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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보다 사랑이다 (요 8:3-11)

by 【고동엽】 2022. 9. 25.

죄보다 사랑이다   (요 8:3-11)

하나님이 세상에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에 예수님을 보내신 것은 참으로 큰 선물입니다. 왜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셨는가 하면 은혜를 주시고 소망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세상을 심판하고 정죄하고 고발하려 함이 아니고 기쁨을 주고 행복을 주고 소망적인 삶을 살게 하려고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신앙의 삶은 소망의 삶입니다. 은혜의 삶입니다. 신앙은 사람으로 하여금 삶을 밝고 건강하고 신나게 하는 은혜의 삶입니다. 그리고 신앙은 우리로 하여금 마음과 삶을 따뜻하게 밝게 기쁘게 용기 있게 해 줍니다. 신앙의 삶은 누구에게나 자신감을 갖게 해 주는 삶입니다. 그것이 신앙의 삶이 주는 은혜요 축복입니다.

사도바울이 처음 이 신앙을 체험하고 예수를 만나고 나서 얼마나 행복해 했습니까. 아주 만족해했습니다. 예수를 만나고 나서 사도바울처럼 행복해하고 기뻐했던 사람도 없습니다. 그래서 고백하기를 “나는 이전에 소중하게 여기던 것들을 분토와 같이 미련 없이 버린다”고 했습니다. 또 “나는 이제부터 예수만 알기로 작정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일생동안 분주하게 돌아다니며 예수만을 전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신앙의 생활은 이런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신앙 안에 들어오면 이렇게 밝고 신선하고 따뜻하고 적극적이 되고 앞서가게 되고 행복하게 됩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이 주는 은혜이고 축복입니다. 이렇게 살아가려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기쁨이고 구원의 은혜이고 주님을 만난 기쁨의 삶인 것입니다. 신앙인은 이렇게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그 삶이 신앙인의 삶인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신앙인들이 실제적으로 이렇게 살아가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보면 어딘지 모르게 어둡고 소극적이고 적극적이지를 못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모습에서 자신감이나 밝음이나 즐거움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모습이 없어 보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거기에 그럴만한 분명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하나는 “신앙의 깊이의 문제” 일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영적생활입니다. 그러면 영적인 어떤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영적 생활에서 오는 맛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 맛을 알아야 신앙생활이 재미가 있고 기쁨이 있고 즐거움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영적 체험이 없으니까 그 맛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 맛을 모르면 할 수 없습니다. 맛을 모르는 사람에게 아무리 설명해 준들 어떻게 알겠습니까.

  학의 새끼가 오리새끼들 틈에서 자랍니다. 자신이 학인 줄을 모릅니다. 연못에 학들이 떼를 지어서 사뿐히 내려앉았습니다. 그 모습을 보니 나는 왜 이 신세인가 하고 눈물을 흘렸다는 것입니다. 모르면 할 수 없습니다. 맛을 기대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신앙생활 10년을 해도 이 신앙의 삶이 주는 기쁨이나 즐거움이나 감사함을 모르는 분이 많습니다. 신앙의 깊이에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소극적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신앙이 소극적인 분이 있습니다. 그런 분은 깊이 알아도 별로 큰 기쁨의 마음이 없습니다. 그런 분은 마음을 활짝 열고 다가가지를 않습니다. 언제나 변두리에 머물러 있습니다. 깊이 들어가지를 않습니다. 그것을 언저리 신앙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발전이 없고 깊은 체험이 없고 언제나 소극적인 자리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마음이 이렇게 소극적이면 감동도 적습니다. 깊이에서 주어지는 은혜를 체험할 수가 없습니다. 한 시간 와서 예배드리고 그냥 돌아가면 끝입니다.

그러니 맛을 느낄 수가 있습니까. 그래서 봉사하고 헌신하라는 강조하는 것입니다. 주안에서 봉사하고 헌신하는 기쁨이 얼마나 큰 것인데 그것을 모릅니다. 큰 고기를 잡으려면 깊은 바다로 나가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지라고 했습니다. 깊은 곳으로 가야 큰 고기를 잡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봉사하고 헌신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일이 다가오는 것이 참 행복합니다. 기쁨이 있습니다. 그 삶이 신앙의 삶입니다.


세 번째는 “성격에도 문제가 있을 것”입니다.

어떤 분은 늘 혼자입니다. 어울리지를 않습니다. 마음을 활짝 열고 받아들이고 함께 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혼자하는 삶이 아닙니다. 함께 하고 더불어 하고 어울려서 하고 같이 해야 하는 생활입니다. 장작불은 같이 모아놓아야 잘 탑니다. 잘 타던 불도 장작을 흩어 놓으면 꺼집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 가면 신이 납니다. 힘이 솟습니다. 능력이 나옵니다. 용기가 솟아오릅니다. 열기가 있습니다.

그래서 마가의 다락방에 열기가 있었던 것은 함께 모여 힘 있게 기도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그곳에 성령이 임했던 것입니다. 그곳에 한 두 사람 좀 생소한 사람이 있어도 그 열기에 묻힐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모두가 은혜를 입을 때 그 사람도 함께 은혜를 입게 되는 것입니다. 성격이 늘 혼자인 분들은 조용히 왔다가 조용히 돌아갑니다. 그러니까 10년이 되어도 더 이상 깊어지지 않고 발전하지도 않고 뜨거운 영적 체험도 적은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함께 하는 생활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성도의 교제에 힘쓰라고 강조했습니다.  

네 번째는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그것은 “죄의 문제” 일 것입니다.

사람은 마음속에 있는 생각과 많이 사용하는 말의 지배를 받고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우리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말이 우리의 삶, 마음, 생각을 지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생활에서, 교회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죄라는 말입니다. 참 많이 사용합니다. 그리고 “하지 말라”는 말도 많이 사용하는 말입니다. “하지 말라”는 말은 “하라”는 말 보다 훨씬 더 많습니다.

10계명이 모두 열 계명인데 그 열개의 계명 중에 두 가지만 “하라”는 계명이고   여덟 가지 계명은 모두 “하지 말라”는 계명입니다. 다 지키며 살아야 하는데 다 지킬 수도 있습니까. 그러니까 늘 마음에 짐이 되어 있습니다. 날마다 회개하는 일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그래서 교회에 가면 회개하라는 말을 참 많이 합니다. 특히 부흥회 때는 회개하라는 말이 단골메뉴로 강조됩니다. 회개하라고 하면 뭔지도 모르고 무조건 용서해 달라고 기도를 합니다.

어느 여인은 새벽마다 교회에 와서 “이 죽을 죄인을 용서해 주십시오”하고 기도했습니다. 목사님이 그 기도를 듣고 “저 여인은 큰 사건을 일으켰나 보다”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기도가 끝난 후에 그분에게 “무슨 실수를 크게 져 지르셨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정색을 하면서 “아닙니다, 나는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습니다”하고 말합니다. 그래서 “아니 조금 전에 죽을 죄인을 용서해달라고 하지 않았습니까”하고 말하자 이 여인은 “그것은 그냥 사람들이 그렇게 기도하기에 그렇게 한 것입니다”하고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코미디입니다. 웃지 못 할 일입니다.

물론 죄는 회개해서 용서받아야 합니다. 죄를 지었으면 먼저 하늘에 회개해서 영적으로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 그렇게 해결 받고 나면 사함 받은 줄로 믿고 잊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 삶에 자신감이 생깁니다. 그것이 사함의 복입니다. 구원의 기쁨입니다. 구속에서 벗어난 기쁨이고 손을 씻은 기쁨입니다. 그래서 사함의 기쁨과 즐거움과 행복함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짐을 벗은 기쁨, 구속에서 벗어난 기쁨, 손을 씻은 기쁨이 주어집니다.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우리는 이 죄를 잊고 이 구속의 기쁨과 행복함과 자유함을 누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삭개오가 예수님의 만나고 말씀을 듣고 나서 얼마나 반갑고 기뻤으면 스스로 뇌물 받은 것은 4배로 갚고 전 재산의 절반을 내놓겠다고 했겠습니까. 막달라 마리아가 한때 귀신에게 매이고 죄에 매여 쇠사슬에 매인 사람처럼 구속 중에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를 만나면서 해결 받고 치유하고 고침 받고 사함을 받았습니다. 그러고 나서 얼마나 기쁜 마음이었으면 평생을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헌신의 삶을 살아갔겠습니까. 그것이 사함의 복이고 자유함이 주는 기쁨입니다. 바울이 예수를 알고 나서 얼마나 행복해했습니까. 이것이 사함의 복이고 자유함의 복입니다.

그래서 오늘 교회가 고칠 일이 몇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이제 교회는 너무 죄를 찾지 말고 사함 받은 후 주어지는 은혜를 더 강조해야 합니다. 그래야 신앙인의 삶이 더 밝아지고 더 행복해 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에 교회가 죄문제만 다루는 곳이 아니고 기쁨과 자유함과 은혜를 강조하는 곳인 줄 알게 해야 합니다.

또 설교에서 죄문제를 너무 강조하기보다 이 구원기쁨과 은혜로 주어지는 자유함 그리고 감사함을 더 많이 설교해야 합니다. 물론 죄문제도 설교해야 합니다. 그런데 너무 죄문제만 강조하다 보면 더 큰 은혜나 구원의 기쁨 그리고 새 생명을 얻은 즐거움의 삶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죄는 잠간이어야 합니다. 죄는 사함 받으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그런데 그 후에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은 너무나 큽니다. 그런데 그 큰 은혜가 죄문제 때문에 가려져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사해주신 죄를 사람들이 정죄하면 더욱 안 됩니다.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고 사함 받았는데도 교회 안에서 사람들은 용서를 안 합니다. 그래서 한번 실수한 사람을 평생 죄인으로 굴레를 쓰고 기를 펴지 못하고 살아가게 합니다.

어느 창녀가 늦게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그 삶을 청산하고 인생을 바꾸어 자신의 처지를 이해하는 좋은 배우자를 만나서 결혼을 했습니다. 아주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 은혜를 힘입어 신앙생활을 열심히 했습니다. 그런데 한편 마음에 자신의 과거가 알려지면 안 되겠다 싶어 이 부부가 멀리 이사를 가서 작은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하며 살아갑니다. 생전 처음 신앙생활하는 것이라 이 부부는 너무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 교인 중 한사람이 고향에 다녀오면서 그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교회에서 입소문이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는 이 부부가 사람들로부터 정죄함을 받고 따돌림을 받고 이곳저곳에서 수군거림의 대상이 되어서 완전 고립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 부부가 고민을 하다가 마침내 “교회는 안 그럴 줄 알았는데 교회에서까지 우릴 받아주지 않으면 우리는 어디로 가서 살아간단 말인가“하고 고민을 했습니다. 그렇게 고민하다가 교회에서 조차 우릴 받아주지 않으면 우리는 갈 곳이 없다 하는 결론을 내리고 두 부부가 자살해 죽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죄는 지적되고 해결되어야 하고 강조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죗값을 다 치루고 용서를 받았는데도 사람들은 용서를 안 합니다. 하나님도 용서하시고 주님도 용납해 주셨는데 교회 안에서 사람들은 용납을 안 합니다. 이것이 오늘 교회가 안고 있는 교리적 신앙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오늘 기독교의 가장 큰 약점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그런 사람들이 어디 있겠느냐고 물으실 것입니다. 그럼 여러분을 놓고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오늘 목사님이 아주 좋은 설교를 했습니다. 그 때 문득 생각되기를 “아 이 설교는 김 집사가 들어야 돼”하는 생각은 안 해보셨습니까. “오늘 설교는 김 집사가 꼭 들어야 하는데” 하고 어디 앉았나 하고 두리번거린 일 없습니까. 오늘 신앙인들이 이렇게 내 흠은 보지 않고 남의 흠을 지적하고 정죄하고 심판하기를 좋아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바리새인들이 간음한 여인을 잡아가지고 와서 예수께 이 여인을 율법대로 죽일까요. 살릴까요 하고 다그쳤습니다. 당시 율법으로는 간음하는 것을 현장에서 붙잡히면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여인은 분명 돌에 맞아 죽어 마땅한 여인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조용히 말씀했습니다. “너희 중에 누가 죄 없는 사람 있거든 돌로 치라.” 그랬더니 하나 둘씩 피하더니 나중에는 그 여인만 남게 되었습니다. 그때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나도 너를 용서했으니 집으로 돌아가라.”

우리는 죄의 문제에 해결방안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내 죄는 회개함으로 씻으면 됩니다. 주님께 회개하면 씻어주시고 사해 주십니다. 그 삶을 매일 매일 우리는 해결하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네 죄에 대해서도 관대해야 합니다.  예수님도 용서했는데 사람들은 용서를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전에 실수한 사람은 평생 그 죄를 씻을 길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그 죄의 흔적을 잊어주지를 않습니다. 오늘 신앙인들이 이렇게 살아가기 때문에 신앙생활이 재미가 없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무한한 자유를 주고 기쁨을 주고 홀가분한 마음을 주고 행복한 마음을 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얼마나 밝고 시원하고 따뜻한 삶입니까. 그래서 교회에서는 이제 죄문제 보다 소망 적이고 밝고 따뜻한 하나님의 사랑을 더 강조해야 합니다. 죄보다는 사랑이 훨씬 더 밝고 따뜻하고 소망적인 요소입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시편 8편에서 천지를 지으신 창조의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온 땅이여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 죄에 눌리고 짐 진 사람이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겠습니까. 모두 다 털어버리고 아주 가볍고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있을 때 세상을 보면 그렇게 밝고 따뜻하고 소망이 가득 찬 세상으로 보이는 법입니다.  

예수님이 왜 이 땅에 오셨습니까. 그것은 이 세상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죄를 지적하고 심판하고 정죄하려고 오신 것이 아니고 사랑을 주시려고 오셨습니다. 더 큰 사랑을 주고 살리고 구하고 사하려 오셨습니다. 이제는 사랑입니다. 용서입니다. 은혜입니다. 기쁨입니다. 이것이 가장 세상을 따뜻하게 만드는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울고 침울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의 죄는 씻어버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이 기쁨과 행복함과 자유함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그것도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세상을 심판하려함이 아니고 용서하고 은혜주시고 구원하시고 고치시려고 말입니다. 그것이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입니다. 얼마나 신나는 삶입니까. 이것이 신앙인의 삶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삶의 목적입니다. 그렇게 살아갈 때 나의 삶은 가장 즐거움과 기쁨과 소망의 생활이 되고 이 세상도 그런 삶을 살아가는 내가 있음으로 밝아지고 건강해지고 소망적인 세상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출처/이정익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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