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초에 시작된 하나님의 뜻 (창세기 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 한 문장은 성경의 문지방이자, 모든 인간의 질문이 고개를 들기 전에 이미 울려 퍼진 하나님의 대답입니다. 우리가 “왜”를 묻기 전에 하나님은 “내가”로 시작하십니다. 우리가 삶의 방향을 찾기 위해 눈을 들어 하늘을 훑기 전에, 하나님은 하늘과 땅을 먼저 지으심으로 우리의 시선을 바로잡으십니다. 창세기 1장 1절은 단순히 우주가 어떻게 생겨났는지를 설명하는 문장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누구신지, 우리가 누구인지, 그리고 이 세계가 어떤 뜻 위에 놓여 있는지를 선포하는 왕의 칙령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태초에 시작된 하나님의 뜻”을 묵상하며, 창조의 첫 선언 속에 숨 쉬는 복음의 숨결을 듣고자 합니다.
많은 사람은 인생의 처음을 자신에게서 찾습니다. 내 계획, 내 의지, 내 결심, 내 선택이 시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처음을 인간에게서 찾지 않습니다. 성경의 첫 단어는 “태초”이고, 첫 주어는 “하나님”입니다. 시작은 나의 열망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의 역사도, 교회의 역사도, 구원의 역사도, 심지어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한 눈물의 역사도, 근본에서 하나님으로부터 흘러나옵니다. 이 진리는 우리를 겸손하게 하지만 동시에 놀랍게 자유롭게 합니다. 왜냐하면 내 삶이 내 손에서 시작되어 내 힘으로 유지되어야 한다면, 나는 끝없이 불안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시작이 내게 있으면 결말도 내게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시작이 하나님께 있으면 결말도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러므로 창세기 1장 1절은 두려움을 잠재우는 첫 복음의 음성입니다. “너는 우연이 아니다. 너는 실수로 던져진 존재가 아니다. 너의 삶은 태초부터 뜻을 가진 분의 손안에 있다.”
“태초에”라는 말은 시간의 첫 지점을 표시하는 동시에, 시간 자체가 하나님이 만드신 질서임을 알립니다. 하나님은 시간 바깥에서 시간을 지으시고, 시간 안에서 역사하시며, 시간 위에서 모든 것을 주권적으로 인도하십니다. 그래서 태초는 하나님이 늦게 등장하시는 무대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무대의 한 배우가 아니라 무대 자체를 세우신 창조주이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개혁주의 신학이 붙드는 하나님 중심성을 봅니다. 하나님은 피조세계의 일부가 아니며, 세계는 하나님을 보충하는 재료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완전하신 분이시기에 창조를 통해 어떤 결핍을 메우지 않으셨습니다. 삼위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스스로 충만하신 복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창조는 필요의 행위가 아니라 기쁨의 의지이며, 결핍의 보완이 아니라 은혜의 넘침입니다.
“하나님이”라는 주어는 창조의 주도권이 전적으로 하나님께 있음을 선언합니다. 여기에는 인간의 협력도, 자연의 자생도, 우연의 추첨도 끼어들 자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이 단순함이 우리 신앙의 뼈대입니다. 오늘날 세상은 자주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너를 만들었다. 네가 너의 길을 정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지었다. 내가 너의 길 위에 뜻을 새겼다.” 그 뜻은 폭력적인 강제가 아니라, 사랑의 설계입니다. 창조주가 피조물을 알고, 피조물을 향해 목적을 가지신다는 사실은 우리를 괴롭히는 운명론과 다릅니다. 성경의 주권은 냉정한 기계의 필연이 아니라, 인격적 하나님이 사랑으로 붙드시는 섭리입니다.
“천지를”라는 표현은 성경적 총체성을 보여 줍니다. 하늘과 땅,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높은 것과 낮은 것, 광대한 우주와 우리의 작은 방 한켠까지, 하나님이 다스리지 않으시는 영역은 없습니다. 이것은 신앙을 교회 안에만 가두려는 유혹을 깨뜨립니다. 하나님은 예배당의 하나님만이 아니라, 시장의 하나님이시고, 가정의 하나님이시며, 병상의 하나님이시고, 눈물의 하나님이십니다. 창조는 예배의 기초일 뿐 아니라 삶의 모든 영역에 대한 하나님의 권리 선언입니다. “너는 내 것이다”라는 창조주의 조용한 선포가 만물 위에 울립니다.
그리고 “창조하시니라”라는 동사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와 선하심이 실제로 사건이 되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은 생각만 하신 것이 아니라 이루셨습니다. 말씀하시면 존재가 일어납니다. 이때 성경이 말하는 창조는 단지 형태를 바꾸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무에서 유를 부르십니다. 피조물은 하나님에게서 흘러나온 신적 조각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실 때 존재하게 된 전적으로 다른 존재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창조주와 피조물의 구별을 붙듭니다. 이 구별이 무너지면 신앙은 혼탁해집니다. 하나님을 자연 속에 녹여 버리면 하나님은 더 이상 위로가 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자연도 함께 신음하며 썩어짐의 종노릇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창조주이시라면, 하나님은 썩어짐을 넘어 새롭게 하실 능력이 있으십니다. 그래서 창세기 1장 1절은 창조의 선언이면서 동시에 새 창조의 약속을 담습니다.
그렇다면 “태초에 시작된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왜 창조하셨습니까. 우리는 성경 전체의 흐름 속에서 대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궁극적 뜻은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시고, 그 영광 안에서 당신의 백성을 복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창조는 하나님 영광의 무대이며, 구속은 그 무대를 회복하고 완성하는 길입니다. 하나님은 만물을 통해 당신의 이름이 찬송받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그 찬송은 하나님이 외로워서 요구하신 박수갈채가 아닙니다. 하나님 영광은 피조물이 가장 참된 기쁨을 누리는 자리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최고의 선이시고, 최고의 아름다움이시고, 최고의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산다는 말은, 인간을 억압하는 종교적 구호가 아니라, 인간이 자기 자리로 돌아가는 회복의 선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현실을 압니다. 창조의 첫 장면은 찬란하지만, 인간의 역사에는 어둠이 스며들었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가 왜 이렇게 깨어졌습니까. 창세기 1장 1절은 죄를 직접 말하지 않지만, 죄를 해석할 좌표를 제공합니다. 죄는 단순한 실수나 약점이 아니라, 창조주를 떠나는 반역입니다. 피조물이 창조주를 중심에서 밀어내고 자신을 중심에 앉히는 사건입니다. 그러니 죄는 존재의 질서를 뒤틀고, 관계를 파괴하며, 삶을 무의미로 몰아갑니다. 그래서 현대인이 겪는 공허는 단지 심리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창조의 목적에서 이탈한 영혼의 증상입니다. 하나님이 중심이신 세계에서 하나님 없이 살려는 시도는 결국 영혼을 메마르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태초에 뜻을 시작하신 분이시기에, 죄로 인해 뜻을 폐기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버리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처음을 여신 분이시기에, 끝도 여십니다. 창조의 하나님은 곧 구속의 하나님이십니다. 창세기 1장 1절의 “하나님”은 요한복음 1장의 “말씀”과 이어지고, 골로새서 1장의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다”는 고백으로 확장됩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의 뜻이 더 깊고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부터,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의 백성을 거룩하게 하시고 영광스럽게 하실 구원의 계획을 품고 계셨습니다. 창조는 구속을 위한 배경이 아니라, 구속을 담아낼 그릇이며, 구속은 창조를 부정하는 사건이 아니라 창조를 새롭게 하는 사건입니다.
여기서 복음은 이렇게 빛납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지으신 것에서 멈추지 않으시고, 죄로 인해 망가진 세상을 다시 살리시기 위해 당신의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창조주가 피조물의 자리로 내려오셨습니다. 영원하신 분이 시간 속으로 들어오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셨습니다. 왜입니까. 태초에 시작된 하나님의 뜻이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멀리서 명령만 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내려와 함께 짐을 집니다. 그리스도는 우리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창조 질서를 무너뜨린 반역의 값을 치르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심으로 새 창조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창세기 1장 1절의 하나님은, 십자가의 하나님과 같은 하나님이십니다. 능력의 하나님이 은혜의 하나님으로 우리 앞에 서십니다. 능력과 은혜가 충돌하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찬란하게 하나가 됩니다.
이 복음이 우리의 삶에 무엇을 요구합니까. 먼저 우리의 시작을 다시 세우라고 요구합니다. 많은 인생이 잘못된 시작 때문에 길을 잃습니다. 시작이 자기 자신이면 끝도 자기 자신입니다. 그러나 시작이 하나님이면 끝은 하나님께서 친히 책임지십니다. 신자의 삶은 결심의 연속이 아니라, 은혜에 대한 응답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창조주이시며 구속주이심을 믿고, 그분의 뜻에 자신을 맡기는 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회개입니다. 회개는 단지 나쁜 행동을 멈추는 것이 아니라, 삶의 중심을 바꾸는 것입니다. “내가 주인”에서 “하나님이 주인”으로, “내 뜻”에서 “하나님의 뜻”으로, “내 영광”에서 “하나님의 영광”으로 돌아서는 것입니다.
또한 이 진리는 고난을 해석하는 새로운 눈을 줍니다. 신자는 고난이 없다고 약속받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신자는 고난 속에서 우연이 아닌 뜻을 발견하도록 부름받았습니다. 물론 우리는 함부로 말할 수 없습니다. 누군가의 눈물 위에 가벼운 설명을 얹는 것은 잔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창세기 1장 1절이 주는 위로는 분명합니다. 세상을 지으신 하나님은 세상 속에서 길을 잃지 않으십니다. 창조주가 통치하시는 세계에서, 신자의 고난은 하나님이 몰랐던 사고가 아니라, 하나님이 사용하실 재료가 됩니다. 하나님은 어둠도 빛의 도구로 바꾸실 수 있습니다. 창조 때에 빛을 부르셨던 하나님은, 우리의 심령에도 빛을 부르십니다.
여기 한 가지 예화를 들고 싶습니다. 한 장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작은 공방에서 나무를 깎아 악기를 만들었습니다. 어느 날 제자가 물었습니다. “스승님, 왜 어떤 나무는 버리고 어떤 나무는 선택합니까?” 장인은 말없이 한 토막의 나무를 들어 보였습니다. 겉은 거칠고 옹이가 많았고, 군데군데 상처도 있었습니다. 제자는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저건 쓸모없다.’ 그러나 장인은 그 나무를 물에 적시고, 불에 데우고, 천천히 눌러 휘게 하며, 오랜 시간 다듬기 시작했습니다. 시간이 흘러 마침내 아름다운 바이올린이 완성되었습니다. 제자가 놀라 물었습니다. “어떻게 저 나무가 이런 소리를 냅니까?” 장인은 조용히 대답했습니다. “나무가 나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나무를 선택했다. 상처는 버려야 할 것이 아니라, 소리를 깊게 하는 흔적이 될 수 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종종 우리 삶의 옹이와 상처를 보며 자신을 쓸모없는 나무로 여깁니다. 그러나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우리를 선택하시고, 우리를 다듬으시며, 우리를 통해 당신의 영광의 선율을 내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불과 눌림과 기다림 속에서도, 하나님은 작품을 만들고 계십니다. 이것이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소망입니다.
또한 창조 신앙은 우리의 일상을 성결하게 만듭니다. 세계가 하나님의 것이라면, 우리는 이 땅을 함부로 소비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몸도 하나님의 것이고, 우리의 시간도 하나님의 것입니다. 교회는 영혼만 구원받고 몸은 버려도 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몸의 부활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영혼만이 아니라 전인격을 구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먹고 마시는 작은 일에도, 일하고 쉬는 평범한 일에도, 정직과 사랑과 감사로 하나님께 영광 돌려야 합니다. 창조주께서 세우신 세계의 질서 속에서, 우리는 청지기로 부름받았습니다. 개혁주의 전통은 이 청지기 정신을 귀히 여깁니다. 신앙은 현실 도피가 아니라, 현실을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거룩한 복종입니다.
그리고 창조는 예배를 낳습니다. 창조의 첫 문장 앞에서 인간은 두 가지 반응을 보입니다. 하나님을 지우거나,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우상숭배는 하나님을 지우는 시도입니다. 자율은 하나님 없이도 의미를 만들 수 있다고 믿는 야심입니다. 그러나 예배는 하나님 앞에 돌아오는 고백입니다. “주님, 주님이 시작이십니다. 주님이 주인이십니다. 주님의 뜻이 제 삶의 길입니다.” 참된 예배는 감정의 고조만이 아니라, 존재의 자리 바꿈입니다. 그 자리 바꿈이 일어날 때, 우리의 삶은 더 이상 흔들리는 모래 위에 세워지지 않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반석이 되십니다.
끝으로, 창세기 1장 1절은 미래를 향한 약속을 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면, 하나님은 마지막에도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루실 것입니다. 성경은 창조로 시작하여 새 창조로 끝납니다. 지금 우리는 “이미”와 “아직” 사이에 삽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 창조가 이미 시작되었지만, 완성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신자는 현실을 낙관적으로만 보지 않습니다. 죄의 비참을 압니다. 그러나 신자는 절망하지도 않습니다. 창조주께서 구속주가 되셨고, 구속주께서 다시 오실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의 작고 연약한 순종이 헛되지 않음을 믿습니다. 한 번도 잊히지 않는 눈물이 있다는 것을 믿습니다. 하나님이 태초에 뜻을 시작하셨다면, 하나님은 마침내 뜻을 완성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완성은 우리를 무의미에서 건져내어 영광으로 이끄는 완성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창세기 1장 1절 앞에서 다시 시작합시다. 세상의 소음이 “네가 시작이다”라고 속삭일 때, 성경의 첫 문장이 “하나님이 시작이다”라고 선포합니다. 내 죄가 “너는 끝났다”라고 정죄할 때, 창조주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너를 새롭게 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내 고난이 “의미 없다”라고 조롱할 때, 창조의 하나님은 “내 뜻이 너를 지나간다”라고 다독이십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의 마음을 주께 드립시다. 우리의 시작을 주께 드립시다. 우리의 내일을 주께 드립시다. 태초에 시작된 하나님의 뜻이, 오늘 우리 안에서 믿음으로 다시 시작되기를 바랍니다.
설교요약
창세기 1:1은 모든 시작이 하나님께 있음을 선언하며,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시간과 세계를 주권적으로 세우셨다. 이 창조는 결핍의 보완이 아니라 삼위 하나님의 충만에서 흘러나온 은혜의 넘침이며, 세계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무대다. 죄는 창조주를 떠나는 반역이지만, 하나님은 창조의 뜻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과 새 창조로 완성하신다. 신자는 창조 신앙으로 삶의 중심을 하나님께 돌이키며, 고난 속에서도 우연이 아닌 뜻을 신뢰하고, 일상 속에서 청지기로 살며, 예배로 응답한다. 마지막에는 새 하늘과 새 땅으로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완성될 것을 소망한다.
묵상 포인트
- 내 삶의 “시작”을 무엇으로 삼고 있는가: 하나님인가, 나의 계획인가.
- 하나님이 창조주이시라는 고백이 오늘의 불안과 두려움을 어떻게 다루게 하는가.
- 고난과 상처를 “무의미”로 규정하는 습관을 내려놓고, 하나님께 맡길 수 있는가.
- 내 일상(가정, 직업, 관계, 소비, 시간 사용)이 하나님의 소유권 아래 놓여 있음을 인정하는가.
- 예배가 감정의 사건을 넘어 존재의 중심 이동이 되고 있는가.
강해
창 1:1은 문법적으로 간결하지만 신학적으로 무한히 깊다. “태초”는 시간의 기원을, “하나님”은 원인의 궁극적 주체를, “천지”는 창조의 총체성을, “창조하시니라”는 무에서 유로의 절대적 창조 행위를 함축한다. 이 구절은 세계가 자생적이거나 우연적이라는 모든 해석을 근본에서 차단하고, 존재의 의미를 창조주의 뜻으로부터 읽게 한다. 또한 성경 전체의 구속사적 전개에서 창조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 창조를 예표한다. 창조주 하나님은 구속주로 자신을 계시하시며, 창조의 영광은 십자가의 영광과 분리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본문은 창조론의 출발점인 동시에, 복음적 삶의 출발점이다.
주석
- “태초에”: 단지 ‘아주 오래전’이 아니라, 시간의 질서가 시작되는 경계. 하나님은 시간에 종속되지 않으시고 시간의 주권자이심을 전제한다.
- “하나님”: 창세기 1장의 ‘엘로힘’은 위엄과 주권을 드러내며, 창조 사건의 전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강조한다.
- “천지”: 히브리적 관용구로 ‘전부’를 뜻한다. 우주 전체와 그 안의 모든 질서가 포함된다.
- “창조”: 성경의 창조 개념은 단순한 가공이 아니라 존재의 부여, 질서의 수여, 목적의 부여를 포함한다. 피조물은 하나님과 동일한 연장선이 아니라, 하나님께 의존하는 존재이다.
원어 주석 (히브리어-구약)
- בְּרֵאשִׁית (베레쉬트): “처음에/태초에”로 번역되며, ‘머리/시작’을 뜻하는 רֹאשׁ(로쉬) 계열에서 유래한다. 시간적 시작을 가리키되, 하나님이 창조의 주권적 원천이심을 드러내는 서문적 표현으로 작동한다.
- אֱלֹהִים (엘로힘): 형태상 복수형이지만, 창세기 1장에서는 단수 동사와 결합하여 한 분 하나님의 위엄을 나타낸다. 삼위 하나님의 계시는 신약에서 더 분명해지나, 구약에서도 하나님의 충만한 위엄과 주권을 강조한다.
- בָּרָא (바라): “창조하다”로, 성경에서 하나님을 주어로 두는 용례가 두드러진다. 피조물이 원인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존재를 부여하심을 나타낸다.
- הַשָּׁמַיִם וְאֵת הָאָרֶץ (하샤마임 웨에트 하아레츠): “하늘과 땅”의 짝은 전체 세계를 총칭하는 메리즘(부분을 나열해 전체를 뜻하는 표현)으로 기능한다.
금언
- 시작이 하나님이면, 결말도 하나님이다.
- 창조는 목적 없는 탄생이 아니라, 뜻 있는 부르심이다.
- 하나님을 잃으면 의미를 잃고, 하나님께 돌아오면 의미가 살아난다.
- 십자가는 창조주의 사랑이 시간 속으로 내려온 자리다.
- 청지기의 순종은 작은 일상을 영광의 제단으로 바꾼다.
신학적 정리
- 창조는 하나님의 자존성과 충만성 위에서 이해되어야 하며, 하나님은 창조로 인해 더 완전해지지 않으신다.
- 창조주/피조물 구별은 모든 건전한 신학의 경계선이며, 우상숭배와 범신론적 혼합을 막는다.
- 창조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이며, 이는 피조물의 참 행복과 충돌하지 않고 일치한다(하나님이 최고의 선이시기 때문).
- 구속은 창조의 대체가 아니라 회복과 완성이다. 새 창조는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되어 종말에 완성된다.
- 하나님의 주권은 인격적 섭리이며, 신자의 고난을 의미 없는 우연으로 방치하지 않는다.
주제별 정리
- 시작: 인간의 자기기원 신화를 깨고, 하나님 중심의 존재론을 회복한다.
- 의미: 세계와 삶의 의미는 창조주의 뜻과 목적에서 나온다.
- 고난: 고난의 해석은 단순화가 아니라 신뢰로 나아가야 하며, 하나님은 고난도 거룩한 도구로 사용하신다.
- 예배: 예배는 창조주를 인정하는 존재의 자세이며, 삶 전체를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행위다.
- 청지기: 창조 세계와 몸과 시간에 대한 책임은 신자의 거룩한 소명이다.
목회적 정리
- 불안한 성도에게: “너의 시작이 하나님께 있다”는 진리는 미래에 대한 공포를 누그러뜨리고, 기도와 순종의 자리로 이끈다.
- 죄책감에 눌린 성도에게: 창조주가 구속주가 되신 복음은 정죄에서 회복으로 옮겨 준다.
- 상처 많은 성도에게: 상처는 폐기 사유가 아니라, 하나님 손에 들리면 깊은 울림의 통로가 될 수 있다.
- 방향 잃은 성도에게: 소명은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가’ 이전에 ‘하나님이 무엇을 뜻하시는가’를 묻는 데서 회복된다.
- 공동체에게: 교회는 창조 세계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선포하며, 세상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미리 보여 주는 공동체다.
성도들의 결단 및 적용
- 오늘부터 기도의 첫 문장을 바꾸겠습니다. “주님, 제 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제 하루의 시작으로 삼게 하소서.”
- 하루 한 번, 창조주 하나님을 의식하며 감사 제목을 구체적으로 기록하겠습니다(숨, 빛, 관계, 식탁, 말씀).
- 고난과 불안을 만날 때, 즉시 결론 내리지 않고 하나님께 맡기는 시간을 확보하겠습니다(짧은 기도, 시편 낭독, 침묵).
- 내 몸과 시간과 재정을 하나님의 소유로 인정하고, 작은 청지기 실천을 시작하겠습니다(정직, 절제, 나눔, 돌봄).
- 예배를 ‘주일의 행사’가 아니라 ‘삶의 중심 이동’으로 붙들겠습니다. 가정과 일터에서 하나님 앞에 사는 연습을 하겠습니다.
Full Source : Artificial Intellig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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