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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디메오의 신앙 (마10:46-52)

by 【고동엽】 2022. 9. 27.

바디메오의 신앙   (마10:46-52)


사람의 일생은 언제나 그가 살아가는 환경의 영향때문에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며 살아갑니다.
살아가는 삶의 자리가 힘들고 어려울 때는 마음에 아픔과 고통과 괴로움을 가지고 살아가지만, 삶이 평안하고 즐거울 때는 기쁨의 삶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우리의 삶의 환경을 우리 마음대로 만들어 갈 수 없기에 인간은 절망하고 괴로워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는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이 고통스럽고 절망할 수 밖에 없는 자리였지만 그러나 그 절망할 수 밖에 없는 환경을 희망으로 바꾼 아름다운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바디매오는 앞을 보지 못하는 소경인데다 길거리에서 구걸로 연명하며 살아가는 거지이기도 했습니다. 어느날 예수님 일행이 여리고 지방을 지나가시게 되었을 때 소경 바디매오가 길가에 앉았다가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소식을 듣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시끄럽다고, 좀 조용히 하라고 꾸짖었습니다. 그러자 바디매오는 더욱 크게 소리지르며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였습니다. 이때 예수님이 가시던 걸음을 멈추시고 "내가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물으셨습니다. 이때 소경의 딱 한마디의 말, "주님 보기를 원하나이다" 하였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바디매오를 향하여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 하였느니라" 하시자 마자 소경이 보게 되어 예수님을 좇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소경, 얼마나 불행합니까? 누구하나 그를 따뜻하게 동정해 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기에 저렇게 소경이 되었느냐고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세상에 앞을 보지 못하는 일처럼 답답한 일이 어디에 있을까요?
소경이요 벙어리요 귀머거리인 삼중고를 지녔던 헬렌 켈러 여사가 쓴 "사흘동안만 눈을 뜰 수 있다면"이라는 글이 있습니다. 헬렌 켈러여사는 아주 어려서 눈을 볼 수 없게 되고, 귀가 들리지 않아서 결국 말을 못하게 되는 불행을 안고 산 사람입니다. 그를 가르치는 가정교사가 "물"이라는 단어 하나를 가르치는데 무려 석달이 걸렸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끝내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아니하고 계속 노력해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신체장애자들에게 큰 용기를 불어 넣었으며, 건강한 사람들에게도 큰 교훈을 준 훌륭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헬렌 켈러는 "사흘동안만 눈을 뜰 수 있다면"이라는 글에서 가장 보고 싶은 것이 무엇일까를 상상해 보았습니다. "첫째날에는 친구들의 모습을 보고, 천진스러운 아기를 보고, 숲에서 자연의 아름다움을 보고, 저녁 노을을 보겠습니다. 둘째날은 밤이 낮으로 바뀌는 감격스러움을 보고, 미술관에 가서 예술품을 감상하고, 저녁에는 영화를 보겠습니다. 셋째날에는 해뜬 광경을 보고, 길에서 사람들이 오가는 모습을 보고, 빈민가, 공장, 아이들이 노는 공원도 가보겠습니다" 그러면서 헬렌 켈러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내일이면 장님이 될 것처럼 눈을 사용 하십시오. 내일이면 귀머거리가 될 것처럼 말소리와 새소리, 오케스트라의 힘찬 선율을 들어 보십시오. 하지만 모든 감각중에 볼 수 있다는 것이 가장 즐거우리라 확신합니다" 소경의 가장 큰 욕구가 있다면 보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바디매오도 보는 것이 그의 절실한 요구였기에 예수님이 내가 네게 무엇하여 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으셨을 때 바디매오는 단 한마디로 보기를 원한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오늘 바디매오의 신앙을 보면서 오늘 우리들의 가져야 할 신앙의 자세를 점검해 보기를 원합니다.

첫째로, 바디매오의 신앙은 예수님 만나기를 소원하는 신앙입니다. 모름지기 길가에 앉아서 지나가는 사람에게 동전푼이나 받고 동정을 받고 살아가는 바디매오에게는 꿈이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바디매오에게 꿈을 심어 주었습니다. "다윗의 후손가운데 예수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분은 사람들에게 놀라운 기적을 행하시는 분입니다. 나인성 과부의 아들과 나사로와 회장당의 딸을 살리셨고, 어떤 소년의 점심으로 오천명을 먹이시고도 열두광주리를 남겼고, 38년된 병자와 12년 된 병자를 고쳤고, 귀머거리의 귀를 열어 주셨고, 눈먼자를 보게 하셨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이것은 바디매오에게는 가장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희망이 그 마음속에 솟아 오르고 그분을 만나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집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이 지금 자기가 있는 곳을 지나가신다는 소식을 듣게 되자 그냥 앉아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보고 싶은 마음이 그의 마음에 불타올랐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런 간절함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을 뵙고 싶은, 주님을 만나고 싶은 욕망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 다녔습니다. 예수님을 눈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라 다녔다고 해서, 눈으로 예수님을 보았다고 해서 예수님을 만난 것이 아닙니다.

삭개오를 보세요. 예수님이 여리고를 지나가실 때 멀리서도 예수님을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나기를 소원했습니다. 그래서 뽕나무에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만나 그 가정이 구원받았습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도 예수님을 보는 신앙이 아니라 예수님을 만나는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바디매오는 새로운 기대감으로 가득찼습니다. 기대감을 가진 사람은 희망을 잃지 않습니다. 희망이 있는 사람은 절망하지 않습니다. 계속 희망을 가지고 있으면 기회가 옵니다. 바디매오에게도 기회가 왔습니다.

어느날 바디매오가 길가에 앉아 있는데 많은 사람들이 몰려오는 소리가 납니다. 소경의 마음은 뛰기 시작했습니다. 오래전부터 만나뵙기를 소원했던 분, 자기의 요구를 들어주시고, 자기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는 분이 지금 가까이 보고 계신 것입니다. 드디어 바디매오는 소리쳤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오늘 우리도 주님을 만나 그분의 도움을 청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이 주님을 보는 신앙에서 주님을 만나는 신앙으로 바꾸어져야 합니다. 우리는 매일 매일 주님을 봅니다. 어제도 보고, 오늘도 보고, 그러나 보다 중요한 신앙은 예수님을 만나는 신앙입니다. 오늘도 예수님 만나고, 내일도 예수님 만나고, 예수님 만나는 자리에 기적이 있습니다. 능력이 있습니다. 역사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이 예수님을 보고 지나치는 신앙이 아니라 날마다 예수님 만나는 신앙이 되시기 바랍니다.

둘째는 부르짖는 신앙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기를 소원했던 바디매오는 예수님이 지금 그곳을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가 얼마나 간절히 크게 소리를 질러댔던지 많은 사람들이 그를 핀잔하면서 잠잠하라고 꾸짖었습니다. 물론 사람들은 바디매오가 지나치게 크게 소리를 질러댔기 때문에 소란을 막으려고 자연스럽게 막아섰던 것입니다. 그러나 모처럼의 기회를 놓치지 않으 려는 그의 갈망앞에 사람들의 핀잔이나 방해는 예수님과 자기 사이를 차단시키는 장벽이 될 수가 없었습니다. 바디매오는 사람이 잠잠하라고 꾸짖는 데도 불구하고 더욱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하고 거듭 외쳤습니다. 그야말로 막아서고 비난하고 꾸짖는 사람들의 힘겨운 장애를 뛰어 넘었습니다.

바클레이는 "무엇으로도 예수님은 만나고자하는 바디매오의 고함소리를 막을 수 없었다" 고 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사람들의 장벽을 뛰어넘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바디매오가 사람들의 장벽때문에 주저 앉고 말았다면 그의 기대감이나 희망은 좌절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만나려면 주니과 우리 사이의 장벽을 뛰어 넘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 앞에 이르기까지에는 많은 신앙의 장애물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신앙의 장애물도 이겨가야 합니다.

사람들의 핀잔이나 꾸짖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부르짖는 바디매오의 소리에 주님은 걸음을 멈추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계속 부르짖는 기도는 주님의 걸음을 멈추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부르짖으면 주님의 주의를 기도하는 사람에게 집중할 수 있습니다. 만약에 이 소경이 기도하지 않았다면 예수님은 그곳을 그냥 지나치고 말았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기도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를 도우실 수 있는 주님이 그냥 지나쳐 버리는 일이 우리의 삶속에서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주님의 걸음을 멈추게 했던 바디매오의 부르짖는 기도는 어느 유명한 사람, 영향력있는 사람의 기도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거지 소경에 불과 했습니다. 하나님은 약한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부르짖는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우리도 응답의 확신을 가지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셋째는 겉옷을 내어 버리고 뛰어 일어나는 믿음입니다. 예수님이 바디매오를 부르신다는 말을 전해 주었을 때 소경은 겉옷을 내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님께 나아갔습니다. 그가 겉옷을 입고 예수님께 나아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겉옷은 예수님께로 뛰어 일어나가는 데는 장애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주저하지 아니하고 겉옷을 내어 던졌습니다. 대개 많은 사람들이 이 순간에 실패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만나기를 소원합니다. 주님도 우리를 만나시기를 원하여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버려야 할 것들을 버리지 못하고 주저합니다. 포기해야 할 것들을 포기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버려야 할 것들을 버리지 못하고, 포기해야 할 것들을 포기하지 못함으로 주님의 은혜와 능력을 힘입지 못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기자는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서 우리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자"고 했습니다. 무슨 겉옷을 벗어 버려야 합니까? 죄와 죄를 낳는 습관을 벗어 버려야 합니다. 기도하기 위하여 무릎을 꿇었을 때 하나님과 나 사이에 장애가 되는 것이 있지 않습니까? 그것을 벗어 버려야 합니다. 자기 사랑도 벗어 버려야 할 겉옷입니다. 때로는 취미나 체면이나 오락이나 친구관계가 신앙의 장애가 될 때도 있습니다. 그것들을 벗어 버려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 마음에서 두 번째 자리를 원치 아니하십니다. 우리 주님을 제일 먼저 모시고 그밖의 모든 것을 기꺼이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진실로 주님 만나기를 원한다면 신앙의 장애가 되는 것을 벗어 버려야 합니다. 예수님은 겉옷을 내어버리고 뛰어나온 바디매오에게 "내가 네게 무엇하여 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의 간절한 소원은 변함이 없습니다. 무엇이든지 다 해결해 줄 수 있는 분이 "내가 네게 무엇하여 주기를 원하느냐?"했을 때 다른 것을 구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디매오는 시종일관 여일했습니다. 주님은 보기를 원하는 바디매오를 향하여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어 보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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