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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2,922편)〓/성찬 설교

성례적 삶

by 【고동엽】 2022. 8.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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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례 聖禮(성매 聖媒, 성사 聖事)의 의미

가. 성례 (성매, 성사)의 어의는 무엇인가?

  한국 그리스도교에서 성례(거룩한 예식), 성사(거룩한 사건) 혹은 성매(거룩의 매체)라는 용례는 희랍어 미스테리온(mysterion)과 라틴어 사크라멘툼 (sacramentum)에 어의적, 역사적, 신학적 기원을 갖는다.

  신약성서에서 언급되고있는 미스테리온(mysterion)이라는 단어는 한글 개혁성경에 “비밀”로 번역되어있다. 예를 들어 신약성서는 “하나님의 그 은혜의 경륜”(엡 3:2-3), “그리스도”(엡 3:4),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취었던 구원의 계획 (엡 3:9),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골 1:27) 그리고 간접적으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 (골 1:18)를 비밀 (mysterion)이라 칭한다. 이런 언어적 용례에 근거해 볼 때 신약성서에서 비밀 (mysterion)이란 세계를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구원계획 그리고 이 구원의 은총을 단 한번에 흠없고 순전히 드러내시고 구체적으로 실현시키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삶을 가리킨다. 이 비밀에는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그림자의 형상으로 예표했던 구약적 매체 즉 구약의 예언, 희생제사, 이스라엘 민족의 삶,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그 분 안에 숨겨진 구원의 은총을 역사 안에서 실현시켜나가야 할 종말론적 매체로서의 교회의 삶 (예배, 봉사, 치유, 증거, 믿음, 신조, 그리스도인들의 삶 등)이 포함된다.

  옛 라틴역 성서에서 희랍어 미스테리온(mysterion)은  사크라멘툼(sacramentum)으로 번역된다. “사크라“(sacrare. 사람이나 물건을 어느 곳에 위치시킴)와 ”사크룸“(sacrum. 거룩)의 합성어  사크라멘툼(sacramentum)은 로마 이방종교에서 “사람이나 물건을 세속으로부터 구별하여 신적 특권과 의무가 주어져 있는 어느 특별한 공간으로 이동시키는 행위”를 뜻했다. 정치 군사적 의미에서 이 용어는 로마 황제의 신성한 군대(sacra militia)의 특권과 그에 상응하는 윤리적 의무 세계에로의 진입행위를 뜻하는 것으로서 로마군 사이에서 행해졌던 황제의 기 앞에서의 충성의 서약을 가리키기도 했다. 이렇게 당대 세속 사회에서 종교적, 정치-군사적 의미로 채색되어있던 사크라멘툼이란 용어는 3세기 경 서방 라틴 교회에 의해 받아들여져 신적 은총의 매체를 가리키는 교회적-예배적 용어로 쓰여지게 된다. 개신교 전통의 배경이 되고있는 이 서방 라틴교회의 신학적 조상이라 할 수 있는 북아프리카 신학자들은 (터툴리안, 시프리안, 어거스틴) 하나님의 구원계획의 성취로서의 예수 그리스도, 성육신, 교회, 신앙, 신조들을 사크라멘툼이라 불렀다.

  희랍 동방전통과 라틴 서방전통에서 미스테리온(mysterion) 혹은 사크라멘툼      (sacramentum)은 이미 언급되었듯이 넓은 의미에서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성취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성육신의 신비(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의 신비한 일치와 화해)와 그 은총의 매체와 표현방식으로서의  교회의 종교적, 윤리적, 제의적 표현들 (예배, 세례, 성찬, 선포, 안수, 참회 등)을 포괄하고 있다. 뉘앙스의 차이를 구별해 본다면 미스테리온이 은총의 현현과 임재의 객관적 공간(예수 그리스도, 교회의 삶)에 보다 관심하는 반면 사크라멘툼은 그러한 은총의 공간 속으로 진입해 들어가는 자들의 주체적, 윤리적 측면을 강조하는 듯 보인다.  

  어거스틴은 성례를 “비가시적 은총의 실체를 매개하는 가시적 상징“이라 정의내렸는데 모든 교회의 성례 이해에 근본적 시각을 이루어왔다.

나. 감리교에는 어떠한 성례가 있는가?  

  감리교는 다른 주요 개신교 전통들(루터파, 개혁교, 성공회)과 함께 세례와 성찬을 성례로 인정한다. 웨슬리는 그리스도의 은총을 받는 “은혜의 수단”(means of grace. 자리)으로서 이외에 금식, 기도, 말씀, 선행 (그리스도인의 삶)을 제시한다. 웨슬리에 따르면 이러한 성례와 수단들이 그 자체로 회중들에게 기계적, 마술적으로 은총을 매개하진 않는다. 은총을 수여하는 주체는 하나님이시며 이러한 성례와 수단들을 통해 은총을 주실지 여부는 전적으로 그 분의 자유에 달려있다. 웨슬리의 체험에 따르면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신약성서와 그 후 신앙공동체의 경험을 통해 명시적 (세례, 성찬), 때로는 암시적 (기타 은총의 수단들)으로 은총의 자리들을 알려주셨다. 모든 신자들이 해야할 일은 이러한 성례와 은총의 자리(수단)에 앉아 자유로이 우리를 만나시는 그 분을 기다리는 것이다. 작은 나무에 올라 초점 맞추고, 초대하고, 대화해야 할 그 어떤 분의 시선을 찿고있었던 삭개오처럼, 은총으로 흔들리게 될 새로운 삶의 움직임을 예감하며 긴장 속에 앉아있던 베데스다 못가의 병자들처럼, 자기가 구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채 그러나 알 수 없는 깊은 목마름으로 성전 미문에 자락을 깔고 막연히 손내밀고 있어야했던 앉은뱅이 거지처럼, 그렇게 거기서 그분을 깨어 기다려야하는 자리가 바로 성례와 은혜의 수단들인 것이다.  

다. 성례(성매, 성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성례는 그리스도의 약속, 매체, 그리고 그 약속에 대한 믿음이라는 세 요소로 구성되어있다. 이 세가지 구성요소가 함께 만날 때 성례는 하나님의 말씀이 체험되고 우리의 삶이 변화되는 거룩한 사건(성사)이 된다. 성례의 본질은 그것이 사건이라는데 있다.

  첫째, 성례의 중심에는 그리스도의 약속이 있다. 예들 들어 성찬성례에는 “이 것이 나의 몸이니 받아 먹으라!” “이 것은 생명의 떡이니라”와 같은 주님의 약속이 있다. 예레미야가 두루마리를 먹었듯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몸과 피, 즉 그 분의 구체적 삶과 삶의 완성으로서의 죽음을 먹는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 편입됨으로써 그 분 안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과의 화해와 친교에 동참하게 되는 것이다. 성례는 믿는자들의 종교적 상상력에 근거하지 않고 주님의 명령과 약속에 근거한다. 이런 뜻에서 루터는 성례의 핵심을 복음의 선포 (그리스도의 약속)라 이해하였다.

  둘째, 이러한 그리스도의 약속은 떡, 포도주, 물, 기름, 향과 같은 구체적 상징 혹은 표와 함께  주어진다. 몸을 입은 연약한 인간의 믿음을 위한 것이다. 부부의 사랑이 결혼반지에 얽혀있듯, 민족에 대한 이해와 정서가 태극기와 애국가의 이미지와 가락에 녹아있듯 역사적 신앙공동체로서 그리스도교는 이러한 떡, 포도주, 물 속에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기다림, 사랑, 그리고 약속과 그 분을 향한 우리의 순종과 찬양을 담아왔다.

  셋째, 성례를 통해 그리스도의 약속이 선포되어있다는 사실이 이미 언급되었다. 이러한 약속의 선포는 그 것에 대한 신뢰와 믿음을 요구한다. 성례를 통해 어떤 축적된 은총이 참여한 자들에게 기계적, 마술적으로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성례에 담겨있는 그리스도의 약속 (세례-죄의 용서와 중생, 성찬-주님을 통한 하나님과의 화해와 친교)은 그 약속을 신뢰하고 목말라하는 신앙의 응답을 통해서만 나의 삶 속에 하나의 구체적, 실체적 사건으로 경험되어진다.

          
라. 예배와 성례는 어떤 관계에 있는가?

  세례는 특별절기(부활주일, 성령강림주일, 혹은 성탄절)를 맞아 행해지는 바 정규 예배에 삽입되는 특별순서로 간주된다. 그러나 세례는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야할 예배의 기본 전제이다. 성경은 물을 통해 당신의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시는 하나님의 구원역사에 대해 증거한다. 첫 창조의 물 속에서 빛, 색, 형태들, 하늘, 땅, 생명이 창조되었으며 이 첫 피조세계는 스스로의 삶을 통해 그 분의 선하심과 아름다움을 찬양하는 우주적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노아의 홍수 그 물 속에 타락의 땅은 잠기고 바로 그 물 속에서 그 분께 순종하고 찬양할 새하늘과 새땅이 열리게 되었다. 홍해의 물을 통해 이스라엘은 우상의 땅 애굽을 탈출, 광야로 나와 하나님께 예배드리게 되었다. 높이 들리우신 주님의 옆구리에서 물이 나왔으며 한 강도는 그 물 속에서 그 분과의 사랑과 친교의 예배가 완성될 에덴의 도래를 목격하게 된다. 세례의 물을 통해 그 분과 함께 죽고 다시 일어선 자들은 주님의 영이 거하는 전, 이 세상에 존재하는 신비한 그리스도의 몸, 그리스도의 향, 그리스도의 편지(말씀),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우리가 그 분 안에 거하는 신비한 연합의 경험에 들어서게된다. 물로 깨끗함받고 성령을 새로운 숨결로 받은 이 새 성전 안에서만 진정 영과 진리로 드려지는 예배가 시작된다. 따라서 세례는 일년에 몇차례 행해지는 특별행사가 아니라 삶을 산 제사로 드려야할 참된 예배의 배경과 전제가 된다.

  성찬 역시 년 중 몇 차례 갖게되는 특별행사가 아니다. 우리들 그리스도교 예배의 기본 틀이다. 개신교에서도 매 예배 시 말씀이라는 거룩한 만찬상(성찬)에 둘러앉지 않는가? 루터에 따르면 설교자는 자신의 입에서 그리스도를 쪼개어 나누어준다. 그리고 아멘으로 성도들은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먹는다. 성찬은 모든 예배의 핵심이다. 태양이신 그리스도의 떠오름으로 다시는 밤이 없는 영원한 낮이 시작되었다. 점차 밝아오는 빛의 지평에서 우리는 세계의 완성, 재림의 때를 예감한다. 그럼에도 아직 그 곳으로 갈 길은 멀고 여전히 유혹과 장애가 우리 앞에 있다. 성찬은 그리스도의 몸에의 참여이다. 이 생명의 떡이 우리에게 낙원에이르기까지 힘과 지혜와 소망을 줄 것이다. 매 예배 때 마다 우리는 하늘 가득 이 떡, 만나의 떨어짐을 기다린다.

  성례(세례와 성찬)는 예배에 삽입되는 특별행사가 아니다. 참된 예배의 전제이며 기본 틀이다.

질문

* 그리스도인(교회)의 삶을 미스테리온, 사크라멘툼, 혹은 성례(성매, 성사)라고 한다. 어떤 이유에서 그런가?

* 성례(세례와 성찬)는 세가지 요소가 어우러져 하나의 거룩한 사건이 된다. 어떤 요소들인가?

* 어떤 의미에서 세례는 예배의 전제가 되는가?

2. 성례와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표

  세례와 성찬의 성례가 꿈꾸고 빚어내는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어떤 것인가? 이 성례들을 통해 진입하게 될 새로운 피조물의 삶으로서의 그리스도인의 모습이란 어떤 것인가?

가. 세례적 삶이란 무엇인가?: 그리스도의 삼중직의 삶(왕, 제사장, 예언자)에로의 참여

  물과 불을 통해 죽고 새로운 생명의 호흡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성령에 사로잡힌 자들이 그리스도인들이다. 그리스도의 전과 몸으로서 오늘날 이 세상을 향한 그리스도의 섬김과 봉사의 사역에 참여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세례가 꿈꾸고 빚어내고자 하는 것은 바로 우리의 몸과 삶을 그리스도의 몸과 삶으로 재창조해내는 것이다. 세례적 삶이란 따라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삶을 뜻한다. 이제부터 사는 것은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와의 신비한 연합을 통해 우리 안에서 당신의 삶을 살아내시는 것이며 우리는 그 분과의 신비한 연합을 통해 그 분을 통해 우리의 삶을 살아내는 것이다. 세상을 향한 그리스도의 섬김과 봉사는 구약의 세 직을 통해 이해될 수 있으며 세례의 물을 건너 성령의 임재를 통해 그리스도의 몸으로 재창조된 그리스도인의 삶은 바로 이러한 삼중직 안에서 그 본질과 존재이유를 발견하게 된다.

  첫째, 그리스도의 신비한 몸으로서의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왕권에 참여한다. 창세기 1장 28절의 “다스리라”의 축복에 참여한다. 그리스도는 이 다스림의 의미를 당신의 삶을 통해 표현하셨는바 그 것은 가난하고 헐벗은 나귀로 형상화된 바 섬김과 봉사의 왕권이며 골고다 죽음의 현실, 그 아픔과 소외의 십자가 위에서 구현된 바 만물의 신음을 대신 탄식으로 올리우시는 제사장적 왕권이다. 그리스도의 왕권에 참여한 그리스도인들은 이 불투명한 피조세계에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하도록, 온 피조물이 그 본래적 본질과 모습을 회복하도록, 자신 안에 내재한 신적 소명과 부르심을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전 피조물의 삶 자체가 하나님께 감사와 찬미, 영광을 돌리는 우주적 아멘이 되도록 왕적 섬김과 봉사의 소명을 수행하도록 되어있다.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의 축복을 받았듯이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그리스도인들은 그 분의 섬김과 봉사의 왕권에 참여하여 모든 피조세계에 복과 은총을 나누어주는 복의 근원, 은혜의 자리, 성사, 성매가 되어야한다.

  둘째, 그리스도의 신비한 몸으로서의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제사장직에 참여한다. 제사장은 만물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다시 만물을 봉헌하는 자이다. 그리스도인은 만물의 사제이다.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목적은 자신의 생존과 번영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바 자기 희생을 통한 아버지 하나님에로의 이 세계의 봉헌이다. 그리스도께서 구원의 길, 진리, 생명이시라면 그 분과의 신비한 연합으로서의 그리스도인의 삶 역시 세상에 대해 저들 구원의 길, 진리, 생명이 되어야 할 것이다.

  셋째, 그리스도의 신비한 몸으로서의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예언자직에 참여한다. 예언자란 하나님의 뜻과 의지를 분별하고 응답할 수 있는 자로서 피조세계 내에서 신적 지혜와 증거자와 대리자이다. 예언자는 하나님의 시각으로 모든 사건들과 상황들을 해석하며, 모든 인간적, 현세적 실체들의 신적차원을 들추어내며, 전 피조세계 내에 숨겨있는 신적 신비에 리듬과 언어를 제공하는 해석자, 해몽가, 독자(reader), 시인들이다. 모든 인간은 그 창조적 본질에 있어 예언자이다. 에덴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응답하지 않았던가? (창 3:8) 타락이란 모든 인간에게 본질로 부여되어있던 바 이러한 예언자에로의 신적 부르심을 거부한 채 비예언자적 자세로 세계에 접근하는 삶을 뜻한다. “네가 하나님 같아 질 것이라”(창 3:5). 그 분으로부터 먼저 들음없이, 그 분과 관계없이 이 세계와 자신의 삶을 오역, 왜곡하는 삶을 뜻한다.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은 이 예언자적 삶에로 다시 회복되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행 2:17, 요엘 2:28). 그리스도의 삶에 참여한 자들은 세상을 향한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의 아픔과 아버지를 향한 세상의 초점없는 신음을 읽어내셨던 그리스도의 예언자직에 참여한다.

  그리스도와의 신비한 연합을 통해 그리스도인들은 왕권, 제사장직, 예언자직이라는 그리스도의 삼중직에 참여한게된다. 그리스도께서 구원의 샘, 은혜의 수여자이시듯, 그 분의 몸된 그리스도인들의 삶 역시 이 세상을 향해 구원의 샘, 은총의 수여자, 즉 성례(성매, 성사, 사크라멘툼, 미스테리온)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세례적 삶으로서의 그리스도인의 삶의 본질과 존재이유가 된다.

나. 성찬적 삶이란 무엇인가?: 그리스도의 삶(봉헌, 성별, 쪼갬, 함께 나눔)에의 참여.  

  성찬의 핵심은 당신의 몸과 피를 먹고 영생하라는 그리스도의 초청과 약속에 있다. 여기서 몸과 피는 그 분의 33년의 구체적 삶과 그 삶의 완전한 압축된 표현과 완성으로서의 죽음을 뜻한다.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의 의미는 성찬이라는 성례를 통해 우리에게 선포되며 참여해야할 삶의 전형으로서 제시된다. 세상을 위한 섬김과 봉사로서의 그 분의 삶과 죽음은 오병이어의 이야기 속에 네 개의 구조로 형상화되어있다.

  한 아이가 지니고 있던 보리떡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를 봉헌한다. 주께서 받으시고 기도하사 거룩히 구별하신다. 주께서 찢으시고 모두에게 나누시니 먹고 배불렀으며 12광주리 가득 남았다.

  주님께서 당신의 흠모할 만한 아름다움 없으시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같이 메마른 당신의 삼십 삼년 전 생을 아버지께 봉헌하셨다. “제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기나이다!” 마지막 숨길조차 아버지를 향해 올리신 온전한 봉헌이었다. 아버지께서 아들 예수의 봉헌을 받으사 거룩히 구별하신다. 그 분의 몸은 번제의 제물이 그러하듯 채찍, 가시 면류관, 청동 못, 창, 그리고 그 분을 향한 이 세상의 배반, 부인, 거부, 조롱으로 찢긴다. 그 절정에서 그 분은 당신의 삶이 완성되었음을 선포한다. 찢긴 것에 생명은 거한다. 이스라엘의 생명은 속죄양의 찢긴 몸 사이에서 흐르고 아브라함의 미래는 순종으로 갈라진 이삭의 몸에서 열렸다. 그 분의 찢긴 옆구리로부터 바로 그 분의 생명인 피가 흐르고 세상은 재창조의 사건에 휘말린다.

  떡과 포도주가 봉헌되고 집례자는 감사의 기도로 봉헌물을 성별한다. 집례자의 손에서 떡이 찢겨 회중의 아멘 속으로 나뉘어진다. 그리스도의 삶에로 초대된다.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와의 신비한 연합으로 그 분의 몸이 된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서 그 분의 삶을 살아낸다. 그리스도인들은 그 것이 기쁨이든 슬픔이든 어떤 삶의 경험이라도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들을 하나도 떨어뜨림없이 그 분께 봉헌한다. 모든 것이 그 분으로부터 왔으니 모든 것을 그 분께 돌림이 제사상으로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삶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봉헌된 삶을 성별하실 것이다. 우리의 삶을 찢어 세상에 나누어주실 것이다.

  어거스틴과 함께 우리는 이렇게 기도할 수 있다. 우리는 당신의 밀알들입니다. 당신께서 저희를 거두어 당신의 말씀의 멍석을 펴시고 도리깨질 하십니다. 절구에 넣어 저희를 부수십니다. 물로 빚으시고 불로 구워(물과 성령의 세례) 떡으로 만드십니다. 세상을 위해 차려놓으신 만찬 상에 저희를 떡으로 올리시고 (봉헌과 성별) 저들을 초대하십니다.  저희의 몸을 찢어 저들에게 나누어 주실 것입니다 (찢음). 저희가 찢기는 순간 저희는 주님과 함께 일그러진 얼굴로 기도드립니다. “다 이루었도다!” 그리고 세상은 저희로 인해 배부를 것입니다(나눔).

  세례와 성찬의 의미는 그리스도와의 신비한 연합 속에서 그 분의 삶을 살아내는 세례적, 성찬적 삶을 통해 밝혀지게될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우리 주께서 세상에 대해 그러하셨듯 오늘 이 세상에 대해 하나님의 은총을 매개하는 비밀(mysterion) 혹은 성례가 될 것이다.

. 질문

* 세례적 삶의 구체적 모습의 예로서 어떤 경험들이 말해질 수 있는가?  

* 성찬적 삶의 구체적 모습의 예로서 어떤 경험들이 말해질 수 있는가?

* 아브라함이 받은 축복은 “네가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라는 것이었다. 그리스도인들의 성례적 삶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

3. 성례, 가정, 사회

가. 그리스도교 가정의 본질은 무엇인가?: 성례로서의 가정의 삶

  세례적 성찬적 삶의 본질이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 삶의 전 범위와 무게를 십자가에 못박아(봉헌) 이 세상을 위한  하나님의 거룩한 성매로 만드는 것이라면 이 봉헌행위에 우리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인 가정이 빠질 수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가정생활의 본질은 무엇인가?

  첫째, 결혼과 가정은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속한다. 그 분이 처음 만물을 만드실 때 제정하신 삶의 질서에 속한다.

  둘째, 가정 생활의 기초는 부부간 서로에 대한 언약이다. 서로를 향해 진지하게 전적으로 자신을 맡기고 위탁한다는 사랑의 언약이다. 이러한 지속적 사랑 안에서 평등하고 깊은 관계적 삶을 창조하고, 북돋고, 유지시키는 삶의 원칙을 상호 창조하는데 헌신해야한다. 함께 인간실존의 종교적 깊이를 모험가처럼 탐구해야하며 신앙의 시선 안에서 이 깊음으로부터의 부름에 함께 응답하는 일에 헌신해야한다. 상호 사랑의 언약 안에 거하며 이 친교가 부재시 그 것을 회복하고자 하는 노력에 헌신해야 한다.

  셋째, 이 언약의 기초는 부부간 평등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손과 입술을 통해 남자와 여자에게 생기를 주심으로 산 존재로 불러내셨으며(창 2:4-7) 당신의 신적 형상을 따라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창 5:1-2). 본래 히브리어에서 남자의 갈비에서 여자를 창조했다는 것은 남녀의 구별된 창조가 아니라 동질성과 평등을 말한다.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이란 표현은 이러한 남녀간 평등의 원칙을 웅변한다. 구별된 존재로서 자신의 주체성을 지닌 평등한 자들 간에서만 진정한 사랑과 두 자아의 신비한 연합은 가능하다. 사도바울은 남녀간 불평등이라는 당대 문화적 한계 내에서 사랑이 전제해야 할 평등의 원리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시오”(엡 5:22) 아내는 주께 하듯 남편에게 복종하며 남편은 머리이신 그리스도가 교회를 위해 자신을 포기하고 희생하듯 아내를 섬기라 말한다(엡 5:26). 그리스도의 권위는 섬김과 봉사에서 나온다. 권력에 허기진 제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큰 자란 섬기는 자임을 말한다. 그리스도의 주권은 타인에 대한 절대적 통제, 장악, 결정권을 뜻하지 않는다. 상대를 자신의 소지품, 가재도구, 자기 삶의 이기적 대상과 객체로 전락시킴은 주님의 사랑에 근거한 주권에 배치된다. 이러한 주님의 사랑, 섬김, 봉사에 근거한 권위를 바울은 모든 남편에게 권한다.  

  넷째, 가정은 사랑의 신비를 빚어내는 곳으로서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 그 구원의 실체를 드러내고 맛보게 해주는 구원의 질서이며 따라서 광의의 의미에서 성례라 할 수 있다. 바울은 부부간 사랑의 일체를 가리켜 교회를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의 내밀한 폭과 깊이가 드러나게 될 비밀(사크라멘트, 성례)이라 하였다 (엡5:32). 하나님은 사랑이시므로 사랑의 실체를 경험하지 못한 자가 어찌 하나님을 알겠는가?(요1서 4장) 가정은 사랑을 빚어감으로써 그 분의 사랑을 깨달아가는 성사적 생활의 장이다.

   그리스도교-유대 전통에서 고아와 과부, 나그네와 이방인 같은 낯선 타자는 하나님을 매개하는 성매적, 성사적 차원을 가진다. 아브라함은 세 명의 낯선 자들로부터 하나님의 고지에 접하며 하갈과 이스마엘은 브엘세바 빈 들에서 다가오는 죽음의 낯선 침묵과 두려움 너머로부터 새 민족이 터 잡을 샘을 발견하게 된다. 이스라엘은 낯선 시공 애굽과 바벨론으로부터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된다. 신약에서 예수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며 원수조차 위해 기도하라 하셨다. 교부시대에 발전된 삼위일체 교리에는 하나님의 자기비움과 사랑의 눈으로 타자 안에서 당신을 발견하시는 하나님의 자유와 사랑이 표현되어있다. 이 모든 예들은 낯선 것들을 통해 당신을 드러내시는 하나님과 그 분을 매개하는 것으로서의 낯선 존재의 성매성을 말해준다. 부부는 남남이다. 오직 자신의 주관과 중심을 가진 낯선 인격체로서만 부부는 사랑의 눈으로 상대 안에서 자신과 하나님을 발견하게 된다. 세례 받은 부부는 피차의 얼굴과 삶 속에서 결코 시간과 경험으로 해소될 수 없는 완전한 타자성과 그 타자성 안에 숨겨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서로 확인하는 성례적 생활을 해야한다.

  다섯째, 이 모든 평등과 사랑의 원리는 자녀관계에 까지 확장된다. 가정 구성원 모두에게 피차는 하나님의 사랑을 매개하는 성매(성례)이며 가정은 가장 조그만 교회라 할 수 있다. 교회로서 가정은 새로 태어난 자녀를 위해 세례식에서 저들의 신앙을 대신 고백해야 하는 책임도 안고 있다. 가정은 교회로서 모든 구성원들의 삶이 하나님께 열납될 만한 거룩하고 산 제물로 타오를 수 있는 제단이 되어야한다.

    
나. 그리스도인들에게 사회생활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성례로서의 세계 내 삶

  피조세계는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고 그 분의 손과 숨길로 거룩하게 된 곳이다. 그 이그러짐과 왜곡에 가장 가슴아파하신 분은 바로 하나님이시다. 탄식과 한숨으로 세상의 재창조와 중생을 위해 기도하셨다. 하나님의 관심은 철저히 이 세상이시다. 그 분이 당신을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우리 중에 오신 것은 이 세상에 대한 사랑때문이었다. 세상과 하나님, 육과 영의 이원적 세계관에 잡혀 세상과 육(몸)으로부터의 탈출을 구원으로 생각하는 것은 도피적 신앙으로서 그 분의 세계구원의 뜻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자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은 이 왜곡되고 상처받은 세계를 섬김과 봉사로 치유하고자 하는 성례적 행위였다. 그 분의 침묵, 아픔, 기쁨, 나눔, 기도, 땀, 눈물, 치유, 귀신추방, 식사, 선행, 가르침, 죽음 등 모든 그 분의 시공의 삶이 구원을 매개하는 성사적 삶이었다.

  세례와 성찬을 통해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신비한 몸으로 변모된 교회의 삶은 주체되신 그리스도의 삶을 오늘의 세상에서 이어 살아내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당신의 몸을 깨쳐 세상의 발에 향유를 바르시고 머리결로 닦으셨다. 수건을 허리춤에 매시고 허리 굽혀 찢겨지고 더러워지고 달아오른 세상의 발을 씻기셨다. 강도만나 쓰러져있는 나그네 세상에게 포도주와 기름을 부어 치유하셨다. 세상의 짐을 지고 광야로 나서셨다. 죽음의 땅 무덤 곁을 방황하는 세상을 위해 기도하셨다. 수의로 온 몸이 묶인채 참을 수 없는 죽음의 냄새와 침묵 속에 버려져있던 세상을 다시 자유와 생명에로 불러내셨다. 세상의 한 가운데 십자가를 세우고 그 위에 높이 오르사 길손처럼 오고가는 세대에 아버지의 뜻을 증거하셨다.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근원적 성례(성매)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 그 분의 신비한 몸으로서의 교회는 참여토록 되어있다. 교회는 양적 시공의 어느 한 영역을 거룩이라 칭하고 그 곳에 거주하지 않는다. 40주야 하늘로부터 쏟아져 내려온 노아의 홍수처럼 거룩은 십자가 위에서 지성소이신 주님의 몸, 그 커튼이 찢어질 때 이미 세상을 휘돌아 덮었다. 세상은 그분의 기운으로 가득하다. 세상에서 일하시는 그 분을 따라 세상을 섬기고 봉사함이 교회가 해야할 일이다. 정의와 평등, 평화, 화해에 구체적 몸을 입히고 그 실체를 빚어내는 삶을 통해 교회는 세상을 재창조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에 참여하게되며 그 안에서 자신의 존재이유를 깨달아가게 될 것이다. 이러한 모든 삶이야 말로 하나님께서 흠향하시고 열납하실만한 산 제사가 될 것이며 그럼으로써 하나님의 은총을 매개하는 성례적 삶을 이루어나가게 된다 .

  세상은 교회의 삶을 통해 자신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뜻(그리스도의 편지)을 보게될 것이며 자신들을 위해 스스로를 비우는 교회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의 구원의 향을 맡게될 것이다.


. 질문

* 어떤 의미에서 가정은 하나님의 은총을 경험하게 되는 성례가 되는가?

*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성매(성례)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 어떠한 것들이 있는가?.

* 어떤 의미에서 세상을 향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성례적인가? .


참고도서  

한국문화신학회 편 제 3집, 『한국문화와 예배』 (서울: 한들, 1999).

J. G. 데이비스 저, 金昭瑛. 洪哲華 공역, 『禮拜와 宣敎』 (서울:대한기독교서회, 1982).

루이 에블리, 金秉濤 역, 『그 사람이 바로 당신이다』 (서울:카톨릭출판사, 1978).

U. 샤퍼, 오지영 옮김 『커가는 사랑: 결혼과 서약에 대한 명상』(서울: 성바오로출판사, 1986).

김영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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