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유속의 십자가
빌 2:5-11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
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
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키에르케고르이 쓴 왕자이야기를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왕자가 시골 시찰을 갔다가 어느 동네에서 예쁜 처녀를 보고 그만 사랑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고민입니다. 사랑을 고백하면 신분의 차이 때문에 결혼할 수 없기 때문에 거절당할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게 고민하는데 마침내 좋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평민복장을 하고 그 처녀가 사는 동네에 가서 살기로 했습니다. 이 청년이 그 동네로 이사 가서 그 처녀 집 근처에 집을 마련합니다. 그리고 그 처녀와 이웃하며 친하게 지내다가 사랑이 무르익을 즈음에 자신의 신분을 밝혔습니다. “나는 왕자다, 당신을 사랑해서 결혼하고 싶어 이렇게 당신 곁으로 이사 온 것이다. 나의 사랑을 받아 달라.” 그렇게 해서 이 두 사람이 결혼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키에르케고르는 이 이야기를 성탄의 의미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를 세상에 내려 보내십니다. 예수님도 이 세상에 하나님의 아들 왕자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어느 날 손오공처럼 완성된 인간으로 오셨더라면 누구도 믿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 사람들을 사랑하셔서 예수를 보내셨지만 사람들은 그 사랑을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들을 육신을 입혀 세상에 내려 보내신 것입니다. 인간과 사귀고 이해시키고 함께 살기 위해서 입니다. 그렇게 오신 예수님은 어느 날 사람들에게 자신을 공개했습니다. “사실은 너희를 사랑하려고 인간의 옷을 입고 온 것이다,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나를 본 사람은 하나님을 본 사람이다, 나를 믿으라, 그리하면 구원을 받으리라.” 그렇게 해서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그 성탄절을 맞이했습니다. 하나님은 장차 세상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태어나리라고 많은 예언자들의 입을 통해서 말씀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은 마침내 예언대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런데 오신 과정이 참 이채롭습니다. 사람들이 오리라던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여행 중에 마구간에서 태어납니다. 하나님이 오시리라고 수차례 예언된 그 예수께서 오시는데 상상을 초월하는 방법으로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시는 장소가 하필이면 말구유입니다. 왜 하필 그 넓은 장소 다 놓아두고 말구유입니까. 거기에 예수의 삶이 예사롭지 않을 것이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장차 이 예수는 참으로 처절한 삶을 살게 될 것이라는 것을 미리 세상에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그 예사롭지 않은 메시지를 몇 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종의 모습”
하나는 종의 모습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말씀을 보면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 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다”고 했습니다. 그 말은 태어나신 예수님은 순전히 종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셨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예수께서 그 많은 곳 다 놓아두고 하필 말구유에서 태어나신 이유입니다. 당시 노예도 그 누구도 말구유에서 태어나는 일은 없었습니다. 그 당시 추상같은 노예제도가 있었지만 어느 노예가 아이를 낳는데 마구간에서 낳았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태어나신 곳이 마구간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은 장차 종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셨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을 때까지 종의 모습으로 살아가셨습니다.
종의 모습은 무시당하는 모습입니다. 종에게는 인권이고, 권리이고, 인간대접이고 없습니다. 당시 노예는 짐승처럼 대우받았고 취급받으며 살았습니다. 예수님은 평생 그렇게 종의 모습으로 살았습니다. 업신여김 받으며 살았습니다. 배척당하며 살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평생 종의 모습으로 살다가 마지막에는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죽을 때도 묵묵하게 아무 말 없이 죽어갔습니다. 예수님은 아주 철두철미 종의 인생을 살았습니다. 종은 섬기는 사람입니다. 희생하는 사람입니다. 수고하는 사람입니다. 침묵하는 삶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일생을 사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도 섬기는 자가 되라”
“겸손의 모습”
세상에는 영웅들이 많습니다. 영웅은 반드시 그 삶의 내용이 신화적으로 꾸밈이 가미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영웅을 묘사한 신화를 보면 대체적으로 두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하나는 화려하게 꾸며놓는 것입니다. 영웅은 대부분 어렸을 때 모습을 신동으로 묘사하거나 초능력을 발휘하는 사람으로 묘사해 놓습니다. 예를 들면 김일성 하면 그 이력을 많이 조작해 놓았습니다. 백두산서 빨치산 노릇을 했다든지 김정일이 백두산에서 태어났다고 가미해 놓았습니다. 그것이 대표적으로 화려하게 가미한 경우입니다. 또 한 경우는 더 초라하게 만들어 놓는 경우입니다. 예를 들면 아브라함 링컨 같은 경우입니다. 링컨이 켄터키의 가난한 통나무집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우리나라에서는 깊은 산골로 표현해서 가난한 집에서 대통령이 태어났다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그런데 켄터키는 그렇게 산골이 아닙니다. 그것도 너무 과장한 것입니다. 죤 뉴턴은 초등학교 때부터 낙제하기 시작합니다. 톨스토이는 대학 때 낙제합니다. 아인슈타인은 4살 때에 가서야 말을 하기 시작했고 7살 때 가서 비로소 글을 깨우치기 시작했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아이들은 모두 천재에 속합니다. 세상의 위인들은 모두 이렇게 두 가지 중 한가지로 과장해서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경우는 너무 사실적입니다. 미화도 가감도 없는 아주 초라한 환경에서 태어나고 초라한 집 초라한 부모 밑에서 자라고 초라한 전도자의 삶을 살다가 죽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 철저하게 종의 모습으로 오셨고 겸손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십니다. 그래서 본문을 보면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사용하시는 기준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이 겸손함입니다. 사람도 겸손한 사람을 좋아합니다. 말없이 자기 할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이 겸손한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불러 사용하실 때 이 겸손이 사용기준입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불러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신 것도 그의 마음이 겸손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많은 인물들 가운데 그래도 가장 완벽하게 하나님께 겸손한 모습을 끝까지 견지한 사람이 다윗입니다. 그가 왕이 되었고 왕도 그냥 왕이 아니고 천하를 통일한 왕으로 40년 동안 군림하면서도 그는 초지일관 하나님께는 어린 아이와 같이 겸손한 순종하는 신앙인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들에서 양을 치는 목동출신을 불러 이스라엘의 왕을 삼지 않습니까.
또 바울을 부르신 것도 그가 천성적으로 겸손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을 보면 한편으로 보면 조건이 참 좋은 사람이었지만 또 한편으로 보면 바울처럼 열악한 조건을 가진 사람도 없습니다. 설교자들이 바울을 말할 때 천재로, 능력자로 표현했기 때문에 그런 줄로 알지만 사실을 알고 보면 사도바울처럼 흠이 많은 사람도 없습니다. 바울이 오늘 이 시대에 나타나서 목회를 했다면 그는 어느 교회로부터 청빙도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어느 교회에서 담임목사를 청빙하려고 이력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이력서가 들어 왔습니다. “나이 50인데 아직 미혼임, 다른 직업도 가지고 있음, 감옥에 여러 번 갔다 왔음, 외모는 키가 작고 신체 왜소함, 간질병 있고 시력 나쁨, 말은 어눌하고 설교 잘 못하는 편임(그 설교 듣고 졸다가 2층에서 떨어져 죽은 사람도 있음). 설교시 오직 예수만 말함, 교회 여러 번 옮겼음“. 이 이력서를 듣고 나서 모든 교인들이 어떻게 그런 목사님을 우리교회에서 모실 수 있느냐고 모두 반대를 했습니다. 그때 그 분이 바로 사도바울이라고 말을 하니 아무도 더 이상 말을 못하더라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이런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를 불러서 사용하십니다. 왜 부르셨는가 하면 바울은 하나님께 철두철미 의지하고 믿고 순종하는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겸손을 말할 때는 인사할 때 허리를 낮게 90도로 굽히고 두 손으로 악수하는 모습을 겸손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나를 보고 교만하다고 말합니다. 나는 두 손으로 악수는 하겠는데 90도로 허리가 굽혀지지가 않습니다. 사람들은 속마음은 모르고 겉모습만 보고 겸손하다 교만하다 그렇게 말합니다. 대신 내가 가슴이 따뜻한 남자라는 것을 사람들이 모릅니다. 그렇게 사람들이 겉모습만 보니까 속으며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울에게서 외모를 보시지 않고 그의 마음, 생각, 신앙, 열정, 겸손함을 보시고 그를 불러 전무후무한 대 사도로 만드셨던 것입니다. 사도바울의 가슴을 가득 채우고 있는 그의 주님 중심의 그 믿음을 보신 것입니다. 그는 오직 주님께 자신을 드리고 바치는 겸손한 신앙을 보셨습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사람을 좋아하십니다.
하나님과 동등한 자격이었지만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그 동등한 자격을 요구하신 것이 아니고 종의 모습으로 와서 종으로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말구유에 태어나신 것은 장차 예수는 종으로, 겸손의 주로 역사하실 것을 암시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겸손의 대명사입니다.
“수난 인생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시는데 말구유에서 태어나신 것은 이 예수는 장차 철두철미하게 수난의 인생을 살 것이라는 것을 암시하신 것입니다. 그 결과 예수님은 극심한 고난의 길을 걷고 수난의 인생을 살았습니다. 예수님의 33년간의 생애를 보면 참으로 처절한 인생이었습니다. 그 처절함은 가난으로 나타났습니다. 가난이 참 무서운 것입니다. 가난은 배고픔만 주는 것이 아닙니다. 가난은 모든 것을 빼앗아 갑니다. 용기도, 의욕도, 기상도, 뜻도 다 빼앗아 갑니다. 그리고 사람으로 하여금 비참하게 만들고 초라한 인생을 만들어 버립니다. 그래서 가난이 무서운 것입니다. 말구유는 가장 빈약한 곳, 가난한 곳입니다. 말구유는 짐승이 거처하는 곳입니다. 당시 노예도 그런 곳에서 아이를 낳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 그곳에서 태어나십니다. 거기에 예수님은 평생 가난과 궁핍 속에서 살아갈 것이라는 암시를 주시는 메시지가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암시는 죽음의 모습입니다. 사람은 죽음의 모습을 보고 그 인생을 평가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시는데 마구간에서 태어났다면 무슨 메시지를 주시고자 했겠습니까. 장차 예수께서 죽을 때 어떤 죽음을 당할 것인가를 미리 보여주신 암시입니다. 결코 예사롭지 않는 상징이고 예표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려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제물 되시기 위해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 십자가의 죽음은 말 그대로 처절한 죽음입니다. 하나님은 장차 예수께서 처절하게 죽는다는 것을 미리 보여주시기 위해서 태어나실 때 마구간에서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왜 처절하게 죽어야 했습니까. 그것은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께서 세상에 오심으로 이 땅에 평화를 이루셨습니다. 그 가장 큰 평화가 인간과 하나님과의 사이에 평화를 이룬 일입니다. 예수께서 제물 되어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가로막혔던 담이 무너져버렸습니다. 예수님은 평화의 사신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 스스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제물이 되셨습니다. 평화는 누군가가 제물이 되지 않고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 세상이 이렇게 시끄러운 것도 모두 제물 되지 못하고 살겠다고 해서 시끄러운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평화를 이루라”고 당부하십니다. 그리고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평화를 이루는 삶이 예수의 제자의 삶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이 평화의 선물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 평화를 깨는 것은 주의 뜻을 깨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보면 불행하게도 이 평화를 깨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평화는 말 한마디를 통해서도 깨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말꼬리 하나를 가지고 화평을 깨고 부드러운 관계를 사정없이 악화시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모두 불행한 일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불화가 일어나고 갈등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어느 남편이 아내에게 국수를 삶아 먹자고 했습니다. 그러자 아내가 “국시지 무슨 국수냐”고 말꼬리를 잡고 시비를 걸었습니다. 남편은 국수라 하고 아내는 국시라고 우깁니다. 국수면 어떻게 국시면 어떻습니까. 이것이 문제입니다. 이래서 평화가 깨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서로 싸우다 마침내 이 부부가 어느 노인에게 갔습니다. 찾아가서 “국수가 맞습니까? 국시가 맞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노인이 찾아온 부부를 한창 바라보았습니다. 참 한심한 부부입니다. 그리고 그 부부에게 이렇게 이야기 해 주었습니다. “국수와 국시는 재료가 틀립니다, 국수를 밀가루로 만들고 국시는 밀가리로 만듭니다, 그리고 그것을 먹는 도구도 다릅니다, 국수는 젓가락으로 먹고 국시는 저범으로 먹습니다.” 이 세상이 이렇게 시끄러운 것은 이렇게 말꼬리를 잡고 따지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서로 옳다고 따지니까 세상이 시끄럽고 불화하고 고소사건이 나타나고 싸움이 일어나고 벽이 쌓이고 원수가 만들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쌓인 벽을 허물고 평화를 주시기 위해서 고난의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십니다. 이 십자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져야 하는 짐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당신 스스로 이 십자가를 지셨고 우리에게 이 십자가를 지라고 강조합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으라”고 했습니다. 십자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져야 하는 짐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이 십자가를 회피하면 안 됩니다.
토인비가 쓴 “역사의 연구”라는 책은 참 방대합니다. 토인비가 런던대학에서 이 역사를 가르칠 때 학생들에게 강조했습니다. “너희는 역사의 주인이 되라, 그리고 역사를 창조하는 사람이 되라.” 그랬더니 한 학생이 “어떻게 하는 것이 역사의 주인이 되는 것입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때 토인비가 이렇게 대답했다는 것입니다. “역사를 보면 그 시대에 빛낸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을 보면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 시대를 위해서 자신을 제물로 바쳤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위인이 되고 역사의 주인이 된 것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말은 그 시대에 필요한 짐을 질 줄 알고 십자가를 지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부활하심”
예수님이 태어나신 곳이 비록 마구간이었지만 그곳에 동방에서 손님들이 찾아왔고 그 멀리서 목자들이 찾아와서 경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장소는 빈약했지만 그곳에 하늘의 빛이 비추었고 천사들의 합창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예수님은 마구간에서 태어났고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서 죽습니다. 한 알의 밀알처럼 땅에 떨어져 죽고 썩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한 알의 밀알이 마침내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었습니다. 그리고 그 초라하게 태어나고 수난을 당하고 마침내 죽어 무덤에 묻혔지만 결국 영광스러운 부활로 화려하게 끝을 맺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 부활의 영광까지 안겨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결국 제물 되기 위해서 세상에 태어났다가 주어진 사명을 다 감당하고 마침내 부활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성탄절을 맞을 때 마다 예수의 고난은 잊어버리기 쉽습니다. 그리고 놀고 재미있고 선물 주고받는 것만 생각하게 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성탄절 그 밑바닥에는 이런 고난의 역정이 들어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 고난의 모습을 우리는 말구유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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