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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을 잘 관리하는 법 (느헤미야 7장 1-73절)

by 【고동엽】 2022. 7.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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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축복을 잘 관리하는 법  (느헤미야 7장 1-73절)

함흥차사(咸興差使)라는 고사성어가 있습니다. 태조 이성계가 두 차례 왕자의 난에 화가 나서 왕위를 정종에게 물려주고 함흥으로 가버립니다. 그러자 태종 이방원이 아버지의 노여움을 풀려고 함흥에 사신을 보냅니다. 그러나 이성계가 그 사신들을 죽이거나 돌려보내지 않아서 한번 가면 돌아오지 않는다는 의미로 함흥차사라는 말을 씁니다.

그와 달리 함안차사(咸安差使)란 고사성어도 있습니다. 고려 말에 한 사람이 대역죄를 지어 조정에서 안핵사(按覈使)를 보내 죄를 다스리게 했습니다. 그런데 이 죄인에게는 노아라는 가무와 학문과 구변에 능한 절세미녀의 딸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부친의 생명을 구하려고 스스로 기생이 되어 안핵사들이 올 때마다 안핵사들을 홀려 아버지를 벌주지 못하게 했고, 안핵사들은 주색에 빠져 자기 본분을 잊고 그냥 돌아가거나 파직되었습니다.

결국 조정에서는 최후의 수단으로 강직하고 청렴한 젊은 관원을 안핵사로 보냈습니다. 신임 안핵사는 호언장담했습니다. “나는 이전 안핵사와는 다르다. 나는 주색을 멀리하고 노아와 그 아비를 반드시 벌주겠다!” 그리고 안핵 길에 올랐습니다.

얼마 후, 신임 안핵사가 노아가 사는 고을 근처의 객줏집에 들렸습니다. 이미 안핵사의 동정을 다 알고 있던 노아는 소복단장을 하고 약간 떨어진 곳에서 안핵사의 시선을 끌려고 사람들 사이로 들락날락했습니다. 마침 안핵사가 낙동강을 바라보다 노아를 발견했습니다. 갑자기 가슴이 뛰고 정신이 아득해졌습니다. 안핵사가 노아에 대해 묻자 주인이 말했습니다. “그 아이는 아무개 딸인데 얼마 전 남편과 사별하고 의탁할 곳이 없어 잠시 소인에게 와 있는 중입니다.”

안핵사는 속으로 “옳다구나!”하고 주인에게 엽전을 주고 밤에 상면케 해달라고 했습니다. 주인이 딱 잡아떼며 안 된다고 하자 안핵사는 거듭 간청했습니다. 그러자 주인은 못이기는 체하며 말했습니다. “하룻밤에도 만리장성을 쌓는다 했으니 버리지 않겠다고 약조하시면 한 번 권해보겠습니다.” 안핵사는 약조한다고 거듭 다짐했습니다.

해가 지자 노아가 주안상을 곁들여 안핵사의 방을 찾았습니다. 가까이서 곱게 단장한 노아를 본 순간, 안핵사는 혼이 빠질 것 같았습니다. 그럭저럭 회포를 풀고 동침을 권하자 노아는 일언지하에 거절했습니다. 안핵사는 애간장이 타서 노아의 손을 붙잡고 간청했습니다. 노아는 마지못해 응하는 척 하면서 평생 버리지 않겠다는 약조를 받고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다음 날, 함안에 도착한 안핵사는 곧 노아를 극형에 처하라고 추상같이 명령했습니다. 관아로 끌려온 노아는 말했습니다. “안핵사님! 죄가 커도 무조건 벌주심은 과한 줄 아옵니다. 먼저 공사(供辭;변명서)를 보소서!” 안핵사가 그 말을 옳게 여겨 공사를 보니 아비의 사연과 함께 끝에 시 한 구절이 있었습니다. 그 시를 보고 안핵사는 간밤에 영원히 함께 하자던 여자가 노아임을 알고 속은 것을 알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습니다. 결국 안핵사는 갑자기 병을 빙자하여 치죄를 중지하고 영원히 관직에서 물러났는데, 그 일로 함안차사란 말이 생겨났다고 합니다.

이 세상에 넘어지지 않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사람은 오십 보 백 보입니다. 완벽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야구에서 타율이 3할이 넘으면 최고의 타자입니다. 한 시즌에 5할이 넘는 타자는 역사상 한번도 없었습니다. 우리의 인간성 타율도 3할 정도면 최고이고, 아무리 성인도 인간성 타율이 5할을 넘길 수 없습니다. 성인도 수시로 죄를 짓고 수시로 나쁜 생각을 합니다. 그것이 바로 사람의 실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리 어떤 큰 성취를 해도 겸손함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요새 한국계 하인즈 워드 열풍이 붑니다. 그의 어머니는 힘들게 살면서도 자식 교육을 잘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제일 많이 했던 교육이 “늘 겸손하라!”는 교육이었다고 합니다. 인생에는 항상 기복이 있기 마련인데, 좋을 때 교만하면 절반의 세계만 보고 사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포츠 스타로 엄청난 돈을 벌지만 워드는 지금도 시장에서 산 3달러짜리 티셔츠를 입고 다니며 항상 겸손하게 살려고 노력한다고 합니다.

우리는 잘 나갈 때 겸손해야 합니다. 무엇인가 일을 이루었을 때 더욱 자기 관리에 힘써야 합니다. 축복 받았다는 것보다 받은 축복을 관리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치유 받았다는 것보다 받은 건강을 잘 관리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항상 어떤 성취를 한 다음이 더 중요합니다. 축복받고 그 축복을 잘 관리하는 것까지 잘해야 진짜 축복입니다.

< 축복 관리를 잘하는 법 >

오늘 본문은 성벽 재건 후에 느헤미야가 취했던 조치에 대해 언급하는 본문입니다. 이 본문을 통해서 받은 축복을 잘 관리하는 몇 가지 원리를 깨닫게 됩니다. 받은 축복을 잘 관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끝까지 방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대적의 집요한 방해에도 성벽 재건 사업은 52일 만에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느혜미야는 성벽 재건에 만족하지 않고 여러 후속 조치를 취했습니다. 왜냐하면 성벽 건축만큼 성벽 관리도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성벽을 견고하게 잘 지어도 방심해서 정탐꾼 하나를 지키지 못하면 더 큰 위험에 빠질 수 있었습니다.

무엇이든 후속조치를 잘해야 합니다. 큰일을 이룬 후에 나태에 빠지지 말고 방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원리가 그렇습니다. 결혼하는 것보다 가정을 지키는 것이 더 어렵고, 구원받는 것보다 구원받은 성도답게 사는 것이 더 어렵습니다. 구역장과 선교회장이 되는 것보다 그 직분을 잘 감당하는 것이 더 어렵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2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면 넘어질까 조심하라.”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자만하지 말고, “나는 스스로 설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 안에서 설 수 있다!”고 믿어야 합니다. 항상 하나님이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기도의 파수를 서야 합니다. 일이 잘 될 때에는 오히려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무엇인가 이루었을 때는 더욱 겸허해지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큰일을 이루고도 작은 방심 때문에 인생을 망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작은 하나도 주의해야 합니다. 그 작은 하나가 뚫리는 것을 막는 것이 큰일을 이루는 것만큼 중요합니다. 특별히 자신의 가장 약한 부분부터 지켜야 합니다. 마귀는 항상 우리의 가장 약한 부분을 공략합니다. 사람들이 넘어질 때 보면 여러 가지로 넘어지지 않고 대개 항상 넘어지는 그 부분 때문에 넘어집니다. 작은 그 부분이 뚫리면 점차 자기 인생 전체가 뚫리게 됩니다.

어느 날, 한 아랍 상인이 겨울에 사막에서 천막을 쳐 놓고 쉬고 있었습니다. 밖에는 낙타가 떨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낙타가 천막 문을 젖히고 고개를 들이 밀고 말했습니다. “주인님! 고개만 조금 넣고 있게 해주세요.” 주인은 못마땅했지만 너무 매정한 것 같아서 허락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에 낙타가 말했습니다. “주인님! 코는 따뜻한데 어깨가 춥네요. 어깨와 앞발도 넣게 해주세요.” 할 수 없이 허락했습니다.

조금 후에 낙타가 다시 말했습니다. “주인님! 저의 육봉과 몸도 들여놓게 해주세요. 앞은 따뜻한데 뒤가 추워요.” 할 수 없이 또 허락했습니다. 그런데 조금 후에 낙타가 또 뒷발까지 들여놓게 해달라고 애원했습니다. 할 수 없이 주인은 또 허락했습니다. 이제 낙타도 천막 안으로 다 들어왔습니다. 그러더니 조금 후에 낙타가 말했습니다. “주인님. 우리 둘이 여기 있기에는 너무 좁네요. 주인님이 좀 나가주시면 어때요?”

하나에서 무너지면 다 무너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작은 하나를 주의해야 합니다. 특별히 잘 나갈 때는 더욱 조심해야 합니다. 살찐 돼지는 더 위험합니다. 성공이 좋긴 하지만 성공했을 때가 가장 위험한 때일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때 방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천국 갈 때까지 방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방심하지 않는다고 해서 완벽한 삶이 펼쳐지는 것은 아니지만 방심하지 않으면 교만과 죄로 무섭게 무너지는 일은 막을 수 있습니다.

2. 예배 중심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본문 1절 말씀을 보십시오. “성이 건축되매 문짝을 달고 문지기와 노래하는 자들과 레위 사람들을 세운 후에.” 성벽의 문짝을 달면서 성벽 건축은 완전히 끝나게 됩니다. 그처럼 성벽 건축 후에 가장 먼저 취한 일이 문지기와 노래하는 자들과 레위 사람을 세운 일입니다. 이 구절에서 문지기와 노래하는 자들과 레위 사람들은 모두 레위 지파에 속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주 임무는 성전을 관리하는 일이었습니다.

왜 그들에게 성벽 관리까지 맡겼을까요? 성벽을 관리할 사람이 너무 적었기 때문입니다. 본문 4절 말씀을 보면 당시 예루살렘 성은 컸지만 그 안에 사는 사람은 적었기 때문에 레위 지파의 동원이 불가피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전 관리를 맡은 레위 지파에게 성벽 관리까지 맡긴 것은 한편으로 보면 예배 중심적인 삶의 중요성을 암시하는 말씀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성이 그저 화려하고 강한 성이 되기보다는 하나님의 도성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성벽을 지키는 일도 예배를 맡은 레위인의 주관 하에 이루어지기를 원했습니다. 이 장면을 보면 예배의 중요성을 깨닫게 됩니다. 예배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과 연관지어 말하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본문 2절 말씀을 보십시오. “내 아우 하나니와 영문의 관원 하나냐로 함께 예루살렘을 다스리게 하였는데 하나냐는 위인이 충성되어 하나님을 경외함이 무리에서 뛰어난 자라.” 느헤미야는 예배를 맡은 사람들과 함께 특별히 자신의 아우인 하나니와 성문을 관리하는 관원 하나냐를 세워서 예루살렘을 다스리게 했습니다.

왜 그들을 세웠습니까? 하나니가 자기 동생이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충성된 사람이었고 무엇보다 하나님의 경외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동생 하나니에 대한 인물 평가는 본문에 나와 있지 않지만 그는 느헤미야 1장 2절에서 예루살렘 성이 훼파된 소식을 가지고 안타까워하며 느헤미야에게 달려왔던 것을 보면 그의 동생도 충성된 자였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음을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그처럼 느헤미야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으로 예루살렘을 다스리게 한 것은 그런 사람이 백성들을 잘 다스릴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대개 보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윗사람을 존경하고, 또한 충성된 사람입니다. 또한 그런 사람이 아랫사람도 선하게 잘 다스리게 됩니다. 어느 공동체이든지 일꾼을 세울 때는 충성되고, 윗사람을 존경하고, 무엇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을 세워야 그 공동체가 성공적인 공동체가 됩니다.

우리도 쓰임 받기를 원하고 머리의 축복을 받기를 원하면 충성된 사람, 윗사람을 존경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머리의 축복을 허락하실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가치 있는 인성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품입니다.

3. 자기 맡은 일에 충성해야 합니다.

본문 3절 말씀을 보십시오. “내가 저희에게 이르기를 해가 높이 뜨기 전에는 예루살렘 성문을 열지 말고 아직 파수할 때에 곧 문을 닫고 빗장을 지르며 또 예루살렘 거민으로 각각 반차를 따라 파수하되 자기 집 맞은편을 지키게 하라 하였노니.”

느헤미야는 하나니와 하나냐에게 성문 파수 요령을 구체적으로 알려주었습니다. 먼저 해가 높이 뜨기 전에는 예루살렘 성문을 열지 말라고 했습니다. 해가 높이 떴다고 하는 때는 오늘날로 말하면 대략 오전 10시쯤으로 볼 수 있습니다. 당시 대부분의 성문은 해가 뜨면 열었는데 해가 높이 떴을 때 성문을 열라고 한 것은 그만큼 당시 상황이 긴급한 상황이었음을 암시합니다.

또한 성문을 열기 전에는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들이 순번을 정해 자기 집 맞은편 성벽을 지키게 했습니다. 느헤미야 3장을 보면 그들이 성벽 공사를 할 때도 주로 자기 집 근처의 성벽 공사를 담당했는데, 파수하는 일도 그렇게 일을 배분해서 했습니다. 그처럼 자기 자리와 자기 구역을 충성스럽게 지켜서 예루살렘 성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고린도전서 4장 2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자기의 맡을 일을 책임 있게 하는 것은 사실 자기 영혼을 지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최선을 다해 자기 자리를 지켜야 합니다. 가끔 예배 때 그 자리에 꼭 있어야 할 사람이 없으면 허전하고 그립습니다. 어떻게 되었나 하고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제일 믿음직한 사람은 자기 자리를 지킬 줄 아는 사람입니다.

가장 불행한 일은 자기 자리를 이탈하는 일입니다. 그것은 사단이 제일 좋아하는 일입니다. 사단은 자리를 이탈한 전력이 있기 때문에 가장 많이 충동질하는 것이 바로 자리를 이탈하게 하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에게까지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조롱하는 말을 퍼붓게 했습니다. 만약 그때 주님께서 억울함과 자존심을 이기지 못해 십자가에서 내려오셨다면 인류의 구원은 없었을 것입니다.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러워도 하나님께서 있게 하신 자리에서 이탈하지 말고 그 자리에서 최상을 작품을 만들려고 힘써야 합니다. 때로는 내가 맡은 자리가 힘들고 의미 없는 자리인 것처럼 보여도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자리라면 계속 맡아야 합니다. 사실 아무 의미가 없는 것 같은 자리를 끝까지 지키고, 화려한 자리보다는 자기의 기본 자리에 충성하는 사람이 진짜 충성하는 사람입니다.

교회생활에서도 ‘특별’이란 말이 들어갈 때 잘하는 것보다 평소에 잘하는 사람이 진짜 충성된 사람입니다. 가끔 교회들이 특별새벽기도회를 하는데 그때 새벽기도에 나오는 사람보다 특별하지 않은 날에 새벽기도에 나오는 사람이 더욱 복된 사람입니다.

요즘은 특별새벽기도회를 ‘특새’라고 부르는 교회도 있는데 어감이 별로 안 좋고 부를 때마다 자꾸만 ‘철새’ 생각이 납니다. 너무 특별한 것 좋아하면 철새 성도가 되기 쉽습니다. 사실 부흥회나 특별 집회도 너무 좋아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런 곳에 자주 찾아다니는 것보다 본 교회 예배에 성실하게 참석하는 것이 훨씬 복된 성도의 모습입니다.

오늘 본문 5-73절까지 왜 스룹바벨과 함께 유대 지역으로 귀환한 명단을 적었습니까? 그들에게 적절한 직분을 맡기고, 그 맡은 직분을 상기시키고 잘 수행하도록 하기 위한 뜻도 있는 것으로 추측됩니다. 사실 자기가 자기 맡은 일을 잘 수행할 때 질서도 세워지고, 질서가 있을 때 권위가 살아나고, 그런 공동체에 하나님께서 은혜를 내려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질서가 없고 권위가 흔들리는 곳에 은혜를 내리는 법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축복 받기를 원하면 질서를 잘 지켜야 하고, 자녀들이 잘 되기를 원하면 무엇보다 질서와 권위를 존중하도록 잘 가르쳐야 합니다. 그런 교육을 위해서 가정 내에 꼭 필요한 작은 규칙들을 세울 필요가 있고, 어른 앞에서는 존댓말을 쓰도록 철저히 가르쳐야 하고, 무엇보다 부모 자신이 아이들 보는데서 규칙을 잘 지키는 모범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살면서 권위주의는 버려야 합니다. 권위주의는 교만이고 위선입니다. 그러나 권위는 필요합니다. 권위가 없으면 무질서한 세상이 됩니다. 가끔 일부 운동권 학생들 중에 민주주의를 내세우고 권위주의를 타파한다고 하면서 권위까지 무시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처럼 권위주의를 타파한다고 하면서 권위까지 무시하면 오히려 민주주의에 역행하게 됩니다.

교수를 욕하고, 총장 사진 밟아놓고 “참된 스승이 없다!”고 한탄하는 것은 모순입니다. 그것은 식인종이 자기 부모를 잡아먹고 “나는 고아다!”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습니다. 왜 그런 일이 가끔 벌어집니까? 권위와 권위주의를 혼동하기 때문입니다. 권위주의는 나쁘지만 권위는 지켜주어야 합니다. 아무리 똑똑한 주장을 펴고 정의감이 있어도 정의감이 있는 만큼 예의도 있어야 하고 질서도 존중해야 합니다.

책임적인 사람은 비판에 열을 올리기보다 맡은 일에 열을 올립니다. 그처럼 자기 맡은 일을 묵묵히 감당하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요새 면접관들은 “사람은 많은데 사람이 없다”는 말을 자주 한다고 합니다. 요새 목사는 많은데 목사가 없다는 말도 있습니다. 양은 많은데 질은 저하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 모든 것이 자기 책임을 회피하고 남 탓만 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맡은 책임을 잘 감당하는 성숙한 일군들이 되어야 합니다.

4. 새로운 비전을 가져야 합니다.

다시 한번 본문 4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 성은 광대하고 거민은 희소하여 가옥을 오히려 건축하지 못하였음이니라.” 느헤미야가 성벽을 건축할 당시에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은 매우 적었고, 그와 대비해서 예루살렘 성은 광대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 살 사람도 별로 없는데 성만 거대하게 지으면 무슨 소용이 있나?”

사실 성벽 건축이라는 1차 비전보다 더 중요한 비전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루살렘 성을 잘 지켜 치안도 확보하고, 사람 살만한 안전한 도시로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점차 예루살렘 성에 사람이 채워지는 역사가 있게 될 것입니다. 즉 성벽이 건축된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성 안을 사람으로 채우기에 힘써야 합니다.

본문 5-7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느헤미야는 귀인과 민장과 백성들을 모아 족보에 등록시켰습니다. 그리고 8절부터 73절까지 족보의 인명수를 상세하게 기록했습니다. 쉽게 말하면 인구조사를 한 것인데, 그렇게 인구조사를 실시한 것은 이전에 예루살렘에 살았다가 타 지역으로 이주했던 조상의 후손들에 대한 객관적 자료를 만들어 그 후손들이 다시 예루살렘 성으로 돌아오도록 독려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느헤미야는 성벽 건축으로 자신의 사역이 끝난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느헤미야서는 성벽 건축이 끝난 6장에서 같이 끝나야 합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성벽 건축보다 더 중요한 내면 건축의 비전을 새롭게 가졌습니다. 그 비전이란 바로 예루살렘 성 안에 거주할 사람을 채우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교회의 빈 자리를 채우려는 것과 유사한 비전입니다. 우리도 그런 비전을 가져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축복을 좋아하지만 왜 축복을 받아야 합니까? 보다 많은 사람을 전도하고 보다 많은 영혼을 살리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의 축복이 최종적으로 그 비전을 향하지 않으면 그 축복은 의미 없는 축복이 되고, 받은 축복도 얼마 후에 사라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많은 영혼을 구하고 교회의 빈 자리를 채우는 일에 최대의 관심을 두어야 합니다. 사실 그 일처럼 보람되고 기쁜 일은 없습니다.

이세 상에 쉬운 일은 없지만 목회도 쉽지 않습니다. 요새 사랑매거진 사역도 쉽지 않습니다. 가끔 잠이 부족해 사랑매거진 사역을 그만 둘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래도 꾸준히 사역할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것은 그 사역으로 영혼이 살아나고 가정이 회복되는 것을 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영혼을 살리는 일처럼 보람된 일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복음 전파와 선교와 구제에 더욱 힘을 써서 우리 인생을 알차게 살아야 합니다.

어느 날, 김삿갓이 한 초상집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그때 배운 것이 없는 상주가 김삿갓에게 비문을 써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김삿갓이 물었습니다. “벼슬이 무엇이었습니까?” 아무 말도 없었습니다. “어떤 업적이 있었죠?” 역시 아무 말도 없었습니다. 바로 그때 옆 사람이 말했습니다. “식욕 하나는 끝내줬지요.” 그 얘기를 듣고 김삿갓이 비문을 써주었습니다. “다죽다먹” 상주는 고상한 글귀라고 좋아하면서 비싼 돈을 들여서 비문을 세웠습니다.

훗날 사람들이 너무 궁금했습니다. 도대체 “다죽다먹”이 뭘까? 한분이 수년간의 연구 끝에 그 뜻을 찾았습니다. 그 비문을 거꾸로 읽어보니까 “먹다죽다”라는 뜻이었습니다. 아무 의미 없이 살다 죽었다는 얘기입니다. 얼마나 불행한 인생입니까? 우리는 이생(二生)이 아닌 일생(一生)을 살면서 인생을 보람 있게 살아야 합니다.

< 축복을 끝까지 잘 관리하십시오 >

모든 축복은 그 축복 받은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기도 응답도 응답 받은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그 다음을 잘해야 합니다. 축복 받은 것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교회 부흥의 터와 기둥이 되고, 교회와 선교의 지경이 확대되는 것을 기쁜 마음으로 지켜보는 것을 인생 최대의 즐거움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처럼 축복 받는 것보다 받은 축복을 잘 관리하고 활용하는 일이 더 중요합니다.

잠시 잘 나간다고 교만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실 이 세상에 특별한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인간은 모두 오십보백보입니다. 우리는 이 땅을 살면서 어떤 성취를 해도 교만할 것 없습니다. 그저 하나님 모시고 현재의 삶에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이 세상에 자기 인생을 자신할 사람은 한 사람도 없고, 유혹에 넘어지지 않을 사람도 한 사람도 없습니다.

어느 날, 도시의 큰 성당 신부님이 시골의 작은 성당에서 미사를 인도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승용차 뒷좌석에서 신부님이 두 분 수녀님과 함께 가는데 그 가운데 신부님이 앉았습니다. 왼쪽에는 나이 많은 수녀님이 앉았고 오른쪽에는 젊은 수녀님이 앉았습니다.

그런데 시골 성당으로 가는 길이 비포장 도로여서 차가 덜컹거리며 가다가 갑자기 도로의 웅덩이에 빠지면서 심하게 흔들렸습니다. 그러자 신부님의 상체가 왼쪽의 노 수녀님에게 쏠렸습니다. 그때 신부님 속으로 기도했습니다. “주님! 왜 저를 시험하시나이까?” 곧 자세를 고쳐 앉았습니다. 얼마 더 가는데 다시 웅덩이에 차바퀴가 빠지면서 이번에는 오른쪽의 젊은 수녀님 쪽으로 쏠렸습니다. 그때 신부님 속으로 기도했습니다. “주님! 뜻대로 하소서!”

다 부족한 존재입니다. 지금도 끊임없이 사단은 우리의 허점을 노리고 공격하고 유혹합니다. 그 유혹에 넘어가지 않을 자신이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 사실을 인정하고 어떤 성취를 해도 겸손함을 잃지 않게 하시고, 특별히 오늘 주신 말씀처럼 끝까지 방심하지 말고, 예배와 교회 중심적인 삶을 살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으로 자기의 맡은 일을 잘 감당하고, 전도와 선교에 힘씀으로 축복을 잘 관리하고 승리하는 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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