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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기 설교[1,404편]〓/성탄절 설교

성탄을 준비하는 자세 (마 2:1-12)

by 【고동엽】 2022. 8.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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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을 준비하는 자세  (마 2:1-12)

우리는 변함없이 성탄절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성탄을 어떻게 준비해야 합니까? 그런데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성탄절이 오게 되면 성도들보다도 불신 세상이 먼저 호들갑을 떨고 상업적인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화려한 치장과 함께 흥을 돋구고 있습니다.  예수님께 대한 경배와 찬양과 감사보다는 향락을 위해 존재하는 절기인양 둔갑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성탄절'이 ' '즐거운 크리스마스'(Merry Christmas)가 아니라 주님께 '죄송한 크리스마스'(Sorry Christmas)가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불신자처럼 성탄을 보내서는 안됩니다. 구원받은 성도답게 성탄을 바로 보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성탄을 바로 보내려면 바로 준비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온 인류의 소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세상에 오신 것을 안 사람은 소수에 불과했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으나 세상은 그를 알지 못했습니다. 아니 자기 땅에 오셨으나 자기 백성들이 알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세상에 예수님이 오실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인간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우리의 죄를 속량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성탄절은 츄리나 화려하게 장식하고, 싼타 할아버지의 선물이나 이야기하는 절기가 아닙니다. 성탄은 나를 위하여 하늘의 영광스러운 보좌를 버리시고 우리 죄를 속량하기 위해 오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우리의 죄악을 내어놓고 자복하며 주님의 긍휼과 자비를 구하는 날이어야 합니다. 성탄절은 인간이 죄인임을 알리는 날이요, 예수만이 인류의 참 메시야임을 알리는 날입니다.
성탄을 축하하면서 예수님은 없고 축제만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오늘날에만 있었던 모습이 아닙니다. 본문을 보니 예수님께서 탄생하실 때에 기쁨으로 축하한 사람들이 있는 반면에 탄생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무관심하거나, 거절하거나, 증오한 사람들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 아침에는 탄생하신 예수님에 대한 주변 사람들의 반응에 대해서 살펴보고 어떻게 하면 바른 자세로 주님을 맞이할 것인지에 대해서 소개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기다리려고 합니다.

성탄절을 맞이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헤롯 왕과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헤롯은 예수님의 탄생에 대해서 겉으로는 환영하나 속으로는 저주하고 적의를 가진 사람입니다. 본문 2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동방박사들이 헤롯 왕에게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라는 질문할 때에 본문 3절에서 "헤롯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고 밝히고 있는 것처럼 헤롯 왕은 물론이고 온 예루살렘이 요동하였습니다. 그러나 헤롯 왕은 이러한 마음을 속이면서 동방 박사들에게 “가서 아기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고 찾거든 내게 고하여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고 말합니다.(7절) 그러나 이러한 마음은 헤롯의 본심이 아니었습니다. 겉으로는 예수님의 탄생을 환영하는 것처럼 보이나 속으로는 그렇지 아니했습니다. 그러기에 마 2:16에서 “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 본 그 때를 표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무고한 유아들을 다 죽이는 엄청난 일을 자행했던 것입니다.

헤롯은 에서의 후손인 이두메 사람 안티파터(Antipater)의 아들로서 주전 73년경에 태어났습니다. 그는 B.C 47년에 로마의 시이저에 의해서 유대의 총독으로 임명되었고, B.C 40년에는 유대의 분봉왕으로 임명되어 예수님께서 탄생할 무렵인 B.C 4년까지 통치하였습니다. 그는 예수께서 탄생할 무렵 약 70세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권력을 지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음을 볼 수 있습니다.
헤롯왕은 의심도 많고 잔인한 사람으로서 반역할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망상 때문에 그의 아들 셋과 아내와 장모까지도 살해한 사람이었습니다. 전해져 오는 이야기로는 "헤롯의 아들이 되기보다는 그의 돼지가 되는 것이 더 안전하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죽을 때 백성들이 슬퍼하지 않을까 봐 '내가 죽으면 명성 있는 신하들을 처형하라'고 함으로써 훌륭한 신하들을 위한 애도 소리가 자기를 위한 슬픔의 소리로 들리게 하려고 했던 편집광이었습니다.

헤롯왕에게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라는 질문은 그에게 어떠한 충격을 주었는지는 상상을 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소동한지라"고 그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소동하다"(타랏소)라는 말은 "뒤흔들다", "흥분케하다", "당황케 하다", "요동케 하다"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곧 극심한 불안과 공포의 현장을 생동감 있게 전해주는 단어입니다.
그는 이미 70세의 나이로 쇠약해진 육체인데도 예수님의 탄생 소식에 안간힘을 쓰며 잔인(殘忍)무도하고 피에 굶주린 폭군답게 왕권 수호에 미친 행동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을 불러 유대인의 왕 즉 메시야가 어디서 태어날 것인가를 묻고, 또한 박사들을 가만히 불러 별이 나타난 때를 자세히 묻고서(7절), 예수를 찾거든 내게 고하여 나도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8절)고 위장을 하였습니다.
이렇게 악한 자는 경건을 가장하고, 신앙이란 가면을 쓰고 자기의 악함을 감추게 됨을 볼 수 있습니다. 헤롯은 겉으로는 미소를 지으며 환영하고, 속으로는 적의에 찬 태도로 살기가 서렸던 것입니다.
또한 헤롯과 함께 온 예루살렘이 소동을 하였습니다. 예루살렘이 소동한 것은 헤롯의 통치기간이 끝나감에 대한 동정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왕조가 바뀔 때 따라오는 전쟁과 혼란의 공포 때문이요, 헤롯의 병적인 잔인한 학정 때문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이름만 들으면 괜히 미워하고 증오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이러한 사람들이 성탄절에 더 흥청거린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던 말던지 간에 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① 제사장과 서기관들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는 헤롯왕의 질문 앞에 저들은 명쾌한 답을 즉시 제공하였습니다. 본문 5절과 6절에 보면 "가로되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 바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제사장들은 아론의 후손들이 그 직분을 이어갔으나 헤롯은 자기의 권세로 아무나 제사장으로 임명하기로 하고 해임시키기도 하였습니다. 여기 유대 종교의 서기관은 구약 율법에 능통하며, 구약의 구전에 해박한 지식을 가진 율법 해석자요, 교사였습니다.
이들은 미가서 5장 2절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그리스도의 탄생 지역을 명확히 꼬집어 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메시야의 탄생 곧 예수님의 탄생에 대해서 이상하게 느껴질 만큼 철저하게 무관심했습니다. 메시아의 탄생지는 베들레헴이라고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쳐 주기는 하였으나 저들은 베들레헴에 가지도 않았고 대망의 메시아가 오셨다고 하는데도 기뻐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특권만 챙기고 헤롯 왕 눈치만 살필 뿐 메시아에 대한 지식이 있으면서도 무관심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이 메시아의 탄생에 대해서 전혀 무관심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당시에 제사장이나 서기관들이 너무 깊이 세속화되었기 때문입니다. 물질이나 명예나 어느 면에서나 부족함이나 불편이 없었기 때문에 구태여 메시아를 필요로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바리새인과 서기관이 왜 성경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영접하지 못했습니까?
첫째로 인간의 교권주의 때문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그들의 교권주의 때문에 예수님을 영접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당시 이스라엘 민족을 지도하는 지도 계급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라는 분이 나타나서 죽은 자를 살려내고 중풍병자를 일으키며 오병 이어로 수많은 군중들을 먹이고도 남기는 등 인기가 높아지자 그들은 시기, 질투가 났습니다. 자신들이 존경과 높임을 받아야 되는데 예수라는 사람이 나타나서 많은 일들을 행하니 시기 질투가 나서 예수님을 핍박하고 가는 곳마다 괴롭혀 나중에는 처참하게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교권주의자들은 예수님을 영접하지 못합니다. 교권주의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처럼 교회의 직분을 하나의 권리로 착각해서 남에게 명령하고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모두 죄성을 갖고 있기에 자칫하면 그렇게 되기 쉽습니다. 교회의 직분은 섬기는 직책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기심으로 섬기는 본을 보이셨습니다.

둘째로 형식주의와 외식주의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하지 못한 사람들은 형식주의 자들과 외식주의 자들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또한 이에 속합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누구보다 성경을 잘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주님으로부터 회칠한 무덤이라고 책망 받았습니다. 외식주의자였기 때문입니다. 겉으로는 훌륭하게 보였지만 속에는 정성도 없었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영접하지 못할 뿐 아니라 계속해서 예수님을 쫓아다니며 괴롭히다가 나중에는 처참하게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모습은 지금 우리의 모습 속에서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성탄을 맞이하면서 우리 자신을 반성하여 타성에 젖어 형식적이고 의식적이었던 것들을 회개하고 말구유에 탄생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해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본문이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이들을 볼 때 성경을 안다는 것 자체가 다 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종교적인 직분을 가진 자들이 메시야의 오심에 대해서 너무나 무관심을 나타내었습니다. 저들은 하나님이 인간이 되어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에 대해서 기쁨을 가지지 못하였습니다. 습관적으로 봉사하고, 지식적으로만 성경을 연구하였지, 정작 구약 성경이 가르치는 오실 메시야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던 자들이었습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도 이런 자들이 없다는 보장을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예수는 오래 전에 믿었는데 은혜 체험도 없고, 눈물로써 자기의 죄를 회개해 보지도 못하고, 진정 생명의 주님께 자기의 삶을 드려 헌신해 보지도 못하면서 신앙 연륜만 자랑하고, 습관적으로 예배당만 출입하는 사람들이 오늘의 한국교회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현상입니다.
우리는 안다는 것과 믿는다는 것을 혼돈하지 말아야 합니다. 지식과 신앙은 별개의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종교적인 습관으로 주일이면 의례껏 교회 마당을 밟으면서도 구원의 감격도 없고,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삶의 희열도 느끼지 못하고, 주님의 요구에 무엇이든 순종하지 못한다면 바로 나의 모습이 제사장과 서기관의 모습이 아닌지 자신을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누가복음 2장 7절에도 보면 여관 주인의 무관심을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숙박할 곳도 없어 말구유에서 태어났습니다. 만약에 여관집 주인이 예수님이 메시야요, 만왕의 왕인 줄 알았더라면 자신의 안방이라도 내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메시야인 줄 몰랐습니다. 이 주인은 영적인 일에는 무관심하고 세상적인 것에는 지극히 예민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여관집 주인은 오직 돈버는 일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여관집 주인의 구유에서 태어나셨을 때 여관집 주인은 가만히 앉아서 메시아를 자기 집에 모실 수 있는 영광을 얻었는데도 그 기회를 놓쳐 버리고 말았습니다. 여관집 주인은 물질을 모으는 일에만 급급하여 예수님을 모실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놓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성탄에 무관심한 이유는? 이 세상 일에 바쁘기 때문입니다. 직장 일에 바쁘고 장사에 바빠서 시간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생명과 부활, 오실 메시야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오직 돈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들에게는 돈이 곧 종교였고 그의 신앙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메시야를 자기 집에 모실 수 있는 영광을 그만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영적인 무관심! 이것은 우리를 비참케 만드는 독소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여관집 주인과 같은 같이 물질 만능주의, 물질 우상주의을 가진 사람은 주님을 성탄을 준비할 수 없습니다. 물질은 영혼을 피폐케 하는 무서운 파괴력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물질에 매여 노예생활을 하면 예수님을 영접할 수가 없습니다. 물론 물질은 그 자체로 나쁜 것은 아니로되, 잘못 사용하면 오히려 우리의 삶을 불행하게 하고 파괴하여 멸망의 자리로 끌고 감을 기억해야 합니다.

① 교만하게 되기 쉽습니다. 교만해지다보니 물질이 우상이 되어 돈 없는 사람들, 이웃들을 업신여기기 쉽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할 마음이 적어지는 것입니다.

② 무사 안일해 집니다. 부족함이 없기에 신앙생활이 나태해지기 시작하고 그의 영혼이 병들어 쾌락을 찾습니다. 그래서 방탕해지고 죄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독교인으로서 물질관을 바로 가져야합니다. 우리는 모두 청지기입니다. 청지기라는 말을 요즘말로 쉽게 풀이하면 매니저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주인의 것을 맡아서 잘 관리만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물질관에 대해서 세 가지를 말씀합니다.
① 물질은 하나님의 '소유권'이라는 것입니다. 물질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잘 관리하라고 잠시 맡겨 주신 것이므로 하나님의 소유라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합니다.
② 물질은 하나님의 '사용권'에 있다는 것입니다. 물질은 내 것이 아니기에 나와 내가족만을 위해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사용권을 인정함으로 교회 운영이나 구제 등 하나님이 원하시는 곳에 사용해야 합니다.
③ 물질은 하나님의 '회수권'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미 내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회수해 가실 권한이 있습니다. 부요하여도 교만하지 아니하고 겸손하여 마음을 더 낮출 수 있는 그 사람은 말구유에서 탄생하신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는 분입니다.

동방박사들에 대해서는 이름도 출신도 알 수가 없습니다. 이방인이 또한 어떻게 오실 메시야를 알게 되었으며, 초자연적인 별에 의하여 예수의 메시아임을 어떻게 확신하였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알 수가 없습니다.

① 동방박사들은 철저히 헌신함으로 성탄을 준비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본문 1절에 "헤롯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역사 속에 나타나셨습니다. 가상인물이 아니고, 꾸며낸 이야기가 아님을 오늘 본문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생명의 주님되신 예수님께서는 어두운 때에 이 세상에 탄생하셨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잘 알고 있는 유대인들은 이 사실을 알지 못했지만 이방의 나라에서 온 박사들만이 유대인의 왕이신 예수님을 찾아 나선 것입니다.

이들은 비록 이방인이었으나 기쁨과 감격에 찬 경배를 예수님께 드릴 수 있었습니다. 서기관과 제사장들의 성경 해석의 도움으로 메시아의 탄생 장소인 베들레헴을 알게 되었고, 전에 나타났던 별의 인도로 아기 예수님이 계신 집까지 쉽게 찾아올 수 있었습니다. 베들레헴은 예루살렘에서 남쪽으로 약 8Km 정도 떨어진 곳으로 다윗이 태어난 고향이요, 다윗의 도성이었습니다(삼상 16:1, 17:12).
베들레헴의 뜻은 "떡집"으로 생명의 떡이신 주님의 오심을 나타내 주는 장소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구약 성경에 대한 능통함에 비해 동방박사들은 별에 의해 메시아가 태어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적은 은혜로 메시아를 만나는 영광을 얻게 되었습니다. 동방박사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먼 길도 마다하고 예수를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오직 아기 예수께 경배 드리기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생명을 바쳐 베들레헴까지 찾아왔습니다. 예배란 자기를 포기하고 생명을 드려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에게는 동방박사들 같이 예수님께 경배 드리기 위해 나를 포기하고 생명을 드리며 예배에 임해 본적이 있으십니까? 동방박사들의 경배는 예물을 드림으로 절정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여기 동방이란 곳이 어떤 나라인지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지만 메대, 파사로 보는 학자도 있고, 페르시아로, 아라비아로, 바벨론으로, 인도로 애굽으로 보는 학자들이 있습니다. 동방에서 온 박사들(Magoi)은 별을 연구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박사”(마고이)라는 말은 갈대아나 파사에서 천문학자들에게 붙여진 이름이기에 이들이 갈대아나 파사에서 온 것으로 생각할 수는 있습니다. 요즘말로 하면 천문학을 연구하는 상류계층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저들은 별을 연구하다가 예수님의 별을 보게 되었습니다(2절). 저들은 초자연적인 특별한 별을 발견하고는 곧바로 유대 땅까지 발길을 돌렸습니다.
그런데 저들은 민수기 24장 17절에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 한 홀이 이스라엘에게 일어나서 모압을 이 편에서 저 편까지 쳐서 파하고 그 소동하는 자식들을 다 멸하리라"고 하신 말씀을 믿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예루살렘까지 온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동방박사들은 유대인의 왕이신 메시아를 찾아 머나먼 길을 순례해야만 하는 헌신자들이었습니다. 당시의 교통수단은 너무나 열악했습니다. 저들이 걸었던 길은 지금처럼 아스팔트로 포장된 길이 아니었습니다. 참으로 험난한 길이었습니다. 먼지를 뒤집어쓰고 와야 하는 길이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영광의 길이 아닌 십자가의 길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평안의 길이 아닌 고난의 길이 우리 앞에 놓여 있습니다. 그래도 가야만 하는 길입니다. 종종 교회 안에는 교회의 직분을 벗어 던지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십자가 지기를 싫어하는 성도들을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시대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예수로 말미암아 구원받았다고 소리치지만 고난의 길을 거추장스럽게 생각하는 성도들이 늘어만 가고 있습니다. 참으로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동방박사들은 상류계층의 사람들로서 생활이 넉넉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저들은 평안을 추구하지 않고 예수님을 찾아 순례의 길을 떠났습니다.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여행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무릅쓰고 먼길을 떠났습니다.
참된 예배란 이렇게 생명 바쳐 주님의 만나는 것입니다. 저들은 성경을 잘 알지 못해 베들레헴이 아닌 예루살렘으로 찾아 나섰습니다. 다행스럽게 서기관들의 조언을 듣고 베들레헴으로 가려할 때 동방에서 보던 그 별이 저들을 예수님이 계신 곳까지 인도했습니다. 만 왕의 왕이신 주님께 경배하려고 하는 자들에게는 남이 알지 못하는 신비스러운 은혜체험을 할 수 있음도 교훈해 주고 있습니다.

왕을 찾아 나서는 것! 이것이 우리 성탄축하의 중심이요,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자녀들에게 선물을 주는 것이 성탄절이 아니라 우리를 영원한 진노에서 건져내신 그분께 예물을 드리는 것이 참된 성탄이라는 말입니다. 왕을 찾아 나서는 저들의 헌신된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을 만나기 위해 고난도 감수하는 믿음이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 주님께 예물을 드림에 있어서도 인색함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본문 2절에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라고 했습니다. 11절에서도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 모친 마리아의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고 하였습니다.
동방박사들의 성탄 방문의 목적은 왕께 경배하고, 예물을 드림에 있습니다. 왕께 경배! 이것이 성탄의 본질이요, 목적입니다. 저들이 생명을 바치고, 자기들의 생활을 포기하고 베들레헴까지 찾아온 것은 요셉을 만나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마리아에게 축하해주기 위해 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메시아 되신 아기 예수께 경배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기만하려고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주님을 만나기 위해 이러한 헌신도 없이 참된 경배를 드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위험한 생각은 없습니다.

저들은 만 왕의 왕 예수님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습니다. 여기 '황금'은 왕께 드리는 최고의 선물로 예수님을 왕으로 인정하는 행위였습니다. 그리고 '유향'은 제사장이 성전에서 향기를 내기 위해 피우는 향으로서 예수님을 대제사장으로 인정하는 예물이었습니다. 그리고 '몰약'은 죽은 사람의 시체에 바르는 약으로서 이것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나타냄으로 예수님의 우리의 구원자 되심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경배에는 이렇게 헌신이 담겨진, 정성이 담겨진 예물이 있었습니다. 어쩌면 우리에게 성탄의 감격과 기쁨이 없는 것은 주님께 드릴 진정한 예물이 없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많이 드리느냐, 적게 드리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그 예물에 내 마음이 담겨져 있고, 그 예물에 내 헌신이 담겨져 있느냐가 중요한 문제입니다. 형식적인 예물, 마지못해 드리는 예물은 주님께 대한 경배를 퇴색시키고 말 것입니다.

3. 동방박사들은 성령의 지시에 순종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본문 12절에 "꿈에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 지시하심을 받아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가니라"고 하였습니다. 동방박사들은 메시아 되신 예수님께 경배하고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다른 길로 고국으로 돌아갔습니다. 헤롯이 동방박사들에게 예수님이 계신 곳을 찾거든 나에게 알려 나도 가서 경배하게 하라고 요청했습니다(8절). 물론 이 헤롯의 말은 예수님께 경배하기 위함이 아니라 예수님을 죽이려는 음모였습니다. 하나님은 악한 헤롯의 모략을 아시고 박사들로 하여금 선한 길로 가도록 인도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동방박사들은 우리와 같이 완전한 하나님의 계시(성경)를 가지지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동방박사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하게 순종하였습니다. 우리가 받은 완전한 계시에 비해서 희미하게나마 꿈에 들려진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한 순종의 모습을 보여줌으로 불순종으로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교훈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하나님의 요구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내 뜻과 내 방식으로 교회를 섬기고 봉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주님을 만난 자들은 걸어야 할 길이 따로 있습니다.
주님을 만난 자들은 변화된 길이 있습니다. 동방박사들은 예수님을 만난 뒤 지금껏 걸어왔던 길로 가지 아니하고 새로운 길, 진리의 길, 생명의 길, 순종의 길로 나아갔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만난 사람, 성탄을 맞이한 사람들은 다른 길로 가야 합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생활방식이 달라져야 합니다. 예수를 만난 사람은 변화된 생활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를 만나기 전과 만난 후의 길이 달라야 합니다. 옛사람의 길이 아닌 새사람의 길로 가야 합니다. 죽음의 길이 아닌 생명의 길로 가야 합니다. 새로운 길, 성령이 인도하시는 길로 가야 합니다. 내 마음대로 가는 길이 아니라 말씀에 따라 순종하는 삶이 있어야 합니다. 내 경험, 내 방법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걸어가야 합니다. 헤롯이 명한 길은 죽음의 길입니다. 복음에 역행하는 길입니다. 불순종의 길입니다.

3. 그렇다면 말구유에 탄생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위해서 무엇을 준비해야 하겠습니까?
⑴ 사모하는 마음으로 성탄을 준비해야 합니다.
동방박사들은 사모하는 마음이 있었기에 멀리 동방에서부터 아기 예수님을 경배하기 위하여 달려왔습니다. 사모하는 마음속에 정성이 담겨져 있습니다. 헌신이 있습니다. 오늘날도 예수님의 탄생을 맞이하면서 사모하는 마음을 예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한 은혜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사55:1-2)

⑵ 예수님을 영접할 빈방을 준비해야 합니다.
베들레헴 여관 집주인은 빈방이 없어서 왕의 왕을 모실 수 있는 일생일대의 축복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여기에서 빈방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비어있는 심령, 즉 깨끗한 영혼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심령이 깨끗한 자에게 찾아오십니다. 예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기에 더러운 곳에는 계실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지난 일 년 동안 하나님과 사람 앞에 범한 불의와 죄악들을 회개하고 깨끗한 심령이 되어질 때 주님을 모시어 들일 수가 있습니다.

⑶ 기도로 성탄을 준비해야 합니다.
누가복음 2장을 보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고 기도하던 안나라는 분이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항상 쉬지 않고 기도로 준비했더니 마침내 탄생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기도를 통해서 주님을 만나는 성탄, 기도를 통해서 새 천년 새 해부터 주님과 동행하며 주님께서 주시는 축복을 받아 누리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⑷ 예물을 준비하여 온전히 경배해야 합니다.
동방박사는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드렸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어른을 찾아 뵐 때 빈손으로 찾아가는 경우는 없습니다. 적든 많든 정성을 다하여 예물을 준비합니다. 그렇다고 하면 우리를 영 죽었던 자리에서 건져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신 크리스마스를 맞이하면서 우리가 어찌 빈손으로 나와서 예배드릴 수 있겠습니까?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크리스마스를 앞에 놓고 분명 예수님을 맞이하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준비하는 것에 달려 있습니다. 오늘날도 예수에 대하여, 기독교에 대하여 반응을 보이는 세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헤롯과 같이 겉으로는 미소를 띠고 있지만 예수를 멸시하고, 기독교를 말살하려는 무리들이 있을 것입니다. 경건을 가장하여 신자를 넘어뜨리려는 무리들이 있을 것입니다. 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같은 종교적으로 잘 훈련된 불신앙자들이 있습니다. 예수를 만난 체험도 없고, 구원의 감격도 없고, 예수께 대한 사랑이나 헌신이나 충성도 없으면서 단순히 어렸을 적부터 습관화된 맹목적인 종교생활이 전부인양 착각하는 무리들입니다. 이들은 교회출입을 많이 하여 성경에 대한 지식은 남다를지 모르나 그 말씀이 나하고는 전혀 상관없는 말씀이기에 오랜 신앙생활도 자신에게는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적인 일에는 예민하게 움직이지만 영적인 일에는 전혀 무관심할 뿐입니다. 우리는 비록 성경에 대한 많은 지식은 없어도 동방박사들처럼 주님을 경배하기 위해서는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고 주님께 나아오고, 자기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주님께 예배드리는 충성스러운 자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탄을 맞는 사람들의 참된 모습입니다. 우리들의 생애에 수없이 많은 성탄절이 지나갔으나 2002년도에 맞이하는 성탄절은 우리의 생애에 있어서 진정 예수를 모시고, 그분을 섬기며, 그분께 생명을 드리는 변화된 모습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해 우리가 무엇을 준비해야 합니까? ① 사모하는 마음을 준비해야 합니다. ② 빈방을 준비해야 합니다. ③ 기도로 준비해야 합니다. ④ 예물을 준비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 이번 성탄에 탄생하신 아기 예수님께 경배하고 정성을 다해 예물을 드릴뿐 아니라 예수님께서 다시 재림하시는 영광의 날에 영원한 천국에서 영원히 사는 행복의 주인공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제는 습관적인 종교생활이 아니라 순간순간 드려지는 나의 거룩한 모습이 하나님 앞에 아름답게 나타나는 우리의 생애에 의미가 있는 성탄절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한국교회 부흥설교 설교 정보수집 편집위원 협조와 추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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