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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청지기

하나님의 일꾼 (눅10:1-16)

by 【고동엽】 2022. 7.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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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일꾼  (눅10:1-16)

우리 나라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일'에 대한 개념이 아주 좁게 이해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보통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이거나 교회와 직접 관련이 있는 일'이라고 생각되었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의 일꾼'(주의 종, 주의 사자)이 누군가? 를 물으면 망설일 필요도 없이 목사나 선교사를 꼽았다. 조금 확대해서 생각한다는 것이 교회가 맡긴 일을 수행하는 장로, 집사, 권사도 '하나님의 일꾼'으로 쳐주는 정도였다.
그러면 한 번 함께 생각해 보자. 주일에 교회에 나와 여러 봉사 일을 감당하는 장로님, 권사님, 집사님 들이 주일을 마치고 월요일부터는 각각, 직장에서 가정에서 생활하게 되는데 그 때에는 하나님의 일꾼인가 아닌가? 장로님이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실 때는 주의 종인가? 아닌가? 권사님이 가정에서 가사 일에 전념하면서 가정을 꾸려 나아갈 때는 하나님의 일꾼인가? 아닌가?
여러분들이 다윗의 경우를 회상해 보면 더 쉽게 성경적인 답변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잘 아는 바와 같이 다윗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을 받은 이스라엘의 왕이었다. 그것도 하나님이 선택하셔서 세운 왕이었다. 물론 그 때에도 하나님의 일을 전문적으로 하는 제사장이 있었고, 선지자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이었던 다윗이 '하나님의 일꾼'이었다는 데에 이론을 달 사람을 없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부르실 때 "내 마음에 합한 나의 종"이라고 호칭하셨다.
그의 원래 직업은 목자였다. 다윗이 양을 기르고 있을 때에 그 일에 하나님이 함께 하셨을까? 만약 그 때에도 하나님이 도우시고 함께 하셨다면 양을 기르는 일도 얼마든지 '하나님의 일'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삼상 17:34,35 "다윗이 사울에게 고하되 주의 종이 아비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떼에서 새끼를 움키면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죽였었나이다." 37절, "또 가로되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 내시리이다." 다윗이 들에서 양을 칠 때에도 하나님은 함께 하셨고, 그를 도우셨다는 말씀이다. 그렇다면 다윗은 왕이었을 때뿐만 아니라 양치기였을 때에도 '하나님의 일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성도는 모두가 하나님이 일꾼이다. 세상 어디서든지 주의 종으로 주의 사자로 보냄을 받은 사람들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에서는 물론이고, 가정에서도 직장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영광스러운 열매를 맺기에 힘써야 할 것이다. 그 때문에 여러분이 어디에 있든 무슨 일에 종사하던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힘과 지혜와 능력을 공급받고, 풍성함으로 채움을 입어야 하는 것이다. 여러분 자신을 하나님의 일꾼으로 믿을 때, 하나님의 복을 구할 명분도 생기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세상 많은 사람들 중에서 선택하셨다. 가장 큰 권세이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일을 맡기셨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이 맡기신 일을 감당할 수 있을까?
본문 말씀에는 예수님께서 세우신 70인의 일꾼들을 보내시면서 당부하신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이 말씀이 오늘날 하나님의 일꾼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아주 좋은 가르침이 된다. 하나님의 일꾼인 우리들이 어떤 마음가짐과 태도여야 하는지, 어떤 방법이어야 하는지 세세하게 가르쳐주고 있다.

1. 가지지 말라.
우리가 낯선 곳을 여행하면서 무슨 일을 하려면 출발하기 전에 반드시 준비하여야하는 것이 있다. 짐꾸리기가 그것이다. 또 그 짐의 크기는 여행기간이 얼마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하루 정도 간단히 다녀올 수 있는 길이라면 수선스럽게 보따리를 크게 할 필요가 전혀 없을 것이다. 그러나 2박3일 이상의 시간이 소요된다면 여행 가방하나는 마련해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여행하는 동안 소요되는 비용을 계산해서 그 만큼의 돈을 지갑에 챙겨 넣어두어야 할 것이다.
아마 지갑이 두터울수록 안심하고 출발할 수 있을 것이다. 생면부지 낯선 땅에서 돈이라도 많아야 여러 상황에 대처하고 해결하면서 여행을 무사히 마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행에 소요되는 기본 경비 이상이 액수를 챙겨가기 마련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일을 하도록 일꾼들을 낯선 곳에 보내면서 맨 먼저 하신 말씀은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을 보내주소서 하라"(2)는 것이었다. 무엇을 가르치는 말씀인가? 하나님의 일을 시작하려고 덤비기 전에 먼저 무엇인가를 하나님께 요청하라고 하신다. 우리의 필요를 하나님께 요청하는 것을 다른 말로 무엇이라고 하는가? (기도)
그렇다. 우리들에게서 모든 것의 시작은 항상 기도여야 한다. 방법이나 요령을 습득하려고 급급하기 전에 기도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얻는 것을 가장 먼저 해야 한다. 하나님의 일은 사람의 요령으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도가 사는 것은 세상의 방법으로 되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혹 여러분이 무슨 일인가를 시작하려고 할 때는 여러 가지 준비를 갖추려고 노력하게 될 것이다. 우선은 자본도 마련해야 할 것이고, 함께 일할 사람도 만나야 할 것이다. 장소나 루트도 확보해야 할 것이다. 여러분! 그런 만반의 준비가 다 갖추어진 것이 확인되었다고 하더라도 "자, 됐다 출발!"이라고 외치지 말아야 한다. 그 대신에 "하나님께 기도하자!"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왜 그런가? 하나님께 기도한다는 것은 단순히 무엇을 요청하는 것 이상이다. 그것은 나를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다. 기도는 처음부터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시작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방법을 찾고 배워서 실행하기 위한 준비가 바로 기도이기 때문이다. 여러분이 그렇게 기도로 시작한다면 절반은 벌써 성공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께서 도우실 것이기에 그렇기도 하지만 여러분이 하나님을 찾고, 의지하고, 따르게 된 그 사실 자체가 이미 인생을 성공으로 이끄는 구조를 갖춘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주님은 낯선 곳으로 떠나는 하나님의 일꾼들에게 "전대나 주머니나 신을 가지지 말며..."(4)라고 말씀하셨다. 앞서도 말한 것처럼 여행을 떠나는 사람은 그 여행에 소요되는 최소한의 준비를 갖추어야 한다. 그런데 주님은 그것조차 가지지 말라고 명령하신 것이다.
그 명령대로 따르자면 두둑한 지갑을 가진 사람, 여행 가방을 빈틈없이 챙긴 사람은 주님이 보내시는 하나님의 일꾼으로서는 좀 부적절하다는 의미도 된다고 하겠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더라도 여행을 떠나면서 빈 몸으로 가겠다고 나서는 사람이라면 철부지가 아닐 수 없다. 그런 사람은 사실상 여행뿐만 아니라 가서 어떻게 일을 감당할지 난감하게 보일 수밖에 없는 사람이다. 여행할 준비도 제대로 갖추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다른 일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주님의 말씀이 불성실이나 무성의가 믿음이라고 권장하는 의미가 아니라는 점을 유의하라. 그러면 무슨 의미이겠는가?
여행을 떠나는 사람이 자기 집에서 살 때보다 더 철저히 준비를 갖추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자기가 갖춘 준비물이 여행의 안전과 목표달성을 보장해 준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른 것은 다 준비하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넉넉한 경비라도 가지고 가야만 한다. 멀리 가는 여행일수록, 오래 하는 여행일수록 두둑한 지갑을 가지고 가야 안심할 수 있는 것이다. 바로 그런 생각은 돈의 효용을 믿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주님께서 경계하신 것이 바로 그것이다. 하나님의 일꾼들은 돈이나 물질을 의지해서 안도하는 버릇을 버리라는 것이다. 지갑이 두터우면 그 안에 들어있는 돈을 의지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애초에 돈을 가지고 가지 않음으로써 철저히 하나님만 바라고 의지하는 믿음으로 출발하라는 당부이고 명령인 것이다. 만약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돈으로 해결을 보려고 한다면 그는 벌써 주님의 명령을 벗어난 것이다. 반대로 돈이 없기 때문에 하지 못한다고 결론을 내리는 것 역시 똑같은 자리에 선 사람이다.
여러분 가정에 돈이 없어서 행복하지 못하다는 생각을 하는가? 아니다. 행복을 공급하시는 하나님께 의지하는 믿음이 부족한 증거다. 여러분의 일터에서 배경이 없어 길이 열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다. 걸음걸음을 붙드시고 이끄시는 하나님을 따르는 믿음이 부족한 현상인 것이다. 성도는 물질이나 배경으로 세상을 사는 사람들이 아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이어야 한다.

2. 옮기지 말라.
5-7절을 보자.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옮기지 말라"
사람이 살면서 편할 수만 있으면 최대한 편안함을 찾고 누리는 것이 지혜롭고 현명한 삶이라고 할 것이다. 7절에서도 "일꾼이 그 삯을 얻는 것이 마땅하니라."하심으로 하나님의 일꾼들이 사역을 감당하는 동안 어느 정도의 대접을 받아도 되도록 허용하고 계시다.
그리고 하나님의 일꾼을 받아들이는 집이라면 제법 자발적으로 대접하고자하는 마음을 가졌을 것이다. 더군다나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을 빌라고 하셨으므로 어떤 경우는 서로 하나님의 일꾼을 자기 집에 모셔들이려고 경쟁하는 상황도 있었을 것이다. 또 그런 경우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하기 마련이다.
처음 갔던 김씨 집에서는 식구들과 별 다르지 않게 단출한 숙식이 제공되었다. 그런데 건너편 박씨 집에서 특별한 요리를 마련하고 안락한 침실을 제공할 터이니 오라고 한다. 사람이 참 간사한 데가 있어서 따지고 보면 그게 그건데 조금만 차이가 나도 솔깃하기 마련이다. 그럴 때 얇은 귀가 되지 말라는 말씀이다. 얍삽한 마음이 되지 말라는 말씀이다.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의 일꾼들이 이 세상에서의 안일에 빠지지 말라는 말씀이다. 여러분 누구든지 멈추면 앉고 싶고, 앉으면 눕고 싶고, 누우면 자고 싶은 것이 천부적인 습성이다. 자연스런 욕구라고 해도 될까? 그런데 하나님의 일을 이루려면 눈앞의 자기 안일을 추구하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말라는 명령이다.
주님은 다른 성경에서도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얻을 엄청난 상을 잃게되는 일이 없기를 당부하셨다. 약하고 가난한 사람을 돕고 구제하는 일은 하나님께서 크게 기뻐하시는 일이다. 그런 일을 이루는 사람들에게 엄청난 복이 약속되어 있다. 눅 6:38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그런데 열심히 구제를 시행하고도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 복을 얻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마6:2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사람에게서 보답을 다 받아버리면 막상 하나님으로부터는 아무 것도 받을 것이 없게 된다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한 일꾼들이 누구에게서 삯을 받아야 하겠는가? 마땅히 하나님에게서 받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사람에게서 미리 받아버리면 영원한 하나님의 상급을 놓치는 위험이 있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루터 같은 사람은 혹 주변 사람들이 "종교개혁의 그 어려운 일을 감당하느라 얼마나 수고가 많으십니까? 그렇게 훌륭한 일을 감당하시니 감사하고, 존경합니다."라고 말하면 "내게서 하나님의 상을 빼앗는 사탄아 물러가라!"라고 면박을 주었다는 일화가 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천국의 귀한 일로 부르시고, 또 그 일을 감당하는 여러분에게 귀한 상급을 예비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일하겠는가? 아니면 당장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고 대접받기를 원하는가? 어느 것이 더 큰복이 되겠는가? 눈앞의 이익이나 안일을 버리고 묵묵히 하나님의 일에 전념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상급이 여러분의 것이 되기를 바란다.

3. 양을 이리에게
"전대도, 주머니도 가지지 말라. 이 집, 저 집 기웃거리지도 말라."
주님께서 세상 물정을 너무 모르셔서 도무지 우리가 따르지 못할 명령을 말씀하신 것일까? 말씀이야 그럴 듯 하고, 이론이라면 모를까 도무지 실천할 수 없는 내용이라고 느껴지는가?
그렇지 않다. 주님은 일꾼들이 가야할 상황과 형편을 너무 잘 알고 계셨다. 3절. "...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13절.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소돔, 두로와 시돈에 버금가는 동네들) 일꾼들이 가야할 동네들.
양을 이리 가운데로 들이밀면 어떻게 되겠는가? 얼마동안이나 버틸 수 있겠는가? 소돔 성이 하나님의 사자들을 어떻게 대접했는가? 창19:5 "롯을 부르고 그에게 이르되 이 저녁에 네게 온 사람이 어디 있느냐 이끌어내라 우리가 그들을 상관하리라."
그런 세상에 가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해야하겠기 때문에 더욱 세상의 방법으로는 안 되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의 방법으로만 감당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세상의 것이 아니라 주의 이름 주의 권세로 가라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일꾼들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권세를 가진 사람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평안을 빌면 그 평안이 임한다.((6) 그들이 발의 먼지를 떨어버리면 거기에 하나님의 심판이 임한다. 결정적으로 16절이 말씀처럼 된다. "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요 너희를 저버리는 자는 곧 나를 저버리는 것이요 나를 저버리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저버리는 것이라."
누구에게서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의 권세가 나타나는가? 하나님의 일꾼들에게서 이다. 오늘 하나님이 부르심을 입고 사명을 부여받은 여러 성도들에게서 이다.
주님께서 양을 이리 가운데 보내는 것과 같음을 아시고도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말라고 하셨을 때에는 그런 상황 속에서 넉넉히 책임져주실 방안이 있으셨기 때문이다. 그 방안이 바로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히 하나님만 바라보고 의지하며 감당하는 방법이었다. 그것이 바로 믿음이다. 돈이면 된다. 배경이 있으면 된다 하는 믿음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넉넉히 된다는 확신이 하나님의 일꾼들에게 필요하다.
우리는 이 예배를 마치면 다시 가정으로 일터로 돌아 갈 것이다. 하나님의 일을 가지고 가는 것이다. 현장에서 기도로 시작하라.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감당하라. 여러분이 믿고 평안을 빌면 평안이 여러분의 가정에, 일터에 임할 것이다.

어느 부인의 9일간 천국만들기


어느 날, 한 부인이 가정생활을 비관하며 간절히 빌었습니다.
“하나님! 빨리 천국에 가고 싶어요. 정말 힘들어요.”
그때 갑자기 하나님이 나타나 말했습니다.
“살기 힘들지? 네 마음을 이해한다.
이제 소원을 들어줄 텐데 그 전에 몇 가지 내 말대로 해보겠니?"


그 부인이 “예!” 하자 하나님이 말했습니다.
“얘야! 집안이 지저분한 것 같은데
네가 죽은 후 마지막 정리를 잘 하고 갔다는 말을 듣도록 집안청소 좀 할래?”

그 후 며칠 동안 그녀는 열심히 집안 청소를 했습니다.


3일 후, 하나님이 다시 와서 말했습니다.
“얘야! 애들이 맘에 걸리지?
네가 죽은 후 애들이 엄마가 우리를 정말 사랑했다고 느끼게 3일 동안 최대한 사랑을 주어볼래?”

그 후 3일 동안 그녀는 애들을 사랑으로 품어주고,
정성스럽게 요리를 만들어주었습니다.


다시 3일 후, 하나님이 말했습니다.
“이제 갈 때가 됐다. 마지막 부탁 하나 하자!
너 남편 때문에 상처 많이 받고 미웠지?
그래도 장례식 때 ‘참 좋은 아내였는데.’라는 말이 나오게
3일 동안 남편에게 최대한 친절하게 대해줘 봐라.”

마음에 내키지 않았지만 천국에 빨리 가고 싶어
그녀는 3일 동안 최대한 남편에게 친절을 베풀어주었습니다.

다시 3일 후, 하나님이 말했습니다.
“이제 천국으로 가자!
그런데 그 전에 네 집을 한번 돌아보려무나!”

그래서 집을 돌아보니까 깨끗한 집에서
오랜만에 애들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고,
남편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니까 천국으로 떠나고 싶지 않았고,
결혼 후 처음으로
“내 집이 천국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부인이 말했습니다.

“하나님! 갑자기 이 행복이 어디서 왔죠?”
하나님이 말했습니다.
“지난 9일 동안 네가 만든 거야!”

그때 부인이 말했습니다.

“정말이요?
그러면 이제부터 여기서 천국을 만들어가며 살아볼래요!”

9일 동안 천국 만들기’의 기적은
어디에서나, 누구에게나 가능합니다.
희생의 길은 행복으로 가는 밝은 길입니다.
희생의 짐을 지면 인생의 짐이 가벼워집니다.
나 너를 위해 모든 것을 걸 때,
너 나를 위해 모든 것을 겁니다.


희생은 부담스럽지만
그 부담을 각오할 때 행복의 신비가 찾아옵니다.
‘자기 몰입의 신비주의자’는 되지 말아야 하지만
‘희생의 신비를 아는 자’는 되어야 합니다.
살고자 하면 죽고, 죽고자 하면 삽니다.
더 나아가 죽이고자 하면 죽고, 살리고자 하면 삽니다.
이 역설의 진리를 잘 소화하는 소화력이 있을 때
행복의 키가 부쩍 자라있음을 보게 될 것입니다.


출처/정원석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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