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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누가복음 12장32-34 / '적은 무리'에 담긴 의미

by 【고동엽】 2023. 1. 18.

(누가복음 12장)

 

32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33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배낭을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둑도 가까이 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

34 너희 보물 있는 곳에는 너희 마음도 있으리라

 

 

(묵상/눅 12:32-34)

 

◆ 적은 무리여

 

(32)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적은 무리여'라는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크다.

 

오늘날은 다수가 힘이고 권력이다. 다수의 주장이 진리로 탈바꿈하고, 다수가 정통이 되는 시대다.

 

세속 학자들의 정의(justice)에 대한 정의(definition)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 the greatest happiness of the greatest number , 最大多數-最大幸福)'이다.

 

이런 상황이니 소수의 주장이나 요청은 묵살되며, 소수는 다수에게 늘 위축된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세상 기준을 따르지 않으신다. 하나님께는 다수냐 아니냐가 판단 기준이 아니다. 오직 진리를 따르느냐의 여부다.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정탐꾼 열두 명 중에 열 명의 말을 더 신뢰했다. 다수이지 않은가? 믿음에 굳게 선 두 명은 소수에 불과했다. 백성들은 소수의 증언을 무시했으며 그 결과는 참혹했다. 하나님께서는 열 명의 말을 신뢰한 수십만 명의 사람들을 광야에서 멸하셨다. 그리고 오직 믿음에 선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가나안 땅을 밟을 수 있었다.

 

수천 명의 성읍 소돔과 고모라는 겨우 의인 열 명이 없어서 멸망했다(창 18:32). 다수가 소수가 없어서 멸망한 것이다. 

 

더 충격적인 사실은 예루살렘에 공의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가 단 한 명이 없어서 멸망했다는 것이다(렘 5:1). 수만 명이 단 한명의 의인이 없어서 멸망당했다는 사실이 믿어지는가?

 

수십만 명이 모여있으면 안전하다고 착각하는데, 2004년도에 인도네시아에 지진이 발생하고 쓰나미가 닥쳤을 때 무려 30만 명이 한꺼번에 죽었다.

 

'적은 무리여'라는 이 말씀은 다수를 맹목적으로 쫓는 사람들의 정신을 번쩍 나게 하신다. 큰 교회, 유명한 교회에 다닌다는 이유로 자신은 진리를 따르고 있다고 착각하고, 다수의 힘을 믿고 자신만만한 자들이 화들짝 놀라게 할만한 말씀이다.

 

이제 우리는 다수가 기준이 아니라, 진리가 기준이 되어야 한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그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을지라도 상관없다. 우리 하나님께서 '숫자'에 연연하지 않으시겠다는데 무엇이 걱정인가?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는 말씀은 사람 수가 적어서 문을 닫아야 할지 말지를 고민하는 작은 교회 사역자들에게 사람 수 늘리기 위해 꼼수를 쓰지 말고, 그냥 진리를 따라 살 것을 명령하시는 말씀이다. 세속화된 수천 명의 교인보다 진리를 따르는 단 한 명의 성도가 더 소중함을 일깨우시는 말씀이다. 

 

 

◆ 보물이 있는 곳에 마음도 있다

 

(34) 너희 보물 있는 곳에는 너희 마음도 있으리라

 

경험자들의 말에 의하면 돈 수집의 재미가 보통이 아니라고 한다. 통장에 0이 하나씩 늘어갈 때의 희열은 모든 고통에 대한 보상이 된다.

 

이 희열을 위해서 헐벗고 굶주리며, 친구 관계가 끊어지고, 형제 관계마저도 끊어지는 고통도 감내한다.

 

수십 년 전에 일본의 어느 노숙자가 영양실조로 죽었는데, 그의 통장에는 10억 원 남짓의 돈이 있었다고 했다. 그는 돈을 절약하기 위해서 신문지에 구멍을 뚫어서 러닝셔츠 대용으로 입었다고 했다.

 

도대체 왜 그렇게 힘들여가며 돈을 수집할까? 나중에 잘 살기 위해서라고 말하지만, 실제로 돈 수집이 취미가 된 사람은 나중에라도 그 돈이 아까워서 쓰지 못한다.

 

결국 그 많은 돈은 다른 사람의 몫이 되고 자신은 그렇게 고단한 인생만 살다가 죽을 뿐이다. 솔로몬은 쌓아두고 누리지 못하는 것을 '악한 병'이라고 했다(전 6:2).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진정한 취미 생활을 가르쳐주신다. 하늘에 보물을 쌓아두는 취미다.

 

세상의 재물은 내가 죽으면 누릴 수 없지만, 하늘의 보물은 무조건 내가 누릴 수 있다. 하늘의 보물은 내가 쌓았는데, 남이 쓰는 일이 없다. 무조건 내게만 지급되고 내가 써야 하는 보물이다. 일시적이 아니라 영원히 누릴 수 있는 보물이다.

 

하늘 은행 통장에 0을 늘려가는 그 희열을 느껴보았는가? 내 돈이 하늘 통장에 입금되는 과정으로 소비된다면 아까워하지 말자. 

 

하늘에 보물을 쌓아두는 자들은 늘 하늘을 소망하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복을 덤으로 받는다.

 

어떻게 하늘 통장에 0을 늘려갈 것인가?

하늘 통장은 오직 이 세상에서만 입금할 수 있고 죽으면 무조건 찾아야 한다. 그러니 살아있을 때 열심히 입금해야 하는데, 어떻게 입금할 것인가?

 

우리 소유를 팔아서 구제하라고 하신다.

'소유를 팔아서'라고 하심은 크게 부담이 되지 않는 범위에서 조금씩 하라고 하심이 아니라, 현재 누리고 있는 것을 희생해서라도 구제할 것을 말씀하심이다.

 

우리의 고질병 중의 하나는, 자신은 너무 가난하기 때문에 남을 도울 수 없다는 생각이다. 나보다 부자인 사람이 돕기를 바란다. 심지어 자기보다 부자인 사람들이 가난한 자신을 돕지 않는 것을 비난한다면 그는 더는 성도라고 할 수 없다. 

 

나보다 더 가난한 사람이 있는 한, 나는 도와야 할 의무가 있다. 아무리 가난해도 하늘 통장에 입금할 수 있음을 왜 모르는가? 거지도 굶어 죽어가는 거지에게 자기 밥그릇을 줄 수 있다.

 

가난한 자가 자기도 힘든데 남을 구제하는 것을 보는 것은 큰 도전이고 감동이다. 하늘 은행의 계산법은 매우 특이해서 과부의 두 렙돈을 부자의 거대한 기부보다 더 크게 쳐준다.

 

오늘날 교회에서 이러한 구제가 살아나야 한다. 이래야 공동체 의식이 회복된다. 헌금을 오로지 교회 헌금통에만 넣어야 한다고 믿는 이런 구약적 사고에서 벗어나야 한다.

 

어떤 교회는 개인적으로 구제하지 말고 교회가 구제 사역을 할 테니 예배당 헌금통에 넣을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막상 구제하는 비율은 지극히 적다. 

 

헌금이 어떻게 사용되든 내 알 바가 아니라고 하지 말라. 만일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 자금이랍시고 힘겹게 보냈는데, 그 돈이 알고 보니 사기꾼의 주머니로 들어가고, 일본군을 막강하게 하는 데 사용되었다고 한다면, 과연 그 사람을 독립유공자로 간주할 수 있을까? 절대 그럴 수 없다. 아무리 동기가 좋아도 결과가 그러하면 그는 유공자가 될 수 없다.

 

마찬가지다. 오늘날 헌금도 결과적으로 옳게 쓰이지 않는 곳에 내가 바치고 있다면 하늘 통장에 입금액이 제로가 될 것이다.

 

이제부터라도 교회의 어려운 형제들과 주변의 이웃, 그리고 어려운 친척들을 구제하라. 그것도 헌금임을 기억하라. 아니 오히려 그런 구제가 주님께서 보장하신 진짜 헌금이다.

 

도울 때는 최대한 익명으로 해라. 설사 불가피하게 이름이 드러나더라도 생색내면 더는 헌금이 아니며, 하늘 통장에 입금되지 않음을 기억하라.

 

우리가 보물을 하늘에 쌓아둘 때 우리의 소망이 더욱 하늘을 향하고, 믿음이 더욱 성숙하며 공동체는 더욱 결속된다.

 

주님,

제가 다수를 좇지 않겠습니다. 오직 진리만을 좇는 용기를 주십시오. 저를 소유욕과 인색함에서 건져주시고, 하늘에 보물을 쌓아두는 신앙을 실천하게 하옵소서.

 

출처 : https://cafe.daum.net/soongsari/WDob/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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