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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소중한 만남 (고전 15:9-11)

by 【고동엽】 2022. 9.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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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소중한 만남  (고전 15:9-11)
                  
오늘은 전도주일입니다. 오늘 생전 처음으로 교회에 오신 분들도 계실 텐데 여러분을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처음 교회에 오신 분은 오늘이 여러분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날로 기억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많은 사람을 만나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살아가면서 내가 누구를 만나느냐 하는 문제는 참 중요한 일입니다.  그렇게 만나는 사람들 가운데는 참 소중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떤 분은 나의 일생을 바꾸어 놓는 그런 만남도 있습니다. 그리고 나의 운명도 바꾸어 놓는 그런 만남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사람들과의 만남을 소홀히 하면 안 됩니다. 우리들이 살아가면서 잘 만나야 할 사람이 몇 명 있습니다.


하나는 “부모님을 잘 만나는 일”입니다.

이 만남은 운명적인 만남입니다. 내가 태어나 보니까 이미 내 부모가 주어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만남을 하늘이 맺어준 만남이라고 말합니다. 좋은 부모를 만나는 것이 복입니다. 맹자의 어머니는 아들을 위해서 세 번 이사했다고 합니다. 오늘 부모는 이점에서는 맹모 보다 훨씬 적극적입니다. 오늘 부모들은 아이들의 공부문제라면 누구에게도 뒤떨어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맹모가 아들을 위해서 이사한 것은 오늘 어머니들과는 좀 생각이 다릅니다. 맹모는 아들을 위해서 묘지근처로 이사하고 시장근처로 이사하고 마지막에는 학교근처로 이사를 했다고 합니다.

맹모가 생각 없이 그렇게 이사했겠습니까. 오늘은 무조건 강남으로 이사를 하는데 그런 것이 아닙니다. 맹모는 아들을 데리고 묘지근처로 이사해서 아들로 하여금 그곳에서 인생의 깊음과 엄숙함을 체험케 했을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맹모는 아들을 데리고 시장근처로 이사를 갑니다. 거기서 아들에게 이 세상의 삶의 모습과 생존경쟁의 원리를 체득하게 해 주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들을 데리고 마지막으로 학교근처로 이사를 갑니다. 거기서 학문의 깊음을 알게 하고 깨닫게 해 주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맹모의 아들에 대한 배려입니다. 그래서 그 아들이 커서 맹자가 됩니다. 그것은 전적인 어머니의 세심한 배려와 공로입니다. 그래서 부모를 잘 만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모세의 어머니도 마찬가지입니다. 모세는 나라가 없을 때 태어납니다. 그때는 아들을 낳으면 모두 나일 강에 버려야 할 때입니다. 모세도 더 이상 부양할 수 없어 나일 강에 버렸는데 마침 하류에서 목욕하던 공주에게 발견되어 궁중에서 자라게 됩니다. 그리고 모세의 어머니는 유모로 고용되어 모세를 양육합니다. 그때 모세의 어머니는 어린 모세를 양육하면서 늘 품에 안고 이야기 해 주었을 것입니다. “너는 커서 나라 잃은 이 민족을 이끌 수 있는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모세가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누구보다도 부모를 잘 만나야 합니다.

또 “배우자도 잘 만나야” 합니다.

이 배우자도 참 중요한 만남입니다. 다른 사람은 마음에 맞지 않으면 안보면 되는데 이 배우자는 안보고 살 수도 없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뜻이 잘 맞는 부부로 만나서 산다는 것은 복입니다. 일본의 여류작가 미우라 아야꼬라는 여인은 남편과 참 뜻이 잘 맞는 부부였습니다. 이 여인은 남편의 벌이가 적어서 가게를 차렸습니다. 그런데 이 가게가 너무나 잘됩니다. 그러니까 주변에 있는 가게들이 모두 죽습니다. 그 모습을 본 남편이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집 가게 잘되는 것 좋은데 이웃집 가게들이 모두 문을 닫으니 걱정이구려”. 그 말을 듣자 이 아내는 다음날부터 물건을 줄였습니다. 그리고 없는 물건은 이웃 가게로 손님들을 보냈습니다. 그러니까 시간의 여유가 생기게 되자 그때부터 틈틈이 글을 쓰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해서 탄생된 책이 빙점이라는 책입니다. 그 책을 세상에 내 놓고 그는 일약 일본의 여류작가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하나님이 그 여인에게 그런 방법으로 보상해 주셨던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아굴라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부르스길라와 아굴라, 그 두 사람은 부부입니다. 아주 뜻이 잘 맞는 신앙의 부부였습니다. 그 부부는 언제나 함께 다니며 전도 일을 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의 제일가는 동역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언제나 이름이 나올 때는 두 부부가 함께 이름이 등장합니다. 이것이 부부입니다. 얼마나 행복한 모습입니까. 두 부부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찬양대에서, 교사로, 함께 봉사하고 헌신하는 모습이 참 아름답습니다. 뜻이 맞는 부부의 모습이 좋습니다.

가끔 차가 밀리는 지역에 가면 어김없이 호두과자를 파는 부부들을 보게 됩니다. 아내는 과자를 만들고 남편은 서서 팔고 있습니다. 그 모습도 참 보기에 좋습니다. 부부가 함께 즐겁게 일한다면 그 모습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우선 둘이 뜻이 맞습니다. 한 사람이 못하겠다 하면 어떻게 그 일을 하겠습니까. 그래서 부부입니다. 뜻이 맞는 좋은 부부가 되는 것도 좋은 만남입니다.

그리고 “스승도 잘 만나야” 합니다.

스승은 자라나는 어린 지성에 많은 영향을 주는 사람입니다. 스승의 말 한마디에 일생을 바꾼 사람도 있습니다. 그만큼 스승이 미치는 영향이 크다는 말입니다. 철학자 플라톤은 정치가가 되는 것이 꿈이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소크라테스라는 철학자를 만나서 이야기하는 동안 그는 철학자가 되기로 마음 바꿉니다. 그래서 이 땅에 플라톤이라는 철학자가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얼마나 큰 영향을 주었다는 말입니까. 스승은 이런 존재입니다. 여러분, 성경에 나오는 바울과 디모데를 보십시오. 얼마나 좋은 스승과 제자사이 입니까. 좋은 스승 밑에 좋은 제자가 있습니다.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좋은 스승을 만나는 것이 복입니다.

그리고 “친구도 잘 만나야” 합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동료나 선배 그리고 동창은 참 좋은 길벗입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서는 이 길벗이 절대적입니다. 우리나라는 이 동향, 동창, 친구가 상당한 역할을 해 주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다윗과 요나단을 보십시오. 이 두 사람은 친구를 말할 때 가장 이상적인 관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윗이 가장 어려움에 처했을 때 요나단은 그에게 가장 훌륭한 상담자였고 의지자였고 충고자였습니다. 세상에 이런 친구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친구는 평소에도 좋은 관계이지만 어려움에 처했을 때 마음 놓고 찾을 수 있는 사람이 진정한 친구입니다. 그런 점에서 다윗에게 있어서 요나단이라는 친구를 가히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입니다.

  요나단은 사울왕의 아들입니다. 사실 그의 친구 다윗은 요나단에게는 가장 강력한 정적입니다. 요나단은 가만히 있으면 자신이 왕이 됩니다. 말하자면 세자입니다. 그런데 자신이 왕이 되는데 가장 걸림돌이 다윗입니다. 그리고 백성들이 모두 다윗을 장차 왕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다윗에게 요단이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네가 장차 왕이 되리라고 믿어, 그리고 나는 네 다음이야.” 세상에 이런 친구가 어디 있습니까. 이것이 친구입니다. 친구를 잘 만나는 것이 복입니다.

그런데 누구보다도 “예수를 만나야”  합니다.

물론 부모도, 배우자도, 스승도, 친구도 좋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 보다 더 중요한 만남은 예수와의 만남입니다. 우리들이 세상을 살아가다가 운명의 자리에 처하게 될 때 이들이 나에게 무슨 힘이 되겠습니까. 한번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이 살아가다 보면 항상 건강하고 행복하고 성공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살아가다 보면 반드시 내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사건에 직면해서 내 재주로는 속수무책일 때가옵니다. 그때는 무슨 힘으로 그 장벽을 극복할 수 있겠습니까.

예를 들면 지금 나의 죽음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요즘엔 이 암이 극성입니다. 그래서 몸이 조금만 이상해도 혹시 암이 아닌가 덜컥 겁이 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순간적으로 죽음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은 건강이 우상이 되는 시대입니다. 몸이 이상해서 진단을 받아보니 앞으로 3개월 밖에 살지 못한다고 합니다. 앞으로 3개월입니다. 그때 누굴 의지하겠습니까. 그때 누가 나에게 힘이 되어줄 수 있습니까. 부모입니까. 자식입니까. 아니면 친구, 스승, 배우자입니까. 그때 그들이 나에게 무슨 힘이 되어줄 것입니까. 사람이 살다 보면 반드시 그런 때가옵니다. 평소에는 별소리를 다 해도 괜찮습니다. 평소에는 예수가 있어도 없어도 괜찮습니다.

그런데 살아가다가 그런 일을 만났을 때는 반드시 예수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 세상에 예수님을 보내신 것입니다. 그때 예수를 아는 분만이 문제를 해결 받고 그의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지금까지 예수를 모르는 분이 참 많습니다. 세계의 여러 나라 사람들 말고 우리 집의 내 가족, 내 부모, 내 형제, 내 친구들도 많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평소에는 예수님이 없어도, 몰라도, 안 믿어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살아가다 보면 언제나 평상시와 같이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예수는 위기의 예수입니다.

아이작 뉴턴이라는 분은 종말의 시기를 맞이했습니다. 그래서 정신이 혼미해졌습니다. 누구도 기억할 수가 없습니다. 제자들이 와서 “선생님은 아무것도 모른다 하시니 도대체 무엇을 생각하고 있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때 선생님은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습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두 가지는 알지, 하나는 나는 죄인이라는 사실과 또 하나는 우리 주님은 나의 구주라는 것은 알고 있네”하고 대답하더라는 것입니다. 임종시에 정신이 혼미해서 다 잊어버린다 해도 이 두 가지는 기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믿음이 있으니까 임종시인데도 그렇게 평안한 것입니다.  

임종하는 모습을 보면 대개 두 가지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는 아주 평안히 죽어가는 모습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서 가장 아픈 일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죽는 일 아닙니까. 사람이 얼마나 고통스러우면 죽겠습니까. 그런데 그 순간에 얼마나 만족하면 편안하게 웃는 모습으로 죽어가겠습니까. 왜 그렇습니까. 그 이유는 예수께서 천사를 보내서 그 영혼을 영접하시니까 그렇게 평안하고 만족한 것입니다. 지금까지 말로만 듣던 천국을 천사들의 인도를 받고 가는데 왜 고통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모든 사람이 다 그렇게 임종을 맞습니까. 어떤 분을 보면 참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분들도 있습니다. 죽어가면서 이를 갈고 온몸을 뒤틀고 안간힘을 다 쓰는 분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고 정을 떼려고 그런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정을 떼려고 하는 모습이 아닙니다. 그 순간 분명히 캄캄한 어두움의 세계를 보았을 것입니다. 그 어두움의 세계는 사탄의 세계입니다. 거기로부터 온 안내자를 따라 가는 그 길이 유쾌하겠습니까. 즐겁겠습니까. 그러니까 가지 않으려고 몸부림을 쳤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몸을 비틀고 이를 갈고 그랬을 것입니다.  

예수는 심심해서 믿는 대상이 결코 아닙니다. 예수는 믿어도 되고 안 믿어도 되는 그런 값싼 존재가 아닙니다. 예수는 절대적 존재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일생을 바치며 목숨까지 바치며 그를 믿는 것입니다. 오늘의 사람들만이 아니고 역사를 보십시오. 얼마나 오래 전부터 사람들이 고 고통의 환경 속에서 예수를 믿었습니까. 예수는 우리 인생에 절대적 존재입니다.

인생은 심은 대로 거두는 심오한 존재입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이 지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지으실 때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법칙과 질서와 뜻이 부여되었습니다. 그 뜻을 알고 하나님을 믿은 사람들은 천국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신앙인들이 마지막 종말의 순간에도 그렇게 자신 있게 죽을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믿고 심은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믿고 선한 것을 심는 생활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면 장래에 반드시 그 결실을 주신다고 약속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을 보면 사도바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바울이라는 사람은 예수를 모를 때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고 박해하고 잡아 죽였던 아주 악질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을 아주 악랄하게 핍박했습니다. 사람이 모르면 용기가 있습니다. 예수를 모르는 사람들은 별 소리를 다 합니다. 바울이 예수를 모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을 악랄하게 핍박하고 박해하고 못살게 굴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이 바울이 예수를 만나게 됩니다. 그는 그날 생전 처음으로 예수를 만났습니다. 바울은 천성이 아주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아주 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도 어지간해서 예수를 만나고 믿기가 힘든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길을 가던 바울에게 환상으로 나타나셨습니다. 나타나서 “너는 왜 나를 핍박하느냐” 하고 질책하신 다음에 그 자리에 거꾸러트리셨습니다. 이 바울이 아주 강한 사람이니까 하나님도 그를 땅바닥에 내동댕이치듯 거꾸러트리셨습니다. 그때 바울은 환상중의 예수를 만난 후 순간 눈이 멀어버립니다. 너무 강한 빛에 노출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3일 동안 혼돈상태에서 식음을 전폐하고 헤매게 됩니다.

  그때 바울은 생전 처음 말로만 듣던 그 예수를 만난 것입니다. 만나고 보니까 그 예수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었습니다. 그것을 깨닫고 나서 이 바울이 두 손을 들고 항복했습니다. 그리고 맹세했습니다. “나는 이제부터 당신의 제자가 되겠습니다.” 그리고 그날부터 바울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모든 것들을 다 버립니다. 다 포기해 버립니다. 지금까지 그토록 소중히 여기던 모든 것을 분토와 같이 버린다고 했습니다. 아주 시원한 결단입니다. 그리고 그날부터 바울은 오직 예수만 전파하는 전도자의 삶을 살게 됩니다. 그리고 바울은 그 예수님을 만난 것을 그렇게 행복하게 생각하며 평생을 예수님을 전하는 삶을 아주 만족하게 살아갑니다.

오늘 읽은 본문 말씀은 그렇게 살아가는 동안 그 마음을 고백한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저도 제 인생 가운데서 가장 행복한 일이 있다면 그것은 예수님을 만나게 된 일이라고 생각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도 지금 예수님을 만나서 이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행복이 여러분들에게도 그대로 주어지시기를 기원합니다.  


출처/이정익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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