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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 연구 총정리〓/바울 서신

바울서신 제 12 강

by 【고동엽】 2022. 8. 27.

바울서신 제 12 강

 

에베소서

 

오늘은 에베소서를 좀 보겠다 그랬죠. 에베소서를 읽고 좀 해왔어요? 에베소서 내용을 읽었어? 지금 여러분들은 바울서신을 정독해간 셈이지. 지금까지 에베소서에 있어서 저작성 문제, 저자문제, 즉 바울이 진짜로 이 편지를 썼느냐 아니면 바울의 제자가 바울의 이름으로 썼느냐? 다시 말하면 이게 바울의 진짜 편지냐? 아니면 이른바 “deutero-Pauline"이라고 하는 이차적으로 바울의 편지인 거냐? 바울의 제자가 바울의 생각을 담아서 쓴거냐? 이게 가장 중요한 문제예요. 골로새서와 더불어서도 이 문제가 나오는데 골로새서에서 보다 에베소서에서 더 심각하게 이 문제가 제기되는 이유는 첫째로 내용적으로 에베소서와 골로새서가 아주 비슷하면서 에베소의 몇가지 특징들이 있는데, 특징들이 골로새서보다 더 이차적 바울의 저작성을 지적하는 것 같다고 많은 學者들이 보기 때문에 그런 問題가 發生을 해요.

 

 

1. 저작성에 대하여

우선 이 便紙의 특징을 보면 첫째로 이 편지가 다른 바울의 편지들에 비해서 굉장히 독자들과 밀접한 개인적인 관계를 나타내는 면이 적어요. 아주 적어요. 바울의 다른 편지들에서는 바울이 독자들을 잘 알고 그들의 문제들을 속속들이 알고 그들에 직접으로 말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심지어 자기가 모르는 교회, 로마 교회에의 편지에서도 로마 교인들에게 직접적으로 호소하는 이런 style이 있는데 비해서, 에베소서에서는 개인적으로 친밀하고 직접적인 요소가 결여되어 있어요. 아주 impersonal하다구. 에베소서 6:21, 22 그런 한 두절을 빼어 놓고는 전체적으로 저자가 지금 독자들을 간접적으로 아는 것 같은 그런 인상을 우리에게 보여줘요. 골로새서와 비교해 봐도 이런 간접성, 그리고 개인적인 친밀성의 결여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구.

둘째로, 이것과 연결시켜서 보통 지적되는 것인데, 그러기 때문에 이게 하나의 편지라기 보다는 --한 교회에 보내서 그들에게 특별한 가르침을 주고 특별한 문제를 해결하려는 어떠한 편지라기 보다는-- 편지 형태를 갖춘 하나의 논문아니냐? 소 논문이라고 봐야 되지 않느냐? 기독론과 교회론에 관한 소 논문의 성격이 많다. 序文과 같애. 편지의 형태를 갖추기는 갖추었으나, 이게 실제로 어떤 교회에 보내진 편지라기 보다는 논문이 아니냐. 그렇다면 이것은 바울의 편지들 중에서는 그런 의미에서도 굉장히 독특하다 이말이예요.

셋째로, 어휘들과 style이 바울의 다른 편지들과 굉장히 다르다는 거야. 에베소서에서는 신약성경 전체에서 에베소서에서만 나오는 38개의 말들이 있다구. 이런걸“hapaxlegomena”라고 그러지. 헬라말 `απαξλεγομενα 에서 왔는데, 한번 말해진 소리, 신약성경에 ‘한번 나온 말’을 보통 `απαξλεγομενα  단수로, 그리고 그런 말들을 복수로 `απαξλεγομεναι 라고 그래. 가끔 나오는 말이야. 이건 그러니까 `απαξλεγομενα 가 다시 말하면 신약성경 전체에서 에베소서에만 한번 나오는 말들이 38번이고 바울의 편지들 중에 에베소서에만 한번 나오는 말이 44번이야. 다시 말하면 바울이 다른 편지들에선 전혀 쓰지 않는 말들이 44개나 이 편지에 있고 그래서 어휘들이 많이 다르다는 것, 둘째로 style이 많이 달라요. 긴, 아주 긴, 복잡하게 묵상하는 문장들, 관계사가 많고 추상명사들이 굉장히 많고 동격의 구절들이 이어져 나오는 또는 속격으로 동의어들이 자꾸 연결되어 있는 것들, 이런 style들은 바울의 다른 편지에서와 style이 많이 다르다. 바울의 다른 편지들에 있어서는 상당히 직접적인 문장으로 고수하는데 여기서는 이런 문장들이라. 그래서 그렇게 어휘와 style이 많이 다르다는 거야.

네째로, 1장의 1절에 그리스도의 예수의 아니, 하나님의 뜻을 통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이 그 다음에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에게 보낸다 할 때에 이 1:1의 εν Εφεσω 가 많은 이 고대 사본에는 생략되어 있다고. 없다고. 거기에 에베소에 라는 이 편지의 수신인들의 지명이 많은 중요한 寫本, 바울서신에서 가장 오래된 중요한 사본은 papirus 46(P46) 이지. 이런 사본들에 생략이 되어 있고, 또 에베소서를 인용하는 古代 교부들에 의해서도 이말이 생략이 되어 있는 것이 확인이 돼요. 그러기 때문에 자연히 사본학적인 문제는 “이 편지가 에베소 교회에 보내졌느냐, 아니냐?”의  문제라. 더구나 이 편지가 원래 에베소서에 보내졌다면 에베소 교회는 바울과 상당히 특별한 관계에 있던 교회지. 바울이 거기 오래 머물렀던 --적어도 한 2-3년 牧會했던-- 다른 어느 敎會에서 보다 더 오래 목회했던 교회라. 그런 교회에 이 편지를 보내면서 아까 우리 처음 관찰한 개인적인 친밀성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 편지를 보낼수가 있었겠느냐? 이런 문제가 제기가 되어요.

반면에 지금까지 이야기한 자료들을 덧 붙인다면 --두개만 덧 붙인다면-- 에베소서의 내용의 중심은 敎會論에 있는데,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같이 하나님께 화해되고 서로 화해되어서 하나의 교회, 또 곧 하나의 그리스도의 몸이 된 것을 아주 위대한 하나님의 恩惠의 사건으로 그 의미를 깊이 묵상하고 그것이 하나님의 太初부터의 구원의 경륜에 의한 것이었고 그 경륜의 실현이었음을 밝힘으로써 한편 이 교회의 우주론적 의미와 이 교회의 영원한 의미, 둘다 다 합쳐서 이 교회의 의미, 형이상학적인 실체로서의 의미를 함축하는데, 이것은 바울 시대 이후의 교회의 상황을 반영한게 아니냐? 바울시대때 까지만 해도 이방인 그리스도인들과 유대 그리스도인들의 대립과 긴장관계가 확연했는데, 바울의 이방인 사도직을 통해서 헬라세계의 가령 에베소 같은 곳에 이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과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하나의 교회를 이루는 상황속에서 이 유대 민족과 이방인 다수로 구성된 교회의 관계가 신학적으로 어느정도 정리된 상황을 반영한게 아니냐? 또 하나는 3장에 바울의 사도직에 대한 집중적인 묵상이 있는데, 바울은 이와 같은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서 화해 되어 하나를 이루게 된 것이, 바울의 이 사도직 곧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 곧 비밀을 맡은, 비밀을 관리하는 관리자로서의 바울의 사도직에 의한 것으로 바울의 사도직을 굉장히 높이는데, 이것은 한편으로는 갈라디아서나 고린도서나 로마서등에 이미 언급되어 있는 바울의 사도직에 대한 이해의 연장선상에 있으면서 그러나 그 보다 더 집중적이고 체계적인 평가 곧 하나님의 구원사에 있어서 바울의 사도직의 의미를 전체적으로 되돌아보는 관점으로 평가하는 것이 아니냐? 이미 완성된 이미 다 끝난 바울의 사도직의 그 의미를 이방인의 사도적 의미를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안에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을 화해시키고 연합시킨, 그래서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을 성취한 그런 것으로 전체적으로 이미 완성된 것으로 되돌아보는 그런 perspective가 아니냐. 이런 점에서 바울의 제자가 존경하는 스승 바울의 사도직을 그렸다고 해석하고 서술했다고 그렇게 봐야 되지 않느냐? 이런 그 제안들이야.

이런 증거들을, 또는 이런 특징들을 주어서 대부분의 비판적인 학자들은 에베소서를 바울의 제자가 바울의 이름으로 쓴 2차적 바울의 서신 deutero-Pauline 편지로서 에베소 교회 한 교회에 보냈다기 보다는 소아시아 지역에 여러 교회들에 보낸 회람이지 않느냐? 그래서 바울의 편지들에 이미 표현되어 있는 바울의 기독론과 교회론, 그리고 바울의 사도직에 대한 이해들을 요약하고 그들을 더 묵상해서 더 높은 차원에서 표현해서 아시아, 소아시아에 있는 여러 교회들에게 보낸 편지, 회람아니냐. 그러기 때문에 에베소서 1:1에 에베소란 말이 빠졌고, 아마 에베소 교회에 갔던 사본은 에베소에 있는 이란 말이 들어 있었겠지. 또는 다른데 보낸 사본은 또 다른 지역의 이름이 거기에 들어갔겠죠. 이렇게 많은 대부분의 비판적인 학자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말이야. 그 학자들은 그러면 “누가 썼겠느냐” 아마 로마서도 바울이 두기고에 구술시킨 것으로 드러나는데, 로마서 16장에 두기고가 바울이 비서로서 로마서를 口述받아서 쓴 자로 인사를 한다고, 로마 교회에. 그래서 바울이 보통 비서를 써서 口述을 했는데, 그럼 이 두기고 같은 사람이 바울의 이 편지를, 바울의 가르침을 담아서 바울시대 조금 후에 바울의 이름으로 이 편지를 보내지 않겠느냐? 또는 누가가 했을거 아니겠느냐? 어떤 사람은 에베소서와 누가복음, 사도행전과의 어휘상에서 약간 비슷한 점이 있다구. 그래서 누가가 이 편지를 바울 사도의 이름으로 썼지 않았겠느냐? 뭐 여러가지 이렇게 추측을 해요.

반면에 아주 보수적인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지만 英國의 상당한 學者들, 가령 F.F. Bruce는 말할 것도 없지만, C.H. Dodd나 또는 옥스퍼드에서 가르쳤던 G.B.Caird같은 사람들도 이 편지의 바울 著作성을 강력히 주장을 해요. 물론 이 주장에는 古代 교회 傳統의 뒷받침이 있지. 왜냐하면 고대 교회는 상당히 聯合된 목소리로 이 편지의 바울 저작성을 證言해요. 바울이 로마 감옥에서 그의 生涯의 끝점에 이 편지를 썼다. 그의 생애의 끝에서 자기의 지금까지의 使徒직을 되돌아보는, 회상하는 perspective. 그 자기의 이방인 사도직을 통해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되돌아 보는 회고하는 perspective로 자기 이방인의 사도직으로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진거야?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된거라. 곧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인 유대인들의 그 역사에 참여하게 된 거라. 또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안에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화해되고 같이 하나님께 화해되어서 같이 하나님의 자녀들 하나님의 상속자들이 되는 놀라운 고대사회에사 想像할 수 없는 異蹟이 일어난 거라. 그래서 하나님과 人間들 사이의 敵對의 장벽이 무너지고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사이에 적대의 장벽이 무너졌는데 이것이 자기의 이방인 사도직을 통해서 이루어졌단 말이야.

그것을 바울이 가령 한 AD 62-3년쯤 후의 생애의 마지막 쯤에 지금까지의 자기의 사도직의 결과를 회고하는 perspective로, 그래서 자기의 사도직이 일어난 현실이 곧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안에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함께 화해되고 또 서로에게 화해 되어서 하나의 unity를 형성하게 된 것은 창세전부터의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에 의한 것이었고, 자기가 그 구원의 계획의 담당자로서 관리자로서 ? 로서 이것을 이루었음을 회고하는 그런 편지다. 그래서 이게 바울이 영적 유지라, 유언(testament)이라. 그러기 때문에 이 편지의 여러 바울적인 사상들이 바울의 특히 기독론과 교회론이 이미 그 앞서 편지들에서 갈라디아서나 고린도서신들이나 로마서에서 이미 표현된 것들이 완숙하게 깊은 黙想을 통해서 발달된 형태로 나타난다. 그래서 C.H. Dodd 같은 사람은 에베소서를 “바울신학의 정수를 담고 있다.” 이렇게 말한다구.

이어받아서 F.F. Bruce도 이 편지가 에베소서가 이 바울 신학의 정수를 담고 있는 것으로 그렇게 표현을 해요. 이런 관점에서 봤을 때에 우린 앞서 다른 바울 편지들과 비교해서 이 편지가 다르다는 여러 특색들이 일부 설명이 된다구. 바울이 지금 어떤 구체적인 교회에 이 편지를 써서 스스로 문제들을 해결하고 이렇게 하려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독자들에 대한 개인적인 친밀성을 나타내지 않아요. 또 이게 바울이 순전히 자기 사도직을 통해서 일어난 위대한 구원사의 현실에 대한 묵상하고 하나의 논문이므로 자연히 덜 개인적인 그리고 덜 직접적인 형태를 뛰게 되고 일부 추상적인 어휘들이 쓰이게 되고, 일부 예배적인 style이 쓰이게 된다 말이야.

그래서 아까 이야기한대로 복잡한 관계들이 이어지고 동격의 명사들이 자꾸 속격으로 이어지고 한 것은 이 묵상의 style --깊은 예배의 상태에 빠져드는 묵상의 style-- 또 아까 내가 강조하진 않았지만 이 편지의 믿음으로 의인됨이 은혜로 그리고 믿음으로 의인화 된다는 의미가 한 두마디로 요약이 되있지, 펼쳐지지 않았어요. 또 종말론이 깊이, 분명히 펼쳐지지 않았다구. 그런 것도 어느정도 이해가 된다고. 지금 바울의 그 주제가 그런 것이 아니고 자기의 사도직을 통해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구원사를 되돌아 보는 perspective로 묵상하는 것이므로 우리가 어떻게 구원받는가 하는 구원의 계획이 태초부터 영원부터 유래함을 강조하지. 그것이 앞으로 종말에 완성될 것의 종말론을 강조하지 않는다구. 도리어 그러면 뭐가 강조된 거예요? 실현된 종말론이 강조된 거라. 자기의 이방인 사도직을 통해서 이미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안에서 실현된 인류의 하나님과의 화해 그리고 이방인들과 유대인들과의 화해 그것이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의 실현 이란 말이야. 그래서 이제 실현된 종말론에 대한 강조가 있고 앞으로 그리스도의 재림이라든지 그때 재림때 완성될 우리 구원에 대한 강조가 결여되어 있는데, 그것도 우리는 바울이 자기의 사도직의 끝에서서 자기 사도직을 통해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에 대한 묵상, 회고의 관점에서 이 글을 썼다면 설명이 되는 거라구. 알겠어요. 무슨말인지?

어휘들이 다르다. style이 다른 것은 어느정도 설명이 된다구. 그런데 그 중에서도 꼭 일부 style은 묵상과 예배의 정황으로 설명이 된다 하지 않더라도 특히 어휘들이 다른 점을 우리가 인정을 해야 되는데 이것은 바울이 항상 서기들을 썼다구. 갈라디아서도 서기들을 썼어요. 갈라디아서 같이 급히 쓴 편지에서도 바울이 서기를 썼다구. 자기가 마지막 서명한, 자기 서명을 했지. 보통 바울은 그래서 서기에 따라 고대 편지쓰는 시간이 과연 어떤 것이었느냐? 한자 한자 불러주는 때도 있었을 것이여. 구술한 때도  있었을 것이지만, 대개 큰 아이디어를 주고 서기에게 그 아이디어로 문장을 구성하도록 많은 융통성과 자유를 주었을 수도 있었을 거라 말이야. 그래서 누가 서기였느냐 에 따라 어휘의 차이들이 많이 설명이 될 수가 있어요. 가령 에베소서와 누가복음, 사도행전 어휘면에서 상당한 근접성이 나타난다면 그것은 바울이 누가를 서기로 썼기 때문에. 그런데 지금 감옥에서 노후에 깊은 묵상하는 하나의 생각을 주었을 때에 그것을 실제로 받아서 文章으로 완성하고 이어지게 한 것은 누가 일지도 모른다구. 그래서 이런 어휘의 차이들이 나타날 수 있다. 이렇게 본다구.

그래서 최근에 에베소서에 바울 저작성을 강력히 論證한 Van Room, 화란의 Van Room이라고 한 600page되는 책을 썼다구. 지루해서 못 읽는다구. Van Room이란 친구가 에베소서의 바울 저작성을 강력히 주장했는데, 그도 바로 이런 점에서 서기가 많이 다른 편지에서 보다 더 많이 활약했음을 인정함으로써 어휘와 style에서의 특이성, 다른 편지와의 차이점들을 설명하면서 근본적인 바울 저작성, 이 편지의 바울 저작성을 주장을 해요. 자, 지금 이런 상황속에서 우리가 결정을 해야 된다구.

바울이 자기의 사도직 끝에, 자기의 사도직을 통해서 지난 한 30년동안의 이루어진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에 대한 깊은 묵상을, 가령 누가 또는 두기고 자기의 동역자 자기의 부관에게 같이 나누면서 그로 하여금 일부 구술하고 --일부 구술한다는 말은 문자적으로 구술하고-- 일부 서기에게 완성하도록 자유를 주어서 이 편지를 썼느냐? 근데 이 편지는 거의 확실한 에베소 한 교회에 보내는 편지라기 보다는, 아시아 교회 전체에 보내는 아마 회람일 것이다. 그 교회들의 어떤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더 크게는 그런 것도 있겠지만, 그건 나중에 보겠지만-- 주로 바울의 회고적 묵상을 담아서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한 전체적 가르침을 주는 그런 하나의 설교라든지, 소 論文이라든지 이렇게 보냈을 것이다.

이렇게 바울의 저작성을, 근본적인 저작성을 견지할 수 있고, 아니면 반대로 이 편지는 누가나 두기고나 이런 바울의 제자가 바울 사후 바울의 생각들을 더 깊이 묵상하고 바울의 사도직을 하나님의 구원사의 맥락에서 평가하고 높이는 사도직을 통해서 일어난 위대한 그 현실 --그리스도 예수의 몸인 교회에서 유대인들과 이방인이 연합하여 한 하나님의 백성 자녀들을 이루게 된 위대한 현실-- 을 칭송하는 선언문을 써서 옛 바울의 선교지역이었던 아시아의 교회들에 보낸 회람이다. 뭐 이렇게 볼 수도 있고, 또 거기서 인제 이렇게 두가지 가능성들이 각자들에게 논의 되는데 이중에서 여러분들이 이제 저울에 이 두 의견들을 놓고 달아보았을 때, 어느쪽으로 더 증거들의 무게가 더 쏠리느냐? 어느쪽이 더 그럴듯하냐? 이렇게 결정을 해야지. 좀 보수적인 사람들은 前者를 결정할 것이고 아까 이야기한대로 좀 자유주의적인 대다수는 後者로 결정한다 말이야.

근데 나는 전자로 결정을 해서 이 에베소서가 진짜 바울 편지인데, 그러니까 바울이 자기의 사도직의 끝에 서서 자기의 사도직을 통해서 일어난 실현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에 대한 묵상을 담은 하나의 說敎 또는 小 論文인데, 어쩌면 󰡔누가󰡕 --우리에게 알려진 자 중에서 가장 그럴듯한 자는 누가일거란 말이야-- 누가에게 많은 자유를 주어서 쒸운 그런 글이다. 나는 그렇게 봐요. 그게 가장 무난한, 모든 증거들을 가장 무난하게 하는 것이다. 난 그렇게 본다구. 그래서 그렇게 본다면 이 편지와 골로새서와의 유사성도 금방 설명을 할 수가 있는거라구.

골로새 교회는 아시아, 소아시아에 에베소에서 가까운 소아시아의 교회에 있는 구체적인 편지로서 그곳에 침투하기 시작한 이제 막 일어나는 영지주의적 경향을 체크하고 그러한 영향으로 부터 교회를 보호하기 위해서 바울이 그 편지를 썼다 말이야. 아마 그 얼마후 같은 지금 소아시아 교회들에게 골로새서에서 일어나고 있는 그런 이제 잉태되는 영지주의적 위험에 대해서, 위험에 맞서서 그리스도의 의미와 --그러니까 기독론과--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진 교회의 의미를 더 깊이 묵상하여 가지고 바울이 하나의 회람으로 소아시아 교회 전체에 이 글을 보냈을 것이다. 그래서 골로새서와 내용의 유사성이 많다 이말이예요. 그렇게 설명이 가능해요.

만약에 이 편지가 바울 死後, 바울의 제자가 바울의 생각을 담아서 썼다면 골로새서와 유사성이 사실은 좀 문제가 된다구요. 그렇게 본다면 왜 바울의 사후, 골로새서를 베껴가지고 골로새 근방의 교회들에게 이 편지를 보냈나? 바울의 이름으로 보냈나? 그 교회들이 틀림없이 교회들을 알게 될 텐데... 그렇게 된다면 골로새서와 에베소서의 차이점을 가지고 바울의 저작성을 --에베소서의 바울의 저작성을-- 否認할텐데, 진짜 바울이 썼을 경우는 그런게 문제가 안돼요. 그러나 바울의 제자가 바울 이름으로 썼을 경우는 문제가 된다구. 왜? 바울의 제자가 바울의 이름으로 썼을 때는 진짜 바울의 편지로 받아들여 지는게 중요하다구. 진짜 바울이 썼을 때는 그건 당연히 자기의 편지로 받아들여질 테니까 그런게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요. 그런 문제는 의식하지 않아요.

그러나 바울의 제자가 바울의 이름으로 편지 쓸 때는 뭐가 중요해? 뭐가 제일 중요한 거예요? 독자들이 이 편지를 진짜 바울의 편지로 들음으로 바울의 사도적 권위가 실린 편지로 인식해 주는게 중요하지. 그러기 때문에 골로새서를 이런 식으로 복사하지는 않았을 거라는 말이야. 왜? 똑같은 지역에 보내는 편지인데 일부 내용이 겹치고 일부 내용이 다르고 그렇다면 사람들이 금방 “어떻게 이런 두 가지 편지가 있나?” 이렇게 생각할 거란 말이야. 근데 진짜 바울이 썼다면 그런 문제를 의식하지 않는 거야. 자기가 직접 썼으니까.

그러나 바울의 제자가 바울의 이름으로 썼을 때는 그것은 이제 문제가 될 거다. 그런 저런 이유로 에베소서를 진짜 바울이 썼다고 보는 것이 더 지금 우리가 관찰한 에베소서의 특성들을 잘 무리없이 선명하게 한다고 그렇게 생각을 해요. 여러분들, 어떻게 생각해? 우리 생각에는 --지금 우리가 성경 말씀에 문장 하나 하나 전치사 하나라도, 전치사는 고사하고 그 토씨 하나라도 눈여겨 보도록 훈련받은 우리들은 또 여러분들 같이 문자적인 축자 영감설 고착된 사람들에게는-- “허이구! 바울이 어떻게 그렇게 자기 서기에게 그만큼 자유를 주어가지고 쓰게 했을까?” 도저히 상상이 안되겠지. 그러나 실제로 신약성경의 저자들은 굉장한 자유를 누렸어요. 왜 자유를 누렸느냐? 바로 성령의 역사를 믿었기 때문에 자유를 누린 거라구. 자기를 통해서 역사하신 성령이 자기 부관, 누가, 두기고를 통해서 역사한다고 철두 철미하게 확신했기 때문에 우리같이 조마 조마하지 않았어요.

우리가 어떻게 아느냐? 여러가지로 알아. 신약성경의 저자들이 구약성경을 어떻게 인용하느냐? 문자적으로 인용하잖아. 어떤때는 문자적으로 인용하지만 어떤때는 말을 바꾸어서 인용하고, 어떤때는 그냥 내용을 한 마디로 간추려서 인용하기도 하고, 많이 말을 바꾸어서 인용한다구. 또 어떻게 아느냐? 이 공관복음서를 비교해 보년 안다구. 마태가 마가를 어떻게 고쳐쓰나? 누가가 마가를 어떻게 고쳐쓰나? 그렇게 할 수 있는 이유가 뭐예요? 성령의 역사에 대한 철두철미한 이 확신 때문에 그런다구. 여러분들이 여러분들의 비서에게 편지 하나를 구술할 때 여러분들 비서의 능력을 의심하면 토씨 하나까지도 정확히 구술할 거라 말이야. 그러나 여러분들이 비서를 신임하고 그가 나보다 더 잘 쓴다, 내 생각을 완전히 표현할 수 있다 한다면 여러분들은 대강 이러 이러한 아이디어를 주고 편지할 거라. 게다가 지금 바울은 믿는게 하나 있어 뭐? 성령의 역사를 믿는다구. 그러니까 사실은 최근에도 그런 예가 많아요.

여러분들 Karl Barth의 교회론을 한번 보라구. 제 몇권인가 서문에 자기가 그 책을 어떻게 썼나를 쭉 쓴다고. 그게 무슨 이야기를 썼는가를 알아요? 자기 여비서 그 아가씨 이름이 뭐야? 어이구 이름 잊어먹어 버렸네. Muchen의 간호원 출신인 여비서를 Barth가 채용을 했어요. 여비서는 독일의 장교의 딸이었는데 여비서는 신학의 문턱도 안가본 친구아. 처음에는 Barth의 글 정서하는 타자를 치도록 채용을 했겠지. 그런데 이 친구가 Barth와 같이 Barth의 책을 정리하고 그의 강의를 정리하면서 스스로 굉장한 신학자가 된 거야. 그래가지고 Barth가 교회론을 쓸 때에 --보통 여름 방학때 자기 친구의 별장인 알프스의 별장에서 이 여비서와 같이 Barth의 사진에도 나와요. Barth의 전기를 보면은-- 같이 마주보고 앉아서 일부 구술하고 일부 쓰게 하고 그런식으로 썼는데, 그 서문에 뭐라고 그랬느냐 하면 자기가 대강 idea를 주고 중요한 개념들을 주고 그 아가씨가 다 썼다고 시인했다고. 자기가 어디까지 쓰고 그 다음에 어디까지 그 아가씨가 이제 더 이상 분간 할 수 없다고 그러지.

여러분들 그 Barth의 책 Dogmatik을 읽어봐요. Barth가 굉장한 style로 썼다고 문장을 아주, 근데 굉장히 긴 문장, 아주 정확히 표현하려고 하는 것보다 훨씬 되풀이하는 그런 저술면이 낫다는 생각이 발전한다구. 그래서 이 독일어 작품으로도 굉장히 훌륭한 문학작품이라구. 근데 Barth도 그래 어디서 부터 어디까지가 자기가 썼고 어디까지 자기 비서가 썼다고 더이상 분간할 수가 없다고 그래. 그 정도로 완전한 사상적인 unity가 이루어진 거지. 이 친구가 다 알아. Barth가 몇마디 하면 뭐라고 할지 안다구. 그래서 문장을 완성하면 Barth가 보면 자기가 생각한 것보다 더 표현을 잘 했으니까 --그런 비서하나 있었으면 좋겠죠 여러분.-- 근데 사실은 Barth와 이 여자의 관계가 상당히 학문적인 친밀성 뿐만 아니고 개인적인 친밀성의 오해가 굉장히 많아가지고 문제가 굉장히 많았어요.

 하여간 근데 그 정도로 Barth가 이 아가씨를 신임을 해 가지고 그 복잡한 신학사상을 표현함에 있어서 주된 생각만 주고 이 비서로 하여금 완성하게 하였어요. 그래서 그건 얼마나, 어느정도 가능해요. 특히 고대의 편지 쓰는 형식에 있어서는 충분히 가능하지. 흔했다고, 관례라.

Q.그것이 성경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서 가능?

A.성경이 될 거라 생각했어도 가능. 왜냐하면 바울은 자기 편지가 여러 교회에서 예배 때에 읽히고 그게 사도적 권위를 가진 하나님께 자기를 통해서 말씀하신 것을 충분히 의식을 했어요. 그러니까 뭐래, 고전 같은데, 로마서 같은데 “내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노라” 그래서 자기가 말하는게 그리스도께서 말하는 것으로 충분히 의식을 했다구. 감수했겠지 아니면 읽어 봐주겠지.

Q.융통성이 주어졌다고 한다면 영감설에 있어서 바울에게 영감이 되었다. 또한 서기에게 영감이 되었다?

A.둘다 다 성령이 꼭 바울에게만 역사하나? 그 바울의 제자들에게도 역사하지.

성령의 주권적인 역사를 바울이 철두철미하게 믿었기 때문에 자기 人間이 중요한게 아니라 말이야. 우리같이 성령이 잘못 믿는, 믿는다고 거짓말로 하면서 사실은 못 믿기 때문에 문자가지고 그냥 어쩔줄 모르고 벌벌 떨고 그냥 알겠어요.

그래서 사실 그 사람들도 바울 편지가 아니라고 한다고 해서 뭐 이 에베소서의 권위가 그만큼 떨어진거냐? 하나님의 말씀으로 권위가 떨어진거냐? 천만에 그렇지 않다 말이야. 그리고 바울의 제자가 바울의 이름으로 이 편지를 쓸때에 뭐 요새 같은 속임수 쓰는거 아니냐. 도저히 그렇지 않단 말이야. 왜? 자기가, 지금 자기 선생의 사상을 나타내기 때문에 그 선생의 이름으로 쓴 거라. 고대 사람들은 이런걸 속임수로 생각하지 않았다구.  당연한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여러분들이 질문하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곰곰하게 생각해 봐. 여러분들 진짜 영감설 믿으면 그런 질문할 필요가 없다고 안 믿으니까 그런 소릴 지금 하지.

바울이 친필로 papirus에 썼어야만 축자영감인데 말이야. 어떻게 바울이 이것을 누가가 받아 쓰고 사도직을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가 어떻게 일어났는가를 지금 바울이 혼자 묵상을 하고 어쩌면 혼자말 같이 깊은 예배의 상태에 빠져서 거기서 가령 상상을 해 보라구. 누가가 그걸 문장으로 만들어 썼다고 해봐. 충분히 그러 수 있단 말이야. 그러기 때문에 누가적인 언어가 많이 나올 수 있다 말이야. 지금 성령이 바울에게만 역사하고 누가에게는 역사 안한거야? 그럼 누가가 거기서 이제 바울 편지라 했다면 누가가 거짓말 한거야. 속임수 쓴거야? 천만의 말씀 바울 편지지. Karl Barth의 비서 이름이 Von Kirschof야. 누가 그럼 Church Dogmatic을 Kirschof가 썼다고 그러나? Karl Barth가 썼다 그러지. Karl Barth의 사상이기 때문에 문장의 구체적인 formulation은 가끔 Kirschof가 했는지 모르지만 그걸 누가 Kirschof책이라고 그래? Karl Barth책이라 그러지. 너무 문자적으로 벌벌 떠는 사람들은 성경을 깊이 공부 안한 사람들이라구. 성경을 공부한다고 하면서 거짓말하는 사람들이야. 금방 바울의 구약성경을 어떻게 인용한가 보면 알잖아.

바울이 어떤 바울이야. 구약성경을 새롭게 인용한다구. 왜? 아 그 선지자들을 영감한 성령이 지금 자기에게 구약성경을 새롭게 해석하고 새롭게 적용하도록 역사한 것을 믿고 확신했기 때문에 그래. 그건 확신이 있기 때문에. 그게 없는 사람들은 문자에만 얽매인다는 말이야. 그런 사람들에게 바울이 뭐라 그래? 고린도후서 3:6 누가 한번 읽어봐 거기 뭐라 그랬는가.

“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꾼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 의문이 뭔지 알아? 문자는 죽이고 영은 어쩐다? 살린다. 그래서 너무 문자적으로 얽매이지 말란 말이야.

자 그래서 에베소서의 저자는 바울이다. 그런데 에베소서는 아마 에베소라는 교회에 보냈다기 보다는 에베소 주위의 아시아, 소아시아 전체의 교회들에 회람용으로 바울의 묵상 또는 설교를 담은 글이다. 뭐 대충 이렇게 저자 문제에 대해서 결론을 내릴 수가 있지.

아 그러면 에베소서는 교회론이 특징인데 그중에서도 그리스도안에서 새로운 인류의 창조, 이 인류의 하나님과 화해, 그리스도의 피를 통한, 그리스도의 속죄의 제사를 통한 하나님과의 화해 그리고 인류의 대표적인 대적 관계에 있었던 유대인들과 이방인들과의 화해, 그리하여 하나님과 세상 전체의 화해, 이런 이 화해론과 하나됨을 강조하는 편지야. 그런데 이 하나님과 인류 그리고 인류와 인류사이에 그리고 온 피조물과의 화해와 하나됨을 강조하는 편지이기 때문에, 이 편지가 특히 20C에 오늘날 같은 시대에 특별히 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해서 이 편지를 어떤 사람은 바울의 어떤 편지 보다 더 이 에베소서가 오늘 우리에게 가장 할 말이 많은 편지이다. 오늘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편지이다. 왜? 20C는 人間들의 적대 관계를 가장 심각하게 체험한 세기라. 양차 세계대전을 통해서 人間들의 상호적대관계의 처절함을 가장 심각하게 체험한 때라 말이야.

그래서 20C에 와서는 일치운동이 여러 형태로 나타나는데, Ecumenical 운동도 그중의 하나지 敎會의 一致運動. 그래서 이 교회의 일치운동을 생각하거나 또는 민족과 민족간의 대립을 해소하고 화해하고 일치하는 생활이었거나, 또는 20C의 사회 계층간의 대립을 가장 극심하게 체험한 때지, 공산 주의 운동이 그런걸.  우리에게 사회 계층간의 대립을 가장 심각하게 부각시킨 것이 지난 70년동안에 공산주의 운동이지 proletaria와 자본가의 대립을 계급간의 계급 투쟁을 공산주의 역사 이론에 의하면 역사의 진전이 어떻게 이루어진다고? 계급 투쟁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말이야. 계급투쟁을 통해서. 그래서 이 계급간의 투쟁이 근본적으로 proletaria에 승리와 독재를 통해서 해소된다고 주장하는 것이 공산주의 이론이란 말이야.

공산주의 이론이 다 파산되어서 거짓 효과없는 것으로 판명되었지만 공산주의 이론이 우리에게 우리 인루 전체사에서 어떤 기능을 했느냐? 사람들로 하여금 계급에 대한 새로운 이해, 새로운 의식, 계급간의 대립에 대한 새로운 의식을 확고히 한거라구. 무산대중, 억압받는 무산 노동 대중과 자본가 그리고 중다 소시민들. 부르조아의 문제를 가장 심각하게 제기한게 공산주의 운동이라고. 물론 그것은 18C이후에 産業革命을 통해서 양산된 노동자 계급의 착취문제에 의해서 일어난 것이지만, 그것이 모든 사람들의 의식 구조에 중요한 문제로 자리잡게 된 것은 共産主義 운동의 역활이라구. 그래서 이 蘇聯에서 특히 中國에서 문화 혁명이 일어나면서 엄청난 문제가 발생을 하고, 우리 韓半島에서도 그런 문제가 발생을 하고, 지금까지도 우리 한반도의 사상적인 후진성을 잘 타나내는 면인데, 이미 유럽에서 1960년도 후반에서 1970년도 후반까지 토론되고 정리된 사상적인 운동이 신좌익 운동이 우리 한반도에서는 80년대에 일어나가지고 지금까지 이제 그게 거의 다시 해소되는 모양인데 한반도에서는 80년대에 일어났지.

한 20-30년의 사상의 후진성을 나타낸다구. 유럽에서 1960년대 중반부터 신좌익 운동이 성행해서 1970년대 후반에 한두번의 oil shock를 거치면서 정리가 되었어요. 그래서 공산주의 운동, 사회주의 운동이 거의 종결이 된다구. 근데 우리 한국에는 그때는 박정희 군사 통치속에서 그런게 좀 못하다가 80년대 후반에 들어와 가지고 요원의 불길같이 모든 대학가에서 또는 이른바 진보주의 체계 속에서 마치 Marx주의가 무슨 복음의 구원이나 되는양 굉장히 확산이 되었다구. 노동 운동이 굉장히 확산이 되고... 근데 우리 자체내부에 학문적인 토론과 사회적인 부의 공정한 재 분배, 사회의 이런 것을 통해서가 아니고 서양에서는 그런 것을 통해서 많이 해소가 되는데, 우리는 공산주의가 소련이나 동구에서 소멸되었다는 그런 세계적인 대세에 밀려가지고 그 사람들이 점점 소멸되었다는 그런 상황에 있어요. 그래서 우리의 부의 재 분배에 있어서 불공정함과 불의한 구조, 억압구조는 사실 별로 수정이 안되고 그대로 남아요.

근데 이런 계급 투쟁의 문제, 특히 이제 20C에 가장 심각하게 의식이 되었고 더 나아가서 최근에 와서는 1970년대 부터는 피조세계 전체와 人間과의 관계라, 자연의 고갈과 환경오염 두 개념으로 대표되는 피조세계 전체와 인간에게 복수를 하는 단계라. 자연고갈과 환경 오염이... 그래서 人間의 생태계가 파괴되므로 인간이 못살게 되는 상황이 일어났다구. 그래서 어떻게 다시한번 성경의 가르침대로 인간과 피조세계 전체가 하나의 연대성 속에 있으며 어떻게 人間들이 피조세계 전체에 대한 올바른 orientation을 주어야 하는가? 하는 것을 새롭게 생각하게 되었다구. 그래서 인간과 세상, 또는 자연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새롭게 의식하게 된 거예요. 그것도 아주 늦게온 사상이예요. 1970년대에 와.

사실은 이런 여러가지 갈등에 갈등관계에 대한 의식이 20C에 들어와서 가장 인간의 보편적인 의식의 문제로 대두되어서 바로 이 에베소서가 하나님과 人間들의 화해, 민족과 민족의 화해, 하나님과 온 세상의 화해, 이런데에서 하나됨, 화해의 하나됨, unity를 강조하는 에베소서가 오늘 우리에게 바울의 어떤 메세지보다 가장 절실한 메세지이다. 이렇게 생각이 되어서 어떤 학자는 아까 이야기한대로 에베소서가 가장 제일 우리시대에 중요한 편지다. 그렇게 주장했었다구.

우리 한국 사람들에게는 에베소서가 새로운 더 중요한 의미를 띄게 될 수가 있다구. 남북관계, 남북이 화해하고 어떻게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서 남북이 화해되고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화해되는 것 같이 그들이 같이 하나님에게 화해되어서 새 인류가 되듯이 어떻게 한국이 화해가 되느냐? 이런 걸 여러분들 곰곰히 생각해 봐. 에베소서를 다음 시간에 좀 더 해보려고 하는데 에베소서의 중요한 주제들을 다음시간에 조금 더 정리하려고 그러는데, 그런것 미리 조금더 생각을 하고 에베소서를 좀더 읽어와.

그런데 교회가 지금 바울이 여기서 그린바와 같이 화해와 하나됨을 지향하는 하나님의 구원사를 담당하는 ? 또는  ? 관리자가 되기 위해서는 교회 자체가 하나가 되어야지. 근데 우리 한국 교회와 같이 분열된 교회가 세상에 어디있어? 그래가지고 이놈의 교회가 화해와 하나됨을 도모하는 하나님의 도구이기는 커녕 분열하고 싸우고 찢고 하는 도구가 되어 버렸다구. 그래서 에베소서의 메세지가 한국 교회에는 한국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더욱 절실한 면이 있어요. 다른 어느 서신보다 그래서 한국 보수교회들이 신학적인 자유주의에 반대하는 의미로 Ecumenical W.C.C운동을 반대하는데 W.C.C Ecumenical 운동이 신학적으로 아주 못되어 먹었지. 여러면에서 아주 못되어 먹었죠. 그들이 내거는 그 이상 교회의 하나됨을 통해서 인류의 화해 그리고 하나됨, 그리고 인류와 피조세계의 화해, 이런 이상은 그들의 자유주의 신학으로 추진, 도모 못한다면 아! 보수교회는 그럼 보수적인 신학으로 도모하려는 의지가 좀 있어야 할 것 아냐? 그런데 없다구. 하나도. 보수교회 일수록 더 찢어진다구. 더 분열이 많아요. 이것을 분명히 성경의 가르침과 완전히 위배되는, 에베소서의 정신과 완전히 위배되는 불순종이라.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 그래서 Ecumenical운동하면 그냥 다 하나님께 저주받을 것으로 다 욕을 하는데 W.C.C라는 기관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하는 Ecumenical 운동의 신학은 구구절절히 틀렸어요.

그러나 그들이 주장하는 이상 화해와 하나됨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정말 추구해야 할 진리라구. 성경적 진리.

그러면 지금 W.C.C운동이 틀려먹은 신학 때문에 그것을 아무리 주장해도 올바로 추진할 수 없다면 그럼 보수신학자와 보수교회는 올바른 신학으로 성경적인 이상을 추구해야 할 것 아냐? 자 어떻게 할 것인가? 여러분들 곰곰히 생각해 보라구. 여러분들 에베소서를 통해서 O.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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