진실로 우리 아버지가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가 기도할 때에 선입관을 가지

고 기도하고, 부르짖어도 하나님이 대답치 않는 것 같이 느껴지기 대문입니

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 보좌에 올라가는 공중에 권세잡은 원수 마귀가 이

불의한 재판관처럼 우리의 기도를 막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 기도의

통로를 막고 있는 원수 마귀와 우리가 대결해서 싸우기 위해서는 전투적인

태세를 가지고 나와야 되며 적극적이고 끈질기게 이 과부처럼 기도를 해야

된다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8장 7절은 "하물며 하나님께서 밤낮 부르짖는 그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고 말씀하고

있습니다.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게 기도할 때 마음속에 뜨거운 소원을 가

지고 밤이나 낮이나 계속해서 부르짖으며, 불퇴전의 믿음을 가지고 뒤로 물

러가지 말고 계속 외치라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주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불퇴전의 기도를 할 때 이 마귀의 진

을 무너뜨리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 대한 좋

은 예가 성경에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 7일 동안 여리고

성을 둘러싸고 돔

 

이것은 우리의 기도에 대한 아주 적절한 좋은 예가 되는 것입니다. 여호수

아는 그 백성들과 더불어서 첫째날에 한번 돌고, 둘째날, 셋째,넷째,다섯

째,엿새날 동안 하루에 한바퀴씩 돌고 이레째는 그 성을 일곱 바퀴 돌고 난

다음에 일지히 고함을 칠때 여리고 성이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

루만에 무너뜨리지 않고 왜 칠일동안 여리고성을 돌게 하고 여리고성이 무

너지게 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기 전에 온전

한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는지 안하는지 시험해 보시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1장 3절에는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내는 줄 너

희가 앎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시련은 인내가 살아있는 온전한 믿음

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여리고 성을 돈 장면을 우리는 상상해 볼 수가 있습니다.

아마 첫째날 그들은 여리고성을 돌면서 그 철벽성을 눈으로 보았을 것입니

다. '아! 저런 철벽성이 무너질 수가 있을까?' 그들은 진에 와서 그것을 생

각하고 기도했을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극복하지 못했더라면 이튿날

그들은 그만 낙심하여 돌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진에 돌아와서

눈에 보이는 그 성벽에 대해 기도하고 거기에 대한 불안과 공포를 극복했습

니다.

 

이튿날 또 그들이 성을 돌때 성에 있는 모든 여리고의 군대들과 그 백성들

이 이스라엘 백성들보다 훨씬 더 건강해 보이고 더 무장히 잘돼 있고 더 튼

튼해 보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조롱하는 소리와 천지를 진동하는 고함 소리

를 듣고 난 다음 이스라엘 백성이 진에 돌아와서 과연 저 성이 무너질 것인

가? 저 성을 정복할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을 생각하고 또 기도하고 거기에

대한 염려와 근심을 그들은 극복을 해야 되었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삼일

되는 날은 돌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또 일어나서 삼일째 그 성을 도는데 가만히 보니까 분위기가 절대

로 무너질 것 같지가 않습니다. 사일, 오일, 육일째가 되어도 무너질 아무

런 징조도 보이지 않습니다. '칠일?째 여리고성을 도는데 끝까지 말씀을 믿

어 볼만 한가?' '정말 눈에는 아무 증거 안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안들리

고 손에는 잡히는 것 없는데 말씀만 믿고 돌아도 될 것인가?' 그러한 마음

의 회오리 바람을 그들은 기도와 믿으으로 극복을 해야만 했을것입니다. 그

래서 마지막 칠일날 일곱 바퀴를 돌고 난 다음 그들은 믿음이 완성되었습니

다. 모든 의심과 불안을 극복하고 마음속에 깊은 평안의 지점에서 도달했을

때 그들의 고함소리는 천지를 진동하는 고함소리가 되었고 그 믿음 소리에

하나님께서는 역사하셨습니다.

 

히브리서 10장 38절에 보면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입

니다. 히브리서 11장 1절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완전한 믿음에는

도착할 때까지 하나님은 이레 동안 여리고 성을 돌고 그 모든 시련을 극복

한 후 믿음에 완전히 서서 눈에는 아무 증거 안보이고 귀에는아무 소리 안

들리고 손에는 잡히는 것 없어도 단호히 믿고 나서자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

난 것입니다.

 

때로 우리는 기도 응답에 시일이 지체되는 것은 마귀의 방해가 있기 때문

입니다. 마태복음 18장18절에는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

희가 하늘에서 매면 하늘에서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

서 풀리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응답을 방해하는 마귀의 세력을

묶어 버려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여리고 성을 돌 때 이미 믿음의 밧줄은 여리고 성을 묶고

있었습니다. 두 바퀴 돌 때는 두번 감기고 세 바퀴 돌 때는 세번 감긴 것입

니다. 칠일째 일곱 바퀴 돌 때까지 믿음의 밧줄은 여리고 성을 칭칭 동여

매었습니다. 마지막 고함은 감긴 그 믿음의 밧줄을 잡아 당긴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마귀와의 영적 전쟁입니다. 마귀는 끝까지 결사적으로 저항

합니다. 거기에 대해서 우리는 끝까지 대적해야 합니다. 일곱번 도는 것은

"완전히 대적하라""절대로 물러가지 말아라""끝까지 대적하라"는 의미입니

다.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가 일곱번 기도하는 것은 완전히 하나님께 제물이

되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께서 제사드리는 행위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짐승을 잡아 피를 흘려 제사를 드렸지만 오늘날에는 산 제물로 제사를 드려

야 됩니다. 제물이란 죽어야 되는 것이기 때문에 자기 고집이 죽고 자기 중

심이 죽고 인본주의가 죽고 불순종이 죽고 완전히 하나님, 그 발 앞에 내

자신을 내어 놓고 온전히 순종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께 응답받으려면 이처럼 하나님께 자기를 드려서 완

전히 순종하는 그러한 삶에 들어가야만 되는 것입니다. "살든지 죽든지 흥

하든지 망하든지 성하든지 쇠하든지 주님 뜻대로 하시옵소서. 나는 주의 것

입니다"라고 고백하고 온전한 순종의 삶을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리고를 일곱번 돈다는 것은 완전한 믿음에 도달하고 완전히 하나

님 앞에서 자기를 산제물로 드릴 때까지 하나님께서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이 지나가면 성이 무너집니다. 우리의 문제의 성이 무너지고 고

통의 집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마귀의 진이 휘파되는 것이빈다. 거기에는

반드시 이와 같은 기도의 요건이 성립되어야 되기 때문에 항상 기도하고 낙

심하지 말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한 것입니다.

 

2.엘리야의 갈멜산 일곱번 기도

 

열왕기상 18장에 보면 삼년 육개월 동안 이스라엘이 우상을 섬기므로 하나

님이 진노하사 비를 내리지 않았습니다. 그때 엘리야가 아합 왕에게 도전장

을 던졌스빈다. 바알의 선지자 4백50인, 아세라 선지자 4백인을 갈멜산으로

모아달라고 요청했스빈다. 갈멜산에서 엘리야와 바알 선지자들은 각각 송아

지 한마리를 가져다가 각을 떠서 나무 위에 놓고 불을 놓지 않았습니다. 그

리고느니 엘리야는 야웨의 이름을, 바알 선지자들은 바알의 이름을 불러 불

로 응답하는 신이 하나님이라는 약속을 했습니다. 바울 선지자들이 아침부

터 낮까지 바알의 이름을 불렀으나 응답이 없었습니다. 오전이 지나고 저녁

소재 때가지도 아무 응답이 없었습니다. 그러자 엘리야는 무너진 야웨의 단

을 수척하고 각을 뜬 송아지에 불을 부은 후 "야웨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

게 응답하옵소서"(열왕기상18:37) 라고 간구하자야웨의 불이 내려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까지 말라버렸습니다. 엘리야는 기손

시내에서 바알의 선지자를 모두 잡아 죽여버렸습니다.

 

그리고 난 후 엘리야는 갈멜산에 올라가서 삼년 육개월동안 비가 오지 않

은 땅에 비가 내리도록 기도를 했습니다. 그는 기도를 한 후 사환에게 비

내릴 징조가 있는지 알아보도록 했습니다. 이렇게 일곱번을 반복했습니다.

일곱 번째 이르러서야 바다에 손바닥만한 작은 구름이 일어났습니다. 서경

에 보면 얼마나 그가 간절히 부르짖었던지 이 허리가 굽어져서 머리가 무

릎 사이에 넣어졌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엘리야는 기도하면서도 '가뭄으로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메말라 버렸는데

내가 기도한다고 비가 오겠는가'라고 의구심을 품었을지도 모르빈다. 그러

나 그는 그런 의심들을 끈질기게 기도했스빈다. 그러나 일곱번 기도한 후

징조가 나타났스빈다. 종이 돌아와서 '손바닥만한 구름이 떠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것을 보자 엘리야는 뛸듯이 기뻐했습니다. 조금 후에 구름과

바다가 일어나서 하늘이 깜깜해지며 큰 비가 내렸습니다. 삼년 육개월만에

하늘에서 폭우가 쏟아진 것입니다. 이러므로 엘리야는 온전한 믿음에 도달

할 때까지 마음에 조그마한 의심도 없을 때까지 기도를 계속해서 그 모든

것을 극복했고 마음에 완전한 믿음이 생겨날 때까지 뒤로 물러나지 않습니

다.

 

우리의 기도가 상달되려할 때 원수 마귀의 방해를 받기도 합니다. 다니엘

이 자기 조국을 위해서 기도할 때 응답이 없습니다. 십일을 기도해도 응답

이 없습니다. 같이 기도하던 사람들은 낙심해서 다 뒤로 나가떠러졌스빈다.

다니엘 손자 남았스빈다. 그는 십일일, 십이일... 금식하면서 계속 기도했

습니다.

 

이십 일일째 되자 한 사람이 세마포 옷을 입고 나타나서 "은총을 크게 받

은 사람 다니엘아 내가 네가 이르는 말을 깨닫고 일어서라"(다네일10:11)고

권면했습니다. 그가 이어 "네 하나님 앞에 스스로 겸비케 하기로 결심하던

 

 

 

첫날부터 네 말이 들으신 바되었으므로 내가 네 말로 인하여 왔느니라.그런

데 바사국 군이 이십 일일도안 나를 막았으므로 내가 거기 바사국 왕드로가

함께 머물러 있더니 군장 중 하나 미가엘이 와서 나를 도와주므로 이제 내

가 만일에 네 백성의 당할 일을 내게 깨닫게 하러 왔노라"(다니엘

10:12-14)고 말했습니다. 이처럼 사단은 우리의 기도를 방해하고 하나님의

응답을 올 때까지 끈질기게 기도하고 마귀의 진을 무너뜨려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응답을 받기위해서는 기도드리는 자가 온전한 순종으로 나

가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산 제사를 요구했습니다. 하

나가링께서 백살에 낳으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에 가서 제물로 드리라고 했

스빈다. 그것은 이삭을 제물로 받으시려는 의도가 아니라 자신의 명령에 전

적으로 순종하는지 아브라함을 시험하신 것입니다. 백살에 낳은 아들을 잡

아서 각을 떠서 장작 위에 넣고 불을 붙여서 제물로 드리라고 할 때 아브라

함은 두말하지 않고 순종해 그 아들을 사흘 길을 걸어 모리아 산으로 데려

왔습니다. 그리고는 칼을 들어 아들을 잡으려 하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마음을 감찰하시고 칼을 내리도록 친히 명령하셨습니다. 자기를 온전히 순

종하지 않고는 절대로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바로 그와 같은 순종의제

사를 하나님이 원하는 것입니다. 그 순종의 제사를 드릴 때 하나님은 감동

하십니다.

 

이처럼 우리의 기도는 우리가 완전히 제물이 될 때까지 하나님게서 기다리

는 것입니다. 완전한 믿음,원수 마귀에 대한 완전한 대적, 그리고 완전한

산 제물이 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에 응답해 주시는 것입니다.

 

3.나아만 장군과 문둥병과 요단강에서의 일곱번 목욕

 

칠은 완전 숫자입니다. 완전히 하나님을 믿고 완전히 마귀를 대적하고 완

전히 순종의 제물이 되기를 하나님은 기다리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조건이

구비될 때 하나님의 응답이 우리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아람의 대장군 나아만은 임금을 위해서 여러 전투에서 승리하고 아람은 구

제했으므로 국가적인 영웅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문둥병 환자였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적으로 명예와 지위와 권세가 있었지만 그는 죽어가고 있었습

니다. 이는 마치 현대를 사는 세상 사람들 같습니다. 이십 세기에 사람들은

옛날보다 잘 먹고 잘 입고 잘 살고 과학이 발달되고 영화롭게 산다고 하지

마는 그 속은 영적 문둥병에 걸린 것입니다. 죄악의 문둥병, 하나님을 대적

하는 문둥병이 그들을 갉아 먹어 들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앞에 들어오기 전에는 그 문둥병이 낫지 않습니다. 예수님

만이 우리 죄악을 십자가에 대신 짊어지고 몸찢고피르리띵려 죽으시고 이를

극복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으면 영적인 문둥병인 죄를 다 사해버리고

지옥에 가지 아니하며 구원받은 사람들이 가는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어느날 이스라엘에서 포로로 잡아온 소녀가 집에서 집안 일을 돕고 있는데

그 소녀가 말하기를 "우리 주인이 이스라엘에 가서 선지자 엘리사에게 보이

면 문둥병이 나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듣고 물에 빠진 사람이 지

푸라기라도 집는 심정으로 나아만 장군은 임금에게 얘기해서 이스라엘로 갔

습니다. 나아만 장군이 위세당당하게 장군의 옷을 입고 말들과 병사를 거느

리고 당당하게 엘리사의 집으로 갔습니다. 엘리사의 문 앞에 나아만과 그

병사들이 서 있자 엘리사는 사자를 보내어 "너는 가서 요단강에 몰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여전하여 깨끗하리라"(열왕기하가 5:10)고 전하게 되었

습니다.

 

이 말에 나아만 장군은 노발대발했습니다. 나아만은 "내 생각에는 저가 내

게로 나아와 서서 그 하나님 야웨의 이름을 부르고 당처 위에 손을 흔들어

문둥병을 고칠까 하였도다"(열왕기하 5:1 1)라고 불만을 토했습니다. 그는

"다메섹강 아마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하냐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랴"(열왕기하 5:12)고 언성을 높

이고 몸을 돌이켜 분한 모습으로 떠났스빈다.

 

종들이 나아와서 선지자의 명을 따르도록 간청하자 나아만이 요단강에 일

곱번 몸을 담그자 그 살이 어린아이 살같이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나아만이 완전한 순종을 하는지 시험에 보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모든 군사들이 보는 가운데서 요단강 물에 들어갔습니다. 그가 한번

물에 들어갔다가 나와 보니까 여전히 문둥병이 있었습니다. 그는 마음 속에

'야, 이거 창피당하고 말았다. 우스꽝스럽게 되는 것 아냐'라고 생각했을지

도 모릅니다. 나아만은 두번, 세번... 엘리사의 명대로 일곱번 몸을 씻었습

니다. 창피와 의심을 이기고 일곱번 몸을 물에 씻자 순식간에 그의 몸이 어

린 아이의 몸같이 변하고 문둥병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만 것입니다.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가 일곱번 물에 들어갔다 나온 것은 여간한 믿

음의 시련과 투쟁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완전히 믿었습니다. 그 완

전히 믿음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응답하신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일곱번 들

어갔다 나오매 그는 완전히 마귀와의 싸움에서 이긴 것입니다.

 

병이란 것은 사고로 다친 것이나 장애자가 아닌 이상 많은 퍼센트가 그 배

후에 마귀가 있습니다. 사도행전 10장 38절에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는아력을 기름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

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귀에게 눌려서 걸린 병을 고치신 것입니다.

 

기도는 마귀와의 씨름입니다. 성경은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더우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에베소

서 6:10-12)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는 마귀와의 씨름이며 레슬링입니다. 그 씨름과 레슬

링을 중간에 포기하면 안됩니다. 마귀는 결사적으로 덤벼들지만 우리는 완

전한 대항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원수 마귀에 대해서 완전하게 '나사렛 예

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너희 원수 귀신아, 너는 이미 십자가에서 무장해제되

었다. 물러갈찌어다"라고 외치고 마귀에 대해서 일곱번, 끝까지 마귀가 물

러갈 때까지 저항해야 되는 것이빈다.

 

우리의 기도는 마귀를 괴롭힙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할수록 마귀는 번거로

워지고 괴로워지고 견딜 수가 없어 고함을 치고 한 길로 왔다가 일곱 길로

도망을 치고 마는 것입니다.

 

나아만은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했습니다. 아람의 장권이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흙탕물에 들어가서 일곱번 목욕한 것은 하나님 앞에 온전히 순종의 제

물이 된 행위입니다. 하나님은 이 제물을 기쁘게 받아주신 것입니다. 그래

서 그 문둥병을 고쳐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여러 사건을 통해서 보게 될 때 여호수아 앞의 여리고 성이나,

삼년 가뭄에 처한 엘리야나 그 당시에 결코 치료 불가능한 문둥병에 걸린

나아만 장군이나 모두 인간적으로 볼 때는 결코 건널 수 없는 강에 맞섰습

니다. 불가능과 절망만이 눈에 보일 뿐이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하

나님의 약속을 믿고 모든 의심을 정복하고 마귀와의 대결에서 이기고 자신

들을 온전히 순종의 제물로 바칠 때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게 된 것입니

 

 

 

다.

 

오늘날에도 인간의 불가능은 하나님의 가능입니다. 인간의 절만은 하나님

의 소망입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

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내게 보여주리라"(예레미야33:3)고 말씀하신 것입니

다. 사람이 알 수 없는 크고 비밀한 일을 하나님은 갖고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나가야 됩니다. 그 기도는 우리가 마치 여호수

아처럼, 엘리야처럼 그리고 나아만처럼 일곱번 기도하는 것, 완전한 믿음의

시험을 통과해야 하고 마귀에게 대적하는 기도입니다.

 

그리고 완전한 제물이 되어서 주님 중심으로 순종하고 일어날 때 마귀의

진은 훼파되고 하늘의 보좌는 움직이고 하나님의 권능이 나타나고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우리의 기도가 응답되는 것입니다.따라서 우리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는 하나님의 은총이 다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27

제목 : 행복한 가정 만들기

자료원 : 조용기목사 여의도순복음교회

발행일 : 95년 05월 14일

 

가정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인간 사회의 가장 기초 단위입니다. 그 때문에

사회의 뿌리가 가정이며, 가정이 무너지면 사회가 혼란해지고 무너져 버리

고 마는 것입니다. 마귀는 인간 사회를 자기의 손아귀에 넣기 위하여 인류

역사를 통하여 가정을 파괴하는 일에 전력을 기울였습니다. 마귀는 항상 부

부간에 불화와 갈등을 가져오고 부모 자식간에 분리를 획칙해 왔으며 어떻

게 보면 이와같은 마귀의 공격은 오늘날 전 세계에 걸쳐 더 흉악해 지고 거

세어 지고 있습니다. 우리날만 하더라도 매년 7만쌍이 이혼을 하고 있습니

다. 그리고 40만명의 어린이들이 결손 가정의 희생물들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가정의 다르 5월을 맞이하여 다시 한번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행복

한 가정 만들기에 전력을 기울여야 되겠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처음 이적

을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행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 주님께서 가정에 대해

서 깊은 관심을 가지고 부족함이 없이 해옥한 삶을 갖기를 간절히 바라고

계신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면 우리 가정이 이루어지는 요소에 관해 하나님

말씀을 통해서 알아보고자 합니다.

 

1. 부부가 연합해서 가정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성경이 가르쳐 주는 가정과 인간 기원은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지

와 만물을 지으시고 사람이 살 수 있는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에덴 낙원을

만드신 후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좇아 아담을 지으셨습니다. 그리고 이

아담을 위해 공중에 새와 물고기와 각종 짐승들을 다 지어 놓았지만 이것들

이 아담의 배필이 되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담의 독처를

기뻐하지 않으시고 그 옆구리 뼈를 취하여서 하와를 만드시고 아담에게 데

리고 왔습니다. 하와를 본 아담은 반겨 말하기를 "이는 내 뼈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창2:23)고 고백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인류 최초의 가정이 탄

생된 것입니다.

 

그러나 마귀는 결사적으로 아담과 하와가 서로 화목하게 가정을 이루어서

자녀를 생산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가정을 통해 하늘 나라가 이 땅에 임하

는 것을 막으려고 아담과 하와를 유혹했습니다.

 

동산에 있는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를 하나님께서 먹지 마랄고 말했

는데 뱀은 하와를 꾀어서 그 실과를 먹도록 해서 타락하게 만들었습니다.

 

뱀 때문에 우리 조상 아담과 하와는 꾀임을 받아 하나님을 반역하고 이후

로 죄악이 가정에 들어온 것입니다. 그래서남편과 아내 간에 끊임없는 미움

과 갈등이 있고 부모와 자식 간에 분리가 있고 형제 간에 암투와 투쟁이 있

고 파괴에 파괴가 연속되어 왔습니다. 가정의 파괴가 결국 사회와 국가와

민족 대민족, 나라와 나라의 파괴로 연속되어 전쟁과 전쟁이 끊이지 않는

피흘리는 세계를 만들어 버리고만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행복한 가정을 만든다는 것을 행복한 사회,국가,세계를

만드는 가장 기초적인 것입니다. 그러면, 행복한 가정은 행복한 부부관계가

비로소 그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아내의 남편에 대한 의무와 남편의 아내

에 대한 의무가 착실히 실천될때 가장은 행복해 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남편과 아내는 하나님 말씀을 좇아서 이 마귀의 괴계를 물리치고 어찌하든

지 그리스도 안에서 행복한 가정을 만들기 위해 노력을 하고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2. 아내의 남편에 대한 의무

성경 에베소서 5장 22절로 24절에는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

를 주께 하듯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모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그러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

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찌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내의 남편에 대한 의무는 세월이 흘러가고 아무리 남녀의 교육 수준이

향상되고 남녀의 권리가 동등하다고 할지라도 가정에서만은 하나님이 만드

신 질서를 분명히 지켜야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내에게 먼저 행복한 가정 만들기를 위한 교훈을 하고 계시

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아내는 남편을 귀하게 생각하고 존경해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든지 어떠한 환경이든지 남편을 존귀하게

여기고 귀하게 대접을 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계십니다. 우리는 물건이 귀한

것이면 혹시 상처가 날까 그렇지 않으면 깨어질까 아주 귀하게 잘 간수하고

천한 것은 아무데나 던져 버리지 않습니까.

 

그리고 아내는 또한 남편에게 복종할 의무가 있습니다. 베드전서 3장1절로

6절은 "아내된 자들아, 이와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하라. 이는 혹 도를 순

종치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니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렬한 행위를 봄이라. 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외몰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랑을 온유하고 안정하고 심령에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

님 앞에서 값진 것이니라. 전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떤 거룩한 부녀들도

이와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함으로 자기를 단장하였나니 사라가 아브라함

을 주라 칭하여 복종한 것 같이 너희가 선을 행하고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

라지 아니하므로 그의 딸이 되었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남편과 아내의 관게는 아내는 남편을 존경하고 그리고 가정 생활에서 남편

을 머리를 삼고 리더로 삼고 복종하는 그런 위치에 놓여있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아내는 돕는 배필의 의무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돕는다는

것은 참으로 힘이 드는 것입니다. 도움을 받는 자 보다도 돕는 자가 실력이

있고 능력이 있어야 됩니다.

 

또한 아내는 영적으로 돕는 배필이고 정신적으로 남편을 위로하고 격려하

고용기를 주고 힘을 줍니다. 남편들은 낙심을 잘합니다. 그래서 부인들이

돕는 배필로서 끊임없이 용기를 주고 희망을 주고 힘을 주고 격려를 주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 가장 무서운 송사가 베겟머리 송사라고 합니다. 부인이 집에 들

어가서 베갯머리에서 남편에게 속삭 속삭해 놓으면 대부분 그 뜻이 현실에

그대로 나타납니다. 이러므로 무슨 부탁을 할때 그 집에 가서 사모님에게

부탁을 해야 통과가 되지 다른 사람에게 부탁해봤자 소용이 없습니다. 이러

므로 돕는 배필의 직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그 다음 생활면에서도 아내들은 끊임없이 남편의 부족한 점을 격려해주고

온전한 남편, 아버지, 사회인이 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언제나

이 세상의 훌륭한 남편 뒤에는 훌륭한 부인의 도움이 있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부인은 따뜻한 가정의 분위기를 만들 책임이 있습니다. 남편

이 이 세상의 생존경쟁에 지치고 피곤해서 집에 올 때 가정의 따뜻하고 아

늑한 분위기로 품어주고 모든 스트레스를 해소해 주어야 하는 것이빈다. 그

리고 활짝 웃는 웃음, 따뜻한 말, 그리고 맛있는 보글보글 끓는 된장찌게,

구미에 맞는 김치, 그리고 별미, 이러한 것으로 준비해서 밥상을 만들어 놓

고 가정의 분위기가 정말 따뜻하게, 언제나 집으로 빨리 돌아오고 싶은 그

러한 분위기를 만들 의무와 책임이 아내에게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행복한 가정 만들기에는 남편보다도 아내의 책임이 훨씬 큽니다.

 

3. 남편의 아내에 대한 의무

 

에베소서 5장 25절29절은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릿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

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

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같이 할찌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

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누구든지 언제든지 제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보양함같이 하나니"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아내를 귀히 여기라는 명령입니다. 아내를 이용의 도구로만 생

각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아내는 이 세상에 살면서 자녀나 낳아주고

집안 청소와 남편 뒷바지나 해주는 이용하는 도구다'라고 생각하면 절대로

안된다는 것입니다. 아내를 하나님이 주신 귀한 보화로 여기고 귀하게 대접

하고 귀하게 보호하라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아내를 사랑하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남편을 사

랑하란 말은 없지만 아내를 사랑하라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사랑은

내가 받는것이 아니라 사랑은 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편은 아내와

결혼해서 살면 아내에게 관심을 기울여 주고 시간을 주고 물질을 주고 그리

고 사랑을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내의 주위에 사랑이라는 하나의 울타리

를 쳐줌으로 말미암아 안심하고 편안하게 살 수도 있도록 해주어야 하는 것

입니다.

 

성경은 또한 아내를 "제 몸같이 사랑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사람들마

다 제 몸을 보호하고 편안하게 하고 돌보고 필요한 것을 채워주지 않습니

까. 그처럼 아내에게 언제나 보호하고 편안하게 하고 돌보아 주고 필요한

것을 채워주어야 합니다.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사

랑해야 합니다. 교회가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하고 버림을 받을 때, 그리

스도께서 교회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걸머지고 피를 흘려서 영혼을 구원해

준 것처럼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남편이 걸머지고 아내를 편안하게 만들어

주고 은총을 받도록 그렇게 만들어 주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4. 부모의 자녀 양육지침

 

자녀는 개인의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기업입니다. 우리 세상에서

조그마한 구멍가게를 해도 그것이 기업이라고 큰 회사를 경영해도 그것이

기업입니다. 우리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은 자식을 기업으로 주셨습니다. 자

녀 양육은 하나님이 주신 사업이기 때문에,나중에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 열

매를 요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르므로 자식 기르는 것을 그냥 자연적으

로 된다고 생각하지 말고 가정의 큰 사업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이러므로 부모가 자식을 키우되 자기의 욕심을 성취하기 위해서 도구로 삼

아선 안됩니다. 자기가 변호사, 판사 못되고 장관이 못되었으니 대신에 자

식보고 "너느 변화사되라. 판사되라. 사업가 되라"고 억압을 해서 정신적인

스트레스에 견디지 못하게 하는 그러한 부모가 되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부모들은 자녀를 욕심의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오늘날 자녀들은 고독합니다.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사회일에 바쁘기 때문에 아침이 일찍 나가고 저녁에

늦게 돌아오기 때문에 자녀들과 대화의 시간이 없습니다. 공휴일이면 친구

들하고 낚시가고 등산 가버리고 자기 시간을 즐기기 때문에 자녀드른 소외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아버지대신 가정의 무서운 존재가 됩니다. 계속해서 '공

부하라'고 윽바지르기 때문에 자녀들은 어머니만 보면 몸서리를 칩니다. 학

교갔다 오면 곧장 "피아노 교습실로 가거라, 피아노 교습실에 갔다오면 그

림 그리는데 가거라. 그림 그리는데 갔다 오면 웅변하는데 가거라. 웅변갔

다오면 태권도 도장갔다 오너라"라고 가정 밖으로 아이들을 내몹니다. 그래

서 자녀들은 정신적으로 고독해서 반발합니다. 미국이나 구라파는 그렇지

않습니다. 중학교, 고등학교 때애들은 별로 공부하지 않고 많이 놉니다. 그

러나 대학에 들어가서는 열심히 공부합니다. 실력을 갖추지 않으면 상급학

교 진학도 어렵고 졸업도 하지 못합니다. 우리 한국은 거꾸로 되어 있습니

다. 이것은 너무나 어릴 때 가정에서 스트레스를 받았기 때문에 그 고독을

풀기 위해서 대학 들어가면 공부를 하지 않고 노는데 정신을 파는 그러한

악순환이 이루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자녀 교육은 부모가 거울입니다. 자녀들은 부모를 보고 배웁니다. 아버지

어머니가 화목하면 화목해야겠다.싸우면 우리도 싸워야 겠다.아버지 어머니

가 거센 말을 쓰면 우리도 거센 말을 써야겠다. 어머니가 자녀의 거울인 것

입니다. 그렇기 때무에 아들 장가 보낼려고 하거들랑 그 집에가서 어머니를

보면됩니다. 며느리 구할때 어머니를 보면 그 딸이 어떠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위를 들일때 그 사위의 아버지를 보면 그 사위가 어떠한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녀들은 부모를 모델로 해서 자기의 모든

언어 심사 행동을 성장시키기 때문입니다. 이러므로 자녀들은 부모의 삶을

그 모델로 삼기 때문에 부모가 처음부터 주님을 경배하고 가정 예배와 성경

공부에 열심하고, 교회 자녀들을 데리고 나가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주 안에

서 화목하게 살면 이것이 자녀들에게 깊이 깊이 뿌리 내립니다.

 

그뿐아니라 자녀를 교육시킬 때에 부모들은 자녀가 잘했을 때는 칭찬하고

상을 주고 그리고 잘못했을 때는 따끔하게 꾸짖고 채찍을 드는 것을 잊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잘해도 내버려 두고 잘못해도 오냐 오냐 내버려 두

면 완전히 아이들이 자라면서 행동 규범을 잃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

므로 선한 것을 행했을 때는 칭찬하고 상급을 주고 악을 행했을 때는 준엄

하게 꾸짖고 악에 대해서 따끔하게 벌을 주어서 그래서 선악의 분별을 분명

하게 하도록 자녀들을 가르쳐야 되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부모들은 자녀들과 함께 살때에 친구가 되어주고 좋은 추억을

만이 만들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얼마 있지 아니하면 자녀들은 부모를

떠납니다. 그러나 부모와 같이 있을 때의 좋은 추억들이 그들 마음 속에 있

으면 부모를 떠난 후에도 그 추억이 기초가 되어서 늘 부모를 즐겁게 생각

하는 것입니다.

 

자녀는 자기가 부모하고 같이 있을 때 가지고 있던 아름다운 추억을 통해

서 부모를 생각하고 그 추억이 기초가 되어서 부모와의 영속적인 교통이 이

루어지는 것입니다. 좋은 추억을 만들어 주지 못한 부모는 자식을 길러놓고

내어 주고 그 자식을 잃어버리고 만다는 것을 알고 자녀가 어릴 때 좋은 추

억을 만들어 주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자녀들을 그들의 개성과 취미를 따라 탤런트를 개발해 주어야

되는 것입니다. 자녀의 개성을 따라 탤런트를 개발해주고 그것을 통해 하나

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도록 가르치는 것이 가장 큰 행복이빈다. 돈이 행복

 

 

 

의 기초가 아닙니다. 물질만능주의로 자녀를 키워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5. 자녀의 부모에 대한 순종

 

하나님은 자녀들에게 부모를 공경하고 주안에서 순종하라고 가르치고 계십

니다. 그리고 부모를 속상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자녀는 비뚤어진 길로 가

지 말고 생활의 책임과 본분을 다하고 착한 심정으로 부모를 도우며 살아야

됩니다. 그러나 자녀들은 결혼후 아내와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성경은 "남

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찌로다"(창2:24)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결혼을 한 후에는 정신적으로 환경적으로나 부모를

떠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부모는 자식이 결혼 후에는 자녈르 자기 소유로 생각하지 말고 지배하거나

간섭하지 말아야 됩니다. 성경이 그렇게 말했습니다. 성경에는 자식들에게

부모를 떠나라 명하셨습니다. 결혼하면 부모를 떠나고 정신적으로도 육체적

으로 새로운 가정을 이루어가야 됩니다. 그러나 경제적, 환경적 어려운 현

실 때문에 같이 살더라도 부모는 자녀들을 지배하거나 간섭하지 말아야되가

것입니다. 이제는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떠난 상태이기 때문에 자녀의

공경만 받고 그대로 살아야 평안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녀들은 결혼 후 정신적으로나 환경적으로 부모를 떠난다고 할지

라도 부모의 은헤를 갚는 생활을 늘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부모의 은혜를

생각하고 그 은혜에 보답하는 마음을 가져야하고 부모에게 걱정을 끼치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가장 큰 효도란 부모에게 걱정을 안끼치는 것이

가장 큰 효도인 것입니다.

 

그리고 부모를 존경하고 사랑함으로 말미암아 언제나 사랑한다는 표시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물질적으로 부족함이 없이 봉양을 하는 것이 바로 자

녀들의 책임과 의무인 것입니다. 가정의 불행은 남편탓이고, 아내 탓이며

자식탓으로 놓고 내탓이 아니라고 하는 이기주의적인 생각을 버려야되는 것

이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보아 자기 자신이 어떠한 것을 고쳐

야할 것을 생각하고 돌이켜 남편도 회개하고 아내도 회개하고 부모도 회개

하고 자식도 회개하고 하나님 말씀에 비추어서 더 행복한 가정 만들기를 위

해서 자기의 의무와 책임을 다하겠다는 새로운 각오와 결심을 하는 여러분

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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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

자료원 : 조용기목사 여의도순복음교회

발행일 : 95년 05월 07일

 

하나님께서 함께 하는 사람은 도대체 어떠한 사람이며 그들의 삶 속에 어

떠한 일들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성경 여호수아 1장5절로 6절에

하나님이 함께하는 사람에 관해서 이와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너의 평

생에 너를 능히 당할 자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던 것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마음을 강하

게 하라 담대히 하라 너는 이 백성으로 내가 그 조상에게 맹세하여 주리라

한 땅을 얻게 하리라"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같이 하심으로 결코 정복되거나 패

배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그 삶 속에 얻게 됨으로

말미암아 그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가 형통하고 강건하며 생명을 얻되 넘치

게 얻는 하나님의 축복이 같이 할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

떠한 사람에게 하나님 함께 하실까요? 성경에는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에

대한 조건을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꿈이 있는 사람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위대한 꿈을 주셨습니다. 만일 여호수아가 이

꿈을 거부하였다면 버림당한 생애를 살아 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수아

는 하나님이 주시는 꿈을 마음속에 받아들였습니다.성경 여호수아1장1절로

4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하나님과 동행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주시는 꿈을 받아들이도록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야웨의 종 모세가죽은

후에 야웨께서 모세의 시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일러 가라사대 내 종

모세가 죽었으니 이제 너는 이 모든 백성으로 더불어 죽었으니 이제 너는

이 모든 백성으로 더불어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 내가 그들 곧 이스라엘 자

손에게 주는 땅으로 가라. 내가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이 무릇 너희 발바닥

으로 밟는 곳을 내가 다 너희에게 주었노니 곧 광야와 레바논에서부터 큰

하수 유브라데에 이르는 헷 족속의 온 땅과 또 해지는 편 대해까지 너희 지

경이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나아갈 꿈을 분명하게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꿈은 받아들이고 살때 하나님이 이 꿈을 이루기 위해서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꿈이 없는 백성은 망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열왕기하 4장 1

절 7절에 보면 엘리사의 선지자 학교의 생도가 죽고 그 부인이 채주에게 몹

시 고통을 당했습니다. 채주는 와서 그 빚대신에 자녀들을 종으로 잡아다가

팔아야겠다고 엄포를 놓았습니다. 이러한 어려움을 당한 선지자의 생도 부

인이 엘리사에게 말했습니다. "내가 너를 위하여 어떻게 하랴 네 집에 무엇

이 있는지 내게 고하라"(왕하4:2) 그 부인은 "계집종의 집에 한 병 기름 외

에는 아무것도 없나이다"(왕하 4:2)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엘리사는 "너는 밖에 나가서 모든 이웃에게 그릇을 빌라 빈 그릇을

빌되 조금 빌지 말고 너는 네 두 아들과 함께 들어가서 문을 닫고 그 모든

그릇에 기름을 부어서 차는대로 옮겨 놓으라 여인이 물러가서 그 두아들과

함께 문을 닫은 후에 저희는 그릇을 그에게로 가져오고 그는 부었더니 그릇

에 다 찬지라 여인이 아들에게이르되 또 그릇을 내게로 가져오라 아드링 가

로되 다른 그릇이 없나이다 하니 기름이 그쳤더라 그 여인이 하나님의 사람

에게 나아가서 고한대 저가 가로되 너는 가서 기름을 팔아 빚을 갚고 남은

것으로 너와 내 두 아들이 생활하라 하였더라"(왕하4:3-7).

 

 

 

 

이것은 우리에게 영적인 의미를 보여주는 것이며 이 기름은 성령의 역사를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는 그릇이 있어야 계

속해서 나타나신다는 것입니다. 이 그릇은 바로 우리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꿈과 환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입술로 "나는 꿈이 없습니다. 나는

바람부는대로 물결치는대로 살 따름입니다.' 이처럼 부정적으로 시인하면

하나님은 그 사람에게 더이상 역사하실 수 없다는 사실을 하나님은 분명히

가르치고 있습니다.

 

최근 우리나라에 여러가지 참사가 일어나고 있는 것은 우리 민족이 꿈과

환상을 상실해 있기 때문입니다. 우연을 바라고 바람부는대로 물결치는대로

적당주의를 살아왔기 때문에 오는 이런 참사의 결과를 가져온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주시는 분명한 꿈을 가지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 정직,

성실, 근면,충성을 가지고 일한다면 하나님이 어찌 우리에게 이와같은 참사

를 당하게 하시겠습니까?

 

우리는 이 세상을 살면서 반드시 꿈을 갖고 나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와 더불어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여러분의 삶 속에 작은 삶이나 큰 삶이나 하나님께로 받은 꿈을

가지고 가슴에 품고 뛰어 갈때 하나님의 성령께서 함께 역사하셔서 끊임없

이 능력과 권세를 나타내 주시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 13절에 보면 "너

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 마음속에 꿈을

가지고 뜨거운 소원을 가질 때 우리 속에서 하나님이 함께 행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에베소서 3장 20절은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꿈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나

아가면 하나님께서 그 크신 능력으로 역사하여 주셔서 우리의 생각하는 것

이나 꿈꾸는 것 이상으로 큰 역사를 베풀어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2. 강하고 담대한 믿음의 사람

 

강하고 담대한 믿음이 없고 마음속에 늘 불안과 공포를 가지고 뒤로 물러

서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지 않습니다."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히10:38)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대다수 믿는 사람들은 감각적인 지식을 가지고 주위 환경에 일어나는

일들을 보고 두려워해서 하나님 말씀을 저버릴 때 가 많습니다. 눈에 보이

는 것, 귀에 들리는 것, 냄새 맡고 맛보고 손으로 만지는 것들에 의해서 불

안과 공포에 휩싸이면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베드로가 칠흙같이 어두운 밤에 풍랑이는 바다 위에서 예수님께서 물 위로

걸어 오라고 말씀하셨을 때 예수님만을 바라보고 걸어나갈 때 베드로는 물

위로 걸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위환경인 바람과 파도를 보고 그만

마음속에 두려움을 가지고 머뭇거리자 그는 물속에 빠져버리고 말았습니다.

성경은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에수께

서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시며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

하였느냐 하사기 "(마14:29-31)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 마음속에 불안과 공포를 가지고 살아가면 우리는 환경과 운명

의 노예가 되고 세속의 물에 빠져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하

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수1:9)고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다윗을 그처럼 사랑했습니까? 다윗이 윤리와 도덕적으로 정

말 의롭고 거룩해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는 윤리나 도덕적으로는 하나님

앞에서 여러번 실패를 경험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서 다윗을 사랑하신 것은 다윗은 하나님을 빌고 강하게 담대하게 인생을 도

전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소년 다윗은 양무리를 칠 때 곰이나 사자 가 공격을 할 때도 피하지 아니

하고담대히 대적했습니다. 다윗이 강하고 담대한 믿음을 의지하여 나가자

하나님의 천사가 함께하여 주어서 사자와 곰같은 맹수들을 무찌를 수가 있

었습니다.

 

또한 다윗이 블레셋 군대의 장수 골리앗을 죽인 것은 너무나 유명한 사건

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전쟁에 경험이 많고 훈련된 장수가 많았으나 블레

셋 장수골리앗의 기세에 눌려서 그와 대결해서 싸울 수가 없었습니다. 성경

은 "그가 서서 이스라엘 군대를 향하여 외쳐 가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

서 항오를 벌엿느냐 나는 블레셋 사람이 아니면 너희는 사울의 신복이 아니

냐 너희는 한 사람을 택하여 내게로 내려 보내라 그가 능히 싸워서 나를 죽

이면 우리가 너희의 종이 되겠고 만일 내가 이기어 그를 죽이면 너희가 우

리의 종이 되어 우리를 섬길 것이니라 그 블레셋 사람이 또 가로되 내가

오늘날 이스라엘의 군대를 모욕하였으니 사람을 보내어 나로 더불어 싸우게

하라 한지라 사울과 온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의 이 말을 듣고 놀라 크게

두려워하니라"(삼상17:8-11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소년 목동 다윗은 인간의 힘으론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으나 야웨를 의지

하고 강하고 극히 담대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백성을 모욕하고 이방인

군대를 향해 나아가 싸우겠다는 믿음으로 담대히 앞장서게 되었습니다. 다

윗은 제구에 물맷돌 다섯 개 넣고 물매에 돌을 넣어 골리앗을 향해서 나갔

습니다. 골리앗은 자기 신의 이름을 부르고 다윗을 저주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굴하지 않고 말했습니다.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야웨의 이름 곧 네

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오늘 야웨께서

너를 네 손에 분이시리라 내가 너를 쳐서 네 머리를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

체로 오늘날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

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삼상17:45-46) 다윗은 골리앗을 향해 물맷돌을

흔들어서 돌을 날려보내니 돌이 골리앗의 이마 정통을 때리자 골리앗이 돌

에 맞아 거꾸러지자 다윗은 골리앗의 칼을 뽑아 그 목을 베고 피가 흐르는

높이 들자 이스라엘의 군사들이 그때야 용기와 힘을 얻고 일제히 일어나서

블레셋을 공격해 블레셋은 완전히 전멸을 당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전쟁을 통해서 강하고 담대한 자에게 하나님

께서 함께 하시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마음에 두려움과 불안을 가지고

있는 자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습니다.

 

성경 모라서 8장 31절에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

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 편에 서서 강하고 담대하게 나가면 하

나님이 여러분과 함께 하셔서 사자도 곰도 거꾸러지고 골리앗도 꺼꾸러집니

다.

 

그러므로 우리는강하고 담대하을 가지고 우리의 운명과 환경에 도전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나타나십니다. 여호수아 1장 7절로 9절에 보면 "오직 너는 마음

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여 나의 종 모세가 내게 명한 율법을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이 율법 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맑;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

데 기록한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 내가 네게 명한 것이 아니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야웨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읽고 그 말씀

을 또 깊이 묵상을 해서 내 것으로 만들고 그 말씀을 좇아서 생각하고 말하

고 행동하며 하나님이 같이 하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해야 되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

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과 가까와질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

사이도 대화를 많이 해야 친밀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33장 11절로 보면 사람이 그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야웨께서는

모세와 대면하는 친구와 대화하는 거소가 같았다고 말한 것입니다.그러므로

여러분, 하나님과 대면하여 이야기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오늘날 우

리 모두 다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우리에게 주

어졌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말씀을 읽고 묵상할 때 그때가 하나님

과 대면해서 이야기하는 시간인 것입니다.

 

또한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영적으로 자라는 것입니다. 육신이 양식을 먹

음으로 말미암아 자라고 힘을 얻는 것처럼 우리 영혼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

해서 성숙해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영의 양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듣지 않고 말씀을 읽지 않는 사람은 신앙이 형식적이며 의

식적이 되므로 생명이 없는 신앙이 됩니다. 오직 말쓰을 통해서만이 성숙한

신앙 속에 들어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먹으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셔서 우리의 삶이 복되

고 우리의 삶도 장구하게 장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시편 23편 3절에도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라

고 말씀했는데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받아들이면 우리 영혼이 살아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통해 힘을 얻어 우리는 의롭게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

다.

 

또한 우리는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생각과 지혜를 얻을 수 있는 것입니

다. 하나님께서는 지혜와 지식을 우리에게 주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

리가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을 받으면 얼마나 총명해 지겠습니까 타산지석이

라는 말이 있습니다. '다른 산에 있는 돌을 가지고 우리 산에 가다 놓으면

우리 산의 돌이 된다'는 말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말씀을 내

가 받아들여서 내가 그것을 소유하면 바로 그것이 내것이 됩니다. 시편 19

편 7절로 11절에 "야웨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 야웨의 증거

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며 야웨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

쁘게 하고 야웨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

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우리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늘 말씀을 접하

는 것은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과 총명을 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

님의 지혜와 지식과 총명과 접하게 되면 하나님의 지혜있고 지식있고 총명

하게 되므로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어리석은 일을 하지 않고 우둔한 일을

하지 않고 지혜롭게 성공적인 인생을 살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여

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 우리가 어느곳에 있던지 범사에 형통

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개인이나 나라는 강성해지고 정복당

하거나 패배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함께 하

시는 이스라엘의 역대 임금이나 역대 왕조는 언제나 강성하고 부귀영화가

충만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떠날 때는 쇠퇴해지고 파멸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 개인이나 우리나라가 강성해져 잘 살수 있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꿈을 가지고, 담대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 말슴을 사랑하고

말씀과 늘 교제하면서 살아나갈 때, 하나님의 같이 늘 교제하면서 살아나갈

때, 하나님이 같이 계시고 우리는 성공저이고 승리로운 인생을 살아갈 수가

있게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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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내 원대로 마옵시고

자료원 : 조용기목사 여의도순복음교회

발행일 : 95년 04월 23일

 

우리가 자랄 때는 아버지는 가정에서 절대적인 존재였습니다. 아버지가 한

마디 하면 이의를 제기할 수 없고 따라서 우리는 가정에서 아버지 뜻대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우리의 가정 형편은 옛날에 비해 크게 달라졌

습니다. 서구의 교육제도가 도입되면서 개인의 자유와 평등이 보장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부모가 자식들 뜻을 살피느라 전전긍긍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자랄

때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일입니다. 나도 아들 셋을 키우는데 아이들

눈치를 살피느라 신경을 곤두세어고 있는 실정입니다. 혹시 잘못 되어 가지

는 않나,야단을 맞고 크게 낙심하지는 않나,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나에 대

해 우리 부부는 늘 살피고 있습니다. 아버지 명령이면 죽는 시늉까지 해야

했던 과거에 비해 정말 엄청난 변화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신앙인을 옛날 아버지를 섬기는 태도 이상으로 하나님을 섬겨

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절대 주권적인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절대 순복해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세상 눈치를 더살피는 어리석은

신앙인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

이어든 이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니아다"(눅22:42)라고 하셨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얼마나 힘쓰고 애써 기도를 하셨던지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같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에 절대 순종을 함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가치있고 보람있는 삶을 살 수 없으며

영생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사람은 파멸의 씨앗을 생애

속에 심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이러므로 나는 성도가 하나님

의 뜻대로 하느냐에 관해 여러분에게 말씀해 드림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

자 합니다.

 

1. 하나님의 뜻을 거역한 아담과 그 후손들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오 만물을 지으시고 동방에 에덴을 창설하신 다음

그곳에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는 이 동산을 상함도 없고 해함도 없는 낙원으로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당

신의 형상과 모양대로 인간을 만드신 후 인간으로 하여금 그 동산을 돌보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첫사람 아담과 하와에게 당신의 뜻을 분

명히 보여 주셨습니다. 그것은 당신의 절대주권을 상징하는 선악을 알게 하

는 나무의 실과는 결코 먹지 말라고 지시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지시와 더불어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2:17)고 하셨습니다.

 

이러므로 인간은 결코 변경할 수 없는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러나 아

담과 하와는 마귀의 꾐에 빠져 이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말았습니다. 마

귀가 하와에게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창 3:1)고 했을 때 하와는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

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

라 하셨느니라"(창3:3)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마귀는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서 선악을 알줄을 하나님이 같이 되어 선

악을 알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 3:4-5)고 말하며 하와를 충동질했습

니다. 그 말을 듣고 하와가 그 나무를 보니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그 실과를 따먹고 남편에게도

주어 먹게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한 그들은 하나님께 저주를 받고 에덴에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영적으로 하나님과 분리되어 죽고 말았으며

육체적으로는 병들고 부패해서 흙으로 돌아가야 했고 환경적으로는 저주의

가시와 엉겅퀴로 인해 이마에 땀을 흘려야 식물을 먹을 수 있게 되었습니

다. 그뿐만 아니라 하와는 잉태와 해산의 고통을 형벌로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인류의 후손인 "에덴의 교훈"을 잊어 버리고 계속 하나님의 뜻을

어기며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 죄악은 노아시대에 이르러 극에 달했습니다.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한탄하시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물로 심판하셨습니다. 당시 그때의 죄악이 얼마

나 심했던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셨음을 한탄하셨습니다.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 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

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

라"(창 6:7).

 

그러나 그후 인간은 또 하나님은 뜻을 거역하는 삶을 살고 말았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들이 아브라함 시대의 소돔과 고모라인들이었습니다. 하나님

께서는 이들 역시 무섭게 심판하셨습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하기로

정하여 재가 되게 하사 후세에 경건치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으셨으며 무

법한 자의 음란한 행실을 인하여 고통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이 의인

이 저희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

령을 상하니라"(벧후2:6-8).

 

소돔과 고모라는 음란의 성이었습니다. 그 성안에는 동성애가 성행했습니

다. 이는 하나님 질서에 대한 인간의 도전이었습니다. 오늘날도 동성연애자

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후천성면역결핍증"입

니다. 이 병은 특별한 약도 없습니다. 이 병에 걸린 사람은 병에 대한 면역

성을 상실해 무섭게 고통을 당하다가 죽습니다. 지금 이 병은 미국과 유럽

일대에서 인간을 파괴하고 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은 이와같은 행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짓밟음으로 명망을 자초했습니다. "야웨께서 하늘 곧 야웨에게로서 유황과

불을 비같이 소돔과 고모라에 내리사 그 성들과 온 성들과 성에 거하는 모

든 백성과 땅에 난 것을 다 엎어 멸하셨더라"(창 19:24,25).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죄를 짓는사람은 반드시 심판을 받습니다. 성경은

"범죄하는 그 영혼이 죽으리라"(겔18:4)."죄의 삯은 사망이요"(롬6:2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은 무엇으로 심든지 그 열매를 거둡니다. 자기의 육체

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둡니다.

 

죄에 대하여 하나님의 심판은, 천천히 돌지만 빠뜨리지 않고 곡물을 부수

는 맷돌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역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떻게 되었

습니까? 그들은 430년동안 애굽에서 종살이 하다 해방을 얻었으나 가나안에

들어가기까지 끊임없이 하나님을 거역했으며 가나안에 들어가서도 우상을

섬기는 등 계속 하나님을 거역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광야에 뼈를 묻고

말았고, 가나안에 들어갔던 여호수아와 갈렙과 그 후손들도 끝내 이방의 포

로로 끌려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역한 사람들은 그 누구를 불문하고 하나님의 축복의 세계

에서 쫓겨나고 맙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이땅에서나 내세에 복된 삶

을 살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2. 예수님의 순종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님의 전 생애는 오직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는 생애였

습니다. '겟세마네에서의 기도'가 이를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여기에서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눅

22:42)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역 처음부터 하나님의 뜻에 따른 삶을 사셨습니다. 예수님

께서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시고 광야로 가셔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실

때 오직 하나님의 뜻을 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40주 40야를 금식하시고

난 다음 주리셨을 때 마귀가 예수님께 말하기를 "네개 만일 하나님의 아들

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고 했습니다.

 

이는 육신의 정욕을 시험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일도 좋지만 먼저 구복부터

채우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시험에 바져 하나님의 일보다도 자신의 구복

보다 채우려는 신앙인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단호하게 이를

물리치셨습니다. 예수님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마4:4).

 

그러자 이번에는 마귀가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하였되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시리

니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

라"고 했습니다.

 

이는 안목의 정욕을 시험하는 것으로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으라는 것입니

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마

4:7)고 말씀하심으로 마귀를 물리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사역초기부터 하나님의 뜻에 다른 삶을 사셨습니다.

이후부터 예수님께서는 유대 땅 전역을 다니시면서 죄인의 죄를 용서하시고

병자의 병을 고치시고 귀신들린 자를 고쳐 주시고 죽을 자를 살리시고 절망

에 처한 자에게 소망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해주십니다.

한 가정에 있어서도 그렇지 않습니까? 자녀가 선한 목적을 가진 부모의 뜻

에 따라 살때 부모는 최선을 다해 도와주려고 합니다.

 

하나님 뜻대로 주신 예수님께서는 최후로 십자가를 지시게 되었습니다. 예

수님께서는 죄가 하나도 없으신 분이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

서는 인류의 죄악을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속죄물이 되신 것입니다. 죄 없으

신 분이 인류의 모든 죄를 다 지셨으니 그 고통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무엇

보다 예수님께서 인류의 죄를 지심으로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다는 이 고통

은 말할 수 없이 컸습니다. 죄를 지은 사람은 하나님앞에서 쫓겨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양손과 양발에 대못이 박히는 육체적 고통을

당하셔야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

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

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눅22;42)라고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좇아 세상 죄를 다 지고 십자가에 올라가셨습

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 버림을 당하신 채 하늘과 땅 사이에서 처절한

고통을 당하셨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인류 대신에 십자가의 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전폭적인 순종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순종으로 한없는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시고 가장 영화로운 보좌 우편에 앉히셨

습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순종이 있었기에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는 죄

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못났음에도 불구하고 버림을 받아야 마땅함에도 불

구하고 예수님의 공로로 구원을 받고 영생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이 세상에

는 많은 종교도 있고 철학도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죄를 대속해 주고 구

원해 주고 영원한 소망을 주는 것은 기독교 신앙뿐입니다. 이러므로 기독교

는 이러므로 기독교는 종교 이상이요,철학 이상입니다.

 

성경은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

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없음이니라"(행4:12)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때문에 전 인류에게 주어진 가장 복된 소식은 나사렛 예수께서 인류의

구주가 되셨다는 소식입니다. 이 소식을 듣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사람

은 이 세상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행운아입니다. 인간이 이처럼 영광스러운

존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사신 예수님의 순종이 있

었기 때문입니다.

 

3. 그리스도인들의 생활

 

그러면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얻은 우리들은 어떤 생활태도를 취해야 할까

요? 우리는 오직 내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대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첫번째로 하나님의 뜻과 육신의 정욕을 선별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여

러분, 여러분은 혹시 하나님의 뜻을 짓밟고 육신의 정욕을 따라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만일 여러분이 의롭지 않은 물질을 취하면서 교회에서만 주

여, 주여 한다면 이는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음란하고 방탕하고 마약중독이 되어 하나님의 성전인 몬을

더럽히면서도 교회에서 거룩한 체 하고 있지나 않습니까? 만일 그렇다면 회

개를 하고 이런 생활을 청산해야 합니다.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의롭

고 거룩하게 되는데 있습니다. 우리가 의롭고 거룩한 삶을 끊임없이 추구할

때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고 강건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는 두번째로 하나님의 뜻과 안목의 정욕을 잘 선별해야 합니다. 오늘

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인기를 위해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일을

자행하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소외당하지 않기 위해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사람, 하나님의 뜻임을 알고도 세상 사람을 두려워하여 세상과 타

협하는 사람은 모두 안목의 정욕에 빠진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이런 삶을

배제해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버림을 받더라도 하나님의 뜻에 따르겠

다는 결의를 갖고 실행해야 합니다.

 

세번째로, 하나님의 뜻과 권력과의 타협을 잘 선별해야 합니다. 오늘날 권

력을 얻기 위해 양심을 짓밟는 성도, 권력의 신 앞에 절하고 정의를 버리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권력 앞에서 하나님의 정의를 굽히지 않았던 저

일재하의 믿음의 선배들을 본받아야 합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주야로 기도해야 할 것은 "하나님이시여 내 뜻대로 마옵

시고 주의 뜻대로 살게 하여 주옵소서"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으며 성령님의 인도하심이 있습니다. 말씀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보

여줍니다. 그런가면 성령님께서는 우리를 감동화하시고 은총의 길로 인도하

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말씀을 듣고 배우고 읽고 묵상하여야 하며

성령님을 인정하고 환영하고 모셔들이고 의지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함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드려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

게서 우리를 높여주실 것입니다. 성겨은 "그를 높이라 그리하면 그가 너를

높이 들리라"(잠4:8)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드리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응

답해 주십니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기도응답을 받지 못하고 나약한 신앙

인, 형식적인 신앙인으로 전락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므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드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면서 무

조건 기도를 응답해 달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신앙입니다. 우리는 생활 속

에 하나님의 뜻을 실천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처럼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할때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더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생활 속에 실천하지도 않고 세속적인 생활만 하다가 갑자기

어려운 일을 만나면 "주여!"하고 나오는 사람은 유아기적 신앙을 가진 사람

입니다. 우리는 성숙한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이 악한 세대에 주의

뜻이 무엇인가 분별하고 그 뜻을 생활속에 실천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

님께서 우리를 붙들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전면적으로 거역한 이 세상은 바야흐로 인류종말을 향해 치

닫고 있습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심판의 징조는 처처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세상에서 의미없는 죽을허망한 존재가 아닙

니다. 우리의 육신의 장막집이 무너질 때 우리는 영원한 천국으로 갈 영광

스러운 존재입니다. 이 때문에 우리는 이말세지말에 더 하나님의 뜻대로 살

려고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 이땅에

서의 내세에서 복된 삶을 살아가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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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예수님 부활,너무나 기쁜 소식

자료원 : 조용기목사 여의도순복음교회

발행일 : 95년 04월 16일

 

온대지방에서는 봄은자연의 부활을 가져오는 계절입니다.겨우내 꽁꽁 얼어

붙은 대지에 앙상하고 새노랗게 말라버린 나뭇가지나 풀이 봄의 따스한 햇

갈이 비취면 파아란 싹을 내어밀고 순식간에 천지가 푸른생명, 아름다운 꽃

으로 가득하게 됩니다. 충만한 부활의 잔면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는 사상은 인간의 생각 속에는 원래

부터 없었습니다. 어느 종교에서도 인간의 사호 영혼불멸은 믿었지만 죽은

자가 다시 부활한다는 것은 믿지 않았습니다.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난다는

사상은 인간의 마음속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히브

리 민족을 통해서 계시하신 사상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 선생은 고린도교회에 편지할 때 예수님의 부활은 본 5백 여형제

들이 바울 생존 당시 태반이나 아직살아 있었고 바울 선생 자신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고전 15:3-8).

 

그러면 우리 주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의 삶에 어떠한 의미를 가져오는 것일

까요?

 

1. 절망에서 소망을 부활시킨 예수님

 

아담과 하와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생존은 완전히 절망에 빠져버렸

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거역하고 선악과를 따 먹은 아담과 하와와

그 자손들의 영혼이 즉시 죽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영혼

이 죽어서 하나님과 교통이 끊어졌으니 절망에 처하게 되고 만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육체가 병들고 노쇠돼서 죽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고 하셨으니 인간의 생명은 한정되어 살다가 병들

고 노쇠해서 흙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는 죽음의 절망에 떨어지고 만 것입

니다.

 

그리고 인간은 환경적인 절망에 부딪쳤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이 땅을 저주했습니다. 그래서 이 땅은 가시와 엉겅퀴가 나고 너

희는 이마에 따을 흘려야 먹고 살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저

주의 절망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실존주의 철할자들도 인간의 상황을 절망으로 평가했습니다. 그들은 말하

기를, 인간은 죄책과 정죄의 절망에 놓여 있는데 그것을 결코 인간은 이겨

낼 수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인간은 허무와 무의미한 절망에 빠져 있어 이

세상에서 아무리 영화롭더라도 그 삶의 의미와 가치는 알 수가 없다고 합니

다. 그들은 또 이렇듯 '인간은 허무와 무의미의 절망에 빠졌으며 또 죽어서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니 죽음과 무의 절망에 빠진 존재'라고 말했습니다.

 

이러므로 인간은 정서적으로나 철학적으로 보아서도 절망적인 존재인 것입

니다. 이러한 인간적인 절망을 어떠한 삶도, 어떠한 문명도, 과학도, 어떠

한 사회개혁도 건져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우리의 모든 절망을 당신의 몸에 짊어지고 십자

가에 못박혀 몸찢고 피흘려 죽으셨다가 사흘만에 모든 사망과 절망의 세력

을 다 정복, 부활하심으로 소망의 부활을 이루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것은 죄악을 청산하고 부활하신 것으로

우리의 영혼을 용서로써 살려주시고 하나님과 교통하게 하셨으니 영혼 부활

의 소망을 채워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육체로 부활하심으로 인간 부활의 소

망을 주셨습니다. 또한 저주를 청산하고 부활하심으로 축복의 소망을 우리

에게 주셨으며 용서의 의, 삶의 목적과 의미를 부활시켜 주셨으며 영생의

부활을 가져다 주신 것입니다.

 

인간은 원래 절망적인 존재였으나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내일은 오늘보

다 다음달은 금번달보다 명년은 금년보다 영원한 미래는 현재보다 더 나아

진다는 소망을 가지고 살 수 있는 존재로 예수님은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부활을 통하여 인간의 가슴 속에 영원히 소망을 부활

시키셨습니다.

 

2. 예수님은 미움에서 사랑을 부활시키셨습니다.

 

마귀는 아담을 꾀어 타락시킴으로 하나님과 인간이 원수가 되게 하였습니

다. 그 결과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쫓겨나고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되었

습니다.

 

그리고 마귀는 인간과 인간 사이에 미움을 심어 주었습니다. 아담은 하나

님 앞에서 하와를 원망했습니다. '당신이 내게 죄를 짓게 했고' 하와는 또

뱀을 원망했습니다. 여기서부터 부부의 갈등이 생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때부터 오늘날까지 어느 가정이나 부부의 갈등이 없는 가정이 없습니다. 아

담과 하와가 타락함으로 마귀가 심어 놓은 갈등인 것입니다.

 

그리고 아담과 하와의 가정에는 비극이 다가왔습니다. 첫 아들 가인이 둘

째 아들 아벨을 시기하고 질투해서 밭에서 돌로 쳐죽인 것입니다. 친족살상

의 비극의 시작입니다.형이 아우를 죽인 비극이 일어난 이후로 인류 속에는

마음이 꽉 들어차게 되었습니다.

 

이래서 오늘날까지 인간의 역사는 오로지 전쟁의 역사입니다. 민족과 민족

간,부족과 부족간의 전쟁으로 이어진 것이 인간의 역사인 것입니다. 인간은

전쟁을 하기 위해서 평화했고 또 평화할 동안에는 전쟁준비를 하고, 그후에

는 또 전쟁을 했습니다. 이 전쟁의 원인은 미움입니다.

 

이와같은 미움이 온 세상에 가득했는데 이 미움을 청산할 함이 인류에게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미움을 예수님이 오셔서 짊어지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로

마인 유대 종교지도자들, 일반 군중들의 미움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심지어

는 하나님께로부터도 미움을 받고 버림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여, 하나님

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것은 온 인류의 미움을 대신 짊어지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수님께

서는 십자가에 못박혀 이 미움을 멸하시고 위대한 사랑의 화신으로 부활하

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는 사람을 보고 "주여 저들을

용서하옵소서 저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아무와도 대결하지 않고 크신 사랑으로 이 모든 것을 감수하고 극복하여 사

랑으로 부활하신 위대한 사랑의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이러므로 예수님은 바로 사랑의 원천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예수 그리

스도를 구주로 모셔들일 때 하나님과 인간은 사랑으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람사이에 원수된 담은 허물어지고 미움은 사라지고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햇빛과 같이 비취지게 되는 것

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성령으로 우리 마음속에 부은 바 됨으로 우리의 영혼 속

이 사랑 가운데서 기쁨으로 뛰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사랑을 연결하는 가교가 된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믿고 나오는 사람을 지극한 사랑으로 사랑해 주시고 넘치는 은

헤를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인간과 인간 사이를 사랑으로 연결시킵니다. 예수 그리스

도께서 우리 속에 들어와서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 주시면 받은 그 사랑으로

말미암아 이웃을 사랑하게 됩니다. 남편을, 아내를 사랑하고 부모와 자식을

사랑하게 됩니다. 친구를 사랑하게 됩니다.

 

성경에는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했는데 인간으

로 행하기에는 도저히 불가능한 명령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으로는

할 수 없지만 모든 미움을 극복하신 예수님께서 우리 속에 들어와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주심으로 원수조차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의지해서 우리의 삶속에 사랑의 운동

을 전개해야 하는 것이빈다. 사랑 이외에는 우리의 운명을 변화시킬 것은

없습니다. 율법과 칼로서는 사람을 변확시키지 못합니다. 구약 4천년 동안

하나님께서 준엄한 율법의 심판을 행했찌만 결국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친히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사

랑은 수천만 수억의 의인들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만

이 우리를 변화시키고 새사람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사랑은 인간과 자연을 사랑으로 연결시킵니다. 오늘날

우리는 대지와 환경의 오염을 통해 스스로의 생명을 자멸로 이끌고 있어 마

음이 아픕니다. 저는 미국이나 구라파에 갈때마다 부러운 것이 있습니다.

도시가 완전히 푸른 동산입니다. 도시에 나무가 많고 공원이 많아 도시인지

산인지 모르는 그런 도시계획인 것입니다. 나무 한 그루를 살리기 위해서

그 주위의 도시계획을 바꿔서 집을 짓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도시계획을 세우면 수십년 수백 년된 나무도 파헤치고

그곳을 벽돌의 숲으로 만듭니다. 이러고도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겠

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에덴을 벽돌동산으로 만든 것이 아닙니다 수플이 우

거지고 나무가 울창한 곳에 아담의 거처를 만드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을 믿는 나라들은 에덴동산의 개념을 살려서 건축을 하여 자연환경이 좋은

도시를 만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모셨으니 자연과 화해하고 자연을 사랑해

야 하는 것입니다.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새 한마리도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연을 죽이면 우리도 죽습니다. 공장을 많이 세워 돈을 많이 번

다고 한들 그 폐수로 인해 물을 마실 수 없게 되고, 마신 사람이 중금속에

중독되어 병이 들어 생명이 단축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들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함께 자연에 대한 사랑이 충만해져야 하며 그

리스도의 부활은 바로 이것을 이루어주시는 것입니다.

 

3. 예수님은 참된 믿음을 부활시키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이후 인간 구원에 대한 믿음이 다 사라졌습니다. 예

수님의 제자들조차 불신앙의 포로가 되어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제자가 고백한 것을 우리는 알 수가 있습니다. 그들은 말하기를 "하

나님께 인정받고 기사와 이적을 행하던 나사렛 예수가 우리를 구원할 줄 알

았는데 빌라도에게 심판받고 십자가에서 못박혀 죽었으니 우리의 구원의 소

망은 사라졌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죽음은 모든 인간의 마음속에 구원의 소망을 다 빼앗아

버리고 믿음을 파괴해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은 인간 구원에

대한 궁극적인 믿음을 다시 부활시킨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았으

면 그리스도의 모든 가르침은 십자가에서 종말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죽은 지 사흘만에 부활하심으로 십자가는 재해석되었습

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실패도, 패배도, 절망도 아니요, 우리를 구원하는

위대한 대속의 근원이 되었다는 것으로 재해석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희생을 통해서 죄사함의 믿음의 부활했습니다. 성령 충

만의 믿음이 부활했습니다. 치료의 믿음이 부활했습니다.아브라함의 축복의

믿음이 부활했습니다. 그리고 영생 천국의 믿음이 부활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심으로 십자가 고난을 통해 대속하신 은혜의 보증이

되셔서 모든 믿는자의 가금 속에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부활시키신 것입니

다. 주께서 부활하사 당신의 십자가에 몸찢고 피흘려 값주고 사신 은혜가

반드시 집행되도록 지금 보장하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성령이 그것을

보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우리는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가지고 십자가의 오중복음과 삼중

축복을 믿고 나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부활이야말로

우리의 깨어진 믿음을 다시 부활시켜 주시고 우리의 마음속에 흔들리던 믿

음을 다시 확고하게 하신 것입니다.

 

4. 예수님의 부활은 천국의 부활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셔서'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고 가르

치셨습닐.

 

그리스도는 가는 곳마다 죄를 용서받고 하시고,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영

의 세계를 깨닫게 하심으로 이것이 바로 천국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가

는 곳마다 병든자를 고치시고 귀신을 내쫓으시고 배고픈 자를 먹이심으로

천국의 역사와 속성을 가르치셨습니다. 천국에는 가난이나 저주가 있을 수

없고 배고픔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주님께서 보여주셨습니다.

 

주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면서 죽음은 오직 이 세상의 산물이며 천국에는

죽음이 없다는 것을 확증하셨습니다. 또 예수님의 풍랑을 잠잠케 하심으로

천국에는 마음의 풍랑,가정의 풍랑 등 풍랑은 있을수가 없고 오직 주님의

의와 평강과 희락만이 꽉 들어차 있다는 것을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백성들에게 천국의 속성을 보여주심으로 그

리스도가 가는 곳마다 사람들은 인산인해로 그를 따랐습니다. 세상에서 구

난당한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들어가는 천국의 영광을 바라보고 맛보

고 체험하고 새 삶을 얻었기 때문에 너무나 기뻐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천국의 나타남도 사라져버

리고 만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고 장사된 후 40일동안에 한 사

람의 죄인도 용서받지 못했습니다. 한 사람의 병자도 낫지 않았고 귀신도

쫓아나지 않았습니다. 죽은 자가 산 적도 없습니다. 바로 모든 것은 어둡고

깜깜하고 절망이었습니다. 완전한 어두움과 절망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순절날에 이르러 다락방에 성령이 강림하시자 부활하신 예수 그

리스도의 믿음이 모든사람 마음속에 확실히,천국의 역사가 또다시 나타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은 천국의 나타남의 부활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로부터 천국복음이 만국에 전파되었으며 천국의 역사로 부활한 것입니

다.

 

오늘날 천국은 이제 죽은 천국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부활하심으로 천국의

역사를 우리 가운데 가지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의 역사는 우리

가운데 계속 나타나고 있는것입니다. 죄사함의 역사, 회개를 통한 구원의

역사, 성령 충만의 역사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영혼육간

의 치료의 역사, 축복의 역사도 일어납니다.

 

우리가 성수주일하고 십일조로 주님을 공경할 때 아브라함에게 내린 축복

의 역사가 오늘 나타남으로 저주의 세상 일을 멸하고 천국의 축복의 역사를

우리 가운데 나타내 보이는 것입니다.

 

영생 천국 소망의 역사도 일어납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우리가 죽어도 살

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 영생 소망의 역사가 우리 마음속

에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또 예수를 믿음으로 의의 역사가 일어나서 의로운

천국역사가 우리 가운데 가득하며 평강과 희락의 마음속에 넘쳐나서 말씀을

듣고 기도할 때 말할 수 없는 기쁨이 충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으셨다가 부활하셨다는 것은 한 역사적 객관적 사실입니

다. 혹자는 예수님의 부활사건을 '조작이다. 십자가에서 기절한 것을 무덤

에 두었다가 살아난 것을 부활했다고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사실 예수님이 살아나지 못했는데 너무나 사모하던 제자들

이 모두 다 히스테리에 걸려 환상을 보았다고도 합니다. 여러분,12명의 제

자와 5백여명의 사람이 동시에 히스테리에 걸려서 환상을 본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거짓말로 사단은 오늘날도 예수님의 부활을 부정하려고 하지만

그것이 불가능한 것은 부활 후 세운 교회 가운데에 부활의 성령이 와 계셔

서 그리스도의 부활의 역사로 천국이 우리 가운데 이루우지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지금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고 성령받고 방언하고 성령의 은사

가 나타나고 지금 병이 낫고 귀신이 쫓겨나기도 지금 저주가 물러나고 하나

님의 축복이 아브라함의 축복으로 임하고 마음에 죄 대신 의,불안 대신 평

안,슬픔 대신 기쁨을 부어주는 천국 체험이 우리 가운데 능력있게 나타나고

있으므로 사단의 모든 말은 거짓으로 드러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의 부활 사실을 믿고 바아들이는 자에게는 엄청난

삶의 내용의 변화와 소망과 사랑과 믿음과 천국의 나타남의 부활을 체험하

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과거의 역사적인 사건이나 성경 속의 이야기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의 사건은 현실적인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부활이요 생

명으로 우리 가운데 계시는 것입니다. 이 그리스도를 모셔들일 때 그 부활

의 역동적인 역사가 여러분의 생활 속에 나타납니다. 여러분의 생애 속에

모든 사망의 세력은 철폐되고 하나님의 영광의 천국 역사가 시작되는 것입

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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