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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 안에서 드리는 깊은 기도(로마서 8:26).

by 【고동엽】 2026. 1. 13.

 

성령 안에서 드리는 깊은 기도(로마서 8:26).

우리는 기도를 입에 올리기 쉽지만, 기도의 깊이에 이르는 길은 종종 멀고도 험합니다. 어떤 날은 기도가 잘 흐르는 샘물처럼 고요히 솟아오르다가도, 어떤 날은 말이 막히고 마음이 텅 비어, 무릎을 꿇고도 한숨만 길게 새어 나옵니다. 믿음이 약해서라 말하기에는, 오히려 믿음이 진실할수록 더 자주 마주치는 벽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서는 일이 가벼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하늘을 향한 인간의 웅변이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피조물임을 인정하는 자리이며, 동시에 죄로 인해 무너진 영혼이 은혜를 향해 손을 내미는 자리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가장 높고도 낮은 자리입니다. 높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낮습니다. 자기 힘으로는 한 걸음도 제대로 내딛지 못함을 깨닫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성도의 구원이 얼마나 견고한 은혜 위에 서 있는지, 그리고 그 구원이 현실의 탄식 속에서도 어떻게 유지되고 자라나는지를 노래하듯 선포합니다. 그 가운데 로마서 8장 26절은 한 줄의 빛으로 우리 기도의 어둠을 비추어 줍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이 말씀은 기도하는 자의 가슴을 두드리는 위로이며, 동시에 기도의 본질을 다시 세우는 진리입니다. 기도는 내가 하나님께 무엇을 설득해 내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나를 붙드셔서 하나님께로 이끄시는 은혜의 행로입니다. 기도는 인간의 종교적 성취가 아니라, 성령의 도우심 속에서만 가능한 복음의 열매입니다.

우선 우리는 “우리의 연약함”이라는 진단 앞에 정직해져야 합니다. 바울이 말하는 연약함은 단지 성격이 소심하다거나, 감정이 흔들린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그것은 죄로 인해 하나님을 제대로 알고 사랑하고 구하는 능력이 손상된 인간의 근원적 무능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기도하려 하면서도 금세 자기중심으로 미끄러집니다. 기도의 언어를 빌려 욕망을 포장하기도 하고, 하나님의 뜻을 묻는다 하면서도 이미 결론을 정해 놓고 도장만 받으려 하기도 합니다. 또한 우리는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무지입니다. 내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내 인생에서 진정 선한 것이 무엇인지, 더 나아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무엇을 구해야 하는지 우리는 자주 모릅니다. 당장 눈앞의 문제만 크게 보이고, 영원한 것을 향한 소원은 희미해집니다. 오늘의 통증은 크고, 내일의 영광은 멀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기도는 때때로 한 장의 지도를 잃어버린 여행처럼 막막해집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막막함의 끝에서 절망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 자리에 성령을 세웁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여기서 “도우시나니”는 옆에서 가볍게 거드는 수준이 아닙니다. 우리의 약함을 함께 짊어지고 들어 올려 주시는 강력한 동행입니다. 마치 무너진 사람을 어깨에 메고 함께 걸어 주시는 도움입니다. 기도의 시작이 내가 아니라, 성령의 도우심에 있음을 분명히 합니다. 우리가 “기도하기로 결심했으니” 기도가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우리를 붙드셔서 “기도하게 하시니” 기도가 됩니다. 그러므로 성령 안에서 드리는 깊은 기도란, 내 감정이 뜨거워져서 깊어지는 기도가 아니라, 성령께서 내 심연까지 내려오셔서 하나님께로 끌어올리시는 기도입니다.

바울은 더 놀라운 말씀을 합니다.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여기에는 성도의 기도에 대한 신비한 복음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입술로는 멀쩡히 문장을 만들지만, 마음은 찢겨 있고, 말이 고르게 이어지지 않습니다. 눈물만 흐르거나, 가슴이 먹먹하여 한마디도 나오지 않는 날이 있습니다. 사람은 그 상태를 “기도가 안 된다”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 자리에서 “기도가 시작된다”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말이 끝나는 곳에서 성령의 간구가 시작됩니다. 우리의 표현이 닿지 못하는 골짜기에서, 성령의 탄식이 하나님께 닿습니다.

여기서 “탄식”은 절망의 신음이 아니라, 구속받은 자가 여전히 남아 있는 죄와 고통의 현실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며 내쉬는 깊은 호흡입니다. 로마서 8장에는 “피조물의 탄식”이 있고, “성도의 탄식”이 있으며, 그리고 “성령의 탄식”이 있습니다. 피조물은 썩어짐의 종노릇에서 해방되기를 탄식합니다. 성도는 양자의 영, 곧 구원의 완성을 기다리며 탄식합니다. 그리고 성령은 그 탄식을 하나님 앞에서 중보로 올려 드리십니다. 이 구조는 우리에게 말합니다. 이 세상에서의 신앙은 탄식 없는 승리의 연속이 아니라, 탄식 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소망의 길입니다. 성령 안의 기도는 탄식을 부정하는 기도가 아니라, 탄식을 복음으로 품는 기도입니다. 울음을 억지로 멈추게 하는 기도가 아니라, 울음 속에서 하나님을 놓치지 않게 하는 기도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성령의 중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조심스럽게 붙잡아야 합니다. 성령의 간구는 그리스도의 중보를 대체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완전한 중보를 성도에게 적용하며, 그 효력을 우리의 현실 기도 속에 깊이 스며들게 합니다. 개혁주의 신학은 성부·성자·성령의 사역이 분리되지 않고, 한 구원의 경륜 안에서 조화롭게 역사함을 강조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와 부활로 단번에 구속을 이루셨고, 지금도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십니다. 성령께서는 그 구속을 우리 안에 적용하시며, 특히 기도의 자리에서 우리의 연약함을 붙드시고 하나님의 뜻에 합한 간구로 우리를 이끄십니다. 그러므로 성령 안의 깊은 기도는 곧 그리스도의 중보에 기대어, 성령의 도우심으로, 아버지께 나아가는 삼위 하나님의 구원 사역 안에서의 기도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공로가 끼어들 틈이 없는 은혜의 신비입니다.

또한 바울은 이어서 말합니다.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겉모습만 보시는 분이 아니라, 마음의 깊은 결을 살피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겉으로는 그럴듯한 기도를 드리면서도 속은 불순할 수 있고, 반대로 겉으로는 말이 엉키고 표현이 서툴러도 속은 하나님을 향해 진실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진실을 아십니다. 그리고 성령의 생각을 아십니다. 왜냐하면 성령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간구는 하나님의 뜻과 어긋나지 않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흔들리지만, 성령의 간구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우리의 소원은 비뚤어질 수 있으나, 성령의 중보는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합니다. 그러므로 성령 안에서 드리는 깊은 기도는 내 뜻을 밀어붙이는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 안으로 빚어지는 기도입니다. 기도의 성숙은 내가 더 많은 것을 얻는 데 있지 않고, 내가 더 온전히 하나님의 뜻을 사랑하게 되는 데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질문이 하나 떠오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기도할 필요가 없습니까? 성령이 다 하시니 우리는 가만히 있으면 됩니까?” 아닙니다. 성령의 중보는 우리의 기도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기도를 가능하게 하고 살아 있게 합니다. 성령의 중보는 우리를 무력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무릎 꿇게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의 책임을 지우지 않고, 오히려 책임을 은혜로 감싸 능력 있게 합니다. 성령께서 도우시기에 우리는 기도합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기에 우리는 더 담대히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기도의 자리는 “내가 해냈다”가 아니라 “주께서 하셨다”로 마무리되는 자리입니다. 이것이 복음적 기도의 숨결입니다.

그러면 성령 안에서 드리는 깊은 기도는 어떤 모습으로 우리의 삶에 나타나겠습니까. 첫째로, 그 기도는 정직해집니다. 성령은 거짓을 기도로 칠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꾸미려는 습관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은 우리를 진실로 이끄십니다. “주님, 저는 지금 겁이 납니다. 저는 제가 무엇을 구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흔들립니다.” 이런 고백이 오히려 깊은 기도의 문이 됩니다. 둘째로, 그 기도는 말씀에 의해 교정됩니다. 성령은 말씀을 통해 일하시는 분이십니다. 말씀을 벗어난 열심은 종종 자기 확신이 될 뿐입니다. 그러나 성령 안의 기도는 성경의 언어를 배우고, 성경의 방향을 따라갑니다. 셋째로, 그 기도는 탄식을 품되 소망을 잃지 않습니다. 탄식이 있다는 것은 아직 완성이 오지 않았다는 증거이지만, 동시에 그 탄식이 하나님께 향한다는 것은 소망이 살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넷째로, 그 기도는 공동체적 사랑을 넓혀 줍니다. 성령의 간구는 성도를 위한 간구입니다. 성령 안의 기도는 “나만”의 기도에서 “우리”의 기도로 자라갑니다. 나의 필요를 넘어서 교회와 이웃과 열방을 품습니다.

이 지점에서 한 가지 예화를 드리고 싶습니다. 어느 교회에 오랫동안 병으로 고통받는 성도가 계셨습니다. 통증이 심해 밤잠을 자주 설쳤고, 마음도 자주 무너졌습니다. 그분은 어느 날 조용히 목회자에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저는 요즘 기도가 안 됩니다. 앉아도 말이 안 나오고, 하나님께 무엇을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목회자는 그분에게 긴 조언을 하기보다, 로마서 8장 26절을 펴서 함께 읽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도님, 지금 기도가 안 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 가장 깊은 기도의 자리로 들어가고 계십니다. 말이 안 나오는 그때, 성령께서 성도님을 위해 친히 간구하십니다. 성도님은 그 자리에만 계셔도 됩니다. 눈물로만 있어도 됩니다. 하나님은 그 눈물을 기도로 받으십니다.” 그 후 그분의 기도가 갑자기 유창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더 이상 “기도가 안 된다”는 죄책감에 짓눌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무릎을 꿇을 때마다 “성령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위로가 가슴 깊은 곳에 놓였습니다. 통증은 남아 있어도, 절망은 점차 물러갔습니다. 그분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이제는 기도하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기도 자리에서 하나님께 기대어 쉬게 됩니다.” 이것이 성령 안에서 드리는 깊은 기도입니다. 그 깊음은 문장의 화려함이 아니라, 하나님께 기대는 신뢰의 깊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령 안의 기도는 우리를 두 갈래의 오류에서 건져 냅니다. 하나는 기도를 인간의 능력으로 여기며, ‘잘 기도하는 사람’이 되려는 종교적 자만입니다. 다른 하나는 기도를 포기하며, ‘나는 기도 체질이 아니야’라고 물러서는 낙심입니다. 복음은 둘 다 무너뜨립니다. 우리는 스스로 기도를 만들어낼 수 없지만,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기도를 일으키십니다. 우리는 마땅히 빌 바를 모르지만, 성령께서 하나님의 뜻대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십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경쟁이 아니라 은혜입니다. 기도는 자랑이 아니라 의탁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말씀 앞에서 한 가지 결단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성령이 도우시니, 기도 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기도가 되는 날만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가 안 되는 날에도 기도 자리로 가야 합니다. 기도는 감정이 좋아질 때 하는 취미가 아니라, 은혜가 필요한 자가 숨 쉬듯 드리는 생명의 통로입니다. 때로는 기도가 짧아도 됩니다. 때로는 말이 엉켜도 됩니다. 때로는 “주님” 한마디만 남아도 됩니다. 그러나 그 한마디가 성령의 손에 붙들릴 때, 하늘에 닿는 간구가 됩니다.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성령 안에서 드리는 깊은 기도는 결국 우리를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데려갑니다. 왜냐하면 성령의 간구는 언제나 복음의 길을 따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종종 “이 고난을 없애 달라”로 시작하지만, 성령은 “이 고난 속에서도 그리스도를 놓치지 않게 하소서”로 우리를 이끄십니다. 우리의 기도는 “내 뜻이 이루어지게 하소서”로 흔들리지만, 성령은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소서”로 우리를 빚으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는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깊은 기도를 들으신 순간은, 우리의 가장 큰 소원을 들어주신 순간만이 아니라,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더 깊이 붙이신 순간이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성령 안에서 드리는 깊은 기도는 결국 하나님을 더 사랑하게 하고, 죄를 더 미워하게 하며, 은혜를 더 귀히 여기게 하고, 교회를 더 품게 하며, 세상을 향한 사명을 더 겸손히 감당하게 합니다. 그리하여 기도는 우리의 입술을 넘어, 우리의 삶을 기도로 변화시킵니다. 말씀과 순종과 사랑이 한 호흡으로 이어지는, 조용하지만 견고한 경건의 길로 우리를 데려갑니다.

그러니 오늘도 무릎을 꿇으십시오. 말이 많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마음이 어지러워도 괜찮습니다. 당신의 연약함이 기도의 자격을 박탈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연약함이 성령의 도우심을 더 선명히 드러낼 자리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연약함을 도우십니다. 우리는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십니다. 이 복음이 오늘 당신의 기도를 다시 살게 하기를, 그리고 당신의 탄식이 소망으로 빚어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요약
로마서 8장 26절은 성도의 기도가 인간의 능력에 근거하지 않고 성령의 도우심과 중보에 근거함을 밝힙니다. 성도는 연약하여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지만,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친히 간구하십니다. 하나님은 성령의 생각을 아시며, 성령은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해 간구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령 안의 기도는 죄책감이나 자만을 버리고, 탄식 속에서도 소망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복음적 기도입니다.

묵상 포인트
기도가 막힐 때 저는 무엇을 근거로 낙심하거나 자책하였습니까.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함”을 인정하는 것이 왜 은혜의 출발입니까.
말이 없는 기도, 눈물의 기도에도 성령의 중보가 역사한다는 사실이 제 마음을 어떻게 위로합니까.
내 기도의 중심이 “내 뜻”에서 “하나님의 뜻”으로 옮겨가는 표지는 무엇입니까.
기도가 삶을 변화시킨 경험이 있다면, 그 변화의 열매는 무엇이었습니까.

강해
본문은 “이와 같이”라는 연결로 시작하여, 앞선 로마서 8장의 탄식과 소망의 맥락 속에서 성령의 사역을 제시합니다. 성도는 이미 구원받았으나 아직 영화에 이르지 못한 “이미-아직”의 긴장 속에서 탄식합니다. 그 탄식은 신앙의 실패가 아니라, 구원의 완성을 사모하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연약하여 무엇을 어떻게 구해야 할지 모릅니다. 여기서 성령의 도우심이 결정적으로 등장합니다. 성령은 단순히 기도하도록 격려하는 차원을 넘어, 성도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십니다. 성령의 간구는 인간 언어의 한계를 넘어서는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묘사됩니다. 이어지는 27절은 하나님이 마음을 살피시는 분이며 성령의 생각을 아신다는 점, 그리고 성령의 간구가 하나님의 뜻과 일치한다는 점을 강조하여, 성도의 기도가 하나님의 뜻 안에서 보존되고 인도됨을 보증합니다.

주석
“성령도”는 성령이 보조적 존재가 아니라 구원 경륜에서 인격적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전제합니다.
“연약함”은 도덕적 나약함만이 아니라, 죄 아래 놓였던 인간이 남아 있는 연약함과 무지, 한계 전반을 포괄합니다.
“마땅히 빌 바”는 기도의 내용과 방향, 동기까지 포함합니다.
“말할 수 없는 탄식”은 성령께서 신음하신다는 인간적 감정 투사라기보다, 성도 안에서 일어나는 깊은 탄식을 하나님 뜻에 합한 간구로 ‘중보’하시는 신비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이해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친히 간구”는 성령의 사역이 실제적이고 능동적임을 강조합니다.

원어 주석
“도우시나니”(συναντιλαμβάνεται, synantilambanetai) 계열의 의미는 “함께 붙들어 주다/함께 짐을 져 주다”의 뉘앙스를 지닙니다. 옆에서 구경하며 돕는 것이 아니라, 짐을 함께 들어 올리는 동행적 도움입니다.
“연약함”(ἀσθένεια, astheneia)은 약함·무력함을 뜻하며, 인간의 제한성과 무능을 드러냅니다.
“마땅히”(δεῖ, dei)는 “필요하다/마땅하다”의 당위성을 담아, 기도가 하나님의 뜻과 조응해야 함을 암시합니다.
“간구하시느니라”(ὑπερεντυγχάνει, hyperentynchanei)는 “대신하여 중보하다”의 의미를 강하게 품어, 성령의 중보적 간구임을 강조합니다.
“말할 수 없는”(ἀλάλητος, alalētos)은 문자적으로 “말로 표현될 수 없는”을 뜻하여, 인간 언어의 한계를 넘어서는 깊이를 나타냅니다.
“탄식”(στεναγμοῖς, stenagmois)은 신음·탄식으로, 종말론적 소망과 고난의 현실이 맞닿는 자리에서 나오는 깊은 호흡을 표현합니다.

금언
기도는 성도의 능력이 아니라 성령의 은혜입니다.
말이 끝나는 자리에서 성령의 중보는 시작됩니다.
탄식은 소망이 죽었다는 증거가 아니라, 소망이 살아 있다는 증거가 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는, 결국 하나님을 더 사랑하게 만듭니다.
기도가 깊어진다는 것은, 말이 늘어난다는 뜻이 아니라 의탁이 깊어진다는 뜻입니다.

신학적 정리
삼위 하나님은 구원에서 분리되지 않고 한 경륜 안에서 역사하십니다. 성자는 객관적 구속을 이루시고 지금도 중보하시며, 성령은 그 구속의 효력을 성도에게 적용하고 기도 속에서 중보적 사역을 수행하십니다. 본문은 성령의 인격성과 신성을 전제하며, 성도의 기도가 은혜의 수단이되 그 주도권은 하나님께 있음을 보여 줍니다. 이는 인간 중심의 신앙 성취를 무너뜨리고, 전적인 은혜에 기초한 경건을 세웁니다.

주제별 정리
기도: 내용의 적합성보다도 먼저, 하나님께 나아가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에 근거합니다.
연약함: 기도 생활에서 실패의 낙인이 아니라, 성령의 도우심을 경험하는 통로가 됩니다.
탄식과 소망: 종말론적 긴장 속에서 성도는 탄식하되 낙심하지 않습니다. 성령의 간구는 그 탄식을 소망의 언어로 하나님께 올려 드립니다.
하나님의 뜻: 성령의 간구는 하나님의 뜻과 합치되므로, 기도는 점차 ‘내 뜻의 관철’에서 ‘하나님의 뜻의 사랑’으로 성숙합니다.

목회적 정리
기도가 안 된다고 느끼는 성도에게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책망이 아니라 복음의 위로입니다. 본문은 무릎 꿇을 힘조차 없는 성도 곁에 성령께서 계시며,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중보하신다고 선포합니다. 그러므로 목회 현장에서는 기도의 기술보다 복음의 토대(그리스도의 중보, 성령의 도우심)를 재확인시켜야 합니다. 또한 말씀과 기도가 분리되지 않도록, 성령의 인도는 말씀을 통해 구체화된다는 점을 반복하여 가르칠 필요가 있습니다.

성도들의 결단 및 적용
기도가 막히는 날에도 기도 자리로 나아가겠습니다.
내 욕망을 포장한 기도에서 돌이켜, 하나님의 뜻을 사랑하는 기도로 빚어지기를 구하겠습니다.
말씀을 더 가까이하여, 성령께서 말씀을 통해 내 기도를 교정하시도록 순복하겠습니다.
나만의 필요를 넘어 교회와 이웃을 품는 중보의 폭을 넓히겠습니다.
탄식이 찾아올 때 그것을 신앙의 실패로 단정하지 않고, 성령께서 나를 붙드시는 자리로 받아들이겠습니다.

Full Source : Artificial Intellig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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