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조용기 목사 설교 31편~40편

by 【고동엽】 2023. 1. 22.
목록가기
첫 목록가기
 

31

제목 : 너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보라

자료원 : 조다윗 목사 여의도순복음교회 기하성

발행일 : 94년 01월 02일

 

창공을 나는 비행기와 대양을 항해하는 배는 출발하기 전 반드시 정

비를 합니다. 만일 이 때 정비가 불량하면 인명과 재산의 엄청난 피해

를 초래합니다. 우리의 인생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가 한해를 출발하

면서 인생을 정비하지 않으면 불행한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입니다.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은 만유의 주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가 복된 삶을 살려면 하나님 앞에서 인생을 정비하고 그 뜻대로 살아

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 연초에 어떤 삶의 자세를 취해야 할까

요? 우리가 정비해야 할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1. 우리는 마음이 생각을 정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생각을 통해서 역사하십니다. 이 때문에 아무리

부요한 환경을 확보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마음이 생각이 부실한 사

람은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시기

를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

서 남이니라"(잠 4:23) 고 하셨으며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

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

실 이에게"(에베소서 3:20)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생각을 가져야 할까요? 우리는 먼저 긍정적인 생

각을 가져야 합니다. 아담과 하와의 후손인 인간은 그 생각이 부패해

있습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빛에 대한 생각보다는 어둠에 대한 생

각을, 질서에 대한 생각보다는 무질서에 대한 생각을, 아름다움에 대

한 생각보다는 추함에 대한 생각을, 부요에 대한 생각보다는 가난에

대한 생각을, 사랑에 대한 생각보다는 미움에 대한 생각을 더 하고 그

생각을 마음의 바탕으로 살고 있습니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는 부정적인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

둠에서 빛을, 혼돈과 무질서에서 질서를, 추함에서 아름다운 자연을,

빈곤에서 부요를, 미움과 원망에서 사랑을 창조하시고 사람들에게 베

푸셨습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올 한해 하나님과 동행하기 위해서는 어둠 대신에

아름다움을, 저주 대신에 부요를, 미움 대신에 사랑을 생각없이 하나

님과 동행하고 하나님이 축복을 받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나아가서 우리는 적극적인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나

는 안된다.나는 못한다. 나는 능력이 없다. 나는 망한다'라고 생각하

고 있습니다. 그러나 서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성경은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마가복음 9:23) 고 말씀하고 있으며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

가 모든 것을 할 수 잇느니라" (빌립보서 4:13)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지시대로 열 두 정탐군을 가나안에 보냈을 때 정탐

을 마친 그들의 보고가 두 갈래로 갈라졌습니다. 먼저 여호수아와 갈

렙을 제외한 열명의 정탐군은 '우리가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

은 그 거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

들이며 거기서 또 네피림 후손 아낙 자손 대장부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고 소극적인 보고를 했습니다.

 

그러나 이 보고에 백성들이 울면서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망하게 하려 하는고'라고 하면서 '우리가 한 장관을 세

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했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우리가 두로 다니며 탐비한 땅은 심히 아

름다운 땅이라'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

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고 보

고했습니다. 이야말로 얼마나 적극적인 생각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소극적인 보고를 한 열정탐군을 죽이시고,그들의 보고

를 듣고 원망, 불평했던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로 회진시켜 방황하다가

거기에서 죽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적극적인 보고를 한 여호수

아와 갈렙,그 후손들만 택하시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

가게 하셨습니다.

 

오늘날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 적극적인 생각을 갖는

성도를 택해 주시고 축복의 땅으로 인도하여 주십니다.

 

따라서 이 새해 벽두 우리는 주안에서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생각을

가지고 출발해야 할 것입니다.

 

2.우리는 꿈을 정비해야 합니다.

 

꿈은 우리를 축복의 세계로 이끕니다. 사람들은 흔히 생각하기를 자

신이 꿈을 가지면 그 꿈을 자신이 이끌고 가는 줄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꿈을 이끄는 것이 아니라,꿈이 인간을 이끄는 것입니

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역사하실 때 꿈을 통해 역사하십니다. 성령

님께서는 바로 여러분과 나에게 꿈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 후에 내

가 내신을 만민에게 부어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

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요엘 2:28).

 

이러므로 하나님 안에서 꿈을 갖지 못한 사람은 버림을 받고 맙니다.

따라서 우리는 언제나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꿈을 가져야 합니다.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 확실하고도 구체적인 꿈을 갖지 않고

그저 막연한 요행을 바라고 있습니다. 이는 어리석은 일입니다. 주 안

에서 확실하고도 구체적인 꿈을 잉태하는 성도가 그 열매를 얻을 수

있습니다.

 

성경은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는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롬 4:17)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없는 것

을 어떻게 있는 것 같이 부를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오직 꿈을 통해

서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는 꿈이 아니면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말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마

가복음 11:24)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구한 것을 어떻게 받은 불로

 

 

 

믿겠습니까? 우리가 구하는 그 대상을 찬란하게 꿈꾸지 않고 믿을 수

없습니다. 바로 꿨은 믿음이 어머니입니다. 성경은 말씀하시기를 "믿

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히브리서

11:1)라고 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올 한 해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한 삶을

살기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주 안에서 그것을 찬란하게 꿈꾸십시오.

여러분이 꾼 꿈은 여러분을 그길로 인도해 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축복하실 때도 막연하게 축복하시지 않았습니

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자손에게 주리니 영원

히 이르리라"(창 13:14,15)고 말씀하심으로 찬란한 꿈을 주셨습니다.

이러므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 굳건한 믿음을 가질 수 있

었고 그것을 성취했습니다.

 

꿈을 갖지 않고 막연하게 한 해를 살겠다고 하는 사람은 불행을 자초

하는 사람입니다. 성도 여러분, 주 안에서 건전하고 광대한 꿈을 안고

한해를 출발하십시오. 그 꿈이 여러분에게 기적을 체험케 할 것입니

다.

 

3.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사는 자세를 정비해야 합

니다.

 

성경은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로마서 10:17)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보는 말씀

은 과거에 하나님께서 선지자들과 제사장들과 왕들과 사도들을 통해

완성하신 책입니다. 우리는 이 성경을 통해 과거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어떻게 역사하셨나를 소상하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현

재 살아서 역사하십니다. 그래서 성경은 생명의 책이요, 영원불멸의

책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 어느 한 말씀이 우리 온 영혼에 회오리

처럼, 걷잡을 수 없이 충격을 주는 때가 있습니다. 이것은 과거 기록

된 말씀이 현재 '내게 주시는' 특별한 말씀입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들으면 인간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굳건한 믿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

다.

 

또한 여러분은 주의 종을 통해 말씀을 들을 때 어느 한 말씀이 불길

처럼 혹은 비수처럼 혹은 아늑한 봄 기운처럼 심령에 다가오는 것을

체험할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이것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특

별한 말씀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기도 중에 혹은 찬송중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깊은 기도중에, 찬송중에서 하나

님의 음성을 듣고 있습니다. 이것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특별한 말씀입니다.

 

그런가하면 장로님이라 권사님이나 집사님이나 성도를 통해 하나님께

서 말씀해 주실 때도 있습니다. 이것은 평범한 대화중에서도, 진지한

대화중에서도 '강력한 메시지' 로 받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받은 말씀은 우리의 믿음과 지혜와 지식과 판단력과 아

이디어가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지금도 성경을 통해, 설교를 통해,

기도와 찬송을 통해, 그리스도인들에게 들려지고 있습니다. 이러므로

 

 

 

우리는 이 연초에 세속적인 옷을 벗어버리고 거룩함의 옷을 입어 하나

님의 말씀을 경청하는 자세를 갖추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

하는데 훈련이 된 사람은 인생을 성공적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이 험한 시대에 힘이 되고 지혜가 됩니다. 오늘날 지혜가

없어 낭패를 당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지혜를

얻으면 그 어떤 위기라고 극복을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

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

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1:5).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이와같은 역사를 베풀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는 과거의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당신이 세속에 젖어 있으면 그 말씀

을 들을 수 없습니다. 이러므로 우리는 한해를 출발하는 이때 말씀을

청종하는 자세를 확실하게 정비하고 출발해야 할 것입니다.

 

4. 우리는 믿음의 선언을 하는 자세를 정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

양대로 지음을 받은 인간의 말에도 창조적인 능력이 있습니다. 더욱이

회개하고 새로운 피조물이 된 그리스도인들의 말에는 위대한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 사도들은 수많은 능력을 나타냈는데 그

들은 모두 담대한 선언을 했습니다. 베드로는 미문가에서 구걸을 하던

앉은뱅이에게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내게 주

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행3:6) 선언

했습니다. 그 결과 말씀이 능력이 나타나 그는 발목에 힘을 얻고 일어

나 뛰면서 하나님을 찬미했습니다.

 

또한 베드로는 선행과 구제에 힘쓴 도르가가 죽었을 때도 그 시체를

향해 ' 다비다야 일어나라'(사도행전 9:40) 고 선언했습니다. 그 결과

말씀의 능력이 나타나 그녀는 다시 살아났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말에도 권능이 있습니다.성경은 말씀하시기를 "

네 입의 말로 네가 얽혔으며 네 입의 말로 인하여 잡히게 되었느니라

"(잠 6:2)고 하셨습니다. 이러므로 전지전능,무소부재하신 창조주 하

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담대한 믿음의 선언을 해야 합니다. '나

는 못해, 나는 절망이야. 나는 무능력해 이런 부정적인 말을 우리의

입에서 제해야 합니다. 우리는 오직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힘차게 시인해야 합니다. 이 말씀이 우리의 운명을 좌우합니

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

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

에서도 풀리리라"(마18:18)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어둠으로 꽉 들어찬 말, 부정적인 말을 하면,

하나님께서도 여러분을 도와주실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약속

의 말씀을 믿고 이 땅에서 담대한 믿음의 선언을 하면 하나님께서도

능력을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선언

해야 할까요?우리가 어떤 믿음의 선언을 하며 한해를 살아야 할까요?

 

먼저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은총을 근거로 죄 사람

에 대한 선언을 해야 합니다. '나는 의인이 되었다. 나는 조의 심판과

상관이 없다. 나는 죄인이 아니다' 이런 선언은 우리로 하여금 평강의

한해를 보낼수 있게 할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그 은총을 근거로 성령충만에 대한 선언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성령을 통해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으며 능력있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언제나 나와 함께 하신다. 힘으로 되지 아니하

고 능으로 되지 아니하나 오직 성령님과 더불어 할 수 있다'는 이런

선언은 우리로 하여금 승리하는 한해를 살게 할 것입니다.

 

나아가서 우리는 그 은총을 근거로 치료에 대한 선언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치료하시는 야훼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

으심으로 우리는 나음을 얻었습니다. 이러므로 우리는 올 한해 아니

평생토록 나는 주안에서 치료함을 받았다.나는 강건하다.원수의 세력

이 나를 해치지 못한다'라고 힘차게 선언해야 할 것입니다. 이 선언을

통해 우리의 삶 가운데 치료의 능력이 나타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그 은총을 근거로 낭패와 실망, 저주와 빈곤에서

벗어난 것을 선언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저주에서 자유함을 얻

은 자유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아브라함의 복에 참여한 "복있는 사

람"입니다. 그런데 많은 성도들이 입버릇처럼 '요즘 사업이 어려워 죽

겠습니다','물질이 없어 살기가 괴로워요','경기가 형편없어요',' 죽

지 못해 살고 있어요'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비극입니다. 왜냐

하면 그말의 열매가 삶 가운데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저주에서 벗어나 복된 삶을 살고 있습니다'라고 선언해야 합

니다. 비록 경기가 형편없다고 하더라도 그대로 말할 것이 아니라 '아

브라함의 복 가운데 있습니다. 라고 말해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축복된 자녀입니다. 나는 아브라함의 복 가운데 있습니다. 나는 부요

합니다'이런 입술의 시인으로 올 한해 복된 삶을 사는 여러분이 되시

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은총을 근거로 사망이 철폐되고 천국의 영광을 얻

게 된다는 것을 선언해야 합니다. 우리는 눈물과 근심과 이별하는 것

이나 곡하는 것이 없는 영생의 세계에 들어갑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죽음은 이런 세계로 들어가는 관문에 불과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죽음

을 불안과 공포와 초조속에 맞이하지만 우리는 평안과 기쁨과 감격 속

에 맞습니다. 이 때문에 우리는 사도바울처럼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

이 어디 있느냐" (고전 15:55) 라고 선언할 수 있습니다.

 

이러므로 우리는 올 한해 끊임없이 천국의 소망, 부활의 기쁨에 대해

힘차게 선언해야 할 것입니다. 그럴때 우리의 삶 가운데 부활의 새 생

명의 역사가 나타날 것입니다.

 

이 네가지 사항이 바로 우리가 정비해야 할 것들입니다. 우리가 이

네가지 사항을 잘 정비하고 실천할 때 올 한 해를 승리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에 부실하면 인생도 황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은 주 안에서 인생을 잘 정비해 하나님의 큰 축복을 받는 한해

를 살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2

제목 : 하나님과 순종

자료원 : 조용기목사 여의도순복음교회

발행일 : 95년 04월 02일

 

개는 오래전부터 인간과 가장 밀접한 관계 속에 있는 동물입니다. 인간과

개는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연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

고 우리들은 개에 대해서 참으로 부정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용하

는 부정적인 말 중에 개를 빙자한 말이 너무나 많습니다. 사람들은 예를 들

어 미운 사람을 보고 '개 무슨 무슨 ''개같은 놈'이라고 말합니다. 또한 맛

이 없고 좋지 않은 것을 가지고 '이 개떡같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어려운 삶을 사는 것을 보고 '개팔자' 라고 합니다. 이와같이 사람은 개를

빙자해서 여러가지 극한적인 비난도 하고 욕도 하고 그리고 탄식도 하는 것

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개에 대한 참된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줌으로써 신앙생

활에 있어서 개의 습성을 통해 배워야 할 좋은 면을 많이 가르쳐 주고 있습

니다. 성경 민수기 14장24절은 갈렙의 순종에 관하여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

니다. "오직 내 종 갈렙은 그 마음이 그들과 달라서 나를 온전히 좇았은즉

그의 갔던 땅으로 내가 그를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 자손이 그 땅을 차지하

리라" 그런데 '갈렘'이라는 이름은 히브리어로 '개'라는 말입니다. 그러므

로 '내 종 개는 그 마음이 그들과 달라서 나를 온전히 좇았은즉 그의 갔던

땅으로 내가 그를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 자손이 그 땅을 차지하리라"는 의

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개에 대해서 우리의 생각과 전혀 다른 생각을 가

지고 계시기에 여호수아와 함께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한 위

대한 지도자의 이름을 개라고 지어주셨으니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갈렙을 크게 사랑하신 것은 개가 주인을 섬기듯 충성

으로 하나님을 섬겼기 때문이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우리는 이 개의 상

품을 알아봄으로 왜 하나님의 당신이 그 귀한 종 갈렙에게 개란 이름을 주

셨는지 그 이유를 우리가 깨닫고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알아보기

로 하겠습니다.

 

1. 개는 주인에게 죽도록 충성합니다.

 

일본 동경의 히비야 역에 가면 그곳에 청동개 동상이 있습니다. 그 히비야

역의 청동개에 얽힌 이야기를 들어보면 참으로 가슴이 찡합니다. 어떤 사람

이 집에서 개를 길렀는데 매일 아침 주인이 직장에 출근하면 개가 역까지

따라나와서 주인을 배웅하고 그리고 또 주인이 돌아오는 시간이 되면 반드

시 그 개가 역에 나가서 주인을 기다렸다가 주인을 모시고 집에 돌아오곤

했답니다. 그런데 그만 주인이 병이 들어 죽었습니다.

 

그런데도 그 개는 매일 주인의 퇴근시간이 되면 히비야 역에 주인을 기다

렸다고 합니다. 그것도 하루 이틀이 아닌 십년이 넘도록 눈이 오나 비가 오

나 봄 여름 가을 겨울할 것 없이 그 개는 주인이 오는 시간에 히비야 역에

나갔다가 마지막 열차가 떠나고 난 다음 주인이 오지 않으면 낑깅거리고 울

다가 집으로 돌아오곤 했습니다.

 

그러다가 그 개는 늙어서 히비야 역 앞에서 죽게 되었다고 합니다. 사람들

은 너무나 감동했고 그 개의 충성심을 기리기 위해 청동개 상을 만들어서

기념으로 세워놓은 것이었습니다.

 

개는 주인이 잘살 때도 충성스럽게 따라오고 주인이 망해서 못 살때도 주

인을 배반하지 않습니다. 주인이 착하고 선한 사람일 때도 충성스럽게 따라

가지만은 주인이 악인일때도 주인을 배반하는 일이 없이 주인을 따라갑니

다. 개는 한번 주인을 섬겼다 하면 죽을때까지 주인을 충성스럽게 섬깁니

 

 

 

다. 갈렙은 개처럼 하나님을 섬기되 충성스럽게 섬겼습니다. 좋을 때나 어

려울때나 고통스러울 때나 평안할 때나 갈렙은 조금만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나를 온전히 따랐다'고 칭찬을 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섬기던 사람들이 자기에게 잘해주고 무엇이든 잘될 때는 충성스

럽게 섬기다가 어려움이 다가오면 쉽게 배반하여 버립니다. 우리가 하나님

을 섬길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복을 주고 좋은 일을 행하실 때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박수를 치고 할렐루야를 외치다가, 시험과 환란이 다가

오면 언제 하나님 믿었냐는 식으로 하나님을 버리고,등지고, 떠나가는 사람

이 너무나 많습니다. 안타까운 실정입니다.

 

하나님께 갈렙을 크게 칭찬한 이유는 죽도록 주인되신 하나님께 충성했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 2장 10절에 보면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개가 주인을 따

르듯 우리가 하나님께 죽도록 충성하면 하나님이 종국적으로 우리에게 생명

의 면류관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2. 둘째로 개는 주인을 정말로 기뻐합니다.

 

제가 어릴 때 저희 과수원에 7-8마리의 개를 키웠습니다. 학교에 갔다 오

면 이 개들이 얼마나 저를 반기는지 뛰어 오르고 끌어 안고 얼굴을 핥는 바

람에 견딜 수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제가 학교에 갔다가

집에 돌아올 때에 개만큼 반가와 해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언제나 쓰다듬

어 주고 기분이 좋을 때는 야옹하고 있지만 조금만 괴로우면 삭 할퀴고 도

망칩니다. 그러나 개는 주인에게 발길로 채이고 얻어맞아도 물고 달려들지

않습니다. 또 꼬리를 치고 주인에게 가까이 옵니다.

 

친자식도 부모를 죽이는 윤리가 무너진 세상에서 주인을 죽였다는 개는 없

습니다.주인이 집에 돌아오면 와서 뛰고 뒹굴고 좋아하며 기뻐하고 주인을

예배합니다.

 

헬라어로 예배란 말은 "프로스퀘네오"라고 합니다. '프로스'란 말은 '향한

다'는 말이고 '퀴네오'란 말은 '개'라는 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란

말은 개가 주인을 향해서 아양을 떠는 이것을 예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개가 주인 앞에서 예배드리는 모습이라고 하나님이 그렇게 가르치고 있습니

다.

 

그러면 개는 주인 앞에서 어떻게 예배를 드립니까? 개는 주인 앞에서 너무

나 주인을 기뻐합니다. 아무 감정도 없이 멍하게 있는 것은 예배가 아닙니

다. 하나님 말만 나오면 너무 너무 기뻐하고 기다리고 기다리던 사람의 음

성이 들리면 반가워합니다.

 

개는 주인이 밖에 나갔다 들어오면 달려들어 기뻐합니다. 낑낑거리고 뛰어

오르고 주인을 기뻐하고 예배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참으로 예배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너무나 기뻐하고 하나님께 나와서 '하나님 감사합니다'라고

찬양을 하며 하나님께 박수를 치고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런 예배

를 하나님은 좋아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하나님을 향해서 개가 뛰어오르듯 하나님을 향해서 두

손을 내어 밀고 하나님을 붙잡을 듯이 하면서 하나님을 기뻐해야 합니다.

체면차리지 말고 하나님께 나가서 고함치고 울부짖고 할레루야를 외채며 찬

양하며 예배해야 합니다.

 

다윗은 법궤 앞에서 바짓가랑이가 내려가 엉덩이가 나올 정도로 춤을 추었

습니다. 하나님 앞에 춤을 추면서 다윗은 옷이 다 내려가는 것도 몰랐습니

 

 

 

다. 이 모습을 본 그의 아내 미갈이 자기 집 창문으로 내다보다가 다윗의이

런 모습을 보고 그를 업신여겼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미갈에 대해서

노했습니다. 그 결과 미갈은 평생에 어린 아이를 잉태치 못했습니다. 하나

님이 너무 기뻐서 주인에게 뛰어오르는 개처럼 춤을 추다가 옷이 벗어져서

궁둥이가 나왔지만 하나님은 그 천진함을 예쁘게 보신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순진무구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 이것을 하나님

은 기뻐하십니다. 개는 주인 앞에 엎드려서 주인을 앙망합니다. 그리고는

끊임없이 꼬리를 치고 주인 앞에 나오면 꼬리를 한시도 쉬지않고 살랑살랑

흔듭니다. 그래서 아메리칸 인디언의 경우에도 '개가 꼬리를 친다'는 말이

'예배한다'는 말로 되어있습니다. 개가 꼬리를 치듯이 우리도 하나님 앞에

서 자꾸 꼬리를 쳐야됩니다. 우리는 '하나님 감사합니다. 할렐루야,할렐루

야, 할렐루야'로 주님을 높여야 합니다. 낯선 사람이 오면 개는 꼬리를 안

칩니다. 그러나 좋아하는 주인 앞에서는 늘 쉬지 않고 꼬리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쉬지 않고 입술로 꼬리를 쳐야 됩니다. 쉬지 않고 입술로 꼬

리를 쳐야 되빈다. 수지 않고 '할렐루야, 감사합니다. 주님을 찬양합니다.

모든 영광 주님께 드립니다.

 

느헤미야서 8장 10절은 "야웨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고 말씀하

고 있습니다. 시편 123편 1절로 2절에도 "하늘에 계신 주여 내가 눈을 들

어 주께 향하나이다 종의 눈이 그 상전의 손을, 여종의 눈이 그 주모의 손

을 바람같이 우리 눈이 야웨 우리 하나님을 바라며 우리 긍휼히 여기시기를

기다리나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예배를 크게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의 갈렙을 크게 사랑하신

이유는 갈렙은 이와 같은 심정으로 하나님을 정말로 기뻐하고 예배를 드렸

기 때문인 것입니다.

 

3. 개는 주인을 끝가지 지킵니다.

 

낯선 사람이나 도둑이 가까이 오면 개는 무시무시하게 짖고 달려들면서 주

인을 지킵니다. 주인이 위험에 처하며 함께 목숨을 바치기까지 합니다. 우

리에게도 개에 얽힌 이야기가 있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이 술에 취해 따뜻

한 양지 잔디밭에 누워 잠이 들었는데 산불이 났습니다. 불이 점점 더 가까

이 다가 오자 개는 놀라서 저 개천있는 곳으로 뛰어 내려가서 몸에 물을 적

셔와 주인 주위를 뒹굴며 풀을 촉촉히 적셔 주인이 불에 타죽지 않도록 온

힘을 다해서 주위의 불을 껐습니다. 그러나 그 개는 몸에 불이 붙어 죽고

말았습니다. 주인이 술에 깨서 보니까 개는 죽어 있고 불은 자기 주위만 피

해 다 타들어간 것을 알게되었습니다. 그 개는 주인을 보호하기 위해서 자

기 목숨을 버린 것입니다.

 

갈렙도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는 자기 목숨도 아끼지 않았고 하나님의 명

예와 영광을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버리려고 했습니다. 로마서 14장 7절로

8절에 보면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자도 없고 자기를 위하

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

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는 주의 것이로다"라고 말씀하고 있습

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지키기 위해서 우리 목숨을 버릴 필요가 있

습니다.

 

4. 개는 주인에게 온전히 순종합니다.

 

저는 얼마전에 일본에서 참 재미있는 프로그램을 시청했습니다. 잘 후녈나

된 세퍼드, 일본 토종개 등 세마리를 며칠 굶긴 후 주인들이 훈련을 잘 시

켜놓았는데 이 맛있는 밥이 담긴 그릇을 세 개 갖다놓고 주인들이' 먹으면

안돼, 먹으면 안돼, 먹으면 안돼'라고 명령했습니다.그리고는 카메라를 몰

 

 

 

래 감추고 개들만 밀폐된 공간에 있게 했습니다. 그런데 그 개들이 그 밥

을 보고 먹고 싶어서 침을 흘리고 입술을 핥으면서도 30분 동안 밥을 먹지

않았습니다. 30여분이 지나니까 일본 토종개가 자기 밥은 안먹고,옆에 있는

밥을 먹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다른 개들은 일본 개가 자기 밥을 멱는데

도 침만 흘릴뿐 견디고 있었습니다. 꾀가 많으 일본개는 주인이 자기 밥을

먹지 말라고 했으니 자기 잡은 안먹고 이웃밥을 먹었습니다. 그러나 서양

개들은 끝까지 주인이 와서 먹으라고 할때까지 그냥 침을 비같이 흘리면서

도 안 먹고 앉아 있었습니다. 개는 한번 주인이 훈련을 강하게 시켜 놓으면

온전히 순종합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도 순종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좋을

때에는 순종을 잘하지만 이해관계가 부딪힐 때는 쉽게 순종하지 않고 하나

님의 말씀을 져버릴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신명기 30장 20절에는 "네 하나

님 야웨를 사랑하고 그 말씀을 순종하며 또 그에게 복종하라 그는 네 생명

이시요 네 장수시니 야웨께서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하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순종하고 하나님을 따라 가면 하나님이 우리 생명이시요

우리 장수가 되고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축복한 축복을 우

리에게 누리게 하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개가 주인에게 온전

히 순종하는 것처럼 이 갈렙은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했습니다. 그러니 하나

님이 너무 기뻐혀시 '나는 갈렙을 보호해 가지고서 약속한 땅으로 데려가겠

다'고 주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5. 개는 정말 끈기가 있습니다.

 

개는 주인이 가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 갑니다. 끈기가 있습니다. 주인이

편안한 곳으로 가도 따라가고 어려운 곳에도 따라 갑니다. 제가 하와이에

갔을 때 어떤 스쿠버 다이버가 자기 개를 데리고 바다 깊숙한 데까지 헤엄

을 쳐 갔습니다. 그 사람은 상당히 헤엄을 잘치는 사람입니다. 나는'저 개

는 얼마 안가다가 돌아오겠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개주인은 멀리까지 헤

엄쳐 나갔습니다. 그 개도 끝까지 헐떡거리면서 헤엄을 치며 주인을 따라서

저 바다 깊숙히까지 헤엄쳐 따라오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저는 그때 충성된

개는 주인이 가는 어느 곳이든 따라 간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께서 시키는 일이면 끝까지 행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끝까

지 견디는 그런 신앙인이 되어야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 하나님을

배반하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가데스바네아에서 배반

했을때 일어나서 '그 땅 주인은 떠났고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 우리가 들어

가자!'라고 외친 사람이 바로 갈렙입니다. 갈렙은 하나님께서 시킨대로 끝

까지 끈기있게 따라붙은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잘 훈련받아 신

앙이 좋은 사람은 한번 하나님 일에 발을 들여놓았으면 뒤를 돌아보지 않습

니다. 끝까지 그 신앙과 지조를 가지고 하나님을 따라갑니다. 이러한 사람

을 주님께서 크게 사랑하시는 것이빈다.

 

하나님께서 갈렙의 온전한 순종을 크게 칭찬하시고 갈렙과 그 후손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여 차지하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오히려 우리는 우리가 기르는 개에게 그 충성스러운 성품을 배워야 되겠습

니다. 이러므로 하나님께서 개라는 의미를 가진 갈렙을 크게 칭찬하고 축복

해 준 것처럼 오늘 우리도 신앙의 선배 갈렙처럼 온전히 깨달음을 얻고서

하나님이 기뻐하는 그런 신앙인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목록가기
 
 

33

제목 : < 예화 > 멀리보는 눈

자료원 : 성공적 구역<조용기>

발행일 : 93년 10월 30일

 

벌레의 눈을 가진 민족은 망하고 새의 눈을 가진 민족은 흥한다

 

즉 벌레와 같이 먼데를 바라보지 못하고, 근시안적으로 눈앞의 사물

만 바라보고 사는 사람은 성공하지 못하지만, 새와 같이 높이 올라가

서 멀리 보는 사람이 성공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우리가 지도자가 되

려면 마음의 눈을 밝혀 내일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내일의 발전

적인 나의 모습을 보고, 마음의 눈으로 그 영상을 붙들어 맬 때에 역

사는 일어나는 것입니다.

 

 

 
 
 

34

제목 : 참 해방자 예수 그리스도

자료원 : 순복음가족 조다윗 목사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

발행일 : 93년 08월 22일

 

우리는 지금부터 48년전 1945년 8월 15일 36년 간의 일본 식민지 노

예생활에서 고생하다가 연합군의 승리로써 해방을 얻고 자유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때 저는 국민학교 3학년이었는데 온 나라가 해방의 기

쁨으로 어쩔 줄 몰라하던 것이 지금도 눈 앞에 생생합니다.

 

그러나 그 해방이 자력으로 얻은 것이지 못하였기 때문에 곧장 해방

군의 이름으로 빠구한에 진주한 소련에 의해 북한은 공산화되고 아직

까지도 북한동포들은 노예생활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 해

방이 가져다준 민족적인 기쁨과 즐거움은 형언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 민족에게 주실 제2의 해방인 남북통일을

바라보며 설레이는 마음으로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휴전선이 무

너지고 5천년의 역사를 가진 한민족이 하나가 될 때 그 때의 기쁨 또

한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해방자로 계시되고 있습니다. 430년 동안 애굽

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을 모세를 통하여 해방시켜 젖과 꿀이 흐르

는 가나안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그의 고향땅 나사렛에

오셔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사 이사야서에 기록된 다음과 말씀을

읽으심으로 당신 자신이 해방자라는 것을 분명하게 선포하셨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

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

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눅4:18-21)

 

이 말씀은 바로 예수님의 사역에 대한 선언이시며 예수님께서 인류의

해방자로 오셨음을 온 천하에 선포한 말씀입니다. 그러면 우리 주님께

서 우리에게 오셔서 어떠한 속박과 구속에서 해방시켜 주시겠다고 말

씀하셨을까요?

 

1.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인간은 가난하게 지음받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인간은 가장 영광스

럽게 지음받았다고 말씀하며 보여주고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

상과 모양대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사람

을 보실 때 마치 우리가 거울을 보고 우리의 형상을 보듯이 하나님 자

신의 형상을 우리 속에서 바라보고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존재하게 지어졌으며 하나님께 사랑받는 존재

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늘과 땅과 세계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지으시고 아담과 하와를 위해서는 특별히 아름다운 처소, 낙원을

예비해 놓으셨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이 낙원에서 부족함이 없는 행복

한 삶을 살 때 마귀의 유혹을 받아 그만 하나님을 반역했습니다. 그

죄로 아담과 하와는 에덴에서 쫓겨나게 되고 땅은 저주를 받아 가시와

엉겅퀴를 내게 되고 사람은 가난과 고통 속에서 살게 된 것입니다.

 

성경 갈라디아서 3장 13,14절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

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

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김으로 저주를 받아 아담과 하와 이후 모든 인간

은 가난과 고통속에서 살아왔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노력을 해도 이

노예생활에서 해방을 얻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오셔서

이 저주를 친히 짊어지고 십자가에 올라가 심판을 받아 찢기신 몸과

흘리신 피로 저주를 청산해 버리고 만 것입니다. 이러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로 하여금 저주와 가난에서의 해방을 선포하는 동기가

된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8장 9절에 보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

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담과 하와의 타락이후 가난과 저주의 포로가 되었

던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의 고난을 통해 포로생활에서 해방되

었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진리를 알지니 진리

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8:32) 고 말씀합니다. 내가 그리스도 예

수로 인하여 어떠한 속박에서 해방되었는가를, 이 진리를 분명히 깨달

아야 하겠습니다. 그리할때 우리의 믿음은 더욱 굳건해지는 것입니다.

 

또 성경은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

암았느니라"고 하셨는데, 그리스도의 말씀을 통해서 진리를 듣고 깨닫

고 난 다음 그 진리에서 서서 단호한 믿음을 가질 때에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시간 우리는 그리스

도의 이 해방케 하시는 말씀을 받아들여 분명한 믿음을 가지고 주님

앞에 단호한 기도를 드리며 살 때 모든 저주는 사라지고 아브라함의

축복과 은헤가 우리의 것이 될 것입니다.

 

2.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인간은 원래 하나님을 섬기는 자유인이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섬

기며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서 믿음.소망. 사랑을 누리며 자유롭게 살

도록 지음받았습니다. 포로생활을 하며 속박받고 살게 되어 있지 않았

습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가 마귀의 꾐에 빠져 하나님을 반역하는 죄를 짓

자마자, 인간은 마귀의 종이 되었으며 죄악의 종이 되고 만것입니다.

마귀는 인간을 포로로 잡고서도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일을

계속했으며 죄악은 인간의 심성을 철저히 부패, 파괴시키고 만 것입니

다.

 

그러므로 현지 우기가 바라보는 인간은 하나님이 최초에 지은 사람과

는 너무나 동떨어진 존재가 되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너무나 짓밟히고

상처투성이가 부패한 심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오늘의 인생인 것입니

다. 누가 이 절망 상황에서 우리를 해방시킬 수 있겠습니까? 우리 주

에수께서는 인간의 처참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성경에서 보여주셨습

니다.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

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저희가 이같은 일을 행사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

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

 

 

 

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롬1:28-32).

 

이와같이 인간의 심성은 처참하게 파괴되고 부패되고 만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사람들은 모두 다 사형에 해당한다고 말했습니

다. 이러므로 온 세상은 하나님의 사형선고를 받은 비참한 존재였싸브

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자진해 십자가에 달

려 몸찢고 피를 흘려 우리의 모든 죄악을 하나님 앞에서 청산함으로,

우리를 마귀와 죄의 포로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

겨주시는 위대한 일을 하신 것입니다.

 

성경은 에베소서 2장 1절로 9절에서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

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

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

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

는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

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 너희가 그 은혜

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그둔

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우리는 우리의 선한 행동이나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죄악과 마귀의 포로로 사형선고를 받은 절망적인 존

재인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대속의 죽으심을 통해서 우리 죄를

청산해 주셨기 때문에 예수를 구주로 모시기만 하면 아무 값없이 공짜

로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죄사함을 받고 죄의 포로에서 해방을

얻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구원받고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버

린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 장사한 바 되고 그리스도 안에

서 함께 부활하여 이미 그리스도와 함게 천국에 앉아 있다'고 말씀합

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를 죄에서 완전히 해방시켜 주셨다는

것을 사장이요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들이 된 것입니다.

 

이러므로 여러분과 저는 죄와 마귀를 향해 단호하게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물러가라"고 말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의

포로가 아니요 성령 안에서 자유인이 되었으며 앞날에 하나님이 우리

에게 주실 새 하늘과 새 땅과 새 예루살렘을 상속으로 받을 큰 기대와

소망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해방

이며 자유입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끊임없

이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돌려야 할 것입니다.

 

3.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인간이 처음으로 지음을 받았을 때는 영안도 밝고 육안도 밝았습니

다. 인간은 영적인 세계와 물질적인 세계를 동시에 가지고 있었습니

다. 매일 서늘할 때면 하나님이 오셔서 아담과 하와의 손을 잡고 에덴

동산을 거닐면서 대화를 했습니다. 그들은 영안을 분명히 열고 하나

님과 천사도 보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육신의 눈이 밝아서 하나님이

지으신 만상을 밝히 보고 기뻐하고 즐거워 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선악을 알게 하는 실과를 따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고

 

 

 

경계하신 말씀을 거역, 선악과를 따먹고 난 다음, 그의 영이 죽자 영

안도 죽어버리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과의 교통이 끊어졌습니다. 그때

로부터 인간은 육체적인 존재가 되고 만 것입니다. 육신의 눈을 가지

고 물질적인 세계만 바로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잃어버린 인간은 자기의 존재 이유를 잃어버리고 말았습니

다. 어디에서 와서 왜 살며 어디로 가는지를 알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삶의 의미가 가치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자기를 고등동물에 불과하다

가 생각하고 죽음을 모든 것의 종말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오셔서 우리가 다시 눈을 뜨게 보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장님된 가운데서 해방을 얻는 위대한 은총인

것입니다.

 

성경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서 21절에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

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

도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

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

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로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

여 간구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

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안에서

하나님의 의가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대신하여 그 생명의 피를 다 쏟음으로 우리의 일

생의 죄를 다 청산해 버렸습니다. 우리는 용서받은 의인이 된 것입니

다.

 

우리가 용서받은 의인이 되자 우리의 영안이 다시 열리게 되었습니

다. 영안이 열리자 우리는 천국과 지옥이 있음을 알고 그리고 영안이

열리자 삶의 이유와 목적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사는

이유와 목적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고 천국에서 주와 함께 사는 것이

삶의 종국적인 목적인 것을 바라보게 된 것입니다. 이러므로 영안이

열리면 무지와 절망에서 깨끗이 해방을 얻어 우리의 삶이 어디에서 와

서 왜 살며 어디로 가는지를 완전히 알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오셔서 우리의 영안을 열어주심으로 우리를 깜깜하던

우리의 앞날, 우리의 절말적인 삶에서 해방시켜 주신 것입니다. 그 결

과로 우리는 영안을 가지고 그리스도를 밝히 바라보고 하나님을 밝히

깨닫고 하나님과 교제하면서 천국을 마음속에 가지고 살게된 이 즐거

움을 얻게 되었으니 얼마나 감사한지 말로 다할 수가 없습니다.

 

4. 눌린 자를 자유케 함

에덴에서 아다은 아무에게서도 눌림을 받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에

덴동산에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예비하시고 돌보아 주셨습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자마자 그때로부터 시작해서 그들은 마

귀와 죄에 짓눌리고 생활고에 짓눌리고 고통에 짓눌리고만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인간은 모두 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요 눌린 자

요 절망적인 존재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 예수께서 오셔

서 이 모든 일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시기를 원하고 계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11장 28절로 30절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

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

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명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셔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친히 다맡

아 짊어지셨습니다.

 

그리스도가 2천년 전에 우리의 죄를 다 청산해 버렸습니다. 우리와

하나님과의 원수된 장벽도 주 예수께서 허무셨습니다. 우리의 질병의

짐도 청산해 버리고 우리의 저주와 가난의 짐도 청산해 버리고 우리의

죽음과 지옥의 짐도 청산해 버리고 만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께서 이 모든 것들을 2천년전에 이미 다 청산해 버리고

이제는 우리를 품에 품고 평안하게 인생을 살아가게 하기 위해 우리에

게 찾아오셔서 우리를 향해 두팔을 활짝 벌리고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

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아담의 후손들이여,

다 내게로 오라. 세상으로 가지말라. 인간의 수단과 방법을 의지하지

말고 내게 오라,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다 가지고 있으며 너희 모든

짐을 십자가에서 피로써 다 청산한 내게로 오라. 그러면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 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못났음에도 불구하고, 버림을 받아야 마

땅함에도 불구하고 빈손 든 그대로 오늘 주님께 나오면 주님은 우리를

받아주셔서 우리의 모든 짐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사

랑하는 자녀로 만들어 주시고 우리에게 성령을 주시고 믿음을 주시고

은혜를 주시고 소망과 사랑을 주셔서 승리의 삶을 살도록 이끌어 주시

는 것입니다.

 

참자유와 참해방은 예수 안에서 하나님 품에 안길 때 얻을 수 있으며

하나님과 함께 살때 우리는 매일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고 강건

하며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으며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 나와야 합니다. 그래야 개인

적으로 사회적으로 국가적으로 세계적으로 진실한 해방을 얻고 넘치는

자유를 가지고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35

제목 : <교회와 목회자:66> 대조 순복음교회 박정근 목사

자료원 : 국민일보 25면

발행일 : 94년 07월 02일

 

◉ 푸른목장 일군 "양치기 32년"/조다윗.최자실목사 개척한 천막교회가

모태/지역주민과 호흡 함께하며 "열정목회"

 

올해로 교회창립 36주년을 맞은 서울 은평구 대조동 67의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 순복음교회(담임 박정근목사)는 교단의 역사와 거의 맥

을 같이 하는 가운데 총회를 대표하는 교회중의 하나로 꼽힌다.지난 58

년 은평구 대조동 산24에서 천막교회로 창립됐던 이 교회는 창립자가

조다윗목사와 최자실목사란 점이 이채롭다.신학교 졸업후 조목사와 최

목사가 함께 세운 첫번째 개척교회였던 것. 이후 교회가 성장하고 교인

들이 조목사와 함께 서대문교회로 이전함으로 선교사였던 스테츠목사가

2대 담임목사로 부임하고 이어 62년 당시 30세였던 박정근목사가 3대

담임목사로 초빙됐다. 이후 박목사가 32년간을 맡아 목회해 와 현재 재

적성도 4천여명 출석성도 2천여명에 이르는 대교회로 성장,발전했으며

다양한 교회 프로그램과 선교를 통해 많은 교회들에 도전과 모범이 되

고 있다.

 

『한 교회를 30년 넘게 맡는다는 것이 쉽지 않음을 여러번 느꼈고 어

려운 고비도 많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장기목회가 가능할 수있었습니

다.저희 교회는 말씀의 능력과 성령의 권능을 기차의 두 레일에 견주어

강조하며 달려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초창기 대조동은 초가집이 드

문드문한 조용한 시골마을이었다.교회당옆은 공동묘지였고 주변은 논밭

이었다.그러나 천막교회에서 시작한 순복음교회는 계속적인 성장을 기

록,61년 1백평짜리 시멘트블록 예배당으로 옮겼고 77년 다시 3백여평의

지상건물로 이전했다.현재의 순복음교회는 지난 80년과 89년에 각각 준

공한 것으로 대지 1천여평 건평 1천2백50평의 교회건물과 교육관을 갖

추고 있다.

 

박목사의 목회는 크게 네가지로 요약된다.진리와 은혜가 충만한 교회,

지역사회와 함께 움직이는 교회,선교에 적극적인 교회,문서선교에 앞장

서는 교회가 바로 그것이다. 원고설교를 꾸준히 지향해 오고 있는 박목

사는 성도들에게 말씀을 바탕으로 한 능력과 행동하는 신앙을 강단에서

언제나 강조한다.월요일 아침 기도를 통해 다음주 설교제목과 주제를

결정짓고 설교를 준비하기 시작,설교가 완성되는 것은 금요일이나 토요

일이다.

 

『제 설교가 성도들의 한주일 영적양식이 된다고 생각하면 결코 소홀

할 수 없기에 설교준비에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합니다.원고설교는 충

분히 연구하고 검토한 말씀을 정리해 전한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순복

음교회는 현 대조동이 형성된 초창기 이전부터 설립된 만큼 그 어느 교

회보다도 지역주민들과 끈끈한 유대관계를 맺고 있다.그것은 이 교회가

오래전부터 주민들을 위한 지원과 봉사,이웃돕기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왔기 때문이다. 교회가 정기적인 지원사업을 펼치고 있는 것은 인근의

대조동 녹번동 불광동 갈현동 등에 살고 있는 극빈자들에 대한 후원이

다.각 동사무소에서 추천을 받은 극빈자들에게 생필품과 생활비를 지원

해 주는한편 장학사업,노인잔치,자활원 방문등의 프로그램을 진행시키

고 있다.

 

교회성장과 함께 국내외 선교지개척과 선교에 주력해온 순복음교회는

현재 25개의 지교회를 세웠는가 하면 15명의 선교사를 파송,지원하고

있다.특히 이 교회가 주축이 되고 교단내 10여 교회가 협력해 창립한

세계선교회(회장 박정근목사)는 2년마다 각국 선교사들을 초청,선교대

회를 개최하고 있는데 선교사명고취의 큰 몫을 감당하고있다.

 

교회 자체로 QT 월간지를 정기적으로 발간,성도들의 영적성숙에 도움

을 주고 있으며 교회소식과 선교보고도 자세히 담고 있다.교회에서는

[생명의 양식]을 매달 3천부이상 발간해 교단내 교역자들과 군부대장

병,재소자들에게 무료로 배포하고 있다. 또 박목사의 주일설교와 신자

의 간증을 실어 매주 발행하는 4.6배판 [순복음의 메시지]는 전도지로

폭넓게 활용되고 있다.

 

『앞으로 주민들의 결혼식이나 행사에 무료로 사용할 수 있는 사회교

육관을 건립하고 기도원을 세우는데 진력할 것입니다.아울러 세계선교

의 교두보 역할을 하는 교회가 되도록 제3세계선교에 교회의 힘을모을

것입니다』 능력과 은혜의 신앙을 강조하고 있는 박정근목사.32년을 한

교회에 몸담으며 실천해온 그의 열정적인 목회가 이제 소담스런 열매를

맺고 있다.<김무정기자>

 

 

 
 
 

36

제목 : 나눔 사랑 [음지목회] 33년/조병호 목사

자료원 : 국민일보 24면

발행일 : 94년 01월 21일

 

◉ 몸에 밴 공동체생활... 사생활도 개방/구역모임 [교구장제] 자랑...

권위 "남말"

 

올해로 목회사역 33년째를 맞는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순복음새서울

교회 조병호목사(63)는 자신의 목회에 가장 큰 영향력을 준 인물로 여

의도순복음교회 조다윗목사와 예수원원장 대천덕신부를 서슴없이 꼽는

다. 『58년 군제대후 병고에 시달리며 절망의 나날을 보내던 저는 최자

실 조용기전도사가 개척한 천막교회에서 제1호로 변화를 받아 순복음신

학교에 입학했습니다.또 61년 교회개척후 당시 성미가엘신학교장이던

대천덕신부를 만나 예수원건립에 참여했고 10년동안 함께 일했 습니다

 

조목사는 조다윗목사에게는 성령충만한 은사적복음과 역동적인 설교의

비결을,대천덕신부에게는 공동체목회의 중요성과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인 만남을 배웠고 이것은 그의 목회에 가장 큰 영향력으로 작용해 왔다

고 설명한다. 따라서 조목사의 목회는 강함과 부드러움이 적절히 조화

돼 성공적인 목회를 이끌어 내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조목사의

목회철학은 [전성도의 거듭남과 가족화]로 요약할 수 있다. 조목사는

크리스천은 분명한 영적회심과 깨달음의 과정을 거쳐야하며 삶 속에서

복음이 용해되고 실천돼야 한다고 믿는다.그래서 그의 설교에는 믿음생

활에 따른 구체적인 지침과 방법이 제시된다. 또 공동체생활 10여년의

경험 속에서 영적성장이 어떻게 이뤄지는지를 세밀히 체험한 조목사는

교인들에게 사도행전2장에 등장하는 초대교회의 공동체를 닮으려는 노

력을 해야 한다고 항상 강조한다.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 자매임을 확

인하고 사랑을 나눌때 평안과 기쁨,은혜가 샘솟는다고 믿기 때문이다.

 

조목사가 목회좌우명으로 삼는 성경구절은 에베소서 5장26절이다.『이

는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앞에 영광

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많은 목회자들이 공감하지만 목회는 스

스로의 부족에 대한 실망과 연약함,부끄러움의 연속 속에서 낮아짐을

배우고 그 속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과 말씀으로 이끌어 나가는 것

이라 생각합니다』

 

소외된 곳,남이 돌보지 않는 곳을 찾아 복음을 전하는 조목사의 목회

방침은 그의 사역 속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강원도 산골목회와 예수원

을 거쳐 1978년 무허가 판잣집이 즐비한 철거민촌에 세워진 순복음새서

울교회에 부임했다.당시 성도수는 40여명이었으며 그나마 내부적인 갈

등도 많았다. 조목사는 부임 즉시 성도들을 구역단위로 단단히 묶어준

뒤 상호간의 베품과 나눔,사랑을 실천하도록 강조했다.

 

아울러 교회내 부서들의 선교활동을 격려,일체감 속에서 선교를 펼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목회자는 방향표시와 신호등의 역할을

잘해줌으로 교인들을 마음껏 편안히 달릴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는

것이 조목사의 지론이다. 또 주일설교를 직접 녹음해 원하는 성도들에

게 카세트테이프를 무료로 나눠주었다.조목사가 설교제목까지 직접 쓴

테이프를 받아쥔 성도들은 그것으로 친지와 이웃전도에 앞장섰다.

 

그리고 조목사는 자신의 집을 모든 성도들에게 오픈했다.누구나 와서

자고 음식을 나누고 신앙상담을 할 수 있었다.이것은 예수원의 공동체

생활 영향을 받은 것이지만 성도들은 조목사의 설교가 그의 삶속에서

 

 

 

가장 먼저 실천되고 있다는 사실을 가까이서 목격하며 훌륭한 목회자를

모시고 있다는 자부심을 가졌다. 현재 성도수가 1천여명을 넘어서는 큰

교회로 성장했지만 조목사의 사역은 초창기와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

다. 아직도 주일설교를 녹음해 성도들에게 나눠주며 그의 집은 성도들

로 늘 붐빈다.

 

『성도들끼리,또 교역자와 교인들끼리 마음의 문을 열고 격의없이 지

낸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자기를 낮추는 훈련을 계속 시키는 과

정에서 아집이 깨뜨려지고 섬기는 자세를 갖게 되는 것을 봅니다.

 

저는 교회내에서 권위주의나 특권의식이 존재해서는 안된다고 항상 강

조합니다.직분자일수록 더욱 고개를 숙여야 한다고 역설하지요』 따라

서 조목사가 성도들에게 입버릇처럼 말하는 것이 있다.[교회는 가정이

되고 가정은 교회가 되라]는 것이다.교회에서는 가정처럼 포근하고 간

격없이 사랑을 나누어야 하며 가정에서는 온 가족이 매일 가정예배를

통해 제단을 쌓고 기도함으로 경건생활에 이르자는 주장이다.

 

새서울교회가 길지않은 기간에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

것은 조목사가 교회내에 [교구회]란 모임을 만들고 각 구역을 관장하는

70명의 교구장을 임명,강도 높은 신앙훈련과 교육을 받게해 일선에 투

입시키는 데 있다고 많은 목회자들이 분석한다. 교구장은 준교역자라는

사명감을 갖게 만들며 [전도]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가지도록 교육시키

는 것이다.

 

새서울교회의 여선교회는 나이별로 모이거나 계층별로 구분되지 않는

다.모임은 많지만 모두가 고루고루 섞여서 일체감을 이룬다.겉으로만

교제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주고 받는 교제가 이뤄지도록 유도함으로

교인들의 결집력이 대단할 수 밖에 없다. 조목사는 2남1녀를 두었는데

장남 성준씨(31)가 대기업에 근무하다 목회자의 길로 나설 것을 서원,

현재 대만에서 대만순복음교회 전도사로 봉직하며 신학수업을 하고 있

는 것이 마음든든하다.

 

새서울교회는 이미 재개발지구로 선정돼 있어 조목사는 교회를 더욱

크고 훌륭하게 지을 계획을 세우고 있다. 교회에서 마련한 18평짜리 작

은 사택에서 10년째 살며 복음전파와 영혼사랑,공동체실천에 매진하고

있는 조병호목사.그가 추구해온 성령충만하고 역동적인 은혜와 사랑과

화목을 중시하는 공동체목회가 이제 소담스런 열매로 나타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순복음 새서울교회><김무정기자>

 

◉ 내가 본 조병호 목사/대천덕 신부 예수원 원장/약자 편 손들어준 용

기있는 목회자

 

나의 오랜 친구요 동역자인 조병호목사를 내가 처음 만난 것은 1961년

이었다.당시 조목사는 내가 살던 집 근처에서 개척교회를 시작했는데

나와 아내가 그 교회를 방문해 새로운 힘을 공급받곤 했던것이다.

 

조목사는 그후 급속히 성장하는 도시에서의 목회를 포기하고 강원도외

딴 비복음전도지역에 가서 아무것도 없이 새로운 교회를 시작했다. 이

곳에서 조목사는 모든 종류의 시련과 위험을 감내하면서 열심히 일했고

많은 교회들이 그에 의해 세워졌다. 조목사의 이런 경험은 내가 예수원

을 세웠을 때 많은 도움을 주었고 결국 나의 동역자가 되어 10년간이나

함께 일했다.하나님은 그를 사용하셔서 주위 무례한들의 마음을 변화시

키게 했고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도록 만들었다.

 

조목사는 모든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평범한 일상용어와 그 특유의

 

 

 

직설적인 논조,그리고 소탈한 유머가 곁들여진 설교로 사람들이 그리스

도를 발견하고 그 안에서 성장할 수 있도록 이끄는데 특별한 능력이 있

다. 도시빈민과 노동자선교에 관심을 가졌던 조목사는 도시로 이주,철

거민들이 밀집해 있는 순복음새서울교회를 맡았고 이내 그의 교회는 부

흥되었다.

 

언젠가 외국에서 오랫동안 연구하고 돌아온 자연과학자 몇몇이 정말

진솔한 설교를 어디서 들을 수 있는지 교회순례를 하다가 조목사의 교

회에 머물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나는 하나님께서 조목

사를 통해 나의 사역을 돕게 해 주신 것에 언제나 감사한다.조목사는

억압받는 사람들을 위해서 의분을 낼 수있는 심정의 소유자이며 또 반

목하는 형제들을 화해시킬 수 있는 사랑의 능력을 가졌다.

 

나는 그리스도께서 조목사에게 승리의 왕관을 주실 때까지 그를 계속

사용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 교회연혁/개척 23년만에 교인 1천여명 우뚝

 

▲ 1971년 3월1일=서울도봉구미아5동310에서 신동수전도사가 개척예배

드림

▲ 1974년=미아동776으로 교회를 이전하고 성전헌당(성전45평 기도실

5.5평)

▲ 1975년=신동수목사 캐나다 선교사로 출국,2대 담임으로 안병관 목

사 부임

▲ 1978년=3대 조병호목사 부임

▲ 1980년=새성전구입(대지 3백13평) 입당및 봉헌예배

▲ 1981년=초대장로 장립(최치열 임영식)

▲ 1982년=창립13주년 기념예배및 권사취임

▲ 1984년=교회사택구입및 식당건물구입

▲ 1986년=교회대지 추가매입(미아동852의50)

▲ 1987년=창립 16주년 기념예배및 권사취임

▲ 1988년=장로 피택(김근배)및 권사피택(조완순 최영희)

▲ 1989년=창립 18주년 기념예배및 제3대 장로장립(유춘성 주용무 강

요식),조병호 목사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부총회장 피선

▲ 1991년=집사안수식(고웅장 최정주)

▲ 1993년=창립 22주년 기념예배및 명예권사추대

▲ 1994년 현재=출석성도 1천여명의 교회로 성장

 

 

 
 
 

37

제목 :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자료원 : 조용기목사 여의도순복음교회

발행일 : 95년 02월 12일

 

아브라함 당시 엘람이라는 나라가 있었습니다. 엘람은 오늘날 이란 고원의

남부에 위치했던 나라입니다. 그 엘람의 왕은 그돌라오멜이었습니다.

 

당시 그돌라오멜은 사해 부근의 여러 나라를 속국으로 삼고 조공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소돔과 고모라왕등 속국의 왕들이 가나안 땅의 심한 기

근에도 불구하고 과중한 조공량에 반발, 정치적 자주권 회복을 위해 그돌라

오멜은 시날왕, 엘라살왕 등 주변 나라의 왕들과 연합군을 결성, 자신에게

대항하는 왕들을 징벌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돌라오멜에게 반기를 든 소돔왕, 고모라왕, 아드마왕,그리고 스브임왕과

소알왕은 연합군을 결성해 대접전을 벌였으나 역부족이었습니다. 소돔과 고

모라가 함락 되고 소돔에 거하던 아브라함의 조카 롯도 포로가 되었고 재

산가지 잃어버렸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아브라함은 자기집에서 훈련시킨 318명의 군사를 데리고

단으로 내려가 그돌라오멜의 연합군을 밤중에 기습을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대승을 거두고 조카 롯과 그 재물들을 되찾았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던 살렘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

와 아브라함을 축복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이 얻은 것에서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습니다.

 

그러자 소돔왕이 아브라함에게 "사람은 내게 보내고 물품은 네가 취하라

"(창 14:21)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아브라함은 '천지의 주재시요 지

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야훼께 내가 손을 들어 맹세하노니 네 말이 내가 아

브람으로 치부케 하였다 할까 하여 내게 속한 것은 무론한 실이나 신들메라

도 내가 취하지 아니하리라"(창 14:22-23) 고 단호히 거절을 했습니다.

 

그후에 야웨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라함에게 임했습니다. "아브람아 두

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창 15:1).

 

1. 멜기세덱은 누구인가?

 

히브리서 7장 1-6절에는 멜기세덱에게 관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여러 임

금을 쳐서 죽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복을 빈 자라 아브라함이 일체

십분의 일을 그에게 나눠 주니라 그 이름을 번역한즉 첫째 의의 왕이요 또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

한 날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

고 하나님 아들과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이 사람의 어떻게 높은 것을 생

각하라 조상 아브라함이 노략물 중 좋은 것으로 십분의 일을 저에게 주었느

니라 레위의 아들들 가운데 제사장의 직분을 받는 자들이 율법을 좇아 아브

라함의 허리에서 난 자라도 자기 형제인 백성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라는

명령을 가졌으나 레위 족보에 들지 아니한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에게 십분의

일을 취하고 그 약속 얻은 자를 위하여 복을 빌었나니"

 

히브리서의 기자는 멜기세덱을 하나님의 아들과 방불한 제사장이라 기록하

고 있습니다. 이말은 멜기세덱이 예수 그리스도의 상징이라는 뜻입니다.

 

또한 아브라함이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올 때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살

 

 

 

렘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와서 그를 축복해 주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이 십자가에서 흘린 피와 찢긴 몸을

가지고 우리들을 영접하시고 모든 죄악과 질병, 저주와 절망과 죽음에서 우

리를 해방시켜 주시는 놀라운 축복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찢겨진 몸을 먹고 흘리신 피를 마심으로 예수님과 새로

운 언약의 관계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 언약을 바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사함과 의롭다함을 얻고 영생을 축복으로 받는 언약이요, 예수 그리스도

를 통해 사람과 화목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늘나라를 상숙 받는 언약

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사랑이 부어지고 성령이 임해 성결의 역사가 일어나

는 축복의 언약인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그냥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

리스도의 피를 가지고 언약을 맺은 것입니다. 피의 언약은 절대로 깨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그리스도의 몸이 찢기고 흘리신 피의 대

가로 영원한 언약을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마

음에 담대함과 소망을 갖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언약하셨으니 그 언약을 우리가 먹고 마시고 받아들인 이상 하나님은 그 언

약을 깨뜨리지 않습니다.

 

창세기 14장 19-20절에는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장면이 나옵니

다.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

님이여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옵소서 너의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

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 일을 멜기

세덱에게 주었더라"(창 14:19-20).

 

오늘날 우리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살을 먹고 피를 마시

며 하나님과 구원의 언약을 맺은 우리들을 축복하십니다. 우리의 영혼이 잘

됨같이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축복에 대해 하나님 앞에 십일조를 드리으로 그 언약을 받았다

는 반응을 보여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의 축복을 받은 후 십분의

일을 드렸던 것처럼 말입니다.

 

2. 십일조와 아브라함의 신앙고백

 

살렘왕, 의의왕 그리고 평강의 왕인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에게 떡과 포도주

를 주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하자 아브라함은 그 축복을

받았다는 증거로 그에게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그것에 축복에 대한 믿음의

행위적인 계약이었습니다.

 

십일조라는 것은 내도 좋고 안내도 좋은 자율계약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절대적인 계약인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떡과 포

도주를 먹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때 그 축복이 내것이라는 확실한 증거로

서 십일조를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일조를 드리지 않는 신앙은 하나님과의 축복의 계약 속에 들어

가지 않은 신앙인 것입니다. 영혼의 구원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받지만 범사의 축복은 우리가 하나님과의 계약조건을 이행하 띵때

받는 것입니다. 그 계약의 증거는 십일조입니다.

 

또한 십일조는 하나님께서 온 우주의 창조주이시며 모든 것의 주인이신 것

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을 지으시고,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지으시고 만유를 소유하시는 지극히 크신 하나님 앞에 우

 

 

 

리에게 맡겨주신 물질을 온당히 관리하겠다는 고백인 것입니다. 그리고 우

리의 삶을 하나님의 충성스러운 종으로 잘 관리하겠다는 증거이기도 합니

다.

 

십일조는 감사의 표시이기도 합니다. 멜기세덱의 축복에 감격한 아브라함

은 축복에 대한 감사로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

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와 사랑에 감격해 기쁜 마음으로 십일조를 감

사의 표시로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십일조는 하나님에 대한 확실한 신앙의 선언인 것입니다. 소

돔왕은 아브라함에게 백성들은 모두 돌려주되 재물은 모두 취하라고 했습니

다. 그때 아브라함은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야웨께서 내

가 손을 들어 맹세하노니 네 말이 내가 아브람으로 치부케 하였다 할까하여

네게 속한 것은 물론 한 실이나 신들메라도 내가 취하지 아니하리라"(창

14:22-23) 고 고백했습니다. 그것은 축복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것이지

세상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는 고백이며 하나님만을 의지하지 인간적인 재산

을 의지하지 않겠다는 강한 신앙고백인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아브라함의 신앙고백을 통해 십일조에 대한 분명한 태도

를 배워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십일조를 멜기세덱에게 주었습니다. 우리들

은 예수님께서 십일조를 드려야 합니다. 그런데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

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의 십일조의 신앙고백은 교회를 통해 드리고져

합니다. 자선단체나 개인단체 등에 드려서는 안됩니다. 그런 곳에는 십일조

외에 다른 물질로 후원해야 되는 것입니다.

 

멜기세덱은 의의 왕이요, 평강의 왕이며 시작도 끝도 없는 인물로서 하나

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성도들은 각각의 지체들입니다. 따라서 우리들은 십일조를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 교회에서든지 십일조를 내면 되지 않겠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믿음의 행위인 십일조는 자신이

성찬을 받는 곳에 드려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피를 마시고 몸을 먹는 그곳

에 믿음의 고백을 보여야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떡과 포

도주, 즉 성찬을 받고난 후에 십일조를 드린 것과 같습니다.

 

어느 교회이든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러나 내가 어디에서 떡과

포도주를 받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깨어진 몸을 먹고 흘

리신 피를 마시고 그리스도의 용서의 언약과 성령충만의 언약을 받는 곳에

십일조를 드려야 합니다. 또한 치료의 약속과 아브라함의 축복의 언약과 그

리스도의 재림과 부활,영생천국의 언약을 받은 그곳에 우리는 십일조를 심

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십일조라는 것은 우리의 참된 신앙의 선언입니다. 아브라함이 소돔

과 고모라왕 앞에서 신앙을 선언한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그

리고 참소하는 사람앞에서 우리의 신앙고백을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물질이 있는 곳에 우리의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

은 또한 "집 하인이 두 주이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

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겸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 하나님과 재

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눅 16:13)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는 천지의 주재시며 하나님은 소유하시고

내 모든 물질도 소유하시며 나에게 복을 주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고백하는

행위로 십일조를 드리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소돔왕의 제의에도 불구하고 한 실과 신들메라고 취하지 않겠

다는 결단은 담대한 신앙고백인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먹고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시며 어디서 살까?를 걱정하

지 않고 '하나님이 함께 계시니 능치 못할 일이 없다' '하나님이 돌봐주신

다''나는 사람을 의지하지 않겠다'는 믿음의 고백을 할때 하나님께서 기뻐

하시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응답

 

창세기 15장 1절에는 "이후에 야웨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며

가라사대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을 사는나 사람들은 모두 두려움을 가지고 삽니다. 원래 인간이 창

조되었을 때는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에덴동산에 살던 아담과 하와에게는

하나님이 항상 함께 계셨고 모든 것이 예비되어 있었기 때문에 두려움이 전

혀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이 금지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고 하나님께 범죄한 후에 두려움이 그들 속에 들어왔습니다. 아담과 하

와는 범죄 후 벌거벗은 것을 알고 무화과 나뭇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입었습

니다. 그때 동산을 거니시던 야웨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하와는 하

나님의 낯을 피해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부르셨습니다.아담은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창 3:10) 라고 대답했습니

다. 하나님을 반역한 후 두려움이 인간세계에 들어온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계시면 두려움이 없고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

를 대적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 앞에 범죄행위는 두려움을 몰고

옵니다.

 

우리의 삶 속에 두려움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려면 하나님과 온전히 동행하

여 주의 뜻대로 순종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런 삶을 살때 마귀가 우리를 괴

롭혀도 두렵지 않습니다. 병도 두렵지 않습니다. 가난과 불행도 두렵지 않

습니다. 사망과 음부의 권세도 두렵지 않습니다. 우리 삶의 근원이신 하나

님 함계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면 우리의 마음 속에 기쁨과 평안이 넘치고 두

려움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

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 "두 세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20) 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다 가지신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데 우리가

가삼을 펼치고 강하고 담대하게 주를 믿고 나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에게 두려움이 엄습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신앙의 계약 상태에

들어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아브라함처럼 우리의 멜기세덱

이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떡과 포도주인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언약을 맺

은 관계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 언약 맺은 사람으로서의 충실한 신앙의

고백으로 십일조를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에 세상을 의지하지 않는다는 고백과 하

나님께서 우리의 방패요, 상급이 되신다는 신앙고백을 통해 두려움을 내어

쫓아야 합니다.

 

시편 91편 1절로 12절은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는 전능하신 자

의 그늘 아래 거하리로다 내가 야웨를 가리켜 말하기를 저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나의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 이는 저가 너를 새 사냥꾼의

올무에서와 극한 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 저가 너를 그 깃으로 덮으시

리니 네가 그 날개 아래 피하리로다 그의 진실함은 방패와 손 방패가 되나

니 너는 밤에 놀램과 낮에 흐르는 살고 흑암 중에 행하는 염병과 백주에 황

폐케 하는 파멸을 두려워 아니하리로다 천인이 네 곁에서 만인이 네 우편에

서 엎드러지나 이 재앙이 내게 가까이 못하리로다 오직 너는 목도하리니 악

인의 보응이 네게 보이리로다 네가 말하기를 야웨는 나의 피난처시라 하고

지존자로 거처를 삼았으므로 화가 네게 미치지 못하며 재앙이 네 장막에 가

까이 오지 못하리니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네 모든 길에 너

를 짖니게 하심이라 저희 그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이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방패가 되시면 이런 어마어마한 능력이 우리와 함께 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십일조를

통해 하나님과의 확실한 약속 속에 들어가 주님의 은총과 사랑의 본을 받는

다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모릅니다.

 

하나님 편에서는 예수님을 보내셔서 그리스도의 피와 살을 우리에게 주셨

고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과 언약에 대한 응답으로서 주님께 십일조를 드림

으로 하나님과 사람이 손을 잡고 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십일조의 언약이라는 것은 너무나 중요합니

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언약에 들어 갔다는 인간쪽의 반응이며 증거이기 때

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자신이"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창 15:1)

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선물만을 구하지 말고 선물을 주시는 사람을 구

하면 모든 선물이 우리의 것이 됩니다.

 

신명기 28장1절로 14절을 '네가 네 하나님 야웨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야웨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네가 네 하나님 야웨의 말쓰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

끼와 우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네 광주리의 떡반죽 그릇이 복을 받

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네 대적들

이 일어나 너를 치려 하면 야웨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패하기 하시리니 그

들이 한 길로 너를 치러 들어왔으나 네 앞에서 일곱길로 도망하리라 야웨께

서 명하사 네 창고와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리시고 네 하나님 야웨

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이며 네가 네 하나님 야웨의 명

령을 지켜 그 길로 행하면 야웨께서 네게 맹세하신 대로 너를 세워 자기의

성민이 되게 하시리니 너를 야웨께서 네게 주리라고 네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에서 네게 복을 주사 네 몸과 소생과 육축의 새끼와 토지의 소산으로 많

게 하시며 야웨께서 너를 위하여 하늘의 아름다운 보고를 열으사 네 땅에

때를 따라 비를 내리시고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볼을 주시리니 네가 많

은 민족에게 꾸어줄지라도 너는 꾸지 아니할 것이요 야웨께서 너로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며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게 하시리니 오

직 너는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네 하나님 야웨의 명령을 듣고 지켜 행하

며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그 말씀을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고 다른 신을 따라 섬기지 아니하면 이와 같으리라"고 기록하고 있습

니다.

 

정말 어마어마한 축복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자신과 언약 맺은 백성들을

위해 상급이 되어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약속대로 아

브라함을 창대하게 만들고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시고 온 세계 만민의 믿음의

조상이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들도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은 아브라함의 복

을 받습니다. 이제 우리의 방패가 되시고 상급이 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긍정적이고 적극적이며 생산적이고 창조적인 꿈과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8

제목 : 내 아버지 집

자료원 : 조용기목사 여의도순복음교회

발행일 : 95년 02월 26일

 

인간에게 있어서 최대의 관심사는 자기의 있을 곳을 확보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근본적으로 있을 곳은 바로 이 육체입니다. 육체가 병들고 무너지

면 우리의 삶은 처소를 잃어버리고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있을 곳은 육신이 거할 집입니다. 그것이 개인 소유든 전세집이

든 삭월세집이든 월세집이든 몸둘 곳이 있어야 됩니다. 집이 있어야 추위와

더위를 피하고 삶을 꾸려나갈 수 있는 처소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사회 속에서 생존할 수 있는 사회내에서의 있을 곳이 우리는 필요합니다.

즉 생계를 이어갈 수 있는, 또 인간대 인간의 교제를 나눌 수 있는 곳이 우

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인간의 인생은 이와같이 있을 곳을 얻기 위한 부단한 노력과 있을 곳을 지

키기 위한 몸부림과 있을 곳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이러한 속에

서 지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월의 흐름은 인간의 이 모든 노력을 순식

간에 다 가져가 버리고 맙니다.

인간이 그 누구나 당해야만 할 죽음은 지상에서 인간의 있을 곳을 영원히

빼앗가 가버리고 맙니다.

 

그러면 죽음 저 건너편에 있을 곳은 어떤 곳일까요? 죽음이 인간에게 최대

의 공포가 되는 것은 죽음을 통하여 지상에 가지고 있는 일체의 모든 것을

다 빼앗아 가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오셔서 이

문제에 관해서 명쾌하게 해답을 주셨습니다.

 

1. 네 아버지집에 있을 곳이 많도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믿

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에게 일

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1-2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예수님께서는 천국은 확실한 장소개념인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막연하게 죽으면 구름같이 영혼이 떠돌아 다니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 우리가 있을 집이 있는 것처럼 아버지께서 예비한 환경적인 그런 장소

가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 선생께서도 셋째 하늘에 올라갔다 내려와서 이런 간증을 했습니다.

고린도후서 12장1절로 4절에는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십사년

전에 그가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

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라고기록되

어 있습니다.

 

오늘날 신학자들은 대개 동의하기를 바울 선생이 셋째 하늘에 올라간 것은

루스드라에서 복음을 증거하다가 원수들에게 잡혀서 돌로 얻어맞아 죽은 것

이 확인되매 그들이 바울의 시체를 끌어다가 거름더미에 던졌버렸스빈다.

시외각지 거름더미에 바울을 던져 놓았는데 바울의 제자들이 함께 서서 기

도할 때 바울이 살아났습니다. 그래서 셋째 하늘에 올라갔다가 내려왔지 않

겠나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선생께서는 그가 간 곳이

분명한 처소인 셋째 하늘이라고 말했습니다.

첫째 하늘은 대기층을 말합니다. 둘째,하늘은 우주 공간을 말합니다. 그럼

셋째 하늘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예비한 영원한 천국을 의미하

고 있습니다. 바울 선생은 체험한 첫째 하늘인 대기층과 우주 공간인 둘째

하늘을 지나서 셋째 하늘인 영원 무궁한 우리 아버지의 처소에 들어가서 낙

원에서 그는 도저히 사람의 말로써는 표현이 안되는 그런 아름다운 장면을

보고 왔다가고 그는 말했습니다.

 

그는 천국에 올라갔을 때 몸으로 올라갔는지 몸밖에 나가서 영혼이 올라갔

는지 도무지 구분이 안된다는 것입니다. 몸으로 갔는지 영으로 갔는지 하나

님만 아시지 자기는 도무지 구분을 할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 사실을

통해서 바울 선생은 이 세상에 우리가 오감각을 통해서 체험하고 보고 아는

이 세상과 천국에 올라가서 그가 체험한 것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는 것이빈

다.

 

또한 사도 요한은 밧모섬에서 유배생활을 할 때 천국에 올라갔습니다. 요

한계시록 4장1절로 11절은 사도요한은 천국체험 모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모습을 "벽옥 같고 홍보석 같고 또 무지개가 있어 보좌에 둘

렀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 같더라"(요한계시록4:3) 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 홍보석이란 것은 바로 보혈을 통해서 인류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 벽옥이란 것은 푸른 것을 살리는 생명을 의미하기도 합니

다.

 

그는 또한 보좌를 굴러싼 무지개를 보았습니다. 무지개는 언약을 말합니

다. 노아의 홍수 이후에 하나님이 무지개로써 다시 이 땅을 홍수로 멸하지

않을 것을 약속하신 것처럼 아버지 보좌 주위에 녹보석의 그런 무지개가 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영원히 사망을 폐하시고 이제 하늘나라에 들

어온 사람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주실 것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보좌 주위에 이십사 보좌가 있고 거기에 이십사 장로가

흰옷을 입고 머리에 금면류관을 쓰고 있습니다. 구약의 열두 지파의 대표와

신약의 열두 사도 24장로가 오늘 구원받은 온 인류들을 대표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금면류관을 쓰고 흰옷을 입고 아버지 보좌 주위에 앉아 있었습니

다. 그리고 보좌 앞에는 일곱 등불이 있는데 이것은 온 세상에 보내는 하나

님의 성령을 상징해 놓았습니다. 그리고 보좌 앞과 가운데와 주위에는 수정

같은 유리 바다가 있고 그 가운데 주위에는 네 생물이 있습니다. 이는 하나

님의 보좌를 지키는 천사인 것입니다.

 

이 네 생물은 그 얼굴이 하나는 사자같고 하나는 송아지같고 하나는 사람

같고 하나는 독수리같았습니다. 그런데 그 보좌주위에서 이제 천국의 예배

장면을 보았습니다. 하늘나라는 하나님 보좌가 중심이고 그리고 하늘나라는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으로 모두 삶이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4장 8절로 11절에는 "네 생물이 각각 여섯 날개가 있고 그 안

과 주위에 눈이 가득하더라. 그들이 밤낮 쉬지않고 이르기를 거룩하다 거룩

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자라하고 그 생물들이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보좌에 앉으사 세세

토록 사시는 이에게 돌릴 때 이집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

려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며 가

로되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앗나

이다 하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와같이 하늘나라는 분명한 장소가 있습니다. 이 대기권과 저 우주공간으

리 지나 셋째 하늘에 하나님이 세우신 영원한 나라가 있습니다. 바로 예수

님은 그곳에서 우리에게 오셨고 또 그곳에 갈 길을 주님께서 에배하신 것입

니다.

 

2. 천국 낙원의 모습

 

고린도후서 12장 14절에 사도바울은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라고 고백하고 있

습니다. 그는 인간의 언어로써는 도저히 하늘나라에 있는 낙원의 그 영광스

러움과 아름다움을 표현할 수가 없어서 단지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

이로다"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빌립보서 1장 23절에서 사도바울은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그 마음속에 이 세상에 사는 것보

다는 떠나서 낙원에 가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더욱 좋다고 그

렇게 사모하며 살았습니다.

 

또한 요한이 본 천국의 낙원은 요한계시록 21장 1절로 2절에 분명히 나타

나 있습니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

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

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

장한 것 같더라"

 

저는 결혼 주례를 할 때마다 웨딩드레스 입고 아버지 손에 인도되어 들어

오는 신부를 제가 가만히 바라봅니다. 항상 신부들의 아름다운 모습에 감탄

을 합니다. 그 머리며 모습을 일생에 가장 아름답게 단장을 했기 때문에 얼

마나 이쁜지 모릅니다. 요한은 우리가 가서 살 새 예루살렘의 모습을 신부

가 신랑을 위해서 단장한 것 같은 아름다운 모습 그 이상으로 표현하고 있

습니다.

 

이 새 예루살렘성의 모습은 요한계시록 21장 11절로 22장 3절에 잘 기록되

어 있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그 성안에 거하십니다. 부활해서 그리스도의 신부로 올

라간 모든 성도들이 그 예루살렘 성에서 하나님과 함께 살게 될 것입니다.

그곳은 하나님과 예수님을 통해서 광명이 되어 나오기 때문에 해와 달과 별

이 필요가 없고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에 밤낮 영광 속에

밝아서 밤이 없습니다. 낮만 계속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보니까 하나님 아

버지가 계시니 그 보좌에 예수님이 계신 그 보좌로부터 물이 사통팔방 모든

금길 가운데로 물이 넘실 넘실 흘러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에 이 물의 이

름은 생명강입니다.

 

그 좌우에는 나무들이 무성하게 자라있는데 거기에 열두달 매달마다 과실

이 맺힙니다. 그래서 천국에 있는 성도들이 와서 마음대로 그 과실을 따먹

고 즐기고 그렇게 하기 위한것입니다. 저주란 그곳에 있지를 않습니다. 하

나님께서는 천국의 모습을 뚜렷하게 우리에게 계시해 주셔서 천국은 막연한

꿈같은 처소가 아니라 이 땅에 사는 우리 현실처럼 감각적으로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냄새맡을 수 있고 맛볼 수 있고 손으로 체험할 수 있고 그곳

에서 우리 자신을 확인할 수 있는 곳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3. 천국 낙원의 생활

 

누가 낙원에 들어가서 살고 있습니까? 구약시대 성도들이 그곳에 들어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에 죽음을 믿지 않는 사람은 아래층

음부에서로 불꽃 가운데 고생하면서 영원한 심판을 기다리고 있으며 하나님

을 믿고 구약시대에 짐승의 피로써 언약을 맺은 이러한 사람들은 아브라함

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낙원에 들어가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성도가 죽으면 어떻게 됩니까? 누가복음 9장 28절로 30절에는

"이 말씀을 하신 후 팔일 쯤 되어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

시고 기도하시러 산이 올라가서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

어져 광채가 나더라 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

야라" 누가복음 9:28-30 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변화산상에서 올라가셔서 기도하실 때 그 모습이 달라지고 옷

이 빨래한 흰옷같이 희어졌는데 그때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보니까

1500여년 전에 느보산에서 죽은 모세와 근 600년에서 1000년전에 물수레를

타고 하늘로 올라간 엘리야가 뚜렷이 살아서 그곳에 와서 주님 앞에 주님이

예루살렘 성에 가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실 것을 전해주고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여러분 1500여년 전에 이미 죽은 모세와 600년에서 1000년 사이에

간 엘리야가 잠을 자고 있었느냐 아닙니다. 그들은 뚜렷이 살아서 하나님의

사명을 받고 와서 예수님께 보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가 지

금 이 땅에서 육신의 장막집을 벗어버리면 잠을 자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직행으로 천국 낙원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1절에 보면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집 곧 손으로 지은 것

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을 아나니"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8절

로 9절에 바울은 말하기를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그런즉 우리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바울이 진정으로 원한 것은 이몸을 떠나서 주님과

함께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몸을 떠나서 무덤 속에 잠잔다고 말하지

아니하고 몸을 떠나서 주와 함께 있을 것이 더 좋다고 그렇게 말한 것입니

다. 그래서 천국에는 예수님을 믿다가 죽어서 육신의 장막집을 버리고 올라

간 사람들이 그곳에 있습니다.

 

그리고 최후에는 부활한 성도들이 그곳에 다 모이는 것입니다. 데살로니전

서 4장 15절로 18절에"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단코 앞서서 못하

리라.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후에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우리는 서로 위로할 수 있는 것

은 우리의 현실의 죽음은 잠시동안 헤어지는 것이고 며칠후 우리는 다같이

천국 낙원에서 만나든지 부활해서 공중에서 만나든지 만나게 되는 것입니

다. 낙원의 생활은 우리가 전부 부활의 모습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부활의 모습이란 이 약한 몸이 강한 몸으로 병든 몸이 강한 몸으로 추한

몸이 영화로운 몸으로, 육의 몸이 신령한 몸으로, 늙은 몸이 젊은 몸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곳에 사는 그 모습은 어떤 것이냐, 요한계시

록 21장 4절로 7절에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

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 보라, 내가 만물을 새

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가라사대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오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니 내

가 생명수 샘물로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이는 이기는 자는 이것을

유업으로 얻으리라.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할렐루야! 그래서 그곳에는 다시 눈물이 없습니다. 울 필요가 없습니다.

 

 

 

아픈 것이 없고 곡하는 것이 없고 죽는 것이 없고 배고픈 것이 없고 생명수

샘물로 날로 더 생명이 넘치고 하나님이 친아버지가 되시고 우리는 아버지

의 친아들이 되어서 아버지와 매일 같이 살고 매일 아버지의 얼굴을 쳐다보

고 매일 아버지와 함께 사니 이야말로 믿음 소망 사랑이 넘치고 기쁨이 충

천하는 그러한 곳에서 우리가 실제적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낙원의 인간관계를 보면, 하늘나라에 올라가면 죽고난 다음이니까

부모 형제 다 알아 보겠나? 그렇게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 성

경에 보면 음부에 내려간 부자가 아브라함에게 뭐라고 말했습니까? 나사로

를 이 세상에 보내어서 내 형제 다섯이 있는데 그들에게 전달해서 이곳에

오지 않게 좀 해주십시오. 죽은 사람도 세상에 있는 자가 형제를 기억하고

자기 형제는 음부에 오지 않도록 건져달라고 호소한 적이 있는 것입니다.

하물며 낙원에 들어가서 어떻게 부모 형제를 몰라보겠습니까. 그러므로 낙

원에 올라가서라도 여러분 부모형제의 그 정은 그대로 계속되는 것입니다.

내 부모요, 내 형제요, 그 가정은 그대로 계속하는 것입니다.

 

오직 천국에서 사라지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지상의 부부의 인연은 사라

집니다. 부부의 관계라는 것은 이땅에서 살동안만 존속하는 것입니다. 이렇

기 때문에 성경에 하나님께서 남녀를 만드시고 "남자가 그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 2:2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육체가 살아있을 동안에 서로 같이 있지, 마음은 같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육체가 사라지면 그 속사람은 완전히 육체와 생활에서 벗어나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예비한 그 낙원에 들어가서 영원히 살아갈 후보자로서 이

땅을 행인과 나그네와 같이 지나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천국 낙원에 들

어가는 길이 되시기 위해서 이땅에 오셨습니다.수많은 사람들이 어디서 와

서 어디로 가는 줄을 모르고 이땅에서 이전투구를 하면서 지위,명예,권세,

부귀,영화,공명만을 얻으려고 발버둥을 치다가 떨어진 낙엽같이 심판의 바

람에 휘말려 지옥으로 가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택하심을 입어서 예수

님을 믿고 천국들어갈 후보생이 되어서 매일매일 그 나라를 향해서 나갈 수

있으니 얼마나 감사합니까.그러므로 여러분 이땅에서 봇짐을 싸고 외국으로

이민가듯이 우리들은 죽음이 다가올 때 이 삶의 모든 것을 청산하고 주님께

서 우리를 위해서 예비하신 영원한 우리 아버지의 집으로 가게 되는 것입니

다. 그러므로 조금도 흔들리지 말고 마음에 불안을 가지지 마십시오. 우리

에겐 영원히 있을 곳이 있습니다. 그날을 기다리며 그곳을 바라보며 수를

위하여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9

제목 : 환난이 가르쳐주는 교훈

자료원 : 조용기목사 여의도순복음교회

발행일 : 95년 02월 19일

 

우리의 삶이 평안할 때는 인생을 깊이 생각하지 않습니다. 평안에 취해서

하루하루를 즐겁게 살다가 먹고 마시는 현실의 삶에 안주하게 됩니다. 그러

나 환난과 폭풍이 우리 삶속에 다가오면 지나온 삶의 여정을 살피면서 "내

가 무엇을 잘못 살았나"라고 생각하며 회개의 기회로 삼기도 합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은 환난이 얼마나 인생을 깊이 생각하게 만들고 인간의

삶의 방향을 변화시키는가를 우리에게 절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1. 로마로 가는 알렉산드리아 배

 

사도바울선생이 예루살렘에서 복음을 증거하다 붙잡혀서 로마로 압송을 당

하여 그곳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로마로가는 알렉산드

리아라는 배에 백부장 율리오와 함께 승선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데 그 배가 그레데 미항에서 머물렀을때 사도바울선생은 백부장 율리

오와 선장과 선주를 불러놓고 이렇게 간곡히 부탁했습니다. "여러분이여 내

가보니 이번 행선이 하물과 배만 아니라 우리 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가

있으리라"(사도행전 27:10). 그래도 이 백부장 율리오는 바울선생이 주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계시적인 지식보다는 현재의 선주와 선장과 항해 경험

이 많은 그런 사람들의 말에 더 귀를 기울였습니다.

 

사도행전 27장11절로 12절은 "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더라. 그 항구가 과동사기에 불편하므로 거기서 떠나 아무쪼록 뵈닉스

에 가서 과동하자 하는 자가 더 많드니 뵈닉스는 그레데 항구라 한편은 동

북을 한편은 동남을 향하였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삶 속에 언제나 갈등이 생기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계시적인 지식이 있는가 하면 인간의 감각과 체험과 이성을 통해서 얻는 지

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땅에 살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계시로 주시는 지식보다는 인간의 감각으나 체험이나 인간의 이성으로 얻은

지식을 더 믿고 그것을 따라 갑니다. 그러나 인간의 모든 감각이나 체험이

나 이성으로 얻은 지식은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알파요 오메가가 되시며 처음고 나중이 되시고 시작과 끝이 되시는

하나님은 영원에서 영원까지 보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계시적인 지식을 내

어 던져버리고 인간의 감각적이고 이성적인 지식에만 의지해서 사는 사람은

언제고 파탄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백부장 율리오는 선장과 선주의 말을 더 듣고 바울의 계시적인 지식을 멸

시해 버리고 닻을 끌어 올리고 돛을 높이 달고 출항했습니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아니하여 유라굴라로라는 거대한 폭풍우가 다가와서 배를 때리매 순식

간에 배는 풍랑에 밀리어서 자기의 가는 방향대로 가지 못하고 배를 조정할

수 없는 그런 상황 속에 서게 된 것입니다.

 

인간이 아무리 감각과 지식과 이성을 통해서 모든 것을 안다고 판단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계시적인 지식에 저항해서 나가면 언제나 유라굴라로의 풍

랑이 다가오고 인간의 감각적인 이성적인 지식은 휴지조각같이 구겨져 버리

고 마는 것입니다.

 

오늘날 세계 역사를 보십시오. 막스 레닌이 소련을 세우고 온 세계를 공산

화하겠다고 꿈을 꾸고 혁명을 일으켜서 70년동안 세계를 위협했지만 경제적

인 유라굴라로라는 거대한 풍랑을 만나자 세계 핵강대국이었던 소련이 순식

간에 무너져 버리고 만 것입니다. 일본도 보십시오. 세계의 무역대국으로

그들은 전후에 미국이 방위를 대신 맡아주는 방위무임 승차를 타고 그들은

승승장구하여 경제부흥을 하고 세계적인 경제대국이 되었다고 교만하게 머

리를 흔들었지만 하나님께서 순식간에 고베의 참사를 보냄으로 말미암아 그

들의 경제적인 바탕이 뒤흔들리고 수많은 사람이 상해를 입고 그들의 도시

가 초토화된 것을 우리가 분명히 보고 있습니다.

 

인간의 지혜나 지식이나 총명이나 이성이라는 것은 하나님과 비길 수 있는

도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시적인 지식에 순종하며 사는 삶만이 평안을

가져옵니다. 인간의 거만한 지식이나 이성적 체험은 파멸을 향해 달려가게

할 뿐입니다.

 

성경은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

아 가임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데살로니가전서

4:16-17)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때가 다가오면 처처에 기근과 질

병이 있고 전쟁과 전쟁 소문이 날 것이라고 성경은 계시하고 있습니다. 이

와같은 상황이 오늘날 우리는 온 세계에 다가와서 불안하고 초조하기 짝이

없습니다.

 

오늘날의 사람들은 언제 어떠한 돌발 사고가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에 불안

과 초조속에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세계의 자연환경은 그리스도의

강림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기근과 지진, 홍수와 한발 등 기상이변이 속출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시적인 지식을 받지 않은 육에 속한 사

람들은 이와같은 자연환경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역사적인 환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계시해주고

있는 사실 또한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2. 고난은 보석과 돌을 가립니다.

 

사람들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부귀나 영화나 공명이나 지위나 명예나

권세를 구하고 사는데 유라굴로의 풍랑이 다가와서 세계가 흔들리고 흔들리

며 깨어지는 그때는 인간의 모든 육신적인 소망은 사라져 버리고 말 것이빈

다. 인간은 그 끔이 산산조각 깨어지고 그 계획이 아무것도 아닌 것같이

되어지는 날을 체험하게 될 곳입니다.

 

바로 바울선생과 함께 배르타고 가던 백부장 율리오도 이 계시적인 지식을

무시하고 인간의 감정적인 지식에 의지했다가 그와 함께 선장과 선주와 수

많은 사람들이 절망적인 고통 속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같은

고난은 우리의 삶을 분별하는 도구가 됩니다. 우리의 삶이 금이나 은이나

보석같이 되었는가.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삶이 나무나 풀이나 짚같은 인생

을 살았는가? 사람이 시험과 환난을 통하면 그 속에 무엇이 있는지 붐녕히

나타납니다. 금이나 은이나 보석은 시험과 환난을 이길 것이요,나무나 짚이

나 풀은 다 시험과 환난을 통해서 불 타버리고 말 것입니다.

 

바울은 이 어려운 고난 속에서 그는 담대하게 자기 신앙고백을 했습니다.

바람이 불고 파도가 치고 돛은 이미 부러져 버리고 닻은 던져버리고 배는

난파와 형태로 물에 떠서 이러 출렁 저리 출렁 말려가고 있는데 사람들은

살 희망을 다 잃어버리고 죽음의 그 순간을 기다릴 때 사도 바울선생은 강

하고 담대하게 신앙을 고백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27장21절로 23절에는 "여러 사람이 오래 먹지 못하였으매 바울이

가운데 서서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 타격과 손상을 면하였더라면 좋을 뻔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 뿐이리라.

나의 속한 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잠에 내 곁에 서서 마

랗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 세상 속에 있으면 세상은 풍랑이 일어나고 파도가 일어나면

두려워 떱니다. 그러나 바울선생이 그 거센바람과 폭풍우와 풍랑 속에 일어

나서 담대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는 그 바람과 그 풍랑과 그 바다와 그

어두운 하늘에 속해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는 "나의 속한 바"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이것은 사도바울 자신은 세상사람들과 다른 곳에 속해 있다는 말

인 것입니다.

 

원래 인간은 아담 때부터 하나님께 속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담이 하나

님을 반역하고 하나님 없이 인본주의로 자기 스스로 살겠다고 에덴을 뛰쳐

나온 이후로 인간은 소속을 잃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인간은 이땅에서 고아

가 되고 말았습니다. 어디서 와서 왜 살며 어디로 가는지를 알지 못하는 방

랑자가 되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2천년 전에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셔서

아담으로 부터 지은 모든 인류의 죄악을 예수님께서 모두 감당하시도록 십

자가에 내어 놓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박혀 몸을 찢고 피를

흘리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악을 다 속하여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하며 하나님께로부터 독립을 선

포하고 나가버린 소속 잃어버린 사람들이라도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게 되면

하나님에게 소속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늘과 땅을 지으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영생을 얻게 되고 성령과 함께 살게되며 그 이름이 하늘나라 생명책에

기록되는 것입니다.

 

성경 요한1서 5장 19절에 "또 아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

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며"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온 세상은 아담

과 하와 이후로 악한 자에게 속해 버렸습니다. 원수 마귀가 세상의 신이 되

고 세상 임금이 되어서 사람들을 죄의 수렁에 빠뜨리고 그들이 삶 속에서

육신의 종이 되어서 살아가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 흑암의 권세에

서 건져내사 하나님의 사랑의 아들나라로 옮겨졌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

가의 그 보배로운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기쁘게 용납해 주시

고 그 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가 화목되고 하나님이 성령을 보내셔서 하나

님의 사랑을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되었으며 하나님의 은혜로서 우리를 붙잡

아 주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또 바울은 "나의 섬기는 하나님"(사도행전 27:23)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돈을 섬기고 지위와 명예를 섬깁니다. 부귀와 영

화를 섬기고 자기의 쾌락을 섬기며 인간을 섬기고 인본주의를 섬깁니다. 그

러나 바울선생은 마음의 중심이 하나님께서 있고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고 살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섬겼다는 것은 항상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려고 애를 쓰

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면서 살려고 애를 쓰고 기도하는

중에 성령께서 그 마음에 감화감동하시고 인도하시면 만사를 제껴놓고라도

성령의 감화와 감동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살려고 그는 노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귀중한 것도 이것입니다. 내가 이 땅에 속하지 아니하고 하

 

 

 

나님께 속하고 나의 삶이 하나님을 섬기고 산다는 이와같은 확실한 신앙고

백을 가진다는 것은 얼마나 귀중한지 모릅니다. 하나님께 속하고 하나님을

섬기고 살면 하나님은 이 사람을 책임져 주시는 것입니다. 이 사람을 환난

이나 곤고나 적신이나 가난이나 어떠한 위험 속에서도 하나님의 자기에게

속하고 자기를 섬기는 백성을 위해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고 일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속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고난과 환난이 다가올수록 더 신

앙이 굳어지고 더 기도가 뜨거워지고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늘에 소망

을 두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본주의와 세상에 속한 사람은 죄와 마귀

를 섬기고 육체의 욕심과 세상의 쾌략을 좇아 살며 이 세상 일과 자랑에 취

해서 살므로 이 세상 것이 지나가는 때에는 아무것도 소유한 것이 없게 되

는 것입니다. 그러나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 속하고 주야로 하나님을 섬

기며 사는 사람은 어떠한 고난에도 의연하게 대처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계획과 우리의 삶

 

사도행전 27장 24절로 25절은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

을 믿노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무리 풀앙이 일어나도 하나님이

사도바울 자신을 향해 세운 계획은 변함없이 그대로 이루어지고야 만다는고

백입니다. 세상은 변해도 하나님의 정하신 뜻은 절대로 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도바울선생을 택하셨을 때 그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분

명히 가지고 있으셨습니다. 사도행전 26장14절로 18절에 보면 사도 바울선

생이 다메섹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그리스도로부터 하나님의 뜻을 받는 장면

이 나옵니다. "우리가 다 땅에 엎드러지매 내가 소리를 들으니 히브리 방언

으로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가시채를 뒷

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내가 대답하되 주여 뉘시니이까 주께서 가라사

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일어나 네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사환과 증인을 사

으려 함이니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우너하여 저희에게 보

내어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

아가게 하고 죄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행 26:14-18).

 

여기에 바울선생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하나님께로부

터 사명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선생이 왜 이세상에 태어나고 지금

까지 살아왔으며 장차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분명하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 사람을 부를 때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이 있

습니다. 우리가 막연하게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우리들을 이미 아시고 예정하사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셨기 때문에

우연히 오다가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들은 하

나님의 영원한 계획 중에서 구원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들에

대한 분명한 계획과 뜻을 가지고 계십니다.

 

최근에는 제가 하나님께 엎드려 기도하면 우리 하나님께서 저에 대한 하나

님의 계획을 옛날보다 더 뚜렷하게 가르쳐 주시곤 합니다. 하나님께서 제게

말씀하시는 것은 "너는 목회자로 내가 부름을 받도록 했다.여의도순복음교

회 목사로서 너의 생명이 다하는 그날까지 말씀을 증거하고 양무리들을 위

해서 기도하며 이 교회에 나오는 모든 사람들이 영생을 얻고 천국에 올라가

도록 도우라" 또한 "나는 너를 선교 붜으사로 불렀다. 그러므로 너는 목회

 

 

 

와 함께 내가 시키는대로 온천하 만국에 나가서 복음을 증거하라"

 

저는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이제는 나이도 먹어가고 지치고 고

달프기 때문에 세계 땅끝까지 나가 복음 증거하는 것을 면하게 하여 주시옵

소서"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너는 내가 온 세상 만방

에 나가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예비한 그릇이기 때문에 너

는 선교 부흥사로서의 너의 사명을 끝까지 다해야 한다. 그리고 너를 통해

기독교 일간지를 만들어 이 메마르고 세속으로 꽉 들어찬 곳에 그리고 온

한국과 북한과 이것이 온 세계 모범으로 나타나도록 세웠으니 이 일을 하도

록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너를 세워 많은 제자를 양

성하여 온 천하에 나가서 복음을 증거하게 하였은즉 이 일을 충성스럽게 하

라. 만일 충성스럽게 하지 아니하면 내게 꾸중을 들을 것이요, 이 일을 잘

하면 칭찬과 상을 받을 것이라"고 계시로서 여러번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이처럼 여러분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분명히 있습니다. 평범한 가정주부로

서 혹은 회사원으로서 사업가로서 여러분이 산다고 생각하지만 여러분이 하

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고 가만히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면 여러분을

하나님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시고 예수님을 믿게 하시고 혹은 가정주부로

혹은 사업가로 혹은 직장인으로 하나님이 세워놓은 그 속에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계신 것입니다.

 

한달란트나 두 달란트나 다섯 달란트나, 이것은 상관할 것 없습니다. 이

달란트에 대해 얼마나 충성하고 착하게 일했는가가 문제인 것입니다.

 

바울 선생은 시험과 환난을 당했지만 하나님께서 그 풍파를 통해서 오히려

같이 배를 탄 2백76인을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큰 풍랑과 환난이 다가오면

세상 줄이 끊어집니다. 우리가 "큰 풍파 일어나는 것, 세상 줄 끊음일세"라

고 찬양하는 것처럼 큰 풍파가 일어나면 그 풍파로 말미암아 세상 줄이 하

나 둘 끊어지고 하늘나라의 광명이 마음 속에 비쳐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다가오는 시험과 환난을 통해서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되고 하나

님을 발견하게 되면 시험과 환난은 우리에게 위대한 축복이 되고 영광이 되

는 것입니다. 주안에서는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풍랑을 만날 때, 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주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며 우리가 하나님께

속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됨을 더욱 뚜렷이 확증하며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0

제목 : <기독논단> 한국교회가 하나되는 길

자료원 : 국민일보 24면 이중표

발행일 : 94년 09월 17일

 

 

◉ 화합운동 전개 이념 갈등 청산 「통일」 준비

최근 예장(통합)이 제79차총회에서 11년 동안 끌어왔던 「조다윗목사 사이

비성논쟁」을 종식하고 오순절신학을 인정하는 연구결과를 발표해 큰 관심을

끌었다. 이번 예장(통합)과 순복음의 화해로 한국 교회는 새로운 일치의 시대

를 맞게 되었다. 지금 한국교회는 분열과 갈등의 시대를 청산하고 화합과

일치를 이루어야 할 중대한 시점에 와 있다. 그것은 동서화해의 세계사의 흐

에 순응하는 것이며 민족의 희년을 준비하는 민족사적 요청인 것이다 .그러

나 돌이켜 보면 한국교회 백년의 역사는 분열을 거듭해 온 부끄러운 역사임을

부인할 수가 없다. 이제 한국교회는 민족을 위한 교회로서 사명을 완수하기

위하여 화합과 일치를 위해서 모든 대가를 지불하고 겸손하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할 것이다.

 

먼저,한국교회는 하나님의 뜻을 거역한 죄를 회개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

도는 교회가 하나되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지금까지 자신

의 교리와 신학적 입장을 가지고 소위 보수와 진보라는 이념으로 갈등을 심화

시켜 왔다. 무분별한 교파의 난립으로 집단이기주의에 사로잡혀 서로 정죄하

고 비난을 계속해 주님의 몸된 교회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혀왔다. 자기만이

복음을 독점한 듯 형제의 교회를 이단시하는 데에 「선교전력」을 낭비했다.

 

이제 통일을 준비하는 한국 교회는 더이상 분열해서는 안되며 화해와 일치

를 이루어야 할 역사적 소명을 받고 있다. 이제 한국교회는 주님의 몸을 상처

낸 죄과를 회개하고 교회의 하나됨에 노력해야 한다

.

둘째,한국교회는 서로 사랑하고 화합하는 일에 힘써야 한다. 교권을 빙자

한 신학적 명분으로 한국교회의 분열을 가져온 죄를 회개하고 지금이라도 서

로 사랑하고 일치하는 운동에 힘을 모아야 한다

.

 

주는 하나이나 신학의 학설은 다양하다. 성령은 하나이나 은사는 다양하고,

세례는 하나이나 방식은 각각 다르다. 이것 때문에 서로 정죄하고 증오할 필

요가 없다. 지금 사소한 번역 차이로 성경을 다시 출간하려고 성경공회를 출

범시키려고 하는 교단도 있다. 지금까지 번역이 미비한 개역성경으로도 한국

교회는 성장 발전하여 왔다. 그런데 또 성경을 번역한 이후에 한국교회가 분

열의 상처를 더 심화시키고 문자주의에 빠져 또 정죄와 비판을 하게 된다면

교회가 받을 피해가 얼마 나 클 것인가 두렵기만 하다.

 

언제나 교회분열 배후에는 개인의 욕심과 집단 이기주의가 도사리고있다.

우리는 이것을 위하여 겉옷을 찢는 심정이 아닌 마음을 찢는 심정으로 하나님

앞에 회개하여야 한다.

 

지금 각 교단은 총회를 하고 있다. 누가 교단장이 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이제 한국교회는 분열의 죄과를 통회하며 회개운동을 일으킬 지도자

를 찾고 있다. 이런 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온유와 겸손으로 십자

가의 멍에를 메고 따름으로 가능한 것이다. 이럴 때만이 한국교회는 온전히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교회가 될 것이다.

 

셋째,한국교회는 통일을 준비하는 민족교회가 되어야 한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민족의 문제를 도외시한 교회의 신학은 민족의 미래에 대한 어떠한

희망적인 방향도 제시하지 못한다. 이제 교회는 민족의 희년을 준비하는 신

 

 

 

학을 정립하지 않으면 안된다. 사상과 이념의 차이로 서로 증오하고 원수가

되는 이런 신학은 인류 구원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

 

따라서 한국교회는 분단의 실상과 아픔을 어느정도 교회가 앞당겨 맛보고

경험해야 한다. 하나님을 반역한 죄를 회개하고 사죄를 받음으로써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게 하는 신앙은 곧 화해와 일치를 체험케 할 것이다.

 

이제 민족의 통일을 염원하는 한국교회는 분열의 죄과를 십자가에 못박고

부활의 아침을 맞이해야 한다. 한국교회가 하나의 교단이 될 수는 없다. 그

러나 한국교회는 먼저 세계사적인 안목을 가지고 이 시대의 변화에 대처해야

한다. 지금 한국교회는 중요한 전환기에 서 있다. 한국교회는 화해와 협력을

이루어 민족 평화를 위한 교회로,그리고 세계를 위한 교회가 되어야 한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