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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기 설교[1,404편]〓/성탄절 설교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요한복음 1:9~14)

by 【고동엽】 2022. 8.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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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요한복음 1:9~14)

같은 복음서인데도 요한복음은 다른 복음서와 조금 차원이 다르게 기록된 것을 발견합니다. 마태, 마가, 누가복
음은 예수님의 행적 중심의 기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신학적 해설이 많은 기록으로 나타납
니다. 마태복음이나 누가복음에서는 많은 분량이 예수 탄생에 대해 기록되어 있지만 요한복음에는 전혀 없습니
다.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신 일, 그토록 고민하시면서 기도하시던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라든가 승천 사건과 같
은 중요한 것들이 요한복음에는 절대로 나타나지 않고 있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행적 중심의 기록은 사건을
본대로 적기만 하면 됩니다. 요한복음은 어떤 사건을 말하고 반드시 해설하는 형식의 논리적 방법으로 나와 있습
니다.
오늘 요한복음 1장 1절을 보시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바로 다음 말씀에 해설이 나옵니다.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 3단 논법 해설이 따라붙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각 복음
서의 1장 1절이나 1~2장을 보면 복음서가 말하고자 하는 성격이 나타나 있습니다. 마가복음 즉, 마가가 본 예수
는 어떤 예수였는가? 1장 2절에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마가는 예수를
바라보았을 때 무엇이 가장 중요한 것인가?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것은 기록을 하지 않고, 복음의 시작부터
기록했습니다. 그가 이 세상에 온 것은 복음을 주려고 오셨기 때문에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셨건 예루살렘에서 탄
생하셨건 아무 상관이 없고, 또 요셉에 집에서 자란 것이나 고향이 나사렛인 것도 중요하지 않게 봤습니다. "그
가 무엇을 하였느냐? 그가 하신 일을 보니 이는 분명히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다!" 그래서 마가복음은 예수의 구
원을 위한 수난사 중심의 기록을 남겼습니다. 그런데 누가는 좀 더 다른 생각을 가지고 복음서를 기록하고 있습
니다. '예수는 그가 이 세상에 태어난 때부터 중요한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로 이 세상에 왔다는 그 자체부터가
중요한 것이므로 탄생부터 자세히 기록해야 된다!' 이렇게 생각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가 온 것은
그 자체가 인류의 큰 변화이므로 탄생이 중요하다고 하여 예수의 탄생 기록이 아주 길게, 1장과 2장에 걸쳐서 자
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얼마나 자세하냐 하면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호적 하라." 이런 정치
적인 일부터 그 사회적 배경, 역사적 배경까지 모두 기록했습니다. 그 다음에 "요셉이 마리아를 데리고 호적 하
러 베들레헴으로 갔다. 사람들이 많아서 여관을 얻을 수가 없어서 마구간을 빌려서 잠을 자게 되었는데 그 지경
에 밤에 목자들이 자기 양떼를 지키고 있었다. 하늘에서 천사들이 무서워 말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
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이렇게 탄생 때의 그 주변에서 되어진 일까지 모두 기록해서 예수의 메시아
되심을 탄생부터 찬양하는 기록이 나타나 있습니다. 마태복음에는 훨씬 더 깊습니다. "탄생 때부터 중요한 것이
아니라 조상 아브라함 때부터 기록해야 예수는 말이 되는 사람이다. 그래서 아브라함 때부터 약속한 하나님의 계
획이 이제 나타난 것이다." 그래서 마태복음 1장 1절이 무엇입니까?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조상에서부터 예수를 설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함으로써 아브라함부터 시작하는 족보이야기가
끊임없이 나옵니다. 마태는 예수를 아브라함 때부터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읽은 요한복음은 어떻습
니까? "아니다. 이 예수는 태초부터 말해야 한다." 그래서 1장 1절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예수는 태초
부터 이야기해야 되는 분이다." 그래서 요한복음이 다른 복음서보다 고차원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요한복음에서 예수는 어떤 분이신가 라는 예수의 성격을 어떻게 나타내었는가? 요한복음이 예수에 대
해서 밝히는 가장 뚜렷한 해석은 예수를 빛으로 보았다는 것입니다. "참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12장 46절에는 예수님 자신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
는 자는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빛에 대한 몇 가지 상식이 있습니다. 이 세
상에 과학의 발표로 모든 물질의 제일 근본은 빛이라고 했습니다. 빛이 있은 후에 다음 물질의 존재가 있다는 것
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이 우주 만물을 창조하실 때 제일 먼저 창조하신 것이 빛이십니다. 그리고 그 빛이
있은 다음에 그것을 중심으로 해서 땅과 바다와 짐승과 사뭇 다른 것들을 다 창조하셔서 빛이 모든 물질의 제일
근본에 서있게 된 것을 보게 됩니다. 성경에 나타난 예수님의 빛의 성격은 몇 가지로 밝힐 수 있습니다. 요한계
시록 22장 16절에 "예수는 광명한 새벽 별이라."라고 말했습니다. 이 빛의 첫째 사명은 광명을 주는 일입니다.
그런데 여기 새벽별이라고 한 것은 캄캄했던 밤을 물러가게 하고 새벽의 여명을 가져오는, 어둠을 물리치는 의미
로서 저녁별이라 하지 않고 새벽별이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어둠을 내쫓기 위해오셨습니다. 지금 우
리들이 예배드리고 있는 이 예배당을 수백 개의 전구가 불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빛이 어둠을 내어 쫓아 주기 때
문에 우리가 이렇게 밝게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캄캄하고 어두운 이 세상에 빛으로 오셨다는 것이
예수님을 향한 요한복음의 가장 훌륭한 표현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들어가시는, 즉 복음이 들어가는 곳은
어디나 어둠을 내어 쫓는 역할을 해왔으며 우리가 예수님의 복음의 빛을 받았다는 것은 같은 성격을 나타내는 의
미가 있는 것으로 이것이 예수께서 우리에게 새벽별 성격으로 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나라의 역사를 기억해보면 어떤 빛을 비추었는가? 어떤 어둠을 내어 쫓았는가? 참으로 우리나라
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때문에 살게 된 나라입니다. 200년 전에 우리나라에 복음이 들어왔는데 사실 그때부터
우리나라는 모든 분야에서 어둠이 물러가고 광명한 새벽의 여명이 터온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가 어
린이 문제 하나만 해도 인격 대우 문제를 어떻게 취급했습니까? 옛날에는 보기 싫은 아이는 갖다 버려도 아무 상
관이 없었습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 부모님들께 흔히 듣는 말이 있었습니다. "너는 주워 길렀어, 이놈아!" 이런
말이었습니다. 갖다 버리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그런 언어문화가 발달한 것입니다. 어린이 천대가 말할 수 없
었습니다. 그런데 복음의 정신은 무엇입니까? 이런 세계에 광명한 새벽별로 복음이 들어왔기 때문에 "어린 아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니라. 누구든지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실족케 하
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목에 걸고 바다에 빠져 죽어라." 어린이 천대의 어둠을 몰아내는 광명한 새벽별, 모든 분
야에 빛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그래서 참빛 세상에 오신 예수라고 요한복음이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조선시대 500년은 여인 잔혹사의 역사로 거기에서 생긴 말이 '남존여비(男尊女卑)'라고 하는 말입
니다. 여자들이 인권이 없었습니다. 한 남자가 몇 여자를 데리고 살아도 괜찮았고, 여자는 말 한마디 잘못해도
쫓겨났고, 말대꾸를 해서는 안 되고, 여인의 인간 대우는 캄캄한 어두운 밤이었습니다. 그러한 어둠의 여인들을
광명의 세계로 이끌어낸 것은 기독교 복음입니다. YWCA가 무엇을 합니까? 여자들도 이 사회 얼마든지 지도자가
될 수 있다고 이 단체를 기독교에서 만들어서 여인들을 사회로 끌어내기 시작한 것 아닙니까? 여인들에게 광명한
새벽별로 나타나 요즈음은 조금 지나친 것도 있는 것 같습니다. 요즘 아침에 정식으로 밥 먹는 남자는 간 큰 남
자라는 말이 있을 정도입니다. 여러분, 우리나라 교회에 왜 여신도가 더 많은지 아십니까? 여인들의 인격 대우가
여기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인들이 많이 교회를 찾아와 기도도 많이 드리고, 우리 갈보리교회는 거의 남자,
여자가 반반이지만, 제가 집회하러 웬만한 교회들 다녀보면 4분의 3이 여인들입니다. 왜 그렇게 여신도가 훨씬
더 많을까요? 그것은 여인들의 광명한 새벽별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서 나타났기 때문에 "우리의 살 곳은 여
기다! 우리가 인격 대우를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 있다."라고 확산되면서 기독교
로 여인들이 몰려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참 좋은 결과만 나타났는데 교육열이 세계에서 제일 강한 나라라고 평가받고 있습
니다. 요즘에는 90퍼센트 이상이 대학을 졸업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대한민국에 언제부터 학교가 생겼는가? 기독
교 복음이 들어와서 광명한 새벽별을 비추어서 그때부터 학교가 생겨 교육열이 강해지고 지금은 너나 할 것 없이
교육 경쟁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얼마나 공부를 많이 했는지 고학력자의 취직 문제가 심각한 사회문제가 될
만큼 어렵습니다. 저는 대학의 이사로 15년째 일합니다. 대학교수 한명 뽑으려면 이사들이 모여서 회의를 하는데
박사 학위 받은 사람들이 수십 명씩 몰려오고 우열을 가릴 수 없을 정도로 외국 유학 다녀온 박사들이 수없이 이
력서를 내는데 놀랍습니다. 저는 우리나라 대학도 다 평준화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대학 교수들의 학력이 어느 대
학이나 다 비슷합니다. 다 외국 유학 다녀와서 쟁쟁한 학위들을 가지고 있는 교수들이 모두 있으니 거의 평준화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가 이렇게 교육이 밝아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더불어서 우리나라가 이
렇게 되었지, 언제 우리나라에 무슨 학교가 있었습니까? 제가 오래전에 인도네시아 디아스 섬 선교를 열심히 다
닐 때 가보면 한 마을 전체가 기독교 섬이 되어 참 복 받은 곳이 있습니다. 인도네시아에서 이렇게 기독교 복음
이 많이 전해진 곳이 없습니다. 그런데 거기 가보면 역사가 있습니다. 미개한 원시인들만 사는 섬에서 제가 제일
충격을 받은 것은 부모가 죽으면 그 시체를 돼지에게 먹입니다. 집이라 해봤자 정글에다 말뚝을 세워놓고 원두막
처럼 꾸미고 산단 말입니다. 항상 더우니까 그 원두막에 온 동네 돼지들을 방목해서 그냥 돌아다니게 합니다. 그
렇게 돼지들을 많이 기르는 이유는 그 돼지가 뱀을 그렇게 또 잘 잡아먹습니다. 섬에 있는 독한 뱀들을 돼지들이
모두 잡아먹어주니까 사람들이 보호를 받기 때문에 돼지를 기릅니다. 그런데 부모가 죽으면 그 시체를 돼지가 있
는 쪽으로 떨어뜨려서 온 동네 돼지들이 다 몰려와 20~30분 만에 모두 잡아먹습니다. "왜 이렇게 하느냐?" "부모
의 영이 돼지에게로 들어가라는 뜻이다." "돼지에 들어가는 게 뭐가 좋냐?" "그 돼지를 내가 또 잡아먹으면 부모
의 영이 다시 나에게로 들어온다." 뭐, 그런 의미입니다. 그렇게 미개한 생활을 하는 곳에 선교사들이 들어가서
그 어두운 미신의 세계에 광명한 빛을 비추어 나중에는 모두 예수를 믿고, 그 섬에서 가는 곳마다 집 앞에 묘지
가 있고 십자가를 세웠습니다. 왜냐하면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자기 집 앞에다 매장을 해놓고 십자가를 세웁니다.
미개한 동네이지만 그것만은 기독교 방식이 철저합니다. 그리고 학교를 세워서 선교사들이 공부를 가르치고 있습
니다.
기독교는 어디를 가나 광명한 새벽별이었습니다. 우리나라 의학의 광명한 새벽별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서 되어진 일입니다. 병이 나면 굿을 하지 않았습니까? 과학적으로 치료할 수 있는 길이 없어서 이런 이상한
짓을 했습니다. 그런데 대한민국에 기독교선교사들이 돌아와서 "광혜원"이라고 하는 최초의 병원을 건설함으로
오늘날 질병의 어둠을 다 내쫓아버리고 지금은 병원이 이렇게 많아져서 '줄기세포 논란'까지 났다 말입니다. 예
수는 광명한 새벽별이라는 겁니다. 어둠을 물리치고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살 수 있는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사회악을 추방하고 고아원을 세워 교육과 양육을 함께 하고 의상 문화를 편리하게
하여 치마저고리 입고 힘들게 일하던 여인들을 간편하게 만들어주었고, 문맹 퇴치 운동을 하여 문맹의 어둠을 쫓
아냈고, 금주 금연 운동을 벌여서 인간들의 건강관리에 공헌했으며 노동의 철학을 정립하였으며, 양반 상놈이라
고 하는 인간의 차별 문화를 평등문화로 만들어주었고, 예수는 광명한 새벽별, 참 빛으로 오신 분이십니다.
누가복음 2장 32절에도 같은 말씀이 나오는데 "예수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라고 말했습니다. 기독교 문화
는 온 세상에 전파되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세계 인구의 절반가량이 됩니다. 아시아와 아프리카에 복음의 빛이
어둡지만 유럽 일대는 국민의 90퍼센트 이상이 다 기독교 문화에서 살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잘못 생각한 것이
광명한 새벽별의 복음을 온 세계에 나눠주라고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선택했는데, 이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이것을
독점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땅 끝까지 이르러 이 복음의 증언
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이 잘못 판단했기 때문에 이방을 비추는 이방 세계의 사명이 넘어갔다는 것입
니다. 복음의 빛은 유대인의 장벽을 넘어 모든 족속을 비추는 빛이 될 것을 예수님은 벌써 누가복음에서 말씀하
셨습니다. 복음의 빛은 땅 끝까지 갈 것이라고, 이방을 비추는 빛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우리나라를 보면 외세
의 침략 때문에 민족 고통의 슬픔을 겪어온 역사였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외국의 은혜를 입은 것이 한 가지 분명
합니다. 그것이 선교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선교사들의 은혜는 영원합니다. 그들이 가지고 온 것이 예수 그리스
도의 빛이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정신으로 이 나라에 공헌해 주었고 그러한 복음의 확산을 위해서
이 땅에 수없이 많은 빛을 비추어 인간답게 사는 터전과 기초를 우리에게 선물해 준 것은 외국 사람들에게 입은
최고의 은혜입니다. 지금 저희 교회도 열심히 선교하고 있습니다. 어떤 때는 생명을 걸고 싸우던 원수들에게까지
사랑의 빛을 전하는 북한 선교도 열심히 하고 있지 않습니까? 예수는 인간관계를 형제라고 하는 혈통관계로 정립
하셨고, 사랑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확실하게 해준 이 땅을 비추는, 이방을 비추는 빛이 되신 것입니다.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는 일은 복음의 능력입니다. 참으로 이 복음의 성격, 복음의 능력은 놀라운 역사를
나타냅니다. 제가 어느 지역에 이방을 비추는 빛의 사역을 위해서 간다고 합시다. 예수를 믿고 감동을 받는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이렇게 시설을 잘해놓고, 오르간과 피아노 소리에 맞춰서 찬송을 하고, 수준 있는 성가대의 찬
양을 듣고 간절한 기도와 잘 준비된 설교자들의 좋은 설교를 매주일 듣고 그래도 믿음이 성장한다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까? 그런데 인종이 다른 사람이 알 수 없는 언어를 가지고 알 수 없는 종교를 말하는데 그게 전도가 되겠
습니까? 그런데도 세상에 있는 모든 기독교인들이나 교회들은 그런 과정을 통해 다 선교가 이루어졌습니다. 이것
을 복음의 능력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복음의 능력은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가지고 외국 이방인들을 찾아
갔지만 하나님의 능력이 복음 안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선교사 아펜젤러와 언더우드가 우리나라에 처음 찾아올 때
먼저 일본에 와서는 갑신정변 때 쫓겨 온 몇 사람을 만나 한국 조선말을 어떻게 하느냐고 물어 말을 조금 배워가
지고 우리니라에 들어왔지 무슨 한국말을 어떻게 합니까? 백의종군이니 와신상담이니 하는 말을 어떻게 압니까?
그런데도 이렇게 되지 않았습니까? 이게 복음의 능력인 것입니다. 그래서 선교사들이 복음의 능력을 믿고 가는
겁니다. 온 세상이 다 이 빛을 가지고 가면 반드시 비추어지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선교사 파송을 하는 겁
니다.
때로는 이 복음의 역사는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을 통해서도 역사합니다. 벌써 4~50년 전 일인데, 한국에서 유
학생 한 사람이 미국에서 공부를 하고 대학 교수가 되었습니다. 미국에서 좀 오래 살다보니까 그 지역으로 찾아
오는 한국 이민자들이 아주 많아졌습니다. 그러니까 그곳에서 오래 사신 대학 교수에게 물어볼 것 아닙니까? 유
학생들이 와서 "교수님! 우리가 한국에서 바로 유학 왔는데 잘 모르겠습니다. 좀 가르쳐주십시오." "그러지요."
그런데 그 대학교수는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래서 공항에도 몇 번 나가주고 아파트도 얻어주고 사무실도
데려가서 통역도 해주고 이민자들을 위해 불편한 것 도와주는 일을 많이 하게 되니까 그 아내가 남편을 보고 느
닷없이 한 말이 "그럴 바에야 교회를 한개 차리는 게 낫겠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남편이 "어? 교회? 그래,
당신 말대로 교회를 하나 차려보자!" 그런데 이 부부는 한 번도 교회를 안 나가본 사람입니다. 예수 믿는 것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 주변에 유학생 몇 사람을 모아보니 다섯 명이 모였습니다. "우리들 교회를 하나
세우면 어떻겠냐?" 그런데 모인 사람 중에 예수 믿는 사람이 한명도 없었습니다. "좋다! 교회를 한번 해보자! 그
런데 교회 건물이 하나 있어야 하니까 미국 교회를 빌려보자." 그래서 미국 교회를 빌리려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데 한 교회에 "200만 불에 교회를 팝니다."라는 간판이 붙여있어서 교회 목사를 만나 "이 교회를 팔려고 하십니
까?" "팝니다. 살려면 사십시오." "왜 파는 겁니까?" "교인들이 없어서 팔아야겠습니다." "그러면 팔지 말고 우
리 주십시오." "당신이 뭐하시려고요?" "우리 교회를 만들려고 하는데 건물이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 찾아다니는
중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 한인교회가 미국에 가서 수지맞는 것이 그런 부분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공짜로
얻는 건물이 흔하게 있습니다. 그 교회에서 의논을 해서 "한국 형제들이 이 교회를 팔지 말고 자기들 달라고 하
는데 그냥 줄까?" 그러니까 "좋다. 그게 낫겠다. 단 한 가지, 이 건물을 영원히 교회로 쓴다는 조건으로 그냥 무
상으로 넘겨주자." 그렇게 교회에서 결의했습니다. 한국 교회 같으면 절대로 안주지요? 그런데 미국에서는 줍니
다. "그러면 당신이 그냥 가지십시오. 그런데 당신 목사입니까?" "아닙니다. 저는 목사가 아닙니다." "그러면 장
로이십니까?" "아니, 그런 것도 아닙니다." "그러면 세례는 받았습니까?" "세례가 뭡니까?" 이렇게 된 겁니다.
"아니, 세례도 안 받았다면 교회는 다녀본 적 있습니까?" "아니요. 한 번도 다녀본 적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교회를 만들려고 하는 겁니다. 우리가 만들고 우리가 교회 나가려고 합니다." 이게 말이나 됩니까? 그런데 미국
사람들은 말이 됩니다. 그래서 서로 사인을 했습니다. "목사도 없고 세례가 뭔지 모르지만 어쨌든 이 마을로 찾
아오는 한인들이 교회가 필요하다고 하니 우리가 그 터전을 마련해 주겠습니다." "영원히 교회로 쓰겠습니다."
그래서 북방 캘롤라이나주에서 지금 25년째 그 건물을 그냥 쓰는 교회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분들이 모여 교회가
있으려면 목사가 필요하잖아요? 그래서 목사님을 한분 찾았습니다. "우리가 모든 준비를 마쳤으니까 목사님이 오
셔서 예수 믿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십시오." 그래서 그 때부터 그 교회가 이민사회에 30년 가까이 잘 부흥하
고 있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교수는 그 교회에서 장로가 되었고 미국 PCUSA에 아주 유명한 지도자가
되어 총회에서 한인으로서 총회장에 출마했었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인 것입니다.
여러분들, 이 빛을 전할 때 "어휴, 내가 말도 잘 못하고 이거 뭐, 전도해봤자…." 이러는 사람은 전도하지
마세요. 안 됩니다. 그러나 복음의 능력을 믿고 열매는 하나님께 맡기고 빛을 비추면 반드시 빛이 나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예수는 이방을 비추는 빛이 됩니다. 예수 안 믿는 사람이 교회도 세우게
되고 하나님이 크게 쓰시는 인물이 되게 하십니다. 복음의 능력 가운데 이방을 향해 떠나는 것이 선교 사역이 되
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참 빛으로 오셔서 세상을 밝게 하십니다. 우리 교회에서 협력하고 있는 알바니아
선교사는 알바니아 말 한마디도 못하고 알바니아로 갔는데 저렇게 잘 하고 있지 않습니까? 러시아 선교사는 러시
아 말 하나도 모르고 갔는데 얼마나 빛을 비추고 있습니까? 인도 선교사는 인도 말 하나도 모르고 갔는데 얼마나
선교 잘 하고 있습니까? 복음의 능력은 이방을 비추는 빛입니다. "빛의 사자들이여 어서 가서 어둠을 물리치고
주의 진리 모르는 백성에게 복음의 빛 비쳐라!" 예수는 복음의 빛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온 세상을 누구나 인
간답게 하나님의 자녀의 형상으로 살 수 있도록 어둠을 물리치고 빛을 전하신 예수 그리스도, 이것이 성탄절의
의미입니다.
지금 온 세상은 주님 탄생의 축하로 가득합니다. 왜 저렇게 많은 빛을 밝힐까요? 예수님이 빛이시기 때문에
상징적으로 밝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는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나도 빛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출석하는 교
회에서 내가 빛이 되어야 합니다. 어둠이 되면 안 됩니다. 내가 살고 있는 사회에서 내가 빛이 되어야 합니다.
내 가정에서 내가 빛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있음으로 세상이 밝아지는, 내가 있음으로 교회가 밝아져야 합니다.
빛으로 오신 예수, 예수의 빛! 여러분 마음에 예수의 빛을 통해서 어둠을 몰아내고 광명한 새벽이 되시기를 주님
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성격이 무엇인가 요한복음은 참빛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빛이 세
상에 와서나 세상 사람들이 영접하지 아니하였다고 했습니다. 우리 모두는 빛을 영접하고 주님이 오신 이 성탄
계절에 나도 빛을 비추는 빛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출처/이필재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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