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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기 설교[1,404편]〓/종교 개혁 주일설교

개혁신앙의 현대적 의미

by 【고동엽】 2022. 8.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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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2:1~11
손상률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오늘은 제487회 종교개혁 기념일입니다. 역사상 암흑시대라 불리우는 중세기에는 로마 캐톨릭의 교권주의와 성경을 무시하는 우민화(愚民化) 정책에 따라 기독교는 형식종교로 전락해 있었습니다. 이 시기에 혜성(慧聖)처럼 나타난 독일의 개혁자 루터(Martin Luther)는 1517년 10월 31일 그가 몸담고 있던 위덴버르그(Witenburg) 대학의 정문에 95개조에 달하는 항의문을 내걸고 로마 교황청에 도전장을 내었습니다. 그 후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나간 개혁운동은 많은 시일과 많은 희생자를 내었지만 결국 기독교 본래의 모습으로 돌려놓는데 성공하였습니다.
그동안 오랜 세월에 걸쳐 성경을 근거로 하는 신학이 학문의 자리를 잡았고 시대마다 거친 핍박을 받으면서도 경건한 신앙의 전통이 오늘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엄격한 의미에서 종교개혁은 완성이 되었거나 끝나버린 것이 아니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처럼 문화적인 환경과 인간 사고의 다양한 변화는 개혁신앙의 접점을 더 어렵게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에 말할 수 있는 개혁신앙은 이론이나 지식보다 오히려 말없는 실천과 그리스도인의 변화된 삶을 통하여 나타나져야만 되는 것입니다. 여기 가나 혼인집에서 일어난 사건은 평범한 삶가운데서 이루어지는 개혁신앙의 특징을 보여주는 것이 됩니다.

Ⅰ. 개혁신앙의 대상과 적용

성경적인 개혁운동은 세상에서 흔히 말하는 혁명이나 쿠테타와 같은 물리적인 힘으로 이루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과거를 들추어내고 세상을 시끄럽게 하면서 요란하게 뒤흔들어 자기의 목적을 관철하는 수단으로 작용하는 것도 아닙니다. 기독교가 지니는 「개혁」(Refomation)이라는 말의 뜻은 궤도를 이탈하여 잘못 가고 있는 것을 본래의 길로 바로 가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중세기 기독교는 일천 년 이상 로마 캐톨릭의 교권정치 아래서 교직 매매와 교회 안에 만연된 우상숭배와 세속주의적 부패 현상으로 인하여 그 생명력을 잃게 되었을 때 개혁자들은 「오직 성경」(Sola Scripture)이라는 신앙의 노선을 정하고 개혁운동에 박차를 가했던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죄로 오염된 세상과 그 속에 사는 모든 인류가 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궤도를 이탈하였기 때문에 말씀의 척도에 따라 바른 길로 들어서는 작업을 하여야만 되는 것입니다.

(1) 모든 사람에게 필요합니다.

시편 14:2-3에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다 치우쳤으며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고 하였습니다. 로마서 3:23에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세상 사람은 예외 없이 모두 다 죄에 오염되었습니다. 죄가 있는 곳에는 온갖 거짓과 부패로 찌들어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부분이 다 부패와 관련되어 있고 심지어 종교의 영역에까지도 어두움의 세력에 둘러싸여 있는 모습을 보게됩니다. 이와 같은 현상은 국가나 사회뿐 아니라 사랑스럽고 평화로워야 될 가정에까지도 만연되어 불행을 재촉하고 있습니다. 신자와 불신자에 구별 없이 세상을 살고 있는 모든 사람이 다 여기에 감염되어 있습니다. 갈릴리 가나의 혼인집도 마찬가지입니다. 경사로운 잔치 집이고 더욱이 예수님께서 계신 집이었지만 거기에도 예외 없이 인간 세상의 한계를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2) 결정적인 동기가 있습니다.

혼인집에 많은 사람이 초청되어 왔고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을 데리고 그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그 집에 와 계셨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포도주가 모자랐습니다. 잔치 집에서 손님을 청해놓고 접대할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것은 매우 충격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유대인의 통념상 손님을 청하는 일이나 그들을 접대하는 것은 가장 즐거운 일이고 복된 일이라고 여겼습니다. 따라서 제일 좋은 음식으로 성의껏 대접하며 손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준비가 부족했거나 아니면 돌발 사건이 발생하여 포도주가 모자랐더라도 이것은 보통 낭패가 아닙니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불완전한 요소와 한계 상황을 인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일을 통하여 인간의 무지와 한계를 인정하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하고 복음의 능력을 힘입어야만 됩니다.

(3) 예수님을 찾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를 과신하며 살아갑니다. 평소에 자기의 부족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 잘못된 결과가 나왔는데도 자기는 잘했다고 우겨댑니다. 야고보서 4:13-14에 보면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인간 생명의 허무함을 인식하는 사람은 생명의 본체가 되시는 예수님을 찾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라오디게아 성도들을 향하여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고 진단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고 하였습니다(계 3:17-18). 문제 투성이인 인간이 완전하신 예수님에게서 새롭게 고침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계시는 곳에는 문제가 있어도 해결의 길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Ⅱ. 개혁신앙의 특징(과정)

일반적으로 개혁을 논하는 사람들은 제도를 뜯어고치고 사람을 바꾸는 등 눈에 보이는 거창한 일을 들먹이거나 사람들에게 과시할 수 있는 방법을 자주 사용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은 가루서말 속에 들어간 누룩처럼 소리도 없이 동작도 없이 실속 있는 변화를 일으키며 모든 영역을 새롭게 바꾸어 놓는 것입니다. 중심에 서 있는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도 눈치채지 못한 가운데 물이 포도주로 바뀌어 졌습니다.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평범한 모습이었으나 실상은 중요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1) 말씀의 권위를 보여줍니다.

본문 사건과 관련하여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의 역할이 두 번 나타납니다. 3-4절에 보면 “포도주가 모자란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희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고 하였습니다. 로마 캐톨릭에서는 마리아의 신성과 완전성을 주장하지만 이 말씀으로 보아 마리아의 위상이 예수님 앞에서는 인간 이상으로 나타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5절에 “그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 중에서 마리아는 포도주가 모자란 사실을 예수님께 아뢰고 도움을 요청하므로써 예수님의 권세를 인정하였고 또 그 집 하인들에게 예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고 말하여 말씀의 권위를 신뢰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유일한 주권자로 인정할 때 그 말씀의 권위에는 전적으로 복종하며 따르게 됩니다.

(2) 순종과 헌신입니다.

본문 말씀 6-9절에는 예수님의 분부를 따라 거기 순종하는 하인들의 모습이 나옵니다. 이름 없는 그 집 하인들은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고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순종하여 물을 길어 날랐습니다. 물이 두 세 통이나 들어가는 돌항아리 여섯에 물을 길어다 부었습니다. 적당히 들어붓는 것이 아니라 항아리의 아구까지 채웠습니다.
예수님께서 활동하신 팔레스틴 지역에는 어디에나 물이 흔한 곳은 아닙니다. 특히 가나처럼 지대가 높고 흐르는 시내가 없는 곳에서는 한꺼번에 많은 물을 길어 오기가 용이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인들은 재주껏 신속하게 물을 길어 날랐습니다. 포도주가 모자라는데 왜 물을 길어 오라고 하는지 의아해 할 만한데 그런 것에는 상관하지 않고 그저 예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그대로 따르고 순종할 뿐입니다. 어느 때나 개혁주의 신앙은 ‘말씀이 가는 곳에 따라가고 말씀이 서는 곳에 멈추어 선다’고 하는 생활원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3) 하나님의 신비가 작용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물을 길어다 항아리에 가득 채운 그 하인들에게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고 분부하였습니다(8절). 예수님의 말씀대로 하인들이 물을 떠다 연회장에게 갖다 주었는데 어느새 그 물은 포도주로 변해져 있었습니다. 9절에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고 하였습니다.
예수께서 하인들에게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고 하실 때는 분명히 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연회장이 그것을 받아서 마셨을 때는 포도주였던 것이 확실합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헌신적으로 순종한 하인들의 손에 의하여 전달되는 순간 변화를 일으켰던 것이 분명합니다. 물을 떠다 나른 하인들마저 그것이 언제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모릅니다. 다만 그 결과를 보고 나서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신비입니다(마 13:11). 하나님 나라의 비밀은 묵묵히 순종하는 사람만이 체험할 수 있는 은혜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Ⅲ. 개혁신앙의 열매

본문 말씀 11절에는 “예수께서 이 처음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고 하였습니다.
가나에서 행하신 예수님의 첫번 표적은 기독교적인 개혁의 결과를 특징적으로 보여주는 내용입니다. 혼인집에 모인 사람들은 그동안 포도주가 모자랐고 하인들이 물을 떠다 돌항아리에 채우고, 그것이 포도주로 변하는 등 그동안 되어진 일련의 사건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 포도주 사건으로 빚어진 결과를 놓고 보면 그 이전과 이후의 분위기는 판이하게 달라져 있습니다. 곧 포도주가 모자란 상태에서 예수님의 이적이 없었을 경우의 당혹스럽고 혼란했을 일을 가상한다면 예수님의 이적으로 말미암아 포도주의 신비가 이루어진 그 결과야말로 엄청난 은혜요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개혁 신앙의 효과도 이런 것입니다. 말씀과 순종과 하나님의 신비로운 은혜의 체험이 곧 개혁신앙의 생활이며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1) 물이 포도주로 변화되는 삶입니다.

기독교를 변화의 종교라고 말합니다. 그 변화는 쓸모 없고 가치 없는 것이 가장 요긴하고 가치 있는 것으로 바뀌어지는 생명적 변화를 뜻합니다. 고린도후서 5:17에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이전 것”이란 죄아래 있는 육신의 소욕들을 의미합니다. 곧 거듭나기 전의 옛사람을 뜻합니다. 갈라디아서 5:19-21에는 이를 육신의 일들이라고 하였는데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고 하였습니다.
한편 새것으로 변화되었다는 것은 성령의 소욕으로 바뀌어진 것을 뜻합니다. 이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입니다(갈 5:22-23). 이와 같은 변화는 세상의 정치 권력이나 물리적인 힘에 의해서 만들어 질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이루어지게 하시는 신비로운 역사로만 가능합니다(슥 4:6).

(2) 점진적으로 발전하는 것입니다.

10절에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고 하였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하는 일은 처음에는 좋게 시작하였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쇠하여지고 나쁘게 변하는 것입니다. 용두사미(龍頭蛇尾)라고 하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은 처음에는 거창하게 나가다가 끝에는 흐지부지 없어지는 경우를 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작게 시작해서 크게 번창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욥기 8:7에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고 하였습니다. 기독교의 발전적인 변화는 양적인 것만 아니라 질적인 면에서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논증하면서 이는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거두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거두며, 육신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산다고 하였습니다(고전 15:42-44). 이와 같은 생명적 발전은 복음전파의 판도에도 적용되었습니다. 사도행전 1:8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신 말씀대로 그리스도의 복음이 온 세계에 점진적으로 확산되었습니다.

(3) 하나님의 영광을 들어내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 11절에 “예수께서 이 처음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이적을 통하여 나타나는 결과를 알게 하는 것입니다. 복음서의 기자들은 한결같이 예수님의 교훈과 행적을 통하여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우리의 구주 되심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여기 가나 혼인집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이 첫번 이적을 통하여 제자들이 예수님에 대한 바른 인식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 성경을 기록한 사도 요한은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요 20:3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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