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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기 설교[1,404편]〓/부활 주일 설교

부활신앙의확신 (욥 19:25-26 )

by 【고동엽】 2022. 8.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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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활신앙의확신    (욥 19:25-26 )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이 누구냐?
죽기를 무서워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즉 죽음을 정면으로 받아 드리는 사람입니다.
사람이 모두 이렇게 되지를 못해서 죽음 앞에서 벌벌 떨고,
눈물을 흘리지 일단 죽기로 마음을 정리하면 그렇게 편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는 사람이 제일 무서운 사람입니다.

그런가하면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 누구냐?
죽음이 모든 문제의 해결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죽으면 그만이다’라고 생각하여 죽음으로 문제의 해결을 보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자살을 하고, 그래서 완전 범죄를 꿈꾸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나 하나 죽어버리면 되지 않느냐?’ 또는 ‘그같은 놈, 죽여버리면 모두 끝장이 아니냐?’고 그렇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죽음을 택합니다.

위의 두 가지 경우에서 보면, 모두 삶을 포기했거나,
죽음에 대한 잘못된 인식에서 기인한 생각들이라고 봅니다.
이런 면에서 기독교 부활신앙은 새로운 삶을 확신하는 긍정적이라는데 특징이 있습니다.

1.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바로 부활신앙에 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다시 살 수 있는가?’
이것은 인류의 최대의 관심사(關心事)이었고, 인간 이성(理性)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영원한 숙제이기도 합니다.
많은 종교들이 자기 나름대로 부활 신앙을 가졌지만,
기독교의 부활 신앙처럼 역사적(歷史的)이고 객관적(客觀的)인 사실 위에 세워진 종교는 없었습니다.
기독교 2000년 동안 이 부활 신앙을 와해(瓦解)하려고 각색 이단들이 제아무리 애썼지만 저들의 주장은 다 소멸되었으나 오늘까지 부활신앙은 건재하여 여기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거짓된 주장은 세월이 가면 끝장이 나지만 부활 신앙은 세월과 함께 점점 더 널리 펴져 나가고 있습니다. 예수 님의 부활은 역사적인 사실이었기 때문입니다.
사실(事實)은 그 자체가 진실(眞實)입니다.
이성(理性)과 지성(知性)으로 이해되고 안되고 하는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사실은 사실대로 믿느냐? 안 믿느냐? 일 뿐입니다.
사실을 가지고 설득하려고 하여도 안되고, 사실을 가지고 믿어라, 믿어라 한다고 믿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사실은 사실 자체로 믿든 안 믿든 사실로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꾸며놓은 말이 아니고 사실 그대로입니다.
마태복음 28:12절에 보면, 부활한 주님의 사실을 막으려고 파수병들의 보고를 받고서는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함께 모여 의논하고 군병들에게 돈을 많이 주며 가로되 너희는 말하기를 그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우리가 잘 때 그를 도적질하여 갔다 하라’그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사실적인 기록입니까?
그래서 15절에 보면, ‘군병들이 돈을 받고 가르친 대로하였으니 이 말이 오늘까지 유대인가운데 두루 퍼지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유대인들만이 아니라 오늘까지도 그리스도의 부활을 부인하려는 자들 입에서 반복되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올 바른 신앙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라면 부활 신앙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2. 부활 신앙을 갖고 사는 사람이어야 참 신앙인 입니다.
고린도전서 15:17-19절에 “만일 그리스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고 하였습니다.
부활 신앙을 가지고 산다는 것은 신앙인의 인격의 고백입니다.
거꾸로 부활신앙을 갖지 않고도 믿는다는 사람이 있다면
그 신앙의 인격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부활신앙이 없다면 내세도 믿을 수 없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내세도 믿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심판도 믿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에 심판도 믿지 않는 사람이라면 이 세상에서 무슨 일이든 못하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부활신앙을 갖지 않고 믿는 사람이란 세상 사람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신앙은 신앙인의 인격이어야 합니다.
신앙은 설득으로 되어지는 것도 아니고, 지식으로 설명되어지는 것도 아니고,
다만 스스로 자신의 인격으로 고백되어지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이란 남이야 뭐라 해도, 내게는 그것이 진실이라고 받아 드려지는 고백일 뿐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substance)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evidence)'라고 하였습니다.
실상(實相)은 허상(虛想)의 반대 개념입니다.
증거(證據)는 회의(懷疑)에 대한 반대 개념입니다.
이렇게 볼 때 부활은 사람들 마음에 허상이 아니라,
실제적 사실에 대한 증거란 말입니다.
주님의 부활은 의심의 여지없는 실상이요, 사실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부인하려고 2세기초부터 얼마나 많은 이단들이 나왔는지 모릅니다.
기독론이 그래서 형성되었습니다. 예수는 참 하나님이요, 참 사람으로 오셨다고 교회는 신앙으로 고백하였습니다.

3. 부활신앙의 확신이 있어야 세상의 모든 불의를 이길 수 있습니다.
부활은 사망에 대한 정면대결이요 승리입니다.
부활은 사망의 권세를 이길 수 있는 유일한 힘입니다.
부활은 모든 불의를 이길 수 있는 유일한 힘의 근거입니다.
아담 이후 인류의 최대의 적은 죽음이었습니다.
모든 인간은 죽음의 종이었습니다.
죽음 앞에 모든 인간은 참으로 약한 존재들이었습니다.
죽이겠다면 모두 벌벌 떨고 살려달라고 애걸하는 존재들이었습니다.
히브리서 2:15절에 ‘죽기를 무서워함으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죽음의 종노릇하던 인간에게 죽음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얻게 된 것이 부활 신앙이란 말입니다. 부활신앙을 가졌기에 죽음의 세력과 싸워 이길 수 있었습니다.

300년 동안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지하에서 살았습니다.
지하 묘지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살았습니다.
이 부활신앙의 확신이 있었기에 총칼 앞에서도 담대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나라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천주교 박해 사를 보거나, 일제 36년 동안의 철권 정치 하에서도,
그리고 공산치하에서도 많은 크리스천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정면으로 싸워 이겼습니다.

‘사망아! 너의 이김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 정면으로 대들 수 있었던 것은 부활신앙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렇게 부활신앙을 갖고 사는 사람에게는 어떤 세상의 불의와 죄의 세력과도 싸워 승리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죄의 세력은 죽음 이상의 힘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 우리의 모습이 어떤 모습입니까?
점점 부활신앙이 퇴색되어 가는 현상입니다.
독일의 목사들 가운데는 육체의 부활을 믿는 사람들이 20% 미만이라고 합니다.
우리 나라도 예외는 아닐 것입니다.
점점 육체의 부활보다는 사상적 부활, 이념적 부활, 정신적 유산으로서의 부활을 말하는 사람들이 많아져 갑니다. 정의를 위해 살다죽으면 영원히 사람들 가슴에 살아 있다는 그런 식의 부활을 믿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일찍이 사도 바울도 ‘만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다는 우리의 증거도 거짓된 증거일 것이고, 우리의 믿음도 헛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제일 불쌍한 사람일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벌써 그리스도의 부활을 의심하는 자들이 나타났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하였습니다. 당시 영지주의 자들은 주님의 부활을 부인하였습니다. 다만 영으로 나타난 것뿐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주님께서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었으니, 이 주장은 다 쓸모 없게 되었습니다.

만일 우리에게 부활이 없다면 그것을 믿고 사는 사람이 얼마나 어리석고 불쌍한 존재들이겠습니까? 어떤 집사 님이 ‘목사님은 술집에 한번 가 보았습니까?’ 물었습니다. 사실 나는 아직 그런 곳에 가본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무런 대답을 할 수 없었습니다. 중간에 예수를 믿고 신학을 한 사람들은 젊어서 그런데도 가 볼 경험이 있었겠지만, 나는 그런 면에서도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 만큼 고지식하게 믿었는지도 모릅니다. 아직도 춤추는 곳에도 못 가 보았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불쌍한 존재이겠습니까? 세상에서 좋다는 것 남처럼 한번도 해보지도 못하고 부활과 내세와 심판도 없는 것을 있다고 그렇게 믿고 우직스럽게 살아왔으니, 얼마나 불쌍한 존재이냐 이 말입니다. 그러나 누가 불쌍한지는 이제 얼마 있으면 판가름이 날것이기 때문에 두고 보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자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고 하였습니다.(고전15:58)

출처/김이봉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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