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 계속 되어야 할 십자가 묵상 롬6:11~14
◑십자가 - 거룩한 삶으로 이끄는 힘
우리가 세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십자가에서 솟아나는 은혜의 샘물을 날마다 마셔야만 하는데...
십자가 앞에 나아가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어떤 은혜를 주실까?
▲아직 끝나지 않은 십자가의 씻는 사역
신학자 도널드 블러쉬 Bloesch는
“죄인을 위하여 하신 그리스도의 사역은 완성되었지만,
죄인 안에서 이루어지는 그분의 사역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고 말했다.
죄인인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는 일은, 이미 주님이 십자가에서 이루셨다.
그러나 내 안에서 이루어질 일에 대해서는, 아직 하실 일이 남아있다.
나는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발이 더러워졌다고 다시 목욕할 필요가 없다. 발만 씻으면 된다.
그렇게 날마다 씻으면서 거룩한 자답게 살려는 노력이 우리 안에 있(어야 한)다.
▲죄를 지을 때마다..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시라!
우리는 아담 안에 있는 사람이 아니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다.
우리가 죄를 범한다 해도, 율법의 종이 되어 죄를 범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로서, 죄를 범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기 전에 짓는 죄와
믿은 후에 짓는 죄는 차원이 다르다.
만일 세상을 살면서 자신은 죄를 한 번도 짓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한다면
그것은 거짓말이다.
믿는 자도 죄를 범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하나님 앞에 빨리 회개하고, 다시는 그 죄를 짓지 않도록 돌이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사는 사회가 지뢰밭과 같다. 거룩하게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백 번 결심해도 또 넘어지고, 무서운 악습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무슨 재주로 내가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는가?
힘을 얻어야 하는데, 그 힘은 십자가에서 온다.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볼 때, 깊이 묵상할 때,
주님은, 성령님을 통해, 우리에게 거룩하게 살 수 있는 힘을 공급해 주신다.
(십자가를 바라보며 이렇게 묵상해 보세요)
‘내 마음대로 죄를 짓던 이전의 나는 예수님과 함께 죽었어.
주님의 죽음과 함께 나의 연약한 존재는 이미 죽었어.
내 정욕과 욕심은 모두 십자가에 못 박혔어.
나는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존재야.
성령님 안에서 사는 사람이야.
은혜가 왕 노릇하는 세계에 사는 사람이야.
날 대신해 돌아가신 예수님이, 내 곁에 계신 이상
나는 죄를 이길 수 있어, 거룩하게 살 수 있어’
이때 새로운 각오와 힘이 내 안에서 솟아난다.
십자가를 날마다 묵상하시라!
①여기라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롬6:11
②드리라
...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롬6:13
③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롬6:14
◑성경의 중심, 삶의 중심 - 십자가
▲복음서, 바울서신, 계시록 등 신약성경의 예수님은 <십자가의 예수님>
예수님의 행적을 기록한 4복음서 중 3분의 1이 십자가의 고난을 다루고 있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는, 십자가가 4복음서의 중심이고, 나머지는 서론에 불과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사도바울도, 복음이란 한마디로 ‘십자가의 길’ 이라고 했다.
복음이란 ‘십자가 복음’인 것이다.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모습 역시, ‘십자가’를 보여준다.
계시록에는, 승리하시고 재림하셔서 온 세상을 통치하시며,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신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이 나오는데,
놀랍게도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의 모습과 교차되어 나온다.
영원한 과거로부터, 영원한 미래에까지.. 그 중심에 십자가의 주님이 계시는 것이다.
새 하늘과 새 땅이 되어도, 십자가의 주님은 영원히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다.
▲십자가를 모르면, 예수님을 모르는 것
예수님에 관한 모든 이야기 가운데, 하나님의 아들이
나를 사랑하사 십자가에서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셨다는 사실만큼
내게 충격을 주고, 내 가슴을 뜨겁게 하고,
내 생각을 완전히 뒤집는 사건이 또 어디 있는가?
그래서 어떤 신학자는 말했다.
“우리에게 그리스도는 바로 그분의 십자가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이해하기 전까지 그분을 안다고 해서는 안 된다”
혹자는 ‘십자가의 죽음은 부활보다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십자가의 죽음이 있었기에, 부활이 당연히 따라오기 때문이다.
십자가가 없었다면, 어찌 부활이 있었겠는가!
▲일상의 삶에 중심이었던 십자가
주후 1, 2세기의 초대교회 교인들은 어디를 가든, 무엇을 하든
십자가를 잊지 않기 위해 몸부림쳤다고 한다.
당시는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만으로(아마 주후 60년경 네로황제 때부터 핍박 본격화)
조롱과 채찍질을 당하고, 옥에 갇히고, 광야와 동굴에 숨어살던 때였다.
초대교회 교부 터툴리안은 이런 기록을 남겼다.
우리들은 발걸음을 앞으로 옮길 때마다
들어가거나 나갈 때마다, 옷을 입고 신발을 신을 때마다
목욕을 하거나 식탁에 앉을 때마다, 등잔의 불을 켤 때나
침상에서나 좌석에서나 매일의 일상 가운데서..
이마에 십자가를 그렸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십자가의 주님을 잊지 않기 위해서,
언제나 이마에 십자가를 그렸다.
십자가가 그들의 일상의 삶에 중심이었다.
▲잔인한 사형도구 십자가를 사랑하는 이유
어떻게 보면 참 끔찍한 이야기다.
당시 십자가는 형틀 가운데도 가장 잔인한 형틀이 아닌가!
오늘날 미국에서는, 사형을 민주적으로 시행하기 위해, 전기의자를 사용하는데,
그 사형틀 전기의자를 작은 모형으로 만들어, 목걸이로 걸고 다니지는 않는다.
교수대 밧줄을 모형으로 만들어, 금박을 입혀서 벽에 걸어 놓을 사람도 없다.
유대교의 상징은 다윗의 별이고,
회교의 상징은 초승달이고, 불교의 상징은 연꽃이다.
다 신비스러우면서도 보기에 우아한 상징물인데,
유독 기독교는 왜 생각만 해도 끔찍한 사형집행도구를
교회 지붕에도 달고, 벽에도 걸어놓고, 심지어는 목에도 걸고 다니는가?
믿음 없는 눈으로 보면, 십자가는 끔찍한 사형 도구에 불과하지만,
믿는 성도에겐, 십자가가 너무나 소중하다.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자신의 목숨을 버리신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해 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대 교회의 문제는, <십자가 없는 복음>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 어느 교회에서는, 고난주간을 폐지하고 부활주일만 요란하게 지킨다고 한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신앙생활은 그만큼 천박해진다.
십자가에서 멀어지면, 영원한 것보다도 세상적인 것, 일시적인 것에
마음을 온통 다 빼앗기게 된다.
예수님 (십자가) 중심의 신앙생활이 아니라
자기 욕망 중심의 신앙생활로 바뀌어 버렸다.
이것이 오늘날 현대 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세속화된 기독교’의 도전이다.
<성공주의>와 <십자가 복음>의 차이는,
성공하고 잘 되는 것은 인간의 공통적인 열망인데...
성공주의는,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고, 성공하고 잘 되는 것이다. 소위 적극적 사고방식이다.
십자가 복음은, 십자가의 죽음과 희생을 통해서만, 그 결과로 잘 되고 성공하는 것이다.
그 ‘성공’이란 의미도, 영원한 성공을 뜻한다. 세상적으로는 성공 할 수도/못할 수도 있다.
그래서 ‘성공’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 ‘승리’라는 말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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