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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기 설교[1,404편]〓/부활 주일 설교

희망의 부활 (요한복음 21:1-14 )

by 【고동엽】 2022. 8.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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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부활    (요한복음 21:1-14 )

미국 작가 헤밍웨이가 쓴 "노인과 바다"라는 널리 읽혀지는 소설이 있습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산디에고라는 노인은 멕시코 만류에서 작은 조각배를 타고 단신으로 고기잡이를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84일 동안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에게 이런 불행이 닥쳐오자 이 노인이 큰 불운을 맞았다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고기를 못 잡은 지 40일 째는 함께 일하던 소년마저 그 부모의 명령에 의해 이 노인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85일 째 되는 날 노인은 여느 때보다 일찍 바다로 나갔습니다. 이날 낮이 기울 무렵 믿을 수 없을 만큼 큰 물고기가 그의 낚시를 물었습니다. 그리고 18척이나 되고 1500파운드를 넘는 큰 물고기와의 싸움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물고기는 조각배를 끌고 끝없이 바다로 나갔습니다. 노인은 3일 동안을 배보다도 더 큰 물고기와 싸우면서 쓰러지고 일어나기를 거듭하다가 드디어 물고기를 죽일 수 있었습니다. 노인은 배에 고기를 붙잡아 메고 항구를 향해 돌아 오게 됩니다. 그 때 상어가 나타났습니다. 노인은 밤중까지 상어와 싸웠습니다. 노인은 칼도 몽둥이도 부러지도록 상어와 싸웠고 몸도 지칠 대로 지쳤지만, 물고기는 뼈만 남게 되었습니다. 배는 항구로 돌아오고, 소년과 다른 사람들은 그 고기뼈를 보고 그 크기에 놀랍니다. 피곤에 지친 노인은 자신의 오막살이에서 늘어지게 잠을 잡니다. 그리고 사자 꿈을 꿉니다.
주인공 노인은 어려운 일만 만납니다. 그러나 그는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지지 않고’ 저항합니다. 노인의 저항은 항상 수포로 돌아가지만 그는 잠을 자면서도 사자 꿈을 꿉니다. 사자란 힘의 상징입니다. 사자 꿈은 그가 용기를 잃지 않는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내 주는 것입니다.
이 소설은 인간의 삶이 비극과 환멸의 연속이라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인간은 희망을 버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비록 이 희망이 인간을 속일지라도 인간은 희망을 가지고 살게 됩니다. 이것이 인간을 인간 되게 하고, 인간으로 하여금 스스로의 존엄성을 지키게 합니다. 이 작품을 통하여 헤밍웨이는 비극적 현실과 대결하는 인간의 존엄성을 위대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헤밍웨이의 이 소설은 인간이 희망을 가지고 있다는 현실 묘사라기보다는 인간이 어떠한 역경에서도 희망을 가져야 한다는 주장을 담고 있습니다. 인간은 희망이 있어야 삽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희망을 갖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희망을 갖기 위한 희망’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 인간들은 희망을 가지고 있습니까? 우리 인간들이 가진 희망이란 결국은 신기루와 같은 것은 아닙니까? 속고 또 속으면서, 속을 줄을 알고 있으면서도, 어쩔 수 없이 가져보는 그런 희망 속에서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여기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질문해야 할 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이 사자 꿈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는 무엇이 그리스도인의 존재를 지켜주는가 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이 세상을 이기게 하는가 하고 질문을 해야 합니다.

제자들의 실패
복음서에서는 사람들의 모습을 영웅적으로 또는 세속적 성공자의 모습으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아주 솔직한 인간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복음서에 나타난 제자들의 삶을 보면 비극적인 면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정치가나 부자들이 아니었습니다. 겨우 고기잡이로 끼니를 잇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나마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수단도 모두 버리고 예수님을 쫓아서 유랑하는 전도자들이 됩니다. 그들의 재산이란 입고 있는 옷과 신고 있는 신발이 전부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다음 끼니를 어디서 무엇을 먹어야 할 지도 모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날 밤의 잠자리가 어디가 될 지도 모르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선생님은 죄인의 몸으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이들은 가졌던 모든 것을 버리고, 선생님을 삼년이나 쫓아 다녔건만 남은 것은 실망과 두려움 뿐이었습니다.

제자들의 신앙
그토록 믿었던 선생님이 죄인으로서 돌아가시자 그들은 너무도 큰 정신적 충격을 받아서, 그 충격으로부터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이 부활의 주님을 제대로 인식하는 과정을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무덤에 직접 들어가서 예수님의 시신은 간 곳 없고 세마포만 놓여 있는 것을 직접 보았습니다. 그런데도 죽은 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리라 하신 예수님의 예언을 기억해 내지 못했습니다(요20:9).
그 날 저녁때에 제자들은 유대인들이 두려워서 집안에 있으면서 숨도 제대로 못 쉬고 두려움에 떨고 있었습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직접 나타나셨습니다. 그런데 도마가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나중에 이 이야기를 들은 도마는 큰 소리를 치면서 말하기를 "내가 그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여드레 뒤에 예수님께서 도마가 있는 자리에서 다시 나타나셨습니다. 도마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하셨습니다. 그러자 도마는 더 이상 의심을 못하고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하고 고백을 했습니다.
이 사건에서 보면 도마를 제외한 다른 제자들은 믿음이 좋은 것처럼 보이고, 도마는 다시 나타나신 예수님을 뵈옵고 완전한 부활 신앙을 가진 것처럼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보면 믿음이 좋다는 베드로나 다시 사신 주님을 뵈옵고,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했던 도마나 별 차이 없이 여전히 불신앙 가운데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주를 따르는데 앞장섰던 베드로, 부활하신 주님의 빈 무덤을 제일 먼저 확인했던 베드로, 부활하신 주님을 두 번이나 만났던 베드로가 물고기 잡으러 가는 데 앞장섰습니다.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니까 다른 모든 제자들도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면서 베드로를 따라 나섰습니다. 본문에서 물고기를 잡으러 간 제자들의 수를 세어보면 일곱 명입니다. 이 일곱이란 숫자는 완전한 숫자로서 단순히 일곱 명의 제자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제자들을 뜻합니다. 물고기를 잡으러 갔다는 것은 이들이 과거의 일터로 돌아 간 것을 의미합니다. 즉 일곱 명의 제자들이 물고기를 잡으러 간 것은 모든 제자들이 자신들의 과거의 삶의 자리로 되돌아 간 것을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아버지와 배를 버리고 주님을 좇았던 제자들이 이제 주님을 버리고 다시 아버지와 배를 찾아갔습니다. 그들은 실망했으며 희망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육체적 생명을 부지하기를 원했고, 부지해야 했기에 자신들에게 익숙한 과거의 노동을 다시 취했던 것입니다.

인간적 노력의 허무함
그런데 이들에게는 이제 어부로서의 삶에서도 만족함이 없었습니다. 정신적 만족이 없었음은 물론이고 어부로서의 일도 제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으나 단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이들의 실망의 현장에 주님께서 다시 나타나셨습니다. 이번에도 이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주님께서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져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대로 하니까 고기가 많아서 들어 올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잡혔습니다. 주님의 기적을 보자 이들은 눈을 번쩍 뜨고 주님을 알아봅니다. 베드로는 해변가에서 계시는 분이 주님이시라는 사실을 알자 마자 바다위로 뛰어 내려 물위를 걸어서 해변가에 도착합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을 확실히 세 번째 알아보게 됩니다.

주님의 교육
오늘 본문의 사건은 주님께서 사람들을 교육시키시는 교육 과정입니다. 주님은 인간의 무의미한 실패의 반복 속에 함께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계셔야 우리 인생의 의미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요한 복음에 의하면 두 번이나 주님이 나타나셨는데도 제자들에게 용기를 주시지 못했습니다. 두 번으로 안 되자 세 번째 나타나셔서 다시 신앙을 일깨워 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내가 몇 번이나 너희들에게 나타나야 부활을 믿겠느냐" 하시면서 꾸짖을 법도 한데 꾸짖지 않으셨습니다. 우리 인간이 주님을 한 번 만나서 불같은 신앙의 소유자들이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인간의 믿음은 많은 실망과 좌절 속에서 큽니다. 인간의 믿음은 인간 자신의 믿음으로 머물러 있는 한 전혀 신뢰성이 없습니다. 오직 주님의 직접적인 인도만이 우리의 신앙을 지탱해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주님의 직접 오심에 의존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계속해서 우리 인간을 깨우쳐 주시는 분이십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계속 반복해서 교육시켜 주실 때만 우리는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세 번이나 반복해서 제자들의 신앙을 일깨워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본문의 사건은 이들의 첫사랑을 다시 회복시키는 사건입니다. 이들이 예수님을 처음 만날 때도 비슷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5장에서 이들이 밤새도록 고기를 한 마리도 못 잡은 새벽에 예수님께서 이들에게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치라"고 하심으로써 그들에게 만선의 기쁨을 안겨 주었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님을 따라 나섰던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물 위로 걸어가는 기적도 오늘 본문에서는 다시 한번 반복되었습니다. 베드로가 물 위를 걷다가 파도를 보고 무서워하여 물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을 예수님께서 건져 주신 일이 있습니다.
제자들은 믿는 것 같았으나, 완전한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훈련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부활한 주님을 알아보는 일은 전적으로 예수님의 선물입니다. 예수님께서 계속하여 자신을 나타내시지 아니하셨으면 제자들의 믿음은 거품과 같은 믿음으로 끝나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삼 년의 세월도 꿈같은 세월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인내와 교육을 감사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인내와 교육을 배워야 합니다. 주님을 알게 될 때, 인간들의 위대함과 인간의 의지의 강함은 무용지물이 되고, 오직 주님의 사랑만이 크게 보이는 것입니다. 이것은 철저한 주님의 사랑과 교육이 아니고는 되어질 수 없는 일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현실의 모순 속에서 무력감을 느끼지는 않습니까? ‘내가 한 명의 그리스도인으로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하고 고민하고 계십니까? ‘학교에서도 남들은 두각을 나타내는데 나는 왜 열심을 내기가 힘드나? 나는 왜 하는 일이 잘 되지 않나? 우리의 가정은 이다지도 피곤하게 굴러가고 있는지?’ 하면서 고민하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현실을 도피하고 싶고, 내가 해 온 모든 일들이 허무한 것 같고, 무언가 새로운 일을 하고자 했던 포부와 계획을 더 접어 버리고 싶고, 진행되는 모든 일들을 도중에 포기해 버리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현실의 모순 속에서, 현실의 허무함 속에서, 인간의 불신앙 속에서, 인간의 무지함 속에서도 함께 하십니다. 우리의 믿음은 주님의 오심으로 시작됩니다. 믿음이란 결코 우리가 주님께로 먼저 나아감이 아닙니다. 믿음은 주님의 교육입니다. 우리의 자기 노력의 결과가 결코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의 모든 주도권은 주님이 가지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불신앙 속에서 도리어 주님의 은혜를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스스로 신앙이 있다고 할 때, 우리는 도리어 은혜를 거절하게 됩니다. 우리가 우리의 불신앙을 깨닫고, 우리의 믿음이 적음을 주님께 고할 때 주님의 사랑은 더욱 커지는 것입니다. 주님의 포기하지 않는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주님을 버릴지언정 주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의 삶의 근거는 우리의 의지의 강함도 아니고 우리의 믿음의 강함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포기하지 아니하시는 사랑에 있는 것입니다. 인간을 인간답게 하고, 그리스도인을 그리스도인답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변치 않으시고, 포기하지 아니하시는 사랑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전쟁과 실업과 미래의 불안과 인간의 모순과 죄악으로 가득한 현실의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를 속이는 인간적 용기가 아닙니다. 스스로 속고 또 속으면서도 자신의 의지를 갈고 닦는 인간적 용기가 아니라, 다시 사신 그리스도의 부활 신앙인 것입니다. 우리는 절망이 절망하고 죽음이 죽어버린 부활 신앙 안에서 인간을 속이는 현실의 헛된 희망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출처/박병욱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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