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절기 설교[1,404편]〓/사순절 설교

십자가의 길 (3) : 고난과 영광

by 【고동엽】 2022. 8. 18.

마17:1~8


예수님은 요단강 세례를 받으시고,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신 후 메시야로 본격적인 공생애를 시작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하고, 병자들을 고쳐주고, 귀신을 쫓아주고,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굶주린 사람들을 먹여주셨습니다. 이런 모습을 목격하자 사람들은 기다리고 메시야가 나타났다고 생각합니다. 로마 제국의 압제로 고통 받던 이스라엘 백성들로서는 정말 꿈같은 일이 생긴 것입니다. 예수님은 일약 유명인사가 됩니다. 가는 곳마다 수많은 군중이 모여들었습니다. 환호를 합니다. 아마 예수님의 제자들은 덩달아 신바람이 났을 겁니다. 마치 벼슬이라도 한 것은 기분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가운데 공생애가 2년쯤 경과한 때였습니다. 어느 날 예수님께서 제자들 중에 베드로, 야고보, 요한 세 명을 데리고 높은 산에 올라가십니다. 그 산은 아마 헤르몬 산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 산 정상에 올라갔을 때 예수님의 모습이 신기하게 변화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건을 가리켜 흔히 ‘변화산 사건’이라 부릅니다.
  그런데 이 사건 자체도 중요하지만, 우선 그 배경이 중요합니다. 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그런 모습을 보여주셨냐 하는 겁니다. 1절.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여기서 ‘엿새 후’라는 말을 주목해 보십시오. 언제부터 엿새인가? 따져봐야 합니다. 앞에 마태복음 16장을 보면 어떤 이야기가 나오죠? 예수님께서 처음 십자가 고난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그 전까지는 여러 말씀을 하시면서도 유독 십자가 고난에 대해서는 함구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처음으로 십자가 이야기를 꺼내신 겁니다. 제자들로서는 마치 찬 물을 끼얹은 것 같은 말씀이었습니다. 시쳇말로 하면 김이 팍 샜습니다.
  제자들 중 가장 적극적이었던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항의하는 장면이 마16:21이하에 나옵니다. 마16:21~23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 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 하리이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 ” 여기서 ‘간한다’는 말은 ‘책망한다’는 뜻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항의하다 못해 책망을 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새로운 이스라엘 왕국의 왕이라도 되실 줄 알았을 겁니다. 그러면 자기들도 한 자리씩 할 것이고 ... 이런 저런 꿈에 부풀어 있는데 엉뚱하게 수치스러운 십자가 사형 틀에 못 박혀 죽는다니 말도 안 된다는 겁니다.
  하지만 여러분! 예수님은 이 세상에 왜 오셨습니까? 인류를 죄와 영원한 사망에서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분은 정치적인 메시야가 아니라 영적 메시야로 오신 겁니다. 예수님은 한심스럽다는 표정으로 베드로를 책망하십니다.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넘어지게 하는 자’라는 말은  ‘방해거리’라는 뜻입니다.
  이런 배경에서 본문의 사건이 있게 된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전혀 딴 생각을 하는 제자들에게 당신이 왜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는지 설명해 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변화 산의 예수님은 천국의 영광을 보여주면서, 바로 그게 십자가를 지는 이유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이게 기독교 신앙의 진수입니다. 그냥 영광이 아닙니다. ‘고난을 통과함으로 얻는 영광’입니다. 예수님은 이 진리를 가르쳐 주고 싶으셨던 겁니다. 오늘 우리도 이런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물론 우리는 ‘영광 없는 고난’을 원치 않습니다. 그것은 헛고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고난 없는 영광’을 원해서도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런 건 아예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를 책망하신 이유가 바로 그겁니다. 그것은 어리석고 한심한 망상에 불과합니다. 그런 헛꿈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아무쪼록 오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이 강조하신 신앙의 진수를 받아들이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1] 변화산 정상 : 하나님 나라의 영광
  본문의 변화산 사건은 한 마디로 표현해서 ‘천국 영광의 예고편’입니다. 제자들은 이전에 이미 천국에 관한 말씀을 들었지만 막연해 했습니다. 관심도 별로 없었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오직 세상 나라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변화 산 사건을 통해 “우리가 장차 누릴 천국의 영광이 이런 것이다!” 이렇게 보여주십니다.  
  ① 예수님의 영광 - 메시아의 영광
  먼저 천국의 중심인 예수님의 영광을 보여주십니다. 2절.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예수님의 모습이 순식간에 변화되는데, 너무 신기합니다. 얼굴이 해같이 빛납니다. 옷이 희어졌다고 했는데, 막9:3에서는 세상에서 아무리 빨래를 잘해도 그렇게 될 수 없을 정도라고 표현합니다. 예수님의 신성이 속으로부터 발산되어 옷까지 변화된 겁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구약 시대의 대표 인물인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고, 갑자기 구름이 몰려옵니다. 5절.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구름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현상인데,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이것은 마치 요단강 세례 시에 하늘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던 것과 비슷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고난을 말씀하신 후 아마 제자들은 헷갈리기 시작했을 겁니다. “메시야라면 화려하고 멋있는 왕이 되어야 하는데, 십자가에 죽다니 ... 말이 안돼! 이건 뭔가 이상해!” 아마 이렇게 생각했을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다시 한번 당신이 분명한 하나님의 아들이요 메시아이심을 확증시켜 주셨고, 동시에 십자가 고난이 하나님의 뜻임을 주지시킨 겁니다.
  그 장면이 얼마나 놀라웠는지 제자들의 반응이 어땠습니까? 6절. “제자들이 듣고 엎드리어 심히 두려워하니” 예수님의 하나님으로서의 영광 앞에 감히 고개를 들 수 없었던 겁니다. 예수님은 부드러운 손길로 그들을 일으켜 세웁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눈을 들어보니 그 사이에 어떤 일이 벌어졌나요? 8절. “제자들이 눈을 들고 보매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 하더라” 예수님과 대화하던 모세와 엘리야가 사라져버리고 오직 예수님만 남았습니다.
   예수님만 남았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아무리 위대한 인간이라도 예수님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모세나 일리야가 대단한 인물들이지만 예수님 앞에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예수님만 하나님의 아들이요 메시아로서 인간을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제자들에게 그 진리를 각인시켜주신 겁니다.
  예수님이 비록 십자가 못 박혀 죽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는 겁니다. 예수님의 놀라운 영광이 있다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후에 부활입니다. 승천입니다. 천국의 영광입니다. 그런 파노라마가 준비되어 있기에 예수님은 기쁨으로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실패가 아닙니다. 진정한 승리요 영광입니다.  
  ② 성도의 영광 - 영생복락과 부활의 영광
  예수님이 변화되시는 가운데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났는데 무슨 뜻이겠습니까? 그들의 구약 대표 인물로 성도들을 대표하는 겁니다. 3절.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로 더불어 말씀하는 것이 저희에게 보이거늘”
  그러면 그들이 나타난 이유는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성도들이 장차 천국에서 누릴 영광을 샘플로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아마 이렇게 말씀하시고 싶으셨을 겁니다.
“내가 왜 십자가를 지는 줄 아느냐? 천국에는 죄인이 들어갈 수 없는 곳이야. 그래서 너희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피 흘려 죽는 거야! 너희들이 십자가를 믿으면 이런 영광을 누린단 말이다.”
i) 영생복락(永生福樂)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난 것은 그들이 결코 죽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천국에서 영생복락을 누린다는 겁니다. 성도들도 그럴 수 있다는 겁니다.
  여러분, 세상에 아무리 좋은 데가 많고 좋은 것이 많다고 하지만 천국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사도 요한은 뭐라고 말합니까? 그는 변화산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밧모섬에서 천국 영광을 계시로 보았습니다. 그 광경은 도저히 인간의 언어로 표현 할 수 없는 것이지만, 별 수 없이 이렇게 묘사합니다.
계21:1~4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계22:1~2 “또 저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계22:5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 저희가 세세토록 왕노릇하리로다”  
  여러분! 천국은 아무리 상상해도 그 이상입니다. 어떤 말로 표현해도 그 이상입니다. 그저 성경 말씀을 읽고 그 정도로 상상할 뿐입니다. 그곳이 바로 성도들의 본향입니다.
ii) 부활의 영광
  더 나아가 장차 예수님 재림하실 때 모든 성도들이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게 됩니다.
모세와 엘리야의 모습은 그런 사실에 대한 실증입니다. 바울은 성도의 부활에 관해 여러 가지로 말씀합니다. 빌3:20~21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고전15:42~45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부활의 몸은 이렇게 영광스런 겁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모세, 엘리야의 모습을 보고 어땠을까요? 한 마디로 황홀경에 빠졌습니다. 4절.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와 가로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주께서 만일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여러분, 얼마나 좋았으면 베드로가 이랬을까요? 아무 생각이 없고, 그저 그 영광스런 가운데 오래 오래 있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천국의 영광을 본 사람은 이렇게 찬송할 수밖에 없습니다. 찬송가 289장의  작사자 가브리엘의 노래입니다. “고생과 수고가 다 지난 후 광명한 천국에 편히 쉴 때 주님을 모시고 나 살리니 영원히 빛나는 영광일세 영광일세 영광일세 내가 누릴 영광일세
은혜로 주 얼굴 뵈옵나니 지극한 영광 내 영광일세” 아무쪼록 이 찬송이 저와 여러분의 신앙 고백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2] 변화산 아래 : 영광을 위한 고난  
  ① 예수님의 십자가 - 대속의 죽음
  예수님은 이런 영광을 보여주시면서 그래서 십자가를 지셔야 된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모세와 엘리야와 더불어 무슨 말씀을 하셨을까요? 본문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병행 구절인 눅9:31 보면 ... 눅9:31 “ ...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할새” 별세하실 것은 곧 십자가 죽음을 의미합니다. 제자들과 유대인들이 그렇게 추앙하는 모세와 엘리야도 예수님과 십자가 죽음을 이야기하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그것이 분명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알려준 겁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고통의 십자가, 수치의 십자가지만 달게 지시는 겁니다. 히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여러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은혜로 값없이 구원 받았다는 표현을 쓰지만 사실은 값이 없는 게 아닙니다. 우리의 구원은 값비싼 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의 대가입니다. 베드로처럼 십자가 지시는 예수님을 오해하는 게 아니라 그 은혜에 감격 감사해야 합니다.  
  ② 성도의 십자가 - 자기 십자가
  그렇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에 감사하면 그분의 뒤를 좇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믿는 자들이 어떻게 살아야 한다고 말씀합니까? 천국의 영광을 본 자들은 그것을 사모하기에 어떻게 살아야 마땅하다고 가르쳐 주셨습니까? 마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여기서 자기를 부인한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인간은 다 죄인입니다. 그래서 그 생각이 모두 이기적이고 육신적입니다. 그 생각을 포기하고 버리라는 겁니다. 그리고 ‘자기 십자가’는 무엇을 말합니까? 당시 십자가 사형수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갔습니다. 그것처럼 이제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에 감사하며 자기 십자가를 져야 된다는 겁니다. 자기 십자가는 ‘고난’입니다. 자기 죄 때문에 예수님 십자가 지셨으니 이제 죄 때문에 당하는 고난을 더 이상 당하지 말고, ‘의(義)를 위한 고난’을 자원하라는 겁니다.
  오늘날 시대가 안일을 추구 하다 보니까 우리 성도들도 세류에 휩쓸려 신앙생활을 대충 편하게 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세상의 안일과 세상의 영광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리석은 겁니다.
  옛날 우리나라가 못 살 때 설탕이 부족해서 사카린을 먹었습니다. 사카린은 인공감미료인데, 발암물질이 함유되어 있어서 세계보건기구에서 사용 제한을 권고한 것입니다. 그러니 당시는 그 사실도 몰랐고, 없어서 못 먹던 시대라 많이 먹었습니다. 그러나 설탕도 먹어보고 자연산 고급 꿀을 먹어보니까 더 이상 사카린을 먹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만일 계속해서 사카린을 먹으며 입맛을 다시는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겁니까? 그런데 그런 식으로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천국의 영광을 체험하지 못해서인지 여전히 세상의 헛된 것들을 보고 입맛을 다십니다. 육신에 속한 ‘사카린 신앙’입니다.
  우리는 천국의 영광을 맛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천국의 영광을 본 사람으로서 세상의 하찮은 것들에 빠지면 곤란합니다. 세상에 살되 천국의 영광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고난의 십자가를 달게 지는 겁니다.

i) 믿음을 지키기 위한 고난 - 이 믿음은 우리를 천국으로 안도하는 겁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지키기 위해 핍박도 조롱도 감수해야 합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세상에서 혹시 신앙 때문에 손해 볼 일이 있다면 기꺼이 보라는 겁니다. 세상 눈치 보느라 십자가 신앙을 숨겨서는 안 됩니다. 세상의 우상에 고개 숙이면 안 됩니다. 세상의 죄악과 타협하면 안 됩니다.
ii) 계명을 지키기 위한 고난 - 우리는 이제 주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혹시 그 말씀 계명을 지키느라 손해 볼 것 같습니까? 손해 보라는 겁니다. 남들이 다 해도 주님이 원치 않으면 하지 말아야 합니다. 남들은 안 해도 주님이 원하면 해야 합니다.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하고, 주일을 지키고, 깨끗하게 살고, 정직하게 살고, ... 죄악 세상에서 이렇게 사는 게 힘들지만 그래도 지켜야 됩니다. 그게 자기 십자가일 수 있습니다.
iii) 사명을 지키기 위한 고난 - 가장 고상한 것은 사명을 위한 고난을 자청하는 겁니다. 복음을 증거하느라,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느라 수고해야 합니다. 헌신해야 됩니다. 시간을 드리고 물질을 드리고 몸을 드리고 ... 축복만 구하는 신앙은 사절입니다. 영광만 구하는 신앙은 사절입니다. 십자가 믿는 신앙이 중요하지만, 십자가 지는 신앙은 그 이상으로 중요합니다.
  ③ 영광을 위한 고난 - 크고 영원한 영광
  이렇게 자기 십자가를 지는 신앙은 왜 아름답고 귀합니까? 그 고난은 영광을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영광이 따라옵니다. 주님을 위한 고난의 대가라고 할 수 있는 사도 바울은 외칩니다! 롬8:17~18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여기서 ‘생각한다’는 말이 중요합니다. 헬라어로 λογιξομαι(로기조마이)이고, 영어성경에는 consider (NIV)로 번역되어 있는데 ‘계산하다’ ‘목록을 작성하다’ 등의 뜻입니다. 한 마디로 수지타산이 맞는다는 말입니다. 당장은 손해 보는 것 같지만 가장 복되고 존귀한 인생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바울은 성도들에게 또 이렇게 권면합니다. 고전15:58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가 세상에서 성공하고 출세하고 육신의 축복을 많이 받는 것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이후가 더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들을 갖고 어떻게 살아가느냐 하는 겁니다. 주님을 위한 고난에 자원해야 합니다. 그럴 때 진정으로 고귀한 인생이 됩니다. 미래의 더 큰 영광이 있습니다.  
  뉴질랜드의 에드먼드 힐러리 卿(Sir Edmund Hillary, 1919 ~   )의 이야기를 잠시 나눕니다. 그는 산악인이요 탐험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1953년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를 등정했습니다. 현재 88세지만 두어 달 전 신문을 보니까 남극을 탐험할 정도로 노익장을 자랑합니다. 세상에서는 그런 외적인 성공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진짜 중요한 것은 다른 겁니다. 그는 네팔의 세르파들과 그 자녀들을 위해 사랑의 헌신을 하는 분입니다. 복지재단을 만들어 학교, 병원을 지어주고 ... 그의 인생의 정상은 에베레스트가 아니라 바로 이겁니다. 사랑으로 헌신하는 삶 그것이 인생의 정상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인생의 정상에 올라가는 신앙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세상에 사는 동안 죄 가운데 살고, 죄 때문에 당하는 고난 가운데 사는 게 아니라, 이제는 내 몫에 주어진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다시 한번 스펄전 목사의 말을 마음속에 새겨 봅니다. “No Cross, No Crown.” 십자가 없이 면류관이 없습니다! 십자가 없이 구원도 영생도 부활도 없고, 천국의 영광도 없습니다!

출처/홍문수 목사 설교 중에서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